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통(心统)이란 마음의 자리라는 말이지만 흔히 부정적으로 쓰인다. 례하면 “심통이 사납다”. “심통이 놀부같다.”등이다. 사람의 심리를 일컬어 심사, 심정이라 하는데 심통은 온당하지 못하고 고집스러운 마음인 심술과 배짝이 맞는것으로서 거개 남에 대한 긍정, 부정심리에서 금그어지고 또 그렇게 체현된다.
긍정과 부정은 론리학에 속한 개념으로서 사물의 내부에 내재한 두가지 완전히 상반된 규정성일뿐만아니라 대립적이면서도 변증통일관계에 처해있다. 량자는 호상 포함하고 있고 호상 전화되기도 한다. 즉 긍정속에 부정이 포함되여있어 일정한 의의에서 긍정은 곧 부정이 되며 긍정적사물에 자아부정의 인소도 내포하게 되여있다.
반대로 부정속에 긍정도 포함되는바 일정한 의의상에서 부정은 곧 긍정이 되는바 부정은 긍정을 소멸하는 환절이다. 우리가 저것이 무엇인가? 하고 판단할 때 “이것”이라고 긍정하게 되며 동시에 “그것”이 아니라는 부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긍정과 부정은 쌍둥이자매이다.
시비가 분분하고 각자 주장으로 시끌벅적한 시대라해도 긍정, 부정이 없으면 어떠한 력량도 생길수 없는 그만큼 긍정이 전무하면 역시 명백한 부정도 없게 된다. 풀어말한다면 명확한 긍정이 없다면 당연히 유력한 부정도 나올수 없다는 설명이 되겠다. 백사에 긍정도 바람직하지 않으나 만사에 부정도 능사는 아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시시비비에서 긍정과 부정의 기준은 무엇이며 누가 정하는가? 두말할것없이 사심ㅡ자기 리해득실이다. 대부분의 언어상황에서 긍정과 부정의 뜻이 이어지면 부정문이 되고 부정에 부정의 뜻이 이어지면 긍정의 뜻이 된다. 물론 두개의 긍정의 뜻이 합쳐져서 부정의 뜻이 되는 언어는 세계 어느 곳에도 없다
긍정, 부정에는 반긍정, 반부정이란것도 있는데 내키지 않지만 반긍정이라도 하지 않으면 얄팍한 속창이 다뒤집어 보이기에 긍정은 하되 “그런데, 그러하다지만, 한것같기도 한데, 그렇게 보이는듯 하다, 그런것같기도 한데…”라는 식으로 토를 달아야 시름놓는다. 반부정도 “그렇기는 해도, 하지만, 그런데, 그런듯 하지만…”등 군더더기로 내심의 공허를 덮으려 하며 귀신이 씨나락 까먹는소리로 자신의 저의를 얼머부린다. 반긍정이나 반부정은 오십보 백보차이로서 자아인격의 폭로이다.
밉다고, 내편이 아니라고 내비위만 내세우면 눈에 콩깎지가 씌우게 되고 판단의 기준이 사악한 리기에 기울지고만다. 무조건 “너는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싶으면 색안경을 써야 한다. 타방을 긍정할줄도 안다는것은 인간의 덕목의 하나인 겸허성을 겸비했다는것을 의미한다. 부정으로 빚어진 사람은 남보기에 도고한것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그리함으로서 그의 인격에 무슨 도금이 되는것도 아니고 빛이 나는것도 아니다.
“아참, 저렇게 가시가 많은 나무에도 저토록 예쁜 꽃이 피는구나!”하고 감탄하면 긍정의 마음을 가진것이고 반대로 “저리도 예쁜 꽃이 피는 나무에 젠장 무슨 놈의 가시가 저리도 많아?”라고 나무리면 부정적인 심태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부정, 긍정의 사유모식이 있고 그만큼 그의 자유적판단결과이다.
그러나 만약 긍정의 력량을 착오적인 곳에 쓴다면 부정이 된다. 물론 부정의 힘을 쓸수 없고 오직 긍정적력량만 써야 된다는것은 아니다. 한즉 우주만물의 음양의 도리를 잘 알고 긍정, 부정의 력량을 사용해야 한다. 대방이 밉다는 아집으로 남을 부정하려들지 말아야 한다. 부정적인 관념, 시각을 긍적적관념, 시각으로 전환해야 정면적인 인간이 된다. 불원이면 영원히 크지 못하는 미숙아가 될것이다. 부정의 다른 결과는 멸시가 되겠지만 결코 그 존재마저 훼멸되는것은 아니다.
