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분명 잘 사는 선진국. 그런데 여기에 와 보니 사람들 살기 어렵다고 야단이다. 불경기란다. 세계경제 한파가 아직도 휩쓸고 있단다. 매년 재정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는 잘 살 수밖에 없다. 매년 자국민보다 훨씬 많은 외국관광객이 몰려들고 있으니 말이다. 세계 제1의 관광국. 관광수입만 해도 먹고 살만 할지어! 그럼 왜서 사람들, 프랑스로 몰려들지? 그것은 다름 아니라 프랑스에는 문화가 있기 때문. 바로 이 문화 때문에 프랑스는 유럽 내지 세계의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과거에 화려한 역사를 지녀온 수많은 나라들이 쇠퇴나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이르러서도 세계 최강대국의 하나로서 당당히 자리매김되고 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건설된 것이 아니다. 프랑스문화도 하루아침에 건설된 것이 아니다. 프랑스는 역사적으로 문화를 중시해왔다.
일찍 샤를 5세가 루브르궁에 초창기 문학작품들, 즉 973권의 필사본으로 개인서가를 만들어서 소장하면서 루브르는 단순한 궁전이 아니라 박물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이 필사본들은 현재 국립도서관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다가 루이13, 루이14의 17세기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문화사업을 국책으로 추진해왔다. 루이13은 1634년에 프랑스학원을 세운다. 이어서 루이14가 1661년에 무용학원, 1962년에 카페트제작소, 1663년에 명문학원, 1664년에 회화와 조각학원, 1666년에 과학원, 1667-1672년 기간에 파리천문대, 1669년에 음악학원, 1671년에 건축학원, 1680년 파리희극원 등을 세웠다. 이런 기관들은 국가에서 투자하고 관리하는 문화기구로서 프랑스문화사업의 골격을 이루어놓았다. 루이14는 정치와 재정적인 조치를 취하여 대량의 국외의 문화엘리트들을 섭외하여 프랑스가 유럽의 문화중심이 되게 했다. 태양왕이라 불리던 루이 14세는 베르사유궁정으로 상징되는 프랑스의 황금시대를 맞이하여 절대왕정의 절정기와 더불어 문화도 그 시대의 한 절정을 이루어 놓았다. 그 무지막지할 봉건군주가 말이다. 발레도 루이 14세의 발명품이라고 한다. 그리고 보다 경탄케 하는 것은 프랑스대혁명시기 그 혼란의 와중에서도 ‘민족유산’이라는 개념이 산생되고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3개 중요한 국가문회기구 즉 국가당안관, 국가도서관, 중앙예술관을 설립했다. 이런 기구들은 바로 유산을 보호하고 국민을 교육하며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예술인재를 육성하기 위한데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18세기와 19세기는 ‘프랑스세기’라고. 실로 프랑스는 이 근현대에 있어서 줄곧 세계 보편의 정신가치를 창출하여 세인의 주목을 끌고 공감대를 형성했다. 주지하다시피 18세기 프랑스계몽운동은 사실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계몽한 운동이였다. 그것은 한 차례 미증유의 사상해방운동이였다. 봉건의 예속성을 타파하고 나의 주체성을 찾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철학사상, 디드로의 ‘의심은 철학을 향해 내디딘 첫 걸음’과 무지몽매를 불사른 ‘백과전서’, 몽테스키의 입법, 사법, 행정 3권의 분립을 주창한 “법의 정신을 논함”, 그리고 볼테르의 인류의 존엄과 자유를 숭상한 인도주의를 체현한 “철학사전”, 루소의 평민의 콤플렉스를 발산한 ‘하늘이 부여한 인권’과 ‘주권은 민중에게!’라는 사상을 나타낸 “사회계약론”, “참회록”... 이들 기라성 같은 사상이 결국은 프랑스자산계급대혁명의 ‘인권선언’ 및 자유, 평등, 박애의 슬로건으로 집약되고 공화정의 새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부리예, 쌩시몬으로 대표되는 프랑스공상사회주의사상은 1871년 파리꼼뮨으로 승화되어 세계사회주의 새 시대를 열기도 했다. 이로부터 놓고 볼 때 20세기 초 우리 중국의 주은래, 등소평 등 우수한 공산주의자들이 프랑스에 와서 구국의 진리를 찾고 탐구한 것도 지극히 정상적이다.
