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고려 말기, 중국에서 전해온 성리학과 유교사상이 조선 왕조 정치 이념의 형태로 온 조선까지 구현되었는데 그 영향을 받아서 여성의 지위가 점차 낮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기녀들은 유교의 엄격한 도덕의 제약에서 벗어난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신분의 특수성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 교양도 겸비하였던 특이한 존재들이었다.
조선 시대의 시조는 대체로 남성 전유물이었고, 특히 조선 전기의 시조 들은 양반들이 풍류를 즐기거나 유교적 이념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사용 된 면이 적지 않다. 그러나 여인들, 특히나 기녀들에 의해 창작된 시조들은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
기녀들의 시조는 고려 가요의 맥을 이어가는 정조를 보여주며, 인간의 진솔한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황진이는 기녀 시인의 대표로서 진사의 서녀로 태어났지만, 사서오경에도 능숙하고 특히 시가, 서예와 음율 등 면에서도 재능이 탁월했을 뿐만 아니라 미모도 출중했다. 황진이는 미모와 기예가 뛰어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지만 그 시대를 넘어서는 사상적 독립성, 정감표출로 하여 한국문학사에 아로새겨지게 되었다.
1.1.시조의 발전사
시조라는 명칭의 원뜻은 시절가조(時節歌調), 즉 당시에 유행하던 노래 라는 뜻이었으므로 엄격히 말하면 시조는 문학부류의 명칭이라기보다는 음악곡조의 명칭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 있어서도 그 명칭의 사용은 통일되지 않아서, 단가 (短歌)· 시여(詩餘)·신번·장단가(長短歌)·신조(新調) 등의 명칭이 시조라는 명칭과 함께 두루 혼용되었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서구문학의 영향을 입어 과거에 없었던 문학부류, 즉 창가· 신체시·자유시 등이 나타났기 때문에, 그것들과 이 시형을 구분하기 위하여 음악곡조의 명칭인 시조를 문학부류의 명칭으로 차용하게 된 것 이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시조라는 명칭이 문학적으로는 시조시형이라는 개념으로, 음악적으로는 시조창이라는 개념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시조는 고려말 이래의 새로운 지도이념인 성리학을 신봉하는 유학자 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새로운 시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시조의 간결 한 정형성은 유학자의 미의식에 알맞은 시형으로 그들은 한시만으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내면을 이에 담아 단아한 기품으로 노래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교주의의 구현은 분명 조선시대 시조 중의 대표적인 주제 내지 제재론의 대상이다. 말하자면 시조에 있어서 동일한 주제가 그 모티프를 어떻게 달리 하는가를 살피는 작업은 시조의 본령을 이해하는 데 여러 모로 뜻 깊은 암시를 준다. 가령 고려 말의 회고가(懷古歌), 조선조의 창업송영(創業頌詠), 중기의 강호가(江湖歌), 도학가(道學歌), 억군가 (憶君 歌), 충의가(忠義歌) 등은 서로 다른 모티프의 선택에 따라 그 제재와 계기는 시대에 따라 달리 나타나지만 역시 주제는 유교적 윤리이다,
그리고 주제인 유교적 이념의 시적 변이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 서도 시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강호가 역시 일견 자연시로 보이지만, 그것은 결코 엄격한 의미에서 자연시가 아니라 충의사상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자연을 주관적으로 관념화한 것이다. 맹사성(孟思誠)의 <강호사 시가>가 바로 그것이다. “적군은 (赤君恩) 이샷다”로 작품을 끝맺음으로써 임금의 은혜를 찬양하고 있다. 그들은 자연을 구가하면서도 유교적인 충의 를 잊지 않고 그것을 노래 속에 반영하였다.
