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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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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을 지킬지언정 거짓말을 하면 안되지요”
2007년 07월 08일 09시 24분  조회:5206  추천:54  작성자: 김성룡

중앙당학교의 조선족 교수 최룡수

김성룡

     북경시 서북교외의 아름다운 의화원 부근에 자리잡은 중앙당학교 앞에 서면 자연 숙연한 마음이 든다. 중국공산당의 중견간부와 고위간부, 맑스주의 리론간부를 강습시키는 최고학부인 중앙당학교인 만큼 일반인에게 있어서는 쉽게 접근할수없는 곳이다. 이곳에 우리 조선족 교수분이 계신다는 얘기는 자주 들었지만 정작 일을 보려고 찾아왔을때는 그분이 퇴직한 뒤인 2002년말이였다.

“구경 어떤 분인지?” 궁금한 면이 많은 분이였다. 중국의 중층이상 간부들만이 공부할수있는 중앙당학교인데 거기서 교원까지 했다는 그 자체가 전설같이 들렸다. 게다가 잊혀진 조선혁명가들의 사적을 찾아 한국이나 중국 조선족 사회에 알렸다니 더욱 궁금하지 않을수 없었다. 미국의 기자 님.웨일즈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던 조선혁명가 김산(장지락,张志乐)의 정체를 밝혀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이 바로 이분이였고 또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화가이면서 혁명가였던 한락연(韩乐然), 기동(冀东)항일유격대를 이끌었던 주문빈(周文彬), 지하투쟁의 지도자였던 리철부(李铁夫), 혁명리론가 김규광(金奎光)…이런 쟁쟁한 인물들의 진실을 밝혀 내기도 했던 것이다.

중앙당학교 교수로 퇴직한후에도 쉬지 않고 계속 우리민족의 력사를 밝혀내기 위해 또 그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정력을 아끼지 않는 그분이 바로 최룡수 교수이다.

머리가 희슥했지만 얼굴색이 맑아 정력적인 분으로 보였다. 또 많이 겸손했고 인자해 보였다. 중앙당학교 교원저택에 사시는 최룡수 교수는 우리를 만나 관내지역 조선민족 반일투쟁사 답사에 관련한 의견과 건의를 제기하였다. 일제와의 항쟁을 위하여 광활한 중국대지를 전전하면서 싸웠던 조선혁명가들이지만 투쟁과정에 이데올로기로 인한 대립을 멈추지 않고 끝내 각기 자기 길을 걸어야만 했던것도 사실이였다.

“교수님은 중앙당학교에서 사업하셨지요? 그럼 교수님은 민족주의자입니까? 공산주의자입니까?”

작별인사를 나누면서 도저히 궁금증을 달랠수없어 물었다. 공식적으로 물으면 실례될것 같아서 헤여질때 재미 삶아 던진 질문이였다.

“사실 이데올리기적인 대립이 너무나도 오래되여 사람들에게 편견이 서게 된것 같은데 진정한 공산주의자는 인간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합니다. 정치목적을 위해 그것을 인위적으로 획분하여 서로 공격하던 시절은 이젠 력사속에 잠재워야하지요. 저는 인간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공산주의잡니다.”

대답이 퍽 공식적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첫 만남에서 받았던 그 공식적인 대답이 그후 5년사이 최교수와 함께 일을 하면서 그것이 가장 진솔한 대답이였다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최교수는 그 파란만장한 세월을 지내오면서 바로 인간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공산주의자로서 부끄럼 없이 살아왔다고 느껴지게 되였다.

 

        “조선족이기에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요”

 

2005년은 항일전쟁승리 6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성대히 기념하고저 방송다큐 “불멸의 발자취”를 만들기 위해 최룡수 교수님을 찾아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것은 2003년 가을부터였다.

최교수는 저택에 잘 보관해 두었던 자료들을 펼쳐보이면서 구체적인 지도를 주었다. 북경에 지금 어떤 분들의 유가족이 남아있으며 어떤 분들이 비교적 연구가 깊다고 알려주었고 또 어떤 곳들을 다니며 현지답사를 해야한다고 지적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불편한 몸이지만 직접 태항산답사와 상해, 남경지역 답사를 다녀오셨다. 

