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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월: 치밀한 위로의 점과 쉼표(소설평)
2019년 07월 11일 14시 11분  조회:321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치밀한 위로의 점과 쉼표

김홍월

 

고통의 시간은 길고 깊었다. 길고 깊은 그 길을 걷는 동안 우리에겐 숨겨진 것들을 발견할 겨를이 없었다. 마지막 장면을 통해서야 우리는 비로소 고통의 길 속에 숨어있던 희망의 조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서로 멀어져만 가고 어찌할 도리 없이 파멸로만 치닫던 녀자와 남자는 사실 반쪽이 아닌 하나가 될 수 있는 희망과 결정된 운명이 아닌 비결정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다. 마치 반점에서 점이 되듯, 마침표에서 쉼표가 되듯 이들은 반쪽에서 하나로, 결정된 상태에서 비결정의 상태로 나아간다.

 

‘반점’에서 ‘점’으로 

- 반쪽·분렬에서 하나·통일로

 빛은 명도와 채도를 만들어내고 우리는 명도와 채도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녀자는 채도를 잃었다. 녀자는 무채색의 반쪽짜리 삶을 자살로 마감하려 한다. 

 

눈이 흐려있다. 그녀는 안개가 낀 것처럼 부옇게 보이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눈물이 앞을 가리고 있는 것도 아니다. 흙탕물에서 금방 건져올린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무 것도 비끼지 않고 있을 뿐이다. 

(…중략…)

색상도 보이지 않는 강물에 오물이라도 쏟아붓고 싶지만 그녀는 오물도 갖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가?

 

색을 볼 수 없을 만큼 녀자는 삶에 의미를 잃었다. 녀자의 삶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겉으로 예쁜 아이의 엄마이고 사회적으로 믿음직한 남편의 안해였지만 녀자는 아이와 남편을 사랑할 수 없었다. 남편의 사정도 마찬가지이다. 남자는 녀자를 경멸하고 아이를 경멸한다. 애초에 이들은 뚜렷한 의미도 없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결혼했다. 이들의 더 큰 문제는 서로가 화합하고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보다 스스로가 스스로 선택한 삶을 긍정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 이들은 부부로서도 분렬됐지만 스스로도 겉과 속이 일치하지 못하는 분렬에 시달린다. 

녀자는 아이를 완전히 잊은 채 강물에 뛰여들려 했으면서도 아이 울음소리에 아이를 챙긴다. 남자는 속으로는 온갖 욕을 하면서도 녀자 직원들을 깍듯한 친절로 대한다. 이러한 자아의 분렬로 인해 이들 부부의 분렬은 돌이킬 것조차 없는 파탄의 상태에 놓여있다. 이들 부부의 관계는 애증으로 인한 뜨거운 파탄에 이른 것이 아닌 일말의 애정조차 없는 차거운 파탄이다.

소설은 이들이 파탄에 이르게 된 원인을 차근차근 풀어놓는다. 자살 기도에서부터 사랑 없는 가정생활, 분렬된 자아 그리고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고통과 파탄으로만 고꾸라져가는 이들을 보며 우리에게는 점점 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의 트라우마가 드러날 때에 우리는 일말의 희망도 가질 수 없게 된다.

녀자가 아이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은 아이의 운명과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녀자의 운명이 비참한 리유는 남편의 사랑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남편과의 사랑의 파탄은 녀성으로서의 문제에 해당하고 아이에 대한 파탄은 어머니로서의 문제에 해당한다. 따라서 녀성으로서의 운명이 파탄에 이른다 할지라도 그녀는 아이에 대한 모성을 포기할 필요는 없었다. 결국 녀자가 모성애를 포기한 것은 첩보다도 못한 어머니의 비참한 인생에 대한 어릴 적 트라우마로 인해 어머니의 인생처럼 자신의 인생과 아이의 인생까지 비참해질 것이라는 운명의식 때문이였다.

 

고추를 잃고 태여난 아기다.

모든 것이 반복이다.

젖이 땅에 떨어지는 것도.

아기가 자라는 것도.

엄마처럼 살아야 하는 것도.

그리고?

아기도 계집애다.

아기도 계집애니 아기에게 언젠가 그녀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엄마처럼 살지 말라.”일가?

그녀가 엄마처럼 살지 않는 방법은 무엇이였지?

아기가 그녀처럼 살지 않는 방법은 또 무엇이지?

-너도…

마침내 그녀의 머리가 말을 시작한다.

-너도 크면 나처럼 될 거야.

