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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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어긋난 연분
2017년 05월 16일 15시 50분  조회:4001  추천:0  작성자: 최균선
                  
                                                          어긋난 연분
 
                                                              최 균 선
 
                                                                  1
   
    참으로 세상은 넓고도 좁다하고 원쑤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옛말 그른데 없다. 그사람, 평생 마음속에서 지우지 못하고 이날 이때까지 살아오면서도 감히 만나볼 엄두도 못내였던 그 남자를 무도장에서 만날줄이야 꿈엔들 생각했으랴. 필연은 아닐테지만 우연치고는 너무나 기우라 할것이다.
    무도장에 늘 다니다보면 자연히 춤짝을 뭇고 차차 배짝도 되여 늘그막 로맨스로 열을 올리는게 관례이지만 그녀는 고독이 지겨워서 이 무도장 저무도장을 다니면서 요청하는 남자가 있으면 몇바퀴 돌며 소일할뿐 무슨 석양의 열련같은것에는 흥취가 없었다. 그런데 운명의 조화인지 새로 개업한 석양무도청에서 잊은듯 차마 잊혀지지 않고 가끔씩 꿈자리에도 나타나던 그 사람과 해후할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그동안 세월은 몇십굽이를 휘돌아 흘렀건만 첫눈에 들어온 그 영상이 대번에 녹쓸어버린 기억의 대문을 활짝열고 들어섰다. 농사일에 찌들리는 청년답지 않게 그냥 패기에 넘치던 근육질의 남자, 훤칠한 체구에 어깨가 유달리 넓은 청년이였다. 비록 한창때처럼 숱이 많지 않았지만 굽실굽실한 반양머리의 흔적이 력력한데다 리지적인 너부죽한 이마아래 정나미돌던 그윽한 눈빛은 별로 색바래지 않았고 날선코마루와 거의 녀성적이여서 좀 이색적이던 입모양도 별로 변한게 없었다. 
    지금와서 말하기는 격에 맞지 않지만 분명 혹해버렸던 첫사랑이였다. 오래까지 사랑하지 못한자가 스스로 부끄러울뿐이라는 자기위안을 다림질할수록 이왕지사가 피 려지며 잠을 쫓아냈다. 그는 어떤 마음일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가? 자꾸 발을 헛디디며 남자의 얼굴을 훔쳐보는 자신이 민망했지만 팔리는 눈길을 거둘수 없었다.
    한번도 녀자의 정에 젖어들어보지 못했다던 남자의 마음에 상처인들 오죽했으랴. 먼저 사랑하고 더 오래 사랑하는것은 죄될것이 없을진대 나는 죄인이 아닌가? 그녀는 지금의 자기 감각과 마음을 자신이 장악한 단어로는 도저히 표현할길 없었다. 결코 늙어서만도 아니였다. 어쩌면 인류의 언어로는 형용할수 없을지도 모른다.
   스스로도 참괴한 일이지만 거의 반세기 세월이 흘러갔어도 잊어버릴수 없었다. 망각해버리기엔 기억에 너무나 깊숙이 새겨졌고 평생 갚을수 없는 빚으로 남아있기 때문이였다. 숱한 빚은 갚을 날이 있어도 자신이 진 감정의 빚은 갚을수 없기때에 기억의 홈타기를 자괴감으로 채우면 가장 절절한 후회가 되는걸가? 워낙 잘 그리지 못한 그림에 검은색 크레용으로 마구 덧칠해버리는 심술난 아이의 마음같은것이랄가?
 
                                                          2
 
    기억도 생생한 처녀시절, 새벽농대를 다니던 때는 그야말로 신주대지를 진감하는 혁명년대인지라 저마다 렬화금강이 되려고 윽윽하던 격정시대였다. 그런 살벌한 분위기속에서도 출신이 명랑하지 못했지만 동학들속에서 인끔이 높았고 웬간한 남자는 찜쪄먹게 못하는 일이 없어서 그랬는지 모른다. 공량을 바칠때는 200근짜리 콩마대도 등에 지고 아찔한 발판을 씨엉씨엉 올라가서 꼬리없는 암소라는 탁호까지 얻었다. 그래서 그녀를 이성으로 여기지 않는지 련애를 걸어오는 남자라곤 없었다.
    세개 큰산이라는 말이 있듯이 자기에게는 두개의 큰산이 있었다. 첫산은 지주성분이고 두번째 큰산은 딸만 아홉인 집에 맏딸로 태여난것이다. 성분이 좋다하더라 도 처가가 될 집에 딸만 아홉이란 소리만 들어도 누구나 뒤주춤할 일였다. 그러다보니 그런 란리판에도 련애하느라 야단들인데 그녀만 “수녀”질 하였다. 수녀원도 아닌 학교에서 남몰래 좋아하는 남자가 있는것도 아니여서 자신에 분통이 터질일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한반에 차명훈이가 능글맞게 웃으며 편지 한통을 건네여주었다. 가슴이 후둑후둑 뛰였다. 설마 명훈이가? 매일 얼굴을 맞대고 있는 처지에서 별스레 련애편지 따위를 쓸 그런 맹충이 아니였던것이다. 평시에 누구보다 잘 리해하여 주고 은근히 동정심도 쏟아주는 그였지만 성분도 마다하고 랑만적인 로맨스를 엮으려는 사람이 절대 아니라는것을 너무나 잘 알고있는터인데 이 무슨 장난질인가?
    “무, 무슨 편진데 반장동지가 이렇게…”
    “내사 알턱이 있나? 어떤 친구가 부탁한 편지니까 련애편지 아닐가?”
    “련애편지? 무슨 생뚱맞은 소리요? 누가 나에게…그리고 그렇게 혁명적인 명훈동무가 나같은 사람에게 오작교를 놓아줄 생각을 다 하였소?”
    “사정이 그렇게 되였소.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혁명은 혁명이구 인정은 인정이지, 실은 중학교때 절친했던 친구였는데…문학을 하는 친구라서 달착지근할걸…”
    명훈이는 익살맞게 눈을 찡긋하고는 휘파람불며 돌아섰다. 암만 생각해도 지꿎은 명훈이의 장난질로 치부해버리는게 좋을것 같았지만 난생 처음 받아보는 련애편지라 면…가슴이 팔딱팔딱 뛰였다. 편지임자가 누구든간에 자기에게 편지를 쓸만큼 마음이 따스한 남자일것이라는 생각에 얼굴이 확 붉어올랐다. 그는 한달음에 학교건물뒤 사람없는 곳에 숨어앉아서 읽고 또 읽었다.

    춘여동무,

    몹시 놀랍지요? 안면도 없는 처지에 이런 편지를 쓰는것은 지금같은 시기에는 너무 엄청난 일이니까요. 그러나 워낙 용기가 없는 사람이여서 편지로써 서로를 알고 지낼 길을 닦을수밖에 없음을 리해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사나이로서 벼르고 별렀던 마음을 곧이곧대로 쏟아내니 끝까지 읽어주면 고맙겠습니다.
     서로 만나보지도 못한 처지에서 무슨 말부터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지만 나로서 하많은 말을 억제할길 없군요. 나는 련애편지에 보통 잘 쓰듯 대번에 감동을 안겨줄 미사려구를 떠올릴수 있지만 동무에게 처음으로 쓰는 이 편지에는 화작을 부릴생각을 접고 그저 솔직하게 쓰겠습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로 말하면 누구들보다 량심으로 진정성을 담보하겠습니다.
   춘여동무는 나에 대해 아는게 전혀 없지만 나는 유일하게 친구로 남아있는 명훈에게서 동무에 대하여 잘 료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히 사랑한다고 말할 처지는 못되면서도 같은 처지에서 오히려 서로를 송충이를 꺼리듯하는 때에 혹시나 춘여동무만은 나를 리해해주고 시작부터 비뚤어진 인생길을 함께 걸어줄수 있지 않을가 하는 요행심리에 내 전부를 걸고 이렇게 씀니다. 리해는 사랑보다 높다고 하지요. 사랑이란 모든 젊은이들의 자연발생적인 감정이지만 나같이 못생긴 새끼오리로서는 본성인 사랑의 감정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군요. 그래서 동무라면 나의 사랑의 감정을 엿보아주시고 나의 실락원에까지 이어줍시사하고 하소연 하는 바입니다.
    착하고 녀자다운 모습과 인품을 믿어마지 않으면서 동무에게 한 남자의 충정으로 고백합니다. 누구도 쉽게 받아주지 않을 운명을 타고난 나에게 이른바 행복을 안겨준다고 장담못하지만 적어도 사랑에 굶주리지 않도록 한생을 바치겠다고 맹세할수는 있습니다. 동병상련이 오히려 우습게 되여진 현실에서 우리 손에 손잡고 인생길을 끝까지 가줄수 있다면 이한 생명을 다바쳐 인생반려로서의 기쁨을 누려보려합니다.
    사랑의 감정은 빌어다가 빚는게 아닌줄 압니다. 동무의 마음의 문을 열고 우리 마주앉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어떤 공통점을 찾을수 있지 않을가요? 이렇게 고백은 하되 소중한 동무의 순정을 흐리우지는 않겠습니다. 저 울밑에 백일홍 이 내마음의 위로가 되여주듯이 리해하고 믿음이 되여주십시오. 불우한 내인생길에 지팽이가 되여주고 용기와 힘의 동력으로 되여줍시사 하고 내마음을 골방을 다 털어 냈으니 사랑의 천사, 아니면 내 어두운 삶의 마당에 외등이 되여줄수 없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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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7월 12일
                                
