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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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가족의 또 다른 이름-사랑> 댓글:  조회:195  추천:2  2022-12-17
사범학교를 갓 졸업한 애숭이 처녀시절, 나에게는 아이들의 훌륭한 계몽교사로 되리라는 포부가 있었다.  귀여운 아이들과 함께 아름다운 추억을 쌓으며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보내던 나에게 어느 날 갑자기 청천벽력과도 같은 불행이 닥쳐왔다.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이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쓰러져버린 것이다. 후사를 각오하라는 의사의 말에 우리 가족은 지옥을 헤매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동생이 수술을 받은 지 한참 지나 나는 우연히 아버지의 일기 한편을 보게 되였다.   “오늘 나는 아들애의 생명을 건 대수술—골수이식수술에 앞서 부모로서의 담보싸인을 하여야 했다. 허나 위험 확률이 성공 확률보다 더 높다는 의사의 말에 손이 떨려 좀체로 서명할 수가 없었다. 13살 난 아들녀석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마냥 이제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저 어린 것이 모진 수술을 받아야 한다니… 차라리 내가 대신 아팠으면 얼마나 좋을가. 어쩌면 영원한 리별이 될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예감에 억장이 무너지고 있을 때 쯤, 아들애는 수술실에 옮겨졌고 흐릿한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여기까지 읽고 나니 당시의 정경이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동생을 수술실에 들여보내고 초조하고 불안한 심정으로 대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의사와 간호사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바삐 드나들었다.  “아니, 혹시?” 가슴을 조이며 몇번이고 붙잡고 물었는데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대여섯시간을 지옥에서 헤매고 있는데 한 간호사가 나오더니 눈물을 쏟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갑자기 상태가 위독해져 정신을 잃기 직전에 그 어린 것이 글쎄 “우리 가족들이 속상해할 테니 절대 알리지 말아주세요.”라고 간절히 한마디를 남겼다는 것이다. 생명이 경각에 이른 순간에조차 응석 대신 가족의 마음을 헤아리는 어른스럽고 착한 애가 세상에 몇이나 될가? 아버지의 일기는 계속되였다.   “죽어가는 자식의 가냘픈 모습을 보며 아버지로서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이 저주롭기 그지없다. 부모로서 치료비마저 지불할 수 없어 여태 수술을 미루어오다가 상태가 이 지경에 이르러서야 겨우 수술을 받게 하였으니… 이 엄청난 빚을 가난한 농민인 내가 무슨 수로 갚는단 말인가? 수술후의 영양보충은 또 어떻게 시킨단 말인가?  아, 혼란스럽다! 아들아, 제발 살아서 나와다오…”   눈물로 얼룩진 아버지의 일기를 읽노라니 가슴이 미여지는 것 같았다.   시상식에서 상장을 받아안고 (오른쪽 두번째)   처음으로 백혈병 진단서를 받아쥔 날 가족의 처참한 모습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초들초들 말라버린 입술로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한 채 시들어가고 있는 불쌍한 동생, 너무나 갑작스러운 타격에 심장병이 발작하여 인사불성이 된 어머니, 떨리는 두 손으로 의사를 부여잡고 무작정 자신의 피를 빼서라도 어린 자식을 살려달라며 눈물로 호소하던 년로한 아버지, 이토록 처참한 가족의 모습을 지켜보던 22살 난 나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고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절망을 헤쳐나가리라 이를 악물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사경을 헤매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동생과 막대한 경제난으로 휘청거리는 부모님은 절망에 빠져 나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을 차리라고 했는데 어떻게 하면 가족에게 용기를 북돋아줄 수 있을가? 이런 고민으로 애간장을 태우던 어느 날, 동생이 조금 차도를 보이자 나는 동생의 손을 이끌고 부모님에게 편지 한통을 썼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우리 부모님께: 존경하는 아버지, 어머니! 항상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한점 부끄럼 없이 깨끗하게 사시는 두분의 미더운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 자식들은 자호감을 느낍니다. 자라나면서 그 누구보다 훌륭한 성적,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상장과 영예를 따내며 남들의 부러움을 살 때마다 이토록 예쁘게 낳아주시고 옳바른 교육을 받으며 자라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신 우리 부모님이 한없이 고마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비록 평범하게 살아왔음에도 분명 가난한 삶이 아니라 풍요롭고 성공한 삶이였다고 우리는 긍정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자식농사를 잘한 것이 영원하고 진정한 것이니까요! 부모님들은 우리에게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필요한 것, 즉 정직하게 살며 례의를 지키고 남에게 베풀 줄 아는 훌륭한 도덕품성을 가르쳐주셨으니 그것이 곧 삶의 지혜이자 유력한 무기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금전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들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니 그 어떤 자책도, 비관도, 한탄도 마십시오. 아들이 비록 지금은 병마의 시달림을 받고 있더라도 사회에 죄를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떳떳하고 행복한 마음의 부자입니까? 우리 둘은 이제 다시 태여나도 아무런 주저 없이 아버지, 어머니의 아들딸로 태여날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우리 힘과 마음을 합쳐 고통을 딛고 일어서 행복한 가족의 미담을 엮어봅시다! 아들딸, 올림.”   이 편지를 받은 이후로 부모님은 많이 달라졌다. 더는 우리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이토록 자식이라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으려는 우리 부모님의 지극한 사랑과 그런 부모님들의 로고를 조금이나마 리해하고 함께 감당하고 싶어하는 우리 자식들의 작으면서도 큰 효성의 마음, 서로가 아픔을 감싸주고 보듬어주고 힘이 되여주려고 모지름을 쓰는 우리 식구들의 끈끈한 가족애가 하늘을 울렸던지 그 무서운 병마도 동생을 우리 곁에서 앗아가지 못했다. 오래동안 투병생활을 이어가면서 수없는 고통과 번뇌를 감내해야 했음에도 우리 네식구는 오직 사랑의 힘으로 이 크나큰 시련을 이겨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엄숙하게 나에게 당부하였다. “사위도 자식이라는데 난 네가 든든한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는 게 소원이다!” 동생이 아프기 시작하면서부터 줄곧 속을 태워온 부모님의 의사를 내가 어찌 거역할가. 나는 냉큼 맞선을 보았다.    그이와 나는 지인의 소개로 어느 조용한 다방에서 처음 만났다.  얼굴을 들어 남자를 얼핏 본 순간 나는 그만 실망하고 말았다. 앉은키는 큰데 겨릅대처럼 말랐고 게다가 안경까지 끼고 있었다. ‘뭐야? 남편이 될 사람이 이렇게 비실비실하면 싫은데. 게다가 시력도 나쁘네. 그리고 선 보러 오는 남자가 단추도 잠그지 않고 나오다니. 상대방에 대한 례의도 없는 사람이네.’ 이렇게 속으로 저울질하고 있는데 그 남자가 입을 열고 한다는 첫마디가 “저, 죄송한 대로 솔직한 말씀 한마디 드려도 될가요? 저는 화장을 한 녀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순수한 자연미가 더 좋지 않습니까?”라는 것이였다.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워낙 얼굴화장에 신경을 쓰는 편인 데다 선을 보는 날인지라 분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두껍게 발랐으니… 자기 입으로 말해놓고 자기도 안스러웠던지 그 남자는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음식은 어떤 걸 좋아하는지요? 전 돼지고기를 좋아합니다. 하루 세때 먹어도 질리지 않습니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나는 말고기든 당나귀고기든 심지어 기름개구리까지 다 먹어도 유독 돼지고기만은 안 먹는다. 아니, 안 먹는 정도가 아니라 돼지고기가 들어갔다 싶으면 국물만 봐도 코를 싸쥐고 밀어놓는다.  새초롬해 앉아있는 나의 표정을 눈치 챘는지 남자는 시간을 오래 끌지 않고 바로 작별인사를 청했다. 얼씨구나 잘됐다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보니 괘씸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마음에 들면 전화번호라도 물어볼 텐데 왜 아무 말 없이 그냥 보내는 거야? 그러니까 다시 만날 의향이 없다는 거지? 재수 없네!’ 자존심 때문에 이렇게 찜찜하게 끝날 바에는 차라리 내가 속시원히 튕겨주고 싶은 오기가 생겼다.   그럭저럭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남자 쪽에서 먼저 만나자는 련락을 보내왔다. ‘그럼 그렇겠지, 내가 누군데, 너 오늘 녀자한테 거절당하는 맛 좀 봐라!’ 나는 쾌재를 부르며 약속장소로 나갔다.  하지만 남자는 내가 짐작했던 것처럼 “만나고 싶었는데 일이 너무 바빠서…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하기는커녕 도리여  “소개해주신 분이 하도 다시 만나보고 결정 지으라고 권고하셔서…”라며 말끝을 흐리우는 것이였다. ‘그러니까 뭐야? 자기는 정리하기로 생각이 다돼있었는데 남의 낯을 봐서 하는수없이 다시 나왔다는 거 아니야? 이 남자 웃기네! 난 뭐 좋아 나온 줄 아나? 그래, 오늘 어디 한번 당해봐라.’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거절하자니 소개시켜준 분의 체면도 있고 해서 렬악한 우리 친정집 가정배경을 실토정하면 십중팔구 저절로 물러나 줄행랑을 놓을 것이라 믿고 입을 열었다. “한가지 알려드릴 게 있습니다. 저에게는 열살 어린 동생이 있는데 백혈병진단을 받고 골수이식수술을 금방 받은 터라 집에서 엄청난 빚을 졌고 심지어 우린 집도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보살핌을 받으며 삶을 유지해야 하니까 큰딸인 제가 모든 부담을 도맡아야 합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반응을 살펴보았더니 원래는 떴는지 감았는지 분간하기조차 어렵던 남자의 실눈이 화등잔 만해지더니 목석이 되는 것이였다. ‘그래, 놀랄 만도 하겠지. 이제 정신을 차리면 핑게를 대가면서 거절을 하려고 식은땀을 빼겠지. 더구나 권세 있는 부모 슬하에서 가문의 유일한 대학생으로 온갖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라난 귀공자라니 나 같은 최악의 조건을 가진 녀자를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을 거야! 호박 쓰고 돼지굴에 들어갈 머저리가 어데 있을라구.’ 어쩌면 나조차도 스스로 이 밉살스러운 남자의 립장을 리해할 것 같은 엉뚱한 방향으로 기울고 있을 때 쯤, 그가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 말을 꺼냈다. “사업을 잘하려고 무척 애 쓰고 아주 락천적인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헌데 어린 나이에 그토록 모진 시련을 겪으면서도 사업에 의연히 열중하는 그런 강한 분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명랑하여 행복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제가 혹시 사정을 모르고 얘기중에 아픈 곳을 건드렸다면 량해를 구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저에게 그 고통을 분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이성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면 먼저 친구 사이로라도 좋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진심으로 돕고 싶습니다.”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뜻밖의 다정한 말에 내 마음은 옴짝달싹 못하고 그 남자에게 사로잡혔다. 나의 가장 아픈, 가장 여린 곳을 이 사람이 감싸주려고 하지 않는가? 용기를 내여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얼마나 진지한지, 꽁꽁 얼었던 내 마음이 삽시에 녹아버렸다. 훌륭한 남자에 근접하는 멋진 이 남자! 완전히 다른 이미지로 새롭게 다가오는 이 남자! 안경을 써서 쳐다보기도 싫었던 그 한쌍의 실눈은 공부를 너무 많이 하다보니 저렇게 되였겠다는 리해심으로 바뀌였고 외모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 꾀죄죄하던 모습도 대뜸 가식이 없고 대범한 스타일로 받아들여졌다. 무엇이든 스스럼없이 말하여 언어예술이 아쉽다고 보이던 것조차 솔직하고 털털하여 남자답고 멋 있어보였다. 이러니 어떻게 이 사람을 더 이상 거절할 수 있으랴! 나 스스로도 자신의 돌변에 당황할 정도였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된 우리의 련애는 짝이 기운다는 뭇사람들의 반대에 부딪쳤으나 장애를 딛고 더욱더 무르익어갔다. 마침내 결혼까지 하게 되였고 결혼후에도 남편이 련애시절의 낙언을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잘 지켜주어 내내 고맙기만 하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데 남편은 가난한 우리 집 살림 때문에 장모가 잡아주는 씨암탉 한번 맛 본 적 없이 만날 김치에 시래기국 신세를 면치 못했고 변변한 대접 한번 받아보지 못하였다. 그래도 남편은 불평 한마디 없이 자기 월급에서 아껴쓰며 모은 돈을 달마다 처가에 생활비로 보태주었다. 그런 남편이 마냥 고맙기만 했다. 그런데 한동안 남편이 며칠 련속 늦게 귀가하는 것이였다. 나는 그런 남편이 야속해났다. 동생이 주기적으로 외지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할 시일이 훨씬 지났는데도 막중한 비용을 미처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차일피일 치료날자를 미루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에 나는 동생의 병이 악화될가 봐 송곳방석에 앉은듯 불안하게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남편은 나에게 힘이 되여주지는 못할망정 저녁마다 어깨가 축 처져서 늦게 돌아오는 것이였다. 자연스레 나의 울분은 애꿎은 남편한테로 돌아갔다. ‘애당초 아예 돈 많은 남자나 찾아 시집 갔더라면 동생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손등이 다르고 손바닥이 다르다는 말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거구나.’ 불쌍한 동생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하는 내 신세가 가증스러워나며 생활에마저 권태를 느끼게 되였다. 나는 반찬도 대충 있는 것으로 때우고 지어 남편의 빨래마저 제때에 해주지 않았다. 그것으로 남편에게 무언의 항의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7시가 다되여서야 남편이 빙그레 웃으며 집문에 들어서더니 밥부터 찾는 것이였다. “흥, 내 속에서는 피눈물이 흐르는데 당신은 웃음이 나와요? 정말 너무해요. 여직껏 저녁도 안 드시고 뭘 하다 온 거예요? 남은 밥은 밖에서 식사하는 줄 알고 다 버렸어요.” 나는 매몰차게 내뱉고 찬바람을 휙 일구며 방문을 쾅 닫아버렸다. 나의 사나운 기세에 억눌렸는지 남편은 식사도 못한 채 거실 쏘파에서 밤을 보냈다. 그런데 이튿날, 어머니한테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나는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얘야, 어제 사위가 여기에 다녀왔네라. 글쎄 사처에서 돈을 꾸어다가 갖다주며 처남 병치료를 떠나라고 재촉하더구나. 네가 기다린다고 언몸을 녹이지도 못한 채 저녁도 마다하고 선자리로 돌아갔다. 원 미안해서…”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밀려오는 자책감에 이어 사랑의 난류가 가슴에 스르르 와닿았다. 나는 부랴부랴 옷을 주어입고 무작정 남편 단위로 달려갔다.  그런데 나를 더욱 궁지에, 아니, 감동의 도가니에 빠뜨리는 일이 또 있을 줄이야! 길에서 남편과 친한 동료 분을 만났는데 “며칠전에 자원적으로 의무헌혈을 했으니 요즘 많이 피곤하고 힘들 거요. 단위에서 영양보충하라고 돈 좀 보태주었으니 닭알이라도 사서 대접해주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네? 헌혈이요?” 몽둥이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였다. ‘아니 그럼, 피를 뽑아서 허약해진 몸으로 돈을 꾸러 사처로 뛰여다녔단 말인가! 더구나 영양보충하라는 돈까지 모조리 우리 집에 가져다주고…’ 아! 내가 이토록 너그럽고 속 깊은 남편에게 앙탈을 부리며 야속하게 굴었으니 얼마나 억울하고 속상했을가? 후회, 감동, 속죄의 눈물로 시야가 흐릿해졌다. 어떤 방법으로 어떤 말을 하면서 용서를 구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집에 도착해서 여러가지로 궁리하던 끝에 나는 하얀 백지에 큼직하게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라는 글을 쓰고 접어서 모자처럼 만들어 머리에 썼다. 그리고 문가에 정중하게 서서 식당 웨이터처럼 남편을 기다렸다.  익숙한 발걸음소리와 함께 문을 떼고 들어선 남편이 광대 같이 꾸민 나를 보더니 호탕하게 웃으면서 나를 와락 껴안아주었다.그 한없이 넓은 어깨로 내 얼굴을 포근히 감싸주었다. 그 이한테서 사람냄새가 짙게 풍기고 있음을 페부로 느낄 수 있었다.  울어서 눈물, 코물로 범벅이 된 나에게 남편은 “이런 멋진 모자를 만들 수 있는 총명한 녀자는 아마 당신밖에 없을 걸, 정말 보기 좋구만.” 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이렇게 변덕 많고 엉뚱한 안해와 살면서도 마냥 칭찬을 아끼지 않는 남편, 그런 미더운 남편을 바라보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분은 분명 하늘이 나에게 특별히 내려준 내 인생의 수호천사일 거야!’ 어느덧 동생이 백혈병으로 투병생활을 해온 지도 20년이 다돼온다. 그 긴 세월을 우리 가족은 부모자식간의 조건 없는 사랑과 남편과 안해 사이의 애틋한 부부 사랑, 훈훈한 가족애로 병마와 싸워 경이로운 하루하루를 맞아오고 있다.  비록 의학적으로 백혈병에 한해 완전히 낫는다는 확진을 못하기에 우리는 아직도 동생의 백혈병이 재발할가 봐 우려를 떨쳐버리지 못하면서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제 더는 백혈병을 두려워하거나 공포에 떨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함께 헤쳐나갈 수 있는 끈끈한 가족애가 있으니까!   그래서 가족의 또 다른 이름은 ‘사랑’이라고 당당히 말하고 싶다.     수상소감 최보라 (최미화, 연길)      13살 난 어린동생이 백혈병이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진단을 받고 온 가족이 좌절과 고통에 빠졌을 때 내 인생에 ‘수호천사’처럼 등장하여 든든한 버팀목이 되여준 무던한 남편의 사랑과 자식의 병간호로 심신이 지친 부모님들께 자식으로서 용기와 힘을 실어드리고저 했던 우리 남매의 소박한 효도의 마음이 불치병도 이겨내는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세상에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이 소중한 것이 바로 가족간의 끈끈한 사랑이며 그 사랑이야말로 그 어떤 시련도 견뎌낼수 있는 강력한 정신적무기가 아닐가싶습니다.  지금 이 시각도 가족의 아픔으로 고통을 겪고있을 환자 가족들에게 조그마한 힘이 되고저 썼던 저의 글이 전국애심녀성포럼 ‘애심녀성컵’ 제5회 생활수기 응모에서 가작상에 당선되여 빛을 보게 되여 너무 기쁘고 행복합니다. 앞으로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달할수 있는 글을 많이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연변녀성》 2019년 10월호에서
28    <비석> 댓글:  조회:172  추천:5  2022-12-11
'애심녀성컵' 제6회 생활수기 응모 수상 입선작품 비    석 김정애         내 결혼식을 열흘 앞두고 친정아버지가 갑자기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안고 울면서 시작한 결혼생활이였음에도 나는 친정부모 못지 않은 시부모님의 사랑 속에서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아오고 있다.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보니 내 인생의 큰 버팀목이 되여주신 시부모님께 고마웠던 일들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중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은 바로 비석에 얽힌 이야기이다.       친정아버지의 3년제까지 지내고 나는 “녀자는 시집 오면 시집 산소를 다니는 게 우선이여야 한다.”는 시아버님의 말씀 대로 10년간 시집 산소만 다니고 친정아버지 산소는 오빠와 올케가 돌보았다.      생전에 락을 누려보지도 못하고 고생만 하다가 우리 곁을 떠난 아버지가 너무 마음 아프다면서 오빠는 해마다 청명과 추석이면 빠짐없이 아버지 산소에 다녀오군 했다. 언젠가 외지에 출장을 갔을 때에도 오빠는 일부러 짬을 내서 아버지 산소에 찾아오는 정성을 보였다.      그런데 돌아가신 아버지한테 그렇게 정성을 다 쏟던 오빠가 몇해전에 갑자기 지병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아버지 산소는 출가외인인 내가 돌보게 되였다.     그 해 추석이여서 산소에 찾아갔는데 할아버지, 큰아버지 묘지와 나란히 있는 아버지의 묘지에만 비석이 세워지지 않은 걸 보고 나는 내심 서운해나서 사촌오빠한테 비석을 세울 의향을 비추었다. 그러자 그 날 친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사촌올케가 나에게 다른 말을 꺼냈다.     “옛날부터 녀자는 출가외인이라는 말도 있잖소? 시집 산소도 있는데 해마다 친정 산소를 다니면 시댁 눈치도 보일 텐데 차라리 아버지 묘지를 평으로 잡고 더 다니지 않는 게 어떨가 싶소. 다 정애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요.”     올케가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인 줄은 알겠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은 한없이 슬퍼졌다. 이렇게 아버지를 잊어야 한단 말인가? 소리없이 화장실에서 설음을 달래려 했으나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걷잡을 수 없었다. 내 마음속 거룩한 존재나 다름없는 친정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눈앞에서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친정아버지는 17살에 참군하여 몇차례 전쟁에 참가하면서 갖은 고생을 다 겪었다. 10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하여 고향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부모님들은 이미 세상을 뜬 뒤였다. 하여 아버지는 한평생 부모님들의 마지막길을 지켜드리지 못한 설음을 안고 살았고 나중에 죽거든 부모님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였다.     결혼하고 10년 동안 엄마는 불임으로 엄청 고생하였는데 가까운 친척들은 아버지한테 리혼을 권고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한 인생이다. 애를 못 낳는다고 갈라서는 법이 어디 있냐?”면서 오히려 친척들을 설득하였다고 한다. 제대후 아버지는 줄곧 공안부문에서 사업하였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훌륭한 형사경찰이였다.          1980년대초에 연변을 들썽한 총기살인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당시 범인을 추적하는 임무를 맡으셨던 아버지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범인을 나포하는 데 큰 역할을 하여 2등공을 기입받기도 했다. 지금처럼 통신설비가 편리하지 않을 때라 아버지가 며칠째 소식도 없이 집에 돌아오지 않아 식구들이 매일 조마조마하게 보냈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뒤늦게 자식을 본 아버지는 우리한테 매 한번 대지 않고 끔찍이 사랑해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가 시집 가는 것을 끝내 못 보고 돌아갔다. 