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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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하이퍼시창작론》

하이퍼시 10대 촉구 9.하이퍼시는 단일체가 아니라 다양체를 촉구
2017년 12월 30일 18시 35분  조회:704  추천:3  작성자: 최룡관
9.하이퍼시는 단일체가 아니라 다양체를 촉구


 
<<창세기>> 첫머리에 이런 대목이 있다. 하나님이 첫째날에 낮과 밤을 만들고, 둘째날에는 물과 하늘을 만들고, 세째날에는 땅에 풀씨와 나무씨를 주고, 네째날에는 물들이 생물을 번성하게 하고 새를 하늘에 날게 하고, 다섯째날에는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을 만들고 …사람을 만들고  남자와 녀자를 만들어 번성하여 다스리라 하고, 여섯째날에는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열매의 나무를 사람에게 주시고, 기는 놈이고 뛰는 놈이고 나는놈이고 가리지 않고, 생명이 있는 모든것들에게 푸른 풀을 주어서 먹고 살아가게 하였다.  이렇게 엿새동안에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만들어내였단다. 사실 이것들은 새로운 사물이 생성됨을 이야기한것이다. 사물들은 모두 이질적이다. 하이퍼시의 다양체란 이렇게 이질적인 사물들의 련속적인 산생을 쓰는것이라고 할수 있다. 노자가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되고 셋이 세상만물이 된다는것도 사물생성의 련속성과 이질성을 말한것이고, <<주역>>에서 태극이 양과 음을 낳고 양과 음의 기에 의해서 세상사물이 생성된다는것도 실은 무의식이 다양체를 생성한다는 말과 다를바가 없다는 말이겠다. 주역은 5000년의 력사를 가지고 있다하고 창세기는 3500년의 력사를 가지고 있단다.주역은 유물론적이고 창세기는 유심론적인것으로서 주역과 창세기는 다른 학문이다.  창세기는 세상 만물을 하나님이 만들었다지만 주역은 양과 음의 기에 의하여 사물이 생성되였다고 하였다.  이렇게 여러가지 사물의 생성을 시적으로 쓰는것이 하이퍼시다.
 련이어 새로운 사물이 나타나게 하는것을 시에서는 다양체라고 한다.  다양체란 이질적인 리좀들의 두개이상의 집합을 말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하면 다양체란 말은 여러가지  리좀이란  말과  다름아닌데 일본의 우노 쿠나이치교수의 해석에 의하면 리좀은<<단지 끝없이 련결되고 도약하여 일탈하는 요소의 련쇄이다>>.(<<천개의 고원>>.98쪽) 20세기까지 우리 시들은 거개가 단일체였다고 할수 있고 , 21세기 시는 단일체가 아니라 다양체로 전의되고 있다. 다양체의 리좀은 기승전결이 아니라 기와 결이 따로 없다. 기이자 결이고 결이자 기이다. 리좀은 중간에서 생성되며 그속에서 충만되고 그속에서 넘쳐난다. 이것이 특점이기에 시에서 행을 대상으로 한  리좀이라면 행을 마음대로 바꾸어놓아도 되고, 련을 대상으로  한 리좀이라면  련을  마음대로 바꾸어놓아도 문제되지 않는다. 리좀과 리좀은 서로 본성이 다른것으로서 이미의 련결을 부인하며, 한리좀이 하나의 주제를 나타내고있다. <<하이퍼텍 스트3.0>>에서 례를 든 시 한수를 더보자. 아마 이 시는 하이퍼시의 법문에 속하는 시라고 할수 있겠다.
 
