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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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언수상록 (22) 하느님과 착한 사람
2014년 12월 14일 08시 06분  조회:5641  추천:0  작성자: 최균선
                                하느님과 착한 사람
 
                                        진 언
 
   신도들은 신앙을 착한 사람으로 되여지려는 륜리적법보로 간주한다. 하다면 신앙을 갖는것과 착한 사람이 되는것은 어떤 인과적인 련관성이 있을가? 신앙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은혜와 적덕으로 소통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는가? 하느님을 믿는 길만이 착한 사람이 되는 길인가? 하느님을 믿으면 극악한 자도 스스로 착해지는가?
   한손에 성경을 들고 한손에 피비린 첨단무기를 휘두르며 세계도처에서 남의 나라 가원을 페허로 만들고 야만적인 인간학대에서 쾌감을 느끼는 인두껍을 쓴 무리들이 악행을 자행하도로 종용한 자는 천벌도 받지 않으니 그리스도께서도 인간의 선행의 길은 모르는것인가? 알면서도 모르는체 하는것인가?
   요지경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사이비함을 너무 많이 느낀다. 사람들의 아름다운 념원에도 불구하고 인류사회는 악으로 도배질되고있다. 거짓이 진짜로 착각될 정도여서 혼탁하고 병든 인간세계에 구세주는 없다는것을 절감하게 된다. 따라서 신도는 아니면서도 막연한 마음으로 착한 사람과 하느님을 련결시켜 본다.
   성경전서에서 설교하는 교리에는 인간의 노력이 전제로 되고있는것 같다. 해석에 따르면 하느님은 다만 가르침과 계명의 역할을 할뿐 인간의 삶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며(않는것이 아니라 못하는것이겠지) 나머지는 인간 자신에 맡긴다는데 참으로 알뚱말뚱이다. 결국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것은 은총을 입고 천국에 가는 복을 누리려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에 달린것이라 설교하니 신빙성을 회의하게 된다.
   철학자 칸트는 “산의 력사는 하느님의 걸작이고 악의 력사는 인간의 작품이다. 에덴동산도 이원적세계”라고 말한다. 확실히 지혜와 생명의 금과도 있거니와 사악과 음흉의 상징인 뱀도 있었다. 하느님이 악의 왕국인 싸탄을 소멸하였더면 이 세상이 천국이 되였을가? 세계발전의 동력은 선악의 투쟁으로서 발전도 무지경이고 선악간이 투쟁도 무지경이라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선이 악을 이긴다고 설교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덕과 신앙, 착한사람과 신도는 그 기준점이 다른것같다. 착하게 살려는 사람은 나름대로 삶의 좌우명을 인간적인 선의와 량심에 두지만 신도 들은 하느님의 뜻을 마음에 새김으로써 천국에 올라가는 “은총”에 매달리기때문이다. 선량한 인간으로 살고저하는 사람들은 무엇이 선의이고 선행인지 확신하기에 그렇게 행하려 하지만 교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에서 선을 판단하는 기준을 찾는것같다.
    하느님은 인간의 선악을 분별하는 기준이 있는가? 하느님의 선이나 자비로움은 인간적판단의 대상이 아니므로 믿기어려운것이 아닐가? 승냥이는 하느님이 다시 빚는 다해도 면양이 될수 없을게다. 그러므로 착한 인간이기를 추구하는 사람은 신앙심이 돈독한 사람이여서가 아니라 천성적으로 어진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것은 락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것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다. 작은 부자는 근면과 성실로 가능하지만 큰부자는 세상이 만든다고 한다. 뜻인즉 하나의 큰부자가 되여지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의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것으로서 부자 그 자체가 큰죄를 짓는것이므로 천국에 갈수 없다는것이라고 해석한다.
