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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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아버지의 소원
2013년 01월 19일 07시 01분  조회:11170  추천:4  작성자: 최균선
                            아버지의 소원
 
                                   최 균 필
           
                                      1
      
    오늘도 아버지는 간편한 운동복차림에 태양모를 쓰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환갑이 래일모레인 아버지가 열심히 아침달리기를 시작한것은 두달전이였다. 그래서 인지 별스레 저녁마다 기상예보는 빼놓지 않고 꼬박꼬박 보시는것이였다. 아버지는 어떤 날에는 낚시가방에 도시락까지 챙겨가지고 다니셨다. 아버지가 심기 편해서 하고싶은 일을 하시는데는 식구들이 누구 하나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소학교 3학년에 다니는 딸애 해련이가 야외활동에 갔다와서는 늘 재잘거리던 참새입이 한발이나 되여있었다. 애에미가 웬일인가고 물어보아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다가 느닷없이 울음보를 터뜨렸다.
    《엄마, 난 래일부터 다른 학교에 전학할래요 우리반 애들이 나를 마루탠스 (马路天使)손녀라면서 입을 삐죽거리며 놀려대요》
《너 무슨 헛소리를 하는거냐?》
    애어머니는 금시 두눈이 화등잔이 되여서 다급히 물었다.
《정말이예요. 할아버지가 한국에서 돈을 많이 벌어왔다면서 왜 길바닥을 쓰는 일을 하나요? 아직도 돈을 더 모아야 하나요?》
     어린애의 말에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
《엄마, 할아버지가 누런 쪼끼를 입고 공원거리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길을 쓰는 걸 제가 직접 보았단 말이예요, 애들도 알아보고 수군거렸어요. 아이, 창피해!》
    참으로 알고도 모를 일이였다. 늘 종달새처럼 은방울을 굴리더 죄꼬만 입에서 뚱딴지 같은 소리가 흘러나오자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할말을 찾지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지난 두달간 나는 아버지가 아침운동을 하러 다닌다기에 “한 백살 앉 으세요”하고 은근히 축원까지 하였는데 아버지가 길바닥을 쓸다니?세상에 아무리 불효자식이라도 남의 눈이 무서워서라도 늙은 애비를 거리에 내쫓아 길을 쓸게 하지  못할것인데 이게 무슨 괴변인가?
    나는 오리무중에 빠져들면서도 무언가 일이 이상하게 번져간다는 예감이 들면서 가슴이 답답해났다. 이제까지 고생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란 나로서는 고생을 사서 하는 아버지가 전혀 리해되지 않았다.
   《여보, 일의 내막을 알아보기전에는 아무것도 모른체 합시다. 해련아, 너도 까딱 말하지 말아야 돼, 알겠니?》이렇게 다짐장을 눌러두고 서재에 들어가 피울줄 모르는 담배를 두대나 태우면서 이 두달 동안의 아버지의 행각을 추적해보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는 매달 로임을 타면 아버지에게 꼬박꼬박 500원씩 소비돈을 드리였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소비돈이 모자라서 청결대에서 부업을 하다면 우리가 돈을 더 드 리면 될일이지만 마작도판도 모르고 담배도 끊으신 아버지가 그럴리 없었다. 점잖은 아버지가 생각없이 행동해서 자식의 얼굴을 깎는 일을 한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렇 다면 아버지는 우리 몰래 무언가 작정하시고 “돈벌이”를 하시는게 분명하였다. 그게 무어길래 아들며느리의 눈마저 속이려드는것일가?
    평시 아버지는 아침운동을 하고 간이음식점에서 기름튀기 두어개에 콩물로 아침 을 에때우고 낚시질하러 가신다고 하면서 보통 집에서 아침을 들지 않았다. 이제보니 며느리의 부담을 덜어주느라고 그런 연극을 노시는데도 눈치채지 못한 자신이 더없이 민망스러웠다. 자식은 그냥 사랑나무의 곁가지에 불과한것일가?
생각해보니 하루종일 낚시질을 하셨다는 분이 아침에 입고나간 운동복에 더러 워진곳 하나 없었고 쇠치네 한마리 없이 그냥 마른 낚시주머니만 달랑 들고 들어 오셨다. 옛날 동북에서는 줄낚시에 반두까지 떠서 강물에 고기를 씨를 말린다는 소리 도 듣던 아버지의 솜씨에 죽은 고기 하나도 걸리지 않는것도 이상했다. 그리고 아침 달리기를 하면 집주위에서 해도 되겠는데 하필이면 자전거를 타고 공원거리에 가서 하신다고 한다. 그 모든것에 주의를 돌리지 못한 나도 한심하다. 그 수수께끼가 오늘 우습게 풀리면서 가슴에 유감과 아픔이 주렁주렁 맺혔다.
    하여간 신체단련이나 하시고 소일거리로 낚시질을 하는것이지 식탁에 반찬깨나 보태자고 하는 일도 아니니 무심하게 지나쳤던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다. 이렇게 대강 줄거리를 세워보고나서 식구들과 무언극을 벌리면서 며칠을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기다리던 일요일이 돌아와자 옆집에 자전거를 빌려타고 아침단련을 나가신다는 아버지를 미행했다. 해련이 말대로 정말 길바닥을 쓰는 아버지의 모습이 확인된다면 어쩌지? 하는 근심에 페달마저 천근같이 무거워났다.
    해련이가 헛본것이나 되였으면, 그리고 아버지가 젊은이들처럼 열심히 달리는 강건한 모습을 보았으면 우리 마음속에 비구름이 싹 가시련만…하는 마음으로 요행에 턱걸이를 하고있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가 아버지는 아빠트구역을 벗어나 리촌공원 방향으로 향했다. 공원거리를 벗어나 골목어귀에 있는 허술한 신수리부 옆에 자전거 를 세우더니 노동복에 누런 조끼를 받쳐입더니 신수리부뒤에서 커다란 참대비자루를 꺼내들고 천연덕스레 큰 길을 쓱쓱 쓸어나기시작했다.