이 200여 년간 프랑스는 수많은 걸출한 문학가, 예술가와 과학가를 배출하기도 한다. 문학가로는 샤다뿌리앙, 발자크, 스탕달, 위고, 죠지·상, 메리매, 프로벨, 대듀마, 쇼듀마, 보드렐르, 도데, 졸라, 범이나, 로만·롤라, 음악가로는 백료차, 고낙, 비즉, 득표씨,화가로는 득라그락와, 모네, 마네, 득가, 뢰뇌아, 세쌍,조각가로는 로댕, 려득… 과학영역을 보면 라와석이 1777년 산소를 중심으로 한 연소이론과 질량보존법칙을 세워 화학의 한 차례 혁명을 이끌어 내어 18세기 과학발전의 가장 휘황찬란한 성과의 하나로 되었다. 그리고 “화학요강”에서 33종 원소의 분류표를 상상해내 인류 최초의 진정한 화학원소표가 되었다. 1864년 파시득은 현대미시생물학의 초석을 닦아놓았고 1885년 7월 6일,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에게 미친개 면역접종법을 진행하여 의학실천의 중대한 발전을 가져왔고 1898년, 물리학자 큐리부부는 레디움을 발견하여 한차례 물리학의 혁명을 일으켰다.
프랑스의 이런 성과는 노벨상으로 이어진다. 1901년 프랑스의 래네·소리보려다모가 세계적으로 처음으로 문학노벨상을 받은 이래로 1985년 크로득·세몽이 재차 문학노벨상을 받은 80여년 사이 도합 12명이 수상하여 세계 제1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영국, 독일, 이태리, 서페인, 러시아 등 기타 유럽문화대국의 거의 배가 된다. 과학영역에서는 11명이 물리, 4명이 화학, 6명이 생명(의학)도합 21명이 수상했는데 미국, 영국, 독일과 더불어 세계 최다다.
그래서 우리 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문학을 하려면 프랑스로!’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로부터 사실 세계의 문학, 음악, 미술 등 많은 예술활동은 파리에 집중되고 꽃펴나고 반발과 공명을 되풀이하면서 새로운 틀 속에서 다시 창조된다. 고전주의, 계몽주의, 사실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 유미주의, 다다이즘, 미래파, 추상주의에서 쉬르리얼리즘(초현실주의) 등 세계문학예술사조가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이에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 대통령이 된 드골은 “희망회억록”에서 “그 어떤 시대에도 프랑스는 천성으로부터 출발하여 ‘하느님의 위대한 사업’을 완성하고 자유사상을 전파하며 인류의 기수가 되리라!”고 호매롭게 말한다. 그리고 봉피두 대통령은 1970년대 제1차 세계석유파동 때 ‘프랑스는 석유가 나지 않지만 사상이 난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실로 프랑스는 사상대국!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의 상징.
프랑스는 1959년 7월, 제5공화국시기 세계적으로 처음으로 문화부를 국가기관으로 설립한 나라다. 당시 드골대통령은 프랑스 유명한 작가 마얼롤을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정부령으로 문화부의 직책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즉 절대 다수의 프랑스인들로 하여금 인류, 더욱이 프랑스의 문화걸작을 접근할 수 있게 하고 프랑스문화유산에 흥취를 가지게 하며 문화예술창작을 촉진하고 예술원지를 번영하게 하는데 있다. 미트랑 대통령이 집정한 14년 간(1981—1995)문화사업에 보다 많은 자금을 투입하고 문화의 공익성을 강조했다. ‘문화부의 사명은 모든 프랑스사람의 발명창조의 능력을 키우고 그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자기의 재능을 검증받게 한다.
