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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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리간계 댓글:  조회:2980  추천:5  2013-02-15
리간계                                                                                                                        최 균 선       인류가 쟁투의 묘리를 터득하면서부터 더 늘어난 지혜의 한가지가 리간도발이라 하리라. 리간질이란 우리 말로 두사람 사이, 나아가서는 군체들 사이에서 헐뜯고 조작하여 대방의 심리변화를 이끌어내면서 관계가 멀어지게 하는짓을 이르는 말이다. 일어에서는 (人ひとの仲なかを裂さくこと) 라고 쓰는데 둘사이를 이간질하다이며 한어에도 리간이란 말이 있는데 도발리간(挑拨离间)이라 하고 영어로 이간질은(가) alienation (나) estrangement)라 하니 인간의 공통된 악덕임에 틀림없다.     리간질은 늘 정직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을 거꾸러뜨리는데 참으로 인간성정의 이률배반이라고 하겠다. 물론 사람마다 서로 우의적으로 착하게 대하고 진심으로 대하는 인간사회를 바랄수 없지만 우연하게라도 당하지 않으려고 늘 말초신경을 도사려 야 한다면 인간사회는 원초적으로 쓸픈 마당이 아닐수 없다. 인간은 언제까지 리간질을 하면서 리기의 극단에로 치달아오를것인가?     파스칼은 “모든 인간은, 불확실한것을 얻기 위해서 확실한것을 걸고 내기를 한다.”고 하였다. 이 말은 도박을 두고 한 말이지만 인간사회에서 쟁투, 암투, 모략, 술수는 더욱 심각한 생명대 생명의 도박이다. 아이러니한것은 확실한것이 허위적인 조작에 얼리워 넘어간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속절없이 “생각하는 갈대”여서인가?     자고로 동과 서, 남과 북, 남자와 녀자, 민초들과 지배자들, 부자와 빈궁한자들, 얻은자와 못얻는자들, 상층과 최하층사이에 리간질이 쟁투의 살수간으로 휘둘려졌고 피와 원한으로 림리하게 되였다. 서로서로 리간질로 득을 보고 남을 해치고도 스스로 잘못되여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냥 책략으로 각인되고 그렇듯 받아들여지는 인간은 얼마나 무모한가? 리간질은《손자병법》36계에서 련t생계(孪生计)로서 전문 리간계를 서술한 장절이있다. 일찍 리목(李牧)과 조왕(赵王) 사이를 뒤틀리게 한 진시황의 리간질로부터 항우와 범증(范增ㅡ진평)이 반목하게 한 류방의 리간질, 지능이 출중한 악의 (乐毅)를 리간질한 전단(田单), 마초(马超)와 한수(韩遂)를 들쑤신 조조의 리간질, 려포를 사촉해 의부동탁을 죽이게 한 왕윤(王允)의 리간질, 조조와 채모,장윤 (蔡瑁,张允)을 버성기게 한 주유(周瑜)의 리간질…위나라 명장 오기(吴起)에게 자기의 딸을 내주려고 작심했던 재상 공숙(公叔)마저 시기질투로하여 리간질한 고사도 있다.     이 모든것은 다 고대인들의 가장 경전적인 전례(战例)들이다. 고대에 두눈을 펀히 뜨고 리간질당한 차수로는 려포를 손꼽고있다. 한것은 만부부당지용의 장수였지만 경박하고 교활하며 반복무상하고 눈앞에 리익에 곧잘 눈이멀어 배은망덕하기가 여반장이였던 그의 성격이 문제였다. 그러구보면 리간도발이 인간의 일종 지혜인듯한데…     개체로 말하면 렬등의식(콤플렉스?)을 가지고 있다보니 누구보다 시기질투로 몸살을 앓는 간능한 자들이 특허를 가지고있다. 어떤목적을 이루려하지만 무위무능하여 허약함에 극에 이르렀을 때 리간질을 서슴치않는다. 리간도발의 최대의 악행은 바로 자기의 기량을 최대한도로 상하를 기편하여 비렬한 목적에 도달하는것이다. 계제가 여하튼 대저 리간질은 인간의 품성으로서는 저질이다.     