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석인생 살다가 떠난 사람
--두만강문인수석회 김봉세회장을 추억하여
리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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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 50대 후반을 살아가면서 찰나에 사는게 인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수가 없다. 지난해 2011년 1월 22일 절친한 지기 류연산이를 잃었는데 한해가 흐른 2012년 5월 31일 또 하나의 절친한 지기 김봉세를 잃었으니. 그것도 늙으면 죽는 법이라는, 흐르는 시간앞에 무력해지는 그런 나이가 아니라 아직도 웃으며 뛰며 살아야 할 나이에 가니 더더욱 애수가 깊어만 진다.
우리 두만강문인수석회 제3임 회장 김봉세는 나 인생사의 또 하나의 절친한 지기였다. 우리 서로 인연을 맺은지는 30여년전 화룡의 고향마을이라지만 살아가는 인생길은 제나름이여서 오랜 기간 서로 모르고 지내다가 지난세기 80년대 중반이후 연길에서 다시 만나 인연을 깊이하게 되였다. 나는 연변일보사의 기자로 뛰다가 90년대 초반 전국을 휩쓴 하해물결에 자맥질하고 있었는데 김봉세도 연변대학병원 당위 조직부로 뛰다가 하해물결에 휩쓸리며 무역회사인가 꾸리고있었다.
김봉세는 1951년 7월 화룡현(후에 화룡시로 되다) 태생이고 대학출신으로서 나보다 세살이나 우였다. 1982년 7월 내가 연변대학 78학번 4년제 본과를 졸업하고 화룡현위당사연구실에 근무할 때 그는 화룡현 림업국 과장으로 뛰고있었다. 1984년 6월에 내가 연변일보사 편집기자로 전근한후 그는 선후로 중공화룡현위 조직부 조직과 과장, 화룡현 문화국 당위서기로 자기 삶에 충실하며 진솔하게 살아갔다.
그후 김봉세는 연변대학병원 당위조직부장으로 활약하면서 우린 화룡에 이어 한 연길에서 생활하게 되였다. 우린 무언가 통하는데가 있는것 같았다. 서로 제각기 제나름의 인생길을 걷다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도 미련없이 버리고 선후로 하해길을 선택하였으니 이어지는 무엇이 있다고함이 옳을듯 하다.
허나 마음이 선량한 지식인 출신의 나나 김봉세는 돈과 전혀 인연이 없었다. 돈이 따르지 않았다. 운도 따르지 않았다. 둘다 선후로 지긋지긋한 하해에서 벗어나 나름의 인생길을 다시 걸으며 나름의 즐거움을 찾았다. 마음도 한곬으로 흘러 90년대 중반이후 서로 수석이란 인생사 넝쿨에 엉키며 틈만 있으면 탐석행에 나서 보았다. 연변의 부르하통하, 해란강, 봉밀하로부터 가야하, 두만강, 돈화의 목단강, 훈춘의 훈춘하에 이르기까지~~물이 흐르며 돌밭이 이루어진 연변땅 어디든지 찾아 다녔으니 우린 대자연이 하사한 경이로움에 파묻히며 어느덧 떨어질수 없는 지기로 되여버렸다. 집사람들도 더불어 허물없이 다니며 친형제나 진배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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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수석을 모르던 처음 시절 우스운 일도 많았다. 가장 우스운 일은 강가 돌밭을 찾다가 조금만 별다른 돌이면 괜찮은 수석인것 같아 모으다보니 귀가할 때면 땀을 뻘뻘 흘리며 한 배낭씩 메고왔다. 생각해 보시라, 그 무거운 돌 한 배낭을. 그날이면 어김없이 저녁밥술을 놓기 바쁘게 단잠에 곯아 떨어졌다. 이튿날이면 주어온 돌들을 다 내다 버려야 했다. 수석공부를 하며 수석책들을 보며 그렇게 버린 돌들이 얼마인지 모른다. 수석인들 말로는 두어 자동차는 던졌다고한다. 이런 어려운 입문의 과정을 거쳐야 수석을 알며 수석인이 된다고, 우린 끝없는 탐석길에서 수석의 초보자로부터 수석인으로 커가는 과정을 거치였다.
