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홍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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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칼럼]위기에 처한 우리 문학 댓글:  조회:263  추천:1  2019-07-15
위기에 처한 우리 문학 최홍일(소설가)     어찌 보면 우리 문학은 전례 없는 성황을 맞고 있다. 중국작가협회 회원이 60여명, 연변작가협회 회원은 500여명, 본격적인 순 문학지인 《연변문학》, 《장백산》, 《도라지》, 《송화강》 외에도 지방에서 발간하는 문학지도 여러종이다.  각급 문학상만 해도 민간에서 설립한 것까지 합치면 두자리수를 차지한다. 창작활동도 퍼그나 활발한 것처럼 보인다. 장편소설만도 이미 몇십부가 나왔다. 이런 성황은 우리 문학이 급변하는 시대에 걸맞게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상황은 그렇지가 않다. 우리가 ‘중국문단’에로  진출하자는 구호를 몇십년간 웨쳐왔지만 중국문학권 내에서 조선족 작가의 영향력은 점점 약해지고 있으며 우리의 립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우리 작가들의 작품은 고작해야 《민족문학》 한문판에서만 소개되고 있는 바 발표되는 작품수가 많지 못할 뿐더러 질도 기타 민족에 비해 많이 떨어지고 있다. 지난 세기 80년대 초에 림원춘선생이 〈몽당치마〉로 전국상을 받은 뒤로는 ‘로신문학상’도 7회에 달하지만 우리 작가들의 이름이 없다. 어찌 된 판인지 ‘소수민족 준마상’도 12년째 (련속 3기) 소설부문엔 공백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문이 열린 지도 30년, 한국문단은 우리 문학을 승인하지 않고 있다. 저들의 70, 80년대 문학 같다는 혹평이 있을 뿐이다. 80년대 말, 90 년대 초에는 우리의 작품이 좀 환영을 받는듯도 하였지만 잠간에 불과했다. 지금도 우리의 소설가, 시인들의 작품이 더러 발표되고는 있지만 반응은 영 제로다.  조선족 독자들도 우리의 작품을 외면하고 있다. 대체로 재미 없다거나 차원이 낮다는 평가다. 우리의 순 문학지 가운데서 1000부 이상 팔리는 문학지가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의 소설가, 시인들의 책이 몇부나 팔리는가? 500부가 고작이고 1000부는 기적이다. 이전에 시를 쓰는 사람이 시를 읽는 사람보다 많다는 말이 있어 소설가들은 시인들을 비웃었다. 인제는 소설가들도 마찬가지이다. 남을 웃을 처지가 못된다.  창작대오에도 차질이 생기고 있다. 소설문단에는 대가 끊긴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소설문단의 맥이 최국철, 김혁을 위수로 한 60후 작가, 구호준을 위수로 한 70후의 작가들로 겨우 이어지나 80후 작가들은 그렇다 할 사람이 없다.  필자가 위기설을 들고 나온다고 해서 우리 문학의 앞날이 암담하다는 것은 아니다. 위기가 기회라는 말이 있다. 문제는 위기를 어떻게 타개하는가에 있다. 우리의 작가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한국의 문학어에 익숙해야 한다. 한국의 문학어가 도시문명 시대의 우리 문학어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나 같은 50후 작가는 한국의 문학어를 배우기가 힘들다. 동년배 작가 허련순씨는 비교적 익숙하게 한국의 문학어를 다루고 있는데 참 부럽다. 우리의 70후 작가들부터는 한국의 문학어에 가까운 특징을 갖고 있는데 참 기꺼운 일이다. 문학의 첫째 요소는 언어이다. 말과 글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킨 것이 문학작품이다. 우리가 끝까지 문학을 지키는 리유가 여기에 있다. 필자는 새로 문학을 하려는 지망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먼저 문학어에 익숙하라. 