    환갑나이가 코앞이지만 노망 쓸 나이는 아니다. 난다긴다 하는 사람들이 이 청도에 모이고 그런 자식들을 따라와서 만년에 복을 누리는 조선족들이 20만도 더 되지만 이런 창피스러운 일을 하시는것을 어떻게 리해해야 하는가? 나의 요행심리는 물먹은 담벽처럼 무너졌고 그 밑에서 나의 문드러진 체신과 자존심이 버둥거렸다. 나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비자루를 분질러버리고 싶은 충동이 명치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한평생 아글타글 아들을 대학공부를 시켜서 당당한 공무원으로 만들고 자가용을 굴리며 내노라하는데 이건 참으로 말도 안되는 일이다. 명에 없는 호강을 누리는것도 아니고 아무리 일에 전 인생이라도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였다. 동료들이 알면 나를 불효막심한 놈이라고 뒤소리를 할것이니 생각만해도 얼굴이 근질거렸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다고 고향마을에서 아버지와 이웃으로 절친하게 지내던 낯 익은 아저씨가 내버려도 주어갈 사람이 없을만큼 형편없는 자전거를 타고 오더니 신 수리부에 척 들어앉지 않는가. 우리 아버지는 최덕보라 하고 그 아저씨는 최덕팔이라 하지만 본이 달라서 사돈에 팔촌도 아니다. 그러나 공교롭게 이름자도 비슷하고 해서 모르는 사람은 친형제로 오해할만큼 절친한 사이였다. 그만큼 두 사람은 세월의 소 용돌이속에서 동고동락하면서 오늘까지 붙어다니였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 참군했다가 퇴오한후 흥안령기슭에 있는 군마창에 배치되여 월급쟁이가 되였다. 그 덕에 고향마을 원근에서 손꼽는 미인이였던 어머니에게 장가 들어 우리 남매들을 낳았다. 덕팔아저씨도 그때쯤 가정을 이루고 생산대장을 하면서 부지런한 농군으로 인생을 영위했다. 두사람은 자식을 낳기전부터 아들딸을 낳으면 사돈을 맺자고 약속까지 한 사이였다. 그런데 두 집에서 다 대포를 찬 놈들이 태여나 는바람에 사돈간은 웃음거리로 남고 분김에 아예 결의형제를 맺았단다.
    고향마을 사람들은 거개 일본놈들의 이른바 개척민으로 이 땅에 오게된 사람들의 후손들이였다. 그러다보니 동성동본은 별로 없고 성씨가 같은 집이 여러호 있었다. 생일이 조금 늦은 덕팔아저씨는 동생이 되였다고 한다.  두분의 우정이야 어찌되였든 나는 눈앞에 벌어진 일에 신경이 쓰이며 속이 왈칵 뒤집혀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저만치 멀어지자 덕팔아버지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인사를 건넸다.
    《아저씨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불쑥 나타나서 죄송합니다. 》
    《아니? 늬 룡호아닝겨? 간부어른이 이 아침에 웬 걸음인기여?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
아저씨는 반색하면서도 무슨 나쁜 일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저으기 불안해 하는 얼굴이였다.
   《아저씨네도 이 청도에 와서 살게되였다는 말을 들었지만 인차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참, 한국에 나가시여 돈도 잘벌었다는 소식을 풍편에 들은것 같은데요. 그런데 어찌하여 신수리를 하나요? 》
《말두 말게나. 내일은 말할라치면 장편소설이 될기여, 8년을 불법체류자로 있으면
서 돈깨나 벌었지만 운수가 꺼벅거려서 나중에 공사장에서 부상입고 이렇게 절를발이 빙신이 되고 수지도 않맞는 신수리를 하는 신세가 되였당께. 아따 그런데 인제 과장님도 되였다꼬 자가용까지 타고다닌다면서 여기는 무슨 일로 왔능교? 아버지는 잘 있능겨?》
    제법 능청을 떠시는 덕팔아저씨의 얼굴엔 불안과 의혹이 물결치고 있었다.
《예. 잘 계셔요. 근데 아저씨는 로인협회에 다니면서 마작이나 노시고 문구나 치면서 향수해야 할 년세에 이게 웬 고생이십니까?》
    아저씨는 대답을 하기 싫은지 흐릿한 하늘을 쳐다보시며 이윽토록 말이 없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처연한지 분명 말못할 사연이 있을것 같았다. 아저씨의 곡절많은 인생에도 찬란한 한페지가 있었다. 원근에 소문난 힘장수인 그는 해마다 씨름판에서 황소를 타던 분이였다. 그러던 아저씨가 세월과의 씨름에서는 맥꼴없이 지레 패배한듯 너무 조로한 모습에 가슴이 알찌근해났다.
    하긴 아저씨만 불쌍한게 아니다. 지금 길바닥을 쓸고있는 아버지도 한국로무 10년을 인생고해를 헤쳐온 고달픈 “선장”이 아닌가? 수십만을 헤아리는 조선족 남녀 동포들이 한국에서 어떻게 돈을 벌고있다는것은 직접 보지 않아도 가히 상상할수 있는 일이다. 어떤 일을 하든간에 개도 안먹는 그 돈때문에 온갖 기시와 홀대를 받으면서 고역을 겪어야 하는 처지이다. 아저씨가 벽돌장을 등에 지고 가파로운 발판 을 오를때 삼킨 눈물인들 얼마며 흘린 땀인들 얼마였으랴,
    더구나 불법체류자 딱지가 붙으면 뼈빠지게 일해도 돈을 받지 못하기가 일쑤이고 녀자들은 릉욕당해도 그 돈때문에 그냥 당하고마는 경우가 푸술하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피눈물에 젖은 돈인줄 모글고 그냥 덕대에서 내려온 뭉치돈인가 할수도 있다. 그러나 울며겨자먹기로 코리아드림에 넋을 잃은 사람들의 그 모순된 심정을 어찌 나혼자의 주관판단으로 가늠할수 있으랴, 여기까지 생각하고 있는데 아저씨가 드디어 입을 여시였다.
   《참, 나 팔자가 드러워서. 나도 본래는 이런 신수리쟁이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못했어, 근데 늬 아버지가 이런 일이라도 해야 한다고 우격다짐해서 이런 꽃 가마에 들어앉았지 뭐냐? 》
  덕팔아저씨는 불만아닌 불평을 한숨에 버무려 토해냈다.
 《우리 아버지는 아침운동도 하시고 낚시질에 재미를 보는데 아저씨는 잔돈 버는 재미를 보는것 같군요》
    나는 짐짓 모른체 하고 변죽을 쳤다. 그러자 덕팔아저씨는 성난듯이 구시렁거리 다가 마침내 실토정을 했다. 
