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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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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⑩ 댓글:  조회:3857  추천:123  2007-05-27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⑩     1935년 12월 메마른 겨울 찬바람이 세찬 섬북의 작은 도시 와요보에서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이 모여 회의를 열고있었다. 문밖에서는 참바람이 계속 세차게 불어치고있었지만 널찍한 토굴집에 모인 사람들은 뜨거운 열의로 중국의 전도와 운명을 거론하고있었다.     중앙홍군이 승리적으로 섬북에 도착한후 당중앙에서는 이곳을 전국혁명의 대본영으로 만들었다. 섬북혁명근거지는 지역이 넓어 홍군이 얼마든지 기동령활한 유격전을 전개할수있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있었다. 하지만 인구가 적고 경제가 락후하며 교통이 불편하여 홍군을 확대하고 부대공급을 하기에는 곤난이 많았다. 게다가 아직 장정을 마치지 못한 홍군부대도 적지 않았다. 장국도가 거느린 제4방면군이 계속 사천경내에서 방황하고있었고 하룡이 거느린 홍군 제2군단,  6군단과도 련락이 두절된 상황이였다. 직라진전투가 있은후 와요보에 도착한 모택동, 장문천, 주은래를 비롯한 지도자들은 12월 17일부터 25일까지기간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하였다. 모택동은 회의에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건립해야할 필요성과 가능성을 체계적으로 전면 서술하였다. 북평에서 발생한 12.9애국청년학생운동은 중국인민 항일구국민주운동의 새로운 고조를 형성하였다. 중일간의 민족모순이 격화되고 항일민주운동이 고조됨에 따라 중국력사도 토지혁명전쟁으로부터 민족혁명전쟁으로 전변되고있는 길목에 놓이게 되였다. 이러한 정세에 비추어 와요보회의에서는 국내전쟁과 민족전쟁을 결부시키고 직접적인 대일작전을 위해 힘을 키우며 홍군의 력량을 확대할것을 결의하였다.         홍군 제15군단 75사 참모장을 맡은 양림은 각부대 전사들을 거느리고 쏘베트근거지 확건사업에 뛰여들었다. 그는 군중들을 발동하고 항일민족통일전선 정책을 적극 선전하는 과업을 맡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전사들을 거느리고 와요보를 위협하는 적들을 저격하였다. 그는 75사 전사들을 거느리고 락생진 부근에서 적 3개퇀의 공격을 승리적으로 물리쳤다.     1936년 1월 중앙혁명군사위원회에서 “동진항일과 매국역적 염석산을 토벌할데 관한 명령”을 하달했다. 홍군 제1방면군은 신속히 동정편대로 재조직되였다. 팽덕회가 총사령을 맡고 모택동이 총정치위원을 맡았으며 염검영이 총참모장을 맡은 중국인민항일선봉군이 조직되였다. 동정항일선봉군은 홍군 제1군단과 제15군단으로 무어졌다. 양림은 계속 15군단의 주력인 75사 참모장을 맡았다.       홍군이 섬북에 도착한 소식을 접한 염석산은 홍군을 막기 위해 황하와 황하기슭 려량산의 지세를 리용하여 보루를 만들고 10만 병력을 모아 수비진을 쳤다.        1936년 2월 18일 전사들을 거느리고 일망무제한 황토고원을 가로질러 동으로 내달리던 양림은 새로운 명령을 접수하였다. 홍군의 첫 작전임무는 동으로 황하를 건너 확고한 진지를 마련한 다음 계속 려량산맥의 각현들을 공격하여 점령하라는것이였다. 중앙혁명군사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홍군 1군단은 제2사를 선두로하였고 15군단은 75사를 선두부대로 하였다. 게다가 모택동과 홍군총지휘부가 모두 제15군단과 함께 도하한다고하였다. 양림은 사장 장소동과 토의한후 직접 223퇀을 거느리고 하구나루터를 확보하기로 하였다. 금사강의 천험을 돌파하고 대도하를 건넌 양림은 풍부한 도강작전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2월 20일 양림은 선견대를 거느리고 섬서성 청간현 하구촌에 이르렀다. 마을앞으로는 누런 황하가 사품치며 흐르고있었고 강대안은 절벽이 가로막혀있었다. 강폭은 근 천메터에 달했고 강에는 갇 풀린 얼음쪼각이 흘러내리고있었다. 홍군전사들은 양림의 지휘하에 하구촌 곁으로 흐르는 무정하에서 엄격한 도하훈련을 진행했다. 큰 벼랑이 막혔기 때문에 적들은 홍군의 행동을 알수없었다. 그들은 황하의 물살과 도하에 수요되는 시간을 정확히 파악하였고 선견대가 탈 나무배도 대기시켜 놓았다. 배는 작은 목선 5척과 큰 나무배 2척뿐이였다. 한편 양림은 농민 차림을 하고 황하 기슭에서 적들의 수비 상황을 자상히 정찰하였다. 염석산은 황하 천험을 사수하기 위해 많은 병력을 동원하였지만 천리 황하를 빈틈없이 수비하기에는 병력이 부족하였다. 예로부터 군사요새이고 유명한 황하 나루터였던 하구를 수비하기 위해 놈들은 선진적인 무기를 갖춘 100여명 적을 일선에 배치하였고 하가와촌 부근에 수시로 지원할 수 있는 한 개 영의 병력을 포진했다. 적은 또한 유리한 지세를 리용하여 산정에 크고 작은 보루를 쌓아 놓았다.     양림은 선견대에서 수영에 능한 40명 돌격대 대원을 선발하였다. 모두가 공산당원이거나 공청단원들이였다. 그들은 모두 비장한 각오를 했지만 전투의 승리만은 의심치않았다. 사 참모장인 양림이 직접 도하작전을 지휘한다기에 전사들의 사기는 더욱 높았다. 그들은 중앙홍군 장정시 금사강나루터를 탈취하고 통안진을 습격하는 전투 지휘자인 양림을 굳게 믿고있었던 것이다.      2월 20일 밤 하늘에는 별도 달도 다 보이지 않았다. 양림의 명령에 따라 40명 돌격대원들은 5척의 작은 배를 타고 먼저 강을 건넜다. 그들은 팔에 흰천을 두르고 등에도 흰천을 댐으로써 뒤에 따라오는 아군이 쉽게 알아보도록 하였다. 양림은 직접 기타 전사들과 함께 2척의 큰배를 몰고 뒤를 따랐다.     돌격대는 대안과 수십메터 거리를 둔 곳까지 접근하였다. 이때 황하기슭을 순라하던 적이 홍군을 발견하고 총을 쏘았다. 산정의 적 보루에서도 기관총이 불을 토하였다.       양림은 기관총 부대를 조직하여 적의 화력을 제압하게 하고 선견대 전원에게 강행도하 명령을 내렸다. 수백명 전사들이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너기 시작하였다. 한편 앞장선 돌격대원들은 신속히 황하를 건너 산비탈을 타고 전진하였다. 그들은 신속히 적 보루에 접근하여 수류탄으로 보루를 까부셨다.     두려움 모르는 홍군전사들은 적 수비진을 헤치고 순조롭게 강을 건너 하가와촌을 점령하였다. 후속으로 더욱 많은 홍군 부대가 강을 건너왔고 홍군 전사들은 적들과 치렬한 격전을 벌리면서 부근의 적 보루를 하나하나 제거하였다.     선견대와 함께 도하한 양림은 부대를 거느리고 하가와촌으로 공격하였다. 그는 전사들과 함께 길목의 적 보루를 제거하고 하가와촌을 수비하는 적 한개련을 소멸하였다. 부대는 계속 도주하는 적들을 추격하였다. 도하작전 임무를 승리적으로 완수한 양림은 경위원과 함께 전장을 점검하면서 후속 부대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아군에게 제거된 적 보루에 숨어있던 놈이 총을 쏘았다. 적탄은 양림의 복부에 명중되였다. 선견대 영장과 경위원이 달려와 그를 구호하였다. 전사들은 그를 부근의 요동에 보내 상처를 치료하게 하였다.       공화국 상장인 주사제는 회억록에서 홍군의 동정과 동정에서의 양림에 관련해 비교적 상세히 적고 있다. 양림의 오랜 전우인 주사제는 당시 홍군 제15군단 참모장으로 전반 동정작전에 대해 잘 알고있었다.    양림이 불행히 복부에 적탄을 맞았다는 소식을 접한 주사제는 급히 전선으로 달려갔다. 하가와촌에 도착한 그는 마을에서 병치료하고있는 양림을 찾아보았다.     양림은 얼굴에 피기가 없었지만 주사제를 보자 전투상황부터 다잡아 물었다. 주사제는 지금 홍군 75사는 의첩진을 공격하고있고 78사와 군단부도 의첩진 부근에 도착하였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이튿날이면 석루현을 공격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모택동도 이미 황하를 건너 전투를 지휘한다고 알려주었다.     양림은 그때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그는 자기를 상관하지 말고 빨리 전선에 나가 싸우라고 주사제를 억지로 떠나 보냈다.      그러나 양림은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고 또 적시적인 치료가 따라 가지 못했기때문에 그는 38세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드넓은 황하가 거침없이 흐르고있고 천길 절벽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다. 가없이 펼쳐진 황토고원 한 가운데 위치한 이름 없는 하가와촌, 조선혁명가 양림은 바로 이  편벽한 마을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청산리 전투와 국민혁명군의 동정, 북벌전쟁, 2만 5천리 장정, 홍군의 동정을 비롯한 수많은 전투를 겪으면서 훌륭한 군사지휘자로 중국 력사무대에서 활약했던 양림은 끝내 일제와의 최후의 결전을 치러보지 못하고 이곳에 뼈를 묻었던것이다.     사랑하는 안해를 잃고 얼굴 한번 보지도 못한 자식을 잃은 그는 일점 혈육도 남기지 못했다. 중국의 광활한 대지를 누비며 항쟁한 그였지만 희생된후 묘소 하나도 명확히 남기지 못하였다. 두터운 황토가 깔린 무연한 황토고원의 어느 마을, 어느 곳에 그의 뼈가 묻혔는지 누구도 모른다.     아무것도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무정하게 흐르고 흐르는 강물뿐이고 황막하기 그지없는 황토뿐이다.     그러나 양림은 또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겨 주었다.     일본침략자들을 소멸한 청산리 골짜기에 그의 우렁찬 함성이 울려 퍼졌고 홍군대학의 조련장에 그의 호령소리가 울려 퍼졌다. 금사강 천험인 교평 나루터에 그의 영웅적 위훈이 남아있고 황하 하구 나루터에 그의 혁혁한 전과가 남아있다. 그는 조선혁명의 승리를 중국혁명의 승리와 결부시켜 전반 약소민족과 피압박민족의 해방위업을 위해 피어린 항쟁을 계속 해왔다.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그는 중국공산당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으며 중국공산당의 고위 간부로, 걸출한 군사가로서 마멸할 수 없는 공훈을 세웠다.     그의 빛나는 항쟁의지와 헌신적인 국제주의정신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을것이며 우리의 더없이 소중한 재부로 될것이다.       양림이 희생된후 홍군 주력부대는 양림이 개척해 놓은 하구나루를 통해 순조롭게 황하를 건너 25일에 석루현을 점령하고 천 2백여명 적들을 포로하는 전과를 올렸다. 3월 하순 홍군 각 부대는 순조롭게 황하를 건너 려량산 내지로 진격하였다. 염석산의 잔여부대를 소멸한 홍군은 지주와 토호를 타도하고 빈곤한 백성들에게 량식을 나누어주면서 항일구국 사상을 선전하였다. 1936년 5월 5일 예기한 군사목적에 도달한 홍군주력은 다시 황하를 건너 섬북으로 개선하였다. 75일간 지속된 홍군의 동정은 정치와 군사적인 큰 성과를 이룩하였다. 국민당군 7개 퇀을 소멸하고 4,000여명을 포로했으며 실전에서 홍군부대의 전투력을 강화시켰다. 산서 수비에 급급한 염석산이 섬북으로 진출한 부대를 철수했기때문에 섬북근거지에 대한 위협을 제거할수 있었다. 홍군은 동정에서 8,000여명의 병사를 새로 흡수하고 30여만원의 군비를 확보함으로써 홍군과 근거지의 력량을 크게 확대하였다. 또한 선서성 20여개 현에서 무장선전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공산당의 항일구국 사상을 선전하였고 일부 항일유격대와 유격구를 창설하였다. 이는 그후 려량산 항일근거지를 개척하는 밑걸음으로 되였다. 이해 하바기에 들어서 전국각지를 전전하면서 싸우던 기타 홍군주력부대도 선후로 섬북에 모여오기 시작하였다. 제4방면군은 당중앙의 거듭되는 명령에 따라 사천을 벗어나 북상길에 올랐고 하룡이 거느린 홍군 제2군단, 제6군단과 회합하였다. 당중앙의 지시에 따라 하룡부대는 홍군 제2방면군으로 편성되였다. 두 방면군은 감숙, 녕하로 진출하여 섬북으로 진격하였다.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1936년 11월 홍군 제1방면군 주력부대가 팽덕회 사령원의 인솔하에 서부로 진격하였다. 홍군 1방면군과 2방면군 그리고 제4방면군은 산성보에서 공동작전하여 추격해오는 적 주력을 통쾌하게 섬멸한후 승리적인 대회합을 이루었다. 1936년 11월 23일 중국로농홍군 제1방면군, 제2방면군, 제4방면군 산성보에서 회합하였다. 이는 만리장정을 거친 홍군의 대회합이며 또한 홍군장정의 철저한 승리를 의미하는 순간이였다. 중국로농홍군 총사령인 주덕은, 세 주력홍군의 대회합과 산성보전투는 장정이 끝났음을 의미한다고 하면서 장정은 우리의 승리와 적들의 실패로 끝났다고 말했다. 그는, 홍군은 섬감쏘베트근거지에 발을 붙이고 전국 항일구국운동의 새로운 고조를 맞이해야한다고 강조했다.  2만 5천리 대장정은 드디어 홍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 위대한 전투에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이 참가하였고 또 소중한 생명을 바쳤다. 이들이 남겨놓은 빛나는 발자취는 장정정신과 함께 인류력사에 기록될것이며 그들의 드높은 혁명정신은 마냥 우리를 격려할것이다.  
