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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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자아의식
2014년 07월 30일 17시 17분  조회:5484  추천:3  작성자: 최균선
 ■ 평론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자아의식
                                                                                                                               

  철학으로 통하는 수학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아니, 우리 인생에도 공통분모는 얼 마든지 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인생과 똑같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끼리 공통분모를 이루고 있는 까닭은 인생도 역시 철학으로 통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처럼 예술 세계의 한 분야인 문학, 특히 시의 영역에서 공통분모와 같은 구실을 하는 작품을 만나는 일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더욱 진한 감동으로 번져주고 있기 때문에 매우 반가운 일이기도 하다.
 
  인간이 사는 곳이면 언제 어디에나 자아의식이 있게 마련이다. 자아의식은 인생을 더욱 의미 있게 하는 인간 실재의 공통분모이기 때문이다. 작품, 특히 문학작품을 연구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작품에 나타난 자아를 발견하는 일이다. 나의 존재가 선명할 때 비로소 모든 존재의 확립도 가능해진다. 따라서 자아의식의 발전은 삶과 인격의 발전이며 우리가 접하는 작품의 발전도 자아의식에서부터 비롯된다.
 
  자아의식은 여러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는 막연히 자기(自己)라는 느낌을 주기도 하고, 어떤 자극에 대하여 반응을 한다거나 또는 타인이 자기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반응해 줄 때, 즉 타아(他我)와의 관계에서 자아를 의식하는 경우, 국가나 사회 등의 관계를 초월하여 종교적 세계와의 관계에서 자아를 의식하는 경우, 또는 이와 같은 외적(外的)인 모든 관계를 끊고, 순수하게 안에서 볼 수 있는 반성의식에서만 자아를 의식하는 경우 등,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과연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자아의식은 어떤 모습, 어떤 빛깔로 배어들어 자리 매김을 하고 있을까?
 
향수에 배어 있는 자아의식
 
넓은 벌 동쪽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워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 성긴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 「향수」의 전문
 
돌아가야 한다
해마다 나고 죽은 풀잎들이
잔잔하게 깔아놓은 낱낱의 말을 들으러
피가 도는 짐승이듯
눈물 글썽이며 나를 맞아 줄
산이며 들이며 옛날의 초가집이며
붉게 타오르다가는 잿빛으로 식어 가는
저녁놀의 울음 섞인 말을 들으러
지금은 떨어져 땅에 묻히었으나
구름을 새어나오는 달빛에 몸을 가리고
어스름 때의 신작로를 따라나오던
사랑하는 여자의 가졌던 말을
끝내 홀로 가지고 간 말을 들으러
그러면 나이 먹지 않은 나의 마을은
옛 모습 그대로 나를 받으며 
커단 손바닥으로 얼굴을 닦아주고
잊었던 말들을 모두 찾아 줄
슬픔의 땅, 나의 리야잔으로
 
         - 이근배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의 전문
 
  정지용의 「향수」는 타향을 떠도는 자의 가슴에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의 설의적 감탄이 짙은 향수로 배어 있다. 〈잊을 수 없는 고향〉을 5연이나 차지하고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를 반복하여 외치고 있다. 이 외침은 연설이나 웅변에서 들을 수 있는 크고 웅장한 소리가 아니라, 어쩌면 심 봉사가 심청을 인당수로 떠나보내며 신음하는 듯한 그런 몸부림일 것이다. 여기서 시인은 뜨거운 눈물줄기가 주르르 흐르는 얼굴로 실성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만큼 그리움은 참을 수 없는 아픔을 동반한다.
 
  이 시에 담긴 정경이 하나도 낯설지 않다. 그대로 우리의 품이며 정경이고 토속인 바로 우리네의 고향이다. 평화롭고 아늑한 고향이지만 "밤바람 소리", "함부로 쏜 화살", "밤물결 같은…사철 발벗은 아내",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등에서 왠지 불안하고 음산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이것은 이 시인이 처해있는 시대적 환경의 알레고리적 묘사가 아닐까 싶다. 평화롭고 아늑한 우리의 고향이 일제의 학정과 물려받은 가난에 휩싸여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 이 시인에겐 "흙에서 자란 내 마음/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지고 있다. 그 넓은 하늘 빛이 그립다니, 얼마나 억눌리고 고립된 삶이었는가 짐작이 간다. 그러므로 무작정 못 잊는 그리움만 읊은 시가 아니라, 정작 그리운 것은 고향이 찾아 누려야 할 참 평화일 것이다. 이는 정경이 그립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데 있다. 나라 잃은 설움에 아파하면서 신음하고 있는 당시의 민족정서를 우리들 귀에 들려주고 있는 시인의 울음이라면 잘못된 표현일까? 이런 점은 그가 모더니즘의 분위기를 짙게 연출하고 있는 향수의 품에 자리한 자아의식의 일면일 것이다. 
 