그래서인지 살아오면서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늘 아버지가 그리워졌다.      “공부는 잘하는 애와 비기고 생활은 못한 애와 비겨야 한다.”던 아버지의 말씀은 지금도 내 귀가에 쟁쟁하다. 생활에서는 근검하고 항상 긍정적인 자세로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던 아버지의 간곡한 가르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친정아버지의 산소문제가 거론되고나서 며칠후 남편이 조용히 나한테 얘기를 꺼냈다. 사실 내 고민을 진작에 알아차린 남편이 며칠전부터 시아버님과 함께 여기저기 비석을 파는 집들을 돌아보면서 내 마음에 들 것 같은 비석을 몇개 골라놓고 가격까지 흥정하고 왔다는 것이였다. 그러면서 내가 시간이 될 때 함께 가서 비석을 정하고 돌아오는 중양절에 비석을 세우면 무난하다고 하니 그 날로 잡는 게 어떠냐고 물어왔다.      (이럴 수가…) 생각지도 못한 남편의 처사에 너무 고마워 목이 꺽 메는 것 같았다.     다음날, 우리 부부는 시아버님과 함께 가서 내 마음에 쏙 드는 비석을 하나 골라놓고 중양절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연변의 10월은 쌀쌀한데 나는 그 날 비만 오지 말았으면 하고 속으로 바랐다. 그것도 그럴 것이 비가 오면 비석 세우는 일도 어렵거니와 더구나 행사에 참가한 분들이 추위로 고생하는 것이 미안해서였다.    남편이 외지에서 사업하다보니 모든 준비는 시아버님이 자진하여 도맡았다. 세멘트, 벽돌, 모래 등 필요한 재료는 물론, 추운 날 마른 땅을 파기 힘들가 봐 곡괭이, 장갑까지 자상히 마련하였다.       더욱 감격스러운 건 비석을 세우는 날 세멘트가 완전히 굳지 않으면 제사상을 받는 례의절차를 밟기 어렵다고 미리 시고모부와 함께 추운 초겨울 날 밖에서 세멘트와 모래를 섞어서 얇은 비석받침대를 만들어놓았다는 점이다. 그리고는 세멘트가 제대로 굳어가는지 걱정되여 매일같이 살펴보았다. 허리를 구부정하고 비석받침대에 정성스레 물을 뿌리던 시아버님의 모습을 난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중양절 날, 우리의 바람 대로 간밤에 내린 보슬비 덕에 땅은 너무 메마르지 않았고 날씨는 해까지 쨍하게 날 정도로 유난히 개이여 걱정보다 춥지 않았다. 남편은 불가피한 사정으로 참가하지 못하고 시아버님의 선두 지휘하에 시동생, 시고모부, 친정어머니와 녀동생 내외 그리고 사촌오빠와 언니 등 일행 10여명이 함께 했다. 그야말로 사돈이 함께 모인 장소였다.        오빠가 전에 가져다 놓은 150근 되는 돌 받침대를 그냥 두고 그 우에 시아버님이 직접 만든 돌받침대를 세멘트로 고정해놓고 맨우에 새 비석을 세웠다. 옆면은 전부 세멘트로 매질을 했지만 정면은 그냥 벽돌 사이사이에만 세멘트를 발랐다. 그렇게 세운 비석에 오빠의 정성, 시아버님의 정성 그리고 우리 딸, 사위들의 정성이 한눈에 다 보여졌다…     나는 신생아중환자실 관리를 책임진 의사이다보니 이른아침에 출근하여 첫번째로 하는 일이 환자회진이다. 청명이나 추석날도 례외가 아니다. 제사상에 올릴 찹쌀기름떡과 두부구이는 집에서 직접 만드는 것이 가장 큰 성의라 말씀하시는 시어머님은 세 아이를 키우면서 병원일에 바쁜 이 며느리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항상 내 몫까지 챙겨주군 한다.     추석에 무성히 자란 옥수수밭길을 오르다 보면 눈에 안겨오는 9월의 풍경이 가슴 설레이도록 아름답다. 매번 경건한 마음으로 친정아버지 산소에 다녀올 때면 친정아버지를 추억하고, 시부모님들의 사랑을 다시 한번 더 느끼게 된다.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우리 친정부모를 기리는 범상치 않은 중양절 행사가 올해도 우리를 기다린다. 돌아가신 두 사돈어르신들을 어떻게 합장하면 좋을가 하고 시아버님은 지금부터 여러모로 또 고민하고 계신다. 너무나 존경스러운 시아버님이시다.     올해 '3.8'절 날, 시부모님의 결혼 50주년 기념 식사자리에서 시어머님은 “사람을 귀해하는 가문에 시집 가면 행복하다.” 던 친정부모님의 권고 대로 이 가문에 시집 와서 후회 없는 금혼을 맞이하게 되였다고 감개무량해하였다.      올해는 시부모님이 금혼을 맞는 해이자 우리 부부가 은혼을 맞는 특별한 해이다. 이 기회를 빌어 존경하는 시부모님께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진심으로 전하고 싶다.      앞으로 친정부모님 못지 않은 시부모님들을 더 잘 공경하리라 생각하면서 우리 부부도 이런 부모가 되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27    <꽃은 사랑 속에서 핀다> 댓글:  조회:225  추천:6  2022-12-08
꽃은 사랑 속에서 핀다 류영자                                                                                                      올해 1월의 어느날, 아빠트 지하주차장에 내려갔던 나는 어느 구석에서 누가 방치한 화분 두개를 발견했다. 화분주인은  키울 사람이 있으면 가져가라는 식으로 곱다라니 놓아두었다.      먼지를 살짝 뒤집어 쓴 화분은 수분이 부족해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꽃줄기를 만져보니 아직 생명의 기운이 느껴졌다. 꽃에 대한 욕심보다 스러져가는 생명에 대한 애착이 나를 충동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화분 두개를 껴안았다.     버려진 화분은 그렇게 우리집에 오게 되였다. 잎이 마르기 시작한 화분에 물을 듬뿍 준후 조심스레 그늘진 곳에 놓았다.      그 때 전화가 걸려왔다.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면 곧바로 나한테 전화오는 연변성주체육구락부(이하 “성주구락부”로 략칭함)의 설화였다. 성주구락부는 우리 민족체육 운동을  올림픽수준으로 올리기 위하여 세워진 민영기업단체이며 2012년부터 해마다 30여명 고아들을 양육하고 60여명의 특수곤난학생들을 면비로 훈련시키고 있다.     나는 우리 집에 꽃화분을 가져온 이야기를 설화한테 상세히 들려주었다. 설화도 불쌍한 꽃이 보고 싶다며 반색했다. 살 가망이 없어보이던 꽃을 정성스레 가꾸었더니 사흘째 되는 날부터 시들었던 줄기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면서  다른 여러 가지 화분들과 어울려 힘찬 생명을 과시했다. 나는 매일같이 싱싱하게 살아나는 꽃의 모습을 폰으로 찍어 설화한테 보냈다. 설화도 기분이 좋아 화분의 이야기를 성주구락부 동학들에게  돌아가며 이야기했다. 그 후로 꽃의 안부를 물어보는 아이들이 점점 많아졌다.      우연하게 주어온 화분 두개가 나와 성주구락부 애들의 공동관심사로 되여 우리들의 마음을 뭉치게 했다. 비록 마음에 상처를 받고 어렵게 성장하고 있는 애들이지만 사랑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강했다. 이제 따스한 봄이 오면 이 두개의 화분을 그애들한테 보내기로 마음 먹었다. 그 애들은 이젠 내 생활의 한 부분이 되였고 나와 희로애락을 함께 한지도 어언 6년 세월이 흘렀다.     1       중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수십년 동안 나는  내가 맡은 사업에만 열중하고 몰입했다. 그러다 보니 직장밖에 눈길을 돌릴 사이가 없었다. 그렇게 “다람쥐 채 바퀴 돌리듯”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제한된 삶을 살다가 2016년부터 여가를 타서 사회에서 뜻있는 사람들이 벌이는 애심공익활동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2년전에 설화를 만난 것도 성주구락부 아이들을 위해 조직한 가을철 애심공익활동에서였다.     그 날, 우리는 성주구락부의 20여명 아이들을 버스에 태우고 야외에 나가 들놀이를 했다. 신나게 뛰노는 애들속에서 한 녀자아이의 그늘 진 얼굴이 문득 내 눈에 잡혔다. 다들 즐겁게 노는데 그애만은 홀로 한쪽 구석에 앉아 고개를 떨구고 발끝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간혹 고개를 들어 하늘의 흰 구름을 쳐다보면서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군 했다. 그런 소녀에게 말 못할 무슨 사연이 있는 같아 나는 관심을 가지게 되였다. 조용히 그애한테 다가가 일부러 이름과 집 사정같은 것들을 물어보면서 말을 걸었다.     그 애이름은 설화(가명)였다. 엄마는 병으로 하늘나라에 갔고 밤낮 술로 세월을 보내던 아빠는 설화를 고모집에 맡기고 남방에 돈벌러 간후 여직 감감무소식이였다. 아빠의 말을 하는  설화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갈쌍갈쌍 고였다.  어린 나이에 고모네 집에 얹혀 살면서 돌아가신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고 소식이 없는 아빠가 얼마나 그리울가? 나는 그애의 작은 손을 꼭 잡아주었다. 의외로 설화의 손은 차가웠다.     성주구락부에는 설화처럼 불우한 아이들이 많았다.  태여나자부터 부모의 버림을 받은 아이,  사고로 부모를 잃은 아이, 한 쪽 부모 먼저 돌아가는 바람에 어렵게 자란 아이, 할머니의 손에서 자라다가 할머니가 양로원에 가면서 마지못해 오게 된 어린 친구들도 있었다. 들 놀이가 신나서  모두들 웃고 떠들면서 재미있게 놀고 있는것 같지만 애들 가슴 한 구석에는 각자 이름할수 없는 상처가 자리잡고 있었다.     오후 활동이 끝나자 아이들은 다시 버스에 앉아 성주구락부에  돌아가게 되였다. 아이들은 모두 아쉬운 표정을 지었고 그새 정들었는지 설화는 떨어지기 싫어 나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런 설화와 아이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무겁고 쓸쓸해졌다. 물론 성주구락부에서 어려운 재정곤난을 극복하면서 아이들을 맡아 키우고 있지만 이 아이들에게는 사회 여러 분야의 더욱 많은 사랑의 손길이 필요했다.   2       설화가 집체활동에 잘 참가하고는 있는지?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지? 설화를 만난후 나의 눈앞에는 슬픔에 잠긴 설화의 눈빛이 자꾸 떠올라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기만 하였다. 보름도 지나지 않아 나는 “사랑과 나눔” 의 동아리 회원들과 함께  원래 계획을 앞당겨 아이들의 선물을 가지고 성주구락부에 찾아 갔다. 물론 제일 보고 싶은 애는 설화였다.     성주구락부 리설봉관장님은 대문밖에 까지 나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우리는 차에서 선물꾸러미들을 내린후 훈련장으로 향했다.  20여 명의 아이들이 흰 운동복을 입고 교련원의 엄격한 지도하에 열심히 훈련을 하고 있었다.        설화의 모습이 인츰 눈에 안겨왔다.  키가 제일 작은 설화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유도련습을 하고 있었는데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여 있었다.  우리들의 눈길이 모두 어린 설화에게 쏠리자 리관장님은 설화는 의지가 아주 강한 아이라고 칭찬했다. 그러면서 설화가 성주구락부에 오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리관장님이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파지를 줏고 있는 설화를 발견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그날 차를 몰고 시가지에 가서 채소를 사오다가 길가의 쓰레기통안에서 뭔가 언뜰언뜰 하는것을 발견했다. 그는 하도 이상해 차를 세우고 쓰레기통으로 다가갔다. 그때 쓰레기통안에 들어가 파지를 찾던 설화는  인기척에 놀라 아주 날렵하게 밖으로 훌쩍 뛰여 나왔다. 리관장님은 직업적 본능으로  설화의 날렵한 동작에서 남다른 운동기질을 발견하였다.      학교갈 나이에 쓰레기통을 뒤지는 아이에게 말못할 사연이 있을 줄 알고 리관장님은 설화의 신상을 알아 보았다.  설화는 한창 학교 다닐 나이에 공부를 못하고 파지나 페품을 주어 팔아 고모네 생활에 보태고 있었다. 리관장님은 그런 사연을 알고 차마 그냥 스쳐지날 수 없었다. 운영경비와 각종 경색의 훈련비용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면서도 그 즉시로 설화고모와 련계를 취한후 설화를 성주구락부에 무료로 입학시켰다. 설화는 이렇게 성주구락부의 꼬맹이 운동선수로 되였던 것이다. 설화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 리관장님은 운동하느라 숨을 할딱거리는 설화를 대견스럽게 바라보면서 아쉬운 어조로 말했다。     “설화는 어린 나이에 때이르게 마음에 아픈 상처를 받아서 아이들과 어울리기 힘들어 하고 주눅이 들때가 많습니다. 그 원인으로 지금 설화는 제대로 운동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리관장님의 하신 말을 거듭 되새겨 보았다.  설화를 비롯한 성주구락부 아이들에게는 더 따뜻한 관심과 보살핌이 수요되였다. 나는 아이들 립장에 서서 문제를 생각하면서 부모같은 마음으로 그 애들 마음 깊숙한 곳에 은페되여 있는 남 모르는 아픔을 조금씩 치유해나가야겠다고 다짐했다. 3     지난 해 봄에 퇴직한 나는 성주구락부 아이들의 여름방학과외보도를 맡게 되였다. 자원봉사하러 온 대학생들과 함께 여름방학기간 아이들의 숙제를 검사하고 앞으로 배울 내용들을 예습시켰다. 성주구락부의 아이들은 대부분 사회나 ,부모, 친인으로부터 소외받은 아이들이기에 공부에 대해 자신감이 약하고 평소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걸고 있어 관리하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였다. 나는 아이들과 많이 소통하면서 사랑으로 그들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 주기로 하였다.     봉사하는 동안 아이들에게 도시락을 사 먹이면 간편하고 좋았지만 이러면 애들의 마음을 여는데 도움이 안되였다.  30도 넘는 무더운 삼복철에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직접 점심밥을 새로 지어 먹였다.  그리고 매일 아침시장에 가서 신선한 과일들을 사서 중간 휴식시간에 나누어주군 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집밥 같은 따뜻한 밥과 반찬을 먹으면서 아이들은 우리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며 고맙다는 인사말도 건네기 시작했다.     자원봉사가 지속되던 어느날 아침, 교실에 들어선 설화가 살그머니 나의 손에 복숭아 여러 개를 쥐여 주었다. 저녁에 성주구락부에서 간식으로 나누어준 과일을 먹지 않고 보관하였다가 나한테 갖고 온 것이란다. 평소에 말이 적고 무뚝뚝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던 설화의 가슴에도 봄날과 같은 따스함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설화의 책가방 안에서 책과 부대끼여 몹시 상한 복숭아를 맛나게 몽땅 먹었다. 설화의 정성을 생각해서였다. 자기가 준 복숭아를 맛나게 먹는 내 모습을 보면서 설화는 행복하게 웃었다. 한알 한알 복숭아를 먹을 때마다 나의 마음도 사랑을 받는 행복으로 달콤하였다. 우리는 누구를 사랑하고 또 누구에게서 사랑받 을 때 가장 행복감을 느낀다. 그래서 “사랑은 나눌수록 커진다” 고 하지 않았던가!     설화와 아이들과 서로 정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자 나와 거리감을 두던 아이들도 내 곁에서 맴돌기 시작하면서 생활면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선생님을 도와 앞다투어 교실청소도 하고 작은 음식도 나누어 먹으면서  서로 화목하게 지내기 시작하였다. 바로 사랑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애들이 앞으로 사회생활에 잘 적응할수 있고 사람들과 정을 나눌수 있는 기초로 되는 것이였다.     세상에 마음을 바로잡는 일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 아이들이 옳바른 마음가짐을 가져야 긍정적인 행동을 할수 있고 자비감에서 벗어날수 있는것이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여나기 시작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애들의 굳게 닫힌 마음을 열어주는 일을 나의 애심공정의 중요한 일환으로 하기로 하였다. 스포츠 꿈나무들과 함께   4       오래동안 설화와 성주구락부의 아이들과 접촉하면서 나는 그애들에게 아무리 사랑을 주고 또 주어도 모자라는 것 같았다. 사랑이란 원래 샘처럼 퍼내면 퍼낸만큼 다시 고이는 것이여서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이미 많은 것을 주고도 미처 주지 못한 하나 때문에 안타까웠고 다음에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주고만 싶어졌다.     새해를 맞아, 우리 “사랑과 나눔” 의 동아리 회원들은 물만두와 김치 등 푸짐한 음식과 애들이 입을 옷가지들을 차에 싣고 부푼 마음 안고 성주구락부로 찾아갔다. 제일 먼저 발길이 닿은 곳은 역시 아이들이 훈련하고 있는 훈련장이였다.      훈련에 열을 올리고 있는 아이들 속에서 왜소한 설화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설화는 훈련에 집중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훈련장에 들어 온것도 몰랐다. 자기보다 한 뼘이나 더 큰 남자아이를 상대로 훈련하고 있었다. 한창 기회를 엿보던 설화는 용감히 정면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남자 아이는 슬쩍 몸을 피하면서 중심을 잃은 설화를 쓸어뜨렸다. 설화는 다시 일어나 덤벼들었다. 이번에도 남자아이에게 뒤치기로 제압당하면서 넘어지고 말았다. 련속 두번이나 지게 된 설화는 상대를 이기지 못한 안타까움에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눈물을 흘렸다.     나는 한달음에 훈련장으로 달려가 설화를 일으켜 세웠다.     “설화야 , 괜찮아? 참으로  대단해! 넌 소학교부고 상대는 한급 높은 초중부야.”     “이제 요령을 더 많이 장악하고 열심히 훈련하면 다음에 선생님이 설화를 보러 올 때는 꼭 이길 수 있을 거야! 설화는 해낼수 있어! ”     문뜩 앞에 나타난 나를 쳐다보던 설화는 나의 팔을 붙잡고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평소에 말수가 적은 설화는 성격이 강하지만 이처럼 자제력을 잃고 눈물을 흘리면서 정서적 파동이 심하였다.      설화 뿐만 아니라 성주구락부의 다른 아이들도 훈련장에서 보여주는 모습과 평소 생활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판이했다.금방까지만 하여도 얌전하게 눈을 내리 깔고 우물쭈물 하던 아이들이 훈련장에서는 사자와 같은 용맹을 보이는가 하면 또 어떤 아이는 평소 훈련장에서는 성적이 우수하지만 정식 경기에 참가하면 주눅이 들어 꼼짝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애심활동을 단순히 고운 옷이나 맛있는 음식을 갖다주는 것으로  끝내는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자신들을 억누르는 고독과 외로움에서 헤여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운명의 그늘에서 애들을 완전히 해탈시킬수 있는 것은 물론 사랑과 관심이였다. 허나 더욱 중요한 것은 남들과 똑 같은 대바른 인격을 세워주는 것이였다. 나에게는 애심공정의 새로운 목표가 생기였다.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와 함께 애심릴레이 활동 전개   5       올해 음력설이 지나 신종코로나가 예고없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연길도 정태관리에 들어가게 되였다. 설화와 아이들을 못 본지도 벌써 두 달이 다 되여갔다.음력설이 지나서 보러오마고 약속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여 너무나 안타까웠다. 아이들한테 갖다주려고 했던 화분은 우리 집 창가에서 봄을 맞이하여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 귀여운 꽃망울은 마치도 설화의 발가우리한 얼굴 같았다. 설화를 생각하니 성주구락부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무척 걱정스러워졌다.     리관장님과 통화를 해보니 아이들은 비좁은 숙소에 격리되여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많이 불안해 하고 인터넷 온라인 수업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대로 계속 방치해 두면  아이들이 공부에 흥미를 잃고 학습성적이 많이 떨어질게 불보듯 뻔했다. 그보다도 정서저락으로 아이들의 운동열정도 식어질수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달려갈수 없는 상황에서 고민 끝에 그들과 온라인으로 만나 교류하기로 했다.  리관장님은 대뜸 찬성하였다.     우리는 첫 단계로 위챗그룹방 (微信群)을  다. 잠간사이에  22명의 성주구락부 아이들을 위주로 한 위챗방이 꾸려졌다. 하나 하나 위챗방에 가입해 들어오는 익숙한 아이들의 이름을 보는 나의 가슴에는 기쁨의 물결이 일렁이였다.     나는 위챗방 이름을 “해피 독서클럽” (이하 ‘독서 클럽’ 으로 략칭함)이라고 짓고 아이들에게 독서클럽의 취지를 설명하고 아이들한테 이제부터 나를 “서경선생님”이라고 부르라 했다.  “서경”(书敬)은 한어로 책을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의미라고, 우리도 앞으로 책을 사랑하고 독서를 많이 하자고 약속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너도 나도 독서클럽에 이쁜 이모티콘을 올리면서 기쁜 마음을 전하였다. 고중을 다닐 때 인민교사로 되는 것이 꿈이였는데 나는 드디여 위챗방 독서클럽에서 아이들로부터 “서경선생님” 이라 불리우게 되였다.     위챗방 독서클럽을 세운후 나는 아이들에게 어떤 글을 올려야 하고 어떤 글을 읽어주면 좋을가하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20여 명 되는 아이들은 년령대가 서로 달랐다. 소학생도 있고 초중생도 있었다. 학년 별로 어울리는 글을 편집해서 올려야 했다. 정태관리를 하는 동안 서점에 갈 수 없는 상황에서 우선 집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 가운데서 아이들의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책들을 골랐다. 나는 고르고 고른끝에《채근담》,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세계명언집》,《사랑의 시간들》... 등 여라문권의 책을 손에 쥐였다. 나는 본격적으로 날마다 소학교와 초중부를 나누어 마음의 힐링이 되는 좋은 글들을 검색하고 타자하고 편집하여 독서클럽에 올렸다.     아이들은 그룹방규칙을 엄격히 지키면서 조용한 분위기에서 열심히 올린 글들을 읽었다. 간혹가다 지정된 시간에 글을 올리지 않으면 “띵똥”하고 이모티콘 표정을 올려 나의 주의를 환기시키기도 하였다.  아이들의 독서열정이 올라간 것이다. 사랑을 희구하는 아이들에게 길 도우미마냥 올바른 길을 가리켜 주고 그 여린 마음들을 보듬어 주는 것이 오래 전부터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였다.  더우기 정태관리를 받는 아이들을 위하여 무엇인가 해줄 수 있고 힘이 되여줄 수 있다는 기쁨으로 글을 올릴 때마다 나의 마음은 마치 사춘기 소녀로 되돌아간 듯 뿌듯하였다.     독서클럽 윗채방이 설립된후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갑갑한 생활속에서 마음속에 자리잡았던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많이 활달해졌다. 그리고 자비감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학습성적도 점차 제고되기 시작하였다. 비뚤어진 생각을 옳바른 생각으로 고쳐나가는 일이야말로 가장 보람있는 일이다. 독서클럽은 드디여 아이들 모두가 마음의 힐링을 얻는 아늑한 보금자리로, 쉼터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해피독서클럽' 학생들에게 휴대폰 촬영기술을 가르치는 연변병원 정대식교수   6       온화한 봄바람 따라 2022년 4월 10일부터 연길시의 정태관리가 완전히 해제되고 사회 각 계층이 전면복직되였다. 그동안 신종코로나로 몸은 묶여 있었지만 성주구락부애들을 위한 나의 애심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여러개 민간애심단체에서 나와 손을 잡았다. 나는 새로 만난 민간애심단체와 함께 독서클럽 아이들을 보러 성주구락부를 찾았다. 차에는 아이들한테 줄 선물들로 그득하였다. 그 중에는 나와 아이들의 공동 관심사로 되였던 화분 두개도 들어있었다.      아이들이 한창 운동련습하는 시간이라 우리 일행은 리관장님의 인도하에 곧바로 훈련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우리가 들어섰을 때 훈련장에는 정식 체육경기장처럼 전에 없던 엄숙한 분위기가 흘렀다. 우렁찬 구령속에서 운동훈련에 열정을 보이는 아이들은 예전보다 더 침착해 보였고 동작이 더욱  날파로워 보였다. 아이들은 올해 하반년에 열리게 될 길림성18기운동경기, 길림성소수민족운동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 위하여 여러 가지 운동항목에 도전하고 있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리관장님이 제정한 운동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열심히 훈련하는 모습, 그것은 감동 그 자체였다. 아이들의 완강한 운동정신에서 성주구락부의 아름다운 미래가 보였다.     설화도 제일 중심위치에서 열심히 유도훈련을 하고 있었다. 몇달사이에 키가 한뼘이나 더 컸고 강인한 눈빛에서는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허리를 약간 굽히고 상대를 노려보면서 “모로 돌리기” 기술전략으로 대방을 제압하고도 하나 흐트러짐이 없이 방어자세로 재 공격을 시도하였다. 