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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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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기동(冀东) 항일유격투쟁의 코기러기 주문빈④ 댓글:  조회:3336  추천:0  2017-04-14
기동항일유격대의 코기러기인 주문빈은 혁명에 충직했고 근검소박하게 생활하면서 헌신적으로 사업했다. 그는 강의한 의지력으로 기동인민을 이끌고 갖은 곤난을 이겨나감으로써 기동인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겨울추위가 한창인 2004년 1월 13일 답사팀은 주문빈렬사의 녀동생 김신정로인을 모시고 당산으로 출발하였다. 주문빈렬사가 개란탄광 로동자들의 대파업과 항일폭동을 령도하고 또 유격대를 조직하여 싸웠던 곳을 돌아보고 기동렬사릉원의 주문빈렬사의 사적을 보기 위해서였다. 당산시 남신서도(南新西道)에 위치한 기동렬사릉원은 1958년에 축조되였다.   기동렬사릉원의 주문빈 흉상 기동렬사릉원의 유격대장 절진국의 흉상   렬사릉원의 관리일군들은 주문빈렬사의 유가족인 김신정로인이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벌써 마중나와 있었다. 주문빈렬사와 함께 싸웠던 기동의 항일영웅 절진국의 딸 절풍란(节风兰) 로인도 와 있었다. 70여세인 절풍란 로인은 차에서 내리는 김신정로인을 보자 반갑게 달려오면서 그의 손을 꼭 쥐며 고모라고 따뜻하게 불렀다.   주문빈의 가르침속에 성장한 절진국렬사는 기동의 유명한 항일영웅이다. 그는 주문빈이 령도하는 개란탄광 로동자파업에 참가하였고 또 항일폭동에 참가하였으며 기동의 항일련군 특무 1대대 대대장으로 활약하였다. 1940년 8월에 그는 한차례 전투에서 희생되였다.   절풍란로인은 이렇게 회억하였다.   (절풍란)“1940년 8월에 아버지가 전투에서 희생되자 주주임(주문빈)이 우리 집을 보살펴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언니, 나, 남동생을 데리고 산동의 고향집으로 가려했지만 주주임이 당이 있는 한 당신들은 꼭 잘 살수있다면서 만류했습니다. 주주임은 회의때면 필기하지 않고 담배만 피우다가 저녁에 집중적으로 회고하여 정리하군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매우 근검소박한 사람이였고 부하들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그의 군마는 늘 경위원이 타고 다녔기에 사람들은 그의 경위원을 사령원으로 부르며 놀려주군 하였습니다.”     주문빈은 뛰여난 조직력이 있었을뿐만아니라 부하들을 관심하고 군중들과 잘 련계하는 훌륭한 사업작풍이 있었다. 그는 경위원에게 사격술을 가르쳐주었고 늘 전사들의 생활을 보살펴주었다.   주문빈에게는 군마 한필이 있었다. 그는 몸소 말에게 여물을 먹였고 내가에 가서 목욕시켜주었다. 하지만 주문빈은 이 애지중지 여기는 군마를 몇 번 타지 않았다. 행군도중에는 녀전사나 꼬마전사에게 양보하였고 또 무거운 짐을 지게 하였다. 뿐만아니라 주문빈은 늘 자기의 옷을 남에게 주고 자기는 헌옷을 기워입군 하였다. 그리하여 기동의 군민들은 주문빈을 자기의 친혈육처럼 생각하였다.   기동에서 유격전을 활발히 전개하면서 일본침략자를 힘있게 타격하던 주문빈은 1944년에 양가포(楊家鋪)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1944년 10월 16일, 기열변구 특별위원회는 풍윤현(丰润县)에서 감조감식(减租减息) 회의를 소집하였다. 주문빈은 천안, 란현, 풍윤현 3개현의 련합으로 된 현당위원회 확대회의에 참가하였다. 이때 일본군이 풍윤과 란현, 천안, 준화 주변의 주요 거점에 병력을 확충했다는 정보가 전해졌다. 이날 저녁 주문빈은 선전부 부부장인 려광(吕光), 비서장 리삼(李杉)과 의논하고 양가포에서 회의를 끝내기로 하였다.   특별위원회와 행정기관 일군들은 양가포부근 마을에 머물렀고 주문빈은 주요간부들과 함께 리장자(李庄子)라는 마을에서 밤을 보냈다. 이튿날 새벽녘에 뜻하지 않게 총소리가 울렸다. 주문빈은 즉각 기관일군들과 전사들을 집합시켰다. 그는 북쪽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북쪽에서도 적이 나타났다. 이때 적은 이미 양가포를 모두 포위하였던 것이다. 위기일발의 시각 주문빈은 사람들의 용기를 북돋아주면서 포위돌파 작전을 주밀하게 포치하였다.  피타는 포위 돌파전이 시작되였다.  련장 류경여(刘景余)가 주문빈의 지시에 따라 두 개 패의 전사들을 거느리고 엄호를 맡았다. 전사들은 화력을 집중하여 전모산(毡帽山)우의 적을 견제하면서 돌격부대와 기관일군들을 엄호하였다. 왜놈들이 유리한 지세를 차지하고 집중공격했기때문에 많은 동지들이 희생되거나 부상 입었다. 전모산 서남기슭에는 물도랑 하나가 있었다. 돌격대원들은 이 물도랑을 따라 산 아래로 내려갔다.   주문빈과 전우들이 두 개 굽이를 돌았을 때 제4지구 당위원회 서기였던 정진군(丁振军)이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주문빈은 슬픔을 참으며 손수건을 꺼내 정진군의 얼굴을 가리워주었다. 그들은 계속 싸우면서 산을 내렸다. 산아래에 거의 도달했을 때 주문빈도 어깨에 총을 맞았다. 그는 아픔을 참으며 계속 전진하였다. 얼마후 그는 선전부의 려광 부부장과 그의 안해 류유(刘俞)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그는 눈물을 머금고 희생된 전우들을 작별하고 계속 전투를 지휘하였다.   치렬한 전투에서 많은 동지들이 희생되였다. 중상을 입은 주문빈이 산아래에 도착했을 때 그의 곁에는 5명 전사밖에 남지 않았다. 그들도 대부분 부상을 입었다. 주문빈은 전우들을 보면서 “마지막 탄알이 남을때까지 싸웁시다!”하고 말했다. 그는 희생된 전우들의 손에서 총을 찾아 쥐고 침착하게 싸우면서 전우들을 엄호하였다. 앞에서 공격해 오던 왜놈 몇이 주문빈의 사격에 쓰러졌다. 주문빈은 “동지들 빨리 뒤로 피하시오!”라고 명령하고 계속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흉탄이 그의 머리에 명중되였다.   조선인민의 훌륭한 아들이며 중국공산당의 훌륭한 간부인 주문빈은 세계 피압박인민의 해방사업을 위해 뜨거운 피를 기동대지에 흘렸으니 그때 그의 나의 36세였다.   혁명사업에 충직하고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하며 근검소박하고 유모스런 주문빈렬사의 숭고한 혁명정신은 기동인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사람들은 영웅을 잊지 않았다. 기동인민들은 주문빈렬사의 유체를 전모산기슭 푸른 소나무 곁에 모셨다가 해방후에는 당산시 기동렬사릉원에 옮겼다. 그후 석가장에 화북렬사릉원이 축조되자 주문빈의 유해는 격이 더 높은 화북렬사릉원으로 모셔졌다. 거기에는 주문빈의 묘소와 동상이 있다. 절풍란로인은 주문빈의 희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절풍란) “주주임이 희생되면 우린 어떻게 할까? 하늘이 무너지는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줄곧 주주임이 당이고 당이 주주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희생될 때도 그처럼 절망하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주주임은 자녀가 없기때문에 아버지 산소에 갈때면 꼭 주주임의 묘소에도 가보라고 부탁했습니다.”   1957년, 절풍란은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 절진국렬사의 묘소를 찾아 본후 주문빈렬사의 묘소도 찾아 보았다. 그때 뜻밖에 김신정로인을 만나게 되였던것이다. 그후부터 두 렬사의 유가족은 한가족처럼 서로 도와주며 지냈다. 절풍란은 김신정로인을 고모라고 불렀고 김신정로인은 당산지진 때 위험을 무릅쓰고 당산에 달려가 절풍란 일가를 위문했었다. 김신정 로인(좌)과 절풍란 로인(우)     주문빈 일가는 해방될 때까지 주문빈의 소식을 모르고있었다.   기동대지에서 피 흘리며 싸운 주문빈렬사가 희생되여 일년도 안된 1945년에 만악의 일본제국주의는 드디어 패망하고 말았다.   일본이 항복한후 씩씩한 조선의용군 전사들이 줄지어 동북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주문빈의 어머니 홍기주는 김신정을 데리고 길가의 돌에 앉아 군인대오를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중국 동북으로, 조선으로 전진하는 의용군 대오속에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주문빈이 있기를 기대하면서 이들 모녀는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행군하는 조선의용군
17    주문빈③ 댓글:  조회:3129  추천:0  2017-04-09
1928년, 주문빈 일가는 북평시 해정구(海淀区)에 이사하였다. 주문빈의 막내 녀동생 김신정 로인이 남긴 회억에 의하면 체육에 남다른 재능을 가진 주문빈은 학교 운동경기뿐만 아니라 하북운동대회, 전국대회에까지 출전했다. 당시 “헝털”이라고 부르는 한 서양인이 주문빈의 뛰여난 체육실력을 좋아해 그에게 손수 운동기술을 가르쳐주었다한다. 그리고 주문빈의 가정이 펴이지 못한것을 보고 양 5마리를 사주며 양젖을 파는 장사를 해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주문빈 일가가 양젖 장사를 시작하였는데 북평의 유족한 사람들이 양젖을 많이 사주었기에 장사가 퍽 잘 되였다. 하지만 통현에서 양젖을 북평 시내로 날라다 팔자니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북평시내로 집을 이사하기로했던것이다. 김씨 일가는 해정구 선연교(仙缘桥)부근에 집을 잡고 계속 양젖 장사를 하면서 살았다. 집은 귀신집으로 불리우는, 누구도 들려하지 않는 집을 헐값으로 들었다. 그때 집근처에 교회당 하나가 있었다고한다.    당시 주문빈의 동생 김상호는 북경대학에 입학하였고 함께 혁명활동을 하던 장진은 보인대학(輔仁大學)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주문빈은 반동적인 학교 교장과 경찰의 눈에 났기 때문에 로하중학교의 졸업증마저 가지지 못해 승학기회를 잃게 되었다. 학교에서 주문빈은 늘 진보적인 학생들을 동원해 국민당이 혁명을 배반한 죄장을 이야기했고 공산당의 혁명주장을 선전했으며 야학을 조직하고 또 교내의 반동적인 사생과 투쟁하였다. 그는 학생들의 앞장에 서서 제국주의에 아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교장과 지주, 군벌가족의 학생들과 정면으로 싸웠던것이다.   승학기회를 잃었지만 주문빈은 락심하지 않고 북경 해정구에 자리잡은 새집에서 당의 지시를 기다리며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였다. 북평에서 3년간 주문빈은 늘 북경대학이나 보인대학에 가서 진보적인 대학생들과 접촉하였다. 그는 중앙쏘베트구역에서 싸우고있는 중국로농홍군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전국인민의 항일투쟁을 이야기하면서 학생들을 고무격려했다. 그의 격려를 받아 보인대학 교원으로 학교에 남아있던 장진은 진보적인 “과학사(科學社)”라는 사회단체를 만들었다. 장진은 학생들과 함께 비밀리에 폭탄제조와 독가스방지설비 제조, 무전기 제조실험을 진행하였다.   20세기 30년대 중반에 이르러 중국에 대한 일제의 침략야심이 날로 심각해졌다. 중국공산당은 광범한 피압박 로동자들을 동원해 일본제국주의자들과 투쟁할것을 강조하였다. 전민의 항일정서가 고조되고있는 가운데 일본자본가들의 착취를 받고있던 로동자들의 투쟁이 더욱더 치렬하였다.  1936년 여름, 주문빈은 하북성 당위원회의 지시를 받고 당산(唐山) 공작위원회 서기로 당산에 파견 되였다. 그의 주요임무는 개란탄광의 로동운동을 전개하는것이였다.  주문빈은 당산화동전기설비소(唐山华东电料行)에서 반도체를 수리하는 일을 하면서 비밀리에 당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는 늘 개란탄광에 찾아가서 로동자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로동자들에게 혁명의 도리를 설명해주었다. 그는 선후로 당산과 조각장(赵各庄)을 다니면서 당조직을 설립하였다. 당조직은 로동자들속에서 날로 더 큰 영향력을 과시하게 되었다. 로동자들을 조직하고있는 주문빈    개란탄광은 당시 중국에서 가장 큰 탄광중 하나였다. 개란광무국은 비록 일본, 중국, 영국이 함께 운영한다고는 하지만 실권은 영국인이 장악하고있었다. 영국자본가들은 높은 리익을 추구해야했고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더욱 많은 선탄자원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이중삼중으로 중국 로동자들을 착취하고있었다.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폭발한뒤 1938년 3월, 개란탄광 조각장 광주인 자본가 진갑삼(陈甲三)이 새로운 작업기록을 실시하면서 로동자들의 로동시간을 늘이고 보수를 줄이는 조치를 취했다. 이는 로동자들의 큰 불만을 자아냈다. 당시 조각장에서 활동하던 주문빈은 파업시기가 성숙되였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지하 공산당원인 호지발(胡志发), 왕가의(王家毅)등과 함께 구체적인 파업실시방법을 연구하였다. 그들은 먼저 서림(西林)과 당가장(唐家庄), 마가구(马家沟)의 당원들과 련계를 가진후 전반 당산지구 광산로동자들이 함께 행동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로동자와 업주간의 첫 담판은 업주인 진갑삼의 배신으로 파탄되고말았다. 진갑삼은 부근의 반동경찰들을 동원해 로동자들을 탄압하려하였다.  3월 21일 저녁, 주문빈은 호지발, 왕가의, 절진국(节振国), 장진원(蒋振元)을 비롯한 20여명 로동자 대표들과 함게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들은 모두 공산당에 가입할것을 신청한 열성자들이였다.   회의에서 주문빈은 영국자본가들을 주요 목표로하고 일본측의 파괴와 간섭을 방지할 구상을 내놓았다. 그리고 파업위원회와 로동자규찰대(纠察队)를 설립하기로 하고 22일부터 총파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22일 오후 1시가 되자 만여명 로동자들이 모여왔다. 이들은 조각장광산의 사무청사를 포위하고 구호를 웨치면서 로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업주인 진갑산은 할수없이 로동자대표를 만나주었지만 로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려면 당산에 있는 상급의 지시를 받아야한다는 핑계를 대였다. 이때 조각장광산의 영향을 받아 서림에서도 25일 파업위원회를 설립했고 26일에는 당가장에서도 로동자사무처를 설립하였다. 이들은 3백여명으로 된 로동자규찰대까지 조직하여 파업을 선포하였다. 4월에 들어서서 당산광산과 마가구광산도 선후로 파업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당산의 5개 광산의 수만명 로동자들의 대파업이 시작되였다.   파업을 더욱 치밀하게 전개하기 위해 주문빈은 다섯개 광산의 로동자대표 련합회의를 설립하고 통일적인 투쟁강령을 작성하고 제국주의자들에게 18가지 요구를 제기했다.   영국과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로동자들과 담판하는 한편 갖은 방법으로 파업을 파괴하고 로동자들의 단합을 무산시키려했다. 그러나 지하당조직의 두리에 굳게 뭉친 로동자들은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고 끝까지 투쟁을 견지해나갔다.  파업투쟁은 5월까지 계속 전개되였다.  광산로동자들의 지속적인 파업으로하여 제국주의자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거대한 손실을 보았다. 당황해난 제국주의자들은 로동자 대표들과 담판을 진행하지 않을수없었다. 영국자본가는 5월 4일에 할수없이 로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16가지 로자협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50여일간 지속된 개란탄광 로동자대파업은 승리적으로 끝났다. 개란탄광 로동자 대파업의 승리는 중국공산당이 령도한 로동운동사에서 한차례 성공적인 파업투쟁 사례였다.   당시 당산시 공작위원회 서기를 맡았던 주문빈은 이 투쟁에서 뛰여난 재능과 탁월한 조직력을 보여주었으며 당조직과 광범한 로동자들의 깊은 신뢰를 받았다. 대파업의 승리는 기동인민의 항쟁을 크게 고무해 주었고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기동인민의 더욱 큰 무장투쟁의 튼튼한 대중적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주문빈이 령도한 당산의 개란탄광로동자 대파업이 계속 되고있는 동안 홍군대장정을 마치고 섬북에 자리잡은 당중앙은 1937년 8월에 섬서성 락천현에서 락천회의를 소집했다. 일본침략군이 대거 침략전쟁을 발동한 상황에서 열린 락천회의는 광범위한 항일근거지를 창설하고 대중에 의지한 항일유격전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가운데 기동항일근거지를 개척할데 관한 지시도 있었다.   당의 지시에 따라 기동인민은 10개 현 항일인민대표회의를 열고 기동인민 항일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회의정신을 실행하기 위해 주문빈은 개란탄광로동자 파업과 로동자봉기 지도사업을 맡게 되였다.   당중앙의 지시에 따라 주문빈은 당산지구의 로동운동을 적극 지도하였다. 그의 뛰여난 조직력과 지도력으로하여 1938년 5월에 개란탄광 로동자들의 대파업이 승리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실패를 달가와하지 않는 제국주의자들은 얼마후 일제의 지원을 받아 로동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해 6월에는 20여명 열성자들이 일본군과 광산의 경찰들에게 체포되고 광산파업위원회의 총대표인 장진원과 대표 절정수(节廷秀)가 비밀리에 살해 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 경찰은 로동자 규찰대 대장인 절진국을 체포하려 하였다.   무예에 뛰여난 절진국은 집에 쳐들어온 일본병사 한명을 칼로 찔러 죽이고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일제의 피비린 탄압은 개란탄광 로동자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주문빈은 로동자들을 모아놓고 새로운 반일무장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1938년 7월까지 전국의 항일투쟁은 이미 일년간 지속되고있었다. 기동인민의 항일투쟁을 돕기 위해 팔로군 제4종대가 기동으로 진출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리운창(李运昌), 홍린각(洪麟阁), 고지원(高志远) 등 기동의 주요간부들은 란현, 천안, 풍윤, 준화 등현에서 항일대폭동을 일으켰다. 무장된 항일군중들은 모두 항일련군으로 개편되였다. 기타 지역에서 모두 항일폭동이 일어나고 또 항일련군을 조직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개란탄광 로동자들은 더 앉아 있을수 없었다. 1938년 7월 18일 밤 주문빈은 2,000여명 광산 로동자들을 조직하여 무장폭동을 일으켰다. 그는 싸움에 능한 절진국을 로동자규찰대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로동자들을 항일무장대오로 이끈 주문빈   절진국은 주문빈의 지시에 따라 규찰대를 이끌고 적의 경찰서를 까부신후 무기를 탈취하였다. 그리고 조각장 경찰서와 탄광, 기차역을 점령하였다.   3일후 당산에 주둔하고있던 일제 선견부대가 조각장으로 공격해왔다. 로동자 봉기대오는 신속히 반격하여 일제와 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막강한 일제 정규부대와 무모하게 싸울수는 없었다. 주문빈은 지원하러 온 기동항일련군과 팔로군 4종대의 엄호를 받으면서 로동자규찰대를 안전한 농촌으로 이전시켰다.   얼마후 일본군 주력이 물러가자 주문빈은 다시 부대를 거느리고 조각장을 점령하고 당가장을 습격함으로써 영향범위를 확대해 나갔다. 이들의 적극적인 행동과 선동이 있었기때문에 로동자 무장대오는 신속히 만여명으로 확대되였고 이 가운데 7천여명이 기동항일련군에 편입되였다.   주문빈이 령도한 개란탄광 대파업과 로동자 무장봉기는 중국의 도시 산업로동자들이 봉기를 일으켜 항일전쟁에 참가하는 훌륭한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하북성 동부인 기동은 동북과 화북을 이어주는 요충지로서 전략적 지위가 자못 중요하였다. 그러므로 기동항일근거지는 중국대륙을 삼키려는 야망을 안고있던 일본침략자들에게 있어서 목에 걸린 가시나 다름이 없었다. 기동의 인민들은 항일유격대를 도와 적의 후방을 교란하였고 교통요로를 습격하였으며 적의 거점을 공격하면서 침략자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1938년 10월에 기동의 팔로군 주력과 항일련군이 전략수요에 따라 서부로 이동하였다. 그리하여 기동에 남은 항일유격대는 3개 분대로 나뉜 수백명에 지나지 않았다. 주문빈은 유격대 군정위원회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유격대 제1분대의 정치부 주임으로 사업하였다.   주문빈은 적이 계속 소탕하는 가운데서도 유격대를 거느리고 기동 동부에서 투쟁을 견지하였으며 기동지구 동부의 공산당 제1책임자로 있었다.   1939년 가을에 이르러 주문빈이 거느린 유격대도 확대되였다. 그는 기동에 남은 부분적인 팔로군을 합쳐 유격대를 항일련군 제5총대와 제9총대로 개편하였다. 8월에 그는 제5총대의 3백여명 유격대와 함께 남부로 진격했다. 부대는 현지 소규모 유격대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란현의 여러 거점을 점령하였고 또 중요한 증가만(曾家湾) 거점도 제거하였다. 그 외에 주문빈은 항일련군 유격대를 거느리고 유격투쟁을 견지하고 토비를 숙청하면서 근거지를 확대해 나갔다. 그는 근거지의 군중들을 발동해 기동의 첫 련합현 당위원회와 풍란천(丰栾迁) 련합민주정부를 설립하였다. 주문빈이 련합정부의 서기를 겸했고 로계명(卢启明)이 현장을 맡았다.   련합정부는 부근의 백여개 촌을 관할하고 농촌당원들을 크게 발전시켜며 항일대오를 장대시켰다.   기동유격근거지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긴 일본침략자들은 3만여명의 괴뢰군을 끌어 모아 유격근거지에 대한 토벌과 소탕을 감행하였다.   근거지를 확보하려면 적과 싸워야 했다. 주문빈은 전투력이 약한 적의 치안군을 선제타격해 소멸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1941년 11월부터 1942년 2월까지 기동의 항일부대를 집중해 적의 치안부대를 공격하였다. 유격대는 11월 15일에 준화(遵化) 40리포(四十里铺)의 첫 전투에서 400여명 적을 소멸하였고 그후 23차의 전투를 거쳐 치안군 2,700여명과 일본군 300여명을 소멸하였다.    다년간의 간고한 항일유격전을 거쳐 1944년까지 기동에는 2만 4천여개 항일 전투부대와 20만 민병을 가진 완정한 기열료(冀热辽) 항일근거지가 형성 되었다.   1943년초에 주문빈은 중공중앙 북방분국과 진찰기군구에 가서 기동의 사업을 회보하였다. 3월 11일 주문빈은 회의에서 “기동사업에 관한 보충보고”를 했다. 그는 기동의 통일전선사업과 조직문제를 언급해 이야기했다. 주문빈의 회보를 자상히 들은 중공중앙 북방국에서는, 유격전쟁을 견지하고 곤난을 극복하며 힘을 모아 항일전쟁의 대반격과 전후 건국사업준비를 할 것을 지시하였다.   기동에서 유격전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려면 무기와 탄약이 문제가 되였다. 진찰기군구에서 회의를 하는 기회를 빌어 주문빈은 군구의 팔로군 병기공장에서 열심히 기술을 배웠다. 당시 진찰기군구 공업부에서 사업하고있던 장진은 주문빈과 함께 통현 로하중학교 당지부를 이끌었던 로전우였다.  주문빈은 장진의 안내를 받으며 병기공장을 참관하고나서 10일간 계속 여러가지 무기 제조기술을 배웠다. 그는 무기 생산과정을 상세히 료해했을뿐만 아니라 몸소 로동자들과 함께 무기생산 작업에 참가하였다. 1943년 6월, 주문빈은 기동에 돌아와 자체로 병기를 제조하기에 힘썼다. 여러차의 실험을 거쳐 드디여 자체로 지뢰와 포탄사격설비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의 요구에 따라 섭영진(聂荣臻)사령원이 기술자들을 파견해 왔다. 그리하여 기동에 훌륭한 팔로군 병기공장이 있게 되었다. 손에 자체로 제조한 무기를 들고 충족한 탄약을 허리에 두른 유격대원들의 전투열의는 더욱 높아졌다.   1943년에 이르러 기동항일유격근거지는 가일층 확대되였다. 이해 7월 7일에 중공중앙 북방국에서는 기동지구 당위원회를 중국공산당 기열변특별위원회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산하에 다섯 개 지구위원회를 두었다. 주문빈은 기열변특별위원회의 조직부 부장사업을 맡은 동시에 계속 기동 동부의 항일유격투쟁을 책임졌다. 주문빈은 기동에서 항일투쟁을 활발히 전개함과 동시에 계속 조선혁명자들과의 련계를 확보하고있었다. 그는 중국의 항일전쟁승리는 곧바로 조선의 반일투쟁승리로 이어질것이며 조선의 독립을 가져올수 있다고 확신하고있었다. 그는 형들을 통해 북평과 상해에 있는 조선혁명자들과 련락을 가졌고 또한 중경에 있는 조선의 반일지사들과도 줄곧 련락을 유지하고있었다. 그는 평안도 출신였기때문에 이 시기 조선민족혁명당의 평안도 특파원의 신분도 가지고있었다. 1944년에 들어서 항일전쟁의 정세는 날로 유리해졌다. 유럽의 독일파쑈가 붕괴의 변두리에 이르렀고 동방의 일본제국주의자들도 인력과 물력의 부족으로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였다. 태평양전쟁에서 거듭되는 타격을 받은 일제는 중국 강점지에서의 략탈을 더욱 가심화했다. 이러한 정세를 파악한 주문빈은 계속 투쟁을 견지하고 중국항일전쟁의 최종 승리를 이끌어내리라 작심하였다. 그는 언녕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있었고 눈길을 산해관 넘어 중국동북과 조선으로 돌렸다. 전반 아시아 여러 민족인민의 항쟁은 꼭 최후의 승리를 이룩하리라 그는 굳게 믿고있었던 것이다.   
