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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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동이', '둥궤' 댓글:  조회:7404  추천:69  2006-06-28
'동이', '둥궤'정인갑 필자가 장가를 못 가 헤매다가 30이 거의 되여 겨우 도문 색시를 얻고 연변에서 살며 부딪친 난관 중의 하나가 언어였다. 평안도 악센트로 말을 하니 '남도치'라고 놀려주고―마치 조선 팔도 중 함경도만 북도인 듯. '-요', '-오' 종결토로 말을 하니 버릇없이 반말을 쓴다고 꾸중하고―'-슴둥?', '-습구마'를 써야 존경어라고 하지 않는가! 그 외에도 마선(재봉틀), 사라(접시), 염지(부추), 제사(제가 도리여), 간대루사(설마), 물둥궤(물독) 등 못 알아들을 말이 수두룩하였다. 중년이 다 된 나이에 이런 말을 배운다는 것은, 특히 악센트를 고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하여 함경도 '오랑캐' 말로 남편을 헐뜯는다고 처에게 신경질을 자주 부리곤 하였다. 그후 어학에 대한 리해가 깊어짐에 따라 방언에는 깊은 력사 문화 요소가 깃들여 있음을 알았으며 함경도 방언도 례외가 아님을 터득하게 되였다. 아래에 '동이'와 '물둥뒈'의 어원에 관해 말해 보련다. 여인네들이 물길을 때 머리에 이는 '동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이'의 어원이 무엇이며 이 말이 한자와 관계되리라고는 아마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필자는 어릴 때 많이 부르던 '동이' 관련 노래들이 생각난다. 샘물터에 물을 길러 동이 이고 나갔더니 빨래하던 군인 동무 슬금설쩍 돌아보네 슬그머니 바라보니 그 솜씨가 서툴러서 부끄러워도 물었지요 제가 빨아 드릴까요. 1950∼1960년대 조선족들에게 많이 불린 조선의 노래 '샘물터에서'이다. 군인과 시골 처녀 사이에 눈길이 서로 오고가는 정경이 실감난다. 짜작 밭골 지나서 언덕 넘어 오솔길 물동이 이고 가는 저 처녀 얌전해 시냇물 한 바가지 푹 퍼 줍소서/ 실커들랑 그만두지 어찌 그리 가루봄둥? 연변 시골의 익살 궂은 총각들이 처녀들에게 치근거릴 때 부르는, 함경도 냄새가 풀풀 나는 노래로, 어느 노래 책에 기재된 것도 아니고 작사, 작곡자가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많이 불렸다. 필자가 이런 노래들을 렬거한 원인은 이렇듯 말소리나, 그 정서나 우리 민족화한 '동이'라는 말이 과연 한자와 관련이 있겠는가 의아한 생각을 금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유어는 물레로 솜을 잣는 것처럼 부드러운 소리에 술술 빠져 나오는 감이고 한자어는 칼로 국수를 써는 것처럼 딱딱한 소리에 좀 억지로 나오는 감이라고 필자는 항상 생각해 왔으니 말이다. 조선 중세 문헌에 '동이'를 에서는 '동희'라 했고 에서는 '동회'라 했다. 지금의 '동이'는 '동희'나 '동회'의 초성 'ㅎ-'이 탈락되고 또 일정한 어음 변화를 거쳐 생긴 것임이 뻔하다. 중세 조선어의 'ㅎ-'초성이 후세에 탈락된 현상은 비교적 보편적이다. 중세의 '아히'가 지금의 '아이'로, 중세의 '올히'가 지금의 '올이→오리'로, '가히'가 지금의 '가이→개'로 된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 '동회' 또는 '동희'의 어원은 무엇일까?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중세 조선인이 한어를 배우는 교과서 에서 찾을 수 있다. 에서 조선의 우물은 중국의 우물처럼 깊지 않으며 또 물을 중국처럼 남자들이 긷지 않고 여자들이 긷는다고 한 후 '把箇銅盔放在頭上頂水'라고 했다. 이에 대한 언문 번역은 '동회  다가 마리에 노하 믈을 이되(동이를 가져다 머리에 놓아 물을 이되―필자 주)'라고 했다. 즉 15∼16세기 때 중국 한어에서 '동이'를 '銅盔'라 했다. '銅盔' 두 자의 한자음이 '동회', 현재의 '동이'이다. '銅盔' 두 자의 근세 한어 발음이 '둥쿠이'이며 이것이 함경도 방언 '둥궤'의 유래이다. 단 같은 물건을 '동이', '둥궤' 두 가지로 계속 부를 수 없으므로 '둥궤'에 '물독'이라는 새 뜻이 부여되였을 따름이다. 한어에서 '盔'는 질그릇을 의미하며 '銅盔'는 구리로 만든 투구다. 이것이 어떻게 '동이'의 뜻으로 둔갑했는지는 좀 더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낡은 투구를 동이로 활용한데서 생긴 말이 아닌가 싶다. 필자는 어느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인적이 없는 야외에서 병사들이 투구로 물을 길어먹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또 어릴 대 전기 뚱딴지를 약 찧는 절구로 활용해 쓰는 것, 여인네들이 자전거바퀴 살을 뜨게 바늘로 활용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지금도 필자는 커피 병을 차 마시는 컵으로 활용하고 있다. 물품이 풍부한 지금도 그런데 먼 옛날에는 더 말할 것도 없지 않았겠는가!
38    '찰떡 벽'에 대한 단상 댓글:  조회:6661  추천:78  2006-06-28
'찰떡 벽'에 대한 단상 정인갑 이번 대학 입시 시험 때 연변1중의 운동장은 학부모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는 중국의 어느 도시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장관이었다. 우리 민족은 정말 중국 56가지 민족 중 교육을 가장 중시하는 민족임을 다시 한번 감지할 수 있었다. 필자는 이런 장면을 SCK미디어에 실린 사진을 통하여 알았으며 필자가 각별히 눈여겨본 것은 연변1중 벽에 다닥다닥 붙은 찰떡이었다. 자기 자식이 대학에 붙으라는 부모의 애절한 마음을 실감함과 동시에 필자는 다른 문제를 음미해보았다. '대학에 붙다'의 '붙다'와 '찰떡이 붙다'의 '붙다'는 서로 별개의 단어이지만 단 그 음이 같기 때문에 우리민족에게는 다른 민족에 없는 이런 풍속이 있다. 이는 어떤 문화현상인가? 이런 문화현상을 巫術문화라고 한다. 무술문화는 제한된 경험 또는 聯想적 추리를 기초로 하는 원시적인 사고방식에서 태어난, 사물의 발생, 발전 및 그의 변화 결과를 공제하기 위한 인류의 행위이다. 무술은 다수의 상황하에 사회적 행위, 전통적인 습관으로 나타나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 대해 맹목적으로 믿게 만들기 때문에 당사자의 논리적인 사고를 거치지 않고 습관적 또는 신앙적으로 행해진다. 한국이나 일본의 선수 팀에 보통 '4번'이 없다. 죽을 '死'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4'와 '死'는 의미상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나 이렇게 연상하고 이런 행동을 취하며 심지어 그것이 풍속화 됐으니 무술문화의 례에 속한다. 우리의 민족은 임신부 집에 고추를 많이 매달아 놓는 습관이 있다. 고추와 男根의 모양이 비슷하므로 남자 아기를 낳으라는 뜻에서이다. 역시 무술문화에 속한다. 중국의 전통문화나 풍속도 마찬가지다. 가장 비참한 례로 漢武帝 때 통치계급 내부의 '巫蠱之禍' 相殘으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드라마 에 상세히 나오므로 구태여 소개하지 않겠다. 지금 중국인이 '8'자나 '6'자를 선호하는 것도 그 본질은 무술문화에 기인된다. 아래에 당나라 名醫 孫思邈(손사막)의 에 게재된 무술문화에 속하는 약 처방의 예를 좀 더 들어보자(괄호 안의 것은 필자의 評語임). △목구멍에 물고기 가시가 걸리면 가마우지의 똥을 먹거나, "가마우지!"하고 외치거나 그물을 태운 재를 먹으면 낮는다. (목구멍에 걸린 물고기 가시가 가마우지, 가마우지의 똥, 그물을 무서워할 것인가). △鐘乳石(종유석)을 넣어 끓인 물을 마시면 유모의 젖이 많아진다. (종유석이 유방처럼 생겼고 거기에서 떨어지는 물이 젖을 연상시킬 수 있으므로 상상해낸 것). △脫肛하거나 산후 脫陰하면 자라 고기를 먹어라. (자라의 머리가 신축성이 큰 데서 상상해낸 것). △뱀이나 매미의 허물로 난산을 치료한다. (뱀이나 매미의 허물은 새로운 생물체가 낡은 생물체로부터 빠져 나온 것이므로 거기서 상상해낸 것). △임파선 종창을 치료하려면 쥐 고기를 태운 가루를 먹어라. (쥐가 구멍을 잘 뚫기 때문에 쥐 고기를 먹으면 종창이 잘 터진다는 상상에서 나온 것). △瘀血(어혈)을 치료하려면 여자 월경의 피가 묻은 천을 태운 재 가루를 술에 타서 먹어라. (몸 안의 피가 밖으로 나오는 월경과 피를 밖으로 빼는 어혈의 치료가 같은 원리라는 데서 상상해 낸 것). △아들을 낳으려면 도끼 한 자루를 산부인의 침대 밑에 놓아라. 날을 아래로 향하게 하되 몰래 놓아야 한다. 믿음이 안 가면 닭이 알을 깔 때 같은 방법을 쓰면 모두 숫병아리가 된다. 세계 모든 민족을 망라한 전통문화나 풍속에는 무술문화가 깊이 침투돼 있으며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무술 문화는 전통문화의 표징과 민족풍속의 일부이기도 하므로 이를 몽땅 없애버릴 수도 없다. 손해를 끼치지 않는 전제하에 '남들이 다 그렇다는데 들어주자'라는 식으로 대하거나, 또는 장난 삼아, 놀음 삼아, 재미로 무술문화를 받아들이는 정도면 충분하다. 허나 이렇지 않는 경우도 자주 목격하게 된다. 한국에서 엘리베이터에 4층 표시가 없는 호텔을 종종 목격하게 되는데 외국 손님들을 당혹하게 만들곤 한다. 자기 마음에 드는 아파트이지만 4층이므로 구매하지 않는 사람도 보았다. 어떤 중국인은 8자가 많이 섞인 전화번호를 챙기기 위해 重金을 탕진한다. 전통문화를 계승할 때 그에 침투된 무술문화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하며 필요에 따라 그를 걸러버릴 줄 알아야 한다. 원시적인 사고 방식, 추호의 과학성도 없는 경험이나 련상에 너무 미련을 가지며 큰 손해를 볼지언정 그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상 방법을 없애버리자.
37    령수증 趣談 댓글:  조회:6232  추천:91  2006-06-28
령수증 趣談정인갑 중국의 재정제도에는 다른 나라에 거의 없는, 령수증에 의해 출장비를 결재 받는 법이 있다. 해당 출장에 어느 정도의 금액이 들것이라는 상식적인 액수는 있지만 령수증이 없으면 보상받지 못한다. 중국식 출장제도이겠다. 이를테면 출장 가서 친구나 친척집에서 잤으면 령수증이 없으므로 숙박비 보상은 받지 못한다. 무슨 방법을 대서 령수증을 장만하면 몰라도. 이런 제도의 허점에 따르는 취담도 적지 않다. 아래에 몇 가지 례만 들어본다. 택시를 타고 호텔 같은데 도착하면 어떤 사람이 "택시 령수증을 사지 않겠나" 하며 접근한다. 령수증에 나타난 액수의 10%로 판다. 기차표를 살 때 의례 어떤 사람이 와서 옆구리를 가볍게 다치며 "담배 사시오. 령수증을 드릴 테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제 돈으로 사 피우기는 너무 아까운 고급 담배들을 선보인다. 려관비, 택시비, 식사비…등 손님이 요구하는 종류의 령수증이라면 내놓지 못하는 것이 없다. 닷새 정도 친척집에서 잤으며 둬 달 피울수 있는 고급 담배를 챙길 수 있다. 비행기 표를 할인해 판매하지만 표에 적혀있는 액수는 원가이다(구매자가 할인 가격으로 적어달라고 고집하면 몰라도).물론 원가대로 보상받을 수 있다. 어느 고위급 기관에서 근무하는 필자의 동창 한 분이 어느 縣에 생활 체험하러 가서 목격한 일이다(보통 이런 '체험'을 거치고 승진시킨다). 한번은 현 기관의 국장 등과 같이 해당 현의 이곳 저곳을 시찰하고 돌아오는 길에 특산품 등을 사는데 꽤나 많은 돈을 썼다. 국장의 비서가 "이렇게 많은 돈을 써서 어쩌지요?"라며 백지 한 장을 꺼내여 '령수증 중 돼지 한 마리 깔아 죽인 대가로 지불한 800원 배상 받았음. ××촌 張××'라고 썼다. 이에 국장은 히쭉 웃으며 "하여튼 우리 왕비서 총명하거든"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후에 회계과 장부에서 '돼지 한 마리 깔아 죽인 대가로 800원…', '개 한 마리 깔아 죽인 대가로 300원…', '닭 한 마리 깔아 죽인 대가로 30원…' 따위의 백지 령수증을 여러 장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국장은 돼지 급, 과장은 개 급, 일반 간부는 닭 급이더라"며 필자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향장이나 촌장에게 암시를 주어 물건을 챙기는 간부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하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 같다. 외국 출장은 좀 다르다. 왕복 항공기 표는 현금 지표로 사므로 출장자와 상관없다. 출장 상대국 소비 수준에 근거하여 국가에서 제정된 표준에 따라 보조금을 일당 얼마씩 준다. 이를테면 한국은 일당 108달러이다. 구미 국가는 당연 한국보다 퍽 많이 준다. 그러나 출장 날자 수가 문제이다. 작년 필자는 직장 동료 5명과 같이 香港 출장을 간 적이 있다. 6일 기한으로 간 출장이므로 일당 향항 돈 900원씩 합계 5,400원 가량의 출장비를 받았다. 그러나 반날의 도서 전시회에 참가하고 나니 공무가 끝났다. 5일간 관광과 쇼핑으로 消日하다가 돌아올 판이였다. 필자의 향향 려행은 이번이 4번째이고, 손바닥만한 향향 더 볼 데도 없고 하여 동료들에게는 친구 찾아가 내 볼 장 보겠다 거짓말하고 사흘째 되는 날 돈을 몽땅 털어 옷 몇 건지, 신발 몇 켤레 사 가지고 돌아왔다. 출장비 결제를 할 때 호텔 령수증을 내놓으라는 것이 아닌가! 호텔 령수증으로 출장 날자 수를 인정하는 것이였다(항공기 티켓에는 앞당겨 온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앞당겨 돌아왔음을 시인하고 출장보조금 2,700원을 고스란히 바치는 수밖에 없었다. 좀 억울한 감이였지만 출장 규정에 따른 것이므로 할 말이 없었다. 한편 6일간의 령수증을 장만해 왔더라면 괜찮았겠는걸 하는 유감도 없지 않았다. 외국 출장비 결제는 아직 확정된 국법이 없어 기관별, 회사별, 업체별 다르지만 필자가 근무하는 기관은 상기의 허점이 있다. 최근 필자의 모 친구가 유럽 출장을 마치고 돌아와 들려준 이야기다. 유럽 각 국, 특히 性 開放이 가장 심하여 국가에서 賣淫 업소를 공식 인정하는 북유럽의 매춘부들이 중국말 한마디는 다 할 줄 알더라는 것이다. 그 말인즉 '게이파퍄우(給發票: 령수증을 드린다)'이다. 그들은 중국인만 보면 '게이파퍄우!'라고 외치며 매음 업소 안으로 끌어당긴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중국 관료들이 매춘부들로부터 령수증을 받았으랴! 이만저만한 나라 망신이 아니다.
