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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북만 토비숙청
2017년 12월 17일 17시 17분  조회:3784  추천:3  작성자: 김성룡

1946년 6월 26일에 장개석은 중경평화담판의 합의서를 찢어버리고 화북에 집결한 수십만 국민당군을 동원해 해방구를 공격하였다. 이로써 반파쑈전쟁이 승리한후 중국에서의 평화적인 노력은 모두 무산되여버렸고 전면적인 국공내전이 시작되였다.

근 1년간의 시간을 리용해 군사적 포치를 완수한 장개석은 미국제 무기로 무장한 정예군을 휘몰아 해방구에 대한 전면공격을 개시했다. 정주에 있던 류치는 30만 대군을 이끌고 해방구를 공격했고 화북의 국민당군은 산동해방구, 하북과 섬서 해방구를 공격했다.

관내에서 국민당군이 여러 해방구를 대거 공격하였지만 동북의 국민당군은 새로운 공격을 발동할 여력이 없었기에 한동안 동북은 계속 휴전상태가 이어졌다. 이러한 정세에 비추어 장춘으로부터 할빈에 온 중공중앙 동북국은 회의를 열고 3가지 비상포치를 했다. 하나는 랍법전투를 사례로 적을 유인하여 분산시키고 각개 소멸한다는 작전경험을 총화하고 널리 보급하며 다른하나는 동북에서의 투쟁방침을 견지하고 남만을 포기하지 않으며 세번째로는 계속 토비를 숙청하고 후방을 공고히한다는것이였다.

중공중앙의 지시에 따라 림표가 동북국 서기, 동북민주련군 총사령 겸 정위를 맡고 팽진, 라영환, 고강, 진운 등이 동북국 부서기를 맡았다. 7월에 동북국의 주요 지도자들은 모두 할빈에 모여 당면 동북의 정세를 연구하였고 금후사업을 토의하였다. 회의에서 채택한 “동북의 정세와 과업”이라는 결의는 중공중앙의 비준을 받고 7월 7일 정식 반포되였는데 이를 “7.7결의”라고도 한다.

 

우세한 국민당군을 전승하려면 공고한 근거지가 있어야했고 근거지를 공고히 하려면 우선 토비부터 숙청해야했다. 당시 동북경내 100여개 현에 토비가 도사리고있었는데 남만에 5만, 북만에 10만에 달하는 크고작은 토비무리가 있었다. 당시 첫단계의 토비숙청을 거친 동만의 연변지역만이 비교적 안정했을뿐이였다. 국민당군이 장춘, 길림을 점령하고 송화강기슭에까지 도착하자 북만 각지 토비들은 더욱 살벌했다. 놈들은 도처에서 살인, 방화, 략탈을 서슴지 않았고 공산당정부를 공격해 간부를 살해하고 조선족 마을을 략탈하였다. 그리하여 동북민주련군 3분의 1의 주력부대와 지방부대가 동원되여 토비숙청에 나섰다.

  

북만의 토비숙청 답사를 위해 안내에 나선 사학자 서명훈 선생

 

흑룡강성 할빈에 있는 사학자 서명훈 선생은 당시 북만 조선족부대의 토비숙청을 답사팀에게 소개해주었다.

“3지대는 토비숙청 제일선에 적게 나갔습니다. 그때 진운이 ‘조선의용군 3지대는 퇀 편제지만 려단급 대우를 하라. 국제부대이기 때문에 간고한 전투에는 참가하지말라.’는 지시를 했습니다. 하지만 수요에 따라 수차 토비들과 싸웠는데 이를테면 연수에서 전투가 있었고 그다음 상지전투, 팔가산 전투가 의용군에서 했습니다. 목단강군구의 토비숙청상황은 3지대의 경우와 달랐습니다. 목단강군구의 14퇀, 영안의 조선부대들은 영안현에 마린하전투, 그때는 신안진도 영안에 속했습니다. 그리고 세린하전투 가장 큰게 마계하 전투, 동안사건, 목단강시내 ‘5.15’사건…이렇게 모두 제1선에서 토비들과 싸웠습니다. 내가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 않았지만 들은데 의하면 동안전투가 간고했습니다. 동안전투에서 우리부대가 흑산이란 곳에 주둔했었는데 두목 사문동 계통의 토비 700명이 동안에 들어와 조선사람은 무조건 막 죽이는 판이였습니다. 조선사람들은 갈데 없어 국경에 가까운 쏘련쪽으로 갔습니다. 생존자들의 회억에 따르면 그들은 중국사람인것처럼 가장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토비들은 조선사람 옷을 입으면 무조건 죽였습니다. 곁에 한족들이 많이 도와주어 겨우 살아났다고했습니다. 소식을 접한 14퇀 장병들은 다수 조선사람이였는데 두개 영이 달려가 토비들을 소멸했습니다. 토비숙청에서 목릉전투, 마계하전투에서 우리전사들이 가장 많이 희생되였습니다.”

