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룡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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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자식농사 하나 둘 셋 댓글:  조회:3421  추천:153  2008-04-26
[수필] 자식농사 하나 둘 셋 강룡운 전 연변일보사 사장   하나 지난 청명에 부모님산소에 가 성묘하고 돌아온지 며칠 안되였는데 연길시 장백로 길 량켠에 벌써 화사한 복사꽃들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컴퓨터에서 묵은 일기장을 열어보았더니 작년에는 4월 20일에 개화, 그러니까 올해는 작년보다 열흘이나 앞당긴 셈이였다. 고대 그리스의 한 철학가는 사람은 똑같은 강물에 두번 들어설수 없다는 수수꺼끼 같은 천고의 명언으로 사물의 끊임없는 변화야말로 깨뜨릴수 없는 만고의 철칙임을 설파한바 있다. 세월도 흐르는 강물처럼 해마다 지나간 세월을 똑 같이  복사해 내는게 아니였다. 금년 개화기가 작년보다 열흘이나 앞당겼으니 말이다. 활짝핀 환한 웃음으로 오고가는 행인들에게 정다운 미소를 선사하는 복숭아꽃을 바라보고있노라면 저도모르게 너무나 귀에 익은 옛노래가 가슴속에서 메아리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바로 이거였다. 먼옛날부터 우리네 조상들은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가   피여나는 산촌마을에 모여살면서 꽃피는 봄이 오면 밭을 갈고 씨뿌리면서 한해 농사를 시작했고 농사를 지어 의식주의 모든 걱정거리들을 하나하나 풀어가면서 우로는 부모님 모시고 아래로는 자식들을 키우면서 대를 이어 세세손손 민족의 혈맥을 이어왔던것이다. 자급자족의 농경사회에서 농사는 천하지대본이라 농사보다 더 큰 일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인지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자식을 낳아 키우는 일을 농사에 비유하면서 자식농사란 낱말을 곧잘 사용해왔던것이다. 청명에 부모님 산소에 다녀오면서도 자식농사 얘기가 흘러나왔다. "우리 시아버지 시어머니는 정말 자식농사를 잘 하셨어요. 자식 셋에 대학생 둘…그래도 제사밥을 차려주는 자식은 당신 하나밖에 없지만서도…" 안해의 이 말에 그 어떤 미묘한 뉘앙스가 깔려있었지만 그래도 내 귀에는 그냥 듣기 좋은 칭찬의 소리로  들려왔다. 안해의 말처럼 나의 부모님은 평생 어렵게 살면서도 두 아들을 모두 대학생으로 키워내신 존경스러운 분들이였다. 형님은 일찍 대학을 졸업하고 북경에 배치받아 거기서 근 50년을 살다보니 부모님산소를 두세번밖에 찾아오지 못하였고 녀동생은 출가외인이라 부모님 생전에 두분을 모신것도 나와 안해의 몫이였고 세상을 뜨신후에는 지금까지 20여년간 청명과 추석이면 꼭꼭 성묘하러 다니면서 가토하고 벌초하는것도 역시 자연스레 우리의 몫이 되였다. 옛날사람들은 자식이 불효하면 너의 집에 가서는 제사밥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겠다고 한바탕 야단을 쳤다고 하는데 옛사람들의 표준으로 말하면 해마다 꼬박꼬박 성묘하러 다니는  둘째 아들놈이 있음으로해서 나의 부모님의 자식농사는  헛되지 않았다고 말할수 있으리라.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하지 않는가.   둘 로씨아의 대문호 고리끼가 말했듯이 모든 비유는 다 일정한 제한성이 있기마련이다. 농작물을 재배하는 농사와 자녀양육을 뜻하는 자식농사란 이 두가지 일은 비슷한 일면이 있으면서도 엄연히 다른 점이 더 많다. 농사는 농절기를 잘 맞춰 좋은 종자를 골라서 되도록이면 밑거름을 많이 주고 제때에 파종하고 제때에 기음매고 후치질해주어 충족한 일광과 충분한 수분만  보장해주면 무럭무럭 잘 자랄수있므로 만풍년을 기약할수 있는것이다. 그러나 자식농사는 이런 밭농사나 벼농사와는 달리 그저 잘 먹이고 잘 입혀서 건실하게  잘 키우는것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인간이란 이 생명체는 다른 동식물과는 많이 다르다. 사람도 일종의 동물이긴 하지만 사회적동물이기때문에 자식을 낳아서 그저 몸뚱아리만 멀쩡하게 키워서는  잘 키웠다고 말할수 없는것이다. 모택동의 말을 빈다면 지덕체가 겸비하고 전면발전한 인간만이 나라와 인민에게 유익한 인간으로 될수 있다는것이다. 그래서 자식농사가 그 어떤 다른 농사보다 엄청 힘들다는것이고 세상에서 제일 부모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것이 바로  자식농사라는 말도 있는것이다. 자식농사가 얼마나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였으면 천군만마를 통솔하여 외래침략자와 800만 국민당군대를 물리치고 새중국을 일떠세운 중국력사상 절세의 민족영웅 모택동주석도 전쟁에서 잃은 둘째동생 모택민렬사의 아들 모원신을 수양해 키우면서 어찌하여 그애를 자신의 뜻대로 잘 키울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하였겠는가! 내가 대학을 다니던 1964년 여름이였다. 어느날 우리는 모택동주석께서 당시 할빈군사공정학원 원장직을 겸임하고있던 라서경(罗瑞卿)총참모장을 불러 그때 그 학교에서 공부하고있는 모원신에 대한 교육문제를 놓고 두분이 나눈 담화록을 내부문건으로 전달받고 학습한적이 있었다. 모주석은 그 담화록에서 모원신과 같은 렬사의 자녀도 혁명적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옳바른 혁명적세계관을 확립하지 못하면 앞으로 꼭 훌륭한 후계자가 된다고 장담할수 없다고 하시면서 그애가 장차 우파만 되지 않아도 천만다행이라고까지 말씀하시였던것이다. 그때 우리는 모주석의 말씀을 듣고 잘 리해할수 없었는데 그후의 력사는 모주석께서 하신 걱정이 결코 기우가 아니였음을 립증해주었던것이다.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바로 이 모원신이 자신의 특수한 신분을 리용하여 연변에 기여들어와 주덕해를 타도하고 당의 민족정책을 말살하며 림표, 강청등 반혁명집단의 악당이 되여 이름하여 “동북의 태상황”이라는 자리에까지 기여오르지 않았던가? 자식농사에 있어서도 중국 신민주주의혁명에서처럼 “최저강령”과 “최고강령”이 있는것이다. 그 “최저강령”은 자식을 낳았으면 아들이든 딸이든 절대로 나라와 인민에게 해만 끼치는 그런 애물단지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것이고 그 “최고강령”은 자기의 자식을 나라와 인민에게 유익한 인간으로 잘 키워야한다는것이다.   중국 신문화운동의 기수였던 로신선생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장래가 걱정되어 특이한 유언 하나를 남기시였다. 그는 자신의 신변에서 맴돌며 좌익문학을 한답시고 빈말만 늘여놓기 좋아하는 그런 “문학가”들이 가증스러워 그때까지 아직 어린애였던 아들 주해영(周海婴)에게 장차 커서 성인이 되거들랑 제발 빈말만 하기 좋아하는  그따위 “문학가”는 되지 말라고 간곡히 당부하였던것이다.  셋 지금 우리 옆집에는 십대 소녀가 홀로 살고있다. 엄마, 아빠는 모두 한국에 돈벌러나가고 그들이 돈을 벌어다가 사놓은 아파트에서 그애 혼자 밥을 해먹으며 학교에 다닌다. 어떤 날에는 제때에 깨워주는 어른이 곁에 없어 늦잠을 잤는지 오전 아홉시가 넘어서야 택시를 잡아타고 학교로 가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운다. 구체적인 집계는 보지 못했지만 학교에 가보면 아직도 엄마, 아빠곁에서 한참 응석을 부려야 할 어린 나이에 엄마, 아빠와 멀리 떨어져 외롭게 살고있는 아이들이 엄마, 아빠와 함께 살고있는 아이들보다 훨씬 더 많다고 한다. 어린 자식을 고향에 남겨놓고 돈벌러 떠나간 사람들은 거의 다 한결같이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서, 아이들이 멀지 않아 대학에 가게되면 그들의 공부뒤바라지를 잘 해주기 위해서 막무가내로 애들을 떼여놓고 돈벌러나간다고 하소연한다. 하지만 부모가 곁에서 지켜주지 못하는 어떤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에 굶주리다가못해 나쁜 친구를 사귀게 되고  이렇게 저렇게 저도모르는 사이에 탈선하거나 범죄에 길에 들어서게 되여 대학에 가기도 전에 감방으로 가는 사례가 비일비재라고 한다. 부모가 곁에 없는 아이들 가운데는 공부엔 전혀 관심이 없고 밤과 낮이 따로 없이 컴퓨터게임에 빠져들어 학업은 아예 포기한채 방황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사춘기의 예민한 시기에 미디어를 통해 너무 때이르게 포르노를 접하게 되여 범죄의 길에 들어선 아이들도 있다고 한다. 그애들의 엄마, 아빠가 이제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왔다고한들 그애들의 앞날에 그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부모와 떨어져있는 아이들만 불행한게 아니다. 부모가 곁에 있어도 불행한 아이들이 있다. 일자무식인 문맹은 아니지만 신문 한장, 책 한페지도 들여다보기 싫어하는 그런 위인들이 자기는 학교문을 나선후 평생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면서도 아이들 보고는 공부를 잘 하라고 마구잡이로 닥달을 한다고 해서 어느 애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주겠는가? 애비 에미는 웃방에서 손님들과 마작판을 벌려놓고 밤잠도 자지 않으며 도박을 놀면서 어처구니없이 아이들은 텔레비도 보지 말고 공부에만 집중하라고 윽박지른다고 해서 어느 애가 그 말을 고스란히 들어주겠는가? 밭에서 자라는 곡식도 해볕과 수분만 충족하면 잘 자라는게 아니다. 반드시 농부의 땀방울을 먹어야 제대로 잘 자란다. 기음을 매서 잡초를 뽑아주어야 하고 후치질해서 송토도 하고 배토도 해주어야 잘 자란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이들도 피자나 햄버거를 맘대로 먹을수 있다거나 용돈을 물쓰듯이 맘대로 쓸수 있다고 해서 다 행복하게  잘 자라는게 아니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의 사랑을 먹어야 잘 자랄수 있고 엄마, 아빠를 인생의 첫번째 스승으로 간주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잘 따라주어야 비로소 올곧게 잘 자랄수 있는것이다. 학교교육이나 사회교육도 가정교육을 떠나서는 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한다. 요컨대 자식농사의 진정한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는게 아닐가? (2008년 4월 15일)  주: 2008년 4월 25일 연변일보 B2 해란강 제1315기에 1/2삭제본으로 발표  
12    마작과 도박(강룡운) 댓글:  조회:3582  추천:142  2008-02-24
수필 마작과 도박 강룡운 《사해(辞海)》라는 사전을 펼쳐보면 마작은 마장(麻将)이라 하고 작패(雀牌)라고도 하는데 일종의 도박놀음(博戏)이라고 풀이하고있다. 한어에서 마작(麻雀)은 참새를 뜻하는 낱말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마작이 이 놀음의 공식적인 명칭으로 되였을까? 마작의 어원은 이 놀음의 모체가 되는 마조(马吊)라는 놀이에서부터 온것인데 처음엔 종이로 만든 지패(纸牌)를 가지고 놀던것이 후에는 물소의 뼈에 대나무로 안을 댄 골패(骨牌)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골패를 섞을 때면 마치 대나무숲에서 시끄럽게 지저귀는 참새떼와 같은 소리가 난다고 해서 마작이란 이름이 붙여지게 되였다는것이다. 지금도 일본에서 마작놀이로 돈벌이를 하는 놀이방의 간판을 살펴보면  한결같이  참새 “작(雀)”자가 씌여진 외글자 한자간판들이 눈확에 안겨온다. 마작도 일종의 문화이다. 로신과 진독수와 더불어 중국 신문화운동의 선구자의 한 사람이였던  호적(胡适)선생은 일찍 여러 나라 국민들의 특수한 기호를 살펴보고 영국의 국기(国技)는 크리켓(cricket板球)이고 미국의 국기는 야구이고 일본의 국기는 스모(相扑)라고 하면서 중국의 국기는 마작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지금 우리 나라 13억 인구중 10억이 마작을 논다는 조금은 과장된 얘기가 나도는걸 보면 국기라는 말이 과연 적중한 용어인것 같기도 하다. 해방전에도 우리나라에서는 마작이 많이 류행되였다고 한다. 흔히는 관가에서 한자리 한다 하는 벼슬아치나 부자들의 전용물이였고 상류사회의 교제도구인 동시에 도박도구였다. 해방후 당과 정부에서는  도박에 물젖은 사람들의 악습을 고치게 하기 위해 1953년 이전에는 마작놀이를 금지시키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1954년 이후에 당에서 로동과 휴식을 결부시켜야 한다는 원칙을 창도하면서부터 마작에 대한 금기(禁忌)도 풀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방이나 부대의 구락부 등 장소에 오락도구로서의 마작이 다시 나타나게 되였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내가 처음으로 마작을 만져본것도 바로 그 시기였던것 같다. 우리 집에는 토지개혁때 부자집을 청산하고 나누어준 네모난 정사각형 마작상이 하나 있었는데 우리는 그걸 밥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내가 초중을 다닐 무렵, 아버지 직장친구들이 우리집에 와서 그 네모상에 마주 앉아 속칭 “조선마장”이라는 놀음을 노는걸 몇번 목격하였는데 나는 그들의 곁에 앉아 호기심에 찬 눈길로 눈여겨 보았지만 그때는 그 게임의 룰(rule, 규칙, 규정)을 도무지 터득할수가 없었다. 그때 아버지 친구들은 성냥개비를 나누어 가지고 한판이 끝날 때마다 몇 개비씩 주고 받았고 놀음을 다 마치면 서로 성냥개비를 헤여보면서 누가 더 잘하고 못하는가를 따져보았고 술 한잔 나누며 환담을 하다가 헤여지기가 일쑤였다. 말하자면 휴식의 한때를 보내는 오락이였을뿐 돈내기를 하는 도박은 아니였다. 그러다가 반우파투쟁이며 대약진이며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자주 자취를 감추는듯 했던 마작이 다시 나의 눈앞에 나타난것은 대동란이 결속된 1976년의 마가을이였다. 내가 근무하던 안도방직공장에는 자치주 여러분야에서 지도일군으로 일하다가 문화대혁명때 농촌에 쫓겨나가 몇년간 “재교육”을 받고 안도방직공장에 배치되여온 간부들이 많았는데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자 그들은 휴일이면 모여앉아 또다시 마작을 놀기 시작했다. 동란의 년대에 “주자파(走资派)”의 감투를 쓰고 혼쭐이 난 그들인지라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백주대낮에도 창문에 커텐이나 모포를 치고 마작판을 벌리였는데 나는 한달가량 남몰래 그들을 쫓아다니며 견학을 하고 실습을 하여 차츰 그 대오의 일원으로 되여버렸다. 이 놀음이 어찌나 재밌던지 금방 배웠을 때 나는 몇번이나 밤을 지새운적도 있었다. 내가 마작을 배운걸 보고 배워달라고 조르는 친구들이 많아지자 나는 아예 내가 배운 리론과 실전경험을 결부하여 이른바 《조선마장 입문(入门)》이라는 “교과서”를 집필했었는데 그것이 수사본으로 전해지면서 꽤나 인기가 있었다. 그때도 마작은 그저 일종의 오락이였으며 플라스틱쪼각으로 만든 가짜 “돈”으로 성냥개비를 대체하여 서로 주고받으면서 옛날 우리 아버지네처럼 승부를 겨루었을뿐 돈내기를 하는 도박은 아니였다. 