“언제부터 이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했습니까?”라고 물으면 늘 “연구라기는 어렵고 그저 조선족이기에 해야 할 일을 한다고 하는거요.”라고 대답하는 최교수 이시다.

사실 최교수가 조선혁명가들에 관심을 가지게 된것은 1981년의 일이였다고한다. 당시 중앙당학교에 조남기장군이 왔었는데 조선족 교원이 있다는 소식을 알고 만나 주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때 조남기장군이 관내 조선민족의 투쟁을 이끌어왔던 많은 항일투사들의 사적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있다고 안타까와했다. 그러면서 북경에 있으면서 이 일을 좀 하는것이 어떠냐고 건의를 제기했다.

뜻하지 않은 건의를 받은 최룡수 교수는 “력사 전문가도 아닌 제가 어떻게 그 일을 하겠습니까?”고 주저했다고한다.

    그러자 조남기 장군은 “당신은 전문가이기 보다는 먼저 조선족 학자요. 조선족이기에 이 일을 해야하지 않겠소?”라고 지적했다.

그러했다. 력사 전문가들에게만 의지해서는 안될 일이였다. 특히 관내지역의 투쟁사가 더욱 그러했다.

그때로부터 최교수는 다시 생각을 고쳐하고 관련 자료를 찾고 현지를 답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사이 어려운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자료에서 나오는 주소와 지금의 주소가 다른곳이 많았다. 또 많은 현장이 덧없는 세월속에 파손되고 변화되여 확인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북경의 크고 작은 골목길을 얼마나 헤매고 돌아다녔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다가 로인만 만나면 옛날에 이곳이 어찌되였는가를 자상히 물어보면서…”사모님이 손님들에게 차를 권하면서 한마디 이야기했다.

“산에 기념비나 절을 많이 찾아보아야하지요. 렬사들의 묘자리를 확인할려고 산을 얼마나 헤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지금도 북경에 있는 반일투사들의 유가족은 최교수를 은인처럼 생각해 준다. 김산의 아들 고영광(高永光 )씨, 김규광의 여러 아들, 류자명의 딸 류득로(柳得橹), 주문빈의 녀동생 김신정(金信正), 한락연의 자녀… 이들은 한국기자들을 포함해 기자들을 만나주지 않는다.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교수가 부른다면 기꺼이 응해 나서고 또 기자들까지 만나준다. 그만큼 서로 믿었고 또 정도 깊었던것이다.

최교수의 저택에는 카드로 작성해 놓은 조선혁명가들의 약력이 수백개가 정리되여있고 또 소중한 사진자료나 신문자료들도 있었으며 친필 약력이라든지 혁명자들이 남겨놓은 시작이나 역작들도 있었다. 다년간의 로고가 그대로 보여졌다.

 

“산을 넘어서니 어린 나의 마음에도 세상은 그처럼 넓어 보였고 또 호기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장백산맥의 남단, 압록강 북녘에 자리잡은 편벽한 산간마을인 료녕성 신빈현(新宾县)의 평정산촌(平顶山村)은 눈만 뜨면 보이는것은 산뿐이였다. 인간사회는 전란과 투쟁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빈곤과 억압에 허덕였지만 춘하추동 변함없이 산은 산대로 사람들을 맞아주었다. 봄이면 적설이 사라지고 시내물이 졸졸 흘러 마을에 생기를 보태주고 북산의 만발한 진달래꽃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또 산에 나는 나물과 산짐승, 강의 물고기는 빈곤한 이 고장 사람들의 식탁을 풍요롭게 해 주기도 한다.

고요한 마을어귀에 한 소년이 호기심에 찬 눈길로 길가는 로인 한분을 쳐다보고있었다. 낯선 로인이였다. 소년은 그 로인이 어디에서 왔으며 또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기 그지없었고 길을 따라 산을 넘어서면 무엇이 있을까하여 몹시 궁금했다.