운동실력과 요령에 능숙한 설화앞에서 설화를 련속 두번이나 이겼던 상대는 이미 기가 많이 꺾이였다. 선생님의 짤막한 책망에 눈물을 흘리고 어깨를 들썩이기도 하던 설화가 아니였다.      패기와 용감성으로 넘치는 설화를 보면서 리관장님은 “설화는 승벽심이 강한데다가 인젠 참고 견디는 인내심도 많이 제고되였습니다.  장차 훌륭한 유도선수로 성장할수 있는 싹수가 보입니다.” 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운동훈련이 끝난 후, 우리는 휴식시간을 리용하여 제 자리에 앉아서 간단한 좌담회를 가졌다. 좌담회에서 아이들은 서경선생님께서 독서클럽에 올리는 내용들은 참신하고 배울점이 많으며 읽을수록 자신감이 생긴다고 하였다. 서경선생님의 랑송을 더 많이 올렸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제출하였다.     얼굴이 상기되여 앞다투어 발언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아이들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학습이나 랑송훈련을 게을리 하지 말고 계속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나는 날마다 향상하는 아이들앞에 항상 긍정적인 마인드의 멋진 모습으로 나서고 싶었다.   '해피독서클럽' 학생들과의 좌담회   7       나는 아이들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깊은 책임의식을 느꼈다. 아이들이 매일 강도가 높은 체육훈련을 견지하는것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의 학습태도와 생활태도, 정서안정 그리고 리상을 향한 확고한 신념을 올바르게 해야 하였다. 한그루의 나무가 숲에서는 빛을 발하지 못하지만  사막에서는 생명의 오아시스같은 존재로 된다. 나는 독서클럽이 아이들의 마음의 안식처이자 성장의 오아시스로 만들기 위하여 더욱 정성을 깃들여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설화도  시간을 짜내서 열심히 나를 도와주었다. 독서활동에도 제일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토론에도 맨 앞장에 섰다. 학습성적도 눈에 띄게 올라갔다.     어느 날, 설화가 갑자기 나한테 문자를 보내왔다.     “서경선생님, 저도 앞으로 선생님과 같은 사람이 될래요!”     “내가 어떤 사람이지?”     “아는 것이 많고 불우한 사람들에게 사랑의 마음을 보내주는 천사 같은 분이지요!”     설화는 문자와 함께 행복하게 웃는 하트  모양의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그 걸 보는 순간 나는 가슴이 뭉클해 나면서 저도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정말 그렇지 않을까?! 우리 모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 설화와 같은 불우한 아이들에게 정성을 쏟고 곡진한 사랑을 준다면 그 애들도 장차 이 사회를 따뜻함으로 가득 채우는 아름다운 꽃으로 피여나 사랑의 빛과 열을 전해주지 않겠는가!     약동하는 푸름의 계절과 함께 요지음은 매일 기쁜소식들이 들려온다. 여러 애심단체에서 성주구락부 아이들한테 사랑의 마음을 전달하였다는 소식이다. “ 시내물이 모여 강을 이루고 강이 모여 바다를 이루듯” 이 사랑의 나눔과 섬김들이 모여 조화롭고 평화로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제 우리가 심은 작은 꽃 씨앗들이 사랑 속에서 싹이 돋고 꽃망울이 터지며 환한 미소로 세상만방에 어여쁘게 피여날 것이다.       애심단체들과 함께 아이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애심공익활동에 참가한지도 어언 6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사회를 밝게 만드는 선의의 행동은 나의 삶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퇴직하여 직장을 떠나면서 인생이 끝나는 것 같아 많이 허무하고 서운했었다. 그런데 설화와 같은 불우한 애들을 도와주면서 작은 베품과 사랑의 나눔 속에서 잔잔한 행복을 누리며 나의 두번째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 열렸다.     퇴직 후에 내가 만난 세상은 참으로 넓고 할일도 많고 마음먹기에 따라 새로운 삶이 시작될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나는 애심공익활동 그 공동체속에서 바른 인성을 배웠고 자아가치를 실현하며 행복을 느꼈다.     “좋은 사람의 삶은 사소하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거나 잊혀진 친절과 사랑의 행동들로 대부분 채워진다” 는 선인들의 말씀이 있다. 내가 성주구락부 아이들한테 쏟은 미약한 사랑은 자랑이 아니다.  나는 내가 해온 그 일들이 또 다른 사랑의 꽃씨가 되여  아직 눈이  녹지 못한 음지에서 새롭게  피여나기를 바랄 뿐이다.  리설봉 관장과 작품을 토론하며
     11월12일 오후,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 애심부에서는 연길시 해란강식당에서 "사랑의 김장 담그기 & 나누기" 김치바자회(慈善义卖泡菜 )활동을 전개하였다. 애심부에서 주최한 이번 행사에는 애심부 회원들과 당지부의 당원 총 29명의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구질구질 내리는 초겨울의 비를 무릅쓰고 행사장에 달려온 회원들은 숨돌릴 새도 없이 촉진회 애심부에서 제공한 산뜻한 통일복장을 갈아입고 촉진회로고가 찍힌 앞치마와 료리사모사에 마스크까지 착용하고 문은희 부회장의 안배에 따라  김치담그기에 달라붙었다.       너도나도 마음을 합치니 일도 척척 손이 맞아 한시간 만에 800근의 초절이한 배추에 빨간 양념을 버무린 맛갈진 배추김치가 완성되였고 다섯근씩 포장된 배추김치봉다리마다에 어느새 촉진회로고와 사랑의 하트가 그려진 ‘상표’가 붙어 행사장은 사랑의 물결이 흘러넘쳤다.         이 날 담근 800근의 김치는 촉진회 46명 회원들의 도움으로 현장에서 전부 판매되였고 2천여원의 판매수익은 전부 불우한 학생들한테 사랑의 성금으로 전달되였다. 다음날, 애심부의 김영자, 문은희 부회장과 몇몇 회원들은 이쁘게 포장한 김치를 들고 촉진회에서 돕고 있는 학생들의 집을 일일이 방문하고 사랑의 성금도 전달해주었다.    이번 행사는 행사준비를 빈틈없이 한 문희 회장과 문은희 비서장 그리고 김향회원의 사심없는 로고, 많은 회원들의 자원적인 참여와  해란강식당의 남복순 사장이 선뜻이 영업실을 내주고 세절적이고 세심한 지도를 해준 덕분에 순리롭게 원만히 진행되였다.    이번 행사를 통하여 회원들은 뭉친 힘은 어떠한 큰일도 해낼 수 있음을 심심히 느꼈고 모두가 한가족 식구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 돕고 방조하는 모습에서 협회의 따뜻함을 더한층 느끼게 되였다.           최근 들어 코로나 여파로 여러가지로 많은 애로가 있지만 촉진회 애심부에서는 해마다 계획적으로 수차례의 애심활동을 펼치고 있다. 애심천사들의 뜨거운 사랑의 손길은 시종 멈출 줄 모르고 달마다 생활고를 겪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끊임없이 전달되여 학생들로 하여금 현실에 도전하여 꿋꿋이 살아갈 수 있도록 용기와 힘을 주고 있다.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는 문희 회장이 제출한 “하나하나의 물방울이 모여 강을 이루듯 일편단심으로 불우아이들을 위해 사랑의 성금을 모아야 한다” 는 초심과 슬로건에 맞게 앞으로도 다양한 애심활동으로 보다 많은 불우한 아이들에게 사랑의 마음을 전달할 것이다. 너도 나도 손맞춰 척척 계량과 포장을 빈틈없이 하고 있는 문은희 비서장과 김향회원 곁눈 한번 팔지 않고 허리 한번 펴지 않고 묵묵히 일하는 모습 "잠간만 여기 봐주실래요." 찰칵!  "저희도 함께 합시다. " 로당원 박순녀와 리명숙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 로고와 사랑의 하트가 그려진 '상표'를 단 김장김치들 "저희들도 한장 기념 남깁시다." 사랑의 천사- 애심부 회원들   사진, 자료제공: 애심부 기사: 홍보부 편집: 홍보부
       지난 11월 6일,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 리사회에서는 박정옥리사장의 주최 하에 리사회 기업탐방 및 제2기 1차 리사회 회의를 소집하였다.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이하 "촉진회"로 명명) 리사회는 2022년초 문희 회장의 임기를 맞으며 새로이 구성된 제2기 리사단으로서 각항 실천활동에 적극 참가하고 기여하면서 "단결, 상승" 의 전통을 계속 발휘하여 촉진회의 운영과 발전을 위하여 든든한 보조역할을 남김없이 발휘하게 된다.     박정옥 리사장은 촉진회의 로회원으로서 촉진회의 여러가지 활동에 참가하면서 견식을 넓혔고 애심활동을 통해 사랑의 마음을 더욱 많이 갖게 되였다면서 앞으로도 어려움을 이겨내는 도전정신을 계속 발휘하여 중창단 활동을 더 활발히 적극적으로 조직하여 래년 촉진회 성립 30주년의 원만한 진행을 위하여 있는 힘껏 이바지하겠다고 결심하였다.    2019년 워크숍 활동을 위하여 복장 모델쇼에 출전할 민족복장을 무료로 제공했던 서미란 부리사장은 올해 자치주창립 70돐을 맞으며 단체 무용복 제작 때 여러가지 원인으로 애로가 많았지만 촉진회 여러 자매들의 헌신적인 방조 하에 모든 임무를 제때에 완성할 수 었었다고 하면서 집체의 따뜻한 나눔과 사랑의 마음에 힘 입어 앞으로 촉진회발전에 힘껏 노력하련다고 진지하게 말하였다.    최정옥 부리사장은 비록 녀성발전촉진회에 참가한 시간은 오래지 않지만 협회에서 조직하는 각항 활동에 참가하면서 안해로서, 어머니로서, 자식으로서 생계와 사업을 위하여 지금껏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이제는 주위를 둘러보고 불우한 이웃도 돌아보는 마음의 여유와 신심을 갖는데 도움을 받았다고 하면서 앞으로 당조직사업을 더 열심히 하면서 애심활동에서 선두적, 모범적 역할을 많이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리명숙 리사는 2010 년부터 애심활동에 참가하였는데 사회공동체의 조성에 있어서 애심은 가장 기본적인 요구라고 하면서 오늘 또다시 새로운 지평선을 향하여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마음가짐으로 래년 촉진회 성립 30돐 기념행사의 원만한 개최를 위하여 애심을 바탕으로 자기의 힘을 남김없이 이바지하겠다고 굳게 다졌다.    윤영미 리사는 말없이 촉진회의 각항 활동에 참가하면서 많은 자아성장을 가져왔고 올해 들어 친인이 아플 때 박방진료소 려순희원장님이 친히 왕진해주어 큰 감동을 먹었고 그 감사의 마음을 힘으로 바꾸어 봉사활동에 저그마한 힘이나마 계속 이바지하겠다고 하면서 내가 감동하고 남에게 감동 줄 일들을 많이 하면서 자아성장을 하겠다고 표시하였다.    안영자 리사는 서로 학습하고 서로 단결하고 서로 돕는 가운데서 자신감을 갖게 되였고 자아성장을 할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다고 하였다. “도전하면 된다” 는 좌우명으로 촉진회 성립 30주년 경축행사를 위하여 자신의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하겠다고 하였다.    문희 회장은 “우리 촉진회는 서로 배우고 서로 배려하고 민족사회를 위하여 봉사하고 공동성장하고 공동 발전하자는 취지를 가진 녀성협회로 목표를 정하고 자아성장과 봉사위주로 녀성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사회리더십을 제고시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촉진회 리사회는 앞으로도 "사랑, 헌신, 감사, 발전" 이라는 슬로건 하에 녀성들의 사회영향력을 강화하고 불우학생들과 사회빈곤계층을 돌보며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다.         좌담회가 끝난 후 려순희 리사를 모시고 박방 중의진료소의 창업사를 청취하였다. (아래 내용은 박방중의진료소에 대한 소개인데 일부 내용의 오역(错译)을 피면하기 위해 한문을 그대로 올린다.)       20세기 70년대 초, 조선의 유명한 한의사가 집필한 림상의학저서 를  4대 제자 조효현으로부터 물려받게 된 박정욱, 려순희 부부는 처방전에 씌여진 비방들을 장악하고 직접 산에 가서 약재를 캐거나 심거나 하면서 자체로 약제조공예를 익혔고 또 많은 약제품들을 개발해 오면서 환자들을 위해 일심으로 봉사하여왔다.         2022年10月,经中国传承人大数据库中心非遗和传统文化传承专业委员会审核,认为吉林省延吉市朴元日同志申报的“朴氏中药专治皮肤炎症经验方”具有传承价值,符合申报条件,准许入库传承人网《中国传承·人才智库》,并授权使用受知识产权保护“中国传承人及图”牌证。     朴元日承扬了皮肤炎症朝医治疗技术,多次向吉林省残联、延边残联肢体残疾人协会捐赠了数十万元的代表性产品褥疮膏,帮助了众多褥疮伤友。吉林省残联汲秘书长,吉林省残联肢体残疾人协会王主席高度评价了其产品功效。                  朴元日近期将受邀参加中国传承人大数据库中心举办的隆重授牌仪式。
24    <나는 '온더웨이'> 댓글:  조회:166  추천:0  2022-11-08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는 우리 민족 녀성들이 민족문화와 전통을 전승하고 꿈과 사랑을 나누는 꿈터로서 전체 회원들은 자아발전을 도모하고저 언제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면서 멋진 인생을 수놓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연변대학병원 소아과에서 어린이들의 심신건강을 위해 밤낮없이 사업하시면서도 녀성과 아이들의 건강관리문제를 사회적인 측면에서 더한층 높게 다루기 위해 라는 위챗계정을 운영하고 또 정기적으로 공익강좌로 사회인을 향한 건강교육보급활동을 활발히 벌리고 있는 김정애회원님의 '애심녀성컵' 제7회 전국 조선족녀성 생활수기공모 은상수상작품을 싣습니다. 나는 '온더웨이'           김정애      얼마 전 고중에 다니는 둘째 딸의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학기말에 있게 될 학부형회의에서 가정교육에 관한 내용으로 강연을 준비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우리 애는 공부를 별로 잘하지 못하는데 제가 무슨 자격으로…" 반급에서 학습성적이 중등선밖에 있었던 아이의 엄마로서 자신이 없다는듯이 말을 흘리는데 담임선생님이 “아닙니다. 지금은 학습성적이 남들보다 뛰여나지 않지만 정이 참 많은 아이여서 과임선생님들 모두 이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잘 할겁니다.”  하고 둘째 딸애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해주며 요즘 들어 아이들과 학부형들사이 관계가 원활하지 못해 공부는 물론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애들이 적지 않다면서 재삼 강연요청을 했다. 사실 나도 사춘기아이를 둔 부모로서 평소에 어떻게 아이를 대해야 할지 여러모로 고민에 빠질 때가 많았기에 학부형들의 심정을 어느 정도 리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역중심병원의 소아과의사로서 학교와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것도 응당 해야 할 일이라 생각되여 “아이들의 심리건강과 부모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준비하겠다고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동안 병원의 의사로 있으면서 보고 듣고 경험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며 우리 주변의 아이들과 부모들사이의 문제가 홀시할 수 없는 사회적문제로 되고있음을 실감했다. 어느날 문진에서 야근을 서던 날에 생긴 일이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60이 훌쩍 넘어보이는 할머니가 흐트러진 머리를 다듬을 새도 없이 걱정어린 표정으로 손녀를 데리고 진찰실에 들어섰다. 손녀가 며칠째 머리가 아프다며 잠을 못 이뤄 너무 힘들어한다고 호소했다. 키가 160센치메터를 훌쩍 넘는 미끈한 체격, 예쁘장한 얼굴, 누가 봐도 미인이라고 칭찬할만한 외모였지만 눈빛만은 정기가 없었다. 진찰을 해보니 감염으로 인한 증상은 아니였다. 혹시 심리요소로 인한건 아닌지 하는 의문에 가정문제를 캐묻기 시작했다.  알고보니 친부모들은 애가 한돌이 되기전에 아이를 외할머니한테 맡기고 외국으로 돈벌이를 떠났는데 지금까지 10여년동안 외국에서 불법체류하다보니 한번도 중국에 돌아온적이 없다고 한다. 아이는 부모와 한번도 직접 얼굴을 마주한 적도, 손을 만져본 적도 없이 그냥 화상채팅으로 서로 대화를 나눈다고 했다. 이 아이는 부모사랑을 가장 필요로 하는, 한 사람의 성격 형성의 제일 관건적 시기인 유아시기를 부모와 함께 생활하지 못했던 것이다. 부모의 손을 잡아본 기억조차 없을 애를 바라보면서 나는 “너 참 너무 불쌍하구나”하고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도로 삼키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 아이의 두손을 꼭 잡아주었다. “리나야(가명)!” 하고 조용히 이름을 불렀더니 갑자기 그 아이의 두 눈에서 눈물이 샘솟더니 이어서 줄 끊어진 구슬처럼 두 볼을 타고 주룩주룩 흘러내려 옷섶을 적시고있었다.  (가여운 이 애를 어쩌면 좋을가…)  부모가 곁에 없는 아이를 지금까지 키워오시느라 고생하셨을 그 외할머니 또한 불쌍하기 그지없었다. “리나야 , 너 참 이쁘게 잘 컸구나, 외할머니가 엄청 고생을 하셨겠지만 니가 이렇게 잘 자라줘서 할머니도 고생한 보람이 있으시네…외할머니도 인젠 년세가 계시니 리나가 강해져야 돼요. 중학생이 되였으니깐 더 어른스럽게 행동해야지. 자기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고 할머니를 도와 설겆이도 하고…이런것 다 할수 있을거지?...네가 다니는 중학교에 내 친구가 담임으로 계셔. 앞으로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갈수 있게 연락해줄게…” 리나는 내 손에 두손을 맡기고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면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날 나는 목이 꺽 메는듯한 울컥함을 가까스로 참았다. 출국붐으로 인가가 눈에 띄게 줄어든 우리 연변, 우리 주변에 이런 아이들이 리나 하나뿐이 아니다. 시댁 친척 한 분도 소학교 1학년에 다니는 딸애를 남편한테 맡기고 일본에 돈벌이를 갔다가 아이가 대학입시를 앞둔 때에야 집에 돌아오게 되였다.  하지만 더 나은 삶을 위해 선택한 출국길이  딸애한테는 이루다 말할수 없는 유감을 남겼다. "엄마와 함께 목욕탕에 다니는 친구가 그렇게 부러웠다"고 말하는 딸 아이의 말에 우리 아이들이 사실 부모한테 바라는것이 많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런 작은 욕구도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우리 부모들의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일가?  그 친척은 엄마로서의 직책을 다 하지 못한 자책감에 대학입시시험장을 나오는 딸애한테 시험 잘 봤냐는 말은 아예 꺼내지도 못했다고, 죄지은 사람처럼 눈치만 살폈다고 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 아닐수 없다. 아이의 성장단계에서 유년기는 일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시기이다. 이 관건적인 시기에 아이들이 응당 받아야 할 사랑을 얻지 못하게 되면 평생에 걸쳐 그 아픔을 치유하면서 산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 뭘 잃고 살아가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출국붐이 일어난지 거의 30년이 돼온다. 그때의 그 아이들이 성장해서 이제 엄마, 아빠로 될 나이가 되였다. 가족의 사랑을 부족하게 받고 자란 젊은 세대 부모들이 과연 옳바른 부모사랑을 차세대에 전할수 있을가 하는 걱정이 앞선다. 2020년 초, 느닷없이 들이닥친 코로나전염병으로 어른들은 물론 마음껏 밖에서 뛰놀던 아이들도 집안에 발이 묶였고 '손씻기'와 '마스크착용'이 생활의 한부분으로 되다보니 병원을 찾는 아이들이 현저히 적어졌다.  예전 같으면 앓는 애들과 부모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소아과문진 청사안이 한적할 정도로 썰렁해졌다. 그렇다면 코로나 '덕분'에 우리 아이들이 건강해진 것일가? 지난해 겨울의 어느날, 중학생 2명이 한밤중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2명 다 12살 나이의 소녀였는데 모두 자살시도목적으로 약을 과다복용한 것이 입원 원인이였다.  한 아이는 이미 우울증 진단을 받고 약물복용중 엄마와의 말다툼끝에 치료제로 먹고있던 우울증약을 과다복용했고 다른 한 아이는 부모가 리혼을 한뒤 친아버지와 계모 슬하에서 살다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부모와의 마찰이 심해 아예 할아버지집에 얹혀살던중 음악공부를 하려는 자신의 꿈을 리해해 주지 못하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워  죽겠다며 아스피린을 과다복용한 것이 위출혈이 생겨 입원하게 되였다. 얼핏 보아도 예술분야에 특유한 재질을 갖춘 예쁘장한 외모와 상반되게 두 손목에는 놀랍게도 자해를 몇번이고 반복했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왜 바보같은 선택을 했을가? 자신의 뚜렷한 꿈이 있는 아이들과 그것을 리해할수 없는 부모들사이의 모순이 극대화되어 결국 아이들이 극단적선택을 한 것이였다. 눈에 띄게 늘어나는 아이들의 심리건강문제를 보면서 나는 석사연구생들을 거느리고 조사설문지를 작성해 최근  6년간 약물중독으로 우리 병원에 입원한 아이들에 대해 더 상세한 조사를 해보았다.  조사를 통해 본 결과 약물중독으로 입원한 환자수가 해마다 점점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다. 처음 몇년간은 유아들이 식별능력이 약해 오용으로 인한 약물중독이 많았다면 최근에는 12살에서 16살미만의 사춘기 아이들이 자살시도로 약물을 과다복용하는 경우가 급격히 많아지는 수자 보고가 나왔다. 사고발생 원인을 따져보면 부모와의 다툼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 청소년시기는 심리적인 면에서 자신의 개성을 살리려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시기인데 대학입시제도하에 학업으로 인한 스트레스 또한 만만치 않다보니 아이들은 심리적으로 힘들것이 뻔하다. 게다가 지난해부터는 ‘코로나19’영향으로 부모들이 직장이나 가정생활에서 여러모로 불편을 겪으면서 심경이 편치 않은 와중에 눈에 거슬리는 아이들의 어떤 말이나 행동들이 부모자식간의 모순을 유발시키는 도화선이 된 것이다. 내가 전공하는 소아과학은 태아시기부터 사춘기 아이들의 건강을 보장하고 삶의 질 향상을 주요목적으로 하는 림상학과이다. 소아과학의 사명은 의대생을 위한 인재양성 뿐만아니라 사회를 위한 봉사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아이의 건강은 임신전준비부터 시작이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병원과 연변대학의학원 지도부의 지지하에 지역의료건강중심발전을 위한 목적하에 2019년에 연변의학학회 주산기(围产期)의학분회를 설립하고 지난해에는 연변대학의학원에 주산기신생아의학연구중심을 설립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연변지역 아이들의 건강과 발달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시스템을 만들었다.  그 외에 다방면의 소질을 갖춘 대학생양성을 주요목적으로  , , ,  등 효와 건강을 중심으로 주산기분야와 연관된 다 방면의 주제를 다룬 (走进围产医学)와 (生命的诞生与成长)이라는 대학생수업과목을 새로 만들었다.    지금의 대학생은 미래의 부모이다. 하여 의학전업생여부를 막론하고 이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더 많은 대학생들이 앞으로 건강한 심신으로 훌륭한 부모역할을 할수 있도록 도와주는데 의미가 있어 학교와 학생들의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한편 글쓰기를 즐겼던 나는 올해 초에 이라는 개인위챗계정을 만들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좋은 글들을 골라 계정에 올려 지인들과 공유하였었는데 후에 녀성과 아이들의 건강관리문제를 사회적인  측면에서 더 한층 높게 다뤄야 될 필요성을 느껴 위챗계정의 로고를 진달래꽃으로 바꾸고 계정이름을  (金达莱母婴医学园地,Jindalai Maternal and Infant Clinic)라고 고쳤다.    그리고 “6. 1”절을 계기로 몇몇 의대생을 거느리고 관련 분야의 교수님들과 함께 정식으로 운영을 시작했다. 아직은 금방 걸음마를 뗀 수준이라 서툴지만 국가에서 얼마전 발표한 ‘세 아이’출산정책의 봄바람을 타고 의 건설이 연변은 물론 국내 나아가 세계무대에서 큰 비전을 가져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특히 “엄마살롱(妈妈沙龙)”이라는 사회인을 향한 건강교육 보급활동은 임신과 출산을 준비하는 녀성과 엄마들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으로서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부딪치는 부모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는데 중요한 취지를 두고있어 그 사회적효과에 더 큰 기대를 하고 있다. 이런 것들을 쭉 돌이켜보며 강연준비를 마친후 담임선생과의 약속대로 36도를 넘는 찌는듯한 삼복의 무더위를 무릅쓰고 학부모들이 모인 강단에 섰다.   사춘기란 의학적으로 어떤 특성을 갖고있고 지금의 아이들이 학업의 압력과 부모와의 의견소통의 불만족으로 얼마나 힘들어 하고 있는지에 대해 많은 사례를 들어 설명하였고 외자녀를 둔 부모들이 아이들의 성적에만 집착하지 말고 학교와 가정이 합심해서 아이들이 건전한 마음가짐으로 일상을 보낼수 있도록 도와주는데 력점을 두고 우리 아이들을 효를 알고 효를 실행할줄 하는 장래의 인간다운 '사람'으로 키워야 할 필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특히 대학입시를 2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낼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은 시점에서 어떻게 아이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많이 가질 것인가에 강연 포인트를 두었다. 