그런데 최근 도시와 농촌 어디라 없이 도처에서 펼쳐지는 마작판을 살펴보면 진짜 돈이 오고가는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옛날엔 성냥개비나 플라스틱쪼각으로 만든 가짜 ”돈”을 주고받으면서도  재미있게 놀수 있었건만 지금은 어디서나 거의 다 돈내기를 하고있다. 심지어  정년이 되여 직장에서 물러난 늙은이들마저 적어도 “10전내기” 마작을 놀고있는데 기실 “10전내기”도 필경은 돈내기이므로 제창할바는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도 도박이라고 마구 몽둥이를 휘둘러서도 안될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각자로 하여금 보다 “책임성”있게 게임에 참여함으로써 좀 더  재미있게 놀려고 10전짜리 잔돈이나마  주고받는것이지 결코 돈을 따기 위해서가 아니기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사회의 어둑시그레한 구석의 “밀실”이나 “별장”같은 곳에서 개별적인 도박군들이 법망의 감시를 피해 다니면서 몇 천원 지어 몇 만원이 오고가는 도박판을 벌이고있다고 한다. 그러면 오락과 도박의 구별점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나는 그 구별점이 바로 마작을 노는 목적성과 출발점에 있다고 본다. 휴식할줄 모르는 사람은 일할줄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혁명의 성지 연안의 움집에서 중국혁명을 승리에로 이끌기 위해 불후의 혁명적경전저서들을 집필하던 나날에 모택동주석께서도 머리를 좀 쉬우려고 가끔 신변의 일군들과 어울려 마작을 놀았다는 일화가 있다. 마작은 유구한 문화를 자랑하는 중국인들의 하나의 발명품이며 그속엔 중국의 문화가 녹아있고 중국인들의 지혜가 배여있다. 가령 모주석께서 마작을 전혀 모르는 문외한이였다면 마작에서 유래된 “청일색(清一色)”과 같은 그런 생동한 언어들을 그처럼 지혜롭게 구사할수 있었겠는가! 마작을 배우고 노는게 문제가 아니다. 단순히 재미로 여가를 보내거나 오락으로 친구나 동료들끼리 친분을 다지거나 일터에서 물러난 로인들이 소일거리로 마작을 논다면 그건 구태여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도박은 금물이다. 그저 재미삼아 노는 오락이 아니고 서로 남의 돈주머니를 겨냥해서 노는 마작이라면 그건 분명 도박이다. 바늘도적이 소도적이 된다는 속담이 있다. “10전내기’하던 사람이 결코 “10원내기”, “100원내기”를 안 한다는 법은 없다. 목적성과 출발점이 변하고 오고가는 돈의 량적변화가 질적변화를 초래한다면 오늘저녁 놀이군이 래일아침에 도박군으로 될수도 있다는게 오늘 우리가 몸 담그고있는 현실이다. 누구나 경각(警觉)의 탕개를 단단히 조이지 않으면 자신도 걷잡을수 없이 천길 나락에 굴러 떨어질수도 있다는 얘기다. 사람은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가 하고픈 일을 무엇이나 다 하면서 살아갈수는 없다. 국가의 법규에 위배되고 사회의 도덕적기준에 어긋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는 일이라면 아무리 하고픈 일이라도 억제하고 자제할줄 알아야 한다. 마작은 즐기면서도 도박은 절대 하지 않는것, 이것도 역시 자기자신을 스스로 단속할줄 아는 자제력이 수요된다. 그리고 “완물상지(玩物丧志)”라는 말이 있듯이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줄 모른다고 놀음에 지나치게 빠져들면 가슴속에 품었던 큰뜻도 상실하기 십상이라는 고훈(古训)도 명심해야 할바이다. 세상 만사가 다 마작처럼 이중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어떤 일에서나 그것의 적극적인 일면은 리용하고 소극적인 일면은 극복해 나갈줄 아는것이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참다운 삶의 지혜가 아니겠는가!   (2008년 2월 22일 《연변일보》B2《해란강》1307기에 일부 삭제된후 발표)  
11    례식장의 이채로운 풍경 (강룡운11) 댓글:  조회:3332  추천:139  2007-09-20
[수필] 례식장의 이채로운 풍경 강룡운 연변일보사 전임 사장   나의 한 동창생은 딸애가 나이 서른이 많이 넘도록 시집갈 궁리라곤 전혀 하지를 않는것 같아 늘 걱정을 입에 달고  다니였는데 그러던 그한테서 드디어 사위를 삼는다는 희소식이 전해왔다. 그도 그럴것이 손아래인 남동생이 먼저 장가를 가서 언녕 손주까지 안겨주었는데 맏이로 태여난 녀식한테서는 종시 감감무소식이였으니 부모의 마음이 왜 다급해나지 않았겠는가? 나는 동창생의 전화를 받고 약속한 시간에 약속된 장소인 성보빌딩 7층 례식장에 당도하여 사위를 둘러보며 대기하고있는데 때마침 6층에서 7층으로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계단식승강기)에서는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 하지 않고 이 순간에도 뜨거운 키스를 주고받기에 여념이 없는 한쌍의 신랑 신부가 눈에 띄였다. 아무리 개방된 시대라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연변에서는 보기 드문 이채로운 풍경이 아닐수 없었다. 게다가 사람들의 이목을 확 끄당기는것은 웨딩드레스로 곱게 단장한 신부는 우리와 똑 같은 동방인인데 반해 양복차림의 신랑은 파아란 눈동자의 서방인이라는것이였다. 알고보니 이들 국제커플(情侣)이 바로 이날 7층 례식장의 주인공이였고 나의 동창생은 미국인 사위를 삼게 된다는것이였다. 자식을 낳았으면 곱게곱게 키워서 공부뒤바라지를 다 해주고 사회에 진출시켜 시집장가까지 보내주어야 부모된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하는것이 우리의 전통관념이다. 그러나 서방에서는 아들이든 딸이든 18세까지만 키워놓으면 부모된 책임을 다했다고 간주하면서 자기의 인생은 자기가 알아서 살아가라고하는게 우리 동방인들과는 색다른 그네들의 전통관념이다. 자녀에 대한 이 한가지 태도만 보더라도 동방과 서방은 그 문화적전통이 너무나 거리가 멀어서 한데 어울리기는 힘들다는것이 옛날 우리들의 생각이였다. 그러나 인제는 동서방이 한데 어울려 지구촌이라는 이 한동네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돼버렸으니 미우나 고우나 다같이 더불어 살아가야만 하는것이 오늘 우리의 눈앞에 다가온 외면할수 없는 현실이다. 이날 결혼하는 신부는 일본에 류학갔다가 일본에서 취직해 현재 일본 체류중인 중국조선족처녀 최송설이였고 신랑은 미국에서 일본 도꾜에 와서 파견근무를 하고있는 미국인 총각 아담스였는데 이들 두사람은 어찌어찌하여 인연이 닿아 도꾜라는 이 국제대도회지에서 서로 만나 연애를 하게 되였고 드디어 결혼에까지 골인하게 되였다는것이였다. 이날 결혼식은 완전히 우리 연변의 조선족혼례식으로 진행되였다. 신랑 신부의 부모가 자리를 마주하고 앉아 지켜보는 가운데 신랑 신부가 맞절을 하고 결혼선물을 주고받았으며 신랑 신부가 큰상을 받은 다음 바가지를 던져 첫 아이는 아들을 낳을것이냐 딸을 낳을것이냐 하고 점을 쳐보면서 하객들의 축복과 웃음을 자아내는  그런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다름아닌 우리 연변의 조선족혼례식 그 자체였다. 신랑측에서는 대양 건너 미국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론 누나와 녀동생, 그리고 신랑의 두 프랑스 친구가 참석하였고 신부측에서는 연변에 있는 일가친척은 물론 신부가 일본에서 근무하고있는 일본회사의 일본인 사장님까지 하객으로 오시였다. 연변의 조선족가수가 불러대는 우리의 노래가락에 맞춰 신부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일가친척들, 신랑의 아버지, 어머니, 누나와 녀동생 그리고 프랑스인, 일본인 하객들마저 서로 스스럼없이 손에 손잡고 한데 어울려 둥실둥실 춤을 추는 그 축제의 분위기는 이날의 결혼식을 말그대로 국제대화합의 장으로 만들었다. 이날의 결혼식은 연변조선족사회자의 사회하에 우리 말로 우리의 흥겨운 노래가락을 곁들이면서 진행되였다. 식순에 따라 신부의 아버지가 일가친척을 대표하여 사돈님일가와 래빈들에 대한 환영사가 있었고 미국에서 온 신랑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설을 하는 재미있는 장면도 연출되였다. 신랑의 아버지는 통역을 통해 자기가 얘기할 차례임을 확인하고는 부랴부랴 두 따님이 앉아있는 테이블에 다가가 가방에서 “연설문”을 찾아들고는 아주 여유로운 자세로 마이크를 잡았다.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나는 도통 알아들을수 없었건만 그가 연설을 마치고 인사를 하자 장내에서는 박수갈채가 터져나왔다. 바로 이때 사화자가 내뱉는  말 한마디가 퍼그나  유머스러웠다. "참 미국과 사돈을 맺는 집안이 다르긴 다름니다. 나는 한마디도 알아 듣지 못했는데  이집 친척들은 통역을 안해줘도 벌써 다 알아듣고 박수를 쳤습니다." 사회자의 재기넘치는 이 한마디로 하여 장내에서는 또다시 일장 박장대소가 터져나왔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신랑의 아버지가 이미 얘기를 하였으면 그 가정을 다 대표했다고 말할수도 있을것인데 그들은 그게 아니였다. 신랑의 어머니도 이미 “연설문”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녀는 마이크를 잡기에 앞서 먼저 미리 준비해 온 행주치마를 앞에 두르면서 진지하게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통역을 통해 알게된 것이였지만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한 말씀이였다. ---내 아들 아담스는 내가 이 행주치마를 입고 지어준 밥을 먹으면서 어렸을 때에는 엄마라는 이성(异性)의 품속에서 엄마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왔다. 아들이 다 자라서 이미 성인이 되였으니 이제 곧바로 나의 품을 떠나 또 다른 하나의 이성인 안해의 품속으로 가게 된다. 아들에게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쁜 안해가 생겼으니 나는 그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복한다… 신랑의 어머니는 이야기를 마치면서 손수 가위를 잡고 입고있던 행주치마의 끈을 한 토막 잘라내여 며느리의 두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고는 이제 내아들은 너의 남편이 되였으니 이 끈으로 아담스를 단단히 동여매놓으라고 당부하는것이였다. 아닌게 아니라 그 내용과 형식이 모두 우리와는 판이한 모습이였다. 이날 결혼식 진행도중 신랑과 신부는 큰상을 다 받고난 다음 갱의실에 들어가서 웨딩드레스와 양복을 벗고 우리 조선민족의 전통의상인 한복을 갈아입고 테이블마다 다니며 하객들에게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파아란 눈동자의 키다리 신랑이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은 그 모양새가 조금은 우습강스럽기도 하였지만 우리 민족의 풍속습관을 존중해주는 그 갸륵한 모습이 참 대견스러워 보였다. 안해가 고우면 처가집 말뚝에도 절을 한다고 하지 않는가! 신랑 아담스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 연변의 조선족처녀 최송설을 자기네 며느리로 맞아들이는데 대해 시종 매우 흡족해 하는 기색이였고 연변의 조선족혼례식의 이채로운 분위기에 경이로움과 감탄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였다.  나는 이날 혼례식에 참석하고 나서 우리의 민족언어와 풍속습관이 얼마나 소중한것인가를 다시 한번 맘속 깊숙히 되새기게 되였다. 만약 150여년전부터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와 이땅에 뿌리 내린 우리 조선족이 지금까지 자신의 언어문자와 전통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계승발전시키지 않았다면 어떻게 오늘처럼 이럴듯 떳떳한 민족공동체로서 세인들의 주목과 찬사를 받을수 있었겠는가? 세상이 많이 변해가고있다. 옛날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 시절에는 이 마을 총각이 당나귀 타고 저 마을에 건너가 새색시를 가마에 앉혀가지고  돌아와 백년가약을 맺는게 고작이였는데 지금은 이웃나라도 아닌 대양 건너 다른 대륙간의 혼사가 비일비재로 이루어지고있으니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대경사가 아닐수 없다. 나에게도 노란 머리 미국인과 결혼한 조카딸이 있고 중국의 한족과 결혼한 조카딸도 있다. 세상물정에 밝은 나의 형님도 딸애들의 타민족, 타국인과의 혼인이 마뜩지 않아 사위감을 문전박대한적도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다 부질없는 일이였다.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는 말이 이제는 그저 가볍게 해보는 빈말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속에 깊숙히 파고들어와 자리잡기 시작한 어쩔수 없는 현실이다. 얼마전에 일본으로 시집간 나의 외조카딸도 일본인 신랑을 데리고 연길에 와서 작년 단오날에 태여난 아들 소우조우마사시(宗象将司)의 첫돌생일을 굉장히 쇠여주고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그들 세식구가 모두 우리 민족의 한복을 차려입고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이 누가 뭐래도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였다. 최송설과 아담스, 그리고 마사시일가가 모두 우리 민족의 멋진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과 비디오는 앞으로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길이 남아 그들의 평생을 환하게 빛내여갈것이다. 세상이 너무 빨리들 변해간다고 걱정을랑 삼가하자. 우리 민족이 생존하는 공간이 이처럼 드넓게 펼쳐지고있으니 우리 민족이 립지도 그만큼 더 넓어지는게 아닌가? 나는 가끔 이런 생뚱같은 생각을 머리속에 굴려본다. 2007년 9월 1일 연변일보 6면(문학)에 발표( 일부삭제)  
10    전단과 약품광고 (강룡운10) 댓글:  조회:3006  추천:123  2007-05-24
