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생긴 아모르
ㅡ사랑은 아름다운 착오인가… 운운
1
봄은 흥겨워…
정성껏 대자연의 첫잔치를 베풀더니 어느새 싫증이 났는지 꽃과 나비와 꿈을 슬며시 걷어가지고 가버린다. 뒤따라 산야에 풍기는 야릇한 애수를 덮어주려는듯 첫여름이 푸른 옷자락을 너울거리며 들어선다.
하늘도, 숲도, 공기도 파랗게 물들었다. 푸르러지는 생각, 그리고 어데론가 자꾸 자꾸 가고만싶어지는 그러한 날이다.
철민이는 실버들이 늘어진 내뚝에 점도록 앉아서 해볕에 포근히 싸인 산간마을을 망연히 바라보며 오만가지 잡념을 다듬고있다. 감개무량하기엔 너무도 가슴아픈 추억의 마을이요, 한맘 크게 먹고 선뜻 들어서자니 무섭게 태치는 량심의 채찍이 쨩 울리며 걸음을 탁 막아나선다.
그랬다. 만약 갑자기 학교에 나오지 않는 학생만 아니였다면 결코 살아생전에 이 마을을 찾지를 않았을것이다.
《후유ㅡ꼭 16년만이로구나…》
철민은 밀물처럼 밀려드는 회한을 겨우 한숨으로 막아놓고 탕개가 풀려버린 두다리에 힘을 고이며 시들히 일어섰다. 그가 무거운 발길로 마을에 들어서는데 때마침 마주오는 늙수그레한 촌아낙네가 있었다.
《저ㅡ여게 한성이네 집을 찾는데요.》
《예에ㅡ저기 바루 저 초가집인데요.》
《네?!…아, 감사합니다.》
녀인의 손길을 따라 눈길을 주던 철민의 얼굴은 대뜸 하얗게 질렸다. (하느님 맙소사.)
철민의 짜내는듯한 신음소리에 녀인은 이상하다는듯 곱지 않게 흘끔거린다. 제풀에 머쓱해진 철민은 얼핏 얼굴을 돌리였다. 갑자기 술취한 사람처럼 걸음이 비탈렸다.
여기저기 보란듯 일떠선 벽돌집들에 소외된듯 언덕쪽에 외롭게 쭈크리고 앉은 초가집, 너무도 눈에 익은 그제날의《실락원》이다. 온갖 불행과 고통과 저주를 고즈넉히 삼키고있는듯 고색이 창연하다. 줄줄이 홈타기진 지붕이며 찌그러진채 매달려있는 헛간문, 얼추 엮어두른 울바자…그 어데나 힘겨운 고달픔이 철철 흐르니 오늘도《실락원》인가…철민은 주인을 부를념도 못내고 우두커니 섰다. 이때 귀익은 남자애의 목소리가 반갑게 들려왔다.
《선생님, 선생님이 어떻게…》
《오, 한성이구만, 그래 어데 갔다 오는길이지?》
철민은 언제나 수집은 계집애처럼 얼굴 잘 붉히는 사내애를 덥썩 부여잡았다. 언제 보나 류달리 정끌리는 개성적인 얼굴, 총기 있고 지혜있는 눈, 그 누가 보나 《훌륭한 애로구나.》하는 인상을 주는 열여섯살, 한창 망울짓는 미소년이다.
《저…논밭에요. 어머니가 목이 마르다기에 물을 가지러…》
《응, 그래?무척 힘들지?저 땀을…쯧쯧…》
《괜찮습니다. 참, 이게 우리 집인데요. 들어갑시다. 제가 어머 닐 모셔올게요.》
《오, 그렇지, 물론 동무의 어머니를 만나봐야지, 헌데 한성인 왜 학교에 안나 오지?》
추구하는듯 따끔하게 쏘는 선생님의 눈길에 사내애는 흙발을 비비며 떠듬거렸다.
《편지 받았습니다. 하지만 어머니 혼자서 도거리농사를 어떻게…어머닌 병도 많으시지…전 아무래두…》
《음, 사정 짐작하구있었소. 하지만 중점고중에도 가고 대학에도 갈수 있는 한성이가 참 애석하구만, 그래 동무어머닌?》
《어머닌 야단이십니다. 뼈를 갈아서라두 꼭 대학공부는 시킨다며 말입니다.》
《오, 참으로 훌륭하신 어머니시구만, 한성이두 효성이 지극하구…그럼 우리 한성이가 어떻게 살고있나 좀 구경할가?》
철민은 한성이를 따라 정지간에 들어섰다. 궁색이 쭉 깔린 살림이다. 몇해전에 갖추었을 색이 바랜 찬장과 그옆에 윤기도는 오지독 몇개, 할머니가 물려주었음직한 옛날 장농 한쌍, 그우에 댕그랗게 얹혀있는 이불 두어채…구석구석을 눈빗질하던 철민의 눈길이 벽에 걸린 사진틀에 굳어졌다. 동공이 점점 커지고 입귀가 자꾸 실룩거린다. 환각도 환영도 아닌 현실의 무서운 비극이 곧 막을 올리려고 한것이다.