 

어쩌면 녀자의 주체성 없는 결혼은 적어도 어머니와 같은 결혼이 아니기 때문에 선택한 것일 수 있다. 소설 속에 녀자는 온전한 가정에 대한 열망만을 보여주고 가정을 이루게 하는 원동력인 사랑에 대한 열망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자신처럼 살지 말라고만 당부했지 사랑을 가르치진 않았다. 결국 그녀가 아이와 남편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비참한 어머니의 삶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한 것이다.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어릴 적 새엄마와 이복동생의 등장으로 가정에서 소외된 트라우마로 인해 아이와 녀자를 사랑하지 못한다. 이들의 트라우마는 각각의 사건들로 기적적으로 극복된다. 녀자의 트라우마와 운명의식은 “내가 힘들고 고달프다고 아기의 운명도 그렇게 아픈 것은 아니예요. 세상에 반복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깐요.”라는 정신과 의사의 조언을 통해 깨지게 된다. 이후 그녀는 아이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남자의 트라우마는 술에 취해 우연히 부성애를 발견하면서 깨지게 된다.

 

그녀의 고성과 함께 이미 술을 반은 넘게 깨여버렸던 남자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물체를 향해 몸을 던지면서 남은 술만이 아닌 그간 마셨던 술 모두를 깬다.

-아기.

아기를 싫어하고 좋아하고 두려워하고 사랑하고를 판단하고 계산할 여유가 없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아기를 향해서 남자는 본능적으로 몸을 던졌을 뿐이다.

 

그는 그 자신이 아이를 끔찍이도 싫어한다고 믿어왔지만 아이를 구하려 몸을 던진 자신을 발견하고 아홉살에 형성되였던 트라우마와 작별한 것이다. 이렇게 트라우마를 깨뜨림으로써 이들은 어머니, 아버지라는 직책과 모성애, 부성애라는 마음을 일치시킨다. 즉 겉과 속으로 분렬된 자아를 다시 하나로 일치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일치된 자아를 갖게 된 이들에게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들이 앞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예고를 한다.

 

그러는 남자의 앞에서 그녀는 녀자가 아닌 또 다른 녀자로 태여나고 있다.

 

그녀는 이제 녀자로 다시 태여나고 그에게 그녀는 녀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즉 서로가 서로에게 이성적 대상이 된 것이다. 이렇듯 부성애와 모성애로서 온전한 하나의 자아를 획득한 것을 넘어 서로 사랑하는 남편과 안해로서도 온전한 하나의 자아의 획득을 예고한다. 이러한 분렬된 자아를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은 곧 자기로부터의 일치를 넘어서 서로가 하나가 되는 부부, 가족으로서의 일치를 예고하기도 한다. 결국 이들은 반점에서 하나의 점이 되였다.

지옥 같았던 이들의 상황은 반점을 점으로 고치듯 분렬된 것들이 다시 하나로 고쳐지면서 천국으로 급변한 것이다. 마치 코딩의 세계처럼 아주 작은 차이가 현실을 완전히 뒤바꾼다. 그리고 코딩의 세계처럼 작은 사건 하나로 구호준은 고통의 순간을 환희의 순간으로 뒤바꾸는 급격한 반전을 이루어낸다.

 

  ‘마침표’를 ‘쉼표’로 

- 결정성을 비결정성으로 

반전은 반전으로서의 감동이 있다. 그러나 모든 반전이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다. 개연성이 없는 반전은 작위적인 것에 불과하며 소설의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녀자가 단지 정신과의사의 한마디 조언만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했다는 점과 남자가 단지 아이를 구하려 몸을 던진 것만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했다는 점은 납득하기가 어렵다. 그토록 자살을 시도할 만큼 강렬하게 아이는 잊은 채 운명을 비관하던 녀자가 단 한마디 말로 마음을 바꾸고, 아이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경멸에 가득찼던 남자가 일순간의 반사적 경험만으로 마음을 바꾼다는 것은 개연성이 떨어진다. 또한 이들이 부성애와 모성애를 되찾았다는 리유만으로 리성적 사랑에 관한 트라우마까지 극복되고 서로의 사랑이 다시 싹틀 것이라는 예고도 개연성이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에서 천국으로의 급격한 반전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표면적으로는 개연성이 떨어져보임에도 불구하고 반전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작품 곳곳에 숨어있던 비밀스런 알리바이, 희망의 씨앗들 때문이다. 우선, 녀자가 운명의 반복이라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모성을 되찾은 리유는 단순히 운명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정신과의사의 조언 때문만은 아니다. 그 조언은 이미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모성을 되찾은 상황에 대한 방점에 불과하다.

강물에 뛰여들기 직전 녀자를 구한 것은 아이의 손길이였다. 가장 강력한 비관을 이겨낸 것은 모성애였던 것이다. 또한 녀자는 처음에는 가식으로 치부했지만 아이를 예쁘게 바라보는 주변사람들의 사랑스러운 눈빛을 결국에는 받아들인다. 이 과정 속에서 모성애가 그녀의 마음의 심연에서 본능으로서 여전히 자리잡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남자는 유아 홈페지 디자인을 가장 쉬운 것이라 여길 만큼 아이들을 향한 부모의 욕망과 사랑을 이미 잘 알고 있다. 