전단과 약품광고                                         강룡운  나처럼 나이 지긋한 사람들에게 전단(传单)이라고 말하면 먼저 뇌리에 떠오르는것이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선전삐라나 비밀유인물들이다. 이를테면 고리끼의 장편소설 <<어머니>>에서 빠벨의 어머니가 혁명에 투신한 아들이 짜리경찰들에게 붙잡혀가자 아들을 대신하여 공장으로 가져가던 그 선전삐라, 그리고 한일합방후 항일투사들이 일제침략자들의 삼엄한 경계망을 피해가면서 도처에 내붙이던 <<타도!제국주의>>와 같은 그런 비밀유인물 말이다.중한수교가 이루어져 한국나들이를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전단이란것이 꼭 정치투쟁의 수단으로만 쓰이는것이 아니고 상품마케팅수단으로도 쓰인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였다.지하철입구를 지날라치면 손에 인쇄물을 들고있는 할머니와 아줌마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단을 나눠주는 광경을 자주 목격했는데 하루 스케쥴을 마치고 호텔방에 돌아와 낮에 받아서 보관했던 전단들을 펼쳐보면 대개는 은행대출광고나 중소기업들의 신제품광고같은것들이 많았다. 잠간 공무로 한국에 체류하다가 곧 중국으로 돌아갈 나에게 그런 전단들은 아무런 소용도 없는 무용지물들이라 그냥 휴지통에 넣어버리기가 일쑤였다.상품경제는 아마 광고마케팅과 함께 동반성장하는 모양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연길시의 길거리에도 전단을 나눠주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였고 해마다 그 대오가 늘어나는 추세다.작년 음력설에 프랑스에서 석사공부를 하고있는 둘째아들놈이 2년만에 집에 놀러와서, 그애랑 함께 시내로 나갔다가 하남시장앞에서 전단을 나눠주는 사람들과 맞띄우게 되였다. 그들이 내게도 손을 내밀었다. 나는 시끄러워 되도록이면 그들을 피하가려고 애썼다. 그런데 아들놈은 그 전단들을 하나하나 받아쥐더니 집에 돌아와서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아버지, 후에라도 사람들이 전단을 나눠주면 받아주세요. 아버지 둘째아들도 프랑스에서 그런 일을 해봤습니다. 전단을 나눠주는데 그걸 받아주지 않으면 얼마나 기분이 상하는지 아세요?!>>그애가 프랑스로 건너간 이듬해 여름방학이였다고 한다. 아르바이트자리를 얻으려고 빠리시내를 헤매고 다니면서 돈 한푼 더 벌기 위해 전단을 배포하는 일을 해보았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류학하는데 1년에 대략 6000유로(인민페로 약 6만원)가 수요되는데 평생 월급쟁이로만 살아온 나로서는 기껏해야 2000유로밖에 보내주지 못하는 형편이다보니 나머지는 스스로 벌어야만 힘겹게나마 공부를 계속할수 있는 상황이였던것이다.집에 있을 땐 고생이라곤 전혀 해보지 못한 녀석이지만 이역만리 타국땅에서 방학마다 이런 저런 고생들을 해보면서 어려운 사람들의 고통을 헤아릴줄 알게 되었고 전단을 나눠주는 사람들의 아픔마저 배려할줄 알게 된 모양이였다. 사실 길거리에서 전단을 배포하는 사람들중에는 농촌에서 올라와 아직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도 있을것이고 도시의 실직자도 있을것이며 나의 아들놈처럼 아르바이트 하는 대학생들도 있을것이고 아이들의 공부뒤바라지를 해주기 위해 얼마 안되는 푼돈벌이에 나선 사람들도 있을것이다.내가 알고있는 한 친구도 이런 대오에 있는 사람이다. “문화대혁명”때 장춘공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회사가 합자기업으로 넘어가면서 직원들을 많이 줄이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였는데 타의에 의해 다른 동료들과 함께 한달에 400원이 되나마나한 생활비를 받으며 정년을 많이 앞둔채 퇴직하게 되였다. 그 돈으로는 도저히 생계를 유지하고 자식을 공부시키기 어려웠던 그 친구는 60고개를 바라보는 나이에 하는수 없이 길가에 나와 전단광고나 벼룩신문을 배포하는 일에 나서게 되였다. 얼마전에 알게 된 소식이지만 그는 불행하게도 페암에 걸렸다고 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엄창난 치료비용을 감당할수 없는 상황인지라 아예 치료를 포기한채 집에 앉아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고있다는것이였다.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수 없다.길가에 나와 전단을 배포하는 사람들이 큰돈을 벌수 없다는건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여름엔 삼복더위에 비지땀을 벌벌 흘리고 겨울엔 엄동의 혹한속에서 추위에 덜덜 떨면서도 전단을 나눠주는 사람들은 다른 일자리를 찾지 못하여 마지못해 이런 일거리라도 찾아나선 사람들일것이다.아들놈이 다녀간후 나는 광명거리와 인민로가 교차하는 네거리길목에서 신약대약방 “청혈팔미캡슐(清血八味胶囊)” 전단을 나눠주는 한 아즘마에게 하루에 이런 전단을 얼마나 배포하며 그 대가로 돈은 또 얼마나 받느냐고 물어본적 있다.<<1000장을 나눠주면 20원을 받는데 하루종일 서있어도 한 1200장이 나가나마나 합니다. 2000장이 나간 날은 거의 없었습니다.>>지금 연길시의 길거리에서 배포되고있는 전단들에는 약품광고가 유난히 많다. 가짜 약품광고가 하도 많아 나를 포함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약품광고에 거부감을 가지고 전단을 나눠줘도 받아쥐기를 꺼려하는 실정이다.그러나 돌이켜보면 가짜 약품광고가 밉더라도 그런 전단을 나눠주는 사람들을 미워할 일은 아니다. 그들은 사회의 약자군체들이며 그저 호구지책으로 그런 일에 종사할뿐이다. 그들은 가짜약품과  그 광고내용과는 무관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뒤에는 광고주들이 있다. 큰돈을 벌어도 그들이 벌고 망해도 그들이 망한다.약품광고내용들이 아무리 허황하고 가짜라 할지라도 길거리에서 전단을 나눠주는 사람들은 탓하지 말자. 그들은 그저 입에 풀칠하기 위해 그런 전단을 배포할뿐이다. 한장이라도 더 많이 배포하면 그들은 적은 일당이나마 받아 푼돈이나마 손에 쥐게 될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전단을 나눠주면 나처럼 피해 다니지 말고 사회의 약자를 돕는다는 마음으로 흔쾌히 받아주자. 받아쥐고 돌아서서 가짜광고로 치부하고 아예 들여다보지 않아도 좋다. 그냥 휴지통에 집어넣어도 좋다. 거창하게 사랑의 손길을 웨치지는 못하더라도 그저 어려운 사람이 내미는 손을 잡는 심정으로 나눠주는 전단을 받아주면 되는것이다. 둘째아들놈이 정중히 나에게 권고하던 그 말 한마디를 다시 한번 되뇌여본다.<<전단을 나눠주면 받아주세요!>>2007년 4월 24일 길림신문(A3 문학)
9    [수필] 얼음낚시 하는 사람들 (강룡운9) 댓글:  조회:3602  추천:130  2007-03-09
                           얼음낚시 하는 사람들                                                        강룡운                                       조양천쪽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강바람에 소대가리도 얼어터진다는 대소한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길 부르하통하 빙판우에선  얼음낚시군들의 겨울낚시가 한창이다.  하남다리를 지나다니면서 다리 량켠을 아래우로 둘러보면 하얀, 노란, 빨간, 파란색 텐트들이 알록달록 옹기종기 주런이 널려져 있는 모습이 마치 한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마냥  예전엔 연길에서 볼수 없었던 겨울풍경을 연출하고있다.     몇해전엔 겨울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차를 타고 멀리 오도저수지쪽에 가 얼음낚시를 했었는데 연길시에 부르하통하 다단계 물막이땜이 건설되면서부터 낚시군들은 멀리 가지않고도 집 가까이에서 얼음낚시를 즐길수 있게 됐다.     이곳 연길 얼음낚시군들의 모습을 스케치해 보려고 컴퓨터속에 있는  지난 겨울 을 펼쳐보았다.   ......     2003년 12월 25일 목요일 구름 많음     오늘은 크리스마스. 며칠전까지만해도  겨울답지 않게 따스하던 날씨가 갑작스레 추워졌다.  오후 3시, 산책하려 강뚝에 나가보니 이 추운 날씨에도 낚시군들이 강추위를 피해 언몸을 텐트속에 감추고 얼음낚시를 하고있었다.  내가 산책하는 구간에만해도 낚시군들이 쳐놓은 텐트가  28개나 눈에 띄였다...     2004년 1월 2일 금요일 흐림     오늘은 신년련휴 두번째 날. 강에는 얼음낚시군들이 전에 없이 많아졌다. 하남다리 서쪽엔 낚시군들의 텐트가 10개, 하남다리와 연동교 사이에는 34개, 연동교 동쪽에는 16개...  하루에 적어도 60여명 낚시군들이 얼음낚시에 투신하고있는 셈이다...     2004년  1월 25일 토요일 맑음     오늘은 음력 정월 초사흘. 음력설련휴기간인데도 강심 빙판우에는 얼음낚시군들의 텐트가 14개나 있었다. 저 사람들은 어찌하여 저렇게 낚시에 미쳐서 설명절도 쇠지 않고 빙판우에서 고생을  찾아 하고있을가?  나는 돈을 주면서 하라고 해도 이 추위속에서 저 고생을 찾아 하지는 않을텐데...     ......     나는 나 자신의 건강을 챙기기 위해 올겨울에도 지난 겨울처럼 매일 한시간씩 강뚝에서 산책을 한다. 그리고 여전히 일기를 쓴다.     올겨울에 쓴 "일기책"을 읽어보면 얼음낚시에 "미친" 낚시군들이 지난 겨울보다 더 많아진것 같다. 하남다리 서쪽켠만 봐도 어림짐작으로 하루에 적어도 크고 작은 텐트들이 30개는 넘어 보인다.  나는 날마다  낚시군들이 또 얼마나 출동했는가를 알아보기나 하려는듯  빙판에 널려있는 텐트들을 하나하나씩 세여본다.     나도 어렸을 땐 낚시를 많이 좋아했고 그래서 한때는 "강태공"이란 별칭까지 붙여지기도 했었지만 겨울낚시는 한번도 못해봤다. 그래서 겨울낚시가 얼마나 재미있고 또 얼마나 고생스러운지 모른다.     어느날,  강뚝산책길에서 중학교 때 나와 절친한 사이였던 한 동창생을 만나 그한테 물어보았더니 겨울낚시는 몹씨 고생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무척 재미있다고 했다. 그가 처음 얼음낚시와 인연을 맺게된것은  그 무슨 심심풀이나 재미에서가 아니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일장의 비장한 생존투쟁이였으며 무가내하의 선택이였다고 했다. 그의 얼음낚시엔 도대체 무슨 기막힌 사연이 깃들어 있길래 이토록 심각하게 얘기하는것일가? 나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     퍼구나 오래전의 일이였다고 한다. 연변농기공장에서 근무하던 그는 공장이 조업중단상태에 들어가게되자 이태동안이나 낚시를 해서 생활고를 이겨나가게되였는데 공장 출근이 불가능해지고 생활비마저 끊기게 된 상황에서 위로는 로모를 모셔야하고  아래로는 두 아들애의 공부 뒤바라지를 책임져야 하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는 휴일 때만 즐겨오던  낚시를 부득블 생업의 수단으로 삼게 되였다는것이였다. 나로서는 금시초문이여서 놀라지않을수 없었다.  글쎄 바다가도 아닌, 또 큰 호수나 큰 강에 근접해있는 곳도 아닌 연길에 살면서 낚시로 잡은 물고기를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는것이 도통 믿겨지지 않는 일이였지만 이것은 분명 엄연한 사실이였음을 나는 그 공장에서 그와 같이 일하던 다른 한 동창생을 통해 확인할수 있었다.    그는 처음엔 부르하통하를 따라 오르내리며 강에서 낚시를 해보다가 몇마리 잡히지 않는 그 물고 기를 팔아선 도저히 돈이 되지 않으므로 입장료를 내면서 저수지 낚시를 시작했다고 한다.  무슨일이든 꾸준히 하고 열심히 하다보면 미립이 생기는 법. 그의 낚시질도 차츰 미립이 트면서 날씨가 나빠 빈손으로 돌아오는 날도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남들보다 고기를 많이 낚는 편이여서 그날그날 잡은 물고기를 팔아서 겨우겨우 밥을 먹고 살았다는것이였다. 물론 추운 겨울에도 생계를 위해선  얼음낚시를 해야만 했고 1년 사계절 쉬임없이 낚시대를 들고 다녔으니 그가 겪은 고생인들 오죽하였으랴만 그때 그시절을 회고하는 그의 표정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모진 시련을 이겨낸 굳센 의지의 소유자들의 얼굴에서나 찾아볼수 있는 그런 특유의 표정이였다고나 할가.      낚시는 원래 우리 인류가 머나먼 유년시기 석기시대로부터 장악해온 일종의 생존수단였다. 그러나 력사의 흐름속에서 인간의 생활에 차츰 여유가 생겨나면서부터 일부 한가한 부류의 사람들 그리고 세상과 멀리하고 살아가려는 은둔자들이 낚시를  한적한 생활의 소일거리로 삼기도 했지만 후날  적지않은 사람들은 낚시를 숨가뿐 일상에서 벗어나 심신의 안정을 찾거나 여가생활을 즐겨보려는 레저의 일종으로 탈바꿈시키기도 했다.       오늘 연길시의 얼음낚시군들을 두루 살펴보면 거개가 생계형낚시군은  아니고 심심풀이삼아 재미로 낚시하는 사람이 더 많은것 같다.      "이놈이 녀편네가 인제는 돈도 안 보내고 전화도 안 친다. 한국에서 다른 놈하고 같이 산단다. 그래서 이렇게 홀애비 신세가 됐는데 아이가 학교에 간 다음 집에서 혼자 뭘 하겠니?..."      "도박을 놀자니 돈이 없고, 책을 보자니 공부할 대가리가 아니고,  또 텔레비를 보자니 재밌는게 별로 없고..."      "그 마작판에 가면 그저 매캐한 담배 연기만 나는데 여기 이 얼음판에만 나오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공기도 시원하고..."      "할일은 없고 놀기도 심심한데 어떻게 시간을 보내겠니? 맨날 앉아 마작을 놀아봤자 돈이나 잃고 허리가 쑤셔나지만 그래도 낚시질하면 몸도 안 아프고 병원에 가서 약 사먹는 돈도 절약하니 이거야말로 꽁먹고 알먹기지... "      얼음낚시군들의 곁을 지나다니면서 귀동냥으로 주어들은 얘기들이다.      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인해 일자리 잃은 사람이 많아지고 해외로무송출인원이 증가되면서 안해는 해외로 나가 돈벌이 하고 남편이 집을 지키면서 아이를 키우는 가정이 점점 많아진 이 시점에서 그들이 하는 얘기는 모두 외면할수 없는 현실이고 또한 오늘 연변의 적지않은 가정의 현주소임은 틀림없다.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의 련속극이다. 사람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한생을 살아가면서 여러차례 선택의 기로에 서게된다.  진학할 때 학교와 전공분야를 선택하는것도 선택이고 취업할 때 직장과  직종을 선택하는것도 선택이며, 연애할 때 애인을 선택하는것도 선택이고 결혼할 때 배우자를 선택하는것도 선택이다. 기업이 조업중단했거나 일자리를 잃었을 때 삶의 용기를 잃고 자포자기 하느냐  아니면 새로운 생업수단을 찾아 새롭게 거듭나느냐도 선택이고, 날마다 빈들빈들 놀기만 하느냐  아니면 몇푼짜리 일거리라도 찾아 열심히 살아가느냐도 선택이며, 밥술만 떨어지면  마작판에 나가 담배연기만 마시느냐  아니면 시원한 강변에 나와 맑은 공기를 마시며 얼음낚시라도 하느냐  하는 이런 모든것이 다 일종의 선택이다. 선택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두말할것 없이 인생드라마에서  승자가 되려면 이와같이 선택도 중요하지만 그와 동시에 무슨 일이든 해내고 말겠다는 집착과 온갖 어려움도 참고 견디는 그런 의지력과 노력이 더욱 중요하다. 한겨울 엄동설한속에서 매서운 강바람을 맞으며 옷속까지 파고드는 혹한도 감내하면서 얼음낚시하는 그런 강인한 의지와 억센 투지, 그리고 언제 물릴지도 모르는 그 미지의 물고기를 기다리면서 강추위도 참고 견뎌내는 그런 집착과 인내심이 있다면 이 세상에서 못해낼 일이 어디 있으며 또 이루지 못할 꿈이  어디 있겠는가?      선택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고 의지와 노력에 따라 성공여부가 결정된다.      나는 강뚝에서 산책하면서 얼음낚시군들의 텐트를 볼 때마다 부질없이 이런 생각을 하군 한다. 2005년 3월 18일 제1232기
8    [수필] 생일파티 (강룡운8) 댓글:  조회:3099  추천:103  2007-02-28