철민은 갑자기 몽유병에나 걸린듯 자기자신을 가늠할수 없었다.
《음ㅡ그러니 한성인 여기 태생이겠지?》
《전 잘 몰라요. 어머니의 할아버지랑 저의 외할아버지, 외할 머니랑은 다 이 집에서 살았대요. 외할머닌 재작년에…》
《오, 그럼 동무의 아버지는…》
그렇게 묻는 철민이의 입술이 저도 모르게 파르르 떨렸다.
《전 유복자라나요. 어머닌 늘…》
《오, 그렇구만, 오…》
철민은 그저 《오오》하면서 체증만난 사람처럼 갑자르기만 했다.
한성이가 나가고 빈집에 남은 철민은 안경을 닦아쓰고 사진틀에 바싹 다가섰다. 돌이나 지났을 남자아이를 안은 젊은녀인이 시름겨운 눈길로 철민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녀시절의 생기와 활력은 스러졌으나 보다 성숙한 매력으로 아름다움을 과시하고있었다. 우수를 머금은 호수같이 서느러운 눈, 지친듯한 얼굴, 애련한 그 모습전체에 비껴있는 암담함과 우울속에서도 뚜렷이 내비치는 성스러운 모성애의 후광…
(아, 분명 그녀다!그녀가 살았단말인가? 어쩌면 그냥 이 집에서…운명은 잔혹도 하구나…헉…)철민은 모진 오열을 토하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16년, 기나긴 세월을 두고 겨우 아물구었던 옛상처가 오늘 참회와 자책의 칼끝에 찔리워 다시 피고름을 랑자하게 짜낸다. 철민은 황황해진 마음으로 쫓기는듯 집을 뛰쳐나왔다. 발길이 닿는대로 걸어서 무너지듯 쓰러지고보니 역시 그 샘물터, 사연도 많은 첫사랑의 요람이였다. 샘물은 예이제없이 찰찰 넘치여서는 이끼 푸른 돌담새로 돌돌돌 흘러버리고있었지만 이 시각, 철민에게 뼈아픈 추억을 불러일으키는것이였다.
《정녀!그대가 묻었다는 그 순정을 이 철민은 찾을 낯이 없구나. 용서해다오. 아ㅡ아ㅡ》
오장을 후벼내듯 괴롭게 부르짖는 철민의 눈에서 뜨겁고 찝찔 한것이 주르르 흘러내리였다.
2
우연이 아니였다면 운명의 작간이였으리라. 대학4년을 알뜰히 다니다가 그만 시큰둥해진 그해 봄이였다. 시골에 계시는 고모네집에서 정양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그날이다. 철민은 다리쉼을 할겸해서 고개턱 로송아래에 잠시 앉았다. 사원들이 하얗게 붙어앉아 김을 매고있는 비탈밭아래 토성마을이 신록속에 잠겨있 었다.
늦은 봄날의 양광이 호듯호듯 가슴을 희롱질하고 싱싱한 계절의 정화는 일만가지 욕망을 꼬드긴다.《혁명》이냐?학문이냐? 선택의 갈림길에 곤혹이 노그라져 하품했다. 그러나 철민이는 아무것도 될수 없었다. 사람마다 성스러운 마음에 숭고한 사명을 품고 열에 떠있었건만 그것은 짓부시고 족치고 잡아내는 지랄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농토에 태줄을 묻고 자란 그는 그러기에는 너무 선량했고 기질적이 못되였다. 철민의 대학교의 그 뮤즈도 하루새에 녀류혁명가가 되더니 그를 싹수없는 시골뜨기, 백면서생이라고 비웃어버리고 높이 날고있었다. 그 자신만이 하찮은 존재 였다. (에이, 차라리 정염에나 콱 빠져볼가부다.) 그는 갑자기 갈증이 느껴지며 올 때 보아두었던 옹달샘이 생각났다. 건정건정 고개를 내려 산기슭 샘물가에 거의 닿았을 때 성긴 관목숲새로 새여나오는 일남일녀의 싱갱이질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제발 이러지 말아요. 싫어요.싫어요.》
《챠, 이거 개똥녀 매화타령인데, 친해보자는데두 왜 이래?이 태씨의 부인이 척 돼보지. 제밀,》
《개똥녀이기에 대상자 못된다는거 아냐요!》
챙챙한 목소리에 울음이 푹 실려있다.