예상외로 학부모들이 너무나도 공감을 많이 해줬다. 적지 않은 학부모들은 사춘기 아이때문에 고민거리가 한두가지가 아니라면서 '엄마살롱' 수업을 언제 개설하냐고 문의하며 너도나도 위챗추가를 요청했다. 담임선생은 학부형들은 물론 자신도 강연을 듣고 소득이 크다고 하면서 연신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 후 아이들의 심리건강문제로 고민하고있는 교사들과 학부모들을 위해 폭넓은 봉사활동을 개시하기로 하고 또 계획을 잡았다. 앞으로 연변대학 교수들을 중심으로 강의진을 만들어 아이들의 심리건강을 어떻게 정확히 체크하고, 심리적으로 애로를 겪고있는 아이들을 어떻게 발견하고 대응할지, 부모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 등의 주제로 강연활동을 정기적으로 진행하려고 관련 교수님들과도 합의를 보았다. 사실 돌이켜보면 나도 박사공부시절에 둘째딸을 낳아 키우다보니 어쩔수 없이 전탁보모를 쓰게 되였는데 그 뒤로 애가 오래동안 ‘손가락 빨기’를 멈추지 않아 엄마로서 사랑을 제대로 주지 못한 탓이라고 많이 자책을 했었다.  게다가 유치원 때 한족반과 조선족반을 넘나들며 전반(转班)을 반복하는 통에 소학교에 입학해서 공부성적이 학급에서 늘 마지막순위에 머물러있었다. 스스로도 표준을 낮춘 모양인지 남들은 100점을 맞지 못해 아쉬워하는 평소시험에도 79점을 맞고 집에 돌아와서는 “딱 1점이 모자랐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해서 우리 부부를 실망시키기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늘 상장을 받아 안고 집에 와서 여러 사람들의 칭찬만 받는 언니한테 뒤질세라 "나도 상장이 있다"며 자기 이름이 적혀있는 호구부를 불쑥 들고 나와 식구들한테 자랑스레 보여주던 둘째 딸의 모습을 보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였다.  (너도 잘 해보려는 마음이 있는 애구나. 그래 너의 우수한 점을 많이 발견하고 성장시켜야겠구나...) 그 뒤로 나는 둘째 딸애의 성장을 위해 학교선생님들과 밀접한 교류를 가지고 가정교육에 관한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놀음에 탐하던 애가 소학교 고급학년때부터 공부에 열정을 보이더니 서서히 학습성적도 오르기 시작했고 롱구나 무용에도 장끼를 보였다. 중학교에 올라가 상해에 수학려행을 다녀온 뒤에는 또 "장래 상해복단대학에 가겠다"고 폭탄선언을 하기도 했다. 자녀교육에서 부모의 본보기가 중요한 역할을 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항상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사업하는 모습을 아이들한테 보여주는 것이 가장 좋은 가정교육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육아를 경험하면서 아이들이 성장과정에 수 없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에 우리가 너무 이르게 아이들한테 "너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락인을 찍어놓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자신감을 갖고 밝고 향상하는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가게 할지를 더 많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세 아이를 가진 엄마로서 소아과중환자실 관리를 맡아보는 힘든 의사 직업에다 또 대학생과 연구생 양성을 겸직한 교사로 있다보니 그야말로 밤낮이 따로 없고 주말이 따로 없이(“白加黑,5+2”) 늘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얼마전 유명한 영화배우 마이리(马伊琍)가 더우인(抖音)에서 “녀성으로서 사업과 가정을 다 잘 경영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의 뒤에는 꼭 누군가의 희생이 뒤받침 되여 있을것이다.”고 하는 말에 크게 공감을 했다. 결혼해서 26년, 돌이켜보니 남편과 시할머니, 그리고 시부모님이 든든한 후원군이 되여 집안일을 항상 넘치게 해주신 덕분에 내가 시름놓고 사업을 할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늘 고마운 마음이다. 칠십이 넘으신 시아버님은 지금도 자가용차를 운전하시면서 애들의 등퇴교와 학원에 다니는 일을 도와주시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자식”이라고 말씀하시는 시어머님이 손군들한테 맛나는 피자를 직접 만들어먹인다고 식자료와 피자가마를 무겁게 들고 집문에 들어서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가끔은 원망도 없질 않지만 그래도 힘들때마다 등을 밀어주는 남편 또한 눈물겹도록 고맙기만 하다. 중층간부경선을 앞두고 늦둥이가 위챗에 음성메세지로 "엄마 힘내. 성공하길 바래" 라고 하던 젖내나던 말은 지금도 귀가에 메아리친다. 나는 “아이는 생명의 연장선이고 학생은 학술의 연장선(孩子是生命的延续,学生是学术的延续)”이며 “훌륭한 의사가 되려면 우선 훌륭한 스승이 되여야 한다.”고 하시던 박사공부시절의 은사 길림대학병원 소아과 로계영교수님의 말씀을 늘 가슴에 새기고있다. 건강을 회복하고 병원을 나서는 아이와 그 가족들의 뒤모습을 보면서, 배움과 실천에서 성취감을 느끼고 퐁퐁 뛰며 기뻐해하는 우리 학생들을 바라보면서, 더우기 평생을 연변의 녀성과 아이들의 건강사업발전에 진력해온 국내호리(护理)계의 거목이신 연변대학 호리학원 리춘옥교수, 심리상담전문가 류혜선교수 등 인생의 등대와 같은 우수한 선배님들을 보면서 아이들의 육체건강과 정신건강을 담당하고있는 의사와 교사라는 성스러운 직업을 겸비한 자신이 참 행복한 인생을 살고있다는 생각을 수 없이 해본다. 오늘도 나는 사랑하는 내 아이들과 우리 학생들, 그리고 우리 녀성과 아이들의 건강을 위하는 사업에 올인하며 살고 싶다. 열심히 일하면서 즐기는 매일의 순간, 순간들이 내가 나서 자라고 지금까지 일하면서 살고 있는 이 곳, 연변의 건설과 발전에 적은 힘이나마 기여할수 있는 값진 인생가치를 만들어 가는 길이라 자부한다.  나는 영원히 "온 더 웨이(on the way)(永远在路上) !"   《연변녀성》 2021년 10월호에서   수상소감   평소에 글쓰기를 좋아했던 리유로 공모에 응한지 올해로 3년째다. 그동안 겪어왔던 일들을 글로 적어 우리 아이들이나 학생들 교육 소재로 되게 하려는 것이 주요 목적이였는데 이번에 의외로 이렇게 은상까지 받게 되니 너무 황송하다. 전국애심녀성포럼 여러 심사위원선생님들과 관련인사들에게 고마운 심경은 내가 맡은바 일들을 잘 해나가는 것으로 보답하려 한다. 대학시절, 연변대학병원 소아과에서 실습을 하면서 어린이건강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여 소아과학공부를 시작한지 어제 같은데 어언 27년 세월이 흘렀다. 아이 하나만 낳게 하던 국가계획출산정책에 변화가 생기면서 우리의 생활환경과 사회적 영향으로 고위험군임신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현실이다.  신생아진료를 맡고있는 의사로 경험했던 몇가지 잊혀지지 않는 사례를 통해 아이들의 건강문제는 태여날 때부터가 아니라 임신전부터 관리가 따라가야 한다는 점을 절실히 느끼게 되면서 최근 몇년간 의료보건학 및 호리학 분야의 교수분들과 손잡고 연변의 주산기의학발전을 위한 시스템을 구축해왔다.  지난해부터 코로나가 온 세상을 쓰나미처럼 휩쓸면서 소아과학분야도 큰  충격을 받았는데 감염으로 앓는 환아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대신 심리적인 문제로 힘들어하는 아이들, 특히 청소년 심리건강이 가정과 학교 및 사회의 큰 문제로 대두되였다. 그래서 산모와 신생아의 건강을  도모하는 주산기의학발전사업을 녀성과 청소년의 건강을 위한 사업으로 폭을 넓히고 그에 맞춰 각 분야 교수님들과 함께   위챗계정을 꾸리고 대학교에 와 이라는 수업과정도 새로 만들었다. 초창기라 힘든 일도 많았지만 교수님들의 사심없는 헌신속에서 그리고 사회와 학교의 적극적인 지지와 도움으로 부딪친 일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갈 수 있었다. 오늘날 주산기의학교연실이 설립된 뒤를 이어 연변대학에 녀성과 청소년들의 건강 촉진을 위한 기금이 마련되고 대학생들의 건강관리를 위한 실습기지가 세워지기까지에 물심량면으로 적극적인 지지와 후원을 아끼지 않은 학교와 사회 및 기업단체들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그리고 항상 큰 뒤심이 되여주신 시댁 식구들과 말없이 나의 사업을 지지해주고 리해해주는 남편과 아이들에게도 이 기회를 빌어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이 순간  한국의 이슬아 일간 작가가 하던 말이 떠오른다. “우리가 살면서 너무 아름다운 일들을 겪거나 너무 감탄스러운 상대를 만나고나면 그 순간을 그냥 흘러 보내기는 너무 아쉽다거나 혹은 나 혼자서만 알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우리 누구한테나 모두 정확히 기억하고 오래동안 보존하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분명히 있을 거라 생각된다. 소중한, 잊고 싶지 않은 이야기는 말로 하면 바로 휘발되지만  글로 쓰면 그 이야기의 수명이 길어진다.” 나에 대한 사랑이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사랑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글쓰기의 아름다운 작업 중의 하나라고 한다. 나는 앞으로 20년간 일기쓰기를 견지해 온 바탕을 밑거름으로 비록 작가가 아니지만 내가 지금 올인하고 있는 교사와 의사라는 직업으로 살아가면서 무심히 지나치는 것들을 유심히 다시 보아가며 그 속에서 얻는 작은 감동들을 솔직하게 글로 적어 아름다운 우리 이 세상에 전하리라 다짐하는 걸로 수상 소감을 마치려 한다.
23    <사부곡> 댓글:  조회:144  추천:0  2022-11-08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는 우리 민족 녀성들이 민족문화와 전통을 전승하고 꿈과 사랑을 나누는 꿈터로서 전체 회원들은 자아발전을 도모하고저 언제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면서 멋진 인생을 수놓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제5기 '계림문화상' 공모에서 은상에 당선되였던 홍보부 류영자 회원의 글 을 올립니다. 은 금년 1월에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장고TV' 계정에 원로 아나운서 서방흥교수님의 랑독과 함께 올랐었고 4월 7일에는 에 기재되였습니다.   사부곡 류영자      세월이 류수와 같다고 했던가. 어느새 아버지가 돌아가신지도 어언 40년의 세월이 가까워오고 있다. 그 사이 강산도 몇번 변했건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짙어만 간다.    1982년 12월 11일, 그 날 아침부터 날씨는 음침하여 당금이라도 눈발이 날릴 것만 같았다. 새벽녘에 아버지가 아주 또렷한 모습으로 학교 기숙사문을 열고 나의 침대가로 살며시 다가와서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였다. 화들짝 놀라서 눈을 뜨고 보니 꿈이였다. 너무나도 이상한 꿈인지라 나는 이번 주 일요일에는 아버지 뵈러 꼭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흐리터분한 기분으로 학교에 갔다.    마음이 하도 심란하여 첫 두 시간에는 시간집중이 되지 않아 간신히 견뎌냈고 중간체조시간에는 밖에 나가 체조를 겨우 두어번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교실로 돌아왔다. 새벽에 꿈속에 다녀간 아버지 생각에 불안한 마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좌불안석하는 사이 세번째 시간이 되였고 어문선생님이 한창 강의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누군가 다급하게 교실문을 두드렸다. 선생님이 잠간 복도에 나가 두런두런 누구하고 이야기하는가 싶더니 다급하게 들어오며 정색해서 첫줄에 앉은 나한테 빨리 나가보라고 고개 짓을 했다. 학생들의 의아해하는 눈길을 등에 업고 황망히 복도에 나가보니 담임선생님이 복도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급히 나의 두 손을 꼭 잡더니 무거운 어조로 금방 전화가 왔는데 오늘 새벽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였다. 청천벽력!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불길한 예감은 있었지만 막상 이런 비보를 듣고 보니 나는 목구멍에서 갑자기 뜨거운 것이 울컥하면서 저도 모르게 오열하고 말았다. 마치 시계의 초침이 그 순간에서 멈추면서 눈앞의 모든 것이 제자리에 정지되는 것만 같았다.    전번 주에 집에 갔을 때 나하고 조곤조곤 이야기도 잘하던 아버지가 어쩜 아무 예고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극도의 비통으로 머리는 텅 빈 것 같았지만 마음은 한시바삐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고향집까지는 거리가 20여리 되는데 집으로 가는 석현행 뻐스는 매일 오전 7시와 오후 4시에 딱 두번만 있다 보니 오후 4시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일각도 기다릴 수가 없었다. 나는 비장한 결심으로 그 자리에서 신끈을 졸라매고 선생님의 부름소리를 뒤로 한 채 아버지이름을 부르며 학교대문 쪽으로 뛰여갔다. 눈물이 앞을 가려 몽롱해진 시야 속에서 나는 사람들의 의아해하는 눈길을 느낄 수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빨리 집으로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쏜살같이 고향 가는 방향으로 달음박질하였다. 하늘에서는 이미 눈꽃이 내리고 있었다.    모진 세월, 풍파를 겪어온 아버지이다. 일찍 아버지는 할아버지 등에 업혀 두만강을 건너 가야하강반의 하룡성에 정착하였다.    아버지는 삼형제 중의 맏이였던지라 동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하여 자신은 학업을 포기하고 어린 나이에 농사일, 나무하는 일, 집안일을 가리지 않고 도맡았다. 농촌일로 다져온 아버지는 1950년대 후반에 강 너머 토성리촌으로 이사 와서 생산대 대장으로부터 민병련장, 치보위원, 주임 등 중임을 맡고 열심히 사업해왔다. 1964년부터는 대대당지부서기 직무를 떠맡고 농민들을 이끌고 수많은 일들을 하였고 상급으로부터 받은 상장만 해도 한 궤짝에 가득 찼다. 그 시기에 상장이 증거로 연루될까 봐 모두 태워버려서 지금은 한장도 없어 안타깝지만 아버지가 해놓은 많은 일들은 산이 지켜보았고 들판에 오롯이 새겨졌다. 줄곧 당지부서기 공작을 맡은 아버지는 한점 흐트러짐 없는 정직한 분이였고 개인의 사욕이 없이 집체와 마을사람들을 위해 성심성의껏 일했다. 아버지의 훈도하에 나는 일찍부터 항상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뚜렷한 인생관을 가지게 되였다. 아버지는 나의 마음속 우상이였고 계몽선생님이였으며 든든한 마음의 기둥이였다.    도문기차역을 지나고 도문다리를 건너서 석현 행 국도에 올라서니 다니는 차량들은 거의 없었다. 한기가 뼈속까지 스며들었지만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돋아났고 입가에는 새하얀 입김이 서리서리 아버지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으로 피어올랐다.    국도로 한참 달리니 저 앞에 향양촌이 보였다. 향양촌을 지나 앞 산굽이를 에돌면 수남촌마을에 들어서게 된다. 그 산굽이를 따라 올라가면 일망무제한 논밭이 펼쳐진다.    옛날 수남촌은 산간지대여서 한전이 많고 수전이 적었다. 하여 마을사람들은 해마다 조이 탈곡이 끝나면 햇좁쌀을 이고 산 너머 린근 동네에 가서 한근에 웃돈을 10여전씩 더 주고 입쌀을 바꿔오군 하였다. 입쌀이 귀한 당지 사정에 비추어 아버지는 마을의 끌끌한 청장년들을 이끌고 수전개간에 나섰다. 물도랑을 내고 낮은 지세에 물방아를 세워서 산과 산 사이의 물을 옮겨오는 데 성공하였다. 아버지는 새벽이슬을 맞으며 논두렁 길을 넘나들었다. 동이 트면 아침이 되고 해가 지면 밤이 오듯, 자고새고 하는 일이 지겹지도 않은 지 아버지는 우직하게 논밭에서 일만 수걱수걱 하였다. 저녁식사를 끝내기 바쁘게 맥진한 아버지는 푹 꼬꾸라져서 꿈나라에 들어가지만 날이 밝으면 논밭으로 나가는 일벌레가 따로 없었다.    아버지의 신근한 로동으로 근 천무가량 되는 한전은 옥답수전으로 되였다. 어쩌면 아버지는 마을사람들이 이밥을 먹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수남촌의 입쌀은 소문도 자자하였고 수남촌은 부근에서 소문이 자자한 부유촌으로 되여 린근이 한족들마저 이사 오고 싶어하는 마을로 탈바꿈했다. 한전을 수전으로 만든 수남촌의 일화는 왕청현정부의 표창도 받았다.    헐떡거리며 향양촌 산굽이에 도착하여 그 논밭들을 내려다보노라니 억척스럽게 일하던 아버지 모습이 아른거린다.    드디어 수남촌 대대마을에 들어섰다. 나의 얼굴은 얼어서 벌겋게 부어있었고 하얀 성에가 낀 머리에서는 흰 김이 모락모락 피여올랐다. 마치 북극에서 사는 유목민을 방불케 하는 나의 모습에 촌에서 맞띠운 사람마다 의아한 눈길로 흠칫하며 쳐다보았다.    “저 애가 도문시1중에 다니는 류하준 막내딸이요. 오늘 새벽 로서기께서 운명하셨다더니 저렇게 어린 나이에 차도 타지 않고 달려서 왔네...”    “어휴, 저 아이를 어쩌지…”    간혹 가다 뒤에서 혀를 차며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의 주고받는 말들이 귀가에 들렸다.    합작사를 지나 조금 더 달리면 수남촌 학교에 도착한다. 나는 소학교 5년과 초중 3년을 수남촌학교에서 다녔다. 내가 태어난 해에 ‘문화대혁명’이 폭발하면서 아버지의 박해 장면을 목격한 할머니는 기절하여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끌려다니면서 투쟁을 받다보니 오빠와 언니들이 나를 업고 마을의 집집을 돌아다니면서 동네 아주머니들의 젖을 번갈아가며 빌어먹였단다. 내가 젖도 제대로 못 먹고 불쌍하게 자랐다고 항상 일이 바쁘셔서 자식들을 돌볼 사이가 없었던 아버지지만 그 바쁜 와중에도 유독 나에 대한 사랑만은 극진하였다.    내가 소학교에 입학하자 아버지는 쇠잔한 몸으로 쿨룩쿨룩 기침하면서 아침마다 나를 등에 업고 5리 길을 걸어 학교대문까지 데려다주군 하였다. 아버지는 독서를 무척이나 좋아하였는데 나를 업고 학교에 갈 때마다 나에게 책 속의 이야기들을 진지하게 들려주었다.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들을 통해서 나는 어릴 적부터 사람은 선량하고 정직해야 하며 남을 많이 도와주는 훌륭한 사람이 되여야 한다는 인생도리를 깨닫게 되였다. 이렇게 나는 아버지의 따뜻한 등에 업혀서 아버지의 심장박동소리와 웅글진 목소리를 들으며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동년을 보냈다. 인젠 다시는 아버지가 해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또다시 울음이 왈칵 터졌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애틋한 마음으로 수남촌학교를 지나 아버지가 나를 업고 다니던 토성리촌으로 가는 길에 올라섰다.    매번 이 길을 걸을 때마다 아버지사랑을 떠올리며 꼭 마치 아버지 등에 업혀서 가는 것 같은 정다운 기분을 느끼며 걷던 길이였는데 오늘 따라 발밑에서 밟히는 모래소리가 나의 가슴을 아프게 허볐다. 원래 이 길은 평탄한 모래길이 아니라 길 량옆에 버드나무들이 빼곡히 늘어선 오솔길이였다. 산사태로 골물이 터지는 날이면 모래와 돌들로 뒤덮여 오솔길마저 없어질 때도 많았다. 아버지는 촌민들이 오르내리는 교통 편리를 위하여 6,000메터나 되는 제방을 건설하고 또 제방을 따라 넓은 모래 길을 닦았을 뿐만 아니라 키 넘는 버드나무숲을 제거하고 기름진 한전을 개간하였다.    나는 아버지가 어깨에 지게를 메고 촌민들을 이끌고 일궈낸 기름진 옥토를 바라보며 오직 촌민들을 위하여 살아온 아버지 생각에 또다시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울었다.    숨이 턱에 닿아 목에서 겨불내가 확확 났지만 아버지가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아서 다시 젖 먹던 힘을 다하여 계속 앞으로 달렸다. 저 앞 모래길 왼쪽에 자그마한 다리가 있고 다리를 건너서 조금 올라가면 동골과 서골이라는 자그마한 산이 두개 있다. 서골의 소나무 숲이 울창한 목도고개를 넘으면 산 너머 송림촌마을에 이르게 된다. 아버지는 일찍 이 산을 넘나들며 향정부로 회의를 다녔다. 회의를 끝내고 돌아올 때면 보통 날이 어슴푸레 어두워져서 산속에서 갖가지 짐승이 출몰하군 했다. 어떤 날에는 범까지 만날 때도 있어서 여간 위험한 것이 아니였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남겨준 렵총을 갖고 다니면서 헛방으로 총소리를 내여 짐승들을 쫓으며 산을 타고 밤길을 누볐다.    회의에 갔다 온 이튿날이면 피곤도 마다하고 곧바로 회의를 소집하여 상급의 주요문건정신들을 신속하게 전달하였다. 이렇듯 열심히 공작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 불시에 생뚱같이 ‘당권패’라는 루명으로 고깔모자를 쓰고 돌림시위행진에 끌려 다니게 되었다.    고된 매질과 가혹한 형벌로 아버지는 갈비뼈가 두대나 부러지고 엄중한 폐질환을 얻고 말았다. 정정하던 할머니는 무릎을 꿇고 몽둥이 매질을 맞으며 투쟁 받는 아버지를 보시고 기절하여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고 집안팍 일을 도맡아하던 어머니도 아버지와 함께 우사에 갇혀있다 보니 장래에 의사가 꿈이였던 큰언니는 눈물을 삼키며 학교를 중퇴하고 집안의 일을 도맡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 어지러운 세월의 파도 속에 우리 가족이 당한 피해를 어찌 한입으로 다 말할 수 있으랴! 강인한 아버지는 그 긴 지난한 시간을 묵묵히 감내해야만 했다.    1977년 도문시당위원회에서 4명으로 구성된 공작조를 파견하여 2년간 아버지의 문제를 철저히 조사하여 아버지의 억울한 루명을 벗겨주었다. 학교운동장에서 큰 대회를 소집하고 평판을 받던 날 아버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저만치에 마을 어구를 지키고 있는 늙은 비술나무도 알리라! 아버지가 얼마나 당에 충성하고 얼마나 당과 인민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땀벌창, 눈물범벅이 된 나를 늙은 비술나무는 따뜻한 아버지 품처럼 맞이해주었다. 아버지는 이 비술나무 아래에서 사원대회를 소집하였고 이 비술나무 아래에서 간부들을 모아놓고 농민들의 정황을 상세히 료해하기도 하였다. 주말마다 막차 뻐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나를 이 비술나무 밑에서 손채양하면서 기다리던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또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얼어든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다시 마을로 향했다.    그렇게 장장 20리 길을 나는 달음박질쳤고 숨이 턱에 닿아서 헐떡이며 고향마을에 도착했다. 길가에서 마주친 모든 사람들은 붉게 상기된 나를 보고 기가 막혀 입을 딱 벌리며 길을 비켜주었다. 우리 집 앞에는 찌프차 두대가 서있었고 문상 온 조문객들로 웅성거렸다. 먼발치에서 어머니가 나를 알아보고 허둥지둥 맨발 바람으로 급히 달려와서 나를 와락 끌어안고 통곡하였다. 한주 사이에 몰라보게 초췌해지고 폴싹 늙어버린 어머니, 이마의 주름은 더 깊어지고 헐렁한 흰옷을 입은 가녀린 몸은 슬픔으로 중심을 잃고 휘청이였다.    어머니를 부축하며 웃방에 올라가니 그토록 강경하던 아버지는 흰 천을 덮은 채 고요히 누워있었고 옆에는 정장을 입은 몇몇 간부들이 있었다. 나는 아버지 침대머리에 조용히 앉으며 나지막하게 아버지를 불렀다. 한번, 두번… 아무리 불러도 대답은 없고 어머니의 울음소리만 처량하게 들려왔다. 그 때에야 나는 침통하게 실감했다.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아버지의 다정한 목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고 아버지의 따뜻한 잔등에 다시는 기댈 수 없고 주말마다 집으로 오는 나를 기다리는 아버지를 더는 볼 수 없다는 것을… 아버지는 저 세상에 가는 그날까지 자신의 생활은 없었다. 오직 집체와 마을 사람들 그리고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하느라 자신을 희생했다.    아버지가 떠나던 날 억장이 무너졌고 나의 하늘도 산산이 조각났다. 하지만 나는 생활이 궁핍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고중을 졸업하고 중등전문학교에 붙었고 우수졸업생으로 정부부문에 배치 받아 성심성의껏 일했다. 가끔 힘든 일에 부딪칠 때면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 어떤 난관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었다.    아버지가 내 인생에 남겨준 정신적 재부는 영원히 내가 살아가는 동안 마음의 등대가 되여 나의 삶의 길을 고스란히 비추어주고 있다.     가끔 고향마을을 다녀올 때면 더우기 여름철 벼꽃향기가 그윽한 수전을 바라볼 때마다 아버지가 사무치게 그리워난다. 마을의 척박한 땅을 억척같이 일궈 옥토로 바꾼 순박한 농사꾼 아버지, 어쩌면 아버지가 벼슬이 높아 권세를 내세우며 거드름을 피웠다면 오늘 이처럼 애틋하게 기억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22    <퇴직후의 당비를 바치면서> 댓글:  조회:146  추천:0  2022-11-08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는 우리 민족 녀성들이 민족문화와 전통을 전승하고 꿈과 사랑을 나누는 꿈터로서 전체 회원들은 자아발전을 도모하고저 언제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면서 멋진 인생을 수놓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건당 101주년을 맞으며 연변대학 화학학부를 졸업하고 재직기간 30여편의 기술론문을 관련 간행물에 발표하여 수차 국가급, 성, 주, 시급 영예를 따냈으며 일찍 1998년에는 과학기술일군으로 《중국조선족인물록》에 수록되였던 최정옥회원님의 글을 올립니다.    퇴직후의 당비를 바치면서 최정옥    새해에 접어들자마자 나는 추위를 무릅쓰고 시내 동남쪽에 위치해 있는 개발구 정부청사로 가는 뻐스에 몸을 실었다. 차창밖을 내다보면서 나는 깊은 사색에 잠겼다. 스무살 꽃나이에 당기 앞에서 정중하게 입당선서를 하던 순간부터 마음속에‘당원'이라는 두글자를 아로새겨 그 이름에 손색이 없도록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면서 살아온 나날들이 어느덧 추억이 되여 그 흔적들이 점점 옅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당비를 바치는 일은 항상 념두에 두고 있었다.        출근할 때는 바로바로 바칠 수 있었기에 별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였지만 퇴직한 뒤로 혹시라도 빠뜨리거나 늦춰질가봐 당비를 바치는 일을 력서에 꼭꼭 표기해 두었다. 퇴직을 하고 나서도 뭔가 남은 아쉬움을 달래려고 나는 개발구에 있는 한 과일즙회사에서 출근하게 되였다. 민영기업에서 당지부를 설립하기 위해 나의 조직관계도 이쪽으로 옮겨오게 되였다. 그렇게 나는 15년동안 개발구에 있는 정부 청사를 찾아가 당비를 납부하군 했다.    돈을 바치는 일에 뭘 그렇게 적극적이냐며 시큰둥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나는 당비도 제때에 바치지 않으면서 어떻게 당원이라고 자부할 수 있느냐며 따끔하게 충고하군 했다.    어린시절 책과 영화를 통해 혁명영웅들과 로공산당원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나도 이제 어른이 되면 꼭 입당을 해야겠다는 신념을 굳히게 되였다.인민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중국공산당의 취지를 안 후로부터‘오보호’거나 렬군속집에 가서 물을 길어주고 땔나무를 마련해 주었는가 하면 밥도 지어주군 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 일찍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였고 학교에서 단지부서기직을 맡아 내꿈을 펼칠 수 있는 밑거름을 마련했다. 얼마 후 나는 당조직에 입당신청서를 바쳤다. 입당을 지원하는 젊은이들이 하도 많아 마음을 죄이는 날들이 길어질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직에서 나의 입당을 비준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였다. 꼭 마치 온 세상을 독차지한 기분이였다. 당기 앞에서 선서를 하며 명실상부한 당원이 되기에 노력하겠다고 다짐을 했다. 입당을 하고 나서 나는 선후로 대대단총지서기, 민병련부련장, 당지부 선전위원 등 직무를 력임하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 하루, 모교 중학교교장선생님이 학교에 와서 교원을 해볼 생각이 없냐는 제의를 해왔다. 내가 대대당지부에서 선전워원 사업을 하고 있던 무렵이였다. 큰 유혹이였음에도 내가 선택한 당사업을 위해 마음을 접기로 했다.    1976년에는 로농병학원으로 추천받을 기회가 있었는데 대대심사에서 통과되고 나서 “이렇게 다 떠나면 농촌의 당사업은 누가 앞으로 밀고 나가겠소?”라는 지부서기의 말에 정신을 번쩍 차리고 마음을 접게 되였다. 다행이 그 이듬해에 대학입시가 회복되여 응시했는데 합격되였다. 이번에는 지부서기도 적극 밀어준 덕분에 행운스럽게 대학꿈을 이루게 되였다.    요즘은 외지로 나가는 일이 잦다보니 당비를 제때에 바치지 못하는 일들이 종종 있지만 고향에 돌아오기 바쁘게 당비를 바치러 달려간다. 오눌도 이렇게 맵짠 추위를 무릅쓰고 뻐스에 몸을 실은 나의 마음 속에서는 벌써부터 봄바람이 불고 있다.    2021년 《로년세계》 제4기에서