생일파티 강룡운     한 가정에서 그 누구나를 막론하고 어느 한 식구의 생일이 되면 으레 평소보다 조금이라도 색다른 음식을 차려놓고   명절을 맞은듯한 즐거운 기분으로 서로 축하해주고 축복해주는것이 우리 민족의 오래된 미풍량속이다. 어린애가 태여나서 백일이 되면 백일잔치요 한돐이 되면 첫돐생일이라 부모된 사람들이 희망에 부플어 큰 잔치를 베풀기도 하고, 인생 만년에 접어든 로인들에겐 회갑잔치요 칠순잔치라 이름하여 자식된 사람들이 부모님께 효성을 바치는 이벤트가 진행되기도 한다. 내가 어렸을 땐 가정형편이 어려워 생일을 어떻게 쇠였던지 특별한 기억이 따로 없다. 그저 생일이 되면 어머니께서는 생진둥이가 아직은 어린애일지라도 꼭 밥 한그릇 따로 떠주면서 그 속에 삶은 닭알 한알을 묻어주던것이 아마 최대의 배려였던것 같다. 성인이 되여 결혼한후에는 안해가 명심해서 나의 생일을 챙겨주어 집식구들끼리 조용히 기념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친척들이 나의 생일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어는 문화대혁명시절 우리 아버지가 혁명의 대상이 되여 투쟁을 받고 있을 때 우리 집과는 거의 발길을 끊었던 친척들도 나의 생일에 찾아오는것이였다. 그것이 아마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내가 자치주인민정부 판공실 부주임으로 발탁된 그 후부터였다고 생각된다. 친척들이 모여와 술잔을 기울이며 회포도 나누고 축복해주는것이 사람 사는 모습이며 인지상정이라 생각되여 기분이 별로 나쁘지 않았다. 오는 정 가는 정, 미운 정 고운 정이 얽히고 설키여 더블어 함께 살아가는것이 바로 우리네 인간이 아닌가. 그 당시만해도 내가 주정부판공실 요직에 있다는것이 일부 친인척들에게는 그 어떤 유혹이였을지도 모른다. 한해 이태가 지나면서 친인척들한테서 "인사청탁"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로는 자식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주고싶어 찾아오는것이 많았다. 가문에서 일어나는 경조사때마다 서로 얼굴을 맞대야하는게 친인척인데 어느날 누가 무슨 부탁을 하여왔다고 하여 갑자기 "나 몰라요"하고 외면할수도 없는것이 또한 친인척 사이의 난감한 립장이라서 나는 진퇴량난의 궁지에 몰리게되는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도움을 청했다가 이런 저런 사정으로 하여 도움을 받지 못할 경우 친척들한테서 욕사발이 쏟아져나오기도 했지만 정책에 위배되지 않는 일이면  나는 내나름대로 연줄을 놓아가며 몇몇 친인척집 아이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줌으로써 그들의 인생궤적을 달리 해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야속하다고는 말할수 없지만 아이들의 일자리가 해결되고 또 내가 권력과는 좀 거리가 멀다고 할수있는 신문사로 자리를 옮겨가자 나의 생일에 다시 찾아오지 않는 친인척들도 더러 있었다. 이 역시 인간세상 염량세태---사람들이 살아가는 또 하나의 다른 모습이 아니겠는가! 지금은 생일을 쇠는 모습들도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 친척들 생일축하모임에 참가하면 직접 집으로 찾아갈 때가 많았는데 최근 몇년사이에는 고급식당이나 고급호텔에 초대받아 갈 때가 더 많다. 얼마전에 나는 한 친척집 생일파티에 참가하려 세기호텔 6층 특실에 가보았다. 고급료리로 푸짐하게 두상을 차렸는데 파티가 끝날 무렵 그집 자식들이 두상에 돈 천원이 훨씬 넘어 들었다고 하면서 령수증을 챙겨가는것이 눈에 띄였다. 설마 누가 그걸 갖고가 손님접대용지출이랍시고 령수증 처리를 하는건 아니겠지만… 어느 땐가 한번은 아들놈들한테서 걸려온 "어머니의 생신을 축하합니다"하는 전화를 내가 받은적이 있었다. 그애들은 나더러 "오늘은 엄마한테 맛있는 음식을 사드리고 두분 모두 즐겁게 잘 보내세요."라고 부탁하는것이였다. 그날 저녁 나는 안해와 같이 분위기 괜찮은 식당으로 찾아갔다. 거기서 나는 안해가 즐기는 료리 몇가지를 청해놓고 단촐하지만 둘이서 와인잔을 부딪치며 오붓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데 그 곁방 특실에서는 대규모 생일파티가 성황리에 거행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용히 진행되던것이 술이 몇 순배가 지나가는가 싶더니 너도 나도 뒤질세라 자리를 차고 일어나 "국장님의 생신을 진심으로 축합니다"라는 소리가 이어졌고 나중에는 술기운이 솟구쳐 올라와 흥분상태에 진입하는듯 싶더니 문화대혁명때 귀에 익은 "영원히 건강하옵소서"하는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마지막에는 "만수건강하옵소서"하는 축원의 환성까지 터져나오는것이였다. 물론 농담조로 하는 "홍색 유머"들이겠지만 이렇게 함부로 "영원히 건강하옵소서"와 "만수무강하옵소서"를 란발하고도 무사태평한 세상이 되였으니 이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인가. 그날 국장님의 생일파티는 1차로 끝이 나지 아니하고 2차로 이어지는듯 싶었다. 다들 술이 거나해서 떠들썩하며 식당문을 나서면서 서로 주고받는 얘기들을 들으면 3차 4차까지 이어질지도 모를 일이였다. 그날 저녁 국장님의 생일파티 령수증은 누가 갖고가서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궁금하지도 않다. 후에 나는 어느 신문에서 그 국장님이 또 승진했다는 소식을 보면서 그 양반이 진짜 해야 할 큰 인물이 아닌가 하고 부질없는 생각도 해보았다. 만약 그 양반이 좀 더 무거운 중책을 걸머지게 된다면 혹시 만방에 인덕을 베플어 해야할 큰 재목이 아닌지 누가 알겠는가? 공산당원 선진성교육이 여러차례 거듭되고 있으니 예전에 그런식으로 공금을 갉아먹던 사람들도 인제는 크게 각성하고 그 고약한 나쁜 버릇들을 언녕 다 고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여기까지 쓰고보니 나는 내가 자치주 기관에서 근무할 때 겪었던 영원히 잊을수 없는  이야기 하나를 꼭  글로 남겨야 하겠다. 어느날 퇴근할 무렵이였다, 우리 자치주의 주요책임자의 한분이시였던 어르신이 퇴근길에 나의 사무실에 들리시여 래일은 개인사정이 좀 있어서 집무실에 나오지 못할것 같으니 딱 하루만 결근하겠다는것이였다. 종래로 이런 경우가 없었는데 뭔가 좀 이상한데가 있는것 같았다. 이튿날 출근한후 나는 그 어르신께서 승용차를 타고 외출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았고 또 이틀전에 그의 두 아드님이 항공편으로 연길에 도착했다는 정보도 입수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나는 추론과 추측을 거듭하며 혹시 이 어르신이 남몰래 회갑잔치를 치르는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되였다. 그래서 나는 능청스럽게 모든것을 다 알고 있기나 한것처럼 그 분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마침 생각대로 그분이 아니고 부인이 전화를 받았다 "녜, 안녕하십니까! 그런데 오늘 행사는 몇시에 시작하기로했습니까?"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무작정 이렇게 물었다. "아, 녜! 난 또 누구라구… 열시에 시작하기로했습니다." 그 부인은 내가 이미 모든걸 다 알고있다고 믿었던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곧이곧대로 알려주는것이였다. 열시가 넘어서 나는 판공실부주임과 함께 그분의 댁으로 찾아갔다. 아니나다를가 두 어르신께서는 이미 회갑상을 받고 계셨다. 그 시절에는 벌써 회갑잔치를 차리기만 하면 몇백명 하객이 줄지어 문전성시를 이루고 하루사이에 몇만원 수입을 올렸다는 사례도 있었지만 이날 회갑잔치의 주인공은 자기의 부하일군들로부터 옛동료들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채 자택의 비좁은 방안에서 그저 친인척들끼리만 모여앉아 조촐하게 회갑잔치를 치루고 있었던것이다. 우리가 좀 달리 생각해보자. 만약 이 어르신이 이렇게 하지않았다면 하객이 그저 몇백 명뿐이였겠는가?… 아무리 세월이 변하고 시대가 달라진다고해도 이렇게 시종일관 입당할 때의 약속을 맘속 깊이 굳건히 지키면서 아름다운 황혼을 불태우고 빛내이는 공산당원들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공산당원들이 점점 적어지는게 못내 아쉽다. 2007년 제3기 장백산
7    40년전 "나의 장정" 댓글:  조회:3477  추천:100  2007-02-21
금년은 중국공농홍군 장정 승리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새중국의 서광을 비껴준 이 위대한 승리를 기념하여 CCTV에서는 여러가지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지난 5월초부터 "나의 장정(我的长征)"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다. 유명한 TV프로그램 사회자인 최영원(崔永元)이 직접 기획하고 진행하고있는 이 프로그램이 첫방송을 시작하기 전후하여 CCTV 뉴스채널에서는 1남1녀,  1로1소가 출연하는 "나의 장정" 홍보물을 련일 방송했다. 손녀애가 묻는 말 : "할아버지, 최아저씨들이랑 장정을 간다는데 그들은 어째서 장정을 가는가요?" 할아버지가 하시는 말씀 :  "신앙을 위해서란다." 이제 겨우 대여섯살밖에 안돼보이는 나어린 녀자애가  "신앙을 위해서"라는 할아버지 그 말씀의 참뜻을 다 리해할수는 없겠지만 나는 그 신앙이 무엇인가를 알것만 같다. 왜냐하면 지금으로부터40년전, 대학 5학년에 재학중이던 나도 신앙을 위하여 "나의 장정"을 해보았기때문이다.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어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어느 고급간부의 집에서 흘러나온듯한 "내부간행"으로된 미국의 저명한 기자 에드거 스노가 쓴 《중국의 붉은 별》(한어문 책명은 《西行漫记》)이란 책과 그의 부인이였던 헬렌 포스더 스노가 쓴 《서행만기속편(续西行漫记)》이란 책을 읽게 되였다. 20세기 30년대 중반  미국의 나젊은 기자 부부가 선후로 생사를 무릅쓰고 첩첩 난관을 꿰뚫고 혁명의 성지 연안에 들어가 모택동, 주덕, 주은래, 장문천, 팽덕회등 중국공농홍군 2만 5천리 장정의 통솔자들을 직접 인터뷰하여 써낸 이 책들은 그 당시에 홍군 장정 승리의 소식을 서방세계에 널리 알리면서 온 세상을 들썽하게 만들었던 책들이다. 이 두권의 책은 20세기 60년대 중반 "문화대혁명"의 풍랑속에 몸을 담근 20대 열혈청년의 가슴을 더없이 뜨겁게 달구었다. 나는 한 친구한테서 이 책들을  빌려다가 가만히 밤을 새워가며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홍군의 발자취를 더듬어 2만5천리 장정의 길을 다시 한번 걸어보고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였다. 나로말하면 이것이 아마 그해 11월 하순에 이루어진 "나의 장정"의 최초의 발단이 되였던것 같다. 그때는 "문화대혁명"의 충격으로 학업이 완전히 중단된 상태였으므로 우리는 학교에 머물러 있어도 할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북경에서 남하하여 강서성 서금으로 내려가 홍군의 장정로정을 따라 연안을 향해 대장정을 해보려고 시도했었다. 그런데 그 동란의 년대에 우리는 몇달 앞으로 다가온  졸업을 앞두고 딱히 어느때 졸업할수있는지 그 누구에게서도 확답을 받을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우리가 그때 그 로선을 따라 장정을 시도했다면 연안으로 채 가기도 전에 중도에서 일단 귀교하여 복학하라는 지시가 내려올수도 있기때문에 그 장정은 중도이페될수밖에 없을것이 불보듯 뻔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보다 실시가능한 방안을 모색하던중,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고 장정의 간난신고도 체험하고 혁명의 성지 연안에도 가 볼수 있는 방안으로 북경에서 연안까지의 "장정"을 단행하기로 작심했던것이다. 1966년 11월 하순, 그해 마가을도 다 가고 락엽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하는 초겨울에 나는 한학급 동창생들인 림장춘, 장철수, 주청일과 함께 넷이서 "장정대"를 무어 이불짐을 둘러메고 무작정 북경을 출발하여 연안을 향해 "나의 장정"을 시작했다. 세상 만사가 다 시작이 어렵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나의 장정"도 첫번째  한 주일이 제일 힘들었던것 같다. 매일 아침 날이 희붐히 밝아오면 우리는 아무리 일어나기 싫어도 피곤이 채 가시지 않은 몸을 가까스로 추스리고 일어나 서둘러 이불짐을 동여매야했고 그것을 짐바로 등에 짊어지고는 아침식사를 하기도 전에 하루의 강행군을 시작해야했으며 한두시간 걸어가다가 길가에서 "접대소"를 만나면 아침밥을 얻어먹는것이 다반사였다. 첫날은 북경에서 석가장방향으로 빠지는 출구를 찾지 못해 몇시간 헤매다나니 저녁녘에야 겨우 장신점(长辛店)에 도착하였으므로 얼마를 걷지 못하였고 이튿날은 한 70리를 걸었지만 사흘째 되는 날부터는 다리 근육 통증이 오기 시작하고 발이 부르트고 물집이 생겨나면서 진종일 부지런히 걸어도 겨우 40리를 넘기지 못하는 날도 하루 이틀이 아니였다. 북경에서 출발하여 1주일만에 보정(保定)에 도착하여 하루동안 휴식을 취했더니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점차 적응이 돼 가면서 처음처럼 그렇게 힘겹지 않았다. 하지만  고난의 행군은 여전했다. 날마다 걸음을 재우치며 걸고 또 걷다가 허기진 배를 붙안고 "접대소"에 찾아가면 먹으라고 내놓는것은 가는곳마다  거의 다 옥수수가루로 만든 음식이였고 저녁에 자고 가라고 안내하는 잠자리는 짚을 깔아놓은 학교 교실이거나 곡식창고의 차가운 콩크리트바닥이였다. 우리는 날마다 거의 하루 세끼를 옥수수로 만든 음식을 먹으며 강행군을 해야했고 추운 겨울밤에도 아무런 난방시설도 없는 콩크리트바닥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하루하루의 장정을 이어갔다. 이렇게 우리는 한달동안 드넓은 하북평야를 주름잡으며 석가장을 거쳐 태항산으로 톺아올랐고 광활한 진중평원에 위치한 태원을 지나 산서성의 허리를 가로 지르면서 황하기슭에 이르렀고 나루배를 타고 황하를 건너 섬서성 북부지역에 도착하였으며 1966년 12월 하순에는 드디어 오매에도 그리던 혁명의 성지 연안의 땅을 밟을수있게되였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나의 장정"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냥 학교 기숙사에서 발편잠을 자고 날마다 입쌀이나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먹으면서 하루하루를 한가로이 보냈을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저절로 고생을 찾아나섰다. 물론 처음 겪어보는 고생들이라 힘들기는 하였지만  이 한달동안의 "나의 장정"은 평생을 두고 잊을수 없는 과감한 도전이였으며 심신에 유익한 실천이였다. 말이 고생이지 우리가 겪은 고생은 홍군이 장정길에서 부딪쳤던 간난신고에 비교하면 그것은 고생도 아니였다. 우리들이 가는 길에는 당년 홍군이 직면해야했던 그런 험난한 상황, 즉 지궂게 뒤를 쫓는 추병도, 앞길을 가로막는 적군도 없었으며 노도가 사품치는 금사강과 대도하도 없었으며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설산 초지도 없었다. 