주문빈은 반일애국지사인 김기창의 셋째아들로 태여났다. 신민회에서 애국계몽의 독립투쟁을 진행하였던 김기창의 영향을 받아 그의 자녀들도 일찍부터 혁명활동에 참가하였다. 어릴때부터 민족심이 강했던 주문빈은 일제침략자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탔으며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바꿔볼 생각으로 점차 진보적인 사상을 접수하면서 혁명활동에 참가하였다. 1914년 6살때 아버지를 따라 북경 통현에 이주해온 주문빈은 1916년부터 통현에서 형들과 함께 로하(潞河)소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맏형인 김승호는 일찍 조선에서 혁명에 참가하였고 둘째형 김영호는 중국에 와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중국에 건너온후 주문빈은 자기 민족의 말과 글을 잊어서는 안된다고하여 스스로 조선어를 자습하면서 문화지식을 터득하였고 일제침략자들로부터 조선민족을 해방시킬 방법을 강구하였다. 1926년에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27년에는 강경신(康景新), 장학연(张学渊 일명 张珍), 홍경륭(洪庆隆), 장수태(张树棣)를 비롯한 중국청년들을 중국공산당원으로 받아들여 로하중학교 당지부를 설립하였다. 주문빈과 함께 활동했던 중국인 강경신은 후에 진찰기변구(晋察冀边区)에서 혁명하였고 홍경륭은 석가장에서 희생되였다. 주문빈의 동생 김상호도 이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유서 깊은 로하중학교는 중국 근대력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유명한 학교였다. 1867년 미국인 선교사 셰필드 (谢卫楼 Sheffield, 1841-1913)가 창립한 이 학교에는 주문빈 형제가 공부했을뿐만 아니라 1920년대에 무려 41명 조선청년들이 공부하였다. 그러므로 로하중학교는 우리민족과 깊은 인연이 있는 학교라 할수있다. 로하중학교 일각   2003년 처음 로하중학교를 답사할때 김신정로인은 학교 교정의 협화호(协和湖)라는 호수에서 오빠들이 스케트를 타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신정) “두 오빠는 안경 사러 간다고 했지만 안경을 사지 않고 그 돈으로 스케트를 사왔습니다. 그들은 이 호수에서 스케트를 탔는데 통현에서 이들이 가장 먼저 스케트를 탔습니다. 셋째 오빠가 가장 잘했지요. 그들은 또 북해공원에 가서 스케트를 타군 하였는데 사람들은 키가 장대한 오빠들을 보면 모두 피했습니다. 두 오빠는 모두 키가 근 2메터에 달했습니다. 키가 가장 작은 큰 오빠도 1메터 90이였으니깐요. 연경대학을 다닐때도 오빠들은 키가 커 소문이 났습니다. 오빠들 가운데서 셋째 오빠 주문빈이 가장 총명하고 날렵했습니다.”   통현 사람들은 이들 일가를 “고려김가(高丽金家)”라고 불렀다. 김신정로인은 당시 조선의 유명한 혁명자 량명, 천진시 당위원회 주요 간부로 활동하던 리철부 부부 등이 주문빈 형제를 찾아왔다고 하였다.   (김신정) “량명은 조선공산당 창시자의 한사람으로서 조선에서 아주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는 북경에서 상해로 갈 때 우리집에 들렸고 다시 상해에서 쏘련으로 갈때도 우리집에 들렸습니다. 그는 상해에서 결혼했는데 1928년쯤 되였을때 일입니다. 비교적 현대식 복장을 한 녀인이 애기를 안고왔습니다. 량명의 부인이였는데 이름이 조원숙(赵媛淑)으로 기억됩니다. 애기는 량소명(梁小明)이라고 불렀습니다. 한달후 량명은 국제회의에 참석하러 쏘련에 갔고 임신한 안해와 아들을 우리집에 두고갔습니다. 그들의 안전을 위해 어머니는 련락을 달아 그들을 평양에 보냈습니다. 한위건은 잘 생기고 또 서생(书生)티가 다분한 사람이였습니다. 내가 소학교를 다닐 때 우리집에 와서 늘 오빠들과 조선말을 하군 하였지요. 한위건, 이 분은 녀성과 같았습니다. 늘 얼굴을 붉히고 말소리도 조용조용하였지요. 하지만 그 부인은 달랐습니다. 매우 활발하고 씩씩해서 도리여 남성 같았습니다.”    로하중학교 협화호 기슭에는 주문빈렬사를 기념하는 작은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로하중학교 시절 주문빈과 함께 당사업을 했던 장진이 1984년에 학교창설 경축대회에서 주문빈의 사적을 이야기하면서 문화대혁명기간 받지 못했던 로임을 전부 헌납하여 주문빈 렬사기금을 만들었다고한다. 그리하여 그해 주문빈 렬사기념비가 세워졌다. 해마다 청명이면 전교학생들이 기념비 앞에 모여 추모모임을 가지거나 공청단 입단식을 가진다고한다.    2003년경 처음 로하중학교를 찾아왔을때 주문빈렬사기념비를 세우게 된 경위와 로하중학교의 첫 중국공산당 지부의 활동을 소개해 주었던 로하중학교 력사교원 경보진(耿宝珍)도 이미 세상을 떴다고한다.  1952년에 로하중학교에 와서 교원 사업을 한 경보진 교원은 오랜 사학자였다. 장시기 학교력사를 연구하였던 그는 1919년이후 1920년대까지 41명 조선청년이 로하중학교를 다닌 기록이 있다고 소개하면서 학교명록에서 그 이름들을 찾아볼수있다고했다. 경보진 교원의 소개에 의하면 로하중학교를 졸업한 이들 조선청년들은 공산당이나 국민당을 따라 혁명한 사람도 있다고했다. 특히 주문빈은 통현에서 첫 공산당지부를 만들었고 당조직을 발전시켰으며 후에는 기동(하북성 동부)에서 혁명투쟁을 이끌었다고 소개했다. 왼쪽으로 세번째 김신정, 네번째 경보진(2003년 사진)
15    기동항일유격투쟁의 코기러기 주문빈①[청명특집] 댓글:  조회:2354  추천:0  2017-03-26
  항일전쟁시기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적후 항일무력은 광활한 화북지역에서 예리한 비수마냥 일본침략군의 심장부를 겨냥하면서 산서와 차할, 하북을 포함한 진찰기(晋察冀)항일근거지를 창설하였다. 진찰기항일근거지는 항일전쟁시기 팔로군이 가장 먼저 창설한 적후할일근거지로서 중국의 항일군민들은 이곳에서 일본침략군과 괴뢰군 35만여명을 소멸하였다.    해방후 진찰기는 화북군구(华北军区)로 개칭하였으며 이 위대한 업적과 항일투쟁에서 희생된 진찰기항일근거지 렬사들을 기리기 위한 화북군구렬사릉원이 하북성 성소재지인 석가장에 세워졌다.     화북군구 렬사릉원에는 우리민족이 낳은 우수한 아들이며 기동항일유격대의 창시자중 한사람이며 기동항일유격투쟁의 코기러인 주문빈 렬사의 기념동상이 모셔져 있다.   화북군구렬사릉원   주문빈렬사 기념흉상 앞에서 기념비에 새겨진 렬사 약력   렬사의 묘소   묘소의 약력     주문빈(1908-1944)의 원명은 김성호(金成镐)로서 1908년 9월 23일, 조선평안북도 신의주 홍남동(洪南洞)에서 태여났다. 어려서 부모님을 따라 중국에 건너온 그는 중국의 제2차 국내혁명전쟁시기 개란(开滦)탄광 로동자들의 대파업을 조직하였고 항일전쟁시기에는 기열료변구(冀热辽边区) 특별위원회(热别委员会) 조직부장을 맡고 직접 항일대오를 거느리고 일본침략군과 싸웠다. 그의 확고한 공산주의 사상과 위대한 국제주의 정신은 화북대지에 우뚝 솟은 기념비 마냥 영원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다.     관내지역 우리민족 반일투쟁사를 답사하던 지난 2003년에 북경시 해정구청하진(海淀区清河镇)에 계시는 렬사의 막내 녀동생 김신정(金信正) 로인을 만나볼수있었다. 지금은 세상 뜨고 안계시지만 그때까지만 하여도 90세 고령으로 비교적 정정하셨다.   김신정 로인은 색바랜 가족 사진 한장을 내놓으면서 파란만장한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주문빈렬사의 가족사진(앞줄 오른쪽 두번째 주문빈)   주문빈렬사의 일가는 1914년에 반일지사였던 아버지 김기창(金基昌)을 따라 조선의 의주(义州)로부터 중국 북평(오늘의 북경시)의 통현으로 이주해왔다. 아버지 김기창, 어머니 홍기주(洪基柱1962년 90세를 일기로 북경에서 사망), 큰 누이 김신경(金信庆), 큰 오빠 김승호(金承镐), 둘째 오빠 김영호(金永镐 공산당원), 셋째 오빠 김성호(金成镐 주문빈), 막내 오빠 김상호(金祥镐) 그리고 막둥이 김신정이였다. 가족사진은 오래된것이여서 그때만 하여도 막둥이 김신정은 사진에 없었다.    1914년, 아버지 김기창은 처음 중국에 건너와 북평시 통현의 복흥장(复兴庄)에 자리를 잡았다. 김기창은 천진의 남개학교(南开学校) 교장인 장백령(张伯龄)을 알고있었다. 일찍 장백령교장이 조선 평양을 방문 할때 김기창이 통역을 맡아주었던 인연이 있었던것이다. 그리하여 김기창 일가는 장백령의 도움으로 천진을 거쳐 북평에 오게 되였던것이다.    북평에서 공부하는 기간 주문빈 형제는 모두 혁명을 지향하면서 비교적 진보적인 사상을 접하게 되였다. 그리고 20세기 20, 30년대,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이 주문빈 일가의 도움을 받아 중국내에서의 혁명활동에 종사하였다. 초기에는 반일지사였던 아버지 김기창을 찾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다녔고 후에는 공산주의를 신앙하였던 주문빈 형제들을 찾아오는 젊은 혁명자들이 많아졌다.    김신정로인이 회억한데 의하면 안창호, 김구를 비롯한 신민회 요원들이 많이 다녔고 후에는 량명(梁明), 한위건(리철부), 무정 등 공산주의자들이 다녔다.    주문빈 형제는 후에 모두 제각기 혁명에 참가하였는데 그들의 생애에 대해서는 김신정도 잘 모르고있었다. 심지어 주문빈렬사의 희생소식도 일본이 항복한후에야 전해 들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조선독립과 혁명을 위해 모든것을 다 희생한 렬사가족이였다.    주문빈의 아버지 김기창은 어려서부터 조선팔도를 다니며 시야를 넓혔다. 룡천군의 한 부자집 서동(书童)으로 있으면서 한자를 익히고 주산을 배웠던 그는 조선 어디에서든지 환대를 받았다. 사람들은 그의 재주를 기특하게 여겨 집 사랑채에 재워주고 먹여주었다. 조선 팔도강산을 다니면서 어린 김기창은 시야를 넓혔고 빈궁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참상을 목격하면서 가슴에 큰 뜻을 품게 되였다.  이때 조선의 많은 지사들이 날로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통탄하면서 민족자각을 목적으로 한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신민회는 1907년 도산(岛山) 안창호의 발의에 따라 량기택(梁起鐸)을 총감독으로 설립한 비밀결사였다.    안창호, 리동휘, 최광옥(崔光玉), 리승훈(李昇薰), 리회영, 김구, 박은식, 신채호 등을 요인으로 전국 800명 회원을 확보한 신민회는 각지에 련락원을 두었다. 김기창은 신민회의 회원으로서 신의주의 력락원으로 많은 일을 하였다.[한민족의 독립운동사 윤병상 등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P131,132]    김신정 로인은 아버지가 신의주에서 조선혁명자들의 압록강 도하를 도와주었던 이야기를 하였다.            김신정로인(왼쪽)   (김신정) “아버님은 북방의 주요 련락원이였던것 같습니다. 그는 조선의 유명한 인물인 최광옥으로부터 통지를 받고 활동하셨는데 최광옥은 양실학교를 설립하고 많은 곳을 다녀본 학식이 대단한 사람이였습니다. 최광옥의 통지를 받고 많은 사람들을 도와 압록강을 건너게 하셨는데 아버지는 체력이 약했고 수영도 잘 몰랐고 자전거도 못 타셨습니다. 처음 8명정도를 도와 강을 건너게 하였는데 희생될 각오를 하시고 미리 가족을 숙부님에게 부탁해두셨습니다. 그때 숙부님은 가만히 도하하는 일행을 미행하여 전 과정을 알고있었습니다.”   신민회 북방 련락원이였던 김기창은 선후로 많은 혁명자들을 압록강을 도하시켜 중국내에 들어오게 하였다. 한번은 신민회의 최광옥이 련락이 왔다. 8, 9명 혁명자들이 압록강을 건느는것을 도와주라는것이였다. 김기창은 체력이 약했고 수영도 잘 몰랐으며 자전거도 못 탔다고 한다. 그러나 혁명자들을 도와주기 위해 그는 약속장소에서 도강할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의주와 신의주 사이에 있는 중주도에 가서 웃통을 벗고 강을 건넜다. 때는 초겨울이라 얼음이 밴 강물은 뼈를 에이는 듯 차거웠다. 김기창의 동생 김기홍(金基鸿)이 이들을 미행해 강을 건너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혁명자들은 모두 안전하게 강을 건너 동북의 관전현(宽甸县)으로 갔다.    김기창은 신민회 요원인 리승훈을 통해 안창호와 김구를 알게 되였으며 그들의 지시에 따라 비밀활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초, 김기창은 신민회의 다른 한 요원인 리윤각(李允珏)과 함께 김구를 만나러 황해도로 떠났다. 군자금을 받아 의주에서 무기를 사라는 련락이 왔기 때문이다. 도중에 리윤각은 다른 일로 가지 못하고 김기창만이 김구네 집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김구는 없고 김구 아버지가 그를 맞아 주면서 무기를 살 군자금을 꺼내 주었다. 그러나 김기창은 맹동하지 않았다. 그는 집에 가서 일을 마무리한 후 꼭 다시 와서 무기 사는 일을 돕겠다고 하였다. 아무래도 김구를 직접 만나지 못한것이 미심쩍었던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였다. 그때 일제 경찰은 이미 황해도에서 신민회 요원들을 대거 검거하고있었던것이였다.    1911년 9월까지 일제는 전국 각지에서 무려 800여명 신민회 회원을 체포하였다. 비인간적인 일제의 고문으로 2명 회원이 숨지고 다수 회원들이 불구가 되였다.   1912년 8월 일제는 체포자 중 105명에 대하여 유죄판결을 내렸다. 이것이 유명한 신민회 《105인 사건》이다. [윤병상 등 한민족의 독립운동사 P190~191]   (김신정) “아버지는 그때 취조를 받았습니다. 일본경찰은 고추물을 먹이고 채찍으로 때리고하면서 갖은 혹형을 가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승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놈들은 아버지가 혁명자들을 강을 건네 준 일을 알고있었습니다. 변절자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유죄판결을 받게 되어 외딴 섬에 류배가게 되었습니다. 그후 그곳에서 성공적으로 탈주한 아버지는 중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김기창은 일제의 갖은 고문을 이겨내면서 비밀을 고수하였다. 하지만 반일지사들을 비밀리에 압록강을 건네 주던 일이 폭로 되여 그는 판결을 받아 지도(智岛)에 류배 되였다.    1914년에 수감중 탈출한 김기창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 북평 통현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얼마 되지않아 가족을 통현 복흥장에 데려왔다.    그후 그는 림시정부를 찾아 상해에 가 보았다. 상해에서 활약하고있던 김구나 로백린 등 독립운동가들과 익숙한 사이였기때문이였다. 하지만 상해 독립운동가들사이에 파쟁이 너무 많아 김기창은 큰 실망을 안고 다시 통현에 돌아오고말았다.    1933년에 김기창은 조선기독교의 초청을 받고 조선에 갔다가 그곳에서 건물이 무너지는 사고를 당해 허리를 크게 다쳤다. 그때로부터 몸을 쓰지 못한 그는 침대에 그냥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신민회의 일원으로 일찍부터 반일투쟁에 몸 담아왔던 김기창은 비록 몸져누웠지만 그의 강의한 반일의지와 진보적인 사상은 자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 소수민족작가학회 윤한윤 부회장, 단군문학상은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작가학회와 손잡고 명실공히 전국상으로 부상했다.   2. 연변당위 선전부 리호남 부부장, 중국조선족대표적 집거지인 연변은 단군문학상을 통해 문학창작과 번영의 새로운 비약을 실현해야한다고 강조      3. 소설부문 수상자 허련순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까?》     4. 시부문 수상자 김영건 《아침산이 안부를 묻다》     5. 산문부문 수상자 장정일 《세모의 설레임》  6. 실화문학부문 수상자 리혜선 《정률성평전》   7. 평론부문 수상자 장춘식 《일제시기 조선족이민작가연구》 8. 아동문학부문 수상자 김철호 《작은 하늘》   9. 한문문학부문 수상자 남영전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전영선 《소화 18년》   10. 신인상 구호준의 《사랑의 류통기간》     11. 화려한 공연무대   12. 단군문학상리사회 신봉철리사장, 작가시인들은 시대에 부끄럽지 않고 력사에 부끄럽지 않으며 민족에게 부끄럽지 않은 불후의 명작을 창작하기에 힘써야한다고 호소  
13    김양, 항일명장 리홍광의 고향을 밝혀낸 사학자 댓글:  조회:3245  추천:3  2015-08-18
세인들이 항일전쟁 승리 및 세계 반파쑈전쟁 승리 70주년을 성대히 맞이하고있는 요즘 “항일영웅 리홍광” 인물평전이 민족출판사에 의해 정식 출간되였다.    중국력사에서 조선족 항일렬사라고 명확히 규명되는 인물은 많지 않다. 그 가운데서 리홍광은 남만 항일유격대의 창시자이며 “동북항일련군의 걸출한 지도자이고 민족영웅인 양정우”의 친밀한 전우로 높이 평가받고있다. 그리고 2014년 9월에는 중화인민공화국 민정부가 리홍광에게 “항일영웅렬사” 영예칭호를 추수하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리홍광의 빛나는 한생에 대한 이야기는 알려진바가 적다. 특히 그의 출생에 대한 자상한 사료가 밝혀지지 않아 줄곧 중국내 조선족 사학자들의 수수께끼로 남아있었다. 출생 비밀이 밝혀지지 않으면 완정한 인물전을 구성하기 힘들며 영웅인물의 완정한 삶을 규명하기 힘들다는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 책의 저자는 올해 81세 고령인 료녕성 심양의 사학자 김양선생님이시다. 김양선생님은 지난세기60년대로부터 리홍광의 사료를 수집해오다가 1990년대 중한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한국학자들과 함께 끝내 리홍광의 출생비밀을 밝혀내고 항일영웅 리홍광의 고향을 확인했을뿐만 아니라 고향방문과 답사를 마치고 드디어 항일전쟁 승리 70주년을 기념하는 올해에 항일영웅 리홍광의 인물평전을 엮어내게 되였던 것이다.    일찍 1959년에 료녕대학 력사학부를 졸업한 김양선생님은 학교에 남아 력사강의를 하시다가 “문화대학혁명”이 끝나던 1976년에 료녕민족출판사에 전근되여 그토록 하고싶었던 조선민족의 사학연구에 본격 돌입하게 되였다고 한다. 그 전에만 하여도 조선민족의 유명 인물들이거나 렬사들의 사적을 언급하면 곧잘 “민족주의자”라는 감투를 쓰게 되기 때문에 대부분 학자들은 감히 이 령역을 섭렵하지 못하고있던 터였다. 하지만 김양선생님은 단연히 민족사학연구에 몰두하면서 우리민족의 자랑찬 력사는 우리 스스로 찾아내고 발굴하며 연구해야한다고 주장하셨다.   김양선생님의 회억에 의하면 그는 일찍 대학시절에 벌써 학교에서 조직하는 “항일렬사”고찰단에 참가해 리홍광의 사적지들을 두루 답사해보았다. 그후 김양선생님은 각지 당안관을 찾아다니며 부지런히 사료를 발굴, 정리하였으며 흑룡강, 북경, 상해 등지를 다니면서 많은 사학자들을 만나 확인작업을 계속했다. 특히 항일련군에 참가했던 많은 생존자들과 당사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소중한 증언을 남겼다. 리홍광은 1930년대에 항일유격대를 조직해 일제와 싸웠기 때문에 그의 항일유격대에 참가했던 생존자들은 지난세기 60년대, 70년대에 대부분 40대, 50대였고 부분적으로 나이가 많은 분도 60세거나 70세 정도여서 생동한 자료를 남길수있었다. 물론 당시는 물질조건이 극히 제한되였기 때문에 사료수집에 있어서 지금처럼 록음기, 카메라, 촬영기를 동원할수 없었다. 그러나 김양선생님은 취재노트에 부지런히 필을 날리면서 생존자들의 이야기와 추억을 낱낱이 적었다. 그리고 대량의 필기들을 론리에 맞게 제때에 잘 정리해 놓았다. 신빈과 환인, 관전 등지는 항일유격대가 활약하였던 곳이기에 골이 깊고 숲이 우거진 고장이다. 녀성의 몸이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김양선생님은 이산저산 다니며 사적지들을 찾아 하나하나 확인하였다. 때로는 날이 깊어지면 장녀가 배동해 다녔고 때로는 현지 사학자들의 도움도 받았다.    김양선생님은 리홍광의 동료나 부하들은 대부분 남만에 있었다고한다. 하지만 남만의 리홍광을 아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보았으나 리홍광의 출생과 가족 상황에 대해 알수있는 증언이나 사료는 별로 없었다. 다만 중국 관변측에서 공식 인정하는 경기도 룡인군이라는 기록밖에 없었다. 그뒤 흑룡강성이나 연변의 많은 사학자들이 관련 연구를 해오면서 리홍광의 출생과 가족에 대한 여러가지 주장이 나타났다. 하지만 어느 주장도 설득력이 없었고 확실하지 않았다.    근엄한 사학관을 가지고있는 김양선생님은 이 문제에서 절대 서둘러 판단하지 않았고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이 관건적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고는 리홍광에 대해 어떻다고 섣뿔리 이야기하는것은 모두 무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언젠가는 보다 유력한 증거가 나타날수있다고 생각했고 꼭 이 수수께끼를 몸소 풀겠다고 작심하였다.   1990년대에 이르어 세상이 많이 달라지기 시작했으며 드디어 중한 수교가 이루어졌다. 김양선생님은 료녕성 민족사무위원회의 추천으로 한국방문 학자로 뽑혀가게 되였다. 당시 료녕성 민족사무위원회 처장으로 사업하시던 우철희 선생님이 극구 김양선생님을 한국 방문에 추천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김양선생님은 80여명 한국방문 조선족 학자중의 한명으로 한국을 방문하게 되였고 한국의 사학자들과 직접 교류할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그리고 우철희 처장의 적극적인 소개와 홍보를 통해 김양선생님은 한국으로부터 의암(毅庵)학술대상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였다. 의암은 우리민족의 유명한 의병투쟁의 지도자였던 류린석의 호이다. 그동안 남만에서 활동한 류린석장군에 대한 연구에 조예가 깊었던 김양선생님의 로고를 치하해 한국에서 의암대상을 그에게 주었던것이다. 그는 “한국에 한번 가보는것만으로도 아주 기뻐했는데 그처럼 큰 상까지 받으니 꿈만 같았다”고 당시 감격의 마음을 이야기했다. 한국언론에 보도된 조선족 사학자 김양   그후 한국의 사학자들도 곧잘 김양선생님을 찾아와 문의하였고 관련 연구를 함께 진행하군 하였다. 그는 중국내 류린석의 의병투쟁에 대해 많이 알고있었기에 한국 사학자들에게 큰 도움을 줄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연구들도 학국 학계의 도움을 받게 되였다. 특히 리홍광렬사의 출생지 비밀이 밝혀지게 되였다. 한국에는 족보체계가 아주 과학적으로 잘 되였기에 성씨와 본 그리고 조부 증조부 등 선조들의 명함만 알면 쉽게 자기의 족보를 찾을수 있는 시스템이 되여있다. 그리하여 룡인 리씨라는 근거를 가지고 한국에서 쉽게 리홍광의 고향을 찾을수 있게 되였고 이 소식을 접한 김양선생님은 만사 제체놓고 사비를 허비하면서 리홍광의 고향답사길에 올랐다.    그때만하여도 남편은 암으로 투병중이였기에 그는 시누이들을 찾아 간병을 부탁하고 답사길에 올랐다. 그번 한국행에서 그는 리홍광고향집으로 찾아가 리홍광의 어머니 묘소를 찾았고 리홍광 부인의 묘소도 찾았보았으며 다른 유가족들을 만나보았다. 항일영웅 리홍광 일가는 리홍광이 희생되자 모두 한국의 고향집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수많은 세월이 흐른뒤에 대부분 세상을 뜨고 지금은 리홍광의 유복녀 한명만이 남았을뿐이였다. 김양선생님과 만났을 때  87세 나이였다고 한다.    수십년간 기다리던 수수께끼는 풀었지만 한국답사를 마치고 귀국한뒤 두달후 남편도 병으로 세상을 뜨고말았다. 하지만 김양선생님은 유감이 없다고 하신다. 만약 이 수수께기를 풀지 못하면 사학자로서 마음의 가책을 받을것이고 항일영웅 리홍광의 빛나는 한생이 계속 완정하게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못하게 될것이라고하셨다.    “자랑스러운 조선민족의 투쟁력사를 쓰는 사학자가 되겠다”, “욕 안 먹는 사학자가 되겠다”   김양선생님은 이것이 사학자로 한생을 보낸 자기의 신념이라고 이야기하셨다.    요즘에도 김양선생님은 집필활동을 멈추지 않고있다. 그는 “우씨가족의 백년사”를 정리, 탈고 하였다고 했다. 김양선생님이 소개한데 의하면 우씨가족의 이민 1세대-우병렬은 류린석장군과 함께 조선에서 의병활동에 참가하였고 울라지보스또크를 거쳐 중국 관전현에 이주하여 청산구(青山沟) 반일투쟁의 기지 마련에 진력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우씨가족의 이민 2세대, 3세대는 모두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새중국 건설에서 훌륭한 지도간부로, 과학자로 성장하였다.    김양선생님은 민족사무위원회 처장으로 사업하시면서 많이 도와주셨던 우철희선생님의 부탁을 저버릴수 없었고 또 이 가족의 훌륭한 백년 력사에 매료되여 이 가족사 집필을 결심하게 되였다고 심경을 밝혔다.    우씨가족 백년사뿐만 아니라 김양선생님은 또 우리민족의 유명한 반일투사이며 혁명가인 김산의 사적을 정리해 평전을 쓸 계획을 가지고 있고 또 류린석장군의 사적지 답사기를 정리해볼 생각이라고하셨다. 그는 80고령을 넘었으니 이제 책 한두권 더 낼수 있지 않을가 생각한다면서 자기는 죽어도 아쉬움이 없고 부끄럼이 없다고 이야기하셨다. 그는 이만큼 책을 냈으니 사학자로서 부끄럼이 없고 욕 안 먹는 사학자로서도 부끄럼이 없다고 이야기하셨다.    81세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늘 환한 웃음을 지으며 오늘까지도 건강하게 집필에 도전하고계시는 김양선생님에게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경례를 올리고싶다.  편집진 (좌로부터 민족출판사 전춘매 부편심, 저자 김양, 조봉 변호사, 반도체전문가 우승희 공정사, 김성룡 기자, 민족출판사 우빈희 사장)     