조선 전기의 시조가 지니고 있던 이러한 현상은 16세기 후반에 이르 면서 세 갈래의 지향점을 발견하고, 그 세 방향에서 각기 우수한 작품 을 산출하고 있다. 그 하나는 이황(李滉)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과 이이 (李珥)의 <고산구곡가 (高山九 曲歌)>등이 대표하는 것으로서 정치적 이념과 태도를 선행시키고 있는 조선 전기의 자연에 대한 유학자들의 태도 가 도달할 수 있는 고아한 품격과 자연에 투영된 인생관의 한 극치를 시조가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정철(鄭澈)의 <훈민가>(訓民歌)가 대표하는 것으로서 유교 적인 윤리관을 주제로 하되 백성들을 계몽하기 위하여 쓰여진 토속적인 언어기교를 시조가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황진이 (黃眞伊)로 대표되는 기녀 (妓女)들의 작품들로서 구체적이고 인간적인 애정의 형상화가 시조시형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특히 유학자들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시조의 작자로 등장하게 된 기녀들의 작품은 전대의 고려가요가 지녔던 발랄한 애정표현을 시조 시형을 통하여 재창조하였고, 시조문학 내지는 조선시대의 모든 면에서 억제되고 있었던 여심(女心)의 표현을 활발하게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1.2. 기녀시조 (妓女時調)
기녀 시조는 사대부 시조와 더불어 고려와 조선시대의 기부장제의 독특 한 사회구조 속에서 생겨난 문학 장르의 하나이다. 기녀 작가군은 딸, 아내, 어머니라는 여성들의 전통적인 정체성에서 벗어난 가족의 관습적인 울타리에서 추방된 특수 여성 집단이다. 조선조 지배 계층 남성들에게는 성(性)에 대한 표현들이 허용되는 사회적인 성적 장치가 만들어졌는데, 바로 기방의 기녀라는 특성 집단이다.
따라서 기녀들이 처한 제한된 문화적 환경요인, 다시 말해 규방의 아녀자들이 남성 중심적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삶을 이루었다면 이러 한 틀에서 벗어난 기녀들은 자유로운 여성으로서의 의식이 그들만의 언술 로 담겨져 여성성을 드러낼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조선조 사회에서 부조화의 이중성은 기녀들의 억압된 의식을 가중 시키는 요인으로서 여성 정체성이 형성되었으리라는 추산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할 때에 기녀들의 작품 속에서 여성성이 어떠한 양상으로 드러나고 있는지, 또 이러한 의식 속에 여성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가에 관한 문제 의식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그 동안 기녀 시조에 대해 단순히 사대부와 향유하면서 성적 표현과 이별의 정한을 읊었다는 기존의 시작에서 벗어나 여성 의식이나 여성성 등을 탐구한다는 것으로 기녀 문학을 다시 읽고, 또 새롭게 읽고자 하는 것과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2. 연구 방향
조선조 사대부 양반들에 의해 널리 쓰여졌던 독특한 문학장르인 시조가
그들의 풍류와 교양을 나타내는 표현체였다는 점에서, 기녀들은 사대부와 의 관계라는 의미만을 통해 공공의 성적 장치의 대응물이라는 입장에서 시조라는 글쓰기를 익힐 수가 있었다.
기녀들은 각종 연회에 나가 가무를 제공하고 사대부, 문인의 주석(酒石) 과 시회 (詩會)에 참석하여 높은 풍류와 아취(雅趣)에 접하는가 하면 육체 를 제공하며 남성들 틈에서 인생의 아픔을 체험하는 존재들로서 기녀들은 남다른 애환 속에서 순탄할 수 없는 일생을 살아가면서도 서정적 정서가 넘치는 시조 작품을 창작해 내었다.
사대부 남성들에게 성과 향락을 제공했던 기녀들은 사회적 신분 계층상 천민이기에 사대부가(士大夫家)의 아녀자로 편입될 수 없는 소외된 자이 면서도 한편 조선조 유교적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윤리관에서 벗어나 그들의 재능이나 지식 등에서는 엘리트적인 요소를 지닌 자유인일 수도 있는 모순된 이중성을 보인다. 이와 같은 모순된 상황 속에서 기녀들은 글쓰기를 통하여 자신들의 삶 속에서 느끼는 심정을 토로해 놓을 수 있었 다고 보여진다.
이것은 그 동안 기녀 시조에 대해 단순히 사대부와 향유하면서 성적 표현과 이별의 정한을 읊었다는 기존의 시작에서 벗어나 텍스트 내면에 가려졌던 여성 의식이나 여성성 등을 탐구한다는 것으로 기녀 문학을 다시 읽고, 또 새롭게 읽고자 하는 것과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 기녀문학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특히는 황진이의 생애와 창작활동,및 그 의 주요작품을 연구하여 한국문학에 끼친 기녀문학 ㅡ황진 이의 시조창작의 예술적 가치와 문학사적 의의을 재조명하려 한다.