소년은 드디어 산으로 올랐다. 무성한 수풀을 헤치고 산마루를 따라 곧추 올랐다. 산등성이에 선 소년은 더 넓은 세상을 보게 되였고 산기슭의 더 큰 마을을 보게 되였다. 그리고 아득히 펼쳐진 저 지평선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가가 더 궁금해졌다.

“산을 넘어서니 어린 나의 마음에도 세상은 그처럼 넓어 보였고 또 호기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어린시절의 고향을 생각하고 고향이야기를 할때마다 최교수는 행복감에 잠기는듯 싶었다. 그러면서도 자랑스럽게 자기 가족을 소개한다.

아버지(최천길,崔天吉)는 부지런한 농군이였고 호조조 조장, 합작사 사장을 하였고 또 인민공사를 하셨다. 하지만 공산당은 회의가 너무 많아서 간부하기 싫다면서 그냥 농민으로 사셨다고 한다. 큰형(최룡서,崔龙瑞)은 해방전쟁시기 리홍광지대 통신중대 지도원을 했으며 선후로 대공 세번 세웠다. 항미원조 전쟁때는 사령부 정찰참모로 사업했고 38군 주둔지인 보정에서 사장급 간부로 퇴직했다고 한다. 그리고 누나(최룡실,崔龙实)는 료녕성 안동시(지금의 단동, 丹东)특등로력모범이라고 한다.

“어릴때부터 아버지와 형님들에게서 혁명교육을 많이 받았지요. 그래서 일찍 아동단에 들었고 비밀편지도 날라준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어릴때는 더 넓은 세상이 궁금했고 또 많이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소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소년은 더 넓은 세상을 알기 위해 배움의 길을 찾아 떠났다. 부모님께도 알리지 않고 250리 길을 걸어 도착한곳이 신빈현 현소재지에 있는 신빈현조선족중학교였다. 소년은 교장을 찾아가 입학시켜 줄것을 요구했다. 학교에 입학하려면 시험을 보아야했다. 한족소학교를 다닌 소년은 자습하여 조선글을 조금 알뿐이였으니 조선력사에 대해 알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친구집에 머물면서 밤새도록 조선력사 교과서를 외웠고 시험을 보아 끝내 신빈현조선족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였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어엿한 사나이로 성장한 소년은 대학입학시험에서 “나의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작문을 썼다. 어머니에 대한 깊은 정이 슴배인 이 작문은 료녕성 본계시(本溪市) 지역의 최고점수를 맞았고 드디어 중국의 명문대인 북경대학 철학학부에 입학하게 되였다.

“어머니의 명함은 제가 지어 주었다구요.”

최교수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봉건유습이 남아있어 어머님은 줄곧 명함이 없었고 사람들은 그냥 ‘최박씨’라고 불렀답니다. 최씨네 집에 시집온 박씨 녀성이라는 뜻이지요. 내가 중학교를 다닐때였습니다. 호구등기를 하게 되였는데 아버지 존함을 쓰고 나서 어머니 명함을 쓰자니 그냥 ‘최박씨’라고 할수 없었지요. 그래서 생각하던 끝에 ‘박정옥(朴贞玉)’이라고 적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어머님에게 새로운 명함을 지어 주었다고 말씀드렸거든요. 어머님도 즐거워 하시며 눈물까지 머금었어요.”

    장백산 기슭의 아름다운 산간마을에서 나서 자란 소년은 드디어 어엿한 사나이로 되여 북경대학에 가게 되였다. 하지만 그를 반겨준 드넓은 세상은 그처럼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피로 모주석 만세를 썼지요. 너무나도 분통이 터져 자살할 생각도 들었구요.”

 

그 시절을 겪어온 사람들은 아마 모두가 모주석을 숭배하는 마음이 있었고 “모주석 만세”를 많이 불렀을것이다.

1957년 국경절을 맞으며 천안문광장에서는 성대한 경축행사가 있었다. 북경대학 학생들이 주석대 앞에 섰기때문에 검열하러 나온 중앙령도들 앞에 선 모택동을 가까이에서 똑똑히 볼수있었다. 학생들은 흥분되여 저도몰래 “모주석 만세!”를 소리 높이 웨쳤다. 그속에는 최룡수 교수도 있었다.