36    중국인과 한국인의 청탁문화의 차이 댓글:  조회:6781  추천:80  2006-04-07
중국인과 한국인의 청탁문화의 차이정인갑 본문중의 '중국인'은 중국의 주체민족―'한족'을 일컫는다. 일전에 어느 한국인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중국인 친구들을 자주 도와주곤 하는데 부탁을 받고 도와줄 때는 식사한 적이 별로 없고 그렇지 않은 때는 오히려 실없이 밥을 얻어먹게 되더라는 것이다. 그 중국인 친구의 말대로 표현하면 '沒事吃飯, 有事辦事(용건이 없을 때는 밥을 먹고 용건이 생기면 볼일만 보다)'라는 것이다. 아주 의미심장한 말이다. '沒事吃飯'은 평범한 말 같지만 그 속에는 중국 전통문화의 저의(底意)가 깔려있다. 이것이 바로 중국인 請託文化의 축영(縮影: 축소판)이며 한국인들은 그의 정수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살아가는 도정에 꼭 다른 사람에게 무슨 부탁을 하며 신세를 져야 할 일이 자주 생긴다. 이런 일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필자는 이런 문제를 일괄하여 '청탁문화'라고 일컬으며 중한 두 민족의 청탁문화는 구별됨을 지적하고 싶다. 첫째, 한국인은 너무나 즉흥적이다. 최근 몇 년간 청화대학은 해마다 외국류학생에 한해 5월 15일경에 입시시험을 치르고 6월 15일 오후 3시경에 시험 결과를 발표한다. 그날 오후 3시가 조금 지나면 적지 않은 한국인으로부터 '오늘 저녁 식사나 같이 하자'라는 내용의 전화가 필자에게 걸려온다. 식사 때 당연 입시에 미끄러진 자식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한다. 물론 도와줄 방법도 없겠지만 방법이 있어도 도와줄 기분이 나겠는가! 마지못해 도와주었다 하더라도 속은 꺼림칙하다. 중국인은 신세를 져야 할 사람과 평시에 느긋하게 친분을 지켜나간다. '오늘 저녁 같이 식사나 할까?'라는 초청을 받는다. 식사한 후 '무슨 부탁할 일이 있나?'라고 물으면 대수롭지 않게 '아니, 우리 둘 다 여가가 있기 쉽지 않으니 술 한 잔 마신 거다'라며 갈라진다. 이런 만남이 오래도록 지속되다가 언젠가는 '우리 자식이 명년에 당신 모교의 연구생 시험을 치르게 되는데 좀 도와 줄 수 없나?'라는 부탁을 한다. 그리고는 '오늘 다른 약속이 있어 같이 식사하지 못해 죄송하다'라는 말을 남기고 이내 사라져 버린다. 둘째, 한국인은 露骨적인데 반해 중국인은 隱蔽적이다. 신세질 사람이 마작을 놀자고 하여 놀면 당연 초청을 받은 자가 딴다. 뒤통수를 긁으며 '오늘은 운수가 나빠(手氣不好) 내가 빨렸지만 기회를 달라. 다음은 내가 이길 테다'라고 한다. 그러나 다음 번에도 초청을 받은 자가 이기기가 일쑤다. 한국의 상황은 이렇지 않다. 어느 사업가가 골프장 건설권을 땄다고 하자. 그와 절친한 어느 정치인(이를테면 모 국회위원)의 은행 구좌를 들춰보면 비슷한 기간에 거금을 입금한 기록이 나타나기가 일쑤다. 중국인간에도 로골적인 금품 거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비밀이 잘 지켜진다. 금품을 들여가며 부탁하였지만 도움을 받지 못했거나 심지어 도와주겠다던 사람이 법적 제재를 받았어도 웬만하면 그 비밀을 지켜주지 적발하지 않는다. '적발해 봤댔자 먼저 내 얼굴에 먹칠하고, 또 그 사람이 지금은 자빠졌지만 앞으로 다시 일어설지 누가 알랴'라는 우려 때문이다. 한국 같으면 서로 원수지면 '내 입이 터지면 그 사람 끝장이야'라고 떠벌리는가 하면 양심선언이다 뭐다 하며 이내 공개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사실 중국에서 행해지는 부정부패가 한국보다 훨씬 더 많겠지만 한국은 날마다 이런 일로 떠들썩하고 중국은 조용한 원인이 언론 관계도 있지만 두 민족의 청탁문화의 이런 차이점에도 많다. 세 번째는 한국인은 結果絶對主義이지만 중국인은 結果相對主義이다. 필자의 어린 시절, 부친이 생산대의 회계를 할 때의 일이다(회계는 생산대의 대장 버금가는 권력자). 부친 생산대의 한족 야채재배기술자가 명절이나 부친의 생일, 또는 우리 집에 대사를 치를 일이 생기면 꼭꼭 찾아오곤 하였다. 부엌구석에 꾸러미 하나 쑤셔 넣거나 삿자리 밑에 봉투 하나 밀어 넣고 어머니에게 눈꺼풀을 껌벅거리고 가버린다. 헤쳐보면 돼지고기 둬 킬로 또는 현금 10원 정도 들어있다. 한 달에 1인당 돼지고기 석 냥(150그람) 배급 주고, 대사 때 2원 정도 들고 가던 그 시절 여간 반가운 일이 아이였다. 그러기를 3년 가량 지속되던 어느 날 중학교를 졸업한 자기 자식을 생산대의 차부로 써 달라는 부탁을 하지 않겠는가! 생산대의 차부는 누구나 하고 싶어하는 좋은 일감이다. 여타 사원들은 삼복에 둬 달, 동삼에 둬 달 정도, 그리고 비오는 날이면 쉬지만 차부는 1년 내내 일거리가 있으므로 수입이 퍽 높다. 부친은 물론 그의 부탁을 쾌히 들어주었다. "데머사니, 듕국사람들 속이 하여튼 우리보다 깊어. 그래서라머니, 부탁을 들어 줘두 속이 시원하단 말이야"라며 부친은 감탄해 마지않았다. 사실 청탁을 위한 느긋한 접촉에는 모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상기의 례로, 3년 후 자식에게 의외의 출로가 생길지, 그때에도 필자의 부친이 회계를 할지, 차부가 남아돌아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주지 못할지…미지수가 적지 않다. 이는 어떤 프로젝트에 투자를 할 것인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이가를 가늠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모험에서 중국인은 결과상대주의이므로 결과절대주의인 한국인보다 행하는 확률이 퍽 높다. 한국인 같으면 식사 대접도 신세질 날의 사나흘 전, 혹은 하루 전에 하거나 당일에 한다. 식사를 하자고 제의한 후 신세를 질 필요가 없게 사태가 갑자기 변하면 핑계 대고 식사를 그만두는 수도 있다. 심지어 식사 대접을 할 것처럼 하다가 대접하지 않고 먼저 신세를 진 후, '한번 잘 모시겠다'라고 하고는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외면하는 자도 있다. 중한 두 민족의 청탁문화의 차이는 결국 속이 깊어 여유적이냐, 속이 얕아 즉흥적이냐의 차이다. 속이 깊고 얕은 것은 당연 문화가 깊고 얕은데서 기인된다. 한국의 문화가 중국보다 얕은 것은 구태여 말할 것도 없고, 같은 한국인도 지역별로 속이 깊고 얕은 차별이 있다. 같은 중국인도 上海人이나 남방인이 북경인이나 북방인 보다 속이 얕다. 중국 조선족의 청탁문화를 보면 한국인 기질과 중국인 기질을 각각 반씩 닮았다. 같은 조선족도 연변의 조선족은 한국인을 닮은 데가 좀 많고, 기타 지역의 조선족은 중국인을 닮은 데가 좀 많다. 언젠가 필자는 흑룡강 모 도시 조선족 중학교 교장의 경험담을 들은 적이 있다. '귀교는 어떻게 省, 市 재정의 돈을 잘 낚아다 쓰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그 교장의 답변은 간단했다. 필자의 리해에 따르면 그 교장이 중국인의 청탁문화에 대한 조예가 깊기 때문이였다.
35    중국인과 한국인의 보복문화의 차이 댓글:  조회:6731  추천:97  2006-04-07
중국인과 한국인의 보복문화의 차이정인갑 전통문화가 상이한 민족간의 報復문화는 당연 서로 다르다. 필자는 중국인과 한국인의 보복문화는 좀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련다. 첫째는 보복의 상대자에게 活路를 주는 것이다. 인류 사회는 라선형으로 발전하므로 지금의 원수가 언젠가는 자기의 동맹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광복 후 장개석(蔣介石)이 원수 일본을 덕으로 보답한 것(以德報怨)이나, 1964년 중국이 인도와의 전쟁에서 인도침략군에게 慈悲를 베푼 것 등이 그 전형적인 례다. 만약 모택동이 文革 때 등소평을 포함한 광범위한 당, 정, 군의 간부들에게 활로를 주지 않았더라면 林彪의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분쇄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는 광복후 李承晩 정부가 모든 異己 세력을 잔인하게 소멸하고 심지어 중간파 金九까지 암살한 례와 판이하다. 다음은 보복할 힘이 없거나 보복을 했다가 오히려 인심을 잃을 가능성이 있으면 무모한 짓을 하지 않고 시간을 끌며 역전의 기회를 노린다. 말하자면 '好漢報讐, 十年不晩'; '三十年河東, 三十年河西' 이다. 춘추시대 오(吳)에 망한 월(越)임금 구천(句踐)이 오왕의 말을 끌어준다, 오왕에게 미녀를 상납한다, 와신상담(臥薪嘗膽)한다 하며 힘을 키워 뒷날 보복에 성공한 례, 晉나라 왕자 중이(重耳)가 살해를 모면하고 탈출하여 19년을 방황하다가 나중에 궁궐에 쳐들어가 임금의 자리를 탈취한 례가 그것이다. 연개소문이 죽자 장남 男生이 막리지의 직무를 대행했다. 그가 자방에 시찰 나간 짬에 두 동생이 궁궐 쿠데타를 일으키고 남생을 내쫓았다. 남생은 그 길로 도주하여 당나라에 투항하고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 寶藏王 25년(서기 666년)의 일이다. 2년후(668년) 고구려는 당나라 군대의 공격에 못 이겨 망하였다. 남생이 개인 보복에 성공하였을 지는 모르지만 그의 이민족을 끌어들여 자기 겨레와 형제를 상잔한 千秋의 죄는 영원히 씻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 셋째는 원수가 더 많은 사람이 미워하는 편으로 되게 방임하는 것이다. 1989년 천안문사태의 '영웅'들은 제 발로 미국대사관으로, 서방국가로 '피신'했다가 13억 인민의 버림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유교문화에 외국과 내통하는 賣國罪보다 더 큰 죄가 있는가! 1973년 김대중은 일본에 가서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에 맹공격을 가하였다. 만약 방법을 대여 김대중이 그냥 일본에 머무르며 한국을 비난하게 내버려 두었다면 시간이 오래 흐를수록 한국국민의 버림을 받을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을 붙잡아다 민주화의 영웅으로 만들어주었다. 보복을 하려다 결국은 원수를 도와준 셈이다. 넷째는 원수를 우회적, 전략적으로 보복하는 것이다. 대학원생의 학위 론문을 심사한다 치자. 지도교수의 라이벌 학자라고 해도, 론문을 잘못 썼어도 그 당시에는 보복하지 않고 일단 통과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서 학위론문이 통과되지 못하는 경우는 드물다. 3년 과정이 끝나면 이내 학위가 수여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후에 저질 론문이 출판까지 되거나, 剽竊한 론문이 탄로되여 더 큰 보복이 이루어진다. 지금 중국 학계에서 저질론문이나 표절한 론문 때문에 패가망신하고 평생 머리를 들지 못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지 않는가! 한국 같으면 그 대학원생 지도교수의 라이벌 학자는 그 론문을 통과시키지 않으려 빠득빠득 애를 쓴다. 그래서인지 한국에는 '學位課程 修了, 學位 證書 待期'의 대학원졸업생이 너무나 많다. 림시 보복은 하였을지 몰라도 장원하게 보면 오히려 자기의 원수를 도와주는 셈이다. 전체적으로 말해서 중국인의 보복문화는 한국인의 즉흥적이고 직접적인데 반해 비교적 여유 있고 우회적이라고 할 수 있다.
34    '총각' 댓글:  조회:7638  추천:102  2006-03-20
'총각'정인갑 우리말로 '총각'은 '장가 갈 나이가 되였지만 아직 장가를 가지 않은 남자'의 뜻이다. 즉 '處女'와 반대되는 말이다. 그런데 '총각김치' '총각 미역'이란 말이 잘 리해되지 않아 생각을 거듭하던 끝에 '총각'에 대해 한번 고증해보고 이 글을 쓴다. 우선 '총각'이 한자어일 것이라는 추측이 앞서므로 고대문헌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중국문헌에서 그 뿌리를 찾았다. '총각'에 해당되는 한자가 ‘總角이'였다. 본래의 뜻은 머리칼을 양쪽으로 갈라 동여매 위로 올린 형태의 머리를 말하는데 그 모양이 짐승의 뿔과 같다 해서 '總角'라고 부르게 됐다. '總'자는 '동여매다'의 뜻이고 '角'자는 짐승의 '뿔'을 가리킨다. 현존하는 총각 골동품이 이를 유력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河南省 安陽에서 발 굴된 아래의 總角 玉器 골동품 사진을 참조하기 바란다. 뿐만 아니라 고대 문헌에서도 '總角'의 이런 뜻을 찾아볼 수 있다. : '婉兮娈兮, 總角"O兮, 未幾見兮, 突而弁兮 (예쁘다, 멋지다/총각은 뿔 같다/얼마 안 본 사이에/벌써 약관이 됐구나)'. 옛날 중국에서는 남자가 약관(弱冠)하기 전이나 여자가 계년(笄年)이 되기 전에 모두 '總角' 형태의 머리를 했다. 그러하기 때문에 '총각'은 또한 미성년의 남녀를 총칭하는 말로도 썼다. 후세에는 시집가지 않은 녀자 및 성 경험이 없는 녀자를 '처녀'라고 구분하여 불렀지만 실은 '총각'이라 해도 무방했다.역시 문헌에서 이런 의미의 예를 볼 수 있다. : '總角之宴, 言笑晏晏, 信誓旦旦, 不思其反(총각 때는 서로 즐거워/웃음 꽃 활짝 피었었지/다짐한 맹세는 진실이었건만/ 지금 와 번복할 줄 몰랐네).' 애인에게 배반당한 여자의 노래인데 서로 어릴 때를 둘 다 '총각' 때라고 했다. '총각'이란 말이 에 몇 번이나 나오는 것을 보면 그 력사가 적어도 2,500년은 되였다. 이 말은 후세의 문헌에도 자주 나타났으며 청나라 때까지 계속 써왔다. : '這院門上也有四五個才總角的小斯, 都垂手侍立(이 뜰 입구에도 총각 몸종 4∼5명이 모두 팔을 드리우고 서 있다).' 청나라 말년부터 ‘총각’이란 말을 점점 쓰지 않았으며 현대 한어에서는 아예 종적을 감추었다. 중국과 문화적으로 뿌리가 비슷한 우리도 옛날에는 '총각'을 중국과 같은 뜻으로 써 왔을 것이다. 허나 필자의 우리민족 문헌에 관한 지식이 박약하므로 본문에 그 예를 들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 재미있는 일은 한자어에서의 '총각'은 의미가 변했거나 파생됐다. 한어의 '總角'과 우리말의 '총각'을 비교해보면 몇 가지 류의할 점이 있다. 첫째, 중국에서도 이미 사라진 이 말이 우리말에서는 지금도 상용어로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원래 녀자도 '총각'이라고 했던 것이 우리말에서는 언제 둔갑했는지 남자만을 '총각'이라고 부른다는 점이다. 셋째, '미성년'이란 뜻의 '총각'이 '결혼하지 않은 남자'로 둔갑되여 40대건 50대건, 심지어 60대, 70대건 결혼만 하지 않았으면 다 '총각' 혹은 '로총각'이라 부를 수 있다는 점이다. 넷째, 한어에서는 전혀 쓰여지지 않은 총각의 형상적 혹은 상징적인 뜻이 우리말에서 파생되어 형용사적으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즉 총각머리의 모양과 비슷한 사물에 '총각'이라는 관형어를 붙여 '총각-무' '총각-김치' '총각-미역(꼭지미역)'이란 단어가 생긴 것이 그 전형적인 례이다. 어느 조선족 식당의 메뉴에서 '총각김치'를 한어 '小伙子泡菜'로 번역해 놓은 것을 보았는데 이를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면 '장가가지 않은 남자 김치'이다. 삶은 소 대가리도 앙천대소(仰天大笑)할 일이다. 우리 동포가 경영하는 북경의 어느 김치공장에서는 총각김치를 '小伙子泡菜'라 이름지었을 뿐만 아니라 배추김치를 ‘大姑娘泡菜’라 이름 지어 팔고 있다. 이런 식으로 이름지으면 앞으로 ‘寡婦泡菜(과부김치)’ ‘跑腿兒泡菜(홀아비김치)’…등 명사들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총각’의 眞意를 모른데서 생기는 웃음꺼리이다. '纓頭蘿卜泡菜'로 번역하면 딱 맞다. '總角泡菜'로 번역해 놓아도 괜찮다. 그 진의를 아는 중국사람들은 유서 깊은 우리문화에 감탄하며 혀를 내두르지 않겠는가! 그 진의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總角’은 고대 한어에서 많이 써오던 단어이며 그 뜻은 이러이러한데 우리 조선말에서는 지금도 옛날 그 뜻대로 쓰고 있다고 설명해 주면 현대한어에서 이 단어가 되살아날지도 모른다.