한때 동북아의 강대한 고구려가 의외로 쉽게 무너진데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었겠지만 리더십과 지략이 뛰여났던 연개소문이 죽은뒤 그의 장자 남생이 대막리지에 올랐다가 곧 동생 남건에게 쫓겨나자 연씨를 반대한 일부세력들이 남생, 남건, 남산 삼형제를 리간시켰기때문에 사분오렬되였다. 악착한 리간질로인한 형제들의 반목과 갈등은 곧 바로 강토를 지키고 백성을 지키내지 못한 화근이 되였다.     동생에게 쫓겨난 남생은 앙심을 품고 국내성에서 현도성으로 도망쳐 당나라품에 안기고 더 나아가 제 3차 고당전쟁 때 당군의 앞잡이로 고구려멸망의 선봉장이 됐다. 남생은 당나라와 내통하고있던 신성이라는 자가 성문을 열어주는 배신행위로 하여 제애비가 피로써 지켰왔던 강대한 나라를 허무하게 무너뜨렸다.     이렇듯 리간계는 권모술수를 부리는 자들이 자기의 적수를 거꾸러뜨리는 묘수로 애용되였다. 중국사람들이 천추에 기리는 악비를 모해한 진회의 리간질은 그 업보로 지금까지 공중앞에서 무릎을 꿇고있는 추태를 현시하고있다. 그런즉 어떠한 계제의 리간질이든 천하에 몹쓸 기량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리간질에는 총명이 과인한 사람이나 기개가 하늘찌를 영웅호걸도 눈을 펀히 뜨고 당하니 얼마나 무서운 기량인가!그러나 남잡이가 제잡이로 된다는 철리처럼 리간쟁이들의 종말도 명랑하지는 않다.     세계사적으로 "리간질외교의 달인”으로 히틀러를 꼽고있지만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더욱 간악한 리간질의 원쑤는 일제였다. 36년간의 식민통치시기 일제는 총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강행하였는데 그 핵심이 3천만 조선의 민심이 단합하지 못하도록 리간질하여 대책없이 서로 헐뜯는 노예적삶을 살아가게 한 술책이다. 그 첫번째 보취로 조선사람의 인권과 자유지향을 말살하시키려는 민족어말살정책이였다. 그 구체적인 체현을 한번 보자.     1922년, 조선총독이였던 사이토란자는“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력사, 전통, 자신의 일들을 알지 못하게 하라. 하여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무능, 악행을 들춰내여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의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청소년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부정하고 멸시, 경시하는 감정을 가지게 하여 하나의 기풍을 만들라. 그러면 조선의 청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될것이며 그때!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 들을 소개하면 통치의 효과가 지대할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비결인것이다.”라고 지껄이였다.     우리 배달민족들로 말하면 천년이 흘러가도 잊을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쑤가 일본제국주의였다. 그런데 멀지않은 그젯날 식민통치국이였던 일본과 동맹국이 되고 그자들의 의발을 계승하여 신라가 당군을 끌어들인 전철을 밟고있고 리간계를 상투 수법으로 쓰고있는 당전 형국에 력사가 롱담해도 더럽게 롱담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월가의 양키마저 등에 업고 호가호위하니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2011년 5월9일,료녕성 사회과학원의 조선ㅡ한국연구중심의 주임인 려초(吕超)는 《환구시보》기자에 이렇게 말했다.