9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⑨ 댓글:  조회:3069  추천:61  2007-05-27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⑨     풀벌레소리 자리러지고 바람이 소슬한 1935년 가을, 국민당의 통수 장개석은 우울한 심정으로 아미산을 내려왔다. 산수가 수려한 사천의 명산 아미산도 그의 울적한 심정을 달래줄수없었다. 수십만 국민당 주력이 중국대지 절반을 추적하면서 홍군을 죽음의 수렁인 설산과 초지에 몰아넣었지만 홍군은 절경에서 벗어나 지금 곧바로 섬북 쏘베트혁명근거지로 향하고있었던것이다.     아미산 기슭에서 장개석은 머리를 들어 흰구름이 감도는 산봉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저도 몰래 한숨이 나왔다. “갖은 심리적 압력을 이겨내면 6년 고생하였는데 결국 공산당과 홍군을 전멸시키지 못했구려.”  그도그럴것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전반 동북을 삼켜버리고 호시탐탐 하북과 전반 중국을 노려보고있는 상황에서 고집스레 홍군을 정벌하는데만 정력을 기울려왔던 장개석은 끝내는 실패를 승인하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착취와 압박에 허덕이는 만백성들은 물론 자산계급과 소시민들까지도 이른바 “외적을 물리치려면 내부를 먼저 안정시켜야 한다”는 장개석의 정치에 불만을 품고있었다. 장개석은 급급히 장학량에게 전보를 보내 성도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장개석 대신 동북을 잃어버린 죄명을 쓰고 외국에 망명해있던 장학량은 착잡한 심정으로 장개석을 만났다. 그는 조속히 옛 부하들인 동북군을 이끌고 일제와 싸우려하고있었다. 오직 일제와 싸워 이겨야만이 그는 일제에게 짓밟히는 동북백성들에게 미안하지 않고 동북군 장병들에게 미안하지 않을수있었으며 또 실패의 치욕을 씻을수 있었다. 하지만 장개석은 장학량을 “서북 공산당토벌 부총사령”으로 임명하였다. 장학량은 새로운 임명에 탐탁치 않았지만 잠자코 숨어있기보다는 그래도 옛부하들인 동북군을 다시 거느릴수있다는것이 반가웠기 때문에 명령을 접수하였다.       한편 이때 홍군은 급촉한 걸음으로 섬북을 향해 전진하고있었다. 죽음의 수렁으로 불리우는 송반초지를 승리적으로 정복한 홍군은 랍자구천험을 돌파하고 합달포에 이르렀다. 조선혁명가 양림은 다시 조직된 홍군 간부퇀과 더불어 단호히 모택동의 군사로선을 따라 북상하였다.     합달포에서 홍군은 간만에 편한 잠을 잘수있었다. 전사마다 동전 한잎을 분여받았다. 당시 동전 두잎이면 살진 양 한마리를 살수있었고 한잎이면 닭 다섯마리를 살수있었다. 홍군 장병들은 모두 기꺼운 심정으로 거리에 나갔다. 모욕을 하고 리발을 했고 맛나는 음식을 사먹었다. 합달포에서 모택동은 국민당 당국의 신문으로부터 중요한 정보를 장악하게 되였다. 신문에는 섬북에 강서의 중앙쏘베트지역만큼 큰 혁명근거지가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리고 악예환근거지로부터 장정을 시작한 서해동의 부대가 이미 섬북의 류지단부대와 회합했다고 보도되였다.     모택동은 홍군 퇀급이상 간부대회를 열고 북상로선의 정확성을 강조하고나서 이제 홍군은 섬북으로 진출하여 그곳의 류지단, 서해동의 홍군과 합쳐 새로운 국면을 열어나갈것이라고 했다. 회의에서는 홍군을 재편성하기로 결정하였다.     중앙종대와 홍군 1방면군 주력을 정식 중국로농홍군 섬감지대로 합병하고 팽덕회를 사령원으로 모택동을 정치위원으로 하였다. 그리고 홍군 1군단을 섬감지대 1종대로, 3군단을 2종대로 중앙종대를 3종대로 편성하였다. 양림이 소속한 간부퇀은 섬감지대 3종대로 되였다.     재편성을 거친 홍군은 8천여명이였다. 장병들은 경건한 걸음으로 섬북을 향해 전진하였다. 섬북이 어떤 곳인지는 누구도 몰랐지만 사람마다 희망으로 가득찼다. 그들은 물이 줄어든 위하를 순조롭게 통과하고 소규모의 동북군을 물리치고 륙반산을 넘었다.       홍군 섬감지대는 드디어 꿈속의 천당에 들어섰다. 눈앞에는 일망무제한 황토고원이 펼쳐졌다. 고원에는 수많은 황토가 쌓여 언덕을 이루었고 또 비바람에 씻기고 패여 깊은 골짜기를 형성해 놓았다. 메마른 서풍은 모래먼지를 날리며 몰아쳤고 흙먼지가 전사들의 옷속으로 날아들었다. 드넓은 황토벌에서 이따금 귀가하는 양떼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군 하였다. 이 모든 정경은 남방에서 온 홍군장병들에게는 신기하기만 하였다. 홍군전사들은 기꺼운 심정으로 노래를 부리며 행군하였다. 대오는 앞뒤가 보이지 않을정도로 길게 늘어서있었다. 게다가 먼지가 자욱하여 앞에서 노래를 부르며 전진하고있는 전사들은 뒤에서 후근부대가 적과 조우한것조차도 몰랐다.     대오의 마지막에서 달리던 양림과 간부퇀 전사들은 갑자기 나타난 동북군 기병부대의 습격을 받았다. 전투경험이 풍부한 양림은 즉각 전사들을 이끌고 응전하였다. 그는 신속히 골짜기속으로 달려가서 몸을 은페하고 적 기병을 저격하였다. 전사들도 그의 뒤를 따라 모두 골짜기에 몸을 숨겼다. 말을 탄 적들은 골짜기로 들어올수없었고 또 말우에서 사격하려면 명중률도 낮았다. 양림과 전사들은 정확한 사격으로 많은 적들을 사살하였고 또 일부 부대를 나누어 적의 배후를 급습하여 끝내 적의 기병부대를 물리쳤다.         만수천산을 지나 중국 10여개 성을 전전한 홍군은 드디여 섬북의 오기진에 이르렀다. 홍군전사들은 어린이들마냥 오기진으로 뛰여갔다. 석양이 붉게 물들어있었고 길가의 흙담에는 어슴푸레 “중국공산당만세!”라는 표어가 씌여져있는것이 보였다. 오기진 거리에는 행인들이 별로 없었다.     이때 머리에 흰수건을 두른 몇사람이 달려와 홍군전사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들속에는 향당지부서기가 있었고 쏘베트 향정부 주석도 있었다.     “쏘베트! 쏘베트정부!”     홍군전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어 마중나온 사람들을 얼싸안았다. 그들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했다. 1935년 10월 19일 섬서성 오기진, 강서성 중화쏘베트를 떠나 장정을 시작한 당중앙과 홍군은 일년하고도 9번째 되는 날에 섬북쏘베트혁명근거지에 도착했던것이다.   모택동은 쏘베트 향정부 당정책임자들과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면서 근거지의 상황을 료해하였다. 섬감쏘베트혁명근거지는 1927년부터 창설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섬서성 당위원회의 지도하에 청간, 위화 등지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봉기실패후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32년에 중국로농홍군 섬감유격대가 설립되였고 이 부대는 후에 홍군 26군으로 개편되였다. 1934년에 이르러 류지단이 령도한 이 부대는 섬북에 혁명근거지를 형성하고 섬감변구 쏘베트정부와 혁명군사위원회를 설립하였다. 습종훈이 정부주석을 맡고 류지단이 군사위원회 주석을 맡았다. 이시기 또 각지의 유격대를 규합하여 홍군 27군으로 개편하였다. 류지단이 홍군 26군과 27군을 거느리고 국민당군과 간고한 전투를 계속하고있을무렵 악예환근거지로부터 장정을 했던 홍군 25군이 섬북에 도착하였다. 홍군 25군은 악예환근거지에 남겨진 부대였다. 이 부대는 제4방면군 주력의 이동을 성공적으로 엄호한후 하남, 호북, 섬서, 감숙 등지를 전전하였다. 군장 장자화, 부군장 서해동이 거느린 이 부대는 1935년 7월 국민당당국의 신문에서 중앙홍군과 제4방면군이 회합했다는 소식을 알게 되였고 당중앙과 홍군주력은 꼭 북상할것이라고 판단하게 되였다. 이해 9월 15일 제25군은 섬서성 연천현 영평진에서 류지단의 제26군, 27군과 회합하였고 영편진에서 중국로농홍군 제15군단을 조직하였다. 서해동이 군단장을 맡고 장자화가 정치위원을 맡았으며 류지단이 부군단장 겸 참모장으로 있었다.   모택동과 중앙홍군은 오기진에서 추격해오는 감숙군벌 마홍빈의 기병부대를 소멸하고 하사만(下寺湾) 으로 진격해 홍군 제15군단 주력과 회합했다. 15군단은 총과 탄약, 의복, 약품을 중앙홍군에 주었을뿐만 아니라 동전 5천원을 지원하였다. 중앙홍군에서는 양림과 주사제, 왕수도, 송시륜, 황진, 오수권을 비롯한 많은 주요간부들을 15군단에 지원 보냈다. 1935년 11월 3일 당중앙회의가 하사만에서 소집되였다. 회의후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정부는 모택동을 주석으로하는 중국로농홍군 서북혁명군사위원회를 설립하고 중국로농홍군 제1방면군 번호를 회복하기로 하였다. 홍군 제1방면군은 팽덕회가 사령원을 맡고 모택동이 직접 정치위원을 맡았다. 그리고 원 1군단과 3군단을 제1군단으로 합병한후 림표가 군단장을 맡았고 서해동이 계속 제15군단 군단장을 맡았다. 제15군단 산하에 제75사와 78사, 81사를 두었다. 양림은 홍군 25군으로 편성된 제15군단 제75사 참모장을 맡게 되였다. 홍군 제1방면군 총병력은 만 6천여명이였다.       홍군 제1방면군이 섬북에 도착한 사실은 국민당군을 크게 놀래웠다. 국민당은 많은 병력으로 섬서서부를 봉쇄하고 동북군 4개사를 동원해 홍군을 공격하게 했다. 선진적인 무기로 무장한 동북군은 전투력이 강했다. 만약 이들이 홍군을 포위한다면 홍군과 혁명근거지는 엄중한 위기에 처하게 된다. 전투의 승부는 제1방면군이 섬북에 발을 붙일수있는가에 직접 관계되였다. 만약 동북군이 근거지에 진입하면 홍군은 다시 부평초같이 이곳저곳 전이하게 된다. 그러므로 홍군은 반드시 이 전투를 이겨야했다.     하사만 대회가 있은후 모택동과 팽덕회가 제15군단 지휘부로 찾아왔다. 그들은 제15군단 각부대 지휘원들과 함께 적정에 대해 주밀하게 토의한후 섬북의 홍군을 집중하여 직라진 부근에서 적을 유인, 소멸하기로 결정했다. 양림은 15군단과 75사가 맡은 임무를 자상히 연구하고 직접 현지에 가 보았다.     직라진은 주민이 백세대도 안되는 작은 진이였다. 세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작은 길 하나가 진을 가로질러 뻗어있었다. 진동쪽에 돌로 에워싸인 작은 산채하나가 있었고 북쪽으로는 강 하나가 흐르고있었다. 양림은 나무 하나, 언덕 하나를 빠짐없이 살펴보고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러면서도 진동쪽의 산채가 마음이 놓이지 않아 전사들을 보내 산채를 허물어버리게 하였다.     중앙군사위원회의 포치에 따라 홍군 제1방면군 각부대는 직라진 부근으로 진격하였다. 1군단은 북쪽의 석취와 봉황두에 매복하였고 15군단은 동남쪽의 한 마을에 매복하였다. 15군단의 백여명 홍군이 양림의 지시에 따라 산마루에서 적을 유인하였다. 11월 20일, 동북군 57군의 선봉을 맡은 109사가 직라진으로 공격해왔다. 우원봉이 거느린 이 부대는 유인하는 홍군과 접전하면서 쉽게 직라진에 들어왔다. 우원봉은 626퇀과 627퇀을 진 량쪽고지에 포치하고 지휘부를 진 가운데 설치했다. 모택동은 직접 홍군지휘부에 찾아와 적들을 깨끗히 소멸할것을 각부대 지휘원들에게 요구했다. 모택동과 중앙군사위원회의 요구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양림은 직라진부근의 적들을 전부, 철저히 섬멸하기로 작심했다. 밤이 깊어지자 홍군은 신속히 직라진쪽으로 접근하여 철통같이 포위하였다.  21일 새벽 돌격나팔소리가 울리자 홍군은 밀물처럼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1군단과 15군단은 남북으로 협공하였다. 양림은 작전계획에 따라 부분적인 전사들을 거느리고 곧바로 진중심부로 돌진하였다. 2시간의 격전을 거쳐 그들은 적지휘부를 점령하였으며 많은 전략물품을 로획하였다. 적 109사 사장 우원봉이 급급히 패잔병들을 이끌고 진동쪽의 산채에 들어가자 양림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산채를 철통같이 포위하였다. 산채의 돌담과 물길을 이미 끊어놓았기 때문에 적들은 오래 버티지 못할것이라고 판단한 양림은 공격을 잠시 멈추라고하였다.   홍군 기타 부대는 직라진의 적들을 소멸하고 적 지원병을 격퇴하였다. 직라진의 적들은 잠을 채 깨지 못한채 대부분 격살되거나 생포되였다. 적 626퇀 퇀장은 자살하고 627퇀 퇀장은 중상을 입고 퇴각하다가 숨졌다. 산채에서 지원군을 기다리던 우원봉은 포위를 뚫기로 결심하였다. 양림은 전사들을 시켜 한쪽 포위를 조금 틔우게 하였다. 우원봉은 급급히 수백명 병졸들을 이끌고 틈을 타서 도주하였다. 적들은 싸울렴을 하지않고 모두 도주하기에만 급급했다. 이때를 기다리던 양림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10여리를 추격해 적을 전부 소멸하였다. 적 109사 사장 우원봉도 격살되였다. 직라진 전투에서 홍군 제1방면군은 적 천여명을 격살하고 5천 3백여명을 생포하였으며 수많은 무기를 로획하였다. 뿐만 아니라 무기전 두대도 로획하였다. 직라진 전투는 홍군 제1방면군의 전환점이라고할수있다. 1년간 간고한 장정을 진행해온 홍군들은 드디어 발붙일 곳이 있게 되였고 새로운 발전을 위한 근거지가 있게 되였다. 이무렵 중국력사도 새로운 전환을 맞이하고있었다.   1935년 12월 9일 북평의 6천여명 학생들이 거리에 떨쳐나와 반일시위를 하였다. 그들은, 내전을 중지하고 일치하게 항일할것을 소리높이 웨쳤다. 간고한 로정을 거쳐 섬북에 도착한 홍군전사들은 추운 겨울 북평에서 발생한 이 사건의 중요성을 잘 모르고있었다. 하지만 모택동은 민감하게 이를 파악하고있었으며 수많은 역경을 이겨온 홍군에게 새로운 력사적 기회가 도래했음을 감지하고있었다.  
8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⑧ 댓글:  조회:3287  추천:65  2007-05-27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⑧     사천성 북부의 송반초지는 평균 해발 3천여메터의 고원습지로서 예로부터 이곳은 인적하나 없는 죽음의 수렁으로 알려져있었다. 남북으로 약 2백킬로메터, 동서로 약 백킬로메터되는 송반초지는 사천성과 감숙, 섬서의 린접한곳에 위치했다. 만수천산을 넘고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이곳에 당도한 홍군은 또 한차례의 생사를 다투는 준엄한 시련을 이겨내야했다. 장정을 시작해서부터 홍군이 이겨낸 수많은 시련 가운데서 악렬한 자연환경으로 인한 시련을 놓고볼때 아마도 송반초지의 시련이 가장 컸다고 할수있다.     초지의 날씨는 변덕스럽기 그집없었다. 아침에 먹장구름이 몰려오며 찬비가 후둑후둑 내리다가 점심에는 갑자기 맑게 개인다.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군 하였다. 폭우로하여 초지의 강물이 급격히 불었고 도저히 도섭할수없었다. 홍군선견대는 할수없이 비가 멎고 물이 줄어들기를 기다렸다가 계속 전진하군 하였다.     초지 한가운데는 작은 산등성이가 있었다. 이곳으로부터 초지의 물줄기는 남북으로 갈려 수천갈래로 흐른다. 남으로 흐르는 강들은 민강과 합쳐 장강으로 흘러들고 북으로 흐르는 강들은 북으로 마곡강과 합쳐 황하로 흘러든다. 그러므로 이곳은 중국의 두갈래 큰 강인 장강과 항하를 나누는 분수령이기도 하였다.      초지에 들어선 이튿날부터 많은 홍군 장병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체내의 마지막 한가닥 열량까지 모조리 소모하고 소리없이 흙탕속에 잠겨버리군 하였다. 어떤 사람은 저녁까지만 하여도 빗속에서 전우들과 함께 서있었지만 이튿날 날이 밝자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섰던 자리에는 이따금 거품을 뿜는 검은 흙탕물뿐이였다. 계속 전진하고있는 사람들의 얼굴색도 검푸르러 있었다. 모진 추위와 기아로하여 많은 전사들은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중앙혁명군사위원회 간부퇀 참모장인 양림, 중앙종대 제3제대 책임자인 무정을 비롯한 조선혁명자들도 기타 홍군전사들과 마찬가지로 이 간고한 송반초지의 어려운 행군을 진행하였다. 험악한 대자연은 인간 정신력과 의지력의 극한을 강요하고있었던것이다.       1935년 5월 참모장 양림이 거느린 간부퇀 전사들의 빛나는 전과로 금사강을 건넌 중앙홍군은 승리적으로 제4방면군과 회합하여 좋은 국면을 개척할수있었다. 그러나 제4방면군의 장국도가 중앙의 지시에 복종하지 않고 딴전을 부렸기 때문에 홍군은 이 불모지인 송반초지를 지나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금사강을 승리적으로 건넌 중앙홍군은 회리부근에서 회의를 소집하였다. 한편에서는 양림을 비롯한 간부퇀이 제3군단과 함께 회리현성을 공격하는 치렬한 접전을 치르고 한편에서 지도간부들이 비상회의를 소집하였다. 회리회의에서는 군사작전에 대한 총화를 진행하고 계속 북상하여 홍군 제4방면군과 회합할 계획을 세웠다.     양림은 간부퇀과 함께 회리로부터 출발하였다. 홍군 참모장 류백승이 거느린 홍군 선견대는 순조롭게 소수민족지역을 통과했으며 슬기롭게 대도하기슭에 당도하였다. 홍군은 안순장 나루에서 배한척으로 강행도하하여 대안의 적진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안순장에는 홍군을 도하시킬 나무배가 고작 4척뿐이였다. 적 주력부대가 곧 추격해 왔기 때문에 홍군은 여기에서 며칠씩 도강할 여력이 없었다. 류백승과 섭영진은 즉각 홍군 1군단과 간부퇀을 거느리고 대도하 북쪽기슭으로부터 로정교방향으로 공격해갔고 1군단 2사와 홍군 5군단이 림표의 지휘하에 대도하 남쪽기슭으로부터 로정교탈취작전에 나섰다.     양림은 홍군들과 함께 대도하 북쪽기슭에서 행동했다. 