                                     남이  드림
 
    그녀는 마치도 감정이 풍부한 풋내기 소녀가 첫사랑의 감정에 미혼탕을 먹은듯이 생각의 문도 꽉 막혀버리는듯 하였다. 그는 낯모를 남자의 마음을 너무나 잘알것 같았다. 자신의 처지를 보아도 결코 순간적으로 떠올려보는 눅거리 동정심같은것이 절대 아니였다. 그는 자기 감정의 진실대로 살아왔던것이다. 자신도 외로움과 드러낼 수도 없는 괴로움으로 얽힌 삶의 진탕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평생을 기탁할수 있는 미더운 남편을 얻는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있었지만 득세하여 떵떵거리는 남편을 바란다는것은 그림에 떡이라고 단정한지 오래다.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할바엔 차라 리 인정스러운 남자의 넉넉한 사랑속에서 농가부녀로 살고싶은 그녀였다.
    장황하지는 않지만 가슴을 울리는 그의 고백에 감동의 여울이 일렁이였다. 한번 보지도 못한 남자이지만 정말 편지에서 비쳐지는 그런 풋풋한 사람이라면 마다할 리유도 없을것이다. 성분타령을 하다가 시집가서 한풀 꺾이고 사는 녀자애들을 많이 보고있는터이다. 인간의 감정에서도 가장 슬기로운 감정인 녀성적인 련민의 정도 씨알 마냥 저도모르게 익고있었다. 자신을 리해하는것은 위안의 고전적형태일세 자신을 벗어나서 아름다운것을 지향하는것을 랑만이라 하는가?
    녀자들에게는 육감외에도 예감이라는게 특히 중요하다. 다른 녀자애들도 거개 그랬지만 그녀는 전통적인 봉건성이 짙은 가정에서 자라나서 보수적이였지만 괄괄한 성미를 가지고있었다. 회답을 쓰든 만나보든 헤덤비지는 말아야 했다. 편지한통으로 홀딱 넘어갈수는 없는 일이였다. 편지는 어쨋든 엮는것이다. 편지글을 직접 심장으로 쓸수 없지 않는가, 그녀는 기회를 보아 명훈이를 조용한 곳으로 불러냈다.
    “명훈히, 나에게 속이지 말고 그 남자에 대해 죄다 말해줄수 있겠소?”
    “그 친구 편지에 자기소개를 아니하던가? 좋소. 노여워하겠지만 사실 내가 그 친구에게 춘여를 소개해주었소. 그친구 참 불쌍한 친구야, 공부도 잘했고 작가꿈도 있는 애인데 그만 세상에 잘못 태여났지. 성실하면서도 의지가 굳고 이루지 못할줄 알면서도 글뒤주라오. 지금은 발표할수 없지만 쇠힘줄이라오…무엇을 속이고 감추고 할것두 없소. 그친구 치명적약점이라면 출신이 나쁜것 말구는 인간적으로 참 미더운 사내라구…낯모를 처녀에게 그렇게 편지질부터 먼저 하는 경망한 친구는 아닌데 아마 내가 군침을 삼키게 했는가봐 하하하…”
    “나는 명훈이가 어떤 사람이란것을 잘 알고있기에 믿음이 가지만 그래도 처녀로서 어찌 허타이 회답편지를 쓰겠소?”
    “그럼 한번 대면해서 대화해보던지. 범의 굴에 들어가야 범의 새끼를 잡는다구 만나보면 호랭인지 시라소니인지 알게 아니요? 사실 내가 말해도 생각해낼지 모르겠지만 그 친구 춘여에게도 전혀 생면부지의 친구가 아니요. 참, 그런데 내가 춘여에게 남자를 소개해주었다는것을 남들이 모르게 해주기 바라오. 사연이야…”
    “걱정말아요, 그럼 그 사람 한번 만나게 련락해주오”
    “그 사람 룡산에 사는데…곧 기별해줄게, 허, 로처녀씨가 싱숭생숭해졌나?”
    “정 그러기요? ”춘여가 얼굴을 붉히며 종알거렸다.
    일요일, 한침실에 친구들이 다 집에 가고 없는 숙사에서 만나기로 했다. 외간남자를 숙소에 불러들인다는건 좀 모험적이긴 했지만 추운겨울 어디가서 이야기 를 나눌곳도 없었다. 약속한대로 오후에 명훈이가 한 청년을 데리고 슬그머니 들어섰다. 남자를 보는 처녀들의 눈은 천성적으로 혜안이다. 농사군답지 않게 끼끗하고 균형이 잘 잡힌 청년의 듬직한 몸가짐에 긴장으로 조금 경색된 눈에서 진심이 흘러넘치고 있었고 좀 갈아앉은 목소리였지만 또렷한 억양에서 내심의 격동이 은은히 메아리치고있었다.
    그런데 이런 희한한 만남이 있단말인가? 명훈히 말처럼 생면부지의 사람이 아니였다.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가끔 고마운 마음속에 떠올려지기도 한 남자였던것이다. 인연이였나? 지난 겨울, 공구량을 바치러 다니던 어느 날 밤이였다. 그날도 남자들과 함께 “량잔”에서 마대치기를 하였다. 처음에는 본때스레 메여올렸지만 차차 힘에 부침을 느끼였다. 필경 녀자라서인가? 아니면 온하루 너무 무리한탓인가?
    마지막 벼마대를 어깨에 올려놓고 휘청거리는 발판을 오르는데 어쩐지 다리가 후들거리고 허리힘이 싹 빠져나가는듯했다. 발판 중간쯤에서 정신이 아찔해나며 뒤로 번져질것같았다. 자칫 벼마대와 함께 아래로 떨어지는날엔 죽지는 않더라도 크게 상 할판이였다. 다른 생산대 공량군들도 벼마대를 메고 뒤따르고 있었다. 그래서  더 조급해났던지 모른다. “아차!”하는 순간이였다. 벼를 뒤주에 쏟고 내리는 발판으로 들 어섰던 한 청년이 눈치빠르게 “잠간만!”하고 소리치며 훌쩍 뛰여건너와서 벼마대를 받아으면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이는 그녀의 팔도 잡아주었다….
    …그때 그저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헤여진후 어디서 사는 사람인지 알수도 없었지만 뜨락또르위에서 마대를 메여주던 명훈이는 그 장면을 다 보았다. 그러나 춘여가 묻지 않는 일을 싱겁게 말해줄수는 없었다. 그후 언제가 길에서 만난 남이가 새벽농대에는 남자꼬부래가 그리 많아가지고 녀자를 마대치기를 시키냐고 힐난하였다. 그래서 말이 난김에 춘여가 자신이 그런 처지에 있다보니 늘 자진해서 적극성을 발휘하는데 정말 못말리는 녀자라며생각이 있으면 소개해줄 의향도 내비쳤더랬다. 물론 그녀는 그런 내막을 가지고 있는줄을 알리없었다.
    “아이참, 알구보니… 어쩜 이렇게 공교로울수 있나요…그날 정말…”
    “글쎄요, 그 발판이 오작교노릇을 한것인지도 모르지요.”
    남자는 사람좋게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정이 뚝뚝 흐르는 편지를 보내던 남자를 직접만나 몇마디 말이 오가지 않았는데도 그녀의 가슴속에 고요히 잠자고있던 녀자의 특성이 걷잡을수 없이 대번에 눈을 뜬것을 느끼며 그녀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대방에 대한 인상은 첫 3초에 결정된다던가, 어떤 대상이나 상황을 인식하고나서 곧 형성된 자신의 감정이 옳다고 판정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자신이 그랬다.
    하긴 녀자 나이가 스믈다섯이니 그의 본능과 욕망은 한껏 성숙되여 터질때만을 기다린던 참이였다. 녀자로 태여나 처음으로 사랑을 하게 되였다는 신비로운 광환에 싸여 불행에 대한 동정심으로 온몸이 팽팽해졌고 가슴이 울렁거릴것은 당연했다. 그녀의 가슴에 딱 찍어말할수 없이 만들어지는 인연의 실, 그가 아무리 험난한 길을 멀리가도 끊어지지도 동이 나지도 않을 실이 천실만실 사랑의 꿈을 엮는듯싶었다.
   억눌리며 자라서 더없이 순해빠지고 성실한 처녀들이란 일단 한 남자를 믿기시작 하면 연분이라 생각할수도 있다. 그녀는 진실한 넋의 지향에 이미 끌려들었고 그 끌힘이 남자를 더 친근하게 다가서게 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가슴속에서 미묘한 파문 이 일어나는것을 숨길수 없었다. 자신이 그런 감정을 가지면 안된다고 단속하면서도 그녀는 자기 감정이 시키는대로 자신을 내맡기기로 작심했던것이다…
                                