12    삼합진, 望江閣을 가다 댓글:  조회:5741  추천:7  2014-10-09
국경연휴를 이용해 고향인 연변을 방문하였다. 연변행차는 언제라도 눈물겹도록 정겹고 즐거운 일이다. 수많은 추억과 이야기들이 묻어있는 고향의 산과 물을 보면 늘 흥이 도도하다.  이번 연휴에는 지인의 안내로 용정시 삼합진을 가게 되였다. 그곳에 “망강각”이 새로 섰고 그곳으로는 조선땅을 한결 더 가까이에서 선명하게 볼 수있다고 한다.  사실 조선땅을 본다는데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한국사람들은 늘 “북한”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또 저들의 각가지 상상까지 보태면서 조선을 신비의 땅으로 각인하고 있다. 그리고 기회만 되면 그곳을 엿보려는 엽기적인 심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마냥 연변에서 자라서 두만강을 따라 삼합이나 훈춘, 도문을 통해 조선을 많이 바라보았기 때문에 별로 신비롭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을 바라본다는 빌미로 아름다운 산천을 둘러보고 농촌의 가을정취를 한껏 느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였다.  용정을 떠난 SUV는 육도하를 거슬러 신나게 삼합진으로 향해 달렸다. 그 유명한 명동학교와 윤동주 시인의 생가가 있었다던 명동촌을 지나 지신방향으로 달렸다. 선바위를 지나 “3.13”렬사묘비와 독립운동사에 유명했던 “15만원 탈취 사적비”도 있었다. 우리민족이 룡정에 터를 잡기 시작해서부터 일제와 굴함없이 싸웠다는 역사의 흔적들이다.   오랑캐령을 지나니 길은 한결 더 좁아졌고 길 량켠의 나무숲이 더 우거졌다. 산에는 알록달록 단풍이 들기 시작하였고 푸른 하늘에 떠도는 흰 구름은 보기만 하여도 시원하기만하였다. 늘 도시에만 박혀있던 우리의 머리를 식히고 혼탁한 마음을 시원히 적셔주기에는 더 좋은 선택이 없었을 것이다.  삼합진은 눈에 띄이지 않을정도의 작은 진이다. 아름답게 가꾸어진 새 농가들이 줄지어서고 길 량켠에 단층집들이 비교적 집중되어 늘어선 곳이 진 소재지라고한다. 우리를 안내한 지인은 삼합진의 무장경찰부대 집무실을 지날 때 커다란 군용 망원경 하나를 들고 나왔다. 망강정에 가면 이것으로 조선을 더 잘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두만강을 따라 좀 더 가다가 다시 산언덕으로 뻗은 길을 따라 산언덕 하나를 올라서니 비교적 넓은 산언덕 공지에 관광지가 개발되어있었고 3층 루각 하나가 떡 버티고 서있었다. 우리의 목적지 망강각이라고한다.  “관광지 입장료는 받는냐 안받느냐? 입장료는 얼마냐? 관광객이 많으냐?” 등등 일상적인 궁금증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수십명이나 몰려있는 전망대의 관광객들이 더 궁금했다. 뭘 그처럼 열심히 구경하고 있을까?   전망대에서 바라보니 조선의 회령군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졌다. 두만강 물줄기가 산밑으로 흐르고 그 건너편은 드넓은 평지와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바로 조선의 회령이라고 한다. 화려한 고층빌딩은 없었지만 5,6층 정도의 낮은 층집들이 비교적 촘촘히 들어섰고 도시 가운데 산언덕은 공원으로 만들어져있었다. 그리고 두만강으로부터 조선측 세관을 지나 회령시로 통하는 도로가 길게 뻗어있었으며 두만강의 지류인듯한 하천에는 철교와 다리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회령시는 아득히 멀리 보이는 산줄기까지 펼쳐져 있었다. 도시규모나 모습은 60~70년대 연길시와 비슷했지만 탁 트인 그 터는 연길시의 몇배 정도로 훨씬 컸다.   나는 급급히 100-400밀리 초장거리 렌즈를 바꾸어들고 회령시를 카메라에 잡아보려 했다. 두만강이나 다리, 도시들은 눈앞으로 많이 다가섰지만 난사광선으로하여 너무 선명하게는 안겨오지 않았다. 망강각에서 바라본 두만강과 멀리 회령벌 두만강기슭의 벌에서 농사짓는듯 회령벌에서 농사짓는 조선 농민들 외편 남색기와의 건물이 조선쪽 세관이라고 한다  너무나도 가깝지만 또 쉽게 갈수 없는 “먼 곳”이었다.   간단히 기념촬영을 마치고 우리는 망강각을 떠나 삼합진의 조선마을로 향했다. 두만강을 따라 굽이굽이 뻗은 길은 화룡을 거쳐 두만강의 발원지인 장백산까지 통한다고 한다. 그리고 반대쪽으로는 그냥 두만강을 따라 개산툰, 도문을 지나 훈춘에 도달할수있다고한다. 그곳에서 두만강은 중국과 조선, 로씨야 3국 국경을 지나 바다로 흘러든다.   드높은 산언덕너머로 푸른 하늘이 아름답게 펼쳐졌고 키 높은 옥수수들이 끝없이 펼쳐져 가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른편은 두만강 량쪽으로 황금의 벼파도가 설레이는 논밭이 펼쳐졌다. 두만강기슭, 산기슭으로 난 길을 따라 한참 달리니 지붕에 붉은 칠을 한 농가들이 나타났다. 아담진 정원과 황금의 벼파도에 포위된 붉은 지붕의 농가들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농가마을 뒷동산에는 과일나무들이 많았다. 수확의 계절이라 과일나무에는 과일이 탐스럽게 달려있었다. 사람들은 과일을 따다 상자로 잘 포장해놓고 언젠가는 팔려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인의 말에 의하면 올해 가물이 심해 농민들이 소득을 가장 많이 올리는 송이버섯은 거의 밀대를 놓았다고한다. 게다가 요즘 중앙의 규정이 심해 과일들도 가득 쌓였지만 판로를 찾지 못한다고했다. 이전 같으면 기관단위들이 모두 예약이 되여 과일을 포장하기 바쁘게 다 실어가버리군 했지만 지금은 도저히 안되는 형편이다. 단속이 너무 심해 어느 단위든지 감히 공금을 내고 사과배를 싸서 종업원이나 직원들에게 나누어줄 엄두를 못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공금이나 공짜로 사과배를 먹는데 습관 된 사람들이 돈을 내고 과일을 사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더욱 기대할 수 없는 일이였다. 농민들은 그냥 가득 쌓인 과일들이 썩어가는 것을 보면서 속을 태워야할뿐이다. 그렇다고 수송비용까지 부담하면서 멀리 도시로 실어다 팔수도 없는 일이였다. 이래저래 손해 보는 건 농민들일뿐이구나 하는 탄식이 나온다. 룡정시 삼합진의 농가 도로 삼합진 농가마을입구 어느 농가의 뜨락또르  두만강을 따라 계속 가다보면 강가에 별장처럼 반듯하게 잘 지은 농가들이 나타난다. 고풍의 돌담으로 잘 둘러져있는 오붓한 벽돌기와집들이였다. 마당에는 채소를 심을 터전이 있었고 또 과일나무도 싱싱하게 자라고있었다. 소개에 의하면 이 집들은 모두 정부에서 돈을 내 건설한 새농촌 새농가들이라고 한다. 변강지역이기 때문에 국가의 혜택도 잘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농가들도 대부분 빈집뿐이고 주민들은 그림자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농망기여서 모두 밭에 나갔는지 아니면 돈벌러 도시로 나갔는지 모를 일이다.  돌아오던 언덕길에서 두만강 건너편 회령군에 속하는 조선의 농촌 마을을 굽어보았다. 촘촘한 벽돌기와집과 숲처럼 밀집된 굴뚝들이 퍽 인상적이였다. 적어도 썰렁하고 빈 느낌이 없이 오붓하게 사람들이 모여사는 고장이고 깨끗한 고장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한창 농망기인지라 차들이 없는 길에는 탈곡한 옥수수들을 말리고있었다. 이따금 그 사이로 행인이 걸어다니도 하였다. 텅빈 우리쪽 농촌마을과는 선명한 대조가 아닐수 없었다. 적어도 인간들이 오고다니는 모습이 정겹도록 반가웠다.   두만강가에는 이따금씩 낮은 변방초소도 보였다. 유심히 찾지 않으면 잘 발견하기 어렵다. 꼭 일제시대의 “또치까”와 같았다. 사사로이 두만강을 건너 월경하는 사람들을 단속하기 위한 조치인 듯싶었다. 조선의 농가마을 거리에 낟알을 말리고 행인도 다니고 아담진 집들이 촘촘한 농가마을 두만강가 나무숲사이에 보이는 초소(강가 가로수 사이 오른쪽 3분의 1쯤)   두만강 기슭을 따라 눈앞의 가까우면서도 너무나도 멀고 낯선 땅을 바라보면서 생각은 착잡하기만 하였다.   두만강, 두만강의 물줄기가 월경민족인 우리를 먹여 살린 생명의 강이요, 어머니 강이라고하지만 나의 인상에는 그것보다도 두만강은 그야말로 눈물에 흠뻑 젖은 강이요, 아픔의 강이요, 우리민족의 통한의 강이라고 생각되였다!  월강죄는 사형이라했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강을 건너 도적 농사를 짓다가 봉금령의 해제로 자유롭게 강을 건너 이 땅에 터전을 잡기 시작해서부터 “눈물 젖은 두만강”은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오래동안 불리워졌다. 고향을 등지고 멀리 이국타향에 와서 새로운 터전을 마련할수밖에 없었던 실향민들의 정감을 잘 반영한 노래였던것이다. 그후 두만강을 넘나들면서 수많은 중조 량국 혁명가들이 어깨겪고 싸웠다. 중국에 공화국이 창건된후에도 엄연히 국적은 달랐지만 두만강은 우리민족의 혈연적 련계를 끊지 못했다.   대약진시기의 굶주림을 피해 많은 조선족 주민들이 조선으로 월강해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리고 중국의 “문화대혁명”시기 “우파”로 몰리거나 “조선특무”로 억울한 루명을 쓴 많은 간부들이 마음의 한을 풀지 못한 채 몰래 두만강을 건너 “자기네 나라” 조선으로 갔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어느 동료에게서 들은 이야기지만 조선 김일성종합대학에 연수갔을때 글쎄 그곳에서 자기 아버지와 함께 연변대학에서 우파로 몰렸던 로교수분을 만났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각별한 사이였던 그 교수는 정치투쟁에 배겨내지 못하고 조선으로 갔다가 지금까지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 처럼 빈곤과 가난에 굶주렸을 때 그리고 정치투쟁이 심각했을때 많은 우리민족이 이 강을 건너 다시 조선으로 나갔던 눈물의 이야기가 적지 않다.  중국에 개혁개방이 되여 좀 잘 살게 된 후 이번에는 세상이 뒤바뀌여 조선의 더 많은 굶주린 백성들이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건너왔다. 한국인들은 이들을 “탈북자”로 부른다. “북한”의 정치체제를 버리고 “자유세상”을 찾아 나온 사람들이라고해서 부르는 명칭이다. 이들의 피눈물의 이야기는 두만강물을 다 퍼부어도 씻을수 없을 만큼이나 많고도 많다.  오랫동안 봉페되여있기 때문에 조선의 정체에 대해 외부에서는 잘 모르고 있다. 설사 강 하나를 사이두고 이웃 마을을 내다보듯 가까운 삼합진에서도 마찬가지로 그 정체를 보아낼수 없다. 보일듯말듯한 베일에 가리워져 그 진실을 알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나쁘게 생각하면 이 세상 더 없이 악착한 곳으로 부각되고 반대로 또 좋게 생각하면 더 없이 훌륭한 “사회주의 낙원”인듯도 하다. 아마도 이렇기 때문에 그 신비감을 더 해주고 있는 듯 싶다.  연변행을 마치면서 귀경할때 놀라운 소식이 터져나왔다. 조선에 “정변”이 일어났다는 놀라는 기사였다. 중국 인터넷에서 터져나온 기사인데 글쎄 조선에 “정변”이 일어나 최고지도자 김정은이 구금되고 조선의 실세 인물들이 인천 아시아체육경기대회 페막식을 빌미로 한국을 돌연 방문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한국 방문의 목적은 단순히 페막식에 참가해 우수한 성적을 따낸 조선선수단을 격려하고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한것이 아니라 조선의 정치체제 변혁을 한국과 서방세계에 통보한다는 숨은 뜻도 포함된 것이라고 분석되였다. 실로 놀라운 소식이 아닐수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거짓보도이고 허위기사였음이 곧 밝혀졌다.    사람들은 너무 일방적으로 조선의 체제가 무너지고 조선이 더 개방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러한 허위 기사가 튀여나오고 또 많은 사람들이 이를 진실로 믿으려하고있는것이다.    사실 세상에서 유일한 분단국인 조선과 한국간의 통일은 국가와 민족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 여러 정치세력이 각축을 벌이는 전초지이기 때문에 현황이 쉽게 개변될수 없다고 생각된다. 그만큼 지금의 균형이 쉽게 깨여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균형이 깨지는 날이면 어찌보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를일이다.    정보화시대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있는 오늘, 세상의 정치중심은 경제발전에 있고 최상의 정치리익은 경제와 안보로 구성된 세력유지와 확보에 있기 때문이다.   가까우면서도 아득히 먼 곳, 건너편 산과 물, 너무나도 친숙한 농가 마을을 눈앞에 바라보면서 가슴이 터질듯 한탄하고 울부짖어도 그 아픔의 현실을 그냥 받아들일수밖에 없는게 바로 두만강이라 하겠다. 그리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눈물젖은 두만강을 사이두고 모든것을 멀리 굽어보는 망강각이 원망스럽다!  망강각에서 굽어본 두만강  
11    “9.3”단상-용서와 사죄 댓글:  조회:4424  추천:1  2014-09-04
9월 3일은 중국의 항일전쟁승리 기념일이다. 올해는 항전승리 69주년이 되는 해로서 이날 전국각지가 성대한 기념행사를 가졌다. 세계 많은 나라들도 요즘 항일전쟁과 반파쇼전쟁 승리의 날을 기념하고있다.    지난 9월 1일 뽈스까가 2차대전 발발 75주년을 기념하는 의식을 가졌다. 놀라운것은 이 기념행사에 독일 대통령도 참석했다는 사실이다. 뽈스까 코모로프스키 대통령과 독일 가우크 대통령이 함께 뽈스까 2차 세계대전 용사기념비에 꽃다발을 진정했다. 75년전인 1939년 9월 1일에 독일 나치스는 뽈스까의 군수품 창고였던 이곳을 포격하면서 2차대전이 발발했다. 이때로부터 5년여시간이 흘러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희생되였다.   코모로프스키 대통령은 이날 행사에서, 2차 세계대전은 무수한 가정과 많은 국가에 비극을 조성해주었고 백만을 헤아리는 생명을 빼앗아가고 또 민족 대학살을 일으켜 상상할수없는 불행과 고통을 빚어냈다고말했다. 그는, 우리는 력사와 아픔속에서 교훈을 섭취해야한다고 강조했다.   독일 가우크 대통령은 연설에서, 히틀러는 한 나라를 훼멸시키고 또 이 나라의 우수한 인재와 백성을 모두 살해하려했다면서 뽈스까는 인종 말살의 실험장으로 되였다는 진상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말했다. 그는, 타국의 영토에 대한 미련은 침략자들의 야심을 키워준다는것은 역사의 비극으로부터 섭취해야할 교훈이라고 강조했다.    2차대전의 가장 큰 피해국의 하나인 뽈스까가 원흉인 독일의 대통령을 기념행사에 초청하기까지 력대 독일 정치가들의 노력이 기울려져있다. 특히 1971년에 무릅꿇고 진정으로 사죄한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의 행동에서 뽈스까와 세계인민이 독일의 진정성을 읽었던것이다.    1971년 뽈스까를 방문한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는 2차대전 희생자 비석앞에 무릅꿇었다. 당시 현장의 모든 사람들이 이 돌발적인 행동에 놀라움을 금치못했고 이어 곧 사내답고 씩씩한 독일 총리의 행동에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그날은 큰 눈이 내린뒤의 아주 추운 하루였다. 체코와 뽈스까를 국가방문한뒤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는 유태인 희생자 기념비앞에 도착했다. 공식 일정대로 기념비에 꽃다발을 진정한후 조난자들의 형상을 새겨놓은 조각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는 돌연 기념비앞 대리석에 무릅을 꿇고말았다. 그는, “하느님이시여, 우리를 용서해주십시오, 아픔을 겪는 모든 영혼이 안녕을 찾기 바랍니다!”하고 기도했다.  빌리 브란트 독일총리의 이 행동은 2차대전에서 무고하게 학살된 유태인들에 대한 침통한 애도일뿐만 아니라 나치스 독일과 관련한 진정한 사죄이고 속죄였다. 이슬비가 촉촉히 내리는 가운데 공식적인 례의를 벗어난 이 돌발행동은 천백만 뽈스까인을 감동시켰고 현장의 세계 각지 외교관과 기자들을 감동시켰다. 긴 말이 필요없이 무릎꿇고 사죄한 행동만으로도 모든것을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뽈스까는 2차대전기간 3백여만 유태인을 포함해 6백만인구가 피살되였다. 하지만 뽈스까를 비롯한 유럽의 많은 2차대전 피해국들은 모두 평정한 마음으로 오늘의 독일을 대하고있다. 함께 경제건설을 도모하고 문화교류를 징행하면서 호혜상생하고있다. 각국이 모두 너그러운 마음으로 독일을 용서하고 독일을 새롭게 대하고있는것이다. 물론 그만큼 독일이 진정성있게 각 피해국에 사죄하고 량해를 빌었으며 용서를 빌었기 때문이다.    전쟁후 독일은 국내에서는 나치스의 영향을 철저히 제거하고 대외적으로는 나치스의 죄행과 관련해 진정성 있게 사죄했다. 때문에 수십년간의 진정성 있는 노력을 통해 독일은 각국의 신뢰를 다시 회복할수있었다. 사람들은 전쟁전의 독일 나치스와 오늘의 독일을 분별해서 대할수있게 되였던것이다.    독일은 과거를 회피하지 않았고 책임적인 자세로 선인들의 잘못과 관련해 사죄했다. 이는 더 없는 용기가 아닐수없다. 정감에 치우치지 않고 언제나 리지적이며 철같은 규률과 투철한 철학정신으로 다져진 독일인들의 의식구조에서만이 비롯되는 행동이 아닐까 생각된다.   서방의 이러한 자세와 달리 아시아권에서는 아직까지도 2차대전의 아픔에서 허덕이며 그 아픔과 상처를 떨쳐버리지 못하고있는것 같다. 참 힘든 로정을 걷고있는것이다. 가령 중국의 항일전쟁 승리 기념행사거나 한국의 광복절 행사에 일본 정계의 주요 인사가 동참했다고 한다면 우리는 다 미친생각이라고할것이다. 그리고 이는 상상할수도 없는 일이라고할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생각은 굳어져있고 현실 또한 엄청 굳어져있는것이다.     아시아권에서는 과거 일본의 만행이 용서를 받지 못하고있다. 그 주되는 원인은 일본이 지금까지도 저들의 침략역사를 승인하지 않고 아시아 각국 피해국에 진정성있는 사죄를 하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에는 각국과의 섬분쟁을 구실로 자국 헌법까지 뜯어고치며 군국주의를 부활시키려 하고있다.     용서와 사죄는 모순통일체로서 사죄가 있어야만 용서가 있게 된다. 또 한걸음 물러서서 먼저 용서를 했으면 따라서 사죄도 해야하는법이다. 하지만 아시아권의 이런 상식을 벗어나 일본은 일방적으로 저들의 주장만 고집하고있다. 저들의 전쟁은 서방 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아시아를 “해방”하기 위한 전쟁이며 아시아의 “공영”을 위한 전쟁이라고 고집하고있다.따라서 2차대전 갑급 전범의 위패를 봉양하는 야스꾸니신쟈를 계속 참배하고있다.  사전의 의도가 어찌되였건 결과가 재앙으로 돌아왔다면 그 행동은 모두 잘못된 재앙일수밖에 없는 일이다. 의도가 어찌하든 일본이 2차대전기간 아시아에서 발동한 전쟁은 곧 침략전쟁이였고 아시아 각국인민에게 침중한 아픔과 고통, 재앙을 들씌운 전쟁이였다는 사실만은 부인할수없는 일이다. 진정 일본이 문명하고 우수한 민족이라면  독일처럼 과감히 역사를 반성할줄 알아야하고 사죄할줄 알아야한다. 진정성있는 반성과 사죄가 없다면 그것은 곧 죄행을 다시 범한다는것과 같은 말이 된다. 그럴진대 수많은 나라에 전쟁의 재앙을 가져다주고 아픔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재앙의 재발을 누군들 허용할수있겠는가? 그러니 일본은 용서받지 못하는것이다!