부대는 안순장을 지원하러 온 사천군과 부딛쳤다. 홍군전사들은 두려움 없이 적들과 싸워 하나하나의 고지들을 점령하고 로정교로 향하는 길을 열어놓았다. 양림과 전사들은 일주야를 적들과 계속 치렬한 접전을 치르면서 로정교에 당도하였다.     대도하 남쪽기슭으로부터 전진하는 홍군들은 적들과 큰 전투를 겪지 않았다. 선견대는 하루 120킬로메터를 달려 남먼저 로정교에 이르렀다.     대도하로부터 로정에 이르는 이곳은 해발 7천여메터되는 대설산과 해발 3천여메터의 이랑산이 마주한 곳이다. 대도하 강물은 두 산사이에 깊은 협곡을 형성하면서 벼랑사이를 사품치며 흘러내린다. 청나라 강희 44년에 서장의 라싸로 통하는 길을 열기 위해 이곳에 다리를 가설하게 되였다고 전해지고있다. 다리는 13개의 굵은 쇠사슬로 량쪽벼랑을 이어주고 거기에 널을 펴서 만든 다리였고 그 길이는 101.6메터였다. 홍군을 막기 위해 적들은 대안에 사격진지를 구축했고 다리의 널판을 죄다 뜯어버렸다. 로정교는 오직 13개의 굵은 쇠사슬만이 허공중에 걸려있을뿐이였다.     홍군은 22명 돌격대원을 조직하였다. 그들은 추호도 주저없이 쇠사슬을 타고 앞으로 전진하였다. 그들의 뒤로 다른 전사들이 부지런히 널판을 깔아 다리를 만들면서 전진했다. 이들을 엄호하기 위해 홍군전사들은 기관총을 집중해 적진을 향해 사격하였으며 사기를 돋구기 위해 나팔수들을 모아 공격나팔을 울리게 하였다. 나팔소리가 천년의 협곡을 진동하였고 콩볶듯한 총성이 그칠사이 없었다.     두려움 없이 공격해오는 홍군전사들 앞에 더럭 겁에 질린 적들은 진지에 불을 지르고 도주하였다. 22명 돌격대원들은 용감히 불속에 뛰여들어 길을 헤치고 로정교를 점령하였다. 이번 전투에서 영웅적 22명 돌격대원들은 한명도 희생되지 않았다.     날이 저물무렵 적들과의 치렬한 접전을 거친 양림도 홍군전사들을 거느리고 로정교에 당도하였다. 강 량안의 전사들은 부근의 적들을 소멸하고 로정교를 완전히 확보하게 되였다.       로정교를 탈취한 홍군은 대설산인 협금산을 넘어 드디어 홍군 제4방면군과 회합하였다. 중앙홍군과 홍군 제4방면군이 회합한후 홍군 간부퇀은 제4방면군의 홍군대학과 합병하여 새로운 홍군학교를 편성하게 되였다. 간부퇀 퇀장인 진갱이 악예환혁명근거지에서부터 장국도와 모순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홍군 1군단 사장으로 조동되였다. 그리하여 예지량이 새로운 홍군학교 교장을 맡았다. 합병한후 홍군간부퇀은 홍군학교 특과퇀으로 편성되였다. 특과퇀의 대리퇀장은 위국청이였고 조선혁명가 양림은 계속 특과퇀의 참모장을 맡았다.      1935년 6월 26일 중공중앙 정치국회의가 량하구에서 소집되였다. 회의에서는 금후의 작전방향을 토의했으며 계속 북상하여 섬북으로 진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순조롭게 사천을 벗어나 섬북으로 전진하기 위해 송반을 점령하는 송반전역을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6월 29일 중공중앙정치국 상무회의에서는 새로운 조직구성을 내왔다. 장국도, 진창호, 서향전을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위원으로 보충선거하였다. 하지만 두 주력홍군의 회합은 새로운 모순을 야기시켰다. 장국도는 당중앙에서 이미 결정한 북상로선을 반대하면서 홍군은 남하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여러가지 구실을 대면서 북상하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홍군의 송반전역도 무산되고말았다. 국민당의 주력부대인 호종남군이 이미 송반을 점령하고 막강한 병력으로 수비하고있기 때문이였다. 뿐만 아니라 홍군은 장국도의 주장에 따라 두갈래로 나뉘게 되였다. 홍군 5군단, 9군단과 제4방면군의 부분적 부대로 좌로군을 편성하고 1군단과 3군단, 홍군 4방면군 부분적 부대로 우로군을 편성하였다. 그리하여 모택동이 거느리던 중앙홍군은 둘로 나뉘여지게 되였고 모택동의 오랜 전우였던 주덕도 좌로군을 거느려야했기때문에 모택동을 떠나게 되였다.     1935년 8월 21일 모택동은 우로군을 거느리고 당중앙과 함께 일망무제한 송반대초지에 들어섰다. 만약 병력을 분산하지 않았다면 두 주력홍군은 얼마든지 송반의 적진지를 돌파할수있었다. 하지만 적이 한발 앞써 유리한 지세를 차지했고 홍군도 두갈래로 나뉘여 병력이 약화되였기 때문에 부득이 죽음의 초지를 지나지 않을수 없었다. 양림이 소속된 홍군학교도 우로군에 포함되였다. 그는 특과퇀 장병들을 거느리고 모택동을 비롯한 당중앙과 함께 초지에 들어섰다. 선견대가 가면서 길을 표시해 놓았지만 비바람에 씻겨 대부분 알아볼수없었다. 양림은 전사들과 함께 길잡이가 알려주는 방법대로 풀뿌리가 무성한곳을 밟으며 한걸음한걸음 앞으로 나갔다. 검은 빛갈을 띤 초지의 물은 독성이 있어서 그냥 마시면 배가 붙다가 죽게 된다. 그리고 상처난 자리에 물이 묻으면 곧 썩어버리군 하였다.     찬비와 희박한 공기 그리고 죽음의 함정이나 다름없는 수렁에 비해 더 큰 위험은 식량부족이였다. 사천북부 척박한 곳으로부터 송반초지에 들어왔기에 홍군전사들은 충족한 식량을 장만하지 못했다. 일부 대오는 초지에 들어선 이틀날부터 쌀이 떨어졌다. 그리하여 수시로 쓰러지는 전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체내의 마지막 한가닥 열량까지 다 소모하고 숨졌다.     양림은 여러 군관학교에서 철같이 굳세게 다져온 체력을 가지고있었다. 그는 전사들을 도와주고 앞장서서 길을 내면서 전진하였다. 간부퇀 전사들은 양림이 낸 발자욱을 따라 손에 손잡고 한걸음한걸음씩 따라 나섰다. 전반초지는 습하기 그지없었고 마른땅 한쪼각도 찾을수 없었다. 불을 피우기도 여간 힘들지 않았다. 전사들은 겨우 피워놓은 모닥불을 둘러싸고 온기를 보충하면서 밤을 지내야했다.        뭇별이 초롱초롱한 하늘을 쳐다보면서 양림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몸은 마냥 추워들고 배도 굶주렸지만 종시 그리운 고향과 안해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수 없었다. 장정을 시작한뒤로 이미 소식이 끊긴지 오래되였다. 동북에서 지하투쟁을 견지하고있는 안해 리추악의 환경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 일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고향산천은 계속 일제에게 짓밟히고있을것이다. 씻은듯 맑은 밤하늘에는 사랑하는 안해의 얼굴이 나타나 웃어주는것만 같았다. 양림은 끊없는 향수에 잠겼다.        날이 훤히 밝아오자 하늘에는 다시 먹장구름이 지고 소나기가 퍼부었다. 이곳에 계속 주저해 있을수는 없었다. 해야할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사랑하는 안해를 만나보고 해방된 조국에 갈려면 우선 초지의 죽음의 고비를 꼭 전승해야했다. 전세계 무산자들과 함께 모든 죽음과 시련을 이겨내고 승리의 그날을 맞이해야했다.     양림은 정신을 가다듬고 전사들을 격려하면서 걸음을 재우쳤다. 폭우로 물이 많이 불어있었다. 빗물에 잠겨 어느곳이 수렁이고 어느곳이 초지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였다. 양림은 곁의 전사들과 함께 서로 팔을 끼였다. 이렇게 하면 수렁에 빠진 사람을 곁에서 쉽게 구할수있었다. 홍군장병들은 한마음으로 뭉친 강철의 집단적 힘으로 죽음의 초지를 정복하려했다. 수백명 전사들이 서로 팔을 겯고 어깨나란히 줄지어 망망한 초지를 향해 전진하였다. 그들은 인터나쇼날을 높이 부르면 드높은 열의로 전진했다. 7주야의 간고한 행정을 거쳐 우로군 홍군들은 드디어 죽음의 지대로 불리우는 송반초지를 승리적으로 정복하였다. 홍군이 절대 스스로 죽음의 길을 찾아 송반초지로 가지 않을것이라고 판단하고있던 국민당군 호종남은 드디어 자기의 오판을 알게 되였다. 그는 뒤늦게 나마 포좌에 부대를 파견해 홍군을 막게 하였다. 이를 미리 파악한 홍군은 포좌를 포위하고 지원부대를 매복습격하는 전술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홍군의 위기를 가셔지지 않았다. 당중앙에서는 신속히 북상할것을 좌로군의 책임자 장국도에게 촉구하였다. 하지만 장국도는 물이 불어 부대가 전진할수없다는 리유로 이를 거부하였고 주덕의 권고도 물리치고 계속 남하하려 시도하였다. 게다가 당중앙과 함께 우로군에 포함되였던 홍군 제4방면군의 일부 고위간부들도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1935년 9월 장국도는 드디어 당중앙의 북상로선을 거부하고 단연히 남하할 명령을 내렸다. 우로군 책임자의 한사람인 진창호도 장국도의 명령에 따르기로 하였다. 모택동과 당중앙은 할수없이 파서회의를 열고 대책을 강구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장국도의 작법을 비판하면서 북상을 견지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모택동은 팽덕회가 거느린 제3군단과 중앙종대에 명령을 내려 밤도와 북상하도록 하였다. 부대는 신속히 행동하여 이미 아계로 전진한 홍군 제1군단과 회합하려 떠났다. 우로군의 홍군대학은 새벽 3시에 출발명령을 받았다. 명령서는 모택동과 주은래가 공동으로 서명했다. 특과퇀의 정위 송임궁은 부대를 소집하고 연설했다. 그는 북상과 남하의 로선투쟁을 설명하고나서 북상하려는 사람들은 중앙홍군을 따르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강요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양림과 특과퇀은 원래부터 중앙홍군을 따라 장정해온 터이므로 두말할것도 없이 부대를 따라 나섰다. 원 간부퇀의 대부분 간부와 전사들은 홍군학교에서 교원으로 있었고 학원들은 대부분 홍군 제4방면군의 전사들이였다. 그러므로 양림을 비롯한 원 간부퇀의 장병들이 일제히 북상할것을 주장하고 떠나자 학원들도 따라나서게 되였다.   1935년 9월 10일 밤, 중앙홍군은 6시간의 밤길을 달려 아서에 이르렀고 날이 밝자 계속 아계로 전진하였다. 모택동과 장국도의 북상과 남하분쟁은 군사적인 쟁론이면서도 의지의 대항이기도 하였다. 중앙홍군은 홍군 1군단까지 합쳐 겨우 8천명밖에 되지 않았다. 주덕, 류백승을 비롯한 주요장령이 장국도 부대에 남아있고 제5군단과 9군단도 제4방면군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모택동의 북상의지는 무엇보다도 강했다. 그는 이 8천여명의 전사들을 거느리고 중국혁명의 새길을 개척하고 새로운 국면을 열어나가려했다. “우리는 꼭 승리해야한다. 아니 우리는 꼭 승리할수있다!”     굳은 혁명리상과 정치적 신념은 더욱 굳은 의지를 낳았고 그 의지는 그무엇으로도 정복할수없었다.     긴긴 밤이 지나고 동방이 희쁨히 밝아왔다. 피빛의 아침노을이 붉게 비추고있다. 죽음의 수렁으로 불리우는 송반초지를 지난 홍군은 두터운 황토가 쌓인 섬북으로 진군하였다. 람루한 옷차림에 무기도 보잘것 없는 대오였지만 이 대오는 그 무엇으로도 정복할수없는 강철의 대오였다. 중국혁명과 세계 피압박인민의 운명을 짊어진 이 대오는 서서히 중국서북대지를 향해 움직여갔다.  
7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⑦ 댓글:  조회:3370  추천:94  2007-05-27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⑦ 세계의 지붕으로 불리우는 청장고원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금사강은 만리장강의 상류이다. 만년설로 뒤덮인 탕굴라산맥 북쪽기슭으로부터 한줄기 물길이 흘러내려오다가 강폭이 점차 넓어지면서 천리 금사강이 되였다. 금사강은 경치가 수려한 운남의 려강에서 큰 굽이를 돌아 동으로 흐르고흐른다. 강물은 해발 3340메터에서 2296메터로 흘러 그 락차가 천여메터에 달한다. 운남경내에서 흐르는 금사강은 강폭이 비교적 넓고 물살이 급했다. 게다가 강량안은 높은산으로 이어져 그 지세가 무척 험했다.   북상항일의 전략적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중앙홍군은 오강을 건너고 귀양으로 양동하다가 1935년 4월말에 운남성 서북쪽에 이르게 되였다. 중앙홍군은 운남성 소재지인 곤명을 공격하는 양동작전을 펼쳐 금사강부근의 적들을 모두 곤명부근으로 모이게 한다음 금사강을 건너 북상할 전략을 세웠다. 이를 위해 모택동과 주은래는 직접 도강계획을 작성하고 1935년 4월 29일 중앙혁명군사위원회의 이름으로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작전명령에 따라 홍군 제1군단은 원모현에서 북상하여 금사강의 룡가나루터를 점령하고 제3군단은 순전현에서 북상하여 홍문나루터를 점령하며 중앙종대는 간부퇀을 선봉으로 직접 금사강의 교평나루터를 점령하게 되였다. 명령이 떨어지자 홍군 세갈래 부대는 주야를 불문하고 강행군을 하였다. 그들은 명령에 따라 길에서 현성을 공략하지도 않고5월 3일전으로 여러 나루터를 점령하고 나룻배를 확보하여 도강을 실현해야했다.   중앙종대 홍군간부퇀이 점령해야할 금사강 교평나루는 급류가 사품치고 량안이 깎아지른 벼랑으로 된 험요한 요새였다. 이번 작전에서 가장 관건적인 문제는 적 보다 한발 앞써 각 나루터에 도착하는것이였다. 만약 적들이 홍군의 의도를 먼저 파악하고 강 량안의 배들을 죄다 불태워버린다면 홍군은 큰 곤경에 빠지게 된다. 교평나루터의 중요성을 파악한 중앙에서는 류백승을 홍군간부퇀 선봉부대 지휘자로 임명하였다. 당의 총책임을 맡은 장문천도 간부퇀에 찾아가 5월 1일전으로 나루터를 점령하는 영광스러운 임무를 완수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간부퇀 장병들은 운남성 서북쪽에 위치한 등록현의 한 산간마을에 주둔하고있었다. 4월 29일 저녁 주은래는 류백승과 함께 이곳에 찾아왔다. 담배연기가 자욱한 작은 방에서 주은래와 류백승은 교평나루를 탈취할 작전계획을 자상히 연구하였다. 주은래는, 교평나루 탈취는 당과 홍군의 생사에 관계되는 중요한 임무라고 강조하면서 꼭 신속히 행동하여 적을 불의에 습격함으로써 임무를 완수해야한다고 했다. 간부퇀의 참모장을 맡은 양림은 주은래와 너무 익숙한 사이였다. 일찍 국민혁명군 두차례 동정시기부터 함께 작전을 연구했었고 서금에서도 함께 일을 보았던 사이였다. 그는 자기의 견해를 적극 내놓고 간부퇀 각 부대의 상황을 자상히 설명하였다. 끝으로 그들은 류백승과 정위 송임궁이 간부퇀의 선두부대인 3영을 거느리고 출발한 다음 퇀장 진갱이 나머지 부대를 거느리고 따라 나서기로 하였다. 주은래는 가장 어려운 상황까지 고려하였다. 그들은 만약 간부퇀이 강나루를 확보하고 강을 건넜지만 배가 없어 주력부대가 강을 건느지 못할 경우 단독으로 북상하면서 유격전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작전을 쉽게 하달하기 위해 류백승과 양림은 모두 선두부대에 나섰다. 간부퇀 선두부대 전사들은 하루 180리의 속도로 급행군하여 교평나루터로 달려갔다. 간부퇀의 8련이 선두영의 앞장에 서서 내처 달렸다. 그들은 로획한 국민당군복을 바꿔입고 길잡이를 따라 산길을 달렸고 장밤 지속된 급행군 도중 십분밖에 쉬지 않았다. 늘 산길을 달리던 길잡이 마저 이처럼 고된 급행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길잡이를 자주 바꾸지 않을수 없었다. 어느 한 산마루를 톺아오를때였다. 40여세인 길잡이가 좀처럼 발을 떼지 못했다. 그는 이곳 산길에는 익숙했지만 아편쟁이여서 체력이 많이 떨어져있었다. 할수없이 홍군전사들은 번갈아가면서 그를 담가에 들고 달려야했다. 이처럼 간고한 강행군을 거친 간부퇀전사들은 밤 장막속에서 강가에 도착하여 은은히 들려오는 물소리를 듣게 되였다.     이곳 금사강은 사천과 서장 사이를 흘러내려오다가 운남성 석고부근에서 180도의 큰 굽이를 돌아 북쪽으로 흘러간다. 강줄기는 고산준령을 가로질러 3천여메터 깊이의 대협곡을 형성해 놓았고 바위나 벼랑에 부딛치는 급한 물소리는 협곡을 진동하였다.     중앙홍군이 머리를 돌려 북상길에 오를 무렵 장개석은 급급히 곤명에 있는 군벌 룡운에게 전보는 보냈다. 그는 금사강의 모든 배들을 불살라버리고 강을 철저히 봉쇄할것을 명령하였다.     교평나루터는 금가강기슭의 중요한 나루터로서 사천과 운남 두성을 이어주는 길목이였다. 예로부터 소금, 량식, 가죽, 약재를 비롯한 물건들이 이곳을 통해 교역되였다. 교평진으로부터 나루터까지 산비탈길이였는데 량켠은 모두 천애절벽이여서 자칫하면 천길 낭떨어지로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     간부퇀 선두부대가 강기슭에 도착하였을때 교평나루터는 이미 봉쇄상태에 처해있었다. 하지만 경각성을 늦춘 적 군관이 사사로운 일 때문에 숨겨둔 배 두척이 있었다. 국민당 복장을 한 홍군은 쉽게 이 두 배를 빼앗았고 또 다른곳에 숨겨둔 배 3척을 찾아냈다.     양림은 선두부대에 도강명령을 내렸다. 전사들은 신속히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갔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강대안의 적들은 마작놀음에 정신없었다. 홍군전사들은 신속히 적들을 생포하고 나루터를 통제하였다.     홍군이 순조롭게 교평나루터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접한 류백승은 즉각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명령에 따라 간부퇀 후속부대는 계속 강을 건너고 선두부대는 신속히 강북 여러진지를 통제해야했다. 홍군전사들은 요기를 할 사이도 없었다. 그들은 길가의 주인없는 한가게에서 상우에 돈을 남겨두고는 만두며 구운떡을 가져왔다. 