《룡남이 늬 지금 모르고 하는 소린디, 사실 말이야, 우리 다 계획이 있고 시작한 일인거야, 하긴 몇날 며칠 목에 피대를 세우며 다투기까지 했지만 말이다. 우린말야 고향갈 채비로 이렇게 푼돈벌이라도 한당께, 자네 모르는 모양인데 늬 아버지 저 기서 지금 길청소를 하고 있지 않나뵈? 》
    덕팔아저씨는 턱짓으로 저 멀리 길 건너편을 가리켰다.
   《고향에 돌아가다니요? 공기좋은 청도에서 손자손녀를 돌보며 만년을 편안히 보내는게 오죽 좋으셔서 그럽니까? 저희 아버지가 그래요? 고향가신다고? 고향얘기 는 가끔씩 하셔도 고향에 가시겠다는 말은 금시초문인데요》
   《이런 젠장, 늬 아버지 제아들도 속였단말인겨? 그러게 자다가 봉창두드리는 소릴 하고 앉았구먼, 우리 고향가서 목장사업 한번 해보자꼬 약속한기여, 자네 정말 몰랐는기여? 시방? 한국에 못사는 사람들 소꼬리 구경도 못하고 산다네. 잘사는 사 람들도 가물에 콩싹나듯이 큰맘 먹고 사치를 부린다네. 나 말야, 자네 아버지서껀 고향가서 목장 한번 본때나게 꾸려놓고 소꼬리 한국에 수출할라꼬,그래서 푼전 이라도 보탤락꼬 이 짓을 시작했지 뭐야,》
   《그런 셈판이였군요? 그런데 우리 아버지 언제부터 길바닥을 쓸었는가요?》 
《이런, 귀신곡할 노릇있나, 자네 아버지는 아들 며느리의 동의를 얻어서 시작한 걸로 아는데, 그래서 대학문을 나온 놈이여서 인정사정 다 안다고 칭찬했는디…》
   《이런 내막 감감 몰랐습니다. 그저 아침달리기를 한다니까 그런줄로만 믿었 지요. 아버지두 참,》나는 우거지상이 되여 목소리를 낮추었다.
   《응 그런 일이였군, 늬아버지와 난 말이네 대구에서 백리가량 떨어진 가야산 기슭에 있는 거창소목장에서 한 5년 같이 일했다네. 깊은 산골이여서 불법체류자가 숨어살기로는 제격이였네. 평생 소궁둥이 두드리면 산지라 하는 일도 재미났고, 》
    덕파아저씨는 하던 일감을 밀어놓더니 이야기주머니를 풀 잡도리였다.
    …동북지구에서 한국에 나간 사람들 거개가 호미대학 출신들인지라 건설현장이나 어장이나 목축장 같은데서 말등 일을 하기가 보통이였다. 고국이라고 허위단심 찾아 가서 돈보따리 챙길줄 알았는데 가서 보니 꿈이 너무 알락달락 했다. 그래서 한번 갔다 온 사람들은  돈밖에 모르고 인정미가 말라버린 못살곳이라고 욕사발 퍼붓는다.
    가지고 간 웅담이랑 록태랑 선물받은 친척들이 입이 반색했지만 그때뿐, 괜히 지들에게 부담이 될가봐 차차 멀리하더라는것이였다. 고리대로 수만원을 내메치고 갔는데 진짜 생각해주는 친척도 없고해서 혼자 여기저기 노가다판에서 개돼지 소리를 들으며 피땀을 흘렸다.
    그는 제 뚝힘을 믿고 한국사람들이 위험하다고 피하는 일을 하다가 그만 사고가 나서 다리를 상하게 되였다. 오고갈데가 없게 된 덕팔아저씨의 사정을 안 아버지가 목장의 사장에게 사정하여 함께 일하도록 주선해주어 함께 끓여먹으며 5년 세월을 형제처럼 살았다. 그러다가 덕팔아저씨는 불법체류자신고를 내고 먼저 귀국하였다.
    덕팔아저씨의 고생담을 마음에 새기니 가슴이 납덩이처럼 무거워났다. 아버지의 피땀에 절은 돈으로 명문대학을 나와 공무원으로 일하게 되였고 아빠트도 사놓고 승용차까지 굴리면서 제잘난듯 살고있는 자신을 다시 한번 질책하지 않을수 없었다. 아직 철부지인 해련이마저 손바닥만한 얼굴이 깎인다고 할아버지가 하는 일에 입이 한발이나 나와 있으니 아버지가 아시면 얼마나 섭섭해 하실가? 
    아버지가 아침마다 쓸어놓은 공원거리에 자가용을 굴리는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대조적이였고 아이러니였다. 하느님이 내려다보고 코웃음칠 일이요 황천에 계시는 어머니의 빈축을 살 일이였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더 듣고 앉을수가 없었다. 나는 상점에서 맥주병이랑 통졸임이랑 가득 사서 덕팔아저씨에게 건네고 자리를 떴다.
   《아버지에게는 제가 왔다갔다는 말 잠시 하지 마세요. 두분을 보기가 부끄럽 습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속담의 뜻을 이제 더 잘 알았습니다. 》
    심한 자책감에 뜨거워진 얼굴을 돌리며 나는 자전거를 밀고 터벅터벅 걸었다. 아스팔드길우에 보이지 않지만 자국마다에 착잡해진 내마음이 찍히고 있었다.
                                 
                                      2.
   
아버지는 인생의 초년에는 그래도 행운아였다. 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귀향한 이듬해 군대모집에 합격한것이였다. 전공사에 참군지원자들이 수십명이였는데 경쟁을 이기고 마을처녀들의 흠모의 눈길을 받으며 고향을 떠났다. 아버지의 배낭에는 공개 할수 없는 많은 비밀들이 들어있었다. 딸을 둔 집집마다에서 우리 아버지를 사위감 으로 찍어놓고 은근히 벼르고들 있었던것이다.
    그 시절, 참군하려면 3대에 이르기까지 성분이 좋아야 하였다. 빈하중농에서도 극빈이였던 우리 집안에서 태어난 아버지인지라 거칠것 없었다. 그즈음 웃음거리가 하나 있었다. 마을에서 내노라하던 덕보와 덕칠이라는 두 젊은이가 입오신청서를 내고 은근히 경쟁을 불태우고 있었다. 덕팔이도 가정성분에 나무릴데 없고 허우대가 훤칠해서 징병을 책임진 군관의 첫눈에 들었단다. 어디서 소문이 새였는지 눈치빠른 집들에서는 딸을 덕팔에게 주려고 서로 다투어 중매군을 띄우는 판이였다.
