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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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궁’회귀본능 댓글:  조회:580  추천:0  2020-07-08
[길신론평] ‘자궁’회귀본능 소설가 김혁의 단편소설 〈련꽃밥〉을 평함 ⊙우상렬 인간에게는 ‘자궁’회귀본능이라는 게 있다. 우리가 나서 자란 고향이 바로 우리의 ‘자궁’의 하나. 인간은 어디에 가든 이 ‘자궁’을 잊을 수 없어 항상 그리워한다. 그래 ‘자궁’회귀본능이라는 것을 외우게 된다. 김혁의 단편소설 〈련꽃밥〉(‘두만강’ 문학상 수상작)은 바로 우리의 ‘자궁’회귀본능을 이야기하고 있다. 작품 시작에 주인공은 페촌이 된 고향마을을 찾아간다. 그것은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찾는 것이였다. 어쩌면 주인공은 고향을 잊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고향이 물질적으로 가난해서 주동적으로 떠났으니 말이다. 이것이 의식세계의 직실한 보기이리라. 그런데 “간밤에 고향으로 간다는 흥분에 꺼둘려 충전을 깜박”한다. 고향은 무의식적인 ‘자궁’회귀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흥분된 것이다. 이런 ‘자궁’회귀본능은 타향에서 고생을 하면 더 발동되는 법이다. 주인공을 보자. 그는 랭동창고에서 악덕업주를 만나 육체적 고달픔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인격적 모욕까지 받으며 ‘시까름’을 당한다. 그래서 경남의 오지 한우농장에 숨어들었다. 그리고 안해의 위장결혼이 ‘진짜’결혼까지 가는 수모를 당하기도 한다. 안해와의 해후는 비극의 생생 보기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 고향은 “한때는 제법 풍요와 번성을 자랑했던 마을이였다.” 바로 이 마을에서 주인공은 마을문화관의 책상물림―화이트칼라로 일을 했는데 비교적 잘 나가는 축이였다. 그래서 수상도 하고 사랑도 싹트고 마을에서 가장 고운 련꽃같은 안해를 얻게 된다. 그리고 자기를 꼭 빼닮은 아들도 보게 된다. 한마디로 여기는 꿈이 피여나고 행복이 무르녹던 곳이다. 현실과 과거의 이런 대비 속에서 자연스럽게 무의식적으로 피여나는 것이 ‘자궁’회귀본능이다. 이는 일종 향수이기도 하다. 이런 ‘자궁’회귀본능은 객관적인 계기나 자극에 의해서도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이 작품에서 마을의 련못이 자연히 “마을 앞 커다란 자연못에 련꽃이 무성해 련화촌으로 불리던 고향마을”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시도 때도 없이 련못에 나와 ‘자궁’회귀본능 즉 향수를 달랜다.“그 감흥에 옮아들어” “우리 연변에도 련이 난답니다. 두만강 홍련이라고”는 직접적인 주석으로 된다. 여기에 농장주의 “그럴테지,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고향의 제것이 더 아름다울 걸세”는 정곡을 찌르며 가슴에 와닿는다. 여기에 농장주는 한술 더 떠 “이보게 옌벤 나그네, 이제 제것을 완상(玩赏)하러 가시게. 꽃잎이 싹 다 지기전에 말일세.”는 직접적인 추동으로 된다. 이런 ‘자궁’회귀본능은 삶의 도리나 리치를 터득하게 되면서 실천으로 나아가게 된다. “련꽃을 마음에 들이면 욕심을 씻고 평정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선친은 늘 말씀하셨네. 무욕의 평정한 마음은 안락과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데 선친께서 가르치셨던 그 간단한 리치를 난 여태 실천해 오지 못했지.” 농장주의 이 말은 바로 그간의 사정을 말해준다. 그래서 주인공이 “나도 여태 완상할 줄 모르고 살아왔슴다. 그 꽃 말임다.”라고 되뇌인 것도 자연스럽다. 이제 주인공은 진정으로 ‘완상’하고 나면 자기도 모르게 그 ‘자궁’회귀본능이 작동되여 귀향의 길에 오를 것이다. ‘자궁’회귀본능—사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가장 아늑한 ‘자궁’같은 고향을 그린다. 이것은 어쩌면 집단무의식 같은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그런데 우리는 왜 이 아름다운 못을 버리고 뿔뿔이 헤여져 떠났던 것인가?”라고 하며 자기도 모르게 반문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집단무의식을 의식적으로 끌어올려 음미하며 완상하게 될 때 고향은 이제 추물이 아니라 더 아름답게 안겨온다. “고향의 련못은 스스로 꽃잔치를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식물, 동물 등 생명의 하모니. 그것은 유구한 자연의 원생태. 한국 한우농장의 인공적인 것보다 더 진실하고 확실하다. 자연은 그대론데 사람은 가고 없구나(物是人非). 그래서 결국 겨우 필림 한 장으로 달래보는‘자궁’회귀본능. 현실은 이외에 별도리가 없단다. 작품은 “빨리, 또렷이 인화되라고 사진을 따뜻이 손아귀에 품어 가슴에 대였다. 내 가슴에서 련꽃 한점이 바야흐로 피여오르고 있었다.”로 마감한다. 여기서 련꽃은 ‘자궁’회귀본능을 달래는 하나의 상징코드이다. 한마디로 〈련꽃밥〉은 식상하기 쉬운 한국제재를 정신분석학적인 ‘자궁’회궁본능이란 집단무의식으로 풀이하여 새롭다. 이것은 재한 조선족들에게 하나의 귀향의식을 자극하기도 한다. 동시에 조선족 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창출하여 긍정할 만하다. (작자는 연변대학 교수)[길신론평]‘자궁’회귀본능 —소설가 김혁의 단편소설 〈련꽃밥〉을 평함 ⊙우상렬 인간에게는 ‘자궁’회귀본능이라는 게 있다. 우리가 나서 자란 고향이 바로 우리의 ‘자궁’의 하나. 인간은 어디에 가든 이 ‘자궁’을 잊을 수 없어 항상 그리워한다. 그래 ‘자궁’회귀본능이라는 것을 외우게 된다. 김혁의 단편소설 〈련꽃밥〉(‘두만강’ 문학상 수상작)은 바로 우리의 ‘자궁’회귀본능을 이야기하고 있다. 작품 시작에 주인공은 페촌이 된 고향마을을 찾아간다. 그것은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찾는 것이였다. 어쩌면 주인공은 고향을 잊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고향이 물질적으로 가난해서 주동적으로 떠났으니 말이다. 이것이 의식세계의 직실한 보기이리라. 그런데 “간밤에 고향으로 간다는 흥분에 꺼둘려 충전을 깜박”한다. 고향은 무의식적인 ‘자궁’회귀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흥분된 것이다. 이런 ‘자궁’회귀본능은 타향에서 고생을 하면 더 발동되는 법이다. 주인공을 보자. 그는 랭동창고에서 악덕업주를 만나 육체적 고달픔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인격적 모욕까지 받으며 ‘시까름’을 당한다. 그래서 경남의 오지 한우농장에 숨어들었다. 그리고 안해의 위장결혼이 ‘진짜’결혼까지 가는 수모를 당하기도 한다. 안해와의 해후는 비극의 생생 보기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 고향은 “한때는 제법 풍요와 번성을 자랑했던 마을이였다.” 바로 이 마을에서 주인공은 마을문화관의 책상물림―화이트칼라로 일을 했는데 비교적 잘 나가는 축이였다. 그래서 수상도 하고 사랑도 싹트고 마을에서 가장 고운 련꽃같은 안해를 얻게 된다. 그리고 자기를 꼭 빼닮은 아들도 보게 된다. 한마디로 여기는 꿈이 피여나고 행복이 무르녹던 곳이다. 현실과 과거의 이런 대비 속에서 자연스럽게 무의식적으로 피여나는 것이 ‘자궁’회귀본능이다. 이는 일종 향수이기도 하다. 이런 ‘자궁’회귀본능은 객관적인 계기나 자극에 의해서도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이 작품에서 마을의 련못이 자연히 “마을 앞 커다란 자연못에 련꽃이 무성해 련화촌으로 불리던 고향마을”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시도 때도 없이 련못에 나와 ‘자궁’회귀본능 즉 향수를 달랜다.