10    “8.15”, 항일 렬사들과 어르신들을 추억하며 댓글:  조회:4088  추천:5  2014-08-15
“8.15” 는 일제로부터 해방 받은 조선민족의 광복의 날로서 자못 의미 깊은 날이다. 때문에 해마다 남북 모두가 이날을 성대히 기념하고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항일전쟁 승리의 공식 기념일이 9월 3일이기 때문에 특별한 기념행사들이 없다. 오직 조선족이 집거해 살고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만이 이날을 “광복”이요, “해방”이요, “항전승리”와 관계없이 민족전통의 어르신들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로인절로 지내고있다. 물론 마음 깊은 사람들은 이날을 로인절로 기념하면서도 이날의 진정한 의미도 망각하지 않을것이다. 늘 “8.15”를 지내왔지만 올해만은 각별히 감회가 남다르다. 늘 그러했듯이 집안 어르신들에게 안부 전화를 하고 곁들어 명절의 인사를 전하며 조그마한 성의로 용돈을 얼마간 보내드리면 그만이였다. 그리고 조금 여유가 있으면 방송사업일군인만큼 우리방송을 애청하고 계시는 연변이거나 장춘의 어르신들에게 문안전화도 하군했었다. 그런데 올해는 웬지 여러 가지 의미가 한데 뒤엉켜 마슴이 무겁기만 하다. 그도그럴것이 내가 알고있는 너무 많은 어르신분들이 이미 돌아가셨다. 내가 방송국 기자로 취재하면서 만났던 많은 로인들 특히 혁명에 참가하셨던 분들은 최근 몇년사이에 련속 돌아가셨다. 조선혁명군정대학을 나왔고 해방전쟁시기 동북대지를 석권하면서 피어린 항쟁을 직접 겪으셨던 심양의 원로 최강 선생님, 서영화 선생님, 길림성 반석의 김응삼 선생님, 길림성 연길의 김병욱 로인, 최명세 로인.......뿐만 아니라 우리방송을 애청해 듣던 잊지 못할 로인분들도 돌아가셨거나 또 병에 시달리고 계신다. 특히 방송을 들으시면서 늘 나를 고무격려해주셨을뿐만 아니라 방송 애청자 소조까지 조직해 주신 연변방송애청자협회의 문태경 회장님께서 중병에 걸려 이제는 사람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비보를 박철원 선생님으로부터 전해 들었기 때문에 심정이 더 무거운감을 느끼고있다. 20여년간의 방송기자로 사업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많은 일을 겪어보았지만 그래도 문태경 회장님을 비롯한 방송 애청자분들을 만났던 일이 가장 기억이 새록새록하고 또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다.   문태경 방송애청자협회 회장  문태경 선생님은 아주 정열에 넘치는 분이셨다. 70세 고령이 넘었지만 점잖고 말수적으며 또 가끔씩 유머도 곧잘 하시군 했다. 또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조금 억찌도 곧잘 부리시군 하셨다. 물론 부인이 안 계시기에 곁에 돌봐주는 사람이 크게 없었던것 만큼 술이나 담배를 자제하지 못하셨다. 게다가 나 역시 깐깐한 성격이 아니였기에 만나면 늘 함께 담소를 나누면서 술과 담배를 걸지 않았다. 문태경 선생님과의 인연은 2004년 하반기부터였을것이다. 당시 내가 맡았던 대형 력사방송다큐 “불멸의 발자취”가 본격 방송되던 때였다. 물론 한주에 한회정도 방송하니 그처럼 큰 영향력을 과시하지 못했다. 대신 오래도록 길게 청취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준 것도 사실이다. 그때 방송이 끝날때면 늘 방송된 내용에서 찾아보는 퀴즈문제를 내주고 전화나 편지로 퀴즈를 맞추는 분들에게는 관련 도서거나 반도체를 비롯한 기념품을 증정했다. 너무 간단한 이벤트였지만 그래도 청취자들의 호응이 괜찮았다. 그러던 어느 날 늘 퀴즈를 맞추던 한 애청자가 편지를 보내왔다. 방송다큐 “불멸의 발자취”를 잘 청취하고 있는데 이 좋은 자료를 책으로 정리해 출판하지 않겠는가고 건의해왔다. 그리고 자기도 자그마한 인쇄공장을 가지고있으니 도움을 주겠다는 내용이였다. 그러지 않아도 책 출판이 꿈이였 던 나는 곧 이 좋은 건의를 제기한 청취자를 기억하게 되었다. 편지마지막에 “문태경(文泰景)”이라고 한자로 밝혀져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때부터 문선생님은 사실 방송 애청자소조를 조직할 준비를 하고 계셨다. 얼마후 문선생님으로부터, 방송에서 호명되는 애청자들의 련락주소를 제공할것을 요구하는 전화가 왔다. 그래서 명함과 통신력락처(주로 고정전화번호)를 정리해 보내주었다. 문선생님은 명함에 따라 애청자분들과 일일이 통화하면서, 방송애청자 소조를 건립해 자주 모임을 가지고 서로 방송청취 소감을 이야기하며 또 뜻 깊은 행사도 조직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하셨다. 그리하여 방송애청자분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2005년에 민족출판사에 의해 “불멸의 발자취”가 출판되였다. 비용은 좀 할인 받았지만 그래도 모든 비용은 자부담으로 해결했다. 책이 출판되자 나는 가장 먼저 이 소중한 도서들을 방송 애청자들에게 선물하고싶었다. 그래 스스로 우편료를 부담하면서 먼저 연변의 문태경 선생에게 부쳐 보냈다. 방송프로그램 퀴즈답변에 적극 참가한 애청자분들에게 선물로 증정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장춘의 애청자분들은 그때 많지 않았기 때문에 수십권을 직접 가져다 드릴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그해 겨울 연변에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비행기를 마다하고 기차편으로 장춘을 들러 가기로했다. 책은 생각보다 아주 무거웠다. 같은 체적의 무게가 돌덩이보다 더 무거운것 같았다. 나는 책을 가득 담은 트렁트를 끌고 장춘역에 내리니 장춘의 방송 애청자 윤영학 선생님께서 마중나오셨다. 윤영학선생님도 그때 장춘의 방송 애청자들을 조직하고 계셨는데 나의 부탁을 아주 기꺼이 들어주셨다. 그리고 나를 댁에 초대해 사모님이 직접 만든 맛나는 음식까지 대접해 주셨다. 그야말로 제집 식구를 맞아주는 격이였다. 장춘에 잠깐 머문 다음 연변에 가서 일을 보기 시작했는데 지금도 그때 연길 출장 목적이 무엇이였던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문태경 선생님과 애청자들을 만나던 정경만은 기억이 뚜렷하다. 우리는 함께 간단한 좌담을 가졌고 애청자분들은 너도나도 다투어 방송을 청취한 소감을 이야기하셨다. 그리고 소중한 책을 선물해주어서 너무나도 감사하다고했다. 그런데 이때 문태경 선생님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셨다. “이왕 이렇게 모였던바에 우리 중앙인민방송국 방송 애청자소조를 건립하자”는것이였다. 물론 자리에 참석한 분들은 기꺼이 승낙했고 만장일치로 문태경 선생님을 책임자로 추대했다. 문선생님은 이 자리를 위해 미리 도서 “불멸의 발자취”를 이분들에게 다 나누어 드리면서 여러사람들의 의향을 다 파악했던것이다. 그리하여 방송 애청자 소조 설립회의가 소박하게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때 생각지 못한 일이 또 생겼다. 한 애청자가 책을 들고 나에게 다가오더니 싸인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아 글자를 잘 못 쓰는데요”하고 겸손을 떨면서 한국식대로 “아무아무에게 드리니 혜존”하고 써 드렸다. 그러자 다른 애청자분들도 모두 와서 줄을 서서 싸인을 기다리는것이였다. 방송애청자 소조 설립좌담회가 도서 출판 싸인회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자리에 모인 십여명에게 다 싸인해주고 방송애청자소조의 설립을 축하해드렸다. 모두가 첫 대면이였지만 문태경 선생님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분은 옛날 주덕해가 연변에서 서기로 사업할 때 연길시 정부의 한 부문에게 공무원으로 심부름을 했던 분이였다. 정확한 직함과 단위는 부끄럽게도 지금까지 모르고 있다. 그후 문태경 선생님과 나는 자주 통화했고 나는 연변에 출장 나갈 기회만 있으면 되도록 시간을 쪼개서 문태경 선생님과 애청자분들을 만나 보군했다. 선생님은 애청자분들을 조직해 주덕해 기념비를 찾아가 추모행사를 했고 렬사릉원을 찾아 렬사들을 추모하는 행사도 조직했으며 또 환경미화활동을 비롯해 다양한 뜻깊은 일들을 많이 하셨다. 뜻깊은 일을 하시고는 늘 우리 애청자분들이 무엇을 했다는 것을 나에게 전해주면서 “사업회보한다”고 말씀하셨다. 롱을 잘하는 분인줄 알기 때문에 나는 전해 들은 내용을 정리하여 방송프로에서 방송하군했다. 그러자 애청자소조의 영향력도 날로 커졌다. 특히 연변의 애청자소조와 장춘의 애청자소조간의 련락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어르신들은 서로 문안을 했고 방송을 듣고 연변에서 혹은 장춘에서 뜻깊은 일을 했다는것을 서로 알았다면서 기꺼워하셨다. 그리하여 후에 연변과 장춘의 애청자 대표들이 함께 길림시의 화피창 렬사릉원을 공동 참배하는 행사도 하게 되었던것이다. 방송애청자소조가 자발적으로 설립된후 이듬해 2006년에 우리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방송 개시 5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방송을 듣고 조선의용군이 싸웠던 중국 관내지역 태항산에 가 보고싶었 던 애청자분들이 이를 계기로 태항산 견학을 하자는 건의가 들어왔다. 물론 역시 문태경선생님의 좋은 아이디어였다. 련락을 받고 나는 고민했다. 대부분 로인분들이기 때문에 건강상황이 문제가 될것 같았다. 그리고 로인분들이 다 돈을 아껴쓰시는 분들인데 어찌 아무 후원도 없이 견학비용을 부담시키겠는가가 걱정되였다. 내가 고민을 이야기하자 문태경 선생님은 걱정하지 말라면서 지금 생활이 좋아졌고 자녀분들이 대도시나 외국나가 돈을 잘 벌고있으니 어지간한 비용은 부담할수있다고 했다. 그리고 특히 “조선 렬사들이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국타향에 묻힌것도 서러운데 우리 연변의 조선족도 찾아가 참배하지 않으면 이분들을 알아줄 사람이 어디있겠는가?”고 하셨다. 2006년 “8.15”가 지난후 얼마 안되여 연변의 애청자와 장춘의 애청자 윤영학 선생님을 비롯해 태항산 견학단 9명이 북경에 모이게 되었다. 이분들은 먼저 중앙방송국 50주년 기념대회에 참석했다. 문태경 선생님은 기념대회에서 연변에서부터 가지고온 금기(錦旗, 작은 기발에 글을 써서 치하하는 것으로 지금의 감사패와 같음)를 방송국 주임에게 드렸다. 금기에는 “백두의 높은 정기는, 조선민족의 숨결일세”라고 씌여졌다. 방송국 조선어부에서는 공식적으로 애청자분들을 초대하고 이분들을 잘 안내하라고 나에게 임무를 주었다. 물론 미리 준비를 다 해놓았던 나는 려행사를 통해 기차표, 관광뻐스, 숙박 등을 까근히 배치해놓았다. 그리하여 기념대회가 있은 이튿날 일행은 기차로 한단에 가서 먼저 한단 렬사릉원을 찾아보았다. 거기에는 조선의용군의 진광화와 윤세주 렬사의 묘소가 있었다. 일행은 묘소를 찾아 연변식으로 참배했다. 간단한 과일과 마른 음식을 차려놓은 다음 한분씩 술을 붓고 절을 올렸다. 이때 누군가가 “제사상에 조선의 마른 명태가 있고 한국산 소주가 있으니 남북이 통일 된거나 다름없지 않는가? 렬사들도 안식할수있게네......”하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모두가 빙그레 웃었지만 마음만은 그처럼 경쾌하지는 않았다. 남북 분렬은 지금까지 가셔지지 않는 우리민족의 아픔이니 말이다. 희생된 렬사인들 지하에게 어찌 마음 펴할수있겠는가?! 한단에서 우리 일행은 관광뻐스를 타고 하북성 섭현으로 가서 조선의용군 사령원 무정이 머물렀던 집, 조선의용군 대원들이 머물렀던 절당, 조선의용군과 현지 백성들이 군민문예야회를 했던 마을의 무대 그리고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를 둘러보았다. 이어 일행은 태항산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마전의 팔로군 전적사령부 옛터를 비롯한 많은 사적지와 전적지들을 참관했다. 특히 태항산기슭에 새로 축조된 “조선의용군 렬사 기념관”과 좌권장군과 함께 희생되였던 진광화, 윤세주 렬사의 묘소자리를 찾아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좌권 장군은 항일전쟁시기 희생된 공산당의 가장 높은 간부였다. 그런데 조선의용군의 렬사인 진광화와 윤세주렬사는 좌권장군과 함께 태항산기슭에 나란히 묻혔던 것이다. 그후 중한 수교가 이루어지고 많은 한국 유가족들이 다녀감에 따라 한국에서 투자해 섭현 정부와 공동으로 이곳에 조선의용군 렬사 기념관을 세웠던 것이다. 애청자분들이 모두 년세가 많은 분들이기 때문에 사적지들을 다 다닐 수 없어 일정을 조금 줄였다. 그리하여 저녁녘에 섭현의 명소 왜황궁을 참관하고나서 빈관으로 돌아왔다. 저녁상에 둘러앉은 애청자분들은 마음속 깊이 솟구치는 감흥을 달랠수 없었다. 방송을 들으면서 받았던 감수, 그리고 아주 먼 옛날 어린시절 조선의용군으로부터 “최후의 결전”, “조선의용군 행진곡” 등 가곡을 배우며 성장했던 일들을 생각하고 또 이번에 조선의용군들이 학습하고 싸웠던 사적지들을 직접 목격한 감격이야 무엇으로 헤아리겠는가? 어느 한분이 먼저 축배의 노래를 부르자 자리의 모인 사람들이 너도나도 장끼를 보이기 시작했다. 춤을 추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 시를 읊는 사람 모두가 흥에 겨워 밤가는 줄 몰랐다. 한단 렬사릉원에서 방송애청자견학단 렬사들에게 술을 올리는 방송애창자 진광화,윤세주 렬사묘소를 찾아   “8.15”, 우리민족이 해방된 날이고 광복을 맞이한 날이지만 지금까지도 남북분단의 아픔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요즘에 와서 일본 우익세력이 더욱 기세를 부리고 군국주의를 회생하려는 기미를 보이고 있어 중국,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과 아시아 린국에 큰 불안을 조성하고 있다. 래년이면 항일전쟁 승리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근 70년 세월이 흘렀지만 강권과 폭압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인류는 아직까지도 진정한 평화를 찾지 못하고 있다. 특히 요즘에는 바티카노의 교황님이 한국을 찾아 성대한 평화기도식을 가진다고한다. 교황님의 평화기도가 진정 우리 마음속의 아픔을 달래주고 진정한 평화를 위해 노력하도록 사람들을 편달할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가 진정 평화를 실현해야만이 “8.15”가 “광복”이요 “항전승리”요, “일본패망”이요 등등의 기념일이 아닌 진정 로인들의 건강과 장수만을 빌고 축복하는 로인의 명절, 건강의 명절로만 될수 있는 것이다!   삼가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빌고 문태경 선생님과 모든 어르신님들의 건강을 빈다!  
9    독일이 우승할수 밖에 없는 이유 댓글:  조회:3781  추천:2  2014-07-16
 연일 밤을 패면서 즐겼던 2014년 브라질 월드컵대회가 드디어 끝났다. 예상대로 독일이 결승전에서 남아메리카의 다른 한 강호 아르헨티나를 1대 0으로 이기고 우승 트로피를 받아 안았다. 결승전은 골 하나밖에 터지지 않았지만 연장전까지 내내 팬들의 신경을 긴장시켰다. 두 팀 모두가 강한 스피드와 빠른 절주로 상대를 압박해나가면서 팽팽히 맞섰다. 독일은 유창한 패스와 원활한 전술 운영으로 장시간 계속 공을 발밑에 통제하면서 상대를 서서히 유인해 내온 뒤 깊숙이 수비진을 파고들면서 골문을 위협했고 아르헨티나는 10번 메시 선수를 중심으로 빼어난 개인기를 앞세우고 밀착수비를 구상하면서 날카로운 반격을 조직했다. 때론 이쪽 골문에서 위험천만의 순간이 연속되다가 조금 뒤에는 또 상대편 골문주변에서 아슬아슬한 순간이 연출되어 팬들의 가슴을 조이게 하였다. 90분 경기가 득점 없이 마무리되고 연장전으로 들어갔지만 팽팽한 국면은 여전히 타개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연장전 후반에 독일의 제1공격수 클로제를 교체해 투입된 신진 로미오 괴체 선수가 신속히 상대 수비진을 파고들면서 질주하던 중 왼쪽으로부터 날아오는 센터링을 재치있게 가슴으로 받아낸 뒤 그대로 오른발 슈팅을 날려 상대 골키퍼의 왼쪽으로 공을 골문에 차넣었다. 독일은 이 천금같은 한골로 강적 아르헨티나를 물리치고 우승 트로피를 받아 안게 되었 던 것이다.   본대회에서 독일은 조직력과 단합력으로 축구의 힘과 용기의 미감(美感)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독일구단은 본대회 가장 완벽한 구단이었다고 평할수 있다. 월드컵을 보면서도 마냥 중국축구를 생각하게 되고 연변축구를 생각하게 된다. 비록 중국이라는 이 큰 나라에서 한쪽 구석을 차지한 작고 촌스러운 시골축구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한때는 전국 우승까지 한 휘황한 성과가 있었고 줄곧 중국 국가대표팀에 수명정도의 조선족 선수를 보내주었고 또 중국 프로축구 1부리그에서 활약상을 보이기도했던 연변축구였다. 더욱히 축구를 열광하는 많은 조선족 축구팬들이 있어 “축구의 고향”으로까지 불리우는 연변이다. 연변축구가 중국 1부리그에서 탈락된 후로 거의 축구에 관심을 돌리지 않고 있던 터라 간만에 브라질월드컵대회 생중계를 시청하면서 다시 옛날 축구의 재미를 되새겨보게 되였다. 1990년 이딸리아 월드컵대회서 마테우스를 주장으로하는 독일이 마라도나를 중심으로 한 아르헨티나를 전승하고 우승을 차지할 때부터 나는 줄곧 독일의 열혈 팬이었다. 그리고 독일이 우승할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늘 그들의 막강한 조직력을 이야기했고 더불어 독일은 대단한 민족이라는 좀 아리숭하고 애매한 이유를 말하군 했었다. 브라질대회에서 독일이 우승할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자면 어차피 독일이라는 이 민족의 우수성을 논해야할것이다. 한나라 한민족의 우수성은 문화와 문명을 가지고 논해야할것이다. 그들이 대표하고있는 문화적 우수성과 그 문화적 우수성이 전반 인류문명에 대한 기여도로 설명해야할것같다. 문명이라면 개념을 정리하기 퍽 어려운 문제이다. 나는 그냥 물질적 조건과 정신적 조건이 가장 우수한것을 문명이라고 행각하고있다. 한시대 인류의 가장 우수한 물질적 생산조건과 정신적인 힘을 말하는것이 문명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럴진대 월드컵에서 보여지는 독일은 가장 과학적이고 론리적인 플레어를 연출하면서 또 강한 정신력을 바탕으로한 개개 선수들의 힘과 기술을 잘 발휘시키고있다. 이것이 문명의 집대성한 결과이고 선진적인 문명의 힘이 아닌가 생각된다. 브라질대회 분조경기가 시작할 때이다. 네델란드의 판 페르시와 로벤이 멋진 득점을 완수하면서 네델란드가 뽀루뚜갈에 대승을 거두고 독일이 뮐러, 클로제의 득점으로 지난대회 우승자 스페인을 대파하는 쾌거를 보면서 모두가 열광하기 시작하였다. 축구열을 놓고보면 아마 세계적으로 중국만큼한 나라도 없을 것이다. 한일 월드컵대회때 한국축구팬들이 “붉은 악마”군단을 형성하면서 축구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광을 잘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한국대표단을 응원했고 이들의 응원에 힘입은 한국대표팀은 사상 첫 월드컵대회 4강이라는 신화를 창조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축구열은 이것이 아니다. 아마 중국식 축구열광이라고나해야 할까?! 중국인들은 자기 축구를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 축구에 열광하고 남미축구에 열광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자아중심에서 철저히 해탈해서 순수한 축구 자체만을 즐길줄 안다고 해야 할 것 같기도하다. 자기 나라 선수면 어떻고 남의 니리선수면 어떻고 일단 축구만 잘하면 환호를 보내고 영웅으로 우상화하면 되는것이다. 때문에 우승한 독일에 대한 관심보다는 아쉽게 실패한 아르헨티나의 메시 선수를 더욱 동정하고 눈물을 흘렸다. 왜 이러한 국면이 형성되였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두가지를 꼽을 수 있다. 하나는 중국축구가 줄곧 부진을 보이면서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론의 지도적 작용이라고 할수 있다. 중국에서는 중국대표단 선수들이거나 이른바 좀 유명했던 축구선수들은 흔히 코미디 프로나 재담프로에서 조롱거리로 되고있다. 그만큼 중국인들은 스스로 중국 축구를 비하하는 심리가 있다. 중국축구가 줄곧 부진한 상황임은 구차하게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것 같다. 과거 사람들은 중국축구의 부진에 대해 중국사람은 체질적으로 약골이기 때문에 축구같은건 잘 할수없다고 생각했다. 축구처럼 강한 힘이 필요한 경기 보다는 기교와 술법에 능한 탁구 종목이 중국인의 체질과 정신적 기질에 더 적성이라는 견해였다. 다소 일리가 있는듯 하다. 하지만 개혁개방을 거쳐 중국사람들도 먹고 입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했기 때문에 물질적 조건이 많이 풍요로와지기 시작했고 특히 80년대, 90년대 출생한 아이들은 충족한 영양소를 흡수했기 때문에 키나 체중, 체질면에서 서구인들에게 크게 밀리지 않는 수준에 도달했다. 키와 힘만 보아도 중국인 새세대들은 한국이나 일본에 조금도 뒤지지 않으며 도리여 아시아에서는 체질이 가장 뛰여나다고 볼수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무엇때문에 다른 체육종목은 모두 큰 진보와 발전을 가져와 올림픽대회에서도 금메달을 수두룩히 따내지만 축구만은 여전히 부진한것 일가? 바로 축구계 관리에 문제가 생겨 중국 프로축구가 실패의 충격과 미열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축구계에 부정거래가 판을 치고 승부조작이 난무하며 사람마다 축구도박에 혈안이 되던 때였다. 축구 선수들의 프로의식이 바닥에 떨어졌고 모두가 돈에 눈이 어두웠으며 허영심에 들떠있었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축구시장의 전망이 밝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개혁개방초에 가장 먼저 시장화를 실시한것이 바로 프로축구분야였다. 비록 돈을 내고 보는 축구경기였지만 사람들의 축구열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경기장마다 관중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였으며 TV화면에는 축구팬들이 환호하는 모습이 진풍경을 이루었다. 당시 축구에 관련한 전문적인 신문만하여도 두세가지가 새로 나타나 큰 인기를 누리기도했다. 프로축구초기의 이 훌륭한 시장은 얼마가지 못하고 깊은 나락으로 추락했다. 언론의 급물살을 타고 선수들이 급작스레 스타가 되였고 따라서 그들의 몸값도 천문학적으로 불어났기 때문에 너무나도 쉽게 유명해지고 너무나 쉽게 돈을 번 선수들은 허영에 들떴으며 제대로 된 축구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내가 스타이기 때문에 자연히 어디가나 환호를 받아야하며 보수도 많이 받아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구장에서 어떻게 훌륭한 기력을 보여야하며 체육인으로서의 훌륭한 정신력을 보여주어야한다는 최저의 요구도 깨끗히 망각하게 되였던것이다. 게다가 프로축구 시장에 눈독을 들인 상인들이 거액을 퍼부으면서 구단에 투자했고 구단을 운영하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국내 많은 부동산업체들이 련속 중국 프로축구에 투자하면서 중국 프로축구 시장화를 고조시켰다. 하지만 중국의 프로축구는 곧 변질되기 시작했다. 축구도박이라는 것이 암종이 생겨났던 것이다. 배후의 검은돈들이 심판, 선수들을 매수하면서 승부를 조작했고 축구관원들도 뒷돈을 받고 마냥 눈을 감아주었기 때문에 축구도박의 흥행과 함께 중국 프로축구는 깊은 나락에 추락하기 시작했던것이다. 뒷심이 되어줄 아무런 배경이 없고 돈도 없었던 연변축구팀도 얼마나 많은 억울함을 당했는지 모른다. 재판들은 공공연히 한쪽을 편들었고 축구관원들도 편들어서 그릇된 판정도 한사코 정확한 판정이라고 우겼다. 모두가 돈으로 조작되는 판국이었다. 경기장에서 선수들은 경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를 했고 재판들은 짐짓 속구구를 하면서 그릇된 판정을 일 삶았으며 경기 승부는 돈을 많이 낸 막후조종자들의 소원대로 되었다. 어두운 이면을 모르고 발을 잘못 들여놓았다는것을 후에야 깨달은 구단 후원자들도 후회막급이었다. 하지만 거액의 자금은 이미 들어갔기 때문에 도저히 몸을 뺄수 없는 상황이었다. 살아남을 길은 단 하나, 어두운 길에서 남보다 더 어둡고 남보다 더 많은 돈을 투입하는 길이었다. 중국 축구계의 상황을 신속히 파악한 이들은 곧 자기들도 가방에 현금을 가득 담아가지고 뒷돈을 주고 승부를 조작할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젠 불쌍한건 중국의 축구팬들뿐이였다. 거짓을 모르고 모든 것을 진실로 믿고 구장에서 선수들이 연기하는것을 진실한 경기인줄 알고 목이 터져라 응원했고 이미 조작된 승부인줄도 모르고 자기가 선호하는 구단의 승리에 환호했고 실패에 생가슴을 앓아야했다. 이런 형국에서 어찌 좋은 축구가 있겠는 가? 2009년말부터 중국축구계는 축구도박과 축구경기 승부조작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중국축구협회 회장, 서기를 포함해 고위 관원들이 전격 수사를 받았고 회뢰를 받은 심판, 감독, 선수들이 덜미를 잡혔으며 승부를 조작한 장본인들이 모조리 형사추궁을 받았다. 축구계의 혼탁한 물은 다소 청소되었지만 전반 중국축구는 치명타를 받았다. 축구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가 사라졌고 축구 꿈나무들이 언녕 축구의 꿈을 접어 버렸기 때문이다. 중국의 수만의 축구팬들은 TV를 통해 이딸리아의 프로축구, 잉글랜드 슈퍼 리그, 독일의 분데스리그 그리고 요즘에는 스페인의 프로리그까지 남김없이 시청하고있다. 그것도 야밤에 생중계로 보면서 축구에 대한 열망을 식히지 않고있다. 세계적으로도 남의 축구를 자기 축구보다도 더 열광하는 사람들은 중국을 내놓고는 더 없을것이다. 개혁개방을 통해 겨우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한 중국인들에게는 아직 프로의식에 눈을 뜨고 신사적 풍격을 갖추며 특히 양보라는 인간의 가장 우수한 매력을 보여줄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문명하지 못하다는 말이 되겠다. 아직도 자기의 털끝만치의 실리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체면이고 정의로움이고 옳고 그름이 다 필요없고 오로지 실리를 확실하게 챙겨 자기 배부터 불려야한다는 원초적인 욕망이 아직 너무 많이 남아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중국이 이런 곤경을 겪고 있을 때 아시아의 한국과 일본의 축구는 한일월드컵대회에서의 맹활약에 힘입어 끈질기게 좋은 경기력을 과시하면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축구라는 운동은 인류의 수많은 체육종목 중 가장 대표적인 운동으로 꼽힌다. 그리고 월드컵대회를 사람들은 쉽게 지구촌 잔치로 비유하고 있다. 그만큼 온 인류의 시선이 집중되는 종목이다. 축구운동은 집단력을 강조하기 때문에 축구운동을 통해서 한 나라와 한 민족의 문명정도, 문화를 읽을 수 있다. 문명이라고 한다면 정확한 개념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가장 우수한 물질적 조건과 정신적 조건을 구비한 생활생산방식이 한개 문명이라고 하겠다. 이를테면 한시기 가장 우수한 물질생산조건과 정신력을 갖추었다면 그 민족이나 그 사회가 가장 우수한 문명을 대표한다고 할수 있다. 물질과 정신적으로 다 인류 최고의 문화를 겸비한 우수한 문명을 갖추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독일이 이러한 문명을 갖추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된다. 독일이라는 나라는 두 차의 세계대전의 아픔을 딛고 전쟁의 페허속에서 우뚝 선나라이고 민족이다. 물질생산면에서 신속한 경제발전과 최첨단 기술의 제품생산이 눈에 띄인다.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자동차를 만들어내고 가장 우수한 카메라와 렌즈를 만들어내는 나라이다. 대표적으로 벤츠 자동자와 레이카 카메라를 들수 있다. 지금 디지털 카메라 시장보급을 보면 모두 일본제품이지만 사실 일본제품보다 어 비싸고 더 우수한 제품들은 독일제 카메라들이다. 이러한 첨단기술과 정성이 슴배인 최고의 제품을 생산해내기까지는 그야말로 엄청난 기술력과 근로자들의 엄청난 피땀이 슴배여 있는 것이다. 한 제품을 완수하기 위해 한세대 또 한세대 기술일군들이 주야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였고 티끌만한 흠이라도있다면 한 세대 한 세대 근로자들이 정성과 열정을 들여 하나하나 그 티를 제거하고 완벽한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훌륭한 제품이 이루어지기 까지 이러한 노력이 없이는 안될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짐작할수 있는 일이다. 반면 중국은 어떠한가? 염가의 저질제품만이 판을 친다. 이러한것이 일정한 경제성장을 가져올수 있겠지만 구경 장원한 길이겠는가? 검토해 보지 않을수 없다. 최고의 정신력을 갖춘 민족이라는 면에서도 독일은 자랑거리가 많다. 종교적으로도 남먼저 개혁을 이끌었던 것이 독일 사람들이였고 철학자들을 많이 탄생시킨 민족 역시 독일의 게르만인들이였다. 현대에 들어와 맑스-엥겔스를 포함해 최고의 철학자들이 거개가 독일인들이다. 이처럼 근대 세계최고의 물질과 정신적인 문화와 재부를 집대성한 나라이고 민족이기 때문에 최고의 문명을 가진 나라이고 민족이라 하겠다. 때문에 힘과 용기를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축구를 얼마든지 구상할수 있는 것이다. 20여년의 노력을 거쳐 드디어 독일이 축구왕국 브라질을 본 때 있게 전승하고 남아메리카의 다른 한 강호 아르헨띠나마저 따돌리고 기적적으로 아메리카 대륙에서 월드컵 트로피를 받아 안은 첫 유럽국가로 될수 있었던 것이다. 얼마전 청도에 출장 나간적이 있다. 그때 거리에서 해물 안주에 청도 생맥주를 마시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청도라는 곳은 가장 먼저 독일의 식민지로 전락되었다가 다시 일본 침략자들의 통치를 받았으며 또 후에는 국민당의 통치를 받다가 해방된 고장이다. 하지만 이 고장에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겨주고 가장 우수한 것을 남겨준 것은 독일사람들이 남긴 문명이라고하겠다. 일매지게 깨끗이 정돈된 거리, 정교하면서도 우아한 건물들 시원한 독일 맥주와 맥주문화…… 그들이 만들어 낸 맥주는 지금도 청도의 대표적인 명물이다. 그리고 장개석이 머물렀다는 석재로 만든 정교한 괴테식 건물인 “화석루”역시 독일인들의 걸작이라고 한다. 브라질 월드컵 대회에서 보여주었다싶이 중국 축구가 쇠퇴하고 한일 축구실력이 퇴보하는 반면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많은 나라의 축구들이 본격적인 진보를 보여주었다. 꼬스타리까, 꾸알라룸뿌르, 알제리 등 별로 들어보지도 못한 나라들의 축구실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것은 이들 나라의 물질생산과 정신력도 마찬가지로 예사롭지 않다는것을 설명해주고있는것이다. 문명과 문명의 전파법칙이 이러할진대 독일이 월드컵대회 우승을 하는 데 또 다른 이유가 필요할까?!
