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 흐르는 동안 이런저런 인연들로 얽히는 인생마당에서 이루어진 수많은 만남과 또 그만큼 많은 헤여짐은 망각의 언덕에 묻혀버리는데 수난의 년대 북국의 동토대에서 맺은 인연들은 끈끈하게도 오늘에 이어지고 오래 살다보니 끊길듯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인연의 끝에서 다시 만남을 가지게 되였으니 감개무량하지 않으랴,
30여년전 어두운 밤, 흑하지구 손오군마사육장의 림업국운수잠에서 눈물로 헤여진후 그냥 편지거래는 있었지만 서로 살기가 바빠서였던지 만나보지 못하고 그리움만 간직하고 있는데 상해에서 살고있는 호즈-쇼펑(耗子-小鹏)이 지난 국경절기간 꼭 만나고싶다며 할빈ㅡ상해의 왕복 비행기표를 끊어보내왔다. 우리 세식구가 상해유람을 할 기회가 생겨 기쁘다기보다 그토록 만나보고싶었던 쇼펑을 다시 안아볼수 있게 된것이 나로서는 격동 그 자체가 아닐수 없었다.
만리벽공에 날아오른 남방행 려객기는 구름을 헤가르고 나는 운해를 내려다보며 아득히 먼 저 곳에서 서서히 솟아오르는 추억의 언덕을 찾는다. 세월도 많이 흘렀으 니 까막골의 앳된 홍위병들이 인젠 50대의 장년들이 되였을것이다. 사연도 많은 북대황에서 인생길의 시작부터 준엄한 시련을 겪다가 마침내 나서 자란 상해탄으로 돌 아간 그들은 각자 자기의 인생길을 멋지게 장식하였으리라. 고마왔던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그려보노라니 까불이 쇼펑의 모습이 추억속에 떠오른다.
내가 손오군마사육장에서 상해지식청년 쇼펑과 생사지교를 맺게 된 계기는 그가 일컬어 “지주” 에게 복수한다며 엄청나면서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 사건이였다. 때는 화창한 봄날아침이였다. 그날도 여느때처럼 종자말에게 여물을 주고는 목에서부터 엉덩이까지 솔로 살뜰히 빗어주는데 말이 무슨 신호를 보내는듯 앞발을 탕탕 굴러댔 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엉덩이에 난데없는 칼자국에서 피가 방 울방울 흘러나오고 있었다. 예리한 뾰족칼에 깊숙히 찔린게 분명했다. 어느 쳐죽일 놈이 말못하는 짐승에게 몹쓸 짓을 했단말인가?
상처가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혹여 파상풍이라도 들어가면 해방패세대와 맞먹는 종자말이 죽을수도 있다. 나는 겁이 더럭 나고 맥이 탁 풀려 주저앉고말았다. 죄는 도깨비가 짓고 벼락은 고목이 맞는다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육하고 훈련시키는 내 가 수쇠를 차게 될 판이다. 내 처지가 처지이다보니 입이 열개라도 해명할수 없고 해석한다 하더라도 내 말을 믿어줄 사람도 없었다.
나는 사색이 되여 가슴만 쥐여뜯다가 문뜩 범에 물려가도 정신만은 차리랬다고 어떤 생각이 뇌리를 때렸다. 말궁둥이에서는 그냥 피가 흐른다. 정신을 펄쩍 든 나는 소독수로 상처를 깨끗이 씻어내고 된장을 한줌 발라서 지혈시켰다. 그리고 붕대를 부착시켜놓았다. 말은 아픔이 좀 가셔졌는지 더는 갈개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한담? 보위과에 제보한다면 선의는 남천방이 되고 불낸 놈이 불이야 하고 소리치는 격이라고 단정짓고 나는 원흉으로 락인찍을게 뻔했다. 오묘한 범죄심 리학도 풀 필요가 없다. 목에 걸면 목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이 살판스러운 시국에 속절없이 당하게 되였으니 얄궂은 운명의 장난인가?! 그저 사고를 미연에 방 지 못한 사업책임이 아니라 현행반혁명활동으로 간주될 엄중사고였다.
생각할수록 무시무시하여 숨이 꺽꺽 막히고 살이 떨렸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거늘 그저 당할수는 없었다. 자고로 궁하면 통하는 법 이다. 묘수가 떠올랐다. 원래 봄철이면 종자말들이 발정기라 진정을 못하고 울타리에 마구 궁둥이를 비벼대며 갈개는게 관례였다.
나는 낡은못 서너개와 망치를 찾아내여 말궁둥이가 닿일 기둥들에 못을 박아놓고 말털을 주어 못에 감아놓았다. 이른바 위조 범죄현장을 꾸며놓은것이다. 모든 일들을 눈깜짝할 새에 해치웠다. 하늘이 알고 말이 알고 내가 아는 일이였다. 내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아닌데 웬 신경을 쓰는가고 의문을 가질수도 있다. 어느 절에나 억울하게 죽은 귀신이 있다하지 않는가? 바로 내가 이 종마사양 장이라는 곳에서 원귀가 될수도 있으니 어찌 당황망조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울렁거리는 가슴을 눅잦히며 마라초 한대를 피워물고 얼없이 앉았다가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어제 저녁무렵 별명이 호즈(쥐)인 쇼펑이 별 요긴한 일 도 없이 사양실에 들와서 기웃거리다가 쫍쌀에 달걀을 터지워 버무린 여물을 맛갈스 럽게 먹고있는 종자말을 째려보며 무어라 욕질하던 생각이 떠올랐다.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그 자식이 한짓이구나!” 하면서 무릎을 탁 쳤다.
아니나 다를가, 조조를 말하면 조조가 온다더니 이튿날 어슬녘에 쇼펑이 슬며시 사양실에 들어왔다. 내가 의아쩍은 기색으로 덤덤해 있는데 호즈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권연두갑을 내들고 련신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러는 쇼펑의 심사를 모르지 않 지만 나는 짐짓 딴전을 부렸다.
“어이, 호즈야! 내가 너한테 좋은 일을 한적도 없고 더군다나 로유가 어마어마한 지식청년에게 좋은 일을 해서는 안되는 정치풍토인데 무엇이 감사하다는거냐?”
“따거야, 내가 저눔의 말엉덩이에 칼을 박았어, 저 짐승은 옛날 지주같이 맨날 계란 여나문개나 터치워 좁쌀에 버무려 먹는데 우리는 뭐야, 일주일 가도 달걀 한알 먹어보지 못하니 너무 억울해서 저 지주를 한번 투쟁했소. 지금 세상엔 투쟁만 잘하 면 출세하는 판에 이 까막골에서 명성을 날려보자고 그랬소. 그런데 숙사에 돌아가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유치했소. 해방패자동차 세대와 맞먹는다는 저 쏘련의 돈하종자말을 해치려한것은 현행반혁명행위이니 무서워서 온밤 한잠도 못잤소. 오늘 새벽에 사양실에 가만히 와서 말을 살펴보니 따거가 치료해놓고 아무 내색을 내지 않으니 좀 안심되였소. 정말 따거의 도량과 인정에 탄복되였소.”
쇼펑은 나의 거친 손을 으스러지게 부여잡고 흔들어대며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그는 바지주머니에서 귀한 술한병과 통졸임 한개를 꺼내여 고뿌에 가득 붓고 강호에 협객들처럼 한무릎을 꺾더니 두손으로 받쳐올렸다. “따거, 이 은혜를 잊 지 않을게. 우리 결의형제를 맺읍시다! ” 하고 말하는데 그의 거동이나 말에 조금도 거짓이 없어보였다. 우리는 이렇게 생사지교를 맺게 되였던것이다.
그립던 그 얼굴들
상해포동공항의 출구에 나서니 낯익은듯 서먹서먹한 전형적인 상해신사가 내 이름자를 큼직하게 쓴 종이판을 들고있었다. 뛸데없는 쇼펑이였다. 그 뒤에 잊혀진듯 채 잊혀지지 않은 그리운 얼굴을 한 신사들 몇이 서있었다. 이름은 일일이 생각나지 않았지만 반갑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오래동안 헤여졌던 전우들, 아니 친형제들이 만난듯이 돌아가며 포옹하고 눈물을 머금었다.
쇼펑의 친구들이 으리으리한 식당에서 환영연회를 차렸다. 술이 몇순배 돌자 이야기판이 벌어졌다. 오래동안 격조하였던 지기들이 만나면 이왕지사들을 떠올리기 마련 이다. 쏘련 돈하의 종자말이였던 얼룩배기가 난산할 때 쇼펑이와 함께 애를 써주었던 고마운 친구들의 입에서 그때의 정경들이 다시 떠올려졌다. 역시 비상한 사연이였다.