전사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만두를 나누어 먹고 대충 허기를 달랬다. 강북 수비를 맡았던 운남군벌 왕보경은 홍군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급히 도주하였다. 한참 도주하다 생각하니 나루터를 빼앗긴 책임 역시 총살감이였다. 그는 할수없이 병졸들을 수습해 다시 나루터로 공격해왔다. 이미 유리한 지세를 점한 홍군전사들은 공격해오는 적들을 효과적으로 저격하였고 적 두목인 왕보경은 홍군에게 사로잡히고말았다.         나루터에 도착한 류백승은 놀람을 금치못했다. 지세나 험하고 물살이 급해 도저히 다리를 가설할수없었다. 게다가 중앙군사위원회에서 급전이 왔다. 홍군 1군단과 3군단이 모두 도강작전에서 실패했던것이다. 1군단은 곤명으로의 양동을 멈추고 급급히 금사강가의 룡가나루터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비행기정찰로 홍군 1군단의 행동을 파악한 적들은 이미 룡가나루터를 철저히 봉쇄하고있었다.  3군단도 명령에 따라 홍군나루터를 점령했지만 배 한척밖에 구하지 못했다. 룡가나 홍문 나루터 역시 교평나루터와 마찬가지로 다리를 가설할수없었다. 그리하여 중앙군사위원회에서는 원 작전계획을 포기하고 모두 교평나루로 이동하여 그곳으로 강을 건널것을 1군단과 3군단에 명령하였다.     새로운 명령을 받은 류백승은 걱정이 태산같았다. 한번에 수십명밖에 실지 못하는 배 5척으로 1군단과 3군단을 포함한 모든 홍군부대를 도강시킨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게다가 강북의 적정이 걱정스러웠다.     이때 홍군전사들이 배 2척을 더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홍군은 배 7척으로 도강하게 되였다. 강기슭에 사령부를 설치한 류백승은 중앙군위에 전보를 보냈다.    “교평나루터는 이미 통제되였고 배 7척을 찾았음. 배 7척으로 주야에 만명을 도강할수있으니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종대는 5일에 도강을 끝낼것으로 판단함”     전문을 보낸 류백승은 극도로되는 피로로 쓰러질것만 같았지만 임무를 승리적으로 완수해낸 간부퇀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간부퇀 동지들은 하루에 근 200리에 달하는 산길을 달렸소. 그것도 밤에 적들을 피해가면서 험한 살길을 달려 나루터를 점령하였소. 한 사람이 어찌 하루에 이처럼 먼길을 달릴수있겠소? 그러나 그들은 해냈소. 뿐만 아니라 전투에서 승리를 했소. 그들은 무엇에 의지했겠소? 바로 드높은 각성과 당성에 의지했던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그 누구도 이 임무를 완수못해냈을것이요.”         하지만 위험을 가셔지지 않고있었다. 모든 홍군이 교평나루 하나로만 도강하려면 최소한 5월 5일까지 시간이 걸려야했다. 그럼 이 사이 부근의 적정이 가장 중요했다. 비록 홍군의 교묘한 전술로 뒤에 처진 국민당군 주력은 한주일 남짓한 거리에 두고있지만 앞의 적정을 알수없었다. 홍군의 도강을 담보하려면 최소한 5일까지는 적 주력이 공격해오지 말아야했다.     누구도 숨을 돌릴 사이가 없었고 누구도 지친 몸을 돌볼 사이가 없었다. 류백승은 다시 눈길을 간부퇀 지휘원들에게 돌렸다. 그는 홍군주력이 강을 건느려면 시간이 필요하기때문에 강북 적의 요새인 통안주를 신속히 점령하라고 간부퇀에 명령했다.     간부퇀은 의논을 거친후 작전명령을 내렸다. 참모장 양림이 선견대를 거느리고 앞장에 서고 그 뒤에 정위 송임궁과 퇀장 진갱이 간부퇀 주력을 거느리고 따르기로하였다.     통안주는 교평나루터에서 20킬로메터 떨어진 작은 산간도시였다. 산비탈을 따라 형성된 이 도시는 인구는 많지 않았지만 교평나루터를 통하는 길목을 지키고있기때문에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했다. 게다가 부근은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지세가 아주 험했다.     “모든 희생을 아끼지 말고 반드시 통안주를 점령하여 홍군의 도강안전을 보호하라!”     류백승 참모장의 명령에 따라 양림은 간부퇀 선견대를 거느리고 통안주로 돌진했다.     통안주로 통하는 길은 가파르고 좁은 산길 하나뿐이였다. 이 산길에는 길은 산허리와 벼랑을 에돌아 굽이굽이 뻗어있었고 대부분 길목은 겨우 한사람만이 통과할수있었다. 그중 화염산으로 불리우는 길목이 가장 험했다. 이곳 산길 한쪽은 천길 벼랑이였고 한쪽은 천길 낭떨어지였다. 적들은 화염산 길목을 차지하고 유리한 지세를 리용해 공격해오는 홍군에게 기관총 사격을 가했고 또 큰돌을 굴러내려보내면서 완강히 저항했다.     양림은 간부퇀의 참모장이였지만 본대나 후위에서 부대를 지휘하거나 작전을 감독하지 않았다. 그는 몸소 정찰패를 거느리고 앞장서 달렸다.     돌격대의 나팔소리가 울리자 양림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화염산 길목으로 돌진했다. 앞에서 달리던 전사들이 적의 총에 맞아 쓰러졌고 또 일부는 산정에서 굴러내리는 돌에 맞아 상처를 입었다. 수많은 전투를 겪어온 양림은 조금도 두려움 없이 돌진하던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예리한 관찰로 신속히 적의 총알이 미치지 못하는 구석을 발견하였다. 양림은 민첩한 동작으로 벼랑가에 몸을 부치고 한걸음씩 전진했다. 총알은 그의 주변에서 땅이나 돌에 맞쳐 불티를 튕겼지만 그의 몸에는 미치지 못했다. 기타 전사들도 즉각 양림의 뒤를 따라 몸을 벼랑가에 붙이고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그들은 앞장선 참모장의 전술동작을 따라 모두 무사히 화염산을 지났다.     느닷없이 몸가까이까지 쳐들어온 양림과 홍군전사들을 발견한 적들은 황급히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였고 일부는 머리를 돌려 통안주로 줄행랑을 놓았다.     양림이 선견대 한개영을 거느리고 통안주에 막 도달했을때 통안주 부근의 서창과 회리로부터 달려온 국민당군과 조우하게 되였다. 적의 원병은 사천군벌 류원당의 두개 퇀과 한개 박격포련이였다. 양림은 소속부대를 신속히 포치하고 선제타격을 가했다. 유리한 지세를 차지한 홍군전사들에게 선제타격을 당한 적 원병은 아무런 준비도 없었던 탓으로 그대로 진영이 무너졌다. 적들은 다투어 진지를 버리고 통안주로 철수하였고 통안주의 지세를 리용해 계속 수비하려 들었다.     철수하는 적을 몰아 그대로 통안주를 점령할수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양림이 거느린 선두영의 병력은 태부족이였다. 지칠대로 지친 선견대 한개영의 병력으로는 수배에 달하는 적의 수비를 뚫을수 없었던것이다. 양림은 잠시 공격을 멈추고 후속부대를 기다렸다.     양림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통안주의 적들과 대치하면서 황혼녘까지 계속 격전을 벌리고있었다. 이때 홍군 간부퇀 정위 송임궁이 후속부대 전사들을 거느리고 당도하였다.     1935년 5월 1일 오후, 홍군간부퇀은 두길로 나누어 적진을 향해 공격했다. 송임군이 일부 전사들을 거느리고 정면으로 거짓 공격을 하였고 양림은 두개영의 전사들을 거느리고 우측으로 우회하여 적 측면을 공격하였다. 양림 참모장의 지휘에 따라 홍군전사들은 용감하고 지혜롭게 적과 싸웠고 적의 진지를 하나하나 점령함으로써 드디어 적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전투는 아주 치렬하게 진행되였지만 간부퇀 참모장 양림이 잘 지휘하였기때문에 홍군은 아주 적은 희생으로 통안주를 점령하였다. 전반 전투에서 홍군은 전사 4명이 희생되고 8명이 부상하는 대가로 화염산 천험을 돌파하고 통안주를 점령했으며 천여명 적들을 격살하거나 생포했던것이다.     통안주에서의 중대한 승리는 금사강의 교평나루터를 효과적으로 통제함으로써 전반 중앙홍군의 승리적 도강을 유력하게 담보해주었다. 5월 5일까지 작은 교평나루터에 수만 홍군주력부대는 7척의 배를 리용해 도강하였다. 사람은 많고 배는 적었지만 전사들은 질서있게 움직였고 여유롭게 강을 건넜다. 뱃사공도 힘든줄 모르고 노를 저었다. 홍군은 일주야에 5원이라는 푼푼한 삯전을 뱃사공에게 주었고 때마다 전사들도 흔히 먹지 못하는 돼지고기 료리로 뱃가공을 대접했다. 30명밖에 타지 못하는 작은 나무배 7척으로 수만홍군이 금사강을 건넜다. 참으로 기적이 아닐수 없었다.     강을 건넌 홍군은 7척의 배를 모조리 불살라버렸다. 뱃사공에게는 한사람당 동전30잎의 삯전을 추가로 주었고 배한척은 뱃사공 개인의것이였기때문에 동전 80잎을 지불하였다.     중앙혁명군사위원회에서는 간부퇀에 표창령을 내렸고 간부퇀의 전공은 적들의 간담을 써늘하게 하였다.     중앙홍군의 금사강 도강은 동서고금 군사상의 기적이 아닐수 없다. 중앙홍군이 금사강을 건넌후 추격하는 적과 홍군은 한주간의 거리를 두게 되였고 사기 드높은 홍군전사들은 씩씩한 걸음으로 노래부르며 계속 북상하였다.
6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⑥ 댓글:  조회:3079  추천:53  2007-05-27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⑥    1935년 2월 중국의 전통적인 명절인 음력설이였지만 침침한 중국대지는 특수한 사건이 별로 없었다. 너무나도 평범한 한해 첫시작인듯 하였다. 당시 <신보>월간지의 보도에 의하면 북평이나 천진, 상해, 남경등지의 사람들은 예나 다름없이 평범한 나날들을 보내고있었다. 그래도 신문이라도 읽는 사람이라면 장개석 위원장의 포상금이 최신상황을 조금 알수있었다. 장개석은 주덕, 모택동, 서향전을 생포하는자에게는 10만원을 장려하고 수급을 바치는 자에게는 8만원을 장려한다고했다.      당시 중국을 통치하던 장개석은 음력설을 려산에서 보냈다. 장개석과 송미령은 장학량부부와 함께 려산의 서양식 별장에서 즐거운 음력설을 쇠였다. 장개석은 최근 한동안 이른바 토비숙청문제를 자주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공산당과 홍군은 이미 패망해버렸으며 더 신경쓸 나위도 없다고 판단했기때문이다. 이때 그의 주요관심사는 일본문제였다. 그는 모임에서 연설할때마다 이른바 중일친선을 강조하면서 일본인을 자극하는 집회를 가지지 말고 일본제품 배격행동을 하지 말며 충동적인 반일행위를 자제할것을 요구하였다. 동북 3성 기름진 땅을 잃어버리고서도 총칼을 들고 다가선 일제 앞에서 그는 계속 타협하기에만 열중했던것이다.     하지만 중국공산당과 중앙홍군은 쉽게 실패하지 않았다. 그들은 북상항일의 뜻을 굽히지 않고 계속 투쟁을 준비하고있었다. 중국공산당은 1934년 7월 15일에 중국로농홍군 북상항일선언을 발표하고 모두 단합하여 항일할것을 전국인민과 항일무장에게 호소하였다. 7월 22일 중앙쏘베트공화국 중앙집행위원의 한사람인 조선혁명가 양림은 당의 호소를 받들고 “홍군의 북상항일선언을 옹호한다”는 글을 홍색중화신문에 발표하였다. 그는, “망국의 참화가 눈앞에 닥쳐왔다. 망국의 치욕이 모든 중국사람의 머리에 떨어질것이다!”라고 쓰면서 “오직 쏘베트와 홍군만이 중국 군민들을 이끌고 싸울수있는 통수이며 항일의 유일정확한 대표”라고했다. 양림은 모든 중국인민이 중국로농홍군의 북상항일 호소를 받들고 만악의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에 나서기를 희망하고있었다.       중국 서남부의 겨울추위는 왕년보다 더 했다. 혹한이 몰려드는 운남성 동북부의 작으마한 도시 짜시진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3백여세대 인가밖에 없는 작은 산간도시 짜시진에 이르러 중앙홍군은 서부로 진격하던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에서 간부와 전사들은 음력설을 맞이했으며 그동안 전투와 행군길의 피곤을 풀고있었다. 한편 중국공산당 중앙의 지도자들은 짜시진의 작은 판자집에 모여 정치국 회의를 소집하였다.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는 화로를 둘러 앉은 지도간부들은 감자며 고무마를 불에 구워먹으면서 중국공산당과 홍군의 운명을 두고 열렬한 토론을 진행하였다. 짜시회의는 준의회의의 계속이였고 준의회의의 결의를 한층더 확정하였으며 장문천을 당중앙의 총책임자로 선정하였다. 그리고 잠시 북상계획을 포기하고 귀주에서 근거지를 개척할 계획을 세웠다.     가렬처절했던 토성전투는 홍군의 실패로 끝났다. 적의 병력에 대한 정보가 잘못되였기 때문에 홍군은 어려운 격전을 치러야했고 나중에는 공산당의 정예 군사간부로 무어진 간부퇀까지 동원하지 않으면 안되였던것이다. 토성전투가 있은후 장강을 넘어 북상하려던 홍군의 계획은 무산되였고 중앙홍군은 운남성 동북부의 적수하 기슭 토성부근에서 적들의 첩첩한 포위에 들었다.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새로운 전략전술을 써야했다. 이시기 홍군의 지휘를 맡은 모택동은 과감한 행동계획을 세우고 기동령활한 전술로 적의 포위를 타개할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중앙홍군은 다시 원길로 되돌아서 적수하를 건너 귀주성 경내로 진입하였다. 홍군이 서진하거나 북상할것이라고 오판하고 병력을 토성부근에 집결시켰던 국민당군은 헛물을 켜고말았다. 홍군은 경건한 걸음으로 곧추 귀주로 공격하였다.       장정에서 양림이 참모장을 맡은 간부퇀은 줄곧 중요한 과업을 짊어지고있었다. 간부퇀은 홍군의 특수한 부대였다. 홍군대학, 홍군 제1보병학교, 홍군 제2보병학교, 홍군특과학교의 학원들로 편성한 이 부대는 천여명의 홍군 기층 군사간부들로 구성되였다.     간부퇀은 중앙과 중앙혁명군사위원회와 함께 행동했으며 군위종대 사령원인 엽검영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았다. 그들은 당중앙과 중앙혁명군사위원회 기관을 호위하고 중앙지도자들의 안전을 보위하며 군사간부들을 보류하고 강습시키며 또 전투부대에 간부를 파견하였을뿐만 아니라 직접 싸워야했다.     장정초기 적의 4개 봉쇄선을 돌파하고 상강을 지나는 등 간고한 행군과 치렬한 전투에서 그들은 극도로되는 피로와 기아를 극복하면서 적들과 싸웠고 중앙지도자들을 호위하고 경위하는 임무를 훌륭히 완수해냈다.     준의회의가 있은후 간부퇀은 토성전투를 시작으로 일선전투에 직접 참가하게 되였다.        귀주성 북부에 위치한 루산관은 해발 천 4백여메터에 달한다. 북쪽으로 동자현과 15킬로메터 상거해있고 남쪽으로 준의현과 접해있다. 사천과 귀주를 이어주는 천금도로가 산을 가로질러있다. 길 량켠은 천애절벽과 천길 낭떨어지로 되여있어 루산관 길목은 말 그대로 천험이였다.     1935년 2월 하순 루산관에는 구질구질 잔비가 끊지 않았다. 적수하를 다시 건너 귀주성내로 진입한 홍군은 곧바로 준의를 향해 진격하였다. 뒤늦게야 홍군의 행동방향을 파악한 장개석은 급급히 귀주성내의 국민당군을 그러모아 준의로 진격했고 또 준의의 부분적인 부대를 루산관에 포치해 홍군을 저격할것을 명령하였다.     홍군간부퇀은 루산관 지원부대로 전투에 참가하게 되였다. 홍군과 국민당군은 루산관에서 치렬한 전투를 벌였다. 전투에서 수많은 우수한 홍군장병들이 쓰러졌고 적들은 천험을 리용해 끝까지 저항했다. 적아쌍방이 모두 수많은 희생을 냈지만 전투국면은 타개되지 않았다. 이때 명령은 받은 간부퇀은 신속히 루산관으로 진격했다. 양림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하루 60킬로메터를 달려왔다.  26일 오후 팽덕회 군단장의 명령에 따라 총공격이 시작되였다. 홍군 제3군단의 13퇀과 12퇀, 간부퇀은 정면으로부터 골짜기의 적들을 공격하였다. 이때 적의 배후로 우회한 제3군단의 10퇀과 11퇀도 공격을 개시하였다. 홍군부대의 우렁찬 나팔소리는 루산관에 울려퍼졌고 홍군전사들은 두려움 없이 적진으로 돌진했다. 양림은 전사들과 함께 적의 화력을 하나하나 제거하면서 전투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날 저녁 모택동과 중앙종대가 루산관에 이르렀다. 물안개 자욱한 루산관에서 모택동은 더 과감한 작전방안을 구상하였다. 그는 일선의 홍군전사들에게 계속 적들을 추격하여 국민당군 오기위 부대를 격파할것을 명령하였다.  양림은 홍군전사들과 함께 극도로 되는 피로를 극복하면서 계속 적들을 추격하였다. 28일 새벽 홍화강부근에서 홍군부대는 오기위부대와 부딛쳤다. 홍군 제3군단은 준의의 남대문으로 불리우는 홍화강 진지를 사수하였고 제1군단은 우회하여 적의 배후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홍화강에서의 접전도 치렬하게 진행되였다. 전투에서 홍군 10퇀 퇀장 장종손이 쓰러졌고 참모장 종위검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홍화강진지의 중요성을 잘 알고있는 팽덕회와 주덕까지도 진지에 와서 직접 전투를 지휘하였다. 이곳이 적에게 돌파되면 적의 배후로 우회한 홍군 1군단의 작전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고 준의와 루산관도 적의 손에 다시 넘어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홍군은 오갈데 없이 적의 포위속에서 전멸하고말것이다. 이 위기일발의 시각 중앙혁명군사위원회에서는 재차 간부퇀을 내세웠다. 홍군간부퇀은 남쪽으로 정면공격을 개시하고 11퇀은 좌측으로 협공하였다. 홍군의 모든 기관총이 일제히 불을 토했다. 장병들은 생사를 불구하고 앞으로 돌진하였다. 치렬한 접전이 계속되고있을때 적의 배후로 우회한 홍군 1군단이 나타났다. 