                                                       3
 
    남이도 심심풀이로 나가보던 무도장에서 늘 기억의 갑속에 꽁꽁 챙겨두고있던 아픔의 주인공인 그녀를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안해에게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다 말해주었지만 자기의 그 복잡하게 얼킨 정한의 갈피는 다 말해줄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일때문에 한번 의심을 가져보지 않던 마음씨 너그러운 안해는 때때로 롱담하듯 혹시 그때 그 춘여라는 녀자를 안해로 삼았더라면 인생이 또 다르게 엮어졌을수도 있었는지 모른다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춘여라는 녀자를 다시 만난것은 순전히 우연일세 더 깊이 생각한다는것은 안해 에게 미안한 일이다. 그런데 뜻밖에 충격을 받은탓인가 달빛이 처량하게 비쳐드는 서재에 앉아 애꿎은 담배를 태우노라니 이왕지사가 담배연기처럼 스물스물 피여오른다. 세월은 반듯한 소녀의 이마위에도 깊숙한 흔적을 남겨놓는다. 함께 춤을 추면서 눈빗 질해 보니 모진 세월속에서도 탐스럽던 옛모이 용케도 남아있었다.
    녀자는 용모가 뛰여나면 머리가 부족하고 머리가 뛰여나면 행동이 부족하고 행동이 뛰여나면 지성이 모자란다고 어느 책에 써있었는데…체대가 덜썩 크지 않지만 탄탄하게 생긴 녀자로서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만큼 요염하지 않았지만 잘 짜여진 몸전체에서 은근히 내비치는 아름다움은 오직 첫눈에 반해버린 사람만이 기쁘게 보아 내고 흔상할수 있는 그런 숨겨진 은은한 미였다.
    그녀의 모습에는 진실한 감정이 깃들어있었으며 녀자로서는 남달리 씩씩한 기상이 넘치고있다. 얼굴은 보름달처럼 환하고 남자의 이마와 같았지만 크고 검은 눈동자에서는 순정이 담기여 어덴가 애련한 멋까지 풍기고있었다. 야들야들하고 해맑은 얼굴살갗이 해볕에 그을어있었지만 여전히 보드랍고 섬세하였다. 특히 다소곳한 자태 가 탐탁하였다. 첫눈에 벌써 깨끗하고 성실한 덕성을 갖춘 녀자라는것이 읽혀졌다, 부드러운 감정같은것은 이 시대에 부차적인 자리밖에 안되였다. 그들은 인생을 자기 들의 어렴풋한 견해로 평가할뿐이다.  
    남들은 어찌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녀 자신도 느끼지 못할수도 있는 반듯한 이마아래 그윽한 눈길속에 사랑의 세계가 몽땅 깃들어있음을 어렵지 않게 볼수 있었 고 그의 눈모양과 눈시울이 움직임속에서 이렇다 꼭 말할수 없는 숭고하기까지 한 매력을 발견할수 있었다. 그것이 첫눈에 떨쳐버릴수 없는 욕심을 부풀리였다…
    그처럼 지울수 없는 좋은 인상을 새겨주었던 녀자는 결국 함께 할수 없게 되였다. 차거운 세월은 그의 가슴속에 피가 림리한 상처에 소금물만 뿌려주었다. 그 세월에 그가 무엇을 애석하며 무엇을 부등켜안아야 하는가? 더 버덕거릴 일도 없고 자신마저 사랑할 리유도 없는데 심장을 박동하게 할 동력이 있었던가? 부정만이 고개를 끄덕 거렸다. 사방은 캄캄한 어둠의 절벽뿐이다. 이런것을 진퇴유곡이라 하는걸가?
     그럼에도 떨쳐버릴수 없는 어떤 욕망이 속깊은 곳에서 용솟음치며 올라오는 몸부림은 대체 무엇인가? 질기고 질긴 생명의 끈인가? “부딪쳐야 해, 이 절망의 심연속 에서 헤염쳐나가야 해, ” 사냥군의 총탄에 상처를 입고 일어서려고 버둑거리는 어린사슴이 그때의 남이의 모습인가…. 그때 남이는 그렇게 고통에 모대기였다. 인생이란 본디 끝없이 흐르는 강물과도 같아서 때론 유유히 흐르다가도 때론 거세찬물결에 물 바래일며 소용돌이치기도 한다, 삶과 죽음, 영예와 치욕은 객관사회의 변화에 따라 변하게 되여있으므로 사람의 욕망과 의지로는 도무지 돌려세울수도 없는 법칙이다. 인생무상이란 말을 알지도 못해서 그저 그렇게만 생각되였다.
   사랑이란 일상적인 사소한 타산이나 충동보다 훨씬 더 강력하며 분노, 질투심, 일반적으로 모든 정열이 다 그것들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것을 남이는 더 뼈저리게 절 감했다. 인생이란 변화무상한것이여서 절망의 나락에 떨어지는 순간, 꼭 잡아주는 보이지 않은 손길이 뻗쳐오고 숨돌릴 공간과 자신을 정리할 기회를 준다. 희망, 그리 고 창망한 앞날을 기약할수도 있다. 그리고 망연자실하여 어쩔바를 모를때 발밑에 또 한갈래 길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 사람이 바로 그 녀자였다.
    …그날, 녀자는 만약 녀동생이 여덟이나 되는것을 꺼리지 않는다면 집에 가서 부모님을 뵙고 허락을 받자고 제의하였다. 움안에서 떡함지를 받은 격이라 남이로 서는 마다할 리유가 없었다. 너무 진도가 빠르다는 우려도 할 계제가 못되였다. 너무 로쇠해서 때시걱을 겨우 차려주는 로모를 생각해서라도 마른나무꺾듯해도 좋을듯싶었 다. 그러나 이 춘여라는 녀자는 대번에 마음을 주어도 랑패는 없을것으로 믿어졌다.
    그들은 새벽농대의 넓은 교정을 나올때는 서로 떨어져 걷다가 인하촌으로 가는 대통로에 올라서서는 나란히 걸어갔다. 해질무렵의 겨울바람은 뼈를 저밀듯이 옷속을 칼질하였다. 동그마니 한족솜옷차림인 그녀의 얼굴은 익은 사과알이 다되였다. 남이는 두툼한 목도리를 벗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춥겠구만. 목이라도 시리지 말아야하지, 얼른 감소.”
    “동무는? 그러다가 감기걸리면 어쩌려구”
    “괜찮소. 나야 남자구 또 고깔모자가 달린 외투를 입지 않았소?”
    말을 하고보니 좀 안되였다. 언제 친해졌다구 “하오”소리를 하다니? 녀자가 그냥 사양하자 큰 마음먹고 바싹 다가가 녀자의 목에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녀자의 뜨거운 입김이 코를 간질렀다. 둘다 얼굴을 붉혔다. 금방 사귄 녀자의 손을 잡는다는것은 대 역부도한 일이라 그러지는 못하고 벙어리장갑까지 내주었다.
   녀자의 따스한 눈길에서 은근히 감동을 받았다는것을 느낀 남이는 칼바람이 몰아쳐도 세상끝까지 가고싶은 마음에 온몸이 후끈해났다. 그녀를 위하여 한 남자로서 무슨 행복의 동산은 못쌓아주더라도 의무와 책임을 다하리라 다짐했다. 그들은 나이도 어리지 않은지라 말없이 걸음만 재촉했다.
    “참, 명구란 그 사람 친구인가요? 동무를 불러세워놓고 무슨 말을 그리 오래 했나요? 혹시 저에 대해서…”
    “아니, 두루두루 알게 된 사람일뿐이요. 춘여가 그사람을 어떻게 아오?”
    “새벽농대 농장에서 뜨락또르를 몰지요. 평판이 하두 나쁘길래 나두 알아요. 친구가 아니라니 좋아요. 제가 괜히 물어서…”
    녀자가 왜 캐여묻는지 까닭을 알수 없었지만 무엇인가 예감은 되였다. 사람을 그 저 깔볼 권리는 없지만 명구는 친구의 친구를 통해서 두루 알게 된것이다. 그런 영광의 나날에 환난을 같이 겪은 친구였지만 그후 가끔 길에서 만나도 도무지 친해지지 않아서 별로 상종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원쑤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녀자와 함께 나오는것을 보자 불러세우고는 횡성수설 끝이 없었다. 저만치 떨어져서 발을 동동 구르는 춘여를 기다리게 하는것이 안되여서 그냥 뿌리칠가 하다가 혹시 호사 다마일지 모를 일이라 그저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명구가 하는 말을 귀등으로 흘리며 그가 춘여에게 단단히 악감을 먹고있다는것을 얼핏 간파해냈다. 지주성분에 딸이 아홉이나 되는 집에 사위가 되려하다니? 머저리같은 생각을 한다며 훈계조로 나왔다. 말은 다하지 않았지만 아마 깨진 남비에 꿰맨뚜껑이 되는격이라고 말하고 싶었겠으나 명구는 그런 말을 생각해낼 머리가 못되였다. 침을 튕기며 말을 하다하다 네 딱친구 성남이가 한마을에 성분이 나쁘지만 참한 녀자가 있는데 소개해주겠다고 하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성남이란 학교때 의기상투하던 태평촌에 친구로서 지금 어느 산골에 가서 선생질 하고있었다. 성남이는 진정으로 생각해 줄수 있다고 믿었지만 명구의 말은 믿기 찜찜 했다…그래서 더구나 명구가 한말을 녀자에게 곧이 곧대로 다 털어놓을수는 없었다. 명구의 됨됨이로는 춘여를 먹고싶을 때 베여먹을수 있는 칼도마위에 고기덩이쯤으로 생각할수도 있어 아무짓이나 하고도 남을수 있었다. 춘여와 명구라는 존재를 련계지 여 생각하는것조차 불쾌해지면서 공연히 분통이 터지였다.
    “명구란 그 친구에게 무슨 선견이라도 있소?”
    “아니예요. 그런 사람과 무슨?”