해마다 봄철이면 망아지들이 세상에 태여나는 즐거운 시절이다. 갓 태여난 망아지들이 얼마나 귀여운지 사람을 영 죽여주었다. 인공교배를 시켜서 밴 망아지들은 지 들은 자연생들보다 체대가 훌쩍 크지만 얼마나 온순한지 막 업어주고 끌어안고 뽀뽀해주고 싶어진다. 나는 오동통하고 귀엽게 생긴 사내애들을 보면 공소사에 들어가 개눈깔사탕이며 우유과자며 한봉지 사서 고사리같은 애들손에 쥐여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늙은총각이다. 내가 로유가 정상인이였더면 벌써 간장병이나 술병을 들고 심부름할만 녀석이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다른 락이 없고 말못하는 미물이지만 종자말을 알뜰살뜰 키워내는것이 다시없는 락이였고 사양실에서나 벌판에서 일에 몰두하는게 사는멋이라면 멋이였다.
어느날, 아침일찍 사양실에 나가보니 얼룩배기 103호 말이 양수가 흘러나오는것 이 곧 새 생명이 태여날 징표였다. 나는 마른 풀을 두툼하게 깔아주고 따스한 소금물 에 수건을 적시여 말의 목이며 등허리, 배아래를 닦아주었다. 말은 건초우에 벌렁 눕 더니 용을 썼다. 그런데 다리 하나만 나오다 말고 다른 발이 태줄에 걸려 나오지 못 하고있었다. 뛸데없는 난산이였다. 백에 하나나 있을법한 종자말의 난산을 한번도 체험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무슨 마땅한 방도가 나지지 않았다.
급하면 부처님 다리에 매달린다고 나는 지식청년들의 숙사에 달려가 쇼펑이네를 사양실에 나오라고 명령아닌 명령을 내리고 천방지축 사양실에 돌아와보니 얼룩배 기는 땀벌창이 되여 버둑거리는데 보기가 안쓰러웠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새 생명을 낳을 때 산고를 겪어야 한다는것을 상식으로 알고있었지만 너무 불쌍했다. 말은 안 깐힘을 쓸때마다 머리를 쳐들다가 마침내 기진맥진했는지 그냥 퍼더버리고 코를 벌 름거리며 단김을 뽑아올리는데 무슨 변이라도 날것같이 내손에도 땀을 흥건했다. 어떻게든 망아지의 뒤다리에 감긴 태줄을 끊어버려야 망아지가 순리롭게 나올것인데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기사 늙은총각님이 이젠 말조산사까지 되였으니 내 인생 에 천방야담을 엮게 된것이 아닌가,
쇼펑이 동아리 일여덟명이나 데리고 달려왔다. 나는 그들에게 바오래기를 나누어 주며 말의 뒤발을 단단히 동여매게 하고 힘깨나 쓸 애들에게 바줄을 단단히 잡으라고 당부했다. 말이 용을 쓰며 뒤발질 하다가 채이기나 하면 대갈통이 박살나지 않으면 옆구리를 걷어채이면 갈비뼈가 여러대 끊어질것이니 만일을 대비해 둔것이다. 다른 애들에게는 말의 모가지를 꽉 누르고 있으라고 명령하고 소금물에 팔목까지 깨끗이 씻은후 말의 자궁에 밀어넣 더듬어보니 태줄에 감긴 새끼말의 뒤다리는 어미말이 용을 쓰는 바람에 더구나 타래떡이 된것같았다.
손가위가 있다해도 한손으로 용빼는 수가 없었다. 그때 쇼펑이 내귀에 대고 태줄을 끊어놓으면 안되느냐고 말했다. 나는 무슨 수가 있으면 한번 시험해 보라고 하며 팔을 빼냈다. 쇼펑은 내가 땀벌창이 되여 태줄을 풀려고 끙끙거릴 때 궁리가 따로 있 어서 자기 손톱을 벽돌에 예리하게 갈아놓았다. 쇼펑은 아예 샤쯔를 벗어부치고 팔을 말의 자궁에 깊숙이 넣고는 태줄을 잡아쥐고 엄지와 식지의 손톱으로 가위질하였다. 한참 역사질하더니 피가 가득묻은 팔을 꺼내면서 태줄이 끊어진것같다고 했다.
나는 다시 손을 넣어 망아지의 뒤다리 두개를 가지런히 쥐고 어미말이 용을 쓰는 힘을 빌어 천천히 잡아당겨 인산했다. 성공이였다. 나는 말의 뒤발을 묶은 바줄을 풀 어주고 말의 목도 누르지 말라고 지시했다. 암말도 숨을 고르롭게 쉬기 시작했다. 아 침해살이 비쳐들면서 어렵사리 세상에 나온 망아지가 용케도 일어나더니 주정뱅이처 럼 휘청거리며 어미말의 머리맡에 쓰러졌다. 마치 제에미에게 건실하게 낳아주어 감 사하다고 절을 하는것처럼 느껴졌다. 어미말도 긴혀를 빼물고 제새끼의 머리와 몸에 묻은 양수를 말끔히 핥아주었다. 짐승의 모성애도 인간의 모성애보다 못지 않게 위 대한것이다. 성스러운 그 정경에 가슴이 찡해났다.
또 군마 한필의 탄생에 모두 환성을 질렀다. 나는 쇼펑의 어깨를 부여잡고 엄지를 내들며 눈물을 흘렸다. 천진해 빠진 그가 지주를 투쟁한다고 종자말의 엉덩이에 칼을 박더니 보배덩이같은 두 말을 살려내느라 땀벌창이 되여진 장한 모습을 보고 어찌 감동되지 않으랴, 나는 쇼펑이와 함께 애쓴 집체호청년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 흔들며 진심으로 감사를 표시햇다. 나는 사양실 한구석에 놓였던 궤짝을 열고 고량주 한병과 내가 담근 김치며 말리운 산나물무침이며를 꺼내놓고 축하연을 차렸다.
로유(누가 먼저 나를 로유(老右)라고 했는지 나의 두번째 이름이 되였다.) 처음으로 상해지식청년들에게 깊이 머리숙여 경의를 표시한것은 그 살벌한 분위기속에서도 그들에게 인정이 남아있고 동정심과 사랑의 감정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동되였기때 문이였다. 나는 쇼펑과 그의 동아리들에게 모두의 애정으로 태여난 망아지를 소상해 라고 이름짓는것이 어떠냐고 제의했더니 모두 대찬성이였다.
우리들이 저를 두고 웃고 떠들어치는줄 알기는 한듯이 제어미를 닮아서 미마인 망아지가 아장아장 걸어오더니 나의 어깨에 턱을 걸고 술한잔 달라듯 두눈이 올롱해 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런 망아지가 너무 귀여워 죽겠다고 서로 다투어가며 안아주고 어루쓸어주었는데 망아지는 능청스레 들이대고 있었다.
그런 비상한 사연이 있은후부터 우리는 진정 친하게 되였다. 앞으로 로유가 해방 도여 조선에 나간다면 따라가겠다고 예약하는 청년들도 있을 정도였다. 한것은 군마 사육장에서 조선예술영화 “꽃파는 처녀”,“남강마을의 처녀들”,“보이지 않는 전선” 등 영화들을 상영하였는데 수천명 지식청년들에게 대호감을 가지게 하였다. 중국에서는 살벌한 광란에 정신없을 때 수정주의라고 비난받는 조선에서는 천리마운동을 벌리여 공업화의 길로 내달리고 있었기에 동경하게 되였는지 모른다.
밭고랑 타고 세계혁명하던 나날
서로 찧고 께끼며 이어가는 이야기판에 주역은 그래도 이름짜한 호즈였다. 아무 참새를 굴레를 씌울 꾀돌이였고 괴짜였으니 그럴만도 했다. 여느때처럼 기음철이 되자 군마사육장의 직공들은 물론 가족들까지 총동원되였다. 군마사육장에서 경작 하는 콩밭은 사래가 어찌나 긴지 한다하는 실농군도 한고랑을 채나가지 못하고 허리가 끊어질듯 해서 휘청거릴 지경이다. 나는 제초전투의 림시지도원으로 농업대에 내려가 지식청년들을 이끌고 콩밭, 강냉이밭, 감자밭김을 맸다.
일에는 늘 베돌이던 쇼펑이 허리띠에 호미긁개를 차고 초모자를 상해탄에 건달처럼 엇비슴하게 제껴쓰고 제법 로농인양 밭고랑을 타고 스리슬쩍 매나가는것이였다. 풀을 매는지 어루쓸는지 매고 나간 자리에는 고개를 쳐든 풀들이 코웃음치고 있었다. 그래도 문화대혁명의 기치를 바싹 따라 할 일도 많은 광활한 천지에 용약 내려와서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으며 밭고랑타고 세계혁명을 하느라 혁명기세가 충천하는데 누가 감히 이렇쿵 저렇쿵 시비를 걸수 있을손가!
