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인가? 비애로다
진 언
대저 어용문인이라면 제왕들이 거두어주면서 오로지 송가를 부를줄밖에 모르는 무료한 문인을 가리켰는데 현재에는 세력이 있는 집단이나 권력자에게 붙어서 감언리설을 늘여놓으며 당나발을 부는 문인을 비유하고있다. 자고로 어용문인이라면 초부도 질시하였는바 중국어에는 이에 관한 헐후어(歇后语)가 많다.
례하면 언덕에서 사람이 물에 빠지는것을 구경하다(岸上看人溺水), 여든살 늙은이가 유치원에 들어가다 (八十岁老人进幼儿园), 백골정이 사람의 말을 하다 (白骨精 说人话), 백리가 되는 공로에 굽이돌이가 필요없다(百里长的公路不用拐弯), 백세로 인이 생일을 쇠다 (百岁老人过生日), 백살로옹이 무도를 배우다 (百岁老人学跳舞), 죽은사람을 업고 강을 건너다(背死人过河), 사람을 핍박하여 바다에 뛰여들게 하다 (逼人跳海), 멜대를 땔나무로 한다(扁担做桨用)등등.
문인이 사람구실을 하는데 최저선은 독립인격과 독립적사고를 하는것으로서 그리되지 못하면 사람으로 되는 조건마저 잃는다. 기실 어용문인노릇을 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도 지엄한 페하가 어느 때 무엇에 입맛이 있어하는지, 어떻게 그의 구미를 맞출지, 바로 그런 어려움때문에 어용문인들속에 평생 제왕의 총애를 받은자가 극히 희소한것이다. 토사구팽이여서인가? 한가지 실례를 들어보자.
황당하던 그 년대, “삼가촌”이요 “연산야화”요 하면서 “잡귀신”들을 성토할 때 그럴쯤으로 믿으면서도 몰래 어떤 경의감도 가지였던 문인 오함(吴晗)도 좋은 끝장을 보지 못하고 후날 일대의 “어용문인”으로 락인찍힐줄이야 촌구석농부가 어찌 생각이나 해봤겠는가? 오함은 개괄해서 말하면 이름짜한 사학가였는데 오늘날 알고보니 그는 일생동안 네개의 큰과오를 범한 사람이였다.
우선 1953년, 북경에서 패루(牌楼)를 허물어버리려고 의론이 무르익고 있을 때 고전건축물들을 마구 헐어버리는 악풍이 온 시내에 불어쳤는데 오함이 앞장섰던것이다. 두번째 과오는 정풍, 반우파운동에서 급선봉으로 나선 영웅이 된것이다. 세번째는 그가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명나라 13릉의 정릉(定陵)을 발굴한것이다. 네번째는 그의 유명한“해서파직(海瑞罢官)”이였다. 대단한 학자로서 중용을 지켰더라면 그렇게 처참하게 되지 않았을것을, 누가든 다 그랬을수 있지만 결국 줄을 잘못선것이다.
1969년 10월 10일, 먹물을 풀어놓은듯 캄캄한 밤, 살을 에일듯한 음산한 바람이 불어치는 경성의 모감옥에서 저승길에 오른 오함은 생사의 계선에서 모대기다가 향년 75세에 불명예스럽게 인간세상을 떠났다. 그는 청화대학 력사계 졸업생으로서 명조력사의 전문가였다. 그는《주원장전》,《등하집,》《오함문집입》,《오함잡 문집》,《해서파직》등 100여종의 저작을 펴냈다. 그런 혁혁한 문인이 어용문인으로 인생패필을 쓴것은 문인의 비애가 아닐수 없다.
