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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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편]마지막 미쟁이(2) 댓글:  조회:160  추천:0  2019-07-17
마지막 미쟁이(2) 리승국   6.  어씨가 일어나니 언제 일어났는지 아들이 벌써 마당에 나와 자전거바퀴에 펌프질하고 있었다. 보니 얼굴에 신심 같은 홍조가 비껴있었고 두 눈에는 정기가 넘쳐 흘렀다. 어씨는 늘 아들과 함께 일하러 다니는 것이 마음에 걸려 간혹 용돈도 찔러주군 하지만 하냥 아들한테 죄진 기분을 가무릴 수 없었다. 하지만 아들은 한번도 투덜거리지도 심술 부리지도 않고 하루 세끼 해주는 밥을 먹고 온종일 어씨를 따라 삯일을 하러 다니며 아들의 자리를 충실하게 지켜가고 있었다. 어씨는 그럴 때마다 아들로 인해 자부와 긍지를 가끔씩 느끼군 했다. 아들도 근간에 많이 셈이 든 듯 싶기도 했다. 예전처럼 철딱서니 없이 시장돌이도 하지 않았고 점점 주변에 친구들이 보이기도 했으며 어떤 날에는 거울에 마주서서 한참씩 얼굴을 다듬기도 했다. 그런 아들을 바라보며 어씨는 자기가 바라던 바에 즐거워했고 기대에 차있기도 했다.  “오늘은 길이 좀 머니까 바람을 많이 넣어야겠다.” 어씨는 손을 뻗어 자전거 다이야를 꾹꾹 쥐여보고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미장칼 하나 더 챙기쇼.” “왜?” 어씨는 진지해진 아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함께 미장을 해야 빨리 끝나지. 아버지 혼자서 언제 다 끝내겠슴까?” “오늘 일은 미장할 일이 아니니 미장칼은 필요없다. 날래 들어가 엄마 아침을 거들어라. 오늘 일찍 떠나가자.” 아들은 바람을 다 채운 자전거를 울바자 앞에 세워놓고 집으로 들어갔다.  어씨는 아들의 튼튼하게 여물어가는 몸통을 대견스레 바라보며 변소로 달려갔다. 어씨는 아들과 함께 품삯길에 올랐다. 오늘의 목적지는 시가지에서 30여리 상거한 시골이였다. 오늘 어씨는 아들과 함께 그 곳에서 하루 동안 하수도를 파는 일을 해야 했다.  웬 일인지 오늘 아들의 기분은 좋아보였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내내 코노래를 흥얼거렸고 두 눈을 쪼프리고 길 량쪽으로 펼쳐진 전야와 멀리 산발을 흔상하고 있었다. 어씨도 아들의 눈길을 따라 전야와 멀리 산발을 바라보았다. 자연은 모든 것을 감내한 듯 말없이 풍요와 인내를 조용히 말하는 듯했다. 멀리 산발과 산발 사이로 운무가 피여오르고 아직 떠오르지 않은 동산 너머의 해빛이 먼 산꼭대기에 빨간 모자를 씌워주고 있었다. 차지만 시원한 공기가 골안에서 흘러나와 어씨와 아들이 가고 있는 포장도로에까지 퍼져왔다.  “아침공기를 실컷 마셔라. 이른아침 공기를 마시면 온 하루 피곤도 모르고 일할 수 있단다.” 아들은 어씨를 건너다보며 웃었다.  어씨는 아들이 왜 웃는지 알고 있었다. 터무니없는 도리를 과학적인 듯 외곡하는 어씨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웃음이였다. “믿지 않아두 좋아. 이 애빈 여직껏 이런 공기를 마시며 일했기에 힘든 줄 몰랐단다. 아마 니눔과 이 애비는 체질이 다른가 보다. 허허허.” 어씨는 먼산을 바라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그 웃음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오랜만의 웃음이였다.  “아들. 이 애비가 20여년 간 이렇게 아침 일찍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얼마나 많은 자전거 다이야를 바꾸었는지 맞춰보아라.” “50개.” 아들은 대수롭지 않게 주어댔다.  어씨는 아들의 건성으로 하는 대답에 실망한 듯 탄식 같은 소리로 아들을 나무랐다. “그걸 대답이라구 내뱉냐?” “그럼 백개?” 아들이 되묻자 어씨는 손을 홱 하고 내저었다. 자기 마음을 조금도 알아봐주지 못하는 아들이 원망스러웠다. 거짓으로라도 천개라고 하면 입이 삐뚤어지기라도 할가? 금방까지 시원한 공기를 마셨던 페부에 열기가 올리밀기 시작했다. “니눔한테 이런 것까지 각인시키려는 내가 더 한심하구나. 관두자. 니들 눈엔 이 자전거가 꼴보기 싫을 테니까 이후에 애비가 죽으면 이 자전거두 함께 불태워 보내거라. 아마 죽어서두 이 자전거를 타고 다닐 팔자 같구나.” 어씨는 페달을 콱 밟았다. 자전거는 씽하니 앞으로 굴러갔다. 그 뒤로 아리숭한 고민에 빠진 아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따라섰다. 일이 시작되였다. 시골의 하수도는 시가지와 달리 단독으로 구뎅이를 파고 거기에 벽돌이나 돌을 쌓고 그 우에 덮개를 덮은 후 흙으로 묻었다. 이런 하수도는 대소변이나 오물이 구뎅이에 찼다가 땅속으로 스며들기에 시간이 오래가면 인력으로 가셔내야 했다. 하지만 가셔내는 그 작업이 엄청 역겨웠다. 여러해 쌓여있던 썩을 대로 썩은 오물들이 풍기는 가스냄새는 사람을 쓰러뜨릴 정도로 지독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대변소변은 밖에 있는 변소를 리용하고 다만 세수물이랑 그릇 씻은 구정물 따위만 하수도에 버렸다. 오늘의 주인은 80이 넘은 늙은 량주였는데 자식들이 몸이 불편한 로인들이 밤에 바깥출입을 하다가 락망이라도 하면 큰일인 것을 대비해 어씨를 불러 하수도를 파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어씨는 이 집 자식들의 효도에 감격해 하수도를 잘 만들어주리라 결심했다. 어씨는 먼저 자식들의 요구를 귀납해 가장 합당하게 그리고 오래 쓸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어씨는 얼렁뚱땅 만들어놓은 후 돈 챙기고 가버리는 그런 얼치기 미쟁이들하고는 달랐다. 어씨는 여직껏 일해오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고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어씨는 이런 생각을 아들한테도 일하는 시시각각 주입시켰다. 아들은 듣는둥 마는둥 했지만 일하는 솜씨에서 어씨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어씨는 인간의 도리를 재간을 물려주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고 실천에 옮기군 했다. 일이 시작되였다. 금방 땅딱지를 떼기 시작했는데 해가 열기를 뿜기 시작했다. 어씨와 아들은 번갈아가며 곡괭이를 휘두르고 삽으로 퍼내기를 반복했다. 얼마를 파내려가지 못했는데 벌써 온몸이 물주머니가 되였다. 주인집 늙은 량주도 어씨네 부자가 땀 흘리는 모양이 안스러웠는지 랭수를 담아다 주었고 얼음과자를 랭장고에서 꺼내 어씨네 부자한테 쥐여주었다. “쉬면서 하라구. 쯔쯔쯔. 이 늙은 것들이 여태 살아있어가지구 사람을 고생시키는군.” “우린 먹구 살기 위해 하는 일이니 응당합지유. 허허허.” 어씨가 아들을 건너다보니 아들은 해빛이 숫구멍을 지져대는데도 말도 없이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마치 금방 길들여진 소처럼 부지런히 일에 여념없었다.   어씨의 마음은 순간 알싸해지며 서글픈 생각과 함께 아들이 가련해보이기까지 했다. 여직껏 키우며 잘 먹이지 못하고 잘 입히지 못해도 그냥 지나쳐왔지만 아들이 자기를 따라다니며 일을 하는 모습을 보니 웬지 생각이 점점 달라졌다. 오전 해를 거의 넘기자 두메터 가량 되는 깊숙한 구뎅이가 생겨났다. 마치 순간 생겨난 싱크홀 같았다. 아들은 깊숙한 구뎅이를 내려다보며 히죽이 웃었다. 마치 전리품을 흔상하는 병사 같이 얼굴에 자호감과 승리감으로 얼룩진 그림자가 잔뜩 비껴있었다.  어씨도 옆에서 같이 웃어주었다. 아마도 이것은 아들이 이 세상에 태여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힘에 의해 만든 성과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씨는 미장칼을 아들의 손에 쥐여주었다. “오늘 벽돌 쌓기는 네가 담당해라. 이 애비가 거들어주마.” 어씨는 아들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직시했다. 어씨의 믿음 어린 눈길에 흔들리던 아들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아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쉼 쉬고나자 또다시 땀으로 반죽된 일이 시작되였다. 생각밖으로 아들의 벽돌 쌓는 솜씨는 례상외였다. 서툰 손놀림도 없이 벽돌과 벽돌을 물리는 것이 마치 오래동안 해온 장인마냥 흠집이 거의 없었다.  “아들, 어디 가서 벽돌을 쌓아봤냐?” “전번에 담장 쌓을 때 해본 게 전부임다.” 아들은 벌씬 웃었다. 자기의 솜씨를 긍정해주는 데 대한 대답이였다. “피를 속이지 못하겠구나.” 아들이 한자 쯤 쌓아올리자 어씨가 손을 바꿔주며 약간씩 잘못된 곳을 지적했다.  일반 담장을 쌓는 것보다 원 모양으로 쌓는 것이 기술과 경험을 겸비해야 하는 난도가 있는 일이였지만 아들은 거뜬히 쌓았고 오차도 별로 없었다.  어씨는 이것을 운명의 조화라고 여길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은 먹고 살기 위해 배워낸 재간이였지만 아들은 마치 타고난 재간인 듯 어씨 앞에서 스스럼없이 자신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해가 거의 저물어가서야 어씨와 아들의 합작품이 만들어졌다. 아들은 서쪽에 붉게 걸린 저녁노을띠를 바라보며 이마에 남아있는 마지막 땀방울을 닦았다.  “힘들지?” “아니 괜찮슴다.” 어씨는 아들의 잔등에 걸친 적삼 우로 허옇게 내밴 소금기를 바라보며 쓸쓸하게 웃었다.  주인집 량주가 건네주는 품값을 받아 옆차기에 챙겨넣고 그들은 귀로에 올랐다. 고된 하루일의 뒤를 따르는 고달픔은 옆채기에 두툼하게 찔러넣은 돈 때문에 가뭇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들, 오늘 저녁에는 세치네탕을 먹자구나.” “좋도록 하쇼.” 아들은 가타부타 투정도 없었다. 어씨가 죽을 마시자고 해도 흔쾌히 대답할 듯했다. “허참. 자식.” 어씨는 색조가 점점 바래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페달을 밟았다.  어씨는 아들과 함께 바래져가는 락조 속을 향해 달려갔다.    7.  며칠 후 어느 날 아침 시한폭탄은 끝내 터지고야 말았다. 마누라는 끝내 병원으로 실려갔고 단두대 같은 수술대에 올라가 생과 사를 넘나들고 있었다.  어씨는 머리를 싸쥐고 수술실 앞에 쭈크리고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아들은 여기저기 뛰여다니며 돈을 지불하고 입원수속을 마쳤다. 수술실로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드나들었는데 저마다 표정이 마치 웃기라도 하면 환자가 죽어버리기라도 하는 듯 하나같이 굳어있었다.  아들이 숨을 죽이고 어씨의 곁에 와 조용히 앉았다. 어씨가 바라보자 아들은 입원수속을 마친 령수증을 어씨한테 건넸다. 어씨는 받지 않고 힐끔 종이장을 들여다본 후 얼굴을 돌려 수술실문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 문이 열리면 어씨와 아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어씨의 앞으로 오고가던 간호사와 의사들이 줄어들고 한참은 고즈넉해졌다. 어씨는 시간이 얼마나 지나갔는지 지금 어느 때인지도 모르고 그냥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아들이 음료수를 손에 쥐여주어서야 갈증이 나는 것을 의식했다.  “7시간 지났슴다.” 어씨는 놀라운 눈매로 아들을 쳐다보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어씨는 수술실 문앞으로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았으나 문틈으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씨는 마누라가 담가에 실려 분명히 이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보았지만 지금 이 시각 도리여 자기가 잘못 보지 않았나 의심이 들었다. 어씨는 혹시 마누라가 집으로 가지나 않았나 헛된 생각까지 했다. 이때 수술실문이 열렸다. 흰 보자기를 몸에 감은 채 마누라가 담가에 실려나왔다. 마누라의 코와 입에는 숱한 비닐도관이 꽂혀있었고 주렁주렁 비닐봉지가 담가 옆에 세워진 쇠꼬챙이에 달려있었다.  “비키세요.” 간호원의 앙칼진 소리에 어씨는 한쪽으로 물러났다.  마누라를 담은 밀차는 어느새 굽이를 돌아 구급실이라고 쓴 칸으로 사라졌다.  어씨가 어정쩡해 서서 마누라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는데 뒤에서 마누라의 이름을 부르며 보호자를 찾았다. “예. 여기 여깁니다.” 어씨는 급한 나머지 손을 번쩍 들었다. “환자는 24시간 간호가 필요합니다. 아직 의식불명이구요. 생사여부는 이제 관찰해봐야 합니다. 아마 2-3일 후에 깨여나면 구사일생이고 안 그러면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그럼 어찌하믄 살 수 있나유?” 어씨는 의사의 손을 꽉 잡았다. 의사의 손은 땀에 푹 젖어있었다. “워낙 뇌출혈이 심해 많은 면적에 피가 퍼진 상태라 회복가능성은 50%라고 보아집니다. 명이 길면 살 수 있을 겁니다. 운명에 맡기십시오.” 의사는 어씨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구급실로 들어가버렸다. 어씨는 의사의 허락을 받고 구급실로 들어갔다. 마누라는 조용히 침대에 누워있었다.  마누라 침대머리의 현파기 액정판에 마누라의 심장박동수가 파란 선을 그으며 마치 수소가 걸어가며 늘여놓는 오줌자리마냥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흰 천에 감싸여 누워있는 마누라의 몸은 렴습을 마친 시신 같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엊저녁까지만 해도 래일 함께 랭면 먹으러 가자고 지청구를 대던 녀편네가 이렇게 혼곤히 잠든 채 저승문어구에 서있을 줄은 어씨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였다. 말도 나눌 수 없는 마누라 앞에 한참을 서있었지만 어씨는 자신이 이 시각 마누라한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저 묵도하듯 마누라 손등에 꿰여진 주사바늘을 내려다볼 뿐이였다. 한참 후 간호사의 축출에 마누라의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을 다시 한번 일별하고는 밖으로 쫓겨나왔다. 아들이 복도의 걸상에 앉아 멍하니 맞은켠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줄근해진 아들의 모습은 먹다 남은 밀가루포대 같았다.  “아마두 후사를 준비해야 할가 부다.” 어씨의 말에 묵묵히 앉아던 아들이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씨는 들먹이는 아들의 어깨를 그러안아주었다. 그리고는 등을 도닥여주며 중얼거렸다. “니 에미두 불쌍하다. 더럽게 못난 나를 만났으니 저렇게 될 수 밖에.” 아들은 말없이 흐느끼기만 했다. 한참 후 어씨는 아들한테 나가서 식사하라고 타일렀다. “어디 가서 끼니나 에때워야지. 여긴 내가 지키마.” “먹고 싶지 않슴다.” “그래두 먹구 힘 내야 엄마를 돌볼 게 아니냐?” 어씨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목구멍으로 올리밀어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말았다. 