그 다음에 문학을 하라.  우리의 작가들은 어딘가 들떠있는듯 싶다. 깊은 사색이 없는 경박함, 스낵 시대의 간소함 같은 감이 든다. 늘 불안하고 무엇에 쫓기우는듯한 모습이다. 작가에게 불안이 수요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확고한 자기 믿음과 그 믿음을 받쳐주는 철학이다.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다수 작가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작가에게 독서는 필수적이다. 오늘날 같은 지식 폭발의 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다. 문학책 뿐이 아니라 그 문학 밖에 책도 읽어야 한다. 재간은 밖에 있다功夫在外는 말이 있다.   우리 문학은 본질상에서 모방문학이다.  50, 60년대에는 조선문학과 쏘련문학을 모방하였고 70, 80년대에는 주로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문학을 모방하였다. 90년대 이후로는 한국문학을 많이 모방하고 있다. 우리가 모방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실정과 관계된다.  외국어를 모르는 우리 작가들은 외국의 책을 읽자면 중국어와 한국어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문학에서의 참조계는 두개, 하나는 중국문학이고 하나는 바로 한국문학이다. 근데 근간에 중국문학을 홀시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중국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중국문학은 우리에게 풍부한 영양을 제공해준다. 우리는 반드시 한국문학의 현대적 수법과 기교에다 중국문학의 호방함과 깊이를 습득해야 한다.       출처: 2018제5호
1    순수와 소박의 미(최홍일) 댓글:  조회:1361  추천:75  2008-06-17
순수와 소박의 미 최홍일 우리 문단은 수필의 시대를 맞고있다. 90년대 이후로 수필의 성황은 누구나 공인하는바다.  소설과 시의 걸음새가 비틀거리는 반면 수필은 발랄한 기세로 활보하면서 전에는 문단의 구석만 차지하던 병아리가 인젠 화려한 장닭의 모습으로 홰를 치면서 앞자리를 다투고있다. 그런데 수필문단의 주역이 녀성들이라는 점이 우리를 더욱 기껍게 한다.  수필문단엔 3, 40대의 숱한 재녀들이 등장해 남성작가들을 무색케 한다. 그녀들은 거개 고학력을 지닌 지적인 녀성들로서 녀성특유의 개인적경험, 뛰여난 현대감각, 세련된 문체, 지적인 유머와 해학을 무기로 한편 또 한편의 주옥 같은 작품을 펴내고있다. 그녀들의 활보는 문학이라는 령역이 남성들보다는 녀성들에게 더 알맞을지 모른다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해주고있다.  녀성수필의 창작대오도 가관이다. 두말 할것 없이 앞에서 말한 재녀들이 수필문단을 주도하고있지만 그 재녀들의 화사한 모습과는 다른, 수수한 풍모를 갖춘 녀성수필들이 조용히 문단의 이목을 끌고있다. 그녀들은 대부분 학력이 높지 못하고 다른 행업에 종사하다 뒤늦게 문단에 발들여놓은 4, 50대의 녀성들이다.  이들의 수필은 지극히 생활적이며 순수성과 소박성으로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고있다. 이 부류의 수필중 신영애의 작품이 비교적 대표적이라 할만하다.  신영애는 제25회 윤동주문학상 수필신인상을 수상,  50 나이에 뒤늦게 받은 상이지만 문필경력이 얼마 안되는 그녀에게는 퍼그나 격려적인 일이고 문단으로 보아도 반가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이달의 문인”에 신영애씨가 선정됐는데 글을 한편 써달라는 편집부의 부탁을 받고 필자가 기꺼이 응하게 된것도 바로 그런 원인이 앞서기때문이다. 풋면목이나 있던 신영애씨와 접촉이 잦아지게 된건 함께 등산을 하면서부터다. 