 

미스 최가 켠 화면은 남자에게는 일도 아닌 그냥 애들의 장난감 같은 존재다. 

유아상점의 사이트를 개설하는 것이다. 유아상점이라면 팔고 있는 상품만 생생하게 보여주면 되는 것이지 구태여 어떤 기교나 느낌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 

 

그러한 아이에 대한 사랑을 단순한 흉내 내기를 통해 터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부성애가 본능으로 내재되여있던 것이다. 또한 그의 어릴 적 트라우마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이복동생에 대한 증오로써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은 그가 아이에 대한 공포를 느꼈던 것이지 이복동생으로 대표되는 아이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낸다. 

 

아기가 미워서도 아니였다.

아기가 싫어서도 아니였다, 그 순간만은.

아기에게 화가 나서도 아니였다.

학교에 갈 수 없다.

 

남자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겨 트라우마를 얻게 되였지만 정작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이복동생과 이복동생으로 대표되는 아이를 미워하지는 않는다. 성인이 된 그는 아이를 싫어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엄밀히 따지면 그는 아이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통해 트라우마의 공포가 떠오르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즉 그는 아이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통해 공포에 빠지는 것이다.

이렇듯 이들의 부성애와 모성애는 단지 억압된 것에 불과하지 이들의 모성애와 부성애는 본능이라는 이름으로 이들 내면 깊은 곳에 그리고 작품 곳곳에 숨어있었다. 한편, 모성애와 부성애가 이들 내면 깊은 곳에 숨어있듯이 이성에 대한 사랑의 욕망도 이들 내면에 숨어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녀자의 경우, 그녀는 전부터 원래 그러기도 했거니와 이미 결혼했기 때문에 가슴을 가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해서 가슴을 가린다. 

 

그녀는 아기를 받아서 가슴을 풀어헤친다. 

병원이지만 상담실에는 다른 사람들이 없고 같은 존재의 녀인만이 있으니 가슴을 헤치는 것이 어렵지 않다. 

누가 문득 문을 떼고 들어오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녀가 들어설 때 의사가 문에 상담중이란 패말을 붙이는 것을 봤으니깐.

 

심지어 진료실에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가슴을 가렸다. 이는 그녀가 머리로는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으려 하지만 본능적으로는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남자의 경우에도 그의 이성에 대한 본능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그는 실장을 보며 성적 흥분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그는 유독 가슴에 집착한다. 그런데 하필 작품상에서는 그의 안해의 가슴이 예쁜 것으로 설정되여있다. 이는 그에게 이성에 대한 사랑의 본능이 내재되여있고 그 사랑의 본능이 향할 곳이 자신의 안해임을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녀자도 자신의 가슴에 대한 시선에 본능적으로 예민하다. 이는 녀자의 사랑에 대한 본능이 자신이 가슴을 좋아해줄 남편에게 향해있음을 드러낸다.

이렇듯 녀자와 남자에게는 서로를 사랑할 본능이, 그리고 앞서 말한 모성애와 부성애의 본능이 내재되여있었다. 이러한 이들의 본능은 작품 곳곳에 은밀하게 그러나 버젓이 숨어서 소설의 급격한 반전에 대한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고통이 환희로 급격히 뒤바뀌는 반전의 개연성은 곳곳에 숨겨진 녀자와 남자의 본능을 통해 드러난다. 녀자와 남자는 모성과 부성 그리고 사랑의 본능을 억눌러왔고 그러나 자연의 리치를 거스를 수 없듯이 본능을 막을 수 없었으며 그리하여 이들의 욕망은 분출되여 녀자와 남자는 아이와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더 깊이 누른 용수철이 더 높이 튀여오르는 원리의 개연성처럼 억눌린 욕망으로 분렬되여 지옥에서처럼 고통스러웠던 이들의 욕망은 극단적 지점에서 분출되며 이들은 가장 높은 환희를 맞이하는 개연성을 보여준다.

한편, 이들이 자신의 본능을 되찾았다는 점은 이들이 주체성을 획득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들의 삶은 트라우마에 갇혀 본능을 억누르는 비주체적 상태에 있었다. 즉 이들의 현재는 과거에 사로잡혀있었던 것이며 이들의 현재의 운명은 과거에 의해 결정된 상태에 놓여있던 것이다. 이러한 이들이 억눌렸던 본능을 표출시킨다는 것은 트라우마를 넘어서고 과거에 의해 결정된 운명에서 벗어나 비결정된 운명을 개척해나감을 의미한다. 이러한 운명의 개척을 강조하듯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전과는 다른 삶의 형태를 예고의 형식으로 보여준다. 녀자와 남자에게 운명은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운명은 쉼표의 상태로 열려있다.