“조선반도의 국세가 긴장한 대치상태에 처한 상황에서 한국은 갈수록 더 조선을 고립시키려고 로골적으로 리간계를 써서 중조관계를 리간질한다”고 하면서 한국매체의 보도가 비록 바람을 붙잡고 그림자를 잡으려는 (捕风捉影)격이지만 갈수록 우심하기에 경각성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리간질에는 태평양건너 간능한 양씨네들도 이골이 터있다. 2012년 9월 5일, 《인민일보》(해외판)은 마침 중국에 온 클린턴국무장관에게 중국의 주변국가을 리간질하지 말라고 일침을 놓았다. 리간질하는 사람은 총명하다 할것이요 리간질당하는 사람은 소견머리가 좁고 어리석고 리간질이 계략이라 하더라도 필경은 광명정대하지 못한 자들이 하는 작태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쉬파리가 생고기에 쉬를 잘 쓿는다해도 생닭알에는 쉬를 쓿지 못하듯이 리간질도 통하는데가 있는것인듯…                              2013년 2월 14일  
2    그들은 짐승조차 못되였다 댓글:  조회:3105  추천:1  2012-08-06
                              수천년의 문명사에 국한해서도 인간이 인간에 대해  저지른 만행을 기록한다면 길고 참혹한 씨나리오일것이다. 전쟁은 인간의 야만성과 잔인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도살장이다. 방화, 략탈, 살인, 강간, 고문…특히 일제가 중국을 침략했던 시기의 남경대학살은 인종배타성, 인간의 폭력성, 잔인성, 광기 등을 극단으로 보여준 인류의 최대치욕으로서 인간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불러왔다. 8년항전기간 중국군민의 상망자수는 무려 3천5백만명에 달한다. 특히 일본군의 남경대학살같은 현대인간비극은 생각만해도 몸서리쳐질 일이다. 일본군 수뇌부는 전쟁에 지쳐가는 병사들에게 위안대상을 찾기에 골몰했다. 중국군의 거센 저항기세를 꺾을 희생양을 찾아 중국인에게 본보기를 보이려고 남경진입전 치밀한 학살계획을 세웠다. 일본군은 조직적인 군사작전을 치르듯 6주동안 남경의 열세곳에서 대학살을 감행했다. 당시 남경침공전에 주력이였던 일본군 제6사 사단장 고꾸 도시오와 제16사 사단장 긴도우곤 아사코가 지휘하는 부대는 인류문명사상 가장 무시무시한 인간도살극을 연출했는데 30만의 무고한 중국생령들이 도륙당했다. 남녀로소 무차별 살륙의 광란이였다. 중국계 미국인 력사가이며 작가인 아이리스 장(張純如, (녀)1968년 3월 28일~ 2004년 11월 9일은 베스트셀러 에서 죽은 사람들이 손을 잡으면 남경에서 항주까지 222㎞를 이을수 있고 흘린 피의 량은 1200t에 달한다"면서 "시체는 기차 2500량을 가득 채울수 있고 시체를 포개놓는다면 74층 빌딩높이에 달할것"이라고 적었다. 남경은 그렇게 참혹한 인간지옥으로 변했다. 남경을 점령한 일본군은 중국인을 죽이는것으로 무료함을 달랬다고 한다. 이런 야차들이 세상에 또 있을가? 일본군은 투항한 중국군포로뿐만 아니라 젊은남자들을 색출하여 성밖에서 기관총으로 학살하였는데 적게는 수십명, 많게는 만여명이나 되는 포로와 남자들은 일본군의 총검술훈련용이나 목베기시합의 희생물이 되기도 했다. 적지 않은 중국인들은 총알을 아끼려는 일본군이 산채로 파묻거나 란도질했다. 어깨로부터 비스듬이 내려베여 심장을 다치지 않게 한다는 기모도리라는 검술로 심장을 꺼내먹었다는 사실도 드러난바 있다. 일본종군특파원 오마다 유끼오는 다음과 기록했다. "첫 번째줄에 서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렸다. 두번째줄에 서있던 포로들은 자신들의 목이 잘리기전에 앞줄에 서있던 포로들의 잘린 몸통을 강물에 던져넣어야 했다. 살륙은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되였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2천명밖에 처리할수 없었다. 그 다음날 이런 처형방식에 싫증난 일본군은 포로들을 한줄로 세우고 기관총을 란사했다. 포로들은 본능적으로 강으로 뛰여들었지만 강건너편에 도달한 사람은 없었다…" 남경경의 한 광장에서는 천여명의 사람들이 몇줄로 구분되여 세워졌다. 군중 가운데는 녀자들과 어린아이도 끼여있었다. 일본군은 군중에게 석유를 쏟은뒤 바로 기관총을 란사했다. 