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군장정에 조선혁명가들 ④
1935년 6월 12일 아침, 청장고원 변두리에 위치한 사천성 서부의 대설산을 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설산의 이름은 협금산이고 산을 넘는 사람들은 홍군이였다. 홍군들은 몸에 열을 돋구기 위해 저마다 고추물을 마시고 떠났다.
가파른 눈길을 따라 홑옷을 입은 전사들은 한걸음한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길이 미끌고 눈보라가 세찼기에 수시로 보이지 않는 낭떨어지속으로 미끄러내려갈수도 있었고 눈사태에 파묻힐 위험도 있었다. 공기마저 희박하여 숨이 가빴고 또 머리마저 어지러웠다. 아무리 춥고 지치고 머리가 아파도 걸음을 멈출수 없었다. 그것은 곧바로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여길을 치렬한 전투를 겪으면서 달려온 홍군들에게 있어서 협금산 대설산을 넘는다는것은 그 어느 전투보다도 참혹했고 험난하였다.
반나절을 거쳐 선두부대가 설산을 넘어 협금산 북쪽기슭 달위진의 한 장족마을에 이르렀다. 중앙홍군을 마중나온 홍군 제4방면군의 전사들이 이곳에 기다리고있었다. 제4방면군 30군 정위 리선념과 제9군 군장 하위가 부분적인 부대를 거느리고 달위진까지 진출해 협금산을 넘어올 중앙홍군을 기다렸다. 이 부대의 선두를 맡은 25사 사장 한동산이 목성구라는 장목마을에서 중앙홍군의 선두부대를 맞이하게 되였던것이다.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 갖은 고생을 다 겪어온 홍군전사들은 드디어 집에 돌아온 느낌으로 기쁨의 눈을 머금었다. 중앙홍군과 제4방면군 전사들은 서로 알건 모르건 부둥켜 안고 감격을 금하지 못했다. 이어 중앙홍군 주력부대도 륙속 도달했고 중앙지도자들도 도착했다. 중앙홍군과 제4방면군은 성대한 경축모임을 가지고 두 홍군주력부대의 회합을 축하했다.
어느날 한 홍군 녀전사가 홍군 30군 정위 리선념을 찾아왔다. 이 홍군녀전사가 바로 양상곤의 부인인 리백소였다. 당시 그는 중국로농홍군 총정치부 선전간사로 있었다. 리선념 정위를 만난 리백소는 찾아온 사연을 이야기했다.
“저는 홍군 총정치부 선전간사인데 리백소라고 합니다. 총정치부 선전부장인 륙정일동지는 홍군의 두 주력부대의 회합을 경축하는 모임을 준비하고있습니다. 그리고 홍군의 회합을 경축하는 노래 한곡 만들었는데 정위 동지에게 회보드리려 왔습니다.”
리백소는 노래가사를 리선념에게 전하고 그자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두 주력홍군 공래산에서 승리적으로 회합했네/
백전백승의 4방면군 영웅적 형제들을 환영하네…”
노래를 듣던 리선념 정위는 손벽을 치며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누가 지은 노래이기에 이처럼 듣기 좋은가?”고 다잡아 물었다.
리백소는 “이곡은 홍군의 유명한 음악가 최음파란 조선동지가 창작한것이고 가사는 륙정일 부장과 제가 함께 썼어요.”라고 대답했다.
조선혁명가 최음파가 작곡한 노래 “두 주력홍군 회합가”는 이렇게 세상에 나왔고 중앙홍군과 제4방면군의 회합을 경축하는 모임에서 천백명 홍군전사들에 의해 불리워졌다.
홍군의 음악가 최음파, 그가 창작한 많은 노래들은 일찍 강서성 서금에서부터 홍군부대에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조선인 최음파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고있다. 다만 서금의 자료실과 로홍군들의 추억의 글에서 부분적으로 그의 사적이 전해져 내려올뿐이다.
강서성 서금의 중앙혁명근거지 기념관에는 다음과 같은 자료가 남아있다.
“쏘베트구역 음악가들이 자체로 창작한 혁명가곡에는 <군대가 되려면 홍군이 되자>, <랑군님을 홍군에 보내네>, <홍군학교 졸업가>, <최후 승리는 우리의 것>등이 있다. 이 가운데 중앙쏘베트구역의 저명한 가곡가 조선인 최음파가 지은 노래 <사표곡>은 격정적이고 경쾌하며 힘이 있었다.”
사람들은 중국에서 활동한 유명한 조선음악가라면 곧 항일전쟁시기 연안의 정률성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정률성보다도 10여년 앞썬 1930년대초의 홍군시기에도 우리민족의 유명한 음악가 최음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극히 적다.