황차 농업대에 대장이 한 말이 있음에랴, “지식청년들이 북대황의 밭머리에 나서는것만도 일대혁명이고 북대황의 만두를 먹는것도 혁명이다.”명창중에 명창이라 해 야 할것이다. 화제를 돌려 우리의 기특한 쇼펑동지의 뒤를 따라가 보자.
흰적삼깃을 깃발처럼 날리며 제일 앞장에서 김을 매며 나가는 쇼펑이야말로 선줄군이나 다름없었다. 헌데 기계화라도 이런 현대적기계화가 또 있으랴, 글쎄 쇼펑이의 호미날은 어떻게 분해했는지 옆채기 혁띠밑에서 쉬고있고 호미갈구리만 밭고랑을 이 리 긁적이고 저리 긁적거리는데 모르고 보면 아주 능숙하게 호미질하고 있는것같았다. 밭고랑에 마른 흙에 거죽만 헤집어놓아서 잠시 흙에 깔린 풀들이 가관이였다. 풀들은 마치 차라리 뿌리채 뽑아버리던지 중둥무이 하던 할것이지 이렇게 머리도 쳐들지 못하게 하느냐고, 보다보다 이런 괴짜는 처음이라고 비웃는듯싶었다.
후에 알고보니 쇼펑이 보란듯 앞장에서 한절반쯤 매여나가는데 재수 좋게도 호미날이 떨어져나간것이다. 호미날를 수리하려면 4,5리나 되는 농기계수리소에 가야 하는데 그게 싫어서 생각해낸 묘수가 북대황의 콩밭에서 솜씨를 펴게 되였다. 아무튼 땅거죽을 핥튼 풀뿌리를 희롱하든 남보기에는 엄연히 기음을 매고 있는것이라 누가 감히 왈가왈부하며 지식청년들의 혁명열의에 찬물을 끼얹을수 없었다. 쇼펑은 눈감고 야웅하는 식으로 얼렁뚱땅 한고랑을 매고는 밭머리에 나가 큰대자로 나누어서 하늘을 바라보고있었다. 흰구름이 푸른하늘에서 뭉게뭉게 피여올라 궁궐을 짓고 밭머리에서 새들이 재잘거리고 있는 북국의 풍경을 보며 두발을 묶고 춤을 추둣 부자연스러운 청춘을 괴롭게 짓씹으며 몰래 눈물을 짓고 있었으리라.
인중승천이라 무릇 무슨 일에서나 은을 내는것이 인해전술이다. 사람이 많이 동 원되다보니 콩밭, 옥수수밭, 감자밭김을 일주일도 채 걸리지 않아 후닥닥 해치웠다. 제초대회전이 대승리로 끝난것이다. 그다음은 련속작전이다. 호미를 벽에 걸어놓고 새판에 청초베기 돌격전이 벌어졌다. 청초를 기계로 베여 건조시킬만한 뉘연한 언덕배기는 모두 고무바퀴뜨락또르가 도맡고 기계가 들어가지 못할 늪가나 강가에는 사람 들이 갈구리같은 긴낫을 휘둘러 베여눞혔다.
풀베기작업은 콩밭김처럼 엉너리를 치며 겉둥치기를 할수 없었다. 한사람이 반 메터너비로 낫질하며 나가면 뒤사람이 또 반메터너비로 뒤따르는 작업이여서 뒤를 돌 아볼새 없이 바지런히 낫을 휘둘러야 하였다. 점심식사 시간이 되여 일손을 놓게 되 자 호즈는 식당운반차가 오기전에 모욕이나 한다며 빤쯔바람에 개울물에 뛰여들었다. 한두메터 너비의 개천은 물이 어찌나 맑은지 조약돌들이 환히 들여다보이고 물고기들 이 꼬리치며 발가락을 물어뜯는것도 빤히 내려다 보였다.
천년천년 수천년을 흘러도 사람구경을 못한 물고기들이 처음 사람냄새를 맛보더니 앞다투듯 모여들어 종아리며 허벅지를 툭툭 쳐대면 제멋이였다. 쇼펑이 종아리를 물려는 버들치 한마리를 잽싸게 잡아서 기슭에 냅다 뿌리였다. 쇼펑이 련신 물고기를 잡아올리자 탄성을 올리며 구경하던 다른 청년들이 너도나도 앞다투어 빤쯔바람으로 내물에 뛰여들어 뒤질세라 물고기들을 잡아올렸다.
난생처음 오염이 없는 산골물에서 목욕하며 맨손으로 한뼘씩이나 되는 버들치며 붕어, 메사귀를 잡아보는 상해지식청년들은 신명이 나서 괴성을 질러댔다. 한여름에 도 뼈가 시리게 차디찬 산골물이라 오래 배기지 못하고 기슭에 올라와선 이발을 덜거덕거리면서도 좋다고 시시닥거렸다. 쇼펑이가 물고기 밸을 따서 버들가지에 꿰여 구 워먹자고 제기하자 여기저기서 삭정이를 주어다고 불을 지펴놓고 말몰이군들이 호주 머니에서 소금알을 꺼내 물고기밸속에 넣고 구우니 천하 별미였다.
대도시 상해에서 만리먼 북변의 까막골에 내려와 빈하중농으 재교육을 받으며 먹어보는 천렵이 이토록 재미날줄을 몰랐을것이다. 남녀청년들이 코밑에 수염을 그려가 며 서로 흉을 보면서 고기를 씹어대는 모습들이 얼마나 정겹던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렇게 풀베기로동판에서 물고기로 성찬을 먹은탓인지 로동열정이 충천하였다.
동토대에 피여난 애정꽃
이야기판에 끼여들지 못하고 꾸어온 보리자루처럼 얌전하게 앉아있던 이 로유의 젊은안해도 추억의 한페지로 펼쳐졌다. 그도그럴것이, 자기가 주례를 섰던 비상시국 의 비상한 결혼식이 쇼펑을 비롯한 다른 상해지식청년들에게는 잊을수 없는 추억으로 새겨져있었던것이다. 나로 말하면 더구나 어렵게 피운 소중한 사랑의 꽃이였다.
개똥밭에도 이슬 내릴 날이 있고 로총각에게도 결혼하는 날이 있게 될줄이야, 전 해 겨울 나는 친구의 연줄로 할빈도위구 송포조선족 마을에 색시가 있다고해서 선 보러 갔었다. 색시감은 한족중학교를 갓나온 김순이라는 처녀애로서 셋째딸이고 그 아래 13살짜리 머슴애, 9살짜리 남동생이 있고 김순의 아버지는 페결핵으로 고생 하다가 3년전에 세상을 떴다고 한다.
김순의 어머니는 남도태생으로서 일본말도 할줄 알고 일본춤도 잘 추는데 몇마디 주고받는 말에서 마음씨가 무던한 녀인이라는것을 알수 있었다. 내가 할빈농기계학원 에 다니다가 우파모자를 쓰고 흑하지구 손오군마사육장에서 로동개조를 하는 불우한 청년이라는것을 들어서 알고있다며 지금 처지가 그래도 좋은 사람은 어디까지나 좋은 사람이니 사위삼아 아들삼아 딸을 맡기겠다고 내손을 꼭 잡아주었다. 나는 김순에게 손바닥만큼 큰 모주석휘장을 례물로 주었다.
전대미문의 동란시대에 우파분자인 나로서는 그저 육신이 살이있으니 말할줄 아는 로동기계일뿐인데 열여덟 앳된 처녀가 무슨 멋이나 알고 그러는지 서른살도 넘는 로총각에게 자기 인생을 맡기겠다고 하자 나는 내가 너무 리기적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 들면서도 약속하고 말았다. 그동안 그냥 꿈속에서 막연하게 동경하던 꽃같 은 처녀와 백년가약을 맺고 돌아온 나는 절망속에서 될대로 되라하며 자포자기하던 자신의 정신세계부터 재건설하였다. 사랑의 힘이란 참으로 어떠한 기적도 창조할수 있는가보다. 모든것을 얼어붙은 동토대에 이제 꽃피는 5월이 오면 꽃다운 색시와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고 생각하니 깊이 묻어두었던 일만가지 욕망이 봄싹처럼 움터서 황페했던 나의 마음밭이 푸르러졌다. 나는 대번에 열살도 더 젊어진것같았다.
동북만주 맨 북녘인 동토대에 바야흐로 새봄이 기지개를 펼 때 김순이가 엄마의 손을 잡고 하늘아래 첫동네, 대낮에도 승냥이떼가 출몰하고 마을에까지 덮쳐들어 집 징승이랑 잡아가는 이 까막골에 흔인등록 증명서와 호구까지 아예 떼여가지고 제발로 걸어왔다. 이런걸 두고 움안에서 떡함지를 받았다고 해야 할것이다. 나를 그처럼 믿 어주는 장모님도 고마왔지만 나어린 김순이가 눈물나게 감사해서 사람들 눈이 아니 라면 막 안아올려 빙빙 돌며 춤이라도 추고싶었다.