21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는 길 아니여라> 댓글:  조회:147  추천:0  2022-11-08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는 우리 민족 녀성들이 민족문화와 전통을 전승하고 꿈과 사랑을 나누는 꿈터로서 전체 회원들은 자아발전을 도모하고저 언제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면서 멋진 인생을 수놓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등 중한시문학축제, 시랑송대회, 랑송회, 예지아컵 시랑송경연 등 다양한 시랑송대회를 수차례 기획하고 조직하면서 우리말 시사랑과 보급에 혼신을 다 바치고 계시는 연변시랑송협회 송미자회장님의 2021년 '애심녀성컵' 제7회 생활수기 은상수상작품을 올립니다.   아이들에게 꿈을     아이들에게 언어문화의 꿈을 심어주겠다는 일념으로 뛰여온 세월이 아니였던가? “요즘 애들은 우리때와 완전 달라요. 한어를 얼마나 잘 하는지 한족애들과 구분이 안돼요.”    나는 진작부터 언어학원을 꾸리고 싶었던 차에 우리말 동화구연 교실을 차리는 것으로 첫 단추를 끼웠다. 홍보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집집이 찾아다니며 우리말로 이야기를 해주고 동화구연을 배워주기도 하였다. 아이뿐만 아니라 엄마도 같이 수업에 참가하여 덤으로 배우라고 권고하였다. 본딴말들로 재치 있게 표현한 재미 있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이들과 학부모들은 우리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체험할 수 있었다. 리듬과 률동에 맞춰 우리말 동시도 읊어주었더니 재미 있다면서 아이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어쩌면 우리말의 감화력에 어깨가 으쓱해나는 순간이였다. ‘아’ 발음부터 다시 배워주고 교정해주어야 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였다. 혀를 펴고 “아”하는 소리로부터 혀를 령활하게 굴리는 훈련을 많이 시켰다. 권설음으로 “개구리, 오리, 꾀꼬리”하던 애들이 점차 혀를 펴고 자연스럽고 류창한 우리말발음으로 바꾸어갔다. 생각밖으로 입술발음을 못하는 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이 오면 우선 발음부터 점검하였다.  언어학에 대한 새로운 공부와 아이들의 개성에 맞는 끝없는 관찰과 탐구가 나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호흡으로 더듬증을 교정하여 성공하였고 몇초도 진정 못하던 자페증아이도 동화구연을 할라치면 눈빛이 변하면서 몇분간씩 나와 눈을 맞추어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률동동시 읊기와 동화구연은 아이들에게 정서와 구사력에 순발력을 키워주는 아주 매력적인 말놀이였다. 2014년말, 송구영신을 계기로 ‘조선말사랑’ 장끼자랑을 펼치였는데 수십명의 아이들이 호기심으로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이며 학부모들과 함께 모여왔다. 무대에서 나비처럼 팔랑팔랑 뛰여다니며 표현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학부모들도 무척 흐뭇해하며 이런 무대가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급기야 학생들의 방명록을 뒤져보니 그 학부모는 다름아닌 룡하수력수리발전유한회사의 리금숙 경리였다. 그러던 어느날 리경리가 내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러면서 3천원을 더 내놓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후원하겠다고까 약속했다. 실로 나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2019년에 연변독서절 계렬행사중의 하나로 들어가면서 ‘룡하컵’은 길림성독서절 브랜드행사로 떠오르게 되였다. 협회가 설립되여서부터 우리 아이들이 펼친 우리말 장끼무대는 14차례나 된다. 이는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기업과 정부와 출판사와 민간단체가 함께 손잡고 연출하는 우리 언어의 플랫폼이 있기에 멋진 언어문화의 환경을 만들어 갈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이 무대가 너무나 소중합니다. 이런 문화행사가 잦은 연변에서 살고 싶어요.” 우리말 랑독, 랑송, 이야기 무대에 오르고 싶어 몇번씩 차를 갈아타면서까지 연길로 찾아오는 산재지구 어린이들의 한결같은 소망이였다.  첫 경연 때 연길, 룡정, 도문에서 온 60여명 학생이 전부였는데 이제는 전국 각지 수백명 학생들이 호응하는 규모로 성장하였다. 우리 민족 학교와 가정들에서 중시하는 데다가 각종 위문공연이며 장끼자랑 무대에서 우리말 구연과 시랑송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면서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일여덟살 되는 아이들이 윤동주의 동시를 비롯한 여러가지 동시 10여수를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노래하듯 읊자 장내에서는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정말 보람 있네요. 사명감으로 하는 사업을 어찌 돈으로 가치를 매기겠습니까?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언어문화의 꿈을 심어주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심금을 울리는 리금숙경리의 말에 나는 내가 선택한 일이 얼마나 뜻 깊고 보람찬 일인지를 다시 깨달았다.       시랑송의 감화력     내가 시랑송을 고집하는 까닭은 모어에 대한 사랑만이 아니였다. 내 부모에 대한 존경이고 자존감때문이였다. 우리말 아나운서로 키우고 싶었던 어머니의 념원때문이였고 외유내강의 조선족녀성으로 살아가라는 아버지의 간곡한 기대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우리말로 된 책을 밥 먹듯이 읽으며 자랐고 그만큼 우리말공부에 있어서는 천재라고 자부할 정도로 잘했고 자신감이 넘쳤다. 경비와 무대가 부족한 우리 협회는 설립해인 2013년에 김부식선생님의 도움으로 글로리카페에서 첫 랑송모임을 가졌다. 시인, 작가, 랑송애호가들이 함께 한 랑송회는 커피향처럼 감미로웠다. 참가자들마다 시와 함께 하는 새로운 문화생활이 너무 우아하고 기품이 있어 좋다고들 입을 모았다. 그때로부터 연변시랑송협회는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듬해 봄부터 나는 ‘자랑스러운 내 고향 알기’ 문학캠프를 조직하여 우리 력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한편 시랑송모임도 겸하여 운영하였다. “그때의 그 매력적인 랑송을 잊을수 없습니다. 보는 순간, 그토록 랑송을 좋아하시던 조선어문선생인 저의 아버지를 다시 떠올렸고 나도 같이 하고 싶다는 충동을 받았죠. 그래서 쭉 해왔는데 지금도 랑송을 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내 인생에서 참 잘한 일이죠. ” 그는 늘 “저에게 시랑송은 주업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시랑송에서 받는 에너지가 제 삶의 활력소로 되여줍니다.”라고 하였다. 교단에서 수십년간 수많은 문학인들과 랑송인들을 양성해낸 김동식선생님, 86세의 고령에도 시를 암송하고 젊은이들과 겨루어 금상까지 수상한 김형자선생님, 그들은 조상들의 얼이 스민 언어를 아름다운 예술적 형식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주고 있다. 그들의 경력과 랑송사랑은 나에게 시랑송문화가 얼마나 절실하고 필요했는지를 다시 한번 깨우쳐주고있다. 시랑송문화가 전국 각지로 확산되기 시작한 전환점은 2016년 연태에서 있은 전국애심녀성포럼 워크숍에서였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연변녀성발전촉진회 회원들의 시랑송을 준비해가지고 참가하였다. 3일간의 워크숍을 통해 나는 아이가 어른이 된 기분이였다.    우리가 준비한 합송 〈혼의 노래〉가 장내에 울려퍼질 때 몇백명 녀성들이 같이 열광하던 감동의 순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고향을 등지고 타향에서 살아가는 녀성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시랑송이였다. 한번의 리허설도 없이 무대에 나선 리령 예술위원장의 무용이 퍼포먼스로 멋진 하모니를 이루면서 랑송예술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나도 굽은 나무 되리라 나도 못난 나무 되리라 지지리 못난 나무가 되여 고향의 선산 푸르게 하리라   당시 우리 합송이 주최측으로부터 특별상을 받으면서 시랑송문화의 가능성을 내다보게 되였다. 그때 받은 에너지가 나에게 멈출수 없는 막강한 힘으로 작용하였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이를 계기로 나는 시랑송으로 많은 이들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광동성조선족녀성협회 전명숙회장은 연변시랑송협회에 가입하여 우리가 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면서 경제적인 후원도 아끼지 않았다.   전경숙의장은 솔선수범하여 선수로 나섰으며 “시랑송문화도 우리 언어문화의 정수”라면서 격변기에 처한 우리 언어문화를 살리기에 힘을 합치자고 호소하였다. 2020년, 예상치 못한 ‘코로나19’ 사태로 온 세상이 마비된듯한 지루한 시간들이 지속되였다. 그 지루한 시간들속에 지친 령혼들을 보듬어 준것이 시랑송문화가 아니였을가고 자부한다. 시인들은 힘들고 지친 령혼들을 다독일 수 있는 시를 끊임없이 창작해 보내왔고 전국 각지에 있는 시랑송애호가들은 앞 다투어 그 시들을 읊어나갔다. 협회의 홍승현부장이 부지런히 음악을 제작해주었기에 모든 작업은 일사천리로 거침없이 이어갈 수 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 낯선 삶의 방식을 터득하면서 배려와 격려와 관심의 씨앗을 가슴마다에 뿌려준 2020년의 봄은 비록 불안하고 우울하였지만 시랑송이 있어 그나마 견뎌낼수 있었다고 많은 이들이 인정해준다. 오프라인 랑송강좌도 온라인 모드로 바꿨다. 처음의 음성강의로는 효과가 그닥잖아 영상강의로 바꾸었더니 전국 각지로부터 많은 젊은 랑송애호가들이 몰려왔다. 몇번의 강의를 듣고 나서 다음 시간이 기다려진다는 메시지를 받을 때마다 나는 기뻤다. “시랑송강의가 있는 화요일이 무척 기다려지네요. 갈증에 목 말라있던 제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기분입니다.”    슬프게 이 시를 읊조렸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어찌 혼자서 걸어온 길이라 하랴? 얼마나 많은 나와 같은 이들이 갈망하면서 함께 하여왔던가? 또 얼마나 많은, 우리말을 사랑하는 사회 각계 인사들이 응원해주고 힘을 보태여주고 있는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길이 아니였음을 이제야 진정 알았다. 내물이 모여 강이 되고 강이 모여 바다가 되듯이 하나하나의 작은 실천이 모이면 우리는 외유내강의 자질을 갖춘 막강한 군체로 거듭 날 것이다. 그날을 기대해본다. 《연변녀성》 2021년 10월호에서
20    <내 가슴에 새겨진 모성애> 댓글:  조회:127  추천:0  2022-11-08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는 우리 민족 녀성들이 민족문화와 전통을 전승하고 꿈과 사랑을 나누는 꿈터로서 전체 회원들은 자아발전을 도모하고저 언제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면서 멋진 인생을 수놓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문학창작과 랑송가로 아름다운 황혼을 멋지게 수놓아가고 있는 교육부 최영숙 회원님의 전국 애심녀성수기응모 은상 수상작품을 올립니다. 내 가슴에 새겨진 모성애 최영숙    얼마 전 “엄마가 많이 심해졌소. 이젠 며칠 버틸 것 같지 못하오.” 라는 막내 녀동생의 전화를 받고 나는 연길시광영원 특별간호실에 급히 달려갔다. 내가 도착했을 때 계모는 두눈을 지그시 감고 얼굴을 찡그린 채 침대에 누워계셨다.  “엄마, 엄마…” 내가 다급하게 몇번을 불러서야 겨우 눈을 뜬 계모는 뭔가 어렴풋이 보이는지 눈을 껌뻑이며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큰딸이 바쁠 텐데 왔구만…” 안깐힘을 다해 웃몸을 약간 일으키더니 온 얼굴에 웃음을 띠고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계모, 그러더니 이내 내 두손을 꼭 잡아서 당신 가슴에 갖다 대고 놓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이야기보따리를 쉬임없이 풀어놓으련만 두눈을 꼭 감은 채 가쁜 숨만 몰아쉰다. 세살 때 전염병으로 어머니를 여읜 계모는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다가 외할머니마저 세상을 뜨자 고모들 집을 떠다니며 살았다고 한다. 열다섯살에 고모의 중매로 시집을 가서 아이 둘을 낳았는데 그 두 아이가 모두 요절하고 말았다. 전쟁에 참가했던 남편마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계모는 결국 자식 둘이 딸린 우리 아버지한테 재가하여 자식 셋을 낳고 시부모를 모시며 평생 동안 숱한 고생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처럼 큰 불행을 겪고도 계모는 완강한 의력과 불요불굴의 강인한 집념으로 남자들과 어깨나란히 일하면서 석현진, 도문시, 나아가 우리 주 모범으로 당선되는 영광을 누렸으며 주인민대표대회 대표까지 되였다. 어디 그 뿐이랴. '문화대혁명' 후기에 부녀로서 농촌창고보관원일을 너무 잘하여 그 사적이 《연변일보》에 실리고 참관단이 우리 마을을 여러번 방문하기도 했다.   자세히 돌이켜보니 비록 평생을 농촌에 뿌리 박고 살았지만 계모가 걸어온 파란만장한 인생길은 허구에 의해 씌여진 그 어느 드라마보다 더 굴곡적이고 감동적이였던 것 같다. 두눈을 꼭 감은 채 꼼짝 않고 누워계시는 계모의 얼굴을 바라보노라니 이제 오래지 않으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나며 저도 모르게 나와 계모 사이에 있었던 슬프고 기뻤던 일들이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1964년 겨울방학의 어느 날, 나는 오빠를 따라 처음으로 연길역에서 기차를 타고 도문시 수남대대 토성리에 있는 외가집으로 놀러 가게 되였다. 바로 그 때 나는 한집에서 살고 있는 아름답고 능력 있는 공산당원 엄마가 내 친엄마가 아니라 계모라는 엄청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였다. 그 때로부터 나의 눈치보기 생활이 시작되였다. 하지만 나의 걱정과 달리 계모는 전처 자식인 오빠와 나를 자기가 낳은 세 자식 못지 않게 지극정성으로 대해주었다. 그런데도 나는 내내 마음의 탕개를 늦출 수가 없었고 의심과 경계로 늘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결국 내가 열세살이 되던 해에 큰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아래마을에 살던 옥주라는 친구가 부모 따라 연길로 가게 되자 우리 몇몇 친구들은 연길에 가서 사진을 찍어 영원한 기념으로 남기자고 약속했다. 다섯살 때 할머니와 오빠와 함께 사진을 찍은 뒤로 쭉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없었던 터라 연길에 가서 사진을 찍는다니 너무나 신난 나머지 친구들과 약속한 날부터 마음이 너무 설레여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정작 연길 가서 사진을 찍겠다는 말을 꺼내려니 망설여졌다. 서발장대 휘둘러도 거칠 게 하나 없는 형편에 아홉식구가 배를 곯지 않는 것도 대단한 일인데 어찌 감히 그런 사치를 누리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닷새 동안 끙끙 속을 앓으면서 이궁리저궁리 해보았지만 합당한 리유를 찾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더 말하지 않으면 안될 긴박한 시점에 이르러서야 겨우 말을 빙빙 돌려 연길에 가도 되겠는가고 계모한테 슬쩍 여쭈었는데 글쎄 단칼에 거절을 당할 줄이야. 어정쩡해 서있는 나를 보고 아버지가 왜 갑자기 연길에 가려느냐고 물었다. 내가 실토정했더니 아버지는 생각 밖으로 넉냥짜리 길림성 량표 한장에 돈 50전까지 쥐여주면서 흔쾌히 허락하였다. 그런데 옆에서 지켜보던 계모가 “앞으로도 그냥 그렇게 챙겨줍소.”라고 말하는 바람에 “내가 저 애한테 돈 한번 못 주냐?” 하고 아버지가 버럭 화를 내며 아침밥상을 뒤엎었고 삽시에 집안 분위기가 팽팽해지면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다른 애들은 모두 연길로 떠났지만 나만 홀로 남아 온 오전 웃방에서 웃옷을 뒤집어쓰고 왕왕 소리내여 슬프게 울었다. 할머니가 내 잔등을 어루쓸며 울지 말라고 다독였지만 서러운 마음은 쉽사리 가셔지지 않았다. ‘계모는 어디까지나 계모구나. 절대로 전처 자식을 친자식처럼 사랑할 수 없구나.’ 하는 고까운 생각이 내 머리속을 꽉 메웠다. 사실 그 날 계모도 일하러 나가지 않고 정주간에 조용히 누워 흐느꼈다는 사실을 썩 후에야 알았다. 그 이튿날부터 나는 집에서 입을 꼭 다물고 벙어리처럼 지냈다. 계모가 예전보다 더 다정하게 불러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묻는 말에만 마지못해 대꾸했다. 집에 들어가는 것조차 싫어서 밖에서 숙제를 하고 책을 보면서 시간을 질질 끌기 일쑤였다. 친구들과 별의별 장난을 다하면서 신나게 놀기만 하고 늘 할머니를 도와 하던 일들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말없이 지켜보던 계모가 나를 불렀다. “영숙아, 그 날 일은 미안하다. 그런데 너도 잘 알잖니, 우리 집 형편이 너희들 공책 사주기에도 변변치 않다는 걸… 그런데 종래로 애들한테 관심 없던 너네 아버지가 사진 찍으러 가겠다는 너한테 오십전이란 큰돈을 주니 나도 모르게 말이 이상하게 튀여나가드라…” “내가… 얼마나… 그 사진 찍고 싶었는데…”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또다시 내 볼을 적셨고 꺽꺽거리며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니 맘 모르는 게 아니야. 그 날 그토록 서럽게 우는 널 보면서 조금만 참았던 걸 하고 많이 후회했어. 그런데 영숙아, 하나만 알아다오. 절대로 내가 후에미여서, 네가 미워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그리고 앞으로 내가 잘할 테니 지나간 일은 잊어주렴. 할머니도 저렇게 고생을 하는데 큰딸인 네가 좀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이야.” 그 뒤로 계모는 과연 약속 대로 매사에 신중을 기울였다. 몇년이 지나 나도 고중을 졸업하고 운 좋게 대대에서 꾸린 소학교에 교원으로 초빙받아 교단에 올라서게 되였다. 1976년 늦가을, 계모는 친척방문차 조선에 있는 큰어머니 댁에 다녀오게 되였다. 돌아오면서 들고 온 물건 속에는 마른명태와 낙지가 잔뜩 들어있은외 데트론이라는 검정색 바지감이 끼워있었다. 까만 데트론천은 ‘디췌량’천보다 퍽 무게 있고 고급스러워보이는 옷감이였다. 그런데 그런 고급천을 계모가 나에게 건네주면서 학교 옆 양복점에 가서 바지를 해입으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너무 뜻밖이여서 의아한 눈길로 계모를 쳐다보고만 있었더니 이젠 선생님이 되여 매일 교단에 올라야 하는데 지금 입고 있는 바지가 볼품없다면서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해있는 나한테 마구 밀어주었다. 내가 데트론바지를 입고 나서자 보는 친구들마다 “너 정말 좋은 바지 입었네.”, “야, 축 내리 서는 바지 입으니 정말 멋 있다!”라고 말하며 부러운 눈길을 보내주어 한동안 어깨가 으쓱해서 다녔다. 한달 후에야 나는 그 데트론천은 당시 조선에서도 흔하지 않은 고급천으로서 계모의 언니가 동생한테 큰맘 먹고 준 것이라는 사실을 귀동냥으로 얻어듣게 되였다. 사진사건으로 계모에 대해 서운했던 마음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하던 무렵 바지감까지 선물로 받고 나니 고마움이 움터올랐다. 사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작가가 되려는 소중한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문학이 무엇인지 잘 몰랐음에도 우리 할머니 이야기를 글로 써서 세상에 자랑하고 싶었다. 아홉살에 좁쌀 한 마대에 팔려갔다가 열여섯살에는 본댁이 아이 못 낳는 집에 첩으로 팔려갔던 우리 할머니… 할머니를 씨받이로 사갔던 중년부부가 전염병으로 돌아가고 23살 꽃나이에 생과부가 된 할머니는 우리 할아버지한테 재가해서 아버지를 비롯한 전처 자식 넷을 친자식처럼 키웠으니 그 기구한 운명을 담은 이야기를 꼭 써내고 싶었다. 나는 내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엄마 젖도 못 먹고 자라온 비운을 가졌더라도 누구보다 멋지게 살고 싶었고 내가 살아온 인생을 글로 남기고 싶었다. 그러자면 꼭 작가가 되여야 하고 작가가 되려면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에 가서 전문지식을 섭렵해야 한다는 생각을 마음속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학입시가 회복되지 않았던 때라 대학에 가려면 추천을 받아야 하고 추천을 받자면 또 무조건 농촌에서 표현이 좋아야 했을 뿐더러 련애도 절대 해서는 안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 무렵에 마을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사실은 아래마을에 하향을 왔던 지식청년이 어느 하루 길을 가는 나를 가로막고 쪽지 하나를 건네주었는데 펼쳐보니 고백편지였던 터라 갈기갈기 찢어 흐르는 도랑물에 던져버린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청년이 글쎄 우리 친척집에 찾아가서 제발 둘 사이를 성사시켜달라고 청을 드는 바람에 소문이 이상하게 나버렸다. 후에 사실의 자초지종을 알고 나서 나는 분하기 짝이 없었고 속까지 바질바질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남들이 알면 대학에 추천받는 데 부정적 영향을 받을 것이고 부모님 귀에 소문이 들어가면 죽게 혼날 것은 뻔한 일이였다. 