어씨는 말하다 말고 아들의 등을 밀었다. 아들은 입원수속 령수증을 어씨한테 넘겨주고는 구급실 쪽을 힐끗거리며 무거운 걸음으로 병원을 나갔다. 아들이 사라지자 어씨는 눈물을 왈칵 쏟았다. 참고 쌓였던 눈물이 골물이 터지듯 한꺼번에 쏟아져 흘러내렸다. 그리고 목이 꺽 메여왔다. 어씨는 꺼이꺼이 울었다. 사람들이 지나가며 여겨보았지만 그는 더 세게 울었다. 한참을 그렇게 마음 놓고 울었다.  지나가던 간호원이 어씨의 모양이 볼썽사나왔는지 위생지를 한웅큼 가져다 어씨의 곁에 놓아주었다. 그래서야 어씨는 천천히 마음을 눅잦히고 눈물코물을 훔쳤다. 어씨는 이 모든 것이 도대체 누구 때문인지 아리숭했다. 자기 때문이라고 하자니 너무 비참했고 누워있는 마누라 때문이라고 하자니 잔인했으며 아들을 탓하자니 후안무치했다.  어씨는 손에 들려있는 령수증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아래켠에 적혀있는 금액에 눈을 모았다. 거기에는 네자리 큰 수자가 떡하니 적혀있었다. 이 돈은 어씨가 마누라 몰래 저축해둔 돈이였다. 그리고 집도 사고 아들도 장가보내야 할 돈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마누라의 목숨을 사야 할 돈이 되고 말았다. 얼마를 주어야 마누라 목숨을 건져올지 막막할 뿐이다. 이제 이런 종이장을 몇장 더 모아야 마누라가 침대에서 일아날 수 있을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씨는 걸상에서 일어나 주춤주춤 구급실로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부연 유리에는 유령 같은 그림자가 언뜻거리고 기기들이 내는 전자파소리가 간간히 들릴 뿐이였다. 어씨는 구급실문 손잡이를 잡았다가 그대로 놓아버리고 몸을 돌렸다. 어씨는 도로 걸상에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는 홀로 중얼거렸다. “죽지 않을 거야. 어찌 쉽사리 죽을 수 있단 말인가?” 어씨는 갑자기 어금이를 뿌드득 으깨지게 깨물었다. 원쑤 같던 마누라의 존재감이 이렇게 큰지를 미처 몰랐던 자신이 너무 어처구니 없게 느껴졌다. 한참 후 아들이 고기소를 넣은 만두를 비닐봉지에 싸들고 왔다. 아들이 이젠 셈이 들어 어씨의 한쪽 어깨가 되여가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멋을 느끼고 있을 때 마누라가 넘어졌으니 어씨로서는 맹랑하고 억울하기까지 했다. “넌 먹었냐?” “네. 식기 전에 빨리 드쇼.” 아들은 구급실 쪽을 일별하고는 어씨 곁에 앉았다. 그리고는 만두가 들어있는 비닐봉지를 들고 멍하니 앉아있는 어씨를 툭 건드렸다. “아버지, 너무 상심마쇼. 이게 다 아버지 팔자가 사나와 그런 거니 그대로 받아들이쇼.” 어씨는 아들을 낯선 사람처럼 돌아다보고는 말없이 만두를 꺼내 우적우적 씹어삼켰다. 어씨가 만두 하나를 거의 먹었을가 했을 때 의사가 다가왔다.  “오늘은 간호사가 간호를 책임집니다. 여기에 있어도 별 도움이 되지 않으니 집으로 돌아갔다가 래일 다시 와보십시오. 그리고 래일 치료비 만원을 더 입금시켜야 합니다.” 어씨는 아들을 돌아다보고는 의사한테 한발 다가섰다. “오늘 5천원 넘게 결산했는 걸유. 무슨 돈을 또 만원씩이나 입금시키라는 건데유?”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데 만원이 대숩니까? 참 한심합니다. 병원에서 지금 살리려구 전력을 다하는 게 보이지 않습니까? 환자가족에서 사람 살릴 성의가 없다면 우리도 포기하겠습니다.” 의사가 랭랭하게 찬 기운을 뿜으며 돌아서자 어씨는 다급히 의사의 옷깃을 잡았다. “아니 잘 몰라서 그래유. 살려야 합지유. 살려야.” “그럼 래일 수금처에 가서 만원을 입금시키십시오.” 의사는 쌩하니 가버렸다.  어씨는 입안에 남은 만두 찌꺼기를 꿀꺽 삼키며 아들을 돌아다보았다.  아들의 얼굴은 이미 까맣게 죽어있었다. “어디에 그렇게 많은 돈이 있슴까?” “가자. 갔다가 래일 다시 오자꾸나.” 어씨는 아들 앞에 서서 허청허청 병원현관을 지나 회전문을 빠져나갔다.  밖은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들어올 때 아침이였는데 벌써 저녁이 되다니. 어씨는 참 시간이 빨리도 흘러간다는 생각을 하며 곁으로 다가오는 아들의 손을 그러쥐려고 손을 아들한테 뻗었지만 어둠 속에서 아들은 그대로 앞으로 걸어가버렸다. 어씨는 손을 거둬들여 호주머니에 쑤셔넣고는 저금카드를 꼭 그러쥐였다.   8.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는 분명히 녀자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라고 여기며 어씨는 문을 열었다. 문밖에 서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어씨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을 듯 휘청거렸다. 글쎄 마누라가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빛 속에 서서 웃고 있었는데 몸에는 환자복이 걸쳐져있었다. “임자가 어찌된 일이우? 왜 왔수?” 어씨는 마누라가 반갑기보다는 무서워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내가 뭐 귀신임두. 그렇게 무서워함두?” 마누라는 어씨를 밀치고 집안으로 들어오더니 부엌으로 들어가 밥을 짓기 시작했다. “오늘 일하러 일찌감치 가야 하는데 아침밥을 지어야지.” “임자 아직 환자인데 어떻게 병원에서 나왔수? 빨리 병원으로 가야지.” 어씨는 소리쳐 아들을 깨웠다. 하지만 아들은 깨여날 줄을 모르고 깊은 잠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어씨는 그대로 달려가 마누라를 그러안았다. 생각밖으로 마누라는 아주 가벼웠고 몹시 가늘었다. 어씨는 아마도 병으로 앓다나니 하루 사이에 많이 여위였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머리를 돌려 어씨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마누라가 아니라 생전 보지도 못한 며느리였다.  “아버님 취하셨나요?” 며느리는 존칭어를 간사하게 구사했는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말투 같았다.  “취한 게 아니라 귀신한테 홀렸나 보구나. 혹시 세치네탕 끓여봤나?” 어씨가 며느리한테 중떠보듯 묻는데 어디선가 세치네탕 냄새가 풍겨왔다.  어씨가 두리번거리며 세치네탕 냄새가 나는 곳을 찾는데 며느리 뒤쪽에 마누라가 세치네탕 그릇을 두 손에 받쳐들고 서있었다. “뜨겁습꾸마. 빨리 와서 받아갑소.” 어씨는 며느리를 밀어내며 마누라한테로 뛰여가 김이 문문 나는 세치네탕 그릇을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는데 마누라가 세치네탕 그릇을 어씨 몸에 던지며 소리쳤다. “돈 만원을 빨리 내놓으라니까.” 뜨거운 세치네탕 그릇이 그대로 어씨의 몸에 와 떨어졌다.  “으악.” 어씨는 몸을 솟구치며 펄쩍 뛰였다.  … … 어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몸을 만져보니 멀쩡했고 자기는 구들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사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창밖에서 새벽빛이 흘러들 뿐 마누라도 생뚱같은 며느리도 아무 것도 없었고 웃칸에서 아들의 코 고는 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어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기가 꿈을 꾼 것을 의식하자 허구픈 웃음을 흘렸다. 망상 같은 꿈을 되새기며 어씨는 한참을 그 자리에 그린 듯 앉아있었다.  “오늘 만원을 입금시켜야 한다고 했지.” 어씨는 혼자소리로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기신기신 일어나 옷을 꿰여입었다. 대충 눈곱을 쥐여뜯으며 어씨는 밖으로 나왔다. 밖은 이미 훤히 밝아오기 시작했고 단층집들 굴뚝에서 나온 연기가 무겁게 골목에 가라앉아있었는데 사람들의 그림자가 유령 같이 여기저기에서 기여나와 혼탁한 연기 속으로 사라져갔다. 어씨도 끌리듯 그 유령 같은 그림자들을 따라 골목을 빠져나왔다. 매캐한 석탄연기 속을 빠져나오니 높이 솟은 아빠트단지가 앞을 막았다. 여기부터는 록화가 잘되여있었고 길 량켠에 화단도 가꿔져 같은 도시 다른 세상을 방불케 하는 풍경이였다.  어씨는 길게 탄식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가로수가 우거진 소구역에는 시원한 공기가 가득 운집해 페부를 시원하게 씻어주었다. 아빠트단지를 빠져나오는 내내 어씨는 심호흡을 멈추지 않았다. 어씨가 거리로 나서니 하루의 바쁜 일상을 시작하러 나가는 사람들의 흐름이 시작되였다. 차도에는 차, 인행도에는 사람, 길옆의 가게는 언녕 문을 열고 아침 스낵들을 차려놓고 고래고래 사구려를 불렀다. 바쁜 일상을 시작하는 그 속을 걸어가는 어씨는 자신이 한낮 빼놓은 낫자루 같아 부끄러워졌다.  어씨는 그들이 차려놓은 음식들을 바라볼 렴치조차도 없다는 자괴심을 지닌 채 드바삐 지나쳐 사거리에 들어섰다. 그 곳에는 현금인출기가 가설되여있었고 돈을 인출해야 했기 때문이였다. 어씨는 두번에 걸쳐 돈을 인출해냈다. 두툼한 돈뭉치를 호주머니에 쑤셔넣고 여액을 확인했다. 액정판에 20, 000이라는 수자가 나타났다. 어씨는 자기가 시간 나면 여기 인출기로 찾아와 천문수자 같이 나타나는 저금 금액을 확인하며 즐거워했던 것을 떠올리며 실소를 던졌다. 자기가 천문수자라고 하던 저금이 몇번의 손가락 조작으로 훌쩍 날아나버리고 있는 것에 허탈을 느꼈다. 메질에도 깨여지지 않을 바위돌 같이 채곡채곡 저축해놓았던 돈이 이렇게 허물어질 줄을 어씨로서는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는 일이였다. 먹고 싶은 술도 세치네탕도 마음대로 먹지 못하며 남한테 맞아터지고 피 흘리며 벌어모은 돈이 이렇게 값이 없을 줄을 어씨는 정말 알지 못했다. “아무쪼록 별일만 없어야 하는 건데.” 어씨는 저금카드를 뽑아 손아귀에 꼭 틀어쥐고 현금인출기박스 안에서 나왔다. 거리는 각종 소음과 냄새로 점점 혼탁해졌다.  어씨는 길옆의 수많은 먹거리 속에서 겨우 두부 한모를 사가지고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은 그 사이 일어나 부엌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엄마 없는 자리가 아름차 보였을 거라고 어씨는 생각하며 손에 들고 온 두부를 아들한테 건넸다. “간단히 먹고 병원에 빨리 가자.” “돈 만원을 내야 하는데…” 아들의 기 죽은 듯한 소리에 어씨는 아들을 다시 한번 쳐다보며 호주머니에서 돈뭉치를 꺼내 식탁 우에 던졌다. “이 애비가 모아놓았던 돈이다.” 아들은 돈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어씨를 건너다보았는데 어씨는 아들의 눈빛이 순간 밝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하늘이 무너져두 솟아날 구멍이 있다잖냐?” 어씨는 치석이 누렇게 낀 이를 드러내고 소리없는 웃음을 웃었다. 아침을 대수 에때운 어씨는 아들과 함께 병원으로 달려가 돈을 수금처에 밀어넣고 마누라가 누워있는 구급실로 달려갔다. 구급실에는 벌써 의사들이 여러명 와서 환자들의 상황을 확인하고 있었다.  의사들의 어깨너머로 마누라를 들여다보니 마누라의 모양은 어제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얼굴의 구멍마다에 어제와 똑같은 비닐도관이 꽂혀있었다. 어씨는 의사들이 주고받는 말소리를 들었다. 마침 의사들이 마누라의 병증상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혈압이 지금처럼 안정되면 한 이틀 지켜보다가 입원실로 옮기시오. 생각밖으로 호전이 빠를 것 같습니다.” “그래유? 아이구 이런. 정말 감사해유.” 어씨는 앞에 서있는 의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우리한테 감사해하지 말고 안해 분한테 감사해하십시오.” “그럼 그럼유.” “오늘부터 여기 있으면서 옆을 지켜야 합니다. 혹시 깨여날지 모르니까요.” “그러지유. 응당 지켜야 합지유.” 의사들은 연신 허리를 굽석이는 어씨의 옆을 지나 밖으로 나갔다. 어씨는 간호사가 알려주는 주의사항들에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예예를 불렀다. 간호사가 나가자 어씨는 마누라 앞으로 다가갔다. 마누라는 죽은 듯이 고요히 누워있었다. 다만 호흡기와 침대머리에 놓인 기기의 액정판에서 흘러가는 그라프가 아직 마누라가 살아있음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였다. 그래도 어씨는 조용히 마누라의 얼굴에 대고 중얼거렸다. “그만 자구 좀 깨여나보지 그러우?” 아들이 뒤에서 툭툭 건드렸다.  어씨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걸상을 끌어다 침대 옆에 놓고 마누라를 마주향해 앉았다. 어씨의 손은 마누라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아들은 어씨의 하는 양을 뒤에서 지켜보다가 밖으로 나가버렸다. 어씨의 피곤기가 가득찬 눈에서 피 같은 것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제발 죽지만 말라니까.” 어씨는 혼자소리로 뇌까리며 마누라의 손을 끄당겨 그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마누라의 손바닥에 눈물이 즐펀하게 쏟아졌다. 어씨는 한참을 그렇게 흐느끼다가 얼굴을 들었다. 희뿌연 눈길에 마누라의 처져내린 볼이 눈에 띄였다. 어씨는 눈물을 닦고 다시 가난이 꼬질꼬질 묻어있는 주름 잡힌 마누라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처음 마누라의 얼굴에 손을 대여보았을 때가 새삼스레 떠올랐다. 어씨는 지금도 그때 그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시절 마누라의 볼은 잘 부풀어오른 금방 쪄낸 만두처럼 탱탱했고 한뉘 가도 주름이 생길 것 같지 않았다. 어씨는 그 만두 같은 볼을 얼마나 만졌는지 모른다. 그리고 꺼칠한 수염이 난 얼굴로 수없이 비비고 또 비볐었다. 그리고 지금 잡고 있는 손도 어씨는 잘 다듬어놓은 옥이라고 비유한 적이 있었다. 아주 어색한 비유를 했지만 그때 마누라는 즐겁게 웃었고 그냥 자기 손을 옥에 비유해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어씨는 아들이 생기고 마누라의 살결이 느슨해지자 옥이 아니라 시래기에 비유했고 원쑤취급을 했다. 그리고는 하늘을 우러러 마누라를 만난 자신을 죽도록 후회했다. 그런 원쑤 같은 마누라가 이렇게 쓰러져있자 어씨는 되려 가슴을 치며 자신의 과거를 뉘우치고 있는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모든 인간은 이렇게 너그러워지는 것일가? 아니면 마누라가 없이 지내야 하는 자신의 인생이 너무나 비참해서일가? 어씨는 자신도 무엇때문인지 모른 채 몸 속에서 발로되는 감정을 그대로 로출시키고 있을 뿐이였다. 마누라는 오전 내내 점적주사를 꽂은 채 혼곤히 잠자고 있었다. 어씨는 그 자리에 앉아 마누라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어씨는 만약 자기가 이 자리에서 일어나면 다시는 마누라의 곁으로 돌아올 것 같지 못할 것처럼 못 박힌 듯 앉아있었다. “아버지 점심하러 가쇼.” 언제 왔는지 아들이 어씨의 뒤에 와 서있었다. “너나 나가 먹어라. 내가 여기 지키고 있을 거니까.” 어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저었다. “아버지, 저한테 미장칼을 주쇼.” 