  자신의 고향을 "리야잔"으로 암시적 표현을 한 이근배의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는 자신의 자아의식을 고향과의 반응에서 오는 그리운 사연들을 소망으로 하여 감정 방출을 하고 있다.
 
  역시 잊지 못할 고향을 그리며 "돌아가야 한다…나의 리야잔으로"를 외치고 있지만, 구체적인 욕구는 "…낱낱의 말을 들으러/…울음 섞인 말을 들으러/…여자의 가졌던 말을/끝내 가지고 간 말을 들으러/…잊었던 말들을"에서 보이듯이 "슬픔의 땅, 나의 리야잔으로" 향한 마음을 '향수'로만 끝내는 것이 아니라 향수를 통한 자기 삶의 말을 들음으로써 오히려 찬란한 슬픔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자아의식의 미적 가치에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하겠다.
 
  정지용의 「향수」와 이근배의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는 고향 그리움에 공통점을 이루고 있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형식에서부터 다르게 나타나 있다. 같은 현대시이면서 자유시(내재율)에 해당하지만 전자는 10연 26행으로, 후자는 전연 18행으로 짙은 시정을 읊고 있다. 연을 나누지 않은 후자는 연을 나눈 전자에 비해 호흡이 매우 급하다. 전자를 느릿느릿 걷는 소걸음이라면 후자는 깡충깡충 뛰는 토끼뜀이다. 돌아가야 할 길이 그만큼 급한 느낌을 준다. 시의 형식이 주는 느낌만도 이렇게 다르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서정적인 면을 그린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그 주제와 소재가 다른데 있을 뿐 아니라 그 추구하는 목표가 같을 리 없다. 전자는 영원히 잊지 못할 고향의 정경을 표면적인 주제로 하고 있지만, 내면적 욕구는 진정한 삶의 추구를 위한 평화와 자유를 갈구하고 있는 자아의식의 발현으로 보아야 하겠다. 후자를 자아의식의 미적 구현을 위한 강렬한 울부짖음으로 본다면, 이런 점에서 두 작품은 향수라는 공통점 외에 서로 자아의식을 달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아의식의 한계성
 
노래가 낫기는 그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버렸다.
활로 잡은 山돼지, 매로 잡은 山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 서정주「꽃밭의 독백」의 전문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놨더니
동지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서정주「동천」의 전문
 
  「꽃밭의 독백」은 婆蘇斷章을 전제로 하고 있다. 파소는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로서 처녀로 잉태하여, 산으로 신선수행을 간 일이 있었다는데, 이 글은 그 떠나기 전 그의 집 꽃밭에서의 독백이라고 미당은 밝히고 있다.
  어쨌거나 전연 14행으로 짜여진 현대 자유 서정시이다. 이미지의 구성은 자연스럽게 1-6행, 7-11행, 12-14행으로 기, 서, 결의 3등분으로 나누인다. 기에 해당하는 부분에서는 자아의식의 유한성을 노래하고 있다.
 
  즉, '노래'가 구름까지 가기는 갔지마는 더는 가지 못하고 한계에 부딪혀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활로 잡았든 매로 잡았든 산돼지나 산새들에도 입맛을 잃었으니, 모든 면의 한계성에 갇혀 있는 실존을 복합감각에 실어서 반복적으로 호소·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서에 해당하는 부분에서는 한계에 갇힌 자아를 직유법을 동원하여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이다.
 
  한계를 벗어나고 싶은 소망은 간절하지만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한  발작도 갈 수 없는 자신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결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이와 같이 한계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방법('벼락과 해일만이 길일지라도')으로라도 출구를 찾아 나서겠다는 강한 결심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아실현의 한계에 부딪힌 자신의 간절한 고백이 나타나 있음을 본다. '물낯바닥'은 수면(水面)을 바꾸어 표현한 말로, 미당이 처음으로 사용한 신조어(新造語)이다.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의 직유를 보아도 자아의식의 한계에 갇혀 있음이 분명하다. 헤엄을 쳐야 갈 데로 갈 수 있지 않겠는가.
 
