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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의 문학적 유산 정리하고 ‘토지’ 해외 출판 일일이 챙겨
예술인 지원 활동… 남편은 김지하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박경리 선생(오른쪽)과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의 즐거운 한때. 김 이사장은 생전에 “어머니가 말년에 종종 화를 내곤 하셨는데, 하나밖에 없는 딸의 고생이 가슴 아파서 그러셨던 것 같다”고 떠올렸다. 토지문화재단 제공
유신(維新)이 선포된 1972년 10월. ‘오적(五賊)’의 시인 김지하는 숨을 곳을 찾아 서울 정릉 박경리 선생(1926∼2008)의 자택 대문을 두드렸다. 망설이던 그에게 누군가가 달려왔다. 박 선생의 외동딸 김영주였다. 두 사람은 1973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생전 박경리 선생이 애지중지하던 고명딸은 2008년 어머니가 타계한 이후 강원 원주시에 머물며 선생의 문학정신과 업적을 알리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는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직을 맡은 뒤 2011년 한국 최초의 세계문학상인 박경리문학상을 제정했다.
지난달 26일 열린 아홉 번째 박경리문학상 시상식에 김 이사장은 참석하지 못했다. 2년 반 전 진단받은 암 증세가 악화된 탓이었다. 토지문화재단은 25일 김 이사장의 타계 소식을 전했다. 향년 73세.
고인은 외모도, 인생 항로도 어머니를 닮았다. 박 선생은 부역자로 몰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남편을, 딸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남편을 옥바라지했다. 어머니는 첫아들을 잃었고 딸은 어린 시절 마음을 다친 두 아들이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과정을 지켜봐야 했다.
고인은 지난 10년간 토지문화관 살림을 두루두루 챙겼다. 어머니가 하던 것처럼 토지문화관에 입실한 예술가들에게 손수 지은 농작물로 식사를 대접했다. 겨울이면 어머니 손맛 그대로 배추 300포기씩 김장을 해 지인들에게 나눠줬다. 문화관은 장편소설 ‘토지’를 기념하는 건물이자 작가들의 무료 창작 공간이다. 국내외 예술가들이 이곳에 머물면서 창작혼을 불태운다. 박 선생이 말년에 시집 ‘우리들의 시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등을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김 이사장은 특히 해외에 어머니를 알리는 데 공을 들였다. ‘토지’ 번역 및 출판 작업 등을 일일이 챙겼다. 이런 노력으로 지난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대에 박 선생 동상이 세워졌다. 한국학과에 선생의 이름을 딴 강좌도 개설됐다. 제막식 당시 “어머니가 마지막을 보낸 원주와 고향 경남 통영, ‘토지’의 배경인 경남 하동에 이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잇는 문화 벨트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고인은 박경리문학제의 외연 확장과 지역 예술인 지원 사업에도 적극적이었다. 최근 원주의 유네스코 문학 창의도시 지정도 김 이사장이 제안해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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