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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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상과 회고 댓글:  조회:751  추천:1  2021-03-31
수상과 회고       오늘 "로인세계"잡지사에서 반가운 소식이 왔다. 나의 작품《남도 조상들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이 수상작으로 선정되였으니 4월2일 국제 호텔 3층회의실에서 가지는 수상식에 참석하라는 것이 였다. 정말 생각지도 못하였던 희소식이 였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그 사랑을 못잊어 창작한 수필이 수상 했다고 하니 내심으로 기쁘다. 그리고 편집선생님들의  수고에 감사를 드린다.       공직생활을 하면서 나는 여러가지 상을 수상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내가 쓴 글이 수상된적은 이번을 포함하여   도합 세번 이다.          첫번째는 지난 세기 80년대 초반 연변일중을 다닐 때 쓴 작문이였다. 그때 쓴 작문의 제목이《나는 중국사람이다》라는 것이였다. 아마 우리또래 친구들은 본적이 있을것이다. 그때 나는 어느 잡지에서  길홍창장군의 이야기를 다룬 문장을 보게 되다. 1931년,항일지사 길홍창장군은 장개석의 핍박에 의하여 하야 하여 외국으로 《실업고찰》에 나서게 되였다. 배가 미국에 도착하여 길홍창장군은  생각지도  못한 련이은 강한 자극을 받게 되였다. 미국의 상등 호텔에서는 중국사람이라고 받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일본사람들에 대하여서는 신처럼 높이 받들어 모시는 것이 였다. 한번은 장군이  옷가지를 넣은 소포를 우편으로 국내에 보내게 되였는데 우정국 직원이 중국을 모른다고 하였다. 배동하여 갔던 사람이 장군하고 " 당신이 일본사람이라고 말했더면 례우를 받았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에 길홍창장군이 당장에서"당신은 중국사람이여서 얼굴이 없다고 하지만 나는 중국사람이 된것이 영광스럽다"고 하며 호되게  꾸짓었다.        어느 하루 길홍창장군이 정결한 군복차림으로 뉴욕의 거리를 걷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고의적으로 길을 막고"당신은 일본 사람이요?"하고 물어 왔다. 그러자 장군은  "아니요. 나는 중국사람이요"라고 당당하게 대답하였다.  대방은 "중국사람은 동아 병부인데 어찌 당신과 같은 웅장한 체구의 군인이 있을수 있소?"라며 시비를 걸었다. 이에 장군은 매우 분개해 하였다. 제국주의 자들이 중국인에 대한 기시에 항의하고 민족의 존엄을 지키기 위하여 장군은 거주처로 돌아온후 약 반자길이의 표식을  만들었는데 그위에는 붓으로 "나는 중국사람이다"라고 한자로 쓰고 아래에 또한 영어로 표기하였다. 그뒤로 매번 거리에 나갈때면 장군은 이표식을 달고 사람들 사이로 활개치며 다니였다. 장군의 이러한 행동은 중국사람을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되고 또 국격을 지켜나가려는 그의 절개를 남김없이 보여 주었다.      이 문장을 보면서 고중생인 나의 가슴에는 뜨거운 피가 끓어 넘쳤다. 그래 중국사람으로 태여난것이 무슨 죄란 말인가. 구사회에서 나라가 약하니 장군도 국외에 나가 기시 당하는것이 아닌가. 우리는 하루 빨리 현대화를 실현하여 국력을 키워야 한다. 나라가 강해야 우리들도 외국 사람들의 기시를 받지 않고 당당하게 살수 있다. 이런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자 나는 단연 필을 들게 되였다. 어린 나이에 조국에 대한 격정과 사랑으로 작문을 단숨에 써내려갔다.         그해 나의 이 작문은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주관하는 《중학생작문선》에 올라 수상을 하게 되였는데  반도체라지오와 조선문으로 된 세계명작 여러권을 선물로 받았다. 그날 출판사선생님들을 모시고 식사를 하게되였는데 내 일생에서 처음으로 참석한 연회석이 였다.        두번째로 상을 타게 된것은 지난해 가을《청년생활》응모작 《장마당 련정》이다. 근년에 나는 시간나는 대로 수필을 적어 조글로에 올리였다. 고중을 졸업하고 나서 기본상 조선문으로 문장을 적어 본적이 없어 수필을 쓰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표기법이 아리숭한데 어느것이 준확한지 머리를 설레일 때가 많았다.  2018년 가을에 조선글로 된 문장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점점 줄어드는 우리글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생각해서라도 우리글의 명맥을 이어가야 겠다는 사명감 같은것이 나를 핍박하였다. 