《하, 요것, 정 이러기야? 잔말 말고 요렇게 착ㅡ헤헤…》
《놔요, 사람을 너무 업신여기지 말아요!제게도 인격은 있어요.》
《흥, 네깐 부농딸에게 무슨 개나발같은 인격이야, 자, 곱게 놀면 너네도 살도리가 나진단말이야.》
그저 웃고 지나쳐버릴《밀회》아니였다. 뒤미쳐 씩씩거리는 소리, 옷이 쫙 째지는소리…사태는 아무튼 급했다. 틀림없는 만행이였다. (저런 강도같은놈같으니라구.)철민의 눈앞에는 독수리에게 채인 풋병아리신세가 되였건만 구원의 소리 한마디 못하고 신음하는 처녀의 모습이 보이는듯싶었다. 철민은 관목숲에 훌쩍 뛰여들었다. 충동의 조약이였다.
《손을 놓아라, 짐승같은놈!》
느닷없이 천둥치는 호통에 한창 처녀의 바지띠를 끌러내리느라고 헐씨근거리던 망나니가 기겁해서 일어섰다. 그서슬에 바지가 훌렁 벗겨지며 흉물이 활 드러났다. 뭉툭하고 딱 바라진 몸뚱이에 마른 강낭떡같은 얼굴, 누렁개털같은 머리칼, 음기가 잔뜩 올라 일그러진 눈,
《너…넌 웬 잡놈이냐?물러갓!》
《썩 사라지지 못하겠니?망종같은놈…》
《야, 이새끼 흥을 깨는데, 씨팔것,》
말이 끝나기전에 주먹이 씽 날아들었다. 철민의 눈에서 불이 번쩍 일었다.
《에익, 개차반같은…받아라.》
철민의 두주먹이 허공을 그리는가싶더니 세괃은 구두발이 방비없는 그자의 사타구니에 날아들어갔다.《어이쿠》하고 허리를 푹 꺾는 그자에게 철민은 날선 무릎팍으로 면상을 콱 짓찧어놓았다. 피투성이된 그자에게 다시 주먹을 안기려는 순간,《그만 때려요. 그만…》하는 처녀의 목소리가 귀전에 울렸다.
《흥, 좋다. 좀 있다 보자구.》
요행 몸을 뺀 그자는 깨여진 입으로 피를 내뱉으며 마을로 줄행랑을 놓았다.
무서운 황소싸움에 오돌오돌 떨고섰던 처녀는 그제야 《와》하고 설음을 터뜨리며 땅에 푹 주저앉았다. 그렇듯 상심해서 우는 처녀의 울음소리가 무두질하듯 가슴을 마구 긁어내렸다. 허지만 철민은 처녀를 달랠 방책이 나지 않았다. 그저 말없 이 샘물가에 주정앉았다.
산곡간에 퐁퐁 솟아서 차분히 대지를 적셔주는 이 땅의 착한 젖줄기, 솟아서 고여서 사랑의 감로수이건만 이 정가로운 샘물처럼 맑아야 할 시골의 인정속에 어쩌면 저따위 잡놈도 끼여있나싶어지며 세상일이 또 한번 묘연해지기만 하였다.
《정…말 고마와요. 전…》
울음을 그친 처녀의 애련한 목소리에 철민은 고개를 들었다. 비록 해볕에 그을고 바람에 거칠어진 얼굴이였지만 무척도 애된감을 주는 처녀였다. 말못하는 내심의 고통과 감격의 정이 물결침에 오르내리는 젖가슴을 정성껏 감추며 어쩔줄 몰라하는 자태…그 모습은 금방 몹쓸 비바람에 시달린 애잔한 산꽃을 련상시켰다.
《아니, 악행에 좀 용기를 내였을뿐이요. 누구나 다 이렇게 했을거요.》
겸양속에 인정미가 흐르는 청년의 말에 처녀는 용기를 얻은듯 한걸음 다가섰다.
《저ㅡ어 혹시…룡강이라는 마을에서 살지 않았어요. 애명…은 야조》
처녀의 당돌한 눈길에 끌리듯 마주 응시하던 철민의 두눈이 번쩍 빛났다. 기억의 쪽문이 활짝 열린것이다.
《아니,귀동녀 아니요?나 야조요. 애명이, 아참 여기서 살았댔구만, 생각밖이요.》
《아이, 옳구만요!오빠, 지금은 한정녀라 불러요.》
그들은 얼싸 두손을 움켜잡으며 반가움에 끓었다. 어찌 그렇지 않으랴, 철민이와 정녀는 죽마고우였던것이다. 정녀네는 토지개혁때 오막살이에 이사와서 살았다. 그늘을 모르는 동심은 대번에 어울려졌다. 봄이면 메도 함께 캐였고 일성산 진달래며 나리꽃을 꺾어서는 귀동녀의 머리에 꽂아놓고《각시, 내 각시》하면서 짝짜꿍을 치던 철민이였다.《너는 아부지, 나는 엄마,》하면서 불때고 밥한다, 애기 업는다, 설레발치며 해지는줄 모르던 소꿉각시 정녀였다. 언젠가 한번은 정녀가 무엇에 토라졌는지 각시질 안한다고 쫑알거렸다.