이튿날 군마사육장 정공처에 가서 결혼증을 내러갔더니 정공간사는 나를 거뜰떠 보지도 않고 홍위병완장을 팔에 두른 김순이를 마치 우주인이나 보는듯이 아래우를 훑 어보더니 책상을 쾅 내리치며 삿대질까지 하며 욕부터 쏟아냈다.
“니야, 니! 너는 계급의식도 없느냐? 지금 어느때라고 매매혼인에 속히워 다니는 가? 뿌싱ㅡ먼저 조사해 봐야겠어…”
나는 서리맞은 배추잎같이 되여 해석 한마디 못하고 섰다. 속은 뻔했지만 처마가 낮으면 머리를 수그리라고 고양이앞에 나선 쥐인체 하기로 작심하였는데 김순이가 정공간사의 코밑까지 다가들며 당차게 맞받아쳤다.
“조사연구도 없이 그렇게 말하면 안되지요. 이 분이 우파라지만 모주석의 말씀처럼 인민내부모순으로 처리할 사람이지 계급의 적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디까지나 쟁취해야 할 사람이구요. 우파분자는 결혼하지 못한다는 법이 있는가요? 게다 가 이분은 조선족인데 우리 조선족들은 옛날부터 매매혼인을 모르는 민족이라구요.”
그는 당지에서 떼온 혼인등록증명서를 척 내놓으며 결혼증을 내지 못할 리유가 없다고 도리를 캤다. 문화대혁명이 사람들을 웅변가로 만드는 모양인가, 원래 야물 딱지게 생긴데다가 혁명의 세례를 받아서 무섭고 두려운것이 없어보였다. 아직 중학 생티도 채벗지 못한 조선족처녀애가 너무 당차게 나서자 정공간사도 유관부문에 청시 해야 한다며 한걸음 물러섰다.
전화를 걸고 돌아앉은 정공간사의 퍼러딩딩하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듯이 곰상 스럽게 이것저것 업무적으로 물어보고는 붉은도장을 박은 결혼증을 내주었다. 그러 면서 혁명정신으로 남편을 잘 교육하며 잘 살기를 바란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나의 가슴에서 무거운 널장이 뚝 떨어지는듯했다. 만사대길이였다.
후에에 알게 된 사연이지만 정공간사가 전화한통으로 일변한데는 그럴만한 까닭 이 있었던것이다. 군마사육장에 제일책임자인 오서기는 중국인민지원군에서 전업한 군관으로서 상감녕전투에서 2등공까지 세운 전투영웅이였지만 사선을 넘나들며 인 정사정을 남달리 터득해서인지 나를 대함에서 우선 인간적이였다. 그는 조선말도 잘 해서 나와 통하는 무엇이 있었다. 가끔 시찰을 내려오면 막사에 찾아와 말을 잘 사양 했다고 치하도 해주면서 함께 말을 타기도 하다보니 막역한 사이가 되여졌다.
오서기는 내가 성실하고 책임성있게 일한다는 보고를 받으면 비록 우파모자를 쓰 고있지만 문화수준이 높고 성품이 정직한 사람이라며 잘 교육하면 좋은 사람이 될수 있다고 긍정해주었다고 한다. 특히 지난번에 얼룩배기의 난산을 재치있게 처리하여 두필의 말을 다 구한 공로도 지도부에서 인장해주고 있다면서 쇼상해를 잘 키우라고 당부까지 하던 그였으니 정공간사가 전화를 걸었을 때 홍위병조선족처녀가 자진하여 시집을 올때는 그럴만한 사연도 있을것이니 실망시키지 말고 숙사도 크고 깨끗한것으로 배치해주라고 지시를 내렸던것이다.
후일의 얘기지만 나와 김순이는 오래 비워두어서 빈대가 많을것을 예상하고 66분가루를 밀가루에 반죽하여 벽틈서리를 메우고 흙으로 잘 매질한후 낡은 신문 지를 싹 뜯어내고 새로 신문지로 병을 도배하였더니 꽤 정갈한 신혼방이 되였다. 부뚜막도 뜯어 조선가마 두개를 걸어놓으니 조선족살림집맛이 풍기여였다…
각설하고, 나는 장모님이 기다리고 있을가봐 20리 큰길을 버리고 강을 건너야 하는 지름길에 들어섰다. 강가에 이르자 나는 이미 내사람이 된 이상 내우를 할게 없다고 생각하며 빤쯔바람으로 등을 돌려대며 김순이더러 업히라고 독촉했다. 김순이는 난생처음 당하는 일이라 얼굴이 홍당무우가 되여 돌아섰다. 지어내는 애교가 아니라 수집음 그 자체였다. 나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어린애처럼 와락 둘쳐업었다. 몽글거리는 처녀의 젖가슴이 등에 밀착되자 전기선에 닿인듯해서 몸이 부르르 떨리였다. 녀자의 단입김이 목덜미를 간지럽히고 내 목을 꼭 끌어안는 두팔이 미묘한 감정을 전달하고있었다. 그것은 이성에게서만 느끼는 사랑의 전류였다.
잔치날은 “5.1로동절”날이였다. 일생에 여러번도 아니고 한번 하는 결혼인데 그 흔한 붉은꽃도 달아보지 못하고 수수한 곤색옷을 빌려입고 색시는 시대의 류행을 따 른 군복차림이였다. 호즈 쇼펑이 주례를 서고 음으로 양으로 친하게 지내던 상해지식 청년들이 제각기 녀자친구를 데리고 잔치객 겸 그 시기엔 천방야담같이 렵기적으로 결혼하는 제또래의 조선족홍위병처녀를 구경할겸 해서 모여들어 자리를 빛냈다.
그들은 세수대야며 보온병, 주전자, 세수수건 등을 결혼선물로 가지고왔다. 지금은 그런것들이 결혼례물이만 코가 삐뚤어지지만 그때는 조련치 않은 선물들이였다. 이날 잔치집마당은 김순이가 부른 “천안문의 붉은태양(조선말)”에 이어 아리랑을 부 르고 도라지, 노들강변 춤까지 추어서 인기가 대단했다. 상해처녀들은 영화 “꽃파는 처녀” 에서 주인공이 입었던 조선족 치마저고리를 한번 구경하자고 야단치는 바람에 김순이는 장모가 시집갈 때 입었다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마당에 나서니 상해처녀들은 김순 이와 서로 사진을 찍는다고 벅구작을 피웠다. 사람들은 이 군마사육장에서 로 유의 잔치날처럼 흥성하고 사람사는 냄새를 피우기는 처음이라고 입을 모았다.
나어린 나의 색시는 인차 상해처녀들과 잘 어울렸다. 휴가일이면 상해처녀들을 휘동하여 남산에 가서 개암을 따왔다. 개암밭이 지천인지라 벌방아낙네들도 개암철이 면 삼삼오오 몰려왔다. 안해는 넓직한 우리 집 마당에 말뚝을 박아 1호 2호…계선을 나누어 놓고 처녀들이 따온 개암을 말린후 키로 잘 까불려서 자루에 넣어주기까지 하 였다. 마음씨 고운 장모를 닮아서인지 안해는 이웃을 잘 도와주고 색다른 음식을 만 들면 나누어주었다, 가는 정 오는 정으로 인심을 얻은 안해는 군마사육장 직공가족들 속에서 인기인물로 되였다.
특히 김장철이면 장모를 모셔다가 배추김치를 큰독 다섯개나 되게 담그었다. 김 치를 담글때면 상해처녀들도 모여와 일손을 거들어주면서 김치를 담그는 기술을 배웠다. 상해에 돌아가면 한번 솜씨를 보인다면서 수첩에 적으며 까근히 익히는 처녀애들 도 있었다. 안해가 해마다 그렇게 많은 김치를 담그게 된것은 오서기부인의 부탁도 있고 지식청년들의 식당에도 보내주기 위해서였다. 깊고 넓은 김치움에서 조선족의 음식중에 명품인 김치는 담그는 사람의 인정과 함께 무르익었고 김치를 나눠먹으면 서 돈주고 살수 없는 아름다운 인연을 엮어가는 안해덕에 나도 인끔이 올랐다.
아픔을 먹고 자란 사랑나무
우리 군마사육장의 농업대에서는 홍당무우, 배추, 감자를 많이 심었다. 검은 흙토지대라 땅이 비옥해서 밑거름을 주지 않아도 강아지만큼 큰 감자들이 바고랑이 터지 도록 달렸고 홍당무우도 팔뚝같이 길고 굵었다. 하늘이 높아지고 말이 살찌는 가을이 오면 사람들은 다람쥐처럼 바지런히 돌아쳤다. 그리고 채소를 사러오는 외지 자동차 들도 뻔질나게 드나들었는데 특히 석유공인들이 많은 대경에서 배추며 감자를 실으려 오는 자동차들이 많았다. 여기서 꾸며낸 이야기같은 이야기가 엮어지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 하루, 대경유전에서 자동차를 몬다는 40대 중반의 낯모를 사람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이 군마창에 로유라는 조선족우파분자가 홍위병처녀와 결혼해서 산다는 말을 듣고 희한하기도 하고 동족이라 반가워서 찾아왔노라고 구구이 해석하면 서 붉은손이 검은손을 잡고 흔들었다. 누구를 속심주고 사귀는 시대가 아니기도 하거 니와 생면부지의 사람이 불쑥 찾아든지라 격정같은것은 없었다. 그러나 동족이라는 그 한가지 리유만으로도 랭대할 마음은 없는지라 나름껏 후대해 주었다.