    녀자가 작정한듯 눈을 크게 뜨고 마주보았다. 남이는 정어린 고운눈과 따뜻한 웃음을 머금은 선이 또렷한 입술, 그래서 청순하고 다정스럽게 보이는 춘여의 얼굴이 착잡한 표정으로 그늘져있었는데 맺고끊는 말에는 서리발쳤다. 남이는 녀자의 눈을 정시하며 전파를 날렸다. (피차 아껴주는 인생반려가 됩시다. 곧 쌓아가려는 애정탑이 하잘것없는 오해로서 무너져서는 안되겠지요? 근시의 남녀가 사랑을 하는것입니다. 터무니없는 편견으로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맙시다. 만약 당신이 나를 받아준다면 험난 한 인생길을 굽이굽이 잘 휘돌아가리라 믿습니다…)
    “남이동무, 그런데 제가 어디가 좋아서 그렇게 대담하게 나왔는지 궁금해요.”
    “울릴줄 모르던 내 마음의 현줄이 우연하게 울렸다고 할가요?”
    “너무 어렵게 말해서 어리벙벙해지네요. 호호호…”
    그들은 완전히 련인이나 된듯이 어깨를 스치며 정답게 걸어갔다. 추운줄도 몰랐다. 화전자골로 들어가는 산기슭에 헐망한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앉은 인화9대에 도달해보니 마을동켠쪽 가파른 산발들에 듬성듬성 박힌 소나무들은 푸른빛이 외롭고 가둑나무랑 잡나무들이 가난한 마을을 지키는 초병으로서는 너무 허수룩해 보였다. 산기슭에 외따로 떨어져있는 초가삼간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어색한 웃음을 날렸다.
    “참, 아버지 엄마에게 한마디 연통도 없이 웨간 남자를 데리고 불쑥 들어서면 어떻게 생각할지 막막해요. 그러나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
   “이미 마음다잡고있소. 넘어져봐야 어떻게 아픈지 알게 아니겠소, 오히려 가자 고하니 덜썩 따라나선 내가 너무 경망한지도 모르지요.”
    “아니예요, 저만 믿고 들어와요.”
    남이는 머뭇거리며 집을 둘러보았다. 지은지 오랜 초가였지만 잘 꾸며져있었다. 흔한 가둑나무를 베여다가 박아놓은 울타리도 든든했고 집이영새도 깔끔하게 다듬어 져있었다. 마당에 들어서니 허접스레한 곳이 한군데도 없었다. 예로부터 집은 그 주인을 말해준다고 하였다. 보지 않아도 옛날 지주집 살림살이 전통은 말려내지 못할것인가보다. 딸이 아홉인 집에 맏사위가 된다면 한절반 아들노릇도 해야 할것이라 생각 하니 미묘한 느낌이 가슴을 메웠다.
    집안에 들어서니 한구들 가득 앉았던 녀자애들이 제언니를 할끔거리다가 올롱해진 눈길들이 내몸을 구멍내고 있었다. 물론 춘여의 어머니도 바가지에 퍼담았던 물을 도로 독에 쏟고 어정쩡해하였다. 웃방에서 담배를 썰던 집주인도 검고 커다란 두눈에 놀라는 마음을 담아내고 있었다.
    구들에 올라와 앉자마자 춘여가 입을 열었다.
    “아부지. 너무 제멋대로 한다고 욕하지 마십시오. 말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남이는 들었는둥 말았는둥하며 딸을 건너다보는 50대초의 사나이를 눈빗질했다. 세상이 바뀌고 많은 시련을 겪었을 얼굴은 풍상고초를 너무나 잘 말해주고 있었고 나 이보다 많이 찌들려있었지만 구들에 턱 들어앉아있는 덩치가 놀라웁게 덜썩 커보여서 저도모르게 조금 위압감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어, 그래? 아무튼 우리 집 내막과 내 딸냄의 사정도 잘 알면서도 찾아왔다니 고맙네그려. 아비된 나로서는 먼저 젊은이의 가정내막도 알아야겠지? 안그렇소? ”
     남이는 생면부지여도 사회적으로 한통속인 사람앞에서 별로 꿀릴것도 없다싶어 곧이곧대로 이실직고하였다.
    “허어, 아직 나이가 어린사람이니 나와는 다르겠지만 마음고생을 많이 했을텐데 주눅이 들지않고 씩씩한 모습이 마음에 드네그려. 충분히 믿어지네, 그런데 어쩌나? 자네도 우리같은 사람들의 운명이 장차 어떻게 될란지 잘 알겠지? 동병상련이라 서루 마음이 못통할것두 없지만 정말 안타까운 일이구만. 툭 찍어말하면 저애가 정한 일이니 마다할 까닭은 없지만 내가 지금 너무 뒤몰리다보니 딸들만은 성분이 좋은 집안에 시집보내여 마음고생을 하지 않고 살게 하고싶다오.”
    “그러시겠지요. 충분히 리해됩니다. 그리고 어르신의 마음을 제가 설득해서 곧 풀어질 일이 아니라는것도 잘 알겠습니다. 이렇게 마른나무 꺾듯이 할 일도 아니니고 해서 오늘 제가 절을 올리고 허락받자고 온것은 아닙니다.”
    “좀 까다롭게 생겼다하고 생각하는데 말 한번 시원허이. 그래 시국이 시국이고 한 딸애의 종신대사이니 사람을 더 지내보기두 해야겠지비, 그러니 오늘은 이쯤하세. 이제 밤이 되였고 모아산꺼정 가려면 길이 멀테니 저녁이나 드시고 나와 저 웃방에 서 묵고 래일 돌아가세.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말구 마음을 너르게 가지게나”
   춘여는 고개만 푹숙이고 아무말도 못하였다. 그녀가 부모앞에서 항변이라도 해야 하는가? 남이는 그러는 녀자를 너무 잘 알것같았다. 마음같아선 당장 일어나고싶었지만 체면도 있고해서 눌러앉았다가 저녁밥을 얻어먹기로 작심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을 어떻게 할수 없는지라 그냥 먹던듯이 차린 저녁상이였지만 점심도 굻은 그로서는 별식이였다. 그래서 잡담제하고 맛갈스럽게 먹었다. 혼사말은 제쳐놓고 일 상얘기를 좀 나누다가 저녁설겆이도 끝나는것같아서 자리를 차고일어섰다.
     “저녁까지 대접받았으니 전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집에 혼자 계시는 로모가 걱정도 하실터이니 아무래도… 여러가지로 페를 끼쳤습니다.”
    밥술도 드나마나하던 춘여가 마침내 격한 목소리를 말했다.
    “아부지, 사전에 말씀드리지 못한것은 제 잘못이지만 제가 다 생각이 있어서 마음속에 결정한 사람임다. 그런데 제맘을 조금도 헤아리지 않고 그리고 먼길을 온 사 람을 단마디로 퇴박줄수 있슴까? ”
   “쯧쯧, 이것아, 산전수적 다겪고 인정사정 다 아는 이 애비이기에 그러는거다. 내 라고 이러는게 마음이 좋을줄 아느냐?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세월을 탓해야지, 장래 새끼들을 생각해서라두 이렇게 하지 않을수 없는게다. 사람이 평생을 두고하는 마음고생이란게 어떤지 너도 가히 상상수 있을거다. 후유ㅡ”
    말꼬리를 사리는 아버지의 눈빛은 처절했다. 바람든 무우같은 표정으로 한숨을 토하며 웃방으로 올라가 문을 닫았다. 맏딸로서 그러는 아버지를 더 닦아세울수도 없 는 일이였다. 남이가 차려야할 례절은 다 차리고 녀자네 집을 나서니 랭기가 가슴에 파고들었다. 뒤따라 나온 춘여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런데 이 밤길을 어찌가나요? 원래 아버지가 이렇게 나올것 을 전혀 예상하지 않은것은 아니지만…그러나 이미 마음을 정했으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말고 우리 장기전을 합시다. 예? 내마음은 절대 꺾이지 않을것입니다. ”
   “나 춘여의 처지와 마음을 너무 잘 읽고있소. 원망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소. 얼른 들어가보오, 옷도 걸치지 않고 그러다가 감기들겠소, 자, 그럼…”
   그말은 둘사이에 묵계일가. 앞으로 어찌될지 모르지만 가장 깊숙이 숨겨둔 말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춘여가 “앗차, 목수건!”하고 소리치며 마당으로 바람같이 사라는것도 못본체하고 마을길을 내리다가 뒤돌아보니 춘여가 목수건과 장갑을 흔들 며 쫓아왔다. 기다릴 마음이 없었다. 필요없으니 더 따라오지 말라고 손짓하고는 홱 돌아서서 건정건정 내뛰였다.
   신작로에서 숨을 돌리며 마을을 바라보니 동산에서 몰래 솟아오른 달이 찬란한 별무리를 거느리고 마을길을 여유롭게 산책하고있었다. 모멸감을 참아내던 육신에 더운피가 거꾸로 흘렀다. 사회에서 천덕꾸러기로 이런저런 수모를 받고나서는 아무데 나 퍼더버리고 앉아 꺼이꺼이 울다가 그대로 영영 잠들어버리고 싶었던 멍든 가슴이 이번엔 갈갈이 찢기는듯했고 고추물에 절어드는듯 쩌릿쩌릿하였다.
   무엇을 어째야 하겠다는 의식도 뿌리채 흔들리고 래일을 바라고 애써 쌓으려던 사랑탑도 물먹은 토담처럼 무너졌다. 코허리에 매운 바람이 찡하니 맺히는걸 참아내 느라고 잠시 그대로 머리를 돌려버렸다. 참으로 견딜수 없이 마음이 아플 때, 금방 이라도 눈물이 솟구칠듯싶을 때 버릇처럼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녀에게 속한 한귀퉁이 하늘은 의연히 넓어보이고 구름은 의연히 유유자적한것을 보면 흐느낌도 갈앉을것이다. 죽는 일도 아닌데 왜 락심천만하는가?
    남이는 그날이후 더는 춘여를 찾지 않았다. 몇달후 마침내 짤막한 편지를 썼다. 잊어버리기 위한 작별의 편지라고 할가?
  