그러던 어느날, 룡정의 륙도하에서 내가 수마가 특별히 잘 된 삼층대 초모자형 버섯모양의 청석류 수석 한점을 탐석하였는데 우리 둘은 너무도 흥분되여 수석이 다 된듯 희망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후 이 소식을 듣고 우리 연변에서 선배 수석인으로 자처하는 사람 하나가 찾아와서 보더니 “이것도 수석은 수석이지만 100원도 안가는 수석”이라고 희꼬았다. 그 자리에는 김봉세도 있었으니 우리 내색은 내지 않았지만 얼마나 격분했는지 모른다. 유감스럽게도 이 수석은 그뒤 제1회 두만강전시회이후 땅에 떨어져 두 동강난 액운을 보였지만 나의 수석사에서 두번 찾아볼수 없는 수석1인자였다, 부르는것이 값일 수석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수석초보자 시절의 수모이야기다.
한해한해 흐르면서 연길시를 중심으로 하는 연변의 우리 문인들속에도 수석인들이 한둘이 아니였다. 김봉세와 나는 문인수석회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우리가 처음 찾은 문인이 한다하는 시인 김학송. 우리 셋은 몇번 만나면서 문인수석회의 테두리를 그리였다. 열정적인 김학송시인이 수고가 많았다. 김학송시인이 원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국장 리흥국(그때 연변주 심계국 국장) 등과 련락이 닿고 서로가 힘쓴데서 2004년 7월 28일 자발적인 수석모임—두만강문인수석회가 연길에서 고고성을 터치였다.
두만강문인수석회는 수석을 사랑하는 연변내 문인수석동호인들로 무어진 동아리모임이였다. 현임 고문에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원 부주필 김대현 선생이고 현임 제1임 회장에 원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국장 리흥국, 부회장에 연변가무단 전직창작원이고 시인인 김학송, 비서장에 소인 리함이 선출되였다. 수석동아리를 무은 날 우리 저저마다 나름의 명구를 한마디씩 적어보았다.
수석은 나의 영원한 동반자여라! (김대현)
수석에 미치고 수석회사람들에 미쳐 나도 수석에 미치겠노라! (김철학)
수석은 내 시정(詩情)의 자궁! (김학송)
내 애인(수석) 찾아 강따라 바다로 간다. (한태익)
부모, 형제, 처자, 수석은 나의 혈육이다. (신철호)
수석은 나의 마지막 취미생활 (리함)
김봉세는 서슴없이 “수석은 인생”이라고 써놓았다. 이는 김봉세의 내심의 발로로서 그후의 김봉세 인생실천은, 제2인생은 수석인생임을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다. 수석은 곧 인생이고 수석은 곧 그였으니 그후 김봉세는 시 “나도 한점의 돌”에서 내심을 그대로 잘 드러냈다.
……
해질무렵
시원한 투석 한 점
별처럼 빛난다
주먹만한 돌을
가슴에 문지르니
심장이 뛴다
구멍나고 뼈만 남은
너는 아무 말도 안하나
나는 너의 만마디 말을 듣는다
돌 밭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돌이 있으니
그만 나도 한점의 돌이 되고 말았네
대자연의 구멍난 투석 한점을 통해 우리는 수석은 인생이라며 수석 제2인생을 살아가는 김봉세의 진솔한 삶을 들여다 보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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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돌과 인간과의 만남은 태고의 구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지만 진짜 대중적 애석, 소장석, 관상석붐이 중국땅에서 일기 시작한것은 개혁개방이 실시된후인 20세기 80년대로부터이다. 수석이란 부름은 지난 90년대초로부터 우리 연변조선족들의 말밥에도 소리없이 오르기 시작했다. 개혁개방과 더불어 한국나들이가 시작되면서 부분적사람들에 의해 탐석행이 주어지고 수석동호인들이 늘어가면서 수석활동이 활발해졌다. 2002년 이후부터는 주안의 여러 분야의 문인들을 선두로 다양한 탐석, 교류활동이 행해지면서 연변의 수석계에 새로운 바람을 주입하였다.