어색한 분위가 점차 화애로워지자 그는 전업군인으로 대경유전에 배치를 받아 운수대에서 일하며 안해는 연변녀자로서 공인식당에서 일하고 아들과 딸이 있는데 한 족학교에 다닌다고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이 까막골에 끌려와 10년이 넘도록 살면 서 처음으로 조선족을 만나 조선말을 하게 되니 저도모르게 지인같이 느껴져서 닭을 잡아 고아서 술상을 차렸다. 나는 자아소개를 하지 않았다. 이 군마사육장에 로유인 꼬리방즈가 하나 살고있다는것은 눈코가 있는 사람은 다 알고있었기때문이다.
게다가 무엇을 자초지종 털어놓을 멋도 없었다. 내가 뿔이 세개 난 도깨비도 아니지만 사람마다 뱀을 만난듯 경계심을 가지고 슬슬 피하는 처경에서 길바닥에 나딩 구는 돌멩이처럼 이리 채우고 저리 채우는 자신을 부연해서 말할것도 없었다. 이 까 막골에서 말궁둥이나 따라다니며 사람 그리운 고생을 하다보니 남도 내마음처럼 생 각하며 곧잘 믿어주군 하는 민충이가 다되여 있던터라 마음속으로 믿어지기도 했다.
그는 닭곰을 얻어먹은 신세를 갚느라고 그랬는지 래일 아침에 마지막으로 감자를 실어가니 집사람이 혹 친정에 가고싶어한다면 태워주겠다고 선심을 썼다. 흑하ㅡ할빈 의 국도가 지나가는 곳에 있으니 다른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다며 좋은 소리는 다하였다. 하긴 안해는 가끔씩 엄마소리를 하며 친정에 갔으면 하는 기색을 보이기도 하 던터러 나는 귀가 솔깃해졌다. 교통이 불편하기로 말이 아닌 여기서 할빈에 한번 나 간다는것은 꿈에 천보기였다. 시집이라고 와서 한번도 친정에 가지 못한 안해가 안 쓰럽기도 했거니와 이 역시 인연이라고 여기며 쾌히 응낙했다.
그런데 북두칠성이 서쪽에 기울어지고 삼태성도 조으는 한밤중이 되도록 웬일인 지 잠들수 없었다. 삼라만상도 잠에 곯아떨어지고 어디선가 부엉새가 청승맞게 울어 싸고있었다. 이제 날이 밝으면 결혼하여 석달, 밀월의 단맛을 만끽하지 못하였는데 잠시일지언정 안해와 갈라진다고 생각해보니 마음이 도무지 개운치 않았다.
이것저것 챙겨야 할 일도 머리에서 맴돈다. 장모님이 어리디 어린 귀한 딸을 나에게 맡기고 가셨는데 어찌 색시를 빈손으로 친정에 보낼수 있으랴싶어 한푼두푼 모아두었던 돈을 보짐에 챙겨넣고 개암이며 검정귀버섯이며 밀가루포대며 다 챙겼지 만 자꾸 무엇인가 빈구석이 있는것 같았다. 안해도 말은 내지 않아도 친정에 가서 엄마며 어린동생들을 만날 일을 생각하니 잠이 아니오는지 돌아누워 꼼지락거리더니 어깨를 달싹이고 있었다. 묻지 않아도 그 마음을 읽을수 있는 나였다.
큰동생은 열세살, 작은 동생은 아홉살인데 세 자식을 키우느라 고생고생 하다가 마침내 옮겨앉을 생각을 하였는데 막내딸을 치우고 훗남편을 맞아들이려고 서두른것도 있겠지만 나를 진심으로 믿었기에 어리디 어린 딸을 밀어맡긴것이라 생각되였다. 그런 생각을 하노라니 몰래 울고있는 안해가 더구나 불쌍해졌다.
“얘, 너 지금 울고있니? 친정집에 간다고 하니 너무 좋아서 그래?”
나는 아내의 헝클어진 뒤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달래였다. 그러자 기다렸던듯이 내쪽으로 홱 돌아누우며 내목을 꼭 껴안고 엉엉 울어대는것이였다. 어찌나 서럽게 우 는지 나도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쳇, 너 좋은 길 떠나면서 왜 청승맞게 밤중에 울어? 무슨 일이야?”
“아저씨, 아니, 자기야, 왜 사람이 그리 민해요? 녀자는 문턱을 넘으며 열두가지 생각을 한다는데, 그리구 처음 만나 좋은 소리는 다하는 사람을 어찌 믿고 천리길에 어린 안해를 딸려보내려고 생각했어?나 친정에 안갈거야, 나를 용서해줘요”
용서라니 이건 또 무슨 홍두깨냐? 돌이켜 생각해보니 짚이는데가 있었다. 김순이는 눈물코물 범벅이 된 얼굴을 내 가슴에 묻고 두손으로 내 턱수염을 어루만지면서 실토정을 하였다. 대경의 그 운전수는 자신이 김해김씨인데 김순이와 동성동본이니 녀동생을 만났다며 정이 철철 흐르도록 너스레를 떨었다. 어린각시가 닭곰도 맛있게 끓였다고 찬사를 개여올리며 술잔도 부딪치며 여간 살갑게 굴지 않았다. 외롭게 자란 김순이가 우연하게 친척을 찾은것이라고 나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더랬다.
그런데 웬걸, 이튿날 내가 말떼를 몰고 목장에 나간것을 낌새채고 그자가 도적고 양이처럼 우리 집에 기여들었다. 녀자는 제륙감각이 있다더니 안해는 바느질광주리에 서 가위를 찾아 팔소매에 감추고 고슴도치럼 가시를 치켜세웠다. 그자는 바깥사람은 벌써 일하러 나갔느냐며 련락도 없이 불쑥 뛰여들어 미안하다고 하면서 자리를 뜰듯 이 하면서도 슬밋슬밋 주저앉아 횡설수설하더란다.
몇번 감자실러 와서 묵어가며 우리들에 대한 좋은 얘기, 나쁜 얘기를 많이 들어 서 사정을 잘 안다면서 젊은각시가 어쩐 연고로 이런곳에 시집왔는지 알수 없으나 이 빌어먹을 까막골에서 힘겨워 어찌 살겠느냐며 아직 아이도 없는데 옮겨앉으라고 구슬리였다. 실은 친동생이 하나 있는데 스믈네살이고 월급쟁이란다. 3년전에 결혼 했으나 처가 딸을 낳고 산후조리를 잘못해서 그만 저 세상으로 간후 한살인 조카애를 자기네가 키우고 있단다. 애가 불쌍해서 마음씨가 고운 새엄마를 얻어주려고 하던차 마음에 딱 뜨는 김순이 를 만나게 되였으니 한번 잘 생각해보라고 간곡히 권고하더란 다. 마음이 약해빠진 김순이라 애가 너무 안되였다싶어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혼자 결정할수 없으면 이번에 자동차에 태워줄테니 친정에 가서 엄마와 상의해 보는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자꾸 침을 놓더라는것이였다. 그때 그 시절에 농촌호구인 녀자가 월급쟁이에게 시집을 간다는것은 하늘에 별따기요 정말 시집을 가게 된다면 복이 넝쿨채로 떨어지는 격이였다. 그자는 궁벽한 이 까막골에 이런 봉황이 있는것을 보고 아마 고운 꽃이 소똥무지에 꽂혔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잘만 하면 좋 은 제수를 얻게 된다고 혼자 김치국부터 마셨던것이다.
그날 점심때 운저수가 술병이랑 챙겨가지고 우리 집에 찾아왔다. 말로는 답례방 문이라고 하였다. 술한잔 입에 대였다가 떼도 얼굴이 관운장이 되는 나인지라 억지로 응수하고 있었다. 그와 김숙이가 어떤 의미로 눈을 마주치고 잔을 부딪쳤는지 알배없 는 나이지라 안해가 공짜로 차를 타고 신선같이 친정집문앞까지 가게 되였으니 좋은 인연에 복을 받게 되였다고 은근히 좋아한 나였다.