   론리로 말하면 부자가 천국에 갈수 없으면 천국에 갈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하느님을 믿고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중에는 천국에 갈수 있는 제일 유력한 후보자들인 가난한 사람들만이 있는게 아니라 작은 부자 큰부자들도 부지기수이다. 성경을 하느님의 유지로 믿는 사람들이 죽어 변성명해도 “천국에 가기어렵다 ”는 말을 믿지 않는것인가? 알면서도 막연한 기대심으로 매일같이 무릎이 닳도록 기도하고 참회를 표방하는것인가?
   때때로 세상에 착한 사람들이 더많을가? 악한 인간들이 더많을가? 하는 우문을 던져본다. 그래도 비례적으로 선량한 사람들이 더 많기에 지구촌이 아수라장이 되지 않고 둥굴게 생긴대로 돌아가는게라고 스스로 “현답”을 하지만 소수의 악한 인간들이 저지르는 죄악에 만천하에 떨고있으니 현답이란 없다고 결론을 짓게 된다.
   선속에도 악이 있고 악속에도 선이 있다. 그것이 선하다는것은 그 속에 이미 악이 포함되였기때문이다. 물질리익이 일체를 결정한다. 사람은 공리적이 아닌 사람이 없다, 리해득실로 옥신각신하는 현세에 절대적으로 착한 사람은 태여나지 않았다. 혹시 태여나고싶지 않는지도 모르지만 그 모든 선심과 선행은 쓸데없어졌다.
   현대시대는 극단적리기주의 시대이다. 그래서 더욱《령성(灵性)ㅡ신령한 품성, 성질)》의 회귀가 요청된다. 이는 종교적관념을 벗어나서 전사회적인 추구로 되여야 함을 말한다. 전하는데 의하면 인디안인의 한 부락에서는 지금도 일종 관습이 류전되고있는데 무릇 일이 있어 외출할 때 몇걸음 걷다가는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데 령혼이 걸음을 따라오지 못할가봐 단속하기 위해서란다.
   눈을 흐리는 외재적사물에 욕망을 불태우지 말고 사람마다 내적발전ㅡ정신의 정화(정신문명건설)를 추구하자는 념원인것이다. 하느님을 믿느냐 마느냐하는 문제로서만이 아니라 참된것을 고양하고 거짓된것을 박멸하고 착한것을 신장시키고 악한것을 짓뭉개버리려는 령적인 인간촌(조화세계?)건설을 갈구하는것이다. 하다면 어떤 길이 착한 사람으로 될수 있는 길인가?
   하느님을 믿지 않아도 착한 사람이 되는 길이 있다. 바로 사람마다 량심의 약속하에 도덕을 지키는 사람이 되는 길이며 사심없이 베풀어주며 적덕하는 사람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남의것마저 빼앗고 가로채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고 착하게 사는 길이 다. 인생의 자세를 다잡는 량심에만 매달려도 자률하게 된다. 량심의 변화는 생명의 자률이고 생명의 자률은 욕망의 자률을 감독할수 있다.
   한 사람의 량심에서 도덕의 분수가 솟구쳐 올라온다면 봄비처럼 그 자신의 몸은 촉촉이 젖어있을것이요 그 분수에 가까이 다가서는 사람도 물보라에 젖을것이고 멀리하며 비웃는 사람은 여전히 악의 상태에서 인생을 영위할것이다. 가령 사람들이 마음을 비울수 있다면 순수의식만 남을것이다. 그러면 욕망도 괴로움도 미움같은것도 없게 된다. 그것이 본성이지만 명상가가 아니면 이러한 상황을 그려볼수도 없다.
   물론 착했던 사람도 경우에 따라 악심을 가지게 되고 사욕에 량심을 묻어버리고 악한으로 전락되기도 한다. 착한 사람들도 리득으로 모이고 갈등으로 헤여지는 중생들이나 량심에 물어 조금도 부끄러울것 없는 인생을 살수는 없다.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다가 기탄없는 비리에 실망하고 체념한다. 매사에 자률적자아로부터 출발하여 량심과 도덕의 약속을 따르면 손해와 실망뿐이니 자연적자아가 자주 분노하게 된다.
   착한 사람들도 자신의 불평불만을 남에게도 전염시켜야 하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선악이 얽혀도는 이 인생마당에서 소신대로 살고 제명에 죽으려면 착한 사람이 되는것만으로는 택도 없다는것만은 절실히 느끼고있다. 신앙과 관계없이 착한 사람이 더 많은 세상이지만 요상한 인간들이 하도 횡행하여서 갈수록 살기가 힘들어진다.
   신도는 아니지만 창망한 하늘을 우러러 묻고싶다. 신이 계시여서 성스럽게 인간을 창조하고 사랑을 주었다면 어이 또 악을 만들었는가? 전세계적인 최대흉악범들을 가득가득 만들어내여 선량한 자들에게 불행과 고통과 죽음을 주는가? 물어도 물어봐 도 우자의 우문이여서인지 아직까지 현답을 듣지 못하고 세월만 늙고 텅빈 하늘에 쪼각구름만 갈곳 몰라하는듯 바람에 오락가락할뿐이다.

                                      2012년 1월 20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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