“그 감흥에 옮아들어” “우리 연변에도 련이 난답니다. 두만강 홍련이라고”는 직접적인 주석으로 된다. 여기에 농장주의 “그럴테지,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고향의 제것이 더 아름다울 걸세”는 정곡을 찌르며 가슴에 와닿는다. 여기에 농장주는 한술 더 떠 “이보게 옌벤 나그네, 이제 제것을 완상(玩赏)하러 가시게. 꽃잎이 싹 다 지기전에 말일세.”는 직접적인 추동으로 된다. 이런 ‘자궁’회귀본능은 삶의 도리나 리치를 터득하게 되면서 실천으로 나아가게 된다. “련꽃을 마음에 들이면 욕심을 씻고 평정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선친은 늘 말씀하셨네. 무욕의 평정한 마음은 안락과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데 선친께서 가르치셨던 그 간단한 리치를 난 여태 실천해 오지 못했지.” 농장주의 이 말은 바로 그간의 사정을 말해준다. 그래서 주인공이 “나도 여태 완상할 줄 모르고 살아왔슴다. 그 꽃 말임다.”라고 되뇌인 것도 자연스럽다. 이제 주인공은 진정으로 ‘완상’하고 나면 자기도 모르게 그 ‘자궁’회귀본능이 작동되여 귀향의 길에 오를 것이다. ‘자궁’회귀본능—사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가장 아늑한 ‘자궁’같은 고향을 그린다. 이것은 어쩌면 집단무의식 같은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그런데 우리는 왜 이 아름다운 못을 버리고 뿔뿔이 헤여져 떠났던 것인가?”라고 하며 자기도 모르게 반문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집단무의식을 의식적으로 끌어올려 음미하며 완상하게 될 때 고향은 이제 추물이 아니라 더 아름답게 안겨온다. “고향의 련못은 스스로 꽃잔치를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식물, 동물 등 생명의 하모니. 그것은 유구한 자연의 원생태. 한국 한우농장의 인공적인 것보다 더 진실하고 확실하다. 자연은 그대론데 사람은 가고 없구나(物是人非). 그래서 결국 겨우 필림 한 장으로 달래보는‘자궁’회귀본능. 현실은 이외에 별도리가 없단다. 작품은 “빨리, 또렷이 인화되라고 사진을 따뜻이 손아귀에 품어 가슴에 대였다. 내 가슴에서 련꽃 한점이 바야흐로 피여오르고 있었다.”로 마감한다. 여기서 련꽃은 ‘자궁’회귀본능을 달래는 하나의 상징코드이다. 한마디로 〈련꽃밥〉은 식상하기 쉬운 한국제재를 정신분석학적인 ‘자궁’회궁본능이란 집단무의식으로 풀이하여 새롭다. 이것은 재한 조선족들에게 하나의 귀향의식을 자극하기도 한다. 동시에 조선족 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창출하여 긍정할 만하다. 길림신문 
1    우리에게는 할 말도 많더라 댓글:  조회:2461  추천:2  2012-07-31
우리에게는 할 말도 많더라  조글로포럼209.7~2010.6 칼럼평 우상렬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조글로는 조선족 글로벌화를 지향하는 중국조선족의 주요 사이트답게 좋은 글도 많더라. 여러 종류의 글들이 지천으로 널려있어 실로 인터넷사이트의 언권, 언론 민주화의 향연을 맛보게 한다. 필자가 조글로 책임자로부터 부탁받은 ‘조글로칼럼평’ 대상-조글로포럼 2009년 7월~2010년 6월까지의 글들만 보아도 거기에는 통계해내기에 바쁠 정도로 많은 글들이 실려 있다. 말 그대로 ‘포럼’의 열린 토론의 장 특색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조글로 "포럼글마당"에 추천되어 있는2009년 7월~2010년 6월까지 글들을 주요 대상으로 하고 그 외의 글들은 참조에 기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필자가 ‘칼럼평’을 부탁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들을 단지 칼럼의 시사성, 의론성, 간단명료성 등의 잣대로 재단하여 많은 좋은 글들을 배제하기에는 너무 아쉽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단지 칼럼만에 국한되지 않고 이런 좋은 글들을 아우러는 조글로 ‘포럼글’들을 대상으로 하여 논의를 전개하도록 하겠다. 그런데 지난 1년사이 발표된 천여편의 글속에서 여기 "포럼글마당"에 추천되어 있는 2009년 7월~2010년 6월까지 글들을 보더라도 200여편을 훨씬 웃도는 수자가 된다. 내용상으로 볼 때 너무 다양하여 갈피를 잡기 힘들다. 그래서 글 조직의 편리상 논의의 대상을 중심으로 하나의 카테고리를 마련해보았다. 근간에 많이 말하는 ‘담론’의 개념을 끌어들여 담론의 대상 차원에서 조선족 말하기, 한국(조선 포함) 말하기, 중국 말하기, 그 관계 말하기로 짜보았다. 본고는 이런 카테고리속에서 대표성적인 글들을 중점적으로 분석하는 画龙点睛 방식을 취하도록 하겠다. 2. 담론 대상 1)조선족 말하기 (1)존재의 이유 주지하다시피 조선족은 이주민족이다. 그렇다해서 조선족은 남의 땅에 와서 借花献佛하는 철면피상을 보였거나 얹혀서 얻어먹는 가련한 상도 보이지 않았다. 조선족은 与天斗,与地斗,与人斗하며 휘황찬란한 개척사, 혁명사, 건설사를 선보였다. 그래 ‘산에 산마다 진달래, 마을에 마을마다 열사비’라 했던가. 이런 조선족의 역사는 두고두고 외워지고 읽히워져야 한다. 그것은 조선족의 가장 확실한 존재이유의 하나로서 민족의 구심점과 자부심이 되기 때문. 이수산의 “조선족사회 현안진단과 대책연구”로 기획된 세 번째 편인 ‘산마다 진달래요, 마을마다 렬사비’와 김성룡의 “영원한기념비--해방전쟁시기조선민족의 투쟁사 답사(1)(2)”는  그 전형적인 보기가 되겠다. 앞의 글을 보면 ‘이 글을 쓰게 된것은 항일련군의 비장한 력사를 기념하기 위해서이며 왜곡된 력사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항일련군에는 바로 조선족의 항일건아들이 많았다. ‘유난히 가렬처절한 항일투쟁속에서 조선족 전사들이 한족, 만족, 몽골족, 회족 등 형제 전사들과 함께 생사를 함께 하면서 맺은 계급적, 형제적, 동포적, 고향적 우의는 선혈로 맺어진것으로서 그 어떤 감정과 우의보다도 끈끈했다. 당시 3-5명 항일련군 전사속에 1명 조선족 전사가 들어있었는데…’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동북항일련군기념관에 진렬된 60여명 항일장령과 저명한 렬사가운데 허형식(…필자 약함. 이하 동) 등 20명 조선족렬사의 영웅이름들이 기재되여있다. 동북항일련군 제2 군단에서 조선족 전사가 절대다수를 차지했고 제1, 제7 군단에서도 조선족 전사가 절반 가량이나 차지했었다.’ ‘문헌의 기재에 따르면 동북에서 6만 2942명 조선족 청장년들이 참군했는데 선후로 항일전쟁, 해방전쟁 등에 참가하여 3만여명이 희생되였다. 연변지역만도 1만 3450명 렬사를 갖고 있다. 해방전쟁시기 몇십만 조선족 해방군 전사와 군중들이 전선을 지원하는 전시복무사업과 중국 전역을 해방하는 전투에 참가했다.’ 뒤의 글을 보면 “‘8.15’광복으로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까지, 중국내 이주해 살아오던 조선이민들이 중화민족의 일원인 중국조선족이 된 이 거창한 력사를 밝혀내고 방송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중국조선족의 력사와 공적을 알리기 위해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선전처와 중앙인민방송국 민족방송센터는 공동제작을 기획하고 답사진을 구성하여 자유와 해방을 위해 중국의 거창한 력사대하속에서 자주적으로 자기의 립지를 다져놓은 중국조선족의 력사를 재조명하고저”한데 있다. 이 글에서 보면 ‘8.15’광복 후 ‘동북각지의 조선족은 조선독립동맹을 통해 공산당의 정치주장을 지지하면서 공산당부대에 적극 참가하여 흑룡강성 할빈지역, 목단강지역, 가목사지역, 길림성의 길림지역, 연변지역에 대량의 조선족 독립대대, 경찰대, 경비퇀, 보안퇀이 나타났다. 이들은 토비들로부터 마을을 지키고 사회치안을 유지했으며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위해 투쟁할 준비를 했던것이다.’ 당시 “목단강군구뿐만 아니라 북만의 합강군구(合江军区)에도 유명한 조선족부대인 ‘동철부대’가 있었다. 