…어린 안해의 솔직한 고백을 듣고난 나는 화가 상투밑까지 솟구쳤지만 사람이 살다보면 이런저런 불상사가 생기기 마련이고 황차 꽃같은 어린안해가 잠간 마음이 흔들렸다면 그역시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나많은 남편을 끝까지 믿고 따르겠다고 “죽어도 화냥년이 되고싶지 않았다”고 이실직고한 안해가 불쌍해졌다. 나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년장자로서 김순이를 포용해야 했다.
나는 하마트면 놓아버렸을 금쪽같은 나의 파랑새을 꼬옥 껴안아주며 어린애처럼 보듬어주었다. 세상엔 아비죽인 원쑤는 두고두고 복수해야 하지만 녀편네를 훔쳐간 원쑤는 어쩔수 없다고 하였다. 한것은 두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기때문이다. 김순이가 나의 동가슴을 북두드리듯 마구 두드리며 옹알거렸다.
“자기야, 순진한거야? 등신인거야?제 색시를 훔쳐가려는 꿍꿍이도 눈치채지 못하 고 그저 제맘처럼 믿어주었으니 민충이 아니고 뭐야? 나 몰라, 몰라!”
어린나이에도 때론 나보다 더 엉뚱한 궁리를 하고 당차서 험악한 환경에도 잘 적응하며 새 가정을 위해 일편단심인 김순이가 나에게는 안해이면서도 그냥 녀동 생같기도 해서 응석부리는대로 받아주기로 마음먹은 나였다. 나는 김순이가 너무 사랑스럽고 또 인간적으로 고맙기도 해서 다시 한번 으스러지게 껴안고 사나이 피맺힌 한을 속으로 짓씹어서는 통채로 삼키였다.
닭이 울었다. 닭이 울어야 새날이 밝는가? 닭이 울지 않아도 새 날은 밝는 법이다. 하다면 나의 새 아침은 언제 밝아올것인가? 나는 새벽잠이 몰려와 눈을 깜빡이는 안해를 도닥거려 재워놓고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나 밖에 나왔다. 하늘을 바라보니 무수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는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 별자리는 없었다. 늦가을 새벽 바람은 차디차서 몸이 으스스해났지만 나의 금쪽같은 어린안해가 잠들어있을 따스한 보금자리를 피부로 느끼며 나는 동가슴을 툭툭 치며 뇌까렸다. “인생나무는 아픔을 먹고 자라고 사랑나무도 아픔을 먹고 자라는 법이다. 그래 억세게 살아야지…”
드디어 날이 훤히 밝았다. 멀리서 자동차의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마당가에서 곡갱이를 찾아들고 기다렸다. 자동차에서 무슨 신호를 보내는듯 헤트라이트를 쩍거렸다. 그러기를 한참 반복해도 집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이 없으니 운전수가 차문 을 열고 내려서 이쪽으로 어정어정 걸어왔다. 나는 밤새 간신히 잠재웠던 분노를 화산같이 터뜨리며 성난 호랑이마냥 그자에게 덮쳐들었다.
“이 개보다 못한 놈의 새끼야, 오늘 대갈통이 박산나봐라!” 벼락같이 소리소리 지르며 달려드는 나를 보자 그자는 “사람살리오ㅡ”하고 비명을 지르며 잽싸게 운전 대에 뛰여오르더니 차문도 닫지 못하고 자동차를 굴리였다. 나는 따라가다가 곡괭 이를 냅다 뿌리였다. 적재함에서 불꽃이 튕기며 쾅! 하는 소리가 새벽의 고요를 흔 들었다. 나는 발을 구르며 듣지도 못하는 욕설을 퍼부었다.
“개보다 못한 자식, 너따위도 조선놈새끼냐? 다된 밥에 재를 뿌려도 유분수지, 이제 다시 이 까막골에 들어서는 날에는 뼈도 못추릴줄 알아라…”
이듬해, 안해는 떡돌같은 아들을 턱 낳아주었다. 나는 상해지식청년들과의 인 연과 인정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을 “상해”라고 명명했다. 조건이 그래서 그렇지 언녕 애엄마가 되였을 상해처녀들은 조선족애가 너무 복상스럽게 생겨서 귀여워 죽겠다며 만나면 서로 빼앗듯 안고돌았다. 애가 돌생진에는 실타래를 여나문개나 걸 어주며 무 병장수를 축원해 주었다. 그후에도 대경에서 감자실이 자동차들이 수없이 드나들었지만 그 저주맞을 놈의 운전수는 대갈쪽을 내밀지 않았다…
더불어 살아가게 마련된 인간세상이라 인연이 없이는 살수 없는 인생이다. 그러나 인연에도 좋은 인연이 있고 나쁜 인연도 있는 법이다. 좋은 인연은 도움을 주고 나쁜인연으로 해서 골탕을 먹기 십상이다. 내가 비록 무리를 잃은 승냥이처럼 혼자 으르렁거리며 살지만 하늘이 불쌍히 여겨 점지해 주었는지 천실만실로 얽혀진 어린안해와 아름다운 인연을 맺을수 있었기에 삶의 용기를 되찾았고 호사다마라 그 나쁜 심보를 가진 운전수처럼 되는 호박에 송곳질하는 놈과 잠시 악연을 맺았기에 나 는 또 한차원 성숙해지게 되였던것이다…
호즈의 야간도주
이번에는 쇼펑이의 야간도주가 화제에 올랐다. 더러 알고있은 친구들도 있었겠지만 도대체 어떻게 까막골을 벗어났는가를 이야기 하란다. 말하자면 길어지지만 아무 래도 유격전같던 그날밤의 이야기를 들려줘야 했다. 이야기는 이러하다.
그해, 청사료도 넉넉히 마련했고 밀가을도 끝냈는지라 군마사육장총부에서는 사흘간 대휴가를 내주었다. 군부에서 방영대도 내려와 구락부에서 련사흘 영화를 돌렸다. 김순이는 아이를 둘쳐업고 상해처녀들과 영화보러 가고 없을 때 나는 방목할 때 늘 쓰는 연장들을 손질하며 소일하는데 쇼펑이 무거워 보이는 큰가방을 들고 찾아 왔다. 무슨 깜투끈인 알지 못했지만 여느때처럼 무조건 반가웠다. 그런데 쇼펑은 무 슨 일이 있어서 왔으련만 낑낑 깝자르고 있었다.
“야, 이 앙큼한 호즈야, 이 따거에게 무슨 못할 말이 있다구 그래? 어서 말해봐!”
그제야 쇼펑은 울먹울먹해서 사정얘기를 털어놓았다. 상해에서 어머니가 병이 위 급하다고 세번이나 전보가 왔는데 정공처에서 종시 청가를 비준해주지 않고 있는데 집체호친구들이 너도나도 돈도 모으고 하향할 때 가지고 와서 고이 간직하고 있던 여 러가지 물건이랑 지원했다면서 현금으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어머니병치료에 보태겠다고 하는데 그 효성이 기특해서라도 발벗고 나서야 했다.
“쑈디야, 너무 속태우지마라, 상해는 병원도 좋아서 엄마병이 나아질거야,”하며 동생처럼 꼭 껴안아주고 힘을 내라고 고무격려해 주었다. 쇼펑이가 돌아가자 나는 선 자리로 보짐을 들고 간부주택에서 사는 중국인민지원군으로 퇴역한 텁석부리아저씨를 찾아가 쇼펑이가 지금 처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자초지종 얘기해주고 도와달라고 청 탁했다. 한뉘 군대에서 몸을 담근 텁석부리아저씨는 성미가 괄괄하면서도 인정만은 후더운 사람이였다. 그는 이 일은 자기에게 맡기라며 가슴을 툭툭 쳐보였다. 그는 이 군마사육장에서 로기술원이여서 덕망이 있는지라 하루밤 사이에 후닥닥 처리하였는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였다.
털보아저씨는 돈묶음을 건네주며 장사얘기를 들려주었다. 필경 새 산품이 아니니 창부공소사의 가격보다 훨씬 눅게 하고 부표도 받지 않는다고 하였더니 베개수건, 타올, 런닝구, 침대보, 양말따위를 너도나도 다투어 사갔다고 했다. 오히려 사지 못한 사람들이 의견이 많았단다. 나는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는 선자리로 달려가 쇼펑에게 돈을 건네주며 빨리 집에 부쳐보내라고 독촉했다.
나의 마음은 역설적으로 더없이 개운하였다. 돈을 인차 마련해준 기쁜 마음도 있거니와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는데 청가를 내주지 않는 불공평한 처사에 일 격을 가한듯한 기분이였다. 아무리 준엄한 비상시국이라도 인지상정도 다 말아먹으니 지랄도 네굽을 안고 하는 지랄발광이 아닌가! 입한번 잘못 뻥긋해도 천길나락에 떨어 지는 살벌한 시국이였지만 속에서 끓어번지는 불만을 누를수 없었다.