두 주력홍군이 앞뒤로 공격해오자 질겁한 적들은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적지휘관 왕가렬과 오기위가 선후로 도주하자 국민당군은 그대로 무너져서 서로 다투어 도주하기에 급급했다. 적들은 오강을 건너 도주하였다. 오기위는 급급한 나머지 부하들이 다 강을 건느지도 않았는데 다리를 끊어버리라고 명령하였다. 수많은 국민당 병사들이 다리와 함께 오강물속에 떨어졌고 강을 건느지 못한 천 8백명 적들은 모두 총을 놓고 투항하였다. 귀주성에서 홍군은 재정비를 거친다음 타곡신장과 로반장 전투를 진행하였다. 두 전투는 걸음걸음 대형을 갖추고 온당하게 공격해오는 적들과 치른 한차례 공방전이였다. 모택동은 이러한 공방전은 희생이 너무 많다고 반대했지만 그의 의견은 납득되지 않았다. 두 전투에서 홍군은 막대한 희생을 냈으며 적들은 계속 공격해와 홍군은 다시 포위에 들 위험이 있었다. 1935년 3월 16일 홍군은 다시 전략을 바꾸지 않으면 안되였다. 모택동과 주덕은 세번째로 적수하를 건너 적을 유인하기로 하였다. 양림은 간부퇀과 함께 귀주성 모태에 당도하여 도강 경계임무와 호위임무를 맡았다. 간부퇀의 공병련은 신속히 강에 다리를 만들어놓았고 한개영의 부대를 강건너에 보내 적을 경계하게 하였다. 이어 홍군주력부대와 중앙지도자들이 선후로 강을 건넜다. 모택동은, 공병련의 공로를 치하하고나서 홍군은 운남의 국민당군을 끌어내기만 하면 승리라고 했다. 류백승과 주덕고 홍군간부퇀의 작전지휘와 공병련의 공로를 극구 치하하였다. 세번째로 적수하를 건넌 홍군은 더 이동하지 않고 강기슭에 잠복했다. 홍군이 적수하를 다시 건넜다는 소식을 접한 적들은 모든 주력부대에게 추격명령을 하달하였고 운남에 있는 부대마저도 북상하여 홍군을 추격하게 하였다. 한동안 잠복했던 홍군은 다시 네번째로 적수하를 건너 귀주성내로 진격하였다. 양림과 간부퇀은 이때 줄곧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종대와 함께 행동하였다. 밤 장막이 깃든 귀주성 북부에서 홍군부대는 마주달려오는 적의 추격부대 틈사이로 신속히 빠져나왔다. 적들은 어깨를 스쳐 지나가는 홍군주력부대도 발견하지 못한채 머리를 숙이고 앞으로만 달렸다. 적의 포위를 뚫고 나온 홍군은 계속 적을 속이는 작전을 펼쳤다. 홍군 제9군단은 홍군주력으로 위장하고 계속 북상하는 듯이 보였고 홍군주력은 신속히 남하하여 곧바로 귀주성 소재지인 귀양으로 전진했다. 귀주성내 국민당군 주력은 이때 모두 홍군을 추격하여 북상했기때문에 홍군은 그야말로 무인지경이나 다름없었다. 홍군의 진정한 의도는 신속히 남하하여 오강을 건너 운남성 경내로 들어가는것이였다. 홍군 주력부대는 오강을 강행도하하고나서 일부 부대를 귀양부근으로 파견했다. 홍군 1군단 4퇀은 귀양성을 공략할 태세로 돌진하였다. 귀양에서 작전지도를 보고있던 장개석은 등골에 식은땀을 흘렸다. 그가 지휘할수있는 부대는 대부분 귀주성 북부에 있어 귀양까지 오려면 며칠 시간이 걸려야했다. 하지만 홍군은 눈앞에 닥쳐왔고 귀양에는 4백명 경찰까지 합쳐도 천명되지 않는 병력뿐이였다. 급해난 장개석은 가장 가까운 운남성에 급전을 보내 급히 주력부대를 귀양으로 진출시킬것을 명령했다. 드디어 홍군의 소원대로 운남성의 국민당 주력부대가 귀주경내로 들어갔다.   폭우속에서 승리적으로 오강을 건넌 홍군주력부대는 신속히 운남성 경내로 진격하였다. 적의 겹겹한 포위속에서 위기를 맞았던 홍군은 모택동의 교묘한 전략적인 전술과 희생적인 전투정신으로 드디어 적의 포위를 뚫고나왔던것이다. 적수를 네번 건느고 오강을 슬기롭게 탈취한 홍군주력부대는 이제 수십만 적의 대군을 뒤에 두고 무인지경인 운남성으로 들어갔다. 양림과 간부퇀은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종대를 따라 기름진 운남성 중부지역으로 진격하였다.  
5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⑤ 댓글:  조회:2747  추천:61  2007-05-27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⑤     1935년 1월 28일 귀주성 서북지역의 작은 진인 토성부근에서 치렬한 접전이 벌어지고있었다. 적아쌍방은 한 진지를 놓고 거듭 빼앗고 빼앗기면서 싸웠다. 나무들이 불타고 전쟁터에는 수많은 시신들이 널려있었다. 피말리는 전투는 세시간 남짓이 계속 진행되고있었다. 일반전사들이 쓰러졌을뿐만 아니라 앞장서 달리던 지휘원들도 수없이 쓰러졌다. 팽팽한 전투상황은 타개되지 않았고 더 많은 희생을 강요하고있었다.     수천리길을 걸어 귀주성에 도착한 홍군은 귀주와 사천 린접부근인 이 토성에서 또다시 피어린 전투를 겪어야했던 것이다. 홍군 3군단과 5군단이 수많은 희생을 내면서 힘겹게 적들을 막고있었다. 그러나 적들은 지원군까지 합세하여 더욱 기승스럽게 공격해왔지만 적수하 기슭을 따라 북상하고있는 홍군 1군단은 3시간 후에야 도착할수있다.      적들은 이미 토성에 위치한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지휘부앞까지 밀고 들어올 태세였다. 조속히 위기의 국면을 돌려세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토성진지가 무너지면 홍군은 적수하를 등에 두고 싸우는 절경에 빠지게 된다. 홍군의 주덕총사령도 더 참을수 없었다. 그는 총을 잡고 직접 전선으로 달려나갔다.     이때 모택동은 중앙홍군 간부퇀을 전투에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간부퇀 집합!”     “나가서 적들의 기세를 제압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천여명의 씩씩한 홍군전사들이 돌격 나팔소리와 함께 적진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용맹한 장병들은 두려움 없이 공격했고 또 지혜롭게 적의 허점을 잘 노려 치명타를 안겼다. 이 무적의 강철대오에는 조선인 혁명가 양림도 있었다. 그는 간부퇀의 참모장으로 전사들을 이끌고 공격에 나섰다. 공격도중 적의 지휘부를 발견한 양림은 특과영의 박격포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는 4영 위국청 영장과 함께 전사들을 지휘해 몇발 안되는 박격포로 준확하게 적 지휘부를 까부셨다. 지휘체계가 무너지자 싸울 신심을 잃은 적들은 드디어 뿔뿔이 철수했다.       홍군부대에서의 양림은 명망이 높은 고위 지휘원이였다. 그는 국제공산당에서 파견한 독일인 리덕을 제외하고는 홍군시기 유일하게 군구사령원 직무를 맡았던 외국적 고위장령이였다. 양림이 이처럼 중임을 뛰여나게 잘 완수하여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무산계급 신형인민군대의 고위지휘원으로 된것은 그의 풍부한 경력과 갈라놓을수 없다. 그는 선후로 6차나 군사학교에 들어갔고 수많은 전투를 겪으면서 문무가 겸비하고 군사와 행정이 모두 뛰여난 군정간부로 성장했다.  양림은 1898년 조선 평안북도의 한 애국인 가정에서 태여났다. 그의 본명은 김훈(金勋)이였고 자는 지원(志远)이였으며 사업의 수요로 양주평(杨州平), 양녕, 삐스티, 양림 등 이름을 사용하였다. 일찍 아버지를 따라 평양에서 ≪3.1≫운동에 참가했던 양림은 아버지가 일제에게 살해되자 1919년 늦가을에 중국 길림성 통화현(通化县) 합니하(哈泥河)로 왔다. 그는 통화에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지식을 배웠다. 이는 그가 다닌 첫 군사학교였다. 1920년 5월 우수한 성적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양림은 왕청현(汪清县) 서대파(西大坡) 반일무관학교에서 교관사업을 하였다. 그러므로 서대파조선인반일군사학교는 그가 다닌 두번째 군사학교이다. 동북에서 힘을 키우고있던 조선인 반일유격대들은 서로 단합하여 일제와 싸울 계획을 세웠다. 홍범도(洪范图), 김좌진(金佐镇)을 비롯한 동북지역 반일유격부대가 길림성 연변지역에 집중되였다. 양림은 한개 중대를 거느리고 대부대와 함께 화룡현(和龙县) 청산리 백운평(白云坪)에 매복해 있었다. 반일유격대가 이미 준비하고있는줄을 모르고 이곳저곳 방화하면서 추적해 오던 일본침략자들은 청산리에서 유격대의 매복에 들었다. 반일유격대는 적들에게 일치하게 불벼락을 안겼다. 뜻하지 않은 습격을 받은 일본침략군은 1,5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철수하였으며 반일유격대는 청산리대첩을 이룩하여 전민의 항쟁을 크게 고무하였다. 청산리, 봉오동(凤梧洞)전투가 있은후 양림은 무력투쟁만이 일제를 몰아내고 민족의 독립을 실현할수 있다는 신념을 굳혔다. 그는 더욱 선진적인 군사지식을 배우고 민족해방의 진리를 찾고싶어 중국 관내로 향했다.   1921년 4월 상해에서 한동안 머문 양림은 운남에 군사학교가 있다는 말을 듣고 곤명으로 떠났다. 그는 광주, 향항, 윁남을 거쳐 도보로 1,000리 길을 걸어 곤명에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양림은 곤명에서 양주평이라는 이름으로 운남강무당 제16기 포병과에 입학하였다. 세번째로 군사학교에 들어온 양림은 침식을 잊어가며 군사리론을 학습하였고 부지런히 군사지휘기능을 련마하였다. 그는 매일아침 등에 벽돌을 지고 10리길을 달리며 몸을 단련하였으며 훌륭한 서적을 접촉하면서 혁명진리를 적극 탐구하였다. 1924년 양림은 학과와 기술과 모두 전교 1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운남강무당을 졸업하였다. 그의 뛰여난 재능을 언녕 눈여겨본 학교 교무장은 학교에 남아 사업할것을 요구했지만 혁명에 뜻을 둔 양림은 학교측의 요구도 마다하고 단연히 광주로 떠났다. 광주에서 양림은 ≪민족해방대동맹≫에 참가하여 각국의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하고 중국공산당과 접촉하면서 맑스주의를 신앙하게 되였다. 1925년 양림은 광주에 있는 조선혁명가들의 도움을 받아 순조롭게 황포군교에 들어가게 되였고 주은래의 천거로 교학부 학생총대사업을 맡아보게 되였다. 황포군관학교에서 양림은 학생들과 함께 늘 주은래의 보고와 연설을 들으면서 점차 중국공산당의 혁명주장을 인식하게 되였으며 주동적으로 공산당원들과 접촉하기 시작하였으며 공산당원들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청년군인련합회(中国青年军人联合会)에 참가하였다. 1925년에 양림은 학생대를 거느리고 진형명의 반란을 진압하는 제1차동정에 참가하였다. 그의 기동령활하고 과단하며 적의 허점을 찌르는 전술은 교관들과 학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그해 6월에 승리적으로 광주에 돌아온 양림은 다시 양희민, 류진환의 반란을 평정하는 제2차동정에 참가하였다. 포술전문가인 양림은 쏘련 고문 갈렌(加仑)과 함께 적사령부를 포격하기로 하였다. 세심한 관찰을 거친후 양림이 직접 대포를 조준하여 곡선포격을 가했다. 포탄은 민가들을 지나 곧추 적사령부를 강타하였다. 적의 지휘체계가 파괴되자 혁명군은 신속히 돌진하여 적들을 소멸함으로써 제2차동정의 승리를 거두었다. 두차례 동정을 승리적으로 완수한 양림은 황포군관학교 중좌 기술주임 교관으로 승직하였다. 그는 교내에서 중국공산당과 함께 계속 우파와 투쟁하여 공산당의 신임과 관심을 받았다. 그리하여 1925년 6월에 양림은 공산당에 가입할것을 신청하였으며 얼마후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되였다. 1925년 11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엽정독립퇀이 광주시 조경에서 설립될 때 양림은 주은래의 배치에 따라 독립퇀 제3영 영장으로 파견되였다. 이 시기 그는 이름을 양녕으로 고쳤다. 그는 제3영 영장 겸 공산당소조 조장을 겸임하였다. 국공량당의 군사인재 양성요람인 황포군관학교에서는 이시기 좌우대립이 심각하였다. 그리하여 조직에서는 다시 양림을 황포군관학교 중좌 기술주임 교관으로 배치하였다. 교내 혁명자들을 더욱 많이 단합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그는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학생들에게 열심히 군사기능을 가르치는 한편 정확한 혁명사상을 전수하기에 힘썼다. 1927년 4월 장개석은 드디여 공개적으로 혁명을 배반하였다. 그는 군대를 풀어 도처에서 공산당을 체포하고 살해하였다. 공산당은 혁명인재를 보호하고 힘을 키우기 위해 양림을 쏘련으로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양림은 안해 리추악과 함께 모스크바로 갔다. 양림은 삐스티라는 이름으로 모스크바 륙군보병학교에 들어가 군사과학을 배웠다.     3년후 귀국한 양림은 상해 중공중앙 군사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 가서 사업하게 되였다. 그는 선후로 만주성 당위원회 군사위원회 서기, 동만특별위원회 위원 겸 군사위원회 서기로 사업하였다. 그는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등지의 인민대중들을 동원하여 세개의 로농적위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연변지역 만 5천여명 군중들을 조직해 반일대회를 열고 반동지주들을 진압했으며 몰수한 량식과 재물을 빈곤한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9.18사변이 있은후 양림은 다시 만주성위원회 군사위원회 서기로 반석로농의용군을 조직하였다. 이부대는 만주로농의용군 제4군 제1종대로 개편되였고 산하에 3개 소대를 두었다. 후에 이 부대는 남만유격대, 동북항일련군 제1군으로 성장하였다.     1932년에 동북 3성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로 전락되였음에도 불구하고 장개석 국민당은 중앙쏘베트지역 홍군에 대한 토벌에만 전력하였다. 당시 크게 확대된 중앙쏘베트지역에는 많은 인재들이 수요되였다. 그리하여 양림은 상해 군사회의에 참가하던 참에 강서성의 중앙쏘베트지역으로 조동되였다. 중앙쏘베트지역에서 그의 재능은 더욱 크게 발휘되였다. 그는 선후로 로농홍군 제1방면군 보충사 사장, 중화쏘베트중앙정부 로동및전쟁위원회 참모장, 강서군구 산하 회창-순우-안원군분구 사령원, 홍군 23군 군장,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총동원무장부 참모장 등직을 담임하였다. 로농홍군 총정치부 위원 겸 로동및전쟁위원회에서 사업할때 그는 주임인 주은래의 지도하에 국민당의 제4차 포위토벌을 분쇄하는 제반 준비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는 주은래를 도와 10개 보충퇀을 새로 편성했으며 직접 새전사들을 훈련시켰다. 훈련받은 전사들은 홍군 주력부대로 수송되여 전선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그는 또 쏘베트정부를 도와 군중들과 함께 다리와 도로를 수리하고 량식과 군수품을 전선에 보냈다. 뿐만 아니라 60여만원을 모금하여 전선에 보냈다.     1933년 4월 강서군구 제3군분구와 제5군분구를 합병하여 월감군구로 만들었다. 양림은 월감군구 사령원으로 임명되였다. 그는 산하의 제23군과 독립2사, 독립3사 그리고 많은 독립퇀을 거느렸다. 하지만 두달후 홍군부대는 재편성을 진행했다. 중앙혁명군사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홍군 제1방면군이 편성되였다. 주덕이 총사령을 맡고 주은래가 총정치위원으로 되였다. 홍군 제1방면군은 홍군주력인 림표의 제1군단, 팽덕회의 제3군단, 제5군단이 포함되였다. 양림은 이때 일년간 홍군제1군단 참모장으로 사업하였다. 홍군 제1군단 군단장은 림표였고 정치위원은 섭영진이였으며 라영환이 정치부 주임을 맡았고 양림이 참모장을 맡았다. 그러므로 이시기 양림은 후에 공화국 원수로 되였던 림표, 섭영진, 라영환 등과 함께 모두 군단급 간부로 있었다.     양림은 부대를 거느리고 중앙혁명근거지에 대한 국민당의 제4, 제5차 포위토벌을 반대하는 전투에 참가했다. 그의 뛰여난 지휘재능과 세밀한 사업작풍, 과감한 결단력은 주덕총사령의 충분한 긍정을 받았고 근거지 군민들의 애대를 받았다.     이해 중앙쏘베트지역에서는 중화쏘베트공화국 제2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렸다. 양림은 외국인 대표로 대회에 출석하였고 당중앙의 지명에 따라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 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다. 50여명 위원들 가운데서 오직 양림과 윁남인 홍수만이 외국적 위원이였다.     대회이후 양림은 수요에 따라 제1군단 참모장을 후임인 좌권에게 넘겨주고 홍군대학 총교관으로 사업하였다. 홍군대학은 수많은 군사인재들을 양성해냈으며 많은 사람들은 홍군대학을 졸업하고 후에 공화국 장군으로 되였다.       1934년 10월 10일 중앙혁명군사위원회에서는 주력홍군의 대이동을 결정하였다. 중앙홍군총사령부와 산하 직속부대로 군사위원회 제1종대를 조직하였다. 염검영이 이 부대의 사령원을 맡았고 박고, 리덕, 주은래, 모택동, 장문천, 주덕, 왕가상을 비롯한 이들이 모두 이 부대에 편입되였다. 군사위원회 1종대는 4개 지대로 나뉘였다. 제1지대는 팽설풍이 책임지고 제2지대는 라빈이 책임졌으며 제3지대는 조선인 혁명가 무정이 책임졌다. 그리고 제4지대는 진갱이 책임졌다. 제4지대 정위는 송임궁이였고 참모장에 조선혁명가 양림이였다.     장정에 나선 홍군은 8만 6천여명이였다. 여기에 민부들까지 합치면 거의 10만에 달하는 인파가 서서히 혁명근거지 서금을 떠나 험난한 장정길에 나섰던것이다.     토지를 분여받고 사람마다 평등하게 살아가던 근거지의 인민들은 눈물을 머금고 홍군을 떠나보냈다.  