두만강문인수석회에는 작가들도 있고 기자들도 있고 학자들도 있고 사회활동가들도 있다. 2004년 8월 1일, 금방 고고성을 터친 두만강문인수석회는 도문시 아래구간 신기동 두만강가에서 첫 집단탐석을 가진이래 김봉세를 선두로 줄기찬 탐석활동과 교류활동을 활발히 펼치면서 첫 1년 남짓한 기간에만 해도 천리 두만강으로부터 수백리 가야하에 이르기까지 가지 않은곳이 없었으니 대소 집단탐석과 합평회만도 근 20차에 달한다.
김봉세 등 문인수석인들을 선두로 은은히 밀려드는 연변의 수석바람, 그야말로 기꺼운 일이 아닐수 없다. 2005년9월 25일, 연변텔레비죤방송국 “고향의 아침”프로에서는 두만강문인수석회 도문 신기동 두만강가탐석을 특집프로를 찍어 일요일 “고향의 아침”프로에 방영하였다. 12분간이나 방영된 “고향의 아침” 프로는 이 나라 관내나 내지도 아닌, 연변 두만강수석만의 독특한 향토석에 초점을 맞추어 두만강수석의 특이함과 월등함을 만방에 알리는데 기여하면서 윤택된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는 수석세계가 널리 알리여졌다. 그 진두에는 언제나 김봉세가 서 있었다.
우리는 중국조선족의 대표적인 문화사이트의 하나인 조글로에도 2005년 6월 10일부터 전문코너—“두만강수석회”를 만들어 사회와 네티즌들속에 조선족 수석문화이미지를 부각시키는데 기여하여 왔다. 수석코너는 필자가 책임지고 꾸려왔지만 연변에서 서로 호흡을 맞추며 주인공으로 뛴 사람은 역시 김봉세였다.
2006년 6월 8일, 연변두만강문인수석회와 연변박물관은 연길시 연변박물관에서 제1회 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를 성황리에 가지였다. 연변수석문화의 대잔치로 되는 제1회 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에는 연변주정부와 주정협, 주문화국의 관련지도자들도 참석하여 축하하고 힘을 보태주었다.
그번 두만강수석전시회의 1등공신은 당연히 리흥국회장이지만 수석전시회의 1선에서 가장 큰 수고를 한 이는 김봉세를 꼽아야 할것이다. 수석전시회는 그해 년말까지 내내 지속되여 김봉세의 수고와 역할을 보다 컸다.
제1회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 기간 두만강문인수석회 초대회장 리흥국의 사회하에 연변박물관 2층홀에서 전문회의를 가지고 수석회 새로운 지도부를 출범시키였다. 전문회의는 리흥국회장의 건의를 받아들이며 일치한 가결로 리흥국회장을 명예회장으로, 원 비서장(총무)인 필자를 제2임회장으로, 김봉세를 부회장 겸 비서장으로 통과하였다. 그해 2006년 8월, 필자가 절강월수외국어대학 한국어학과에 초빙된데서 김봉세가 제3임회장으로 추대되여 두만강수석회를 꾸준히 밀고나갔다.
한데서2006년은 희망과 행운으로 넘쳐난 보람찬 한해인것 같다. 이 한해 두만강수석회는 한맘으로 단합하여 연변박물관과 더불어 제1회 연변두만강수석전시회를 성과적으로 치르면서 두만강, 가야하를 오르내리며 대소 20여차 탐석행에 “중국지도” 등 수십점의 수석을 얻는 행운을 지니였다. 2004년 7월에 무어진 우리 두만강수석회로 말하면 수석농사의 기꺼운 성과로 아롱진 수확의 한해였다고 자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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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인생사를 봄에 심고 가을에 거두는 농사로 비유하면 한생에는 여러가지 농사가 있게 된다. 그 농사가운데의 한 농사가 자식농사로 펼쳐지니 김봉세회장은 자식농사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로 나타난다. 하해하여 회사를 꾸리다말고 그는 나라의 상업분야 일군으로부터 연길시 서시장에서 식품 등 전문가게를 차린 안해를 도와 몇년을 하루와 같이 가게운영에 나섰다. 그속에서 아들애와 딸애를 모두 어엿한 대학생으로 키워냈다. 아들애는 상해복단대학를 졸업하고 석사생으로 되여 상해에 집을 잡고 상해의 모 외국회사에 출근한다.
