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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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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연변의 첫 당조직 댓글:  조회:1101  추천:0  2014-02-05
지금 룡정시 교원연수학교 자리가 연변에서 첫 당조직이 설립된 곳이다.   연변의 첫 당조직은 1928년에 룡정에 섰다.   지금 이 곳은 룡정시 혁명전통교육기지이다.   중국공산당에서 연변에 파견한 제1임서기는 주동교이지만 후날 그가 혁명을 배반했기에 여기 기념관에는 그의 반신상이 없다.           이곳은 연변에서 중국공산당이 첫 발자국을 뗀 성지이지만 이곳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연변인민방송
6    천지가에 있었던 절간 종덕사 댓글:  조회:1096  추천:0  2014-02-05
장백산천지가에 세워졌던 종덕사((宗德寺)) 고증에 의하면 이 절간은 1920년대 초반부터 1927년 이전 사이에 세워진 것이다.   종덕사는 천지가에 좀 떨어진 곳의 평평한 바위우에 지었다. 종덕사는 팔각형으로 되였고 그래서 일명 팔괘묘라고도 하였다. 당지 주민들은 일찍 종덕사의 팔각집 복판에 있던 세개의 부처도 보았다고 하였다.   종덕사를 지을때의 기념사진. 이들은 누구일까? 당지 로인들의 회억에 의하면 이들은 일제의 만행에 참을수 없어 반일을 결심한 조선 북부의 "덩덕궁"패들이다. 이들은 천불교파의 사람들인데 천지가에 절간을 세운 것은 "조선사람을 살리고 일본을 패망하게 해달라"고 천지신명께 빌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조선에서 출판한 화보인 "조선"에 실린 종덕사의 모습. 일찍 1928년 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였던 김일성(당시 이름은 김성주)주석이 항일련군시절에 종덕사에 가서 "덩덕궁"패들이 축제를 벌리던 장면을 보기도 하였다고 자신의 저서 "세기와 더불어"에서 증명했다.   종덕사주변에서 파낸 철편. 내두산(조선이주민들이 처음 안도에 들어온 곳)사람들의 고증에 의하면 종덕사는 1928년부터 1930년 사이에 마적떼에 의해 파괴되였다고 한다.   천지가에서 종덕사의 기초돌을 가리키면서 종덕사의 존재를 확인. 종덕사는 마적에게 파괴된 후에 다시 춰서지 못했지만 형체만은 그대로 남아있다가 지난 세기 70년대 중반에 완전히 사라졌다.   종덕사의 설경.   당지 주민들의 고증과 김일성주석의 회억록에서 보면 종덕사는 민중항쟁의 유력한 증거라고 할수 있다. 당시 천불교파의 문자기록을 아직 찾지 못하여 이 절간을 정확히 어느 시간에 누가 지었는가는 지금까지 력사의 숙제로 남아있다. 연변인민방송
5    연변의 발해유적지 댓글:  조회:1336  추천:0  2014-02-05
돈화에 있는 발해 3대왕 대흠무의 둘째 딸 정혜공주묘.   훈춘에 있는 팔련성. 8개의 성곽이 이어져있다 하여 팔련성이라 명명. 발해는 돈화에서 시작하여 두번째는 화룡에 도읍을 옮겼고 세번째로 훈춘에 도읍을 정했다.   돈화에 있는 오동성.   돈화에 있는 강동 24석. 이 돌들이 있던 위치는 당시의 역참.   화룡에 있는 룡두산고분군. 여기에 대흠무의 넷째 딸 정효공주묘지가 있다. 둘째 딸의 묘지는 돈화에, 넷째 딸의 묘지가 화룡에 있다는 것은 발해가 당나라를 두려워 당나라를 멀리하여 천도했다는 증거이다.   화룡에 있는 서고성 유적.   도문시 경내의 월청진 마패촌에도 돌을 쌓은 흔적들이 있다. 이는 당시 발해국이 변강을 순회하는 통신병들의 편리를 위하여 만든 역참의 창고. 역참에 쌀과 화식도구들을 넣어두었다.   돈화 륙정산에 있는 발해의 고분군. 돈화는 발해의 시작으로 건국초기의 명장들이 여기에 묻혀있다.   발해는 거란에 의해 초토화가 되였기에 문자로 된 기록은 불에 타서 거의 없이 고적만 남아있다. 연변인민방송