33    '網言可畏' 댓글:  조회:6496  추천:87  2006-03-20
'網言可畏'정인갑 한어에 ‘人言可畏(인언가외)’란 성구가 있다. ‘떠도는 말이 무섭다’는 뜻이다. 가령 A왈: “갑군(甲君)과 을양(乙孃)이 같이 어디로 갔어”, B왈: “같이 방으로 들어갔대”, C왈: “같이 살았을 걸”, D왈: “을양은 이미 임신됐나봐”로 넘겨짚는…이런 식의 떠도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가! ‘떠도는 말’은 많이는 유언비어를 일컫는 것 같지만 옛날 본 뜻은 이렇지 않았다. 이 말의 출처는 3천여 년 전 의 ‘人之多言, 亦可畏也’이다. 한 소녀가 중자라는 남자에게 “밤에 담을 넘어 나를 찾아오지 말라. 부모의 꾸지람, 형제의 잔소리, 이웃의 여론이 무섭다”라고 한 말의 한 부분이다. 사실 의 적지 않은 부분은 덕정(德政) 또는 악정(惡政)을 찬양 또는 비판하는 ‘떠도는 말’이었다. 그 떠도는 말을 집대성한 것이 바로 민요 대집 이다. 필자는 본문에서 ‘人言可畏’를 ‘網言可畏(망언가외)’로 고쳐 활용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망’은 ‘인터넷(因特網)’이라는 뜻이다. 福建省에 부정부패의 척결 투사 黃金高라는 공산당 간부가 있다. 그는 福州市 재정위 주임으로 있을 때 불법 돼지 도살장을 척결한 건으로 주먹사회의 위협공갈을 받으며 방탄의(防彈衣)를 입고 다녀야 했다. 그가 連江縣의 당위서기로 전근된 후 모 건설업체와 전임 당위서기와 결탁하여 이루어진 모 도로공사의 부정부패 건을 다루려 했지만 연루된 권력가, 결탁된 주먹사회 등 때문에 해결을 보지 못하였으며 여전히 방탄의를 벗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 사건은 모 신문사의 사이트에 실려졌고 이내 다른 허다한 사이트로 확산되었다. 며칠 사이에 수십만, 수백만, 심지어는 수천만의 군중이 이 글을 읽었으며 온 나라가 떠들썩할 정도다. 지금 중국에서 일어나는 많은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문제들이 인터넷의 힘에 의해 빠른 해결을 보고 있다. 필자의 취지는 황금고 사건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이다. 인류의 언론 도구는 수천 년을 거치며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3천여 년 전에는 과 같은 민요가 충당되였다. 한 사람이 입으로 외우면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귀로 듣고 전달하는 형식이겠다. 이것이 인류 언론의 최초 단계이다. 그 다음은 책이였다. 책도 초창기에는 죽간에 쓰다가 후에 헝겊에 옮겨지고 나중에는 종이에 쓰므로 하여 전 사회에 보편화되였다. 근세에 진입하여 신문, 잡지(정기 간행물)가 생겼으며 또 그 다음에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생겼다. 지금은 인터넷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이 인터넷은 비할바 없는 빠른 속도에 비할바 없이 많은 참여자를 초래했다. 속담에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했지만 그 천리를 가는데 며칠이 걸릴지 몇 달이 걸릴지 모르겠으나 발 없는 인터넷의 내용은 분, 초를 다투며 수만리 간다. 한국 대통령 선거 때 로무현 대 리회창의 대결을 인터넷 대 신문의 대결, 인터넷이 이겼다는 설이 있다. 인터넷은 정말 괴물이다. 망언(網言)은 정말 무섭다. 본문의 기회를 빌어 ‘연우미디어’의 사다사소(四多四少)의 부족점에 대해 의견과 건의를 제출해보고자 한다. 본 미디어는 정면소식이 많고 반면 소식이 적으며(報喜不報優) ; 정치소식이 많고 사회소식이 적으며; 상층소식이 많고 서민 소식이 적으며; 찬양이 많고 비평이 적은 것이 흠이다. 국내 다른 사이트는 이와 반대로 사다사소인데 말이다. 연우미디어는 괴물도 아니고 可畏한 말도 없다. 연우미디어가 제 구실을 하자면 부정부패를 일삼는 위정자들을 섬뜩섬뜩하게 만들기도 하고, 서민들의 간지러운데를 빡빡 긁어주기도 하며, 항간에 떠도는(허나 진실한) 말들을 많이 실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며 우리 겨래 사회의 발전을 이끌어나갈 수 있겠는가!
32    天賦, 취미 및 三術 댓글:  조회:6085  추천:83  2006-03-20
天賦, 취미 및 三術정인갑 인간은 인생의 길을 어떻게 선택해야 바람직한가? 그 사람의 天賦에 따르는 것이 우선이라고 본다. 목청이 좋으면 성악을 하고 그림을 잘 그리면 미술을 하며 팔다리가 잽싸면 육상경기선수를 하는 등이 그것이다. 자기 인생 최상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리상적인 인생이 아닌가! 謝軍은 비상히 총명한 애였다. 청화대학에 입학할 가능성도 아주 많았다. 그런데 부모가 우연히 사 준 장기(象棋)에 푹 빠졌으며 소학을 졸업하는 해에 '나는 장기만 보면 흥분된 심정을 억제할 수 없으며 마음이 무척 편안해진다. 평생 장기에 몸 바치고 싶다'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그의 天賦는 장기였다. 청화대학 교수직에 있는 모친은 처음에는 회의적이다가 나중에는 딸의 선택을 지지해주었다. 후에 謝軍은 세계 굴지의 女 장기 棋手로 되었다. 체질적으로 天賦가 없는 자는 취미에 따르는 것이 二次적인 선택이겠다. 우표수집, 당구치기, 하다 못해 휘파람불기도 괜찮다. 이런 것으로 一方名人이 되여 사회에 공헌하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면 역시 의의 있는 인생이다. 지금 CCTV '小崔說事' 프로에 이런 인재들을 많이 선보이고 있다. 필자의 형님 鄭俊甲은 음악적 천부는 없지만 음악을 각별히 좋아했다. 고중 졸업 때 중앙민족대학 어문계에 입시 면제로 保送받았지만 가지 않고 연변예술학교에 다녔다. 북경의 중점대학을 포기하고 변방의 中專에 간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 아닌가! 그러나 짧은 인생에 우수한 곡을 많이 창작했으며 민족음악 사업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천부도 취미도 없는 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물론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자기의 천부와 취미가 무엇인지를 찾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苦讀書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세 번째 선택이겠다. 그러나 여기에도 기질별로 선택의 여지가 있다. 총명한 자는 學術의 길, 인내성이 강한 자는 技術의 길, 정서적인 자는 藝術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이 '三術'은 필자가 어릴 때 본 조선 작가동맹위원장 李基榮의 저서 에서 퍼온 개념이다. 필자가 崔鍵의 집에 놀러 다니기 시작하던 1978년, 그는 17살나는 고중생이였다. 그런데 악기만 삐삐 불며 학교 공부는 뒷전이였다. 그러던 그가 중국 록음악의 開山鼻祖로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필자의 인상에 그는 아주 정서적인 사람이였으며 록음악이 그의 기질에 딱 맞았던 것이다. 문혁 때 下鄕을 피하려 많은 사람들이 學齡前부터 예술에 뛰여들었다. 그때 연변예술학교에서 30명 정도의 학생을 모집하는데 3천명 이상이 입시에 참가할 정도였다. 예술적 기질이 전혀 없는 자도 입학하였으나 성공하기는 만무하다. 무용을 했댔자 체조와 다를 바 없고, 바이올린을 했댔자 손가락 屈伸운동에 불과했다. 필자의 위와 같은 3가지 선택의 순위와 三術의 개념에 면박을 가하는 독자가 있음 즉 하다. 謝軍이 청화대학, 鄭俊甲이 중앙민족대학을 졸업했다면 더 출세했을지 모른다. 崔鍵이 중국 록음악의 창시자가 된 데는 우연한 운수가 따른 것이 아닌가 라며. 해마다 북경대학이나 청화대학에 입학하는 학생은 해당 성 인구의 100만 대 1이다. 북경대학과 청화대학을 졸업한 자로서 사회의 인정을 받는 학자가 된 사람은 이 두 학교 졸업생의 1천 대 1이 될까말까 하다. 苦讀書의 길을 걸어 인정받을만한 학자가 되기는 하늘의 별 따기로 어렵다. 필자는 북경대학을 졸업하고 청화대학의 교편도 쥐고 있으며 25년간 새벽 2시 반전에 별로 자본 적이 없이 분투하였지만 成名成家 하지도 못했고 돈도 못 벌었다. '내가 남보다 나은 재주가 뭐지' 라고 자문해 보면 '朝→中 번역'과 '四角號碼 字典으로 글자를 빨리 찼기' 이 두 가지뿐이다. 一言以蔽之하여 학술의 길은 다른 길보다 퍽 어렵고 성공의 확률이 퍽 낮다. 謝軍이 청화대학, 鄭俊甲이 중앙민족대학에 다녔다면 십상팔구는 상기의 인생에 미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또한 학술의 길에서 崔鍵과 같은 운수가 생기기는 퍽 어렵다. 대학을 졸업하고, 또한 대학에서 교편을 쥐며 논문도 써냈고, 책도 몇 권 써냈다 하여 수만 명, 수십만 명의 팬을 가지고 있는 '풍각쟁이', '體育棒子' 등보다 낫다고 보는 견해 자체가 陳腐한 관념이다. 또한 옛날에는 대학에 붙은 자체가 출세의 징표였지만 지금은 출세의 시작도 되기 어렵다. 필자가 자라던 시기 인생 분투의 목표는 우선 초중→고중→대학→연구생→학자였다. 많이는 이 길을 걸을 수 없어야 마지못해 다른 길을 걸었다.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인생 최상의 가치실현을 하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으랴! 만약 謝軍과 崔鍵의 부모가 당초에 자식들의 선택을 제지시켰더라면 세계적인 棋手, 중국 록음악의 창시자가 夭折되였을 것이 아닌가! 이번 춘절을 필자는 고향 무순에 가 쇠면서 명년이면 무더기로 환갑을 치러야 할 동창들과 그들 자식의 인생을 한번 점검해보는 기회를 가졌다. 결과 필자 상기의 견해에 일리가 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독자들의 후대 배양에 도움이 되였으면 하여 이 글을 써본다.
31    '개띠' 댓글:  조회:6035  추천:88  2006-01-13
'개띠'정인갑 음력설이 다가온다. 음력으로 2006년은 丙戌년이며 병술년에 출생한 사람은 개띠이다. 물론 '×戌'년에 출생한 사람은 다 '개띠'에 속한다. 그러면 '개띠' 중 ‘띠’의 本義는 무엇이며 그 어원은 어디에 있을까? 필자는 어려서부터 이 문제의 정답을 찾느라 꽤나 애를 써봤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러나 漢語發達史에 대한 리해가 깊어지고 더욱이 漢語 音韻學에 대한 연구가 넓어짐에 따라 필자는 이 '띠'의 어원을 한자 '第'로 보게 되였다. 우선 발음상으로 한자 '第'의 한어 고대, 근대, 현대 발음이 [diei→di→ti]인데 그것을 한글로 옮겨 쓰면 '뗴→띠→디'가 될 것이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출간된 조선 중세 문헌에 한자의 漢語 발음을 [t]는 'ㄷ'로, [t’]는 'ㅌ'로 표기했고 탁음 [d]는 'ㄸ'로 표기하였다. 즉 '第'자의 음을 '띠'로 적기는 어음상 완전히 가능하다. 다음은 의미상으로 '第'자의 古代漢語 원래 뜻이 동사 '순서에 따라 배열하다'이고 이 뜻에서 명사 '순서'의 의미가 파생됐다. 옛날에는 책을 竹簡에 쓴 후 끈으로 엮어 말아서(卷) 순서에 따라 배열해 놓곤 했다. '卷 第三'은 '삼국지를 쓴(또는 칼로 새긴) 죽간 말이를 순서에 따라 배열한 세 번째'라는 뜻이다. '개띠'를 '개 번째', 즉 '十二支의 속성을 상징한 12가지 동물을 순서 따라 배렬한 개번째'라고 풀이하면 매우 적합하다. 또 그 다음은 조선어에서 형태소 '띠'에 '차례'라는 의미 외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는 도저히 힘들다. 조선어에 '첫째' '첫 번째' '둘째' '두 번째'라는 말이 있는데 '째'의 어원 역시 한자 '第'이며 위의 '뗴'가 구개음화 됐을 뿐이다. 고대 조선어에는 복모음이 없었으므로 [diei] 중의 [e]가 남고 [e] 앞의 [i] 때문에 [d]가 구개음화 하면 '째'가 되고 [i]가 남고 구개음화가 되지 않으면 '띠'가 되는 것이다. '개띠'는 사실 '개 째', '개 번째'인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李熙昇 편찬, 民衆書林 출판 을 펼쳐보니 한국어의 '차례'를 한자 '次例'라고 적어놓았고 張三植 편찬, 進賢書館 출판 은 漢語의 '次第'를 한글로 '차제'라고 표기하고 있다. 모두 틀렸다. 사실은 의 '차례'를 '次第'로, 의 '次第'를 '차례'로 표기해야 맞는다. 한어에 '次第'란 말이 있고 그 뜻은 한자어의 '차례'와 같다. 일본인이 만든 에는 '次第(しだい)'라는 올림말이 있으며 그 뜻 역시 한자어의 '차례'와 같다. '次例'라는 단어는 한어는 물론, 일본의 한자어에도 없다. 그리고 '次第'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 것은 한국뿐이다. 한어의 '도장←도댱(道場)'을 조선어로 '도량'이라 발음하고 '목단牧丹'을 '모란'이라 하는 것처럼 한어의 [d] 또는 [t]가 조선어에서 구개음화 돼 'ㄹ'로 되는 수도 있다. [-t] 받침이 있는 한자를 한자어에서 일률 [-ㄹ] 받침으로 한 것을 보면(達, 닫→달; 發, 받→발; 葛, 갇→갈 등) 고대에 'ㄷ'가 'ㄹ'로 되는 현상은 비교적 보편적인 듯 하다. 그러므로 '차례'를 구태여 의미상으로 썩 맞지도 않는 '次例'로 쓰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조선과학원 언어문학연구소 사전연구실 편찬 ('6권본 사전'이라고 속칭함)에는 '차례'가 '次第'로 표기돼 있는데 지당하다고 본다. 한자 '第'가 조선어에서 '띠' '째' '례' '제'의 4가지로 쓰인 것은 여간 재미있는 언어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30    神刀 댓글:  조회:5629  추천:57  2006-01-11