글의 질은 점차 올리기로 하고 일단 문장쓰기에 돌입 했다. 짬이 나면 쓰고 고치고 역사에 역사를 다 했다. 그때 친구가 한국재외동포문학상에 도전해보라고 했다. 하여 나는 이왕에 적었던 아버지의 이야기을 소재로 하여 수필을 써 나갔다. 수필이 마무리 될즈음  나는 일단 문학을 전공한 선생한테 부탁하여 의견을 들었다. 그런데 선생님애 말씀하기로 나의 직업현황을 봐서 이런 문장은 부적절하다고 귀띄움해 주었다. 하여 잠시 아버지 이야기를 접고  어머니에 대한 수필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쓴 수필이 《장마당 련정》이다. 어려서 어머니 꽁무니 따라 다니던 동시장의 정경이 훤히 떠올랐다. 다문 한푼이라도 더 만들려고 정심식사도 거르시던 어머니모습이 떠올랐다. 어느 한번 나는 어머니의 일손을 돕는다며  자전거에 살구한광주리 싣고 장에 나갔다. 어머니와 나는 진종일 서로 대방을 찿노라 헤매였다. 그 따거운 장터에서 어머니를 만난 순간 나는 기쁨에 앞서  저주부터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한마디 나무람하지 않고 자리를 찿아 장을 보았다. 그것이 다 누구를 위하여서 일까. 당신한테는 한푼의 돈도 쪼개여 쓰면서 오직 자식들의 공부 뒤바라지에 허리 휘여간 우리 어머니가 아니였던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어머니 그땐 진짜로 철없었습니다. 미안 합니다. 지금도 장에 나가 로인들이 쭈크리고 채소를 파는 장면을 보면 저도 몰래  어머니 생각이 난다. 추운데 오돌오돌 떨며 밖에서 장보는 노인들을 보면 나는 측은한 마음에  필요 이상으로 채소를 사가지고 들어 온다.       글이 마무리되자 《청년생활》잡지에 기고 하였는데 글쎄 년말에 금상을 받게 되였다. 나는 너무도 기뻐 어쩔줄  몰랐다. 나도 자기를 알고 있다. 수필에 아직 미흡한 점이 많다. 편집선생님들의 반복되는 수개를 거쳐온 작품이라 또한 감사의 마음 금할길 없다.        세번째 상을 타게 된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남도 조상들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다. 《 장마당 련정》을 끝내고 나서 나는 다시 아버지의 이야기를 수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될수록이면 민감한 상황은 피면하고 순수한 가정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좋다는 판단에서 였다.        사람은 다 자기가 나서 자란 고향이 있다. 고향이란 그 어느 고장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그 동네의 사람들의 대 집성이라 하겠다. 그래서 동년을 보낸 고향에 대하여 사람들은 잊지 못한다. 고향이라고 하면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님 동생들과 한가마밥을 먹던 정든 고향집 풋풋한 사람내음이 풍기는 동네방네 어느 하나 빠질수 없다. 나의 아버지는 18세에 고향을 떠나 만주에 들어와 별라별 고생을 다 하였고 다시는 고향땅을 밟아보지 못했다. 아버지의 인생은 너무도 고생많은 인생이 였다. 해방군에 입대하여 장춘,무한 해방 전투에 참가하였고 항미원조에도 참가하였다. 전쟁뒤로 조선은 분단되였고 다시 고향에 돌아갈수 없게 되였다. 내가 어릴때 아버지는 전쟁 이야기를 곧잘하시였다. 꿈에서도 콩 복듯한 기관총소리에 잠을 깬다고 했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단순 남도 어느 한사람의 이야기 만이 아니다. 이민 1세로 중국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의 집합 이다. 하지만 또 우리 아버지의 이야기는 당신만의 이야기 이기도 하다. 친인 한분도  없는 중국땅에서 고향생각인들 얼마나 했으며 친인인들을 얼마나 그리워 했을가. 아버지가 돌아가신지도 30여년이 지난 2019 년 아버지의 고향땅을 밟은 나의 심정은 심히 격동되였다. 고향집 여기 저기서 나는 마치 아버지의 자취를 찿아 볼수 있을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비록 아버지는 생전에 귀향을 실현 못하였지만 우리 세대들이 그 혈육의 정을 영원히 이어갈것이다. 하여 오늘도 남도 조상과 그 후손들의 이야기는 수많은 강들이 모여서 주야장천 바다로 흘러가듯 쉼없이 엮어지고 있다.      남들이 보기에 내가 수상한 글들은 별거 아닐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소중한것 들이다. 세번의 수상은 어느정도 나의 습작에 대한 고무격려라고 본다. 이를 계기로 하여 더 좋은 글을 써낼것을 다짐한다.    