때문에 우리가 겪은 고생은 홍군이 이겨낸 간난신고의 천분의 1, 만분의 1, 아니 억만분의 1도 안되는 고생이였으며 고생이라는 말조차 어울리지않는 그런 어려움이였다고나 할가. 40년전 20대 열혈청년이였던 우리는 그때만해도 이 나라의 해방을 위해 피흘리고 목숨을 바친 혁명선렬들의 고귀한 정신을 이어받아 조국의 미래를  떠메고 나갈 주력군이 되고자 자신을 보다 억세게 련마하기 위해 "나의 장정"에 자진해 나섰던것이다  나는 "문화대혁명"이라는 이 력사적재난때문에 졸업론문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대학을 졸업하게 되였지만 "나의 장정"을 통해 책에서나 교실에서 배울수 없었던 많은것들을 터득할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추운 엄동설한에 차가운 콩크리트바닥에서 쪽잠을 자고 옥수수떡을 먹으면서 하북, 산서, 섬서 세개성을 경유하면서 태향산지역의 척박함과 황토고원의 황량함을 피부로 느꼈고 그런 고장에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감행했던 저주로운 "삼광정책"이 빚어낸 참상이 그 얼마나 참혹했을가를 다소 상상할수 있었으며 이땅에서 혈전을 벌였던 그 고장 사람들과 그 후손들을 우러러 볼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질수 있었다.  우리 말에는 젊어서의 고생은 금을 주고도 못 산다는 속담이 있다. 중국 고대의 성현인 맹자님께서도 "하늘이 누구에게 큰 일을 맡기려면 반드시 먼저 그의 심지(心志)를 괴롭히고 그의 근골을 지치게 하고 그더러 굶주림에 허덕이게  하고 그가 길을 떠날 때 로비도 없게 하여 제멋대로 할수 없게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마음을 련마하게하여 그가 할수 없었던 일도 할수 있도록 하게 하느니라."라는 금쪽같은 명언을 남기였다. 이런 관념에 깊이 물젖은 나로서는 이따금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오늘과 같이 평화롭고 풍요로운 여건속에서 복된 삶을 누리며 순탄하게만 자라난 젊은이들이, 이 세상에 태여나 아직까지 큰 고생이라곤 전혀 겪어보지못한 젊은이들이 래일 나라의 중임을 떠메고 혁명선렬들이 피로 바꿔온 이 강산을 대를 이어 굳건히 지켜나갈수 있을가?… 나의 이와같은 생각들이 그저 나의 부질없는 기우였으면 좋겠다. 누군가가 력사는 오늘과 래일을 창조하는 밑거름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현대사에 막대한 재난을 가져왔던 "문화대혁명"이 갈무리되고 본격적인 현대화건설이 바야흐로 서서히 그 막을 올리던 시절에 우리는 현대화건설을 "신장정"이라고 일컫었다. 그 시기에 창간된 당의 한 리론간행물의 명칭도 바로 이 《신장정》이 아니였던가. "신장정"은 비록 설산 초지를 넘나드는 그런 고난의 행군이 아니지만 일년사시절 만년설이 녹지 않는 청장고원의 동토층우에 청장철도를 부설하고 인적조차 보기드믄 망망한 타클라마칸 대사막에서 유전을 개발하는 그 간난신고 역시 홍군이 설산 초지를 넘나들던 2만5천리 장정에 못지않는 고난의 행군이다. 그리고 지금 한창 진행중인 장강의 물을 황하이북지역으로 끌어올리는 "남수북조(南水北调)"공정이나 서부의 천연가스를 동남연해지역으로 수송하는 "서기동수(西气东输)"공정, 그리고 서부에서 다 쓸수 없는 전력을 동부지역에 수송하는 "서전동수(西电东输)"공정과 같은 대역사(大役事)도 설산 초지를 넘나드는 간난신고에 비견할수 있을것이다. 지금 CCTV에서는 "나의 장정"이 계속 방송되고있다. 층층의 여러 관문을 거쳐 선발된 21명 정식대원과 5명의 후보대원들로 구성된 "나의 장정"대원들은 날마다 70년전 홍군이 걸었던 그 길을 다시 걷고있다. 그들중에는 군인출신도 있고 운동선수출신도 있으며 기자, 교사, 상인, 간호사, 대학생, 장군부인, 자유직업인, 사회과학원연구원등 여러분야의 인원들이 망라되여있다. 상해의 한 큰 회사의 총경리인 동봉(董峰)은 "나의 장정"에 참가하면서 장정을 하는 1년동안 자기가 살아온 지난날을 돌이켜보고 앞으로의 후반생을 어떻게 살아갈것인가를 곰곰히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다. 동봉총경리와 같은 백만장자가 "나의 장정"에 참가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세인을 놀라게할만한 인생드라마가 아닐수 없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홍군의 장정정신을 계승함에 있어서 누구나 꼭 "나의 장정"을 해야한다는것은 아니다. 아직 고생을 크게 못해본 젊은이들로 말하면 한번쯤 고생을 찾아 해보는것도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수업의 필수과목이기는 하지만 굳이 "나의 장정"과 같은 고난의 행군이 아니더라도 좋다. 도전과 실천이 중요하다. 례를 들면 방학이나 여가를 리용해 아직도 어렵게 살고있는 농민들속에 내려가 논밭에 발을 담그고 모내기도 같이 해보고 기음도 같이 매면서 그네들의 로고를 체험해보는것이 무엇보다 바람직하다. 진정 이렇게 도전과 실천으로 자신의 심신을 꾸준히 련마해 나간다면 조국의 미래를 떠메고 나갈 미더운 주력군으로 성장하는데 좋은 밑거름이 될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06년 10월 28일 길림신문(A3 문학)
6    대학으로 가는 길 댓글:  조회:3017  추천:101  2007-02-21
  지난 6월 7일과 8일, 올해 대학입시가 진행되던 날, 나는 차량통행이 엄격히 통제된 연변1중과 연길시2중 두 고급중학교 대문앞을 지나가다가 두곳에서 다 이런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학교부근 길목은 온통 사람들로 붐비며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학교대문앞에는 누군가 벌써 마련해놓은 대문짝 같은 널판자우에 새하얀 찰떡덩어리가 수없이 어지럽게 붙어있었다. 입시생 학부모와 일가친척들이 시험장에 들어간 입시생들을 위해 그들의 성공을 기원하고있는 장면이였다.   1954년 내가 중학교입학시험을 칠 때는 아직 초중교육도 보급되지 않은 때라서 입학률이 6대1이였는데 나의 할머니는 내가 혹시 시험에서 탈락하여 붙지 못할가 걱정되여 "쟤가 시험치려갈 때는 찰떡이나 한 함지 쳐가지고 가서 떨어지지 못하게 떡 붙여놓았으면 좋겠는데..."하고 말씀하시군 했다. 아마 우리 민족의 의식속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녀교육에 대한 찰떡같이 끈질긴 소망이 담긴 이러한 설법이 있었던것 같다. 다만 그때는 아직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절이여서 먹고 살기가 힘들어 그저 말로만 그랬을뿐 실천단계는 아니였던가싶다. 1992년 12월 22일, 한국 대학입시가 진행되던 날, 나는 서울에서 난생처음으로 입시생 학부모들이 시험장밖에서 돼지머리를 밥상우에 올려 놓고 고사를 지내기도 하고 찰떡덩어리와 엿덩어리를 입시장밖 담장에 덕지덕지 붙여놓고 입시생들이 시험을 잘 치르도록 기도드리며 전전긍긍 로심초사하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몇해가 지나지 않아 우리 연변에서도 민족의 동질성을 확인이나 하려는듯 이런 진풍경이 연출되기 시작했고 해마다 그 규모가 날로 확대되고있는 추세이다. 도대체 대학이 무엇이길래 천군만마가 왜 이렇게 대학이라는 이 외나무다리로 몰려드는것일가? 대학은 원래 우리 인류의 력사에서 사회의 엘리트를 배양하기 위해 퍽 오랜 옛날에  발족되기 시작한 고등학부로서 이미 1500년전 구라파에는 영국, 독일, 프랑스, 이딸리아 등 제국을 중심으로 약 80여개의 유니버시티(university: 종합대학)가 있었으며 19세기초에 창설된 베를린대학이 근대대학의 본보기로 되였다고 한다. 그러면 대학에서 배양한다는 엘리트란 또 무엇인가? 영어에서의 엘리트(elite)란 정예, 지배층, 선택된 사람 등을 가르키는 말인데  아무튼 지식있고 능력있는 세련된 부류의 사람들로서 사회의 지도층이 될 사람들을 지칭하는것 같다. 한 사람이 기왕 이 세상에 고고지성을 울리며 태여났으면 힘들게 낳아주시고 애타게 키워주신 부모님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보다 높은 인생가치의 실현을 위해 설사 엘리트는 되지못할지라도 대학교육 한번 받아보고싶은것이 많은 사람들의 욕심이고 한낱 소망이 아닐수 없다. 하지만 오늘까지 국민의 다수가 대학생이 된 나라는 하나도 없다. 미국 마틴 트로우(Martin Trow)교수의 고등교육 3단계론에 의하면 선진국가의 대학교육은 엘리트단계에서 대중화단계를 거쳐 보편화단계로 넘어간다고 한다. 여기에서 대중화단계는 해당 년령층의 취학률이 15%를 넘어야 하며 보편화단계는 50%를 넘어야 한다는것이다. 그러면 지금 우리 나라의 대학교육은 어느 단계에 와 있는것일가? 2006년 2월 28일, 신화넷은 교육부장 주제(周济)의 말을 빌어 2005년도 우리나라 대학 입학률은 해당 년령층의 21%로서 국제상에서 공인하는 대학교육 대중화의 표준 15%를 초과했다고 보도했다. 뿐만아니라 2005년 우리나라는 대학교 재학생수 2300만을 기록하며 세계에서 최대규모의 대학교육을 영위하고있는 국가로 되였으며 대학교육이 대중화단계에 진입하였다는것이다. 더욱 놀라운것은 북경 등 대도시는 승학률이 50%를 넘어 이미 대학교육 보편화단계에 진입했다는것이다. 최근 몇년사이에 북경시의 대학입시 록취률은 줄곧  70%를 유지하고있다고 한다.  1962년 내가 대학에 입학할 때는 전국적으로 고작 22만명을 초생하였는데 금년도 초생규모 530만명의 24분지 1밖에 안되는 수준이였다.  먼 옛날 얘기를 해서 무엇하랴. 근 10년사이의 변화만 보더라도 1998년 초생규모는 108만명, 1999년에는 164만명, 2000년 220만명, 2001년 260만명, 2002년 275만, 2003년 335만명, 2004년 400만명, 작년 2005년에는 504만명이였다. 나젊은 학도들에게 대학으로 가는 길은 이렇게 활짝 열려있다. 대학입학이 이처럼 쉬워졌는데도 입시생 학부모들의 근심은 아직도 태산같다. "우리 아이는 아무 대학이라도  붙어야 하겠는데 속이 싹 타 죽겠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다 대학생인데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이 대학에도 못 붙으면 이게 무슨 망신이야." "우리 조카아이는 꼭 붙어야 한다이. 글쎄 동생하고 제수가 한국으로 돈 벌러 가면서 애를 우리 집에 맡겨놨는데 저애가 만에 하나 대학에 붙지 못하면 제새끼 공부 못하는 줄은 모르고 똑 마치 우리 집탓인것처럼 두고두고  원망하겠으니 죽을 때까지 그 싫은 소리를 어떻게 들어주겠소?" "우리 안깐이가  이제 한국에서 제아들이 대학에 못 붙었다는 소리만 들으면 나를 죽이자고 덤빌께다. 집에서 빈들빈들 놀고있는 주제에 애 하나 제대로 공부시키지 못하는 사람과 뭘 믿고 같이 살겠는가? 당장 이혼하자고 야단칠텐데…" "우리 아이는 모의고사때마다 반급 10등안에는 들었는데 이번엔 시험을 제대로 치겠는지 모르겠다. 십년전 우리가 리혼할 때 내가 우겨대서 아이를 내가 키우기로 했는데 걔가 대학에도 못가면 내 체면이 어떻게 되겠니?"… 시험장안에서 입시생들은 답안을 쓰기에 여념이 없고 머리가 아플텐데 시험장밖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어른들은 서로 내심속의 고충을 하소연하면서 시험종료시간를 초초히 기다리고있었다. 나는 이러한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저도 모르게 오늘 쓰고있는 이 글, "대학으로 가는 길"이란 제목을 머리에 떠올리게 되였다. 대학으로 가는 길은 지식과 학문의 전당으로 가는 길이며 인격의 새로운 수련장으로 가는 길이며 진리를 추구하는 젊은이들이 모이는 시대의 광장으로 가는 희망에 차넘치는 길이다. 오늘날 현시대에 있어서 대학으로 가는 길은 인생 성공의 유일한 길은 아니지만 인생 성공의 첩경임은 분명하다.  대학으로 가는 길에서 대학입시는 하나의 중요한 관문이다. 이제 시험이 끝났으니 오라지 않아 시험점수가 발표될것이고 뒤이어 록취결과가 발표될것이다. 그러면 대학입학의 영예를 받아안은 행운아들은 들뜨고 부풀어 오른 심정으로 오매에도 그리던 배움의 전당으로 달려갈것이다.  대학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곳이다. 진짜 공부는 이제 대학에서 시작된다.  대학에서의 공부는 여러가지 기존의 지식을 배우며 지식의 편린들을 주어모으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어 세상을 폭넓게 리해하는 안목을 키워가면서 앞으로 혼자 공부하고 탐구할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는것이다. 대학으로 진학하는 학생들이 있으면 대학에 못가는 학생들도 있기 마련이다. 금년도 전국 입시생이 950만명이고 초생규모가 530만명임을 감안하면 절반이 넘는 55.5%가 입학하게 되고 절반이 못되는 44.5%가 락방하게 되는데 입학자가 락방자보다 11포인트나 많은 셈이다. 이것은 성공과 좌절이 교차할수 밖에 없는, 오늘 우리가 당면한 어쩔수 없는 현실이다. 이번 입시에서 락방한 학생들은 너무 실망에 빠져 의기소침하지 말고 청춘의 푸른 꿈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은 대졸생들만 사는 세상이 아니다. 이 세상엔 학자, 교수, 음악가, 예술가, 사회지도자, 우주로케트 설계사들도 있어야 하지만 농사짓는 사람, 집 짓는 사람, 옷 만드는 사람, 쓰레기를 처리하는 사람들도 있어야 한다. 장군만 있고 병사가 없는 군대가 어찌 적을 무찌를수 있겠는가?. 한마디로 인간세상은 엘리트만 수요하는게 아니고 다양한 인재를 수요한다. 때문에 대학에 못붙었다 하여 인생이 끝났다고 비관하지 말라. 뜻있는 곳에 길이 있다. 결심만 있으면 한해 더 재수하여 재도전 할수도 있고 일하면서 배울수도 있다. 어떤 일에 종사하든지 최선을 다한다면 사회에 유익한 사람으로 될수 있으며 그 분야의 전문가로 될수도 있는것이다.   만약 진정 대학입학의 꿈을 접을수 없다면 기회는 언제나 얼마든지 있다. 몇년전에 우리 나라에서는 대학입학 년령제한까지 취소하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회갑을 훨씬 넘긴 나이에 대학에 입학했다는 로익장들도 있지않은가! 세상은 언제나 노력하는 자에게 성공의 기회를 준다. 2006. 6. 15. [강룡운수필집《무궁화련정》33-38페지]
5    나의 《건강일기》 댓글:  조회:2910  추천:117  2007-02-21