4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 ④ 댓글:  조회:3255  추천:76  2007-05-27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 ④      1935년 6월 12일 아침, 청장고원 변두리에 위치한 사천성 서부의 대설산을 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설산의 이름은 협금산이고 산을 넘는 사람들은 홍군이였다. 홍군들은 몸에 열을 돋구기 위해 저마다 고추물을 마시고 떠났다.     가파른 눈길을 따라 홑옷을 입은 전사들은 한걸음한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길이 미끌고 눈보라가 세찼기에 수시로 보이지 않는 낭떨어지속으로 미끄러내려갈수도 있었고 눈사태에 파묻힐 위험도 있었다. 공기마저 희박하여 숨이 가빴고 또 머리마저 어지러웠다. 아무리 춥고 지치고 머리가 아파도 걸음을 멈출수 없었다. 그것은 곧바로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여길을 치렬한 전투를 겪으면서 달려온 홍군들에게 있어서 협금산 대설산을 넘는다는것은 그 어느 전투보다도 참혹했고 험난하였다.      반나절을 거쳐 선두부대가 설산을 넘어 협금산 북쪽기슭 달위진의 한 장족마을에 이르렀다. 중앙홍군을 마중나온 홍군 제4방면군의 전사들이 이곳에 기다리고있었다. 제4방면군 30군 정위 리선념과 제9군 군장 하위가 부분적인 부대를 거느리고 달위진까지 진출해 협금산을 넘어올 중앙홍군을 기다렸다. 이 부대의 선두를 맡은 25사 사장 한동산이 목성구라는 장목마을에서 중앙홍군의 선두부대를 맞이하게 되였던것이다.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 갖은 고생을 다 겪어온 홍군전사들은 드디어 집에 돌아온 느낌으로 기쁨의 눈을 머금었다. 중앙홍군과 제4방면군 전사들은 서로 알건 모르건 부둥켜 안고 감격을 금하지 못했다. 이어 중앙홍군 주력부대도 륙속 도달했고 중앙지도자들도 도착했다. 중앙홍군과 제4방면군은 성대한 경축모임을 가지고 두 홍군주력부대의 회합을 축하했다.       어느날 한 홍군 녀전사가 홍군 30군 정위 리선념을 찾아왔다. 이 홍군녀전사가 바로 양상곤의 부인인 리백소였다. 당시 그는 중국로농홍군 총정치부 선전간사로 있었다. 리선념 정위를 만난 리백소는 찾아온 사연을 이야기했다.      “저는 홍군 총정치부 선전간사인데 리백소라고 합니다. 총정치부 선전부장인 륙정일동지는 홍군의 두 주력부대의 회합을 경축하는 모임을 준비하고있습니다. 그리고 홍군의 회합을 경축하는 노래 한곡 만들었는데 정위 동지에게 회보드리려 왔습니다.”      리백소는 노래가사를 리선념에게 전하고 그자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두 주력홍군 공래산에서 승리적으로 회합했네/ 백전백승의 4방면군 영웅적 형제들을 환영하네…” 노래를 듣던 리선념 정위는 손벽을 치며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누가 지은 노래이기에 이처럼 듣기 좋은가?”고 다잡아 물었다. 리백소는 “이곡은 홍군의 유명한 음악가 최음파란 조선동지가 창작한것이고 가사는 륙정일 부장과 제가 함께 썼어요.”라고 대답했다. 조선혁명가 최음파가 작곡한 노래 “두 주력홍군 회합가”는 이렇게 세상에 나왔고 중앙홍군과 제4방면군의 회합을 경축하는 모임에서 천백명 홍군전사들에 의해 불리워졌다.   홍군의 음악가 최음파, 그가 창작한 많은 노래들은 일찍 강서성 서금에서부터 홍군부대에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조선인 최음파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고있다. 다만 서금의 자료실과 로홍군들의 추억의 글에서 부분적으로 그의 사적이 전해져 내려올뿐이다. 강서성 서금의 중앙혁명근거지 기념관에는 다음과 같은 자료가 남아있다. “쏘베트구역 음악가들이 자체로 창작한 혁명가곡에는 <군대가 되려면 홍군이 되자>, <랑군님을 홍군에 보내네>, <홍군학교 졸업가>, <최후 승리는 우리의 것>등이 있다. 이 가운데 중앙쏘베트구역의 저명한 가곡가 조선인 최음파가 지은 노래 <사표곡>은 격정적이고 경쾌하며 힘이 있었다.”      사람들은 중국에서 활동한 유명한 조선음악가라면 곧 항일전쟁시기 연안의 정률성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정률성보다도 10여년 앞썬 1930년대초의 홍군시기에도 우리민족의 유명한 음악가 최음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극히 적다.       최음파는 홍군시기 중앙쏘베트지역에서 활동했던 아주 유명한 음악가였다. 그는 바이올린을 잘 연주했고 창작을 잘했으며 여러가지 공연도 곧잘 하였다. 당시 중앙쏘베트지역에는 현대음악을 배운 음악가들이 극히 적었다. 대부분 민가나 전통예술가들이였고 현대가곡 창작에 능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쏘베트지역 군민들이 부르는 노래들은 대부분 쏘련 노래곡에다 가사를 다시 창작하여 만든 노래거나 전통민요에 현대적인 가사를 붙여 부르는 노래였다. 그러므로 현대악기인 바이올린에 능하고 현대음악지식을 장악한 최음파의 음악적 재능은 이곳에서 충분히 발휘되였다.     당조직의 소개로 20세 젊은 나이에 상해로부터 중앙쏘베트지역에 온 최음파는 홍군전사로, 혁명가로 활동했다. 그리고 자기의 음악적 창작으로 해방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뜨거운 감정을 표달하였다.     1931년 11월 강서성 서금에서 제1차 전국쏘베트대표대회가 소집되였다. 대회의 개최를 경축하기 위해 최음파는 전우들이 창작한 가사에 곡을 지었다. “전국쏘베트대표대회를 옹호한다”라는 이 노래는 근거지 군민들의 격동된 심정을 담아 군민들의 애창하는 노래로 되였다. 노래는 제1차 전국쏘베트대표대회 개막식에서 합창으로 불리워졌다. 당시 로홍군 오수권도 합창단의 일원으로 이 노래를 불렀다. 수십년후 그는, 격정에 넘쳐 불렀던 그때 그 노래는 지금도 귀전에 쟁쟁하다고 이야기했다.     1931년 12월 4일, 국민당 제26로군이 강서성 녕도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홍군으로 넘어왔다. 봉기한 만 7천여명 병사들은 석성과 서금 임전부근에서 재정비를 하고있었다. 봉기부대 병사들은 대부분 북방사람들이였기때문에 남방의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있었다. 앓는 사람이 많았고 또 많이 지쳐있었으며 정서도 좋지 못했다. 이를 감안한 림시중앙정부 모택동주석은 공연대를 파견해 이들에게 선전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꼇다. 그리하여 모택동주석의 지시대로 쏘베트지역에 있던 예술인재들이 한팀을 무어 부대위문을 가게 되였다. 17명으로 구성된 위문공연팀에는 리백소, 호저, 전장비, 최음파 등 우수한 선전일군들이 포함되였다. 이들은 “누구를 위해 싸워야 하는가?”를 비롯한 극을 선보였다. 리백소가 가난한 농민역을 맡고 호저가 국민당 병사역을 맡았으며 장개석과 비슷하게 생긴 전장비가 장개석역을 맡았다. 공연은 아주 성공적이였다. 공연을 본 수천명 장병들은 장개석을 타도하자, 홍군만세를 소리높이 웨치며 출연자들에게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최음파는 이 공연의 시나리오 편성과 음악을 맡았다.      이때로부터 쏘베트지역의 예술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그리하여 쏘베트근거지의 첫 극단인 8.1극단이 서금의 로농홍군학교에서 나타났고 또 많은 소규모 연극팀이 무어졌다. 이에 비추어 1932년 9월 2일에 중앙에서는 서금에다 로농극사 본사를 설치하였다. 로농극사는 로동자, 농민, 홍군, 쏘베트 직원들이 혁명극을 연구하는 조직이였다. 로농극사의 제일임 사장은 장흠이였고 주요사원들로는 사가부, 리백소, 전장비, 호저, 번한년, 리극농, 채건, 최음파 등이였다. 극사창설초기 최음파는 전우가 작사한 <로농극사 사가>에 곡을 붙여 이 노래로하여금 극사 사원들을 고무하는 전투적 노래로 불리워지게 했을뿐만 아니라 근거지 군민들이 모두가 애창해 부르는 노래로 되게 하였다.     극사는 중앙에 본사를 두고 성과 현에 분사를 설치했으며 또 공장이나 공회, 합작사, 학교 그리고 쏘베트정부기관, 군중단체에 지사를 두었다. 그러나 극작가나 공연배우를 할 사람은 많았지만 음악을 할 사람은 적었기 때문에 최음파는 무척 다망하게 보냈다. 공연이 있는곳마다 찾아가 음악을 편성해주어야했고 또 직접 연주를 맡아야했다.      이시기 최음파와 기타 홍군예술인들의 활약에 대해 로홍군전사들이 여러편의 회억의 글을 남겼다.     로홍군전사이며 양상곤주석의 부인인 리백소는 “로농극사에는 사가가 있었는데 가사는 집체로 창작하였고 조선인 작곡가 최음파가 곡을 달았다”고 회억하였다.     로농극사 사장이였던 로홍군 조품산은 다음과 같이 회억하였다.     “홍군대학 개학식이 있던 날, 극사의 사람들은 내용이 풍부한 야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날 저녁 공연프로를 보면 노래가 있었고 춤이 있었으며 또 최음파의 바이올린 독주가 있었습니다. 그때 중앙동지들도 공연을 구경하고 야회에 참석하였는데 온 저녁 박수소리가 끊지 않았습니다.”      중앙쏘베트지역에 홍군대학이 있게 되자 최음파는 홍군대학 구락부에 들어가 활동하게 되였다. 당시 상황을 로홍군 오수권은 이렇게 회억하였다.      “중앙에서는 홍군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고 교장은 엽검영이 맡았습니다. 그리고 하장공과 등평 두 군장과 기타 몇분의 사장을 학교에 파견했습니다. …당시 홍군학교의 문화사업은 아주 활약적이였습니다. 활동의 중심은 홍군학교의 구락부였는데 상해나 쏘련으로부터 귀국한 문화인재들이 많았습니다. 례하면 위공지나 석련성이 있었고 작곡을 아는 조선동지 최음파 등이 있었습니다. 문예공연은 거의 한달에 두번정도 진행되였습니다.”      로농극사의 사장이였던 조품산은 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홍군학교의 확극사업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이때 화극사업에 필요한 일군들도 확대되였습니다. 당시 주요일군들 가운데는 최음파도 있었습니다. 그는 조선동지였고 또 우리의 훌륭한 바이올린 전문가였습니다.”      최음파는 중앙쏘베트지역에서 공연할때 자주 바이올린 독주를 하였다. 그는 늘 조선가곡을 연주하였다고한다. 그의 전우였던 리백소는 만년에도 최음파가 연주하였던 조선가곡의 선률들을 얼마간 기억하고있었다한다.      로농극사는 1934년 1월에 중앙쏘베트극단으로 개칭하였다. 이 시기 로농극사의 사원들은 모두가 뛰여난 혁명자이면서 예술가였다. 이들은 예술을 무기로 쏘베트를 위해 싸웠다. 이들은 군민의 문화생활을 풍부히했고 혁명투쟁을 추진했으며 당의 선전사업을 훌륭히 완수해냈다.     그후 홍군이 장정을 시작할때 대부분 사원들은 조직의 명령에 따라 근거지에 남게 되였다. 이들은 구추백의 지도하에 화성, 붉은기, 전호라는 3개 극단으로 나뉘여 각지 유격구로 떠났다. 최음파는 극사의 주요핵심인 리백소, 호저, 전장비 등과 함께 중앙과 주력홍군을 따라 장정길에 나섰다.        장정길에서 최음파는 기타 전사들과 함께 갖은 시련을 다 겪어야했다. 피어린 상강전투을 겪었고 수천리 강행군을 해야했으며 적수하를 네번 건느고 금사강, 대도하를 뛰여넘고 설산을 넘어야했다. 장정에서 그는 훌륭한 전투원으로, 훌륭한 정치사업간부로, 뛰여난 선전일군으로 활약했다. 전투가 끝나면 그는 별로 쉴사이도 없이 거리에서 연설했고 광장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였으며 사람들을 모아놓고 혁명가곡을 배워주기도 했다. 어려운 행군길에서 그는 때로눈 부대의 앞에서 달리기도하고 때로운 뒤에 따르는 전사들을 격려하기도하면서 선동사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남들보다 더 많은 걸음을 걸었던것이다.       지금까지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중앙홍군을 따라 처음부터 장정에 참가하여 섬북까지 살아 남은 외국인은 4명으로 알려져있다. 이들로는 국제공산당에서 파견한 독일인 리덕, 윁남인 홍수 그리고 조선인 삐스티와 무정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홍군시기의 조선인 혁명음악가 최음파는 장정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는것을 알수있다. 중앙홍군과 제4방면군의 대회합을 노래하였던 우리의 음악가 최음파는 그후의 행적과 희생경과를 남기지 못했다. 죽음의 수렁으로 알려진 초지를 지나다 희생되였는지? 어느 치렬한 전투에서 흉탄을 맞고 쓰러졌는지? 아니면 대서북 어느 평범한 마을에서 병으로 숨졌는지? 알려지지 않고있다. 더욱 유감스러운것은 그가 언제 어디에서 태여났고 어떤 경력을 가진 인물인지도 밝혀지지 않고있다.     하지만 중앙쏘베트지역에 남겨진 그의 불타는 혁명노래와 장정길에 남긴 우렁찬 승리의 노래는 중화대지에 계속 울려퍼질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영원한 음악과 함께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을것이다.  