김봉세 부부한테는 그런 아들딸이 그리도 대견할수가 없다. 이 몇해간은 해마다 여름과 겨울이 되면 상해서 사업하는 아들딸을 찾아 상해에 와서 한때를 보내는것이 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았다. 2008년 겨울도 어김없이 상해에 나타났다. 그런 김봉세, 리분녀 부부가 이해 11월 27일 상해서 절강소흥으로 달려왔고, 우린 소흥의 로신옛집과 로신기념관을 함께 유람하는 기회를 가지였다. 11월 28일과 29일에는 우리 함께 절강~안휘 접경지대의 절강땅 림안시 룡강진 경내를 흐르는 림천강 수석탐석에 나서 보았다. 김봉세는 당신이 있어 상해서 소흥에 왔고 강남땅에서 탐석할수 있게 되였다면 감개에 젖어들었다. 나도 기분이 좋았다.
항주의 전당강을 지나고 서호가의 륙화탑을 지나며 우리는 몇시간만에 근 500리밖의 탐석지에 다달았다. 우리 연변은 마가을에서 겨울로 번지며 추위가 시작되는 한창 계절이라지만 황산 가까이 해발 1800여메터 청량산 아래 강남땅 탐석지는 대면적의 돌밭으로 펼쳐지며 온통 푸르른 산들이요, 림천강에 맑디맑은 물이 흘러내린다. 우리는 순수한 대자연이 살아있는 숲과 강가에서 맘껏 탐석하며 절강안휘 변계에 우리만의 탐석의 자취, 소중한 추억을 남겨보았다.
2010년에는 1월과2월, 김봉세~리분녀 부부는 또 상해에 왔다가 남하하여 수석의 고향으로 불리우는 광서 류주시로 가서 겨울의 한때를 보내며 남방의 수석세계에 깊숙히 빠져도 보았다. 김봉세는 바로 이런 사람이였다. 수석생활과 더불어 수석지식을 널리 받아들인데서 수석리론경지에도 올랐다. 수석지식을 론할 때 우리 연변에서 김봉세와 비길 사람이 있으랴 정도로 김봉세는 일가견을 가진 수석인으로 떠올랐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필자에게 김봉세와 같은 이런 절친한 친구가 있다는것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하기에 해마다 겨울방학이나 여름방학 연변으로 귀가하면 의례 만나야 할 사람들이 김봉세와 두만강수석회 석우들이다. 여름방학이면 어김없이 탐석행에 나서지 않으면 수석교류, 모아산 산행 등으로 즐거운 한때를 보내군 했다. 그때마다 시종 같이하는 이는 김봉세회장이다.
아마도 연변에서의 우리 만남은 2009년 7월 25일 그때가 최근년간 마지막으로 되는 만남인것 같다. 그날 우리는 김봉세회장, 한태익사무국장(총무)이랑 같이 수석회 고문 박식사장이 경영하는 한식관에서 점심식사를 하고는 박식사장의 안내하에 그가 새로 개척한 소하룡 동쪽골안 소나무숲 산행길을 따라 스케줄에도 없던 수석회산행을 가지였었다. 그해 8월부터 나는 겨레 양림, 무정 두 장군의 평전집필을 위해 4년 여름방학을 리용하여 두 장군의 발자취 좇아 전국으로의 답사길—하북, 산서 태항산항일근거지, 강서 서금으로부터 시작된 홍군장정길 주요 답사길에 오르다보니 연변에 갈 기회를 갖지 못함이 유감이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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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세회장과 나 사인 말그대로 스스럼없는 사이여서 만나면 반갑고 헤여지면 그리워 서로 북방과 남방6000리를 사이두고 자주 통화하지 않으면 자주 조글로 수석코너에 들어가 만나군 한다. 서로 탐석이나 수석뉴스를 수석코너에 올리면 서로 축하하며 수석에 취해 본다. 언제부터는 서로의 댓글이 시로 흐르며 수석 향기가 그윽하다. 김봉세는 북방에서, 신철호는 한국 대전에서, 나는 남방에서 수석으로 시적대화를 나눌 때 그 재미 여간만이 아니다.