4    연길감옥에서 죽은 말대황후 댓글:  조회:1124  추천:0  2014-02-05
청나라의 말대활후 완용이 연길에서 죽었다. 바로 지금의 연변로동자문화궁(원 연변예술극장, 옛날의 연길감옥)   완용은 1905년에 청나라 내무부대신 영원(다우르족)의 녀식으로 태여났다. 어릴때의 완용은 훌륭한 가정문화교육을 받았고 회화와 시사에 능했고 영어가정교사까지 둘 정도로 가족이 부흥했다.   1922년에 영달을 꿈꾸는 아버지의 주장에 따라 부의에게 시집을 갔고 11월 30일에 명의상의 황후로 되였다. 1924년 풍옥상의 "북경정변"으로 부의와 함께 황궁에서 쫓겨나 천진으로 갔고 그때부터 아편에 빠졌다.   때는 또한 부의가 남자구실을 할수 없었던 시기였고 청춘의 탱기가 분발했던 완용은 부의의 수행보안과 사통하여 딸을 낳았는데 부의는 그애를 강보에서 요절시켰다.   대노한 부의는 완용을 랭궁에 처넣었으나 외관으로는 완용에게 관대하게 처리하는 체 했다. 부의가 완용에게 담배를 붙여주는 장면.   모아산 이름 모를 곳에 묻혀있는 말대황후의 시신,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생생한 현실.   중국인민해방군이 장춘을 해방할때 완용은 체포되였고 완용의 가족에서는 이미 아편이 골수에 박힌 완용을 거두어주지 않았다. 국민당과의 결투의 전야에 해방군은 인도주의차원에서 완용을 안전지대인 연길까지 이송해왔고 의료조건이 극히 차한 환경에서 완용은 1946년 6월 20일 아침 5시에 연길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완용--말대황후가 죽은후 감옥을 지키던 전사들은 완용의 시신을 거적에 말아 모아산 어딘가에 묻었는데 당시의 자료는 문자적으로는 남아있으나 시신을 묻은 곳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연변인민방송
3    연길의 100년 넘는 청나라건물-수변루(戍边楼) 댓글:  조회:1492  추천:0  2014-01-02
현 연길시 인민정부(원 주정부)청사 북쪽에서 50메터 떨어진 주택구역에 완벽하게 보존된 청나라건물 수변루(戍边楼)가 있다.   100년도 넘는 력사의 세례를 거친 수변루. 지금 연길시 정부에서 정기적으로 보수하고 있다.   길림변무도독이란 오늘날의 주정부를 뜻한다.   1907년 7월에 연길변무방판(延吉边务帮办)으로 임명된 오록정(吴禄贞 1880-1911)이 바로 이 수변루에서 집무를 보았다.   오록정은 1911년 11월 7일에 원세개가 파견한 자객들에 의해 살해되였다. 1912년에 손중산은 오록정을 륙군대장군으로 추증하였다. 오록정의 유해는 1982년 3월에 석가장 장안공원 서북쪽에 있는 작은 토산우에 이장되였다. 묘지석 정중앙에는 “고 연진련군 대장군 수경 오공지묘(故燕晋联军大将军绶卿吴公之墓)”라는 14자가 새겨져 있다. 묘지의 전체 면적은 150평방메터이다.   1907년 7월에 오록정은 동북3성 총독 서세창을 따라 군사참의를 맡았다. 이때 일본은 중국의 간도지구를 삼키려고 여론을 조성하였다. 이때 오록정이 변강을 잘 지키는 제의를 하여 서세창은 오록정을 연길에 파견하여 변강사무조사를 했으며 연길변무방판으로 임명되였고 이 수변루에서 집무를 보기 시작했다. 8월에 오록정은 간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일본의 음모를 분쇄했다. 오록정은 현지답사를 거쳐 "연길변무도"를 제작했다. 후날 중국측은 일본과의 담판에서 이를 중요한 의거로 삼았다. 일제가 천보산광산의 광주 정광제와 짜고들어 천보산의 광석을 강제적으로 일본으로 실어갈때 오록정은 날카롭게 맞서 천보산광산을 차압몰수하고 봉인을 붙여 나라의 주권을 보호하였다. 그후 간도사건에서도 오록정은 중국의 리익을 절실히 수호하여 "간도영웅"으로 추대되였다. 연변인민방송 남철기자