《너 정말 안할래?간나!》
《안해, 안해,뿅!심술쟁이,》
정녀가 어찌나 얄밉게 입을 쫑긋거리는지 철민이는 손에 쥐고 있던 유리쪼각으로 정녀의 이마를 찔러놓았다. 삽시에 이마에서 빨간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만 겁이 더럭 난 철민이는 우는 정녀의 이마를 부등켜안고 와ㅡ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때 그 상처가 지금도 그녀의 반듯한 이마우에 남아있을줄이야!
철민이가 열네살, 정녀가 열한살 때 성분이 나쁜 정녀네는 어느 산골로 쫓겨갔다. 그후 철민이네도 모아산아래 벌마을에 이사 와서 살게 되였다. 그때 그렇게 헤여지고 오늘이 처음이지만 두 동심에 꼭 박혔던 서로의 모습을 용케도 알아본것이다. 그들은 흉허물없이 정녀가 싸온 점심밥을 나누었다.
아쉬운 작별이였다. 집에 돌아온 철민의 마음은 가라앉을줄 몰랐다. 정녀가 시골의 함박꽃으로 피여서일가?아니면 소꿉시절의《각시》여서일가?불행한 그녀, 억눌린 그 넋에서 발산하는 그 빛은 무엇이였던가?아무튼 유혹은 너무도 컸다. 그녀의 몸에서 철민은 사랑의 오아시스를 분명 보았다.
랑만과 환상속에서 자기를 분장하기를 좋아했던 그는 목가적인 시골의 사랑을 그려보며 그 어떤 비장한 희열을 맛보았다. (기사식의 로맨틱한 사랑, 불행에 허덕이는 처녀를 구원해주는 의로운 기사!얼마나 렵기적인가…) 철민은 마음이 내키는 대로 감정의 준마를 타고 그 막연하면서도 신비로운 록지의 세계를 향해 달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향락주의자는 아니였다. 향락주의가 되여질수 있는 그런 기질은 그에게 없었다. 현실과 장래, 관념과 인습 앞에서 그도 사랑의 저울추를 이리저리 옮겨놓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그것이 또하 불만이였지만,
그러던 어느 날, 철민이한테 정녀와 자기의 운명을 과거와 미래로부터 다시 가늠해 보고 이른바 선량한 사나이의 의로운 책임과 고결한 사랑으로 그녀를 구원해 보려는 용단을 내리게 한 일이 생 겼다. 그때 마을에 하중렬이라는 친구가 반란의 기치를 들고 토황제질을 하고있었는데 못하는짓이 없었다. 어느 하루 마을에 로총각 병구와 지껄이는 소리가 우연히 철민의 귀에 걸렸다.
《야, 로병구, 너 생고기 맛을 볼래?》
《어데 있니?곱니?》
《응, 산골미인이야, 상표 잘 붙지 못해 그렇지 일 잘하구 순박하구…에 또…》
《헌데 성분이 뭐니?괜히…》
《야, 그게 썩어떨어질 주제에…녀잔 고우면 단거야.》
《그렇게 곱니? 어쩐다? 그럼,》
《넌 시키는 서방질이나 하면 돼, 내가 다 방법이 있으니까, 헌데 너 될가? 히히…》
《쳇, 바가지들 맥이면 다된다면서?》
《음, 좋아, 헌데 너 누이동생 우리 처남과 약혼시켜야 해.》
《엉?너네 처남 나그네 아니니?》
《야, 싫으면 그만둬, 리혼자린데 뭘 그래,》
《가만 좀 생각해 보자.》
페병쟁이 색귀라더니 숨쉴 때마다 할딱거리면서도 생각은 굴뚝같은 모양이다. 실로 악착한 하씨의 심보요, 어처구니없는 교역이였다. 그리하여 철민이는 마침내《거룩》한 기사로 등장하기로 맘먹었다. 우선 편지를 썼다.
《…정녀, 이로써 대강 사연을 알렸소. 악덕의 라체가 란무하고 수난의 흉수가 모든것을 삼키려 할 때 정녀는 부디 동류의 처녀들처럼 자기를 학대하지 말고 흥정없는 진실한 감정으로 인생의 상록수를 가꿔가기를 바라오. 중언부언했소. 오해하지 말아주오.》
걱정많은 소꿉동무로부터
따찌야나에게 한 오네긴식의 긴 설교를 늘여놓은 편지를 보낸후 며칠은 그 어떤 성스러움과 거룩한 감정을 짜릿하게 맛보았다. 그러나 또 인차 후회하기도 하였다. 결국은 그녀의 불우한 처지에서 자기의 우월감을 가진것 같기도 하고 그녀의 감정세계에 너무 일찍 뛰여든감도 느꼈던것이다. …
철민은 부끄러운 자기 추억에서 간신히 헤여나왔다. 락조속에 마을이 유정하게, 그리고 쓸쓸하게 안겨왔다. 목에서 겨불내가 났다. 두손으로 샘물을 마구 움켜 마셨다. 그러나 어제날의 물맛이 아니였다. 그의 마음은 그녀의 집 문턱을 언녕 넘어섰고 그녀의 찢어진 마음을 어루쓸고있었다. 거의 같은 시각에 강짜많고 성미가 급한 안해의 충충한 얼굴이 차디차게 마주쳐왔다. (아, 아니다. 역시 오늘도 내가 못갈 집이 되였구나…)
집으로 발길을 돌리는 그의 눈앞에 한성이의 모습이 우렷이 안겨왔다. (그 애가…설마…?)악몽같은 상념에 가슴은 납덩이같이 무거워졌다.