영웅의 얼굴
조슈아 래파포트
 
늙은 바이나모이네넨이 노래부른다
호수에 잔물결이 일고, 지구가 흔들리며
구리산이 떨어진다
억센 옥석들이 덜커덕 굴러가며
절벽이 둘로 갈라지고
돌들이 해변을 철썩 때린다
그는 젊은 요우카하이넨을 노래한다
그의 칼라활에 묘목을 얹고
말의 멍에엔 버드나무 관목
발자국끝에는 호랑버들
그의 금테 두른 썰매를 노래하며
바닷가에 있는 갈대에
구슬로 매듭지은 그의 채찍을 노래한다
 
먼저 이 시속에 등장하는 인물부터 보자. 바이나모이넨은 영원한 현자라는 뜻으로서, 칼레라바의 주인공이다. 요우카하이넨은 바이나모이넨의 라이벌이다. 둘은 신분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둘은 노래 경연을 한다. 요우카하이넨이 지면 녀동생을 바이나모이넨에게 주기로 한다. 요우카하이넨이 지자  그의 녀동생은 자살을 택한다.  요우카하이넨은 바이나모이넨을 죽이려고 하나 성공하지 못한다. 한수의 짜른 시에 대립되는 두 인물이 선택된 자체가 이색적이다.
 
늙은 바이나모이네넨이 노래부른다
호수에 잔물결이 일고, 지구가 흔들리며
구리산이 떨어진다
억센 옥석들이 덜커덕 굴러가며
절벽이 둘로 갈라지고
돌들이 해변을 철썩 때린다
 
 
바이나 모이네넨이 부른 노래이다. <<호수에 잔물결이 일고, 지구가 흔들리며/구리산이 떨어진다>> 여기에 세개의 <<구어적몸짓>>이 있다. 구어적몸짓이란 언어로 표현된 사물의 움직임이다. 몸짓마다 다른 사물들의 운동이다. 첫번째의 몸짓은 <<호수의 잔물결>>이고 두번째 몸짓은 <<지구의 흔들림>>이고 세번째 몸짓은 <<구리산이 떨어진다>>이다. <<억센 옥석들이 덜커덕 굴러가며/절벽이 둘로 갈라지고/돌들이 해변을 철썩 때린다>>에서도 옥석들이 굴러가며부터 일어나는 구어적몸짓이므로 련결이 아니라 분리이다.  굴러가며는 절벽이 둘로 갈라지는 원인같지만 토<<ㅡ며>>는 동시에 어떤 행동이 일어남을 표현하는것이지 <<ㅡ면>>처럼 앞의 문구가 뒤의 문구의 조건을 지어주거나 원인이 되는것이 아니다. 또 있다. <<절벽이>>에서  토<<ㅡ이>>가 주어를 표시하므로 앞의 행동의 련결이 아니라 <<절벽>>자체의 운동이라는것이다. 아래행의 <<돌들이>>도 위와 마찬가지이다. 시전반에서 차원이 다른 새로운 사물이 련계되든 말든 관계하지 않고, 한 사물이 나타나면 뒤에 사물이 나타나면서 먼저 사물을 밀어버린다. 나타나고 밀어버리고 하는것을 반복적으로 일으키는것이 바로 다양체의 수법으로 되는것이다.
 
그는 젊은 요우카하이넨을 노래한다
그의 칼라활에 묘목을 얹고
말의 멍에엔 버드나무 관목
발자국끝에는 호랑버들
그의 금테 두른 썰매를 노래하며
바닷가에 있는 갈대에
구슬로 매듭지은 그의 채찍을 노래한다
 
