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ㅡ 시적대화의 특질을 다음같은 다섯가지로 개괄하고있다.
첫째, 느낌을 론리적언어로 설명할수 없기에 시에서 비유적어법으로 표술하거나 동화(同化) 또는 투사(投射)적인 어법을 택하는것이다. 둘째로, 이런 어법때문에 사물과 언어의 관계는 외연적이라기보다 내포적으로 쓰이는게 특질이다. 셋째로, 유기적이고 구조적이고 함축적이라는것이다. 넷째로, 간결한 양식을 취한다. 왜냐하면 시란 순간적정서의 발로라는데서 규정되기때문이다. 마지막 특질이지만 시가 시로서의 매력을 가지게 하는 음악성이다. 춤추는 글인 시의 음악성이 시의 매력이다.
서정시에 해당하는 리릭(Lyric) 이란 용어는 원래 리레(Lyre)라는 악기에서 온것으로서 노래로 불려지기 위한 쟝르임을 의미한다고 정의하고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그 특성이 유전되여 산문화된 현대시도 음악적인 성격을 띠도록 류의하게 된것이다. 아래에 박목월의 시 “산도화”에서 우리 말 시의 음악성ㅡ운률미를 흔상해보자
산은 구강산(九江山)
보라빛 석산(石山)
산도화(山桃花)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玉)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이 시는 전통적인 수법으로 기승전결의 형식에 맞추어 2행씩 4련으로 구성하였는데 각 련을 3보격으로 짜놓았을뿐만아니라 각 련마다 음악적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알심들여 특수한 음운들을 선택하고 있음이 감미롭게 느껴진다.
첫련의 경우, “산은/구강산//보라빛/석산” 인 각 음보의 의미상 초점은 “산(A)-산 (A)-빛갈(B)-산(A) ”이며 이들의 종성은 진동성이 큰 유성자음과 진동이 일어나지 않는 무성자음을 교차적으로 조직하여 유성(A) -(A)-무성(B) –유성(A)식으로 배렬하여 운률미를 고도로 살리고있다. 뿐만아니라 전개에 해당하는 셋째련을 제외하고는 밝고 작은 양성모음을 택하여 나무잎이나 풀잎들이 가볍게 소근대는듯한 인상을 주면서 산, 구강산, 석산, 산도화, 송이, 사슴,씻는다 등 단어들을 간헐적으로 제시하여 봄날의 산속풍경같은 뉴앙스를 형성하도록 유도하고 있어서 더없이 감칠맛을 돋군다.
줄글에서 이와같이 단락이나 문장의 길이를 비슷하게 나누는 관례는 드물다. 그리고 시에서라도 이처럼 음운을 고려하여 조직하는 례는 김소월, 박목월, 한용운 등 지난세기 우리 민족의 훌륭한 시인들의 붓끝에서만 찾아볼수 있다. 이는 독자들의 읽기, 시간을 고려하고 정서적색채를 한껏 느끼도록 하기 위한 창조적작업이였다.
하지만 현대시로 접어들면서 이런 리듬적속성은 점점 배제되여 산문화적쩨마와 문체가 류행되고있다. 이와같은 형식미의 변화는 과연 현대독자들의 감각이 리듬이 지니고있는 주술적, 자동적속성을 은연중 거부하고있기때문인가? 현대독자들이 시인이 제시하는대로 시형식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각성의 상태에서 자기 나름대로 시를 자률적으로 수용하여 재조합하려는 경향때문인가? 그래서인지 현대파시는 쩨마만 서정적이면 형식이나 기법에서는 산문과 다를배 없는것을 흔히 볼수 있다.
쉘리의 주장처럼 시인은 비록 비리성적인 상상력에 의지한다고 해도 그 상상력을 통하여 일상세계의 뒤면에 숨어있는 절대관념의 세계와 직접 접촉할수 있다는 가능성과 사색과정을 제공하여야 바람직하다. 쉘리는 시란 영원한 진리로 표현된 인생의 이미지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플라톤이 중시했던 리얼리트를 의미하였다.
한편 쉬끌로브스끼, 야꼽슨 등 형식주의자들도 시적언어란 일상어에“조직적폭력”을 가한 특수한 언어라고 주장하면서도 소리의 층차, 모음조화, 자음다발(多发), 압운, 운률, 률격 등을 외면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류의할 필요가 있다. 시에서 매력적인 시적기능은 파생적언어조합이다. 그만큼 서정적자아의 개방이라해도 지시적이고 설명적인 언어는 독자에게 미감을 주지 못한다고 단언해도 어페가 없을것이다.
언어는 의미와 음성을 자의적으로 결합시킨 기호이다. 사물의 구체적모습과 의미를 제거해버리고 추상화하여 음성기호로 바꾼게 주지시의 언어이다. 음운의 의미나 사물의 모습을 환원시킴에서 음운과 의미의 관계는 반드시 일치한것은 아니지만 어느정도 상관관계가 있다. 여기서 시의 운률미의 존재리유가 서는것이다. 양성모음은 밝고 명랑하고 깜찍한 느낌을 주며 음성모음은 어둡고 거칠며 큰 느낌을 준다는 우리 말의 특성을 무시하는것은 모든 시의 특성상에서 불가하다는 설명이 된다.
