박범신은 소설 <은교>에 대해 설명하다가 “내가 연애 소설, 사랑 얘기에 소질이 있나보다. 사랑은 갈망이고, 갈망이 있어야 문학이 가능하다. 문학은 큰 틀에서 보면 모두 사랑 이야기지.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남자는 로망으로 산다. 꿈이 없으면 청춘이 아니듯, 남자가 로망을 잃으면 더 이상 남자가 아니다. 이는 구석기 이래 수만 년 동안 면면히 이어져온 남자의 DNA다. 여자는 육아와 가사에 여자 아닌 엄마로 살지만, 식구들의 주린 배를 책임지는 남자는 고통스런 밥벌이 시간이 끝나면 한쪽 구석에서 다른 인생을 꿈꾼다.
남자의 로망은 걸윙도어(gull-wing door)의 람보르기니 스포츠카나, 도베르만이 뛰어 노는 푸른 정원의 2층 저택, 선상 태닝과 달빛 수영이 담보된 세계 일주 크루즈 여행처럼 돈이 많아야 가능한 것에서부터, 열광하는 관중을 마주한 일렉트릭 기타 솔로 연주, 장신 수비수 2명 사이를 뚫는 드리블에 이은 환상적인 레이업슛, 하버드대 학생들을 상대로 한 유창한 영어 강연같이 1만 시간 이상의 노력 투여가 필수(말콤 글래드웰 <아웃라이어>)인 것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경우에 따라 회복 불가능한 재정 파탄과 심각한 신체적 위험이 따름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추구되는 남자의 로망 덕분에 유튜브에 나이 지긋한 나비넥타이들의 아마추어 냄새 풀풀 풍기는 가곡 독창 영상이 흘러넘치고, 주말마다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패스, 여기!” 소리를 지르며 공 하나에 머리숱 듬성한 중장년 20여 명이 매달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이다.
그런 남자의 로망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사랑’이다. 남자의 사랑엔 정년이 없다. 문고리 잡을 힘만 있어도 남자는 사랑과 연애를 꿈꾼다. 남자의 로망들 가운데에서도 으뜸인 그 사랑은, 그러나 불행히도, 가장 맹목적이다. 살인을 비롯한 강력 사건의 원인은 태반이 돈 아니면 여자 문제다. 조강지처를 내치고, 제 뱃속에서 낳은 새끼도 버리는 ‘빌어먹을’ 사랑이 주변에 부지기수다.
42년 내공의 작가 박범신(70)의 소설 <은교>(2010)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 손등 위의 맥박은, 울근불근, 아주 고요하면서도 힘차게 뛰고 있었다. 네 심장이 뛰고 있는 것 같았지. (중략) 나는 보고 느꼈다. 내가 평생 갈망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로망이 거기 있었고, 머물러 있으나 우주를 드나드는 숨결의 영원성이 거기 있었다.”
존경 받는 시인인 칠순의 이적요 교수가 17세 여고생 은교를 사랑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갈등과 비극을 그린 이 소설은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뉴페이스 김고은을 단숨에 스타덤에 올리며 숱한 화제를 뿌렸다.
작가는 이 작품 덕에 ‘위험한 노인’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는 말한다.
“주인공 이적요는 나의 입을 빌린 나의 욕망입니다. <은교>는 석 달 만에 썼는데 적어도 15년 동안 내 마음속에 있던 소설이지요. 15년 동안 차오르기를 기다린 후 쓴 소설입니다. 영화는 오직 발가벗겨진 정사(情事)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더군요. 하지만 나는 순애보라고 생각하고 쓴 겁니다. 노년에게도 꺼지지 않는 욕망이 있고, 그걸 솔직하게 발가벗긴 것이지요.”
그는 산악소설 <촐라체>에 대해 ‘왜 산악인은 목숨을 걸까?’라는 질문에 대한 본인 방식의 해답을 찾는 소설이었다고 말했다. 27년째 살고 있는 그의 집에서는 북한산 자락이 한눈에 들어온다.
소설을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사실 노인이 욕망하는 것은 열일곱 살 처녀의 육체가 아니다. 불멸의 젊음을 욕망하는 거다. 그래서도 70 노인의 이런 말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賞)이 아니듯, 내 늙음은 내 잘못으로 받은 벌(罰)이 아니다.”
박범신은 42년 작가 생활 동안 41권의 장편 소설을 썼다. 1년에 한 권꼴로 장편을 집필하면서 단편, 에세이, 여행기 등도 함께 써왔다. 데카르트 식으로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인 것이다.