2011년 이후 김봉세는 한국 강원수석회와 손잡았다며 여러번 전화가 왔다. 조글로 우리 수석회코너에도 상기 뉴스가 가담가담 올랐다. 지난해 년말인가는 강원수석회 분들 초청으로 부부동반으로 한국에 다녀오기도 했다면서 그리도 기뻐하였다. 지난해 12월, 내가 이름난 겨레 항일운동가 서일장군세미나와 서일평전 출간회차 한국 대구로 갔을 때, 한국 박사공부 체류중 대전에서 달려온 우리 수석회 신철호박사는 강원수석회와의 교류현황을 알리면서 그들 수석잡지에 우리 글들도 자주 싣고있다고 알려주었었다. 이런 기꺼운 소식도 김봉세와 나는 전화나 수석회코너로 자주 주고받았다.
이 몇해간 자주 연변에 가지 못한데서 우리의 만남은 앞에서 스쳐본바와 같이 상해가 아니면 소흥에서 이루어지기가 일쑤다. 상해에서의 첫 만남은 2008년 11월 21일인것 같다. 그날 일가 셋은 조카 결혼으로 연변행차 상해 홍교공항을 거치면서 김봉세회장 부부를 만났다. 김봉세 부부는 11월 12일 비행기편으로 상해 복단대를 졸업하고 외국회사에 근무하는 아들집으로 왔고, 우리가 상해 홍교공항에서 상해~연길행에 오른다는 것을 알고 홍교공항에 이르렀었다.
학기수업 중이여서 말미를 얻은 우리는 원래 김봉세회장 아들집에서 만나기로 약속되었다. 근데 우리의 오후 상해 도착이 늦어져 원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홍교공항에 곧추 갈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김봉세회장 부부는 모처럼 홍교공항까지 와서 우리의 상봉이 이루어졌다. 그 소행이 그지없이 고마왔다. 연변밖 머나먼 상해에서의 두 부부간 상봉, 정말 쉽지 않은 상봉이다.
2011년 2월 20일, 우린 상해에서 다시 만났다. 두어시간만에 쾌속버스로 상해뻐스남역에 이르니 약속을 받은 우리 연변의 두만강문인수석회 김봉세회장과 부인 리분녀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만남은 상해 회해중로와 우루무치 남(중)로 사이 공간에 자리한 인민음악가 섭이동상을 찾아보는 일이였다. 그런데 회해중로가 어디에 있는지 알수가 없다. 다행히 상해 지하철에 익숙한 김봉세회장이 지하철안내도에서 섭이동상이 자리잡았다는 회해중로(淮海中路)를 인차 찾아냈다. 그 덕에 우린 쉽게 지하철 1호선에 오르고 여러 정거장을 거쳐 상숙로(常熟路) 역에 내렸지만 찾고저하는 회해중로는 쉽사리 나타나질 않는다.
그날 우리는 섭이동상을 찾느라고 고생이 많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물으며 걷고걸어 먼저 부민로(富民路)에 위치한 전한동상(田汉铜像)을 찾아내고 다음 섭이동상을 찾아냈다. 섭이동상은 그닥 넓지 않은 공간지대에 자리하고 2월의 겨울이여도 겨울기간도 푸르싱싱한 강남의 나무들에 쌓이여 스산한 감을 주지 않았다.