그리고 자기의 뜻에 따라 예술훈련을 받을 수 있게 한다. 집단의 공동이익을 위하여 전국과 지방 및 부동한 사회단체의 문화재부를 보호하며 예술작품과 예술사상의 창조를 위하여 지지와 방조를 제공하며 그런 작품들로 하여금 많은 감상자를 획득하게 한다. 그리고 세계문화와의 자유로운 대화 속에서 프랑스문화예술의 발전을 촉진하도록 한다.’ 그 후 희라크 대통령집권시기에는 프랑스문화를 추진하고 보급하는 것을 세계에서 프랑스의 대국적 지위를 새롭게 확립하는 중요한 조치로 여겼다. 마얼롤 대통령집정 시기는 ‘대중으로 하여금 평등하게 문화복지환경 속으로 들어가고 참여하며 융합되게 하’기 위하여 문화부에서는 전체 공민이 문화사업에 들어서게 하고 예술가의 사회복지보호를 강화하는 정책을 폈다.
프랑스의 문화정책은 뭐니 뭐니해도 문화민주주의에 있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중앙집권제이다. 모든 것이 수도 파리에 집중되어 있다. 문화도 마찬가지. 파리의 경우 근교를 포함하여 70여개의 박물관과 기념물들이 있다. 나는 1937년 만국박람회 때 건축된 반타원의 샤이오궁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거기에만도 영화박물관, 문화재박물관, 해양박물관, 인류박물관, 파리국립극장 등 문화시설이 즐비하게 꾸려져 있었다. 그래서 각 지방에도 각종 문화원을 세우고 도서관, 박물관, 기념관 등 문화시설을 건립했다. 물론 이런 시설들을 눈가림 식으로 대충 만드는 것이 아니다. 최고 멋지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피카소미술관 하나만 놓고 보아도 알만하다. 피카소미술관은 유럽 여러 나라에 있는데 파리에 있는 것이 피카소 고국인 에스빠냐를 제치고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그 직실한 보기. 피카소미술관은 11년의 기획건설기간에 세 대통령에 다섯 문화부 장관이 참여했던 것이다. 정부 차원에서 문화를 공민 권리와 복지로 취급하고 있는 만큼 모든 민중이 보편적으로 문화에 참여하고 누리도록 여건을 마련한다. 이로써 프랑스사람 누구든지 언제 어디서나 쉽게 문화를 접해 문화인이 되게 하는데 있다.
현재 매년 전국 각지에서 조직하는 영화절만 해도 160개에 달한다. 그리고 매년 3월 ‘시인의 봄’, 6월 ‘노천음악회’ 등 전국적으로 행해지는 문화행사는 전국을 문화적인 분위기로 만든다. 10월은 각종 박람회가 많이 열린다.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자동차박람회로부터 쵸콜릿박람회 등의 다양한 박람회가 인기를 누린다. 그리고 많은 박물관이나 기념관 같은 데는 18세 이하는 무료이고 18-25세도 할인이 많다. 매월 첫째 월요일에는 모든 사람에게 무료. 그리고 최고급의 오페라나 발레 같은 경우 시작 30분 전에 180유로하는 최고 좋은 자리의 표가 남았을 때 학생, 실업자, 60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30유로에 판매한다. 그래 나 같은 놈은 싸구려나 공짜 기회를 이용하여 루브르궁도 공짜, 오르세도 꽁짜, 오랑주도 공짜... 재밋는 공짜로 돌아쳤지!