총탄이 사람들의 몸을 꿰뚫을 때 석유에 불이 붙었다. 아비규환의 지옥같은 광경, 그러나 일본군들은 자신들이 연출한 장면을 보며 웃고 즐겼다. 제 2 차 세계대전후 발견한 남경대학살에 참가한 일본군인의 일기에서는 "심심하던중 중국인을 죽이는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면서 "산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죽이고 몽둥이로 때려죽이기도 한다"고 적혀있었다. 인간사냥이 극에 달하면서 일본군은 녀자들에게도 마수를 뻗쳤다.남경대학살에서 이뤄진 강간은 더욱 잔혹했다. '집단륜간', '선간후살'(先奸后杀)….일본군은 녀성을 성노리개로 삼는것에 그치지 않고 강간후 참혹하게 살해했다. 그 대상은 열살도 안된 어린이부터 60·70대 로파까지 그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일본군은 수녀와 비구니를 포함하여 남경의 녀성들을 보이는대로 릉욕했다. 성스럽다는 일본군은 선간후살(先奸后杀)에 임신부,태아까지 살해하는 인성을 완전 상실한 만행을 너털웃음속에서 자행했다. 일본군법은 강간을 금지하긴 했지만 고급장교들을 비롯하여 누구나 강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일본군은 임신중인 녀자도 강간했는바 강간뒤 임신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 함께 죽여버리는 만행도 서슴치 않았다. 일본군병사인 아즈마 시로는 "중국녀자들을 옷을 벗겨 구경한뒤 '오늘은 내가 목욕 하는 날이다'라 웨치며 륜간했다, 륜간뒤 우리는 그 녀자들을 죽여버렸다, 시체는 말을 할수 없으니까"라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남경시내 곳곳엔 사지가 절단된 시체와 더불어 다리를 벌린채 죽은 녀자시체가 쌓였다. 일본군은 살해한 녀성의 성기를 도리거나 그 속에 막대기를 쑤셔넣기도 했다. 일본군에 의해 가슴이 도려나가고 성기가 잘려나간 녀성이 숨을 멈출때까지 고통에 몸부림치자, 일본군은 박수를 치며 웃어댔다. 중국 는 한 생존자의 목격담을 실으면서, "죽은 녀시체의 열중 여덟은 배에 칼을 맞고 죽어있었다, 녀자들은 가슴이 잘려져 떨어져 나왔고 그렇지 않은 시체는 총검에 숱해 찔려 가슴의 형체를 알아볼수 없었다, 한 녀자는 고기덩어리처럼 변해버린 태아옆에 쓰러져 죽어있었다"고 보도했다. 인간은 선량한가? 악한가? 세인들은 남경대도살 와중에 출현된 악명높은 살인광들을 기억하고있다.  일본군 제6사,16사《편동련대분산영(片桐联队富山营)》소위부관이였던 노다 다케시(野田毅)는 1937년 당시 25세였고 무카이 토시아키(向井敏明)는 같은 부대포병소대장이였는데 당시 26세였다. 두놈은《백인참사경색(百人斩竞赛)》을 하였는데 먼저 100명을 죽이면 승리자인것으로 약속하고 승리자에게는 포도주한병을 장려하기로 하였다. 당시 금방 대학을 졸업한 24세의 나이로 동경심판에 참여하였던 고문빈(高文彬 ㅡ현재 유일하게 생존한 견증자) 은《동경일일신문(东京日日新闻)》에 게재된 보도를 발견했는데 살인과정, 정확한 수자에 사진까지 곁들어있었다. 전쟁당시 일본매체들은 흥미진진하게 잔폭한《백인참》을 무용담으로 보면서 살륙찬가를 엮어댔다. 량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차마 다 읽어내려갈수 없는것이였지만《충실》하게 력사기록을 남겼으며 흰종이, 검은 글자사이 사이에 피비린내가 랑자하였다. 보도를 읽은 고문빈은 페가 터지는듯 하였다고 한다. 그는《백인참초기록(百人斩超记录》이라는 제목의 보도를 내보냈는데 문장에는 두살인광의 대화내용도 있다.     노다: 어이, 난말이야 105명을 베여버렸어, 당신은?     무카이: 나는 106개야,     두소위는 하하하 웃었다. 결과적으로 누가 먼저 백을 베였는가를 묻지 않았다.     “빅은 유희로 치자구, 다시 150명을 베기내기를 하는게 어떤가? ” 두사람은 의견일치를 본후 11일부터 150명베기 시합을 시작하기로 약정했다. (하략) 당시 일본에서는 신문심사제도가 아주 엄했는데 종군기자들의 보도와 사진이 당당하게 일본신문들에 게재된것은 무엇을 설명하는가? 