신영애씨는 문인산악회 초창기부터 10년가까이 산과 사귀여온 원로대원이고 필자 역시 등반경력은 홀하지 않으나 지난해에 그 산악회에 가입했으니 신입대원인 셈이다. 작년가을의 어느 토요일, 등산팀은 목적지를 이란향으로 잡았다.  이란향에 가면 등반코스가 많지만 그래도 가장 선호되는 곳이 망향산이다. 해발 600메터, 아아히 높은 봉이 눈길을 끌지만 봉우에 올라서면 면면히 뻗어내린 크고작은 푸른 산발들이 한눈에 안겨오고 울창한 나무숲이 끝없이 펼쳐지여 번잡한 도시생활에 찌든 가슴을 푸르게 적셔주기때문이다. 산정에 오르니 망루는 여전히 반가운 모습으로 안기여왔으나 망루를 지키던 사람은 없고 그대신 망루우에 설치된 촬영감시기만이 천천히 돌아가고있었다.  모니터시스템의 보급과 발전을 여기서도 엿볼수 있었지만 울적해지는 마음을 누를 길 없었다. 망루의 산지기아저씨와 술 한잔 나누면서 한담을 하는것도 퍼그나 즐거운 일이였는데 그가 없고보니 서운한감이 앞섰던것이다. 바로 이때 대원중 누군가 신영애에게 롱을 걸었다. “산지기아저씨가 없어 영애씨가 서운하게 됐네.” 그러자 다른 대원들은 너도나도 덩달아 한마디씩 영애씨를 시까슬러주었다.  “아닌게아니라 그 아저씨의 신상이 궁금하네요.” 영애씨의 대답이였다. “한국에 간 안해가 돌아왔는지…” 말끝을 흐리는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비껴올랐다.  그제서야 나는 이 장소가 바로 신영애씨의 수필 “나의 산지기애인”의 출산지임을 알게 되였다.  윤동주신인문학상을 받은 “나의 산지기애인”은 인간애가 짙게 풍기는 수필이다. 높은 산봉우에서 외롭게 망루를 지키는 풋풋한 사나이, 련련한 산발너머 동쪽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위장결혼으로 한국에 돈벌이 나간 안해를 그리는 쓸쓸한 사나이, 안해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리유로 도시에서 온 낯선 녀인에게 련모의 정을 쏟는, 얼간이 같으면서도 진솔한 사나이.  독자들은 수필속에서 이런 사나이를 만난다. 우리 주위에 흔해빠진 어디서나 볼수 있는 평민백성중의 한 사람이다. 그 사나이의 모습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인간들의 고통과 불행이 담겨져있고 그런 역경속에서도 락천적으로 살아가는 생명력이 현시되여있다. 그래서 독자들의 가슴속에 잔잔한 감동을 일으키고 동정과 련민을 불러온다. 수필속의 나(작자)는 그 사나이의 “짝사랑”을 아량있게 헤아려주고 그 사나이의 부부 생리별에 깊은 동정을 보인다.  이건 단지 생활이 유족하고 지적인 도시녀성이 시골의 궁핍한 사나이에게 보내는 련민과 동정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한 녀성의 소박하고 순수한 인간애가 깔려있다. 그래서 수필은 또 한번 독자들에게 감동을 준다.  신영애의 수필은 지극히 생활적이고 소박하다.  이미 발표한 몇십편의 수필들은 죄다 작자 자신의 진실한 체험에 바탕을 두고 그 체험을 가식이나 화려한 장식없이 진솔한 정감으로 표출시킨다. 거개가 녀성의 일상이고 또 가정 일상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작자는 시집살이의 무거운 일상, 시어머니와의 고운 정 미운 정, 부부사이의 믿음과 배려, 자식에게 쏟아지는 애틋한 모성애, 친정에 대한 그리움, 무릇 녀성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일상을 소재로 작자특유의 감수를 화사하지 않은 소박한 필치로 차분히 그러나 감동적으로 드러낸다.  작품에서 표출되는 정감은 추호의 거짓이 없이 진솔하다. 소고기 다섯근을 두고 시어머니와 보름씩 랭전을 하다가도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싶게 화투를 치면서 시어머니를 동무해주는 나의 이야기, 그런 이야기는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일상이지만 읽고나면 가슴속으로 실개천이 졸졸 흘러든다싶은 즐거움을 준다. 왜냐 하면 식구란 한지붕아래서 살면서 싸우기도 하나 어쩔수 없이 정을 주며 살아가는게 생리라는 점과 또 그것이 바로 생활의 흐름이고 생활의 즐거움이란 섭리를 감동적으로 표현했기때문이다.  