神刀정인갑 필자는 陝西省 咸陽市의 의사 張朝堂을 지금까지 목격한 사람 중 가장 신비스러운 인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1995년 필자는 당시 한국 모 신문사 북경 특파원과 유럽-아시아 대륙교(歐亞大陸橋: 山東省 連運港에서 출발하여 중국대륙을 횡단한 후 중앙아시아를 거쳐 네덜란드의 암스트담까지 가는 철도) 취재 중 함양시를 거치게 되었다. 그때 朝陽병원의 의사 ‘神刀’라는 별명을 가진 張朝堂을 취재했는데 ‘세상에 이런 기적도 있을 수가 있나’ 하며 깜짝 놀라고 말았다. 우리는 그 병원의 전문인 디스크(hyperosteogeny:骨質增生) 질환을 치료하는 장면을 견학했다. 환자의 통증 부위에 커피 색 물약을 바른 후 피부를 베니 싹은 뼈가 비집고 나오는 듯 했다. 그것에 끌을 대고 톡톡 쳐버리는 것으로, 1분 가량에 수술이 끝났다. 쳐버리는 일도 견학자인 우리들을 시켜 행했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발발 기다시피 하며 들어와 누운 환자들이 치료 후 웃으며 제 발로 걸어 나아가니 또한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 약 10만 명의 환자를 치료했는데 한 명도 복발된 자가 없다고 한다. 관건은 그 물약이다. 마취, 진통, 소염, 지혈 등 기능을 모두 지니고 있으며 심지어 싹은 뼈를 원 뼈에서 리탈시키는 기능까지 겸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사실은 신도가 아니라 ‘神藥’인 셈이다. 신도의 본업은 치질 전문이였는데 동업 의사들의 반발이 너무 심해서 디스크 전문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날 례외로 필자의 치질을 수술해 주었다. 항문에 그 물약을 바르고 수술 칼을 항문에 넣어 휘저어 너덜너덜한, 밸 같은 것을 꺼내는 것으로 수술을 끝냈다. 약 20초 걸렸다. 1년에 의사 한 명이 약 50만 명, 의사 몇 십 명이면 전 중국의 치질환자를 모두 치료할 수 있는 셈이니 동업자들의 반발을 받을 만도 했다. 원래 필자의 치질은 아주 심했는바 아스팔트 같은 찬 곳에 한시간 정도 앉았다가는 항문이 아파 몇 시간 대굴대굴 굴며 비명을 질러야 했었다. 그래서 치질전문 북경 二龍路 병원에 가서 입원 신청을 두 번이나 했다가 모두 도망쳐 왔다. 왜냐하면―치료 중의 고통은 제쳐놓고라도―수술 방법이 치질의 궤양 부위를 탄력이 강한 나일론 끈으로 조여 매고 헌데가 떨어진 후 염증을 제거하는 것인데 약 35일간 걸린다. 1분 1초도 쪼개어 써야 할 대단히 바쁜 필자가 어떻게 35일이나 병원에 엎디어 있는단 말인가! 그러나 신도의 덕분에 20초에 완치했으며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나 아직 복발되지 않았다. 세상에 이런 신비스러운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 중앙 고위급 령도 한사람은 신도의 수술장면을 보고 ‘神刀是國寶(신도는 국보다)’라는 제사를 써 남겼다고 한다. 그때 그 고위간부가 병원에 찾아가기로 했는데 약속 시간이 되도 나타나지 않자 신도는 목욕하러 가버렸다. 약속 시간이 퍽 지난 후 성 정부의 간부가 찾아가 공중목욕탕에 잠적한 신도를 찾느라 꽤나 품을 놓았다. “왜 이제야 오나, 나는 약속이 취소됐나 했지” 하며 신도 편에서 오히려 투덜댔다고 한다.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의사가 아닌 사람 치고 무릇 ‘신도’의 수술장면을 목격한 자들은 모두 탄복한 나머지 혀를 내두르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의사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절대 ‘신도’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고 한다. ‘신도’에 비교하면 자기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의사, 하찮은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신도’는 그야말로 ‘괴재(怪才)’ ‘귀재(鬼才)’ ‘기재(奇才)’ ‘신재(神才)’다. 필자가 신도에 대하여 대서특필하는 것은 그를 자랑하는데서 그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역시 중화문화의 한 개 단면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첫째, 중국은 13억이라는 막대한 인구를 가진 나라이므로 이런 괴재도 자연히 많을 수밖에 없다. 1천만 명당 한사람이 나타난다고 해도 130명쯤은 될 것이 아닌가! 둘째, 동물로부터 진화된 인간은 그의 사회 속성이 점점 강해지고 자연속성이 점점 퇴화될 것이다. 규범화된 현대 교육이 강해질수록 인간 개개인의 속성이 점점 증발될 것이다. 아직 규범화된 교육이 미약한, 문맹 천지인 중국이니 이런 귀재가 다른 나라, 다른 민족에 비해 더 많다. 상기의 ‘신도’도 고모네 집에 입적해 6살부터 한약을 가공하는 일만 한 반 문맹이다. 셋째, 중국인은 어떤 한가지 재능을 연마하기 위해 평생, 심지어 몇 세대를 바치는 기질이 강하다. 그런 와중에 기재가 튀어나올 수 있기 마련이다. 넷째, 중화민족은 일단 한가지 재능을 장악하면 그것을 가문의 비방으로 하고 대대손손 물려주는 기질이 강하다. 특허로 신청하여 벼락부자로 되려는 현대 상업사회의 상례와 전연 다르다. 이는 아마 자신의 부귀영화보다 가문을 빛내고 후손에게 복을 주려는(光宗耀祖, 封妻蔭子), 혈연관계를 중시하는 유교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많은 외국인이 그 물약의 비방을 특허로 사려고 찾아갔지만 절대 팔지 않고 있다. 상기의 물약도 세세 대대에 거쳐 개발된 것이다. 밖으로 비밀이 새여 나갈까봐 딸에게는 절대 가르쳐 주지 않고 아들에게만 가르쳐 준다. 의사 세대인 고모부는 아들이 없으므로 처남의 자식을 입적시켜 가르쳐 준 것이 바로 상기의 ‘신도’이다. 그때 ‘신도’도 20살 난 딸에게는 가르쳐 주지 않고 15살밖에 안 되는 아들이 커서 차세대 ‘신도’가 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작년 봄 필자는 출장차 신도를 찾아간 적이 있다. 새로 지은 4층집에 개인 병원을 차려놓고 있지 않는가!(이전의 조양병원은 국가병원) 아마 시장 경제의 물결속에서 동업자들의 반발도 무시할 수 있게 된 모양인지 치질치료도 본격적으로 할 수 있다고 하였다.
29    '本我' '自我' '超我' 댓글:  조회:6671  추천:67  2006-01-10
'本我' '自我' '超我'정인갑 작금세기에 걸쳐 유태 민족은 천재적인 인재 세 사람을 배출해 냈다. 인류 공산주의 리론의 창시자 맑스, 정신분석 리론의 창시자 프로이드 및 대과학자-발명가 아인슈타인이다. 본문에서는 정신분석 리론을 거론해 보련다. 한 남자가 절색의 유부녀와 만났다고 하자. "야, 이 녀자와 련애를 한번 해보았으면" 하고 생각하며 갖은 노력을 할 수도, 심지어 련애에 성공할 수도 있고(A), "그렇긴 한데 간통했다가 망신당하면 어떻게 하지?' 하며 자제할 수도 있으며(B), B의 생각이 승화되어 비밀리에 간통할 조건이 주어졌어도 안 할 수도 있고 심지어 전혀 그런 생각이 나지 않을 수도 있다(C). 에 나오는, 품에 안겨진 녀자를 날이 새도록 건드리지 않았다(坐懷不亂)는, 그리하여 2천여 년간 칭송을 받아온 柳下惠가 바로 C의 전형이겠다. 프로이드의 리론에 따르면 A는 本我 즉 인간의 본래 모습이고, B는 自我 즉 인간의 자제된 모습이며, C는 超我 즉 인간의 昇華된 모습이다. 한국에는 스님이 룸살롱, 단란주점에 들어가 술 먹고 아가씨 껴안고 노는 사례가 적지 않다고 한다. 또 한국 옛 패설문학에 스님이 마을의 부녀자들과 정사를 나누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얼마 전 필자는 세미나 참석 차 山西 五臺山을 유람한 적이 있다. 불교의 성지로 스님이 5천명이나 되는데, 이들이 점을 쳐준다며 바가지를 씌우는가 하면 민가의 부녀자들과 사통하는 예도 아주 많다고 한다. 이런 스님을 한국말로 '땡초'라고 매도하지만 프로이드의 리론대로 스님의 '본아' 역시 보통 인간, 보통 남자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면 그뿐일지도 모르겠다. 唐나라의 녀 황제 武則天은 비구니 출신이며 불교를 각별히 선호했다. 해마다 전국적인 불교 축제를 한차례씩 했는데 한번은 전국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스님 3사람을 불러 "당신들은 녀색을 놓아하느냐, 좋아하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중 두 스님은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녀색을 좋아하겠습니까?" 라며 질색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머지 한 스님만이 "물론 좋아하지요. 단 우리에게 녀색을 외면하는 체면마저 없으면 어떻게 사람들 앞에 떳떳이 나서며 존대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당신이야말로 정말 솔직한 사람이구나"라며 무측천은 그 스님을 좋아했다고 한다. 아마 무칙천의 머릿속에 인간의 성격을 '본아' '자아' '초아'로 갈라보는 개념이 있었음 즉 하다. 실로 대단한 정치가이다. 나라의 정치를 잘하는가 못하는가의 관건은 국민의 '본아'를 파악하고 정책의 기반을 '본아'에 두는 데 있다. 만약 '본아'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했거나, 정책의 기반을 '자아'나 '초아'에 두면 실수를 면치 못할 것이다. 중국 유흥업에 三陪 아가씨가 생긴지 15년이 넘는데 나라에서 三陪 아가씨를 줄곧 단속해 왔지만 없어지기커녕 엄청나게 불어났다. 한번은 노래방을 경영하는 필자의 친구가 그 노래방에 三陪를 두었다는 죄명으로 구속되었기에 그를 빼내려고 어느 아는 공안국장을 찾아갔다. 마침 그날이 캄보쟈의 시하누크 친왕이 북경을 방문하는 날이며 그 국장이 당직을 선다는 호텔로 찾아갔다. 그런데 일체 고객의 호텔 출입을 금지시키고 경찰 수십 명이 해당 호텔 나이트클럽을 독차지한 채 나이트클럽의 三陪 아가씨 하나씩 껴안고 술을 마시고 있지 않는가! 그때 필자는 아연실색했으며 심지어 분노하였었다. 그러나 프로이드의 '본아'설로 보면 아연실색할 것, 분노할 것도 없을지 모르겠다. 경찰은 남자가 아닌가! 아마 三陪 아가씨와 술 마시기를 선호하는 것 역시 일반 남자들의 본아인가 싶다. 하여 瀋陽시 세무국에서 전국에서 솔선적으로 유흥업아가씨들에게서 세금을 징수하여, 사실상 그들을 공식 인정한 것으로 되였다. 지금은 정책상 어떻게 실행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당시는 꽤나 사회의 물의를 빚어낸 일이였다. 필자가 보기에는 심양시의 위정자들이 정치를 잘한다고 보여진다. 三陪와 賣春買春은 별거니까!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 생산자료를 국유화하면 인민은 나라의 주인으로 됐으니 국가의 사업이 바로 내 개인의 사업이니까 하며 허리가 부러지도록 일할 것으로 보았다. 인류의 그런 시대가 언젠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현 단계에서는 아직 그렇지가 않다. 이런 착각 때문에 인류의 공산주의는 경제면에서 실적은 내지 못했으며 중국이 앞장서 이의 개혁을 추진한 것이다. 지금 중국공산당이 진행하고 있는 개혁, 즉 중국식 사회주의나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간단히 말하면 바로 맑스의 리론과 프로이드의 리론을 결합시키고 있는 과정이라고 보여진다.
28    심상치 않은 '손님' 화제 댓글:  조회:11431  추천:86  2005-12-14
심상치 않은 '손님' 화제정인갑 우상렬 칼럼 '손님이 왔습니다'[CK連友포럼 No.437]에 한국 배재대학의 여학생들이 수업이 싫어 '손님'(月經―필자 주)을 빙자해 휴가를 청하며, 학생회장 경선 출마자들의 '生理休講制度' 실시 公約에 여학생 100%찬성, 남학생 同感이라 하였다. 부산 동아대학에서는 이미 최초로 생리휴강제도를 정규적으로 실시했으며 경희대학 총여학생회에서도 생리휴강제도를 시범 실시한다고 발표하였단다. 지금 생리휴강제도실시 思潮가 한국 대학을 석권하고 있으며 불원간 적어도 3流∼末流 대학에서 곧 전면 실시될 조짐이다. 필자가 처음 '생리'를 알게 된 것은 중3때였다. '몸이 불편해서'라면 선생이 고개를 끄덕여주고 그 여학생은 체육시간에 빠질 수 있었다. 그런데 한 총각 선생이 그 말귀를 못 알아들어 캐고 묻는 바람에 '라이리쨔러(來例假了 : 월경이 왔습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었으며 필자도 그 바람에 생리가 뭔지 알게 되었다. 그 여학생은 너무 수줍어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고. 그런데 배재대학 신문에는 진붉은 월경색 2호 글자로 '월경, 당당히 말하자'라는 제목을 달고 그 옆에 알락달락 예쁜 생리대 아이콘을 줄 세워 놓았다고 하지 않는가! 사회의 변화가 이렇듯 無常한데 대해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본문의 제목을 '심상치 않은 "손님" 화제'라고 단 원인은 상기와 같은 '월경'에 대한 엄폐의식의 파멸이 아니라 한국 청년학생의 정신상태의 변화에 대한 우려이다. 생리휴강제도를 실시하자? 너무나 어처구니없다. 이는 한국 대학생들이 태만, 타락의 길로 가고 있다고 밖에 해석할 수 없다. 한국의 지성인들은 마땅히 이를 심상치 않은 화제로 보아야 한다. 밥을 짓다가 아기를 낳는다거나, 필자의 모친처럼 해산 후 며칠 쉬지도 못하고 가마니를 짜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중국에서 1950∼70년대까지 종업원에 한해 해산 후 56일의 휴가제도를 실시하다가 점점 시간을 늘여 지금은 반년, 조건이 허락되는 직장에서는 심지어 1년까지 허용한다. 이렇듯 사회 발전에 따르는 여권의 伸張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상기의 '손님'은 별문제이다. 이 '손님'은 重體力勞動者에게 적당한 혜택을 주는 정도면 충분하다. 학생에 한해서는 체육시간을 면제해 주면 그뿐이다. 일반 수업까지 빠져야 할 정도의 부담이 되는 '손님'이 절대 아니라고 한다. 여성에 대한 무제한의 '혜택'은 마땅치 않으며 이는―시각을 바꾸어 보면―여권의 신장이 아니라 오히려 여권에 대한 침해로 변할 수 있다. 여성을 弱者, 심지어 無能者로 취급하며 그 만큼 사회 활동의 領域에서 배제시키는, 하여 여성의 사회 지위가 낮아지는 결과를 빚어낼 수도 있다. 남성과 거의 같이 일하는 중국 여성이 집에서 놀며 남편이 벌어다 주는 밥을 받아먹는 한국 여성보다 사회지위가 훨씬 더 높은 것이 이 도리를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여학생에게 이런 혜택(생리휴강제도)을 주자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 더 낙관적이고 적극적이며 주인공다운 인생도 있지 않을까. "시끄럽다! 우리는 한 달에 한번씩 붉은 '손님'이 찾아와 고무해주니 신바람 나는데 휴강은 무슨 놈의 휴강이야! 너네 남학생들 우리보다 작대기 하나에 계란 두 개 더 차고 다니니 몸이 무겁고 힘겹지? 휴강하고 싶으면 너희들이나 해봐라!"라며. 필자가 소학을 다닐 때 '皆勤生(개근생)' '整勤生(정근생)'이라는 상이 있었다. 1년에 결근 날자가 이틀 이하면 정근이고 하루도 없으면 개근이다(지각, 조퇴가 3번이면 하루 결석으로 인정한다). 30명 정도의 한 개 반에 해마다 정근생 2∼3명, 개근생 2∼3명의 수상자가 나온다. 심지어 졸업시 6년 정근생, 개근생 수상자도 간혹 나온다. 옛날 한국도 상기의 상황과 비슷하였으리라 본다. 이런 정신이 있었기에 광복 후의 곤란, 6•25전쟁 후의 난관을 이겨냈으며 한강의 기적도 창조해 냈으리라. 좀 먹고 살만해 졌다고 안일만 추구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세상에 각고분투 없이 출세한 사람이 있는가! '손님'이 머무는 시간을 평균 4일로 하면 남학생보다 15.4% 적게 수업 받는다. '손님'체류 기간과 일요일이 겹칠 수도 있겠지만 수업이 싫어 주장한 것이라고 할 때 일요일 외에 4일간 결근할 것은 당연하다. 1년 수업 기간을 9개월로 가정하면 대학 4년간에 남학생보다 4×9×4=144일 결근하게 된다. 여자대학이라고 해도 저마다 손님이 오는 시간이 다르니 강의 진도를 어떻게 장악할 것인가. 여간 복잡한 문제가 아닐 것 같다. 필자가 한국 대학의 사정을 잘 아는 자에게 이런 예기를 했더니 "한국 대학생들 PC방에 가 게임 놀고, 채팅하고, 술 마시고, 데이트하는데 미쳤지 공부하는 줄 알아? 나흘 더 배운 자나 덜 배운 자나 그거이 그거야"며 필자를 면박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한국 대학생이 다 이렇지는 않겠지만 아무리 봐도 너무 한심하다. 중국의 웬만한 대학에서는 며칠 결근했다가는 남의 필기장을 빌어 베낀다, 밀린 숙제를 한다 하며 보충 공부로 둬 주일간 진땀을 흘려야 하는데 말이다. 중국에 유학 온 한국 대학생 공부 안 한다고 너무 소문났다. 수업에 빠지는 현상은 아주 보편적이며 그 정도도 십분 엄중하다. 어학 연수생의 예로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50% 정도의 수업에 빠지는 학생이 1/4, 30∼50% 빠지는 학생이 1/4이나 되며 1주에 한번도 안 빠지는 학생은 거의 없다. 기숙사에 찾아가 보면 대낮에 쿨쿨 자는데 밤새 카라오케에 가 놀고 새벽에 돌아온 자도 비일비재하다. 유학생만 그런가 했는데 자국에서 공부하는 학생도 마찬가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여간 우려를 표시할 일이 아니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도 결코 '생리휴강제도'의 합리여부만을 운운하자는 것이 아니다. '손님' 현상은 한국 적지 않은 청년학생들의 타락을 나타내는 심상치 않은 현상이라고 호소하기 위해서이다. 월경이 '지긋지긋하고 우울만 안겨주던 반갑지 못한 손님으로부터 반가운 손님으로 변해간다. 女權이 그만큼 신장되고 현대사회가 그만큼 신사화 되었다는 말이 되겠다.' '그리고 나는 맹세했다. 이제 중국에 돌아가 우리 연변대학교 강의 때는 여학생들이 생리기색만 보여도 내가 알아서 척척 배려해 주리라고. 우리 여학생들은 여자가 아닌가, 무엇이 모자란 데 말이다 하고 생각하면서.' 위 단락은 '손님 왔습니다' 문장의 맺는 말이다. 저자가 배재대학에 몸담고 있으면서 배재대학化하여 생긴 착각(當局者迷)에 불과하며 연변에 오면 생각을 달리 할 것이라고 믿는다(旁觀者淸). 절대 '생리휴강제도' 따위를 연변대학에 끌어들여 우리민족의 지성인을 배양하는 최고 학부를 오염시키지 말기 바란다. 물론 이 맺는 말이 저자의 아이러니일 수도 있으며 그러면 필자의 맺는 말도 蛇足에 불과하고.