2. 본론
2.1, 기녀문학의 시대배경
조선시대 기생이라 하면 노비와 비슷한 천한 계급의 하나로 지체 높은 남성들의 곁을 지키는 노리개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상 기녀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신분이 높은 양반들과의 교류가 많았고 멋과 재주를 키우며 생활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같은 천인이라도 노비와는 현저하게 다른 생활을 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기녀를 둔 목적이 경기(京妓)나 지방기(地方妓)를 막론하고 공사(公私)의 연향 (宴享)에 동원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이들은 춤·노래·악기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어야 했고, 장악원(掌樂院)에서 일정한 교육과정을 두어 이들을 가르쳤다. 기녀의 활동형태는 대개 3가지로 나뉜다.
조선시대의 시조는 주로 연회에서 불렸던 성악(聲樂)의 가사로 창작되 었던 것이었으므로, 그 연희의 주역이었던 기녀가 시조의 창작에 깊이 개입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최동원(崔東元)의 연구에 따르면 기녀 작가의 이름이 전하는 경우는 황진이 (黃眞伊)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기명 (妓名)을 쓰고 있다.
이들 모두를 통틀어 〈역대시조전서 歷代時調全書〉에 실린 기녀작가의 수는 28명, 작품의 수는 56수인데, 신빙성이 희박한 것을 제외하면 25명에 44수가 된다. 기녀의 작품은 일반작가들에 비해 전승이 불완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작품이 연회석상에서 불려 작품의 내용보다는 음악의 창사 (唱詞) 로서의 구실이 더 중요했고 유흥이 끝나면 부른 사람의 이름을 굳이 기억하지 않고 잊어버리는 경향이 짙었으며 출신이 천한 이들이었으 므로 당시의 시조집 편찬자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기녀 자신들 역시 자기 작품에 대한 전승의식이 희박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실제 고시조 중에서 성(性)을 주제로 한 작품이나 여성화자 (女性 話者)의 작품은 상당수가 기녀에 의해 창작된 것으로 여겨 진다. 황진이로 대표되는 기녀 들의 시조는 정서를 완곡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괄목할만하다.
2.2 . 조선시대 기녀(妓女) 출신의 시조작가들.
기녀시조로서 가장 오래된 작품은 성종(成宗) 때의 소춘풍(笑春風)이 지은 "당우(唐虞)를 어제 본 듯 한당송(漢唐宋) 오늘 본 듯"으로 시작되는 작품이나, 이 작품은 상투적 문구를 늘어놓았을 뿐 형식도 안정되어 있지 않다. 기녀시조로 가장 우수한 작품은 조선 중기에 와서 황진이·매창 (梅窓)·홍랑(紅娘) 등에 의해 창작되었다.
기녀는 성리학적 이념아래 억압당했던 일반여성들과는 달리 미천한 신분과 직업상의 이유로 인해 사대부들과 자유로이 교유할 수 있었던 신분적으로 특수성고 직업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남성에 대한 상사의 일념이 대부분이고 자유롭게 연정(戀情)을 표현했으며, 즉흥적으로 남성의 수작에 화답하는 노래 또한 많다.
진실한 사랑을 염원하고 인간의 신뢰와 지속적인 의지 등을 소중한 가치로 인식하였으며, 자신의 내적 갈등에 기인하여 동물이나 자연을 문학적 소재로 빌어 존재적인 문제를 표현한 것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2.3 황진이의 생애와 작품세계
황진이가 태어난 해와 죽은 해는 알수가 없지만 중종 6년에서 36년 정도까지 살았다고 추정된다. 당시 송도의 명기였던 그녀가 후세에 이름을 남긴 것은 그의 미모가 출중해서라기보 문학사에 기재될만큼의 가치로운 명시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의 시조작품에는 여성적 정조와 조선말의 아름 다움을 아주 잘 표현했던 것이다.
일명 진랑(眞娘). 기명(妓名) 명월(明月). 개성(開城) 출생. 중종 때 진사 (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나,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고 시(詩) ·서 (書) ·음률(音律)에 뛰어났으며,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15세 무렵에 동네 총각이 자기를 연모하다가 상사병(相思病)으로 죽자 기계 (妓界)에 투신, 문인(文人) ·석유(碩儒)들과 교유하며 탁월한 시재(詩才)와 용모로 그들을 매혹시켰다.