아들의 홍두깨 같은 소리에 어씨는 몸을 돌렸다.  아들은 어금이를 지그시 깨문 채 어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장칼을 해선 뭐하려구? 설마 너 홀로 돈벌이하겠다는 건 아니지?” “맞슴다.” “미장일이 애들 장난이 아니다. 그리구 널 내놓구 이 애비가 시름 놓을 것 같냐?” 어씨는 세괃게 손을 저어 아들의 생각을 묵살해버렸다. “엄마가 쓰러졌는데 그냥 이러구 있을 수 없잼까?” 아들의 고달파보이는 눈확에는 눈물이 그들먹하니 고여 떨고 있었다.  어씨는 마누라를 일별하고는 몸을 일으켜 아들의 등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 굶어죽을 지경이 아니니까 너무 서두르지 말어라. 이 애비두 다 생각이 있니라. 이제 엄마 병이 호전되면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잖겠니?” 아들은 말없이 몸을 돌려 걸어갔다. “밥이나 잘 챙겨 먹어라. 괜한 걱정 말구.” 어씨는 걸어가는 아들의 등뒤에 대고 소리쳤다. 하지만 그 소리는 곁에서도 들을 수 없을 만큼 가늘었다.    9. 한달 가량의 병원신세를 진 어씨의 마누라는 드디여 퇴원했다. 죽는 줄로만 알았던 마누라가 겨우 말을 할 수 있고 남의 부축을 받으며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어씨로서는 천만다행이였다. 삐뚤어지는 얼굴로 웃으며 어씨를 바라보는 마누라의 눈길에는 수많은 말들이 담겨져있었다. 그냥 멍하니 바라보는 것 같았지만 눈물이 그렁하니 매달린 눈에는 알지 못할 내용들이 그들먹이 차있다는 것을 어씨는 잘 알고 있었다.  “고생…” 퇴원해온 날 밤 마누라는 힘 없는 손으로 어씨의 손을 잡으며 겨우 외마디를 내뱉았다.  어씨는 고개를 끄덕여 응대했다. 그리고는 수건을 적셔다 얼굴을 닦아주었다. “래일 우리 함께 간만에 목욕하자구. 오래동안 목욕을 못했는데.” 어씨가 시무룩이 웃자 마누라도 입을 귀에 가져다 붙이며 웃었다. 그 바람에 입귀로 걸죽한 침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어씨는 망가져버린 마누라를 내려다보며 그래도 처녀를 자기한테 바친 녀자라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어쩌면 마누라가 없었더라면 자기는 한뉘 외토리로 지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튿날 아침 마누라가 갑자기 어씨를 툭툭 건드렸다. 어씨는 불에 덴 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누라는 멀쩡하니 놀란 표정의 어씨를 바라보았다. 어씨는 마누라가 앓은 후부터 늘 신경을 도사리고 있었기에 조금만 다른 기척이나 소리가 나도 쉽게 놀라군 했다. “왜?” “돈… 돈 다 쓰고 어찌…” 어씨는 마누라가 돈걱정을 한다는 것을 알고 허구프게 웃었다.  “근심 말구 죽쳐있기나 하라구. 내가 그래 임자를 굶겨죽일 것 같은가?” 어씨는 마누라한테 큰소리를 쳤지만 자신도 어찌해야 할지 막막했다. 기실 어씨는 자기가 모아놓았던 저금을 다 털어 마누라 병치료에 써버렸다. 이제 마누라 약값, 집세, 입에 넣어야 할 먹거리를 어떻게 해결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어씨는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호주머니에는 몇백원 밖에 남지 않은 저금카드가 들어있었다. 어씨는 무슨 방법을 대야 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살아 돌아온 마누라까지도 잃을 것 같았다. 어씨는 골목을 서성거리다가 문득 왕스푸가 머리에 떠올랐다. 어씨는 드바삐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왕스푸의 전화번호를 찾아 터치했다. 인차 신호가 련결되였다. “와이. 뉘긴데유?” 귀익은 왕스푸의 둔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로위네. 그간 잘 지냈나?” 어씨는 될수록 말투를 즐겁게 하려고 애썼다.  “허허허. 그럼유. 그런데 로위, 아침부터 전화를 하는 거 보니 무슨 일이라두 생긴 건 아닌가유?” “아닐세. 혹시 일감이라두 없나 해서 그러네. 요새 한달 간 몸이 불편해 쉬였더니 일감이 들어오지 않누만.” “마침 잘됐네유. 어제 일감을 맡았는데 굴뚝을 쌓는 일이래유. 나 혼자 하기 힘에 부쳐 걱정했는데 로위 와서 도와주면 되겠네유.” 어씨는 그래도 왕스푸가 자기 고초를 알아봐준다고 기뻐했다. “알겠네. 그럼 래일 련락해서 함께 가세.” 어씨는 마치 탕개가 풀린 듯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리고는 속으로 뇌까렸다. “하늘이 무너져두 솟아날 구멍이 있다 했는데…” 이튿날 어씨는 마누라를 아들한테 맡겼다. 그리고는 왕스푸가 준 새 미장칼을 꺼내 연장가방에 찔러넣었다.  “아버지, 힘드면 내 가기쇼. 나두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관둬라. 굴뚝 쌓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엄마나 잘 돌보구 있거라.” 어씨는 퀭하니 자기를 올려다보는 마누라를 내려다보았다. 마누라의 눈에는 근심 같은 것이 가득 어려있었다. “밥, 밥 챙기고… 일찌기…” 어씨는 마누라의 말뜻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알았다니까? 점심은 챙겼구 해 저물기 전에 올 거니까 아들 말을 잘 들으라구. 이제 저녁에 와서 목욕을 시켜줄게.” 어씨가 마누라를 내려다보며 웃자 마누라도 쳐다보며 웃었다. 일그러진 웃음이였으나 한없이 찬연했다. 어씨는 아들한테 저금카드를 건네주었다.  “오늘 집주인이 집세 받으러 올 거다. 이 카드의 돈을 찾아 집세를 물어야 한다.” 아들은 말없이 카드를 받아 호주머니에 넣었다.  어씨는 다시금 어금이를 지그시 깨물며 집을 나섰다. 어씨는 마치 사냥물을 찾아 떠나는 굶주린 승냥이 같았다. 어씨는 지금 자신이 한없이 굶주려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피땀을 흘려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결과는 응당 배를 불리는 것이였고 래일 아침 무사히 눈을 뜨고 기상하는 것이였다.  골목에 나섰던 어씨는 문득 멈춰서서 뭔가 생각하다가 몸을 돌려 도로 집으로 들어갔다. 어씨는 연장가방에서 새 미장칼을 꺼내 아들한테 넘겨주었다. “이 미장칼을 잘 건사하거라. 이후에 따로 쓸 일이 있을 거다.” 어씨는 낡은 미장칼을 찾아 연장가방에 쑤셔넣고 다시 집문을 나섰다. 머리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는데 갑자기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가 싶더니 핑하니 돌아가며 어씨는 순간 휘청거렸다. 어씨는 머리를 잡고 눈을 감았다. 좀 지나 다시 눈을 뜨니 괜찮아졌다. 어씨는 아마도 요즘 많이 피곤해 그런 거라고 생각하며 자전거에 올라탔다. 어씨는 곧추 왕스푸가 있는 하동으로 페달을 밟았다. 어씨는 골목을 벗어나 시거리를 질주했다. 기실은 질주가 아니라 아슬아슬 인파를 헤가르고 인력거를 에돌아 덮쳐오는 택시와 승용차의 어깨를 스치며 가까스로 하동의 왕스푸네 집 부근에 도착했다. 왕스푸는 오래 기다린 듯 담배를 피워문 채 길옆에 쭈크리고 앉아있었다. “늦었네.” “로위 늦은게 아니라 내가 일찍 나온 거래유.” “갑세.” 둘은 오늘의 일감을 향해 달려갔다. 아니, 일감이 아니라 먹거리를 향해 달려가는 두마리의 굶주린 승냥이 같았다. 어씨는 왕스푸 역시 많이 주려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굶주린 흔적이 보이지 않고 되려 얼굴에 기름기가 감돌고 있었다. 어씨는 이 세상에 자기보다 더 주려있는 사람이 있을가 다시 되새겨보았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알찌근해났다. 어씨는 긴 한숨을 내뿜었다. “로위, 근간에 근심이 많은가 봐유? 얼굴색두 안 좋구.” 왕스푸는 어씨의 얼굴을 근심스레 훑었다. “몸이 불편해 그냥 며칠 쉬였네.” “감당하기 어려운 일 있으문 이 동생한테 도움을 청해유. 친구는 서로 도우는 거래유.” 어씨는 왕스푸의 말에 그만 뜨거운 것을 삼켰다. 어씨는 그래도 좋은 사람은 있기 마련이고 착한 사람은 도움받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감사하이. 이후 신세 많이 져야겠네그려. 허허허.” 어씨는 오랜만에 소리내여 웃어보았다. 어씨는 웃으며 먼 하늘에 떠가는 구름덩이를 바라보았다. 웬지 오늘 마음이 개운해지면서 말할 수 없는 흥감이 서서히 몸 속에서 솟아올라왔다. 어씨와 왕스푸는 반시간 쯤 달려 오늘의 일감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어씨가 보니 이미 굴뚝기초는 마무리된 상태였다. 그래도 굴뚝기초를 해놓았으니 다그치면 오전 내로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제 와서 먼저 기초를 때려놓았는 걸유.” 이왕과 마찬가지로 주인이 와서 이것저것 주의할 것들 그리고 요구사항들을 구구절절 늘여놓고는 가버렸다. “기초를 때렸으니 하루 걸릴 거 없구먼. 부지런히 다그치면 오전 내로 끝내게 될 걸세.” 기실 어씨한테 굴뚝 쌓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왕스푸도 어씨의 능력을 알고 있기에 도움을 청한 거였다. 왕스푸는 그저 담이나 쌓고 부뚜막이나 고치는 정도의 미쟁이일 뿐 어씨 재간에는 비하지 못했다. 왕스푸가 어씨를 존경하는 원인의 하나가 바로 그것이였다. 드디여 굴뚝 쌓기가 시작되였다. 어씨가 굴뚝을 쌓고 왕스푸가 벽돌과 세멘트반죽을 날랐다.  오늘 왕스푸 역시 기분이 좋은 듯 얼굴에 웃음을 달고 있었다.  “로위, 이후 우리 함께 일을 하면 좋을 듯한데 어때유? 그럼 더 큰 공정두 맡아할 수 있을 텐데유.” “그럼 여북 좋겠나. 그런데 자네한테 내가 신세 지는 것 같아 좀 그렇네.” “듣기 거북한 말 말아유. 앞으로 함께 일하게 되믄 내가 로위를 스승으루 모실 테니까유. 허허허.” “한턱 내지 않구 스승을 그렇게 쉽게 모실 수 있나? 하하하.” 어씨의 우스개에 왕스푸는 가슴을 두드렸다. “좋지유. 오늘 일 끝나믄 내가 한턱 쏠게유. 먹고픈 거 잘 생각했다가 일이 끝나믄 말해유. 화끈하게 한잔 해야지유.” “좋네.” 둘은 마주보며 크게 웃었다.  손을 맞춰가며 일하니 진척도 빨랐다. 오전 해가 거의 되여오자 다섯메터 높이의 굴뚝이 거의 올라갔다. 이제 한메터 정도 남은 부분에는 마무리를 하면 되였다. “로위 내려와 담배쉼이나 해유. 오전내루 끝내믄 될 텐데유.” 왕스푸가 소리치자 어씨도 다 끝난 일이라 잠간 쉬였다가 마무리하는 것도 좋을 듯 싶었다. 숨도 돌릴 겸 물도 마실 겸 어씨는 미장칼과 망치를 거치대 우에 놓고 머리를 수그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어씨는 뭔가 자기를 밀치는 듯 몸이 휘청거려지며 사위가 빙 돌아갔다. 어씨는 얼결에 옆에 가로 매단 나무 가름대를 쥐였다. 하지만 어씨는 그 나무 가름대를 헛짚으며 그만 아래로 거꾸로 떨러졌다.  “쿵.” 땅바닥에서 먼지가 풀썩 일었고 땅에 박은 어씨의 머리에서 피가 터져나왔다.  왕스푸는 그 정경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어씨의 입에서 피거품이 게질게질 흘러나왔다.  왕스푸는 그때에야 정신을 차리고 어씨를 안았다.  어씨의 머리에서 그냥 피가 솟아나오고 있었다.  왕스푸가 손으로 더듬으니 어씨의 머리 밑에 왕스푸가 굴뚝기초를 하느라 깨여놓았던 예리한 돌이 피에 젖어있었다. “로위, 어이쿠 로위, 정신차려유. 이게 무슨 변이래유? 어이쿠 사람 잡았네. 사람 잡았어.” 왕스푸는 혼겁한 나머지 넋 나간 사람마냥 소리질렀다.  어씨는 간신히 눈을 떴다.  어씨의 눈앞에는 혼겁해 소리지르는 왕스푸가 아니라 아들이 서있었다. 뭐라고 소리치는 듯 했지만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씨가 왜 엄마를 돌보지 않고 왔느냐고 물었지만 아들은 그냥 어씨의 몸을 흔들며 넉두리를 했다. 어씨는 듣기 싫어 눈을 감고 말았다. 몸이 세차게 흔들렸다. 어딘가 둥둥 떠가는 듯 싶었다. 자동차 엔진소리가 들렸다. 어씨는 다시 아들을 찾았다. 아들이 언제 차를 사서 자기가 이렇게 아들 차에 앉았을가 생각했다. 몸이 또 들추어졌다. 누군가 어씨의 입을 막았다. 어씨가 뿌리치려 해도 막무가내로 어씨의 입을 틀어막았다. 무언가 페부로 밀려들어오면서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마치 예전에 얼음과자를 먹고 오한으로 떨어본 적이 있었는데 감각이 어쩌면 그때와 똑같았다. 몸이 추워지자 갑자기 마누라의 품이 생각났다. 그래, 오늘 저녁에는 마누라와 목욕을 해야지. 따스한 물에 이 먼지투성이 몸을 깨끗이 씻고 마누라를 안고 자야지.  어씨의 몸이 또다시 둥둥 떠가고 있었다. 멀리에서 마누라가 웃고 있었고 그 뒤로 아들이 달려왔는데 아들 옆에 꿈에서 보았던 며느리가 함께 웃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에는 어씨가 오매불망 그리던 아빠트가 덩실하게 솟아있었고 아빠트 밑에는 번쩍이는 하얀 승용차가 세워져있었다. “이봅소. 빨리 옵소. 새집들이 하지 않겠슴두?” “아버지 빨리 오쇼. 새 차에 앉아 들놀이 가기쇼.” 어씨는 손을 뻗어 마누라와 아들 그리고 며느리의 손을 잡으려 했으나 되려 그들은 점점 멀리 가버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서서히 어씨의 눈앞에서 사라져갔다.  “아들, 니눔한테 미장칼을 물려주려 했었는데…” 어씨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맥없이 손을 떨어뜨렸다. 어씨의 눈에는 인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씨는 자신의 몸이 점점 차거워져가는 것을 느끼지 못한 채 혼곤히 깊은 잠에 빠져들어갔다… 출처:2017 제2호
2    [단편소설] 도소주-리승국 댓글:  조회:223  추천:0  2019-07-11