그래서 내가 사실의 전후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하루, 마침 아래마을에서 영화를 돌리게 되자 다른 식구들은 영화 보러 나갔다. 모두들 자리 비운 틈을 타서 나는 아버지, 어머니를 앉혀놓고 겨우 입을 열었다. “아버지, 어머니, 나는 꼭 대학에 가야 하기에 농촌에서 절대 련애 같은 걸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아래마을의 한 지식청년이 자꾸 날 따라다닙니다. 어떤 소문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들에 앉아있던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며 비자루를 거머쥐더니 나한테 달려들었다. “네 년이 어떻게 설치구 다녔기에 벌써 남자가 따라다녀?” 비자루가 내 어깨에 떨어지려는 순간 눈치 빠른 계모가 얼른 막아나섰다. “이거 봅소, 이재 들으니 야 잘못한 게 하나두 없구만 왜 이럼두?” “자고로 녀자들이 처신 잘하면 남자들이 얼씬도 못하우.” “이재 같이 들었재쿠 뭠두. 쟤는 련애할 생각도 없는데 그 남자가 일방적으로 따라다녔다 하잼두?” 아버지는 더 이상 말을 않고 혼자 분을 삭이느라 씩씩거리고 있었다. “자식이 부모를 믿고 말하면 잘 듣고 일깨우든지 혼내든지 해야지 세마디 안짝에 비깡대부터 쥐면 어쩜두?” “니 말 알아들었으니까 빨리 영화구경이나 가자.” 계모는 무서워 부들부들 떠는 나를 떠밀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그제서야 나는 숨이 활 나왔다. 계모 덕분에 아버지한테 얻어터질 번한 곤경에서 벗어났다. 다시 생각해봐도 무턱대고 화부터 내는 친아버지보다 사리가 밝고 아량 깊은 계모가 훨씬 좋고 고마웠다. 이윽고 어둑스레한 밤길을 걸으며 계모가 물었다. “영숙아, 너 방금 말한 대로 꼭 대학에 갈 거지?” “네.” “그래, 세상에 노력해서 안되는 일이 없네라. 꼭 대학에 가거라. 내 너를 믿는다.” 어쩐지 계모의 “믿는다”는 그 말 한마디에 가슴이 찡해나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1977년,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면서 우리 젊은이들에게 희망의 문이 활짝 열렸다. 나는 운이 좋게도 사범전문대학에 붙었다. 비록 내가 그렇게 원하던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는 아니였지만 좋아하는 교원사업을 그냥 할 수 있다는 리유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거기다 사범학교에 가서 한학급의 총명하고 착한 남자를 만나 서로 사랑에 빠지면서 결혼까지 약속하게 되였다. 결혼식을 한달 앞둔 어느 날, 칼바람이 쌩쌩 불어치는 엄동설한에 약혼자가 장춘으로 출장 가게 되여 나는 배웅하러 함께 역전으로 나갔다. 4선 뻐스에서 내리니 눈보라가 어찌나 세게 몰아치는지 코끝이 단통 얼어들고 눈도 바로 뜰 수 없었다. ‘이럴 때 마스크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약혼자와 함께 손 잡고 대합실을 향해 걸어가는데 멀리에서 검은색 솜옷을 입고 머리에 수건을 빙빙 두른 키가 자그마한 녀인이 발을 동동 구르며 오가는 행인들을 가로막고 서서 뭐라 중얼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왼손에 새하얀 마스크를 가득 들고 오른손으로 마스크를 가리키며 무엇이라 설명중인 것 같았다. 추위 속에 땔감을 보낸다는 게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구나 하고 감탄하며 약혼자 손을 잡아끌고 앞으로 바싹 다가가 물었다. “커우쪼 이거 둬챈?(마스크 하나에 얼마예요?)” 그 당시 연길에서 물건 파는 사람 대부분이 한족들이였고 또 우리 연변에 사는 사람들은 한족인지 조선족인지 분간이 안되면 먼저 한어로 묻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났는데도 대답이 없었다. “마스크 하나에 얼맘두?” 이번에는 약혼자가 큰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마스크를 팔던 녀인이 홱 돌아서더니 반대방향으로 휑하니 걸어갔다. 녀인의 어이없는 행동에 화가 난 나는 따라가서 마스크를 와락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마스크들이 와르르 땅에 떨어졌다. “왜 마스크를 사겠다는데 달아남두?” 하지만 뒤늦게야 녀인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나는 그만 입을 딱 벌리고 그 자리에 못 박힌듯 굳어졌다가 땅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동무 왜 이러우?” 뒤따라온 약혼자가 나를 잽싸게 안아 일으키면서 마스크를 팔던 녀인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더니 “아이, 어머이 아닙니까?” 하고 소리쳤다. 나는 땅에 떨어진 마스크를 하나 주어 놀란 기색이 력력한 약혼자에게 넘겨주면서 말했다. “동무, 기차시간이 다되였는데 빨리 가세요.” 약혼자가 떠나고 나는 땅에 떨어진 마스크들을 몽땅 주어들고 계모의 팔을 붙잡고 역전 가까이에 있는 친척집에 들어갔다. 추워서 부들부들 떠는 계모를 얼른 가마목에 앉혀놓고 “엄마, 이 추운 겨울에 엄마가 왜 마스크 장사를 함두?” 하고 심문하듯 따졌다. “니 엄마가 니 결혼식 례단준비에 보태겠다고 이 엄동설한에 이렇게 마스크를 판다. 벌써 한 보름 됐다.” 입 빠른 친척집 큰어머니가 계모 대신 대답했다. “엄마, 결혼식 때문에 아무 걱정 말라구 여러번 말했잼두.” “야, 아무리 그래두 그렇지. 니 말처럼 아무 것도 안해가지고 가면 연길 시내 시집에서 당연히 널 업신여길 게 아니겠니. 그리고 우리 가문을 얼마나 비웃겠니. 어른들도 계시는 집안이란 게 법이 없이 빈손으로 시집 보냈다고 말이다.” “엄마, 지금 어디 옛날처럼 법을 따질 땜두. 몇년 전에 사촌언니는 호미 두개 사들고 시집 가도 너무 잘살고 있고 고모사촌오빠는 대장함에 모주석책을 넣고 장가 가도 지금 다 잘살잼두? 아버지, 엄마는 농촌에서 나를 대학에 보낸 것만 해두 대단하니까 이렇게 준비하느라 고생하지 맙소. 내 정말 아무 것도 안해가지고 시집 가겠으꾸마.” “그럼 니 평생 기 못 편다.” “엄마, 내 기 죽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니까 쓸데없는 근심걱정하지 말고 래일 당장 집에 갑소. 그런데 마스크를 판다는 사람이 왜 마스크를 끼지 않고 이렇게 얼굴을 빨갛게 얼굼두?” “마스크를 끼고 말하면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 못해 답답하더라. 그래서 하나라도 더 팔려고…” 나는 난생처음으로 계모를 와락 그러안았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줄줄 흘렀다. ‘내가 뭐라고? 내가 엄마한테 뭘 잘했다고…’ 부처님이 아닌 이상 계모도 실수할 때 있고 잘못할 때 있는 것이 정상인데 그걸 깨닫지 못하고 거의 십년 동안이나 계모의 진심을 외면하고 마음의 문을 꼭 닫은 채 살아온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해보였다. 나의 성화를 못이기겠는지 계모는 가져온 마스크만 다 팔면 이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나와 약속했다. 출장 갔던 약혼자가 돌아오자 나는 조용히 말을 꺼냈다. “동무, 미안하지만 결혼식 때 아무 례단도 준비하지 못할 거 같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지요?” “당연히 괜찮지. 정말 잘 생각했소. 요 며칠 마스크를 팔던 장모님 모습이 내내 머리속에서 맴돌면서 잊혀지지 않았소. 계모라서 심리부담이 더 큰가 보오. 우리 부모님한테는 내가 잘 말해놓을게.” 내가 그렇게 만류했는데도 계모는 기어이 약간의 례단을 갖추어놓았다. 결혼식날, 큰절을 올리고 떠나는 나의 두손을 붙잡고 계모는 눈물이 글썽해 말씀하였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나쁜 기억은 본가집에 싹 다 묻어두고 오늘부터 시댁에서 새 출발 하거라. 절대로 기 죽지 말고 떳떳하게 잘살거라.” 결혼하고 자식 둘 낳아 키우면서 매번 계모의 도움으로 인생 고비를 무난히 넘길 수 있었다.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계모는 년로하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계속 모시고 살았고 시집 간 내 걱정도 떨쳐버리지 못했다. 내가 난산으로 둘째를 낳고 모진 고생을 할 때에도 계모는 그 바쁜 벼씨 붓는 일을 제쳐놓고 달려와 일주일 동안 밤낮으로 시중 들었고 집에 돌아가서는 온 집 식구들의 반대도 무릅쓰고 할아버지 시중을 들고 계시는 할머니를 우리 집에 보내 애기를 돌보게 했다. 비록 계모는 이 세상 무수한 엄마들처럼 자식을 품에 꼭 끌어안고 다독이며 속삭일 줄은 몰랐어도 자신의 실제 행동으로 굳세게 모든 역경을 헤쳐나가며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함을 보여주었다. 어릴 때부터 부지런하고 뭐든지 척척 해내는 계모의 모습을 보면서 커왔던지라 나도 언제 어디서나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뚝심으로 기 죽지 않고 당당하고 지혜롭게 내 삶에 도전하면서 살아올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모성애를 잃었다고 한탄하던 내가 뒤늦게나마 계모의 사랑을 넘쳐나게 받으면서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모성애를 느끼게 되여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래서 그 고마운 마음을 필 끝에 담아 이렇게 글로나마 표달하고저 한다. 이 글이 생사의 고비에서 몸부림치는 계모의 생전에 이 딸이 바치는 최고의 선물이 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연변녀성》 2018년 제10호에서  
19    <아버지라는 울바자> 댓글:  조회:143  추천:0  2022-11-08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는 우리 민족 녀성들이 민족문화와 전통을 전승하고 꿈과 사랑을 나누는 꿈터로서 전체 회원들은 자아발전을 도모하고저 언제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면서 멋진 인생을 수놓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일찍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소년아동프로 전직 사회를 담당했었고 연변가무단 화극부 배우로 활약하면서 해마다 음력설야회 소품으로 대중들에게 웃음과 기쁨을 선사했던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 차세대 교육담당 최미화 부회장의 '애심녀성컵' 제6회 생활수기 응모 수상작품을 올립니다.   아버지라는 울바자      최미화   시골에 가면 집집마다 울바자를 친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높든 낮든 단단하든 허술하든 울타리를 치고 모든 것을 보호해주는 의미의 존재一울바자! 나에게도 그런 울바자 같은 존재의 아버지가 계신다. 나의 아버지는 성격이 불같고 호랑이 같이 엄한 분이다. 철 없던 사춘기시절, 귀한 자식 매로 키운다는 아버지의 깊은 뜻을 알 리 만무했던 나는 아버지한테 매를 맞고 욕을 얻어맞은 날이면 일기책에 "커서 복수할 사람 1위" 에 아버지이름을 써넣으면서 종종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군 하였다. 한번은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남장을 하기 즐기는 녀자애가 “미화야, 학교 가자!” 라고 웨치면서 불쑥 우리 집에 들어왔다.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아버지의 넉가래 같은 손이 날아와 내 귀쌈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영문도 모른 채 얼얼하게 얻어맞은 나는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계집애가 행실을 어떻게 하고 다녔기에 애비가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벌써부터 사내녀석들이 집에 들락거려?” 이미 얻어맞아 귀의 달팽이관이 파열 직전에 이른 마당에 해석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는 억울하고 분한 나머지 아예 등교를 포기하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곡소리를 내면서 꼬박 하루 동안 드러누워있었다. 엄마한테서 친구가 녀자라는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아버지는 화가 누그러들었고 ‘과실죄’를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내 머리맡에 동전을 한뼘 높이로 쌓아놓았다. 엄마의 조해와 금전의 힘으로 그번 ‘사건’은 그렇게 두리뭉실하게 ‘합의’가 되였다. 또 한번은 우리 집앞에서 휘파람 소리가 났다. 저녁에 남자애들이 녀자애네 집앞에서 휘파람을 불면 녀자애더러 나오라는 신호이고 그럴 때 나가면 십중팔구 사랑고백을 받는다는 것을 주어들은 적이 있는지라 나는 도대체 어떤 녀석이 나한테 호감이 있는지 궁금해서 살짝 들뜬 마음으로 엉덩이를 들었다. 그 순간, 바람이 휙 불더니 아버지가 어느새 번개같이 뛰여나가 집앞에 무져놓은 장작 가운데서 제일 굵은 몽둥이를 찾아들고 호통쳤다. “이마에 피도 안 마른 놈들이 어디서 얼쩡거려? 죽고 싶어?” 아버지의 불호령에 남자애는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줄행랑을 놓았다. 그 이후로 우리 동네 남학생들은 등교길에 거쳐야 할 길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을 빙 에둘러 다른 길로 학교를 다녔다.  그 사건 이후로 대머리인 아버지한테는 ‘고르바쵸브’라는 별명이 붙었다. ‘고르바쵸브’가 떴다 하면 마음 약한 남자애들은 대낮에 길거리에 나온 쥐새끼마냥 갈팡질팡했다. 그토록 엄한 아버지 밑에서 죽은듯이 얌전히 살다가 한번은 목숨을 내걸고 아버지 허락도 없이 영화구경을 간 적이 있다. 남들이 다 다니는 영화관에 왜 나만 못 가는가 하는 오기로 간덩이가 부어서 들어갔는데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도저히 집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어떻게 나오실지 무서워 집 주위에서 머뭇거리는데 인기척이 들리길래 얼른 몸을 숨겼다. 아닌 게 아니라 아버지가 황소숨을 몰아쉬며 동네를 참빗질하듯이 샅샅이 훑고 그 뒤로 엄마가 울면서 따라다녔다. 밖에서 둬시간 숨어있자니 춥고 배고픈지라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제발로 집에 들어갔다. '고르바쵸브'가 구들 한복판에 앉아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며 강술을 마시고 계셨다. “영화구경 했슴다. 죽여주쇼.” 는 털썩 무릎부터 꿇었다. 그 와중에도 머리핀을 꽂은 채로 머리를 맞으면 아플 것 같아 머리핀을 빼면서 말했다. 죄행이 엄중하여 손길이 아닌 발길이 날아올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아버지가 “살아 돌아왔으니 고맙다. 쉬거라.” 라고 온화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였다. 평소에 맞을 때에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던 내가 아버지의 그 말에 오히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데 대한 안도의 눈물이였는지 모르겠다. “불량배들한테 랍치라도 당했을가 봐 아버지가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모른다.” 내 걱정으로 아버지가 십년은 감수했을 거라는 엄마의 말에 나는 ‘이 딸이 불량배들이 랍치해갈 만큼 이쁜 얼굴이 아닌데요.’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후에 내 또래 녀자애들이 저녁에 늦게까지 놀러 다니다가 건달들한테 잡혀 수모를 당한 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그 날 아버지가 괜한 걱정을 한 것이 아니였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였다. '고르바쵸브' 아버지의 엄한 교육과 매는 귀한 아들에게도 례외는 아니였다. 손녀만 줄줄이 9명이나 되는 최씨 가문의 장남으로 태여난 남동생은 가문에서 ‘황태자’로 받들렸으나 잘못을 저지르면 여전히 아버지의 엄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동생이 사춘기시절 호기심에 몰래 담배를 피우다가 들켰다. 아버지는 대뜸 소가죽 혁띠를 빼들고 사정없이 동생을 후려쳤다. 말리고 싶었으나 괜히 그 불똥이 나한테 튈가 봐 나는 옆에서 비렬하게 구경만 하였다. 아무튼 그 때 크게 혼나서였는지 동생은 평생 담배와 인연을 끊고 산다. 엄격한 아버지 앞에서 주눅이 들 만도 할 텐데 나는 늘 아버지 말씀에 토를 달거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또박또박 말대꾸를 하여 매를 벌군 했다. 얼마나 한심했으면 자기 딸임에도 아버지가 이런 말을 했으랴. “내 장담컨대 너 그 따위 성격과 말 대답질에 손 안 올라갈 남자 없다. 너 앞으로 남편한테 매 맞고 살지 않으면 내가 손바닥에 장을 지진다.” “걱정 마세요. 부처님처럼 성격 좋고 착한 순둥이를 만나서 맞는게 아니라 내가 때리면서 살테니, 아버지 손바닥에 지진 장맛 꼭 봅시다요!” “너를 안 때리고 살만치 참을성 있는 놈 있으면, 내가 사위한테 매일 절을 하겠다.” 이것이 우리 집에서 삼시 세끼 식사 다음으로 주로 나누는 대화였다. 내가 커서 어른이 되자 아버지는 남자는 같은 남자가 봐야 안다면서 남자가 생기면 애비한테 먼저 보여줘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아버지가 반대하는 결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에 나는 둬번 만나본 남자를 아버지 앞에 데리고 가서 검사를 맞혔다. 긴장한 마음으로 평가를 기다리는데  “니 임자 맞는 거 같더라. 거절당하지 않도록 잘해보거라. 에헴.”라고 하더니 아버지만의 특유한 헛기침을 하며 뒤짐을 지고 쥉쥉 걸어갔다.  행여 아버지가 마음에 안 들어하면 어떡하나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데 잘해보라고 하니 그 날부터 나는 ‘퇴짜’를 안 맞으려고 온갖 아양과 내숭을 다  떨어 끝내는 남자친구를 내 편으로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앉은 자리에서 기름개구리를 10마리씩 거뜬히 먹어치우면서도 “어우~ 그 징그러운 기름개구리를 무서워서 여자가 어떻게 먹어요?” 라고 하며 손사래를 쳤고 주량이 웬만한 남자보다 세면서도 “술곁에만 갔다와도 취해요! 아직 술 못배워서~” 라고 하면서 한손으로 입을 조심스레 막고 고개를 다소곳이 숙였다. 그럭저럭 2년이라는 련애 끝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였는데 신랑이 어찌나 싱글벙글 입이 귀에 걸려있는지 민망하여  “넘 좋아하니 바보스러워요. 자제하세요!”라고 핀잔을 주었더니 “별소릴 다하오. 내 결혼에 주인공인 내가 좋아하지 않고 누가 좋아하겠소?” 라며 발걸음도 가볍게 씨엉씨엉 례식장으로 걸어들어갔다.  부모님에게 큰절을 올리자 덕담을 해주라고 사회자가 아버지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그런데 아버지가 “바르고 건강하게 자라줘서 고맙다. 남들보다 잘해주지 못해서…” 라고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한채 끝내 사회자한테 마이크를 도로 넘겨준다. 동네 크고작은 행사에서 사회를 도맡아할 정도로 언변이 뛰여난 아버지가 정작 이 딸의 결혼식에서 말을 잇지 못하다니! 여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내 동생이 13살에 갑자기 백혈병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고 병석에 누워 힘든 투병생활을 하게 되였다. “남산 호랑이는 총소리에 늙고 부모는 자식의 앓음소리에 늙는다.”고 아버지는 심신이 극도로 지쳐있었다.  게다가 엄청난 치료비 때문에 어마어마한 빚을 진 상태라 친정에서는 시집 가는 나에게 옷 한벌, 이불 한채, 지어 숟가락 하나 사주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나와 신랑의 월급은 손에 들어오기 바쁘게 동생의 치료비에 꼬박꼬박 보태졌고 우리의 신혼생활은 빚을 안고 시작되였다. 그런 딸자식을 바라보며 안스럽고 미안한 마음에 아버지가 어찌 편한 덕담을 할수 있었으랴?!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듯이 아들을 살리려고 딸을 고생시킨 것이 가슴 아파 결혼식을 앞두고 아버지가 매일 술을 마시고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나중에 동네 분들한테서 전해들어서야 알게 되였다. 최선을 다해 자식에게 무엇이든 최고로 잘해주고 싶은 부모의 심정을 딸자식을 둔 지금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죽고 못살아 한 결혼이라지만 입안의 혀도 깨물 때가 있다고 우리 부부도 가끔 다툴 때가 있었다.  한번은 남편과 다투고 집에서 뛰쳐나와 무작정 아버지의 ‘동정표’를 얻으려고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오서방이요, 날 괴롭혀요. 어찌된 일인가 하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내 말을 가로챘다. “시끄럽다. 안 봐도 비디오다. 니 잘못이 뻔해! 내 물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 우리 집에서는 불량품 반납이 안된다. 페품으로 처리할 테니 알아서 해라!”  헉! 알심들여 준비한 내 씨나리오가 무산되는 순간, 너무 허무했다.  울면서 하소연하여 모든 죄와 잘못을 오서방한테 덮어씌우며 눈물연기까지 곁들이면  아버지가 “귀한 내새끼 눈에서 눈물을 빼? 그놈 혼내야겠다. 앞서거라!” 하면서 맨발로 달려나와 전치 8주 나올 정도로 속시원히 두들겨 패주는걸로 극본이 탄탄하게 구성되여 있었는데, 그리고 후속작으로는 오서방이 아버지네집에 날 데리러 와서 손이야 발이야 싹싹 빌면 마지못해 따라나서는 척하며 집에 자연스레 컴백하는것으로 원만한 에필로그까지 다 짜놓았는데 대사도 채 하지 못한채 오디션에서 처참하게 탈락을 하다니… 합작을 안해주시는 아버지가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덕분에 그 이후로 내 인생사전에서 ‘가출’이라는 단어는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그런데 나중에야 이 두 남자사이에 나를 두고  엄청난  뒤거래가 이루어졌음을 알게 되였다. 아버지는 사위한테 딸을 허락하는 대신 해마다 신문, 잡지 등을 주문하는 비용을 사위가 부담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즉 아버지는 딸을 팔아 문학에 투자하였고 남편은 사람에 투자한 셈이다.       그러고보니 삶도 역시 주식과 비슷한것 같다. 신문이나 잡지 주문은 1년에 몇백원이면 해결되지만, 남편은 선견지명이 있어 ‘투자’를 제대로 한 덕분에 아버지와의 ‘불평등조약’ 체결로 리익을 톡톡히 본 것이다.  461원의 월급으로 남편한테 시집왔던 나는 비교적 강한 경쟁력과 돈벌이 재주로 나날이 주가가 치솟고 증권그라프에서 별다른 하락세 없이 줄곧 상승선을 긋고 있으며 그 보답으로 가끔 남편에게 통큰 선물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늘 우리집 판사님의 현명한 안목을 칭찬하며 “이래서 사람은 역시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사신다. 10년전, 아버지 환갑잔치에 어쩌다 가족들이 노래방에 가게 되였고 그 날 아버지의 노래도 들어보았다. 아버지의 십팔번은〈남자라는 리유로〉라는 노래였다. “누구나 웃으면서 세상을 살면서도 말 못할 사연 숨기고 살아도 나 역시 그런저런 슬픔을 간직하고 당신 앞에 멍하니 서있네  언제 한번 가슴을 열고 소리 내여, 소리 내여 울어볼 날이  남자라는 리유로 묻어두고 지낸 그 세월이 너무 길었어…” 아버지의 온갖 애환과 삶의 무게를 담은 가사를 한마디씩 소화하는 모습이 애처롭게 느껴져 나도 몰래 가슴이 짠해났다. 아버지는 한때 당뇨병합병증으로 썩어가는 발가락을 절단해야 한다는 선고를 받았다. 그래서 내가 보름간 아버지를 간병해드린 적이 있는데 말이 간병이지 아버지는 나더러 아무 것도 못하게 하였다. 상처가 흉하다고 날 손도 못 대게 하고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하였으며 신음소리 한마디 내지 않고 새벽이면 먼저 일어나 밥까지 다해놓고 나를 깨웠다. 몇달 후 아버지네 집에 들렸더니 객실 한복판에 아버지가 직접 쓴 문구가 유표하게 눈에 띄였다. “나는 날마다 모든 면에서 좋아지고 있다!” 글자마다, 마디마디 가슴을 파고들었다. 수면제 없이는 잠 못 이루던 아버지가 인생은 결국 자기와의 싸움이라며 삶의 치렬한 현장에서 자신과 사투를 벌인 가슴 아픈 흔적이였다. 젊었을 적에는 벽을 뚫고 나갈 정도로 기백이 넘치던 아버지가 년세가 들면서 차츰 연약해져가는 모습에 마음이 아릿할 때가 많다.  한번은 밖에서 점심식사를 대접하고 갈라졌는데 한참 길을 가다가 뒤돌아보니 아버지가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내 뒤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서 가라고 손짓을 했더니 연신 엄지손가락을 내보이며 발걸음을 떼시는데 다리를 심하게 절뚝거려서 마음이 한없이 서글펐다.  그제야 아버지가 왜 갈라진 후 인차 걸음을 옮기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혹시 뒤돌아서 당신의 절뚝거리는 초라한 모습을 보게 될가 봐 그게 싫었던 것이였다. 요즘은 통화할 때마다 “고맙다” 는 말과 “미안하다” 는 말만 곱씹는 아버지, 뭐가 그렇게 고맙고 미안한지 그저 안스럽기만 하다.  건강한 몸, 남부럽지 않은 말재주, 웬만한 글솜씨, 활발한 교제능력, 락천적인 성격과 긍정적인 사고방식 심지어 주량까지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아버지를 신통히 쏙 빼닮았으니 이토록 위대하고 찬란한 유산을 물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송구해하시는 아버지… 사실 ‘고르바쵸브’의 패기가 점점 사라져가게 아버지의 기를 죽이는 데는 내가 한몫을 했었다. 젊은이는 희망에 살고 늙은이는 추억에 산다고 아버지가 술상에만 마주앉으면 “옛날에 내가…” 하고 서두를 떼는데 그 때마다 나는 대뜸  “네, 알 만합니다. 개산툰 산의 범은 다 아버지가 때려잡으셨죠? 그래서 지금 산에 호랑이가 멸종되고 고양이만 남은 거 맞죠?”라고 중둥무이해버렸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 한다하는 깡패두목 아무개 말이야, 나만 보면 형님, 형님 하고 그랬다!”라고 하시면  “아버지 나이가 한참 이상이니 그래 형님이라 하지 동생이라 하겠습니까?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라고 까밝혀놓아 아버지가 괜히 게면쩍어 입을 쩝쩝 다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철없이 놀아 뒤늦은 후회가 갈마든다. 요새는 가끔 아버지한테 데이트를 신청하여 함께 등산하고는 아버지가 즐기는 회집에 들린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나 죽거든 절대 울지 말라. 세상에 너 만큼한 딸 없다. 현대 심청이야.”라고 하며 엄지를 내미신다. 사람들은 흔히 아버지의 사랑을 바다와 산에 비한다. 그만큼 깊고 무게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든든한 울바자에 비하고 싶다. 아버지의 울바자 같이 소박한 사랑은 변함없이 나를 지켜주신다.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연변녀성》 2020년 12월호에서