프랑스는 또 문화의 예외와 문화의 다양성원칙을 주장한다. 1993년 10월, 프랑스정부는 40여개 프랑스어국가지도자들이 참가한 프랑스어공동체수뇌회의에서 통과한 한 결의에서 ‘문화예외’의 개념을 천명했다. 이런 문화예외의 주장은 자연히 문화다양성의 원칙도 이끌어 내왔다. 2001년 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의 회의에서 프랑스대통령 희라크는 정식으로 ‘문화다양성’의 개념을 제출한다. ‘문화를 글로벌화하되 문화의 다양성을 제창해야 한다. 이런 다양성은 매개 민족이 세계상에서 자기의 독특한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자기의 매력과 진리로 인류의 재부를 충실하게 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 것이다. 프랑스의 추동 하에 대회에서는 ‘문화다양성선언’을 통과했다. 그리고 2003년 프랑스는 카나다와 공동으로 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에 약속력이 있는 ‘문화다양성을 보호할 데 관한 국제공약’을 통과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2005년 주로 프랑스의 노력 하에 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는 제33차 대회를 열어 ‘문화표현형식의 다양성을 보호하고 촉진할 데 관한 공약’을 통과했다. 이로부터 프랑스는 ‘자신의 문화특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미국식 문화 패권 및 제국주의에 맞선다. 1990년대 유럽연맹과 미국 사이 무역관세 총 협정에 관한 우루과이라운드협상에서 문화산품으로 하여금 ‘문화예외권’을 누려 일반 상품과는 달리 별도로 취급하게 하였다. 그리고 유럽연맹무역부장회의에서도 프랑스는 혼신의 힘을 다 하여 유럽연맹으로 하여금 유럽과 미국의 자유무역담판에서 시청산품을 예외로 취급하는데 동의하게 하였다.
사실 프랑스문화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다양성의 색채를 띠었다. 이를테면 프랑스는 5세기에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서게르만계 프랑크족의 지배아래 놓이게 됨으로써 로마문화와 게르만문화가 융합되면서 그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프랑스는 여러 인종, 문화가 무난히 조화롭게 잘 지내고 있다. 전통적인 골족 및 그 문화, 그리고 이주해온 아프리카종족 및 그 문화, 아랍계 종족 및 그 문화, 아시아계 종족 및 그 문화, 이외에 유태계, 집시계... 서로 ‘파동(미안)’, ‘맥시(고마워)’하며 잘 살아가고 있다.
실제로, 법적으로 종족기시나 문화멸시는 엄금되어 있다. 누구와 충돌했을 때 종족문제를 물고 늘어지면 절반은 이기고 들어간단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는 유난히 백인과 흑인의 커플이 잘 눈에 띠이기도 한다. 프랑스는 문화적인 콧대가 높다. 그러면서도 오픈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기념비적 건물을 지을 때는 전 세계 범위에서 입찰을 한다. 그래서 민족, 국적에 관계없이 가장 훌륭한 설계나 시공을 확보한다. 그래서 미트랑대통령 때 그랑루브르궁계획 하에 현재 유리금자탑입구 설계를 미국국적 중국인에게 맡겼고 오르세미술관의 설계는 오스트리아 사람에게 맡겼고 새 개선문의 설계는 댄마크 사람에게 맡겼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프랑스는 기회의 땅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 세계 유수의 예술가, 문화인들이 프랑스로 몰려들고 있다. 사실 프랑스의 수도 파리의 지하철을 이용해보면 ‘Porte’가 들어가는 역이름이 상당히 많다. 이것은 어디어디로 향한 문이라는 뜻이다. 파리는 밖으로 그만큼 개방되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프랑스사람들은 동성애도 하나의 문화로 받아준다. 프랑스사람들은 성에 대해서는 즐겁게 담론한다. 그러나 개개인의 성적 취향에 대해서 묻는 것은 금물이다. 물으면 실례. 그런데 일단 말이 나왔을 경우, 예컨대 나는 이성만 사랑해라고 하면 너의 반쪽밖에 사랑할 줄 모르네라고 농담을 한단다. 그래서 동성애들이 미팅하고 활개치고 다니는 특정지역이 형성되기도 했단다.
요즘에는 동성커플을 위한 PMA(인공수정), GPA(대리출산), 어린이입양까지 정부 차원에서 합법화하는 토리비법안이 거론되고 있다. 물론 반발을 사기도 하지만. 그리고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도 형평성을 이루며 나름대로 꽃을 피우고 있다. 미트랑대통령 시절에 옛 감옥터를 이용한 파스티유민중오페라극장과 유레공원구에 록가수들이 대형공연회를 할 수 있도록 록음악센터를 세운 것은 그 전형적인 보기가 되겠다.