   “춘여, 나라는 사람이 일컬어 참된 사랑을 이루려는것이 얼마나 허황한것인지 비로소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나는 시종 사랑하는 사람앞에서 자존심마저 완전히 포 기할수도 있는 그런 남자로 자처해 왔습니다. 추호의 거짓도 없습니다. 나는 그런 사 랑을 춘여에게서 이루어지리라 믿었던것입니다. 나를 무서운 고민의 구렁텅이에서 건져줄듯 싶었던 녀자, 그러나 곧 그 혹독한 고독과 절망속에 던져버린 녀자로 충당 되여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더 슬프게 합니다. 춘여씨의 본의가 아니래도 말입니다.
   봄은 간다는 말도 없이 살그머니 여름의 록음속에 숨어버렸군요. 꽃과 나비춤, 그리고 푸른잎새를 기약해주고 가는새없이 가버린 봄, 뒤따라 하늘도 산야도 대기마저 다 짙푸르게 물들어버린 6월이 무성하는 7월을 불러올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시국은 시끌벅적해도 인간상정으로서는 꽃피는 아침에 꽃을 사랑하고 달이 밝은 밤이면 달에 매혹당하는 평화롭고 평범한 삶의 나날은 변할것이 없지요.
나는 그대와 꿈도 알락달락하게 지극히 감성적이고 향락적인 이성의 일면보다도 그렇게 해서 불태우는 정열이 가져오는 사그라들지 않는 생의 욕망과 용기를 안고 내 불우한 인생을 나름대로 가꾸려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결혼했기에 사랑하며 한가정을 꾸린다는 그러한 관념적인 사랑만이 아니였습니다. 물론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해서가 아니라 운명이 나를 그렇게 자위하게 만들었고 나름대로의 랑만을 보듬게 만든것이라고 리해하면 우습지 않을것입니다.
   조물주가 남자의 마음에 심어준것은 사랑과 추구의 용기이고 녀자들의 마음에 심어준것은 두려움과 사양하는 담략이라는 책에서 본 구절이 떠오름니다. 하긴 이 세상의 모든 남녀가 누리는 그런 일상의 애욕도 굽이굽이 풀내려가야 하겠지만 그보다도 한 순결한 처녀를 점유하는데서 오는 보통의 남자로서의 본능적추구마저도 나에겐 허무하군요. 춘여탓이 아니니 상심해 말아요. 춘여의 아버지가 세월탓이라고 하였는데 잘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과연 이 세월을 이겨나갈수 있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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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사람들은 서로 충성심을 불태우며 혈안이 되여 시간가는줄을 몰랐지만 화살보다 빠르게 도르래기 돌아가듯 빙빙 도는 지구는 백여도 자전하는 동안에 적설이 길길이 쌓였던 산과 들에 비단을 깔아놓은듯이 푸른 풀이 우거지고 강건너 룡처럼 굽이쳐 내 려가 룡산촌 뒤산에는 살구꽃들이 화사하게 웃기시작했다.
    낮에 한동안 실실이 내린 첫비가 하늘을 말끔히 걸레질하여 더없이 청청했다. 고향의 동산에 둥실둥실 떠오른 달님은 금시 목욕을 하고 나온 소녀의 청신한 얼굴 마냥 유난히 아름답고 깨끗하였다. 남모르게 타들어가는 속을 식혀볼가해서 옛날 비 행기활주로에서 홀로 바장이던 춘여는 저도 모르게 해란강가에까지 나왔다. 강물은 은빛으로 반짝이며 흐르고있다. 멀리 서쪽켠에 모아툰으로 통하는 해란강다리가 커 다란 뱀이 걸린듯 우중충하게 안겨왔다. 그녀는 저도모르게 그 남자를 생각했다.
    비록 깊이 사귀여보지 못했지만 그 남자네 마을의 생산대장에게 시집을 간 한마을의 소꿈친구 영자에게서 그 남자의 내속과 살아가는 모습을 전해들으면서 더구나 망각할수 없었다. 망각하기엔 너무나 깊숙히 기억에 아로새겨져 있어 마치 유리알같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잔인한 운명이란것도 빈구석이 없이 실감할수 있었다. 그는 비판투쟁을 밥먹듯하며 살고있단다. 만약 그 남자가 막연한 래일을 바라고 운명과의 사투를 포기했더라면 언녕 열번도 넘게 저승사자앞에 섰을것이다.
    남들은 혁명하느라 밤낮으로 구호를 웨치며 돌아다녔지만 반란파에도 들 자격이 없는지라 맨날 똥진오소리처럼 일만하였다. 그녀의 뇌리에는 남자를 처음 만나던 일 과 남자가 둘러준 목도리의 따스함을 가슴으로 느끼며 함께 걷던 그날의 자기와 그후의 그럭저럭 지나간 나날의 일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마치 아득한 먼옛일처럼 운무에 가리운듯 아무리 그려보아도 그 영상이 좀처럼 눈앞에 똑똑이 안겨오지 않았다. 자책감과 후회가 클수록 절망이 커지는가? 자기와 같은 경우에는 후회가 뼈저릴수록 자책감이 무거워지는것인가?
    그래서인지 눈만 감으면 그 남자의 모습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지척이 천리라고 한시간도 안걸리게 걸으면 모아산아래 그 남자네 동네에 이를수 있었지만 먼저 찾아 갈 용기가 종시 솟아니지 않았다. 그렇게 밤길을 더듬어간 그 남자는 마지막 결별의 편지를 보내고는 아무소식도 없다. 상념은 무리를 찾아헤매는 외기러기처럼 번민의 무리를 찾아 맴돌이치기가 그 몇십번이였던가,
    혁명이 고조기에 이르면서 하루건너씩 “최신지시”가 내려올라치면 한밤중이라도 학교마당에 모여서 북을 치고 꽹과리를 울리며 불멸의 태양이 내린 “최고지시”를 외 워대며 공사마당에 집중하여 경축대회를 열었는데 그 자신으로 말하면 국외인으로서 덩달아 해야 하는 충성이였고 남들이 웨치니까 웨치기만했다. 말이 새벽농업대학이지 그저 혁명의 소용돌이속에서 농사짓고 비판투쟁을 하는게 업이였다.
    원래 자기와 같은 오류분자의 자제로 대학생이란 명칭을 띠기에도 하늘에 별따기 였지만 초대학생회 회장인 명훈이가 힘을 써서 입적하게 되였던것이다. 그러니 훌쩍 떠나버리기도 안되였다. 졸업증이나 타겠는지 모르고 탓다고해도 크게 해볼데가 없는 줄 알면서도 그래도 어울려주는 무리에서 스스로 떨어져나가 생산대에 내려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있는터였다. 동학들이 찬눈길로 보지 않는것만도 얼마나 다행인가,
    누구의 도움도 바랄수 없는 꽉 막혀버린 자기의 처지에서 깊고 내밀한 아픔들을 혼자 보듬어야 하고 그러노라면 가슴은 온통 갈기갈기 찢긴 칼자리뿐이였다. 저절로 한숨이 애를 끓였다. 남녀사랑이란 그렇게 빈약하고 그렇게 쉬이 무너질줄이야, 높은 리상도 아니고 그저 마음에 드는 남자와 농가의 향락을 누리며 살려는 안일한 지향이 그렇게도 어려울줄이야, 남들은 그렇게 쉽게 시집을 가고 아이를 낳고 사는데…
    편지에 쓴것처럼 그 남자는 절절한 사랑의 애원이 있을뿐 애욕의 성급함이라 전혀없다는것을 녀자의 본능으로 느끼였다. 그를 바라볼 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으 나 그남자의 눈길은 가슴에 끓어넘치는 격정을 감추고있었다. 그러나 서로의 눈에는 똑같은 감정이 비끼여 있었고 두마음은 하나의 생각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었다. 마지막편지가 될줄은 생각못하고 난생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썼다.