8    중국의 비카소 한락연② 댓글:  조회:6242  추천:0  2012-11-09
 중국 전민이 동원되여 일본침략자와 싸우던 그 가렬처절한 전투에 뛰여들기 위해 조선혁명가 한락연은 프랑스로부터 중국에 왔다. 그는 중국의 항일전쟁은 기필코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전승할것이라고 믿었고 따라서 조선인민도 독립과 해방을 맞이할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기자의 신분으로 중국에서 저지른 일본침략자들의 비인간적인 야망을 전세계에 전해주고 유지인사들을 단합시켜 일본침략자와 싸울 것을 다지며 무한에 거처를 잡았다.   (권립) “로구교사변이 일어나자 그는 불타는 애국심으로 귀국하여 무한 동북항일구국 총회에서 사업했습니다. 그는 화가의 신분으로 민주인사들과 접촉하고 국민당 장군들과 외국인사들과 접촉했습니다. 그때 한구에서 학교를 꾸리고있던 미국 기자 스노, 한구에서 전선지원 의료대 훈련반을 꾸리고있던 스미스트라이 녀사에게도 한락연은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때로부터 한락연은 당의 지시에 따라 줄곧 상층 통일전선 사업에 자신의 한생을 바쳤습니다.” 진보적인 항일잡지 반공(대부분 반공 잡지의 표지그림은 한락연이 그렸다) 한락연은 반공잡지에 동북 장고봉에 관련한 글을 실었다 한락연은 이 건물에 거폭의 항일선전화를 그려 걸어놓아 전민의 항일의지를 고양시켰다   귀국하여 무한에 도착한 한락연은 동북에서 활동할 때 친숙하였던 염보항의 소개로 다시 공산당조직활동에 참가하였다. 당시 무한에는 중공중앙 장강국(長江局)의 령도를 받는 동북항일구국총회(東北抗日救國總會)가 있었는데 동북에서 활동하던 류란파(劉瀾波), 염보항, 우의부(于毅夫) 등이 책임자로 있었다. 무창(武昌) 명월교(明月橋) 순직회관(順直會館)에 본부를 둔 동북항일구국총회는《반공(反攻)》이라는 반월간 잡지를 출간하였는데 한락연은 늘 잡지에 글을 발표하였으며 잡지의 표지설계와 미술편집을 담당하였다. 선전사업을 더욱 폭넓게 진행하기 위해 그는 선전대와 함께 거리에 만화를 붙였고 또 한구(漢口)의 가장 번화한 강한관(江漢關) 종루(鐘樓)에 거폭의 선전유화를 걸어놓기도 하였다. 동북항일구국총회의 련락사업을 맡은 그는 또 쏘련 대사관과 련락을 가지고 쏘련의 중국항전 지원사업을 추진시켰다. 쏘련대사관의 한 무관은 그에게 독일제 사진기를 선물하기도 하였다. 한락연은 외국어에 능했기때문에 국제인사들과 쉽게 접촉할수 있었다. 한락연의 부인 류옥하(劉玉霞)녀사가 회억한데 의하면 길림성 룡정에서 태여난 한락연은 어려서부터 중국어, 조선어, 일본어에 능했고 또 로어도 조금 배웠다한다. 그후 유럽을 다녀오면서 또 영어, 독일어, 이딸리아어도 잘했다한다. 당시 국제우호인사 스메들리(Annes Smodler)는 한구에서 의료일군 지원자 강습반을 만들려 하였다. 저명한 미국 녀기자였던 스메들리는 전장의 구호일군을 양성시키는 한편 팔로군에 보낼 약품을 모으려 하였던것이다. 무창에 있던 한락연은 늘 강을 건너 한구에 가서 스메들리의 사업을 도와주었으며 외국기자들에게 전쟁터의 사진을 전했다. 그는 일제의 침략죄행과 중국인민의 항일투쟁을 내용으로 하는 많은 소중한 사진들을 외국기자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중국의 항일투쟁을 국제에 널리 알리게 하였다. 한락연은 또 중국인민의 벗인 국제우호인사 루이.앨리(Rewi Alley), 에드가 스노(Edgar Snow) 등과 친숙한 사이였다. 이들이 1938년, 한구에서 중국공업합작협회(中國工業合作協會)를 세울 때 이미전부터 이들을 알고있었던 한락연은 이 사업에 적극 참가하였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편 그는 무한에서 범장강(范長江), 진룡비(陳龍飛)와 함께 청년구국협회(靑年救國協會)를 조직하였는데 협회는 민주인사 심균유(沈鈞儒), 전준서(錢俊瑞)가 령도하는 상해구국회와도 밀접한 련계를 가지고있었다. 무한에 있던 중공중앙의 지도자들인 주은래, 동필무(董必武) 등은 동북항일구국총회의 여러 사람들과 함께 무한에 모인 수많은 민주인사들과 적극적인 련계를 취하면서 항일통일전선을 이끌어나갔다. 1938년 8월 13일, 8.13항일전쟁 전면개시 일주년을 기념하는 횃불시위가 무한에서 성대히 진행되였다. 한락연은 수많은 중국, 조선 청년들과 함께 시위에 참가하였다. 십여만 시위 인파속에는 《중화민족선봉대 총대부(總隊部)》, 《동북항일구국총회》, 《조선민족전선련맹(朝鮮民族戰線聯盟)》 등 글자를 새긴 기치를 볼수있었다. 주은래, 동필무, 엽검영(葉劍英) 등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이 시위의 앞장에 섰다. 이해 한락연은 주은래가 조직한 작가와 예술가 연안(延安)방문단에 참가해 연안을 방문하였다. 그는 연안의 녀대학생들에게 《항일전쟁속의 민족문화예술》이란 주제로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무한에서 통일전선사업을 맡고있던 한락연은 또한 조선혁명자들도 적극 도왔다. 이시기 혁명의 성지(聖地) 연안으로 가려하는 조선청년들이 있었다. 그는 중국인 혁명활동가 강극부(姜克夫)를 통해 리명(李明), 왕수성(王守成), 장영(張英 녀) 그리고 서양화를 배우는 장진광(張振光) 등 4명 조선청년을 연안에 보냈다. 이들은 서안의 팔로군판사처를 거쳐 연안으로 갔다. 이들 중 리명(李明), 장진광(张振光)은 연안 항일군정대학(抗日军政大学)에서 학습한후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파견되여 조선의용대와 조선독립동맹의 요원으로 되였다. 1938년 전민의 항일투쟁정서는 크게 앙양되였지만 전세는 호전되지 않고있었다. 일본침략군은 상해, 남경을 함락한후 세면으로 무한을 포위해왔다. 적들은 비행기, 땅크를 동원하였고 최 정예부대를 투입해 무한공격전을 개시하였다. 중국 군민들도 이에 대항해 무한주변 산과 물에 의지해 완강히 적들과 싸웠다. 적아 쌍방이 백여만명 병력을 투입한 무한회전은 일제의 무한함락으로 막을 내렸다. 이해 겨울, 무한의 동북항일구국총회는 당의 지시에 따라 중경(重慶)에 옮겼다. 한락연은 주은래의 결정에 따라 중경에 옮겨온 동북항일구국총회에서 사업하였다. 그는 구국총회 본부를 설치한 오랜 전우 염보항의 집에 거처를 잡았다. 이듬해 봄, 한락연은 녀청년회 향촌부 주임간사를 맡고있던 류옥하와 결혼하였다. (한건립) “어머니는 기독교 녀청년회에서 전국협회 농촌부 총간사였습니다. 청년회 본부는 상해에 있었습니다. 상해에서 후에 부유난민소가 있었습니다. 이조직은 후에 무한에 옮겨왔는데 어머니는 무한에서 아버지와 결혼. 어머니는 당시 미국 꼴롬비아 대학 석사졸업생이였습니다. 1935년 졸업하고 38년 모든 항일조직이 모두 무한에 모였는데 무한에서 항일선전대를 조직하였습니다. 무한 기독교 녀 청년회에서 사업했는데 기독교라는 종교이름이였지만 당사의 조직사를 보면 무릇 여기에 참가한 사람은 항일, 혁명의 참가 기한을 모두 그때로부터 기록했습니다. 기독교 이름이지만 사실은 진보적인 조직이였습니다. ” 40년대 가족사진(한락연과 부인 류옥하, 딸 한건립, 아들 한건행) 한락연의 부인 류옥하 유화 뒷줄 좌로 두번째가 류옥하 녀사이고 다섯번째가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 녀사이다     류옥하는 일찍 미국 꼴롬비아 대학에서 공부한 지적인 녀성이였다. 항일전쟁시기 그는 선후로 한구와 중경에서 녀성항일선전대를 조직하였고 주은래의 부인 등영초의 많은 지도를 받았다. 항일전쟁이 폭발한후 장개석은 국민당 좌파인사들의 지지를 받기 위하여 자기가 직접 주임위원을 맡은 전지당정위원회를 설립하고 리제심(李濟深)을 부주임으로 임명하였다. 공산당에서는 국민당 상층인사들과의 련락을 강화하고 통일전선을 공고히 하기 위해 주은래를 전지당정위원회 위원으로 배치하였다. 한락연은 전지당정위원회에 파견되여 소장지도원(少將指導員)의 신분으로 활동하였다. 1934년 4월, 그는 염보항의 소개로 제7전구 사령부에 가서 사업하였다. 그는 주로 산서와 섬서지역에서 국민당과 공산당 부대의 련락사업을 맡아 두 군 사이의 마찰을 감소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시기 그는 중경으로부터 서안을 거쳐 진동남지구를 자주 시찰하였다. 그는 기자이면서 또 전지당정위원회의 소장지도원의 신분으로 국민당과 공산당 부대를 자유롭게 다닐수 있었다. 그는 전구인민들의 항쟁사실을 사진에 담았으며 현지 풍경과 민속을 화폭에 담았다. 이해 겨울, 한락연 다시 산서성 남부를 시찰하였다. 당시 일본군이 진동남지구를 토벌하고있었다. 그는 포화를 무릅쓰고 황하를 건너 항일전쟁에 나선 국민당 장병들을 위문하였고 팔로군 주둔지에 가 보았다. 그는 팔로군 전선총부(前線總部)의 부참모장인 좌권(左權)장군을 만나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당시 산서에 주둔하고있던 국민당 93군은 장개석의 직계부대였다. 그는 93군 참모장인 위외(魏巍)와 긴밀한 련락을 가졌는데 위외는 황포군관학교 제4기 졸업생으로서 줄곧 국공합작을 주장하던 인물이였다. 그의 주변에는 혁명을 지향하는 수많은 진보적인 장병들이 있었다. 1940년 2월, 장개석은 93군에 밀령을 내려 산서의 팔로군 유격대를 공격하게 하였다. 명령을 받은 위외는 작전계획에 허점이 있다는 구실로 명령을 하루동안 하달하지 않았다. 이 기회를 빌어 당천제(唐天際)사령원이 거느린 공산당의 유격부대는 순조롭게 국민당군의 포위권을 빠져나올수 있었다. 이 일로 하여 93군 내부는 혼란에 빠졌으며 국민당에서는 위외를 중경의 중앙훈련단에 와서 강습하라고 하였다. 사실 강습은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위외가 중경에 돌아가면 체포되여 심판받거나 구금될것은 뻔한 일이였다. 그는 한락연을 만나 서한을 팔로군의 팽덕회(彭德懷)부사령원에게 전할것을 요구하였다. 팽덕회를 만난 한락연은 위외더러 계속 93군에 남아 사업을 견지할것을 요구하는 팔로군측의 의사를 전했다. 5월에 한락연은 위외의 서한을 가지고 서안의 팔로군 판사처를 찾아 떠났다. 그는 서안을 거쳐 중경으로 가던 길이였다. 그러나 서안을 떠나 중경으로 가던 도중 한락연은 보계(寶鷄)에서 국민당 밀정들에게 체포되였다. 밀정들은 그를 공산당으로 의심하였지만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였다. 옥중에서 한락연은 적들의 혹형을 이겨내고 당의 비밀을 고수하였으며 옥중의 기타 전우들과 함께 적들과 투쟁하였다. 한락연은 전지 기자의 신분으로 팔로군의 진동남근거지를 다니며 공산당과 팔로군, 신사군의 항일을 적극 선전했다(태항산근거지의 민가) 한락연의 옥중 자화상   한락연이 체포된 소식을 접한 당조직에서는 백방으로 구조하였다. 그러나 위외의 사건과 련계되였기에 처음에는 쉽게 풀려날수가 없었다. 당시 위외는 사태가 엄중한것을 짐작하고 93군의 부분적인 진보인사들을 거느리고 팔로군을 찾아 떠났던것이다. 위외는 후에 백천(白天)으로 이름을 고치고 팔로군 전선총부 참모처장을 지냈으며 함께 93군에서 나온 하눌(夏訥)은 전선총부 참모로, 양공소(楊公素)는 전선총부 비서로 사업하였다. 3년간 옥고를 치른 한락연은 중국공산당과 국민당 상층인사들, 동북 민주인사들의 노력으로 가석방되였다. 그러나 밀정들은 계속 그를 감시하였으며 그에게 서북을 떠나지 못한다는 등 여러가지 제한을 주었다. 출옥후 한락연은 서안시에서 생활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한편 계속 당의 통일전선사업을 진행하였다. 이해 여름에 그는 예술기질이 있는 학생 황주와 함께 다시 섬서로 떠났다. 수개월간 한락연은 중국의 참담한 모습을 진실한 화폭에 담아냈으며 동행한 황주에게 회화기교를 전수하는 동시에 혁명사상을 전수하였다. 드넓은 중화대지의 아름다운 경물들과 빈궁에 허덕이는 농민들, 낡은 마차, 농촌녀인들의 진실한 모습이 그들의 화폭에 담겼다.
7    중국의 비카소 한락연① 댓글:  조회:5523  추천:2  2012-11-07
“전국이 해방된후 나는 여러차례 신강에 가군 하였다. 거기에서는 무거운 짐을 지고 아득히 펼쳐진 사막을 가는 락타대를 늘 보게 된다. 그리고 멀리에서 울리는 락타방울소리를 듣는다. 그때면 가파른 어느 산정이나 바위우에 락연선생님이 서있는 모습을 그려보게 된다. 그의 모습은 영원히 젊어보인다. 그는 산기슭의 맑은 샘가에서 나를 보고 웃는듯 하였다. 나의 마음속 깊이에서는 가벼운 부름소리가 난다. 락연선생님, 제가 왔어요!” 이는 중국의 저명한 화가 황주(黃冑)가 1982년, 은사인 한락연(韓樂然)선생을 기념하여 쓴 글의 한 대목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아득히 펼쳐진 사막을 가는 락타대, 그것은 조선독립과 중국혁명의 중임을 떠메고 반일투쟁의 험난한 길에 나섰던 혁명가 한락연의 한생을 방불케 하였다.   중국의 저명한 화가 황주, 한락연의 학생 황주의 작품, 그의 작품에서는 한락연의 화풍이 잘 보여진다   중국 길림성 룡정촌(龍井村)에서 태여난 한락연(1898-1947)은 최초의 중국조선족 무산계급혁명가이며 탁월한 화가이며 국제반파쑈전선의 투사이다. 그의 원명은 광우(光宇)이고 자는 락연(樂然)이다. 지금 북경에는 그의 딸 한건립(韓健立), 아들 한건행(韓健行)이 살고있다. 중앙당학교 최룡수교수의 련락을 받고 우리가 한락연의 유가족을 찾아간것은 2003년 9월 18일 오전이였다.촬영사 김철기자와 력사고문 최룡수교수 일행 3명이 갔다. 북경시 방장(方莊) 방고원(芳古園)에는 한락연의 딸 한건립이 살고있었다. 남편 강기민(康冀民)씨는 외교관으로서 오문(澳門)문제 중국-뽀루뚜갈 련락소조 중국측 대표로 일하다가 리직한 분이고 한락연의 아들 한건행은 국가체육총국 체육신문업본사 대형행사센터의 부주임으로 사업하고있었다. 이들은 기자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한건립녀사는 차분하고 조용조용한 성격이였고 한건행씨는 스포츠사업을 하는만큼 성격도 활달하고 시원스러웠다. 서로 인사를 나누자 자연스럽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강기민씨를 제외하고 모두 조선족이였지만 한건립녀사와 한건행씨는 조선말을 못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어로 대화가 오고갔다.   한락연의 자화상   한락연 북경 유가족과 함께(좌로 두번째 딸 한건립, 네번째 아들 한건행) 2003년   한건립녀사는 다음과 같이 회억하였다. “아버지께서는 1947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1944년에 태여났으니깐 그때 네살이였지요. 한건행은 그때 두살이였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라면 마지막 신강으로 떠나실 때의 일뿐입니다. 아버지는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트럭에 앉아 신강으로 떠나셨습니다. 어린 나는 아버지를 따라가면서 함께 가겠다고 했거든요. 그러니 아버지는 다음엔 꼭 데리고 간다고 하시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자상한 이야기는 후에 어머니에게서 많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회억을 더듬으면서 이들 오누이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락연의 아명은 윤화(允化)였고 또 한소공(韓素功)이라는 별명을 쓰기도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가정이 가난했기때문에 그림공부를 하지 못하였다. 한락연은 어렸을 때 형제가 여럿이 있었지만 모두 페결핵으로 요절하였다. 때문에 한락연은 후에 자녀들의 이름자에 모두 건강하다는 건(健)자를 넣어주었다 한다. 나라가 독립 못하며 녀성들도 자립할수없다하여 딸한테는 일어설 립(立)자를 붙여주고 말한대로 행동에 옮기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들한테는 행(行)자를 붙여주었다고 한다. 어릴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한락연은 하학후면 묘지에 가서 나무가지로 땅에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가 1914년에 소학교를 졸업한후 선후로 전신국과 세관에서 일하며 집안살림을 보태지 않으면 안되였다. 세관에서 일할 때 한락연은 많은 외국서적을 접하게 되였으며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미술에 관한 전문서적도 찾아보면서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1919년 3월 13일, 중국 길림성 룡정에서도 조선의 3.1운동을 성원하는 성대한 군중시위가 있었다. 한락연은 이날 시위를 위해 교회당에서 밤새도록 프랑카드를 썼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다니면서 사람들을 련락하기도 하였다. 3월 13일, 만여명 시위자들과 함께 조선독립과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반대하는 구호를 소리높이 웨치던 그는 무고한 시위자들에게 총격을 가하는 일제의 만행을 직접 보게 되였다. 마침내 그는 만악의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소멸하고 젊음의 끓는 피를 조선독립과 민족해방사업에 기여할 결의를 다지며 고향을 떠나게 되였다. 1919년, 로씨야의 사회주의 10월혁명을 동경한 한락연은 로씨야로 갔지만 울라지보스또크의 많은 조선혁명자들이 중국 상해에 가자 그들과 함께 다시 상해로 갔다. 상해에서 한락연은 전차(電車)회사와 인쇄공장에서 일하는 한편 상해미술전과학교(上海美術專科學校)에 입학하였다. 그는 상해에서 늘 조선혁명자들과 접촉하면서 고려공산당 활동에 참가하였으나 조선혁명자들의 내부 종파투쟁과 암투에 큰 실망을 느끼고 말았다. (한건행) “1923년 아버지께서는 상해에서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후 1924년에 동북에 파견되였습니다. 아버지는 동북에서 사업을 시작한 첫 중국공산당원이라는 기재가 있습니다. 당사에는 심양 봉천 당지부 설립의 한사람. 조선쪽의 공산당과 어떤 인물들과 련락하는지 몰랐지만 로소비의 회억에 의하면 아버지께서는 상해에서 수요일이면 꼭 밖에 나갔다고합니다. 심양에서 심양미술전문학교(지금 심양로신예술학교) 미술학원을 설립하였습니다. 상해의 로소비, 구양여천을 초청해 회화와 희곡을 강의한 학교였습니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당원들과 련락하기 위해 학교에 나가셨습니다. 그는 소자원을 당원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은행에서 대부금 맡아 운영하는 학교였습니다. 혁명활동으로 아버지가 외출하였을 때 빚 재촉이 와서 학생들이 아버지 방에서 트렁크를 열어보았는데 거기에는 전부 맑스주의저작과 혁명서적이였다고합니다. 그리고 일본 파쑈의 죄행, 조선의 곤혹 이 같은 내용의 서적들이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인 것을 알게 되었다고합니다.”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이 상해에서 창건되였다. 당시 중국공산주의자 채화삼(蔡和森)이 창간한 《향도(向導)》잡지의 애독자였던 한락연은 적극적으로 중국공산당에 접근하였으며 1923년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 되였다. 이해 말, 우수한 성적으로 상해미술전과학교를 졸업한 그는 당의 파견을 받고 중국 동북으로 가게 되였다.   한국 동아일보에 실린 한락연의 기사 성경시보에 실린 한락연의 미술활동 관련 기사 조기 공산주의 간행물인 향도 최초의 개인 유화전을 했던 곳 할빈 보육중학교, 한락연은 할빈에서 보육중학교 미술교원의 신분으로 활동했다 한락연이 꾸린 락천사진관이 있었던 곳 흑룡강 치치할시 룡사공원에 있는 격언정, 한락연이 격언정을 설계했다 한락연(한행지)를 시정국 공정과 과원으로 임명한다는 임명장   1924년 봄, 봉천(奉天 심양)에 도착한 한락연은 기독교청년회(基督敎靑年會)의 간사 염보항(閻寶航)을 알게 되였다. 그는 염보항의 도움으로 개인 유화전시회를 열었고 또 소남관(小南關) 풍우대(風雨臺)부근에 사립미술전과학교를 세웠다. 기독교청년회와 미술전과학교는 한락연이 혁명활동을 전개하는 좋은 장소였다. 그는 수많은 청년들을 조직해 맑스주의 리론을 학습하게 하였으며 사회 각계인사들과 접촉하면서 혁명을 선전하였다. 1925년에 그는 당에서 파견한 임국정(任國禎), 오려석(吳麗石)과 함께 심양의 최초로 되는 당지부를 설립하였다. 한락연이 이끌어준 소자원(蘇子元) 등 청년들도 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심양의 중국공산당 조직사업을 훌륭히 완수해 내였다. 1925년 여름, 한락연은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로씨야 울라지보스또크로 갔다가 다시 할빈에 남아 사업하게 되였다. 그는 할빈 보육중학교(普育中學) 미술교원의 신분으로 활동하면서 초도남(楚圖南), 조상지(趙尙志) 등과 함께 청년독서회, 평민야학을 조직하고 지식인과 청년들에게 공산주의사상을 전수하였다. 이 시기 한락연은 수분하(綏芬河)에 중국공산당 련락소를 만들었으며 또 치치할시 룡사공원(龍沙公園)의 격언정(格言亭)을 설계하였다. 1929년 가을, 한락연은 동북으로부터 상해를 거쳐 멀리 프랑스로 떠났다. 그는 예술의 전당으로 불리우는 프랑스에서 예술의 새로운 경지를 찾아보려고 했던것이다. 한락연이 프랑스에 도착했을때는 서방의 전반 자본주의사회가 극심한 경제공황을 겪던 시기였다. 프랑스 리옹에 도착한 한락연은 거리에서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프랑스에서 류학하는 중국의 화가들인 상서홍(常書鴻), 려사백(呂斯百)을 알게 되였고 또 리옹의 중국호텔에서 개인 회화전시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비록 성숙되지 못한 그림들이였지만 그의 과감한 행동과 짙은 동방적인 회화기법은 사람들의 긍정을 받았고 또 려비도 얼마간 마련하게 되였다한다. 그후 한락연은 프랑스 남부도시 니스에서 한동안 생활하다가 1931년, 빠리에서 예술대학에 입학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예술의 조예를 깊이 하는 동시에 프랑스 공산당 중국언어지부에 가입하고 국제로동운동의 경험을 학습하였다. 이해 그는 유럽 각국을 다니면서 시야를 넓혔고 여러차례 회화 개인전을 가졌다.   프랑스 류학시절 작품활동을 하고있는 한락연 빠리 거리에서 사생하고있는 한락연 빠리 개선문의 부조 유화(한락연) 항일전쟁이 폭발하자 양호성장군 등과 함께 귀국하는 배에서(뒷줄 좌로 다섯번째가 한락연), 이 사진은 온가보 총리의 백부 온붕구가 수장한 사진이다   1937년 7월, 일본제국주의는 로구교사변을 일으켜 중국대륙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을 시작하였다. 이딸리아에서 이 소식을 접한 한락연은 급급히 빠리에 가서 빠리 석간신문사의 촬영기자 신분으로 반파쑈국제선전사업에 종사하였다. 얼마후 그는 항일전쟁의 일선에서 사업하려는 열망을 안고 귀국의 길에 올랐다. 그는 서안사변 주인공의 한사람인 양호성 장군과 함께 귀국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6    중국항일전쟁시기 조선지사들 댓글:  조회:6241  추천:2  2012-09-18