1    새봄이 온다 댓글:  조회:889  추천:0  2020-05-06
새봄이 온다       본격적으로 봄이 다가 오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다. 한낮이 되면 기온이  상승하여 지붕위에 쌓였던 눈이 녹아 흘러 내린다. 금년에 들어서 연변에는 유달리 눈이 많이 내리였다. 내린다 하면 폭설이고 폭설이 왔다하면 길이 막혀버린다. 제설작업은 밤에 낮을 이어 간다. 방금 눈을 실어 내간지 얼마 안되였는데 또 큰 눈이 내린다. 3월에 들어서서도 폭설이 여러번 대지를 강타하였다.          저 멀리 보이는 룡정의 마안산은 흰눈에 덮히여 마치 고원지대의 산봉오리 같은데 윤곽이 더욱 선명하고 더욱 웅장하게 보인다.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의 동창은 옛날 짜리로씨아군대가 저기를 지나 룡정에 진입했다고 나에게 알려 주었다.  계절은 계절인지라 적설은 오래가지 못하고 녹아버린다. 하지만 골목길이나 음달진곳의 눈은 인츰 녹지 않는다.        남방에서 사업하는 친구들은 위챗을 통하여 봄소식을 알리는 사진들을 많이 보여 준다. 얼마전 저멀리 광주에 꽃이 피였다더니 요지음은 가흥에 벗꽃이 만개하였다는 소식도 반갑게 전해 온다. 지리에 박식한 서기는 이제 얼마 안되면 벗꽃전선이 북상할거라며 우리에게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주었다. 시시각각 봄 소식을 보내주는 친구들이 있음으로하여 마음속에는 언녕 새봄이 찿아 왔다. 나는 봄을 타는 스타일인가 보다. 북경에 사업하는 교수님은  목난꽃이 피였다며 이쁜 사진들을 올리고 산동 위해에서 사업하는 선배님은 살구꽃사진과 곁들어 봄소식을 전해 왔다.       내가  봄을 좋아하는것은 새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한겨울의 추위가 물러가고 얼었던 대지가 기지개를 켜고 씨앗들이 뿌리내리는 봄철은 사람들로하여금 희망과 기쁨을 안겨준다.      몇해전의  일이다. 남들은 바다 넘어 일본에 벗꽃구경을 간다고 야단 할때 우리부부는 청명휴가를 리용하여 호북성소재지 무한을 찿아 떠났다. 무한대학교정의 벗꽃은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무한대학에가서 벗꽃을 즐기고 오리라 .        무한도착 이튿날 아침 우리는 일찍이 기상하여 무한대학거리에 나섰다. 교정에는 아름드리 벗꽃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처음 보는 벗꽃이라 신기하기도 하였다. 화사한 벗꽃들이 가지에 가득 피여 있는데 좀체로 나무가지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때에야 연분홍색 벗꽃도 있다는것을 알았다. 시기로는 조금 늦게 왔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그것이 무슨 대수랴!       봄은 자연에만 있는것이 아니다. 사람들 마음속에도 봄이 간직되여 있다. 코로나19로 역경을 겪던 우리가 얼마나 봄이 오기를 고대했던가. 그봄이란 자연의 봄이라는 범주를 벗어나 새희망과 새생활을 동경하는 마음속의 봄이였다. 험난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사람들은 시종 희망과 신심을 버리지 않았다. 집에 있는 기간 리용가능한 모든 도구를 리용하여 신체단련을 견지하였고 또 마음의 조절도 하였다.      이제 봄이 왔다. 코로나도 점점 물러가고 있다. 두팔을 벌려 새봄을 맞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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