바로 일본군 특유의 “무용전” 으로서 모두 일컬어 “무사도정신”과 열광적인 군국주의사상을 선양,고취한것이다. 기실 “무용전”의 뒤에 피와 잔폭성을 쉽게 보아낼수 있다. 그러나 일본군국주의자들이 전 민족을 선동하며 미쳐날뛰던 년대에 이런 보도들은 “인심을 흥분시키는 영웅 사적”으로 되였으며 “백사람베기경쟁”은 노다와 무카이같은 살인악마들은 일본땅에 가가호호에서 다 아는 “영웅”이 되여졌다. 그러나 죄는 지은데로 가는법이 아니던가? 태평양전쟁이 폭발하여 비률빈에 주둔했던 이 악명높은 부태는 미군상륙부대에 의해 620명이 겨우 목숨을 부지한 나머지 모조리 18층지옥에 떨어졌다. 동경심판과정에 중국대표단에서는 또 다른 살인마귀를 발견했는데 일군제6사단 대위중대장이였던 다나카 키쯔란 놈이였는데 남경 중화문에서 수서문구간에서 300여 명의 중국군포로와 평민들의 목을 베여버린 이리도 아닌 극악무도한 악마였다. 포로 되였다가 귀국하여 도꾜부근의 기옥현에서 난전을 하던중 체포된 놈이다. 1947년 12월 18일 남경군사법정에서는 이 세악귀들에게 사형판결을 내리였다. 죄악이 하늘에 사무친 놈들에 대한 징벌은 공정하지만 우스운것은 그자들이 철증같은 사실앞에도 시종 자기들의 죄행을 승인하지 않았다는것이다. 그런 증거와 그자들의 승인자체가 중요한것이 아니다. 그들이 왜 승인하지 않았을가? 저들이 저지른 만행을 승인하면 엄벌이 두려웠을게다. 징벌을 두려워한것은 개목숨이 아까웠다는 얘기다. 다른 생명을 놀음처럼 해칠때 생명이 누구에게나 귀중한것을 생각못했는가? 결국 약자에게 강폭한 자들이 거개 그러하듯 자신들이 더없이 비겁하고 비렬하며 너절한 생령들이였다는것을 자인한것이다. 우화대의 사형장에서 최후의 담배를 피우는 장면 이 력사기록으로 남아있다. 타들어가는 담배대를 보며 과연 무엇을 생각했고 무엇에 초조해했을가? 모르긴해도 담배대가 무한히 길기만 바랬을것이다. 당시 중국을 대표하여 원동국제군사법정의 법관으로 출정한 매녀오(梅汝璈)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복수주의자가 아니기에 일본군국주의가 우리에게 진 혈채를 일본인민들의 몸에 기록할 뜻이 없다. 그러나 나는 과거의 고난을 잊는다 면 가능하게 미래에 재화를 불러올수도 있다는것을 확신한다. ” (북경일보 ㅡ2012년 7월  17일부) 그의 말은 정확하며 원경성이 있다. 그러나 군국주의자들이란 누구누구들인가? 일본천황인가? 도죠 히떼끼인가? 노다 다케시인가?고꾸 도시오인가? 당시 일본인민이라는 개념의 외연과 내포는 어찌되는가? 여기서 “인민”이란 개념은 모호해진다. 노다나 토시아키같은 자들은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원래는 선량한 청년들이였는데 침략전쟁이 악마가 되라고 핍박하였고 할수 없이 군도로 학살유희를 벌렸는가? 그러나 일본군국주의 유령부스러기들은 아직도 ‘신화같은 조작’이라고 당나발을 불며 피로 씌여진 력사사실을 극력 부정하고있다. 하긴 인간은커녕 짐승도 아니였던 자신들의 만행을 기억한다는것은 힘든 일이 아닐수 없다. 황야의 승냥이들이 얼마나 많은 양을 잡아먹었는지 알수 없듯이 말이다. 그리고 더 슬픈 일은 많은 중국사람들이 내혈육이 아니고 아득히 흘러간 세월의 언덕너머에서 벌어진 일이라는데서 기꺼이 망각하고있다는 사실이다. 잊을것이 따로있다. 이런 망각은 고통을 잊게 하는 령약이 아니라 민족혼의 상실과 무위무능을 말해줄뿐이다. 우리 민족은? 강도는 칼을 쥐지 않는 부처님에게 탄복하는 일이 없다. 인두껍을 쓴 야만들은 꿈도 살륙하는 꿈으로 장식할것이다. 일제침략군이 격세유전의 만행을 저지른것은 그 자들의 죄악이고 사람들이 잘사는 나라인것만 알고있는 아이러니는 력사의 수치이고 비애일뿐이다. 피로 기록된 력사는 망각의 이끼로 덮혀지지 않는다. 지금 일본정부의 작태는 어떠한가? 더 악착한 승냥이로 되려고 발톱질을 하고있지 아니한가?                             2012년 7월 27일 (수정고)    
1    제 6 장 절 변형시켜 쓰기. 제 1 절 줄여쓰기 댓글:  조회:2261  추천:1  2012-06-16