완평성 담밑의 경종석에는 중국을 침략한 일군의 만행이 적혀있다     1937년 “7.7”사변을 통해 일본은 중국대륙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을 발동하였고 중국인민의 전면항전도 개시되였다. “7.7”사변때 로구교를 수비하면서 가장 먼저 일본침략군과 싸운 중국군에는 일찍 중국의 여러 군관학교를 졸업한 조선인 장병들이 많았는데 이들도 중국군민과 함께 처음부터 정면전장에서 일본침략군에 맞써 용감히 싸웠다. 북평에서 반일활동에 종사하던 김자렬(1897~1961)은 1924년에 리대소의 소개로 풍옥상 장군의 국민군 간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졸업한후 북벌과 중원대전에 참가하였다. 그는 장자충장군의 수하에서 180사단 참모장을 맡았었다. 항일전쟁이 시작된후 그는 부대를 따라 로구교항전에 참가했을뿐만 아니라 대아장전역, 서주전역에 참가했고 또 조양, 남과점 전투에도 참가했다. 장자충장군이 순국한후 그는 부대를 떠났다. 풍옥상의 서북군에는 김자렬외에 또 강석훈(1896~?)이라는 조선인 군관이 있었다. 그는 29군 113려단 소좌부관으로 있었다. 1937년에 그는 랑방에서 228퇀 기관총련을 거느리고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많은 적을 소멸하였다. 그후 그는 림기, 사자령 등 전투에 참가하여 대아장 전역의 승리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중국의 전면항전이 개시된에 |따라 국공량당이 항일통일전선을 결성하였다. 이는 중국내 조선의 여러 당파들의 단합을 촉성하였다. 1937년 11월, 조선공산주의자와 공산주의를 동조하는 좌익당파들이 남경에서 조선민족전선련맹을 결성하였다. 1938년 10월 10일 무한보위전의 포성이 울부짖는 가운데 중국 관내 조선민족의 첫 무장대오인 조선의용대가 정식 창립되였다. 조선의용대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에 소속되여 조선의용군 지도위원회의 령도를 받았다. 지도위원회는 4명의 중국관원과 조선민족혁명당을 대표하는 김원봉, 조선민족해방동맹을 대표하는 김규광, 조선청년전위동맹을 대표하는 김학무, 무정부주의자 류자명으로 구성되였다. 의용군 창립시 대원수는 120명이였다. 김원봉이 총대장을 맡고 산하에 두개 구대를 설치하였는데 1구대 구대장은 박효삼이고 정치지도원은 왕통이였으며 제2구대 구대장은 리익성이고 정치지도원은 김학무였다. 이듬해 대오는 한배 더 늘었기에 제3구대를 설립하였는데 구대장은 한지성이 맡았다. 조선의용대는 창립후 곧 무한보위전에 참가하여 선전, 구조, 정보수집을 비롯한 사업을 진행하였다. 이 부분은 중국의 유명한 문인 곽말약의 에서 일부 언급된다. 무한이 함락된후 조선의용대 대원 대부분은 여러 전구에 나뉘여 적정을 수집하고 일본군 정보를 해독하였으며 포로를 심문하고 항전을 선전하는 사업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국민당이 중경으로 천도하자 조선의용대 본부와 한국 림시정부가 령도하는 여러 조선인 당파들은 모두 광서 계림을 거쳐 중경으로 갔다.   무한에서 창립된 조선의용대 기념사진 상해 로신공원(홍구공원)의 윤봉길 의사 의거지 기념석 남경근교의 천녕사(조선혁명군정학교가 있었던 곳) 한국 림시정부 주석 김구 조선의용대 대장 김원봉 중경시 기강현 실험소학교(7당 통합대회가 있었던곳)     항일전쟁시기 김구가 령도한 한국 림시정부는 국민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1932년 4월 29일, 김구가 이끄는 애국단 성원 윤봉길이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군 파견대 사령 시라가와 대장, 상해 일본 거류민 단장 카와바다를 폭사하였다. 윤봉길의사의 의거가 있은후 국민당과 장개석은 김구와 한국 림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기 시작하였으며 한국 림시정부가 추천하는 조선청년들을 여러 군관학교에 받아들여 학습하고 훈련하게 하였다. 장객석은 중경부근에 도착한 김구와 한국림시정부에게 조속히 통합대회를 소집할것을 요구하면서 통합되여야만 더 확실히 지원할수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여러 당파들은 중경부근의 기강현에 모여 통일대회를 열었다. 좌파인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련맹, 조선청년전위동맹,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한국 국민당, 한국 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7당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치렬한 변론을 진행했지만 끝내 합의를 보지 못했다. 장개석의 거듭되는  촉구하에서 좌파 수령 김원봉과 우파 수령 김구는 1939년 5월에 공동선언을 발표하면서 협력과 단합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국민당정부의 수락을 받고 중경에 한국림시정부 사무기구를 두고 한국 광복군을 창건하기도하였다. 하지만 사실 중국내 조선 여러 당파들은 줄곧 진정한 단합을 이루지 못했다. 유감이 아닐수없다.   1941년 1월 1일 조선의용대 부총대장이며 제1지대 지대장인 박효삼과 정치 지도원 윤세주가 1지대와 3지대 대원들을 거느리고 민생호 륜선을 타고 중경을 떠나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갔다. 그들은 주은래와 중경 팔로군 판사처의 도움을 받았기에 순조롭게 한국 림시정부와 중국국민당을 떠나 중국공산당과 팔로군을 찾아가게 되였다.   조선의용대 주력이 장강삼협을 지나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갔다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제2차 대회가 있었던 곳(하북성 섭현) 조선의용군 주둔지(하북 섭현) 조선의용군 무명렬사묘지를 지킨 현지 로인 대적구호를 쓰고있는 조선의용군 대원 대적 함화를 하고있는 조선의용군 조선의용군 사령원 무정   조선의용대는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도착한후 조선청년련합회를 조직하고 조선청년 혁명학교를 꾸렸다. 1942년 7월 14일, 하북성 섭현 중원촌에서 조선청년련합회 제2차 대회를 열었다. 회의에서는 화북조선독립동맹을 창립하고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칭하였다. 이때로부터 조선청년련합회는 조선독립동맹 당으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되였다. 김두봉, 무정, 최창익, 박효삼, 김학무, 채국번이 독립동맹 본부 집행위원을 맡고 김두봉이 집행위원회 주임을 맡았다. 무정은 조선의용군 사령으로 박효삼은 화북지대 지대장으로 임명되였는데 이때 대오는 2백여명이였다. 태항산에서 조선의용군과 파로군은 어깨겪고 싸우면서 적후 선전활동, 반포위 토벌투쟁을 진행하였다.   1942년 12월 11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제2대는 대장 김세광의 인솔하에 하북성 석가장부근의 원씨현에 가서 선전활동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호가장에서 군중집회를 열고 항일투쟁을 선전하였다. 대원들은 강연을하고 시사보고를 했으며 또 군중들에게 춤과 노래를 선보이기도하였다. 그리고 담벽에 선전표어를 써놓았다. 하지만 이날 밤 그들은 뜻하지 않게 백여명 일본군과 괴뢰군의 포위습격을 받았다. 김세광 대장은 손일봉, 박철동, 한청도, 김학철을 거느리고 대원들을 엄호하면서 철수하였다. 손일봉은 탄약이 떨어지자 덥쳐드는 적을 기다렸다가 수류탄을 터쳐 7,8명 적을 소멸하고 희생되였다. 총칼로 적과 싸우던 박철동은 마지막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적의 총칼에 찔려 희생되였다. 한청도 역시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적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수류탄을 터치며 희생되였다. 이와 같이 엄호를 맡은 대원들이 영용하게 잘 싸웠기 때문에 대부분 대원들은 마을을 빠져나와 지원하려 달려온 팔로군과 회합할수있었다.  팔로군의 백퇀대정은 일본침략군에게 침중한 타격을 주었다. 실패를 달가와하지 않는 일제는 1942년 5월에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대한 미친듯한 포위토벌을 감행하였다. 적 선견대는 현지 백성으로 분장했기 때문에 쉽게 근거지에 접근해 팔로군 전선총부가 있는 료현으로 공격해왔다. 상황은 아주 위급했다. 팔로군 본부 참모장 좌권은 팽덕회 부총사령원과 전투력이 없는 천여명 후근일군을 신속히 대피시킨후 직접 경위부대와 조선의용군을 거느리고 적을 막고싸웠다. 조선의용군 박효삼 대장은 백여명 대원들을 거느리고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우면서 수차 적을 물리쳤다. 이들은 싸우는 한편 점차 십자령부근으로 철수하였다. 전투는 점점 더 치렬하였다. 적은 비행기까지 동원해 십자령부근을 무차별 폭격하였다. 그리하여 팔로군 참모장 좌권이 폭격에 희생되고 경위부대와 조선의용군은 분산 철수하였다. 철수도중 조선의용군의 주요 간부 진광화와 윤세주도 장렬히 희생되였다. 전투가 끝난후 성대한 장례식이 있었고 진광화와 윤세주 렬사는 섭현의 좌권장군 묘소와 얼마떨어지지 않는 해빛밝은 언덕에 안장되였다. 호가장 전투가 있었던 원씨현 혹장마을 진광화와 윤세주 렬사의 묘소(태항산, 하북 섭현) 조선의용군 기념관의 진광화와 윤세주 렬사 사적소개(하북 섭현) 조선의용군이 남긴 대적구호, 아직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하북 섭현)     항일전쟁시기 혁명성지 연안은 줄곧 전국 혁명지사와 뜻있는 청년들이 지향하는 곳이였다. 조선청년들도 다투어 연안에 갔는데 거기에는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를 창작한 인민의 음악가 정률성(1918~1976)도 있었다. 정률성의 맏형 정효룡과 둘째형 정충룡은 일찍부터 일경의 눈을 피해 중국에 건너와 중국혁명에 참가하였으며 공산당에 참가하였다. 맏형은 투쟁중 불행히 일경에게 체포되여 옥사하였고 둘째형은 국민혁명군에 참가하여 북벌전쟁에서 희생된것으로 전해지고있다. 정률성의 셋째형 정의은도 조선의렬단의 성원으로 있었다. 형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정률성은 1933년에 중국남경에 와서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졸업후 그는 진보적인 “5월문예사”에 참가해 자기의 예술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상해와 남경에서 정률성은 오랜 조선혁명가 김규광, 김산, 박건웅을 알게 되였다. 그의 누나 정봉은은 박건웅과 결혼하기도하였다. 항일전이 본격 발발한후 정률성은 1937년에 김규광, 박건웅 등의 도움으로 얀안에 가게 되였다. 연안에서 그는 로신예술학원을 다니면서 “연안송”, “팔로군 대합창”을 창작하였다. 이 가운데 팔로군 대합창의 “팔로군 행진곡”은 해방후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지정되였다.   항일전쟁시기 연안을 찾아오는 열혈청년들 음악가 정률성 연안 라가평의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 기념비   1944년말, 연안의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본부는 중국내 조선인을 단합시켜 일제와의 최후의 결전을 치르고 항일전쟁 승리후 아름다운 조선을 건설하기 위한 정치과 군사인재를 양성할 필요를 느꼈다. 그리하여 연안에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세우기로하였다. 태항산항일근거지의 2백여명 조선의용군 대원들은 박효삼을 따라 연안에 도착해 연안의 조선청년들과 회합하였다. 이어 전국 여러 항일근거지에서도 조선청년들이 속속 연안에 모여왔고 쏘련에서 륙학하고 돌아온 주덕해, 주춘길, 방호산등과 함께 조선혁명군정학교 건교를 준비하였다. 1945년 2월 5일, 조선혁명군정학교 창립대회가 연안 라가평에서 성대히 거행되였다. 주덕과 서특립이 경축대회에 참가하였다. 조선혁명가 김두봉이 교장을 맡고 박일우가 부교장을 맡았는데 학교 학원수는 280여명이였다. 이시기 각지 조선혁명력량은 모두 독립동맹 분맹과 군정학교 분교의 이름으로 발전되고있었다. 팔로군 제1임 포병퇀장 무정이 령도한 태항산 조선혁명군정학교 학원수는 293명에 달했고 독립동맹 산동분맹의 리명이 령도한 조선혁명군정학교 산동분교 학원수도 200명에 달했다. 그리고 진찰기분맹 리대성이 령도한 조선의용군은 백여명이나 되였고 신사군쪽에도 화북항일군정대학 제5분교 왕신호(김웅)가 령도한 백여명 조선의용군이 있었다.    
5    조선족,해방전쟁시기 공적 댓글:  조회:11483  추천:3  2012-09-04
중국조선족의 대표적인 집거지인 연변조선족자치주도 이젠 창립 60주년을 맞이하였다. 자치주 창립을 경축하면서 조선족의 혁명투쟁사를 잠시 생각해 보게 된다. 조선지사들이 중국경내에서 광범한 조선민족을 이끌고 중국군민과 어깨겯고 싸우면서 중국공산당을 따라 승리에서 승리에로 나아간 빛나는 력사적 공적은 대체로 세개 부분으로 나누어 볼수있다. 하나는 중국 대혁명시기이고 다른 하나는 항일전쟁시기이며 또 해방전쟁시기이다.   해방전쟁시기의 공적   1945년 8월 6일,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입하였고 8일에는 쏘련군이 동북으로 출병하였다. 대세가 기울렀음을 판단한 일본천황은 라지오방송을 통해 이른바 항복조서를 선독하였다. 9월 3일 태평양 미군 군함 미수리호에서 일본은 정식 항복서에 서명함으로써 동맹국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1945년 8월 11일, 주덕총사령은 제6호 작전명령을 하달해 조선의용군 사령 무정과 부사령 박효삼, 박일우에게 제6호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즉 소속 조선의용군을 거느리고 동북으로 진출하는 팔로군 각부대와 함께 동북으로 출병해 일본군과 괴뢰군을 소멸함으로써 조선인민의 전적인 해방과업을 완수하라고하였다. 명령에 따라 기동의 주연이 가장 먼저 조선의용군 백여명 대원을 거느리고 팔로군 기열료 부대를 따라 출발하여 9월에 심양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연도에서 계속 조선청년들을 받아들여 입대시켰는데 심양에 도착할때 이미 4백명 정도 되였다. 심양에서 이들은 심양에서 조직된 조선의용군 독립지대와 합쳐 천여명 규모의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를 편입하였다. 관내 연안과 태항산의 조선의용군 주력 그리고 신사군의 조선의용군들도 선후하여 심양에 도착하였다. 심양에 모인 조선의용군은 쏘련 10월혁명 기념일을 경축하고 성대한 군인대회를 열었다. 대회 결의에 따라  김두봉, 무정, 최창익, 한빈을 비롯한 소수간부들이 먼저 조선에 가고 기타 간부와 조선의용군은 계속 중국 동북에 남아 조선주민을 보호하고 단합시키기로 하였다. 군인대회 결의에 따라 조선의용군은 3개 지대로 나뉘여 남만, 동만, 북만으로 진격하였다. 김웅과 방호산이 2천명 규모의 조선의용군 제1지대를 거느리고 남남에 남아 투쟁하기로 하고 박일우와 리익성이 천명에 달하는 조선의용군 제5지래를 거느리고 동북의 조선인이 가장 많이 집거해있는 동만(연변)으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북만은 이미 군창건 기반이 닦아졌기 때문에 주덕해를 비롯한 19명 간부를 파견해 조선의용군 제3지대를 편성하도록 하였다.   주덕총사령의 명령에 따라 동북으로 진군하고있는 태항산의 조선의용군 대원들   심양에서 군인대회를 열고있는 조선의용군(력사사진)   조선의용군의 호소에 따라 동북각지 조선청년들이 용약 공산당부대에 참가하였다.   심양 오가황소학교의 조선의용군 군인대회 개최지 옛터 기념비   할빈부근 배극도, 조선의용군 제3지대 편성지를 설명하고있는 할빈 사학자 서명훈   조선의용군 제3지대 정위 주덕해(연변 초대 주장 겸 주당위 서기) 항일간부 김응삼(하북 로태농장에서 탈출해 조선의용군에 가입, 동북에 온후 련지도원을 담임)   항일간부 강재렬(하북 로태농장에서 조선의용군에 가입, 동북민주련군 제3종대에서 근무)   항일간부 최명세(북평에서 조선의용군에 가입, 동북에 온후 련장직을 맡음)   항일간부 김현태(상해에서 신사군의 조선의용군에 가입, 동북진출후 선전사업)   항일간부 최강(연변으로부터 관내에 가 조선의용군에 입대, 동북에 온후 조선의용군 제1지대 퇀급 간부로 사업)   한편 쏘련군과 함께 동북에 들어온 88려단에는 많은 조선인이 있었다. 9.18사변후 동북에서 간고하게 항일하던 동북민주련군은 조직적으로 국경을 넘어 쏘련으로 철수하였으며 그곳에서 쏘련 원동방면군 제88려단으로 편성되였다. 동북항일련군 출신의 이들은 동북각지에 아주 익숙하였기 때문에 부분적인 조선혁명가들은 직접 조선으로 가지 않고 동북에 남아 중국공산당을 도와 사업하였다. 조선인 강건(강신태)는 연길로 가서 쏘련군의 도움으로 연변경비사령부를 설립하고 조선인 경비부대를 창설하였따. 김광협은 목단강에 가서 고려경찰대를 조직하여 목단강군구 창설사업을 시작하였다. 국민당 장개석은 공산당의 심상치않은 움직임을 그냥 지켜볼수없었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중쏘조약에 따라 쏘련군의 손으로부터 동북 행정대권을 그냥 접수하면 될줄 알고있었지만 공산당은 이미 동북에 발을 들여놓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고있엇던것이다. 그는 급히 두률명을 시켜 국민당 최정예부대를 거느리고 동북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동북에 도착한 림표는 동북의 팔로군과 신사군을 통솔하였지만 부대가 너무 흩어져 전투력을 일시 전투력을 형성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동북의 한족들은 대부분 국민당군을 정부군으로 알고있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공산당은 갑자기 군중기반이 없게 되였다. 림표는 할수없이 얼마안되는 부대롤 국민당군과 싸우면서 한걸음한걸음 철수하였다.   리홍광(1910~1935), 리홍해, 리의산이라고도 한다. 조선경기도 룡임군 단삼동에서 태여났다. 리홍광은 남만 항일유격대의 주요 창시자이며 동북항일련군 지휘부 참모장으로 있었다. 1935년 5월 12일, 불행히 전사하였다.   허형식(1909~1942), 동북항일련군 고위 지휘자로서 리희산이라고도 한다. 동북항일련군 제3군 군장 겸 제12지대 정치위원을 맡았고 송눈평원에서 유격전을 진행함으로써 란서 풍락진 전투의 승리를 거두기도하였다. 1942년 8월에 경성 청봉령에서 일제와 싸우던중 불행히 희생되였다.   주보중(가운데)을 따라 동북에 온 강신태(좌)와 김광협(우)   항일련군의 호소하에 적극 동북민주련군에 입대하고있는 동북의 조선청년들   국민당 정예부대가 동북에 들어오자 쏘련 주둔군은 심양을 국민당 행정관원들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팔로군과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심양을 내주게 되였다. 제1지대는 심양을 떠나 남만 각지의 조선인을 보호하는 동시에 열혈청년들을 선동해 적극 부대를 확대하여 통화에 이르렀을때 이미 만명규모를 갖춘 대부대로 되였다. 장시기 일제의 시달림을 받아왔던 동북의 조선인들은 조선의용군을 보자 “우리의 군대”라고 하면서 크게 신뢰했으며 젊은 자녀들을 다투어 조선의용군에 입대시켰던것이다. 1지대는 남만에서 비교적 완정한 민족사업과 요육체계를 형성하였고 공산당을 도와 각곳에 민주정권을 세웠다. 통화 일본잔여세력의 폭동을 진압한후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리홍광지대로 개칭하였으며 자질이 좋은 대원들을 한개 중대 한개 중대씩 남만의 동북민주련군 주력부대인 제3종대에 보냈다. 주덕해는 할빈에 도착한후 배극도에서 조선의용군 제3지대를 편성하고 팔로군 359려를 도와 목란, 방정, 연수, 상지 등지에서 싸웠으며 우수한 조선청년들을 뽑아 359려에 보냈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연변에 도착한후 동북항일련군 간부들이 조직해놓은 조선인부대와 합쳐 동만군구 경지 제1려를 편성하였다. 제1려는 산하에 제1퇀, 제2ㅊ퇀, 제3퇀을 두었다. 한편 이들은 민주정권을 세우는 한편 토비숙청을 진행하여고 토지개혁을 진행하였다. 연변 광범한 조선인 군중들은 조선의용군 제5지대와 항일련군 간부들의 두리에 굳게 뭉쳤기 때문에 연변은 신속히 공산당의 가장 믿음직한 근거지의 하나로 건설되였다. 그리고 제5지대가 길림을 지날때 일부 간부를 남겨 조선의용군 제7지대를 건립하도로 하였다. 이들은 길림보안총대의 조선인대대와 함쳐 조선의용군 제7지대를 편성했다. 박훈일이 7지대 대장을 맡았고 또 화전현에 군정학교를 세워 조선청년들을 학습시켰다. 동북의 조선인부대는 동북민주련군 서렬에 포함된후 조선쪽의 수요로하여 대량의 고위간부들이 귀국하였다. 그리하여 조선독립동맹도 민주동맹으로 개칭하고 동북경내 조선인 민중들을 이끌고 공산당을 따라 토지개혁을 통해 땅의 주인이 되고 가각적으로 중국적을 가진 조선족으로 되기 시작하였다. 1947년의 통계에 따르면 동북경내 조선족인구는 당시 110만이였다. 조선족인구의 80%이상이 동만 연변에 집중되여 있었기에 연변의 군중기반은 아주 좋았다. 왜냐하면 20세기초 공산당조직이 생기면서 항일련군과 반일조직들은 줄곧 동만에서 활동하였기에 당은 줄곧 광범한 조선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있었다. 때문에 일제가 투항한후 동만의 공산당조직은 신속히 회복되기 시작하였는데 1947년의 통계를 보면 연변 2057명 당원 중 1120명 조선족 당원이 있어 반수이상을 차지하였다. 1948년, 연변의 3175명 당원중 조선족 당원수는 2579명으로서 총수의 80%를 차지하였다. 때문에 광범한 조선족 군민들은 동북에 방금 발을 들여놓은 팔로군과 신사군의 가장 믿음직한 뒷심이 되였고 연변을 비롯한 조선인 집거지는 공산당의 가장 훌륭한 후방근거지로 되였다. 1946년 미국제무기로 무장한 국민당군은 사평까지 공격해와 민주련군과 치렬한 접전을 치렀다. 사평전투에 배합하기 위해 북만과 동만 각부대는 쏘련군의 철군 기회를 빌어 신속히 할빈과 장춘을 차지하려하였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할빈 점령군속의 조선인부대를 봉기하도록 설득하였고 또 조선인 로동자들을 동원해 폭동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공산당부대는 별로 힘 드리지 않고 할빈을 차지할수있었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를 위주로 편성한 조선퇀은 하경적이 지휘하는 동남종대에 편입되여 조리회가 거느린 동북종대, 양국부가 지휘한 서남종대와 함께 장춘을 공격하였다. 장춘을 쟁탈하는 혈전에서 조선퇀의 박락권 퇀장과 고생호 부퇀장이 선후로 희생되였다. 하지만 전사들이 두려움없이 잘 싸웠기에 동북민주련군 각 부대는 괴뢰만주국 중앙은행을 점련하고 장춘쟁탈전의 승리를 이룩하였다.   장춘쟁탈전에 참가한 김응삼 로인이 괴뢰만주국 중앙은행 청사를 공격하던 전투를 설명하고있다.   장춘쟁탈전을 앞두고 련지도원 김응삼(좌)이 겸위원과 통신원과 함께   적아쌍방의 력량이 현저하게 차이가 있었기에 민주련군 주력은 한개원 남짓이 싸우다가 결국 사평에서 철수하고말았다. 팽팽하던 대치국면이 무너지자 상황은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악화되였다. 림표는 련속 장춘시와 길림시를 내주면서 송화강 이북으로 주력을 철수시켰다. 길림성 당위와 정부도 신속히 로야령을 넘어 연변으로 옮겼다. 그리하여 조선족 인구가 80%이상을 차지한 연변은 동만의 정치, 경제, 군사 중심지로 되였다. 4차의 림강보위전시기 남만의 리홍광지대는동북민주련군 독립 4사로 편성되여 동북민주련군 제3종대와 제4종대에 배합해 간고한 적후 작전을 펼쳤다. 그들은 각지 정부기구를 보호하고 적 거점을 제거하였으며 적의 유생력량을 분산해 하나하나 적을 격파하였다. 1947년 3월에 독립 4사는 민주련군 제3종대 8사 22퇀과 함께 휘남현성을 해방하였다. 이 싸운에서 조선족 전투영웅 조성두는 폭약을 안고 적의 화점을 폭파함으로써 자아희생적인 폭파영웅으로 되였다.   폭파영웅 조성두의 묘소(료녕성 휘남)   림강 렬사릉원에 모셔진 조선족 렬사의 묘비   동만근거지를 보위하기 위해 동만의 군민들은 일치 단결되여 영용히 싸웠다. 조선족 장병을 위주로한 동만독립제1사(조선퇀), 동만 독립 3퇀과 독립 6퇀 그리고 조선의용군 제7지대로 개편한 72퇀은 길림과 장춘주변에서 간고한 유격전, 대치전을 진행하면서 국민당 60군을 견제하였다. 이로써 국민당군은 줄곧 로야령을 넘어 연변쪽으로 공격하지 못했고  연변의 백성들은 전력으로 생산에 열중해 대량의 쌍과 탄약, 피복을 끊임없이 전선에 수송하였으며 전선의 부상자들을 연변에 실어다 치료해주었다. 림강보위전과 강남 직격작전이 끝난후 동북민주련군은 대규모의 반격을 시작하였다. 하기, 추기, 동기 동세가 련속 펼쳐졌으며 광범한 조선족 인민들은 생산을 발전시켜 유력하게 전선을 지원하였을뿐만 아니라 우수한 자녀들을 다투어 부대에 입대시켰다. 통계를 보면 해방전쟁시기 63000여명 조선족 청장년이 참군하였는데 이는 조선족 17명당 한명이 입대한 셈이다. 특히 연변 5개현은 34855명이 참군하였는데 이는 연변 참군총수의 85%를 점한다. 197년 9월 10일, 동북민주련군 주력부대중 조선족 장병이 가장 많은 제10종대가 정식 편성되였다. 북만 조선의용군 제3지대가 수송한 조선청년들로 제10종대 28사를 편성하고 서란, 영길, 유수, 교하 등지 조선족 보안부대로 제10종대 29사를 편성하였으며 조선족 장병이 반수이상인 동만독립사로 제10종대 30사를 편성하였다. 1948년초, 조선족 장병이 다수를 차지하는 동만 독립 3퇀과 6퇀, 71퇀으로 독립 6사를 편성하였다. 1958년 4월에는 길남 73퇀 1700명 조선족 장병과 송강군구 제8퇀, 목단강군구 제14퇀의 2200명 조선족 장병을 합쳐 독립 11사를 편성하였다. 동북에서 국공량당의 대결전인 료서전역때 독립 6사와 독립 11사는 기타 독립사단과 함께 길림, 장춘부근에서 싸우다가 장춘을 포위하여 최종 장춘을 해방하였다. 동북민주련군 제10종대는 흑산, 대호산에서 료요상 병촨을 성공적으로 저지함으로써 료서 대섬멸전을 담보하여 불후의 공적을 쌓았다. 이 가운데 10종대 28사 조선족 반장 최성걸은 적의 포화에 찢겨진 자기의 왼다리를 절단해버리고 계속 적과 싸움으로써 “계급의 강골”로 불리웠다. 그의 사적은 오늘까지도 료심전역 기념관에 전시되여있다. 줄곧 심양주변에서 적을 견제해 싸우던 독립 4사의 조선족 장병들은 신속히 남하해 기타 부대와 함께 심양을 공격하여 심양을 해방하는데 기여하였다. 동북이 해방된후 독립 11사는 장춘 수비임무를 맡았고 독립 4사는 심양 보위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독립 6사는 주력부대인 제6종대에 편입되여 중국인민해방군 156사로 되여 관내로 진입해 전국을 해방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사평해방전투에서 희생된 조선족 렬사 김동원(사평 렬사기념관)   흑산 저지전의 101고지 기념비   10종대 28사 강철8련 명세서(김교진 지도원 정리)   료심전역 기념관의 최성걸 렬사의 동상   최성걸렬사가 사용했던 기관단총   료심전역기념관의 강인복 렬사 동상   우수한 호사장 강인복 렬사 유상    료심전역기념관 렬사담벽에 새겨진 조선족렬사들 명단(일부분)   연변의 혁명렬사기념비   동북이 해방된후 제4야전군 조선족장병들은 선후로 평진전역, 장강 도하작전, 중경해방전투, 해남도전역을 비롯한 수많은 전투에 참가해 공화국 창건을 위해 마멸할수없는 공적을 세웠다. 조금도 과장이 없이 연변은 그야말로 산마다 진달래꽃이 피고 마을마다 렬사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영원한 발전과 번영이 있으라!