 리승국  도소주(屠蘇酒)  1  강주는 문설주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풍만하게 살집이 오른 마누라 정이의 몸뚱이를 바라보았다. 저녁해빛에 정이의 몸뚱이는 창피하리만치 찬란하게 빛나고 있어 강주로 하여금 얼굴이 붉어지게 만들었다. “인사치레라두 내야 면목이 서는 게  아닌가?” 강주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목소리는 갈린듯 겨우 흘러나왔다. “여부가 있슴까? 안 그래두 남의 덕에 농사한다구 뒤소리 듣는데. 이 김에 한상 보란듯이 차리기쇼.” 정이의 맞장구는 강주한테 가장 합당한 위로였다.   한상 차리는건 래일 저녁으로 정하고 강주는 밤이 깊어오자 마누라 정이의 속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오십을 바라보는 마누라의 몸은 아직도 탄탄함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되겠슴까?” 참 맥 떨어지게 하는 물음이다. 강주는 이를 악물며 대답대신 끙하고 외마디 소리를 뽑았다. “괜히 나만 비참하게 만들지 말구 편히 자기나 하기쇼.” 웬지 정이의 태도는 새벽바람같이 싸늘했다. 홀로 지내온 지 인젠 3년이 넘었는데도 정이는 달아오르기는커녕 가을 배추통처럼 싸늘했다. 강주는 움쭉 몸을 들어 마누라를 내려다보더니 다시 마누라의 살덩이우로 몸을 얹었다. “좀 어떻게 해보라니까?” 강주의 음성은 애걸에 가까울 정도로 가련했다. 정이의 긴 한숨소리가 천정으로 날아올라갔다. 드디여 정이의 일로 거칠어진 손이 강주의 남근을 거머쥐였다. 강주는 또다시 끙하고 외마디 신음을 내면서 마누라의 몸뚱이 우에서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곬을 따라가던 강주의 남근은 미안스레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강주의 몸은 끝내 천정을 향해 눕고 말았다. “너무 걱정 마쇼, 천천히 몸이 회복되믄 모든 게 제대로 될겜다.” 한참후 정이가 강주의 가슴에 난 잔털을 만지작거리며 달래듯 말했다. “내가 이렇게 일찍 페인이 될 줄은 누가 알았겠어. 녀편네 하나두 건사 못하게 생겨먹었으니.” 강주의 목구멍에서 무엇인가 꾸르륵 거리며 올리밀다 도로 몸속으로 내려갔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 앞에서 강주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이튿날 정이는 룡정에 가서 여러가지 채소와 고기 등속을 사가지고 와 저녁에 한상을 버젓하게 차렸다. 강주는 마누라한테 신세 진 사람은 한사람도 빼놓지 말고 청해오게 했다. 강주네 집은 강주가 외국 가서 처음으로 사람들로 웅성거렸고 고기냄새와 술냄새가 풍겨 마치 잔치집 같았다. 정이는 통 크게 강주가 오면 마시게 하려고 여러가지 약재를 넣어 담근 술단지를 그대로 들어다 구들복판에 놓았다. 강주는 술단지의 술을 모여앉은 사람들한테 붓고 정중하게 무릎을 꿇었다. 둘러앉은 마을사람들은 술잔을 들고 놀라운 눈으로 강주를 바라보았다. “감사합꾸마. 태를 묻고 자라오면서 죽을 때까지 함께 살 것 같더니 잘 살겠노라 집을 버리구 돈 벌러 갔다가 이런 꼴로 돌아왔습꾸마. 그래두 여러 아즈바이, 형님들 덕에 우리 마누라가 근심 없이 농사두 짓구 집두 지키며 지낼 수 있었습꾸마. 오늘 우리 내외 감사의 마음으루 이렇게 한상 차렸습꾸마. 그간 정말 수고 많았습꾸마. 자 한잔 들깁소.” 강주의 눈언저리에 물기가 번쩍거렸다. 그는 진심으로 감사해하고 있었다. “형님, 술 마셔 되겠소?” 강주의 8촌 되는 동생 강호가 근심스레 말렸지만 강주는 어느새 술을 목구멍에 털어넣었다. “오늘은 몇잔 마셔도 괜찮아. 허허허.” 강주는 입을 쓱 문지르며 좌중에 술을 권했다. 강호는 강주한테 엄지를 내두르며 너스레를 떨었다. “형님, 이렇게 중풍을 맞지 않았으면야 한근 술은 맨물 같지므, 안 그렇소?” “그런 말 마라. 인젠 알 털어낸 지푸라기지. 자자, 모두 굽 냅소.” 강주의 말에 모두 술잔을 기울였다. 갑자기 강주의 눈에 고동색 얼굴의 사나이가 들어왔다. 강주는 그 사나이한테 술잔을 내밀며 웃음을 날렸다. “로팔이 동생, 한잔 합세.” 강주의 권주에 그 사나이는 술잔을 들었지만 술은 겨우 한모금 마셨다. 그 사나이는 여기 송림동에 이사온 한족 과수원예가였는데 한로팔이라 불렀다. 마을사람들이 과수밭을 버리고 가버리자 촌장은 과수나무를 그냥 버릴 수 없어 과수재배에 솜씨 있는 한로팔이를 마을에 받아들였다. 한로팔이 마을에 오자 강주가 선뜻 부모가 살던 집을 내주었다. 부모가 세상 뜬 후로 그냥 비워두고 있었다. 원래는 한로팔이한테 팔려고 생각했다가 그해 강주가 외국으로 가게 되자 한로팔이 손도 빌려쓸 겸 인심도 쓸 겸 여러모로 생각하고 그냥 한로팔이한테 무상으로 내주었다. 한로팔이는 혈육 하나 없는 타지에 들어왔지만 강주내외의 마음씀씀이에 그만 감동되고 말았다. 강주는 한로팔이 이사온 그해 외국으로 나가버렸었다. 그 이듬해 한로팔이는 손에 목돈을 쥐고 정이를 찾아와 집값으로 만원을 내놓았지만 정이는 한사코 받지 않았다. “한씨, 이렇게 째째하게 놀무 다시는 거래하지 않겠소.” 한로팔은 원래 사람이 부지런하고 남의 일을 돋기를 즐겨 마을사람들한테 꽤나 인심을 쌓고 있었다. 송림동에 이사온 지 이미 7년해를 잡은 한로팔은 자가용차도 사놓고 돈도 꽤나 모아놓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늘 녀자 없이 홀로 지내고 있었고 그의 곁에는 녀자의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았다. “강주형님, 내란 눔은 원래 술 못하는 체질이라서.” “이렇게 반편이 된 나도 마시는데 동생이 마시지 못한다니. 자 우리 한잔 합세.” 강주의 술잔이 한로팔의 잔에 부딪치며 소리를 내자 한로팔은 인차 술잔을 입에 대고 기울였다. “동생, 수고 많았네. 동생 로고를 잊지 않겠네.” “그런 말 마슈, 이웃이면 사촌이라는 조선족 속담 알구 있수. 아주머니 난처한 처지를 그냥 보구 있을 사람 여기 누가 있겠수. 허허허.” “감사하이.” 이때 정이가 남정네들 술상에 다가왔다. 그녀는 그릇에 가득 담겨진 닭곰을 한로팔 앞에 놓아주었다. “한씨가 아마두 당신을 낮설어하는 거 같슴다. 한씨, 자자, 닭고기 많이 드오.” 정이의 말에 한로팔은 얼굴을 붉히며 엉뎅이를 들썩이며 안절부절 못했다. 정이가 한로팔을 한씨라고 부르는 게 구접스레 듣겼는지 강주가 마누라를 뚱겨주었다. “한씨가 뭐요, 한씨가. 로한이라고 불러야지.” 한로팔이 뭐라고 불러도 괜찮다고 손을 내저었다. “로팔이 동생, 아직두 홀몸으로 있나?” 한참후 강주가 무언가 생각난듯 한로팔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럼유, 녀자가 있으믄 돈이 필요해유. 돈을 좀 벌어서 얻어야겠수. 허허허.” 녀자말을 꺼내자 한로팔의 얼굴이 대뜸 붉어졌다. “뜸을 들이지 말게. 녀자가 생기면 인차 집에 들이여 같이 살게.” “실은…” 한로팔이 뒤더수기를 긁으며 고개를 숙였다. “실은 녀자를 만나긴 했수. 산동에 있는 녀잔데 맘에는 들지만 이곳을 뜨기가 아수해 도무지 결단이 서지 않수.” 한로팔이 말에 정이도 부엌에서 술상으로 다가왔다. “그럼 데려오믄 되지. 내가 조선족혼례로 식을 챙겨주지.” “급해하지 말구 천천히 해보라구, 그쪽으루 가든 여기루 오든 이제 시간이 지나믄 결정이 되겠지. 아무튼 녀자가 생겼다니 좋은 일이지.” 강주가 다시 한로팔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갈 놈은 가구 있을 놈은 있구 상관할게 뭐요, 내 입에 밥이 들어오믄 되는 거지. 근심두 팔자네.” 옆에 앉은 강호가 한로팔을 힐끔 째려보고는 닭다리를 집어들고 뜯었다. “강호쓩디(兄弟), 먹새는 잘하는데 일하기 좀 싫어하우. 안 그런가 강호쓩디?” 한로팔도 술기운이 솟는지 강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강호는 세괃게 한로팔의 손을 뿌리치며 한로팔을 치떠보았다. “밑구녕으루 호박씨 까구 있군. 이봐, 한로팔, 왜 자는 범 코구멍 후비고 그래, 내가 봐주고 있는 걸 알고나 있나?” “알지, 강호쓩디 내 빽인거 알지. 허허허.” 한로팔이 강호의 어깨를 두드리자 강호는 한쪽으로 물러나며 그냥 닭다리를 뜯었다. 강호의 꼴을 보고 모두 술잔을 기울이며 배를 끌어안았다. 정이는 강호의 볼썽사나운 꼴을 흘기며 술상에서 물러나 부엌으로 나갔다. 강주는 한로팔의 술잔에 술을 부으며 간절한 어조로 뇌까렸다. “로팔이 동생, 앞으로 많이 부탁하겠네. 한족이믄 어떻구 조선족이믄 어떻나. 갈 때 가더라두 한동네서 마음 맞춰 살믄 다가 아닌가.” 강주는 조금 취한듯 말소리가 어눌했지만 전달하려는 의사만은 분명했다. 그는 한로팔이 자기가 외국 간 긴 세월을 하루같이 자기 마누라의 농사일을 도와주었다는데 감격했고 아직도 마음을 함께 할 수 있는 마을사람이 곁에 있다는데 눈물을 흘렸다. 강주는 취했다. 그의 감사의 말은 나중에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넉두리로 돼버렸고 그 뒤 그만 너부러지고 말았다.   2 한낮때 강호가 기신기신 강주를 찾아왔다. 마침 정이가 일밭에 나가고 강주 홀로 집마당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마누라가 일밭에 나간 후면 강주는 뭐라도 해놓으려고 집뜰을 서성거리며 일감을 찾았지만 자기가 할 일은 하나도 없었다. 한쪽 손이 맥없이 처져내린 상태로 무슨 일을 하면 잘할 수 있단 말인가? 강주 자신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실감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집뜰을 서성거리기라도 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군 했다. 강호가 어깨를 추스린 채 기웃거리며 대문으로 들어서자 마침 뒤뜰에서 앞마당으로 나온 강주는 강호의 불가사의한 표정에 마음이 언짢아졌다. 강호가 자기를 보며 히죽히죽 웃자 강주는 속으로부터 뭔가 울컥 솟아오름을 느꼈다. 마치 똥을 밟은 것 같은 그런 기분이였다. “너 히죽거리는 거 보니 뉘 집 녀편네 오줌 누는 거라도 본 것 같구나.” 강주는 마루에 걸터앉으며 오른손으로 저려나는 왼손을 주물럭거렸다. 어느새 강호도 강주 곁에 다가가서 앉았다. “형님, 놀라지 마오.” 강호의 놀랄 만치 신비한 얼굴을 건너다보며 강주는 눈을 올롱하게 떴다. “오늘 허깨비 간이라두 빼먹었나, 왜 헵뜨는 소리하니?” 강주는 자리를 드텨앉으며 강호의 갱핏한 얼굴을 쓸어보았다. 강호는 강주의 먼 친척 동생벌이 된다. 강호는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를 저는 절름발이다. 어려서부터 약은 수를 많이 써서 사람들한테 홀대 받으며 자라왔는데 부모를 잃은 후도 그냥 빈둥거리기를 직업으로 삼고 있었다. 그래도 부모가 남긴 재산이 좀 있어 그것을 사탕 녹이듯 갉아먹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강주가 외국으로 나가면서 자기 마누라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일하기 싫어하는 강호가 팔 걷고 나설 사람이 아니였다. 그래도 친척이라고 강주는 늘 강호를 친동생처럼 대해주었고 앓는 몸으로 돌아왔어도 강호한테 양복 한벌을 맞춰주기도 했다. “형님, 아주머니가 형님 없는 사이 그 돼눔한테 닭곰 몇번 해준 거 알기나 하우?” “돼눔이라니?” 강주는 등에한테 물린 소마냥 두 눈을 슴뻑였다. 강호는 사위를 둘러보고는 강주 곁으로 바짝 다가앉으며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한로팔, 그 등신 같은 눔이 닭곰을 잔뜩 먹고 지금 저렇게 힘을 쓴다니까.” 강호의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강주는 강호를 저만치 밀어버렸다. 그 통에 강호는 마루에서 땅바닥에 내동댕이치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개소리 그만해라. 너 지금 귀신하구 흘레를 하구 왔니, 웬 귀신 씨나락 까는 소리야?” 강호는 땅바닥에 앉은 채로 강주를 쳐다보며 앙앙불락했다. “이게 다 형님을 생각해 귀뜸하는 소리요. 불 붙기 전에…” 순간 강주의 발이 강호의 가슴을 걷어찼다. 강호는 뒤로 자빠졌고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튕겨나왔다. “어이쿠, 형님, 나를 잡지 말구 한로팔이를 잡아야지.” “당장 내 앞에서 사라지지 못해?” 강주의 눈에서 불똥이 튕겼다. 자칫하다간 큰 변이 날 것 같았다. 강호는 기신기신 기여일어나 투덜거리며 울바자 밖으로 달아나버렸다. 그는 달아나면서도 강주한테 그냥 악발이같이 대들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다 했슴네.” 강호가 사라진 지 으슥했지만 강주의 성은 풀리지 않았다. 인젠 오른손까지도 저려왔다. 마치 도깨비한테 홀리운 사람처럼 멍하니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있었다. 이건 도대체 무슨 말인가? 지금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강주는 오리무중에 빠진 채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다. 모든 게 그대로 멈춘 듯했다. 강주는 후둘후둘 떨리는 다리에 몸을 지탱하며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목이 타들어갔다. 목구멍에 무엇인가 막인듯 숨쉬기조차 가빠왔다. 이대로는 도저히 정신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그는 휘뚱거리며 집안으로 들어가 부엌의 수도꼭지를 비틀어 랭수 한바가지 받아 들이켰다. 하지만 목구멍에는 그냥 무엇인가 막혀 내려가지 않았다. 바가지를 내려놓는 순간 가마목에 있는 그릇 안에 삐죽이 내민 닭고기가 눈에 띄였다. 전번날 먹다 남은 닭고기였다. 새하얀 닭고기는 마치 서로 엉켜붙은 실 한오리 걸치지 않은 남녀의 몸뚱이 같았다. 눈앞에 적라라하게 펼쳐진 정경에 강주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환각의 영상은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을 상기시켰고 뒤이어 마누라의 흰 허벅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허벅지에 가리웠던 치마가 누군가의 투박한 손에 의해 서서히 벗겨지는 것이 눈앞에서 연출되였다. “잘그랑.” 어느새 강주의 손에서 휙 바람소리가 나더니 닭고기를 담은 그릇이 바닥에 떨어지며 박산나버렸다. 그 순간 강주는 환각에서 소스라쳐 깨여나며 바닥에 쭈크리고 널린 닭고기와 그릇 쪼각들을 그러모았다. 이때 문이 열리며 정이가 빨간 머리수건을 쓰고 들어섰다. “먼 일임까?” 강주는 눈앞의 마누라의 흙이 게발려진 신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손에서 미끌어졌구먼, 으흠.” 강약이 없는 강주 말소리는 정이의 귀에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미약했다. “휴―” 공기 새는 것 같은 소리가 정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맥두 못 추는 손으로 뭘 자꾸 들면서 그램까?” 정이의 지청구 같은 소리가 강주의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강주의 손이 사뭇 세차게 떨렸다. 그는 손에 묻은 닭고기부스레기를 다른 손으로 털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당신이 거두우.” 강주는 마누라를 지나 밖으로 나와버렸다. 정오의 해살은 사뭇 따스했으나 강주의 마음속에는 얼음같이 차가운 것이 그들먹하니 차올라 몸을 오싹 떨었다. 상한을 만난듯 다리까지 떨렸다. “왜 아픔까?” 뒤따라 나온 정이의 물음이 뒤등을 두드렸다. 푸념 같기도 하고 근심 같기도 한 정이의 물음은 강주를 슬퍼지게 만들었다. “조금, 집에 붙박혀있으니 몸이 점점 굳어지는 것 같구먼.” 강주는 정오의 해빛을 듬뿍 머금은 멀리 산발을 바라보았다. 그 산발 우로 흰 구름덩이가 면화같이 둥둥 떠있었다. 정이의 손이 강주의 맥없이 처져내린 손을 잡았다. “래일부터 룡정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기쇼. 한달간 꾸준히 하면 효과가 있을겜다.” “깨진 밥사발을 다시 붙여쓴들 얼마나 견디겠소. 나한테 신경 쓰지 말구 당신이나 몸건사 잘하오.” “알았슴다. 빨리 점심 먹기쇼. 오후에 논에 출비해야 함다. 한씨가 실어주겠다 했슴다.” 정이는 강주의 말뜻을 리해하지도 못한 채 흘리듯 대답하고는 도로 집안으로 들어갔다. 강주는 그 자리에 부동한 채 아까 바라보던 멀리 산발에 다시 눈을 박았다. 아스랗게 멀리 보이는 산발은 해빛 속에서 련련한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비스듬히 누워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주는 어금이를 지그시 깨물더니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망할 자식.”   3  “오늘 나두 함께 출비하는데 가기우. 집에 있는 게 갑갑해 어디 살겠소.” 약간 신경질적인 어투가 강주의 입에서 튕겨나왔다. 그는 마누라를 건너다보았지만 기실은 어딘가 애원에 가까운 눈빛이였다. “더운데 뭐하러 따라와 고생하겠슴까. 오늘 출비할 논밭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정이는 빨간 머리수건을 정수리에 얹으며 벽에 걸린 거울을 힐끗거렸다. “바람도 쏘일 겸 논밭두 돌아볼 겸 함께 가기오.” “그러기쇼, 그냥 집에 박혀있으믄 잡생각이나 나지 밖에 나가 돌아보는 것두 좋을 것 같슴다.” 