    양력설이 지나고 음력설마저 다 쇠였으니 올해 내 나이 예순 여섯, 어느덧 이순(耳顺)의 언덕을 넘어 고희(古稀)의 고개를 바라보며 뚜벅뚜벅 걸어가는 "륙십청춘 닐리리"의 한창 나이이다.     우리 이 고장  한족들은 내 나이가 되여 생일을 맞게되면 출가한 녀식이 밀가루 여섯냥과 돼지고기 여섯냥으로 예순 여섯개의 물만두를 빚어 부모님더러 다 잡수시게하는데 "륙륙대순(六六大顺)"이라 장수한다는 풍속이 있다. 그런데 나는 한족도 아니고 또 딸자식도 없는데다가 자식들이 모두 곁을 떠나 멀리 해외에 머무르고 있으므로 나와 안해는 자신의 건강은 자기가 알아서 스스로 챙기거나 서로 알아서 챙겨주는 상황이다.     나는 매일 아침 잠에서 깨여나면 먼저 소금물로 양치질을 한다. 《건강문적보(健康文摘报)》에서  소개한 방법대로 매일아침 아래위 이발을 300회 좌우 맞부딪치면서 양치질을 하는데 그래서인지는 딱히 알수없지만 약간씩 흔들리던 나의 앞니 몇대는 이몸이 예전보다 많이 든든해져 몇해째 더는 나를 괴롭히지 않고 있다. 양치질을 마치면 인차 빈속에 광천수 합컵을 들이 마신다. 밤새 자면서 소실된 수분을 보충하고 배속을 한번 쑤욱 씻어주면 그렇게 시원할수가 없다.     그리고는 서재에 들어가 컴퓨터부터 켠다. 신화넷, 신나넷, 야후코리아. 미디어다음, 연우미디어에 들어가 국내외 뉴스를 한번 쭈욱 훓터보고 하루에 딱 한 알만 먹으면 된다는 혈압약을 먹는다. 고혈압에 한번 걸리기만 하면 평생 혈압약을 입에 달고있어야 한다기에 달리 용빼는 수가 없다.  약을 먹고 반시간이 지나면 식초계란을 먹는다. 돈도 별로 안들고 혈관건강에 좋다고 하여 십년이 넘도록 계속 명심해서 먹고 있다.     2006년 새해를 맞으며 연우미디어(www.ckywf.com)개통 1주년을 기념하여 "연우"식솔들이 모이는 파티에 초대받고 갔다가 덕담 한마디 해달라는 김삼 포럼장의 청을 받고 이런 말 몇마디를 남기고 왔다."우리 세대가 미처 해내지 못한 큰 일을 너희 젊은 세대들이 해냈다. 참말로 장하다. 진심으로 축하한다.  연우미디어야말로 전세계가 우리 중국조선족사회를 들여다 볼수있는 훌륭한 창구가 되기에 손색이 없을것이다."     사실 나는 연우미디어가 우리 중국조선족이 세계와 련결되는 좋은 창구라는것을  직접  체험한 바 있다. 한번은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있는 둘째아들과 메신저로 화상채팅을 하다가 그애가 고향소식을 묻기에 연우미디어의 인터넷주소를 알려주었다. 그랬더니 몇초후에 벌써 찾아 들어가 문장제목들을 훓터본다고 하였고 잠시후에는 연우포럼--명사미니홈에서 소설가 김혁선생이 쓴 《채플린을 다시 보며》라는 글을 읽어보았다고 하면서 글을 참 잘 썼더라고 독후감까지 말해주었다. 이것이 바로 연우미디어다.  이렇게 연우미디어는 세계의 그 어느곳에서나 아무때든 상관없이 우리 중국조선족에 관한 각종 정보를 접할수 있는  인터넷 창구이다.     작년부터 나는 날마다 연우미디어와 함께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당일 《연변일보》와 전일《흑룡강신문》, 《길림신문》, 《료녕조선문보》가 아직 배달되기도 전에 나는 연우미디어를 통해 중국조선족사회에 관한 여러가지 소식들을 접할수 있다. 그리고 연우미디어  칼럼리스트들인 우리 중국조선족 대학교수, 문화평론가, 작가 ,학자 그리고 기업인들이 쓴 글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대학공부를 하는듯한 멋진 기분에 젖어들기도 한다.     그리고 인터넷으로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双向交流)이 가능하므로 그저 그들의 좋은 글들을 읽기만 하는것이 아니고 나도 그들중에 끼여들어 나의 글도 올려보고 그들이 쓴 글에 대글(꼬리글)도 달아가면서 나의 의사를 표시하기도 한다. 그 실례를 하나만 든다면 얼마전에 청화대학 중문학부 정인갑 객원교수의 《심상치 않은 화제》라는 글과 이를 반박하는 연변대학 우상렬 부교수의 《정인갑 아저바이 》라는 글을 읽으면서 아래와 같은 대글을 달아주기도 했다.    "두 교수님의 글을 배독하면서 느낀바 많습니다. 전혀 무의미한 론쟁은 아닌것 같고 합리적인 '핵'이 있는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읽어내려가면서 '소제대작(小题大作)'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끔 없지 않았습니다만 녀권운운,  인권운운, 교육운운에서 많이 배웠습니다.그러나 '문인상경(文人相轻)'이라고나 할가. 두 교수님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어투에서 자존심싸움같은 느낌도 지울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갑론을박식 론쟁풍토가 몹시 미비한 오늘 현시점에서 보다 정상적인 론쟁이 많았으면 하는 기대도 크지만 좀 더 신사적인 론쟁을 기대하는것이 우리 연우미디어식솔들의 과욕은 아니겠지요?》     이렇게 대글을 쓰면서 어떤 때는 좀 싱겁지않나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한국 네트즌들의 대글문화가 대단히 활발한 양상을 보이고있는데 반해  우리네 네트즌들은 아직 대글문화에 너무나 낮설어하는 모습이기때문이다. 우리네 네트즌들도 너도 나도 대글을 달아가면서 이러쿵 저러쿵 론쟁을 펼쳐간다면 퍼구나 재밌을텐데...     거의 매일이라고는 말할수 없지만 대개 반나절은 이렇게 눈깜박할 사이에 지나간다.      잠이 보약이라고 해서 나는  점심때가 되면 꼭꼭 오침시간을 갖는다. 한잠 자고 일어나서는 믹서기로 사과와 요그르트를 믹스해서 한 사발 마신다. 미국 버먼트주에는 "하루 사과를 한 개 먹으면 의사를 멀리 한다"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요그르트를 매일 마시면 로년성변비도 예방할수있고 칼슘도 보충할수 있다고 하므로 요그르트-사과쥬스야말로 진짜 건강음료임이 분명하다.     나는 재직시 건강상태가 그닥 좋지 않았다. 정년퇴직후 지금까지 육체적 건강을 챙김에 있어서 나는 약물료법보다는 식이료법을 선호한다. 그리고 육체적건강과 함께 정신적건강도 소홀히 할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신로동에 종사하던 사람은 퇴직후에도 계속 머리를 써야 치매예방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지않는가. 그래서 나도 언녕 성쌓고 남은 돌이 되였지만 독서와 독보를 하루도 게을리 하지 않고있다. 고금중외의 명작들을 두루 섭렵하는 한편 《연변일보》는 물론 《환구시보(环球时报)》,《문적순간(文摘旬刊)》,《건강문적보(健康文摘报)》 등 신문과 《연변문학》,《장백산》,《도라지》등 우리 민족 문예지들도 구독한다. 자료실에서 빌려보거나 인터넷에서 열독할수도 있지만 상기의 우리 민족 문예지들을 굳이 구독하는것은 자금난에 모대기고있는 그들에게 구독자가 하나라도 더 늘어나면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지 않을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고 그보다도 이런 간행물을 통해 오늘을 살고있는 우리 민족의 참모습을 좀 더 많이, 좀 더 깊이있게 료해하고 싶었으며 우리 민족의 당면한 문제들을 우리 민족 지성인들과 함께 고민하고 싶었다.      고민도 고민이지만 독서요, 독보요, 인터넷이요 하면서 날마다 그냥 방안에만 들어박혀있어도 안된다. 로년에는 되도록이면 많이 움직이여야 한다. 그러나 나는 아침엔 운동을 하지 않는다. 게을러서가 아니고 늦잠을 자서가 아니라 연길시의 공기오염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밤기온이 낮기온보다 낮기때문에 밤이면 공기중에서 부침하는 오염물질 미세립자들이 찬공기를 따라 땅쪽으로 내리깔리게 되므로 아침공기가 결코 신선하지 않다. 그러나 해가 솟아올라 차츰 기온이 올라가면 오염물질 미세립자들이 다시 공중으로 상승하게 되여 낮공기가 아침공기보다 훨씬 신선한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침후 혹은 저녁식사전에 시간을 떼내 강뚝에 나가 산책을 한다. 두 팔을 휘드르고 활개를 치면서 연길시경제개발구 북쪽 강뚝 끝자락까지 걸어갔다오면  뒤잔등에 땀이 약간 났구나 하고 느껴질 때 몸이 한결 가벼워진다. 아마 이렇게 날마다 산책을 하면서 굴신운동도 견지하여온것이 나의 건강상태가 재직시보다 많이 나아진 비결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저녁엔 안해를 동무하여 TV뉴스도 보고 드라마도 본다. 그리고는 또 컴퓨터앞에 와 앉는다. 만약  아들애들이 인터넷에서 온라인 상태이면 그애들과 한참씩 채팅을 하기도 하고 만약 오프라인 상태이면  곧바로 연우미디어에 들어가 포럼글마당에 새로 올려진 글들을 읽으며 사회를 읽고 인생을 배운다.그리고 컴퓨터로 일기도 쓰고 독서필기도 한다. 컴퓨터 자판을 도닥거리는 손가락놀림도 뇌건강에 유익하다는 일설이 있다.     밤 열시가 넘으면 잠자기전에 두 발을 뜨거운 물에 한 반시간동안 담그고 족욕(足浴)을 하다가 따뜻한 우유 한컵을 마시고 자리에 누으면 잠이 잘 온다.     하루밤 푹 자고 깨여나면 래일은 또 래일의 태양이 솟아오를것이고 또 다시 드바쁜 하루가 시작될것이다. 비록 이미 별볼일 없는 몸이 되었지만 나는 하루하루가 지겹다거나 심심하다고  느껴질 때가 거의 없다.      나는 확신한다.아무리 성쌓고 남은 돌이라 할지라도 지레 무소작위의 허탈감에 빠져 남은 인생을 허송세월속에서 자포자기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긍정적으로 살아간다면 자신의 심신건강에도 모두 리로울것이라고. 2006년 3월 10일 연변일보 B3 해란강 제1250기 (수필) 나의 《건강일기》
4    할머니의 증손들 댓글:  조회:2624  추천:100  2007-02-21
   나의 할머니는 1890년 경인(庚寅)년생, 범띠다. 할머니는 열여섯 나이에 우리 할아버지와 결혼하여 강씨가문으로 들어오셨다고 한다. 그때 할아버지 나이 겨우 열세살, 할머니는 년상의 녀인이였다. 아마 지금 이 또래 나이의 중학생들이 이 얘기를 들으면 "이거 진짜 웃긴다"고 폭소를 터뜨릴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는 "너의 할아버지는 장가를 가구 홍진(홍역)을 했네라. 내가 시집와 너의 할아버지 홍진시중까지 다 들어주었네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가끔 할아버지를 놀려주군 하시였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갓 스므살되던 해에 나의 아버지를 낳으셨고 아버지가 열살되던 1921년에 남부녀대하여 쪽박차고 두만강을 건너와 화룡 우심산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재미있는것은 머리태를 땋아드리운 열살난  아버지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 우심산으로 걸어오는걸 어머니가 보았다는것이다. 우심산에 와 아버지는 나의 외할아버지가 교장으로 있은 소학교를 다니게 되였는데 열네살 되던해에 열여덟살이된 년상의 녀인인 나의 어머니와 결혼했다고 한다. 아마 조혼은 그때 우리 조상님네들의 풍속이였고 결혼년령 남소녀대(男小女大)가 그시절의 풍토였던모양이다. 지금 한국에서 적잖은 젊은 총각들이 년상의 녀인을 선호하는 그 취향은 아마 우리 민족의 력사에서 오랜 전통과 깊은 뿌리가 있는것 같다.    할머니는 내가 대여섯살 되던 때부터 "누가 너의 고향이 어딘가고 물으면 함경북도 부령군 부고면 사구동이라고 대답해라. 그래야 똑똑한 애야"라고 가르쳐주었다. 고향이란 바로 할아버지, 할머니가 나라 잃은 설음을 안고 살길 찾아 이역땅으로 떠나오면서 등을 돌리지않으면 안되였던 고국의 그 정든 땅이며,  두만강을 도강하여  새로운 낯선 세계에로 진출한 우리 가족 새력사의 출발점이다. 과 이 뭐가 어떻게 다른지 딱히 잘 모르시는 할아버지, 할머니였지만 두고온 고향땅이 늘 그리워 나어린 손자들에게 자기의 근본을 잊지 말라고 이렇게 고향에 대한 의식을 심어주었던것이다.  어찌나 똑똑히도 가르쳐주셨는지 "도", "군", "면", "동"이 뭐가 뭔지 모르는 어린 나이에도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알려준 고향주소 열세글자는 머리속에 깊이깊이 아로새길수 있었다.    1993년 가을, 나는 연변일보사대표단을 인솔하여 평양을 방문하게 되였다. 우리가 소형뻐스를 타고 회령에서 청진으로 가는 도중, 신문사 박춘민부장은 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의 선친의 고향이 부령이라는 얘기를 듣고 부령역광장에 차를 세우게하고 나로하여금 선친의 고향을 일별할수있도록 특별한 배려를 베풀어주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한참동안이나 사위를 둘러보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고향땅에서 기념사진까지 찍고 다시 차에 올랐지만  나의 마음은 선친들에 대한 생각으로 하여 한없이 설레이였다. 나는 맘속으로 라고 웨치면서 저승에 계신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이 소식을 들으시면 모두 대견스럽게 여기시며 기뻐하실거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병환으로 환갑전에 일찍 세상을 뜨시였고 할머니는 83세까지 장수하시면서 두 손자가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장가가는것까지 보시였으며 또 큰 증손녀도 안아보시였다. 큰 증손녀는 할빈공업대학를 졸업하고 북경의 한 연구원에서 연구사업에 종사하던 나의 형님의 큰 딸이다. 그애는 출생해서부터 줄곧 한족탁아소에서 자랐으므로 다섯살에 처음 증조할머니품에 와 안겼지만, 한어밖에 할줄 모르는 그애가 뭐라고 종알거리는지 할머니는 한마디도 알아들을수 없어 퍼구나 실망스러워하는 표정이였다.      할머니는 집안살림이 하도 구차하여 독자아들인 우리 아버지를 소학교밖에 공부시키지 못한게 늘 가슴속에 한으로 맺혀있어 손자녀석들의 공부뒤바라지에 적극 동참하면서 손자들이 대성하기를 크게 기대하시던 분이였다. 할머니는 손자들이 외지에서 공부하다가 방학이 되여 집에 왔다가 돌아갈 때면 기차역까지 나오시여 고 떠나가는 기차를 향해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민망스럽게 하고 웨치시였다고들하는데  아마 손자들이 잘 되는게 할머니의 제일 큰 소망이였으리라.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북경에 배치되여 크게 출세했다는 큰손자놈의 딸아이가 우리말도 모른다니 이게 웬 말이냐! 할머니는 "북경에 있으면 뭘하냐?새끼들이 자기말도 할줄 모르는데..">하시면서 이런 출세를 별로 반가워하지 않았다.    형님의 딸애들은 둘 다 우리말을 모르고  우리글도 모른다. 그애들은 자기집에서 중국식 볶음료리에 조선식 장국과 김치를 곁들여 먹으면서 자라서인지 김치는 좋아하고 또 잘 먹는편이지만 그애들한테서 조선족의 다른 그 어떤 특징도 거의 찾아볼수 없을만큼 완전히 한족으로 동화돼버렸다.  큰조카딸이 일본 쯔꾸바와 니이가다에서 공부할 때 나는 일본의 어느 한 한식집에서 그애와같이 식사를 한적이 있는데 일본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김치를 좋아했다. 이것이 그애한테서 찾아볼수 있는 조선족 후손의 유일한 특징이라고나 할가. 하지만 김치를 좋아한다고 다 조선족인가?     큰조카딸은 북경에서 석사공부할 때 벌써 한족남자와 결혼하고 함께 일본에 건너가 박사학위를 따냈는데 일본에서 취직했다가 어린아들애의 조기영어교육을 위해 몇해전에 또 카나다로 이민갔다. 작은 조카딸은 북경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가서 석사공부를 하였는데 노란머리 코큰 미국사람과 결혼했다고 한다.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는 말이 이미 국제상식으로 되여있다. 국제결혼,  타민족과의 결혼이 문제가 아니다. 그애들은 그저 혈연적으로 조선족인 형님과 형수님의 피줄을 이어받았을뿐 민족적 감정이라는게 젼혀 없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모르기때문에 그애들은 우리 조선족과의 문화적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지금 미국과 카나다에 살고있는 그애들은 우리 가족과 더 나아가 우리 조선족과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게될것이고 그리고 또 언젠가는 우리 조선족과의 련관성마저 완전히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지금 그애들은 자기들을 한족이 아닌 조선족이라고 하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며 "별일 다 있다. 