4    대혁명기시의 공적 댓글:  조회:5769  추천:2  2012-09-02
   중국의 조선족이 대량 중국동북 각지에 이주해오기 시작한 력사는 백 50여면이라고 볼수있다. 20세기초에 이르러 그 수가 2백만에 달했다. 우리민족 선인들은 신근한 로동으로 동토대인 동북에서 황무지를 일구고 벼농사에 성공함으로써 동북의 생산력을 크게 추진하였다. 항일전쟁시기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침략전쟁을 위한 대량의 물질적 자원을 비축하기 위해 조선반도로부터 대량의 조선농민을 중국동북이거나 화북 발해 연해지역으로 강제로 집단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하거나 광산개발, 도로수건, 철도부설을 비롯한 고된 로동을 시켰다. 1910년, 일제가 전반 조선반도를 침점하자 국권을 상실한 조선의 지사들은 중국으로 와서 반일투쟁과 혁명의 길을 찾았다. 이들은 중국내 광범한 조선주민들을 단합시켜 불효불굴의 의지로 반일투쟁을 진행하였다.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이들은 또 중국공산당을 따라 장개석 독재정부를 전복하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창립하기 위해 영용히 싸웠다. 조선지사들이 중국경내에서 광범한 조선민족 주민들을 이끌고 중국혁명에서 중국인민과 어깨겯고 싸우면서 중국공산당을 따라 승리에서 승리에로 나아간 빛나는 력사는 대체로 세개 부분으로 나누어 볼수있다. 하나는 중국 대혁명시기이고 다른 하나는 항일전쟁시기이며 또 해방전쟁시기이다.   대혁명시기의 공적    1910년 일본제국주의는 이른바 “한일합방”을 통해 조선을 침탈함으로써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저락되였다. 이로부터 조선의 수많은 유지인사들은 국가주권과 민족의 독립을 위한 간고하고도 장기적인 반일투쟁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진정한 대중의 해방과 자유를 위한 혁명을 길을 탐구하면서 헌신적으로 싸우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중국에 와서 중국의 반제반봉건의 위대한 투쟁에 참여하였고 수억 중국인민과 함께 진리를 찾고 민족해방의 길을 모색하였다. 이들은 중국혁명의 승리는 곧 조선혁명의 승리를 가져올수있고 중국 항일전쟁의 승리는 필연코 일본제국주의의 멸망을 가져오고 조선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가져올것이라고 믿었던것이다.   독립운동가 신정(1879~1922)   1910년 신정(1879~1922)이 중국 상해로 왔다. 그는 “민생보”를 운영하면서 송교인, 진기미, 황흥을 비롯한 중국동맹회 중요인물들을 알게 되였고 이들의 영향을 받아 손중산의 삼민주의 사상을 접수하게 되였다. 1912년에 신정은 “동제사”를 만들어 광범한 조선지사들을 모으기 시작하였으며 송교인, 호한민, 교중개, 진과부를 비롯한 중국 동맹회 중요인사들의 힘을 빌어 대량의 조선청년들을 보정군관학교, 호북강무당, 운남륙군강무당 등 군사학교에 보내 현대화한 군사지식을 배우도록 하였다. 1916년에 운남륙군강무학당 제12기 기병과에 입학한 조선인으로는 배달무, 김정, 김세준(김자렬), 최진이 있었다. 이들은 가장 일찍 중국군사학교에서 공부하고 훈련받은 조선인이였다. 조선 3.1운동이 있은후 더 많은 애국지사들이 일경의 눈을 피해 중국상해에 모여들었고 상해에서 한국림시정부를 세웠다. 신정은 림시정부 법무총장, 외무총장, 국무총리 대리를 비롯한 직무를 맡았고 손중산과의 련계를 강화하였다. 손중산이 이끄는 중국 호국군정부는 한국 림시정부를 승인하였고 1921년 3일에 정식 외교관계를 설립하였다. 그후 신정은 한국림시정부의 무능함과 돌이킬수없는 분렬사태에 극도로 되는 실망을 가지고 1922년 국무총리에서 사임하였다. 이때 중국광동의 진형명도 반란을 일으켜 손중산의 혁명도 큰 위기를 겪고있었다. 중국의 신해혁명처럼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으로 일제를 조선에서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려던 신정은 이중 타격을 받고 극도로 되는 실망속에서 병으로 쓰러지고말았다. 그는 아예 치료를 거부하고 단식을 하던끝에 1922년 9월 5일 상해에서 별세하였다. 그는 사후 상해 만국공원에 안장되였다. 상해 만국공원의 만국공동묘소(이곳에 묻힌 조선의 독립지사들의 유해는 후에 한국에 봉환되였다)   3.1운동후 조선인민의 반일투쟁형식은 주로 한국림시정부와 중국동북의 여러 조선민족 무장에게서 체현되였다. 망국의 한을 지닌 조선의 애국청년들은 가산을 팔아 중국에 건너와서 조선인 집거지에 학교를 세우고 애국주의 교육을 진행하면서 무장투쟁을 준비하고있었다. 1920년 가을, 동북의 여러갈래 반일유격대들이 한데 모여 청산리에서 일본군 근 천명을 소멸하는 청산리 대첩을 이룩해냈다. 한편 상해림시정부의 항쟁주장은 줄곧 같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은 강대국의 이른바 위임통치에 환상을 걸고 외교구국을 주장하였으며 일부 사람들은 심지어 일본과의 타협까지 주장하였다. 주장이 달랐고 림시정부 내부의 파벌도 분립해 서로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싸웠다. 대부분 지사들이 리승만을 림시정부의 초대주석으로 추대하였지만 그는 멀리 미국에 있으면서 줄곧 상해에 와서 취임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수많은 반일지사들과 애국지사들이 큰 실망과 방황속에서 허덕일때 새로운 희망이 나타났다. 로씨야 10월혁명이 폭발해 봉건제국을 뒤엎고 참신한 사회주의 국가를 건립하였던것이다. 이로써 공산주의 사상이 신속히 중국대지에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공산주의자 리동휘(1873~1935)   1919년 9월에 조선공산주의자 리동휘(1873~1935)가 상해에 도착하였다. 그는 상해 한국림시정부의 활동에 참가하였다. 조선의 의병운동이 실패한후 리동휘는 로씨야 원동지구로 가서 1915년에 아시아지구 첫 공산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었다. 리동휘가 상해에 도착함으로써 림시정부는 새로운 활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1920년 리동휘는 려운형과 함께 상해 공산주의소조를 세웠고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재조직하면서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동북간도(연변)지구에 사람을 보내 공산주의소조를 세웠고 중국의 공산중의자들과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또 로어에 정통한 안병찬을 시켜 공산국제의 대표 위진스키를 데리고 중국 공산주의자 리대소, 진독수를 만나게 하였다. 이들은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도와 중국공산당을 창립하게 했다. 광주 황포도의 군관학교 기념관   무한 군관학교 옛터   무한 구관학교 광주 중산대학   대혁명시기 손중산은 “로씨야와 손잡고 공산당과 손잡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로써 광동성은 중국혁명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따라서 대량의 조선청년들도 광동성에 찾아왔다. 조선의렬단의 단원 강세우, 김성숙(김규광), 장지락(김산), 리영준, 최원, 서의준, 리활(이륙사) 그리고 조선 지식청년 마준, 김동주, 김원식 등이 중산대학에 와서 혁명리론을 학습하였다. 이때 의렬단 단장 김원봉은 단원들을 데리고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황포군관학교 총명책”을 보면 황포군관학교 조선인 교관과 학원을 찾아볼수있다. 제3기에 리빈, 차정신(김지일), 장성철, 리일태 등 4명이 있었고 제4기에는 강평국, 류원욱, 박효삼, 박건웅, 최림(김원봉), 양검, 전의창, 리우각, 권준, 리집중, 왕자량, 윤의진, 최영택, 김종, 리종원, 로일룡, 리기환, 오세진, 전홍묵, 백홍, 로세방, 박익제, 문선재, 로건 등 무려 24명이나 있었다. 제5기는 김호원, 안유재, 장흥, 장익 등 4명이다. 황포군교 건교초기 쏘련의 군사학교를 졸업한 조선인 강섭무가 포병훈련교관을 맡았다. 그리고 상해림시정부가 보낸 김철남이 제3교도단 소좌 부퇀장을 맡았고 조선인 손두환이 교장 판공실 부관을 맡았으며 운남강무학당을 졸업한 조선인 리계동이 부관을 맡았고 리검운(리철호)은 조교를 맡았다. 운남강무학당을 졸업한 조선인 양림은 기술조교로 있었고 쏘련 고문단의 조선인 양달부(량도부)가 포병교관으로 있었다. 제3기를 졸업한 리빈이 정치대대 구대장을 맡았다. 그리고 제5기에는 양림이 중좌 교관으로 있었고 오성륜, 채원개, 최추해, 안응근, 오명, 리일태 등 조선인 교직원이 있었다. 황포군관학교 제5기에 입학한 조선청년은 백여명이 되지만 4.12반혁명정변이 일어났기에 대부분 정상적으로 졸업하지 못하였기에 학생명책에는 김호원을 비롯한 4명밖에 없다. 황포군교의 조선인 교관과 학원은 대부분 “류, 양”반란을 평정하는 투쟁과 국민혁명군의 동정에 참가해 공훈을 세웠다. 특히 중좌 교관 양림과 소좌 구대장 최용건은 중국공산당이 장악한 첫 무장대오인 엽정독립퇀의 군관을 맡았다. 양림은 독립퇀 제3영 영장을 맡았고 최용건은 전부 조선청년으로 편성된 특무련 련장으로 있었다. 1927년 4월 12일 장개석은 공동연히 반혁명정변을 발동해 총부리를 공산당에게 돌렸다. 이로써 국공분렬이 초래되고 “로씨야와 손잡고 공산당과 손잡는다”는 손중산의 주장과 일치하게 제국주의와 본건주의를 반대한다던 대혁명은 최종 실패하고말았다. 대혁명이 위기에 처해있을때 중국공산당은 단연히 남창봉기, 추수봉기, 광주봉기를 발동함으로써 간고한 무장항쟁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국민혁명군에는 2백여명 조선인 장병들이 있었다. 이들은 남창봉기에 참가하였는데 엽정부대의 길림성 룡정사람인 박인과 흑룡강성 녕안의 김철강이 남창공원의 수관음청을 공격하는 전투에서 맹활약을 보였다. 그리고 흑룡강성 녕안의 방월성은 결사대에 참가해 천주교회당의 완고한 적을 소멸하였다. 하룡부대의 강석필, 김래준, 홍범기를 비롯한 조선인 장병들은 고루와 적 지휘부를 공격하는 치렬한 전투에 참가하였다. 김원봉과 조선의렬단 단원들은 하룡부대에 편입되여 남창봉기에서 싸웠다. 남창봉기가 실패한후 엽정을 비롯한 많은 공산주의자들은 다시 광주에 모여 공주봉기를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대혁명시기 광동에 모여온 대량의 조선청년들이 모두 이번 봉기에 참가하였다. 황포군관학교의 조선인 교관과 학원들 그리고 중산대학의 조선인 학생들은 광주봉기에서 중층 령도직을 맡았다. 1927년 12월 11일 아침, 봉기 총지휘인 엽정이 직접 황포군관학교 교도단을 거느리고 사하진과 연당의 주둔군을 공격하였다. 교도단 제2영 5련의 150명 장병은 모두 조선청년이였다. 련장은 조선인 박영(박근성)이였다. 이들은 30여명 적을 소멸하고 5백여명 적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사하진 전투를 신속히 끝냈다. 중산대학의 김산(장지락)은 황포군관학교 포병교관인 량도부와 함께 봉기군을 거느리고 연당의 적 포병진지로 달려갔다. 쏘련 고문단의 일원이며 황포군관학교 포병교관인 양도부는 장발규 부대에서 위망이 아주 높았다. 그는 연당에 도착하자 김산의 통역을 통해 적 포병진지의 병사들을 설득하였는데 2천여명이 무기를 놓고 투항하였다. 봉기가 시작된후 황포군관학교의 최용건도 특무영 제2련의 조선인 장병들을 거느리고 행동하였다. 그는 동북교구에서 지주무장을 격퇴한후 사하진에서 와서 교도단 2영 5련의 조선인 장병들과 함께 사하진을 수비하였다. 12월 13일, 적이 도처에서 반격해왔다. 조선인 장병들은 제때에 철수명령을 받지 못하고 봉기군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면서 간고하게 적과 싸웠다. 교도단 2영 5련 150명 조선인 장병들은 련장 박영의 지휘하에서 적과 최후까지 싸우다가 모두 장렬히 희생되였다. 광주의 “중조인민 혈의정”의 기념비에는 이들의 영웅적 사적이 영원히 새겨져있다. 쏘련에서 군사학교를 다닌 다른 한 조선인 교관 리용은 로동자 무력을 거느리고 적 공안국을 점령하는 싸움을 지휘하였다. 그들은 기관총사격의 엄호를 받으며 적 장갑차 한대를 폭파하고 공안국을 점련하였고 적 천여명을 포로하였다. 12월 12일 광주 공안국 부근광장에서 쏘베트정부 수립대회가 진행되였다. 조선인 량도부, 김산, 김규광이 대회에 참가하였고 김규광은 정부 16명 위원의 한명으로 선출되여 숙반위원회 위원을 맡났다. 그리고 김산은 로동자부력부에서 일을 보았다. 12일 적의 반격은 더 막강하였다. 전투는 령남, 장제, 사면 등지에서 치렬하게 진행하였다. 황포군관학교 제3기를 졸업한 조선인 교관 리빈과 량도부는 함께 사면에 대포를 걸고 적을 지원하러온 제국주의 군함을 포격하였다. 성세호대했던 대혁명은 끝내 실패하고말았다. 조선혁명가 장지락(김산) 광주봉기에서 희생된 박영(박근식) 광주 광주봉기 렬사릉원의 중조혈의정 중조혈의정의 비문   중국공산당의 무력항쟁은 도시로부터 광범한 농촌으로 이전하였으며 농촌에서 홍군을 조직하고 토지혁명을 진행하면서 쏘베트정부를 세우고 확고한 혁명근거지를 개척하였다. 많은 조선곤산주의자들도 쏘베트구역에 도착해 토지혁명에 참가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은 양림과 무정이다. 양림 무정 양림(1898~1936), 원명은 김훈이고 자는 지원이다. 혁명하면서 그는 또 양주평, 양녕, 삐스티 등 멸명을 사용하였다. 3.1운동이 있은후 그는 일경의 눈을 피해 둥국동북에 와서 통화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후 그는 동북의 여러 조선인 반일유격부대와 함께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 근 천명을 소멸하였다. 그후 양림은 상해림시정부의 소개로 운남륙군강무학당 제16기에 입학하였고 졸업후 황포군관학교에 가서 교관으로 있었다. 이때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국민혁명군의 몇아의 동정전투에 참가하여 중국공산당이 장악한 엽정독립퇀 제3영 영장으로 승진하였다. 대혁명이 실패한후 그는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쏘련 군사학교에 가서 공부하였으며 졸업후 귀국해 동북의 동만특별위원회에서 사업하였다. 1932년 가을 그는 주은래의 부름을 받고 쏘베트구역 서금에 가서 중앙정부 로동및 전쟁위원회 참모장을 맡았다. 서금에서 그는 또 강서군구 회창, 순오, 안원 군분구 사령원, 홍군 제23군 군장, 월감군구 사령원, 홍군 제1군단 참모장,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총동원 무장부 참모장 등직을 맡았으며 쏘베트정부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을 선거되였다. 1934년 그는 중앙홍군대학 군사총교관을 맡기도 하였다. 무정(1905~1952)의 원명은 김무정이다. 큰 뜻을 품고 일제를 극도로 미워한 그는 애국청년운동에 참가해 일경의 추적을 받았다. 1924년 그는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하북성 보정에서 보정륙군군관학교 포병과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무정은 장가구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군교 졸업후 북벌전쟁과 상해 로동자 폭동에 참가하였다. 1930년 6월에 상해 당조직은 무정을 쏘베트근거지에 파견하였다. 그는 등대원의 소개로 팽덕회의 홍군 제5군에 참가하였다. 무정의 뛰여난 포병기술은 팽덕회의 승인을 받았으며 그는 신속히 패방으로부터 련장, 영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홍군에서 홍군 포병전문가로 소문이 높았다. 그후 무정은 쏘베트구역 홍군특과학교 제2임 교장을 맡기도 하였다. 중앙홍군이 장정을 할때 양림은 중앙직속 홍색간부퇀 참모장을 맡았고 무정은 중앙직속 제1종대 제3제대 사령원 겸 정위를 맡았다. 양림과 무정은 모두 승리적으로 연안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양림은 1936년 홍군이 동정할때 황하도하작전을 지휘하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광주봉기가 실패한후 김규광은 상해에서 조선 각당파의 단결을 도모하였고 김산은 북령에서 중공북평시 당위 선전부 부장을 맡고 학생운동을 령도하면서 지하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천진에서는 조선공산주의자 리철부가 하북성 당위 선전부 부장을 맡고 지하투쟁을 하였다. 김규광(운암 김성숙) 류자명 리철무(한위건)    
3    아름다운 연변 댓글:  조회:3939  추천:1  2012-09-02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국조선족의 대표적인 집거지로서 중국조선족의 상징이기도하다. 연변은 나서 자란 고향이라서 더욱 그립지만, 우리방송 애청자들 또한 대부분 연변에 계시기 때문에 연변에 자주 가게 된다. 이번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경축하는 마음에서 또 연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고저 최근 몇년간 연변을 다녀오면서 찍은 사진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정겨운 초가삼간은 사라졌지만 대신 덩실한 기와집이 우리의 주요한 주거지로 되였다. 모아산 기슭의 만무과원과 유유히 흐르는 해랑강도 아름답다.  
2    “한락연 기념관” 축성 세미나 룡정서 개최 댓글:  조회:5803  추천:29  2010-09-16
“한락연 기념관” 축성 세미나 룡정서 개최      우리민족의 자랑인 혁명가이며 예술가인 “한락연 기념관” 축성기획 세미나가 얼마전 한락연 선생의 고향인 길림성 룡정시에서 진행되였다. 룡정시 당위원회에서 주최한 세미나에는 원 국가통일전선부 부부장이며 원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인 리덕수와 한락연의 차녀 한건립, 아들 한건행이 출석했고 또 연변조선족자치주 관련부문 책임자들과 룡정시 당위원회와 정부 주요 책임자들이 참가했다. 룡정시 당위원회 윤성룡 서기가 “한락연 기념관” 축성기획을 설명하면서 룡정시는 우리민족의 우수한 혁명가이며 예술가인 한락연 선생의 고향일뿐만 아니라 중국 조선족의 문화중심이고 혁명중심지이기 때문에 수많은 문화력사유적을 가지고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룡정시는 앞으로 “한락연 기념관”을 비롯해 중국조선족의 력사문화 중심기지로 건설한다는 거창한 전망기획을 제기하였다. 이어 회의참가자들은 “한락연 기념관” 축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문화중심지인 룡정시를 중국조선족의 문화력사 중심기지로 건설해야한다고 지적하였다. 한락연 선생의 아들 한건행씨는 “아버지 세대의 혁명유지를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고 하면서 룡정시 당위원회와 정부가 “한락연 기념관”을 축성한다는데 대해 아주 감사히 생각한다고 표했다. 그리고 각계의 힘을 빌어 “한락연 연구회”를 결성함으로써 앞으로 한락연 선생의 력사사적을 계속 연구하고 “한락연 기념관” 축성에 이바지할것을 호소했다. 원 국가통일전선부 부부장이며 원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인 리덕수는 총화발언에서 중국조선족 혁명가이며 예술가이며 사회활동가인 한락연 동지의 고향은 룡정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룡정시는 혁명시기 참전인수가 가장 많고 혁명렬사가 가장 많으며 동북 3성 혁명대오 가운데 조선족 당원수가 가장 많았다고 했다. 또한 룡정은 혁명간부와 혁명 지식인들을 가장 많이 양성해낸 고장이라고 하면서 룡정시가 한락연 기념관을 세우려는것은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한락연 연구회를 설립하는것을 지지한다면서 전문 기금회를 설치해 한락연 동지의 혁명적 업적과 예술생애를 잘 연구하고 크게 선전함으로써 로세대 혁명가들의 혁명정신을 계속 발양해 나가야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리덕수를 비롯한 지도자들과 한락연 선생의 유가족 그리고 각계 대표들은 림시로 만들어놓은 한락연 기념관을 참관하고 룡정시 해란강과 륙도하 합수목에 축건한 락연공원의 정자를 둘러보았다.  