    아버지는 신청해놓고 밑져야 본전이라고 속셈을 해두고는 속이 든든해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신체검사를 하던 날 아버지는 무사통과되였는데 소문난 잔치 먹을게 없다는 격으로 자신만만하던 덕팔이는 평평족이여서 미역국을 먹게 되였던것이다. 당장 군인가족이 된듯싶어 떡치고 닭잡고 야단법석을 치던 덜팔이네는 락담실망했다.
    이튿날 공사 무장부간사와 징병온 군관이 덕팔이네 집을 지나쳐 덕보네 집을 찾아오자 마을이 들썽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원래 되여도 좋고 안되여도 좋다는 뱃심 을 가지고 있던차라 당연한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흥안령변방부대에서 3년간 복무하고 퇴대하여 흑하군마창에 배치받았다. 조상대대로 땅을 뚜지고 살던 농사군의 집안에 국록을 타먹는 사람이 나왔으니 마을사람들이 부러워할만도 하였다.
    아버지가 취직한 군마창은 원래 일본관동군 기병대의 병영이였다. 그래서 군마 사양실은 철갑모를 줄지어 엎어놓은것같은 구조였다. 그 당시 값으로 해방패자동차 한대와 맞먹는다는 종자말들은 매일 좁쌀에 홍당무우를 먹였다. 아버지는 손에 선 일 이였지만 열심히 일하였다. 월급쟁이가 된 아버지는 저마다 눈독을 들이던 마을에 일 등 미인에게 장가들어 군마창에 새살림을 꾸렸고 거기서 내가 태어났던것이다.
    몇해후 내가 학교갈 나이가 가까워오자 아버지는 한족사람들 천지인 흥안령 골짜 기에서 하나 아들을 한족아이로 키우는것이 마음에 걸린다며 월급봉투를 던져버리고 지구를 수리하려 마을로 돌아오고말았단다. 마을사람들은 어렵사리 얻은 철밥통을 제발로 차던진 아버지를 두고 뒤공론이 많았지만 아버지는 오리는 오리무리를 따라야 한다며 후론이야 여하튼 죄다 귀등으로 흘려버렸다. 
    그러나 제일 기뻐한것은 덕팔이였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온 친구가 남모르게 반 가웠던것이다. 생산대에서는 아버지가 농사일에는 숙맥이라고 양돈장사양원을 시켰다. 무슨 일을 하나 직심인 아버지는 아무 군말이 없이 맡은 일에 열심하도 했다. 그러나 농사일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아버지를 건달농사군취급을 하였다.
    남들이야 콩팔칠팔 하든말든 아버지는 돼지죽을 끓인다 돼지불을 깐다, 씨붙임을 시니킨다 하며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군대까지 갖다온 놈이 결국 이노릇 밖에 못하는 신세가 되였다고 깨고소해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한술 더 뜨는 식으로 생산대장인 덕팔에게 두방을 차리자고 건의했다. 두부팔아 푼돈을 벌고 사료도 해결하는 일거량득인지라 덕팔이는 대찬성이였다.
   물론 처음으로 집체두부방을 차리자니 곤난이 많았다. 다행히 이웃 한족말을의 인심고운 생산대장이 기술자를 파견하여 두부방도 꾸려주고 가마도 걸어주고 기술전 수도 하여주어서 무난히 두부앗기에 들어가게 되였다. 첫두부를 앗는 날, 마을에 노인들과 아이들이 구경거리나 생긴듯 두부방의 뜨시한 구들에 모여앉아 아버지의 첫솜씨를 구경하였다.
    사람들이 눈길아래서 첫두부를 앗자니 조금 긴장하기도 했지만 워낙 눈썰미가 빠른 아버지는 한족기술자에게서 어느새 솜씨를 익혔는지 첫시작에 대성공이였다. 마을사람들도 덩달아 환성을 올렸다. 두부방은 여러가지로 인기를 끌었다. 비누도 표제를 하던 시절인지라 마을 아낙네들이 머리를 감거나 빨래를 하는데 제격이였다. 그래서 두부콩을 갈기도 전에 다투어 물통이랑 대야랑 갖다놓고 대기하고있었다.
   아버지는 한족두부를 앗는 기술을 배웠지만 차차 순조선족두부를 만들어내게 되였다. 우유빛도 아니고 그대로 눈덩이같이 하얗고 아기의 볼기짝처럼 야들야들한 두부는 대환영을 받았다. 집집에서 드문히 콩이랑 쌀이랑 들고와서 두부를 바꿔 가면서 흥성해졌다. 하지만 사람들이 끼니마다 두부를 먹을 형편이 아니여서 어떤 날은 잘 나가지 않으며 소수레에 싣고 중심툰에 가서 팔았다.
    아버지가 《사구려》를 부르지 않아도 중심툰에 사람들이나 공소부에 물건사러 왔던 아낙네들이 조선두부를 먹어본다고 곧잘 모여들군했다. 그러노라니 구설수에 많이 오르기도 했다. 한족사내들이나 하는 일을 멀쑥하게 생긴 조선나그네가 앞치마 를 두르고 두부장사를 하니 어디 모자란다는둥, 월급을 팽켜치고 콩물이나 주무는 신세가 되였다는둥 벼랄별 의론이 귀전을 때렸다. 그러나 아이를에게 민족교육을 시키려는 아버지의 속심을 곁사람들이야 어찌 알수 있으랴, 그래서 그따위 후론에 아예 마이동풍이였다.
   한편 발없는 말이 천리간다고 소문이 소문을 낳아서 최두부쟁이, 조선두부라면 귀를 가진 사람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였다. 이웃마을들에서 주문이 들어오게 되자 하루 한판씩 하던것을 두세판이나 하게 되였다. 두부찌끼가 남아돌게 되자 소들에게도 먹이게 되였다. 바싹 여위였던 소들의 엉덩짝에 살이 오르고 힘꼴을 쓰게 되자 마을 사람들은 칭찬이 자자해졌다. 그래서 모범사원이 되기까지 하였다.
   그런 경력을 가진데다가 돌꼭대기에 올려놓아도 살 사람이라는 평판이 자자한 아버지는 호도거리농사가 시작되자 양돈장과 두부방을 도맡았다. 물론 도맡았대야 사양장에 득시글거리던 크고 작은 돼지들이 제비놀음에 뽑혀 개인집으로 시집을 가다보니 텅빈 돼지우리와 엉성한 두부방뿐이였다.