내가 어떻게 돼서 조선족이지? 참 재밌다!"하는 식으로 호기심을 가질뿐이다.    두 조카딸을 이렇게 조선족답지 않은 으로 키워온 뼈아픈 교훈이 있기에 북경 형님은 나의 아들애들이 한족학교에 입학하는걸 견결히 반대했다. 내가 안도방직공장에서 근무할 때 나의 큰애가 방직공장 탁아소와 유치원에서 한족 보육원들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기에 한족말은 완전히 한족애들 수준이였지만 조선말은 겨우 알아들을수 있었을뿐 잘 하지는 못했었다. 그래서 소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자 우리는 하는수없이 한족학교에 보내야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북경 형님이 "아는것이 힘이라고 한가지 언어라도 더 아는것이 장차 경쟁에서 큰 힘이 될터이니 아이들을 꼭 조선족학교에 보내서 조선말과 조선글을 배우게 하라"고 편지를 보내왔다. 형님의 편지를 받고 우리 부부는 연변에 살면서 애들을 북경의 조카애들처럼 만들수는 없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큰애를 억지다짐으로 조선족학교에 입학시켰다. 처음엔 선생님의 강의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몹시 힘들었는지 방과후면 선생님을 찾아가 한족말로 "선생님, 오늘 숙제문제를 다시 알려주시요"하고 숙제문제를 재확인했다고 한다. 사람은 언어로 사유하고 또 언어가 사유를 지배한다. 유치원까지 계속 한어로 사유하던 어린애가 갑자기 조선어로 사유하게되자 첫학기는 적응이 잘 되지않아 조금은 힘들어했지만 그후로는 차츰 적응이 되여갔다. 지금 그애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한국기업 회사원으로 취직하고있는데 중국어, 한국어를 모두 잘 구사하고 두가지 문자로 서류작성도 잘하기때문에 한중무역 업무수행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한다. 나의 둘째 아들애도 소학교부터 고중까지 줄곧 조선족학교를 다니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 프랑스에서 국제무역 석사과정을 밟고있다. 조선어, 중국어,영어,프랑스어등 여러가지 언어를 다 배웠으므로 앞으로 국제무역에 종사해도 역시 크게 도움이 될거라고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20세기 20년대초반 함경북도 부령군에서 출발한 새로운 세계로의 진출은 지금 이민 4세에 이르러 이렇게 한국, 유럽 더 나아가 저 멀리 북아메리카대륙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할머니 증손들중 절반은 우리말과 우리글을 알고 절반은 우리말과 우리글을 모른다. 그 분수령은 바로 교육에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민족어교육에 있다. 형님네는 북경에 있었기에 아이들에게 우리말과 우리글을 제대로 가르칠수있는 여건이 없었지만  연변에 돌아온 나까지도 만약 아이들을 한족학교에 입학시켜 우리말과 우리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게 하였다면 이거야말로 진정 후대들에게 무책임한 엄청난 실책으로 되였을것이며 돌이킬수 없는 엄중한 후과를 초래했을것이다.    민족의 동화는 언어의 동화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나의 두 조카딸의 경우, 물론 그애들 자신의 차실은 아니지만 동화는 이미 심각할 정도로 진행되였다. 지금 우리 조선족사회에서는 이러한 추세가 날로 확대되고 있다. 재래식 농경사회의 탈출로부터 시작된 대도시로, 해외로의 대거 진출이 날로 증가됨에 따라 나의 두 조카딸과 같은 젊은이들이 점차 늘어남으로써 지금 우리 민족의 일부 청소년들은 동화의 위기와 시련에 직면하고 있다.    기원 70년,  로마제국이 유태인들의 봉기를 무참히 탄압하고 팔레스타인을 완전히 점령하였을 때 유태인들은 세세손손 살아오던 고향을 등지고 전세계 방방곡곡에 흩어져 살게되였다. 그러다가 거의 이천년이란 세월이 흘러간후 산지사방에 뿔뿔이 흩어져 살아오던 그들이 타민족에게 동화되지 않고 다시 자기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할수 있게된것은 그들에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와 유태교가 있었기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조선민족에게는 뭐가 있는가? 우리에겐 민족종교가 없다. 우리에겐 오직 이 있을뿐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생존, 발전, 번영하는데 있어서 첫번째 필수과목이다. 우리는 자기스스로 우리말과 우리글을 얕보지 말아야 한다. 학자들에 따르면조선어(한국어/조선족어)는 언어사용인구에서 세계의 언어중 12위권에 있는 결코 무시하거나 홀대할수 없는 언어중의 하나라고 한다. 현재 전세계에  6700여종 언어가 있고 우리나라에만 120여종 언어가 있는데 그 많은 언어들가운데서 우리 조선어가 세계사용인구순위 제12권안에 있다는것은 우리 민족의 긍지이며 자랑이 아닐수 없다.     언어는 인간의 교제도구이다. 한 민족의 언어는 그 민족공동체의 교제도구이기도 하지만 단순한 교제도구만도 아니다. 언어는 그 자체가 일종의 특수한 문화이며  그 속에는 그 민족의 문화가 응집되여있고 그 민족의 얼과 혼이 깃들어있으며 그 민족의 력사가 슴배여있는것이다.     남영전 시인은 민족에 관한 자신의 소신을 이렇게 피력했다."민족은 문화적 개념이지 혈통적 개념이 아니다. 민족은 문화로 구분되는것이지 혈통으로 구분되는것이 아니다."    우에서도 언급했지만 북경에서 자라나 우리말과 우리글을 배우지 못한 나의 두 조카딸은 혈연적으로는 조선족이 분명하지만 문화적으로는 이미 조선족이 아니다. 그애들은 우리말과 글을 배우지 못했기때문에 우리말과 우리글속에 응집되여 있는 민족문화와 민족정신을 모르며 우리 민족의 력사도 모른다. 그애들은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해서도 잘 모르며 증조할아버니, 증조할머니에 대해서는 더욱 모른다.  함경북도 부령군 부고면 사구동에 대해서는  더더욱 모른다. 때문에 그애들에겐 애틋한 민족감정이라는게 있을수 없다.    나는 오늘 이글에서 우리집과 나의 할머니 그리고 그 증손들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잘 모르기는 하겠지만 다른 가정이나 가족의 상황도 크게 다를바 없이 대동소이할것이다. 백여년전부터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온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의 후손들이 오늘 해외로, 대도시로의 민족대이동이 한참 진행중인 이 시점에서 자녀교육, 더우기 자녀들에 대한 민족어교육은 다른 동네 얘기가 아니다.민족은 일종의 문화유전인자라고 하는데 문화가 없으면 민족이 어떻게 유전되겠는가? 그래서 후대를 잃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들 하지 않는가? 대변혁의 오늘을 살고있는 우리 민족의 책임있는 구성원이라면 그 누구나를 막론하고 지금은 거의 집집마다 하나밖에 없는 자녀들이나 후손들의 입학, 진학등 진로문제를 결정할 때는 보다 진지하게 재사삼고(再思三考), 심사숙고해보는것이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가? 2005년 10월 14일 연변일보 B3 해란강 제1245기
3    "세계 금연의 날" 단상 댓글:  조회:2775  추천:125  2007-02-21
    5월 31일은 "세계 금연의 날"이다. 애연가들은 좀 힘들겠지만 전 인류의 건강을 위해 1년에 단 하루만이라도 담배를 피우지 말고 담배가게에서는 담배를 팔지 말아주십사 하는 국제적인 금연 캠페인이다.     금연 얘기가 나오면 나는 저도 모르게 자화자찬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모두들 그렇게 끊기 힘들다고하는  담배를, 그것도 25년동안이나 피워오던 담배를 하루아침에 뚝 끊어버렸으니 나 자신도 스스로  대견스러워 감탄사를 련발할 때가 있다.     (아, 담배 끊기가 참 힘들었는데 ...     내가 어떻게 천신만고끝에 드디어 금연에 성공했을가!...)      담배가 신체에 해롭다고, 앓지말고 오래오래 같이 살자고, 애들한테도 해로우니 제발 그 담배만은 좀 끊어 달라고 그렇게 애걸하던 안해의 말은 들은척 마는척 귀등으로 흘러보내던  내가 어느날 갑자기 담배를 안 피우기로 작심했다고,  래일부터는 담배를 끊는다고 선포한 그 다음부터는 진짜 담배와 일도량단, 철저히 끊어버렸다.     그래서 안해는 나를 독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것은 내가 어느 정도 수준급의 골초였는지를 그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기때문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솔직하게 고백한다면 , "문화대혁명" 시절  "현행반혁명분자"의 루명을 쓰고 령어의 몸이 되여 시도때도 없이 심문을  받을 때에는 하루에 담배 세갑---오전에 한갑, 오후에 한갑, 저녘에 또 한갑씩 피우던 날도 있었고 , 후날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에서 근무할 때  밤을 새워가며 주장어른들의 연설문을 작성해야 하는 날에는 집에서 갖고 간 담배를 다 피우고나면 한밤중에 어디 가서 담배를 사올수도 없고 해서 재떨이에서 담배꽁초를 주어서 그걸 부셔가지고 원고지에 말아 피워야 작업을 계속할수 있었는데 그래도 원고를 마무리하지 못하면 구차하게 허리를 구부정하고 사무실 땅바닥에서까지 담배꽁초를 주었으니 그야말로 최고수준급의 애연가였다. 아무튼 글을 쓰자고 책상앞에 마주앉으면 먼저 담배를 한두대 피워물어야  문장제목이 머리에 떠오르고 연거퍼 줄담배를 이어대야 글을 써내려갈수 있었으니  나는 한평생 글을 쓰면서 살자면  이놈의 담배와는 인연을 끊을수 없는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지금 이 시각,  키보드로 이 글을 쓰고있는 이 순간에도  담배생각은  젼혀 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담배를 피워야 글을 쓰던 그시절이 마치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의 옛말처럼 느껴진다.     알고보면 흡연은 일종의 불량한 생활습관 즉 이미 생활화된 나쁜 버릇에 불과하다. 전세계에 11억으로 헤아려지는 애연가들의 이 나쁜 습관을 고쳐보려고  2003년 5월 21일 제네바에서 거행된 세계보건대회에서 192개 성원국이 만장일치로 찬성하고 168개국이 정식서명하고 58개국에서 이미 비준절차를 마친 국제적인 "연초통제기본협약"(FCTC)이 금년 2월부터 발효되기 시작했다.  "협약"은 성원국들에게 가격정책으로 연초소비를 통제하거나 담배갑의 30% 내지 50%면적에 흡연이 건강에 해로움을 알리는 경고메시지를 인쇄하도록 하는 등등 여러가지 정책을 권유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최근 한국정부에서는  이 국제협약의 정신에 좇아 성년남자의 흡연률을 선진국수준인 30%이하로 끌어내리기 위해 담배가격을 재인상하기로 했다. 그들은 이미 여러차례 담배가격을 인상시킨 기초상에서 금년부터 또 담배값을 한갑에 한화 500원씩 올리기로 결정, 그리고  이렇게 모아지는 자금을 국민의료복지에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10년전까지만해도 한갑에1000원 미만이던 담배값이 2000원대로 껑충 치솟아 올랐고  담배값 인상이 너무도 부담스러워 담배를 끊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는 보도가 계속 이어지고는있지만 이라는 신조어가 말하듯이 금연을 결심한 사람들이 1년을 버텨내는 성공률이 겨우 2%에 불과하다는 통계도 뒤따르고있다.     세상 만사가 다 그러하듯 금연도 "외인이 변화의 조건이고 내인이 변화의 근거"이므로 흡연자 자신의 굳은 결심과 끈질긴 노력이 없이는 금연은 말그대로 작심삼일에 그치고마는 경우가 다반사다. 기실 담배를 피워 습관이 되고 인이 배기게 되면 사람이 담배를 피우는게 아니라 사람 몸안에 배인 담배인이 담배를 피우는것이다 . 다시 말하면 장기간의 흡연으로 하여 인체 혈액속에서 산성과 알카리성의 균형상태에 있는 니코틴이  인체의 신진대사로 말미암아 그 함량이 감소되면 새로운 니코틴의 보충을 요구하게 되므로 이것이 곧바로 새로운 흡연욕구로 표현되는것이다. 그러므로 금연에 성공하려면 이처럼 생리적 욕구로 표현되는 흡연욕구를 능히 억제하고 극복할수 있는 한결 더 강화된 심리적 단속이 뒤따라야하는데 바로 이것이 어려운것이다.     이글의 서두에서 나는 마치 하루아침에 쉽게 금연에 성공한듯 비쳐졌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였다. 나도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여러차례 실패의 고배를 마셨다. 대학교 다닐 때 담배를 끊는답시고 각서를 써 기숙사 벽에 붙여놓고 동창들더러 감시해달라고 호언장담을 터쳐놓고는 겨우 일주일도 견디지 못해 교실도, 기숙사도 아닌 도서관 복도의 한 귀퉁이에서 한학급 동창들의 눈에 뜨이지 않는 틈을 타 남몰래 도둑담배를 피우기도 했고,  결혼해서 아이들이 출생한 후에는 간접흡연이 아이들의 건강에 더욱 해롭다는 안해의 성화에 못이겨 안해앞에서 "남자대장부 일언중천금"을 운운하며 래일부터는 꼭 담배를 끊을터니 어디 한번 잘 지켜보라고 큰소리를 늘여놓고는 또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안해의 눈길이 미치지 못하는 사무실이나 밖에서 안해 물래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그러다가 옷호주머니에 담배를 넣은채로 귀가하게 되는 경우,  집앞 복도에서 담배갑과 라이터를 복도의 어둑시그레한 구석에 감춰두었다가 이튿날아침 출근시에 도로 찾아내 밖으로 나서기 바쁘게 담배부터 꼬나무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코미디를 연출하기도 했다.      한번은 한국에 갔다가 국제망신까지 당할뻔 했다. 나의 금연실천이 여러차례 실패를 거듭하던중 나에게 또 한국으로 출장가는 기회가  생겼다. 나는 한국 체류기간 두주일이면 담배를 끊을수 있겠다고 생각,  천진공항 출발시부터 아예 담배를 휴대하지 않았다. 아마 이렇게 한 일주일정도 버티였을가,  춘천에 갔을 때였다. 춘천의 한 사장님이 풍광 수려한 소양강땜에서 우리 일행를 초대하면서 나보고 담배는 안피우시냐고 묻기에 동행했던 장연하기자가  입빠르게 "금연실천 일주일째"라는  비밀을 까밝혔다. 장기자의 이야기를 들은 그분은 대뜸 "좋은 결심 하셨습니다. 연변일보 사장님이라면 연변조선족의 귀감이 되어야죠 "라고 말씀하시면서 나의 금연결심을 극구 찬양하는것이였다. 이건 완전히 나를 물러설수 없는 궁지에 몰아넣는 셈이였다. 그런데 나는 이번에도 물러서고 말았다.     서울에 돌아와 다시 만난 다른 한 사장님이 나와 오찬을 같이 하는 자리에서 나의 기색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금방 한국에 오셨을 때보다 많이 피곤해 보인다고  이야기를 꺼내시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또 윤태연기자가 "피곤"한게 아니고 금연으로 인한 금단(禁断)증세라고 그 비밀을 공개했다. 