합강군구 1퇀 2영에 편입된 이 부대 영장은 한족인 류곤(刘坤)이였고 교도원 김동철(金东哲), 참모장 김해정(金海静)이하 600여명 장병은 모두가 조선족이였다./이밖에도 허태동(许泰东)이 조직한 목릉현조선독립영을 비롯해 빈현(宾县)(…) 등 많은 현에 모두 200여명 규모의 조선족 독립대대가 있었고 동흥(东兴)(…) 등 현에 100여명 규모의 조선족중대”가 활약했던 것이다. 이수산과 김성룡의 글은 각기 항일투쟁시기와 해방전쟁시기 조선족의 혁명업적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세찬 눈보라가 몰아치던 간거한 항일 투쟁 역사를  절때 잊지말아야하며 오늘날의 행복한 생활이 어떻게 왔는가를 더구나 잊지 말고 갑절 더 소중히 여기고 애호해야한다.’(이수산 글에서)와 ‘력사는 거울이다. 력사의 거울로 비춰보지 않으면 자기를 알수없고 오늘을 사는 자세를 바르게 가질수없다. 력사를 망각하는것은 배신을 의미한다고도 한다.’(김성룡의 글에서)고 호소한다. 이런 글은 쉽게 씌어지는 글이 아니다. 실로 두 발로 열심히 뛰며 힘들게 쓴 글이다. 이수산은 ‘항일련군을 기념하기 위해 나는 수차 할빈 동북항일련군기념관을 참관하여 항일련군 장령과 렬사들의 자료를 하나하나 찾아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김성룡은 ‘로인분들의 베개가에 귀를 대고 마지막 숨결을 느끼면서 그 격정의 나날들을 알아야했고 력사의 현장을 검증해야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경의를 보내고 싶다. 그럴진대 조선족 내지 그 역사에 대한 비방이나 왜곡은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이수산의 “조선족사회 현안진단과 대책연구”로 기획된 두 번째 글 ‘조선족, 역사와 현실바로잡기에 나서야’는 이 방면에 바쳐진 글이다. 작자는 이 글에서 ‘지금 중국의 주요한 매체 사이트에서 한국 조선에 빗대고 우리조선족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평가 심지어 비하 중상 목욕이 범람하고 있음을 10만명도 넘는 조선족 지성인들은 간과하거나 묵인하고 있다. 요사이 이러한 오해 비방과 목욕으로 가득찬 문장이 홍콩의 (凤凰网)(新浪网)홈페이지에서 공공연히 나돌고 있어 독자가 이미 10만명을 넘어섰다. 이러한 민간 요언과 비방이 나돌며 간부들과 국책에도 엄중한 영향을 준다는 점’에 대해 심한 우려를 나타낸다. 그리고 ‘후에 안일이지만 우리조선족의 항일투쟁 해방투쟁 신중국창설과 건설에 관한 역사는 우리만 알고 있지 중국사회에선 별로 알려지지 않은것도 사실’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이에 단지 감성적인 의분이나 안타까움이 아닌 대책도 내놓고 있어 더욱 좋다. ‘각급정부의 민족간부들, 천여명을 해아리는 연변대학교수님들, 소수민족의 최고학부인 중앙민족대학과 중소학교 교원들, 민족일보사 잡지사 출판사 방송국 문화관 연구소 및 사업단위와 기업의 전업일군 등 우리민족의 지성인들이여, 우리들만이 자랑하고 흥분하며 옥신각신하시지 말고 당당한 중화인민공화국공민으로서 중국땅에서 떳떳히 발 붙이고  국어인 한어나 영어로 우리의 역사와 공적을 더 많이 홍보하여야할것이며 (新华网)(人民网)(光明日报网)(凤凰网)(新加坡早报)(搜狐网)(新浪)(雅虎)망 등 주요한 신문매체 사회여론과 민족사업에 더 많은 관심을 돌리며 참여하고 홍보를 한어로 된 문장을 모두다 (百度) (谷歌)등 검색 사이트와 중요한 홈페에지에 올려서 에 적극 나서야 할것이니 이것이 바로 역사 현실과 미래의 주인공정신이고 중국공민으로서 참다운 인간의 삶의 자세일것이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항상 하며 수수방관하면 언제가면 제 발등에 불덩어리가 꼭 떨어지게된다.’고 민족의 지성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필명 思考民族을 단 ‘有尊严的中国朝鲜族农民’도 같은 맥락의 글이다. 조선족은 실로 깔볼 족속이 아니다. 당하면 ‘무지랭이’ 농부도 당당히 나선다. 이런 글들은 투철한 역사의식 및 민족적 사명감과 의무감이 흘러넘친다. (2)조선족은 지금… 개혁개방 후 조선족은 눈을 세계로 돌리게 되었다. 특히 1990년대에 들어서 중한수교 후 한국에 드나들면서 많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었다. 세계적 범위에서의 탈이념적인 민족성 및 뿌리의식, 그리고 디아스포라논의의 확산은 여기에 부채질을 한 셈이 된다. 이로부터 조선족의 민족성과 국민성 간의 이중정체성 갈등문제가 야기되기도 했다. 민족정체성에 대한 쟁론문제는 단지 학술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 민족의 입지나 주체문제와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일단 학술적으로 잘 밝혀져야 할 문제인 것인만은 틀림없다. 조성일('조선족과 조선족문화 이중성재론'), 김호웅('중국조선족과 디아스포라’)과 황유복(‘이중성성격의 사람은 있지만 이중성민족은 없다’, ‘中國 朝鮮族의 文化共同體’, “‘조선족’은 누구인가”, ‘100% 조선족’, ‘게임을 하겠으면 룰을 지킬 줄 알아야’)의 조선족 정체성문제를 둘러싼 쟁론은 언술상에서 일부 문제점이 없지 않아 있지만 학술적으로는 상당히 수준급이다. 특히 김호웅의 ‘중국조선족과 디아스포라’에서는 조성일과 황유복 논쟁의 문제점을 치밀하게 살펴본 후 통속성을 기하면서 조선족의 디아스포라적인 성격,이중문화신분, “제3의 영역” 및 “접목의 논리” 등에 대해 학술적으로 깊이있는 천명을 하고 있다.그리고 김호웅은 계속해서 ‘다문화사회와 소수자의 목소리’에서는 주로‘이민열조와 주변부 문화의 붕괴위기’,‘경계의 공간과 숙명적인 공존’,‘정체성의 분열과 동화의 비애’를 둘러싸고 중국 주류민족과 조선족의 갈등과 화해의 논리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이를테면 한국과 중국 사이에 그 어느 쪽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부평초처럼 떠도는 중국조선족 군체(群體)가 모국의 문화와 중국의 중심문화 사이에서 겪는 이중정체성 갈등과 그들의 민족적정체성 찾기는 다문화주의담론의 중요한 화두로 떠올라야 할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수산은 ‘조선족의 정체성물음과 간명해답’에서 도표형식으로 조선족과 화교(한족)의 경우를 일목요연하게 비교학적으로 제시하여 조선족의 정체성문제를 인식하는 하나의 참조계를 제공하고 있어 좋다. 이런 조선족의 정체성에 관한 논의는 ‘우리의 역사와 민족적 정체성 및 향후 생존과 발전전략에 관한 원론(原論)적인문제’(김호웅의 ‘중국조선족과 디아스포라’의 ‘1.머리말’에서)로서 상당히 중요한 의의를 띠고 있다. 이런 쟁론은 워낙 중요하고 민감한 사항이라 네티즌들도 많이 참여한 기꺼운 양상을 보이고 있다. 조선족이야말로 与时俱进. 역동성이 넘친다. 그래서 ‘신조선족’이란 말이 나왔던가. 김문학의 시리즈글‘《신조선족》월경론(越境论)’은 그 대표적 논의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논의의 허점과 문제점들이 많다. 하나하나 보도록 하자. ‘1.신조선족의 탄생’, 새‘패턴’, 새‘경계’에 놓인 ‘신조선족’의 개념을 풀이하고 있어 새로운 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긍정적인 ‘신조선족’에 부정적인 비월경의 ‘구조선족’을 떠올리게 하는 문제점을 노정한다. 실은 ‘조선족디아스포라’에 다름 아닌 것을 가지고 굳이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낼 필요는 없는 줄로 안다. 하물며 ‘신조선족’이란 중국에 장기간 거주하면서 조선족 문화와 많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한국인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미 사용되고 있는 한 개념의 혼돈도 초래하니 말이다. 그리고 ‘2.포스트 개조론’, 일단 자기의 지지자들을 이용한 자화자찬이 문제고 근거와 설득력이 결여한 아집과 독단, 그리고 상대를 진짜 ‘타자화’하는데 문제가 있다. ‘3.