3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③ 댓글:  조회:3056  추천:65  2007-05-27
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③ 강남의 명산 무이산(武夷山) 서쪽기슭의 풍요한 평지에 위치한 서금은 제2차국내혁명전쟁시기 중국혁명의 중심지였고 중화쏘베트공화국 림시중앙정부가 있었던 곳이다. 서금은 강서성 동남부의 주요도시로서 강서, 복건, 광동 세개 성을 이어주고있다. 고대에는 서금을 양주역(杨州域)이라고 불렀으며 진시황(秦始皇)이 전국을 통일한후 구강군(九江郡)에 귀속시켰다. 그후 953년 이곳에 현을 설치하였다는 기재가 있다. 서금은 1994년에 시로 승격하였다. 20세기 30년대가 시작될때 전반 세계는 공포와 불안에 떨고있었고 중국은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고있었다. 미국의 실업인구는 천 5백만명에 달했고 쏘련에서는 집단농장을 하고있었으며 나치스 돌격대는 대규모의 검열을 진행하였다. 한편 이딸리아의 무쏠리니도 오지리국경에 18만 병력을 포진하여 팽팽한 분위기를 조성하고있었다. 이러한 세계적인 분위기는 중국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지만 중국은 련속되는 자연재해와 인위적인 군벌할거로 도탄속에 빠져있었다. 장강류역의 홍수로 하여 20만명이 숨지고 수원, 산서, 섬서의 지진으로 7만명이 숨졌으며 빈곤선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이 5천 7백만명에 달했다. 게다가 전란까지 끊기지 않았다. 장개석을 반대하는 풍옥상, 염석산, 리종인의 싸움은 중국 10여개성을 전쟁터로 만들었으며 농민들은 막중한 군비부담으로 사경을 헤매야했다. 수천만 인구가 전란을 피해 류리걸식하게 되였고 50만 도시 실업인구가 나타났다. 하지만 중국동남부의 한구석에 위치한 서금지역만은 이시기 즐거운 노래소리가 끊기지 않았다. 사람들은 황금낟가리에서 풍년의 기쁨을 노래했고 씩씩한 전사들은 우렁찬 구호소리를 높이 웨치며 대렬을 지어 다녔다. 적위대는 농가를 도와 가을에 바삐 돌았고 녀성들은 저녁밥을 지어 밭에 가져갔고 황금낟알을 가득 지고 귀가하였다. 사람들은 중화쏘베트중앙정부를 옹호하고 홍군을 노래하였다. 이곳에는 맑스레닌주의를 신앙하는 수많은 문인, 철학가, 교육자, 직업혁명가, 학생, 상인들이 모여왔다. 당시 서금은 쏘베트지역의 수도였다. 40여만평방킬로메터의 국토와 3천여만 인구를 가진 중화쏘베트공화국정부가 서금에 있었던것이다. 중화쏘베트공화국에서는 철저한 토지혁명을 진행하였다.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빈곤한 농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홍군 장병들도 토지를 분여받게 되였다. 그들은 토지를 현지 농민들에게 경작을 맡겼다. 대다수 빈곤농민들과 홍군 장병들에게 있어서 자기의 토지를 가지게 되였다는것은 모두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일이였다. 사람들은 무한한 열정을 안고 빈곤농민과 무산자들의 정부인 중화쏘베트정부를 옹호하였다.  쏘베트란 로씨야어의 대표회의이라는 말을 음역한것이다. 지금도 중화쏘베트제1차 전국대표대회 유적지가 강서성 서금시 성북쪽 엽평촌에 자리하고있다. 서금시에서 323번 국도와 206번 국도가 접하는 곳으로 빠져 나가 약 3킬로메터쯤 가면 일찍 홍군시기 쏘베트정부 설립지였던 엽평(叶坪)에 도착하게 된다. 마을에 도착하면 잘 보수된 중화쏘베트 제1차전국대표대회 유적지를 쉽게 찾을수있다. 아담한 정원에는 고풍적인 3진원 구조의 건물이 있다. 당지 대지주네 사당으로 사용되였던 이 건물은 사씨사당(谢氏祠堂)이라고 한다. 사당은 2층으로 되여있는데 건물은 중심부분의 빈 공간을 둘러싸고 축조되여있었다. 1931년 11월 7일, 쏘련의 10월혁명기념일을 맞으면서 이곳에서 제1차전국쏘베트대표대회가 열렸다. 대회에서는 쏘베트 림시중앙정부를 내오고 모택동을 주석으로 선거하였다. 대회장으로 사용되였던 강당 정면 벽에는 붉은기와 모택동, 주덕의 초상이 걸려있다. 강당에는 수십명이 앉을수 있는 나무걸상이 있었는데 서서 방청하는 사람까지 합쳐 수백명가량 용납할수 있다. 강당 량켠에는 널판자로 막은 작은 칸들이 있고 칸마다 천으로 문발을 쳐놓았다. 침대 하나와 책상, 걸상을 하나씩 놓을수 있을 정도인 이러한 방들이 바로 쏘베트림시중앙정부의 각 부서 집무실이다. 외교인민위원회, 군사인민위원회, 재정인민위원회, 로동인민위원회를 비롯한 각 부서들이 이곳에서 사무를 보았던것이다.   쏘베트지역에서 활동하던 많은 조선혁명가들도 쏘베트지역 군민들과 함께 사람마다 평등하고 함께 일하며 다 같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쏘베트생활을 마음껏 느끼고있었다. 이 가운데 조선혁명가 최정무가 조선인대표로 제1차전국쏘베트대표대회에 참가하는 영광을 가지게 되였고 또 대회에서 발언까지 하게 되였다. 최정무의 부모는 일찍부터 로씨야 우쑤리스크에 이주하였고 최정무도 1910년 그곳에서 태여났다. 로씨야 10월혁명이후 자유를 얻고 해방을 받은 최정무일가는 토지까지 분여받았다. 최정무는 우쑤리스크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공청단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일제놈들에게 짓밟히는 조선과 일제 수탈에 허덕이는 조선인민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기 그지없었다. 1926년 16살인 최정무는 혁명의 열기를 안고 중국 상해로 왔다. 로씨야에서 이미 공산주의 사상을 접수하기 시작한 그는 쉽게 중국내의 지하당조직과 련락을 취할수있었다. 상해에서 한동안 체류하던 그는 지하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광주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황포군관학교의 공식적인 자료에서는 아직 그의 이름을 찾아볼수없다. 그가 황포군관학교 몇기에 입학하였고 또 언제 졸업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있다. 하지만 이 시기 1927년에 황포군관학교 기술주임으로 있던 조선인 교관 양림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시간적으로 보아 최정무는 1926년에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였고 졸업을 못하고 1927년 장개석의 4.12쿠데타를 맞게 되였던것으로 보여진다. 1927년 4월 12일 장개석은 반동군대를 동원하여 공산당원들을 체포하고 살해하였다. 이때 최정무는 학교병원에 몸을 숨겨 다행히 적들에게 체포되지 않았다. 그후 그는 광주봉기에 참가했고 봉기가 실패한후 도보로 상해 당조직을 찾아갔다. 상해에 도착한 그는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중앙혁명근거지인 서금에 와서 홍군 군사기계수리소에서 일하게 되였다. 그는 홍군 후방정치부 주임이였던 모택담(毛泽覃)의 지극한 관심을 받았으며 그와 매우 친숙한 사이로 되였다. 이 산간오지에 찾아온 조선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그를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것이다. 모택담은 집에서 물만두를 빚는다거나 색다른 음식이 있을때면 늘 최정무를 청해다 대접하군 했다. 그는 모택동의 셋째동생이였다.  1931년 11월 7일 전국쏘베트대표대회가 서금에서 소집되자 최정무는 600여명 대표의 한사람으로 대회에 참가했고 또 발언할 기회까지 가지게 되였다. 나어린 최정무는 몹시 격동되였고 몹시 긴장되여있었다. 그는 미리 준비하였던 말을 죄다 잊어버리고 대회축사를 하였던지 자기의 결심을 발표했던지 기억에도 남지 않을 말을 하였다. 최정무가 연설대에서 내려오자 주석대에 앉았던 모택동주석이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모택동은 당시 중화쏘베트공화국 주석이였다. 그는 최정무의 손을 잡고 이름이 무엇이며 나이가 얼마며 무슨 일을 하느냐고 자상히 물어보았다 한다. 모택동과 주덕은 모두 발언을 잘했다고 그를 치하하였고 모택동은 홍군대학에 가서 공부하라고 추천해주기까지 하였다. 그후 최정무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홍군군정대학에서 공부하였고 졸업한후 학교 사무장으로 있다가 로농홍군 제1군단 산하 제22군의 부련장으로 임명되였다.   1933년 장개석 국민당은 40만 대군을 집중해 중앙쏘베트지역과 홍군에 대한 제4차 포위토벌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강서성 동남부의 모든 홍군부대는 집중적으로 적 포위토벌을 반대하는 치렬한 격전을 치르게 되였다. 홍군 제22군의 련 지도원으로 있던 최정무도 이 전투에 참가하였다.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이 상해로부터 중앙쏘베트지역으로 이동해 왔고 이들은 모험주의적인 전략을 실행하였다. 그리고 유격전에 풍부한 경험을 쌓았던 모택동도 이시기에는 홍군의 지도적 위치에서 물러나있었다. 중앙홍군은 이른바 선제타격의 전략으로 성곽이 견고하고 적의 병력이 방대한 남풍성을 공략하기로 하였다. 치렬한 공격전에서 홍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이때 적들은 다른 부대로 남풍성을 공격하는 홍군의 배후를 습격하려 계획하고있었다. 이 위기의 시각 주은래와 주덕은 과감히 공격부대를 철수해냈다. 그들은 주력부대를 려천방향으로 돌리고 잘 은페시켰다. 부분적인 공격부대를 추격해 오던 국민당군은 홍군의 매복에 걸려 황피, 곽원지역에서 참패를 당했다. 이어 홍군은 다시 초대강, 서장지역에 매복했다가 광창으로 공격해오는 적의 한개사를 섬멸했다. 집겁한 국민당 기타부대는 급급히 퇴각하였고 중앙홍군은 제4차 반포위토벌전의 승리를 이룩하였다. 홍군 제4차 반포위토벌전에 참가한 최정무는 어느 한차례 전투에서 오른쪽 발목을 적탄에 맞았다. 부대를 따라 더 싸울수 없게 된 그는 홍군 제3병원으로 호송되였다. 치료를 받아 탄알을 뽑았지만 그는 지팽이를 짚고 다닐수밖에 없었으며 다시 전선에 나가지 못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당조직에서는 그를 홍군병원에 남아 당총지부서기 겸 지도원으로 사업하게 하였다.   1934년 10월 홍군은 끝내는 국민당군의 제5차 포위토벌을 극복하지 못하고 부득이 중앙근거지를 떠나 장정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당시 홍군병원에는 200여명 중상자들이 있었다. 최정무는 100여명 의료일군들과 함께 중상자들을 민가에 숨겨두고 대부대를 따라 감주로 떠났다. 그러나 100여명이 한데 몰려 움직일수 없었기때문에 그들은 다시 소분대로 나누어 행동하였고 나중에는 모두 흩어지고말았다. 혈혈단신이 된 최정무는 앞길이 막막했다. 주력부대는 멀리 떠나갔고 적들은 도처에서 홍군을 수색하고있었다. 그는 호북의 농민으로 가장하고 상해에 있는 조선혁명가들을 찾아가기로 작심하였다. 그는 혼자서 멀고먼 장정을 시작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또 수시로 국민당군과 지주무장대를 피하면서 가야했다. 갖은 고생을 거쳐 그는 1936년에 드디어 도보로 상해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그는 려운형과 기타 조선혁명가들을 찾지 못했다.   1937년 로구교사변이후 최정무는 무한, 개봉 등지를 다니며 공산당부대를 찾았으나 역시 찾지 못하고 홍군은 장정을 거쳐 섬북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단연 홍군을 찾아 섬북으로 떠났다. 하지만 가던 길에 그는 국민당군의 강제징병에 끌려가게 되였다. 국민당부대에서 그는 국민당 통신부대 두목을 설득하여 20여명 통신병을 이끌고 태항산의 팔로군을 찾아갔다. 팔로군을 찾은 최정무는 무정이 거느린 조선의용군에 참가하여 계속 항일투쟁을 견지하였다.