 

목단강군구 조선족부대인 제14퇀 3영과 제15퇀 3영, 사령부 경위련, 보안퇀 제2영, 수녕성정부 경위련, 포병퇀 조선족련은 첫단계 토비숙청에서 정운봉과 마희산을 비롯한 많은 토비들을 소멸하였다.

1946년 5월부터 목단강군구 주력부대는 부사령원 류현권(刘贤权)의 인솔하에 세길로 나누어 림구(林口)의 리화당(李华堂), 목릉(穆棱)의 왕지림(王枝林), 계서(鸡西)의 사문동(谢文东)을 공격하였다.

 

목릉현부근의 대천장 오늘의 공화향일대에는 다섯개 마을에 300여 가구의 조선족이 살고있었다. 광복이 되자 150명 조선족청년이 부대에 참가하여 목릉조선독립영을 편성하였다. 왕지림을 토벌하기 위해 이 부대는 목단강군구 주력부대와 함께 마교하(马桥河)쪽으로 나갔다.

5월 12일, 300여명 토비가 목릉을 공격했다. 현정부에 남은 10여명 조선족 전사들은 현정부 청사를 지켜 용감히 적과 싸웠다. 그들은 정확한 사격으로 수차 적을 물리치면서 정부청사를 사수하였다. 한편 목릉기차역에서는 김홍국과 신태환 두 조선족 전사가 뜻하지 않게 수십명 토비의 공격을 받았다. 신태환은 허리에 총을 맞은 김홍국을 안고 역사에 들어가 몸을 숨겼다. 적이 계속 공격해 오자 신태환은 두 창문에 총을 걸고 이쪽저쪽 왔다갔다하면서 사격했다. 그의 정확한 사격에 7~8명 적이 쓰러졌고 나머지 놈들은 머리를 들수없었다. 한동안 대치하던 중 도대체 아군수가 얼마인지 판단하지 못한 적은 감히 공격을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한편 더욱 치렬한 전투는 목릉현 북가(北街)의 독립영 영부층집에서 진행되였다. 패장 허만호와 김철룡은 관리원 리남해, 반장 허만수를 비롯한 17명 조선족 전투원과 함께 150여명 적을 대적하면서 영부를 사수하고있었다. 놈들이 뜨락으로 밀려올때 허만호 패장이 옆으로부터 경기관총을 사격해 적을 쓰러눕혔고 바른편으로 허만수가 정확한 사격으로 련속 적을 쓰러뜨렸다. 당황한 놈들은 철뚝으로 철퇴하여 계속 맞사격을 하였다.

적은 다시 공격해왔다. 이때 영부 아래층에 몸을 피하고있던 50여명 녀성과 아동들이 《최후의 결전》을 부르면서 아군의 사기를 붇돋아주었다. 전사들은 더욱 용감하게 싸워 해질 무렵까지 또 한차례 적을 물리쳤다.

목릉이 공격받는다는 소식을 접한 군구 조선족 독립영은 밤도와 50리길을 달려왔다. 망원경으로 적정을 살피던 영장 허태동(许泰东)은 북가의 기름 가공방이 적 지휘부임을 판단하고 날이 밝자 곧 공격명령을 내렸다. 아군은 먼저 포격으로 적 지휘부를 날려버린 다음 북가를 포위공격하여 대부분 토비를 소멸했다.

