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이야기다. 청도 와서 처음으로 로산 바닷가에 새해 해돋이를 보러 간 적이 있다.
새벽 4시에 출발하여 5시전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한 겨울의 해가 상대적으로 늦게 뜬다는 것 쯤은 다 알고 있는 상식이다. 허나 상식은 상식이고 심정은 심정인가 보다.
결국 해는 7시가 넘어서야 떴다. 요즘 같은 스마트한 시대와는 사뭇 대조된다.
일행은 해돋이가 잘 보일 것이라는 어느 로산 산자락에 차를 세웠다. 누가 려명전의 암흑이라 했지 않았나? 정말로 한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동트고 보니 우리가 주차한 위치가 낭떠러지였다. 차량 전조등으로도 바다와 산자락을 분별할 수 없을 만큼 캄캄했다. 생각만해도 아슬아슬하다.
허나, 한겨울의 새벽5시쯤, 그리고"해상제일명산"으로 불리우는 로산 산자락은 쏟아지는 별들에게 묻혀 그야말로 감동과 환상 그 자체였다.
맑고 차디찬 한 겨울 새벽공기는 총총한 뭇별들을 한결 더 돋보이게 한다. 시골에서 태여난 나는 늘 밤하늘을 바라보며 별들을 즐겨왔다. 하지만 고개를 들지 않고 눈앞에서 별을 보는것은 태여나서 처음이다. 손을 내밀면 잡힐 것만 같은 가까운 거리다. 뭇별들과 속삭이며 호흡할수 있을것만 같았다. 쏟아져 내리는 뭇별들이 그토록 반짝이고 밝을 수가 없다. 영화에서 나오는 한 장면 같았다. 요즘 시대 언어로 VR를 체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쏟아져 내린 뭇별들의 대집결을 경험했다.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감동의 순간이였다.
행여 해돋이를 놓칠까 로파심에 일찍 서둘러 간 그 두시간이 나에게는 평생 감동의 추억거리가 됐다. 그 감동에 밀려 해돋이 구경은 별로 기억에 남지 않게 되였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가끔 그때 그 감동을 생각하면 자연계가 신비로울 따름이다.
한편 엉뚱한 생각도 들곤 한다. 동화속에서는 별들은 해빛이 쨍쨍한 낮에는 잠자고 있다고 표현하던가? 내가 그토록 감성을 쏟아부었던 그날의 별들, 밝디밝은 낮에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자꾸 궁금해진다. 나의 무지함의 세계는 참으로 무한계인 것이 틀림없다.
우연히 이란 글을 읽게 됐다. 그동안 무지함으로 얼어붙은 나의 궁금증이 싹 녹아내렸다. 처음으로 낮별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우주에는 성간흡수(星际吸收)현상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별빛은 언제나 변함없이 존재하지만, 더 밝은 천체의 빛에 흡수되면, 미약하게, 혹은 보이지 않게 되는 현상이다.
낮별이 그렇다고 한다. 찬란한 태양빛속에 가려져 별빛이 보이지 않게 된다. 성간흡수현상은 낮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달빛이 넘치는 밤에도 별빛은 미약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다른 빛이 없는 맑고 캄캄한 밤은 별들이 유난히 총총하고 반짝이는 것이다.
별빛은 언제나 변함없이 존재한다고 한다. 중요한 단서이다. 나는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그때 감동을 주었던 그 뭇별들의 대 집결도 성간흡수라는 현상으로 인해 낮에는 보이지 않는 별들로 존재했을 터이니 말이다. 따지고 보면 려명전에 암흑 같은 어두움이 있어서 쏟아지는 뭇별들의 진경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눈을 감고 보이지 않는 낮별들을 한번 상상해본다. 존재를 알리지 못하는 낮별들도 려명전의 별빛처럼 쉴새없이 한결같이 빛을 내고 있을 것이다.
책에서 나오는 한구절이다. 왠지 모르게 짜릿한 느낌이다.
그러고보니 인간은 참으로 자연스럽다.
밝은 햇빛속에서는 낮별의 존재를 거의 모르고 태양에만 의존한다.
달빛이 흐르는 밤이면 인간은 온갖 미사여구로 달만 노래한다.
달빛이 없는 캄캄한 그믐의 밤이여야 별을 특별히 바라보게 된다.