정이의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강주는 구들을 내려 끌신을 발에 꿰였다. 마누라의 허락이 없이도 일밭으로 따라갈 수 있는 강주였으나 웬지 기어코 마누라의 대답을 받고 싶었다. 마당에 나서니 어느새 한로팔이 손잡이뜨락또르를 몰고 왔다. “형님두 가려구유?” 한로팔은 얼굴에 주름이 지게 웃으며 울바자의 삽작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섰다. “도움은 안돼두 일밭에 나가보구 싶어 그러네.” 강주는 한로팔의 거밋거밋한 얼굴과 힘이 오를 대로 오른 몸집을 힐끈거리며 괜스레 허리 굽혀 바지가랭이를 탁탁 털었다. 뒤따라 나온 정이는 한로팔을 보자 모이 본 암탉마냥 반색했다. “한씨 왔구만, 뜨락또르를 저쪽에 대오.” 한로팔은 히쭉 웃으며 도로 울바자를 나가 손잡이뜨락또르 궁둥이를 창고 뒤문 쪽에 가져다댔다. 정이와 한로팔은 강주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둘이 화학비료를 맞들어 적재함에 실었다. 퀭하니 그들의 하는 양을 지켜보는 강주는 마치 개들의 흘레모양을 바라보는 늙은 소 같았다. “앉으쇼, 빨리 가기쇼.” 정이가 손을 탁탁 털며 강주한테 소리하자 강주는 두 눈을 슴뻑이며 허청허청  걸어가 정이의 부추김을 받으며 겨우겨우 적재함에 올랐다. 뜨락또르가 떠나자 정이는 강주의 어눌한 얼굴을 일별하며 피식 웃었다. 강주는 정이의 웃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그냥 먼산만 쳐다보았다. “일하고 싶슴까?” 정이의 뜬금없는 소리에 강주는 순간 얼떠름해지며 그냥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리고는 다시 머리를 저었다. “하고 싶어두 인젠 엄두두 안 난다구.” “그러니까 아무 생각두 하지 말구 잠자코 병치료에나 신경 쓰쇼.” 어느 사이 뜨락또르가 논밭에 다달았다. 강주는 뜨락또르에서 내리자 검푸르게 번져가는 논밭을 쓸어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곳은 강주의 명줄이나 다름없었던 애지중지해온 논밭이다. 거의 한쌍이 되는 논밭을 강주는 마누라와 함께 가꾸며 미래를 곱게 그려보았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는 수입에 실망한 강주는 마누라한테 이 논밭을 맡기고 외국행을 결심했었다. 그런 그가 지금 다시 망가진 몸으로 이 논밭을 찾아왔다. 논밭은 여전한데 사람은 많이 변해버렸다. 다행히 정이가 악착같이 논밭을 지키고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되였다. “벼가 아지를 잘 쳤군. 이만하믄 임자 수입이 짭짭하겠구만.” “가을에 가서 뚀피(貂皮)외투 하나 사입겠슴다.” 정이의 얼굴에 옅은 노을이 살짝 비껴갔다. “당연한거지, 제 번 돈으루 제 사고 싶은걸 사는데 누가 막소.” “당신 외투두 한벌 갖추기쇼. 외국나들이 했다는 사람이 행색이 초라하믄 쓰겠슴까?” 둘이 마주보며 웃는 사이 한로팔은 어느새 화학비료 한마대를 어깨에 둘러메고 논두렁 우를 씨엉씨엉 걸어갔다. “로팔동생 밭머리쉼 좀 하구 시작하지.” 한로팔은 강주의 말을 들었는지 그냥 앞으로 걸어갔다. “저 앞에 늪두 있는데 한바퀴 돌아보쇼. 한씨가 그 늪에 숱한 잉어를 넣었슴다. 팔뚝만큼씩 엄청 큰 잉어가 잔뜩 할겜다.” 정이는 손에 비닐바께쯔와 음료를 들고 논두렁에 올라 한로팔을 따라 논밭한가운데로 들어갔다. 강주는 마누라의 뒤뚱거리는 엉뎅이를 흘기고는 앞에 바라보이는 갈대가 들어선 늪 쪽으로 향했다. “한씨 거기다 내려놓소. 무거운 걸 멀리 가져가지 말구.” 정이의 말소리가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대기를 뚫고 강주의 뒤등에 맞혀왔다. 강주는 소외되여가는 자신이 허무하게 느껴졌지만 그냥 늪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자기를 두둔해줄 지기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잰걸음으로 늪을 향해 걸어갔다. 강주가 늪가로 다가가자 늪에서 노닐던 물새들이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늪은 강주의 기억속의 늪이 아니였다. 늪변두리는 뚝을 쌓아 높였고 늪가 모래뚝에는 초막까지 지어놓아 주인 있는 늪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원래 갈대가 무더기로 자라 수면이 얼마 되지 않던 늪이 사람의 힘에 의해 훤히 트인 큰 늪으로 변해버렸다. “돼눔들의 일솜씨 하나만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휴―” 강주는 그대로 늪 가장자리에 주저앉아 늪을 둘러보았다. 수면 우로 작은 물고기들이 노닐고 있었고 이따금 덩치 큰 잉어들이 강주를 구경하려는듯 몸을 솟구쳐오르기도 했다. 원래 늪은 마을사람들의 낚시터였다. 농한기만 되면 새벽부터 이곳에는 마을의 낚시군들이 모여들군 했다. 사람들은 늪주변에 빙 둘러앉는데 낚시군은 칠십의 령감도 있고 이마빼기에 피도 채 마르지 않은 애숭이도 있었다. 강주도 그 낚시군들 속에 끼운 한사람이였고 그렇게 아침나절 낚시질하고 나면 점심 국거리는 얼마든지 장만되였다. 그렇게 잡은 물고기로 동네 남자들 몇이 모여앉으면 해 넘어갈 때까지 고주망태가 되군 했다. 강주는 지금도 누구누구 어느 낚시터에 앉았던지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강주는 자기가 만들어놓은 수초가 무더기로 자란 동쪽에 자리를 잡았고 이젠 저세상에 가버린 강호 부친은 강주가 특별히 만들어준 옆자리에서 낚시를 했다. 그리고 각자가 모두 자기의 낚시 자리가 있었는데 만약 누가 자기 자리를 차지하면 그것은 마치 계률을 벗어난 일인듯 큰일로 간주했고 남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도덕에 어긋나는 행실로 다른 사람들의 질책과 안 좋은 눈총을 받아야 했다. 그러했기에 누구도 그 계률을 어기려 하지 않았고 만약 다른 사람이 자기 자리에 앉아 낚시하면 그날 그 자리 주인은 낚시대를 메고 도로 집에 가지 않으면 다른 늪으로 가버려야 했다. 기실 그 시절의 낚시는 물고기로 만든 세치네탕을 마주하고 술잔을 기울이며 농한기의 느슨한 시각들을 만끽하기 위함이였다. 그 시각이 농군들한테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했기에 물고기를 낚는다는 것은 시골에서 또 다른 의미를 지닌 하나의 빼놓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강주가 마지막으로 이 늪에서 낚시를 한 때는 그가 외국으로 나가기 전 초여름였다. 손바닥만한 붕어를 여라문마리 잡아가지고 강호를 비롯한 몇이 모여 술추렴을 했다. 그 속에 마을로 금방 온 한로팔이도 끼여있었다. 그날 술돈을 한로팔이 냈고 돼지고기도 한덩이 들고 와 시골로는 꽤나 풍성한 술추렴자리가 되였었다. 술추렴자리는 바로 지금 초막을 지어놓은 여기 모래뚝이였다. 강주가 외국으로 간다고 술잔을 들었을 때 한로팔이 만류했다. “그래두 고향 좋지유. 내 보기엔 여기가 천당이구먼. 왜 자꾸 고향을 뜨려 하우?” “씹고 있는 이 풀이 너무 쓰거든, 단 우유를 마셔볼가 욕심 부려보는 거여.” 그날 강주를 비롯한 여럿은 하늘이 노랗게 될 때까지 술을 마셨다. 한로팔은 강주의 어깨에 손을 얹고 어금이를 깨물었다. “강주형, 이제 형이 돌아오면 이 늪이 내 늪이 될 거유, 그래두 괜찮겠지?” 강주는 모든 게 무관하다는듯 세괃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데 지금 그 말이 현실이 되였고 이 늪뿐 아니라 아마도 이 마을 전체가 이놈의 한로팔이를 비롯한 마을에 들어온 한족들 차지가 될 것만 같았다. 늪 수면 우로 붉은 잉어가 솟구쳐오르며 위세를 부린다. 강주는 순간 저 잉어놈도 한로팔 같은 한 족속 잉어가 아닐가 하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다. 강주는 늪 우로 돌멩이를 날리고는 몸을 돌려 정이네가 출비하는 논밭으로 걸어갔다. 논밭머리에 이르니 논밭중간 논두렁 우에 한로팔이와 정이가 나란히 앉아 쉼을 하고 있었다. 빨간 머리수건이 한로팔의 어깨우로 나풀대고 있었고 정이의 웃음소리가 벼포기사이로 울려왔다. 런닝샤쯔만 걸친 한로팔의 고동색 몸통이 해빛에 번뜻이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부부모습이다. 정이가 먼저 강주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오똑 일어섰다. 한로팔도 뒤따라 어정쩡 일어섰다. “날이 더워지는데 먼저 들어가쇼. 우리 출비 마저 다 끝내구 들어갈게.” 강주는 아무 말도 없이 마을로 향했다. 그는 논밭길에 난 물웅뎅이를 이리저리 피해가며 정이가 우리라고 한 말을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중얼거려보아도 그 우리라는 말속에는 강주가 없었다. 강주 대신 외간남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도 타민족인 한로팔이 차지했다는 것이 강주한테는 위기였고 위협이였다. “아주머니가 형님 없는 사이 그 돼눔한테 닭곰 몇번 해준 거 알기나 하우?” 갑자기 강호의 말소리가 귀전에 들려왔다. 그런데 이 시각 강호의 이 말이 왜 떠오른 걸가? 강주는 머리를 흔들며 그 소리를 떨쳐버리려 했지만 그 소리는 지꿎게 강주의 귀전을 맴돌았다. “강호가 뭔가를 알고 있을 거야.” 강주는 어금이를 지그시 깨물며 멀리 정이네가 출비하는 논밭을 돌아다보고는 마을로 허청거리며 들어갔다.   4  “한로팔이 얼마나 힘이 센지 그리구 얼마나 잽싸게 일하는지 하루일을 반나절에 끝냈슴다.” 정이는 빨간 수건을 머리에서 벗겨내며 흥분에 들뜬듯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문다졌다. “그럼 닭곰이라두 해줘야 하는 게 아니오?” 강주는 마누라의 상기된 얼굴을 힐끔거렸다. “해줘야지, 안 그래두 넘 수고 시키는데.” 정이는 강주의 변해가는 안색을 무시한 채 자기 말만 중얼대며 땀에 전 적삼을 벗었다. 속내의에 가리운 정이의 젖가슴이 강주의 눈에 아름차게 들어왔다. 오십을 바라보는 중년녀자의 젖가슴치고는 탄력이 여전했다. “그러니까 남의 손으로 농사 짓지 말구 인젠 밭을 남한테 줘버리라구.” “농사 안 짓구 하늬바람 마시겠슴까?” 정이의 말대로 하늬바람은 마실 수 없지만 이대로 농사를 한다는 것도 방법이 아니였다. 더구나 한로팔의 곁에 앉아 밭머리쉼을 하게 할 수 없었고 더더구나 한로팔이 정이의 체취를 만끽하게 하고 싶지 않았으며 정이의 커다란 젖가슴을 훔쳐보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강주로서는 별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강주는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가 찾은 것은 강호였다. 강주가 찾아오자 강호는 저만치 물러서며 달아날 준비부터 했다. 강주가 반편은 되였어도 예전에 내노라 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싸움군임을 알고 있는지라 강주의 손이 매운 걸 무서워하고 있었다. “형, 형님, 제발 때리지 마오.” “허참, 돼지꼬리 같은 놈.” 강주 얼굴에 띈 웃음을 보고서야 강호는 곁으로 다가왔다. “형님, 성내니까 땅이 꺼지는 것보다 더 무섭더라니까? 아직두 여전하오. 허허허.” “그럼, 아직 죽지는 않았지. 스스로 원통할 따름이다.” 강주가 구들에 걸터앉자 강호가 눈치 빠르게 랭장고문을 열었다. “형님, 맥주나 시원히 하기오.” “그거 좋겠구나. 칭커(请客)하는 게야, 아니문 코밑치성 하는 게야?” 강주가 잘 랭각된 캔맥주를 받아놓으며 넌지시 우스개했다. “좋도록 생각하오.” 둘은 마른명태를 중간에 놓고 캔맥주를 땄다. 강주는 둥글소 물켜듯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원한 맥주가 배속으로 흘러들어가자 찌뿌둥하였던 속이 개운해졌다. “뺀 낫자루 같은 놈이 생활이 꽃피는구나.” “이게 다 조상 산 잘 쓴 덕이 아니겠소? 우리 부모들이 한푼두푼 모은 거 나한테 고대루 물려줘서 이렇게 호강하오.” “짜식, 니같은 눔을 일컬어 불이 세쪽이라고 한다. 하하하.” 강주는 웃었지만 괜스레 시샘이 올리솟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자기는 외국가서 죽도록 일하다가 이 꼴이 되였지만 강호녀석은 빈둥거려도 이렇게 시원한 맥주나 마시며 호강하고 있으니 강주로서는 속이 쓰려날 만도 했다. “전번 날 니한테 괜히 화를 냈구나. 속에 넣지 마라.” 강주는 마른명태를 북 찢어 입에 물며 강호를 넌지시 건너다보았다. “난 언녕 잊었소. 내가 붙는 불에 키질한 게지.” 강호는 강주의 눈치를 살피며 캔맥주를 입가에 가져다댔다. 하지만 눈만은 강주의 얼굴에 나타나는 표정을 읽고 있었다. “내 아무리 생각해두 니 한 말이 그저 일 같지 않아 그런다.” “한로팔이 너무 으시대고 마을사람들을 무시하는데다 아주머니까지 넘보니까 형님한테 귀뜸해준 거요.” 강호의 얼굴에는 한로팔에 대한 원한 같은 것이 가득 담겨져있었다. 아무래도 강호의 입에서 강주가 알아야 할 말이 나올 것 같았다. “그래 한로팔이 내 마누라와 집적거리는 거 보기라도 했다는 게야?” 강주의 눈은 강호의 얄팍한 입술을 주시했다. “닭곰을 해가지고 한로팔이한테 가져다주는 거 몇번 봤지.” 강호는 시뚝해 허리까지 곧게 폈다. “그거야 우리 집 일을 해주니까 감사해서 해준 거구, 다른 게 더 없나 그거지?” 강주가 바투 들이대자 강호는 올빼미눈을 슴뻑거렸다. “과수밭으로 들어가는 거 몇번 봤소.” “어떻게 니 눈에 띄였니?” 강주의 얼굴이 강호의 턱밑으로 다가오자 강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말하면 안되는데…” 강주의 두 눈은 점점 충혈되여가고 있었고 목 울대뼈가 세차게 오르내렸다. “말해봐라, 괜찮다.” “이건 정말 비밀인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구 했소.” 강주의 손이 강호의 옷깃을 거머잡았다. “이건 우리 둘만 아는 거다.” “그, 그게…” 강호가 더듬거리자 강주는 잡았던 옷깃을 풀며 드텨앉았다. “너한테 덤터기를 쓰우지 않을 테니 시름 놔라.” “형님, 꼭 약속 지켜야 하오.” 강주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자 강호는 서서히 입을 열었다. “형님, 앞마을에 사는 홍옥이 알지?” “응, 그 약간 모자라는 애 그러니? 금곡에 사는 한족한테 시집갔지 않니?” “모자라긴, 인젠 여간 똑똑해졌소.” 강호가 얼굴을 붉히자 강주는 히죽이 웃었다. 강주는 강호의 붉어진 얼굴에서 그 무엇인가를 읽은듯 강호의 어깨를 쥐여박았다. “홍옥이 정말 돌아왔다더구나.”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날 우리 둘이 마을뒤더기의 배밭에서 노는데 한로팔이 아주머니와 함께 배밭에 들어갑데.” “그래서?” “그냥 들어가는 거 봤소.” 강호는 목이 마른듯 캔맥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또?” “없소, 여러번 과수밭으로 들어가는거 봤을 뿐이요.” “그럼 그 뒤를 따라가 봤어야지.” “나두 한창 재미를 보는데 언제 그런 생각할 새 있소.” “그래, 그것만 보구 한로팔이 내 마누라와 들어붙었다구 나한테 일러바쳤니?” 강주는 기대와 다른 결과에 허구프게 웃었다. “그 돼눔새끼 너무 으시대는 게 괘씸해서…” 강주의 손에 들고 있던 캔맥주가 방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아무래두 너 그 세치혀가 큰일 친다 쳐.” 강주는 그대로 강호네 집을 나와버렸다. 허무하게 무너진 기대에 실소를 하며 강주는 지지리 구접스런 생각을 한 자신을 질책했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긴 한숨을 토했다. “돼지보다 더 미련하구나.”   