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가 나를 살리나?
리승국
허구는 거짓말이 아니다. 허구라고 말하는 것은 소설을 쓰기 위한 작가의 가장 합당한 변명이다.
생활은 늘 나한테 이런 질문을 제기하곤 한다. 생활이 그대를 속여도 그대는 믿을 수 있는가? 참 오묘한 물음이다. 하지만 나는 믿을 수 있다고 말해야겠다. 왜냐 하면 나는 생활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한 믿음은 나의 상상으로 승화되여 또 하나의 생활세계를 만들어놓는다. 바로 허구된 생활-소설이다.
소설 <마지막>의 어씨가 가지고 있는 미쟁이 재간은 바로 나의 아버지의 재간을 옮겨놓은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돌 쌓고 벽돌담을 쌓는 것을 늘 보아왔고 언젠가는 아버지를 따라 함께 돌 쌓고 미장일을 한 경력도 있다. 어찌 보면 생활경력의 하나하나가 허구 아닌 허구로 만들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쓸 때면 늘 내가 가장 잘 아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선택하고 가장 익숙한 일들을 골라 서술하기를 좋아한다. 그런 일들은 서술하기가 쉽고 또한 파악이 있으며 공감대가 있어 깊은 곳까지 파고들 수 있다. 그리고 주인공이 무엇을 말할 것이고 어떤 몸짓을 할 것이며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까지 미리 알 수 있다. 인물과 가까와지는 것이 바로 소설에서 인물을 부각하는 가장 근본적인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장 잘 아는 사람을 소설에 등장시키고 단장시켜 준다. 그리고 잘 아는 사람이여야 대화도 스스럼없이 엮어내려갈 수 있고 술도 성향에 맞춰 속시원히 함께 마실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인생경력은 나의 소설창작에 아주 큰 작용을 했는데 가장 근본적인 것은 바로 최하층 인간들의 삶을 많이 체험해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고충이 무마할 수 없을 만큼 몸 속 깊숙이 응어리져있기 때문에 내가 쓴 소설 속에는 그런 행위가 더욱 류다르게 형상화되군 한다.
어느 편집선생님은 나의 소설을 편집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리선생의 소설이야기가 혹시 가정사를 다룬 것이 아닙니까?”
그 물음에 나는 내가 알심들여 엮은 이야기가 독자한테 착각을 주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소설은 완전한 허구로 엮어낸 소설이였고 나의 가정사와는 삼만팔천리나 떨어진 먼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속의 인물들은 내 가까이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였기에 그렇게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소설인물을 부각할 때면 항상 남다른 사람을 내세우기에 집요한 추구를 하지만 썩 마음에 와닿는 주인공은 별로 없고 대신 눈 뜨면 늘 보이는 앞집 형님 같은, 뒤집 누이 같은 사람들로 소설 속에 등장해 조금은 답답한 느낌으로 허탈감을 맛보기도 한다. 다만 그들이 지금 어딘가에서 살고 있을 것 같은 사람들처럼 그려졌다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 것 같다.
번마다 소설을 쓸 때면 나는 늘 먼저 나의 지난 작품들을 반추해본다. 혹시 겹치거나 중복되고 반복되는 이야기를 피하고 쌍둥이 같은 소설을 모면하기 위해서이다. 그런 고민은 나의 소설에 색다른 이채를 부여해주었는데 아마도 그런 반추와 고민 덕에 나의 소설들이 남들 앞에 나설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우에서 언급한 최하층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은 객관적인 견지에서 보면 어딘가 직설적인 면들이 드러나보이지만 나는 줄곧 그런 작법을 고집해오고 있고 또한 그런 직설적인 서술과 생활 그대로의 묘사가 더욱 생신하고 생활에 더 가까운 감을 느끼게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중에는 기필코 소설은 어디까지나 허구라는 것을 각인시켜주어야 한다. 그것은 예술의 경지를 만들어가는 가장 훌륭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허구를 즐기고 그래서 더욱 소설을 쓰는 것이다. 아마도 허구가 나를 살려주는 것 같다.
출처:<장백산>2017 제3호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