3
철민이가 샘물가에 쓰러질 때 한성이네 모자가 집에 들어섰다.
《예, 오셨다는 선생님은 ?》
《글쎄요, 기다리신다구 하셨는데…》
《한성아, 내 얼른 밥할게, 너 밖에 나가 찾아보렴. 오신분이 설마 그렇게 훌쩍 가버렸겠니?》
《엄마, 그럼 닭이랑 잡고 점심 잘해요. 네? 얼마나 좋은 선생님이라구요.》
《오냐, 자식두, 어련히 하지 않을라구,》
가마에 물을 퍼넣던 그녀는 문득 아들을 불러세웠다.
《예, 한성아, 게섰거라. 그 선생 성씨가 뭐라했던가? 알구나 인사해야지…》
《성철민이예요.》
한성이는 이렇게 외마디를 내뱉고 삽짝문밖으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 얘, 너, 너 뭐라느냐? 성철민?…》
그녀의 손에서 물바가지가 미끌어떨어졌다. 한가득 담겼던 물이 좌르르 소리내며 널장판새로 흘러들었다. 못생긴 과거때문에 슬픔에 절고 전 마음, 악몽같던 전반생을 영영 묻어버리고 살아가려던 그녀의 운명은 또다시 그녀의 여린 가슴을 찢어놓는다. (아이고, 그래 그이란말인가? 어쩌면…) 그녀는 치마폭에 얼굴을 싸안고 흑흑 흐느꼈다.
이윽해서 한성이가 풀이 죽어 들어왔다.
《어머니, 또 우시잖아요? 또 아프세요?》
《응, 오냐,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 선생님은?…》
그녀는 아들의 대답을 바란것이 아니다. 마음은 벌써 흘러간 그 봄날의 샘물가에서 철민이를 부등켜안고 태질하고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알뜰히도 사랑했던 그 남자가 안겨준 꿈같던 그 행복이 남긴 굴욕과 가지가지 경난을 떠올리기 앞서 자기에게 열어준 첫사랑의 세계ㅡ그 신비롭고 소중하던 아름다운 화폭들을 먼저 새겨보았다. 사랑에 불행했던 녀인들은 자기의 슬픈 사랑을 눈물로 절이는 순간에도 추억의 꽃다발만 애써 엮어보는 약점이 있는것이다.
…그날, 그들은 아름다운 동화를 엮듯 동년시절의 꿈을 되살려보았으며 운명에 짓밟힌 처녀의 불행과 현실을 두고 다정한 오누이처럼 속삭였다. 흉허물이 없던 그 시절의 이름을 버릇처럼 부를때마다 정깊은 미소를 짓는 철민이를 몰래 훔쳐보며 (아이, 내게도 저런 힘센 오빠가 있었으면…)하는 절절한 마음이 솟구치기도 했다. 하여 방금 있었던 그 부끄러운 일마저 가뭇없이 잊고 가슴속에서 이름할수 없는 그 무엇이 싹트는 야릇한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며 은실금실을 늘여보았다. 그러나 거의 동시에 자기 인새의 지평선에 놓인 아찔한 낭떠러지와 넘을수 없는 절대경의 험준한 산의 무서운 환영을 확인했다. 동경과 기대, 신뢰에 찾던 얼굴을 머리수건으로 푹 검춰 버렸다…
《정녀, 오늘 정말 기뻤소. 이젠 그만 작별할가? 이제 또 만나게 될거요…》
철민이가 일에 갈라터진 그녀의 손을 꼭 잡아줄 때 정녀는 크고 미더운 그 품에 얼마나 기대고싶었던지 모른다.
정녀는 멀어져가는 철민의 뒤모습을 오래오래 지켜보았다. (미련없이 훌쩍 가버는 사람, 이렇게 헤여지고 다시 아니보면 잊혀질가? 잊으면 내 마음 편할가?) 정녀의 좁은 가슴에서 이름못할 아쉬움이 지꿎게, 얄궂게 수수께끼를 엮고있었다.
이리하여 정녀의 단조롭고 적막하던 마음의 동토대우에서 생의 첫봄이 찾아들었다. 해볕이 마음속에 더 깊기 스며들었고 꽃들이 그녀와 소곤거렸다. 남모를 안타 까움속에 살랑이는 미묘한 정감은 꿈길로 번져갔고 그 꿈이랑은 철민이로부터 펼쳐지고 또 모여왔다. 깨끗하고 말쑥한 얼굴, 정열적이고 선량한 눈길, 날렵해보이는 몸매, 그처럼 특이하게 흡인하던 착한 빛과 그 착함속에서도 은연히 내비치던 일종의 위압감…박우물을 마시고 자란 시골의 처녀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하나의 우상이였다.