 제 6장 변형시켜 쓰기  제 1절 줄여쓰기 줄여쓰기란 비교적 긴 글을 일정한 요구에 따라 삭제하거나 줄여서 편폭이 짧은 글로 만드는 일종 글짓기 방법이다. 줄여쓰기를 할 때 반드시 원문의 중심사상, 기본내용과 표현 형식에 대하여 깊이 이해한 기초에서 원문의 중심 및 풍격을 살려 써야 한다. 그리고 원문의 매 단락을 골고루 줄여쓰지 말아야며 독후감을 쓰지 말아야 한다. 재료1 :         아직도 그리운 어머니     문득문득 엄마가 이제 계시지 않는다는걸 느낄때가 있다.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깨어보니 자명종만 울리고있을 때, 느지막히 집에 돌아와도 여전히 어둡기만한 거실을 바라볼 때, 방에 불을 켜두고 잠이 들어도 여전히 꺼지지않은 형광등을 보며 잠이 깰 때, 이젠 더이상 집에 오시지 않는 동네 아주머니들을 길에서 마주칠 때, 왠일인지 가실 때 즈음이 되어서야 그렇게 찾으시던 번데기 장수를 마주칠 때, 가신지 벌써 2년이 되어도 문득문득 엄마가 그리워지 게하는 그런 순간들을 본다.   나는 몸살에 걸렸다. 집에 들어와 고개만 꾸벅거리고는 곧장 방에 들어가서 자리에 누워버렸다. 젊은 나이에도 몸살쯤에 끙끙거리며 누워있는 나를 질책하고 있던 내 어두운 방문을 여신건 당신, 엄마였다.   당신이 그리도 아프셨으면서 그저 하루이틀이면 나아질 내 이마를 말없이 쓰다듬어주시던 엄마.  잠든척 그저 엄마의 손을 받기만 하고 있던 난 그날 밤새도록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눈물마저도 이젠 보여드릴 수 없을 나의 엄마.   엄마가 암이셨던건 한참후에나 알았다. 그저 조금, 이번엔 그저 평소보다 조금 더 아프실 뿐이라고 이리저리 놀러다니기만을 좋아했던 나 자신을 합리화 하려던 나. 언젠가 병원에서 엄마와 함께 전설의 고향을 보면서 〃이제 엄마도 저렇게 가게 되겠구나〃 하시던 말씀 만으로도 알 수 있었을텐데, 난 마지막까지도 엄마에겐 그저 응석받이 어린애일 수 밖엔 없었다.   가끔 엄마가 보고싶어서 마음이 한껏 답답해 질때가 있다. 엄마의 대답이 듣고싶어서 지갑속의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때가 있다. 뒤를 따라 시장에 갈때면 〃좀 펴고 다녀라〃시며 등을 치시던 엄마의 손에 다시 맞고싶어질 때가 있다. 그러면서도 이제는 조금씩 엄마와 함께있던 기억들에서 멀어져가는, 엄마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모르게 눈물삼키는 그런 일들이 잦아들어가고 있는 나를 느끼게 된다.   장례식때 어른들이 말씀하시던 〃산사람은 살아가게 마련이라〃 말을 이젠 더이상 부정할 수가 없다. 나는 엄마라 부른다. 어머니라고 한번도 불러드린적 없었고, 이제 계시지 않더라도 당신을 부를때면 늘 엄마라 불러드린다. 누군가 다시 그 자리에 대신할 사람이 있다하더 라도, 죄송스럽지만 나 그분을 어머니라 할 순 있어도 엄마라 부르진 못할것같다.   내 이십 몇년의 기억속에서 언제나 그림자처럼 내 뒤에 서 계셔 주셨던 엄마. 엄마, 나의 엄마. 누군가가 이십 몇년의 삶에서 가장 사랑했던 한 사람을 꼽으라면, 그리고 이제 남은 그 얼마간의 삶에서 가장 보고싶은 한 사람을 꼽으라면, 아직도 그리운 나의 엄마.   요구: 300자 좌우로 줄여쓰시오.   재료 2.                  부모님의 은혜     우리가 고고성을 울리며 이 세상에 태어나 강보에 쌓여 엄마의 젖을 빨고 말을 번지면서부터 제일 처음 불러보는 이름은 엄마아빠이다. 그러나 걺음마를 타면서 매 한걸음의 성장의 길에 부모님들이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지 모르고 자란다. 나는 이렇게 다 크도록 보은사상에 대해 깊고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인제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 자기가 걸어온 인생행로를 되돌아 보면서 부모님께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가를 자문해 보곤 한다.   