이런 것이 다 이유가 있어서 였을까?
인간도 별과 닮은 꼴이 많다.
그래서 높은 인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별이라고 부르는가 보다.
그 별들의 유형도 다양하다. 인생의 최고의 순간을 빛내는 별이 있는가 하면
달밤의 호수가처럼 은은하게 빛을 내는 별도 있고, 낮별처럼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별들도 많다.
낮별처럼 보이지 않는 별속에는 "나"라는 별들도 존재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없이 자기인생의 별이고 누군가에게 별이 된다.
이 귀한 존재를 우리는 스스로가 소홀히 하거나 잊고 살 때가 많다.
그래서인지 무엇인지 모르게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든다.
내게는 청도에서 알게 된10년지기 낮별같은 한국친구가 있다.
오래전에 영어학원에서 공부를 한적이 있다. 그때 그녀를 알게 됐다.
서로가 끌리는 곳이 있었나 보다.
처음에는 목례로 인사하다가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전화번호도 주고 받고, 가끔은 만나기도 하면서 서서히 친분을 쌓아왔다.
둘다 빠르게 열정을 불태우는 성격은 아니다. 그냥 설정된 온도처럼 식지도 않고 오르지 도 않으면서 좋은 관계를 쭉 이어 왔다.
그런 세월이 10년이다. 서로가 표현이 필요 없는 편하고 믿음 직한 관계다.
좋은 글에서 많이 나오는 것처럼,
좋은 일 있을 때 전해 주고 싶고, 가끔은 만나서 수다도 실컷 떨어보고 싶고, 그녀가 사는 집 부근을 지나가게 되면 그냥 은근스레 그녀가 궁금해 지곤 한다.
사실 누구에게나 한 사람 즘은 있는 친구관계이다.
그 어떤 가식과 수식이 필요 없는 진실한 그런 친구 관계가 소중할 따름이다.
그녀의 전공은 미술이다. 직업도 디자이너이다. 예술가라서 인가 늘 안목이 남다르다.
한편 낯가림을 많이 하는 성격이기도 하다.
언젠가부터 그녀는 오랫동안 내버려뒀던 꿈을 찾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유시간에 꾸준하게 그림 그리러 다녔다. 가끔은 그림 그리는 기쁨을 나와 공유하기도 했다. 그리고 첫 작품전시회가 열렸고, 나에게 초청장을 보내왔다.
청도에서 일과 상관없이 만난 첫 사회친구에게 일 번으로 보내는 초청장이라 한다.
고마울 뿐이다. 그리고 그녀가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녀가 별이 된 듯한 느낌이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시작하면 꾸준히 하는 성격이다. 그후 전시회도 매년 열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채팅방에 자기가 그린 그림이 국제무대에서 특별상을 받았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친구한테 자랑 질 해야겠다’고 농담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토록 반가울 수가 없다. 내가 수상하는 것처럼 들뜬 마음이다. 국제무대에서 상을 받는다는 것은 엔간한 경사가 아니다.
있는듯 없는듯 한결같은 그녀의 존재가, 뭇별속에서 서서히 낮에도 보이는 낮별이 되여 가고 있는것일까?
사실 그녀는 원래 존재하는 별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나름의 리듬속에서 끊임없이 빛을 내고 있었던 낮별였을 것이다.
그 별이 오랜 세월 꾸준히 에너지를 축적해 왔기에 오늘날 반짝이는 낮별이 되였을 것이다.
그렇다. 그녀라는 낮별처럼
누구에게나 “나”라는 별은 늘 자기 인생을 빛내려고 노력하는 존재이다.
인생을 빛내는 것은 남에게 알리는 존재 보다,
자신이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의 증거이다.
가끔은 달빛속의 별빛처럼 미약할 때가 있을 것이고,
가끔은 강한 햇빛속의 낮별처럼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아 사라 진 존재가 될 때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여명 전의 별처럼 자신을 빛내는 인생의 최고의 순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소중한 것은 변함없이 자기 인생을 빛내려고 노력하는 그 자체인 것이다.
그녀도 별들처럼 쉴 새없이, 변함없이 자기를 빛내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변함없는 존재로 인해 스스로 반짝이는 낮별이 되고 있다.
나도 그런 낮별이 되고 싶다.
2017년 5월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