   남이동무:

   안녕하십니까? 지금도 저의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지요? 물론 저의 아버지가 그 냥 허락을 하지 않고있지만 사랑문제는 우리들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마음을 달리 먹지않기를 간절히 바람니다. 먼저 사랑하고 더 오래 사랑하는것은 중요하지 않지요. 먼저 사랑을 버리고 더 오래까지 사랑하지 못한자가 스스로 부끄러울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서로 그런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래요.
    눈에는 두가지가 있지요. 하나는 육체의 눈, 그리고 또 하나는 마음의 눈말이예요. 육체의 눈은 가끔 잃어버리는수가 있지만 마음의 눈은 항상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지요. 비록 겪어보지는 못했으나 동무의 량심적이고 인격적인 정열을 그리며 몸이 달아오를 때 이것저것 망서리않고 한달음에 달려가 자신을 훌 맡겨버릴가 하는 생각을 한두번 한게 아니였습니다. 녀자로의 수치심을 덮어버린 진심입니다.
    남이씨를 알고나서 오래 고이키웠던 로처녀의 순정과 단조롭던 생활에도 마침내 달콤한 시간이 찾아들었다고 감사하게 생각하였습니다. 해빛이 나의 마음속에 깊이 스며들었고 룡산중턱에 진달래꽃도 더 붉어보였습니다. 성숙한 정염의 신비한 동경속에 부끄러운 욕망이 가슴에서 소용돌이쳤습니다.
   우리들은 무엇때문에 이미 마련된 행복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가? 무엇때문일가? 우리들은 남들보다 못하지 않는 아름다운것을 얻기 바라지 않는가요? 그런데 결과적 으로 얻기도 전에 왜 잃어버려야 합니까? 남은것이란 미봉할수 없는 가슴을 저미는 한단락의 추억뿐이여서 매양 후회의 심연속에서 모대기에 됩니다.
   신화를 그리워하고 영원을 생각하는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해주던 그 말을 잊지 않고있습니다. 사랑을 하는 순간에 있어서 주의를 생각하고 현실을 생 각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순수성을 모독하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믿고하는 말입니다. 누가 뭐라하든 그것이 남녀의 사랑의 특징이고 평범한 사랑의 생리임은 사실이지요.
    슬픔에 찢어진 나의 가슴은 나날이 갈마들던 고통스러운 분위기를 잠시동안이 나마 벗어나 순결한 넋이 안겨주는 더없이 살뜰한 애정과 감미롭고 미묘한 동경과 이성애의 환락속에 한껏 젖어보기도 하였던 저입니다. 몰래 한숨을 삼키고는 무겁게 마당을 나서던 동무의 뒤모습을 얼없이 지켜보면서 우리의 엉성한 울타리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서로 지나치도록 열정을 쏟으며 알뜰히 가꾸려던 사랑의 터밭을 이대로 내버린 다는것은 나로서는 너무너무 크낙한 고통이고 슬픔이였습니다. 나에 대한 동무의 감 정이 완전히 탈색한다 하여도 저는 완전히 지워질수는 없을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다하더라도 말이예요.
   휴식날 집에 돌아가 퇴마루에 앉았을 때 호젓한 앞마당에 떨어지는 나무잎 하나 하나의 소리는 저의 가슴속 깊이에 간직된 물음에 화답하는듯 싶었어요. 그러면 나의 마음은 또 소란스러운 번민으로 뒤범벅이 되여버렸습니다. 동무가 더 주동적으로, 더 용감하게 나올수는 없을가요? 나는 이미 한번 도끼질에 넘어갔지만 당신은 열번스므 번 찍어서 우리 아버지를 넘어뜨릴 그런 용기가 없나요? 기다릴게요…
    그녀가 평생 장악한 아름답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말을 총동원해서 편지를 썼지만 남자는 종시 회답을 해주지 않았다.
 