사실 프랑스는 정치적인 파업도 하나의 문화로 승화시킨 나라다. 파리시청 건물 정면의 시계아래에는 프랑스의 국가이념인 자유, 평등, 박애가 박혀있다. 바로 여기서 ‘시청 앞에서의 키스’라는 프랑스낭만을 만방에 알린 사진이 탄생하지 않았던가. 시정 앞 광장은 파업이라는 뜻의 그레브광장. 실제로 파업의 현장이 되기도 한다.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을 설치하여 시민들이 한때를 즐기게 한다. 프랑스사람들은 파업의 나라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파업을 잘 한다. 혁명도 잘 한다. 프랑스대혁명, 1830년 7월혁명, 1871년 파리꼼뮨, 1968년 파리의 학생과 시민들을 중심으로 5월혁명... 그런데 이들 파업이 참 재미나다. 파업하는 쪽에서 폭력사태를 방지하고 과격시위자들의 합류를 막고자 자원봉사자들과 직업경호원들을 투입하여 스스로 질서를 유지하며 나아가고 있다. 이런 것을 파업문화라 해야겠지!
프랑스문화는 참신성과 독창성으로 돋보인다. 튀는 멋진 개성이라고 해도 좋다. ‘내정불간섭’, 현재 ‘유엔헌장’에 명시된 국제관계의 기본준칙이다. 그런데 이 이념은 최초로 1793년 프랑스헌법에서 가장 먼저 제출된 것이다. 프랑스는 또한 유럽연맹(EU)의 제창자고 설계자고 추동자였다. 1950년 ‘유럽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랑스사람 랑·모네가 경제협력을 중심으로 한 유럽연합의 구상을 최초로 제출하고 프랑스에서 제정한 유럽헌법조약이 2007년에 통과됨으로써 유럽은 현재 정치, 외교, 군사연맹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프랑스는 냉전이 결속된 후 초강대국 미국이 세계를 쥐략펴략하는 국면에 맞서 최초로 다극화세계를 구축할 데 관한 이념으로 미국의 단일주의에 맞선 다원주의원칙을 제출했다. 기후온난화문제에 맞서 책정 가능한 배기감량목표를 내왔고 세계적인 금융위기에 맞서 새로운 국제금융질서를 확립할 것을 호소했다.
이로부터 프랑스는 세계인들로부터 ‘사상독립, 창신돌출’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세계여론을 보면 프랑스는 종합국력으로 볼 때 2류 중등국가이지만 세계무대에서 일류대국의 역할을 논다. 그것은 다름 아닌 프랑스문화의 국제영향력 때문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사실 거창한 국제사회에서의 이런 개성적인 독창성은 제쳐두고라도 프랑스사람들의 일상생활의 스타일만 놓고 보더라도 마찬가지. 파리의 어머니강-센강의 다리를 좀 보자. 몇 세기 전부터 죽 30여개를 지어왔단데 같은 모양의 다리 하나 없다. 다 자기 나름대로의 모양새를 자랑한다.
그리고 건축을 좀 보자. 프랑스도 현대도시인 만큼 새로운 현대적인 건축을 많이 짓는다. 현재 내가 몸 담고 있는 파리7대학 부근은 새로운 도시개발구로 새로운 건축이 많이 들어선다. 그런데 그 건축들이 같은 모양새가 아니다. 극력 현대건축의 기하학적인 멋 없는 단순함에서 벗어나고 있다. 어떤 것은 네모꼴과 원형의 찧고 빻기, 어떤 것은 들쑥날쑥 허물어질 듯한 감을 주기도 한다. 또 어떤 것은 숭숭 구멍을 만들고 뻥 공간을 만들어 시원한 감을 주기도 한다. 파리7대학 바로 옆에 있는 프랑스국립도서관은 도서관답게 세 개의 펼쳐 놓은 거대한 책모양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여하튼 기발한 착상 속에 현대건축의 천태만상을 창출하고 있다. 그래서 파리7대학 부근은 많은 건축가들이나 건축을 배우는 사람들이 배우러 오는 성지가 되기도 한다. 프랑스사람들은 교육에서도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남과 다르게, 튀게’를 강조한다. 컴퓨터프로그램과나 디자인과에 다니는 중국 유학생들의 말을 들어보면 교수들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개성’, ‘독특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참 그기에 맞추기가 그렇게 힘들 수가 없다는 것이다. 프랑스학생들은 잘 따라 가는데 말이다. 여기 사람들 일상 옷차림이나 치레를 봐도 참 재미나다. 잘 산다는 사람도 별로 명품이나 비싼 것을 입는 것 같지 않고 아무 거나 막 입는 것 같다. 그런데 어쩐지 그럴듯해 보이고 멋져 보인다. 그 사람, 그 옷에 딱 어울리는 것, 내 몸에 맞고 좋은 것이면 다다.