요우카하이넨을 노래한 내용이다. 이 노래는 언어의 흐름들이 천만뜻밖으로 흘러간다. <<칼라활에 묘목을 얹는다>>.  <<말의 멍에엔 버드나무관목>>이란다. <<발자국끝에는 호랑버들>>, 일상적인 문법으로 말하면 맞지도 않는 무질서이다. 아래 세행도 마찬가지다. 금테두른 썰매, 바다가 갈대, 구슬로 매듭지은 채찍, 각행은 하나의 리좀이다. 세행이 각기 다른 리좀의 라렬이다. 기성의 관념으로는  이러한 시는 해설이 가능하지 않다. 롤랑바르트의 말을 빌리면 이러하다. <<구어적몸짓은 대자연을 수정하는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하나의 조물주와 같다. 그것은 의식의 태도가 아니라 관계의 행위이다. 이것이 바로 최소한 근대적시인들, 자신들의 의도를 끝까지 밀고 가는 그 시인들의 언어이다. 그들은 시를 정신적인 실천, 령혼의 상태 혹은 립장의 계시로 받아들이는게 아니라 꿈꾸어진 언어의 찬란함과 신선함으로 받아들인다. >> (<<글쓰 기0도 >>49쪽)  <<그의 칼라활에 묘목을 얹고/말의 멍에엔 버드나무 관목/발자국끝에는 호랑버들>>.  기성의 문법대로 하면 죄다 병구이다. 하지만 이런 시구는 <<의식의 태도>>인것이 아니라 <<관계의 행위>>이며 <<구어적몸짓>>으로 대자연을 수정한것이라고 할수 있다. 이말은 첫째 시속에 의식의 태도가 나타나지 않아도 된다는것이다. 의식이 태도란 무엇인가? 시인의 감정이나 립장이다. 그러니 시에선 시인의 감정이나 태도를 표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된다. 시는 <<의식의 태도>>가 아니라 <<관계의 행위>>란다. 어떤것이 관계의 행위인가? << 칼라활>>과 << 묘목>>, << 말멍에>>와 <<버드나무관목>>, <<발자국끝>>과 <<호랑버들>>들이 이항대립관계를 이루며 <<구어적몸짓>>을 이룬다고 하겠다. <<바닷가에 있는 갈대에/구슬로 매듭지은 그의 채찍을 노래한다>>에서는 <<바다가>><<갈대>>와 <<구슬매듭>> 및 <<채찍>>등 네개의 차원이 다른 물질들이 동시에 대립을 이루며 련합되여있다고 할수 있다. 이러한 시구들은 시인의 어떤 의식의 흐름인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흐름이다. 시인은 어떠한 의식도 표현하지 않고 사물들의 관계의 흐름을 보여주고있다고 하겠다. 이 관계의 흐름만을 표현한다는것은 사실주의의 립장에서 말하면 망태기다. 현대주의립장에서도 사이비한것이다. 이런것들은 <<시를 정신적인 실천, 령혼의 상태 혹은 립장의계시로 받아들이는>> 현대주의인것이 아니라 <<꿈꾸어진 언어의 찬란함과 신선함으로 받아들이는 >>구조주의의 하이퍼텍스트이며 무의식의 산물인것이다.
 이러한것에 대하여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렇게 말한다.<< 다양체는 그것이 차원수에 의해 규정되는것이다. 다양체는 본성이 변하지 않고서는 나누어지지도 않고, 자원을 잃거나 얻지도 않는다, 그리고 다양체의 차원들의 변화는 다양체에 내재하기때문에, 이것은 결국 각각의 다양체는 이미 공생하고 있는 다질적인 항들로 조성되여있으며, 또는 각각의 다양체는 그것의 문턱들과 문들을 따라 일렬로 늘어선 다른 다양체들로 끊임없이 변형된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이다. >>(<<천개의 고원>>473-474쪽)여기서 차원이란것이 무엇인가를 극명하게 밝히고 있다. 