바로 그러한 때에 철민에게서 편지가 날아왔다. 가슴이 활랑거렸다. 그녀는 바삐 겉봉을 뜯고 속지를 뽑아들었다.
비록 몇장의 종이이긴 하지만 외롭고 위태로운 자기를 포근히 감싸주는 미더운 품이였고 리해와 지성으로 쌓아올릴 철옹성이기도 한 편지였다. 그녀는 온 마음을 다해 회답을 썼다. 시간과 공간을 날아넘어 길게 뻗어가는 뜨거운 악수와 쩡 메아리치는 심장의 울림을 실은 편지였다. 두번, 세번 날아가는 편지마다 절절한 호소였고 아픈 마음의 속삭임이였으며 눈물에 전 념원이기도 했다.
고난속에서 허덕이며 의욕과 갈망에 타는 이 불쌍한 처녀를 사랑의 신ㅡ아모르는 그렇듯 기이한 힘으로 서서히 철민에게로 떠밀어주었던것이다. 마침내 철민에게서도 뜨거운 마음들이 전해오기 시작하더니 드디여는 열풍으로 정녀를 휩싸버렸다.
어느 날 땅거미질무렵, 정녀가 개울가에서 진빨래를 하다말고 하염없는 우수에 잠겨 속절없는 한숨만 헹구고 앉았는데 소학교에 다니는 동생이 오더니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정녀의 두눈에 별이 떴다.
《응, 그래, 얘, 집에가 암말두 하지마, 알지 응?》
정녀는 바람처럼 날아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철민이가 내뚝에서 기다리고있는것이다. 마침내 다시 만난 그들, 두 넋은 굳게굳게 껴안았다.
《오셨군요, 흑ㅡ보고싶었어요, 전…》
《그래 이렇게 오지 않았소? 나도 정녀때문에 걱정이 많았소. 자, 내 눈물을 닦아주지.》
《절 이렇게 영원히 지켜주세요. 네?》
《정녀, 날 믿어도 좋소. 리해와 성실의 기반우에 세워진 우리의 에덴동산은 무너지지 않을거요.》
멀고 먼 신비의 나라에서 온 성자마냥 거룩해보이던 철민이, 따사로운 손길로 눈물을 씻어주며 그렇듯 경건하게 미래를 축복하는 님의 품속에서 정녀는 사랑보다 높고 귀중한 리해를 받아안았다. 고마움에 목이 메였고 감격에 전률했다.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숨막히는 시각, 정녀는 처음으로 달콤하고 진지한 입맞춤을 받았다. (아이, 숨차…)하면서도 참지 못하는 격정에 그녀도 그런 입맞춤을 주었다. 그리고는 부끄러움에 못이겨 철민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처녀의 순진한 마음으로 무지개같은 고운 행복을 손짓해보는 애정생활의 첫시작에 흔히 있는 첫키스였지만 정녀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성결한 령혼이 입술우에 올리는 혼례였고 사랑의 제단에 바치는 기도였다.
피치못할 그 숙명의 밤이였다. 그렇듯 마음을 감동시키는 흥분의 절정에서 달아오른 두몸은 포개지고 밀착되여버렸다. 영원과 순간, 질풍노도같은 격정을 휘몰아치며 작열하던 철민의 숨결은 신비롭고 몽롱한 애무의 미궁에로 그녀를 실어갔다. 육신에 굽이굽이 감돌아치던 형언할길 없던 감각들…
그 밤을 정녀는 후회하지 않았다. 녀인의 단순한 심리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였다. 자기는 이미 철민의 사람, 살아도 죽어도 그 한사람의 안해가 되여진다고 믿어의 심치않았던것이다. 그만큼 정녀는 청춘의 온 생명을 다해 철민이를 사랑했다.
그러나 운명은 늘 하나의 목표를 향해 일심하는 그런 사람을 우롱하기 좋아했다. 무지개 비꼈던 그 사랑의 호수에 폭푸우가 들이닥쳤다. 파도에 실린 사랑의 쪽배가 사공을 잃었다. 잔인한 심리변태에서 장난질삼아 휘두르는 태씨의 보복의 채찍은 그녀의 집을 무덤으로 만들어놓았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비명횡사했고 그 죄명도 어마어마했다. 그다음 아버지가 강물에 던져진 원혼이 되였다. 원래 빈농의 딸이였던 어머니가 요행 남았다. 그러나 들이닥치는 끔찍한 사변들앞에서 미쳐버렸다. 절망, 비통, 망연자실, 허탈속에서 하나의 믿음은 철민이뿐이였다. 그러나 철민이도 발길을 끊었다. 그런 때 누가 감히 올수 있었으랴,
태씨는 더욱 기승을 부렸고 불난 틈에 도적질하듯 태씨의 누이가 또 페병쟁이와의 혼담을 들이댄다. 그러면서 알아들으라는듯 철민이가 배치를 받고 흑룡강 어데론가 가버렸다고 넌지시 찌른다. 정녀는 앞이 아득했다. 일체가 끝났다.