주정시이든 주지시이든간에 시작품은 “음소→음절→단어→문장→단락”의 층차로 짜여진 의미와 감각적구조물이라 말하고있다. 하여 시에서 내포적어법은 주체와 객체가 상호침투하면서 문맥적의미가 형성되도록 표현해야 한다. 현대파관점에서는 결국 “친숙함”과 “낯설음”의 대비와 차이에서 내포성이 증가된다고 여긴다. 즉 사물성을 상실한 현대언어를 가지고 시인들이 지향하는 새로운 경지에 이르려고 낱말들의 질감과 배경을 왕창 비틀고 감추면서 이미지를 낯설게 하려고 애쓴다.
례컨대 “길”을 “도로”라고 하면 낯선것은 아니지만 조금 달라보일수 있다. 길이란 아득한 옛날에 만들어진 자연적개념이고 “도로-고속도로” 와같이 현대적개념이기에 인공적이라는 현대문명의 냄새를 풍기는 경우와 같다. 이처럼 현대시에서 창조된 이미지는 구체적사물에서 얻어지는 직접적인 표상이 아니라 언어라는 간접적자극을 통하여 얻어지는 감각현상이다. 그리고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재현되고 일정한 지향성을 표백하면서 단순한 감각차원에 머무는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물과 감각을 창조하려는데 몰입하고있다. 이점에서 현대시의 장점이 긍정적이 된다.
하지만 독자의 시각에서는 사정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언어적인 표상에 대한 리해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독자는 시인이 제시한 언어(시)를 통해 사물의 모습을 떠올리고 인생의 또 다른 정경을 흔상하면서 시인이 의도화하는 관념이나 정서에 도달해야 하는데 시인이 사용한 언어의 의미가 독자리해와 융화되지 못하고 그저 추상적인 언어의 퇴적으로 된다면 그 시는 원초적으로 가치성을 상실하게 된다.
언어와 시인의 심상, 또는 사물간의 단절이나 불균형문제는 랑만주의 시에서는 문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시를 선호하면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의 보편성도 부정하고 특정한 순간의 특정한 모습에 안주하게 되였다. 될수록이면 생경한것을 추구하다보니 자신에게조차 낯선것들을 설명적인 방법으로 전달할 의무는 아예 버린것이다. 환언한다면 시인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제시하는 의미를 깨득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제시적인 언어를 포기하고 언어로 모호한 그림을 그리려 한다.
옛날 랑만주의시인들은 시예술이란 이미지를 창조하여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양식이며 추상적이거나 초월적인것을 구체적으로 바꾸는 기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과학자가 발견한 낯선세계를 누구나 다 알수 있는 세계로 바꾼게 시라는 워즈워즈의 주장이나 “이미지가 없이는 예술은 없다”고 이미지절대론을 주장한 로씨야의 뽀떼브나 이미지는 아무리 알기 힘든 대상도 순간적으로 선명하게 파악할수 있도록 두뇌작용을 절약하게 만든다는 스펜서의 견해들은 아주 교훈적이다.
시란 정서 또는 정서작용을 통하여 떠오른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런데 상상력은 주관적이고 가변적이고 심리적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바르게 전달하려면 가시성을 완전해 배제할수 없다. 아래의 시를 음미해보자.
할일도 없이 물끄러미 앉아서
읽다버린 노자(老子)를 다시 읽는다.
연(정-필자)직이위기 당기무 유기지용(挺直以为器,当其无,有器之用)
흙을 이겨 항아리를 만들지만
항아리의 쓰임새는 텅 빈 곳에 있다
텅 빈 곳에 있다
빈 곳에 있다
곳에 있다
에 있다
있다
다 (중략)
앙금같이 갈앉은 토요일 창밖엔 무거운 먹구름이 차일을 치고
한 라유체와 백 두철쭉이 혼례를 치루는 강의실 벽을 향해
철벽을 향해
페경기의 노자(老子)가 물끄러미 앉아 있다
다
있다
아 있다
앉아 있다
미 앉아 있다
러미 앉아 있다
끄러미 앉아 있다
물끄러미 앉아 있다.
여기서 시인이 이야기 하려는것은 단지 대학가의 상황만이 아니다. 흙을 이겨 항아리를 만들지만 그 쓰임새는 오히려 텅 빈곳에 있다는 존재론적역설 역시 화자가 이야기하려는 화제가운데 하나일뿐이다. 그리고 이와같이 모호한 충동을 이미지를 통해 전달하려 한다. 여기서 이미지가 시인의 정서를 육화하는 기능을 지녔다고 볼수 있다. 그러면서 은유를 비롯하여 음절수를 줄이거나 증가하여 삼각형으로 배치한것은 기성세대의 가치관이 모두 무의미함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기 위한것이다.
이처럼 시를 감상함에서 독자가 자률적으로 해석권을 확대시키는 기능을 현대시에 담으려하지만 자칫 이미지를 등한시하는 관념시처럼 리해불능의 벽에 부딪혀 전전긍하게 할수 있다. 모더니즘은 언필칭 전통에 대한 반역, 파괴성인데 읊어서 정서가 출렁거리게 하는 시를 쓰려면 시적운률미를 등진 언어유희로는 실현불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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