그런데 한 사흘이 지나서 멜가방 하나를 달랑 멘 쇼펑이 나를 찾아와서 작별인사 를 하러 왔노라고 눈을 씀벅이더니 룡진역으로 가는 지름길을 알려달라고 했다. 상부에서 청가를 내주지 않으니 목숨을 걸고라도 도망쳐서 엄마의 림종을 지키려 작심했 단다. 자유의 목숨이요 자유의 공민인 쇼펑이지만 군사생활같은 여기 종마사육장에서 도주한다는것은 그저 사민의 일반 탈주가 아니였다. 하지만 눈물이 글썽해서 나만 지켜보는 쇼펑이가 너무 안되여서 도와주겠다고 응낙했다.
대낮에는 어림도 없으니 밤에 어둠을 타서 행동하자고 다독여놓고는 내 숙소에서 한잠 푹자며 심리준비를 잘 하라고 일렀다. 나는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저지르 려고 하는지 모르지 않았지만 래일은 삼수갑산에 가더라도 이 효자를 30리 밤길에 혼자 내놓을수 없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힘세고 걸음이 빠른 적토마를 도적질 하듯 끌어내서는 안장을 얹고 배끈을 단단히 죄였다. 그리고 말을 먹일 강냉이알도 한가방 넣고 소금도 한줌 푼히 주머니에 넣었다. 쇼펑이가 길에서 먹을 만두 몇개와 짠지도 잊지 않고 그의 멜가방에 넣어주었다.
준비를 마친 우리는 말잔등에 올라타고 야간도주의 길에 올랏다. 밀가을이 끝난 들판이라 로출되기 쉬웠지만 밤안개가 엄호하여 주어 마음놓고 말을 달릴수 있었다. 자기 잔등에 올라탄 두사람이 갈길이 촉급한것을 알아주기나 하는듯 적토마는 걸음도 경쾌하게 잘 달려주었다. 나는 용진역으로 가는 길을 접어버리고 림업국운수잠을 목 표로 말을 내몰았다. 세시간 남짓이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대합실에는 아침뻐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밤샘을 하며 기다리는 사람들로 벅적거 렸다. 나는 쇼펑이 뻐스에 오르는것을 보아야 시름놓을수 있었지만 안해에게 간다 온다는 말한마디 없이 떠나왔으니 알면 얼마나 속을 태우랴 싶어져서 섭섭한대로 돌아서야 했다. 갓스므살에 나는 앳된 쇼펑이와 30대 초반을 넘어선 나는 친동생을 떠나보내는듯 애절한 마음을 눈물로 적셨다. 앞날을 기약할 처지도 아니여서 더구나 마음이 아리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쇼펑을 굳게 안아주고 일로평안을 기원하며 말을 내몰아 어둠속을 내달렸다. 나는 도적처럼 집에 들어가 이불속에서 긴장을 풀었다.
못잊을 “8대금강들”
이번엔 내가 백골난망의 은혜를 입었던 그 날의 처절했던 정경을 떠올리며 집체호 “8대금강들”에게 술을 붓고 건배한후 이야기했다. 화두를 떼기전부터 눈물이 앞서며 목소리가 울먹울먹해진다.
쇼펑이 까막골에서 깜쪽같이 사라진지 사흘째 되는 날 한밤중에 누군가 우리 집 대문을 사납게 두드려대며 고함지를 소리에 나는 초풍하듯 놀라 벌떡 일어났다. 도둑이 제발저린다고 할가, 하지만 나는 곧 마음을 가다듬고 아닌보살을 하기로 작정하고 태연하게 문을 열어주었다.
“인민민주전정이다!” 민병련장이 사납게 고함지르며 들이닥쳤고 그 뒤에 전공간사가 기간민병 세넷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대적과 맞다들린듯이 제쪽에서 공연히 긴장과 공포심을 키우며 큰대문을 지켜서고 정주문도 지켜선후 가택수색에 들어갔다, 민병련장과 정공간사는 도끼목수인 내 솜씨로 짠 허수룩한 궤짝을 열어젖히고 곰팡이 냄새가 나는 헌옷가지를 일일이 털어보고 안해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고리짝도 발칵 뒤집어놓았다. 수상한 세수수건 하나, 양말한짝도 찾아내지 못한 그들은 창고며 닭우리까지 뒤져보았지만 바라는 물건을 찾아내지 못했는지 나를 무섭게 째려보고는 바람같이 뛰여들었다가 바람같이 사라졌다. 그러나 결국은 닭쫓던 개 울 쳐다보는 격이 되고만것이다.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였고 섬약한 안해는 놀란 새끼사슴처럼 바들바들 떨고있었다. 제코가 석자인데도 싱거운 걱정으로 화를 자초하는 이 로유를 만나 아니할 고초 도 겪고있는것이다. 인간최하층에서 계급투쟁의 과녁이 되고있는 남편으로 하여 당당 한 빈하중농의 딸이 이런 수모를 받으니 얼마나 억울하랴, 결코 열화금강이라는 좋은 말처럼 문화대혁명의 세례를 받는것도 아니였으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가, 이튿날 구락부에서 투쟁대회가 열렸다. 구락부의 두 벽에는 “우파분자를 타도하자!”, “하향지식청년재교육운동을 파괴한 반혁명분자 최××를 타도 하자!”, “조선수정주의 분자를 타도하자”라는 구호가 적힌 프랑카드가 높이 걸려있었 다. 나는 속이 얼어들면서도 황당한 현실에 역반심리가 꿈틀거렸다. 이 흥안령속 깊은 오지에 끌려와 사상개조를 하며 산송장이 다된 이 로유가 인젠 국제적요시찰 인물이 되였으니 얼마나 황당무계한가! 대단한 착상이고 기발한 창조였다. 아니면 제좋을 대로 엮어대는 국제롱담인가? 지랄도 가지가지라고 해야 할것이다.
상해집체호의 8대금강이 몽둥이를 거머쥐고 나를 둘러쌌다.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여기 까막골에 내려온 할빈지식청년들은 다 같은 할빈출신인데 동정심을 가지기는커녕 평소에 사사건건 걸고들며 못살게 구는데는 정말 분노가 끓어도 해볼 처지가 아니여서 그냥 죽여줍시사 하고 들이대고 있는 판이였다. 지나간 얘기지만 고리방즈 로유가 힘깨나 쓴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한번은 힘내기를 해보자고 걸고들었다.
180근짜리 밀마대를 련거퍼 열개를 삼층높이의 밀뒤주에 쏟아넣기였다. 나는 평시 밀포대를 량옆구리에 끼고 사양실로 씽씽 날라들였다. 그런 경력이 있지만 내기는 내기인지라 젖먹던 힘까지 다 내야 할 판이였다. 죽기아니면 까무라치기였다. 나는 숨도 돌리지 않고 밀포대 15개를 밀뒤주에 메여 올리고는 “날 좀 보소.”하는 심사로 뒤주우에 앉아 마라초를 말아 여유작작하게 피웠다. 그러나 꾸역꾸역 뿜겨나오는 담 배연기는 바로 터지지 못해 속에서 끓는 화산재였다.
나와 겨루는 자는 본래 체육단에 거중선수였다는데 체대도 거쿨지게 생기여 힘장수같이 보였다. 그런데 빛좋은 개살구였던가, 여섯개를 넘기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며 두손을 내들었다. 그런 그가 그때 수모당한 봉창을 하려고 그러는지 작두로 짤라버린 참대비자루로 내 얼굴을 찔러댔다. 옛날 농촌에서 지주부농을 투쟁할 때에도 이런 악착한 짓거리는 하지 않았다. 역시 현대문명의 비애라고나 할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통봇나무를 둥근 칼판처럼 잘라서 만든 개패는 30근은 족히 되였다. 맨 목에다 건 바오리가 살을 파고들어 도저히 견딜수가 없어 자연히 머리가 숙여졌다. 그러면 고개를 쳐들라고 고함치면서 참대비자루로 얼굴을 사정없이 찔러대 였고 어떤 놈들은 무대에 올라 몽둥이로 대갈통을 부셔버려야 한다고 길길이 뛰였다.
그런데 나는 몽둥이 찜질을 당하지 않았다. 상해집체호 8대금강들이 그저 위세를 부리느라고 나를 둘러싸고 있은것이 아니였다. 그들은 겉으로는 동조하는체 하면서 뭇 눈길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게 교묘하게 나를 보호해주었다. 그들이 할빈청년들과 맞서는데는 그들이 터세를 내며 못되게 논데서 악감정이 생겼을수도 있었다.
내가 쇼펑을 남몰래 빼내준것을 알고그랬는지 몰라도 그들의 행동이 고맙기만 하 였다. 나는 그들 덕에 얼굴이 많이 상했지만 관동군에서 번역을 했다는 력사반혁명분자는 완고통이라고 몰아대며 때려죽였다. 사람잡이에는 개잡은 포수처럼 우쭐렁거리다가도 콩밭기음매기에서나 청초를 벨때면 땀벌창이 되여서 쩔쩔 매며 이 로유의 도움을 바라던 그들이 어찌하여 인성마저 다 잃고 날뛰는가싶어 오히려 불쌍하게 여겨졌다. 인간은 참으로 어디까지 잔인해져야 하는지 나로서는 알수 없었다.