차원이란 우의 리좀과 아래의 리좀의 <<본성이 변해야>>한다는것이다. 본성이 변해야 한다는것은 우의 리좀과 아래의 리좀이 성질이 다른 사물이여야 한다는 말로 풀이 된다. 더 해석하면 우의 리좀이 물이라면 아래의 리좀은 돌이거나 태양이거나 불이거나 변소간이거나 …자연적인 다른 사물이거나 문화적인 다른 사물이여야 하는것이다. <<결국 각각의 다양체는 이미 공생하고 있는 다질적인 항들로 조성되여>> 있다는것이다. 소위 공생이란 한수의 시속에서 함께 살고있다는 말이 되겠다. 이런 변화와 공생은 다양체라는것에 내재되여있단다.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을 출간한 니콜러스 로일은 이렇게 해석한다. <<선 하나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의미를 표현하려면 반드시 두번째선이 필요하다. 이것은 중대한 사유법칙이다.>>(<<자크 데리다의 유령들>> 230쪽.)여기서 말하는 선이란 한개 사물의 운동을 말하것이고  두번째 선이란 앞의 사물과는 련계도 되지 않는 새로운 사물의 운동이라고 리해하면 된다고 생각된다.
롤랑 바르트는 <<담화는 의도의 예상도 연속성도 없으며 따
라서 언어의 사회적기능에 매우 대립되기때문에 어떤 불연속적 인 말에 단순히 의존하기만 해도 모든 고유한 초자연들의 길이 열리게 된다. (<<글쓰기 0도>>.47쪽) 담화라는 말은 리좀으로 보아도 되겠다. 리좀은 하이퍼시의 중심적이고 핵심적인 명제이다. 가장 간단한 말로하면리 <<리좀은 계층도 중심도 없고, 초월적인 통일도 또 이항대립이나 대칭적인 규칙도 없으며, 단지 끝없이 련결되고 도약하여 일탈하는 요소의 련쇄이다.>>(<<천개의 고원>>982쪽) 결국은 언어의 기능의 작용으로서 련계되고 분리되고 도약하는것이라고  생각한다. 니콜러스 로인과 롤랑 바르트의 말은 더 해석하지 않아도 리해되리라 믿는다.
우에서 인용한 세석학의 말은 대동소이하다. 종합하면 아래와 같을것이다. 1) 다양체는 차원이 다른 사물들의 모임이다. 차원이 다르다는 말은 각각의 사물들의 성질이 완전히 다르다는 말이겠다. 2) 사물들은 고정되여 있는것이 아니라 운동하며 변형된다는 말이겠다. 3) 각각의 사물들은 어느것도 주체가 아니기에 죄다 중심밖에 있다는 말이겠다. 4) 각각의 사물들의 관계속에서 의미가 산생된다는 말이겠다. 이런 관점은 세석학만이 하는것이 아니라  소유의 구조주의자들은 다 이렇게 말한다. 이미 언급되였지만 구조주의란  인류학과 언어학이다. 문학은 언어학에 속한다. 언어학에 대한 구조주의 주요한 주장은 언어는 변형되며, 언어의 흐름이 바뀌는것이다.  한번 변형되는것이 아니며, 한번 바뀌는것이 아니라 여러번 변형되고 여러번 바뀐다는것이다. 그리하여 이미지는 예기치 못했던 돌발성과 기습성, 기의성과 신비성을 구비하게 된다는것이다. 그리하여 조슈아래파포트의 시 <<영웅의 얼굴>>처럼 그로데스크(괴상한)한 이미지와 이미지 련결이  나타나게 된다.
아래에  시 한수를 더 보자.
 