당시 10년 동안 수도(修道)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 (天馬山) 지족암(知足庵)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破戒) 시켰고,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徐敬德)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 사제관계(師弟關係)를 맺었다. 황진이는 여러 사람들을 유혹시키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유독 서경덕만은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는 일화는 황진이 의 인격적 인간형상의 측면을 시사하고 있다.
당대의 일류 명사들과 정을 나누고 벽계수(碧溪守)와 깊은 애정을 나누 며 난숙한 시작(詩作)을 통하여 독특한 애정관(愛情觀)을 표현했다. ‘동지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둘에 내어’는 그의 가장 대표적 시조이다. 서경덕 ·박연폭포(朴淵瀑布)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주요 작품으로 《만월대 회고시 (滿月臺懷古詩)》《박연폭포시 (朴淵瀑布詩)》 《봉별소양 곡시(奉別蘇陽谷詩)》《영초 월시(初 月詩)》 등이 있다.
황진이의 작품으로 확실한 것은 6수인데,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어"로 시작되는 작품이 절창으로 손꼽힌다. 이들의 작품은 주로 애정과 이별을 주제로 하되 참신한 시상(詩想)과 표현으로 당시 매너리즘에 빠진 사대부시조를 자극했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송이(宋伊)·매화(梅花)·명옥(明玉)·천금(千錦) 등 의 기녀시조시인이 등장했으나, 작가가 남성으로 표기되는 등 특정한 작가 의 작품으로 확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대개의 내용은 역시 그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애정문제를 주제로 하고 있다.
황진이의 임종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 1587) 이다. 평생 황진이를 못내 그리워하고 동경하던 그는 마침 평안도사가 되어 가는 길에 송도에 들렀으나 황진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절망한 그는 그길로 술과 잔을 들고 무덤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다음의 시조를 지어 황진이를 애도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백호 임제>
조정의 벼슬아치로서 체통을 돌보지 않고 한낱 기생을 추모했다 하여 백호는 결국 파면을 당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임종을 맞게 된다.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내가 이같이 좁은 나라에 태어난 것이 한이로다" 하고 눈을 감았다 한다.
2.4 황진이 시조창작의 사상, 감정기초
조선시대 기생이라 하면 노비와 비슷한 천한 계급의 하나로 지체 높은 남성들의 곁을 지키는 노리개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상 기녀들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신분이 높은 양반들과의 교류가 많았고 멋과 재주를 키우며 생활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같은 천인이라도 노비와는 현저하게 다른 생활을 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2.5. 황진이의 시조세계
황진이 시조작품에서 우선 유명한 것으로 꼽는 것은 《동짓달 기나긴 밤을… 》이 다. 외로운 밤을 한 허리 잘라내어 님 오신 밤에 길게 풀어 놓고 싶다는 연모의 정을 황진이만의 감미로운 어휘로 노래하고 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보다싶이 시조에서 시인은 겨울의 기나긴 밤에 임을 기다리는 절절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한허리를 베어낸다”고 표현하고, 그리던 님을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될 이불 속을 “봄바람”이라고 재치있게 비유함으로써 은근 히 에둘러 표현하는 국어의 미묘한 맛을 운치있게 살리면서 간절한 그리 움과 기대를 절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황진이가 이별의 상황을 노래한 애정시이다. 황진이의 신분과 시조의 제재들로 보아 그녀의 시조는 기녀시조이면서 애정시조로 파악할 수 있다. 기존의 연구 결과 들을 참고하여 보면 먼저 기녀시조로서의 측면에 중심을 둔 경우가 있다.
조선전기 기녀들의 시조는 사대부들의 시조와 대비하여 시간의식을 포함 한 내면의식의 추적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기녀시조로서만 접근 한다면 애정시로서의 본질을 부각시켜 이해할 수 없다.
다음으로는《청산리 벽계수야… 》를 꼽을 수 있다.
황진이와 벽계수와의 이야기는 서유영(徐有英)의 <금계필담 (錦溪筆談)> 에 자세히 전한다. 황진이는 송도의 명기이다. 미모와 기예가 뛰어나서 그 명성이 한 나라에 널리 퍼졌지만 종실 벽계수는 평소 결코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말해 왔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황진이가 사람 을 시켜 그를 개성으로 유인해왔다.