27    중국산은 맛이 없다? 댓글:  조회:7249  추천:84  2005-12-03
중국산은 맛이 없다?정인갑 이 글은 본 사이트에 실린 박영철 선생님의 문장 (포럼마당글 No.389 참조)에 대한 보충으로 쓴다. 朴은 한국 언론이 중국산 농수산물은 무조건 저질이고 불량이라고 모독한데 대하여 못마땅한 행위라고 질책하였다. 잘 쓴 글이라고 생각되지만, 朴은 다른 또 하나의 문제―한국인들이 중국산 농수산물 자체를 맛없다고 하는 데 대하여 생각해 보았는지 모르겠다. 朴의 문장에는 '중국산은 맛있을 수도 있는데 질량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저질을 한국으로 수출하였기 때문에 먹지 못할 물건이다'라는 저의가 깔려있다고 볼 수도 있다. 필자의 취지는 이것이 아니라, '중국산은 우수품질이라고 하여도 한국산에 비하면 맛이 없다'라는 문제이기 때문에 朴이 언급한 문제에 비하여 더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필자는 한국을 자주 드나드는 중국인들, 특히 한국과 농수산물 무역을 하는 중국인들로부터 자주 이런 말을 들어왔다: "날마다 중국산 농수산물을 먹는 한국인들로부터 중국산이 한국산보다 맛없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기분이 상한다." 필자 자신도 이런 체험을 한 적이 있다. 한국에 갈 때 잣이나 참기름을 선물로 주곤 했는데 "중국 잣, 한국 잣보다 맛이 없어", "중국 참기름, 한국 참기름보다 맛이 없어"라는 말을 듣곤 하였다. 그럴 때마다 기분이 상하곤 하였다. 이 말은 한국인들의 "身土不二"의 신념에서 나온 애국 정서의 반영에 불과하지 한국인들이 설마 마음속으로도 중국산을 무조건 맛없다고 여기겠는가고 필자는 생각해 왔다. 따라서 한국인들의 이런 정서를 좋게 해석하며 리해해 주었다. 그러나 아래의 체험을 통해 여기에는 한국인들의 편견이 없지 않음을 발견했다. 어느 우연한 기회에 필자는 서울 가락 농수산물 시장을 돌아보게 되였다. 한국에서는 가장 큰 농수산물 시장인데 없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중국산도 적지 않은데 모두 한국산보다 퍽 싸며 맛이 없기 때문이라고 가게 주인들은 일제히 말한다. 마늘, 참깨, 海魚 등을 두 무지로 갈라놓고 "이것은 한국산, 맛있으므로 비싸고, 저것은 중국산, 맛없으므로 싸다"고 하지 않겠는가! 두만강 양쪽에 위치한 같은 백두산에서 자란 잣이 도랑 하나를 사이에 두었다고 맛이 다를 소냐! 동풍이 불면 조선(한국)의 잣이 중국으로 날려 떨어지고, 서풍이 불면 중국의 잣이 조선(한국)으로 날려 떨어지는데 한국산, 중국산이라고 가를 수 있으랴! 너무나 語不成說이다. 한국의 西海와 중국의 渤海•黃海는 서로 붙었으며 물고기가 이쪽저쪽 왔다 갔다 하는데 한국산과 중국산을 가를 수 있으랴! 또한 중국 漁船이 한국 漁船과 이웃하고 고기를 잡으며 잡은 고기를 한국 어선에 밀수로 넘겨주는 예도 많다고 한다. 배가 다르기 때문에 맛이 틀릴 수 있는가? 터무니없는 소리다. 같은 품종의 농수산물이면 일반적으로 북으로 올라갈수록 맛이 있다. 아마 성숙하는데 걸린 시간이 길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 내의 예로 입쌀, 밀가루, 고사리, 도라지, 깨, 목이버섯, 시금치…등은 모두 북방 산이 남방 산보다 맛있다. 그러면 한국산은 중국 북방 산보다는 맛없고 남방 산보다는 맛있음 즉 하다. 또 보통 건조한 지대, 사막지대의 농산품이 평원지대, 습한 지대보다 맛있다. 필자는 중국 新疆(신강) 출장의 체험을 통하여 그곳 사막지역의 밀가루가 다른 지역의 것보다 퍽 맛있다는 것을 충분히 느꼈다. 그것은 건조한 지대, 사막 지대의 토질에 알칼리성이 강하며(즉 짜며) 짠 흙에서 자란 농산품이 더 맛있다는 것이다. 사막지역의 양고기, 쇠고기도 다른 지역의 것보다 퍽 맛있는데 역시 그 짠 흙에서 자란 풀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리가 있다고 보여진다. 필자는 어릴 때 한족이 3/4, 조선족이 1/4인 마을에서 자랐다. 조선족 집에서 돼지를 잡으면 한족들이 불티나게 사가곤 했다. 조선족이 기른 돼지고기가 더 고소하며 맛있다는 것이다. 그 원인을 물으니 조선족은 먹는 음식이 짜며 짠 음식의 찌꺼기를 받아먹은 고기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계발을 받은 생각이긴 하지만 한국산 가축의 고기가 맛있을 가능성은 있겠다. 한국인의 풍속에 시골집에서 아기가 똥을 싸면 '워―리!, 워―리!' 하며 개를 불러 들여 먹이며 심지어 아기의 엉덩이, 항문까지 핥아먹게 한다. 한 집에 자식을 대여섯씩 기르는 그 시대에 아기 엉덩이만 핥아먹어도 반 포식은 했음 즉 하다. 그런 개고기나 제주도의 똥 돼지가 맛있는 원인은 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짠 간을 먹였기 때문이다. 한우가 미국산 쇠고기보다 더 고소한 원인 역시 먹인 사료의 구별 때문이다. 그러나 배합사료로 산업화•기계화 사육하는 현 시대에 이런 구별점도 점점 퇴색돼 가고 있다. 지금 뜨물을 먹여 키운 돼지, 아기 엉덩이를 핥아먹은 개, 콩깻묵을 먹여 키운 소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렇게 보면 한국산 가축의 고기가 더 맛있을 가능성마저 없어졌다. 중국산과 한국산을 대조하는 상기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같은 바다의 수산물은 맛이 같을 것이고 농산물은 어느 것이 더 맛있다고 말하기 딱하며(중국 淮河 이북의 농산물 및 서북 사막지대의 농산물은 한국산보다 맛있고, 淮河 이남의 농산물 및 동남 평원지대의 농산물은 한국산보다 맛이 없으며) 축산물은 그 산지가 주요하게 사막, 초원지대인 중국산이 한국산보다 더 맛있을 것이다. 만약 기어코 맛있다고 우기면 한국인의 습관에 따른 입맛이지 객관적인 맛이 아니다. 필자의 집에 식모를 여럿 써 봤는데 음식을 잘하는 식모가 만든 음식도 처음에는 맛이 없어 보인다. 식당의 요리사를 더 좋은 자로 바꾸어도 그 식당 단골 손님의 입맛에는 오히려 맛이 없어 보이는 수가 있다. 모두 이미 습관된 입맛 때문이다. 한국산이 중국산보다 좀 맛있어도 체면상 중국인 앞에서 좀 삼가해야 하겠는데 하물며 그런 근거도 없는 판에 이런 말을 식은 죽 먹듯이 할 필요가 있겠는가? 1987년 그때 한국 시장의 땅콩 소매가격이 중국 농촌의 땅콩 도매가격의 40배였다. 필자는 일찍 한국의 식품가공업자와 승용차로 중국 산동반도를 일주한 적이 있다. 서울 5•16광장 몇 배 크기의 땅콩 밭을 바라보며 그 한국인은 "아하! 중국에 비기면 한국의 농사는 소꿉장난에 불과하구나!"고 한탄한 나머지 "이제 우리는 중국을 파먹는 수밖에 없구나!"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한국 농산물과 중국 농산물의 게임이다. 이런 현실을 直視하고 '중국산은 맛이 없다'는 奇談과 '중국산은 무조건 저질이다'라는 怪論을 던지고 글로벌 시대에 역행하는, 이로 하여 오히려 한국에 손해를 끼치는 행위를 하루속히 포기하여야 할 때가 되였다.
26    '명함' 댓글:  조회:6885  추천:72  2005-12-03
'명함' 정인갑 영어의 '네임카드'에 해당하는 우리말의 '명함'이 한자어임은 누구나 다 짐작이 갈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족이나 한국인에게 명함의 '함'자를 어떻게 쓰느냐고 물으면 이를 잘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郵便函'이라는 '函'자가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명함에 보통 通信 주소가 적혀있으니 정답일 듯하다. 사실은 '職銜(직함)' '銜'자를 쓰는데 말이다. '名銜' '姓銜'의 뜻을 정확히 풀이하면 '이름과 직함' '성과 직함'이라야 맞다. 명함을 일컫는 漢語의 '밍폔(名片)', 일본어의 '메이시(名刺)', 그리고 영어의 '네임카드'에는 '직함'의 개념이 전혀 없는데 어째서 우리말에만 유독 이렇게 됐을까? 이에 대해 우리민족이 아마 다른 민족보다 '직함'이나 '관직'을 각별히 중시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겠거니 하고 넘겨짚기 쉽다. 그러나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우리민족은 다른 민족, 가령 漢族에 비해 벼슬에 대한 탐심이 적은 편이다. 우리말에서 네임카드를 '명함'이라고 하는 데는 그 원인이 다른데, 즉 유서 깊은 문화에 있다는 점을 필자는 강조하고 싶다. 漢語의 '名片'이란 단어는 불과 淸末에 생겼다. 그러나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名刺' '名紙' '名帖'이라 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최초의 조상은 '爵里刺(작리자)'임을 발견할 수 있다. 역사 제9권 의 裵松之(배송지) 注釋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하후연의 다섯째 아들 榮은 어릴 때 뛰어나게 총명하고 기억력도 대단했다. 7살 때 벌써 문장을 지을 줄 알고 하루에 책 천자씩 읽었으며 한눈에 문장의 뜻을 다 터득할 수 있었다. 이런 소문을 듣고 魏文帝가 그를 한번 접견한 적이 있다. 자리를 같이한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名刺(명자)에 적혀있는 本貫, 성명 등을 문제에게 上奏한 뒤 하후영에게 한번씩 보였는데 10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名刺를 그는 한 사람도 틀리지 않고 다 외웠다. 배송지의 주해는 이 기록을 해석하면서 '名刺'는 바로 세간에서 말하는 '爵里刺(작리자)'라고 했다. '爵里刺'라는 말은 이미 한나라 때에 씌어진 이라는 책에 나타나며 본인의 작위, 관직, 그리고 鄕里 즉 本貫이나 거주지를 적은 것을 말한다. 즉 중국에는 2,000여 년 전의 한나라 때에 벌써 명함이 있었으며 명함의 내용은 작위, 관직 또는 오늘날 말하는 직함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단 그때의 명함은 지금의 핸드폰 넓이에 세개 정도 길이의 엷은 널 쪼각으로 된 것이였다. 우리말의 '명함'은 고대 漢語 '爵里刺'라는 말의 뜻을 고스란히 이어받았으며 후세에 변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다만 '爵'자를 그와 뜻이 비슷한 '銜'자로 고쳤을 뿐이다. 사실 지금도 직함이 없는 명함은 거의 없다. 일반 농민이나 근로자가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따져 보면 일어의 '名刺'는 '名里爵'의 아들 벌에 해당되고 현대 漢語의 '名片'은 '名里爵'의 손자 벌에 해당되는 셈이다. 우리말의 '名銜'은 '名里爵'의 동생쯤은 되니까, '名刺'의 작은아버지, '名片'의 작은할아버지이고. 한국인들에게서 가끔 '국장 대우' '부장 대우'라고 씌어진 명함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한국 기업의 직위가 세분화돼 있는 일면과 함께 한국인들의 명함에서 직함 '銜'자가 유명무실한 들러리가 아니라 실질적인 내용이 있다는 얘기다. 필자는 한국인에게서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라는 물음을 받았을 때 "소인은 河東 鄭氏에 處長의 자리를 겨우 지키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 한번도 행동에 옮겨본 적은 없다.
25    '儒敎' 析 댓글:  조회:6635  추천:72  2005-12-03
'儒敎' 析 정인갑 몇 년 전 한국 모 교수의 '儒敎'에 관한 론문을 중국의 어느 학술지에 싣기 위해 번역을 맡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학술지 측에서 '儒敎'란 단어를 모두 '儒學'으로 고치는 바람에 말썽이 일어났었다. "론문의 저자가 한국인이고 그들은 '儒敎'라고 하는데 굳이 '儒學'으로 고쳐야만 하겠는가?"하는 필자의 변명에 대해 학술지 측은 "터무니없는 소리하지 마라. 공자의 학설이 어떻게 종교라고 할 수 있는가"하여 막무가내였다. 그 뒤로 필자는 한국어의 '儒敎'는 모두 중국어의 '儒學'으로, 중국어의 '儒學'은 한국어의 '儒敎'로 옮기에 되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무언가 께름칙한 느낌을 금하지 못했다. 만약 '유교=유학'이 성립된다면 '종교=학설' 또한 성립돼야 할 것이 아닌가! 종교란 무엇인가? 세계를 지배하는, 인간과 자연을 초월하는 神(절대자)의 존재를 독실하게 믿으며 그를 경배하는 사회의식을 종교라고 한다. 종교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가 來世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사상은 禮樂과 仁義를 숭상하고 忠恕(충서)와 中庸(중용)을 제창하며 德治와 仁政을 주장하는 등이 그 핵심적 내용이다. '儒'는 본래 '巫(무당)' '史(사관)' '祝(제관)' '卜(점쟁이)' 등과 구분되는 '書生 또는 '學者'를 일컫는 말이다. 儒家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신을 믿지 않으며 따라서 내세를 인정하지 않는다. 神格的인 것에 대해서는 십분 懷疑적이었다. 중국 上古의 서적들은 거의 유가에 의해 정리됐는데 그들이 신격적인 내용을 삭제해 버렸기 때문에 4개 고대 문명국 가운데 희랍, 이집트, 인도 문화에는 신화가 발달돼 있는데 유독 중국만은 신화전설이 거의 없다. 세계적인 종교이건 토착 종교이건 중국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원인도 유학 사상의 강한, 심지어 통치 지위의 작용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공자의 사상을 宗敎라고 할 근거는 전혀 없다. 때문에 몇 천 년 간 공자의 학설을 중국에서는 줄곧 '儒家', '儒術' '儒學' '孔孟之道' 등으로 불러왔다. 1898년 康有爲(강유위)가 戊戌變法(무술변법)을 할 때 쓴 책 에서 '孔敎'라는 말을 내놨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어 끝내 전파되지는 못했다. 어쨌든 '儒敎'라고 부르는 것은 마땅치 않다. '儒學'이라 고쳐 부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한국에서 '儒學'이라고 부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필자가 본 책만 해도 한국 三省出版社에서 간행된 退溪(퇴계)와 栗谷(율곡)의 저서를 수록한 책이름이 으로 돼 있으니 말이다. 한국에서는 유교라고 부르는 것이 큰 대접일지 몰라도 종교의 지위가 낮은 중국에서는 위대한 사상가, 정치가 겸 교육가를 어떻게 한낱 종교의 敎主로 격하시킨단 말인가며 反感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한국을 소개한 책자마다 한국의 종교상황을 소개하는 대목에 '儒敎'가 있으며 심지어 '敎徒' 숫자까지 있다. 그들이 '종교활동'을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또 한국에 '儒林'이 있으며 그 숫자도 나와 있는데 '儒林'과 '儒敎徒'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다.