    아버지는 대부금을 내여 전기화 두부방을 꾸리고 굴암퇘지 다섯마리에 새끼돼지 스므마리를 사다넣고 사육하기 시작했다. 도거리농사 2.3년에 쌀독이 넘쳐나고 인심 이 풋풋해졌다. 머리를 잘쓰고 부지런한 사람들이 벽돌집을 짓고 텔레비를 산다 모터 찌끌을 산다하며 야단이였다. 한편 로동력이 없거나 농기계, 성축이 없는 집들에서는 점점 살림이 각골해져서 빈부차가 나기시작했다. 그리하여 일컬어 신지주들이 나타났 고 땅값으로 쌀이나 받아먹는 신빈고농들이 륙속 나타났다.
    아버지는 땅과 씨름하지는 않았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치부계획이 있었다. 두부방 을 확대하고 마을에 김과부를 조수로 쓰면서 양돈장의 몫인 사료지에 배추까지 심 어서 김치장사도 벌였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철교공사장이 생겨나자 거기 식당에 두부를 공급하게 되여 한동안 재미를 짧짤하게 보았다.
    아무튼 아버지는 극성이였다. 노인들이 돼지우리에 관자널을 마판으로 깔면 돼지 들이 탈없이 잘 큰다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뒤공론이 분분하건말건 면례해간 낡은 묘지를 쫓아다니며 관자널을 파내다가는 돼지우리에 마판으로 깔아주었다. 아닌게 아니라 진탕속에서 자고 먹던 돼지들이 깨끗한 널판자위에서 딩굴고 자면서부터 돼지 들이 무럭무럭 잘도 컸다. 그러나 아버지는 귀신사촌이라는 별호를 달게 되였다. 그 바람에 담차기로 이름난 김과는 해가 설핏하면 일손을 팽개치고 줏자를 놓았단다.
    그렇게 몇해가 꿈처럼 흘러가고 조선족들은 돈냄새에 깊이 절어들어갔다. 땅을 팽개치고 도시진출한 사람들이 늘어나기시작했다. 상점을 차린다. 파마점을 한다. 식 당을 경영한다…하여튼 돈이 될만한 구멍을 다 뚫어가고있었다. 처녀애들이 먼저 시내바람을 일으키더니 논과밭에서 땀흘릴줄 밖에 모르던 아낙네들의 치마폭에도  돈바람이 감돌아치기 시작하였다.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할 때 아버지는 고향 땅에 심을 남다른 꿈을 키우기시작했다.
                                 
                                  3.
 
마침내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한국문이 열리고 코리아드림이 만주대지를 휩쓸어 갔다. 그러지 않아도 시내바람에 농토가 버려지고 처녀들의 씨가 마르게 된 판에 한국에 시집가는 바람마저 불어쳐서 숙성한 처녀들은 꿈에 천보기보다 더 드물게 되 였고 마을에 남은것은 장가들곳 없는 로총각무리들뿐이였다.
    바람이 세찬데 고요히 서있을 나무가 어데 있으랴. 한국로무수출바람이 불어칠 때 아버지는 남산언덕 무연한 초판에 목장을 꾸릴 타산을 하고 부지런히 양돈장을 경영했으나 한판 크게 해보자면 꽤 큰돈이 있어야 했다. 이리저리 궁리를 짜던 아버 니도 마침내 조류에 휩쓸려 한국행을 하게 되였다.
    외가의 가까운 친척들이 한국에 있는게 다행이였다. 한달에 인민페 만원씩 벌수 있다는 대구 가야산속의 목장에 나와 일하라는 편지가 오자 부랴부랴 수속을 마친 아버지는 10년을 기약하고 한국땅에 들어서게 되였다. 다행히도 아버지가 일하게 된 거창이라는 목장의 사장은 한국인치고 보기 드물게 후덕한 사람이였다고 한다. 게다 가 아버지가 제집을 하듯이 직심으로 일하는 바람에 작업반장까지 시키며 신임했다.
    먹고 자는데도 돈이 들지 않고해서 한달에 만원소시가 남았다. 일은 고되였지만 저금액수가 불어나는 재미로 외로움과 향수의 감정을 말리며 일하고 또 일하였다. 아들 룡남이가 서안과학기술대학에 붙게 되자 더구나 힘이 솟았고 금자탑과 희망탑이 나란히 솟게 되였다.
    남사장이란 사람은 경상도 대지주의 아들로서 한국농축협회 리사로 덕망도 높고 뜻도 높은 사람이였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동북의 송화강류역에 자기의 해외목장을 하나 차리고 싶어하던차였다. 그런데 인연으로 얽힌 세상에서 아무 반연도 없이 거금을 투자하기가 주저되여 여태껏 벼르고만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속만 앓던차에 좋은 인연으로 부지런하고 직심인 최덕보라는 사람이 제발로 찾아와서 여간 기쁘지 않다고 했다. 그는 무슨 속셈이 있어 서였던지 명절때면 아버지를 청하여 술상을 마주하고 속심말을 털어놓는 무랍없는 사이가 되였다.
    그러다보니 아버지도 고향에 목장을 꾸려볼 꿈이 있다며 젊은 시절에 군마창에서 말을 사육하던 이야기랑 해주었다. 마침내 소리를 낼수 있는 두손벽이 마추치게 된셈 이다. 그때부터 남사장은 음으로 양으로 목장경영기술이랑 방법이랑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불법체류자 색출하려고 면에서 사람들이 내려온다는 정보가 있으면 아버지를 산속 방목장에 빼돌리고 내려온 내무서사람들에게 소꼬리탕도 대접하고 소갈비짝도 쥐여주면서 감싸주다보니 아버지는 10년을 내 무사하게 일할수 있었다.
    그렇게 있다가 드디어 불법체류자 신고를 내고 아들집에 돌아왔던것이다. 10년 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마음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였으련만 아버지는 별로 늙지 않고 끼끗하셨다. 산좋고 물이 맑은 가야산 산속에서 산탓인지 아니면 고향에 목장을 꾸리겠다는 꿈을 안고 산탓인지 모른다. 아무튼 손녀를 안고 눈물이 글썽한 아버지의 모습에 다하지 못한 효성을 다짐한 나였다.
   10년세월을 가족과 떨어져 세월을 쪼개며 살면서 아글타글 돈을 벌어 나의 뒤바 리지를 해주셨고 공직생활후 100평도 넘는 너렁청한 고급아빠트까지 마련해준 아버 지는 나에게는 참으로 위대한 분이다. 그렇게 위대한 아버지의 목장꿈은 이 아들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깨여버렸을것이다.