어렸을 때 나의 심목속에 아버지는 태산처럼 우뚝솟아 있었고 어머니는 천사같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러나 무정한 세월 속에 아버지는 옛날처럼 우뚝하지 않고 어머니 는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지나간 일들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면서 부모님의 무한한 사랑을 가슴 속에 새겨 넣는다.   내가 일곱살 나던해 가을, 밀가을 하는 부모님을 따라 밭에 나갔다. 원래 장난이 심했던 나는 밀밭 주위 여기저기를 뛰어 다니며 놀다가 그만 다리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다행히 나무뿌리를 잡았기에 개천에 굴러떨어지지 않고 큰소리로 엄마를 불러댔다. 어머니는 울음소리를 듣고 낫을 든째 천방지축 달려왔다,    아버지의 사랑이 산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이 딸에 대한 사랑을 입로 표현한 적이 없다. 나는 아버지가 7시 후에 일어나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해마다 여름을 이렇게 팽이처럼 돌아쳤다, 남들 이 한가하게 보내는 겨울에도 이렇게 지냈다. 아버지는 인제 나보다 더 약하고 키가 작아졌다. 아버지는 점점 못해 가신다. 어머니는 나에게 “아버지가 저렇게 황소처럼 쉴줄 모르고 일하는 것은 다 너를 위해서란다. 그러니 아버지의 은혜를 잊지 말고 장차 효도해야 해”라고 당부 하시곤 한다. 나는 아버지의 쇠약해진 뒷모습을 볼때마다 너무 가슴이 아프다.      나는 그들한테 뭘 해드릴 수 있을까? 나는 항상 이렇게 자기에게 묻곤 한다. 나는 갑자기 훌쩍 커진 것 같다, 나는 부모님의 걱정 하시지 않도록 열심히 공부하고 집에 돌아가면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도록 설거지를 하고 가정 분위기가 활기에 차도록 자주 노래를 부른다. 나는 될 수 있는대로 부모님에게 가장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들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부모님이 땅이라면 나는 그 품에서 움트고  자란 한그루 작은 나무이다. 부모님이 바다라면 나는 그 깊은 곳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물고기이다, 부모님이 나에게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도록 따뜻한 집을 마련해 주신데 감사드린다. 부모님이 하늘이라면 나는 그 하늘을 마음껏 날아예는 새이다, 부모님이 나에게 자유를 주신데 감사드린다. 어머니의 사랑은 바다보다 더 깊다, 아버지의 사랑은 산보다 무겁다.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 나의 인생을 동반해주신 당신들에 감사드립니다, 은혜에 감사의 마음, 꽃피고 지는 사연 진귀하듯 아버지, 어머니의 평생을 진심으로 기리나이다.                                                              2011년 3월 22   요구: 이 이야기를 400자 좌우로 줄여서 써보시오. 재료 3.            낯선 할아버지의 넓은 등   “어휴, 이걸 어떡하지? 그냥 걸어가 볼까? 그냥 건너면 집에까지 축축해서 어떻게 가지? 아유, 난 몰라.”   벌써 5년 전 일이다. 그때 난 중학교 3학년이었다. 교회로 가는 길은 시멘트로 만들어졌는데 공사를 잘못했는지 교회를 좀 덜 가서 길이 움푹 패여 있었다. 날씨가 맑으면 잘 모르는데 비만 오면 그곳엔 물이 고이곤 했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아니나 다를까 자동차 한 대가 지나다니는 그다지 넓지 않은 길이 옆으로 지나갈 수 있는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온통 물바다였다. 