마침표는 이미 끝나버린 것, 결정된 것에 해당한다. 반면 쉼표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 비결정된 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한편 앞서 확인했듯이 마침표는 점이고 쉼표는 반점에 해당하기도 한다. 구호준은 교묘하게도 ‘.’ / ‘,’을 1차적으로는 점 / 반점, 혹은 하나·통일 / 반쪽·분렬로 해석하도록 설정했고 숨겨진 2차적 의미로는 결정성 / 비결정성으로 해석하도록 설정했다.

 

쓴 커피를 들이켜면서 한참을 화면과 씨름하던 남자는 마침내 문제를 찾았다.

점이 반점으로 되여있었다.

‘점(.)’과 ‘반점(,)’, 크게 눈에 띄지 않고 쉽게 혼돈이 생길 문제다.

부호를 수정하니 화면이 펼쳐지면서 아기용품 상점이 펼쳐진다.

점과 반점의 사이, 그 작은 사이 하나가 전체를 지옥과 천국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남자는 화면에서 움직이는 아기용품 상점의 물건들만 멍하니 쳐다본다.

마음을 빼앗는 뭔가가 보여서가 아니다. 남자는 화면을 보고 있으면서도 점과 반점의 차이를 찾고 있다.

 

얼핏 보기에는 점은 옳은 것이고 반점은 잘못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인용문의 뒤로 갈수록 옳고 그름의 경계가 흐려지고 남자는 점과 반점의 차이를 찾으려 한다. 남자는 이미 점이 맞고 반점을 틀린 것으로 보고 있고 우선적으로 ‘.’과 ‘,’을 점과 반점으로 읽기 때문에 점을 하나·통일로, 반점을 반쪽·분렬로 해석하는 것이 1차적 해석에 위치한다. 그리고 인용문의 후반부에 은밀히 드러나는 ‘.’과 ‘,’의 마침표 / 쉼표, 결정성 / 비결정성의 의미는 2차적 해석에 위치하게 된다.

 

  인물적 수제, 시간적 파불라

<태양의 동쪽>은 두가지 의미의 구성형식을 취하고 있다. 첫번째 의미에서의 형식은 녀자에게 밀착한 서술, 남자에게 밀착한 서술로 분렬된 두개의 서술 그리고 이 둘을 통합시켜 함께 서술하는 3단 구성으로 이뤄진다. 이러한 인물을 기준으로 한 <태양의 동쪽>은 분렬된 것이 다시 온전히 합쳐지는 것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즉 인물에 관한 형식을 기준으로 하면 <태양의 동쪽>은 불완전한 반점이 온전한 점이 되는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러한 의미는 앞서 언급했던 1차적 의미에 해당한다.

두번째 의미에서의 형식은 과거-현재-미래를 서술하는 3단 구성으로 이뤄진다. 이러한 시간, 혹은 시점时点을 기준으로 한 <태양의 동쪽>은 과거에 의해 결정되고 억눌렸던 현재가 본능에 의해 과거의 굴레를 벗고 비결정된 미래로 나아간다는 의미를 지닌다. 즉 시간에 대한 형식을 기준으로 하면 <태양의 동쪽>은 결정성의 마침표가 비결정성의 쉼표가 되는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의미는 앞서 언급했던 2차적 의미에 해당한다.

정리하면 인물에 관한 수제 형식에 립각해 작품을 읽게 되면 분렬된 인물이 통일되는 내용이 도출되고 시간에 관한 파불라 형식에 립각해 작품을 읽게 되면 결정된 운명이 비결정된 운명으로 나아가는 내용이 도출되는 것이다. 이렇듯 <태양의 동쪽>은 1, 2차의 의미에 걸쳐 내용과 형식을 일치시킨다. 

‘점’으로 그리고 ‘쉼표’로 바꾸게 됨으로써 이들 둘은 모두 반쪽·분렬의 삶, 결정된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 ‘태양의 동쪽’인 새로운 생명의 땅을 재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용과 형식의 복잡하고도 치밀한 구성을 통해 <태양의 동쪽>의 극단적 고통이 환희로 뒤바뀌는 급격한 반전은 개연성을 가지며 자연스럽게 우리의 심리로 침투한다. 이것은 고도의 위로이다. 한올의 희망도 기대하지 못하게 독자들을 완전히 무장해제시킨 후에 모든 고통을 다시 환희로 바꾼다. 단순히 사라져버리라는 주문만 외운다고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와 같은 고통을 미리 겪고 고통에서 탈출해본 자의 구체적인 경험을 치밀하게 공유하지 않는 이상 몇마디 주문 같은 말로 고통은 위로받을 수도 없고 희망은 생기지 않는다. 

이제는 구호준이 이처럼 치밀한 구성을 한 리유를 알 수 있다. 극단적 고통을 환희로 위로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값진 일이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출처:<장백산>2018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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