설레임1                                             
김철호
 
18층 빌딩에서
커다란 새 한마리가 뛰여내린다(1)
콩크리트바닥과 만나 춤추는 피아노파편들
 
명예란 공중루각이라고 소리친다(2)
 
자판기우에서 혈흔들이 날뛴다(3)
불바람이 어슬렁거린다(4)
스마트폰이 사람들 얼굴을
뭉청뭉청 뜯어먹는다
머리 없는 그림자들이 활처럼 휘여져있다(5)
 
검은 새 흰 새들이 서로를 찾아부르짖고
암수들이 부둥켜안는다(6)
 
콩크리트바닥에서 피아노가 환생했다
피아니스트는 70먹은 할망구다(7)
흰 머리카락들이 강선이 되여
땡땡 소리친다(8)
음악이 나봐라 얼굴 내밀었다가
너 죽는다 주먹질이다(9)
 
석간신문이 벽돌장이 되여
웃는 얼굴에 날아가 박힌다
 
독자는 한명도 없다.(10)
 
길지만 지루하지 않다. 아니 지루할 사이가 없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새로운 사물이 뛰여나와 자신을 표현하고있다.설렌다 설렌다. 시인도 설레고 독자도 설렌다. 신선한 사물들이 사람을 설레게 만든다. 하이퍼시단위로 나뉘여 번호를 달아보니 도합 열개의 단위들이다. 열개의 리좀이란 말이겠다. 시는 피아노에서 풀쩍 뛰여 자판기로 갔다가 자판기에서 훌쩍 뛰여 스마트폰으로 갔다가 다시 피아노로 돌아왔다가 석간신문으로 풀쩍 뛰여간다. 그리하여 리좀들이 열리는가 하면 막히고, 막히는가 하면 열리고, 열리는가 하면 도약한다.  경상이 이채롭다. (2)와 (10)에서 행을 가르지 않아도 될것을 시인은 갈라놓은 같고 , (7)과 (8)은 련을 띄여도 될것을 붙여놓은 같다. 시인은 시행이나 련의 조직의 위계질서를 파괴하면서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같다. 시는 은어들로 차고 넘친다. 필자가 보기엔 18층빌딩은 피아노이고 처음 나오는 새는 폭팔적인 음악이고, 흰새, 검은새는 피아노의 검은 건반과 흰건반이다…질박한 언어로 언어의 코드를 바꾸는 저력이 돋보인다. 그래서 시의 흐름이 딱딱하지 않고 활기로 넘친다.  전반시가 상상과 환상의 도가니속에서 사물들이 놀이를 하고있고, 음과 양의 기가 성해서 현실에서 초월을 가든, 초월적인 링크(18층빌딩, 자판기, 스마트폰, 석간신문…)로 뛰여넘기를 하든 어색하지 않고 스스럼이 없다. 그외에 <<70먹은 할망구>> 같은 유모어까지 …
시는 사상을 말한다기보다 의미를 말한다는 경우에 속하는 문체라고 할수있다. 그 의미도 직설인것이 아니라 에둘러 이미지로 말하는것이라겠다. << 석간신문이 벽돌장이 되여/웃는 얼굴에 날아가 박힌다//독자는 한명도 없다.>> 이 <<설레임1>>의 마지막 두련에서 무슨 의미를 전달하려고 하는가? 석간신문이  독자한테로 가지만 벽돌장이 되여 보는 사람이 없다는것이다. 이 이미지내용의 자체가 의미인것이다. 석간신문과 벽돌장사이는 은유로 되여있다. 왜 보는 사람이 없는가? 신문이 벽돌장이기때문이다. 당연이 이것은 외연이다. 시는 외연이 중요하다. 외연이 없으면 내연이 없다. 외연속에 잠긴 내연을 들추어내서 깨닫는것이 시이다. 독자마다 흔상능력이 달라서 내연을 파보는것도 다르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신문이 새소식을 쏘아야 하는데 벽돌장이 되였으니 고정물이 되였다. 벽돌장은 언제나 한모습 한색갈이다. 사람이 석간신문을 찾아야 하는데 오히려 석간신문이 사람을 찾는단다. 그래서 벽돌장이 된 신문은 보는 사람이 없다(이 표현은 조금은 직설적이지만)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벽돌장과 신문과의 관계를 말하는것이지만 여기로부터 새로운 의미로 확장시키게 된다. 사실 이 시구들은 새것과 낡은것의 대결이라고 읽게 된다. 낡은것을 고집하고 새것을 배척하는것은 전도가 없다는 말이 되겠다. 이렇게 흔상해보면 정말 가치가 있는 하나의 리좀이 되고 령토가 된다.