남을 무조건 부정하는것으로 자기를 긍정하며 심리평형을 가지려 하지만 남을 긍정할줄도 앎으로써 역으로 부정의 힘도 유력해진다는 도리도 모르고 또한 알려고도 하지 않는데 특히 나와 사이가 틀어지고 앙숙인 경우에는 지어먹은 마음으로 무작정 부정의 몽둥이부터 휘두르면 얼핏 보아도 내심의 허약성을 드러낸다는것이 뻔해서 민망스럽다. 덮어놓고 상대방을 부정하려드는 사람들은 거개 사촌이 기와집을 지으면 배아파 한다는 속담의 주인공들이다. 말하자면 질투의 화신들이다.
그저 부정하지 않으면 자기 존재감을 상실한듯 여기는 자들은 남을 부정할 건덕지가 정없을 때는 며느리가 미우면 발뒤축이 달걀같다고 나무린다는 속담처럼 이것저것 얼토당토않게 깎아내리고야 심리평형을 찾는다. 이런 심통은 그야말로 얄팍하여 가소로움을 자아낸다. 이런 심리적렬근성은 아마도 세계민족지림에서 우리 민족이 특허권을 따냈다고 해야할것 같다. 그만큼 유일한 비애의 족속으로 남아있고…
례를 든다면 자기가 맹종하는 “권위자”혹은 세인들이 거개 콩이라고 언명하는데도 자기의 리속과 엉큼한 심통으로 하여 한사코 팥이라고 우겨댄다면 이런 언동은 해설이 필요없이 “내심통은 이렇게 얄팍하오”하고 자아를 폭로하는격이 된다. 설사 콩이라 해도 콩으로 메주를 써서도 안된다고 억지를 쓴다. 진짜 콩을 삶아 메주를 쓰면 필경 뜰것이고 메주가 뜨면 메주냄새가 나고 그게 향긋한 냄새라도 내게는 공기오염이라고 억지를 써야 한다. 장은 오래되면 냄새가 난다고 신발견을 한듯이 고아대는 이런 심태에서 “나의 실패는 경험쌓기이고 남의 실패는 잘코사니다”라는 론리가 아닌 궤변이 난당이다. 이런 무조건 부정의 저의는 너무 비릿하다.
친구의 가살스러운 칭찬보다 적의 뼈저린 비평이 더 낫다는 말이 있던지…자신심에 넘친 사람은 결코 불문곡직하고 부정의 방패를 내들려하지 않는다. 그 방패는 나의 시각도 가리울수 있기때문이다. 아량 즉 도량이 전혀없는 사람은 참으로 불쌍한 넋을 가진 허접스러운 존재이다. 적에게서도 따라 배울것은 배우는것이 현대적관념이고 현대인으로서 마땅히 갖추워야 할 심리자세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묵어빠진 격언대로 처사하면 황당무계할뿐만아니라 가증하기까지 하다. 감탄, 탄복에는 필경 사적인 감정인소가 작용하기 마련이지만도 판단의 정당성에는 객관성이 선행해야 한다.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다. 남을 부정하고 또 부정하면 은연중에 긍정이 되고 결과적으로 자기부정이 된다. 이것은 절대진리이다. 따라배울바도 부정적으로만 대한다면 그저 경멸이 따를뿐이다.
아량ㅡ도량이 넓은 사람이 되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작정하고 아량이 좁은 흉금으로 젠체하면 참으로 귀찮은 존재일수밖에 없다. 부정에 찌뜰린 심태가 전민 족적인것, 나아가서 국가적인것이라면 그 민족은 희망이 없는 민족이며 그 나라는 국격이 여실히 들여다보이는 “소인국”으로서 미래가 없다. 과언인가???
내게 넘치는 존재감, 자신감이 없을수록 남을 긍정할줄도 알아야 한다. 세상에 미련보다 더 미련한 일은 없다! 아량을 갖추는 그만큼 세계가 넓어진다. 긍정의 힘은 내삶의 라침반이자 원동력이다! 남을 긍정할줄 알아야 자유경쟁도 정당성을 가지게 된다. 글로벌시대, 실력경쟁은 선택이 아니라 당위성이다. 힘의 론리시대, 대방에 대한 부정적태도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그저 사대주의자들의 곰팡내나는 암투에 그치고말것은 당연하다. 긍정과 부정은 론리학개념이지만 세사의 철칙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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