    그러나 본성은 버리지 못한다고 그렇게 가석하게 깨여진 꿈끄트러기를 아버지가 가슴깊이 품고있다가 다시 그 꿈을 부풀리게 되고 별로 가망이 없을줄 짐작하면서도 길을 쓸어서라도 돈을 모아 고향을 지킬 목장을 꾸리겠다는 집착을 다시 먼지와 땀으 로 보듬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 큰 충격이 아닐수 없다. 옛말 그른데 없다고 부무님들은 근심과 걱정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다. 그런데 나는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고향꿈을 얼마나 챙기였는가? 아무리 자문해도 대답이 궁한 나이다.
    절름발이 덕팔아저씨의 어설픈 꿈도 눈물겹지 않으랴, 나는 천방백계로 이 노인 들의 꿈을 이루어드리리라 다짐했다. 무거운 짐을 부리워놓은듯 가슴이 저으기 개운 해졌다. 나는 자전거에 올라앉아 페달을 힘있게 밟았다. 바람이 씽씽 귀전을 스친다. 그날 저녁 나는 안해와 딸애를 몰래 불러내다 산책하며 아침에 내가 보았던 아버지 의 모습과 속사정, 덕팔아저씨의 갸륵한 마음을 자초지종 이야기해주었다.
   
《듣고 보니 우리가 너무 리기적이였어요. 아들며느리는 승용차를 타고 출퇴근 하는데 아버님은 길을 청소하고 계시다니 말이 안돼요. 여보, 우리 무슨 방도를 댑시 다. 네?》안해는 딸애를 꼭 껴안으며 비장한 결심을 내리는듯 진지해졌다.
    《그래서 하는 말이 아니요?아버지는 10년의 피땀을 한순간에 우리 아빠트에 소모해버렸소. 아버지는 돈은 내주었지만 그분 자신의 꿈은 내버리지 않았으니 내가 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구려》
    사실 여기 리창구에 새 아빠트를 살 때 아버지를 노엽게 했더랬다. 아버지는 고향 에 대한 아집을 버리지 못해 하였고 나는 만년에 향수시킨다는 실속없는 말로 아버지를 설복했다. 예로부터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아버지는 눈물을 몰래 삼키면서 나에게 지고말았을것이다. 며느리사랑은 시아버지라고 며느리말이라면 끔뻑 죽는 시늉이라도 할 아버지 자신도 며느리마저 어린손녀에게 그럴듯한 집에서 자라게 하는게 않좋으냐며 간청하는 바람에 큰맘 먹고 꿈을 접으셨을것이다.
    새집에 들어서서 한동안은 무엇인가 내켜하지 않는 모습이였지만 차차 시내사정 에 익숙해지고 손녀의 손을 잡고 바다구경도 나가는 멋이 새롭던지 차차 기색이 좋아 지셨고 나도 만금심을 다 털어버렸다…더구나 해련이가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아침 저녁으로 데려다주고 데려오며 무럭무럭 커가는 두벌자식의 사랑에 모든것을 체념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 보니 아버지가 구부정해서 거리를 쓸며 나가는 모습이 흡사 무언의 항의를 하는것으로 받아들여질 때 나는 할말을 잃었다.  
                           
                                     4.
 
산에들에 단풍이 곱게 물드는 가을, 추석을 며칠 앞두고 공교롭게도 나에게 할빈 출장갈 기회가 차례졌다. 나는 할빈에서 공무를 마치자바람으로 10년만에 외 할 머니가 계시는 고향으로 가는 뻐스에 몸을 실었다.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벌, 고개 를 푹숙인 탐스러운 벼이삭들이 풍년을 자랑하고 있었고 길가 옥수수밭에는 오동통한 아기들을 서너개씩 없고 근엄하게 서있는 옥수수대들이 유별나게 정겨웠다. 역시 농 민의 피줄은 속이지 못하는가보다.
   그러나 마을풍경은 이색적이다. 옛날같으면 머리에 보퉁이를 떠들썩 뻐스에서 오르내릴 조선족 아낙네들은 보이지 않고 어두운 얼굴의 노인 몇분이 나와 함께 차에 서 내렸을뿐이다. 마을뒤 높지 않은 산언덕은 민둥산 그대로였고 마을길은 울퉁불퉁 수레길 그대로였다. 그대신 여기저기 한족마을들은 번듯한 벽돌집들로 꽉차있었다. 황페해진 고향마을, 시대의 추세인가?  아니면 변해버린 인심의 걸작들인가?
   중학교때 우리가 심은 수양버들만이 가지를 흐느적이며 어서오라 반겨주었다. 거목이 된 버드나무를 보노라니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저 버드나무들이 백양나무들처럼 쭉쭉 빠진 재목들이였다면 언녕 베여졌을것이다. 그러면 나같이 고향을 떠나 새로운 터전을 잡은 사람들은 잘 생긴 나무들인가? 꼭 그런것만은 아닐것이다. 지금 아버지가 못생긴 저 버드나무처럼 고향에 돌아와 땀 으로 걸구고 피로써 지켜낸 고향땅을 다시 지켜나서려고 하는것이니 어찌 아버지 세대들의 마음을 못났다할수 있으랴,
    바람에 우수수 락엽이 날린다. 나의 마음에도 락엽같은 스산함이 고패쳤다. 외할 머니네 집은 인민공사때 지은 초가집 그대로다. 오래동안 손길이 가지 않아서 지붕은 헌삿갓을 눌러쓴듯 했고 군데군데 밭고랑이 깊이 패여있다. 벽체는 주저앉을대로 주저앉아 당금이라도 와르르 무너질것 같이 위태롭다. 낯선사람이 들어서자 검둥개가 대달아오며 컹컹 짖어댔다.
    찌그러진 정주문이 비시시 열리며 외할머니가 문설주를 집고 내다보았다. 나는 짐짝을 든채로 달려가 외할머니를 부축했다. 나를 업어 키우신 외할머니의 여윈 어깨 는 가냘프게 떨고있었다. 외삼촌내외가 한국에 나간후 손자의 뒤바라지를 하며 살아 가는 할머니는 몹시 지쳐있었다. 외할머니가 이렇게 되도록 너무 무심했던 자책감에 할말을 잃었다. 옛말에 외손자를 다 키워놓으면 개를 추긴다더니 내사 그 쪽이다.
    방안에 들어가 앉기바쁘게 외할머니는 하소연했다.