5  마을에는 과수농사 하는 한로팔, 옥수수 농사를 하는 왕얼따, 벼농사를 하는 따쥔, 이 세 사람이 마을로 이사와 마을 통채로 그루갈이를 해버렸다. 원래 토박이는 늙은이들 뿐이고 강호가 젊은 사람으로 간신히 남아있을 뿐이다. 그들은 새로 농기계를 사들여 모든 밭일을 파종부터 수확까지 기계로 했다. 마을 로인들은 밭에서 밭 갈고 약 치고 비료 치는 농기계들을 바라보며 왜서 한뉘 가대기 지탑을 잡고 소궁둥이를 두드렸는지 리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농한기면 자가용을 몰고 시내로 소풍을 떠나는 게 평생 소수레를 몰아온 로인네들한테는 마치 신선놀음같이 느껴졌다. “지금 농군들은 하이야까지 다 몰구, 돼눔들이 살 줄 안다니까.” “그눔들이 있길래 마을이 사람 사는 냄새 나지 않수.” 로인들은 그들이 마을로 들어온 걸 다행스럽고 감지덕지한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마치 그들이 아니면 마을이 페촌이라도 될 것처럼 여기는 듯싶었다. 강주도 페인이 되여 마을에 돌아와 처음으로 느낀 것이 바로 변해버린 동네 모습이였다. 가는 곳마다에서 한족들의 말소리가 들렸고 대문짝에 붙여놓은 주련과 저녁이면 풍기는 물만두 찌는 냄새에 곤혹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자중해질 수 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한로팔이 한해에 20만원 번다고 했을 때 강주는 그만 기절할 번했다. 자기가 외국에서 4년간 아껴먹으며 악착같이 벌어야 모을 수 있는 돈을 한로팔은 한해동안에 건뜻 번다고 했다. 송림동에서 태여나 자랐고 뼈가 굵어져 농사를 해오면서도 이 마을에 이런 돈벌이가 있었다는 것에 아연해지고 말았다. 노다지를 깔고 자면서도 그걸 팽개치고 외국으로 가버린 자기 자신을 비롯한 마을사람들이 한없이 가소로왔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아버린 셈이였다. “썩돌이믄 뽑아버려야지.” 강주는 마을 뒤산에 올라 마을 앞과 뒤에 펼쳐진 벼밭과 옥수수밭, 과수밭을 둘러보며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올라보는 마을 뒤산이였다. 강주는 앞이 훤히 틔인 벌을 내려다보았다. 멀리 두만강이 펼쳐진 논밭 저켠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마을 뒤산은 원래 땅이 메말라 무엇을 심어도 별로 걷어들일 게 없었다. 후에 촌에서 도라지씨를 뿌렸는데 그것도 그렇게 락관적인 결과를 보지 못하고 그대로 황무지가 되여버렸다. 오늘도 집에 붙박혀있는 것이 갑갑해 삽을 들고 도라지나 캐려고 찾아왔지만 도라지밭은 사람이 들어설 수 없을 정도로 나무와 풀들이 무성했다. 점점 황페해지는 고향의 산야는 그 모습 자체가 강주의 마음을 암담하게 했다. 대신 한족들의 입촌이 그나마 생기를 부지하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강주는 도라지캐기를 포기한 채 언덕빼기에 앉아 갈마드는 사념 속에서 허우적대며 담배를 태웠다. 원래 앓고 난 후 담배를 피우지 않았었는데 집에 돌아와 보이는 것마다 마땅찮고 귀찮아 담배를 도로 입에 물었다. 담배연기가 강주의 코구멍에서 새여나와 공기 속으로 사라짐과 동시에 빨간 수건이 강주의 눈에 띄였다. 강주의 숨결이 순간 멈췄고 들이마셨던 담배연기가 코속에 머물렀다. 강주는 큭큭거리며 자리차고 일어났다. 멀리 언덕 아래 한로팔이네 과수밭머리에 지은 초막 안으로 빨간 머리수건과 한 남자가 기여들어가는 것이 내려다보였다. 강주의 심장이 멎을 듯하더니 세차게 높뛰였다. 그 빨간 머리수건은 분명히 정이의 머리수건이였다. 강주는 먹이를 겨냥한 맹수마냥 담배대를 땅에 짓뭉개버리고는 손에 들린 삽을 틀어잡고 초막을 향해 산언덕을 내려갔다. 때는 오후 한나절 때라 과수밭은 조용했다. 이따금씩 새들이 과수사이를 날며 짝직기를 하고 있을 뿐 모든 것이 고즈넉했다. 어느새 눈앞에 한로팔이네 초막이 보였다. 시골에서 이런 초막은 과수원예가들이 가을에 익은 과실을 지키거나 일하다 비를 피하는데 사용했다. 초막은 사면을 널판자로 막고 벼짚으로 지붕을 만든 간단하면서도 유용성이 뛰여났다. 초막이 가까와올수록 강주의 심장은 당장 몸밖으로 튀여나올듯이 점점 더 세차게 가슴벽을 두드렸다. 목구멍이 바짝 말라들었다. 손에 힘을 너무 준 탓에 삽이 부르르 떨었다.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초막 가까이에 다달으니 초막 안에서 헐떡거리는 소리와 신음소리가 간간하게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강주의 몸속에서 붙는 불에 기름을 얹듯 뜨거운 것이 확하고 올리밀었다. 순간 강주의 발이 초막문을 걷어찼고 강주의 몸이 안으로 들어가며 강주가 잡은 삽날이 벌거벗은 남자의 엉뎅이에 가서 박혔다. “으악.” 신음소리가 비명소리로 바뀌였고 피가 튕겨올라왔다. 그와 동시에 강주의 손에 쥐였던 삽이 한쪽켠에 가서 떨어졌고 엉뎅이를 잡고 강호가 벌거벗은 채로 강주 앞에 엉거주춤 마주서있었다. “아이고, 형님.” “이, 이게 어찌된 일이냐?” 강호 뒤에서 녀자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있었는데 피끗 보니 바로 홍옥이였다. “어이쿠, 형님, 왜 내 궁둥이를 찍소?” 강호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고 다리사이로 뻘건 피가 흘러내렸다. 강주는 사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호주머니에서 화장지를 꺼내 강호의 피 흐르는 상처를 막았다. “형님, 사람 잡자구 잡도리했구만. 어이쿠, 나 죽는다.” 강호의 아우성이 초막을 진동했다. 어느새 옷을 다 입은 홍옥이 까칠한 눈으로 강주를 할낏거리며 강호한테 옷을 입혀주었고 강주는 죽그릇을 엎지른 개 신세가 되여 초막 밖으로 나오며 허구프게 웃고 말았다. 어쩌면 일이 이렇게 번진단 말인가? 하필이면 한로팔이 아니고 이들이 내 눈에 띄워 이런 생벼락을 맞는단 말인가? “별 재수없는 놈 다 있다, 허참.” 한참후 강호가 홍옥이를 뒤에 달고 초막에서 나왔다. 사색이 된 강호는 겨우 걸음을 옮기며 강주 앞으로 다가왔다. “너 왜 여기 있냐?” “형님은 여기 웬 일이요?” “그냥 지나가다가…” 강주는 강호 뒤에 서 있는 홍옥이를 힐끗거리며 입을 다셨다. “홍옥아, 오랜만인데 미안하게 됐구나.” “강호오빠 병나면 책임져요.” 홍옥이는 한마디 내뱉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과수나무사이로 달막거리며 빠져나갔다. 머리에 대수 걸친 빨간 머리수건이 간신히 매달려있었다. “가자. 병원에 가 처치해야지, 상처를?” 강주는 강호의 궁둥이를 내려다보며 재촉하자 강호는 손을 저었다. “그래도 형님이 사람 죽이자구 찍은 건 아닌 것 같소. 피 흐르긴 해두 너무 깊은 상처가 아니오. 그냥 지혈되믄 별일 없을 거요.” “사실은 너를 한로팔로 착각했구나. 홍옥이가 왜 그 빨간 수건을 쓰구 다닌다니? 허참, 일이 별나게 꼬였다.” “형님 눈에 허깨비가 보였던가 보오, 남을 잡는다는 게 제 동생을 잡고.” “미안하다, 홍옥이한테 잘 말해줘라.” 강주는 강호를 부축해 마을로 내려왔다. 강호를 집에 눕혀놓고 강주는 한달음에 상점에 가서 여러가지 부식품과 맥주를 사왔다. 전번에 강호한테 괜스레 화내고 또 오늘 볼썽사납게 강호 엉뎅이를 찍어놓았으니 할 말이 없었고 형으로서 미안했다. 심사가 뒤틀리니 일도 꼬였다. 강주는 강호와 마주앉아 맥주잔을 기울이며 홍옥이를 말밥에 올렸다. “너 그렇게 도둑놀이 하지 말구 그냥 같이 살어라. 이제 잘못하다가는 다음에는 정말 목숨을 잃는다.” 강주가 웃으며 뚱겨주자 강호는 길게 한숨을 내뿜었다. “그냥 좋게 지내기로 했소. 그러다가 날아갈 새오. 래년 봄에 외국 간다오.” “그럼 함께 가면 되지.” “난 그렇게 살뜰한 남자가 못되오. 그리구 아직 그 돼눔과두 리혼하지 않고 있다오. 어쩌겠소, 그저 이렇게 날아가다 앉는 새나 보며 살지므. 이게 내 팔잔갑소.” 강호는 찍힌 엉뎅이가 아픈지 눈살을 찌프리며 몸을 추슬리고는 맥주잔을 입에 가져다댔다. “허참 짜식, 래일 내 마누라와 말해 닭곰 해주마.” “그러지 마오, 한로팔이 해줄 닭곰두 얼마 없겠는데. 언제 내까지 다 챙기겠소.” “너 자꾸 한로팔 한로팔 하겠니? 재수없게. 그렇게 까불믄 이번에 ×× 잘라버린다.” 둘은 웃었다. 그리고는 맥주잔을 천천히 기울였다. 어느새 여름의 저녁이 서서히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6   “강호한테 닭곰 해줘야겠어.” 아침술을 들던 정이는 강주의 말에 낯선 사람 보듯 강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뭐람까?” “강호한테 닭곰 해줘야겠어.” 강주가 복창하자 정이의 두 눈이 차갑게 강주의 얼굴을 훑었다. “강호한테 닭곰은 왜 해줌까? 당신 혹시 강호한테 빚진 게라두 있는 게 아님까?” “사실 어제 밸 김에 삽으로 강호의 엉뎅이를 찍었소. 피를 좀 흘렸거든.” 강주는 죄지은 아이처럼 다소곳하게 밥을 입에 퍼넣었다. 그러나 씹지는 않고 입에 문 채 마누라의 대답을 기다렸다. “남의 엉뎅이는 왜 찍슴까? 무슨 일이 있었잼까?” 정이가 바투 들이대자 강주는 손을 내저었다. “남자들 일을 아낙네들이 알아서 뭐해.” “안됌다.” 정이는 앵돌아졌다. “한로팔이는 닭곰 해줄 수 있구 왜 강호는 안된다고 그래?” 강주가 한로팔이를 거들자 정이의 얼굴색이 변해갔다. 정이는 한로팔이 하도 정성껏 일을 도와줘서 닭곰을 해주었다고 변명했다. 말투까지 당당했다. 정이의 당당한 태도에 강주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도로 한발 물러났다. “아무리 수고했다 해두 닭곰을 해준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그 뜻이 다르다구. 알기나 하는가?” “그럼 이 동네서 내가 그렇게 힘들게 농사하는데 나서서 손을 봐주는 사람 누굼까? 그래두 한씨가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는데 그까짓 닭이 뭐가 대숨까? 소라두 잡을 정도루 고맙지. 보쇼, 이 울바자 남자손이 없이 거의 넘어지는 거 한씨가 고쳤지, 그리고 엉뎅이도 다 보일 정도로 망가진 변소두 저렇게 고쳐놨지, 그리구 검댕이를 뒤집어쓰구 구들까지 다 수리하는 그런 사람 닭곰 해주믄 안됨까? 그리구…” 정이는 말하다 말고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강주는 인차 출입문을 닫아버렸다. 괜히 남들한테 쓸데없는 소문을 낼가 두려웠다. 원체 말을 시작하면 보물이 터지듯 거침없는 정이의 입을 막을 수 없었다. 그냥 말이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리고 강주는 달래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뒤소리 듣기 싫어 그러는 거야. 녀자 몸으루 남정네의 도움을 받는다는 게 시골에서 뭘 말하는지 잘 알게 아닌가?” “내 무슨 뉘네 남정네를 꼬셨음까? 자기라두 했슴까? 당신까지 나를 화냥년으로 생각하잼까?” 정이의 붉게 충혈된 커다란 두눈은 강주를 직시했다. 그 눈에는 원망과 더불어 그 어떤 증오 같은 것이 그들먹하니 고여있었다. 강주는 괜히 자는 범의 코털을 건드려놓아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군 자신의 행실을 몹시 후회했다. “강호 그 자식이 기분 나쁜 소리를 해서 으름장을 놓는다는 게 그만 좀 다쳤거든.” 강주는 말머리를 돌리고는 절인 소고기 한덩이를 집어 마누라의 밥공기에 얹어주었다. 그것은 잘못했다는 뜻이기도 했고 지청구 그만하라는 뜻도 포함되여있었다. “맨날 그늘 밑의 개팔자 되가지구 외간녀자나 봐다니는 그런 사람과 좀 작작 붙어다니쇼.” 강주는 갑자기 망나니가 된듯 몰아붙이는 마누라 앞에서 모래 씹듯 밥을 씹어삼켰다. 정이는 강주를 힐끗 건너다보고는 밥공기에 얹어준 절인 소고기를 강주의 밥공기에 놓아주었다. “당신 가만 보니 강호한테 무슨 소리 들은 것 같슴다. 안 그러던 사람이 트집을 잡는 게 아무래두 이상함다.” “이상하긴 뭐가 이상하다구 그래, 아마두 신경이 예민해진 것 같구먼.” 강주는 소고기덩이를 통채로 입안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그 모양에 정이는 풉하고 웃으며 입안의 밥알을 뿜어냈다. 이때 밖에서 한로팔의 부름소리가 들려왔다. 한로팔은 강주가 아니라 정이를 불렀다. 강주는 그 소리가 안 좋게 들렸지만 몸을 일으켜 바깥문을 열었다. 하얀 와이샤쯔에 날을 세운 바지를 받쳐입고 까만 구두까지 신고 한로팔이 문밖에 서있었다. 한로팔의 끼끗한 모습에 강주는 그만 문턱을 넘지도 못하고 우두망찰 굳어버렸다. “허허, 강주형님, 아주머니 있수?” “있네, 들어오게나.” 정이가 어느새 문 앞으로 나서며 한로팔을 맞았다. “한씨, 오늘 이렇게 차려입으니 정말 멋있소. 근데 어디 가오, 멋지게 차려입구?” 정이는 한로팔의 차림새를 올리훑고 내리훑으며 흐응흐응 웃었다. 그 사이에 섰던 강주는 개밥에 도토리마냥 한쪽 켠으로 밀려났다. “일 보러 가는거유, 오늘 비료 한차가 올거유, 그걸 좀 받아주우.” 한로팔은 열쇠뭉치를 정이한테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썩썩 긁으며 강주을 힐끔 건너다보았다. “갔다 와서 강주형님하구 할 말두 있수. 허허허.” 한로팔은 강주의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대문을 빠져나가더니 대문 밖에 세워놓은 자가용 속으로 들어갔다. 차는 웅하고 울바자굽을 에돌아 마을을 빠져나갔다. “한씨 입이 당나발이 된 거 보니 꼭 좋은 일이 생긴 거 같구나.” 정이가 혼자소리로 중얼거리자 강주가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정이의 곁에 붙어서며 물었다. “좋은 소식이라니. 혹시 백만부자가 되는 건 아니겠지?” “저렇게 좋아할 때는 백만부자가 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 겜다.” 강주가 들떠있는 정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정이는 멋적었는지 아니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무안했는지 얼굴의 웃음을 거두고 드바삐 집안으로 들어갔다. 강주는 한로팔이 사라진 마을 동구밖에 눈을 주고는 마누라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재수없게 아침을 설친 강주의 마음은 수삽했다. 강주는 아래간에 들어가 낚시가방을 찾았다. 가방 안에는 몇해전 강주가 낚시하던 도구가 그대로 들어있었다. 강주가 낚시가방을 들고 나오자 정이가 말렸다. “날두 무더운데 집에 누워있지 낚시는 무슨 낚심까?” “답답해 그래, 바람이나 쏘이다 들어오겠어.” 강주가 고집하자 정이는 랭장고를 열고 음료수를 꺼내여 낚시가방에 넣어주었다. “해살이 펴지기 전에 일찍 들어오쇼, 잉어 많이 컸을겜다. 잉어 잡으믄 저녁에 잉어탕 맛있게 끓여줄게.” “늪이 도처에 쌔고 버렸는데 왜 남의 늪에서 낚시하겠어? 안해.” 강주는 낚시가방을 메고 논밭길을 걸어가며 아무리 생각해도 한로팔의 늪을 내놓고는 다른 곳에 가서 낚시할 데 없었다. 한로팔의 늪언저리에 서서 한참 머밋거리던 강주는 그대로 한로팔의 늪으로 들어갔다. 낚시터는 당연하게 예전에 자신이 하던 낚시터였다. 이미 흙둔덕이 높아졌지만 그래도 수면을 마주하고 앉으니 웬지 침침하던 가슴이 서서히 열리는듯 개운해졌다. 한쪽 손이 말을 잘 듣지 않아 성가셨지만 강주는 간신히 낚시대를 펴고 낚시를 물에 던졌다. 오랜만에 아롱아롱한 찌가 춤추며 강주의 눈에 들어왔다. 건너편 늪기슭에서 등이 붉은 잉어가 풀쩍 뛰여올랐다. “살이 잘 쪘군.” 강주가 중얼거리며 물 우에 떠있는 찌를 들여다보니 어느새 찌가 없어졌다. 순간 강주는 낚시대를 들어올렸다. 묵직한 감각이 손아귀에 전률해왔고 낚시대가 활등처럼 휘여들었다. 