 

목릉현 토비숙청에서 희행된 렬사들의 묘소

 

국민당군이 사평을 공략하고 련속 장춘, 길림을 차지하면서 예리한 공격태세를 보이자 목단강부근의 토비들도 이들과 합세할 태세로 목단강을 점령하려 시도했다.

5월 14일, 600명에 달하는 토비가 목단강시를 공격했다. 놈들은 신화로와 홍운교를 넘어 군구사령부를 포위공격하였고 부근의 목단강군정간부학교와 수녕성정부를 공격했다. 군구사령부에서는 조선족부대인 경위련이 조명선(赵明善) 련장의 지휘밑에 침착하게 적과 싸웠고 성정부에서도 조선족경위련이 련장 김종과 지도원 허동섭의 지휘밑에 적과 치렬한 전투를 벌였다. 간부학교에서도 조선족학생들이 한족학생들과 함께 무기를 들고 적과 싸웠다. 삽시에 목단강시 전부가 초연에 휩싸였다.

목단강군구 사령부 뜨락에는 조선족 기술자 남정웅(南正雄) 등 7~8명이 낡은 일본제 땅크를 수리하고있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땅크수 김병준(金秉俊)은 곧 땅크를 몰고 참전하였다. 땅크는 사령부를 공격해오는 적을 물리치고 간부학교를 거쳐 성정부로 달렸다. 길모퉁이에 숨었거나 물도랑에 숨어 사격하던 놈들은 땅크의 기총사격에 이리저리 쓰러졌다. 수류탄을 던져도 소용이 없었다. 땅크는 거리의 락엽을 쓸어내듯이 성정부부근의 적을 숙청해 버렸다. 그리하여 날 저물기전에 목단강시의 총소리는 멎었다.

이튿날 날이 밝자 부근에 있던 목단강군구 정위 김광협도 제14퇀 3영의 조선족장병들을 거느리고 달려왔다. 목단강 보위전에서 아군은 토비두목 왕소정을 생포하고 수백명 토비를 소멸했다. 하지만 전투에서 부영장 정우(郑友), 련장 최인규(崔仁奎), 땅크수 김병준을 비롯한 6명이 장렬히 희생되였다. 

5월 26일에 목단강시 기차역 광장에서 승리경축대회와 렬사를 추모하는 추도회가 성대히 열렸다. 

 

목단강시 토비숙청 전적지 홍운교

목단강과 마교하 토비숙청과정을 이야기하는 현지 농민

목단강기념관에 전시된 93명 조선족렬사들의 토비숙청 사적

목단강시 혁명렬사 기념비와 기념관

 

목릉현과 목단강시를 공격하려던 토비를 숙청한 다음 아군은 재차 부대를 정비해가지고 계속 계서쪽으로 공격했다. 계서로 통하는 길목인 마교하촌에는 범흥산을 두목으로하는 400여명 토비가 있었다. 아군은 정면공격과 적의 퇴로에 미리 매복하는 전술을 결부시키는 작전을 구사하였다. 범흥산은 아군의 정면공격에 배겨내지 못하고 퇴각하던 중 다시 아군의 포위에 걸려들었다. 5시간의 접전을 거쳐 아군은 마교하를 수복하고 적 백여명을 격살하고 백여명을 포로하는 전과를 올렸다.

목단강군구 제14퇀 3영과 제15퇀 3영의 조선족 장병들은 기타 부대와 함께 련이어 림구, 계서, 수분하, 동녕 등지를 수복하고 왕지림, 리화당, 사문동이 거느린 토비들을 숙청했다. 수분하로 진격하던 14퇀 3영은 세린하(细麟河)에서 적과 조우하였다. 아군은 목단강으로부터 기차로 땅크를 실어다 적을 공격해 철도남산고지를 점령하고 적 230명을 소멸하였다. 이어 1946년 6월과 7월에 조선족 장병들은 또 민주련군 359려와 함께 동흥폭란을 평정하고 오림현(五林县)에서 토비 400여명을 소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신안진(해림) 토비숙청을 이야기하는 현지 농민

 

마교하, 신안진, 계서 토비숙청에서 희생된 조선족렬사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

 


토비숙청에서 희행된 43명 조선족렬사들을 기념하는 비문

 

북만의 토비숙청에서 또 조선족 장병으로 구성된 “동철부대”가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광복후 김동철(金东哲), 김명세(金明世)를 비롯한 36명 가목사의 조선족 청년이 일제가 버린 총을 들고 마을을 지켜 싸우기 시작했다. 이들은 후에 5000여명 규모로 확대되여 삼강인민자치군 조선족영으로 편성되였다. 연안에서 온 한족인 류곤(刘坤)이 영장을 담임하고 김동철이 교도원을 맡은 이 조선족영은 송화강, 흑룡강, 눈강이 흐르는 드넓은 삼강평원을 주름잡으며 토비와 싸웠다.