   《이거 분통이 터져 어디 살갔어? 산사람은 다 빠져나가고 죽은 사람도 쫓기는 세월이 되였으니 말이다.》듣던 소문대로 농촌사회가 돌아가는 꼴이 말이 아니였다. 문화대혁명때 개잡은 포수처럼 우쭐대던 방길만이라는 자의 일은 더구나 격분을 자아 냈다. 약삭빠르기로 소문난 그는 몇년전 한국에 시집보낸 딸의 덕분에 현성에 올라가 개장집을 차리고 얼렁뚱땅 돈뭉치나 쥔 자였다. 그자는 외삼촌을 전화로 어떻게 구슬 렸는지 도맡은 과수원을 헐값으로 넘겨받은 자리로 한족사람에게 10년동안 경영권을 팔아넘겼단다. 과수원 임자가 된 그 한족은 과수원 가운데 있는 나의 어머니의 산소 마저 옮기라고 호령질했단다. 
   외가집 한집만이 겪는 일이 아니였다. 개척민시절부터 일구기 시작한 논밭들이 야금야금 한족들이 차지하고있다. 특히 방길만같은 자들의 롱간질에 넘어가 농토를 버리고 고향을 떠나버린 사람들이 얼만인지 모른다. 그러는 사람들을 내가 무엇이라 고 평판해야 하는가? 나도 고향을 벗어나 도시민이 되려고 기를 쓰고 공부했고 뜻대 로 도회지인이 되여 떵떵거리며 살지 않는가?
    인생에 무슨 규률이 없듯이 삶의 방식은 저마끔이고 선택은 자유이다. 흘러가버 린 조선족마을들, 이런 살풍경에도 아버지는 고향에 돌아오려고 로심초사하신다. 늙 으막에 무슨 고생을 사서 하려는지, 걱정에 앞서 의구심이 앞선다. 그러면서도 여지 껏 동전한푼 고향건설에 보태지 않은 자신으로서는 스스로 가소롭기도 하다.
    나는 그때까지 마을에 남아 농사짓는 중학교동창 용호를 찾아 촌민위원회를 찾아 갔다. 그는 어릴때부터 뜨개소였는데 의협심도 강해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 이였다. 그가 촌장으로 있을 때 방만길이가 기신기신 기어들어 또 수작을 꾸밀때 논도랑에 거꾸로 처박아놓고 다시 마을에서 얼씬거리면 모가지를 비틀어놓겠다고 으름장까지 놓았단다. 그말을 들으니 해묵은 체증이 다 가셔진듯 속이 시원했다.
    마을에 김국철이라는 어리숙한 사람이 있었는데 한국수속을 마치고 촌정부에 땅 을 뜰여놓으려고 하던차에 어디서 낌새를 챘는지 방만길이가 도둑고양이처럼 기어들 어 6만원 현금을 내놓으며 10년기한부로 임대계약을 하자고 쑥덕이고 있을 때 용호가 들이닥쳐 다짜고짜 밖에 끌고나가 논도랑에 처박았던것이다. 그후 방가는 다시 마을에 얼씬거리지 못했다며 마을사람들이 쾌재를 불렀다고 한다.
    내가 용호에게 찾아온 사연을 말했더니 그저 사람좋게 웃기만 하다가 대꾸했다.
   《여, 동창생, 생각은 좋지만 한발 늦었네. 일전에 덕팔아저씨가 찾아와서 땔나 무골과 산등성이 한전 10쌍을 70년기한으로 도맡겠으니 잠시 아무에게도 주지 말라 고 했네. 선불금은 불원간 갖다바치겠으니 단단히 부탁해놓고 갔어…》
   늙은소 콩밭쪽으로 한다더니 아버지가 덕팔아저씨를 보내서 목장자리까지 맡아놓 은 판이다. 참대빗자루와 목장이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으니 참말로 경탄하지 않을수 없었다. 나의 가슴속에서는 아버지의 꿈을 이루어 드리라는 결심이 룡트림하였다.
   《허, 빈대떡이 안팎이 있나. 역시 고향사람이니 잘된 일이군, 그런데 나 송아 지 300마리를 실어가지고 온다면 나와 계약을 맺을수 있는가? 》
    나는 뒤처리를 제쳐놓고 장훈을 불렀다. 용호는 눈이 휘둥그래서 꿀먹은 벙어리 상을 하다가 일이 아이들 장난이 아니니 촌민위원회에서 토론하여 결정하겠다고 좀 기다려달라고 하였다. 이튿날 촌민위원의 결정을 거쳐 내 요구대로 협의서를 작성하 였다. 목장은 주식형태로 하기로 하고 20% 주식을 땅값으로 치고 투자측은 80%의 주식을 보유하면서 생산경영권을 행사하며 총투자액 100만원을 현공상관리국에 등록하고 법인이 법적보호를 받는다는 조항을 덧붙이고 락착을 지었다.
    나의 통큰 설계에 어안이 벙벙해진 촌위원들은 일이 성사되면 민둥산은 무상으 로 내줄수 있다면 선심을 썼다. 역시 고향에 뿌리깊은 정을 가진 마을사람들은 고향 에 찾아와서 고향을 지키겠다는 진심된 마음과 한줄로 이어진것이다. 이튿날 나는 어머니 산소에 올라가 술을 부어놓고 오래오래 앉아있었다.
    눈아래 내가 처음 배움의 첫걸음을 뗀 소학교가 한눈에 안겨왔다. 지금은 페교가 된지 오래되여 운동장은 염소나 게사니들의 놀이터가 되여있다. 나는 어제 저녁 조카 의 작문책을 들춰보다가 본 구절이 떠올랐다. 누나같은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떠나가 고 학교가 페교된 일을 두고 쓴 글이였다. 글은 서툴렀지만 내 마음을 울리기엔 충분 했다. 《…누나같은 우리 선생님 떠나가고 학교도 문을 닫았다.우리는 인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우리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또 울었다…》
    조선족학교가 페교된후 아이들은 고개넘어 한족소학교에 편입되었다. 중국말 잘 몰라 선생님께 꾸지람 받고 머리큰 아이들에게 놀림당하여 어린것들이 무리싸움도 드문히 한다고 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학교가기를 싫어하다못해 버들숲에 책가방을 팽겨치고 뻥을 치다고 집에 돌아오군 했다. 저 어린것들이 철없이 보낼 시간도 잠간 이다. 장차 그들이 커서 어른이 되면 누구를 원망할가? 아무 뒤생각 없이 농토를 버 리고 무작정 도시에 들어온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누가 담보할수 있을가?