2    덕신향 중평촌의 500년 고목 댓글:  조회:1306  추천:0  2014-01-02
멀리 마을뒤켠에 500년을 묵묵히 마을을 지켜준 나무   가까이 가보니 비술나무였다. 옛날 이주민들이 이곳을 지나다가 큰 나무가 있는걸 보고 여기에 삶의 터전을 잡았다고 한다.   이 마을 주민들이 전하는데 의하면 이 나무는 항일련군들의 접선장소로도 사용되였는데 이 나무아래에서 회의를 하다가 일본놈들의 총에 맞아 죽은 항일련군전사들도 있다고 했다.   오른편에 보이는 길다란 집이 30여년전의 집체호   나무의 둘레는 6.8메터, 네 사람이 팔을 벌려 겨우 안을수 있었다.   룡정시 덕신향 중평촌에 500년 되는 고목이 있다. 이 나무는 이주사의 견증자이고 마을의 수호신이였다. 이 마을의 로인들은 이 나무에 령기가 있다고 믿었고 풍수조화의 길상을 지닌 당산나무라고 믿어 아이들이 나무에 오르면 크게 야단쳤다. 연변의 소설가 림원춘선생이 이 마을태생이다. 연변인민방송 남철기자
1    '도덕경' 댓글:  조회:2457  추천:1310  2014-01-02
필자가 다니는 직장의 엘레베이터는 ㄱ자형으로 된 랑하를 지나서 있다. 아침에 엘레베이터를 탈때면 내가 복도에 들어서는 소리가 분명 들렸겠는데도 엘레베이터는 사정없이 쑥 올라간다. 그것도 정면으로 사람을 보면서. 그때면 기분이 잡치는 것은 물론 "저 자식 저거..."하는 욕지거리도 나온다. 몇번은 꾹 닫겨진 엘레베이터문을 발로 차기도 했고. 그때 나와 정면으로 맞띄우면서도 태연하게 올라가는 사람은 대부분이 젊은 치들이였다. 그 장면에서는 "저 젊은 놈들 교양없이 자랐구나. 독신자녀인 80, 90후들이여서 배려라는 의미를 하나도 모르고 자랐구나."하는 욕도 곁들인다. 그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는데 ㄱ자형 복도의 가운데에 45도 각으로 거울을 걸어놓으면 보이지 않는 복도의 저쪽에서 오는 사람을 볼수 있지 않을가 하는 착상도 해보았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회사내에서 그런 분위기가 없는 것도 선배들은 자신의 모범적인 행동이 없었다는 책무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젊은이들은 선배들의 뒤잔등을 바라보면서 자란다. 그러면 선배들이 과연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행실을 한 적이 있었던가?    젊은이들만 무작정 타발할 일이 아니다. 웃기둥이 올발라야 아래기둥이 비뚤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나에게는 그런 소치에서 나온 하나의 습관이 생겼다. 내가 엘레베이터에 탔을때면 꼭 ㄱ자형복도,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혹시 발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지를 확인한다.   그렇게 기다려서 바삐 달려온 사람으로부터 고마운 인사를 받을때면 그날 하루가 멋지게 시작되는것은 물론 하루내내 기분이 좋아진다. 거기서 한보 더 승격한것은 내가 엘레베이터를 타고 나의 사업터가 있는 5층에 올라간다음 나는 다시 1층번호를 눌러 엘레베이터가 내려가도록 한다. 그것이 이제는 몸에 배인 습관이 되여 1층번호를 누를때면 내 마음도 흐뭇해진다.      오늘도 내 마음속에 거울을 하나 걸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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