최음파는 홍군시기 중앙쏘베트지역에서 활동했던 아주 유명한 음악가였다. 그는 바이올린을 잘 연주했고 창작을 잘했으며 여러가지 공연도 곧잘 하였다. 당시 중앙쏘베트지역에는 현대음악을 배운 음악가들이 극히 적었다. 대부분 민가나 전통예술가들이였고 현대가곡 창작에 능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쏘베트지역 군민들이 부르는 노래들은 대부분 쏘련 노래곡에다 가사를 다시 창작하여 만든 노래거나 전통민요에 현대적인 가사를 붙여 부르는 노래였다. 그러므로 현대악기인 바이올린에 능하고 현대음악지식을 장악한 최음파의 음악적 재능은 이곳에서 충분히 발휘되였다.
당조직의 소개로 20세 젊은 나이에 상해로부터 중앙쏘베트지역에 온 최음파는 홍군전사로, 혁명가로 활동했다. 그리고 자기의 음악적 창작으로 해방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뜨거운 감정을 표달하였다.
1931년 11월 강서성 서금에서 제1차 전국쏘베트대표대회가 소집되였다. 대회의 개최를 경축하기 위해 최음파는 전우들이 창작한 가사에 곡을 지었다. “전국쏘베트대표대회를 옹호한다”라는 이 노래는 근거지 군민들의 격동된 심정을 담아 군민들의 애창하는 노래로 되였다. 노래는 제1차 전국쏘베트대표대회 개막식에서 합창으로 불리워졌다. 당시 로홍군 오수권도 합창단의 일원으로 이 노래를 불렀다. 수십년후 그는, 격정에 넘쳐 불렀던 그때 그 노래는 지금도 귀전에 쟁쟁하다고 이야기했다.
1931년 12월 4일, 국민당 제26로군이 강서성 녕도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홍군으로 넘어왔다. 봉기한 만 7천여명 병사들은 석성과 서금 임전부근에서 재정비를 하고있었다. 봉기부대 병사들은 대부분 북방사람들이였기때문에 남방의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있었다. 앓는 사람이 많았고 또 많이 지쳐있었으며 정서도 좋지 못했다. 이를 감안한 림시중앙정부 모택동주석은 공연대를 파견해 이들에게 선전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꼇다. 그리하여 모택동주석의 지시대로 쏘베트지역에 있던 예술인재들이 한팀을 무어 부대위문을 가게 되였다. 17명으로 구성된 위문공연팀에는 리백소, 호저, 전장비, 최음파 등 우수한 선전일군들이 포함되였다. 이들은 “누구를 위해 싸워야 하는가?”를 비롯한 극을 선보였다. 리백소가 가난한 농민역을 맡고 호저가 국민당 병사역을 맡았으며 장개석과 비슷하게 생긴 전장비가 장개석역을 맡았다. 공연은 아주 성공적이였다. 공연을 본 수천명 장병들은 장개석을 타도하자, 홍군만세를 소리높이 웨치며 출연자들에게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최음파는 이 공연의 시나리오 편성과 음악을 맡았다.
이때로부터 쏘베트지역의 예술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그리하여 쏘베트근거지의 첫 극단인 8.1극단이 서금의 로농홍군학교에서 나타났고 또 많은 소규모 연극팀이 무어졌다. 이에 비추어 1932년 9월 2일에 중앙에서는 서금에다 로농극사 본사를 설치하였다. 로농극사는 로동자, 농민, 홍군, 쏘베트 직원들이 혁명극을 연구하는 조직이였다. 로농극사의 제일임 사장은 장흠이였고 주요사원들로는 사가부, 리백소, 전장비, 호저, 번한년, 리극농, 채건, 최음파 등이였다. 극사창설초기 최음파는 전우가 작사한 <로농극사 사가>에 곡을 붙여 이 노래로하여금 극사 사원들을 고무하는 전투적 노래로 불리워지게 했을뿐만 아니라 근거지 군민들이 모두가 애창해 부르는 노래로 되게 하였다.
극사는 중앙에 본사를 두고 성과 현에 분사를 설치했으며 또 공장이나 공회, 합작사, 학교 그리고 쏘베트정부기관, 군중단체에 지사를 두었다. 그러나 극작가나 공연배우를 할 사람은 많았지만 음악을 할 사람은 적었기 때문에 최음파는 무척 다망하게 보냈다. 공연이 있는곳마다 찾아가 음악을 편성해주어야했고 또 직접 연주를 맡아야했다.
이시기 최음파와 기타 홍군예술인들의 활약에 대해 로홍군전사들이 여러편의 회억의 글을 남겼다.
로홍군전사이며 양상곤주석의 부인인 리백소는 “로농극사에는 사가가 있었는데 가사는 집체로 창작하였고 조선인 작곡가 최음파가 곡을 달았다”고 회억하였다.