  “만세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모주석 만세를 웨친것은 기쁘다는 뜻이지 정말 만년 살라는것은 아니였습니다. 물론 모택동을 숭배하는 마음은 있었지요.”

  북경대학에서 공자철학을 전공한 최룡수교수는 졸업후 길림전력학원(吉林电力学院)에서 사업하게 되였다.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그는 3차나 억울한 루명을 쓰고 투쟁받았으며 2차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1965년말에 길림전력학원 당위원회 위원, 공청단위원회 서기, 길림시 공청단위원회 위원으로 되였습니다. 대학 졸업생이 4년사이 이렇게 제발되기는 흔치 않은 일이였지요. 당시는 기운이 나서 열심히 사업했고 농촌에서도 많이 일했습니다. 물론 좌적인 경향도 있었지요. 당시 인식이 그러했으니 말입니다.”

    길림성 화피창(桦皮厂)의 조선족대대인 성화대대에 공작조로 내려갔을때의 일이다. 겨울이여서 몹시 추웠는데 공작조 성원들은 대대부에서 석탄불을 피우고 자야했다. 그러다가 어느날엔가 가스에 중독되였던 것이다. 문가에 있었던 최교수는 그래도 적게 중독되였든지 정신을 차리게 되였다. 하지만 몸을 움직일수없었다. 그는 안깐 힘을 모아 침대에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것으로 몸의 신경을 조금 깨운 그는 힘겹게 수화기를 들고 공사에 전화를 해서 모두가 구조될수있었다. 그리고 또 한번은 강뚝이 터졌을때였다. 농촌공작대 대장인만큼 그는 얼음이 채 녹지 않은 강에 뛰여들어 물막이에 나섰다. 그러면서 젊은이들과 민병들을 지휘하여 물을 막고 터진 뚝을 고쳐놓았다. 하지만 추위로 그의 몸은 모두 얼어 그만 쓰러지고말았다한다.

    “하도 젊었으니 목숨이 붙어있었지 잘못 될뻔 했다구요. 그때는 참 헌신적으로 일을 했는데 후에 그처럼 큰 억울함을 당할줄은 생각지도 못했지요.”

    얼마 안되여 문화대혁명이 터졌다. “2월 제강”이 나왔고 잇달아 “5.16제강”이 나왔다. 하나는 류소기가 작성한것인데 대자보를 쓰지 말자는 등 내용이였다. 이에 반기를 든 것이 “5.16제강”이였다. 길림전력학원의 공청단원들은 우에서 지시하는 대로 할수밖에 없었다. “2월 제강”을 비판하고 총화하는 대회가 열렸는데 나젊은 최교수는 상급의 지시대로 했을뿐이라고 하면서 “잘못된”것을 시정하려하지 않았고 자기의 주장을 떳떳히 세웠다. 사건 뒤면에 엄연한 권력투쟁이 도사리고있는것도 몰랐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길림시 당위원회 서기의 추종자로서 헤이방(黑帮)이라는 루명을 쓰게 되였다. 길림시 부비서장으로 있던 범생경(范生庆)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최교수를 단독 심문하였다.

“잘 못한 일이 없는가?” “조직에 교대할것이 없는가?” “모주석과 혁명에 대해 립장이 흔들리지 않았는가?” 기어코 무엇을 꼬집어 내려는듯이 문책이 계속되였다.

    “개별담화를 한다는것이 사실은 루명을 씌우려는 수작이였지요. 헤이방이라고 몰아붙이면서 자백하라고 했습니다. 너무나도 억울하고 또 화가 동해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써 혈서를 썼던거죠. 모주석 만세라고요.”

    그때의 일을 회억하는 최교수는 지금도 많이 괴로워하는 표정이였다.

    “당시 개인숭배가 많았어요. 밥을 먹을때도 모주석 만세를 불렀고 대회를 열때도 모주석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때부터 객관세계를 다시 보게 되였어요. 문제를 리상적으로 보지 않고 현실적으로 보고 분석하게 되였던것이지요. 일제시대 우리는 도꾜방향을 향해 매일 아침 절을 했습니다. 물론 일제놈들이 강요한것이지요. 일제시대와 하는 짓이 꼭 같아서 큰 반감이 생겼던것입니다. ”

    일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최교수는 억울한 루명을 쓰고 감금생활을 하게 되였고 고된 로동을 하게 되였다. 또 그가 자살할것 같아 그냥 사람을 붙여두어 감시하게까지 하였다.