방법으로서의 조선족’, “방법적 프리즘에는 큰 결함, 함정이 있다는 것을 필자는 ‘발견’하”고 “동일성속의 ‘이질성’팩터”를 강조하고 있는데 본질적으로 같은 조선족을 굳이 이런 시각으로 접근해야 되나, 하물며 현 단계 많이 같이 가고 있는 조선족들임에라!라는 의문이 남는다. 그리고 ‘4.조선족의 異時代的文化群’은 ‘3.방법으로서의 조선족’의 연장선에 놓이는 글로서 “2010년 현재에서 区分化하여 바라본 조선족사회는 그 특점을 필자는 ‘共時적 이질문화권’이라고 지칭하”고 있는데 본질적으로 같은 조선족문화를 지역적인 변화는 있을지라도 ‘이질문화’로 풀이하는데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5. 중국이 없는 중국조선족’, 중국이 우리 생활의 장이고 그것이 공기와 같은 것일진대 정치, 제도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사실 조선족의 생활문화도 한족文化을 비롯한 다른 민족문화와 얽히고설키여 있다. 이것이 연변, 전반 조선족의 실존이기도 하다. 그럴진대 ‘중국이 없는’ 논의는 근본적으로 문제점을 안고 있다. ‘6.小盆地型 문화’, 개혁개방 전 연변의 일부 문화적 특성을 짚어내고 있는 듯하나 그래도 地定적 냄새가 풍긴다. “7.경계인(境界人)으로서의 ‘디아스포라’”,  디아스포라도 민족성을 전제로 하고 일정한 국적을 가지고, 예컨대 조선족의 경우 ‘중국심’이나 ‘한국심’, ‘조선심’ 사이에서 좀 헷갈림뿐이지 ‘도대체 나는 어느 나라 국민일까 하는 자문자답을 수도없이 해보’고 “나는 늘 자신을 가리켜 ‘삼중 인격자’, ‘무국적 지구촌민’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할’ 정도의 무지각적이지는 않다. 그런 ‘자문자답’이나 ‘삼중 인격자’, ‘무국적 지구촌민’운운은 잠꼬대나 귀신씨나락 까먹는 소리에 불과하다. “8. ‘디아스포라’의 디아스포라”, 디아스포라 차원에서 조선족에 대한 연구시각을 좀 진척시킨듯하여 긍정적이다. 물론 재론의 여지는 있다. ‘ 9.동아시아의 3국어 사용자’, 조선족의 이중언어, 혹은 삼중언어사용자로서의 우세를 잘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족이 개혁개방 초기 외국어로 일본어를 선택한 것은 ‘배우기 쉬운’데 있은 것이지 “식민제국 언어의 ‘기억’이 재생”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10.경계를 넘는 신조선족의 글쓰기’, ‘11. ‘신조선족'의 국제적위상과 의미’도 역시 자화자친 투성이다. “12. 월경하는 ‘신조선족’의 新生活文化圈’”도 편파적인 논리가 관통되어 문제점이 야기된다. ‘13.조선족에게 정체성은 있는가’, 주요 문제는 비껴가면서 은근슬쩍 자기의 유식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신조선족’론에 김정룡의 ‘신조선족 개념 문제없다’의 긍정론과 주청룡의 “‘신조선족’論에 대하여 ”라는 부정론이 있어 언론의 민주적인 양상을 보는듯해서 좋다. 물론 네티즌도 긍정론과 부정론을 나타내고 있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부정론이 우세인듯하다. 이외에 이수산의 ‘’도 있다. 그런데 그는 김문학과는 다른 변화된 현실에서의 조선족이 국내외로 웅비하며 새롭게 거듭날 ‘신조선족’을 기원하고 있다. 그런만큼 이수산은 ‘주류의식과 변두리의식’에서 ‘’, ‘’, ‘’적인 ‘마음가짐과 자세’를 불식하고 ‘’, ‘ ’, ‘’적인 ‘주인공 자세와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논술하고 있다. 특히 민족자치지역일수록 더욱 그래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런 문제는 ‘공부를 많이해 학자가 된 대학교수들과 우리지성인들은 많이 심사숙고해야할 사회과제이기도 하다’고 하면서 조선족의 ‘주류의식’을 촉구하고 있다. 중국조선족의 중심은 연변-조선족의 상징은 연변. 우리는 이렇게 여기고 느끼고 자부심을 가져왔다. 그런데 김정룡이 우리의 달아오른 머리에 찬물을 끼얹어 제 정신이 들게 하여 좋다. ‘연변사람, 안쪽 사람 뭐가 다를까?’, 지정학적으로 본 연변사람, 참 문제가 많다. 특히 안쪽 사람에 비겨.  ‘맞아죽을 각오’로 쓰는 이런 글들에 나는 사랑의 눈길을 보내고 싶다. 그러나 연장선상에 놓인 그의 ‘연변사람 우월의식?’은 일부 현상들에 치우쳐 그것을 확대재생산하는 감을 주어 아쉽다. 나는 조선족은 官보다 民이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아래에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하겠지만. 우리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진정한 민족간부. 이런 차원에서 놓고 볼 때 오기활의 ‘민족지도자의 인격’에서 모든 민족간부들의 좌우명과 민족간부를 식별하는 시금석으로 추천한 ‘《민족을 생각하지 않는 민족간부는 자격이 없다》’는 우리 모두의 공감대를 형성할 것이다. 조선족은 용감하고 슬기롭고 위대한 민족. 한마디로 ‘우리는 자랑스러운 중국의 조선족’(주청룡). 박복선 특약기자의 ‘1.조선족 과학자들 중국 우주비행에 큰 기여’를,  차철구의 “《조선족 대외개방 3부곡》”에서 ‘1.조선족 산업민족’으로 거듭나는 모습, 윤운걸의 ‘조선족 한국행 잃은 것보다 얻은 것 많아’, 강순화의 ‘우리민족 녀성형상의 시대적 변천’에서 항일전쟁시기인 1930년대로부터 개혁개방을 실시한 8-90년대와 근년에 이르기까지 잘난 우리여성을 이야기하고 있어 기껏다. 그리고 세상은 돌고도는가, 장정일의 ‘인구의 이동과 역이동’은 귀국, 귀향창업자들의 이야기를 민감하게 포착하고 있어 좋다. 그리고 “‘선족’이라는 말을 쓰지 말자”(정인갑)는 조선족지성인의 조선족에 대한 옳바른 정명의 주장을 하고 있어 눈에 띈다. 이외에 김범송의 ‘재한중국동포들에게 드리는 글’은 2010 경인(庚寅)년 새해를 맞이하여 재한 조선족들의 한국에서의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새해에 따뜻한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위의 글들이 조선족 스스로가 조선족을 말했다면, 아래의 글들은 한국인들이 따뜻한 동포의 정으로 말하는데는 달던 쓰던 모두 좋다. 홍건영의 ‘조선족 사회의 어제와 오늘’, 조선족 사회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을 일반 독자를 위해 조선족 사회의 간략한 역사를 소개하고 현재 조선족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문제점으로 지적한 ‘코리안 드림과 조선족 공동체의 소멸’, ‘민족 정체성의 위기’, ‘위기 대응 능력이 부족한 조선족 지도층’은 몸에 와 닿는다. 작자가 2년 동안  연변에서 살았고10년 가까이 조선족과 부대끼며 살았고, 그리고 8년가량 ‘조선족과 한국인의 상호 이해와 교류’를 표방한 사이트 ‘연변통신’을 운영한 한국인이라 할 때 그의 조선족에 대한 이해는 비교적 정확하다. 심양백제원 여태근 사장의 ‘재중한식당, 조선족전통요리협회 보고 배우자’- 결함투성이인 듯한 조선족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니 기분 좋은 소리. 한인네트워크( 2010년 5월호)에 실린 ‘새로운 시대를 맞는 중국동포들’, 긍정적인 눈길로 한중수교 후 조선족의 현실, 그리고 희망찬 미래를 내다보고 있어 고무적이다.   (3)우환의식 중국은 아직도 격변기. 이 와중에 조선족은 흔들리고 휘청한다. 그래서 얻은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잃은 것도 적지 않다. 이로부터 민족 지성인들의 우려를 자아낸다. 특히 요 근간에 무슨 연룡도요, 선도구라, 연변은 기회이면서 심한 도전을 받기도 하는 듯하다. 자치주가 휘청하니 말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 이룡희는 얼마전 전국인민대표대회회의에서 ‘자치주’를 ‘시’로 고칠 의향을 제출한다. 심히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중국사회과학원 민족학-인류학연구소 교수 정신철이 나섰다. “’연변시’의 구상은 ‘연변조선족자치시’인지 아니면 일반 지구급’시’인지?” 정곡을 찌르는 물음이다. 