상해 섭이동상 답사는 우리 두 가족의 공동답사로서 필자가 “예술세계”에 련재하고있는 김염련재를 위한 현지답사의 일환이였다. 섭이와 김염은 상해시절의 절친한 친구로서 김염을 쓰자면 섭이가 자주 등장하게 된다. 상해 섭이동상도 김염련재를 마무리는 현지답사의 하나로서 올해 2012년 예술세계 제2호에 실리였다. 그런데 편집부에서 그날 같이 답사한 김봉세 부부사진을 올리지 않은데서 필자로 말하면 여간 유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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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여름방학도 례외없이 필자는 연변으로 귀가하지 못하고 양림, 무정 발자취를 추적하며 운남~귀주~사천~감숙 홍군장정길 답사에 나서보았다. 답사도중에 사천땅에서 대면적의 수석산지를 발견하고 장강과 금사강, 대도하 등지에서 탐석도 하면서 괜찮은 수석 몇점을 얻게 되였다. 2011년 7월24일, 사천땅 대도하의 로정교와 대도하 안순장을 답사하던 필자는 대도하수석을 안고 기쁜나머지 핸드폰으로 멀고먼 연변의 김봉세를 찾았다. 내가 사천에서 대면적의 수석산지를 찾았고 수석 몇점도 손에 쥐였다고 하니 김봉세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우리 수석인들은 수석산지를 발견하거나 맘에 드는 수석을 얻으면 서로 알리며 같이 기뻐하는것이 통례로 되여있다. 우리 문인수석인들 가운데는 연변의 탐석은 두만강에서 시작되여 두만강에서 끝을 본다는 말이 있듯이 김봉세를 비롯한 수석회 석우들이 2010년 9월이후 두만강 삼합진 북흥~개산툰진 대산 사이 며칠간 두만강 구간탐석에서 누구나를 막론하고 몇해만에 탐석대풍이란 쾌거를 이루어내니 머나먼 6000리 밖 필자도 그렇게 기쁠수가 없어 즉각 “오호라~두만강 탐석 대풍이로다”글과 함께 그들의 현지탐석 사진을 다시 편집하여 조글로 수석코너에 올린바 있다.
김봉세도 마찬가지. 그는 사천땅이 연변과 비슷한 수석산지라는것을 들은적이 있다면서 우리 둘이서 전문시간을 내여 사천 수석탐석을 하자고 약속을 가지였다. 늦어도 2012년 나의 여름방학 시간을 리용하자고 속셈을 나누었다. 둘은 핸드폰으로 어린애들처럼 찧고박고 웃으며 야단을 부리였다. 연변의 수석산지가 거의 고갈된 현실에서 그 거리는 여하하든 연변밖 수석산지의 발견은 우리를 그토록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갔다. 그런데 김봉세는 그 약속을 지킬수가 없었다.
나도 련속 들이닥치는 서일평전과 양림평전 등 집필과 출판으로 정상일상이 아니다. 시간과 정력을 최대한 집중하느라고 2011년 7월부터 지금까지 1년간 조글로를 비롯한 문화사이트들에서 손을 뗐다. 웬간한 일이 아니고는 대외련락도 철저히 막아버렸다. 두만강수석회도 례외가 아니다. 그러던 2012년 3월의 어느날, 김봉세한테서 전화가 왔다. 여러번 련락해도 찾을수가 없었단다. 나는 미안하다며 나 일정이 그렇게 되였다고 알리였다.
뒤미처 김봉세는 련락도 못하고 죽을뻔 했다면서 자기가 불치의 위암이라고 한다. 나는 깜짝 놀랐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위암류는 생존률이 따르니 남들의 경험이랑 잘 받아들이며 주의를 돌리면 괜찮다고 진정제를 놓았다. 사람됨이 락관적인 김봉세도 자기는 쉽게 죽지 않는다며 허허 웃었다. 그후도 우린 수차 전화통화를 가지였다. 학기도중이여서 쉽게 달아갈수도 없었지만 필자로서는 위암이니 잘 다스리면 적어도 몇년은 문제가 없을것이라고 보았다. 돌아오는 여름방학이면 무조건 연변으로 달려가리라고 맘먹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후에야 안일이지만 갖은 방법을 다해도 김봉세의 병세는 차도가 보이지 않고 급격히 악화되여 갔다. 문제는 모든 음식물로 넘길수가 없이 다 토한다고하니 말이아니다. 그런줄도 모르고 나는 긴장한 학기가 어서 지나고 여름방학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였다. 그 와중에 한동안은 전화통화도 가지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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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시 전화를 든것은 5월 하순의 어느날. 댁에 두어날 련속 전화를 걸어도 안되여 김봉세의 핸드폰에 직접 걸었다. 김봉세는 지금은 전화를 받기어려우니 저녁에 다시 걸라고하였다. 목소리가 많이 변했다고 느끼면서도 죽음까지는 생각지도 못하여 그날 저녁 다시 전화를 걸지 못했다. 학기도중 시험을 치르느라고 깜박 잊고있었다. 며칠 후에 다시 전화하니 안해되는 리분녀가 첫 마디에 “갔소!”하는것이 아닌가. 다시다시 물어도 갈길을 갔다는 말은 변함이 없다.