18    <나와 로라스케트장의 인연> 댓글:  조회:144  추천:0  2022-11-08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는 우리 민족 녀성들이 민족문화와 전통을 전승하고 꿈과 사랑을 나누는 꿈터로서 전체 회원들은 자아발전을 도모하고저 언제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면서 멋진 인생을 수놓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다양한 취미생활로 아름다운 황혼을 빛내가는 김경희녀사님의 '애심녀성컵' 제4회 생활수기 응모 수상작품 가작상 수상작품 을 올립니다.  나와 로라스케트장의 인연                                            김경희     25년 전, 개혁개방의 거세찬 물결을 타고 나는 연변에서 제일 처음으로 체육관 실내에 로라스케트장을 운영하게 되였다.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남들이 그토록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을 잠시 그만두고 모험을 강행하며 상업계에 몸을 훌쩍 던져버렸다. 어벌이 크게 안정된 직장마저 뿌리치고 로라스케트장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우연한 기회에 한국을 방문하면서부터였다. 한국에 가서 쇼핑을 빼놓으면 서운하다기에 하루는 롯데백화점을 찾게 되였고 지하에 설치된 로라스케트장에서 음악에 몸을 맡기고 신나게 로라스케트를 즐기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게 되였다.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번쩍 뜬 기분이였고 신선한 충격이였다. ‘우리 고장에서도 로라스케트장을 운영하면 어떨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치고 지났다. 그 당시만 해도 연변에는 아이들이 여가시간을 즐길 수 있는 문화공간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돈도 돈이였겠지만 무엇보다 우리 고향 아이들에게도 건전하고 추억이 될 만한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한달 동안 깊은 고민에 빠져있다가 나는 결국 로라스케트장을 오픈하기로 마음 먹었다. 물론 남편과 합의 속에 이뤄진 용단이였다. 그러나 자금이 문제였다. 단시일내에 어디 가서 그 많은 돈을 얻어온단 말인가? 며칠 밤잠을 설쳐가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나는 친척, 친구들을 불러놓고 나의 사업구상을 털어놓았다. 듣자마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뒤로 빠지는 이가 있는가 하면 오죽 고민을 많이 했을가 하며 무조건 믿는다면서 장농 속에 깊숙이 보관해두었던 돈을 싹싹 털어주는 고마운 이도 있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그렇게 모아진 돈도 적은 액수가 아니였다. 그래도 사업을 하기엔 태부족이였다. 나머지 부족한 15만원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게 되였다. 1993년도에 15만원이면 고급 아빠트 두채는 거뜬히 살 수 있는 거금이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처음 사업을 벌려본 내가 무슨 자신감으로 남들한테서 퍼그나 꾸고도 겁나는 게 없이 은행대출까지 받았는지 모르겠다. 돈이 모아지자 나는 그 숱한 현찰을 들고 미리 봐두었던 복건성 하문에 있는 한 대만기업을 찾아 떠났다. 요즘에는 휴대폰만 있으면 국내는 물론 세계 각국에 가서도 마음대로 금융거래를 가질 수 있지만 그 때는 예상도 못할 사치였다. 나는 돈을 빨간 돈가방에 넣고 두겹, 세겹으로 허리춤에 찼다. 행여 나쁜 사람들의 눈에 띄워 큰 변을 당할가 봐 일부러 십년 전 궤 밑에 보관해두었던 엄마 옷을 찾아입고 화장기도 없이 머리도 부수수한 채로 집을 나섰다. 거울을 비춰보니 몰골이 말이 아니였다. 적어도 돈이 있는 사람 같게는 안 보였다. 한푼이라도 아끼느라 침대렬차는 생각도 않고 일반석렬차에서 꼬박 사흘밤을 지새웠다. 잠자는 동안에 행여 털릴가 봐 전전긍긍하며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아닌게 아니라 군복외투 같은 걸 걸친 한 무리 도적떼들이 깊은 잠에 곯아떨어진 려객들을 골라가며 호주머니를 들추어 푼돈을 챙기느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사업일군들은 뭐 하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잠들지 않은 려객들도 더러 있었지만 자기한테 화가 떨어질가 봐 그자들이 대놓고 절도하는 데도 못 본 척하고 있었다. 범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나는 몰려오는 잠과 사투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사흘낮 사흘밤을 버텼다. 녀자 혼자서 렬차에 몸을 실은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현금까지 묵직하게 차고 있었으니 참으로 소름 끼치게 아찔하고 무시무시한 시련이였다. 그렇게 내내 마음을 졸이면서 사흘 만에 목적지인 하문에 도착했다. 로라스케트 신발 100컬레를 구입하면서 10여만원의 현찰을 지불하고 나니 볼록했던 배가 홀쪽하게 들어가고 머리카락이 곤두서게 긴장했던 마음의 탕개도 풀리였다. 당시 무슨 용기로 녀자 혼자서 겁도 없이 십여만원을 몸에 지니고 한어도 변변히 못하면서 생전 가보지도 못한 그 먼곳까지 달려갔는지 모르겠다. 물류회사를 통해 구매한 신발들을 부치자마자 곧장 돌아와서는 체육관에 여러가지 필요한 설비들을 설치하고 또 사소한 부분까지 일일이 체크하느라 밤낮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돌아쳤다. 그 때는 말 그대로 일에 대한 열정이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그런데 로라스케트신발을 부친 지 20여일이 되도록 도착하지 않았다. 지금 같으면 택배회사에 확인하면 물건이 어디 쯤에 도착했는지 바로 알 수 있으련만 당시로서는 그런 여건이 안되였다. 미리 정해놓은 개업날자(5월 28일)가 눈앞에 다가오고 청첩도 다 돌렸는데 26일까지도 제일 중요한 로라스케트신발이 감감무소식이니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갔다. 도착하는 시간을 미처 꼼꼼히 체크하지도 않고 마음만 들떠 개업날자를 미리 정해놓았으니 모든 게 내 과실이였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어데 있겠는가? 그렇게 애간장을 태우고 있는데 27일 오후에 오매에도 그리던 물건이 장춘에 도착하였다는 기별을 받게 되였다. 우리는 서로 전화를 바꿔가며 급한 사정을 루루이 얘기했다. 운송료를 곱으로 더 줄 테니 밤 사이에 꼭 도착하게 해달라고 손이야 발이야 하고 사정하였다. 딱한 사정을 헤아려 물류회사에서 밤샘작업까지 해가면서 돌아친 덕에 드디여 이튿날 새벽 2시까지 물건이 모두 이르게 되였다.     그렇게 한바탕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고 1993년 5월 28일 오전 9시 58분에 드디여 ‘금마로라스케트장’을 개업하였다. 시누이, 올케, 언니, 시골에 있던 조카들까지 모두 우리 로라스케스장에 취직하게 되였다. 나는 일약 가문의 직업해결사로 떠올랐다.   연변에서 최초였을 만큼 주변의 걱정과 달리 수입이 짭짤하였다. 나는 우선 은행대출부터 갚았고 친척들한테서 꿨던 돈들도 리자까지 푼푼히 얹어주며 하나둘 갚아나갔다. 신발도 400컬레 더 늘여 스케트장 규모를 넓혀가는 동시에 경영에 더 신경을 기울여가며 사업을 확장해갔다. 고생 끝에 락이 온다고 모든 것이 자리를 잡았으니 이젠 앉아서 지켜만 보면 된다고 생각하던중 예상치도 못했던 시련이 닥쳐왔다. 로라스케트라는 운동이 워낙에 생소한 데다가 영업을 시작하자마자 큰 히트를 치는 바람에 깡패들이 각지에서 소문을 듣고 모여들어 괴롭혔다. 무리를 지어 우르르 입장해서는 표를 사기는커녕 직원들까지 협박하면서 란리를 피웠다. 어느 날에는 서로 다른 지방의 깡패들끼리 무리싸움을 하는 일까지 벌어졌는데 정말이지 핍진한 무협드라마가 울고 갈 만치 아짜아짜하였다. 어디 그 뿐이랴. 여기저기서 돈 냄새를 맡고 심지어 낯선 사람들까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로반, 돈 좀 꿔주오.”, “로반, 협찬 좀 해주오.” 하며 귀찮게 굴었다. 그 무렵에 관리업체에서까지 찾아와 규정에 어긋나는 부분을 짚어가며 피대를 세우니 정말이지 애들처럼 엉엉 울고 싶은 날이 하루이틀이 아니였다. 성실하게 맡은 바 사업을 이끌어가려고 한 것 뿐인데 이상한 류언비어들까지 도니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모든 걸 그대로 포기하고 싶었지만 내 인생과 내 가족의 신용을 걸고 시작한 첫 스타트를 그렇게 무의미하게 접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정신을 추스르고 다시 움직여나갔다. 머리를 짜던 끝에 그래도 해당 부문에 문제를 반영하고 함께 치안 관리와 대책을 강구하는 게 가장 적합한 대안이겠다는 판단에 해당 구역 파출소를 찾아갔다. 파출소에서 적시적으로 나서 도와주었다. 매일 두명의 민경을 파견하여 영업장소를 지켜주었다. 연길시보안회사에서도 5명의 보안인원을 보내주었다. 그 뒤로 로라스케트장은 서서히 질서가 잡혀지기 시작하였다. 온갖 비바람에 풍상고초를 겪고 점차적으로 치안도 안정되고 운영도 잘되면서 기업으로서의 전성기를 한껏 누리게 되였다.     로라스케트장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낮에는 중소학교 학생들의 체육시간으로 탈바꿈되였고 밤에는 가족과 련인들의 힐링장소로 되였다. 황홀한 불빛이 명멸하는 로라스케트장에서 쌍쌍의 련인들은 손에 손 잡고 은은한 노래소리에 맞추어 예술과 스포츠의 미묘한 조화를 한껏 즐겼다. 또래 친구들과 함께 로라스케트장에서 생일이벤트를 즐기는 장면,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웃고 떠들며 행복을 만긱하는 화면들이 한장 또 한장의 사진이 되여 추억의 앨범을 채워갔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 행운스러운 사람인 것 같다. 그 때의 성공을 발판으로 모든 일에서 자신감을 얻게 되였고 딸애도 남부럽지 않게 영국 명문대학에 류학을 보낼 수 있게 되였다. 뱅글뱅글 로라스케트 바퀴가 돌고도는 것처럼 내 인생의 수레바퀴도 멈출 줄을 몰랐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흘러 어느덧 25년이 지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25년이 지난 오늘 그제날 로라스케트장은 가뭇없이 자취를 감추고 도망 가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던 지난날의 시련도 이젠 웃으며 마주할 수 있는 추억으로 가슴 속 어디엔가 고스란히 자리 잡고 있다. 로라스케트장과 함께 했던 나의 청춘, 나의 꿈은 땅속깊이 뻗어나간 그루터기마냥 나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나의 40대를 고스란히 바쳐온 로라스케트장. 가끔씩 그 때의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내 삶을 돌이켜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연변녀성》 2018년 제8호에서
       지난 10월 22일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에서는 회원들의 문화생활을 풍요롭게 하고 만족감을 높이기 위해 연변조선족전통음식연구소와 손잡고 조선족김치담그기 체험활동을 조직하였다.     이 날 오후, 연변조선족전통음식연구소 주부교실 강습실에 모인 회원들은 료리사복장을 갈아입고 앞치마를 두르고 료리사모자에 마스크까지 착용하니 제법 멋진 료리사가 되기라도 한듯 기쁨에 넘쳐 환호하였다.           체험활동은 김치담그기 특강과  김치담그기 체험 두개 내용으로 진행되였다.    특강은 연변조선족전통음식연구소 김순옥회장이 담당하였다. 김회장은 김치의 유래로부터 김치소에 들어가는 각종 채소와 양념의 사용순서 및 초절이방법까지 낱낱이 설명해주었다. 회원들은 열심히 강의를 들으면서 하나라도 놓칠세라 깨알같이 기록해나갔다.    특강이 끝난 후 회원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손맛을 자랑하려고 서로 뒤질세라 팔을 걷어부치고 강의내용에 따라 미리 준비된 채소와 과일을 다듬고 여러가지 양념들을 비례에 맞게 맞춤히 계량하고 널직한 그릇에 담아 버무리기를 시작했다. 색감 곱고 맛갈스러운 양념만들기가 끝나자 잘 초절이 된 배추를 대야에 엎어놓고 배추소박부터 켜켜이 양념을 무쳤다. 배추김치를 담그는 회원들의 얼굴마다에 웃음꽃이 활짝 폈고 드디여 완성된 빨간 양념을 입힌 배추김치는 군침이 스르륵 돌게 참말 먹음직스러웠다. 완성된 배추김치는 회원들의 손을 타고 또다시 이쁜 그릇에 보기좋게 담겨 얌전히 앉아 평가를 기다렸다. 수십년간 가정료리사로 일해온 회원들의 손맛은 견줄데 없이 모두 으뜸이였다.    반나절의 김치담그기활동을 마무리하며 문희회장은 “음식문화는 사회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발전변화한다. 날로 변화되는 음식문화 발전과 함께 앞으로도 회원들의 문화생활을 보다 풍부히 하고 조선족의 전통음식문화를 널리 선전하기 위하여 다양한 활동을 많이 조직할 것이다." 라고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셨다.    회원들은 맛있게 담근 배추김치를 이쁘게 포장해가지고 서산에 지는 해를 바라보며 귀로에 올랐다.     사진제공: 윤영미 글: 홍보부 편집: 홍보부
          제21회 세계한민족녀성네트워크 대회가 2022년 8월 24일부터 25일까지 한국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온라인 방식으로 진행되였다. 연변녀성발전촉진회 29명 대표가 이 대회에 온라인 비대면 형식으로 참석하였다. 중국연변분회장은 통달외국어양성학교에 설치되였고 분회장에 오지 못한 회원들도 자체로 온라인으로 참석하였다.      세계한민족녀성네트워크(KOWIN, 코윈)는 2001년 출범한 이래 지난 20여년간 지구촌 한인녀성 네트워크의 중심으로 자리잡았고 지구촌에 당면한 량성평등·기후위기·평화·녀성인권 등 다양한 이슈에 대해 토론하여 왔다.       이번 대회는 한국녀성가족부의 주최 하에 “디지털 전환시대 세계한인녀성의 힘으로 열어갑니다” 라는 주제로 조직되였으며 개회식에서 한국녀성가족부장관 김현순의 개회사에 이어 세계 한민족녀성재단 리사장 김순옥, 충남 도지사 김태흠, 예산군수 최재구의 축사가 있었다.                              개회사를 하고 있는 한국녀성가족부장관 김현순   첫날 글로벌 녀성리더포럼 제1부 (경제·경영)에서는 한국기술교육대학교 산업경영학부 이은영 교수, 로보아르제 대표 강지영, 한인여성경제인협회 세종충남지회 주희정 회장,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윤동열교수가 디지털 전환과 에너지전환시대를 맞이하여 첨단산업, 과학기술, 리공계 분야 인력수요가 급증하는 가운 데 이들 분야에 진출하는 녀성비율이 아직 낮은 상황과 우수한 녀성인력을 로동시장이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분석하였으며 녀성경제활동참여 및 경력단절예방을 위한 보육서비스질 개선, 저출산과 고령화문제로 인한 일련의 문제들에 대한 맞춤형지원, 녀성일자리전환, 직업훈련강화, 녀성끼리의 련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제2부(문화·예술)에서는 KBS공연미디어연구소 글로벌리더 녀성포럼 좌장 유건식, 청주대학교 (디지털미디어 디자인전공)교수 김양호가 전통예술이 온라인상에서 AI기술과의 접목과 글로벌예술에로의 진화 등에 대해 언급하였다.       제3부(과학·기술)에서는 연세대학교 독임교수(한국 과학기술정보연구원 원장, 박사) 최희연교수, 덕성녀자대학교 약학과 문애리교수, (주)레드렛 김지원 대표가 디지털시대의 포용성과 다양성으로 말미암은 녀성의 역할을 피력하고 녀성의 감성, 정서가 디지털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음을 확신하면서 녀성의 디지털적응, 녀성의 디지털분야진출, 력량강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튿날 지역담당관 회의의 활동분야별 네트워킹에서는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 문은희부회장이 연변지역을 대표하여 발언을 하였다.      대회의 마지막순서인 표창장 수여식에서는 코윈 중국 지역본부 전경숙 지역담당관 대표가 중국 코윈지회의 한국녀성가족부장관상(단체상)을 전달받았다.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의 문희회장님의 위탁으로 연변분회장 조직을 맡은 김향란 명예회장은 이번 대회의 감수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대전환을 맞이하는 지금 강력한 추진력과 유연한 사고를 지닌 리더가 수요됩니다. 특히 복잡한 사회문제 해결에서 소통과 공감 능력까지 탁월한 녀성리더들의 약진이 더욱 눈부신 시대입니다. 오늘과 같은 네트워크를 통해 국내외 한인녀성리더들의 련대가 더욱 공고해지고 동반성장하는 계기가 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 김향란명예회장 (앞줄 가운데)                           사진, 글: 홍보부 황영희                              편집: 홍보부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성립 70돐 맞이 활동을 활발히 전개     2022년 8월 21일,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이하 ‘촉진회’로 략칭) 는 한성호텔에서 중국공산당 제20차 당대표대회를 맞이하고 연변조선족자치주성립 70주년을 맞이하는 경축대회와 공익활동를 펼쳤다. 연변 내 각 분야에서 자존, 자강, 자력의 힘을 보여주며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에 맹활약하고 있는 촉진회 회원 70여명이 대회에 참석하였다.      대회는 연극배우 최미화부회장의 사회 하에 장엄한 국가의 주악과 자치주성립의 노래로 시작되였다.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한복으로 곱게 단장한 회원들이 즐거운 명절 분위기 속에서 협약식, 건강강좌, 기부금모으기, 문예공연 등 다채로운 절목으로 뜻깊은 행사를 펼쳐나갔다.   문희회장은 개회사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지난 70년간 중국공산당의 정확한 령도와 주정부의 올바른 인솔 하에 여러 민족 인민들이 손에 손잡고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에서 모두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음을 자랑차게 말씀하고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는 1993년에 "여성을 잃으면 민족을 잃는다"는 위기의식을 가진 학술 및 언론문화예술분야에서 활약하던 지성인여성들이 뭉쳐 성립한 녀성단체법인으로서 회원들의 자아성장과 사회참여의식 제고를 념두에 두고 녀성들의 리더십 및 차세대양성 각종 학술회의 애심공익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면서 전국애심녀성포럼 및 코윈을 통한 국제교류에도 참여하여 협회의 풍채를 보여줌으로써 여러차례 사회각계로부터 선진집체의 영예를 안아왔고 앞으로도 전임 회장님들 뒤를 이어 새로운 회장단의 인솔 하에 여성들의 창의력과 발전과 진보를 위하여 "초심을 잊지 않고 시대에 부응하는" 단체로 거듭날 것이라고 하면서 전체 회원들에게 신심과 용기를 북돋우어 주었다.    개회사에 이어 연변부녀아동건강사업의 발전을 더욱 추진하고 행복하고 화목하고 건강한 가정을 꾸려나가기 위해 촉진회와 연변대학부녀아동건강중심은 자원, 지지 및 성신의 원칙으로 우호적인 협상을 통하여 교류협력협의를 체결하였다.   앞으로 촉진회와 연변대학부녀아동건강중심에서는 정기적으로 '어머니살롱' 계렬공익복지강좌를 개최하여 가정녀성의 종합적인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연변대학부녀아동건강중심은 '어머니살롱' 공익강좌내용을 준비하고 강사를 파견하는 업무를 맡았다.       합의체결이 끝난 후 연변의학원 김정애박사가 연변대학부녀아동건강중심에 대해 소개하였다. 김정애교수는 ‘어머니살롱'은 사회를 향한 부녀아동건강중심의 중요한 복무창구로서 그 취지는 우리 사회에 건강지식을 보급하고 긍정에네지를 전파하면서 보다 더 건강하고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김정애교수의 소개에 이어 길림성동부지역 외상의료중심주임이며 연변대학부속병원골과 주임 류연군교수가 중로년녀성의 뼈건강에 대한 특강을 했다. 류연군주임은 골다공증의 증상, 중년 및 노년 녀성의 골다공증 진단, 예방 및 치료에 관해 상세히 설명하고 나서 중로년녀성의 골다공증 발병률이 높기에 적극적인 예방이 관건이라며 적절한 운동, 균형 잡힌 식단, 칼슘 VD섭취에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골다공증은 많은 중로년녀성들의 관심사라 회원들은 도정신하여 강좌를 들으며 유관 건강상식과 예방법에 대해 알아가며 연신 감탄을 하였다.     건강강좌에 이어 최미화부회장의 란 주제의 색다른 녀성행복특강이 있었다. 최미화부회장은 가정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이야기로  안해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가정'이라는 사업의 CEO 이며 가정의 행복은 안해의 지혜로움에 달려있다고 하면서 평소생활에서 부부지간에 제때로 되는 소통과 긍정,  칭찬을 아끼지 말고 언어의 온도를 지키며 표현예술을 발휘하면 훨씬 행복한 삶을 영위해나갈 수 있음을 새삼스럽게 깨우쳐주었다. 그야말로 눈물과 웃음이 동반된 훌륭한 특강이였다.        강좌에 이어 애심소품, 애심사업총화보고, 애심기금모으기 등 세가지 내용으로  애심공익활동이 진행되였다.             김해란선생님과 최아정학생의 소품은 촉진회에서 후원하는 학생이 량부모 모두 잃고, 할머니랑 둘이 힘들게 하루하루를 버텨 나갈 때, 촉진회 여러분들의 사랑의 손길로 대학시험에서 540점으로 대학입학통지서를 받게 된 진실한 사실을 토대로 각본을 짠 소품이였다. 소품에서 최아정학생이 사춘기에 들어서서 방황할 때 친부모 못지 않게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시고 바른 길을 걷도록 잘 인도해 주신 촉진회의 은혜 영원히 잊지 않겠다며 앞으로 대학에 가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꼭 이 사회에 유익한 인재가 되는 것으로 보답하겠다고 하였다. 정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감동적인 장면이였다.    애심공익활동 총관담당 김영자부회장의 보고에 의하면 다년래 촉진회는 70여만원의 자금을 모금하였고 9,525건의 옷과 물품을 기부했으며 18명의 빈곤학생들을 부축하여 대학까지 보냈다. 지금도 회원들은 한달에 한번씩 학생들의 가족을 방문하여 생활비를 보내고 학생들의 생활과 학업, 건강을 돌보고 있다. 현재 촉진회에서 후원하고 있는 학생 13명과 북경애심녀성네트워크 “희망의 꿈나무키우기” 활동에 추천했던 31명 학생을 대상으로 빈곤부축사업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이 44명 학생 중 일부 학생들이 중앙재정대학, 중국정법대학, 천진남개대학, 길림대학, 상해사범대학, 중국매체대학, 중국지질대학 등 여러 좋은 대학에 입학하여 나라의 튼튼한 기둥감으로 성장하고 있다.                                                                           김영자부회장은 하나하나의 작은 물방울들이 뭉치면  거세찬 파도를 일으키는 사랑의 바다가 된다며 우리들이 매일 1원씩 모으면 사랑의 거금으로 되여 많은 경제난으로 고생하는 학생들을 살릴 수 있다며 “우리 매일 1원씩 절약히여 함께 모금하여 곤난한 학생들을 방조하자” 라고 창의하였다.           뒤이어 애심기부금모으기행사가 진행되였는데 대회에 참석한 신로회원들이 총 10370원을 의연하였다. 금년 4, 5월에도 31명회원들이 8493원의 금액을 의연하여 지난 여덟달동안 총 18863원의 의연금을 모았다.   이어 새로운 당지부위원과 부리사장, 리사 사업부와 문예부부장 임명 및 임명장 발급의식과 표창이 있었다. 촉진회는 2021년도 주급사회조직선진단위, 사회조직빈곤부축선진단위, 2017년~2021년 기간 선진단위로 표창받았고 김영자부회장이 사회조직선진공작자로 표창받았다.    표창식에 이어 신임회원들을 소개하고 회원들이 정성들여 준비한 다채로운 문예절목을 펼치면서 서로간의 친목을 다지고 우애를 나누는 따뜻한 시간을 가졌다.   촉진회 모든 회원들은 금후에도 드높은 사명감을 안고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함으로써 연변녀성들의 사회적 지도력 개발에 힘쓸 것이며 불우이웃 돕기, 나눔과 섬김, 베품을 실천하면서 새로운 녀성리더로 성장하기 위하여 노력에 노력을 다할 것이라 믿는다.