  반면에「동천」에 나타난 자아의식의 한계는「꽃밭의 독백」과는 사뭇 다르다. 한계에 부딪히거나 갇혀있지 않고 오히려 자유롭기 그지없다. 무한한 가치에의 경외심을 자신의 자아 속에 내포하고 있는 "우리 님의 고운 눈썹"에 이입시키고 있음을 본다. "동지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의 행위에서 오는 반응을 통해 자아존재의 무한한 가치부여를 돋보이고 있으므로 자아실현의 가능성을 넉넉히 내비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매서운 새가 눈썹을 비끼어 가는 행위는 눈썹을 밟고 간다는 의미와는 절대 상반되는 것으로써 눈썹에 무한한 존재가치를 인정하면서 오히려 외경심까지 가지고 비끼어(피해) 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한국 현대시에서 이만큼 자아의식의 존재를 고무시킨 작품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자아의식의 내면적 승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서시」의 전문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滿) 이십 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 윤동주「참회록」의 전문
 
  「서시」에는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괴로워하면서도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나한테 주어진 길, 즉 고난과 역경의 길을 가겠다는 자아의식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자신의 자아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에서 찾을 일이다. 과거에서 미래로, 그리고 다시 현재로 돌아와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고 현실인식을 확실하게 다듬고 있다. 여기에 자아의식이 내면으로 더욱 분명하게 앉혀지고 있음을 본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은 일찍이 맹자(孟子)의 진심편(盡心篇)에 나타난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 중 二樂에 속한다.
 
  1연에서 깊은 시정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의 3, 4행이다. 사실 '잎새에 이는 바람' 정도라면 괴로워 할 대상으로까지 여겨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이토록 섬세한 감정의 승화로 우리를 울리고 자신도 울고 있다. 여기에 나타난 자아의식이야말로 참으로 처절하다 아니할 수 없다. 이 시가 쓰여질 당시의 우리 민족의 자아의식의 표본이랄 수도 있다.
 
  「참회록」에는 망국의 부끄러움으로 뒤덮인 역사 속에 유물로 욕되게  남아있는 자아의식이 뚜렷하다. 이 부끄러운 고백을 후회하면서 자아를 자아다운 자아로 구현하기 위해 '구리거울 속에 낀 녹을 밤이면 밤마다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고, 그러면 역사의 떳떳한 십자가를 지고 갈 홀로의 자아가 구현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이렇게 분명한 자아구현이 내면에 자리하므로 내적 자신의 모습 발견에 성공하고 있음을 본다. 여기서 자아구현은 조국광복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즉, 개인적 욕구와 공동체의 욕구가 병행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결국 우리 민족 전체의 자아가 시인 자신에게 집약적으로 내면화되어 있다.
 
자아의식의 신앙적 승화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의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 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 자리 앉아,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 박두진「해」의 전문

百 千萬 億겁
찬란한 햇살이 어깨에 내립니다.
 
자꾸 더 나의 위에
壓倒하여 주십시오.
 
이리도 새도 없고,
나무도 꽃도 없고,
쨍쨍, 永劫을 볕만 쬐는 나 혼자의 曠野에
온 몸을 벌거벗고
바위처럼 꿇어,
 
귀, 눈, 살, 터럭,
온 心魂, 全 靈이
너무도 뜨겁게 당신에게 닳습니다.
너무도 당신은 가까이 오십니다.
눈물이 더욱 더 맑게 하여 주십시오.
땀방울이 더욱 더 진하게 해 주십시오.
핏방울이 더욱 더 곱게 하여 주십시오.
타오르는 목을 축여 물을 주시고,
 
피 흘린 傷處마다 만져 주시고,
기진한 숨을 다시
불어 넣어 주시는,
 
당신은 나의 힘.
당신은 나의 主.
당신은 나의 生命.
당신은 나의 모두….
 
스스로 버리려는
벌레 같은 이,
나 하나 끓는 것을 아셨습니까.
 
또약볕에 氣盡한
나 홀로의 핏덩이를 보셨습니까.
 
                              - 박두진「오도」의 전문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머얼리서 온다.
 