                             
                                                               5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그는 남이의 사나이다운 정열보다 현실성과 실효성을 지닌 명구의 지꿎은 추구가 고달픔을 한결 더 쥐여짜게 하였다. 그녀가 명구를 이를 갈며 미워하는데는 남에게 알릴수 없는 사연이 있었더랬다. 그녀는 원래 순진하고 성실한 자기의 성품대로 감정을 거슬리지 않고 자기의 믿음에 따라 인생을 가꾸려는 성미의 처녀였다. 그녀로 하여금 성분이 좋으면 다 백마왕자로 보지 않은것인지 모른다.
    그가 갓 농업기계반에 입적하였을때다. 순진한 녀자애들로 말하면 거의 언제나 선량한것이라고 믿어버리거나 진실한것이라고 믿어버리는데로부터 실책이 저질러진다. 명구의 내막을 잘 모르는 그는 뜨락또른운전기술을 배우면서 명구가 도와주겠다고 하는 말을 곧이듣고 부르면 만났고 그의 말을 최신지시처럼 새겨들었다.
    몸집이 갱핏한 남자였다. 가마노르께한 길쭉한 얼굴에 턱은 뾰족하고 입술은 곡선이 하나없이 다물려있다. 그와 대조적으로 입을 벌릴때마다 몸서리치게 하얀 이발 이 들어났다. 공연히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차거운빛이 내뿜기는 눈은 보통 말하는 뱀의 눈과 흡사하였다. 매부리코는 독살스러운 교활성과 짜내는 성실성과 리기주의적 욕심과 동시에 아무도 안중에 없다는 오만이 력력히 드러나있었다. 겉보기에는 흔한 남자같지만 독기를 품으면 무서운 사람으로 변할 사람이라는것이 력연하였다.
    아닌게 아니라 일체를 타도하는 혁명이 터지자 농장반란파의 두목이자 학교에 진출한 빈하중농대표랍시고 매양 개잡은 포수처럼 우줄렁거리였다. 명구라면 다른 녀 자애들도 딱 질색이였다. 같은 반란파지휘부에 있는 명훈이와도 수화상극이였다. 농 대의 천교장도 명구가 휘동하는 반란파들의 손에서 반주검이 되도록 박해받다가 자살하고 말았던것이다. 그리고 발구에 실어다가 남산덕이에 대충 묻어버렸다.
   그건 그렇다치고 처음부터 개똥밭에 참외처럼 보았는지 기회만 있으면 지분거려서 소름이 끼치였다. 그러다가 기어이 일이 터지고말았다. 어느 일요일날이였다. 반란 파지휘부로 오라는 명구의 호출이 내렸다. 곧장 득달하니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갔 는지 그가 혼자 있었다. 그는 걸상을 권하고는 다자고짜 엄정하게 선포하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에, 말하자면 유훙유쫜”의 무산계급새일대 기술인재를 배양하는 이 전당에서 춘여같은 지주집 딸이 혁명일대들과 함께 공부한다는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 아니겠소? 그래서 우리 관리위원회에서 의론했는데 아직 결론은 짓지 않았지만 생산대로 돌아갈 준비하라고 불렀소. 하긴 내가 마음먹기에 달린일이기도 한데…춘여동무가 어떻게 나오는가 하는게 관건이지…”
    순간, 가슴 한복판이 쿵하는 파렬음을 내며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일년만 더 공부하면 졸업증을 타게 되는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명구가 무엇을 하자 는것인지 지각이 든 처녀로서 모를수 없었다. 남자들은 다 자기속에 동물의 모습을 감추고있다. 남자들은 자기가 잡아놓은 쥐를 오래오래 양공질하는 몹쓸 고양이를 가지고있다. 아니면 나비를 유혹해서 그믈속에 끌어넣은 다음 그피를 빨아먹는 독거 미를 가지고 있다고할가 명구가 지금 그 고양이로, 독거미로 현신한것이다.
    “툭 찍어놓고 말한다면 이 방대장이 춘여를 좋아한지 오래오. 그동안 매우 점잖게 대했지만 혁명이 어디 칭커츠판이나 수놓이를 하는게요? 나의 사랑을 받겠소? 아니면 촌에 내려가 호미강대를 쥐겠소? 량단간 결정하오. 내각씨가 되면 이 무시무 시한 혁명폭풍속에서 무사히 살아갈수 있을것은 떼놓은 장땅이지? 안그러오? 어쨋든 나같이 고도의 혁명각오가 있는 사람이 능히 교육할수 있는 오류분자자제들을 책임지려 하지 성분이 좋은 어느 남자가 춘여를 요구하겠소, 내가 한평생 춘여와 처가집과 한구들이나 되는 처제들을 잘 책임져줄게 어떻소?”
    아무리 막돼먹은 남자라도 이렇게 자기 마음을 고백하지 않을것이다. 어리숙한 녀자라도 남편을 고를때는 아주 세심하다. 그러나 아무리 세심한 남자라도 열련에 빠 지면 바보가 되여버린다고 했다. 하다면 나는 아주 세심한가? 이 남자는 지금 열련에 빠져 바보가 되여버린겐가? 출신을 턱대고 아무짓이나 하는 망나니밖에…                        
   명구는 슬며시 다가와서 끌어안으며 정욕으로 달아오른 끈적끈적한 입술을 볼에 대며 가슴을 마구 헤치였다. “너무 좋아서 아닌체 하는거야, 얌전하게 있어,” 아무 방비도 없던차 그가 구렝이처럼 휘감들자 그저 몸서리쳐지면서 정신이 아뜩해났다. 출신이 나쁜녀자는 제하고싶은대로 하려는 이 동물에게서 자극받고 흥분하고 정복당 하고 어떤 쾌감으로 만족하기 위해서는 자기도 동물이 되여야 하는것이다.
    녀자들은 보통 한 남자를 사랑할 때 귀간지러운 거짓말을 들으려 하지만 한 남자를 미워하게 되였을 때 듣고싶어하는것은 진실이다. 녀자가 소리도 못치고 그저 바들바들 떨고만있자 더욱 대담해진 명구가 교실바닥에 번져놓고 마구 깔아뭉갰다. 차디찬 세멘트바닥의 섬뜩함을 느끼며 마구 덤벼치는 야수에게 유린당할수도 있다는 괴로움 마저 얼어들어 꽛꽛해졌다. 인간생활은 복잡다단하고 변화무상하다 하여도 결국은 두가지뿐이다. 하는 녀자의 생활, 하나는 남자의 생활이다.
    비참한 오한에 전률하며 자신의 무력감을 뼈저리게 느끼다가 극복의 문리가 차차 트이였다. 괴로움속에서 터진 울음끝에 오는것은 흐늑흐늑 흐느낌이다. 이대로 당하고 그이 노리개가 될것인가? 포악스러울만큼 거칠고 탐욕스럽게 옷을 벗기려는 미친 남자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고이 지킨 순정이 절대 안된다고 부르짖고 있었다…
    자기의 입을 찾는 명구의 입김을 피해 몸음 비틀어대던 춘여의 눈에서 마침내 분노의 불길이 타번졌다. 그것은 원치않은 헌신을 강요당하는 약자의 굴욕감에서 서릿발치는 저항의 비수였다. 비애와 쓰라림은 짙은구름이 되여 얼굴이 무섭게 일그 러졌을것이다. 땅바닥의 랭기가 괴로움과 분노의 불덩이가 가슴에서 화산으로 터졌다. 마침내 비장한 결심을 한 그녀는 남자를 힘껏 뿌리쳤다. 힘으로 한다면 명구쯤은 헤까닥이다. 일어나서 자기를 잡으려는 남자를 콱 밀치고 밖으로 내뛰였다. 뒤에서 “쇠새끼 같은년, 두고보자!”하고 욕질하는 목갈린 소리가 날아와 귀청을 스쳤다…
    명훈이를 찾아가서 학교지도부에서 정말 자기를 내보내려고 결정을 지었는가고 물어봤더니 그런 일이 없다고 도리질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명구가 너절한 수단으로 자기를 어째보려한 꿍꿍이였던것이다. 그러나 그는 학교에 더 있을 체면이 없었다. 명구는 자기가 매일 꼬리없는 암쇠를 올라타고 놀아댄다는 야비한 소문을 퍼 뜨리고 다녔다. 그런 더러운 소문이 마침내 그녀의 귀에도 들렸던것이다. 그날로 이불짐을 꿍져지고 집으로 돌아오고말았다.                                  
    …본가집에 나들이를 온 영자에게서 가슴아픈 소식을 들은날 밤. 그는 집뒤 산기 슭에서 울고 또 울었다. 남이가 일을 저지르고 구류소에 갇혔다고했다. 영자의 말에 의하면 남이가 농대에 있는 어떤 사람을 죽도록 패놓았는데 문제가 크게 번져 잡혀가서 언제 풀려나올지 알수 없단다. 맞아댔다는 남자가 명구였을게 분명했다. 그는 그 남자를 위해서 통곡했고 자신의 가슴이 찢기여서 온밤을 흐느끼였다.
    썩후에 명훈에게서 들어서 안일이지만 모욕받은 자기를 위해서만 그런게 아니였 단다. 자기가 소개해준다고 한 태평촌에 부농집딸이 일색인것을 보고 어떻게 구슬렸 는지 아니면 강다짐으로 잡아챘는지 안해로 삼았단다. 역시 성남이란 친구에게서 들은 말을 남이에게 하였는데 아무래도 분노가 겹치여 일을 친것같다고했다. 구류 소에서 반년넘게 고생하다가 풀려나오긴 했는데 그일 때문에 더 고생하게 생겼단다.
…자기의 인생이 그렇게 비틀어지자 아름다운 사랑의 동산이고 뭐고 더 바랄것 없이 아버지 말대로 연길역전앞 마을에 시집갔다. 물론 출신이 좋은 집에 며느리가 되였다. 아이도 낳고 그럭저럭 사는 동안 황당하던 질풍노도의 세월도 끝나고말았다. 긴긴 십년세월, 개잡은포수로 날뛰던 명구가 못된짓도 많이 한데다가 학교의 천교장의 학대사건으로 갈데로 들어갔다고 한다. 인과보응이라 할것이다.
    영자에게서 들을라니 남이도 늦게 결혼하고 어느 시골학교에 민반교원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리고 신문과 잡지에 드문히 문장을 발표한다고도 했다. 쥐굴에도 볕이 들었다고할가, 개천에서 룡이 났다고할가, 자신이 그 남자를 배반한것인가? 역시 연분이 아니였다고 자기를 위안하면서도 가슴은 그처럼 허전할수 없었다. 더구나 후에는 도문시내의 큰 중학교에서 교원질한다는 소식도 들었다.
    사람이야 만날 면목이 있으랴만 남이의 작품이 실린 신문이랑 잡지서껀 얻어서는 진심으로 축복하는 마음으로 읽고 또 읽었다. 그리하는것이 그 남자에게 속죄하는 흉내라도 되랴만 감정의 빚을 덯쌓는것으로는 무관하리라 생각했다. 영자도 명동골, 도문으로 전전하며 선생질하는 남이에 대해 더는 소식을 전할수 없었지만 발표되는 작품에서 그남자의 후반생의 궤적을 추적할수 있었다.
   그는 스스로도 그렇게 뿌리깊은 첫사랑일수 있느냐고, 늙도록 연연한 마음을 가지는 자신이 우습기도 했지만 마음은 그냥 한곬으로 흐르는것을 말려낼수 없었다. 더 구나 남편이 일찍 타계하고 새끼들도 다 출세하여 집에 혼자남게 된후 저도모르게 흘러간 세월을 더듬게 되고 그 세월의 언덕에는 어김없이 그 남자의 영상이 오롯이 서있군하였다. 더구나 그가 대학에 교수로 퇴직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인생무상을 느 끼며 한탄하였다. 일부러 하는것도 아니고 말도 안되는것도 알지만 자꾸 생각이 난다. 참으로 녀자의 첫사랑이란 다 이런것인가?
    어느 책에서 녀자가 늙으면 늙은 남자들보다 더욱 우울해지고 고독해진다고 썼더니 과연 그말이 맞는것같다. 지금 자신이 고독을 달래지 못하여 무도장출입이 잦아 지게 되였는데 혹떼러갔다가 혹을 붙여온다고 자기야말로 아픈 추억이라는 혹을 달고 왔으니 고독한 만년에 이 무슨 보응인가? 모르는게 약이라고 가끔씩 옛일을 떠올리며 무엇인가에 안위를 받아야 하련만…
   주책없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남자에 대한 련모의 정을 못잊어 가슴태우는 녀자의 얼굴, 그 몸가짐이 젊은녀자라면 아름다울지 모르나 다늙어서 옛사랑에 모 대기는 자기의 모습은 결코 보기가 좋을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감정이 시키는대로 자신을 내맡긴 그녀로 말하면 그래서 더구나 허무하였다.
 