최근에 그가 낸 소설은 <당신>이다. 치매에 걸린 노부부를 통해 한평생의 삶과 사랑, 그 현상과 이면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인내와 헌신으로 일관해 온 주호백의 삶은 2009년 치매에 걸리면서 무너져가고, 억눌러왔던 내면이 그 틈으로 비집고 나오며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한다. 치매와 그에 따른 합병증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남편을 간병하면서 윤희옥은 그가 부정, 분노, 협상, 우울의 단계를 지나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끔 돕는다. 자신의 몸속에서도 치매가 이미 진행 중인 사실을 모른 채 남편의 바람대로 그를 안락사 시키고, 제 손으로 남편을 묻었다는 사실을 잊은 채 돌아올 리 없는 남편을 매순간 기다리며 지낸다.
“노부부의 순애보를 그린 작품입니다. 장인어른이 작년에 치매에 걸려 돌아가셨는데, 평생 8남매를 버젓이 잘 키운 분이 밤마다 소리를 버럭 지르더랍니다. 애들 키우는 동안 오욕칠정을 드러낼 겨를이 없었다는 얘기겠지요. 꾹꾹 눌러놓았던 것들이 치매를 계기로 의식 수면으로 떠올랐던 겁니다. 하지만 자식들에겐 그 어른의 외침이 내용을 알길 없는 소음에 불과하다는 슬픈 사실이 모티브가 됐습니다.”
“상상력이란 버려진, 고독한 의자에 앉아 있어야 나와요”
상명대 인근 북한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자택 2층 집필실에서 작가는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분절음이 명확한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대지 120평인 이 집을 그는 27년 전 평당 100만 원을 주고 구입해 직접 집을 짓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 이 집에서 아이들 교육시키고, 시집장가 보내고, 손주들을 봤다.
1 박범신은 “작가들은 행복해지기 어려운 숙명을 타고 났다. 자기가 몸담은 세상이 잘못돼 있다는, 자기가 사는 시대가 가장 불안한 시대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까닭이다”라고 말했다. 2 작업 방식에 대한 그의 말. “어떤 때는 머리에서는 문장들이 안 나오는데, 손이 문장을 쓰고 있는 경우가 있다.”
Q <당신> 집필에 얼마나 걸리셨나요?
A “<은교> 때와 비슷했어요. 900~1,000장을 3개월 만에 다 썼으니까.”
Q 상당히 빨리 쓰십니다.
A “소설이 잘 안 써진다면 그건 앞부분을 잘 못 썼기 때문이지요.”
Q 집중력이 좋으신 편 같습니다만.
A “한창 땐 10시간을 쉬지 않고 앉아서 썼지요. 그럴 땐 밥도 안 먹어요, 화장실 다녀오는 동안에 생각이 흐트러질까봐 책상 밑에 페트병을 두고 볼일 봤을 정도니까.”(웃음)
Q 하하, 대단하시네요.
A “글 쓰는 게 중독성이 있어요. 고통스러우면서도 좋은. 온 정신이 집중되어 있을 때 일종의 황홀경에 빠지는데 그걸 깨고 싶지 않게 되지요.”
Q <당신> 쓰면서 자료 조사도 따로 하셨는지요?
A “시내 교보문고에서 치매에 대한 책 40~50권가량을 한꺼번에 구매해서 틈틈이 봤습니다. 다 읽지는 못했고(웃음). (책장을 가리키며) 저렇게 꽂아두기만 해도 든든해져요. 자료야 부차적인 거고 어차피 소설은 상상력이 관건이니까.”
Q 거두절미하고 여쭤 보겠습니다. 소설은 상상력의 산물입니까?
A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작가가 상상력이 떨어지거나 창조적 재능이 부족하면 소설은 보고서나 에세이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하지만 상상력만 있어서는 소설이 될 수 없지요. 소설은 강력한 논리 구조를 이루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철저한 인과론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하지요. 소설은 앞부분에 깔아놓은 대로 진행이 될 수밖에 없어요. 작가 마음대로 쓰지 못한다는 말이 여기서 나오지요. 중간에 제 맘대로 써대면 막장 드라마일 뿐이지요. 강력한 내적 개연성을 반드시 갖고 있어야 소설다운 소설이 됩니다.”
박범신의 입에서 “소설은 철저한 논리의 구축”이라는 말을 들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죽음보다 깊은 잠>, <풀잎처럼 눕다>, <흰 소가 끄는 수레> 등을 통해 어느 누구보다 ‘감성적 묘사 위주의 시적인 문체’를 인정받아 온 그가 아니었던가.
Q 선생님은 ‘탁월한 감수성의 작가’란 말을 들어온 작가이신데요….