   청년들은 거개 한국기업에 목매고 당분간은 호의호식하며 멋스럽게 산다. 그러나 그것도 절대적은 아니다. 일전에 청도에 진주한 한국중소기업들이 백여개의 기업주가 야반도주를 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그바람 기업에 붙어살던 수많은 사람들이 일조에 실업자가 되고말았다. 글로벌시대, 우리 조선족들이 자기 기업은 없이 남에게 얹혀사는것이 장구지책이 될수 있는가? 나로서는 해답이 막연한 의난문제일수밖에 없다. 이런 형편을 아버지네 세대들이 고향에서 버티면 얼마나 버틸수 있는가? 지금 내가 할수 있는 일은 고향을 다시 찾고 고향을 지키겠다는 그 꿈을 뒤받침해주는 길밖에 없을줄 안다.
                                   
 5.
 
       출장에서 돌아오자바람으로 나는 안해와 토론하고 차를 팔았다. 아버지에게는 차가 크게 고장 나서 수리소에 입원시켰다고 둘러댔다. 그리고 기업가 친구에게서 빌 고 저축통장까지 털어서 기본자금 50만원을 마련했다. 조만간 기회를 보아서 작은 집으로 옮겨가고 집값에서 위돈을 벗길 작정이다. 이제 내가 할일은 때가 될떄까지 일요일마다 아버지 대신 길을 쓸어놓는것이였다.
오늘도 일요일날 나는 아버지 먼저 공원거리에 달려가 길을 쓸기 시작했다. 그런데 비자루를 꽉 밟는 사람이 있었다. 올려다보니 독기어린 아버지의 눈이 나를 쏘아보고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일요일마다 이상하게 길이 깨끗하다 싶더니 과연 네 수작 이였구나. 내가 너희들을 속이고 이일을 하는것은 해석이 필요없지만 너는 어쩌자고 이러는거니?》
《아버지, 이렇게 하는것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줄 압니다, 하지만 저는 아버 지의 꿈을 알아냈습니다. 늦기는 했지만 이제라도 그 꿈의 한자락이 되고싶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벌써 붉어있었다.
《그래, 여기서 긴말을 할수 없으니 이만하고 집에 돌아가 얘기하자꾸나》
    그날 저녁 나는 그동안의 일을 말씀들였다. 촌위원회와 맺은 계약서와 저축통장 을 내놓으면서 아버지가 하는 일에 발벗고 나서겠노라고 결심까지 곁들었다. 아버지 는 나무람하시면서도 대견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시면 감격해마지 않아했다.
    아버지도 그동안 길만 쓸고있은것이 아니였다. 남사장의 투자를 다구쳐서 거의 성사시키고 있던차였다. 아버지는 남사장이 먼저 송아지 500리를 살 돈과 목장의 시 설물 건설비로 따로 돈을 보낸다는 확인서와 한국수출입은행 해외송금승인서도 청도 한국총령사관에 인편으로 보내왔다고 하셨다.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아버지는 일단 일을 시작하면 정부의 목축업장려정책에 따라 중국농업은행에서 대부금을 낼수 있다면서 저금통장을 안해앞에 밀어놓으셨다. 70년 계약을 했으니 나도 아버지 목축장에 주식을 가지고 싶다며 도로 통장을 아버지앞에 갖다놓았다. 50만원에서 20만원은 해련이 명의로 해놓고 30만원은 아버지 주식으로 해야 앞으로 리사회에서 발언권이 있다고 도리를 따져드렸다. 아버지도 역시 손에 쥔 돈이 사업의 길에 든든한 지팽이라는것을 아시는지라 나중에는 접수하고 말았다. 한껏 즐거워지신 아버지는 꼬마주주인 해련이를 무릎위에 앉히고 농담삼아 말했다.
  《너 아빠말 알아들었냐: 이제 대학가서는 목축업을 배우거라. 그래야 네가 덕보목축장의 리사장이 될수 있거든, 안그래? 허허허》
    아버지는 오래간만에 만시름 털어내는 큰 웃음을 터뜨렸다. 아버지의 꿈자락을 한귀퉁이 들어준다는 자호감에서 나도, 안해도 밝게 웃었다. 가정이 화목해야 만사가 형통하다는 고훈을 상기하며 나는 아버지의 귀향길이 활짝 열릴것을 기원하였다.
    한달후 모든 일이 다 성숙되자 아버지는 즐거움은 앞세우고 석별의 정은 뒤에 남기고 덕팔아저씨와 귀향길에 올랐다. 뿌리박은 터, 사랑하는 고향을 못잊어하시다 가 드디어 고향으로 가시는 아버지의 그렇게 밝을수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아버지가 고향으로 가기까지는 너무도 먼길을 걸어오셨던것이다.
    덕팔아저씨도 다리를 저는 사람같지 않게 팔팔했다. 내가 작은 어머니라고 부르 는 덕팔아저씨의 안해는 그저 좋다고 덩덕꿍이다. 그렇다, 고향이란 우리 모두에게 피줄처럼 당기는 길이 아니랴! 아버지는 홀가분한 차림이지만 수많은 금빛송아지들을 몰고가는것이다. 멀지 않은 앞날 남산덕이에 포동포동 살찐 송아지떼가 구름처럼 흐를것이다.
    그리고 그 흐름위에 아버지의 드팀없는 향토애가 무지개처럼 곱게 비낄것이다. 나는 속으로 공직생활에서 정년퇴직하는 날, 고향으로 곧추 달려가리라고 속다짐했 다. 내 다짐은 결코 헛말로 되지 않을것이다. 인제 내 마음속에서 나서자란 고향이 새로운 모습으로 부상되였음에랴!
                 
 2010년 6월 1 일 수화에서 탈고 
 
                 2012년 연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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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7 (잡문) 작가의 량지 2018-09-20 0 3952
806 ( 잡문) 작가정신을 기리다 2018-09-20 0 4190
805 ( 칼럼) 왜 기어이 “북한”이고 “주민”이 되냐? 2018-09-20 0 3651
804 (잡감) 숙명인가? 비애로다 2018-09-14 0 3555
803 (잡문) 엉터리들을 엉터리로 론함 2018-09-03 0 4311
802 자기 부정이 기꺼운 일인가? 2018-08-24 0 4597
801 딱해진 우리네 문학 2018-08-18 0 3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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