김동철 교도원은 사문동 수하의 기병퇀 참모장 김해정(金海静)을 설득해 아군에 넘어오게 했다. 이들은 한달 남짓한 사이에 2500여 킬로메터를 달려 30여차의 전투를 하면서 토비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리하여 놈들은 “조선부대가 온다.”는 소리만 들어도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놓았고 사람들은 이 부대를 “동철부대”라 불렀다. 소문을 듣고 더욱 많은 조선족 열혈남아들이 동철부대를 찾아와 입대하였다.

서명훈 선생의 소개에 의하면 동철부대는 의란에서 리화당의 토비무리를 격퇴한후 목단강까지 적을 추격해 소멸했고 목단강의 조선족부대와 함께 리화당, 사문동의 토비무리를 격퇴시켰다. 그리고 벌리에 동철부대 렬사 기념비가 있다고했다.

1946년 5월 동철부대는 칠대하(七台河) 부근의 청룡산을 포위공격해 사문동의 토비무리 200여명을 소멸하고 계속 적을 추격했다. 사문동은 계서로 도주해 리화당, 장우신(张雨新) 등 토비무리를 수습한후 동안에 쳐들어가 5월 26일 피비린 “동안사변”을 조작했다. 조선족부대의 타격을 받은 토비들은 동안거리를 훑으며 조선족이라면 남녀로소 불문하고 살해했다.

“동안사변” 소식을 접한 동철부대 전사들은 치솟는 분노를 가까스로 참으며 만악의 토비를 끝까지 소멸할 결의를 다졌다. 동철부대는 모든 곤난을 극복하면서 계서, 계동, 벌리, 밀산 등지를 전전하면서 토비를 추격하였고 놈들에게 숨돌릴 기회를 주지않았다.

동철부대는 리련희 토비무리를 숙청하고 북만의 주력부대인 359려와 함께 기타 대부분 토비들을 숙청했다. 아군의 드센 공격과 추격작전에 지칠대로 지친 토비무리는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으며 토비두목들은 하나하나 나포되였다. 그리하여 마희산, 리화당, 장우신, 사문동을 비롯한 토비두목들은 선후로 민주련군에게 포로되여 총살당했다.

하늘에 사무치는 죄악을 저지른 사문동은 벌리에서 공개심판을 받은후 토비숙청에서 희생된 동철부대의 16명 렬사를 위해 세운 16렬사기념비 앞에서 처형되였다. 피로 얼룩진 목단강, 가목사, 밀산지역의 간고한 토비숙청은 승리적으로 끝났다. 이곳 토비숙청에서 수많은 무고한 조선족 농민들이 피해를 보았고 또 많은 우수한 조선족 장병들이 소중한 생명을 바쳤다. 조선족부대의 전투적 업적과 두려움 모르는 혁명정신은 영원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간직될것이다.

 

동북민주련군 주력이 할빈에 도착함에 따라 북방의 대도시 할빈시는 동북해방구의 정치군사중심지로 되였다. 북만의 목단강지역 토비숙청이 거의 마무리되고있을때 할빈부근에 잠복했던 토비들은 국민당 특무들의 사촉하에 할빈시를 탈환할 모략을 꾸미고있었다. 놈들은 할빈을 공점하고 아군의 지휘체계를 파괴함으로써 곧 장춘으로부터 북상하는 국민당군 주력부대와 함께 북만해방구를 전부 차지하려 시도했던것이다.