그것은 ‘소위 경제발전구상만 강조하고 연변의 특수성, 즉 민족성을 회피한 감을 준’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현시점에서 보면 ‘자치시’설치가 아주 어려운 점, 그래서 첫째, 연변이 소수민족지역이라는 것을 잊지 말 것. 따라서 행정구역변경을 거론할 때 항상 ‘민족’을 빼놓지 말아야 할뿐만 아니라 더욱 강조하여야 한다. 두번째는 ‘민족자치시’ 설치 가능성을 잘 파악할 것. 만약 연변자치주가 ‘민족자치시’로 개칭되지 않고 ‘연변시’로 개설된다면 이를 극력 반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법은 민족자치를 약화 내지 취소할 가능이 있기 때문이다. 세번째는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연변만 대표한 것으로 보면 안 된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중국 200만 조선족의 중심역할을 하여야 하므로 자치주 책임자라면 ‘연변’울타리를 벗어나 더 큰 안목으로 전체 조선족사회 이익의 대변인으로 되어야 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지역의 교훈을 섭취해야 한다. 호남성의 장가계시나 료녕성 봉성시의 경우. 마지막으로 가령 ‘민족자치시’가 아닌 ‘연변시’가 사실로 된다면 중국 기타 소수민족의 미움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로 晓之以理,动之以情, 천만지당한 말이다. 진정한 조선족지성인의 참여의식 및 이성이 빛발치고 충정이 넘쳐난다. 이룡희 주장의 견해에 많은 조선족 네티즌들도 한마디 한다. 주장어른도 무서워하지 않고. 3월 9일, 인터넷 “길림신문” ‘연변《주》를 《시》가 아니라 《구》로 만들수는 없는가’‘를 보라. 조선족인민들은 축소지향의 ‘시’가 아니라 확대지향의 ‘구’다. 연변의 네티즌들과 독자들의 반응을 보자. 네티즌들은 부동한 각도, 부동한 측면에서 단마디명창으로 자기들의 견해를 표했다. 그중 다수가 ‘주’를 ‘시’로 만드는데 반대다. 모두들 오히려 ‘연변조선족자치구가 그립다’, ‘연변조선족자치구를 세워야 한단’다. 실로 ‘모두가 고향을 사랑하고 민족의 자치주를 사랑하는 마음의 발로라 하겠다.’ 民은 정의롭고 똑똑하다. 교육은 백년대계. 약소민족에게 있어서 교육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런데 조선족의 교육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조선족 지성인들에게 일단 교육 문제가 지대한 관심사로 떠오른다. 현 단계 ‘필자로부터’에서 지적하다시피 ‘산해관이남지역으로 조선족인구의 다량적인 이동은 이 지역에 민족교육의 필요성과 절박성을 초래하였지만 현재까지 산해관이남지역의 조선족사회현황과 민족교육현황에 대한 파악과 연구는 아주 결핍’한 상황하에서 정신철의 ‘중국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현황 및 대책’은 적시적이고 현실적이여서 좋다. 이 글의 ‘목차’만 보더라도 ‘서언’으로부터 시작하여 ‘1. 중국조선족교육발전 회고’, ‘2. 개혁개방이후 조선족교육의 새로운 도전’, ‘3.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필요성’, ‘4.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성원들의 민족교육의욕’, ‘5.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의 현황’, ‘6.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전개의 유형’, ‘7.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발전의 대책’으로 구성되었는데 조선족교육의 역사 및 현 단계 새로운 문제와 도전, 그리고 그 대책과 가능성에 대해 소상히 서술하고 있다. 실로 이 글은 ‘우리사회에서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사회와 민족교육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과 연구에 어떤 도움이 되’기에 손색이 없는 줄로 안다. 정신철의 ‘중국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교육현황 및 대책’이 그래도 희망적이라면 정인갑의 “‘새집거지역’조선족교육 비관론”은 이와 전적으로 다른 반대 견해를 피력하고 있어 재미있다. 아니, 단지 재미보다는 우리의 사색을 불러 일으킨다. 그것이 실제 학교를 꾸려본 작자의 肺腑之言일진대 더욱 그렇다. 좀 구체적으로 보면, 작자는 ‘1.새집거지역에 대한 국가정책의 결여, 2.조선족교육에 대한 학부모 열정의 부족, 3.조선족교원 업무수준의 低下, 4. 조선어교학 점점 어려워져, 5.조선어의 실용성 점점 약해져’에 걸쳐 비관론을 펴고 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안타깝기도 하다.                                  이수산의 “조선족경제문화발전대안 시리즈”는 조선족교육의 관념전환을 이야기하고 있어 돋보인다. “1. ‘돌아오는 교육’으로 조선족사회가 궐기한다”를 보면 작자는 단도직입적으로 “우리는 여태껏 인재교육에서 빠져나가는 ‘출세교육’에만 전념하면서 만족해왔다. 대학을 졸업해도 고향건설엔 별로 도움이 되지못했지만 북경 상해등 대도시와 해외에서 사업한다하니 부모들은 자랑스레 생각했고 마을사람들은 부러워하기도했다. 이러한 대세와 흐름이 우리고향마을과 민족공동체의 황페화를 가속화했다. 언녕 멀리내다보며 반성하고 수정해야했다.”로 조선족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로부터 “하나는 승학교육 즉 ‘출세교육’을 ‘돌아오는’ 교육으로 전환시키고  다른 하나는 중국에서 사업을 펼쳐야한다. 즉 ‘조국(고국)을 가슴에 안고 발 붙이며 세계를 내다보’(立足祖国,放眼世界)는 발전방향이 세워져야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현대농업을 구축하는과정에서 신농촌건설이 다그쳐지고 ‘돌아오는 교육’으로 도농통합발전이 추진된다는 점을 우리민족간부들은 이념과 발상으로부터 몸소 사회적 실천에 옮겨야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3.‘자주창신형’ 창업학교를 세우자”에서는 창신, 창업학교에 대한 일반적 논의 및 국외의 사례들을 거론하면서 조선족들에게도 ‘하이테크연구개발이 전공이였고 경영에 익숙하며  실무 경험이 있는분들은 고향에다 창업학교를 꾸릴 필요와 가능성이 있다. 연변과기대학과 연변과학원에서도 혹은 을 꾸릴수있다.’고 지적하며 ‘각급정부와 조선족사업단위 기업 등 민간단체에서도 후원해주어야한다’고 모를 박았다. 이외에 강순화의 ‘현시대의 가정교육은 어떻게 할것인가?’는 ‘가정교육의 새로운 개념’으로부터 ‘우리의 가정교육’문제를 끌어내오고 ‘우리부모들이 할수 있고 또 해야하는 몇가지’에 대해 논하고 있다. 역시 강순화의 ‘조선족교육과 그 문제점에 대하여(5)’에서는 이미 ‘조선족교육의 엄중한 실태’를 반영한 전제하에서 교사자질, 정부지지, 민족교육의 발전방향에 걸쳐 ‘조선족교육에 관한 몇 가지 건의’를 확실하게 하고 있다. 관본주의유습이 팽배한 우리 사회에서나마 民은 목소리를 낸다. 그래서 더 진귀하다. 정경락의  ‘연변주 인대 대표들에게 부탁한다’를 보라. 주인대 대표들에게 정부재정예산보고의 중요성을 환기시키고 그 중시도가 부족한 문제에 대해 첫째, 정부예산보고의 심의시간이 짧다. 둘째, 예산방안은 전문성이 너무 강하다. 셋째, 대조해보지 않는다. 넷째, 대표들의 책임성문제이다로 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재정예산에 대한 심사 문제를 풀자면 첫째, 예산보고를 통속하게 구체화하는것이다. 둘째, 심사에 충족한 시간을 주는것이다. 셋째,재정예산에 대한 중시도를 높이며 대표들의 전문지식수준을 높이는것이다로 세가지에 중시를 돌릴데 대해 국내외의 구체적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했다. 제목소리를 내는 民은 민주주의의 표상. 이 글은 민생에 중요한 문제를 투철한 기자의식으로 반영하여 눈길을 끈다. 조선족 담론은 위기의식이 많이 내비친다. 려호길의 ‘조선족사회의 위기와 위기의식’ , 조선족은 중국혁명에 커다란 희생을 내고 기득권을 얻었음에도 타민족에 비해 위기의식을 갖고 산다. 