                                                               6
 
    남이도 가끔 옛일을 추억할 때마다 안해에게 자기의 이왕지사를 숨기지 않고 말해주군 했는데 안해도 시무룩하게 웃으며 잘 응대해주었다. 기실 모아툰에서 농사 일을 할 때 친하게 지낸 영자라는 녀자가 우정 들으라고 그랬는지 춘여란 녀자의 얘기도 몇번 하길래 그간 사정을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고 한다. 몇번은 영자와 연길에 장보러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기어이 함께 가자고해서 용포동의 그녀자네집에 따라 가기도 했단다. 참으로 수더분하고 장생긴 녀자더라고 치하하기도 했다.
    남편이 드문히 나가던 무도장에 며칠 안나가자 안해가 캐묻는 바람에 옛날 그녀 자를 우연히 만나게 된 얘기를 털어놓았다. 이제 무엇을 옴니암니 따지지 않는 늙은 이여서 그런지 남의 이야기를 하듯 스스럼없이 주고받으며 남이는 회심의 미소를 짓 기도했다. 처음으로 마음을 준 녀자로서 첫사랑이라면 첫사랑이지만 시작도 못해보 고 흐지부지 막을 내린 그 사랑의 연극이 지금와서 무슨 특별한 의의를 가지는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인생의 저문언덕에 한가지 깊숙한 홈타기가 된것은 사실이다.
    “그럼 한번 더 나가서 만나보구 국수라도 함께 나누구려. 나 절대 질투하지 않을 테니까유. 같은 녀자이고 나도 그런 풍파를 겪으며 당신에게 시집을 왔으니 남의 일 같지 않아유. 그 녀자도 후에 행복하게 살았는지 모르지만 애석해 할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요? 나라도 그럴것 같은데 호호호…”
    “허허허…참으로 인생이란 새옹지마이지, 어쨋든 마누라가 도량이 넓어 좋구려” 
진심어린 미소는 잔잔한 호심에서 이는 미풍과 같은것이다. 가슴에 뒤끓는 태풍을 안은채 진정한 미소를 지을수 없다. 시기와 질투와 불신의 소용돌이를 감춘채 진 정 신비롭고 아름다운 미소를 짓기는 어려운것이다. 지난날을 다 리해하여주며 늘 동고동락을 기약하는 미소처럼 흐뭇한것은 없다. 그래서 고마운 마음이기도 하다.
    남이는 역시 버릇처럼 자기 허구픈 사랑철학에 빠졌다. 지구라는 이 땅덩어리에 산이 있어 물이 있듯이 인간사회에 남성이 수요되고 그만큼 녀성의 존재는 불가결의 인소이다. 흔히 녀자는 감성적이고 유연하고 섬세하며 외유내강하다고 한다. 일컬어 녀자를 천사의 화신이라 칭송하면서 녀인은 “사랑”의 대명사로 된것이다.
    반대로 남자가 없는 세계는 무질서하여 혼란할것이고 녀인이 없는 세계는 메말라 쇠갈될것이라는 아름다운 글귀들을 줄기차게 엮어왔다. 그러나 자신의 첫에덴동산엔 싸탄이 나타나서 인생을 다른길로 끌고갔다. 에머슨은 정직한 마음만큼 성스러운것은 없다고 하였다. 나자신은 애정에 얼마나 성실했는가? 따지고보면 춘여만 원망할 일이 아니였다고 늦게나마 반성해본적이 있었다.
   사람이 자기가 귀속되여 할 녀자에게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면 스스로 사랑을 구겨박은것이고 자기감정의 노예가 된것이다. 젊은시절 사랑함에서 가장 삼가해야 할것은 두 사람 모두 서로의 미래를 환상하는것이였고 늙어서는 어디까지나 서로의 지난날을 마음에 담아두는 일이라 할것이다.   
    한 사람에게 있어서 련애사가 복잡하더라도 자기가 만나고 사랑했던 녀자를 반복해서 생각할수록, 애석해하면 할수록 녀자의 실체는 사라지고 신비한 면사포를 쓰고 눈앞에서 하늘거릴뿐이다. 어찌생각하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기에 더 절절한지도 모를일이다. 아무튼 잃어버린 사랑이 있었던 곳에는 애석함과 련민의 정이 남아있게 되는법이다. 녀자를 가지는것보다 어떻게 사랑했던가가 더 중요하고 자기와 어떻게 사느냐보다는 어디서든 행복하게 사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사후에 청심환 같은 쓰잘것없는 사랑철학이리라.
    그래 맞다. 흘러간 과거는 흘러가라 하라. 어차피 흘러간 물로는 방아를 돌릴수 없거늘 추억이 눈물겹다면 그로써 자족하는것이 좋으리라. 남이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말았다. 그리고 눈을 감아버렸다. 단떼의 “신곡”에 한구절이 생각났다.“여기서는 일체의 머뭇거림을 버려라  그 어떤 주저함도 여기 죽어마땅하도다”이것을 패러디한다면 지옥의 입구와 마찬가지로 사랑의 입구에도 비슷한 요구가 써있을것이다.
    그날밤, 남이씨는 꿈을 꾸었다. 춘여가 나타나서 비겁하고 무책임한 남자라고 질 책했다. 그리고는 꺼이꺼이 울어댔다….              
 
                                            2015년 5월 8일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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