내가 "피곤"해 하는 내막을 알게된 그 사장님은 "담배를 끊으실려거든 연변에 돌아가서 끊으시고 서울에 계실 땐 담배도 맘대로 피우시면서 기분좋게 일을 보시다가 귀국하세요"라고 하시면서 운전기사를 시켜 담배 네 보루를 사오게 하여 나에게 안겨주었다. 이렇게 돼서 나는 한국에서도 사탕포탄(糖衣炮弹)의 진공에 그만 두손 들고 말았다.     그때로부터 몇년이 지난 어느날, 나는 춘천에서 걸려온 국제전화를 받았다.     "...그 동안 별고 없으신가고 문안도 드릴겸 선생님께서 춘천에서 하신 약속대로 지금까지 담배를 안 피우시나 궁금해서 전화 드렸습니다..."     나는 그때 그 약속을 언녕 까맣게 잊고 그런 일이 언제 있었느냐는듯이 계속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한국에서 딱 한번 만났던 그 량반이 아직도 그때 그일을 기억하고 그 멀리에서 나한테 전화까지 걸어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런데 이처럼 천만 뜻밖에 걸려온  전화를 받는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것을 어쩔수 없었고, 그리고 뒤이어 지금껏 나름대로 가꾸어오던 자신의 이미지가 한순간에 망가지면서 더없이 초라해지는 느낌을 금할수 없었다.  이것이 나에겐 커다란 충격이 되고 최후의 계기가 되여 나는 흡연자로부터 금연자로의 철두철미한 환골탈태를 위해 아주 깨끗이 담배를 끊게 되였던것이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담배를 끊는데는 별다른 묘방이 따로 없다. 나는 담배를 끊기 위해 "금연사탕"도 먹어봤고 "금연차"도 마셔봤으며 "금연중약"도 세첩이나 달여먹어 보았다. 그러나 모두가 다 무용지물, 소용이 없었다. 진짜 효험 있는 약은 딱 하나--- 흡연의 유혹을 물리칠수 있는 굳은 결심과 억센 의지 그 하나뿐이다.  마라손선수가 42.195킬로미터를 달리는 도중 힘들고 어려울 때 한숨 돌리며 쉬고싶은 생각이 어찌 전혀 없으랴만은 종점까지 완주하기로 결심한 선수라면 잠깐이라도 숨을 돌리고싶은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계속 종점을 향해 꾸준히 달려갈것이다. 마라손이 자기자신과의 싸움이라면 금연도 자기자신과의 싸움이다.  일단 금연을  결심한 사람이라면 남들이 담배 피우는 걸 보면 조건반사가 생겨 자기도 한대 피우고싶어질 때, 더우기 술자리에서 남들이 다 피우는 그 담배를 나도 딱 한대만 피웠으면 하는 생각이 오락가락 끈질기게 갈마들 때, 이렇게  흡연의 유혹에 마음이 흔들려 금연을 포기하고싶은 생각이 마구 솟구쳐오를 때, ... 이럴 때일수록 한번 다진 굳은 결심 누그러뜨리지 말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계속 끝까지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 성공의 피안에 도달할수 있는것이다. 실패는 왕왕 하고 고삐를 늦추거나  여태껏 견지하여오던 립장에서 한발작 뒤로 물러설 때 걷잡을수 없이 찾아오는것이다.     나는 대학교 때부터 17년 동안이나 피워오던 담배를  9년동안 끊었다가 담배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떨쳐버리지 못한 탓에 예전에 피워보지 못했던 미국담배 말보루의 유혹에 끌려들어 "딱 한대만 피워본다"고  다시 입에 댄것이 그게 그만 큰 화근이 되여 걷잡을수 없이 가 되였으며 또다시 8년간이나  담배를 더 피웠던 사람이다.  이처럼 금연실천에서 우여곡절도 많았던 나였지만 금연에 재도전하여 지금까지 다시 성공할수 있게된것은  그 하찮은 담배때문에 인격마저 망가뜨려서는 안된다는 오직 이 한가지 집념과  자기자신과의 싸움에서 인격완성을 위한 몸부림이였다.   사람이 살다보면 이렇게 저렇게 여러가지 약속을 많이 하게된다. 약속을 잘 지키는가  잘 지키지 못하는가? 이것은 한 사람의 인격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의 하나이다. 진정으로 타인과의 약속은 물론, 자기자신과의 약속도 진솔하게 잘 지킬수 있는 사람은 비록 이처럼  어렵고 힘든 금연이기는 하지만  일단 결심을 했으면 기어이 성공하고야말것이다. 2005년 5월 27일 연변일보 7면 해란강 제1237기
2    어머니의 자식사랑 댓글:  조회:2623  추천:100  2007-02-21
요즘 나는 인터넷을 통해 프랑스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막둥이하고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눈다.컴퓨터카메라에 잡힌 화면을 아들애에게 발송해 서로 얼굴을 마주보기도 하고 자판을 두들겨 문자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부자간의 인터넷대화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안해는 저녁 일곱시가 넘도록 아직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아들의 대답을 읽고 안달을 한다. "여보,그 애판테 잘 부탁하세요.끼니는 거르지 말고 꼭꼭 챙겨먹으라고..." 나는 프랑스와 중국의 시차가 7시간,그러므로 현재 이 시각이 바로 그곳의 점심때임을 안해에게 상기시키면서도 자식의 건강을 늘 걱정하고있는 안해의 마음을 헤아려 그의 당부를 곧이곧대로 아들한테 전했다. "엄마왈:아무리 바빠도 아침엔 우유 한컵,하루에 적어도 닭알 하나 그리고 토마토나 사과 한개씩은 명심해서 사먹어라..." 그러자 아들애가 발송해오는 대답이 재미있었다. "엄마,또 뭘 먹으람다?엄마는 인터넷에서도 바가지를 잘 긁으시네...ㅎㅎㅎ..." 그 애가 갓 프랑스에 갔을 때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전화를 걸어오거나 나한테 이메일을 보내왔었는데 지난 여름방학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노트북을 샀다면서 요즘은 전화나 이메일외에도 메신저라는 통신서비스를 자주 리용하고있다. 막둥이를 그 먼곳으로 떠나보내고 여태껏 아들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하고있던 안해는 요즘 처음으로 컴퓨터화면에서 그새 퍼그나 여위여진 아들의 몰골을 찬찬히 들여다보고난 그 이후로는 하루도 근심이 잦을 날이 없다. 몇해전 그 애를 대학에 보낼 때만 해도 안해의 자식사랑은 내가 보기에도 너무나 지나칠정도였는데 지금은 그래도 많이 나아진편이다.그때 있었던 에피소드 한토막이다.애가 막 학교로 출발해야 할 그 시점에 나는 출장을 떠나야 했으므로 안해에게 아이를 학교에까지 데려다주고 챙겨줄것이 있으면 더 챙겨주고 오라고 부탁했다.그런데 내가 신강 우룸치에서 뻐스를 타고 투루판으로 달리고있는 도중 핸드폰이 울렸다. 글쎄 대학이라고 찾아와보니 한개 침실에 쌍층침대 세개,학생 여섯명이 한방에서 비좁게 생활해야 하는가 하면 또 제각기 밥그릇을 들고다니면서 식당밥을 사먹어야 하는게 통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것이였다.차라리 이 학교를 때려치우고 집이 가까운 연변대학에 입학시켜 집에서 먹고 자면서 학교에 다니게 하는게 아무래도 마음 놓일것 같다는 안해의 전화였다. 자식이 낯설은 고장에서 고생하는게 안스러워 대학생이 된 아들조차 계속 옆에 끼고 살고싶어하는 안해의 그 어쩔수 없는 모성애! 나는 하도 어처구니 없어서 신강 회의가 끝나는대로 서둘러 북경에 도착할테니 그때까지는 절대 경거망동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내가 부랴부랴 학교에 달려가보니 옛날 우리가 공부하던 대학교 기숙사와 별반 다를것 없이 한칸에 쌍층침대 세개가 놓여있었고 졸업생들이 떠나간후 방학동안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인지 화장실냄새가 불쾌할 정도로 코를 자극했다.안해는 이렇게 어설프고 불결한 환경에 그만 실망하였을것이고 마음이 흔들렸을것이다.기숙사를 호텔식으로 운영하므로 이부자리 등 침구를 갖고오지 않아도 된다고 한 입학통지서를 보았을 때 안해는 아마 대학교기숙사를 호텔방 수준으로 착각하고있었을수도 있다.그래서 입학등록을 마치고 침실에 들어서면서부터 모든것이 눈에 거슬리고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물론 대학에 가면 집에 있을 때처럼 독방을 차지하고 하루세끼 엄마가 지어주는 더운 밥을 먹을수 없다는것쯤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겠지만 이처럼 어수선한 곳에다가 막상 애지중지 키워오던 막둥이를 홀로 남겨두고 에미 혼자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서 그런 황당한 생각까지 하게 되였을것이다.안해는 이미 마음속으로 애를 데리고 돌아가기로 작심하고있었다.그는 다음해 다시 시험을 보게 되면 외지 대학은 아예 생각지도 말고 연변대학만 지망하면 얼마든지 붙을수 있다면서 아이를 설득시키려 했고 나는 아무때든 부모곁을 떠나가야 할 자식이므로 지금부터라도 고생을 좀 시키는게 유일무이한 정확한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그때 그 아슬아슬하던 순간을 다시 돌이킬 때마다 어머니의 모성애란 모성의 일종 본능적인 사랑이여서랄가,자칫하면 도를 넘어서기 십상이고 지나치면 리성을 잃을수도 있으므로 자식들의 성장에 오히려 역작용을 할수도 있음을 뼈속깊이 깨닫게 되엿고 또 자식들의 건실하고 옳바른 성장을 위해서는 어머니의 감성적인 "모성애"는 물론 없어서는 안되지만 아버지의 보다 리성적인 "부성애"도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것임을 다시 한번 새삼스럽게 터득하게 되였다. 그때 아들애는 다음해에 시험을 한번 더 쳐보라는 어머니의 주장을 한사코 반대하면서 입시준비라는 그 지긋지긋한 "인간지옥"으로는 다시 되돌아가기 싫다면서 재수를 완강히 거부했다.그래서 결국 그 학교 그 학급 그 "6인침실"에서 4년간의 학업을 마치게 되였고 거기서 키운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또다시 멀리 해외류학의 길에 나섰다. 비록 국내에 있을때보다 몇만리 더 멀리 떨어져있긴 하지만 지금은 정보화시대라 맘대로 전화를 할수 있고 이메일도 수시로 주고받을수 있으며 요즘엔 또 메신저 서비스를 리용해 얼굴도 서로 볼수 있게 되였으니 내가 대학다니던 그 옛날과는 완전히 천지개벽 딴 세상이 돼버렸다. 나는 지금도 집을 떠나 외국에서 고생하고 있는 아이들때문에 매일같이 속을 끓이는 안해를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머리속에 어머니의 옛모습을 떠올리군 한다. 내가 대학입시준비에 신경이 날카로와져 자주 밤잠을 설치던 그 시절,대학입시가 바로 한참 무더위가 시작되는 여름철이라서 그 가난했던 오막살이 초가집에서는 밤이면 밤마다 무더위도 무색하리만치 빈대들마저 극성스레 사람을 못살게 굴었다.어머니는 내가 빈대들에게 시달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할가 걱정되여 낮이면 미리 당콩잎을 따다 두셨다가 저녁이면 나의 잠자리둘레에 놓아주셨고 내가 잠든후면 조용히 전등을 켜고 당콩잎 보슴털에 발목이 잡힌 빈대들들 잡아주셨다. 이렇게 애면글면 길러낸 아들들이지만 정작 키워놓고보면 저마다 어머니곁을 떠나가서 보고싶어도 맘대로 볼수 없었으니 어찌 속이 타지 아니하고 애간장이 말라들지 않으셨겠는가.한해 두해도 아닌 그 지지리도 힘겨운 나날에 어머니가 날마다 손꼽아 기다리는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자식들의 편지였다. 그런데 자식들한테서 막상 편지가 부쳐와도 어머니는 언제나 눈뜬 소경 신세였다.워낙 그 시절 많은 어머니들과 마찬가지로 어머니 역시 낫놓고 기윽자도 모르는분이였으니 아버지가 형님한테서 온 편지를 들고 집에 돌아오셔도 그 편지를 속시원히 읽어보지 못하고 그저 아버지 눈치를 보아가며 조금이라도 편지내용을 더 알고싶어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으셨고 아버지께서 여차여차하게 얘기해주셔도 어머니는 글모르는 당신한테만 무언가를 감추지 않나하여 어떤 때는 아버지손에서 편지를 앗아다가 나더러 아버지 몰래 가만히 읽어달라고 하셨다.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글을 모르는게 너무도 한스럽고 안타까우셨던지 서리 내린 하얀 머리카락만 썩썩 긁적이시였는데 나의 눈에는 그것이 마치 어머니의 하나의 버릇처럼 비쳐지고 각인되여 지금도 나의 머리속 깊은곳에는 그 모습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아마 내가 북경에서 공부할 때도 어머니는 매일 같이 나의 편지를 손꼽아 기다렸으리라.이러는 어머니이신줄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공부에 몰두한답시고 어머니를 잊고 있을 때가 더 많았고 편지를 자주 하지도 않았으며 편지를 한다 해도 번마다 "부친님전 상서"였을뿐 "모친님전 상서"는 한번도 없었다. 지금 나는 내곁에서 거의 날마다 나더러 두 아이한테서 이메일이라도 오지 않았나 확인해보라고 졸라대는 안해를 보면서 자주 이런 생각을 하군 한다. (오늘 이렇게 좋은 여건하에서도 나의 안해가 이처럼 아이들때문에 속을 끓이고 있는데 옛날 우리 어머니는 그 허구한 세월 자식들이 보구싶어 얼마나 속을 태우셨으며 또 그 많은 아픔과 슬픔을 어떻게 혼자서 묵묵히 참고 견디셨을가...) 사람은 누구나 부모님에게 평생을 두고 다 갚을수 없는 마음의 빚을 지고 산다.부모가 자식을 백번 생각할 때 자식이 부모를 한번만 생각해도 효자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그 백분의 일의 효자,효녀 노릇이라도 제대로 하면서 살고있는지? 우리 집에는 큰아들애가 어머니한테 선물로 보내준 표 전기밥솥이 있다.그애가 이 전기밥솥을 어머니께 선물할 때는 아마 "모심"(어머니마음)이란 그 브랜드가 각별히 맘에 들어 선택했을지도 모른다.나의 안해는 마치 "모심"을 읽어낸 자식의 "효심"이라도 한아름 받아안은듯 이 선물을 받은지 어언 몇년이 지났건만 여태껏 소중히 모시고 있을뿐 쓰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있다.어쩌면 그 언젠가 애들이 모두 자기 곁에 돌아와 옛날처럼 함께 살게 되면 이 전기밥솥으로 따뜻한 밥을 지어먹으면서 오순도순 재미있게 살게 될 그날을 은근히 학수고대하고있는건 아닌지?세상은 넓고 아이들이 할 일은 많고 많은데 안해는 아직도 자식들을 곁에 끼고 살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건 아닌지? "모심"이란 무엇일가.그것은 바로 우리들을 키워준 어머니의 그 따스한 젖줄기와도 같고 또한 우리들을 키워준 어머니의 그 따뜻한 밥과도 같은 그런 자양분 덩어리가 아닐가."어머니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그리워지는 사랑의 보금자리이며 우리들을 포근히 감싸주는 마음의 고향이다. 세상이 아무리 달라지고 세대가 끊임없이 교체된다고 해도,나의 할머니가 그랬고 나의 어머니가 그랬고 또 나의 안해가 지금 여전히 그러하듯이 자식사랑 "어머니 마음"만은 세월과 더불어 마냥 변함없이 영원할것이다. 2004년 12월 17일 연변일보 7면 해란강 제1226기
1    강룡운 프로필 댓글:  조회:2417  추천:108  2007-02-21
강룡운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 판공실 부주임, 연변주인대상무위원회 부비서장, 연변일보사 사장 력임.ly115@hanmail.net 0433-2858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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