이같은 위기의식은 첫째, 과거 중국공산당의 거듭되는 정풍운동과 잔혹한 문화대혁명을 치른 결과이며 둘째, 당내인사들의 ‘사상의 고도의 일치성 유지’를 강조하는 공산당작풍(共産黨作風)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고 셋째, 소수민족 중에서 유일하게 ‘모국을 둔 민족’, 즉 역사적으로 2중국적자라는 신분에서 비롯된 것이란다. 논란의 여지는 많지만 그래도 사고해볼만한 점도 많다. 홍순범의 ‘깨여지는 가족공동체’에서는 주객관 원인으로 온전치 못한 조선족가족 위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허동식의 ‘잡담117 연변의 지역성적인 곤혹’에서는 연변의 지역성적인 곤혹을 경제발전 후진성과 침체성에서 찾고 있으며 경제발전저수준이 가져다주는 사회발전저수준과 밀접히 관련시키고 있다. 그리고 여러가지 기성조건의 결핍과 민간자본운영저수준은 연변경제의 변연화를 개변시키지 못하고 있으며 그것이 연변의 지역성적인 곤혹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또한 지역문화결구의 급변에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보다 치밀한 논의가 필요하나 그래도 사색의 거리를 던져준다. 그리고 ‘떠나기만 하고 돌아올 줄 모르는 출국인들’(김정룡)은 조선족의 많은 문제를 노정한다. 이를테면 ‘1. 한국이 조선족인구유동에 미친 영향, 2. 재한조선족의 삶의 변화, 3. 떠나기만 하고 돌아가지 않는 이유, 4. 누구를 위한 출국인가?’로 출국의 문제점이 노정된다. 그러면서 조선족의 새로운 가치관 및 생활경향을 잘 포착한 점이 돋보인다. 같은 김정룡의 ‘연변문화메카론 재고’는 조선족문화의 중심으로서의 연변의 문제점에 대해 현상만 보고 본질을 보지 못한 치명적인 한계점, 그리고 많은 편견과 독설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그래도 우리 스스로 자성케 하는 일고의 가치는 있다. 이외에 주봉의 ‘우리 노래를 더 잘 살리자’에서는 ‘지난 90년대를 잡으며 한국노래의 부단한 충격은 우리 노래로 하여금 그만 활기를 잃고 시들어가게 한’데 대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장연하의 “‘통이 커진’ 고향사람들”에서는 조선족농촌의 낭비벽 등 문제를 고발하고 있다. 김광석의 ‘언어는 인격의 거울’은 일부 조선족들한테서 보게 되는 무례한 언어구사를 꼬집고 있다. 나름대로 모두 귀를 귀울여볼만한 얘기다. (4)생존전략 위의 ‘(3)우환의식’을 나타낸 글들에서 우환의식과 더불어 대책이나 방안 같은 것들도 많이 제기하고 있는 내실을 기한 글들도 많았다. 그러나 살아남기, 그것도 잘 살아남기가 더 중요한만큼 전문 ‘생존전략’과 많이 매치되는 글들을 다루어보도록 한다. 황유복과 이수산의 글이 돋보인다. 황유복의 “중국 조선족의 문화공동체”의 ‘4. 조선족이 살아남으려면 민족문화를 공유할 수 있어야’에서 일단 ‘21세기에 조선족사회가 살아남는 길은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가는 길밖에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 다음, ‘조선족의 민족 정체성과 전통적 가치관을 유지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민족문화문제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교육을 들고 조선족단체들의 활약을 들고 ‘《글로벌조선족네트워크》의 구축과 상응한 시스템 도입’문제를 들고 있다. 지당한 말이다.  황유복은 ‘발전과 해체의 딜레마에 빠진 조선족사회’에서는 ‘조선족 사회가 전통적인 농업경제를 탈피하고 도시경제에로 진입하는 과정’에서의 발전과 해체의 딜레마에 빠진 조선족사회를 진단해낸다. 즉 경제적 수입의 증가를 실현하기 위해 민족교육체계의 붕괴, 민족문화영토의 상실, 출산인구의 기하급수적 감소 등 많은 귀중한 것들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있다. 그리고는 생존전략으로 ‘우선 사회와 경제의 균형적 발전이라는  핵심적 문제를 지혜롭게 풀어 나가기’, ‘조선족 기업인들은 자기들의 생존공간을 한국관련 기업으로 제한시킨 현실을 극복하고 자체적 발전공간과 미래의 진로를 고민하기’, ‘조선족기업인들은 우선 형제민족기업인들과 같이 ⟪중국특색⟫에 따라 ⟪중국 돈⟫을 벌기’, ‘조선족 기업들은 한국계기업들과 차별화된 ⟪중국특색⟫의 기업발전공간을 개척하는 동시에 한국계기업들과 생존을 함께하는 전략적 제휴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면서  자체적 발전공간과 미래의 진로를 개척해 나가기’를 제시한다. 그 넓은 시야에 손들고 만다.    이수산은 “사회 현안진단과 대안연구”의 한 사색의 갈래인 ‘창업은 가장 중요한 민족사업’에서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창업은 우리민족의 생존과 발전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부상하는것 같다.’고 하며 창업의 가능성, 도경 및 조치에 대해 설명하고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조선족경제문화발전대안 시리즈” “2. ‘창조적 경영’ 민족으로”에서는 “우리민족 특유의 ‘가교형’ ‘의존형’의 고정된 발전모델”에서 벗어나 ‘창조적 경영’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산업화, 정보화 사회에 맞는 그럴듯한 얘기다. 무명씨의 ‘《산해관이남지역 조선족도시공동체구축에 관한 조사연구》구상’은 현재 산해관이남도시에 조선족인구가 널리 분포되면서 도시민족교육실행문제와 민족정체성유지문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아직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지못하고 있다. 그래서 산해관이남 여러 도시지역의 조선족사회에 대한 현지조사를 통하여 조선족도시공동체구축에 필요한 조건, 당면한 문제 등을 파악하고 도시공동체구축방안을 탐구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실로 지상공론이 아닌 차곡차곡 해야 할 일을 제시하고 있다. 이승률의 ‘조선족사회대망론(待望論)’, 이 시대를 이끌 조선족의 대망론을 펴고 있어 기분이 좋다. 이를테면 ‘실제로 조선족은 태어나면서부터 중국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습득하는 환경에서 자란다. 그리고 고등학교 이후에는 일본어 또는 영어까지 교육받는다. 이와 같이 중국과 한반도 양대 국가 사이에 끼어 있는 변경 소수민족으로 이중 문화를 무리 없이 융합하고 재창조하는 유연한 문화적•감성적 특질을 생래적으로 갖추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변연복합문화(邊緣複合文化)형의 구역 가치와 경쟁력을 갖춘 집단으로 성장해 있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인정이 많고 우애롭다. 남의 고통을 좌시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미덕을 잃지 않고 있다. 여기에 근면한 성품과 명석한 두뇌로 중국 55개 소수민족 중 가장 뛰어난 민족으로 평가받고 있다.’로 조선족이 지니고 있는 우세를 구체적인 사례들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旁观者清이라 했던가, 한국인로서의 知中派, 知朝鲜族派인 이승률의 지론은 넓은 공감대를 형성할 것이다. 대한뉴스 국제부 이명근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사)동북아공동체연구회 이승률 회장은 ‘동북아시아 集團知性 조선족을 주목하라!’고 촉구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교육을 받은 조선족은 중국 식자들사이에서도 앞으로 큰 역할을 할 동북아경제공동체의 집단지성’으로서 앞으로 ‘한.중,일 간의 역사.문화.생활.