A “나는 감수성이란 말을 순간적으로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합니다. 내가 남들보다 사물의 본질을 간파하는 능력이 좋은 것 같기는 해요. 가령 시골 촌놈인 내가 서울 올라와서 남산에 올라갔다 칩시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흐린 날 어느 한순간 번쩍 번개가 치면서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면, 나는 서울에서 생활하며 오래 살아온 이보다 더 서울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습니다. 어떤 섬광 같은 거지요. 이런 감수성은 문학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에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작가의 집필실 한쪽 벽에는 침상이 놓여 있다. 오랜 집필에 따른 허리 통증 때문에 마련한 물건이다. 수시로 눕는 침상 발치에는 벽걸이용 TV도 걸려 있다.
Q 그런 감수성은 노력하면 키울 수 있는 건가요?
A “훈련을 하면 90%까지는 키울 수 있다고 봅니다. 나머지 10%는 아무래도 타고 나야겠지요.”
Q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나요?
A “둔해 보이는 인간도 뜨겁게 연애하면 상대 여자에 대해 예민해지잖아요? 그런 거지요. 중요한 점은 세상에 대해, 사물에 대해 연민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윤동주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잖아요? 그 시인에게는 실제로 그만큼 괴로웠던 겁니다. 감수성의 확장을 위해서는 인문학적 훈련이 필요하지요. 인문학적 통찰력이란 벽장 너머를 보는 거거든요. 세상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현상을 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상 너머를 보는 것. 독서를 통해 인문학적 소양을 쌓고, 다양한 문화적 향유를 통해 사람들에 대한 공감 능력을 키워야 해요. 공감 능력이 없으면 전부 꽝입니다.”
Q 그렇게 상시적 예민함을 견지하려면 삶이 피곤하지 않습니까?
A “불안정하지요, 지속적으로. 내적 분열까지도 오지요. 시골의 가난뱅이 집에 태어난 내가 현재 갖고 있는 환경은 비교도 안 될 만큼 무지하게 좋아졌지만 나는 여전히 내면에서 행복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여전히 고독하고, 여전히 세상이 엉망이라는 느낌을 받고. 불안한 고독감. 하지만 내가 세상을 바라보면서 푹신한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느낌을 받는다면 그건 내 상상력이 죽어버렸다는 뜻에 불과한 겁니다. 상상력이란 놈은 버려진, 불안한, 고독한 의자에 앉아 있어야 나오는 거지요.”
칠순인 박범신은 여전히 ‘골초’다. 평소엔 한 갑을 피우지만 밤새워 집필하거나 술자리에선 두세 배로 는다. “어디라도 중독이 되어야 살 수 있을 만큼 세상이 어지러운 탓”이라며 “한국은 주로 서민층인 1,000만 흡연자의 세금만 빼먹고 범죄 집단 취급을 하는 아주 돼먹지 못한 나라”라고 열변을 토했다.
히말라야의 설봉을 바라보면 신의 제단 마주한 느낌
인터뷰가 갑자기 너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마주 앉아 ‘불안한 예민함’에 대해서만 말하기엔 볕이 너무 좋고 공기가 너무 달았다.
Q 산을 특히 좋아해서 히말라야에도 여러 차례 다녀오셨습니다. 산악 소설 <촐라체>도 쓰셨구요.
A “히말라야는 대여섯 번 찾았지요. 나는 대한민국 교회와 절에는 하나님과 부처님이 있다고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히말라야 8,000m 고봉 아래를 걷고 있으면 신의 제단에 무릎을 꿇고 있는 느낌이 절로 납니다. 누군가 교회를 갈 때 나는 히말라야로 갑니다. 히말라야의 설봉을 바라보고 있으면 정결한 신의 제단을 마주한 느낌이 듭니다.”
Q 히말라야는 그렇다 치고 다른 산에 들 때는 어떠신지요?
A “산은 큰 덕이라고 봅니다. 우리들의 근원을 생각하게 만들고, 자본에 먹혀 버린 우리의 본성을 회복시켜 주는 곳이 산이지요. 산티아고를 비롯해 서양 여러 곳에 순례자의 길들이 있지 않습니까? 한 달이든 열흘이든 순례하는 동안이라도 죄를 안 지으려고 종일 걷는 거지요. 우리에게는 산이 그러한 곳입니다. 영혼을 정화시키는 곳.”
작가는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었다. 아무리 뜯어봐도 칠십 노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젊은 시절 ‘허무주의’를 트레이드마크처럼 달고 살았던 작가, ‘문학은 목매달아 죽어도 좋은 나무’라는 유명한 문장을 남긴 문학지상주의자가, 모든 남자들의 로망인 ‘영원한 청춘’을 부드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눈앞에서 체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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