그리고 치레도 마찬가지. 나는 여기에 오기 전에 여자들 귀걸이만 있는가 했는데 여기에 와 보니 입술걸이, 코걸이, 눈썹걸이... 여러 걸이가 눈에 띠운다. 그리고 여자들만 이런 걸이를 하는가 했더니 많은 남자들도 이런 걸이를 하는걸. 프랑스사람들은 남이 어떻게 해 다니든지 절대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나는 여기 와서도 중국에서 하던 버릇대로, 제 버릇 개주랴~ 머리를 박박 밀었다. 그리고는 활개치며 강의에 들어가고 돌아다녔다. 그런데 그 누구도 나의 까까 중머리를 의식하지 않는다. 좀 허전해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우리 쪽 같으면 많은 사람들이 관심조로 대학교수가 그런 머리... 하는 식으로 관심을 보였겠는데 말이다. 프랑스는 식당도 마찬가지. 보톨식당, 동성애식당, 빙하식당... 이상한 테마 별 식당이 많다. 여하튼 프랑스사람들은 우리 눈에 ‘괴짜’들이 많다. 나는 트람(유궤전차)을 내려 학교입구로 들어갈 때면 항상 머리를 들어 위로 쳐다보며 좀 걸음을 조심조심하게 된다. 워낙 거기에는 여러 가느다란 긴 쇠막대 위에 큰 바위들이 듬성듬성 얹혀 있기 때문이다. 해나 그 바위가 떨어지지 않을가 항상 조심하게 되는 내 마음. 에익, 예술도 감상할 줄 모르는 못난이!
프랑스사람들 자체가 문화를 아끼고 사랑한다. 프랑스사람들 일단 자기의 전통문화를 사랑한다. 그들은 19세기 중기 오늘의 현대적 파리도시를 건설한 오스만을 많이 욕한다. 건설의 명분으로 아름다운 옛 건물이나 명소를 많이 헐어버렸다고. 사실 나는 파리시내를 걷다보면 이 도시는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가 참 잘 어우러진 매력적인 도시라는 감을 자기도 모르게 느끼게 되는데도 말이다. 우리가 가벼운 현대에 더 많은 매력을 느낀다면 파리사람들은 어쩌면 무거운 전통에 더 매력을 느끼는 듯하다. 파리에서 마레지역은 제일 큰 역사보호구이다. 1500동의 옛 층집이 있다.그래서 파리에서 집값이 가장 비싼 곳의 하나가 되고 있다. 파리7대학은 다른 곳에서 시교의 조용한 원래 밀가루공장지역으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그런데 건물이름이 참 재미나다. 우리 학과 사무실이 있는 곳의 건물은 밀가루창고라는 이름이고 내가 강의하는 청사는 정미소라는 이름이란다. 밀가루공장 건물을 수선해서 그대로 쓰면서 이름을 그대로 이어 받은 것이다. 건물의 전통을 보존하기 위해서란다.