하늘은, 머얼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 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며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따가운 볕,
초가을 햇볕으로
목을 씻고,
 
나는 하늘을 마신다. 자꾸 목말라 마신다.
마시는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
 
                                                   - 박두진「하늘」의 전문
 
 「해」에는 해가 솟기를 기다림, 달밤을 싫어함, 청산을 좋아함, 앳되고 고운 날을 누려보고 싶은 자아가 절절이 노래되어 있다. 이것은 한 마디로 광복에의 염원일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기독교의 은혜의 세계에 대한 애타는 갈구이다. 기독교적이라면 그리스도적이요, 메시야적이다. 어둠 속에 억눌린 자의 확실한 해방에의 염원이다. 그러므로 해는 메시야적 절대적 대상이요, 모든 생명체들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진리임이 분명하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으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11:6-8).
 
  이는 복음의 예언자로 불려지는 이사야의 예언이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이미 인간 성품의 영역에서 이와 같은 유(類)의 변화를 불러 일으켰으며, 궁극적으로는 전 피조물을 변화시키게 된다(롬18:10 이하). 특히 여기 표현된 사실들은 평강의 왕 메시야가 통치하게 될 왕국의 평화로운 모습을 나타낸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에도 우리 마음속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면 즉, 해가 솟아오르면 이런 평화를 맛볼 수 있다.
 
  서정적 산문시로 개념어나 추상어의 다양한 구사를 하지 않으면서도, 의성어 의태어 활유법 명령법 반복법 종결어미 사용 등을 통하여 자신이 소망하는 자아실현을 신앙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오도」에서 볕만 쬐는 나 홀로의 광야(曠野)에 핏덩이로 주님을 향해 꿇어 있는 구도자의 모습(자아)을 본다. 귀, 눈, 살, 터럭, 온 심혼(心魂) 전 영(全靈)이 주님에게 닳는 지극히 간절한 자아,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과 죄 많은 인간이 만나는 장면의 회화적 감각이 반복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땀어린 기도의 모습도 떠오른다. 오직 주님을 향해 있는 인생의 모습이라는 간단한 시상을 바탕으로 이와 같이 절절한 믿음의 읊음을 통해 만백성의 공통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박 시인은 이 시에서와 같이 절실한 믿음으로 주님을 사모하며 살아온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제목「午禱」는 기도 중에서도 가장 열심 있는 기도(강청기도)를 의미하기 위한 박 시인 나름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하늘」은 나(자아)의 신앙적 승화로 하늘 즉, 주님과의 주객일체를 이룬다. 이것이야말로 자아의 승리인 동시에 곧 믿음의 승리이다. 믿음은 너와 내가 하나가 될 때 나타나는 신앙적 신비이다. 즉, 1+1=2이므로 완전한 것이 못된다. 주(1)와 객(1)이 일체가 되는 비결은 1+1로는 될 수가 없다. 1×1=1이 되는 비결을 이루어야 한다. 「하늘」은 이런 이치로 신앙적 자아실현에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내가 네 안에 네가 내 안에' 거(존재)해야 한다는 말씀과 같이, 하늘과 내가 하나가 되는 데 초점이 있다. 이에 쓰인 점층적 수법은 매우 적절한 강조법이다. 내가 하늘을 향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게로 온다" 시공을 초월한 곳에 계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를 찾아 오셨으니 말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은혜이다. 그러므로 절대자를 만나는 인생은 자아실현의 승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상으로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자아의식을 살펴보았다. 향수에 배어있는 자아의식, 자아의식의 한계성, 내면적 자아의식, 자아의식의 신앙적 승화 등, 여기서 취급한 작품만이 아니라 자아의식의 정서적 승화는 다른 시작품들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자아의식은 결국 구원의식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인간의 구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은총과 우리의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징검다리처럼 인간을 구원의 길목으로 안내할 수 있는 것이 문학이라면 문학은 구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확실한 이정표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공헌하는 것 중에 자아의식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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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7 (잡문) 작가의 량지 2018-09-20 0 3949
806 ( 잡문) 작가정신을 기리다 2018-09-20 0 4181
805 ( 칼럼) 왜 기어이 “북한”이고 “주민”이 되냐? 2018-09-20 0 3651
804 (잡감) 숙명인가? 비애로다 2018-09-14 0 3555
803 (잡문) 엉터리들을 엉터리로 론함 2018-09-03 0 4310
802 자기 부정이 기꺼운 일인가? 2018-08-24 0 4597
801 딱해진 우리네 문학 2018-08-18 0 3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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