경제등 여러분야內 이질적인 갈등요소를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유롭게 풀어나갈 집단은 조선족이 가장 유력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한국은 ‘이제 닫힌 민족주의가 아닌 열린 민족주의 차원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조선족에 대한 인재경영철학은 이제 더 이상의 '선택'이 아닌 ‘필수’”로 되어야 한다고 모박았다. 이외에 전정옥의 ‘관광업 브랜드산업으로 육성 절실’도 한 번 읽을만 하다. 2)한국(조선 포함) 말하기 한국은 조선족의 고국. 두말하면 잔소리. 그래서 조선족에게는 이래저래 할 말이 많다. 려호길의 ‘역사를 괴롭히지 말아라’에서는 미우나 고우나 조선족은 한반도사람들과 역사와 문화를 공유한 동포이며 어쩌면 ‘고국에 돌아와 살 수도 있는 민족’으로서 결코 미움으로 일관되어야 할 무리들이 아니다. 그들은 과거 조선인들의 후예로서 암울했던 한반도사이며 일제치하 서러웠던 한민족사이기 때문이다. 자기 역사를 괴롭히고 민족과 인권에 미성숙한 국민이 선진국 국민이 될 수 있다는 세상이 요상할 뿐이다고 한국인의 조선족에 대한 심각한 편견문제를 꼬집고 있다. 주청룡의 “적절한 명칭은 ‘재중동포’ 혹은 ‘중국동포’”는 한국에서의 조선족에 대한 호칭에 대해 나름대로 주장하고 있다면, 김정룡의 “얼빠진 ‘차오시엔족’ 표기”에서는 한국에서 ‘주체성과 정체성이 없이 자아중심이 되지 못하고 동포마저 상대의 입장에 서서 남의 발음에 따라 표기해야 하’는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주청룡이 ‘漢字교육의 필요성’에서는 한국에서 한자교육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도 간자체로 해야 한다고 피력하고 있다면, 김정룡의 ‘한국이 간자체를 거부하는 이유’에서는 한국이 간자체를 거부하는 국내외적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수산이 ‘한국어의 선진성’을 이야기했다면 주철룡은 ‘영어 발음을 대체할 새 문자를 만들려는 것은 찬성할 바 아니다’로 새 문자창제를 반대한다. 그리고 주청룡은 ‘두음법칙의 페단’에서 ‘(1)서로 다른 성들사이에 혼돈이 생긴다,  (2) 한 사람의 성이 경우에 따라 두가지로 된다,  (3) 친 형제사이에도 서로 다른 성을 가지게 되다,  (4) 성명권 침해로 된다, (5) 자전을 찾기에 불편을 준다. (6) 두음법칙은 한자어와 한자어단어의 원래의 의미가 상실된다’에 걸쳐 우점보다 폐단이 많은 한국의 두음법칙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주청룡이 ‘한국의 중국 인명,지명에 대한 나의 견해’에서 김광림 교수가 제기한 것처럼 한국의 중국 인명, 지명에 대해서는 우리의 한자음으로 부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필요에 따라서 한자를 병기하거나 원음으로 부르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현명한 방안이라고 지적한다. 방흥국은 “‘만주’를 없앱시다”는 한국사람들이 중국 동북3성을 ‘만주’라고 부르는데 대해 일제 식민지 잔재로 보며 시정할 것을 촉구한다. 박문희의 ‘아름다운 발’은 한국의 예체능계에서 성공한 인물들인 강수진, 김연아, 박지성의 상처투성이로 얼룩진 발을 통해 성공의 어려움을 보여주고 있다. 이경호의 ‘생식숭배문화로 보는 단군신화’는 생식숭배문화 차원 및 역사적 맥락에서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풍백, 운사, 우사를 풀이하여 고대한민족의 문화 본질과 정체성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되고저 집필된 것이다. ‘역사와 정체성’은 2009년 11월 17일 대한민국 고등학교 역사교육이 필수과목에서 선택과목으로 개정한 것을 계기로 한국의 역사의식을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은 조선족을 옳이 활용하고 있는가’에서는 조선족을 한국, 특히 한국 “‘관광업의 보석’으로 활용하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무명씨의 ‘연변에서 보는 중국과 조선의 보릿고개’는 중국의 농촌 개혁개방 전후의 경우를 이야기하면서 ‘연변에서 근심하는 조선의 농사’, 그러면서 조선의 농촌개혁을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주청룡의 ’천안함 침몰사건에서 내가 바라는 마음’에서는 한국인과 비통한 마음을 같이 나누면서 더 큰 비극을 우려해 제발 원인규명에서 북측의 소행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을 나타낸다. 이는 정치적 입장에서가 아니라 소박한 혈육의 감정에서이다. 워낙 남이나 북에는 모두 ‘나’의 혈육지친(血肉之親)들이 있고, 북이나 남이나 ‘나’에게는 모두 고국이기 때문이다. ‘나’는 남북이 화목하고 조화롭고 같이 잘 살기만 바라는 마음뿐이다. 전반 조선족의 마음을 잘 나타냈다. 한국인 스스로도 한국에 대해 할 말은 있다. 특히 조선족과의 관계속에서 할 말이 많은 것같다. 석일진은 ‘한국인은 조선족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에서 이제 한국인은 '중국의 조선족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로 고민하지 말고,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를 고민해야 한다. 말로만 '동포'라고 부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들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며 '동포'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고 한국인에 대해 실질적으로 촉구하고 있다. 이광표는 “동아일보” 기자신분으로 ‘다문화 정책, 이젠 조선족 동포에 주목할 때’라는 제목하에 高大 윤인진 교수의 논문 ‘코리안 디아스포라와 다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윤 교수의 논지의 핵심은 ‘그동안 국내의 다문화 연구와 다문화 정책이 비(非)한국계 외국인에만 주목했다면 앞으로는 국내에 들어와 있는 조선족 동포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윤 교수는 현실을 직시할 것을 강조한다. 90일 이상 장기체류하고 있는 조선족 동포는 2009년 7월 현재 44만3000여 명. 장기체류 전체 외국인 110만6000여 명 가운데 40%를 차지한다. 인구가 많을 뿐 아니라 노동 결혼 육아 주거 소비 등 다양한 방식으로 내국민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한국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윤 교수는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조선족 동포들이 빠진 상태에서 주로 동남아 등지에서 온 비한국계 외국인 이주민들의 적응과 사회통합에 대해서만 논의해 왔다’고 지적한다. 조선족 동포들을 한국 다문화 사회의 중요한 행위자로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는 말이다. 윤안진 교수의 지론에 공감되는 바가 많다. 한국인하대 교수 이진영의 ‘화교•조선족포용 역지사지 정책을’ 은 태국의 '화교화인' 전인대 직접 취재를 거론하면서 한국정부가 역지사지로 화교•中동포 포용정책을 펴 진정 행동으로 상호 신뢰를 보여줘야 한-중 공동번영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중, 조선족에 모두 플라스가 되는 지론. 3)그 관계 말하기 조선족과 한국은 불가불리의 관계를 가진다. 운명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 이로부터 이들 간의 관계는 하나의 주요 담론으로 된다. 김정룡의 ‘한자논란과 만주논란’은 ‘재한조선족은 한국에서 글을 쓰되 조선족의 이익에 관련된 내용이거나 기타 삶의 체험 혹은 그 어떤 분야의 지식을 담은 글을 쓰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그렇지 않고 우리 조선족과 아무런 관련이 없이 한국정부거나 언론 나아가서 한국정치에 향해 감 놔라 밤 놔라는 식의 글들은 조금 도에 맞지 않은 것 같다’로 재한조선족의 글쓰기 자세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 이유로 ‘조선족은 필경 중국공민이지 한국인이 아니다’는 대전제하에 구체적으로 ‘한자논란과 만주논란’을 들어 설명하였다. 