사실 프랑스사람들은 옛 것에 대한 정취가 다분한 것 같다. 내가 사는 동네는 현대건물이 많이 들어선 파리시교다. 그런데 그 현대건물들 사이를 지나다 보면 무슨 유적지를 발굴하다만 것처럼 주위는 정화된 가운데 돌덩어리를 늘어놓은 상황이 눈에 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기간에 루브르궁에 보관한 10만 개의 보물을 민간에 보관시켰는데 전후 한 개도 차실없이 회수했단다. 잘 보관되어 있었다. 훼손이 없었다. 생제르맹 데프레를 좀 보자. 전통적으로 살롱문화를 유행시킨 곳. 여기 주요 카페들은 예로부터 작가, 예술가, 출판업자들이 모여서 토론하는 장소. 많은 예술가들이 이곳에 작업실을 갖고 있고 19세기에 옮겨온 여러 출판사들도 모여 있다. 1945-55년 사르트와 보봐르, 그리고 까뮈를 중심으로 한 실존주의 및 그와 관련되어 부활된 보혜미아니즘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지금도 문학, 예술, 철학을 비롯한 문화인들의 사교의 활력적인 중심지로 되고 있다. 그래 나는 늘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군 한다. ‘생각하는 사람’들, 바로 프랑스사람들.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지? 바로 문화를 생각하는 거라고!
프랑스는 제도적으로 예술가를 예우하거나 문화사업을 지원한다. 예컨대 법적으로 창작자유를 절대 보장한다. 엄밀한 검증을 거쳐 일단 예술가로 인증이 되면 아뜰리(작업장)가 딸린 집을 싼 사용료만 내고 살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국가에서 창작계획서에 따라 지원하고 작품을 구매도 해준다. 세금도 거의 무료에 가깝다. 수입의 일부를 협회에 납부하면 된다. 기획, 공연, 영화 등 집중적인 작업을 하고 쉴 때도 국가에서 최저 생활비를 제공하여 준다. 그리고 문화사업을 지원하는 업체는 3%좌우의 세제혜택을 받도록 되어 있다. 여하튼 기본 의, 식, 주의 보장 하에 예술문화활동에 종사할 수 있도록 국가에서 뒷받침해준다.
그리고 국가적으로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예를 주고 있다. 사실 나는 루브르궁에 갔다가 ‘프랑스와-조제프 엥’이라는 유화를 보고 감개무량한 적이 있다. 그것은 일찍 1825년 1월 15일, 샤를 10세가 예술가들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현재에도 파리 라틴지역에 있는 만신전에 전문적으로 역사상에서 걸출한 문학, 예술, 철학가를 기념하고 있다.
파리는 고급브랜드가 많다. 샤넬, 디오, 피얼카단, 스테롱... 파리에서 매년 두 차례 진행하는 복장전시회는 세계복장디자인의 스찔과 그 흐름을 이끌고 있다. 프랑스사람들은 자기의 이런 브랜드를 사랑하고 아낀다. 샹젤리제에 가보면 이런 명품브랜드는 한정 판매를 잘 한다. 그리고 요새 프랑스가 불경기라 포도산지나 포도주생산지를 외국에 처리하더라도 명브랜드는 절대적으로 고수한다. 명브랜드를 팔 경우에도 대개 자기가 경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단다. 사실 프랑스제품의 브랜드가치도 따져보면 거기에 배어있는 그들의 문화의 힘에 다름 아니다. 사람들은 프랑스문화의 힘에 감복하고 젖어들어 그 브랜드에 공감하게 되고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되뇌이게 되는 것이 바로 문화는 생산력, 브랜드, 힘. 샹젤리제 대로와 이어진 개선문의 뒤편에 일직선으로 뻗은 길을 지나 센강 건너면 약 3,2키로미터에 걸쳐 데팡스지구가 나온다. 이곳은 미래도시형으로 차도와 철도 등의 교통시설과 전원케이불 등이 지하로 들어가 소음이나 배기가스를 줄이고 고층빌딩가에 녹지를 조성했다. 넓은 광장에는 미로를 비롯한 60여명의 예술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세자르의 12미터 크기의 정크아트의 ‘엄지손가락’ 조형물도 있다. 여기에는 빨강, 파랑, 노랑의 거대한 미래형 초현대식 건물이 조성되어 있다. 그 앞에는 내부가 뚫린 거대한 정육면체의 대형아치문-1989년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맞아 제2의 개선문이 세워져있다.
프랑스는 제2의 그랑-큰 도약과 개선을 꿈꾸고 있다. 이 도약과 개선에도 프랑스 국민일동은 ‘오직 문화만이 프랑스의 위대함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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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2.20
동북아신문 2014-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