24    中韓間의 고유명사 논란 댓글:  조회:7586  추천:48  2005-11-17
中韓間의 고유명사 논란정인갑 반년 전 한국은 중국에게 '서울'을 '漢城(한청)'이라 부르지 말고 '首爾(서우얼)'로 불러달라고 청구하였으며 중국은 마침내 이 청구를 받아주었다. '서울'을 '한청(漢城)'이라 부르지 말아달라는 요구를 제출한지 오라며 이에 대한 중국측의 태도는 ‘그럼 어떻게 불러 달라느냐, 너희들이 이름을 지어 우리에게 알려다오’였다. 한국측에서 ‘서울’이라는 음에 어느 한자를 써야 좋을지 몰라 10여년 고민하다가 최근에야 마침내 '首爾' 두 자를 고안해 낸 것이지 중국이 질질 끌며 한국의 요구를 받아주지 않은 것이 아니다. 사실 중국과 한국 사이에 이런 논란이 이것뿐 아니다. ‘한청(漢城)-서울(首爾)’, '남조선-한국', '중공-중국' 등은 이미 해결된 것이고 아직 현안으로 남은 것이 적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단 이런 문제에 대하여 비교적 대범한 중국이 한국처럼 옹졸하게 걸고 들지 않을 다름이다. 우선 ‘중국’이라는 칭호도 문제점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한국은 중국의 고유명사를 중국 現時 普通話(표준어) 발음대로 적고 있는데 그러면 ‘中國’을 ‘중궈’라고 표기해야 맞다.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등은 현시 발음대로 적으며 ‘中國’은 왜 현시 발음대로 ‘중궈’라 적지 않고 1,000여년 전에 이미 사라진 음으로 적는가? 한국이 중국의 ‘香港’과 ‘奧門’을 ‘샹강’과‘아우먼’이라 부르지 않고 ‘홍콩’과‘마카오’라 부르는 것에 대해 중국이 시비를 걸자면 큰 시비꺼리이다. ‘중국으로 회귀한지 오란데 왜 아직 식민지 때 부르던 이름을 계속 쓰고 있느냐?’ ‘중국이 한국을 “조선총독부”라고 불러주면 당신네 동의하는가?’라면 한국이 어떻게 대꾸할 판인가?‘국제 사회에서 “홍콩”, “마카오”라고 부르므로 그렇게 부르는데 무슨 잘못이냐?’고 변명하겠지만, 그렇다면 ‘중국이 한국을 국제 사회에서 부르는 것처럼 “까우리(高麗-Korea)”라고 부르면 한국이 동의할 것인가? 만약 국제 사회에서 부르는 것에 따른다면 왜 “중국”을 “차이나(China)”라고 부르지 않느냐?’고 반박하면 어떻게 대꾸할 것인가? ‘”서울”이면 어떻고 “한청”이면 어떻나?’라는 중국 사람의 질문에 가장 유력한 반박이 ‘서울대학으로 보낸 편지가 한성대학으로 잘못간다’였다. 이렇게 잘못간 편지가 10년에 몇번 되는가? 아마 가물에 콩나듯 할 것이다. 이는 위의 ‘홍콩’ ‘마카오’의 시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필자는 1992년 초 한국경제를 소개한 70만자 편폭의 책자를 써 中信出版社에서 출판한 적이 있다. 이 책은 한국측 모 신문사 및 연구소와 중국측 中國國際信託公司 간의 협력 프로젝트이며, 해당 신문사가 책임지고 1,000달러짜리 광고 50개를 본책에 내기로 하고 시작한 것이다. 1991년에 두 나라가 수교될 것으로 추측했던 것이 수교가 되지 않아 원래 로 시작한 책 이름이로 바뀌게 되였다. 책 이름에 ‘남조선’이라 했다며 그 신문사에서 끝내 광고를 유치해 주지 않아 중신출판사는 엄청난 적자를 보았으며 필자도 2년간 거의 헛수고를 하였다. 자기네는 공공연하게 ‘중공’이라 하며 ‘한국’이라 표기해야 한다고 억지를 쓴 것이다. 이런 논란은 지명, 국명뿐 아니다. 본문에서는 아직 남은 현안으로 볼 수 있는 '중국어(中國語)' 문제도 운운해 보련다. 지금 세계 각국에서는 중국 주체민족 '漢族'의 언어 '한어(漢語)'를 '중국어(中國語)'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中國語'라는 명사가 없다. 지난 세기부터 한어를 '國語'라고 했었다. 이는 '中國語'의 생략어로 볼 수도 있지만 中華人民共和國이이 성립된 후에는 이내 없애버리고 ‘한어’로 고쳐불렀다. 그 리유는 중국에는 56개 민족이 있고 각 민족은 각자가 쓰는 언어와 문자를 포함해 일률로 평등한데 한어만을 '國語' 또는 '中國語'라고 부르면 大漢族主義의 혐의가 있다는 논란 때문이다. 중국 어학 巨匠 북경대 교수 王力 선생이 해방전에 쓴 저서 을 해방후 再刊할 때 이라 이름을 고쳤다. 그러면서 ‘이라 하면 대한족주의의 혐의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고친다’는 聲明을 붙였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중국 내 56개 민족의 언어를 망라해 '中國語'라고 부를 수 있다는 潛在적인 개념이 생긴다. 한어는 그 중의 한 언어에 불과 하며 따라서 중국 내 각 소수민족이 쓰는 언어도 中國語中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황당무계한 논리 같지만 결코 필자의 말장난이 아니다. 문혁 때 연변대학에서 '中文系' 산하에 朝鮮語와 漢語 두 가지 전공을 설치한 적이 있다. 이런 조치는 위의 논리대로라면 맞는 것 같기도 하지만 조선족들의 강렬한 거부감을 불러일으켰었다. 아마 여타 소수민족도 자기네 말을 '中國語'라고 부르는 것을 원치 않아서인지 '中國語'라는 명사는 좀처럼 유행되지 않고 있다. 중국 각 대학의 중문계, 즉 중국언어문학계에서 한어, 한문학만 취급하면 역시 대한족주의의 혐의가 생기기 때문에 '중국 소수민족 문학'이라는 과목을 설치하고 있다. 적어도 북경대 중문계는 이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소수민족 언어는 취급하지 않으므로 56개 민족의 문학을 망라한 '중국 문학'은 있어도 56개 민족의 언어를 망라하는 '中國語'는 없는 셈이다. 력사적으로 한국에서는 '중국어'라는 말을 쓰지 않았었다. 조선조 때 중국어를 배우는 교과서 의 '乞大(키따)'는 '契丹(키단)'의 음역이다. 좀 후에 나온 에서는 중국어를 '한아어언 (漢兒語言)'이라 불렀고 또 후에는 '華語', '官話' '한(漢)말'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중국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지는 몇십년밖에 안 된다. 한국에서 '중국어'를 '한어'라고 고쳐 불러주어야 도리상, 예의상 맞다. 이는 ‘서울’이냐, ‘漢城’이냐 보다 더 심각한, 중국의 정치제도와 관계되는 문제이다. 단 중국은 한국이 '중국어'라 부르던, '한어'라 부르던 상관하지 않을 따름이다.
23    한자와 우리민족 댓글:  조회:7441  추천:82  2005-09-07
와 그 에서 필자는 ‘한자는 우리민족의 글, 한자문화는 우리민족의 문화’라는 견해를 피력하였으나 그 론거를 상세히 제시하지 못하였다. 본문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론술하고자 한다.한어의 력사分期에는 고대한어(五代이전)와 현대한어(宋代이후) 2개 단계로 획분하는 설이 있다. 지금 쓰고 있는 현대한어의 기본 구도는 宋代 때 이미 형성되였기 때문에 2단계설도 도리가 있다. 우리민족이 쓰는 한자는 形, 音, 義 3개 면에서 모두 고대한어를 지키며 조심스럽게 변화, 발전시켜왔지 현대한어는 받아들이지 않았다.현대한어의 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주지하는 바이다. 례: 國국/궈 合합/허 多다/둬 등. 고대 한어의 음도 우리민족의 어음 체계와 발음 습관에 편리하도록 개조하였다. 례: 達닫/달 勃받/발 溪켸/계 哭콕/곡 등.현대한어에 새로 생긴 글(形, 音, 義 포함)은 기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례: 吗 妈 嘛 骂 奶 哪 氖 钠 呐 啦 垃 旯 噶 嘎 尬 旮 这 你 呢 那 등. 고대한어에 있던 글에 부여한 현대한어의 새로운 음과 뜻도 기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례: 的de 地de 得de 着zhe 了le 등.고대한어에 없는 단어도 우리절로 창조하여 써왔다. ‘却說’의 고대한어 원 뜻은 ‘말을 이미 언급했던 화제로 돌려’이다. 우리말에 ‘각설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장타령군’의 뜻을 부여하였다(‘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 않고 또 왔네’ 참조). ‘看過(보다가 소홀히 빠뜨리다)’는 고대한어에 없는 단어를 우리가 만들어 쓰는 것이다. 현대한어에 ‘看過(본 적이 있다)’라는 단어결합이 있지만 의미가 우리말과 완전히 다르다. 그 외에도 우리절로 만든, 한어에 없는 한자어들이 아주 많다. 례: 우왕좌와(右往左往) 비일비재(非一非再) 오리무중(五里霧中) 흐지부지(諱之秘之) 등.이 외에 우리절로 만든 한자도 있지만 성공적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언급하지 않겠다.한어와 한자어간의 이런 차이점이 얼마나 되는가? 필자가 통계한 바로는 현대한어 문장에 나타난 단어와 그에 대응되는 한자어간의 차이점은 어음은 100% 다르고 어휘(단어의 품사 포함)는 서로 완전히 같은 것이 약 55%밖에 안 된다. 즉 한자어는 어음, 어휘상 한어와 크게 다른 별개의 언어체계이다.한자를 중국에서 입수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미 2천년 정도 써왔고 훗 단계의 1천여년간은 우리 독자적으로 변화, 발전시켜 별개의 언어체계화 했다고 할 때 한자는 우리의 글, 한자어는 우리의 언어로 보아야 한다.이상은 중국인이 창제한 한자를 우리가 배우고 입수하였다고 가정해 놓고 한 말이다. 그러나 한자를 중국인이 창제했다고 하는데는 무리가 있다.夏나라 때까지 중국에는 문자가 없었다. 한자는 商나라 때 창제한 것이다. 商나라는 東夷족이 中原으로 쳐들어가 세운 나라이므로 우리민족의 조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중국 력대 문헌에 중원지역을 華夏라 불렀고, 그 동쪽의 사람을 東夷로 불렀다. 지금의 황하 하류로부터 시작하여 그 동쪽을 일컫는다. 그러나 이 지역의 여러가지 민족, 부족을 東夷라 총칭한 것이 아니라 우리조상의 나라와 민족만을 동이라 불렀다. 우리 조상의 나라를 , 에는 ‘朝鮮’이라 했고 이후는 동이라 칭하며 그 안에 부여, 예맥, 숙신, 삼한,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을 넣었다. 이로 보아 동이는 우리민족의 조상이며 적어도 우리민족이 동이의 주체 성원이였다. 商이 망하자 箕子가 조선으로 갔다고 하는에 이를 信史로 보기에는 근거가 미비하다. 그러나 상나라 많은 遺民이 자기 민족의 발원지인 동쪽--조선반도로 피난 갔다고 보기에는 충분하다. 마치 원나라가 망하자 대부분의 몽고족이 자기의 발원지 북으로 피난 간 것처럼 말이다. 이 역시 상나라는 우리민족의 조상이 세운 나라라는 증거의 하나로 될 수 있다.상나라 문화 중 특출한 것이 거북이 뼈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 쑥을 넣어 태워 점을 치는 것이다. 뼈에 쓴 점괘 甲骨文이 바로 한자의 최초 문헌이다. 그런데 우리말의 ‘거북’이란 단어는 이 동물의 이름 ‘거←구(龜)’에 점을 치다의 ‘북←복(卜)’을 합쳐 부르니 이는 기적적인 현상이다. 같은 시기의 다른 민족에는 이런 문화가 없었다고 할 때 같은 동이민족인 우리민족의 조상과 商나라 민족은 같은 민족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만약 같은 민족이면 언어도 같아야 한다. 한어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우리말과 근사함을 발견할 수 있다. 아래에 그 례를 들어보자.짐승/衆生: 2,000여년전 한어에서 ‘衆生’을 ‘짐승’처럼 읽었다.설, 살, 섣/歲: 2,000여년전 한어에서 ‘歲’자를 ‘섣’처럼 읽었다. 한어의 ‘ㄷ’ 받침이 후세에 우리말의 ‘ㄹ’받침으로 변했다. 그러면 ‘섣달’, ‘설쇠다’ ‘나이 다섯 살’의 섣, 설, 살은 다 ‘歲’자와 관계된다.때/時: 2,000여년전 한어에서 ‘時’자를 ‘때’처럼 읽었다.좀/蟲: 2,000여년전 한어에서 ‘蟲’자를 ‘좀’처럼 읽었다(‘좀벌레’ 참조)되놈/夷戎: 2,000여년전 한어에서 ‘夷戎’을 ‘되놈’처럼 읽었다.금/躬: 2,000여년전 한어에서 ‘躬’자를 ‘금’처럼 읽었다(몸을 의미하는 ‘오금’ 참조)이상은 체언의 례이고 용언의 례를 살펴보면 고대한어에 교착어의 흔적이 보이며 특히 우리말의 종결토 비슷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말의 종결토와 그 발음이 거의 대응된다. ‘也’자를 2,000여년전에는 ‘댜’처럼 발음했다. ‘댜’가 ‘다’로 변하는 것은 당연한 언어현상이겠다. ‘是’자를 [zi]처럼 발음했으며 탁음 [z]는 우리말에서 잘 탈락되므로(마슬/마을, 가슬/가을, 구시/구이 등 참조) ‘이’처럼 읽기 일쑤다. ‘矣’는 2,000여년전 ‘디’처럼 읽었다. 우리말의 종결토 ‘지’는 그 원형이 ‘디’다(평안도 방언에 종결토 ‘지’를 ‘디’로 발음). 이런 인식으로 아래의 문장들을 읽어보자. 王道之始也(왕도지시다/야)天時不如地利也(천시 불여 지리다/야)小人之德草也(소인지덕 초다/야)天下之通義也(천하지 통의다/야)男女授受不親禮也(남녀 수수 불친 례다/야)武王是也(무왕이다/이야)文王是也(문왕이다/이야)仁是也(인이다/이야)得其民斯得天下矣(득기민사득천하지)可謂孝矣(가위효지)必有得天时者矣(필유득천시자지)为仁不富矣(위인불부지)无責耳矣(무책이지) 상기의 례문은 몽땅 에서 뽑은 것이다. 결속어가 우리말의 종결토와 그 음이 얼마나 흡사한가! 우리민족이 한자를 입수한 력사를 1,500-2,000년으로 보는데 이 정도의 력사로는 상기의 언어현상을 해석하기 어렵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상나라는 우리말과 비슷한 동이말을 썼고 동이족은 한자 창제의 주역이였다. 周가 商을 대체하며 중국은 기초방언 지역을 서쪽(鎬京-長安)으로 1,000킬로 정도 옮겨갔고, 상의 유민은 동쪽(조선반도)으로 2,000킬로 정도 옮겨갔으며 2,000여년간의 ‘平和演變’을 거쳐 두 언어의 간격이 점점 멀어진 것이겠다. 후세에 변화된 중국어를 다시 입수하며 상나라때 쓰던 말은 혹은 소실되였고 혹은 우리말의 고유어에 스며들었다. 위에 필자가 든 예(체언, 용언 포함)들이 바로 고유어에 스며든 것들이며 잘 찾으면 아주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중국은 夏商周工程이라는 프로젝트를 설정하고 200여명의 학자를 동원하여 5년간 연구한 끝에 하, 상, 주 3개 조대의 건립 년대를 ‘결정’지었다. 그러나 정확한 確定이라고 보기에는 아직 거리가 멀다. 一介 草民인 필자의 한어발달사 지식으로 내 놓은 상기 정도의 론거도 하상주공정이 내놓은 론거 못지 않다. ‘상을 세운 동이민족은 우리민족의 조상일 것이다’, ‘상나라 때 생긴 한자의 창제에 우리민족의 조상이 주역을 했다’.이 두 명제에 대해 그래 ‘절대 허황한 말이 아니다’, ‘일리가 있다’라는 평가마저 내릴 수 없단 말인가!우리는 종종 ‘廣州起義에 우리민족이 참여했다’, ‘天津 해방에 우리민족의 공로도 있다’라는 말을 하며 민족 자부심을 느끼곤 한다. 광주기의나 천진 해방에 참여한 우리민족이 100분의 1도 될까 말까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민족이 한자를 창제한 주역이라고 하는데 ‘No!’ 하는 것이 된 말인가!우리민족의 적지 않은 사람이 출판물에 한자를 쓰기 싫어하며 심지어 한자어 자체도 배격하려 하는데는 다른 민족의 글과 말을 쓰면 민족 자존심이 꺾인다는 저의가 깔려 있는 원인도 있다. 필자의 이 글은 이런 견해를 부정하고자 하며 소기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었으면 한다.