2    홍군장정에 참가한 조선혁명가들 ② 댓글:  조회:3283  추천:81  2007-05-27
홍군장정에 참가한 조선혁명가들 ② 1934년 11월말 장정길에 나선 중앙홍군은 가장 처절했던 상강전역을 치르게 되였다. 상강과 소수 두갈래 강을 사이두고 홍군의 북상길을 차단하기 위해 국민당 군대는 남북으로 협공해왔다. 홍군 제1군단과 제3군단이 남북을 차단하고 우세한 적들과 치렬한 접전을 거듭하고있을때 홍군주력은 상강을 건너야했다. 하지만 번중한 물건들을 지고 로약자들을 부축하며 움직이는 홍군주력의 행군은 굼뜨기 그지없었다. 그리하여 저격을 맡은 홍군부대는 수많은 희생을 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홍군은 적의 포위를 뚫고 상강을 건넜지만 막대한 희생을 냈다. 장정출발시 8만 6천여명이던 홍군부대는 3만여명으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대부분 전사하거나 민간에 흩어졌던 것이다.    홍군부대가 귀주성에까지 이동하였을 때 앞에는 설산이 가로막혔다. 부대의 령활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중무기는 버려야 하였다. 따라서 포병부대도 다른 부대에 편입되여야 했다.  중앙군사위원회 제1종대 제3제대 사령원 겸 정위를 맡았던 조선혁명가 무정은 자기의 부대를 떠나게 되였다. 그가 지휘하던 포병부대도 대포를 버리고 새로운 전투부대에 편입되였다. 무정은 마음속으로 언젠가는 더욱 막강한 포병부대를 건립할 결의를 다지면서 포병부대를 떠나 지휘부에서 일을 보게 되였다. 대도하(大渡河)를 건느고 설산을 넘어 사천성의 파서(巴西)에 도착한 중앙홍군은 새로운 위기를 맞게 되였다. 홍군은 사천성에서 미리 이곳에서 혁명근거지를 창설하고있던 제4방면군과 회합하였다. 제4방면군의 당, 정, 군 책임은 모두가 장국도가 맡고있었다. 그는 10만을 헤아리던 강대한 중앙홍군이 수만명밖에 남지 않은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당시 홍군 제4방면군은 수적으로 중앙홍군보다 퍽 더 많았다. 그리하여 그는 부대의 우세로 자기의 립지를 높이고 중앙의 지도권을 차지할 생각을 하게 되였다. 당시 당중앙과 모택동은 계속 북상하여 섬감녕근거지를 창설할 전략적 방침을 확정하였다. 그러나 장국도는 이를 극구 반대하면서 부대를 이끌고 남으로 진격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천강(川康)변경으로 퇴각하려 하였다. 그리고 사사로이 홍군4방면군을 이끌고 남하길에 올랐을뿐만 아니라 홍군의 무전암호를 모두 거두어 들였다. 그것은 각 군과 당중앙의 련계를 끊어버리고 자기의 우세한 병력으로 홍군 제3군단을 남하하도록 강박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되면 사실 전반 홍군에 대한 통제가 장국도의 손에 넘어가게 되고 당중앙과 모택동은 부대를 지휘할수없는 고립적인 위치에 놓이게 된다. 공화국 원수 팽덕회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억하였다. “이번 북진에서 3군단은 우익종대의 가장 뒤에 섰고 홍군 제4방면군의 4군, 30군,  9군과 전적총지휘부가 가운데 섰다. 그때 나는 장국도가 야심이 있다는것을 느끼게 되였다. 하지만 중앙에서 아직 이를 눈치채지 못한것 같았다. 모택동과 당의 총적 책임자였던 장문천은 전적지휘부 한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3군단은 아서, 파서지구와 하루, 이틀 거리를 두고있었고 전적지휘부와는 15리쯤 떨어져있었다. 나는 숙영지에 이르러 곧바로 전적지휘부와 모택동이 머문 곳으로 갔다. 사실 나는 모택동을 만나기 위하여 전적지휘부에 자주 드나들었다. 이때 주은래와 왕가상은 병으로 제3군단에 있었다. 파서에 며칠 머무는 동안 나는 매일 전적지휘부로 갔으며 비밀리에 제11퇀을 모택동의 거처에 은밀히 음페시켜 만일의 사태를 막으려했다. 얼마후 전적참모장 엽검영에게서 홍군 제1군단이 아계(俄界)지구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아계의 제1군단과 련계를 확보하고 북진하여 홍군 제1군단과 합치려해도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우선 길잡이를 찾을수 없었고 길을 물을 곳도 없었으며 더구나 지도도 없었다. 망망한 초원에서 어디가 길인지? 어디가 아계인지 분간할수 없는 상황이였다. 그리고 아계의 제3군단의 주요간부인 양상곤이 이미 다른 부문에 조동됐고 나의 곁에는 3군단 정위를 맡은 리부춘만이 있었다. 나는 조선동지인 무정에게 이 임무를 맡겼다. 그에게 지북침을 주면서 꼭 제1군단의 종적을 따라 무전암호를 제1군단에 전해줄것을 요구했다.”   장국도의 시도를 분쇄하려면 홍군 제3군단은 아계로 진출한 홍군 제1군단과 무전련계를 가져야 했다. 그러자면 새로 만든 무전암호를 홍군 제1군단에 보내주어야 했다. 이 위기일발의 시각에 팽덕회장군은 자기의 가장 믿음직한 전우인 무정을 제1군단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길도 없고 지도도 없었다. 무정은 지남침으로 방향을 확정한 다음 드넓은 초지를 달리기 시작하였다. 언제 어느 은페된 소택속에 깊숙히 빠져 다시 헤어나오지 못할수도 있었고 뜻하지 않게 적의 기병이나 순라대를 만날 위험도 있었다. 무정은 조금도 지체없이 내처 달리기만 하였다. 얼마를 달렸는지 앞에는 불타다 남은 나무쪼각들이 무져져 있는것을 발견하였다. 누군가 모닥불을 피워놓고 여기에서 휴식하다 떠난것이 분명하였다. 자세히 관찰해보니 떠난지 별로 오래된것 같지 않았다. 분명 제1군단의 전사들이 남겨놓은 흔적이라고 판단한 그는 신심가득히 걸음을 재우쳐서 끝내는 제1군단을 찾아냈다. 그는 숨 돌릴사이도 없이 곧추 지휘부로 달려가 무전암호를 넘겨주었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모택동은 위험을 무릅쓰고 팽덕회의 제3군단 지휘부에 찾아와 새로운 무전암호로 전보를 보냈다. 《림표, 섭영진 앞: 행동방침에 변동이 있으니 원지에서 대기할 것.》 제1군단 비휘부에서 새로운 암호의 전문이 번역되여 나오는것을 보자 무정은 그제서야 시름을 놓았다. 드디어 중앙홍군의 2개 주력부대인 제1군단과 제3군단이 련락이 되였고 두 군단은 모택동의 지휘밑에 당중앙에서 확정한 북상항일의 길을 떠나게 되였던것이다. 무정도 이 부대를 따라 승리적으로 섬북에 도착하였다.       1936년 섬북에 도착한 무정은 그해 6월 중국인민항일홍군대학 제1기 고급간부과에서 학습하였다. 고급간부과는 주로 홍군 사급이상의 간부를 양성하는 곳으로서 학원이 도합 36명이였다. 고급간부과의 학원들은 모두가 8년 이상의 투쟁경력이 있어야 하며 전투중에서 3번 이상 부상을 입은 공헌자라야 했다. 학원중에는 림표(林彪), 라영환(罗荣桓), 라서경(罗瑞卿), 막문화(莫文骅), 진광(陈光) 등 홍군고급간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령도이면서 학원이었다.    12월, 홍군대학을 졸업한 무정은 계속하여 홍군총부의 작전과장직을 담임하고있었다. 마음속으로는 강대한 홍군포병부대를 이끌어낼 결의를 다지면서 그는 때를 기다리고있었다.     1937년 로구교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은 전면적인 항일전쟁시기로 들어서게 되였다. 홍군도 팔로군으로 개편됐다. 1937년말, 항일전쟁의 새로운 수요에 따라 팔로군총부에서는 포병퇀을 건립하기로 결정하고 조선혁명가 무정을 팔로군총사령부의 포병주임으로 임명하고 포병부대 건설사업을 맡게 하였다.     해방후 전국정협주석이였던 원광은 당시 포병퇀 제1임 정치부주임이였다. 그는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썼다. 림분에 도착한후 우리는 지대의 700여명 전사들을 4개 련으로 재편하였다. 또 그곳에 있던 두 개 련을 합하니 천여명에 가까웠다. 퇀장은 팔로군총부 작전과 과장인 무정동지가 담임하였는데 그는 조선사람이였다. 그는 일찍 보정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로농홍군에 참가했으며 홍군대학의 특과영 영장을 지냈고 또 홍군의 포병사업을 지도하였다.     1938년 1월 28일, 림분(临汾)부근의 한 광장에서 포병퇀 창건대회가 성황리에 열리였다. 팔로군 판사처 주임 팽설풍이 중앙군사위원회의 임명장을 선포하였다. 팔로군 포병퇀 퇀장에 조선혁명가 무정, 정치위원에 구창성, 정치부 부임에 원광이 임명되였다. 중앙북방국 책임자 양상곤이 팔로군 포병퇀 창건대회에서 축사를 하였으며 국민당 제2전구 사령인 염석산도 대표를 파견하여 축하를 드렸다. 이로부터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에 포병부대가 있게 되였다.     피어린 장정길에서 할수없이 대포를 버리고 포병부대를 해산해야만 했던 무정에게 있어서 이는 더없이 격동된 순간이였다. 포병퇀이 건립된 후 무정은 단기 훈련반을 꾸리고 그가 직접 교관을 담당하고 전사들에게 사격원리와 포 다루는 요령을 가르쳤다.    당시 상황을 로홍군 원광장군은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림분에 있을때 우리에게는 대포 몇문밖에 없었다. 전퇀의 천여명이 모두 모여도 포병기술을 아는 사람이 몇이 없었다. 기술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집중강습을 시키고 다시 분산하여 전퇀전사들에게 기술을 가르쳐주는 방법을 취했다. 그리하여 먼저 련장, 배장급 간부들을 집중해 기술강습을 시켰다. 퇀장인 무정동지와 9련 련장인 조장성동지를 비롯한 이들이 직접 지도원을 맡고 사격원리와 조작기술을 가르쳣다. 또 주은래동지가 후방으로부터 포술전문가들을 보내 우리에게 강의해 주었다. ”      이처럼 일찍 무정이 직접 양성해낸 많은 포병간부들은 훗날 중국인민해방군 제2포병부대의 고급지휘원으로 성장됐다. 무정은 포병부대를 거느리고 항일전쟁의 제일선에서 백퇀대전을 비롯한 수많은 전투에 참가해 일본침략자들을 힘있게 타격하였다.     조선혁명가 무정은 장정길에서 다진 결의를 드디어 실현하게 되였던것이다. 그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로농홍군 2만 5천리 위대한 장정에 참가하여 굴할줄 모르는 투쟁의지를 남김없이 과시했으며 혁혁한 공적을 남겼다.  
1    홍군장정에 참가한 조선혁명가들① 댓글:  조회:3537  추천:107  2007-05-27
홍군장정에 참가한 조선혁명가들① 국공분렬후 중국공산당은 피의 상흔을 안고 새로운 항쟁을 준비하였다. 중국공산당은 광범한 농민들을 발동하여 토지혁명을 일으키고 농촌으로부터 도시를 포위하는 위대한 전략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1927년 가을부터 1929년까지 모택동과 주덕은 정강산(井冈山)혁명근거지를 창설한후 팽덕회부대와 합세하여 서금을 중심으로 한 강서성 남부와 복건성 서부지역으로 근거지를 확대하였다. 혁명근거지가 확대되고 홍군의 력량이 장대해짐에 따라 중국공산당 중앙이 서금으로 왔으며 서금에 중화쏘베트공화국(中华苏维埃共和国) 림시중앙정부를 수립하였다. 이곳 사람들은 토지를 분여받고 함께 일하고 함께 수확을 분여받으며 살아갔다. 사람마다 평등하고 사람마다 다 같이 일하고 다 같이 잘 살아가는 소박한 꿈을 무르익히면서 살아갔다. 이때로부터 이 지역은 중앙쏘베트지역으로 불리웠고 서금은 공산당 붉은 정권의 수도라는 뜻으로 홍도(红都)로 불리우게 되였다    한편 제3 국제공산당은 1928년 12월 이른바 일국일당의 원칙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중국내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개인신분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할것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중국관내에 있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 조직에 가입하게 되였고 상해에 있던 조선공산당 국제련락부도 중국공산당 강소성 위원회 산하의 법남구한인지부로 되였다. 조선혁명가 려운형, 조봉암, 홍남표, 무정, 구연흠을 대표로하는 이 지부는 관내 조선공산주의자들을 집결하여 새로운 임무를 주었다. 그리하여 대혁명에 참가하였던 조선혁명가 박근만, 박근수, 최석천, 리계동, 리용, 신춘, 마천목, 반경유 등은 중국동북에 파견되여 유격투쟁을 지도하게 되였고 일부는 서금의 중화쏘베트공화국을 지원하러 떠났다.     법남구 한인지부에서는 중앙쏘베트지역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무정, 최정무, 최음파를 비롯한 30여명 조선혁명가들을 강서성 서금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대혁명시기부터 공산당무장부대에 편입되여 활동하던 부분적인 조선혁명가들, 중국공산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로씨야나 동북으로부터 파견되여 조선혁명가들이 서금에 모이게 되였다. 이들은 중앙쏘베트근거지를 중심으로 여러 혁명근거지에서 국민당과 싸우다가 1934년 10월 위대한 로농홍군의 대장정에 참가하게 되였다.      1934년 중앙쏘베트지역은 국민당의 제5차포위토벌을 이겨내지 못하고 위기를 맞게 되였다. 국민당은 동북을 강점하고 상해를 공격하는 일본침략자들과는 계속 타협하면서 50만 대군을 풀어 홍군을 토벌하였다. 당시 중국의 실정을 파악하지 못하고 쏘련혁명의 성공경험을 공식적으로 답습하는 공산당 중앙지도부의 좌경로선(左倾路线)으로 하여 홍군은 처절한 실패를 보게 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이해 10월, 중앙홍군과 중앙령도기관의 지도자들은 서금으로부터 장정을 시작하였다. 조선혁명가 무정은 중앙직속 제1종대(第一纵队) 제3제대(第三梯队) 사령원 겸 정위로 중앙지도자들과 함께 장정을 시작하였다.   전설적인 영웅 무정(1905년―1952년)의 원명은 김무정(金武亭)이다. 1905년 조선 함경북도 경성군(镜城郡)에서 태여난 그는 서울에서 자랐다. 가정형편이 어려웠기때문에 그는 어려서부터 자체로 돈을 벌어 공부하였다. 14살때 ≪3.1≫운동을 목격한 그는 애국사상과 혁명사상을 접촉하게 되였다. 그리고 그후 기독교중학교를 다닐 때 서울의 고려공산당조직의 지도자 려운형(1885년―1947년)을 알게 되였다. 그의 영향을 받은 무정은 1923년에 학교를 중퇴하고 단연 혁명의길에나섰다. 그는압록강을건너 중국 북경에 와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1942년에 무정이 쓴 친필 략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씌여있다. ≪나는 조선에서 청년운동과 로동운동에 참가하다가 일제에게 체포되여 세번이나 옥살이를 하였다. 여러가지 혹형을 받다가 도망쳐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에 온후 대혁명에 참가하였고 사업의 실패로 두차례나 옥살이를 하다가 만기 석방되였다. 1930년부터 지금까지 홍군에 참가하여 여러가지 투쟁을 진행해왔다.≫   1920년대초에 중국에 온 무정은 하북성 보정에 있는 보정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군벌부대에서 근무하였다. 남구(南口)전역과 천진공격전에서 천재적인 군사재능을 발휘한 그는 포병 중좌까지 지냈다. 1925년에 무정은 장가구에서 문창빈(文昌彬), 명덕건(明德件)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군벌혼전에서 아무런 희망도 보지 못한 무정은 그후 북벌전쟁에 참가하였지만 1927년에 장개석이 혁명을 배반하고 공산당을 진압할 때 무창에서 체포되여 사형에 언도되였다. 하지만 당시 장개석의 독재를 반대하는 시위가 많아 만여명 학생들이 시위를 단행하면서 정치범을 석방할것을 요구하였다. 뿐만아니라 법정에도 혁명을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었기때문에 무정은 무사히 풀려나와 상해로 가게 되였다. 1929년에 무정은 상해 로동자폭동에 참가하여 무장조직 지휘자로 활약하다가 영국인에게 체포되였다. 영국법정에서는 상징적으로 그를 2개월간 감금한후 곧 석방하였다. 무정은 계속 상해에서 지하투쟁을 견지하였다. 1930년 6월 중국공산당은 당중앙소재지인 상해에서 쏘베트지역 대표대회를 소집하였다. 대회에는 홍군 제5군 정치위원인 등대원(滕代远)이 참가하였다. 등대원과 무정은 친숙한 사이로 되였다. 회의가 끝난후 무정은 당중앙의 지시에 따라 등대원과 함께 호북 양신(阳新)에 있는 팽덕회군장의 5군에 참가하였다. 이해 7월, 팽덕회의 5군은 동정호(洞庭湖)기슭의 악주(岳州)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홍군은 동정호에 정박해있던 미국, 영국,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함대의 포격을 받게 되였다. 당시 패장으로 있던 무정은 팽덕회를 찾아가 대포로 반격할것을 제기하였다. 홍군이 악주를 점령할 때 야전포 4문과 산포 2문을 로획한것이 있었다. 무정은 대포를 걸어놓고 전사들에게 포사격 요령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는 기타 전사들과 함께 직접 조준하여 포사격을 가했다. 포를 20여발 쏘았는데 10여발이 적함을 명중하자 적함은 도망치고말았다. 이번 포격으로 하여 무정은 홍군의 전설적인 영웅으로 알려졌다. 공화국 원수로 된 팽덕회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회억하였다. ≪우리가 악주를 점령한후 영국, 미국, 일본의 군함이 성안에 포격을 가했다. 우리는 남몰래 포를 걸어놓았다. 당시 나와 조선동지인 무정만이 포를 사용할줄 알았다. 적함이 가까이 다가오자 반격을 가했는데 약 10여발의 포탄이 적함을 명중하였다. 이때로부터 적들은 감히 포사격을 하지 못했다.…악주에서 홍군전사들은 우리가 쏜 포탄이 적함을 명중하자 모두 환성을 올렸고 <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소리높이 웨쳤다.≫ 천재적인 군사재능과 뛰여난 통솔력을 갖춘 무정은 수차의 전공을 세웠고 선후로 패장, 련장, 영장으로 승진하였다. 팽덕회는 무정의 재능을 아껴 그를 요직에 배치하였으며 항일전쟁시기에도 태항산에서 계속 함께 싸웠다. 이때로부터 무정은 홍군의 포술전문가로 명성을 떨쳤다. 1930년 7월 홍군은 호남 평강(平江)에서 첫 산포련(山炮连)을 조직하였는데 그해 말 무정은 산포련의 제3임 련장을 맡았다. 1931년 5월에는 홍군 중앙군사위원회 포병퇀이 강서 피두(陂头)에서 창건되였다. 1임퇀장이 실직행위가 있었기때문에 한달후 무정이 홍군 포병퇀의 제2임퇀장을 맡게 되였다.3) 그후 무정은 중국공산당 군사위원회 위원, 홍군특과학교 포병과 주임으로 사업하다가 후에 특과학교 제2임교장으로 사업하였다. 무정이 교장을 맡았고 정치위원은 중국인 원설조(袁雪祖)가 맡았다. 홍군특과학교는 홍군 다학과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이다. 1933년 10월에 성립된 이 학교는 원 중국공농홍군학교의 기관총련, 포병련, 공병련을 합병하여 세워졌던 것이다. 당시 특과학교 정치위원은 학교에서는 실전수요에 따라 ≪적게 강의하고 많이 해보며 과당수업을 적게 하고 야외훈련을 많이 한다(少讲多做, 少课堂多野外)≫는 교수원칙을 제정하였다. 1937년 7월의 통계를 보면 당시 전교에 1,876명 학생이 있었다. 1934년 9월, 장정을 앞두고 부분적인 학생과 사업일군들이 간부퇀에 편입되고 나머지는 교도사를 편성하였다. 홍군특과학교의 설립은 홍군대학이 단일학과로부터 다학과로 발전하는 첫 시도였다. 이 학교의 교장이 조선혁명가 무정이였다는것은 민족의 자랑이 아닐수 없다. 홍군 포술전문가였던 무정은 장정초기, 군사위원회 제1종대 제3제대 사령원으로서 포병영, 공병영, 수송대대, 부속병원을 포함한 홍군기술부대를 지휘하였다. 전투가 가장 치렬한 곳일수록 무정이 거느린 포병부대가 뒤따랐다. 장정에 참가하였던 라원발(홍군 제3군단 5사의 퇀급 간부로 상강전역에 참가했고 후에는 6사 18퇀 퇀장을 맡음.)로인이 쓴 ≪라원발회억록(罗元发回忆录)≫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장정을 시작한후 가장 치렬했던 상강전역이 시작되였다. 우리 5사는 팽덕회군단장의 명령을 받고 주야로 급행군하여 상강나루터를 점령하는 임무를 맡았다.…지휘부에서는 군사위원회 포병영 무정동지가 포병영을 이끌고 화력지원을 줄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장정에 나선 중앙홍군 주력은 림표가 거느린 제1군단과 팽덕회가 거느린 제3군단이였다. 공격에 능한 제1군단은 선봉역할을 많이 하였고 수비에 능한 제3군단은 엄호작전을 많이 하였다. 수많은 전투에서 무정은 줄곧 포병부대를 이끌고 팽덕회를 도와 전투임무를 승리적으로 완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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