령토란 또 무엇인가. 시속의 하나의 실체이고 리좀이라고 할수 있다. 이 령토는 리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한다. 마냥 변하려고만 하는것이 령토이다. 언제나 탈령토화 하려하고, 언제나 재령토화를 실현하려한다. 하이퍼시는 우선 령토화를 해야 하고 다음에는 탈령토화와 재령토화를 해야 한다. 탈령토화와 재령토화는 동시에 진행된다. 김철호시인의 시에서 이미지가 피아노로부터 자판기로, 다시 스마트폰으로 다시 석간신문으로 전의하는데 이러한것이 령토화, 탈령토화 , 재령토화라고 할수 있다. 령토화는 한사물에서 일어나지만 탈령토화된 사물은 원래의 령토화된 사물과는 다른 사물이여야 한다.  이미지가 다르면 다를수록, 멀면 멀수록 좋다. 그렇게 되여야 하이퍼시의 다양체가 이룩되는것이다. 이런 다양체는 시인의 감정이 아니라 시인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사물인것이다. 다양체에는 또 지층이란 말도 있다. 지층에도 재령토화처럼 주체가 없는것이 특점이다. 모두 겉지층이거나 겻지층이다. 한마디로 옆지층이다. 모두가 옆지층이니까 중심이 없다. <<설레임1>>에서 피아노가 나오고, 자판이 나오고, 스마트폰이 나오고, 석간신문이 나오는데 이 네가지 사물은 다 대등한 관계이지 어느 사물이 주체이고 어느 사물이 부속물인지 가릴수 없다. 피아노가 있기 때문에 자판이 있는것도 아니고, 자판이 있기때문에 스마트폰이 있는것도 아니고, 스마트폰이 있기때문에 석간신문이 있는것도 아니다. 사물들은 각자 존재이며 독립적이며, 어느 사물도 다른 사물의 종속도 아니고, 어느 사물도 다른 사물과의 인과관계로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다. 이런것을 분리라 하고 일탈이라 하고, 새로운 사물의 산생이라고 하고, 조화라고 하겠다. 어떻게 이런 생성이 이루어지는가? 피아노도, 자판도, 스마트폰도, 석간신문도 다 치거나 눌러야 하는 과정이 수요되며, 그것들 모두가 사각형사물이므로 서로 련계된다고 하겠다. 이런 동일성을 지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사실 시에서 사물의 동일성을 론하는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사물에는 동일성이 없어도 언어에는 동일성이 있기에) 시는 처음부터 독자들이 지각하기 어려운 언어들로 흘러내려가고 있다. 특히 (3),(4),(5), (10) 돌출하다고 하겠다. 상상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는 이러한것들은 집합이라 하고 무질서로 구성된 시라고 하겠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런 리좀구성에 대하여 <<의문의 여지 없이 지각할수 없는것 –되기이다. 지각할수 없는것은 생성의 내재적끝이며 생성의 우주적정식>>(<<천개의 고원>>. 529쪽)이라고 하였고, 롤랑 바르트는 <<무질서는 세계를 만들어낸다.>>(<<글쓰기 0도>>. 98쪽)고 하였다.
문덕수의 시 한수를 더보자.
 