머리가 뗑해났다. 불치의 병을 알아서 몇달이 되지 않는데 그렇게 빨리 갈수가 있느냐는 물음에 갖은 방법을 다해도 어쩔수가 없었다고 터놓는 김봉세의 안해, 나는 더이상 할말을 잇지 못하였다. 건강은 있을 때 지키라고 하지만 잘 안되는것이 바로 건강관리다. 누구나 자기는 건강하다고 믿지만 그 믿음속에서 건강이 무너지는것을 모른다. 알았을 때는 모든걸 잃을 때이다. 김봉세도 그러한가부다. 그로부터 두달이 훨씬 지나도록 나는 추모의 글을 쓸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눈만 뜨면 김봉세가 삼상히 밟혀오며 천국으로 떠났다는것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먼저 가고 후에 가는것이 인생사라 하거늘 현실을 정시해야만 했다. 두만강수석회의 석우들이 추도식에 참석하였다하고, 인민공원—박창호님이 6월 1일 조글로 수석코너에 천국으로 떠났다는 간단한 소식을 내지 않았는가. 가는 세월을 누가 거역하리오마는 사람 산다는게 이리도 허망한가 싶었다. 1년동안 수석회코너에서 잠적한 나는 다시 돌아와야 했고, 추모글도 올려야 했다. 그러는 내 마음은 슬프기 그지 없다. 지금도 전혀 믿어지지가 않는다.
내 맘속 김봉세친구는 나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격려와 희망을 주며 받들며 서로서로 시련의 고비를 넘어온 막역지우이고 많고많은 소중한 추억을 남긴 사람이였다. 이제 남은 제2인생 어떻게 살아갈까, 내가 서 있어야 할 삶의 자리는 어디일까~~이러루한 인생사 과제를 우린 수시로 교류하며 실천하며 제2인생의 최대의 취미생활로 수석을 선택한, 수석으로 항상 생활에너지가 넘치고 활력으로 넘치던 절친한 친구였다.
김봉세는 이러한 사람이였다. 일찍 화룡시위 조직부 조직과 과장, 화룡시 문화국 당위서기, 연변대학 병원 당위조직부장을 지내던 뜨거운 사람이였고,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아들딸을 대학생으로, 석사생으로 키운 자애로운 아버지였고, 안해 리분녀를 그지없히 사랑하는 미더운 남편이였고, 우리 연변 수석문화의 번영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 선줄군이였고, 한국 강원수석회와 석연을 맺고 오가며 교류하던 독실한 수석인이였고, 수석시를 자주 쓰며 유망한 시인으로 커가던 수석시인이였다. 이 추모글도 수석인 김봉세의 시 “돌 앞에 서면”으로 마무리어 본다.
돌 앞에 서면
부끄러워지는 마음
만고풍상 다 견디고
풍아(風雅)의 극에 이른
주먹만한 수석 앞에서
개미같이 작아진다
돌처럼
말없이
정직하지도
진실하지도
단단하지도 못하고
홀연
네 앞에 다시서면
무아지경에 빠져
숨을 곳 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2008년 8월 5일
2012년 8월 8일, 강남 두앵원에서
2013년 5월 30일 보충 수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