22    우리민족의 개고기 음식문화 댓글:  조회:7056  추천:66  2005-09-07
1986년 필자는 雲南성에 출장갔다가 昆明시 광장 야시장에서 개고기를 맛보는 幸運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먹는 방법이 작은 공기에 湯을 물 한컵 정도 되나마나 하게 담고, 개고기 몇 점과 薄荷 잎 몇개 띄웠는데 둬모금에 다 마셔버리는 것으로 끝났다. 고기는 질기고 탕도 맛이 없어 입에 넘어가지 않았다. “개고기를 이 꼬라지로 해 놓고 먹으라니 말이 되느냐?”하며 한참 훈계를 했더니 “이 고장에서는 개고기를 이렇게 밖에 해 먹을 줄 모른다…알기로는 조선 사람이 개고기를 가장 선호한다는데 그들은 어떻게 해 먹는지 궁금하다”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바로 조선족이라고 하니 그는 필자를 신비스럽게 쳐다보며 개고기 먹는 방법을 제발 좀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 필자는 좀 흐뭇한 심정이였다. 하여 개고기를 만들줄 모르는 처지에 아는체 하며 한참 질벌거려 보았다. 그후 한국을 몇 번 다녀왔지만 개고기 요리는 한번도 먹어보지 못하였다. 한번은 필자의 內外가 중문학 교수 셋의 식사 대접을 받았는데 먹은 음식이 개고기였다. 그런데 식사후 세 교수가 각각 밥값의 1/3씩 내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밥값이 너무 비싸 AA制로 밥값을 물었다는 것이 아닌가! 사실 그번 식사 때 필자 내외는 개고기를 별로 먹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그러나 리해가 가긴 가였다. 1975년 필자가 금방 연길시에 정착했을 때 개 한마리에 10원 정도 하였다. 필자의 고향 무순에서는 개 껍질만 돌려주면 쌀 4근(80전)으로 개 한마리를 바꾸어 먹을 수 있었는데 말이다. 개고기를 좋아하는 조선족이 좀 많이 모여사는 연길도 그런데 한국은 오죽하랴! 그때 우리 민족이 개고기를 선호한다는 것이 한국에서는 이미 빈말이 되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서울올림픽 때 개고기 집이 없어졌거나 서울 外廓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월드컵 기간에 한국의 개고기 집은 한번 더 된 서리를 맞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필자는 지금까지 한국을 수십 번이나 다녀왔지만 개고기를 먹어본 예는 앞에서 말한 그 한번 뿐이다. 우리민족의 개고기 음식 문화는 한국에서는 이미 끝장 나는가보다고 필자는 생각하여 왔다. 그러던차 며칠 전 본 연우포럼에 실린 金范松君의 글 ‘補身湯과 愛玩犬’(포럼글마당 NO.351 참조)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해마다 伏날이 되면 서울의 補身湯 집에는 保養食을 먹고 무더위를 이기려는 손님들이 몰려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룬다’’1998년 자료에 따르면 현재 韓國에서 보신탕을 취급하는 業所는 6,484곳에 달하며, 年間 개고기 소비량은 10만 2,000여 톤, 일당 개고 기 소비량은 280톤, 개소주(燒酒) 釀造에 드는 개고기가 年間 9만 3,600여 톤이다.’ 개고기는 우리민족의 음식문화에서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한국은 개고기 음식문화의 宗主國에 손색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 필자의 머리에 떠오르게 되였다. 필자의 이 말에 “무엇이 어째? 우리민족의 개고기 음식문화? 한국이 개고기 음식문화의 종주국 이라고? 개고기를 먹는 것만도 창피한데 거기다 문화요, 종주국이요 라는 말까지 봍여?”라며 왈칵 성을 내며 대드는 사람이 있을 듯 하다. 필자가 본문을 쓰며 노린 것이 바로 이 문제이다. 우리는 반드시 개고기에 대한 시비에 결론을 내려야 한다. 개고기에 대해 正名을 해야 한다. 이 문제는 무엇을 먹고 안 먹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개 민족과 나라의 자존심, 나아가서는 주체성에 관계된다. 우선 개고기 자체에는 추호의 是와 非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민족이나 자체의 역사와 전통에 따라 어떤 음식은 선호하고, 어떤 음식은 嫌惡할 수 있기 마련인데 여기에 대고 가타부타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만약 강대민족이 약소민족의 음식 문화를 비방하거나 간섭하면 이는 문화 제국주의요, 약소민족이 강대민족의 눈치를 살피며 자기가 선호하던 음식을 무작정 포기하는 것은 문화 事大主義이다. 필자는 한국의 에서 이런 내용의 글을 본 적이 있다. 중국인이 한국인 한개 팀을 북경 인민대회당 식당에서 식사대접을 하면서 요리 하나를 가리키며 무슨 요리인지 알아맞혀 보라고 했다. 누구도 알아맞히지 못하자 개고기라고 알려주었다. 이에 한국 손님들은 입을 짝 벌리며 말문이 막혔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가장 선호하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모른 것은 설마 개고기일 수가 있으랴 했기 때문이었다. 片見이 無知보다 더 무섭다는 말을 이런 때에 쓰는가보다. '서양사람들이 욕하겠으면 욕해라, 나는 내 나름대로 산다' 라는 중국인의 자존심과 주체의식에 감탄하며 쓴 글이었다. 뉴질랜드가 시드니 올림픽 유치를 위한 마지막 투표를 앞두고 중국인이 개고기를 먹는 장면을 담은 비디오를 보여주며 '이런 야만적인 나라에서 어떻게 올림픽을 개최하겠는가' 하며 악선전을 한 것이 중국에게 큰 마이너스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인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2008년 올림픽 유치를 위한 투표를 앞두고 베이징시 정부는 서양 기자 5∼6명을 개고기 집으로 안내했다. 그 장면이 텔레비전에 방송됐는데 조선족 개고기집도 이에 포함돼 있었다. 서양 기자들은 입을 딱 벌리며 세상에 이처럼 야만적일 수 있느냐는 표정들이었다. 그들의 질문에 식당 주인의 대답은 아주 태연했다: "모두 개 사육장에서 가져온 개고기다. 당신네가 양을 사육해 먹는 것은 문명적이고, 우리가 개를 사육해 먹는 것은 야만이란 말이냐? 우리도 애완용 개고기는 먹지 않는다." 서양 기자들은 머리를 끄덕이며 '일리가 있다,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으며 식당 문을 나섰다. 중국인은 개고기 문제에서 서양사람들에게 추호의 양보와 타협도 하지 않고도 그들을 끝내 이긴 셈이다. 문화 제국주의 앞에서 벌벌 떠는 학국인들이 한스럽다. 문화 사대주의에 물젖어 남의 눈치만 보며 사는 한국인들이 가련스럽다. 물론 한국인의 전부는 아니다. 한국 월드컵 직전 독일의 알게마이네지도 고유 음식문화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문화 제국주의라고 공박을 하였는데 왜 우리 저절로 벌벌 떨어야 하는가! ‘개는 인정과 통하는 동물이므로 개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편견에 속한다. 인정과 통하는 동물은 개 외에도 많다. 돌고래, 원숭이, 코끼리, 고양이, 말, 양…수없이 많으며 인간의 開發과 訓練만 거치면 인정과 통하지 않는 척주동물은 거의 없다. 정이 어느 정도 이상 통하면 먹을 수 없고, 어느정도 이하 통하면 먹을 수 있는가? 일정한 조건만 구비되면 개보다 더 인정이 통하는 동물이 있거나 많을지 누가 알랴. 그가 인류이냐, 동물이냐의 표준밖의 표준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동물학대 때문에 개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더 어처구니 없다. 양이나 소를 먹으면 동물학대가 아니고, 개를 먹으면 동물학대란 말인가! 필자는 개고기를 먹는 문제로 종래로 창피스럽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으며 또한 우리민족이 개고기를 선호한다고 하여 허물로 여긴 적이 없다. 필자는 5년 반동안 의무병역에 종사한 적이 있다. 길림성 伊通縣, 雙陽縣 일대에서 군사훈련을 하였는데, 조선족이 없는 그 일대 개값이 어찌나 싼지, 개고기를 꽤나 많이 먹었다.같은 連隊의 한족들이 처음에는 “개고기를 어떻게 먹느냐?” 하다가 “그럼 나도 한 점 맛 보자”, “먹을만 하다”, “참 맛있다”로 이어지다가 나중에는 조선족보다 더 잘 먹으며 탕도 몇 사발씩 마신다. 除隊해 고향으로 돌아간 그들은 아마 지금은 필자와 같이 개고기를 먹던 일을 옛말처럼 외우며 ‘狗肉好吃論’'狗肉補身論' '朝鮮族作狗肉眞棒論'을 鼓吹하고 있음 즉 하다. 2002 한일 월드컵 때 한국팀이 승승장구로 이길 때 필자 주위의 한족들이 “한국 선수들 개고기 덕택에 이긴 것이 아니냐?”, “高麗蔘 때문에 이긴 것 아니냐?”라는 말을 던지면 필자는 머리를 끄덕이며 “물론, 당신네도 앞으로 개고기를 많이 먹어봐라, 힘이 저절로 난다”라도 대꾸하곤 하였다. 농담이 좀 섞인 대화이기는 하지만 그때 필자는 신바람이 나서 말을 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 ‘우리는 개고기로 몸보신을 잘한다”며 자오감을 느끼며 살 수도 있는데 하필 저절로 자기의 전통을 못마땅하게, 천스럽게 생각할 건 뭔가! 갑골문에 개고기로 제사 지내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자기의 조상이나 하늘에 제사지내지는 음식에 천한 고기를 사용하긴 만무하다. 상나라를 세운 東夷민족, 바로 우리의 조상이 개고기를 선호한 역사는 3,500여년이나 된다. 상나라가 주나라로 교체되며 주체민족이 동이민족으로부터 西狄민족으로 바뀌며 개고기는 중국대륙에서 점점 빛을 잃었다. 제사에 소고기, 양고기, 돼지고기를 쓰는 것(이 3가지 고기를 모두 쓰면 '太牢'이다)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우리민족은 그 전통을 지금까지 이어왔다. 한개 민족이 자기의 전통을 3,500여년이나 지키며 문화적 斷層을 모면하며 이어왔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이런 전통을 21세기에 와서 우리의 손에서 아무런 리유없이, 아무런 도리도 없는 남의 숭에 버릴 수 있을 소냐!
21    북경진출 조선족 학부모에게 충고한다 댓글:  조회:6543  추천:74  2005-09-07
해마다 이때면 필자는 大入과 관계되는 전화 받기에 겨를이 없다. "나의 자식(또는 조카, 친구의 자식…)이 이번 大入시험에 참가했으며 북경의 某某 대학을 지망했는데 붙게끔 좀 도와 달라, 돈을 쓰는 것은 별문제다", "나의 자식…이 이번 대입에서 미끄러졌는데 어느 학교이든 좀 밀어 넣어 달라, 돈을 쓰는 것은 별문제다"라는 전화이다. 그중 적지 않게는 북경에서 사업하며 자식을 북경에서 공부시키고 호구 소재지 고향에 가서 대입 시험에 참가시킨 필자의 친구들이다. 물론 필자는 그들의 요구에 婉曲한 말로 거절한다. 도와줄 능력도 없거니와 오래 전부터 한 필자의 忠告를 듣지 않는 그들이 아니꼽게 생각돼서이다. "자식을 북경에서 공부시키려면 북경호구를 만들어주고, 그렇지 않으면 고향에서 공부시켜라. 호구는 고향에 두고, 공부는 북경에서 시키고, 나중에 고향에 가서 대입시험에 참가하고, 이 길은 절대 걷지 말라."이것이 필자가 북경 진출 조선족들에게 항상 하는 충고이다. 이런 충고를 20년간 하였지만 여태껏 필자의 말을 들은 사람이 별로 없는 듯 하다. 중국의 대학생 招生은 省別로 名額을 주는 제도를 실행하고 있다. 이를테면 몇 년 전까지만 하여도 1천만 인구의 북경시에서 대학생 2.8만 명 정도 모집하고 4천만 인구의 遼寧省에서 대학생 16,000명 정도 모집, 즉 1천만명당 4천명을 모집하는 셈이다. 료녕에서 大專에도 붙지 못하는 학생이 북경호구라면 명문대학 北京航空大學이나 北京理工大學에 쉽사리 붙을 수 있다. 이렇기 때문에 필자는 중국에서 가장 깨끗한 것도 교육계요, 가장 썩은 것도 교육계라고 한다. 에누리없이 입시 성적에 의해 招生하므로 한국과 같은 金一封 따위의 작용은 거의 불가능하다. 옛날 북경대학 교장 陸平의 아들은 입시시험에 10년 참가하여 겨우 북경대학에 붙었으며 어느 해는 단 3점이 모자라 못 붙은 예도 있다. 그러나 省別로 名額을 떨구므로 북경시 對 지방 各 省이면 엄청난 불평등이 존재하며 그 이상 썩은 것 또한 없다. 이런 부정을 20여년간 叱咤해 왔으나 별로 是正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북경은 해마다 大卒生이 엄청나게 수요되는데 지방의 학생을 끌어들이면 북경시의 人口膨脹이 초래되므로…'라는 계획경제 시대의 '遺産'을 고집하는 얼토당토 않는 원인을 내건다. 또 다른 원인은 전국 32개 직할시, 성, 자치구 주요 령도간부의 처자식들이 적지 않게 호구를 북경에 두고 있다. 즉 이런 불평등에 의해 생기는 特權은 북경시 사람만 享受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 각성의 많은 주요 간부들도 같이 향수하고 있으므로 그들은 反旗를 들지 않는다. 이렇듯 방대한 阻力을 밀어버리기는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최근 몇 년간에 이런 불평등이 다소 解消된 것 같지만 이는 是正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대학생 招生 숫자를 많이 확대하였으나 북경은 더 확대시킬 학생이 없기 때문에 생긴 假像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북경시 중소학교 교사들의 質이 형편없이 낮다는 점이다. 인재의 水準을 1∼10段으로 나누면 북경은 1.5∼10段이 대학에 붙으며 그중 1段이 소학교 교원을 하고 1.5∼2段이 중학교 교원을 한다. 지방은 7∼10段만 대학에 붙을 수 있으므로 그중 5∼6段 정도가 소학 교원을 하고 7∼8段 정도가 중학 교원을 한다. 그러므로 북경 중소학교 교원의 수준은 전국에서 가장 낮다. 자식을 북경에서 공부시키고 고향에 가서 대입시험에 참사하는 것은 2段 水準의 교사에게 배우고, 3段 정도 경쟁심의 학생과 경쟁하고(북경은 해마다 高卒生의 거의 100%가 대학에 붙기 때문에 학생들의 경쟁 열기가 동북 3성처럼 熾熱하지 않다) 고향에 돌아가 7∼8段 수준의 교사에게서 배운, 8∼9段 정도 경쟁심의 학생과 경쟁하는 격이 된다. 물론 게임이 안 된다. 북경에서 공부시키고 고향에 돌아가 대입시험에 참가한 조선족 학생으로서 대학에 붙은 자는 아주 적다. 간혹 붙었다고 해도 고향에서 공부했으면 북경대학에 붙을 것이 북경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료녕대학밖에 붙지 못하는 꼴이 된다. 高卒生 자식을 放任해버리기는 아깝고, 또한 돈 깨나 있으니 각종 엉터리 사립 大專에 보내거나 외국류학을 선택한다. 1980년대부터 세계적으로 공부 못하는 자를 외국류학 보내는 바람이 불었으므로 류학 가도 이미지가 안 좋고, 돌아와도 잘 씌우지 못한다. 앞으로는 점점 더 악순환일 것이다. 私立大專에 보내던 외국 류학을 하던 좋은 인재가 되기는 어렵고 자칫하면 도덕 품행상 인생을 망치기 일쑤며 또한 엄청난 돈을 탕진하게 된다. 만약 자식이 소학, 중학을 다닐 때 그의 호구를 북경 호구로 만들어 주었다면 위와 같은 악과를 초래하지 않을 것이다. 당당한 명문대학의 졸업생으로 되었을 것이다. 자식을 私立大專이나 외국에 보내는 금액의 몇분의 일이면 호구이전이 가능한데 말이다. 그때는 왜 "돈을 쓰는 것은 별문제다"라는 생각을 못하고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가! 사실 부모는 북경에서 사업하며 자식을 고향의 조부, 조모, 외조부, 외조모나 다른 친척집에 맡겨 공부시키는 것도 최상의 방법은 아니다. 자식은 어디까지나 부모 곁에 있어야 바람직하다. 그러면 북경 사업을 걷어치우고 자식을 데리고 고향에 가야 한다는 말인가? 그럴 만도 하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젊었을 때는 자기가 어떻게 잘 돼 보려고 갖은 애를 쓰던 것이 40이 넘으니 '나야 잘 된들 얼마 잘 되랴, 자식을 출세시켜야지'라는 생각밖에 남지 않더라. 100만원을 벌었다 한들 자식의 전도 망친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물며 지금 북경에 진출한 조선족들 100만원 이상 벌어 장진 사람이 몇이 되랴! 필자의 한 친구(한족)는 西安호구에 북경에서 변호사 사업을 하고 있다. 필자의 상기와 같은 권고에 따라 10만원을 새겨 자식의 호구를 북경에 들여왔다. 대입 시험에 490점 맞고 북경 화공대학에 붙었다. 만약 서안 호구였더라면 510점이여도 시시한 大專밖에 못 붙는다. 그러면 몇십만원을 새겨가며 이름도 없는 大專에 보내거나 더 많은 돈을 새겨 외국류학을 선택했을 것이 뻔하다. 20여년간 입술이 닳도록 말로 하던 충고를 오늘 글로 써보는 바이다.