어느 달이 뜬 저녁, 나귀를 탄 벽계수가 경치에 취해 있을 때 황진이가 나타나 “청산리 벽계수야...” 시조를 읊으니 벽계수는 밝은 달빛 아래 나타난 고운 음성과 아름다운 자태에 놀라 나귀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다음으로는 철학적 이미지를 다분히 담고있는《산은 옛 산이로되... 》 이다. 황진이 이 시조에서 자신을 청산에 비유하여 변치 않는 정을 노래 하고 있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晝夜)에 흐르거든 옛 물이 있을손가
인걸(人傑)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는 것은.
황진이는 한시에서도 남다른 재능을 보이면 독특한 자기의 정감을 토로하고 있다. 아래에 그이 대표적인 한시 《잣나무배》를 보기로 하자.
잣나무 배
저 강 한가운데 떠 있는 조그만 잣나무 배
몇 해나 이 물가에 한가로이 매였던고
뒷사람이 누가 먼저 건넜느냐 묻는다면
문무를 모두 갖춘 만호후라 하리
小栢舟(소백주)
汎彼中流小柏舟
幾年閑繫碧波頭
後人若問誰先渡
文武兼全萬戶侯
범피중류소백주
기년한계벽파두
후인약문수선도
문무겸전만호후
세월이 흐른 뒤, 황진이가 자신의 첫사랑을 생각하며 지었을 법한 시이다. 또 다른 한시인 《반달을 노래함》을 흠사해 보자.
반달을 노래함
누가 곤륜산 옥을 깎아 내어
직녀의 빗을 만들었던고
견우와 이별한 후에
슬픔에 겨워 벽공에 던졌다오
詠半月(영반월)
誰斷崑山玉裁成織女梳
牽牛離別後 愁擲壁空虛
수착곤산옥 재성직녀소
견우이별후 만척벽공허
이 시는 초당(草堂) 허엽(許曄, 1517~1580)의 시인데 황진이가 자주 불러 황진이의 시로 오인되고 있다는 학설도 있다.
[황진이와 화담 서경덕] 마음이 어린 후이니…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 화담 서경덕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 삼경(月沈三更)에 올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시조에서는 그리운 정에 떨어지는 잎 소리마저도 님이 아닌가 한다는 화담의 시조에 지는 잎 소리를 난들 어찌하겠느냐는 황진이의 안타까움을 전한다.
《어져 내 일이야…》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어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이별의 회한을 노래한 것으로 황진이가 시조의 형식을 완전히 소화하고 있다는 평을 듣는 시조이다.
相思夢 (상사몽) 꿈
그리워라, 만날 길은 꿈길밖에 없는데
내가 님 찾아 떠났을 때 님은 나를 찾아왔네
바라거니, 언제일까 다음날 밤 꿈에는
같이 떠나 오가는 길에서 만나기를
이 시는 김안서 작사, 김성태 작곡으로 <꿈길에서> 라는 제목의 가곡 으로 만들어졌다.
2.4. 황진이 시조의 예술특색 및 성과
다른 기녀들의 시조들처럼 황진이의 시조는 풍류적이고 정서적이다. 그러나 황진이의 시조는 언어가 우미할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시조들은 철학적 사색까지 주고있어 독특한 풍격을 이루고 있다. 그의 재치는 황진이만이 할 수 있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다정다감하면서 기예에 두루 능한 명기(名妓)였던 황진이는 시조를 통하여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2.5황진이는 시조창작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한시창작에도 조예가 깊어 적지 않은 작품들을 남겼다. 그이 시조가 주로 사랑과 이별의 정한을 노래하였다면 그의 한시는 그 폭이 넓어서 사랑 뿐만 아니라 보다 다채 로운 내용으로 되어있다. 말하자면 섬세 한가 하면 정열적이였고 상정 (伤情)이 있는가 하면 영사회고(咏史怀古)도 있었다.
朴淵瀑布 (박연폭포) <황진이>
一派長川噴壑롱 한 줄기 긴 물줄기가 바위에서 뿜어나와
龍湫百仞水潨潨 폭포수 백 길 넘어 물소리 우렁차다
飛泉倒瀉疑銀漢 나는 듯 거꾸로 솟아 은하수 같고
怒瀑橫垂宛白虹 성난 폭포 가로 드리우니 흰 무지개 완연하다
雹亂霆馳彌洞府 어지러운 물방울이 골짜기에 가득하니
珠舂玉碎徹晴空 구슬 방아에 부서진 옥 허공에 치솟는다
遊人莫道廬山勝 나그네여, 여산을 말하지 말라
須識天磨冠海東 천마산야말로 해동에서 으뜸인 것을.