    “그때 나를 감시하던 사람이 원래 국민당이였던 사람이였는데 도리여 나를 감시했던것입니다. 기가 막혀서…”

    최교수는 그후 또 조선수정주의자로 몰리게 되였고 5.16분자로 무함받기도 했다. 당시 손오석(孙五石)이라는 동창생이 조선에 가게 되였는데 헤어질때 최교수는 그에게 돈 30원을 준 일이 있었다. 사실 손오석은 정상적인 조동으로 조선에 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빌미가 되여 최교수는 조선수정주의자로 락인 찍혀 2층집의 한방에 갇히게 되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이는 조직적인 무함이였던 것이다. 당시 혁명위원회를 설립할때 최교수가 가장 젊고 학력도 좋아 전도가 가장 유망한 사람이였다. 그런데 어느 한 대회에서 당위서기를 비판하게 되였는데 사람마다 앞장서서 비판하였다. 하지만 최교수는 이 사람에 대한 결정자료를 보자고 요구했고 자료가 없으면 발언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최교수는 남의 눈에 나게 되였고 드디어는 조선수정주의자라는 루명을 쓰고 3개월 남짓이 감금되여 생활하게 되였다한다.

    “그때는 정말 자살하고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감금생활과 고된 로동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억울하고 원통해서 말이지요. 모주석에게 그렇게 충성하는 사람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나를 투쟁하고 반대한 사람은 글쎄 내가 입당시켜준 사람이 였던 것입니다. 나를 조선특무로 무함했던 사람이지요. ”

    “문화혁명이 총적으로 잘 못 되였지요. 하지만 문화혁명에 참가한 사람들이 다 나쁜것은 아닙니다. 조직에서 시킨 일이니 조직에서 책임져야지 개인이 책임지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지만 이 기간 남을 무함하거나 때리거나 해치는 사람은 나쁘지요.”

 

“철학은 언제나 실사구시해야지요. 인생도 마찬가집니다. 솔찍해야지요.”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전국적으로 진리표준(真理标准)에 대한 토론이 전개되였다. 이는 문화대혁명후 가장 큰 규모의 맑스주의 자아교양활동으로서 실천만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규준이라는 보편적인 진리를 명확히 하였다.

  이 시기 최교수는 길림에서 리론간부 리론토론회에 글을 발표했다. “유심주의 세계관의 대폭로(唯心主义世界观的大暴露)”라는 이 글은 당시 길림성혁명위원회의 주임의 그릇된 작법을 비판하였다. 그들의 주장은 먼저 사상이 있어야하고 그 사상에 따라 자료를 찾고 또 사상을 증명해야한다고 했다. 유심주의적인 거꾸로 된 작법이였던 것이다. 이를 비판하는 최교수의 글은 길림성 리론지인 “신길림(新吉林)”에 발표되였다. 이 글은 길림성에서 그릇된것을 바로잡는(拨乱反正) 리론적 근거로 되였다.

  1978년에 이르러 중국공산당의 사상리론 교양의 최고학부인 중앙당학교에서도 진리의 표준에 관련한 토론이 심각하게 진행되고있었고 점차 실천만이 진리의 표준이라는데로 의견이 모아지기 시작하던 때였고 본격적으로 과거의 그릇된 것을 바로잡고 있을때였다. 중앙당학교의 많은 글들이 최교수의 관점과 같았고 또 중앙당학교에서도 최교수의 글에 중시를 돌리고있었다. 그리하여 얼마후 최교수는 중앙당학교로 조동되여 맑스주의리론과 철학 강의를 하게 되였다. 개인 서류도 보지 않고 중앙조직부의 비준을 거쳐 그냥 중앙당학교로 조동하게 되였던것이다.