20    조선어출판물에 한자를 섞어 써야 하는 리유 댓글:  조회:6475  추천:74  2005-07-07
조선어출판물에 한자를 섞어 써야 하는 리유정인갑 금년 2월 중순 한국 국어연구분야에서 활약하는 모 학자가 필자를 찾아와 한국에서는 출판물에 한자를 섞어 쓰자는 견해와 섞어쓰지 말자는 견해의 대립이 팽팽한데 정교수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는 주제로 인터뷰를 하였다. 인터뷰가 끝난 후 그 학자는 인터뷰의 내용을 조선족 신문에 꼭 실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한국 두 파벌 외의 제3자의 견해라는 의미에서 아주 필요하다며 말이다. 하여 일요특간 2월 20-26일 22면에 인터뷰의 全文이 실렸으며 그것을 다시 연우포럼에 퍼옮겼다. 그런데 최균선 선생님께서 필자의 행위를 “남의 제상에 감놔라, 배놔라”하며 “강건너 꾸짖기로 손짓발짓”한다고 하였다(본 사이트 포럼마당글 NO309 참조). 너무나 얼토당토 않는 말이다. 학술문제에 ‘남의 제상’이 있는가! 그것도 지구촌 시대에 쫍은 바다 하나 사이둔, 비행기로 한시간 미만의 거리인, 같은 민족, 같은 문화, 같은 언어, 같은 문자의 한국인데 말이다. 학술문제의 서로 다른 견해의 토론을 ‘손짓발짓’ 한다고 풍자하면 有傷斯文也!. 최균선 선생님의 관점상, 논술상, 방법상, 풍격상의 많은 문제들을 하나하나 거론하면 토론의 大道로부터 빗나갈 위험이 있으므로 차후에 천천히 취급하기로 한다. 필자의 문장은 한국을 상대로 쓴 글이였으므로 중국 조선족의 출판물에도 한자를 섞어 써야 한다는 리유를 밝히지 못하였다. 본문에서는 이 문제를 이야기해 보련다.1. 섞어 쓰는 것이 오히려 우리말 지키는데 리롭다 어떤 사람은 섞어쓰면 우리 민족 언어의 순수성을 파괴하고 나아가서 민족언어를 상실케 하는 비행을 자초한다는 우려를 표시하였다. 사실은 섞어 쓰는 것이 오히려 우리말을 지키는데 리롭다. 지금 우리민족은 언어동화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언어동화의 표현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그 중의 한 가지가 한자를 우리말로 읽지 못하는 것이다. 필자는 ‘金鑫’, ‘盧春艶’이라는 이름을 ‘김신’, ‘로춘연’이라 부르는 것을 보고 ‘김흠’, ‘로춘염’이라 시정해준 적이 있다. 그러니 상대편이 오히려 "웃기지 말아, 우리학교 선생, 조선어, 한어 선생들도 다 이렇게 부르며 이미 20여년 불러왔는데 틀릴소냐"며 대드는 것이였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그들 앞에서 필자는 아연실색할 뿐 할 말이 없었다. 선생들도 이렇다니 학생을 원망할 수 있으랴! 고유명사를 이렇듯 틀리게 부르는 것은 이해한다 치고 일반 언어의 표현도 엉망이다. 아래의 례문을 보자. 징차가 따이부해갔어. 스녠 판했대(경찰이 체포해 갔어. 십년 실형이대). 선양에 쌍발해. 한국 허즈치예서 미수한대. 궁즈 꽤나 높다더라(심양에 출근해. 한국 합자기업에서 비서한대. 공자 꽤나 높다더라). 링다우구 나발이구 터수화할줄만 알았지 췬쭝 쿤난 알기나 알아?(령도구 나발이구 특수화할 줄만 알았지 군중 곤난 알기나 알아?) 우리민족들 사이에서 상기와 같이 말하는 것을 너무나 흔히 목격하게 된다. 만약 출판물에 한자를 섞어 쓰고, 소학 때부터 이런 훈련을 받아 왔으면 한자어에 부딪칠 때마다 그 한자의 한어발음과 조선어 발음이 동시에 머리에 떠오를 수 있다. 그러면 상기 ‘警察, 逮捕, 十年, 合資企業, 秘書, 工資, 領導, 特殊化, 群衆, 困難’등을 자연스럽게 ‘경찰, 체포, 십년, 합자기업, 비서, 공자, 령도, 특수화, 군중, 곤난’으로 말할 수 있으며 ‘징차…쿤난’ 등으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한자를 섞어쓰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 민족 언어의 순수성이 파괴되고 나아가서 민족어를 상실케 하는 비행을 자초하는 화근이 생기게 된다. ①단우이(單位)에 반처(班車)가 있어 쌍발(上班), 쌰발(下班) 다 뻰리(便利)해. (②직장에 출퇴근 차가 있어 출근, 퇴근 다 편리해 / ③ 단위에 반차가 있어 상반, 하반 다 편리해.) ①즈예(職業) 주츌(足球) 찡싸이(競賽) 볼만해. 그런데 찡싸이창(競賽場)의 츄미(球迷) 쯔쉬(秩序) 란타우(亂套)야(②프로축구 경기 볼만해. 그런데 경기장의 축구 팬들 질서 란잡하더라 / ③ 직업족구 경새 볼만해. 그런데 경새장의 구미들 질서 란투야) 위의 례문 ①은 조선족들의 입에서 자주 흘러나오는 말이다. 문법 외에는 거의 한어에 동화된 말이다. ②처럼 말해야 비교적 표준적인 조선어 표현이다. ③에 사용된 ‘반차, 상반, 하반, 족구, 경새, 경새장, 구미, 란투’ 등은 해당 한자의 조선어 발음으로 표현했을 뿐이므로 엄격히 말하면 조선어가 아니다. 그러나 새로 창조한 한자어라고 하면 조선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한자어란 우리민족이 수천년간 한어로부터 입수한 차용어라고 할 때 지금은 입수할 수 없다는 법은 없을 것이 아닌가! 만약 우리가 출판물에 한자를 섞어 써 매개 한자에 대한 우리말 독법에 익숙하면 적어도 ③처럼 ‘반차…란투’로 발음할 수 있게 된다. 즉 이만하면 우리말이다. ‘반처…란타우’로 발음하는 것에 비해 우리말을 지켰으며 동화되지 않은 셈이다. 출판물에 한자를 섞어 쓰면 적어도 ③정도는 되므로 우리말을 지키는데 이롭다는 결론에 떨어진다.2. 섞어 쓰는 것은 한어를 장악하는데도 리롭다 사실 한자어의 존재는 우리가 한어를 배우는데 큰 도움이 된다. 우리말 에서도 한자와 빈도 높게 접촉하면 한어 문자관을 넘는데 퍽 쉬워질 것이며 한자어를 기초로 하면 한어 단어를 익히는데 크게 편리하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 외에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데 역시 출판물에 한자를 섞어 써야 이런 도움을 충분히 받을 수 있다. 우선 오자(誤字)를 없애는데 리롭다. ‘絶對正確’에 ‘絶’인지 ‘決’인지 아리송할 때가 있다. 우리말로 ‘절대정확’이지 ‘결대정확’이 아니므로 당연 ‘絶’이 맞다. ‘向領導反映問題’에 ‘映’인지 ‘應’인지 아리송할 때가 있다. 우리말로 ‘반영’이지 ‘반응’이 아니므로 ‘映’이 맞다. ‘甚至’인가, ‘甚致’인가? 우리말로 ‘심지어’이지 ‘심치어’가 아니므로 당연 ‘甚至’가 맞다. 이런 글은 한족들도 틀리기 쉬우나 우리민족은 절대 틀리게 쓰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한자들의 조선어 발음을 모르거나 익숙히 장악하지 못하면 이런 득을 볼 수 없다. 다음은 어음을 장악하는데 리롭다. 그중 한 가지 례로 한어에는 권설음(卷舌音)과 평설음(平舌音)의 구분이 있으며 이를 구분하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북경사람 외의 한족들도 골칫거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자어 발음이 있기 때문에 쉽게 장악할 수 있다. ‘즈, 츠, 스’처럼 발음하는 한자(知子, 持此, 詩思 등)를 예로 들어보자. 만약 이런 한자의 조선어 발음이 ‘지치시’면 권설음이고 ‘자차사’면 평설음이다. 예: 지치시:支指止紙知志脂智祉之, 治置値致齒恥稚峙侈緻, 時市施詩始示視試侍尸 ―이상은 권설음 자차사:自子資字咨姿紫, 雌次此慈瓷磁刺, 思四死絲私司辭寺似斯 ―이상은 평설음, 단 ‘社事史使士師’ 6자와 이들을 변으로 하는 글자만은 ‘사’로 발음하지만 례외로 권설음. 북경인이 아닌 한족들도 북경에 반평생 살며 권설음과 평설음을 구분하기 힘들다. 그런데 일부 조선족이나 한국인은 필자에게서 한 시간 정도의 보도와 훈련을 받고 적지 않은 글자들의 권설음과 평설음을 구분할 줄 알게 되었다. 한자어음에 익숙하지 않은 자에게는 도저히 이런 보도와 훈련을 시킬 가능성이 없다.3. ‘도우미’ 좋은 방법 아니다 한글 전용이면 아무래도 쉬운 말을 골라 쓰게 되고 풀어쓰게 되며 문장이 길어지고 지저분해진다. ‘백문불여일견’을 풀어쓰면 ‘백 번 들은 것이 한 번 본 것보다 못하다’로 되어 6자가 15자로 되며 띄어쓰기까지 합치면 23자가 된다. 문장의 품위가 떨어질 뿐만 아니라 시각 청각에 주는 감도 달라진다. 어떤 사물이나 특정된 시공(時空)하에 존재한다. 경극 무생(武生) 연예인이 1미터 거리 안에서 열 번 공중전을 하는 것과 2미터 거리 안에서 열번 공중전을 하는 것은 관중에게 주는 예술적 감이 다르다. 수박씨에 새긴 룡을 수박 껍질에 옮겨놓으면 역시 그 감이 달라진다. 다른 문체에도 이런 구별이 있겠지만 문예 작품, 특히 문학 작품은 언어 예술인바 예술 형상을 부각하는데 어떤 말을 썼나, 그 말을 몇 개 음절로 표현했나에 따라 독자에게 주는 예술적 형상이 달라진다. 적지 않은 작품이나 특정적인 표현 단락에 한자어를 쓰는 것이 예술 형상 창조에 퍽 이로울 때가 많다. 어떤 사람의 말처럼 한글로 쓰고 괄호안에 한자를 ‘도우미’로 써넣어도 무방한가? 이를테면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다. 마치 먼저 들러리를 써놓고 다음 주요인물이 나타난 듯 하다. 마치 가수가 마이크에 대고 입만 벌리고 사전에 잡아놓은 록음을 스피커로 내보내는 듯 하다. 6자가 12자로 되었고 괄호까지 합치면 편폭이 배 이상으로 불었으므로 템포도 느려졌고 보는 사람의 시각, 듣는 사람의 청각에 주는 감도 6자만 못하다. 만약 이것이 시(詩)나 연속 겹친 음절수가 같은 배비문(排比文)이면 예술적 형상이 더 엄청나게 떨어진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인류의 언어사나 문자사를 보면 절약, 간소화가 철의 법칙으로 관철되여 왔다. 개념 표달에 문제가 되지 않는 전제하에 되도록 말마디 수를 줄이고 문자의 획을 줄인다. 우리말의 배아미→배미→뱀, 가히→가이→개는 말마디를 간소화한 전형적인 례이다. 뎡(鄭)→졍→정, 쟝(章)→장은 어음수 및 글자의 획수를 간소화한 례이다. 한자의 수천년에 거친 간체화는 문자 간소화의 례이다. 한자의 經→经, 東→东 등 많은 간체자는 글씨를 빨리, 헐하게 쓰기 위하여 간소화한 초서에서 따온 것이다. 전 인류의 언어와 문자가 간소화하는 방향의 규률에 따라 변화하고, 담은 한 음절, 한 획을 아끼느라 고심하고 있는데 우리가 6자를 12자로 펑펑 늘여쓰는 것이 된 말이냐! 인류의 언어, 문자의 발전 규률에 역행하며 우리 조상에게도 미안하다. 만약 부득이한 경우라면 몰라도 완전히 피면할 수 있는데 말이다. 소학교부터 한자를 섞어 쓰면 괄호안의 ‘도우미’는 완전히 필요 없는 군 살이다. 필자는 신문 에 칼럼 문장 305편을 쓴 경력이 있다. 판면 제한 때문에 1,200자로 국한된 칼럼이였다. 제한된 편폭안에 심도 깊은 내용을 싣기 위해 매 한자 한자를 다듬어 써야 했으며 금싸라기처럼 아껴 써야 했다. 그러나 한자어 뒤에 괄호를 치고 ‘도우미’를 적어야 하므로 한글, 한자 혼용의 80% 내용밖에 표달하지 못하는 고민을 하여야 했다. 중국 조선족 출판물은 한국이나 조선의 출판물에 비하여 한자를 섞어 써야 할 리유가 더 충분하다. 한국도 출판물에 한자를 섞어 써야 한다는 견해와 섞어 쓰지 말자는 견해의 사람이 거의 반반이며 그 대립이 팽팽한데 중국 조선족이 출판물에 한자를 섞어 쓰자는 견해를 완전히 외면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물론 우리는 간체자를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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