번개치고 우뢰우는 깊은 밤, 정녀는 샘물가 소나무가지에 환멸의 올가미를 걸었다. (철민씨, 당신도 구원할수 없다면 저는 가렵니다. 나는 당신의 첫안해된 그 마음과 몸을 그대로 안고 갑니다. 부디부디 행복하세요…)
발돋움하며 모지름쓰며 염라국의 문전을 넘으려는 찰나이다. 배속에 뿌리내린 새 생명인 철민의 씨가 별안간 부르르 떨더니 가느다랗게 몸부림을 쳤다. 순간, 옹키고 맺혔던 그 생각, 목숨을 끊어서라도 보복하려던 막생각이 사라지고 강렬한 생의 추구를 주는 신비한 힘이 생겼다. 젊은 녀자의 마음속에 그 무엇보다 강한 모성애가 성큼 올라섰다.
이튿날부터 마을에서 정녀를 볼수 없었다. 마을에서는 의론이 분분했다. 두만강 물에 몸을 던졌다는 설도, 그 건너 제 삼촌을 찾아 도망갔다는 설도…사람을 잡기 일쑤인 패풍이 흙탕물도 오래지 않아 가라앉아버렸다. 해는 여전히 동산에서 솟았고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눈이 왔다.
정녀는 죽지 않았다. 갖은 수모와 굴욕을 길량식으로 삼고 철민이를 찾아 북대황에서 헤매이다가 장백현 두메산골 일가집에서 새 생명의 빛을 뿜어올렸다. 달이 가고 해가 지고…묵은 덤불속에 새싹이 움트는 계절, 걸음마타는 아들을 안고 마을에 들어섰다. 시골에 또 한번 풍운이 일었다. 비난의 돌팔매질, 동정의 눈길, 류언비어…그러나 정녀는 끄떡없이 그 모든것을 견디여냈다. 그녀에게 얼룩진 청춘을 보상해주고 미래를 약속해주는 삶의 기둥인 아들이 있었거늘 슬픔도 괴로움도 다 잊을수 있었다. 아들은 무럭무럭 잘도 자랐고 헴도 빨리 들었다.
마침내 이 땅에 추월춘풍이 불어 정녀의 가슴의 고드름도 녹았다. 진리의 해빛은 암흑을 내쫓고 재난의 광대들을 갈곳으로 보냈다. 따사로운 해빛아래서 정녀도 허리를 폈다. 인민의 진정한 봄이 왔건만 정녀의 사랑의 봄은 한번 가더니 올줄 몰랐다.
4
철민은 실면했다.
방황하는 그의 병든 넋은 밤마다 두만강의 탁류와 함께 흐느꼈다. 다른 일이라면 뉘우침의 고배를 마시고 불안의 꿈이라도 꾸는것이 고작이였으련만 정녀와의 해후는 다시금 뼈저린 참회를 낳았고 그 아픈 심회는 그의 온 생명을 단두대우에 내세웠다. 기억의 창고에서 곰팡이 끼였던 정녀의 마지막 편지(어머니앞으로 보냈던것이다.)가 다시금 피를 뚝뚝 돋히며 펼처진다.
《철민씨, 전 당신을 사랑했고 모든것을 바쳤어요. 그러나 믿으라던 그 품은 지금 어데 있나요? 서러워요. 그러나 안심하세요. 당신 한몸에 리롭다면 슬픔도 고통도 이 찢어진 가슴에 조용히 싸안겠어요. 철민씨에게 바쳤던 그 순정을 여기 샘물가에 묻어요. 언젠가 추억의 발길 닿거든 저를 위해 눈물 두방울만 뿌려주세요. 아, 구천에 가면 당신의 품은 변함이 없을가요? 저는 먼저 갑니다. 거기서 기다리겠어요. 부디 행복하기를…빌어요. 안녕히 계세요.》
그 편지를 받은 이튿 날 철민은 마을을 영영 떠나버렸다. 북만의 마을과 마을에서, 도시와 도시에서 전전하며 교편을 잡다가 마침내는 눈물겨운 이 변강도시에 들어와 다시금 사랑의 죄인으로 정녀앞에 나서게 되였던것이다.
철민이가 번민의 나락속에 깊이 빠져 헤매고있을 때 한성이가 학교로 나왔다.
《한성이, 잘 왔소. 정말 반갑소!》
철민은 밤낮으로 돌아치며 한성에게 정성을 쏟았다. 인습과 관념의 위력앞에서 무릎을 꾼 비겁한 사나이, 너무도 리기적이였던 철민이, 그 자신은 까츄샤에게 속죄하기 위해 경건히 기도하던 네흘류도브가 생각되면서 자신이 가증했지만 그렇게라도 마음의 평형을 찾아야만 했다.