1    “침묵을 지킬지언정 거짓말을 하면 안되지요” 댓글:  조회:5274  추천:54  2007-07-08
중앙당학교의 조선족 교수 최룡수김성룡      북경시 서북교외의 아름다운 의화원 부근에 자리잡은 중앙당학교 앞에 서면 자연 숙연한 마음이 든다. 중국공산당의 중견간부와 고위간부, 맑스주의 리론간부를 강습시키는 최고학부인 중앙당학교인 만큼 일반인에게 있어서는 쉽게 접근할수없는 곳이다. 이곳에 우리 조선족 교수분이 계신다는 얘기는 자주 들었지만 정작 일을 보려고 찾아왔을때는 그분이 퇴직한 뒤인 2002년말이였다. “구경 어떤 분인지?” 궁금한 면이 많은 분이였다. 중국의 중층이상 간부들만이 공부할수있는 중앙당학교인데 거기서 교원까지 했다는 그 자체가 전설같이 들렸다. 게다가 잊혀진 조선혁명가들의 사적을 찾아 한국이나 중국 조선족 사회에 알렸다니 더욱 궁금하지 않을수 없었다. 미국의 기자 님.웨일즈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던 조선혁명가 김산(장지락,张志乐)의 정체를 밝혀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이 바로 이분이였고 또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화가이면서 혁명가였던 한락연(韩乐然), 기동(冀东)항일유격대를 이끌었던 주문빈(周文彬), 지하투쟁의 지도자였던 리철부(李铁夫), 혁명리론가 김규광(金奎光)…이런 쟁쟁한 인물들의 진실을 밝혀 내기도 했던 것이다. 중앙당학교 교수로 퇴직한후에도 쉬지 않고 계속 우리민족의 력사를 밝혀내기 위해 또 그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정력을 아끼지 않는 그분이 바로 최룡수 교수이다. 머리가 희슥했지만 얼굴색이 맑아 정력적인 분으로 보였다. 또 많이 겸손했고 인자해 보였다. 중앙당학교 교원저택에 사시는 최룡수 교수는 우리를 만나 관내지역 조선민족 반일투쟁사 답사에 관련한 의견과 건의를 제기하였다. 일제와의 항쟁을 위하여 광활한 중국대지를 전전하면서 싸웠던 조선혁명가들이지만 투쟁과정에 이데올로기로 인한 대립을 멈추지 않고 끝내 각기 자기 길을 걸어야만 했던것도 사실이였다. “교수님은 중앙당학교에서 사업하셨지요? 그럼 교수님은 민족주의자입니까? 공산주의자입니까?” 작별인사를 나누면서 도저히 궁금증을 달랠수없어 물었다. 공식적으로 물으면 실례될것 같아서 헤여질때 재미 삶아 던진 질문이였다. “사실 이데올리기적인 대립이 너무나도 오래되여 사람들에게 편견이 서게 된것 같은데 진정한 공산주의자는 인간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합니다. 정치목적을 위해 그것을 인위적으로 획분하여 서로 공격하던 시절은 이젠 력사속에 잠재워야하지요. 저는 인간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공산주의잡니다.” 대답이 퍽 공식적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첫 만남에서 받았던 그 공식적인 대답이 그후 5년사이 최교수와 함께 일을 하면서 그것이 가장 진솔한 대답이였다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최교수는 그 파란만장한 세월을 지내오면서 바로 인간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공산주의자로서 부끄럼 없이 살아왔다고 느껴지게 되였다.           “조선족이기에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요”   2005년은 항일전쟁승리 6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성대히 기념하고저 방송다큐 “불멸의 발자취”를 만들기 위해 최룡수 교수님을 찾아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것은 2003년 가을부터였다. 최교수는 저택에 잘 보관해 두었던 자료들을 펼쳐보이면서 구체적인 지도를 주었다. 북경에 지금 어떤 분들의 유가족이 남아있으며 어떤 분들이 비교적 연구가 깊다고 알려주었고 또 어떤 곳들을 다니며 현지답사를 해야한다고 지적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불편한 몸이지만 직접 태항산답사와 상해, 남경지역 답사를 다녀오셨다.  “언제부터 이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했습니까?”라고 물으면 늘 “연구라기는 어렵고 그저 조선족이기에 해야 할 일을 한다고 하는거요.”라고 대답하는 최교수 이시다. 사실 최교수가 조선혁명가들에 관심을 가지게 된것은 1981년의 일이였다고한다. 당시 중앙당학교에 조남기장군이 왔었는데 조선족 교원이 있다는 소식을 알고 만나 주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때 조남기장군이 관내 조선민족의 투쟁을 이끌어왔던 많은 항일투사들의 사적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있다고 안타까와했다. 그러면서 북경에 있으면서 이 일을 좀 하는것이 어떠냐고 건의를 제기했다. 뜻하지 않은 건의를 받은 최룡수 교수는 “력사 전문가도 아닌 제가 어떻게 그 일을 하겠습니까?”고 주저했다고한다.     그러자 조남기 장군은 “당신은 전문가이기 보다는 먼저 조선족 학자요. 조선족이기에 이 일을 해야하지 않겠소?”라고 지적했다. 그러했다. 력사 전문가들에게만 의지해서는 안될 일이였다. 특히 관내지역의 투쟁사가 더욱 그러했다. 그때로부터 최교수는 다시 생각을 고쳐하고 관련 자료를 찾고 현지를 답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사이 어려운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자료에서 나오는 주소와 지금의 주소가 다른곳이 많았다. 또 많은 현장이 덧없는 세월속에 파손되고 변화되여 확인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북경의 크고 작은 골목길을 얼마나 헤매고 돌아다녔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다가 로인만 만나면 옛날에 이곳이 어찌되였는가를 자상히 물어보면서…”사모님이 손님들에게 차를 권하면서 한마디 이야기했다. “산에 기념비나 절을 많이 찾아보아야하지요. 렬사들의 묘자리를 확인할려고 산을 얼마나 헤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지금도 북경에 있는 반일투사들의 유가족은 최교수를 은인처럼 생각해 준다. 김산의 아들 고영광(高永光 )씨, 김규광의 여러 아들, 류자명의 딸 류득로(柳得橹), 주문빈의 녀동생 김신정(金信正), 한락연의 자녀… 이들은 한국기자들을 포함해 기자들을 만나주지 않는다.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교수가 부른다면 기꺼이 응해 나서고 또 기자들까지 만나준다. 그만큼 서로 믿었고 또 정도 깊었던것이다. 최교수의 저택에는 카드로 작성해 놓은 조선혁명가들의 약력이 수백개가 정리되여있고 또 소중한 사진자료나 신문자료들도 있었으며 친필 약력이라든지 혁명자들이 남겨놓은 시작이나 역작들도 있었다. 다년간의 로고가 그대로 보여졌다.   “산을 넘어서니 어린 나의 마음에도 세상은 그처럼 넓어 보였고 또 호기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장백산맥의 남단, 압록강 북녘에 자리잡은 편벽한 산간마을인 료녕성 신빈현(新宾县)의 평정산촌(平顶山村)은 눈만 뜨면 보이는것은 산뿐이였다. 인간사회는 전란과 투쟁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빈곤과 억압에 허덕였지만 춘하추동 변함없이 산은 산대로 사람들을 맞아주었다. 봄이면 적설이 사라지고 시내물이 졸졸 흘러 마을에 생기를 보태주고 북산의 만발한 진달래꽃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또 산에 나는 나물과 산짐승, 강의 물고기는 빈곤한 이 고장 사람들의 식탁을 풍요롭게 해 주기도 한다. 고요한 마을어귀에 한 소년이 호기심에 찬 눈길로 길가는 로인 한분을 쳐다보고있었다. 낯선 로인이였다. 소년은 그 로인이 어디에서 왔으며 또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기 그지없었고 길을 따라 산을 넘어서면 무엇이 있을까하여 몹시 궁금했다. 소년은 드디어 산으로 올랐다. 무성한 수풀을 헤치고 산마루를 따라 곧추 올랐다. 산등성이에 선 소년은 더 넓은 세상을 보게 되였고 산기슭의 더 큰 마을을 보게 되였다. 그리고 아득히 펼쳐진 저 지평선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가가 더 궁금해졌다. “산을 넘어서니 어린 나의 마음에도 세상은 그처럼 넓어 보였고 또 호기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어린시절의 고향을 생각하고 고향이야기를 할때마다 최교수는 행복감에 잠기는듯 싶었다. 그러면서도 자랑스럽게 자기 가족을 소개한다. 아버지(최천길,崔天吉)는 부지런한 농군이였고 호조조 조장, 합작사 사장을 하였고 또 인민공사를 하셨다. 하지만 공산당은 회의가 너무 많아서 간부하기 싫다면서 그냥 농민으로 사셨다고 한다. 큰형(최룡서,崔龙瑞)은 해방전쟁시기 리홍광지대 통신중대 지도원을 했으며 선후로 대공 세번 세웠다. 항미원조 전쟁때는 사령부 정찰참모로 사업했고 38군 주둔지인 보정에서 사장급 간부로 퇴직했다고 한다. 그리고 누나(최룡실,崔龙实)는 료녕성 안동시(지금의 단동, 丹东)특등로력모범이라고 한다. “어릴때부터 아버지와 형님들에게서 혁명교육을 많이 받았지요. 그래서 일찍 아동단에 들었고 비밀편지도 날라준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어릴때는 더 넓은 세상이 궁금했고 또 많이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소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소년은 더 넓은 세상을 알기 위해 배움의 길을 찾아 떠났다. 부모님께도 알리지 않고 250리 길을 걸어 도착한곳이 신빈현 현소재지에 있는 신빈현조선족중학교였다. 소년은 교장을 찾아가 입학시켜 줄것을 요구했다. 학교에 입학하려면 시험을 보아야했다. 한족소학교를 다닌 소년은 자습하여 조선글을 조금 알뿐이였으니 조선력사에 대해 알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친구집에 머물면서 밤새도록 조선력사 교과서를 외웠고 시험을 보아 끝내 신빈현조선족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였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어엿한 사나이로 성장한 소년은 대학입학시험에서 “나의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작문을 썼다. 어머니에 대한 깊은 정이 슴배인 이 작문은 료녕성 본계시(本溪市) 지역의 최고점수를 맞았고 드디어 중국의 명문대인 북경대학 철학학부에 입학하게 되였다. “어머니의 명함은 제가 지어 주었다구요.” 최교수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봉건유습이 남아있어 어머님은 줄곧 명함이 없었고 사람들은 그냥 ‘최박씨’라고 불렀답니다. 최씨네 집에 시집온 박씨 녀성이라는 뜻이지요. 내가 중학교를 다닐때였습니다. 호구등기를 하게 되였는데 아버지 존함을 쓰고 나서 어머니 명함을 쓰자니 그냥 ‘최박씨’라고 할수 없었지요. 그래서 생각하던 끝에 ‘박정옥(朴贞玉)’이라고 적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어머님에게 새로운 명함을 지어 주었다고 말씀드렸거든요. 어머님도 즐거워 하시며 눈물까지 머금었어요.”     장백산 기슭의 아름다운 산간마을에서 나서 자란 소년은 드디어 어엿한 사나이로 되여 북경대학에 가게 되였다. 하지만 그를 반겨준 드넓은 세상은 그처럼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피로 모주석 만세를 썼지요. 너무나도 분통이 터져 자살할 생각도 들었구요.”   그 시절을 겪어온 사람들은 아마 모두가 모주석을 숭배하는 마음이 있었고 “모주석 만세”를 많이 불렀을것이다. 1957년 국경절을 맞으며 천안문광장에서는 성대한 경축행사가 있었다. 북경대학 학생들이 주석대 앞에 섰기때문에 검열하러 나온 중앙령도들 앞에 선 모택동을 가까이에서 똑똑히 볼수있었다. 학생들은 흥분되여 저도몰래 “모주석 만세!”를 소리 높이 웨쳤다. 그속에는 최룡수 교수도 있었다.   “만세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주석 만세를 웨친것은 기쁘다는 뜻이지 정말 만년 살라는것은 아니였습니다. 물론 모택동을 숭배하는 마음은 있었지요.”   북경대학에서 공자철학을 전공한 최룡수교수는 졸업후 길림전력학원(吉林电力学院)에서 사업하게 되였다.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그는 3차나 억울한 루명을 쓰고 투쟁받았으며 2차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1965년말에 길림전력학원 당위원회 위원, 공청단위원회 서기, 길림시 공청단위원회 위원으로 되였습니다. 대학 졸업생이 4년사이 이렇게 제발되기는 흔치 않은 일이였지요. 당시는 기운이 나서 열심히 사업했고 농촌에서도 많이 일했습니다. 물론 좌적인 경향도 있었지요. 당시 인식이 그러했으니 말입니다.”     길림성 화피창(桦皮厂)의 조선족대대인 성화대대에 공작조로 내려갔을때의 일이다. 겨울이여서 몹시 추웠는데 공작조 성원들은 대대부에서 석탄불을 피우고 자야했다. 그러다가 어느날엔가 가스에 중독되였던 것이다. 문가에 있었던 최교수는 그래도 적게 중독되였든지 정신을 차리게 되였다. 하지만 몸을 움직일수없었다. 그는 안깐 힘을 모아 침대에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것으로 몸의 신경을 조금 깨운 그는 힘겹게 수화기를 들고 공사에 전화를 해서 모두가 구조될수있었다. 그리고 또 한번은 강뚝이 터졌을때였다. 농촌공작대 대장인만큼 그는 얼음이 채 녹지 않은 강에 뛰여들어 물막이에 나섰다. 그러면서 젊은이들과 민병들을 지휘하여 물을 막고 터진 뚝을 고쳐놓았다. 하지만 추위로 그의 몸은 모두 얼어 그만 쓰러지고말았다한다.     “하도 젊었으니 목숨이 붙어있었지 잘못 될뻔 했다구요. 그때는 참 헌신적으로 일을 했는데 후에 그처럼 큰 억울함을 당할줄은 생각지도 못했지요.”     얼마 안되여 문화대혁명이 터졌다. “2월 제강”이 나왔고 잇달아 “5.16제강”이 나왔다. 하나는 류소기가 작성한것인데 대자보를 쓰지 말자는 등 내용이였다. 이에 반기를 든 것이 “5.16제강”이였다. 길림전력학원의 공청단원들은 우에서 지시하는 대로 할수밖에 없었다. “2월 제강”을 비판하고 총화하는 대회가 열렸는데 나젊은 최교수는 상급의 지시대로 했을뿐이라고 하면서 “잘못된”것을 시정하려하지 않았고 자기의 주장을 떳떳히 세웠다. 사건 뒤면에 엄연한 권력투쟁이 도사리고있는것도 몰랐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길림시 당위원회 서기의 추종자로서 헤이방(黑帮)이라는 루명을 쓰게 되였다. 길림시 부비서장으로 있던 범생경(范生庆)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최교수를 단독 심문하였다. “잘 못한 일이 없는가?” “조직에 교대할것이 없는가?” “모주석과 혁명에 대해 립장이 흔들리지 않았는가?” 기어코 무엇을 꼬집어 내려는듯이 문책이 계속되였다.     “개별담화를 한다는것이 사실은 루명을 씌우려는 수작이였지요. 헤이방이라고 몰아붙이면서 자백하라고 했습니다. 너무나도 억울하고 또 화가 동해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써 혈서를 썼던거죠. 모주석 만세라고요.”     그때의 일을 회억하는 최교수는 지금도 많이 괴로워하는 표정이였다.     “당시 개인숭배가 많았어요. 밥을 먹을때도 모주석 만세를 불렀고 대회를 열때도 모주석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때부터 객관세계를 다시 보게 되였어요. 문제를 리상적으로 보지 않고 현실적으로 보고 분석하게 되였던것이지요. 일제시대 우리는 도꾜방향을 향해 매일 아침 절을 했습니다. 물론 일제놈들이 강요한것이지요. 일제시대와 하는 짓이 꼭 같아서 큰 반감이 생겼던것입니다. ”     일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최교수는 억울한 루명을 쓰고 감금생활을 하게 되였고 고된 로동을 하게 되였다. 또 그가 자살할것 같아 그냥 사람을 붙여두어 감시하게까지 하였다.     “그때 나를 감시하던 사람이 원래 국민당이였던 사람이였는데 도리여 나를 감시했던것입니다. 기가 막혀서…”     최교수는 그후 또 조선수정주의자로 몰리게 되였고 5.16분자로 무함받기도 했다. 당시 손오석(孙五石)이라는 동창생이 조선에 가게 되였는데 헤어질때 최교수는 그에게 돈 30원을 준 일이 있었다. 사실 손오석은 정상적인 조동으로 조선에 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빌미가 되여 최교수는 조선수정주의자로 락인 찍혀 2층집의 한방에 갇히게 되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이는 조직적인 무함이였던 것이다. 당시 혁명위원회를 설립할때 최교수가 가장 젊고 학력도 좋아 전도가 가장 유망한 사람이였다. 그런데 어느 한 대회에서 당위서기를 비판하게 되였는데 사람마다 앞장서서 비판하였다. 하지만 최교수는 이 사람에 대한 결정자료를 보자고 요구했고 자료가 없으면 발언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최교수는 남의 눈에 나게 되였고 드디어는 조선수정주의자라는 루명을 쓰고 3개월 남짓이 감금되여 생활하게 되였다한다.     “그때는 정말 자살하고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감금생활과 고된 로동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억울하고 원통해서 말이지요. 모주석에게 그렇게 충성하는 사람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나를 투쟁하고 반대한 사람은 글쎄 내가 입당시켜준 사람이 였던 것입니다. 나를 조선특무로 무함했던 사람이지요. ”     “문화혁명이 총적으로 잘 못 되였지요. 하지만 문화혁명에 참가한 사람들이 다 나쁜것은 아닙니다. 조직에서 시킨 일이니 조직에서 책임져야지 개인이 책임지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지만 이 기간 남을 무함하거나 때리거나 해치는 사람은 나쁘지요.”   “철학은 언제나 실사구시해야지요. 인생도 마찬가집니다. 솔찍해야지요.”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전국적으로 진리표준(真理标准)에 대한 토론이 전개되였다. 이는 문화대혁명후 가장 큰 규모의 맑스주의 자아교양활동으로서 실천만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규준이라는 보편적인 진리를 명확히 하였다.   이 시기 최교수는 길림에서 리론간부 리론토론회에 글을 발표했다. “유심주의 세계관의 대폭로(唯心主义世界观的大暴露)”라는 이 글은 당시 길림성혁명위원회의 주임의 그릇된 작법을 비판하였다. 그들의 주장은 먼저 사상이 있어야하고 그 사상에 따라 자료를 찾고 또 사상을 증명해야한다고 했다. 유심주의적인 거꾸로 된 작법이였던 것이다. 이를 비판하는 최교수의 글은 길림성 리론지인 “신길림(新吉林)”에 발표되였다. 이 글은 길림성에서 그릇된것을 바로잡는(拨乱反正) 리론적 근거로 되였다.   1978년에 이르러 중국공산당의 사상리론 교양의 최고학부인 중앙당학교에서도 진리의 표준에 관련한 토론이 심각하게 진행되고있었고 점차 실천만이 진리의 표준이라는데로 의견이 모아지기 시작하던 때였고 본격적으로 과거의 그릇된 것을 바로잡고 있을때였다. 중앙당학교의 많은 글들이 최교수의 관점과 같았고 또 중앙당학교에서도 최교수의 글에 중시를 돌리고있었다. 그리하여 얼마후 최교수는 중앙당학교로 조동되여 맑스주의리론과 철학 강의를 하게 되였다. 개인 서류도 보지 않고 중앙조직부의 비준을 거쳐 그냥 중앙당학교로 조동하게 되였던것이다.   “실천만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규준이라는것은 맑스주의의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하지만 모택동을 우상화하고 모택동사상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던 문화대혁명 직후였기에 이 진리표준을 다시 내세우기까지는 쉽지 않았지요. 이것으로 검증한다면 문화대혁명은 틀린것이고 모택동에게도 문제가 있지요.”     중앙당학교에 전근된 최교수는 리론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맑스레닌주의 철학과 경전을 강의하게 되였다. 그는 독일어를 자습하여 직접 철학론문을 번역하면서 강의에 열중하였다. 1981년 정당(整党)이 시작되였다. 중앙당학교에서는 최교수를 정당판공실의 성원으로 선정하고 조직조 조장을 맡겼다. 정당이란 학교내의 모든 임직원을 상대로 문화대혁명시기 잘못된 일이 없는가를 밝혀내는 일이였다. “문화대혁명의 교훈이 있는데 문제를 확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되였어요. 절대 근거가 없이 사람을 비판하지 말아야지요. 그래서 대자보를 썼거나 조직의 명령에 따라 비판대회에 참가한 정도는 그냥 다 넘어가게 했습니다. 실사구시적이여야지요.” 이처럼 실사구시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구체적으로 개인과 집단간의 책임을 분별하여 일을 했기 때문에 중앙당학교에서는 순조롭게 정당을 완수하게 되였다. 하지만 청화대학 같은 경우에는 문제를 확대화하여 교육장을 하던 사람까지 걸려들어 철직받고 쫓겨난 사례도 있었다한다. “철학은 실사구시해야 됩니다. 또 철학으로 사업을 지도하니깐 사업을 실사구시적으로 진행해야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지요. 사람은 솔찍해야하거든요.” 실사구시해야하고 진실하게 살아야한다는것이 최교수의 인생관이라고 할수있다. 그는 바로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사업을 했고 학문을 연구했으며 또 진실하게 인간을 대해왔던 것이다. 1985년에 최교수는 중앙당학교 과학연구판공실의 직함처(职称处) 처장을 맡게 되고 1991년에는 학위판공실 주임을 맡게 된다. 당학교는 원래 공무원계렬에 속했기때문에 직함을 평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학교 교장으로부터 시작해 당학교를 교육계렬에 포함시켜 직함을 평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이 임무를 맡은 최교수는 문건을 작성해 중앙조직부에 보냈다. 드디어 중앙조직부의 비준을 거쳐 현 당학교는 대학전문학교 체제로, 성 당학교는 본과체제로 하기로했다. 그리하여 많은 로간부들이 직함을 가지고 교수로 되였다. 물론 여기에는 중앙직함개혁 지도소조의 비준을 받기 위한 최교수의 숨은 노력이 많았다. “그때까지 공무원으로 대접받았는데 후에는 교수 대접을 받게 되였지요. 명색이 학교인데 그때에야 교수가 있게 되였던 것입니다.” 최교수의 얼굴에는 만족의 빛이 흘렀다. 학자로서의 최교수는 가치 있는 론문들을 많이 써냈고 또 조선독립운동사에 관련한 연구도 많이 진행해왔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늘 구체적으로 설명하려하지 않았다. 응당 해야할 일을 했을뿐이라고 했다. 최교수가 발표한 론문들을 정리할것 같으면 철학론문이 많다. 특히 1993년에 발표한 “조선유학사의 특성과 역활(朝鲜儒学史的特点及其作用)”이 주목되는데 론문은 중국에서 처음으로 조선유학의 핵심인 퇴계(退溪) 리률곡(李栗谷)을 언급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성리학이나 주자학으로 퇴계를 많이 연구했지만 최교수는 변증법적으로 연구했다. 독일의 헤겔과 퇴계를 련계시키면서 변증법을 리용했던 것이다. 또 퇴계 리률곡의 사상을 실학사상과 련계 시켜 연구하여 돌파적인 관점을 제기하고있다. 일반적으로 률곡을 성리학자로 보는데 그의 실학사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극히 드물다. 최교수는 실학과 성리학을 분리하여 률곡의 실학사상내용을 쭉 뽑아서 문제를 증명해 나갔으며 결국에는 실학사상은 조선유학사상의 새로운 단계라는 주장을 내세워 학계를 놀래웠다. 조선지사들의 독립운동을 연구하면서 최교수는 민족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8차에 걸쳐 연안에 다녀오면서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에 아무런 기념물도 없는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일본포로들을 교육하던 곳까지 기념물을 만들었는데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을 위해 그처럼 많은 피를 흘리며 싸워온 우리 조선혁명가들에 대한 기념물이 없다는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데요.” 최교수는 관련 자료들을 모아가지고 연안시 박물관 관장에게 서한을 보내 기념비를 세워야할 중요성과 의의를 강조하였다. 그의 거듭되는 노력을 거쳐 드디어 연안시 라가평(罗家坪)에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라고 밝힌 돌비석이 있게 되였다. 뿐만 아니라 관련 부문과 책임자에게 편지를 보내 료녕성 신빈현에다 리홍광의 조각상을 세우도록 했고 길림성 반석(磐石)의 홍광중학교에 리홍광에 관련한 자료들을 제공하기도 했다. “책만 보고 력사를 운운해서는 안됩니다. 꼭 자료를 충분히 장악해야하고 현지를 답사해야합니다. 이 두가지가 겸비되여야만이 진정한 연구가라고 생각됩니다.” 최교수의 다년간의 노력을 거쳐 관내지역에서 투쟁했던 많은 조선혁명가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였다. 현장을 답사하고 박물관이나 서류관에서 자료를 찾고 또 유가족을 만나고 하면서 흘러간 력사를 진실하게 살려내기 위해 노력해왔던 것이다.       2005년 중국에서는 항일전쟁 승리 60주년과 세계 반파쑈전쟁 승리 60주년을 성대히 기념하였다. 기념행사의 하나로 우리가 제작한 방송다큐 “불멸의 발자취”, 관내지역 조선민족 반일투쟁 사적이 중앙인민방송과 연변텔레비죤방송을 통해 중국의 광범한 조선족과 대면하게 되였고 또 민족출판사에 의해 책으로 정리되여 조선족 독자들과 만나게 되였다. 조선혁명가들의 투쟁사에 크게 감동된 청취자와 독자들은 다투어 편지와 전화를 보내왔으며 뒤에서 제작팀을 유력하게 도와준 최교수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뜻을 전해왔다. 무더기로 쌓인 편지들은 최교수에 대해 알고싶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였다.     “우리 력사가 실사구시적으로 우리 조선족에게 알려졌다니 그만큼 더 기쁜일이 없다”며 최교수는 “이것만으로도 족하다”고 하셨다. “철학은 언제나 실사구시해야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인데요. 환경조건이 허락하지 않으면 침묵을 지킬지언정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합니다. ” 한평생 맑스주의를 신앙하면서 실사구시적으로 진실된 삶을 추구해왔던 최교수였다. 진정한 공산주의자는 민족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한다는 최교수의 말을 다시 되새겨 본다. “구경 우리는 부끄럼 없이 인생을 살고있는것일까?” 스스로 손을 가슴에 얹고 생각해 보게 된다.   최룡수 약력 1936년 료녕성 신빈현에서 출생 1954년 신빈조선족중학교를 졸업하고 1959년 6월 중국공산당에 가입. 1962년 9월 북경대학 철학학부를 졸업하고 길림전력학원 맑스레닌주의 교학연구실 교원으로 임직. 1964년 길림전력학원 당위원회 “5반”판골실, 무장부에서 사업. 1965년 농촌의 사회교육사업조 조장 1966년 길림전력학원 당위원회 위원, 공청단위원회 전직 부서기, 길림시 공청단위원회 위원을 력임. 문화대혁명시기 박해를 받음. 1973년 10월 중국공산당 길림성 직속기관 당위원회 선전처에 조동. 간부교양과 대 대만선전사업을 책임. 1978년 6월 중국공산당 중앙당학교 철학실에 조동. 1985년 9월 중앙당학교 과학연구판공실 직함처 처장. 1991년 중앙당학교 과학연구판공실 부국급 당지부 서기. 1993년 중앙당학교 과학연구판공실 부주임. 교수직함. 1995년 국무원 특수 수당금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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