  “실천만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규준이라는것은 맑스주의의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하지만 모택동을 우상화하고 모택동사상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던 문화대혁명 직후였기에 이 진리표준을 다시 내세우기까지는 쉽지 않았지요. 이것으로 검증한다면 문화대혁명은 틀린것이고 모택동에게도 문제가 있지요.”

    중앙당학교에 전근된 최교수는 리론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맑스레닌주의 철학과 경전을 강의하게 되였다. 그는 독일어를 자습하여 직접 철학론문을 번역하면서 강의에 열중하였다.

1981년 정당(整党)이 시작되였다. 중앙당학교에서는 최교수를 정당판공실의 성원으로 선정하고 조직조 조장을 맡겼다. 정당이란 학교내의 모든 임직원을 상대로 문화대혁명시기 잘못된 일이 없는가를 밝혀내는 일이였다.

“문화대혁명의 교훈이 있는데 문제를 확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되였어요. 절대 근거가 없이 사람을 비판하지 말아야지요. 그래서 대자보를 썼거나 조직의 명령에 따라 비판대회에 참가한 정도는 그냥 다 넘어가게 했습니다. 실사구시적이여야지요.”

이처럼 실사구시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구체적으로 개인과 집단간의 책임을 분별하여 일을 했기 때문에 중앙당학교에서는 순조롭게 정당을 완수하게 되였다. 하지만 청화대학 같은 경우에는 문제를 확대화하여 교육장을 하던 사람까지 걸려들어 철직받고 쫓겨난 사례도 있었다한다.

“철학은 실사구시해야 됩니다. 또 철학으로 사업을 지도하니깐 사업을 실사구시적으로 진행해야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지요. 사람은 솔찍해야하거든요.”

실사구시해야하고 진실하게 살아야한다는것이 최교수의 인생관이라고 할수있다. 그는 바로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사업을 했고 학문을 연구했으며 또 진실하게 인간을 대해왔던 것이다.

1985년에 최교수는 중앙당학교 과학연구판공실의 직함처(职称处) 처장을 맡게 되고 1991년에는 학위판공실 주임을 맡게 된다. 당학교는 원래 공무원계렬에 속했기때문에 직함을 평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학교 교장으로부터 시작해 당학교를 교육계렬에 포함시켜 직함을 평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이 임무를 맡은 최교수는 문건을 작성해 중앙조직부에 보냈다. 드디어 중앙조직부의 비준을 거쳐 현 당학교는 대학전문학교 체제로, 성 당학교는 본과체제로 하기로했다. 그리하여 많은 로간부들이 직함을 가지고 교수로 되였다. 물론 여기에는 중앙직함개혁 지도소조의 비준을 받기 위한 최교수의 숨은 노력이 많았다.

“그때까지 공무원으로 대접받았는데 후에는 교수 대접을 받게 되였지요. 명색이 학교인데 그때에야 교수가 있게 되였던 것입니다.”

최교수의 얼굴에는 만족의 빛이 흘렀다.

학자로서의 최교수는 가치 있는 론문들을 많이 써냈고 또 조선독립운동사에 관련한 연구도 많이 진행해왔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늘 구체적으로 설명하려하지 않았다. 응당 해야할 일을 했을뿐이라고 했다.

최교수가 발표한 론문들을 정리할것 같으면 철학론문이 많다. 특히 1993년에 발표한 “조선유학사의 특성과 역활(朝鲜儒学史的特点及其作用)”이 주목되는데 론문은 중국에서 처음으로 조선유학의 핵심인 퇴계(退溪) 리률곡(李栗谷)을 언급했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성리학이나 주자학으로 퇴계를 많이 연구했지만 최교수는 변증법적으로 연구했다. 독일의 헤겔과 퇴계를 련계시키면서 변증법을 리용했던 것이다.

또 퇴계 리률곡의 사상을 실학사상과 련계 시켜 연구하여 돌파적인 관점을 제기하고있다. 일반적으로 률곡을 성리학자로 보는데 그의 실학사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극히 드물다. 최교수는 실학과 성리학을 분리하여 률곡의 실학사상내용을 쭉 뽑아서 문제를 증명해 나갔으며 결국에는 실학사상은 조선유학사상의 새로운 단계라는 주장을 내세워 학계를 놀래웠다.