어쩔 줄 몰라 한참 망설이는데 맞은편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슬리퍼를 신고는 여유 있게 건너오셨다.    그때 할머니가 안절부절못하는 내 상황을 눈치채셨는지 “어휴, 저애 가 저길 어떻게 건너려고…” 하며 걱정하셨다. 그러자 할아버지께서 내 앞으로 다가와 “자, 업혀라” 하며 등을 내미셨다. 나는 너무 놀라고 당황했다. 할아버지 연세가 족히 70은 다 되어 보이시는데, 그렇다고 내가 깃털처럼 가벼운 몸매도 아니고 좀 통통했기 때문이다. 순간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혹시 다치시지는 않을까. 모르는 할아버 지께 덥석 업히는 게 너무 염치없는 일은 아닌가!’ 그래서 난 정중히 괜찮다고 말씀 드렸다.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막무가내로 계속 업히라고 하셨다. 결국 할아 버지 성화에 못이겨 업히고 말았다. “넌, 내 손자뻘쯤 되겠구나. 내가 안 잡을테니 네가 나를 꼭 잡아야 된다” 하며 내 마음까지 헤아려 주셨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할아버지의 등은 참으로 넓고 따뜻했다. 할아 버지 등에서 내리고 나서 나는 부끄러움에 고개 숙인 채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하고 외쳐댔다. 잠시 뒤 고개를 들었을 때는 두 분은 저 멀리 가고 계셨다. 요즘도 그 길을 지나치면 그때 그 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넓고 따뜻한 등을 보여 주신 것뿐이지만 난 거기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조건 없이 이웃을 도울 수 있는 여유를 배울 수 있었다. 처음 마주친 나에게 선뜻 당신의 등을 보이신 할아 버지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열심히 살려고 노력 중이다. 어려움에 처한 모르는 이웃에게도 손을 내밀 수 있는 할아 버지의 등과 같은 넉넉함이 그리울 때다. 제시:  이 이야기를 200자로 줄여쓰시오   세 개의 예문은 자작글 쓰기를 준비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핵심 개념을 중심으로 간단히 줄이는 연습을 하려는 것이다. 구절을 내 말로 풀어쓰고 난 다음에는 핵심 개념으로 최소한도로 축약할 수 있는 데 핵심 개념으로 아주 확 줄여 구절의 의미를 끄집어낼 수 있어야 한 다. 그러기 위해서 다음의 원칙에 따라 자꾸 연습해야 한다.   첫째 : 육하 원칙에 따라 누가 무엇을 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줄여야 하는데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했다는 것에 해당하는 내용이 명확해야 한다. 여기서 우선적으로 누가 무엇을 했다는 것을 정리하고  나서 덧붙일 내용을 최소로 찾아본다.   둘째: 표현이 다르지만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점을 찾아본다. 바꾸어 말해서 여러 표현들이 있지만 그것을 다른 한 말로 적절히 바꿀 수 있는 표현을 찾아보는 것이다. 글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다른 표현들을 하고 있지만 어떤 한 가지 개념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전에 개념 찾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축약이 말의 생략이 아니라 핵심 개념의 발견임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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