대개 짐작은 하고있었지만 총부에서 쇼펑의 딱한 사정도 아랑곳없이 청가를 주지 않은바람에 상해지식청년들이 속에서 원성이 높아지고 불평부리며 일터에 잘 나오지 않는것으로 항의하기에 이르렀다. 영향도 영향인지라 바빠난 총부에서는 계급투쟁으로 그들의 정서를 전환시키고 지식청년재교육을 억세게 틀어쥔다는 취지로 나를 과녁 으로 내세운것이였다. 8대금강의 보호로 사지가 멀쩡해서 돌아와보니 이런 생사람을 잡는 지옥같은 곳에서 더는 못살겠다고 나를 마구 잡아흔들며 할빈으로 옮겨가자고 악바리를 썼다. 그의 심정은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정서는 문제의 반영일뿐 해결방법은 못되였다. 나는 정책상 그렇게는 안될 일이니 참고견디노라면 좋은 날이 돌아올것이라고 자신도 확신이 없는 말을 횡성 수설 늘여놓으며 달래였다. 그맘때는 바로 신주대지를 쥐락펴락하던 “영원히 건강하 리”라던 주인공의 집단의 음모가 파탄되고 상승장군도 운드르한에서 야심에 종지부를 찍은때였다. 천지개벽할 징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영원한 진리는 모든것 은 변한다는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이젠 정치풍도도 변해야 했다.
그후의 이야기들
이야기판이 거의 끝날무렵, 내가 그후의 쇼펑의 인생일사가 궁금해서 물었다. 쇼펑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에게는 운명의 전절점이라는게 있고 생각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는 말을 새삼스레 되새기게 되였다. 지금 돌이켜 생각만해도 머리끼가 곤두서는 그날밤이 정경이 쇼펑을 또 다시 울리고있다. 말등에 오른 쇼펑은 네굽을 안고 질주하는 말에서 떨어질가봐 나의 허리를 꼭 껴안고 두눈을 꼼 감았단다.
그렇게 목숨을 내걸고 상해에 도망쳐온 쇼펑은 끝내 어머니의 림종을 지켰고 어머니의 마지막 길에 아들로서의 도리를 다했다. 아니, 금을 주고도 바꿀수 없는 효성이였다. 어머니를 화장하고 나서 뒤마무리까지 깔끔하게 해놓은 쇼팡은 피터지도록 비판투쟁을 받을 각오를 하고 까막골에 돌아오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쇼펑의 어머니가 다니던 상해 제8방직공장의 혁명위원회에서는 쇼펑을 어머니를 대신(顶替)하여 취직시키고 국가정식로동자로 만들어주었다. 쇼펑은 공장에서 전공을 배웠다. 상해하향지식청년판공실에서는 방직공장의 강렬한 요구로 쇼펑이 있던 군마사육장의 총부와 협상하고 호구와 량식관계, 로임관계, 당안을 상해에 넘기도록 하였다. 정공처에서는 찍소리 못하고 정치표현이 아주 좋다고 문건을 작성하여 상해에 부쳐왔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꼬치꼬치 캐며 각박하게 굴었지만 정공처간사는 누이좋고 매부좋다는 식으로 쇼펑의 도주사건을 무마시켜버렸다.
다시 당당한 상해시민이 된 쇼펑은 미국에 류학간 누이의 도움을 미국의 선진기술을 도입하여 방직공장에 대변혁을 가져왔다. 개혁개방후, 상해자유무역구가 창설 되면서 쇼펑은 국영기업체제를 주식체제, 사인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얼마후 리사장으로 발탁된 쇼펑은 미국의 “내커”, 프랑스의 “아디다스” 체육단복장의 위탁을 받고 의류가공련합체를 세우고 국내외시장을 개척해 나갔다. 원래 별명이 호즈(쥐)인것처 럼머리를 잘굴리는 젊은기업가로 거듭나서 전국에서 경공업중심지인 상해에서 동방 명주탑처럼 두각을 나타낸 전도유망한 대기업가로 성장하였다…
쇼펑이 나에게 그후 살아온 이야기를 하란다. 말이 난김에 그후의 나의 후반생을 간단히 서술하고 넘어가는것이 순리일것같다.
1976년 9월 9일, 모주석이 서거하고 강청을 두목으로 한 “4인방”이 짓부셔지 자 등소평시대가 열리면서 억울하게 짓눌려 살던 수백수천만의 수난자들에게 해방으 새봄이 왔다. 나도 우파모자를 벗겨주고 정책에 따라 안치금을 내주었다. 나는 이 로유와 함께 살면서 지지리 인간고를 치르던 안해 김순이와 군마사육장에서 태여난 아들 상해를 데리고 나는 13년만에 할빈에 돌아왔다.
아무도 간섭할수 없는 자유공민으로 된 나는 떳떳한 발걸음으로 할빈 중앙대가에 있는 정치감옥의 검은대문앞을 보란듯이 지났다. 그리고 할빈의 명물로 되여있는 “홍수방지기념탑”에 이르러 기념탑의 대리석기둥을 어루쓸어 보았다. 이 기념탑에는 나의 피와 땀도 스며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냥 지나칠수 없었던것이다. 지나간 옛이야 기지만 1957년 송화강이 홍수에 범람하여 할빈을 삼키려 들었다. 하여 전도시의 청 장년들이 총동원되여 도리(道里), 도외(道外)의 송화강뚝에서 모래주머니를 메여날라 제방뚝을 높이였다. 실로 생사관두의 전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래서 나는 할빈을 그처럼 사랑하는지 모른다.
화는 홀로오지 않고 복은 쌍으로 오지 않는다지만 그해 나에게는 복이 쌍으로 왔다. 내가 남강구에 있는 모교인 할빈농업기계학원에 강사로 취직하게 되였던것이다. 앞날을 바라고 한숨을 죽이며 살다가 이런 날을 맞게 된것은 당의 영명한 시책이 전 제이긴 하지만 그날 투쟁받으면서 육신이 성한대로 살아나서 오늘 날 해방을 맞게 된것은 살벌하던 그 어려운 시기 동토대에서 인연을 맺은 상해집체호청년들의 은정을 떠나서는 생각할수 없다.
오랜세월 이 아들을 눈이 헐게 기다리며 눈물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다가 환갑나이가 되기전에 고혈압병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그 비보를 받고도 그저 동가슴을 치고 하늘을 우러러 통탄했을뿐 쇼펑처럼 림종을 지켜보지도 못하였다. 나어린 호즈는 효자였지만 나는 불효막심한 죄를 짓고 평생 후회하며 살아야 했다. 인생은 만남으로부 터 시작되고 그 첫만남은 나의 생명을 낳아준 어머니이시다. 그런 어머니를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사후청심환이라도 효성은 바쳐야 했다.
그해 8월 추석, 김순이와 아들을 데리고 금삼포 공동묘지에 오래동안 내버린채로 있어 스산하기 그지없는 어머니산소를 찾아가서 벌초를 한후 어머니령전에 술을 올리 고 이마가 땅에 닿도록 깊은 절을 올리고 또 올렸다. “어머님, 이 불효자식이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불러봐도 외워봐도 대답이 없을 어머님이지만 정말 죄송합니다. 손자 의 술을 받으세요. 흥안력 까막골에서 망아지 쇼상해와 같은 날에 태여났고 상해지식 청년들의 은정을 기념해서 상해라고 이름지은 손자입니다.”
여기 이 젊은각시는 송포에 있는 조선족마을에서 열여덟 애어린 나이에 이 로유 에게 시집온 나의 안해입니다. 며느리가 술을 부어올립니다. 지각한 효성이라도 기 쁘게 받으십시오.” 술도 다 붓고 절도 올렸지만 만리장천을 우러러 허무한 인생을 개탄하며 굽이굽이 서리고 얽히는 만단회포에 눈물로 봉분을 적시였다.
아름다운 인연에 또 한매듭 짓다
더불어 살게 되여진 세상에 인연으로 얽히는 인생마당이여서 사람은 누구나 다 인연으로 산다. 좋아도 인연이고 나빠도 인연이여서 살아가면서 인연으로 웃게 되고 인연으로 울게도 된다. 인연으로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피해도 보기도 하기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좋은 인연을 맺고도 그것을 모르고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좋은 인연인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이어간다. 맺아지고 풀어지는 인연속에서 삶이 좋아지고 힘들어진다. 그래서 좋은 인연이란 시작이 좋은 인연이 아니라 끝이 좋은 인연이라 하는것이다. 시작은 나와 상관없이 시작되였어도 인연을 어떻게 마무리하는가는 나 자신에게 달렸다고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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