조선지사들의 독립운동을 연구하면서 최교수는 민족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8차에 걸쳐 연안에 다녀오면서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에 아무런 기념물도 없는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일본포로들을 교육하던 곳까지 기념물을 만들었는데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을 위해 그처럼 많은 피를 흘리며 싸워온 우리 조선혁명가들에 대한 기념물이 없다는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데요.”

최교수는 관련 자료들을 모아가지고 연안시 박물관 관장에게 서한을 보내 기념비를 세워야할 중요성과 의의를 강조하였다. 그의 거듭되는 노력을 거쳐 드디어 연안시 라가평(罗家坪)에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라고 밝힌 돌비석이 있게 되였다. 뿐만 아니라 관련 부문과 책임자에게 편지를 보내 료녕성 신빈현에다 리홍광의 조각상을 세우도록 했고 길림성 반석(磐石)의 홍광중학교에 리홍광에 관련한 자료들을 제공하기도 했다.

“책만 보고 력사를 운운해서는 안됩니다. 꼭 자료를 충분히 장악해야하고 현지를 답사해야합니다. 이 두가지가 겸비되여야만이 진정한 연구가라고 생각됩니다.”

최교수의 다년간의 노력을 거쳐 관내지역에서 투쟁했던 많은 조선혁명가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였다. 현장을 답사하고 박물관이나 서류관에서 자료를 찾고 또 유가족을 만나고 하면서 흘러간 력사를 진실하게 살려내기 위해 노력해왔던 것이다.

 

    2005년 중국에서는 항일전쟁 승리 60주년과 세계 반파쑈전쟁 승리 60주년을 성대히 기념하였다. 기념행사의 하나로 우리가 제작한 방송다큐 “불멸의 발자취”, 관내지역 조선민족 반일투쟁 사적이 중앙인민방송과 연변텔레비죤방송을 통해 중국의 광범한 조선족과 대면하게 되였고 또 민족출판사에 의해 책으로 정리되여 조선족 독자들과 만나게 되였다. 조선혁명가들의 투쟁사에 크게 감동된 청취자와 독자들은 다투어 편지와 전화를 보내왔으며 뒤에서 제작팀을 유력하게 도와준 최교수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뜻을 전해왔다. 무더기로 쌓인 편지들은 최교수에 대해 알고싶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였다.

    “우리 력사가 실사구시적으로 우리 조선족에게 알려졌다니 그만큼 더 기쁜일이 없다”며 최교수는 “이것만으로도 족하다”고 하셨다.

“철학은 언제나 실사구시해야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인데요. 환경조건이 허락하지 않으면 침묵을 지킬지언정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합니다. ”

한평생 맑스주의를 신앙하면서 실사구시적으로 진실된 삶을 추구해왔던 최교수였다.

진정한 공산주의자는 민족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한다는 최교수의 말을 다시 되새겨 본다.

“구경 우리는 부끄럼 없이 인생을 살고있는것일까?”

스스로 손을 가슴에 얹고 생각해 보게 된다.

 

최룡수 약력

1936년 료녕성 신빈현에서 출생

1954년 신빈조선족중학교를 졸업하고 1959년 6월 중국공산당에 가입.

1962년 9월 북경대학 철학학부를 졸업하고 길림전력학원 맑스레닌주의 교학연구실 교원으로 임직.

1964년 길림전력학원 당위원회 “5반”판골실, 무장부에서 사업.

1965년 농촌의 사회교육사업조 조장

1966년 길림전력학원 당위원회 위원, 공청단위원회 전직 부서기,

길림시 공청단위원회 위원을 력임.

문화대혁명시기 박해를 받음.

1973년 10월 중국공산당 길림성 직속기관 당위원회 선전처에 조동. 간부교양과 대 대만선전사업을 책임.

1978년 6월 중국공산당 중앙당학교 철학실에 조동.

1985년 9월 중앙당학교 과학연구판공실 직함처 처장.

1991년 중앙당학교 과학연구판공실 부국급 당지부 서기.

1993년 중앙당학교 과학연구판공실 부주임. 교수직함.

1995년 국무원 특수 수당금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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