한국과 중국 사이 조선족의 입지를 생각할 때 수긍되는 바도 많다. 이수산은 “중한‘문화분쟁’해소법”으로 먼저 중한 양국국민간에 쌓인 오해와 갈등이 무엇인가 분석하고 그것의 해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로부터 그 오해를 ‘(1)다같이 을 쇠고 즐기는 해법, (2),옛날 옛고향이 그리워 중국의 이름을 그대로 옮겨감, (3)역사는 두나라가 함께 풀고 써내려가야, (4)먼저개발과 공동발전’으로 풀고 ‘2,상부상조, 3,콘텐츠시대의 인터넷과 네티즌, 4,공동분모와 밝은 미래’로 미래비전을 제시했다. 김범송의 “안중근과 손중산, 그리고 '동북아공동체'’”는 현대에 있어서의 한국과 중국의 위인들의 공동한 사상을 짚어본다. 이경호는 ‘홍익인간과 중국공산당의 종지’로 한국의 전통사상과 중공의 매치점을 풀이하고 있어 이색적이다. 이수산의 ‘한중미(韩中美)함께 약동할 수 있는 시대’는 한중관계뿐만 아니라 미국을 아울러 일단 미국과 중국의 장점과 제한성을 파악한다면 자연히 다양성과 우월성을 잘 결부할 수 있어 창의력을 부단히 창출하게 된다. 그리고 ‘(韩中美)’는 한류속의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중국, 미국과 함께 협동, 질주, 약진, 약동할 수 있다는 뜻으로도 풀이된다는 것이다. 이상 논의가 조선족의 시각이었다면, 李成日의 ‘한중관계와 중국조선족의 역할’은 한국인의 시각으로서 비교적 전면적으로 논하고 있다. 이 글에서 작자는 한중 간의 바람직한 협력과 세계한인경제문화네트워크 구축 및 이것을 위한 조선족의 역할 활용에 관하여 피력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1)글로벌 코리언 네트워크에 조선족 기업들이 보다 많이 동참할 수 있도록 적극 홍보하고 유도할 것, (2)중국 내 조선족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한중 양국 간의 협력 체제를 적극 구축해야 할 것’, (3)한국을 비롯한 중국 이외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들의 해외 네트워크 이용 방안도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리고 ‘3.한중관계 발전에 있어서의 조선족의 역할’에 대해 (1)한중 간의 경제협력에서의 가교역할, (2)한중 간의 문화교류에서의 매개역할, (3)남북관계 개선에 있어서의 중개역할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한국 뉴스타운 이동훈 기자의 “비판의 규칙과 ‘경계'”에서는 “요즘 한글의 ‘두음법칙'과 한자의 ‘간체자', 그리고 한국인들의 문화, 역사적 '인식체계', ‘언론행위'를 놓고 한국의 매체, 중국 내 교포 매체들과 네티즌, 여기에 한국인들까지 가세한 논란”을  거론하면서 ‘토론과 비판에는 반드시 규칙과 경계관념이 필요하다’는 것을 제기한다. 그러면서 한국인과 조선족 사이 ‘여전히 우리는 서로를 너무 모르고 있’는 관계를 확인한다. 그리고 ‘한국어와 조선어 中고유명칭 표기문제’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다. 4)기타 위의 ‘1),2),3)’의 담론이 조선족과 한국에 관련된 것이었다면 여기서는 특정 민족과 국가를 벗어난 보편적인 차원의 담론을 보도록 하자. 연변조선족자치주 서기 등개와 주장 이룡희의 ‘연변은 당신의 성공을 기대합니다’는 2010년 연변자치주 대학졸업생영입사업에 즈음하여 ‘대졸생들에게 고하는 글’이다. 고위급 간부들의 성근하고 낮은 자세가 좋다. 이수산의 ‘와 ’는 우리에게 아직 생소하고 낯설어 몸에 베이지 않은 ‘민주주의’와 왜곡되고 빗나가기 쉬운 ‘국가주의’에 대해 옳바른 개념을 심어주며 이 양자의 바람직한 관계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역시 이수산의 ‘개혁개방과 자주창신은 필승 비법’에서는 ‘1,선진적인 정치, 2,선진적인 생산력과 경제발전, 3,선진적인 국방, 4,선진적인 과학 교육 문화와 생활’에 걸쳐 ‘나라와 민족발전의 필승 비법’을 논의하고 있다. 무명씨의 ‘엄마의 지혜는 어디에 ?’는 ‘5월9일 어머니절을 맞이하여’ 엄마의 바람직한 모습과 자세를 이야기하고 있다. 역시 이수산의 “불루오션과 ‘연장선’”에서는 항상 남다르게, 심지어 엉뚱하게 생각하고 과감히 실천해보는 생각을 강조했다. 그리고 강순화의 ‘《혼외련》현상에 대한 몇 가지 사고’가 정통적인 담론을 진행했다면, 이 글의 질의로 쓰어진 정인갑의 ‘애정,혼인,가정문제를 좀 더 과학적으로 보았으면’은 보다 개방적이고 유연한 담론을 보이고 있어 재미있다. 허상림의 ‘조글로는 쟁론자리와 여건을 마련해야’는 조글로의 바람직한 자세를 제시하고 있다면, 네티즌의 ‘조글로는 조선족 똘똘 뭉치게 해야’는 허상림의 글에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심사광의 "’인터넷 정치’의 역할과 그 한계”는 인터넷정치에 대한 안목을 넓혀준다. 연합뉴스 기자 이상원의 ‘인터넷문화 이제는 바꾸자’는 ‘욕설, 비방 등 저질댓글 자정 노력 절실’과 ‘인터넷 윤리교육 통해 풍토교정 나서야’함을 필설하고 있다. 김정룡의 ‘조글로가 개인사이트인가?’도 인터넷문화의 본령을 짚고 있다. 강순화의 ‘직업녀성의 이중배역에 관하여’는 여성의 가정배역과 사회배역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리고  역시 강순화의 ‘희망을 만드는 유쾌한 실천’에서는 우리에게 아직 좀 생소한 연변대학교 민족교육원의 ‘생명열선, 녀성열선 상담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김정룡의 ‘누가 김문학을 뜨게 했나?’는 ‘김문학현상’에 대한 본질적인 가치판단을 떠나 ‘반대파’라는 안티에 의한 현상적인 ‘상반상성’의 표피적 효과만 논하고 있어 별로 의미가 없다. 이외에 안병렬의 ‘돈의 수치와 가치’, 강순화의 ‘녀성들의 삶의 변화를 보면서’는 인생에 대한 새로운 사색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정인갑의 “문학의 ‘비애’”는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문학의 비애, 무명씨의 ‘남북통일은 천국의 이야기’는 안타까운 한반도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3. 나가는 말 조글로는 조선족의 열린 토론의 장. 우리는 할 말이 많다. 아니, 우리는 할 말을 하고 산다. 속시원할시구! 대명천지 인터넷세상 고마울시구! 우리는 말을 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 그래서 기호학의 대가 헤데겔은 말(언어)은 인간의 존재의 집이라 했던가. 조글로의 담론에는 조선족의 미디어답게 조선족의 지성인들이 많이 참여했다. 물론 네티즌들도 심심찮게 참여한다. 그런만큼 조선족 스스로에게 할말이 제일 많더라. 모두들 문제의식이 투철하고 문제포착이 예리하다. 우환의식에 참여의식, 대책마련에 고심이다. 그래서 참 희망적이다. 담론도 각양각색이다. 중심과 주변, 다수와 소수, 내국인과 외국인… 百花齐放, 百家争鸣의 기꺼운 국면. 우상렬의 시시껄렁한 콤플렉스에 관한 글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물론 일부 문제점도 노정하고 있다. ‘중국 말하기’에 우리는 失语症을 앓고 있는 듯하다. ‘중국 말하기’는 네티즌의 ’汉语该如何对待外来语’ 한 편밖에 확인되지 않는다. ‘한국 말하기’에는 시시콜콜 캐는듯한 감도 주는데 말이다. 그리고 일부 관점들도 좀 고루하고 신선한 감을 주지 못한다. 또한 어떤 글들은 좀 방만하고 딱딱하며 재미가 없다. 본고는 어디까지나 대표적인 혹은 전형적인 글에만 치우친 画龙点睛은 했으되 面 즉 전반적인 면모는 그리 고려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니 미완의 글이다. [끝] 201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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