    2021년 3월9일,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에서는 연길 황관혼례청사 7층13호 홀에서 “3. 8”국제부녀절 111주년 기념행사를 펼치였다. 【집체사진】     다 같이 "국가"를 부르면서 대회의 막을 열었다. 【국가를 합창】     이어서 김향란 회장님의 축사가 있엇다. 다사다난했던 2020년을 다시 돌아보는 시간이였다. 뜻하지 않은 코로나로 방역품이 부족한 의료진에 전체 회원님들이 자원으로 성금을 모아 방역비품을 사서 전달하였고 너도나도 글, 시, 서예로 의료일군들을 응원하고 격려하였다.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는 정부의 호소에 따라 자가격리, 마스크착용, 사교거리 지키기 등 방역조치를 철저히 하였다. 그리고 촉진회 대화방을 통하여 자아성장, 사회봉사, "손에 손잡기", 불우학생 돕기 등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였다. 하여 연변조선족자치주 민정국으로부터 "전주 사회조직공작 선진단위",  "전주 사회조직 빈곤부축공작 선진단위"라는 영예를 수여받았다. 김향란 회장님은 여러 회원님들의 따뜻한 사랑의 손길과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와 같은 영예를 이루게 되였다고 감개무량해 하였다.   【김향란 회장님 축사】 【선진단위 영예증서 전달】     또 이어서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 당조직분담 김계월 부회장께 영예증서 전달식이 있었다. 김계월 부회장은 코로나로 어려운 시기에도 당조직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의 영예를 받았다.   【김계월 부회장님께 영예증서 전달】     다음으로 연길시문화관 연구원, 연변대학 사범학원 객원강사 리순자 녀사님의 특강이있엇다. 특강 제목은 였다. 우리 민족의 대사인 돐 생일, 결혼잔치, 회갑, 회혼례, 장례식에 관한 지식과 지켜야 할 례의범절에 대해 알기 쉽게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리고 일상의 옷차림, 몸가짐에서 주의 해야 할 점에 대해 몸으로 보여주면서 배워주었다. 항상 우아한 녀성이 되기에 노력하고 우리 민족의 우수한 전통을 자손들한테 전수하는데 솔선수범하기를 부탁하였다. 일상에서 모르고 그냥 지나쳤던 것들을 알아가는 배움의 시간이였다. 【리순자 녀사님 특강】     특강에 이어 간단한 축하공연이 있었다. 김순자 회원님의 독창 "어머니 진달래"와 박정옥 등 8명 중창팀의 "阳光路上", "9월의 그네놀이"로 명절의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   【축하공연1 독창-김순자 회원】 【축하공연2 중창-박정옥 등】 그리고 또 조를 나누어 쇼 "내가 제일 멋져", "나는 분발해", "허리돌려 공떨구기" 등 유희를 하면서 기나긴 방역으로 지쳐있엇고 단조로웠던 일상을 잊고 서로의 우애를 다지는 시간을 가지였다. 치렬한 경쟁을 거쳐 고양이팀은 을, 꽃나비팀은 을, 꽃사슴팀은 을 받았다.   【내가 제일 멋져!】 【우리는 품위있는 녀성】     마지막으로 회가 "진달래 연변녀성"을 합창하면서 뜻깊은 3.8국제부녀절 기념행사의 막을 내렸다. 편집:강순자 날짜: 2021. 3.12 사진: 회원님들
    2020년 12월 20일 오전, 연길시 한성호텔에서 제6회 《애심녀성컵》 전국조선족녀성 생활수기 응모행사 연변지역 수상자 시상식이 전국애심녀성포럼 문화위원회와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의 주관하에 성대히 열렸다. 시상식은 국가를 제창하고 전국애심녀성포럼 회가 “애심녀성송” 을 제창하면서 시작하였다. 전국애심녀성포럼 부의장,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 김향란 회장이 환영사를 했고 뒤이어 전국애심녀성포럼 전경숙 의장, 전국애심녀성민족공익사업발전기금(주비)회  류필란 리사장, 전국애심녀성포럼 문화위원회 남복실 위원장이 보내온 축사록음이 방송되였다.      《애심녀성컵》 전국조선족녀성 생활수기 응모행사는 전국애심녀성포럼에서 주최하고 전국애심녀성포럼문화위원회에서 주관하며 전국애심녀성민족공익사업발전기금(주비)회의 후원으로 연변조선족자치주조선어문사업발전판공실과 “연변녀성”잡지사의 협력하에 어느덧 제 6회를 맞이하게 되였다.       신종코로나 바이러스성 페염으로 전 세계가 아픔과 불안속에 떨어야 했던 금년 2020년에도 응모행사는 중단되지 않았다. 연길, 도문, 훈춘, 왕청, 돈화, 할빈, 심양, 대련, 북경, 상해, 천진, 청도, 중경, 남경, 심수, 향항 등 국내 16개 지역과 한국,일본 등 해외에 사는 조선족 녀성들이 77편의 응모작을 보내여 왔다. 금년의 시상식은 2020년 12월 22일에 북경에서 온라인으로 진행하게 되는데 연변지역에 수상인이 비교적 많고 집거한 상황에 비추어 연변지역 입상작 시상식을 12월 20일에 연길에서 먼저 진행하게 되였다.       제6회 《애심녀성컵》 전국 조선족녀성 생활수기 응모작 심사위원회는 남복실(문화위원회 위원장, 연변작가협회 북경지구창작위원회 주임)을 심사위원장으로, 안려홍(“연변녀성”잡지사 주필), 김해응(중국인민대학교 문학원 교수, 문학박사), 류해금(문화위원회 부위원장, 산동성 위해직업학원 한국어과 교수), 오경준(“중학생”잡지사 주필)을 심사위원으로 구성하였다. 심사위원회는 공정하고 투명한 심사를 거쳐 77편의 응모작중에서 최종 25편을 수상작품으로 선정하였다. 그중 16편은 연변지역 녀성들의 작품이다. 심사결과는 아래와 같다.   금상: 1편,(상패와 상금 5000원)        〈나는 할머니바리스타〉(오경희, 연길) 은상: 2편,(상패와 상금3000원)        〈레오의 봄날〉(석성애, 훈춘)        〈도시락을 안고 방역전장으로〉(허향순, 연길) 동상: 3편,(상패와 상금2000원)        〈‘명주실혼’사랑〉(변선화, 북경)        〈먼길〉(림선자, 연길)        〈아들애의 우리말 려행〉(한미화, 북경)  가작상: 5편,(상장과 상금1000원)        〈더 미워질 데 없는 녀자〉(김경희, 연길)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비낀 우리 민족의 래일〉(윤국화, 상해)        〈어머니와 한족동생〉(김영순, 연길)        〈사랑은 서로 지켜주는 것〉(정해선, 연길), 7월호        〈잃어버린 꿈을 찾아서〉(고향란-한란, 연길)  입선상: 5편,(상장과 상금500원)        〈비석〉(김정애, 연길)        〈아버지와 ‘마파두부’〉(김령, 남경)        〈마개골에 묻힌 어머님전 상서〉(방금숙, 연길)        〈한족며느리한테 우리말을 가르치는 리유〉(박순자, 연길)        〈엄마의 손〉(강매화, 대련)  장려상: 9편,(상장과 상품)        〈우리 어머니〉(류영자, 연길)        〈아버지라는 울바자〉(최보라-최미화, 연길)        〈나의 ‘시집살이’〉(최소천, 도문)        〈가을의 들국화로 피여나리라〉(리미선, 장춘)        〈0순위〉(김춘희, 청도)        〈엄마나이 세살〉(동향화, 북경)        〈55년의 사랑〉(김서례, 연길)        〈아빠의 눈물〉(박해평-박해옥)        〈엄마의 그림자〉(리설영, 향항) 【연변지역 전체 수상자 기념 사진】   【금상 시상】   【은상 시상】   【동상 시상】                        【가작상 시상】   【입선상 시상】 【장려상 시상】       심사위원인 “연변녀성”잡지사 안려홍 주필과 “중학생”잡지사 오경준 주필이 몇달동안 응모 작품들을 심사하면서 겪은 로고에 감사장을 드렸다. 【심사위원께 감사장 수여】     시상식장에서 허향순 은상 수상인은 받은 상금중의 1000원을 연변애심어머니협회에 기부하였고 림선자 동상 수상인은 받은 상금 2000원을 전국애심녀성민족공익사업발전기금(주비)회에 기부하였으며 김경희 가작상 수상인은 받은 상금1000원 전부를 전국애심녀성민족공익사업발전기금(주비)회에 기부하였다. 【허향순 수상인 연변애심어머니협회에 기부】   【림선자, 김경희 수상인 전국애심녀성민족공익사업발전기금(주비)회에 기부】          우리는 우리말, 우리글을 사랑하며 꿈과 사랑으로 평범한 우리 삶의 평범치 않은 이야기를 우리 글로 엮어가면서 우리민족문화 전승에 힘을 다할것을 다졌다. 시상식장은 아름다운 우리 한복차림의 회원님들과 귀빈들로 시종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시상식 참가자 전체기념 사진】         12월 22일 저녁 7시, 텅쉰회의(腾讯会议, 회의번호:249473099)에서 열리게 되는 온라인 시상식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전국애심녀성민족공익사업발전기금(주비)회 연변리사들】   글: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 홍보부 사진:향자, 윤영미                                                   2020.12.22
12    옥이의 발 자르면 안돼 —사랑은 기적을 낳았다 댓글:  조회:1679  추천:1  2020-07-04
   “동상을 입은 옥이의 발을 절단해야 한답니다. 병원측에서는 5만원을 준비하라고 한대요. ”    2020년 4월 5일 뜻밖의 전화가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 (이하 호칭 촉진회) 문희 상무부회장으로부터 걸려왔다    '옥이의 발 자르면 안돼!" 애심담당 김영자 부회장의 가슴에서 큰돌이 덜컥 떨어졌다.   소식은 인차 촉진회 김향란 회장과 회장단 및 리사진에 전해졌다    문희 상무부회장은 병원에 가서 료해한 정황을 상세히 회장단에 전했다    옥이가 의외의 사고로 뼈가 두 곳이 끊어졌고 한쪽발이 얼어서 잘라야 한다고 병원에서 통지했단다    어린 소녀의 발을 절단할 수는 없었다. 또한 생활이 째지게 가난한 옥이네가 어찌 5만원이란 돈을 내놓을 수 있단 말인가.  옥이아빠는 무작정 옥이를 퇴원시키고 고향의 작은 병원으로 옮겨왔단다.    초중여자애 발을 자르다니?  세상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코로나19비상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촉진회 애심공익부에서는 온라인 비상 회의를 거쳐 사경에 처한 옥이를 도울 방안을 회장단에 제기했다.   회장단에서는 즉각 물심 경제 여러 방면으로 옥이를 구해야한다는 창의서를 전체 촉진회 회원님들에게 전달했다. 전체 애심 회원들은 적극적인 호응으로 행동으로 신속히 움직였다.    옥이는 3살에 엄마를 잃고 두 인공 관절로 겨우 다리를 움직이는 아빠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촉진회의 경제 지원으로 학업을 계속하는 학생이다 .   회원님들은 코로나 19방역 지원에 여러곳에 후원했고 영업상황도 좋지않아 마음도 경제도 모두 힘든 상황이였지만 너도나도 다투어  옥이를 살리는 응원에 참가하여 100원 300원 ......,현금과 여러가지 영양품 보건품 약품들이 합쳐 17,600원가치로 모여졌다.   이때 “내가 약품과 일체 치료 비용을 책임지고 옥이의 잘라야 한다는 발을 치료해보겠습니다 ” 라고 나서는 분이 있었다     남편과 함깨 원 “도문시 화상병원”을 경영하다가 지금은 연길시에서 상해박방생물과학유한회사 연변지사 '박방본초 전매점”을 경영하는 려순희 사장이다.   하여 본격적인 옥이의 발을 살리는 치료가 시작되였다.    상처를 헤치니 얼었던 발은 시커멓고 돌처럼 땅땅해져 있었다.    려순희 사장은 보기만해도 끔찍한 옥이 언발의 썩은 조직을 베여내고 “박방본초 전매점”의 소염, 살균, 생기"生机","长皮"작용을 겸비한 동상고와 욕창고(冻伤膏和褥疮膏)로 처치하여 주었다. 회원님들의 애심이 듬뿍 담긴 영양품과 보건품들이 옥이의 면역력을 높여주면서 살과 피로 되였다.      촉진회의 어머님들과 려순희 사장은 왕복 160 (公里)공리의 거리를 6 차례 다니며 치료를 계속하여 보기 무서울 정도로 얼었다가 땅땅했졌고 다시 썩으면서 고약한 냄새들을 풍기던 옥이의 발이 100여일 만에  야들야들한 새로운 살들이 살아나면서 건전한 새 발을 눈앞에 보여주었다    야! 정말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연변여성발전촉진회의 어머니들과 명의 려순희 사장님의 명약들이 연변의 3급갑등 병원에서도  잘라야 한다던 옥이의  언발을 원래 발로 재생시키는데 성공하는 기적을 만들어 냈다    정말 사랑의 힘은 대단하다    지금 옥이의 발은 회복단계에 들어섰다    20일후이면  씩씩한 걸음으로 동창들과 선생님 곁으로 돌아갈 옥이의 건강한 모습을 그려본다.    이것이 바로 연변 조선족여성 발전촉진회가 코로나 특수 시기에 사랑으로 이루어진 기적이다!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   
11    연변의 첫 녀성 사회단체 연변녀성발전촉진회 25주년 맞아 댓글:  조회:545  추천:2  2018-07-10
 류금화 작사 한정자 작곡으로 된 회원 자체창작 회가 《진달래와 연변녀성》을 열창하고 있는 연변녀성발전촉진회 회원들.  7월 7일, 연변의 첫 녀성 사회단체인 연변녀성발전촉진회는 연변대학종합청사에서 25돐 경축행사를 조직하고 파란 많은 력사를 되돌아보며 신시대 신녀성의 가치 발휘를 위한 새로운 조직체로 거듭나기 위한 교류활동을 진행하였다. 1993년, 연변주부녀련합회 산하 《연변녀성》잡지사 주필이였던 박민자녀사는 〈녀성을 잃으면 민족을 잃는다〉는 리념으로 사회녀성들의 자질제고를 목표로 문화계 녀성지성인들 위주의 연변주 첫 법인단체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를 발족하였다. 초대 회장으로서 박민자녀사는 지성인의 시각으로 연변조선족녀성들의 력사를 발굴하고 격려하는 일에 앞장섰으며 녀성리더십을 양성하고 녀성의 발전방향을 모색하는 학술회의와 같은 다양하고 창의적인 국내외 활동을 활발히 조직하였다. 제2대 회장 강순화녀사는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에 연변대학민족문화교육원의 〈심리상담학습교육반프〉로그램을 인입하여 수많은 회원들이 심리상담교육을 받도록 하였고 〈연변 생명의 전화〉상담을 설치하고 회원들이 심리상담사로 자원봉사를 하면서 격변하는 사회변화 속에서 가족관계나 사회관계에서 고민하는 사람들을 도와나섰다. 제3대 회장 김화선(연변대학녀성연구중심 주임)녀사는 연변대학녀성연구중심 1대 연구원들이 위기 속에서 사비를 털어 촉진회 산하 ‘녀성문화교실’을 창설하고 사회변화에 적응하기 힘든 녀성교직원들에 대한 지도와 지원을 가동한 뒤를 이어 〈한사람의 힘은 미약해도 련대의 힘은 크다〉는 신조로 조직적으로 전국애심녀성포럼에 참여하면서 내부의 활성화를 이룩하고 동시에 회원들이 전국무대, 국제무대에 가서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새로운 통로를 열어놓았다. 김화선회장은 연변조선족녀성들의 발전사를 회고하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립된후 연변조선족녀성들은 공산당의 령도하에 가정의 문을 넘어 사회적 로동에 적극 참가하여 독립적 경제적 소득을 획득하는 방식을 통해 남녀평등을 향한 첫발을 내디디였으며 ‘남자가 할수 있는 일은 녀성도 할 수 있다’ ‘녀성은 절반하늘을 떠멘다’는 사회주의식 녀성발전의 길을 걸어왔다.” “개혁개방후 전례없는 직업적 이동과 공간적 이동을 실천하면서 다원적이고 고차원적인 새로운 녀성주체로 거듭 발전을 이룩하였다.” “강대한 소질을 갖춘 연변조선족녀성들은 시대와 함께 새로운 사회적, 정책적, 민족적, 성별적 이슈들을 발견하고 해결하는 노력을 꾸준히 해왔다.” “습근평 시대는 ‘영웅이 배출되는 시대”이기도 하지만 ‘지혜를 집합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연변녀성발전촉진회는 이제부터 신시대 녀성들이 살기 좋은 성평등 사회문화를 만들어간다는 문화적 자각을 안고 전체 회원님들의 지혜를 모아 연변지역 특색이 있는 조선족녀성발전의 길을 모색하는 길에 앞장설 것이다.” 대회에서 박민자 초대회장과 강순화 2임회장(대독)의 축사에 이어  전국애심녀성포럼 류필란 의장, 북경녀성네트워크 리령 회장, 연변사회교육연구회 류혜선 회장, 연변녀성평생교육협회 김영순 회장 등이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의 발전에 대한 긍정과 격려와 함께 새로운 차원으로, 련대적 협력으로 보다 큰 발전을 이룰 것을 창의하였다. 연변녀성발전촉진회 고문으로 시종 관심과 격려를 보내준 현재 호남사범대학 교수로 종사중인 채미화교수는 먼길을 마다하고 모처험 이번 기념행사에 참석하여 "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가 25년간 걸어온 가장 큰 의미는 중국조선족녀성문화를 창출해낸 데 있으며 이것은 우리가 옛날에도 가지고 있었고 또 오늘도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가꾸어가야 할 사랑과 땀과 아름다움과 그리고 교육의 정신"이라고 강조하였다.  이어 대회에서는 연변녀성발전촉진회 회원들의 다채로운 문예종목으로 단합과 성장을 거듭한 참신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25주년 기념화첩을 출간하여 기억과 기록을 기초로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문화적 새장을 마련하였다. 길림신문 김청수 기자 
10    녀성문화교실 활동내용소개 댓글:  조회:1606  추천:0  2011-09-22
       눈부신 발전과 도약이 이루어지는 현대사회에 주변환경의 급격한 변화는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오고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한번 배운것만으로 한평생을 살기에 미흡하게 되였습니다.  은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개척하고저 하는 성인녀성들에게 배움과 나눔의 장을 열어드립니다.        에는 멀티미디어실, 컴퓨터실, 무용실, 독서실, 법률자문실과 휴식실이 개설되여있고 노래교실, 건강미체조, 조선무용, 기초영어, 건강강좌, 미용과 복식문화, 꽃예술, 문화특강등 내용으로 운영합니다.        삶은 새로운것을 받아들일때 발전합니다.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는것은 무엇보다 배움에의 열정과 실천일것입니다. 성인녀성은 모두 신청할수 있으며 의 전문관리인원에게 자문을 청할수도 있습니다. 교실주소: 연변병원 입원처 동쪽문 맞은켠 자인당약방3층(滋仁堂药店3楼) 교실전화: 255-5656, 13704483020 련계인: 김선생  사)연변조선족녀성발전촉진회 《녀성문화교실》시간표(2011년9월-12월)   시    간 월 화 수 목 금 9:00-10:00 노래교실 특    강 노래교실 특    강 건강미체조 10:10-11:10 건강미체조 조선무용 기초영어 조선무용 기초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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