낚시줄에서 윙윙 시위를 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지 않아도 대어가 물린 게 틀림없었다. 강주는 부실한 손까지 동원해 낚시대를 잡고 안깐힘을 쓰며 물고기를 기슭으로 끌어왔다. 한참을 싱갱이질해서야 강주는 잉어 한마리를 낚아올렸다. 서너근은 실히 될 것 같았다. 강주는 잉어와 싱갱이질하는 사이 아침에 설쳤던 마음이 가뭇없이 사라지고 저도 모르게 코노래가 흥얼거려졌다. 그는 고기를 낚느라 해가 중천에 떠서 숫구멍을 지져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낚시는 큰 잉어를 낚다가 낚시줄이 끊어져서야 끝났다. 강주는 대여섯마리나 낚은 잉어를 두마리만 망태에 넣고 나머지는 도로 늪에 놓아주었다. 두마리면 저녁참으로 넉넉했다. 오랜만에 고향의 물고기맛을 보게 되였다. 물론 물고기는 한로팔의 늪에서 잡긴 했지만 그래도 고향의 늪에서 자란 물고기라 맛이 류다를 건 분명했다.   저녁에 정이가 잡아온 잉어로 잉어국을 끓여 상에 금방 올렸는데 밖에서 차소리가 들렸다. 강주가 내다보니 한로팔이 손에 술병을 들고 대문을 들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이름할 수 없는 빛이 물들어 반짝이고 있었다. “구수한 물고기탕 냄새가 진동하는구먼유.” 한로팔은 푸접 좋게 웃으며 손에 들린 술병을 강주한테 건넸다. “무슨 술인가?” “모태주우(茅台), 누가 주길래 갖구 왔수, 형님과 한잔 하려구. 아침에 내가 저녁에 온다구 했잖수.” 강주는 한로팔이 할 말이 있다던 생각을 하며 머리를 주억거렸다. 셋은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잉어탕을 마주하고 저녁상에 둘러앉았다. 강주는 한로팔이 무슨 말을 꺼낼가 그의 입을 쳐다보았고 정이는 한로팔의 얼굴에 비낀 즐거운 표정이 무엇을 의미할가 가늠해보았다. 술잔에 술을 채우자 한로팔이 술잔을 들었다. “형님, 아주머니,오늘 나한테 녀자가 생겼수. 허허허.” “뭐, 뭐라구? 색시 생겼다구? 그럼 전번에 얘기하던 그 산동녀잔가?” 정이는 들었던 술잔을 놓으며 한로팔의 어깨를 탁 쳤다. 그 통에 한로팔이 들었던 술잔의 모태주가 쏟아졌다. 강주도 순간 멍하니 한로팔의 고동색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래유, 예전에 말하던 그 산동녀자유.” “그래 결정했구먼, 그런 말 왜 인제야 하나?” 강주는 그제야 얼굴에 화기를 피우며 웃음을 떠올렸다. “뒤끝이 안 좋을가 걱정했댔는데 그래두 일이 제대두 풀렸어유. 자, 형님, 아주머니 한잔 들어유.” “그래그래, 자자, 축하축하.” 정이는 하늘에서 돈다발이 떨어진 것보다 더 기뻐했다. 그녀는 단숨에 배갈을 굽냈다. 강주도 한로팔이 속이 깊은 녀석이라고 속으로 뇌까리며 술을 입안에 털어넣었다. 술이 한순배 돌자 한로팔이 입을 열었다. “형님, 이렇게 하면 형님이나 아주머니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 눔은 생각했던 건 하고야 마는 눔이우.” “무슨 말인데 그러오, 빙빙 에돌지 말구 직방하오.” “마을 앞에 있는 늪을 형님한테 넘기려 하우.” “내가 그걸 사선 뭘하겠나, 관두게.” 강주는 뒤로 물러나면서 손사래를 쳤다. “팔려는 게 아니라 그냥 형님한테 주려는거우.” “한씨, 오늘 취했소? 홍두깨 같은 소리하면서 이러오?” 강주와 정이는 한로팔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그리고 무슨 속궁리로 그 늪을 그냥 주려는지 알 수 없었다. 한로팔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 산동으로 가기로 결심했수, 원래는 그 녀자를 여기로 데려와 형님들과 함께 살려구 했댔는데 생각대루 안됐수. 나 그 녀자 부친이 다루던 대추나무밭을 물려받았수. 그 녀자 부친이 병석에서 림종을 기다린다우. 아마두 송림동에 내가 묻힐 곳이 없는가 보우.” “그럼 이 과수밭은 어쩌구 가나?” “그냥 마을사람들한테 두구 가려우. 마을에서 알아서 처리하게 하겠수. 내란 눔이 여기 와서 번신하구 가는데 그까짓 과수밭이 대수겠수.” 한로팔은 강주와 정이의 술잔에 술을 넘치게 부었다. 그리고는 잔을 들고 웃었다. “내가 이 마을로 처음 왔을 때 제일 먼저 나한테 손을 내민 사람이 바로 형님과 아주머니였수, 형님 덕분에 김치, 된장, 고추장이 이미 습관된 지 오래우, 흐흐흐. 그건 그렇고 우리 한족들은 집을 위해 일생도 바치는데 형님과 아주머니는 나한테 그런 집을 내주었수. 그런 고마움을 모르면 이 한로팔이가 인간이 아니지우. 내가 남기고 가는 과수밭과 늪은 이 한로팔이가 형님과 아주머니 그리고 마을사람들의 은혜를 값기 위함이우. 조선족과 한족은 사는 방법이 다르지만 잘 살려는 욕심만은 같다구 보우. 아주머니가 녀자의 몸으루 농사 짓는 게 나를 일깨워주었수. 내 아주머니 얼굴을 봐서 늪을 형님한테 주는 거우. 그 늪에 잉어가 많을 거우. 형님, 앞으로 한마리씩 잡아 아주머니한테 대접하우. 그리구 마을사람들두 대접하구. 형님두 병을 빨리 고치구 함께 산동으로 날 찾아오우. 맛있는 대추떡 대접하리다.” “그럼 그럼, 가야지. 고맙소, 한씨.” 정이의 눈초리가 촉촉해졌다. 강주도 머리를 주억이고는 술잔을 기울였다.   강주는 이튿날 정이가 해준 닭곰을 가지고 강호를 찾아갔다. 강주는 강호가 닭다리 하나를 다 뜯자 한바탕 닦아세웠다. 강호는 자신의 호의를 몰라준다고 억울하다며 역설했지만 강주의 손끝은 강호의 코끝을 향해 삿대질해댔다. “너 때문에 생사람 잡을 번했잖아. 너 무슨 심보루 가지구 나한테 그런 말을 했어?” 강주가 두 눈에 불을 달고 자기한테 욕을 퍼붓자 강호는 갑자기 주눅이 든듯 머리를 떨구었다. “사실은 한로팔이 나를 무시하는 게 괘씸해서 그랬던 거요. 형님 손을 빌어 혼 좀 내려구 한 건데…” “그럼 왜 남한테 무시당하메 사냐 이 말이다. 니나 내나 좀 한로팔이처럼 사는 맛이 나게 살자.” 강호는 의아한 눈으로 강주를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형님, 한로팔이 혹시 형님한테 소비돈이라두 쥐여줍데?” “소비돈 아니라 마을 앞 늪을 통채로 나한테 주었다. 왜?” 강주의 말투에는 으시대는 투가 약간 섞였지만 얼굴에는 부끄러움의 찌꺼기가 둥둥 떠있었다. 강호의 닭기름이 잔뜩 게발려진 입이 딱 벌려졌다. 그의 입에서 헉헉거리는 소리가 새여나왔다. “한로팔이 환장했구만, 그 늪을 그가 얼마나 품을 넣어 수건했는데.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니오?” “나두 꿈을 꾸는가 했는데 사실 한로팔이 산동녀자 만나 함께 산동으로 간단다.” 강주의 진지함에 강호도 웃으며 닭가슴살을 쥐여뜯어 입에 쑤셔넣었다. 그리고는 신비한 어조로 뇌까렸다. “한로팔이 산동 가면 더는 록색모자 쓸 일이 없겠구먼.” “짱―” 강주는 강호의 뒤등을 후려쳤다. “짜식, 엉뎅이 한번 더 찍히고 싶어서 그러니?” “롱담이오. 허허허.” “맥주나 내오나. 아무리 널 먹으라구 해온 닭곰이라구 혼자 먹는 눔 어디 있냐?” “알았소.” 둘은 늪을 어떻게 더 잘 만들어놓을가? 과수밭은 도대체 누구한테 차례질가? 래년 농사는 누굴 믿고 할가를 놓고 언거번거 담론하며 맥주잔을 기울였다.   7  가을이 여름을 팔아 풍작을 안아왔다. 구슬 같은 땀을 해빛에 구워낸 누런 곡식들이 전야에 넘쳐났다. 벼밭에서는 꼼바인이 뒤꽁무니로 벼주머니를 쏟아내고 옥수수밭에서는 옥수수 수확기가 홍두깨 같은 옥수수 이삭을 말아올렸다. 한로팔이네 과수밭은 말끔히 수확한 뒤였고 앞마당에는 사과배 상자가 포장을 마치고 피라미드마냥 쌓여있었다. 정이가 한로팔의 신세로 지은 곡식들도 앞마당과 뒤주에 차고 넘쳤다. 이젠 한해 농사도 끝나 한가해지자 정이는 강주와 함께 마을뒤산더기에 있는 옛 도라지밭으로 올라갔다. 기실 정이는 해마다 가을 이맘때면 여기 도라지밭으로 올라와 수풀 속에서 도라지를 캐군 했다. 정이는 캔 도라지를 잘 다듬어 술에 담갔다가 강주가 외국에서 돌아오면 내놓군 했다. 그 술독에는 도라지뿐 아니라 더덕, 방풍, 송이버섯, 머루, 오미자 같은 야생약재와 열매들이 가득 들어차 그야말로 보신주였다. 그 술을 강주는 두번 마셨다. 한번은 음력설에 외국에서 돌아와 마셨고 두번째는 중풍으로 반편이 되여 돌아와 마셨다. 강주는 이런 술은 잘 담갔다가 설날에 모두 모여 마시는데 이름하여 도소주라 부른다고 정이한테 설명했다. 정이는 손사래 치며 그런 복잡한 단어이름은 모른다며 그냥 몸보신용으로 조금씩 마시면 좋을 거라며 여직껏 술담그기를 고집해왔었다. 가을이면 시골의 산에는 여러가지 산약재는 물론 식물의 줄기와 나무줄기, 산열매들이 널려있어 아무렇게나 다듬어 술에 담그거나 음식으로 만들어도 몸에 좋은 보약이 되였다. “올해 음력설에는 도소주 마셔보겠구먼.” 강주는 광주리에 담긴 도라지를 한웅큼 쥐고 냄새를 맡았다. 흙냄새와 더불어 도라지 본연의 독특한 향이 페부속으로 스며들었다. “오랜만에 집 왔는데 술도 취토록 마시지 못하니 내 팔자두 한심하지.” 정이의 진담인지 우스갠지 알 수 없는 말에 강주는 마음이 알싸해났다. 여직껏 강주 자신은 마누라한테 잘해주었다고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별로 그럴듯하게 해준 게 없었다. 그렇게 어느새 50을 훌쩍 넘겨 지천명이 되여버렸고 쓸모없는 페인이 되여 마누라 궁둥이를 구접스레 따라 다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런 소리 하지 말라니까. 한쪽 손을 가지구두 얼마든지 내 살아갈 벌이는 할 수 있어. 이제 한로팔의 늪을 잘 경영하믄 목돈두 벌 수 있을 거야.” 둘은 산둔덕에 나란히 앉아 마을 앞 늪을 내려다보았다. 늪은 커다란 거울을 논밭 한가운데 놓은 듯 해빛에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저 늪을 더 크게 늘여가지구 낚시어장을 만들면 큰 돈은 아니여도 여유있게는 살 수 있을 거야. 그리구 내 처지에두 딱 들어맞는 일이지.” “생각 잘했슴다. 이젠 다른 생각 말구 조용히 여기서 죽을 때까지 살기쇼. 애들이 찾아오면 맛있는 거나 해주면서 말임다.” 강주는 말없이 마누라의 손을 꼭 잡았다. 정이의 손은 힘든 일로 많이 거칠었지만 강주의 손아귀에서는 마치 처녀때 손같이 부드럽게 느껴졌다. “여부가 있을가, 인젠 그걸 락으로 살아야지, 욕심 부리지 말구.” “당신두 인젠 많이 늙었슴다. 그런 말 다 할 줄 아는 거보니. 훗훗.” 정이는 자기가 말해놓고도 우스운지 입을 싸쥐였다. “늙은 게 아니라 셈이 들었지. 지천명이 되니 인제야 인생 한끝이 알리는 거야. 허허허.” 둘은 미소하며 멀리 수확기들이 내달리는 벌판을 내려다보았다. 참 좋은 곳이였다. “한씨가 모레 간단데 어쩜까? 우리 집에서 한때 대접해야지. 그 산동녀자두 래일 온담다.” 한참후 정이가 강주를 건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한로팔이 가버리는 것에 대한 미련과 애잔함이 가득 젖어있었다. “응당한 일이지, 래일 아침 늪에 나가 잉어 둬마리 잡아올게. 그리구 닭곰두 하고 두부두 앗아야지.” “닭곰은 그만두기쇼, 아마 너무 많이 먹어 싫증을 느낄겜다.” “그럼 내가 먹지. 좌우간 송별음식이니 잘 차리오.” 둘의 웃음소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둘은 나란히 마을로 내려갔다. 그들의 머리우로 산새들이 우짖으며 날아갔다. 해빛은 찬연히 그들의 몸우에 쏟아져 내렸다.   이튿날 강주네 집에서는 한로팔의 송별잔치가 벌어졌다. 음식상 우에는 정이가 정성스레 만들어 올린 음식들이 가득 차려졌다. 강주가 아침잠을 설쳐 잡은 잉어볶음료리가 상 중앙에, 닭곰이 그 옆자리에, 그리고 여러가지 산나물과 도라지, 송이로 만든 음식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로팔은 색시와 함께 특별히 차를 몰고 왔다. 한로팔의 색시는 빨간 옷을 입었는데 한로팔이보다 나이가 더 있어 보였고 세월에 부대낀 흔적이 력력했다. 그래도 웃음이 주는 매력 때문인지 이뻐보였다. 강주와 정이는 대문 앞까지 나가 한로팔이네를 맞았다. 귀빈대접 그 이상이였다. “형님, 아주머니, 전번에 말했던 내 색시우. 이쁘지유?” “그럼 이쁘구 말구, 반갑소. 어서 안으로 들어가기오.” 강주와 정이는 인사치레를 마치고 한로팔이와 색시를 집안으로 안내했다. “어이쿠, 벌써 이렇게 푸짐하게 한상 잘 차렸네유. 허허허.” 한로팔이 색시가 손에 들었던 례물을 정이한테 건넸다. “이건 우리 집에서 재배하는 붉은 대추입니다.” “아이구, 그 먼곳에서 이런 귀한 걸 다 가지구 왔네.” “자자, 앉자구. 음식이 다 식었네.” 이때 문이 열리며 강호가 들이닥쳤다. 그의 뒤를 따라 홍옥이도 들어왔다. 홍옥이는 강주을 보며 얼굴을 붉혔지만 강주는 되려 강호를 흘겨보며 꾸중했다. “빈손에 오니? 맥주라두 들구 와야지.” “오늘따라 상점에 맥주 없습데.” 강호가 뒤더수기를 긁자 모두가 웃어제꼈다. 여섯 사람은 음식상에 둘러앉았다. 강주는 약간 흥분된듯 얼굴이 불깃불깃 해졌다. 그는 미리 준비해놓은 약술을 꺼내여 돌아가며 한잔씩 부었다. 술잔을 든 강주의 음성은 사뭇 떨렸지만 발음만은 똑똑했다. “내가 한마디 하겠네. 오늘에야 나는 인정에 대해 뜨겁게 느끼게 되누만. 그리구 로팔이 동생한테 미안한 것두 반성하게 되네. 로팔이 동생이 떠나간다니까 더 빨리 깨달았네. 난 마치 잠에서 깨여난 느낌이네. 우리 집의 한팔이 되여준 로팔이 동생한테 이 술을 권하겠네. 그리구 둘이 행복하게 잘 살게. 축하하네. 자, 건배.” 강주는 뜨거운 것을 삼키며 술잔을 들어 굽 냈다. 그 뒤를 따라 한로팔, 강호를 비롯해 돌아가며 술잔을 들었다. 정이는 닭다리를 뽑아 한로팔이 색시한테 쥐여주었다. “우리 마을에 들어온 색시는 이 닭다리를 꼭 먹어야 한다오. 그래야 애낳이두 잘한다오.” “아주머니, 이 나이에 애가 당찮지유. 허허허. 그냥 마음 맞춰 살면 되는 거지유.” 한로팔이는 오늘따라 머리도 윤기 나고 고동색 얼굴도 유난히 밝아보였다. “나는 하나 낳을 건데. 될지는 모르지만.” 강호가 감초처럼 께끼자 강주가 강호한테 잉어머리를 집어주었다. “그래, 맞다. 이렇게 잉어 같은 미인어나 하나 낳아라.” 강주의 우스개에 또 한바탕 웃음꽃을 피웠다. 강주는 두번째 잔을 들고 강호와 홍옥이를 건너다보았다. 강주는 강호가 부모를 잃고 홀로 살아가는 것을 곁에서 보는 것이 가슴이 알찌근해지기도 했다. 결혼한 지 일년도 안돼 리혼 맞고 여직껏 홀아비로 있으며 남들의 업심도 많이 받아왔다. 강주가 강호를 미워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일하기 싫어하는 본성 때문이였다. 그래도 친척이라 별수 없이 곁을 주며 받아주고 있었다. “강호, 여직껏 혼자 사느라 고생했다. 인젠 임자를 만났으니 좋은 날 택해 식을 올려라. 이 형님이 주례를 서주마. 그리구 음식은 너 형수님이 차릴 거다. 그리구 홍옥이두 우리 강호 잘 모셔라. 그래두 쓸만한 눔이야. 니들이 한집에서 살아야 이 형님두 다시는 강호 엉뎅이를 찍지 않을 게 아니냐? 허허허.” 강호와 홍옥이는 강주의 말에 얼굴을 붉혔고 정이는 입에 잉어고기를 물고 훗훗거리며 웃었다. 한로팔이는 무슨 말인지 몰라 좌중을 둘러보며 그저 웃기만 했고 한로팔이 색시만은 닭다리에 붙은 고기를 뜯느라 여념이 없었다. “좌우간 고맙소, 형님 있어 마음이 든든하오.” “여보, 그 도소주 어딨어?” 정이는 강주의 말에 아래간으로 내려가더니 정히 포장한 술 두병을 들고 나왔다. 술병은 이미 붉은 천으로 동여져 있었다. 병 속에는 여러가지 약재가 들여다보였는데 얼핏 보아도 그 정성이 느껴졌다. “이건 우리 조선족이 설에 마시려고 장만하는 술이네. 도소주라고 부르지. 옛날에 사람들은 도소주가 묵은 해의 액운을 물리치는 효능이 있어 설에 마신다고 했네. 한로팔, 별로 선물할 게 없구만. 이 술을 가지고 가서 설에 친척들이 모여앉아 마시게.” “아이구, 이렇게 좋은 술을 나한테 주면 어떻하우. 형님 두구 설에 마셔야지.” 한로팔은 신기한듯 술병을 들고 병안에 들어있는 약재를 들여다보았다. “신비할 게 없네, 그저 우리 마음이 담긴 술일 뿐이야.” 강주는 취기가 오른 만면에 기쁨을 가무리지 못한 채 또다시 술잔을 들었다. 한로팔이도 술잔을 높이 들었다. 정이도 강호도 홍옥이도 한로팔이 색시도 다 함께 술잔을 들었다. 술흥은 점점 흥그러워갔고 무르익어갔다.  
1    엄마의 우물 댓글:  조회:674  추천:2  2012-12-24