이 한시에서는 황진이가 자신을 포함한 송도삼절의 하나로 꼽을 정도로 사랑한 박연폭포. 송도의 기생이었던 황진이는 물론 이곳을 자주 방문하여 풍류를 즐겼을 것이다.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유려한 표현은 박연의 장관을 짐작케 한다.
이 시에 굽이치는 기백을 보면 녀자의 정서에서 나온 작품이라고 믿기 힘들다. 황진이는 자기를 스스로 천한 기생으로 낮추지 않았다. 이 시에 묘사된 박연폭포의 힘찬 울림, 장쾌한 기상 그리고 그것을 누리의 으뜸이 라고 한것은 한편 자신으 높은 뜻과 자긍심을 말해주기도 한다. 그만큼 황진이의 한시는 기녀문학의 한계를 넘어선 문학이라 칭해도 과찬은 아닐 것이다.
3. 결론
황진이는 서민 시조의 선구자이며 탁월한 녀류 시인이다. 상기한 시조 들에서 보다 싶이 은일적이며, 도학적인 시가들이 불려지고 있을 때, 황진 이는 은일적, 도하적 경향들과는 달리 생활에 발을 붙이고 남년간의 애정 과 인정 세태를 사실적으로 노래하는 우수한 예술 작품을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조국 산천의 아름다움도 노래하는 작품을 내놓아 16세기 국문 시가를 빛나게 하였는바, 녀류 시인 황진이는 시정인들의 시가가 새로운 서정적인 세계를 열어 주어 인민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게 된 것은 주목할 사실이다. 그 한가지 사실로 황진이의 임종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인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가 황진이의 무덤가에서 읊은 시로서도 더 증명되다.
평생 황진이를 못내 그리워하고 동경하던 임제는 마침 평안도사가 되어 가는 길에 송도에 들렀으나 황진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절망 한 그는 그길로 술과 잔을 들고 무덤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다음의 시조를 지어 황진이를 애도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조정의 벼슬아치로서 체통을 돌보지 않고 한낱 기생을 추모했다 하여 백호는 결국 파면을 당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임종을 맞게 된다.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내가 이같이 좁은 나라에 태어난 것이 한이로다" 하고 눈을 감았다 한다. 이렇듯 녀류시인이자 기녀 시조대가인 황진이는 한국문학사 에서 오늘도 굳게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감사의 말
논문완성과정에서 최균선교수님께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참고 문헌
1. 조광국,『기녀담 기녀등장소설 연구』, 서울: 도서출판 月印, 2000.
2. 조옥라,「가부장제에 관한 이론적 고찰」, 『한국여성학』제2집, 1986.
3. 황충기,『여항인과 기녀의 시조』, 국학자료원, 1999.
4. 황패강,『한국문학작가론』, 형설출판사, 1973.
5. 기녀 시조 연구,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2003, 정윤환.
6. 기녀 시조의 특성 연구, 단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2003, 김지현
7. 조선시대 여류시조 연구, 조선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2000, 장성호
8. 한국 여류 고시조 연구,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1999, 조상진
9. 옛시조 감상, 정신세계사, 1999, 김종오
10. 전경린,『황진이1,2』, 서울:이룸, 2004.
11. 김동하,「기녀시조의 특성 연구」, 영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2.
12. 김용숙,「한국 여류문학의 특질」, 『아세아여성연구』, 제14집, 1981.
13. 신은경,「기녀시조 연구」,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
14. 양진국,「기녀시조 연구」, 학위논문(석사): 국어국문학, 1999.
15. 임명숙,『기녀, 그는 "창녀" 인가 "성녀" 인가』, 서울 : 업그레이드 미디어,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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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 ]
1 작성자 : 반항
날자:2013-01-24 15:45:03
백호의 한탄처럼 "내가 이같이 좁은 나라에 태어난 것이 한이로다"
활달하고 호방하며 협객의 풍을 지녀 굴복하지 않으며
시서화에 능한 다재다능한 조선시대 걸출한 여장부 대시인 황진이의 문학을
기녀문학에 귀속시킴에 안타까움을 금할수 없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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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달하고 호방하며 협객의 풍을 지녀 굴복하지 않으며
시서화에 능한 다재다능한 조선시대 걸출한 여장부 대시인 황진이의 문학을
기녀문학에 귀속시킴에 안타까움을 금할수 없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