한성이가 드디어 지구 중점고중에로 떠나던 날이다, 철민은 한성이에게 돈 백원을 슬며시 넣어주고 역으로 나가지 않았다. 이렇게밖에 할수 없었다. 역에서는 아직도 젊고 아름답고 가슴속에 념원과 격정이 차넘칠 정녀가 한성이를 바래리라는것을 알았던것이다.
붐비는 플래트홈에서 정녀가 한성이를 바래고있었다. 그러나 철민이가 그려보는 그런 모습이 아니였다. 병색이 푹 배인 가냘픈 시골의 녀인, 눈에서는 류다른 광채를 뿜고있었다. 한성이가 눈물이 글썽해서 말했다.
《어머니, 부디 오래 살아야 해요. 전 꼭 성공하겠어요.》
렬차는 떠나갔다. 인생의 플래트홈, 떠나는 아들을 말없이 바래는 정녀의 가슴속엔 가슴을 저미는 긴 고동소리만 남았다. 다 낡아빠진 기관차가 빈 바곤들을 한데 모으고있었다. 정녀는 자신이 빈 바곤같이 생각되였다. 파란많던 인생의 궤도에서 밀리우고 당기우며 오늘에 이르렀어도 역시 텅빈 가슴이 아닌가…역에서 나온 정녀는 우체통에 편지를 넣고는 곧추 집으로 걸어갔다. 10리 산길이건만 뻐스를 타고싶지 않았다. 들꽃이 피여있는 잔디밭도 있었건만 그녀는 그 모든것이 자기에게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불행과 고통과 비애를 묵묵히 짊어지고 내처 걸으며 힘겹게 찍어가는 그 하나하나의 발자국만이 그녀의 세계였다. 그래 정녀에게 또 무엇이 있을수 있단말인가?
그 이튿 날, 철민이는 두툼한 편지를 받았다. 그는 두만강기슭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었다.
《…철민씨, 원래는 이런 편지를 쓰리라고는 생각못했어요. 인제는 아득히 흘러간 옛이야기, 세월이 흘러가도 더더욱 가슴만 허벼주는 하나의 사연이 있어요. 불행했던 그 사랑의 열매가 오늘 익어서 생명의 찬란한 빛을 뿜어올리게 되였어요. 그가 누구인지 당신은 알겠지요? 애석하게도 그 애에게 축복해주어야 할 유일한 사람, 당신은 그런 용기마저 없었지요? 한성이, 그 애는 나에게 남은 유일한 진실이고 전부입니다.
당신이 찾아오리라는 기대속에 꿈꿀 때 배속에서 꼼질대는 생명, 첫사랑의 선물에 일종의 신비와 감격을 안고 축복했어요. 당신이 저를 버리고 멀리 가신후에도 몸안에서 부드럽게, 때론 급작스레 태동하는 진실한 새 생명은 빼앗긴 그것에 대한 막연한 보상으로, 미래에로 향한 강렬한 힘으로 되여 내 생명의 뿌리를 지켜주었어요. 바로 이것이 그 모진 세월에 죽지 못하고 살아온 원인이랄가요? 세상에서 제일 훌륭하고 착하고 사랑스럽던 당신, 아, 그러나 당신이 그리도 못생긴 아모르일줄을! 그러기에 불행한 녀인의 첫사랑에 대한 애착과 모성애의 성스러움을 영원히 리해할수 없지요?
인류가 생겨서 인간성은 줄곧 피와 눈물속에서 흐느껴왔고 참된 사랑을 위해서 진실로 비장한 대가를 치른 사람도 많지 않다고 당신은 말했지요. 그것이 당신의 말이였던지 어느 책에서 외운 말인지를 전 몰라요. 다만 당신이 아무말없이 떠날 때 눈물을 흘려보았던가 묻고싶어요.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도 추억하지도 않겠어요. 다만 당신이 늘 말하던 그런 사랑과 인간성, 박애를 당신의 아들, 아니 나의 아들에게 베풀어주실것을 바래요.
내 생명의 나무는 너무도 빨리 말라들어서 그 불쌍한 애에게 그늘을 지어줄수 없군요. 별수 있나요? 폭풍속에 떠돌던 일엽편주, 운명의 작간으로 배주인이 그냥 소용돌이속에 처박아두면 그 배는 갈앉기마련이지요. 너무 긴 말씀을 드렸어요. 그럼 부탁합시다. 정녀》
눈물에 얼룩진 편지지들이 락엽처럼 날려 두만강 물결우에 떠내려갔다.
《아아, 못생긴 아모르! 그래 내가 아모르였던가?!…》
산너머 먼 저쪽 고개에 비를 머금은 구름덩이들이 엉켜돌고있었다. 철민은 자기 가슴을 쾅쾅 짓찧었다. 그것은 이른바 눈물의 참회, 통탄으로 이루어진, 홍소를 터뜨리지 못하는 몸부림이였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