엄마의 우물 리승국 엄마의 우물에는 향기로운 사랑이 있고 잔잔한 미소가 있으며 맑은 소망이 있다. 그 우물에 가면 나를 울리던 금이 간 물바가지가 있다. 그리고 애달프게 들여다보이는 우물속의 하얀 조약돌이 있다. 퐁퐁 솟는 샘물도 있다… 엄마는 봄이면 앓군 했다. 의사의 말이 산증이라고 했다. 엄마는 얼굴이 팅팅 부어오를 때면 신경질을 부리군 했는데 눈물까지 흘렸다. 그러면서도 한사코 병원에만은 가지 않겠다고 버텼는데 그 누구도 말려낼수가 없었다. 그런대로 토방법을 쓰군 했는데 용케도 부은것이 내리고 정신도 차렸다. 그리고는 일밭에도 나갔다. 그덕에 우리 집은 봄을 맞아 처음 닭곰으로 생활개선을 했다. 아끼던 씨암탉을 잡으면서도 엄마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엄마는 닭곰을 할 때면 꼭 닭의 배속에 차입쌀과 황기 아니면 인삼을 넣고 실로 배를 봉합했다. 그다음 솥에 물을 조금 붓고 나무로 만든 시루다리를 두세개 걸쳐놓고 닭을 오지단지에 넣어 시루다리우에 올려놓고 불을 땐다. 솥이 끓어 이십여분이 지나면 닭고기냄새가 조금씩 나기 시작한다. 이때가 되면 엄마는 물길러 가군 했다. 《물길러 갔다올테니 아궁이에 나무가지를 좀 넣어라.》 그렇게 물길러 갔다온 엄마가 빈물동이를 이고 집으로 들어왔는데 엄마의 얼굴색이 말이 아니게 흐려있었다. 엄마는 아무말도 없이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부엌에서 불을 때던 나는 인차 엄마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엄마는 사랑칸에서 삽을 들고 나섰다. 《엄마, 삽은 왜?》 《우물을 손질해야겠다. 어느 망할자식이 소한테 물을 먹이다가 그랬는지 우물후렁이 무너졌더구나.》 《엄마 혼자힘으로 어떻게 손질한다고 그래?》 나는 엄마뒤를 따라서며 툴툴거렸다. 나는 엄마가 늘 그렇게 싱거운 일을 찾아하는줄 알고있었다. 그 우물도 엄마 혼자 마시는것도 아니고 온 동네가 다 마시는 우물인데 한사코 고집스레 홀로 나서기를 즐겼다. 《누가 하든 손질하기는 마찬가지야.》 엄마의 뒤를 따라 우물이 있는 당나무밑으로 가니 우리가 매일 마시는 우물이 살풍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있었다. 둔한 소의 발에 밟혀 우물둘레에 쌓은 돌이 한쪽 귀퉁이가 우물속으로 무너져내려 우물이 몹시 흐려져있었다 그 살풍경을 보자 저도 모르게 밸이 울컥 솟아올랐다. 《어느 개새끼…》 《개새끼가 아니라 소새끼다.》 우물은 언제부터 생겨났는지는 알수 없으나 오랜 세월을 흘러온듯 돌에 푸른 이끼가 끼였고 돌과 돌사이에 옹배기쪼각이 드문드문 끼여있었다. 우물은 정갱이높이만큼의 깊이에 한발 남짓한 아구리를 가진 바가지우물이였다. 물은 돌틈에서 솟는 샘물이라서 사람들은 암수(岩水)라고 했다. 내가 퍽 어릴 때부터 엄마가 그냥 그 우물을 손질해온것을 알고있어 나는 우물을 엄마의 우물이라고 불렀다. 언젠가 엄마가 두만강가에 나가 하얀 자갈돌을 주어다 우물속에 뿌려놓아 우물속에 하얀 자갈돌이 들여다보였댔는데 지금은 간혹 몇개씩만 들여다보인다. 어느 장난꾸러기 개구쟁이들이 건져간것이라고 엄마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알려주었다. 엄마는 돌을 쌓으며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우물은 가꾸는 사람이 따로 없다. 언제나를 막론하고 누구나 다 가꿀 일이니라.》 엄마는 돌 하나를 쌓는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모나지 않고 둥글게 생긴 돌이라 어떻게 놓아도 시원치 않았다. 그래도 엄마는 열번이라도 돌을 돌려가며 견고하고 곱게 쌓기에 열심했다. 그렇게 한동안 애를 써서야 겨우 원모양 비슷하게 돌을 쌓아놓을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엄마는 팔소매를 걷어올리고 우물안의 나무잎이랑 비닐주머니같은것들을 건져냈다. 시골에는 도처에 쓰레기같은 오물들이 많아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면 그런 오물들이 곬을 따라 흘러내리군 했다. 그렇게 바람에 날려 우물에 떨어진 먼지와 쓰레기들이 볼품없이 우물을 망가뜨리고있었다. 엄마는 그 항거할수 없는 자연의 심술앞에서 그저 말없이 우물을 손질하는데만 열심했다. 엄마의 우물주위에는 여러가지 풀들과 들꽃이 피여있었다. 그 풀들과 들꽃은 자연이 하사한 혜택이고 그것을 가꾸는것은 엄마의 지혜이고 의무였다. 일자무식인 엄마였지만 그저 자신의 힘으로 우물을 청소했고 그러한 의무를 하나의 리념같은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언제나를 막론하고 우물을 집물독마냥 깨끗하게 손질해놓군 했다. 마을에는 위생소가 있었다. 위생소에서는 초약을 달여 마을사람들과 학교에 보내 절기에 따른 전염병을 예방하게 했다. 해마다 봄이면 류행성감기를 비롯한 전염병이 전파되여 많은 사람들이 병에 시달렸다. 위생소에서는 산에서 캐온 약재로 약을 달이군 했는데 물은 엄마의 우물에 와 길어갔다. 그해 촌위생소는 전염병예방퇴치로 전 시적으로 첫손에 꼽히는 위생소로 되였다. 경험발표때 촌위생소 박의사가 마을에 유일한 우물인 엄마의 우물을 자랑삼아 선전했다. 그 소문으로 시병원에서 사람을 마을로 파견해 엄마의 우물에 대한 수질화험을 했다. 결과 엄마의 우물에서 솟는 샘물은 광물질을 비롯한 미량원소가 풍부하다는것이 실증되여 대뜸 전 시에 소문났다. 그후 여러 위생부문에서 엄마의 우물의 물을 길어다 증류수를 만들었고 제약에 쓰군 했다. 그 덕에 마을도 소문났다. 그러나 엄마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엄마의 우물은 엄마 혼자 소유가 아니고 촌의 소유였기때문이였다.비는 하늘이 내리고 절은 부처가 받는다고 엄마가 땀을 흘려 손질하고 건사해온 우물이 소문나자 촌주임과 서기 그리고 촌위생소 박의사네는 북경유람까지 갔다왔다. 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어느 날 엄마는 삽을 들고 어딘가 나갔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농군들은 일손을 놓고 집에서 한가히 잡담이나 하지 않으면 술놀이나 하군 했다. 일없이 집에서 바느질하던 엄마가 밖을 한참 내다보다가 밖으로 나가자 나는 어딘가 집히는데가 있어 슬그머니 엄마뒤를 따랐다. 틀림이 없었다. 엄마는 삽을 들고 머리에 작은 비닐쪼각을 쓰고 우물로 내려가 우물주위에 도랑을 파고있었다. 나는 대뜸 엄마의 손에서 삽을 빼앗았다. 《엄마, 이 우물이 엄마 한사람 마시는 우물이야? 왜 옆사람까지 억울하게 만들어?》 엄마는 말없이 삽을 도로 빼앗아 그냥 도랑을 팠다. 《엄마한테 복이 차례지라는 말은 아니야. 하지만…》 《그만해, 복이란게 따로 없다. 내 마음에 내켜서 하는 일이면 그게 복이다. 넌 아직 어려서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채 몰라 그런거다.》 엄마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머리에 쓴 비닐쪼각을 벗어 나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누가 손질하든 우물은 마찬가지다. 너도나도 다 함께 마시는 우물이고 꼭 이 우물만 마셔야 하니깐 네일 내일 따로 없다.》 엄마의 말을 반박할수 없었다. 언제 한번 부모의 말을 거역해본적이 없었던 나라 말없이 여기저기서 돌을 주어다 우물주위에 쌓아놓았다. 우물은 그렇게 항상 맑았고 사람들은 그냥 맑은 물을 마셨다. 그렇다고 해서 엄마한테 감사하다거나 감격해본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고 그로 해서 엄마가 사람들한테서 칭찬을 받아본적은 더구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때로부터 엄마의 우물의 존재가치를 얼마만큼 알게 되였고 엄마의 소망이 무엇임을 알게 되였다. 그후 나의 일상에는 하나의 걱정거리가 생겨났는데 그것이 바로 엄마의 우물에 신경을 쓰는것이였다. 내가 조금이라도 엄마의 우물을 건사하면 그만큼 엄마의 일손이 덜어지기때문이였다. 얼마후 농촌수도화를 실현한다는 상급의 지시정신으로 촌에서는 마을에 수도를 놓는다고 했다. 산너머 뒤골의 개울물을 끌어다가 음료수로 한단다. 세월이 흐르니 신세도 고쳐본다고 마을사람들은 어른부터 아이들까지 기뻐서 야단들이다. 그날부터 촌에서는 집집마다 수도관을 묻는 구뎅이를 파게끔 메터수로 떼주었다. 우리 집에도 몇십메터되게 차례졌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괭이와 삽을 메고 매일 땅파기에 나갔고 가끔 불편한 몸을 끌고 엄마도 나서군 했다. 생각만 해도 신선스러운 수도물이 집집에 설치된다고 하니 수도공사는 진척도 빨랐다. 초겨울에 잡아들기 바쁘게 집집의 오지독에 수도물이 꿈같이 쏟아졌다. 나는 그날 저녁 조용히 집을 나와 엄마의 우물로 나갔다. 엄마의 우물가에 웬 그림자가 왜소하게 쭈크리고 앉아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엄마였다. 엄마는 울고있었다. 달빛에 엄마의 눈물은 맑게 빛나고있었다. 《엄마?》 나는 조용히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인기척을 느끼고는 힘겹게 몸을 움직여 한쪽으로 드텨앉았다. 《국이냐? 이리와 앉거라.》 엄마곁에 앉으니 엄마의 가느다란 말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엄마의 고향에는 엄마가 아침마다 머리를 적셔 다듬던 우물이 있었단다. 그런데 그 우물이 산사태에 파묻혀버리는바람에 엄마는 할수 없이 식구들과 함께 고향을 떠나고말았단다…》 나는 그 이야기가 광복전 일이라는것을 알고있었다. 엄마는 마음이 서글퍼질 때면 늘 이 이야기를 하군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엄마의 눈에 비낀 애수를 보군 했다. 소녀때의 그 우물을 오늘의 이 우물로 대신해보는 엄마의 그 마음속 저변에는 어떤 소망이 자리하고있는것일가? 수도물이 집집에 들어오면서부터 엄마의 우물에는 점점 사람이 적어졌고 쓸쓸하리만치 한적해졌다. 엄마는 늘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우물을 손질해야겠는데 말이다. 몹시 망가진것 같던데… 아무때나 그 우물을 다시 마실수 있을거다. 절대 버리지 말아야 한다.》 엄마는 아픈 몸을 끌고 하루에 한번씩 우물에 나가보군 했는데 돌아와서는 아무말도 없이 수도꼭지를 묵묵히 바라보군 했다. 그러다가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수도꼭지를 열고 쏟아져나오는 수도물을 내려다보면서 조용히 미소를 흘리기도 했다. 나는 엄마의 그 소망을 지켜드리려고 시간이 나는대로 우물에 나가 물도랑도 쳐놓고 우물안에 떨어져들어간 비닐쪼각이나 나무가지따위를 건져냈다. 그렇게 한번씩 엄마를 대신해준후면 어쩐지 마음이 개운해졌고 마치 큰일이라도 해놓은듯 스스로 대견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처럼 그렇게 알뜰하게 가꿀수는 없었다. 엄마는 우물가로 나갔다가 돌아오면 기쁨을 가무리지 못한채 나를 정겹게 바라보았다. 《네가 했지? 자식…》 나는 엄마의 즐거워하는 표정을 읽으며 속으로 한없이 기뻤다. 그런날 저녁이면 엄마는 나의 밥그릇에 닭알 한알을 얹어주며 아닌보살을 떨었다. 《일하느라 많이 축해졌다.》 물론 아버지한테도 동생한테도 똑같이 차례지는 엄마의 혜택이였지만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몰랐다. 겨울을 지나보내고 엄마의 치마폭같이 산뜻한 봄이 찾아왔다. 봄이 돌아오면 시골은 농사차비로 바쁘다. 어느날 엄마는 일밭에 나갔다가 심한 통증으로 그자리에 까무러치고말았다. 그렇게 쓰러진 엄마는 자리에 드러누웠다. 엄마의 얼굴은 팅팅 붓기 시작했는데 고통을 참느라고 찌프린 량미간의 주름이 내 가슴속에 깊은 골짜기를 파놓았다. 우리가 병원에 가자고 졸랐지만 엄마는 한사코 고집했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괜찮다는것이 엄마의 치료방법인듯싶었다. 날마다 축해지는 엄마앞에 어느날 나는 끝내 무릎을 꿇었다. 《엄마, 제발 고집부리지 말고 병원에 가봐. 난 엄마가 밤마다 내는 앓음소 리를 들을수가 없어.》 할수 없이 엄마는 병원에 가기로 했다. 나도 따라나섰다. 나는 나의 귀로 엄마의 병세를 듣고싶었다. 도대체 엄마의 병이 얼마나 중한지 알고싶었다.엄마는 병원의 여러칸으로 의사가 시키는대로 들락거리더니 점심무렵에야 병원복도에 놓인 나무걸상에 주저앉았다. 엄마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고통스레 내돋았다. 아버지는 의사와 함께 방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따라 들어가려고 했으나 아버지가 부라리는 눈에 기눌려 그대로 주저앉고말았다. 얼마후 아버지가 문을 열고 나왔는데 얼굴에는 애써 만들어내는 미소가 비꼈다. 그 미소를 읽으면서 나는 엄마의 병세를 짐작할수 있었다. 나는 어금이를 깨물며 엄마의 가냘픈 손을 꼭 잡았다. 《가자.》 아버지는 얼굴을 돌리고 성큼성큼 앞섰다. 그뒤를 따르며 엄마가 아버지의 옷깃을 잡았다. 《의사가 뭐랬는데 그래유?》 《입원할 필요가 없다누만. 집에서 치료하면서 잘먹으면 된대.》 《내 그럴줄 알았지. 국이야, 봐라. 엄마가 이제 백살까지 살지 않나.》 엄마의 얼굴에는 채색무지개같은 웃음이 비꼈다. 그렇게 찬란한 웃음을 나는 처음 보았다. 고통속에서 모대기는 엄마의 얼굴에 어떻게 그런 웃음이 비낄수 있었는지 알수 없었다. 그렇게 병원에서 돌아온 엄마의 정신상태는 초인간적으로 명랑했다. 늘 웃음을 얼굴에 담고있었는데 그런 상태는 모내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다가 끝내는 드러눕고야말았다. 그때에야 아버지는 나한테 조용히 알려주는것이였다. 《국이야, 엄만 방광암이란다. 인젠 치료할수가 없다. 전번에 병원에 갔을 때 의사가 그러더라.》 나는 이미 마음속에 준비가 있은지라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엄마가 그렇게 못된 병에 걸렸을줄은 미처 몰랐었다. 《저도 어느정도 알고있었지만 엄마가 너무 불쌍해서…》 나는 뒤말도 잇지 못한채 울음을 터뜨렸다. 약 한첩 제대로 써보지 못한 엄마가 밉기까지 했다. 엄마는 여름을 넘기지 못한채 무더위가 심한 어느날 숨을 거두었다. 엄마는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도 식구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 미소를 바라보며 엄마가 우리들 마음속에 그늘을 던져주지 않으려고 애썼음을 알수 있었다. 장례를 치른 그날밤 나는 엄마의 우물가로 나갔다. 멀리서 바라보니 엄마의 환영같은 그림자가 엄마의 우물가에 앉아있는듯싶어 심히 놀랐다. 그사이 우물은 손이 가지 않아 수면에 종이장, 나무가지, 풀잎들이 둥둥 떠다녔다. 볼썽사나운 우물을 내려다보며 나는 조용히 엄마를 불러보았다. 《엄마, 엄마가 없으니 우물이 더러워졌어.》 그해 가을 나는 친척의 소개로 일자리를 찾아 외지로 떠나갔다. 객지생활의 고달픔과 지겨움에 부대끼면서도 나의 마음속에는 하냥 엄마의 우물이 맑게 솟아나 견딜수가 없었다. 음력설 집에 오자 나는 행장을 풀기 바쁘게 엄마의 우물로 달려갔다. 우물주위에는 누런 소똥이 지저분하게 널려있었고 우물후렁을 쌓아올린 돌들이 반나마 무너져내려 꼴불견이였다. 나는 억이 막혀 한참이나 그자리에 서있었다. 불어오는 하늬바람에 우물은 점점 더러워지고있었다. 나는 차디찬 겨울하늘을 바라보면서 어쩌면 엄마의 얼굴조차도 그려볼수 없을것만 같았다. 나는 머리를 수그린채 엄마의 우물을 떠나고말았다. 그렇게 얼마마한 세월이 흘렀을가… 지금 엄마의 우물에는 웃음도 없고 채색무지개도 없으며 노래도 없고 이야기도 없다. 엄마의 우물에는 아쉬움과 기대만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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