마릴린 몬로
    문덕수
 
마릴린 몬로가 호텔을 노크한다
제 유방 하나를 떼여 벽에다 걸어놓는다
 
마릴린 몬로의 떼가 몰려온다
제 혼자 혹은 손잡고 어깨동무하고
혹은 휴대폰을 걸면서
종로에서 브로드웨이에서 인천국제공항에서
메뚜기처럼 뛰면서
금방 부화한 바다가 모래밭의 자라새끼처럼
 
마릴린 몬로의 노란 버스
마릴린 몬로의 빨간 비행기
마릴린 몬로의 분홍SST
마릴린 몬로의 파란 자전거
마릴린 몬로의 록색 트럭
 
유방이 없는 마릴린 몬로가
고층빌딩 한개씩 들고 들어온다
              ㅡ<<마릴린 몬로>> 전문
 
마릴린 몬로는 (1926년 6월 1일 ~ 1962년 8월 5일)는 미국의 배우, 모델, 가수로서 본명은 노마 진 모턴슨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초 상업적으로 많은 성공을 거둔  영화에 출연하면서 섹스 심벌이 되었다고 한다. 이 시에서 심벌의 되는 중점시구는 <<제 유방 하나를 떼여서 벽에 걸어놓는다>>,<<마릴린 몬로의 떼가 몰려온다>>, <<고층빌딩 한개씩 들고 들어온다>> 등등 이다. 첫 구는 자기의 초상을 걸어놓는다로서 녀자임을 나타내고, 둘째 시구는 팬들이 몰려온다이고, 세째 시구는 비즈니스가 잘 된다로 풀이 될것 같다.
이 시에 대하여 한국의 심상운시인은 <<마릴린 몬로는 여성 이미지
환유라고 말할수 있지만 집합적이미지들은 서로 론리적맥락이나 인
과를 맺지 않는 당돌한 결합이라는 점에서 독립성을 갖는다>>고 평하
였다.
<<마릴린 몬로>>라는 언어가 여러번 중복하였는데 이러한 중복
을 하이퍼시에서 리토르넬로라고 한다. 리토르넬로가 들어가면 다음에
나오는 언어들은 꼭 앞의 언어들과는 관계없는 새로운 언어들이 나와
야 한다. 다시 말해서 앞의 사물과는 관계없는 새로운 사물이 생성되
여 나와야 한다는것이겠다.
 
마릴린 몬로의 노란 버스
마릴린 몬로의 빨간 비행기
마릴린 몬로의 분홍SST
마릴린 몬로의 파란 자전거
마릴린 몬로의 록색 트럭
 
전반시가 리토르넬로로 구성되였다고 할수 있는데, 특히 세번째련
에 리토르넬로가 집중되여있다. 이 세번째련에서  리토르넬로뒤에
나오는 사물들이 서로 다른 사물이라는것을 금방 알수 있다. 처음에는
<<노란 버스>>가 나오고, 그담에는 <<빨간 비행기>>가 나오고. 그담
에는 <<분홍SST>>가 나오고, 그담에는 <<파란 자전거>>가 나오고,
그담에는<<록색 트럭>>이 나온다. 노란 빨간 분홍 파란 하고 색갈을
올리여 리좀들의 모임이 눈부시다. 리토르넬로에 의하여 서로 다른 사
물들이 생성되여 나오는것을 우에서 말한것처럼 령토화 탈령토화 재령
토화라고도 한다. <<다양체들은 현실이며, 어떠한 통일도 전제하지 않
으며, 결코 총체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며 절대 주체로 돌아가지도 않는
다. 총체화, 전체화, 통일화는 다양체속에서 생산되고 출현하는 과정들
일뿐이다.>>(<<천개의 고원>>.5쪽)라는 말을 똑똑하게 리해시키고 있
다고 하겠다. 3련의 리토르넬로는 주체를 타자화하는 수법을 기발하고
도 활발하게 리용하여 독자들에게 시의 새로운 멋을 각인시키고, 새로
운 맛과 여운을 풍미한다.
<<주역>> 413쪽에 이런 리치가 적혀있다.<<사물이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한참 간다>> (穷则变,变则通, 通则久) 궁이란 궁극이란 말로서 끝이나 마지막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한 사물이 발전하여 끝이나 마지막에 이르면 새로운 사물이 생성되는데 이 두사물은 차원이 다른 사물이다. 차원이 다른 사물이 생성되면 서로 통하게 되고 통하면 한참 간다는것이다. 소위 한참 간다는것은 생명력이 강하다는 표현이 되기도 하고 또 변할수도 있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시적으로 말하면 한 이미지가 완성되면 차원이 다른 이미지가 생성되는데 그것들은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련결되였다는 말이 되고, 소위  한참 간다는 말은  이미지들이 탄탄한 한수의 시를 이룬다는 말이 되고 새로운 이미지가 생성될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함의가 깃들어있다겠다.
 우에서 뱀은 기러기가 된다든가 황소가 사자가 된다든가 호랑이가 꾀꼬리가 된다는 고전을 인용하였는데 다 이런 도리다. 뱀과 기러기, 황소와 사자, 호랑이와 꾀꼬리는 보기에는 대단히 다른 사물이지만 통한것이다. 원나라때의 마치원의 <<秋思>>도 명사적라렬로 되였지만 그녀석들은 서로 통하고 있는것이다. 하이퍼시가 다양체란 말은 바로 중국고대에서 말하던 이런 문학의 활발한 부활이라고 할수 있는것이 아니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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