묵존(墨存)선생은 몇십년후에 비효통(费孝通)선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반우파시기 다른 사람과 유별나게 인정사정 없었다는것을 기억하고 있소?” 아닌게 아니라 오함은 1957년 7월 7일, 전국제1기인대 4차회의에서 “나는 분노한다. 나는 공소한 다”는 장편보고를 하였는데 “라장련맹(라륭기(罗隆基) 장백균(章伯钧)”을 엄정하기 그지없이 토벌하였다. 그는 마지막에 “그들 무리는 인민의 흉악한 적들이다!”라고 성토하여 오래동안의 박수갈채를 받았단다. 아마 몹시 득의양양했을것이다. 저명한 학자 라륭기는 1965년에 원혼이 되였고 애국민주인사 장백균은 1969년도 우파모자를 쓰고 불귀객이 되였다. 절마다 억울하게 죽은 원귀들이 있다더니…
오함이《해서를 론함(论海瑞)》발표한후 경극배우 마련량(马连良)이 희곡으로 개편할것을 요청했다. 오함은 일년동안 일심불란으로 극본을 완성하였는데 유명하게 된 “해서파직” 이였다. 연극을 본 최고권위자는 마련량을 집에 청하여 밥을 먹으면서 극이 잘되였다고 극구칭찬하였다. 권위자의 칭찬속에 더없이 도취된 오함은 그의 불운이 이 극본으로부터 시작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성세호대한 문혁의 서막이 열리자 오함은 곧 계하수가 되였다. 마연량도 투쟁받으며 시달리다 집까지 발칵 뒤집히고나서 자살하였다. 오함은 필생을 걸고 령수에 충성하였지만 나중에 옥중원혼이 되고말았다. 그가 정치상에서는 미로에 들어섰어도 량심 하나만은 지켰다고 평가하지만 “어용문인”의 감투는 벗지 못하고있다.
어용문인들이 어찌어찌하여 권력의 그늘속에 들어섰지만 부림당하고 대변자가 되여지고 야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인격도 걸레로 만들어버리고 생각과 사상이 빈혈증에 걸리여 제도권에 기생충이 될수밖에 없었다. 책은 책자체의 용도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도권은 언론인들의 언론의 의미와 가치, 용도를 가르쳐주지 않고 오직 무책임하게 리용하였을뿐이다. 이류의 언론보다 오히려 술판에서 민초들이 담론하는 천하만사속에 사회현실이 시사되고있다.
5천년 도도히 흐른 중국력사의 장하에서 조대가 바뀌려는 때에는 필경 부패무능한 군주가 충신들을 피눈물을 흘리게 한 대신 태감들이 권력봉을 휘둘러 백성들을 도탄속에 몰아넣고 나중에 자멸한 사실을 력사가 증명하고있다.례하면 진나라 2세때에 조고가 지록위마라는 지경에 이르도록 권력을 희롱하다가 마침내 진2세를 죽임으로써 천하대란을 자초한 사실, 동한말년“십상시(十常侍)”가 권력을 잡으면서 동탁이 입경하여 횡포무도를 일삼다가 려포에게 죽임당한 사실, 당조말년 태감들의 전횡으로 백여년의 재난이 있었던 사실 등등이다.
몇천년의 봉건사회에서 무치한 어용문인들은 일컬어 천명(天命)과 하늘의 뜻 (天意) 왕도락토라는 황당한 궤론을 만들어냈다. 가장 무치하게 흑백을 뒤섞은것은 백성을 마치 “국가”가 기르는 동물로 만들어버린것으로서 력래로 어느 봉건통치자도 백성들이 자기를 양육한다고 말한적이 없다. 언제부터인가 청조의 력사를 다시 쓰면서 원래의 사료와 어긋나는 일들이 세상에 알려졌다. 력사는 고칠수 없는 줄을 알면서도 어찌하여 그 많은 사람들이 피곤한줄 모르고 열정을 불태웠을가? 한마디로 권력과 리익, 일세영달이 그들로 하여금 일사불란하게 만든것이다.
만약 한 개인이 어떻게 후안무치하고 어떻게 량심을 팔아먹든지 그 개인의 일로서 사회적 위해는 별로 없다. 그러나 높은 로임과 우혜대우를 받으면서 모집단을 위해 거짓말을 꾸며내고 흑백을 뒤섞고 시비를 전도하면서 가상을 꾸며서 민중을 기편하여 리익집단만 위하는 일은 질적으로 다른 일이다.
례컨대 한국내에서 보수어용언론의 특징을“거두절미”,“침소봉대”, “아전인수”, “룡두사미”, “부화뢰동”이라고 개괄하고있다. 이것은 어용언론들의 위기감을 폭로한것이다. 그리하여 “그럴듯한 기사”와 “있을것같은 기사”, 그리고 아예 “거짓말 기사”들만 약장사들의 헛소리처럼 판을치고 민중들도 점차 그 “보도행태”에 익숙해지고 있다고 지성인들은 대성질호하고있다.
“국내적으로라도 공정해야 할 매체들이 기득권자들의 리해득실때문에 편파적인 보도만 하고 있고 이와같은 상황에서 신문, 방송, 등 전파매체 (저널리즘)의 생존자체가 위협을 받고있다”는 지적이 날카로운데 그새장새이다. 자원했든 핍박에 의해서였든 어용문인이 되여야 할 숙명이라면 참으로 애재(哀哉)가 아닐수 없다.
2013년 8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