국민당으로부터 륙군중장 위임장을 받은 토비두목 강붕비(姜鹏飞)는 할빈부근의 토비들을 규합해 할빈시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강붕비는 장춘쟁탈전에서 아군의 심한 타격을 받은 철석부대의 두목이였다. 그는 리화당의 잔여세력을 배극도에 집결시키고 류작비(刘昨非)의 무리를 아성에 집결시켰으며 할빈시 근교와 송화강 이북에는 토비두목 류송파(刘松坡)와 류경산(刘景山)을 배치해 8월 28일에 동시에 할빈시를 공격하려했다.

1946년 8월 24일 저녁에 강붕비는 할빈시 광복호텔(光复饭店)에서 부하 장교들과 술을 마시고있었다. 그는 국민당 신1군이 곧 할빈으로 공격해 온다면서 이 기회를 빌어 할빈을 점령하고 부귀를 누리자고 부하들을 구슬렸다. 하지만 강붕비의 일거일동은 언녕 아군 정보일군의 손에 장악되여있었다. 술판이 한창 짙을 무렵 민주련군 특공대가 나타나 강붕비와 그의 부하들을 술자리에서 전부 체포했다.

강붕비를 비롯한 적 두목을 전부 제거했지만 놈들의 폭란은 막지 못했다. 1946년 8월 28일에 황창회(黄枪会) 폭도 3000여명은 원 계획대로 할빈에서 폭란을 일으켰다. 당시 할빈의 위수임무를 맡은 주요 력량이였던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명령을 받고 토비들과의 치렬한 접전을 치렀다.

폭도들이 고향(顾乡)에 주둔한 의용군 1대대 2중대의 병영을 포위하고 공격하자 전사들은 중대장 한택치(韩铎治)의 지휘하에 침착하게 싸워 수십명 폭도를 격살하고 적을 물리쳤다. 다른 천여명 폭도는 도외(道外)를 거쳐 태평교(太平桥)부근으로 공격해왔다. 놈들은 부적을 달고 총뿐만 아니라 칼과 창까지 들고 달려들었다. 태평교를 수비하던 3중대 장병들은 중대장 최서화(崔瑞华)의 명령이 떨어지자 일제히 사격했다. 수십명 폭도가 총알을 맞고 쓰러져서야 혼비백산한 폭도들은 어둠속에 줄행랑을 놓았다. 3중대는 전투에서 수십명 폭도를 격살하고 50여명을 포로했다. 이로써 조선의용군 제3지대 장병들은 승리적으로 황창회의 폭란을 평정하고 정치군사중심지인 할빈시를 승리적으로 보호했다.

 

1946년말에 이르러 북만의 토비들은 대부분 숙청되였고 북만근거지는 더욱 공고히 되였다. 북만토비숙청에서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할빈위수임무를 훌륭히 완수하고 황창회의 폭란을 성공적으로 제압했으며 목단강군구 조선족장병들은 두려움없이 싸워 가목사지역의 동철부대와 함께 토비들을 철저히 숙청했다.

 

목단강시 렬사릉원의 기념조각

목단강시 렬사릉원의 기념비

 

지금 목단강시 렬사릉원에 가면 마교하전투, 목릉전투, 목단강시 보위전투에서 희생된 93명 조선족장병들의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그리고 할빈시 렬사릉원에도 21렬사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1946년 9월에 조선의용군 제3지대의 3대대 7중대가 향방구(香坊区)의 시교에서 토지개혁할때 리영택(李英泽) 중대장과 박만근(朴万根) 부중대장이 한개 소대 30여명 전사를 거느리고 사리툰(舍利屯)으로 달려갔다가 적의 매복에 걸려 21명이 희생되였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향방비행장에서 렬사들을 위한 성대한 추도식을 가졌다. 후에 렬사들은 이곳 할빈시렬사릉원에 모셔졌던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철부대의 16명 용사를 기리는 16렬사기념비도 벌리에 세워져있다.

 

조선의용군 3지대의 21렬사기념비를 소개하는 서명훈 선생

 

흑룡강성의 이러한 기념비들은 북만을 공고히하고 토비숙청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운 조선족장병들의 업적과 토비숙청에서 소중한 생명을 바친 렬사들의 사적을 후손만대에 길이 전해줄것이다.

  북만토비숙청에서 영용히 희생된 조선족 장병들의 넋은 영원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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