로농극사 사장이였던 로홍군 조품산은 다음과 같이 회억하였다.
“홍군대학 개학식이 있던 날, 극사의 사람들은 내용이 풍부한 야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날 저녁 공연프로를 보면 노래가 있었고 춤이 있었으며 또 최음파의 바이올린 독주가 있었습니다. 그때 중앙동지들도 공연을 구경하고 야회에 참석하였는데 온 저녁 박수소리가 끊지 않았습니다.”
중앙쏘베트지역에 홍군대학이 있게 되자 최음파는 홍군대학 구락부에 들어가 활동하게 되였다. 당시 상황을 로홍군 오수권은 이렇게 회억하였다.
“중앙에서는 홍군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고 교장은 엽검영이 맡았습니다. 그리고 하장공과 등평 두 군장과 기타 몇분의 사장을 학교에 파견했습니다. …당시 홍군학교의 문화사업은 아주 활약적이였습니다. 활동의 중심은 홍군학교의 구락부였는데 상해나 쏘련으로부터 귀국한 문화인재들이 많았습니다. 례하면 위공지나 석련성이 있었고 작곡을 아는 조선동지 최음파 등이 있었습니다. 문예공연은 거의 한달에 두번정도 진행되였습니다.”
로농극사의 사장이였던 조품산은 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홍군학교의 확극사업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이때 화극사업에 필요한 일군들도 확대되였습니다. 당시 주요일군들 가운데는 최음파도 있었습니다. 그는 조선동지였고 또 우리의 훌륭한 바이올린 전문가였습니다.”
최음파는 중앙쏘베트지역에서 공연할때 자주 바이올린 독주를 하였다. 그는 늘 조선가곡을 연주하였다고한다. 그의 전우였던 리백소는 만년에도 최음파가 연주하였던 조선가곡의 선률들을 얼마간 기억하고있었다한다.
로농극사는 1934년 1월에 중앙쏘베트극단으로 개칭하였다. 이 시기 로농극사의 사원들은 모두가 뛰여난 혁명자이면서 예술가였다. 이들은 예술을 무기로 쏘베트를 위해 싸웠다. 이들은 군민의 문화생활을 풍부히했고 혁명투쟁을 추진했으며 당의 선전사업을 훌륭히 완수해냈다.
그후 홍군이 장정을 시작할때 대부분 사원들은 조직의 명령에 따라 근거지에 남게 되였다. 이들은 구추백의 지도하에 화성, 붉은기, 전호라는 3개 극단으로 나뉘여 각지 유격구로 떠났다. 최음파는 극사의 주요핵심인 리백소, 호저, 전장비 등과 함께 중앙과 주력홍군을 따라 장정길에 나섰다.
장정길에서 최음파는 기타 전사들과 함께 갖은 시련을 다 겪어야했다. 피어린 상강전투을 겪었고 수천리 강행군을 해야했으며 적수하를 네번 건느고 금사강, 대도하를 뛰여넘고 설산을 넘어야했다. 장정에서 그는 훌륭한 전투원으로, 훌륭한 정치사업간부로, 뛰여난 선전일군으로 활약했다. 전투가 끝나면 그는 별로 쉴사이도 없이 거리에서 연설했고 광장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였으며 사람들을 모아놓고 혁명가곡을 배워주기도 했다. 어려운 행군길에서 그는 때로눈 부대의 앞에서 달리기도하고 때로운 뒤에 따르는 전사들을 격려하기도하면서 선동사업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남들보다 더 많은 걸음을 걸었던것이다.
지금까지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중앙홍군을 따라 처음부터 장정에 참가하여 섬북까지 살아 남은 외국인은 4명으로 알려져있다. 이들로는 국제공산당에서 파견한 독일인 리덕, 윁남인 홍수 그리고 조선인 삐스티와 무정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홍군시기의 조선인 혁명음악가 최음파는 장정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는것을 알수있다. 중앙홍군과 제4방면군의 대회합을 노래하였던 우리의 음악가 최음파는 그후의 행적과 희생경과를 남기지 못했다. 죽음의 수렁으로 알려진 초지를 지나다 희생되였는지? 어느 치렬한 전투에서 흉탄을 맞고 쓰러졌는지? 아니면 대서북 어느 평범한 마을에서 병으로 숨졌는지? 알려지지 않고있다. 더욱 유감스러운것은 그가 언제 어디에서 태여났고 어떤 경력을 가진 인물인지도 밝혀지지 않고있다.
하지만 중앙쏘베트지역에 남겨진 그의 불타는 혁명노래와 장정길에 남긴 우렁찬 승리의 노래는 중화대지에 계속 울려퍼질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의 영원한 음악과 함께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