신영애의 수필엔 순수하고 소박한 인간애가 주선률을 이룬다. 그녀의 수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모티프는 사랑이다. 사랑이란 추상적인 의미도 내포하지만 어디까지나 구체적인 개념이다. 구체적인 정감으로 표현되고 실천으로 완성된다. 부모자식지간, 형제자매지간의 사랑은 모든 사랑의 토대로되고 원초로 된다.  민족애나 조국애, 그리고 휴머니즘도 다 거기에 뿌리를 두고있다. 신영애의 수필은 그 원초적인 사랑에 렌즈를 맞추고 천진하다싶을 정도로 순수한 심령의 자세와 지극히 소박한 필치로 절절한 애정을 펼쳐보인다. 남편에 대한 사랑(“맹귀우목”), 시어머니와의 정(“소고기 다섯근 풍파”), 친정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사모곡”), 자식에게 쏟는 사랑(“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벙어리동생에 대한 사랑(“무언의 천사”), 올케의 고마운 정(“고마운 작은올케”), 이런 수필들은 정서가 차분하고 필치가 소박하지만 독자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작자가 표출시키는 정감이 진실하고 자연스럽고 부드럽기때문이다. 그로 하여 작품들은 진한 감동을 자아낸다. 신영애의 수필에서 사랑은 가족과 친지에만 국한되는 정감만이 아니다. 그 사랑의 골물은 평야로 흘러나와 타인에게로, 사회에로 적시여든다. 앞에서 언급한 “나의 산지기애인”은 대표작이라 할만한 작품이다. 이 수필에서 사랑은 휴머니즘으로 승화되여 사회밑바닥의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절절한 동정과 련민의 정으로 드러난다. 산지기사내의 모습은 간단한 사건과 간결한 필치에 담겨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동성과 진실성으로 독자의 머리속에 각인된다. “나의 친구 련화스님”과 “사랑의 차원”은 좀 이색적인 수필이다. 작중의 나는 련화스님과의 접촉에서 받은 감동을 잔잔한 필치로 독자들에게 전달하면서 인간박애의 사상과 아가페적인 사랑에로의 갈구를 토로한다.  그녀의 수필은 사랑을 대자연의 령역으로 확장시킨다. 아마도 신영애씨가 10년 경력의 등산대원으로 산과 오래 사귀여온 체험과 관련될것이다. “봄날에 평봉산에 올라”, “여름날의 산행일기”, “가을녀자”, “겨울산의 이미지”와 같은 수필들은 대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감동과 계시를 표달하고 자연에 대한 존중과 사랑, 인간과 자연의 조률과 화합을 호소한다.  문여기인(文如其人)란 말은 신영애씨에게 더없이 알맞을듯싶다. 신영애의 수필을 그녀의 자화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는 심성이 착한 녀성이다. 성미가 유순하고 동정심이 많고 남을 배려할줄 안다. 그녀와 접촉이 잦은 사람들은 누구나 다 공인하는바다. 감정이 소박하고 순수한 타입의 녀성이다. 지금 시대의 많은 “교양녀”, “위장녀”들과는 달리 가식이 없고 진솔하다. 바로 그런 성정때문에 그녀의 수필은 인간애가 넘치고 순수와 소박미를 발산하는듯싶다. 인간에 대한 구김없는 순진한 사랑,  순수미와 소박의 미, 이것이 바로 신영애의 수필의 모티프이자 풍격이며 또한 그녀 자신이기도 하다. 그녀의 수필에 아쉬운 점도 없진 않다. 그녀의 수필은 아픔이 적다.  아픔 역시 인생의 본질이고 인생의 과정이다. 그리고 사색이 적다. 밀란쿤데라는 문학의 발전단계를 서술의 문학, 묘사의 문학, 사색의 문학으로 나누어보면서 당금의 문학은 사색의 시대라고 말한적이 있다. 사색이 결핍한 글은 깊은 감동을 줄수 없다. 물론 문학인의 사색은 철학자의 사색과 달라야 한다. 신영애의 수필의 도약과 비상을 기대해본다.                                      2007년 11월 30일 2008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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