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사람.동식물.언어/오솔길의 고백/함박눈/살아있는 혼의 뼈다귀/ 얼음꽃/환상의 성ㅡ시/입술연지/진달래/구름 별곡/안개/ 련꽃 이야기/ 시에 대하여/연이네 늪을 읽다/
사람. 동식물. 언어
필자는 지금 세느강반을 걸어가고 있다. 여긴 파리의 노란 자위이다. 세느강에는 채색 기발을 날리는 유람선들이 물결에 새하얀 여덟 팔(八)자를 쓰면서 오간다. 뒤에는 파벨탑이 소소리 하늘 찌르고 서있고, 파벨탑과 나의 중간의 하늘에서 원으로 된 유람기구가 돌아가고 있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으로 걸어가던 필자는 이따금 발길을 멈춘다. 길좌우에는 유명한 조각품들이 줄느런히 서있다. 한조각앞에서 나의 발은 길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참 희한한 조각상이다. 사자의 몸뚱이에 미녀의 상반신이 붙어있는 조각상이다. 사람과 짐승이 한몸이 되여있다. 야릇함이 묻어나는 조각상이다. 조금 가다가 또 발이 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이번에는 범과 사나이가 붙은 조각상이다. 저도 모르게 <<세상에!>> 하고 찬탄이 나간다. 필자의 머리속에는 얼결에 단마르크 해안에 있는 미인어조각상이 떠오른다. 물고기 몸뚱이게 배뿍이 보이는 미인이 붙은 조각상이다. 또 고루려 벽화에 그려진 미인새도 떠오르고 싱가포를 잉어사자가 한몸이 된 머라이언도 떠오른다.
사람과 짐승이 하나가 되고 물고기와 사람이 하나가 된 조각상이고 새와 사람이 하나를 이룬 그림인가 하면 잉어와 사자가 하나로 된 조각상이다. 그러니까 사람과 짐승, 사람과 물고기, 사람과 새가 물고기와 사자가 같다는 말이 되겠다. 사람이 범이 될수 있고 사자가 될수 있고 물고기가 될수 있고 새가 될 수 있고 잉어가 사자가 될수 있다는 의미이고, 범이 사람이 될수 있고 사자가 사람이 될수 있고 물고기가 사람이 될수 있고 새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자가 물고기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또 짐승이 물고기나 새가 될수 있고, 물고기가 짐승이나 새가 될수 있다는 의미도 있겠다. 이 성질이 완연히 다른 사람과 짐승, 물고기 짐승 및 새가 하나로 될수 있다는 경의로움이 필자의 뇌리를 아프게 촉동한다. 이런 촉동을 받아보기는 처음이다. 파리에서 많은 명승을 구경하였지만 이렇듯 사이비하고 황홀한 촉동을 받아본 적이 없다. 세상만물이 서로 어울릴 수 있고 하나로 될수 있다는 증언이 아니겠는가!
필자의 사유는 날개를 펼치고 번개의 속도로 중국 고대로 날아간다. 중국 고대 당나라 때, 사람을 열두개 띠로 나누어 표현하였다. 열두개 띠에는 쥐띠, 소띠, 범띠, 토끼띠, 룡띠, 뱀띠, 말띠, 양띠, 원숭이띠, 닭띠, 개띠, 돼지띠가 있는데 이 열두가지는 짐승과 사람이 같다는 말이 되겠다. 열두가지 띠는 또 열두가지 사물로 변한다고 한다. 쥐는 봉황으로, 소는 사자로, 범은 꾀꼬리로, 토끼는 꿩으로, 룡은 제비로, 뱀은 기러기로, 말은 사슴으로, 양은 공작새로, 원숭이는 비둘기로, 닭은 참새로, 개는 송학으로, 돼지는 앵무새로 변한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사람이 24가지 동물로 변할수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쥐, 소, 범, 토끼, 룡, 뱀, 말, 양,원숭이, 닭, 개, 돼지로 변할수 있을 뿐만 아니라 봉황, 사자, 꾀꼬리. 꿩, 제비, 기러기, 사슴, 공작새, 비둘기, 참새, 송학, 앵무새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렷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은 모든 동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며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동질성이나 동일성이 있다는 것이다.
실은 사람과 짐승(모든 동물 포함), 사람과 물고기뿐 아니라 사람과 곤충까지도 동일성이나 동질성이 너무나 많다. 모두가 입으로 먹고, 홍문으로 싸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소리로 말한다. 물론 사람들은 녀석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자식들 언어를 모르니까. 이렇듯 동물과 사람, 사람과 물고기 및 곤충류가 서로 전의할 수 있는 조건이 있는데 사람과 식물은 동일성이 없을가? 있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다 세상에 태여났다가 죽는다. 다 물을 먹어야 산다. 다 해빛과 달빛 솟에서 산다. 다 짝짓기를 하여야 후대를 번식한다. 사람과 식물의 짝짓기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사람은 여러가지 식물을 먹어야 살 수 있다. 어떤 식물은 곤충을 먹고 사는 것도 있다. 식물의 뿌리에 시체를 묻으면 그 식물이 왕성하게 자라는데 그것은 식물이 사람을 먹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사람도 식물도 동질성이나 동일성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죽어서 련꽃이 되였소, 죽어서 나비가 되였소 하는 옛말들은 다 이런 도리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겠다.
명나라의 유명한 철학가 왕양명이 세상사물은 다 형제간이라고 하면서 모든 사물들의 아버지는 하늘이고 어머니는 땅이라고 하였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곤충이나 물고기나 이 세상 모든 사물은 다 땅에서 태여나고 하늘을 쓰고 산다. 그러니 다 아버지는 하늘이고 어머니는 땅이 아니랴. 다 하늘과 땅의 똑 같은 자식이 아니랴.
고대로 갔던 사유는 이번에는 현실문학으로 돌아온다.
문학에서 특히 시에서 한 사물이 다른 사물로 변하였을 때 어떤 사람들은 이게 어디 리치에 맞는가? 시인의 미친 소리다 라고 한다. 시란 사물들의 새로운 관계를 밝혀내고 사물변화로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여는 상상적 언어작업이다. 무의식속에서 새롭게 사물이 산생된다는 것이 시적 사유의 근본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의식에 맞추어 시를 써야지 초월하면 안된다는 독단주의 견해를 내세워선 안되는 것이 아닐가! 세상 사물은 모두 한집안 식구라는 개념이 똑똑하게 박히지 못한 실례가 아닐가! 필자는 사유를 부단히 해방하면서 세상 사물은 한 집안이란 사유로 모든 문제를 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사물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고 하였다. 변하는 데와 통하는 데는 조건이 없다. 시에서 사물의 동일성을 사유하는 시간은 몇십분의 1초 내지 몇백분의 1초라고 한다. 사물사이에 몇십분의 1이나 몇백분의 1이 비슷하기만 해도 서로 소통할수 있고 서로 전의할수 있다는 말이 되겠다.
실은 모든 사물은 동일성이 있고, 모든 언어는 자유로운 결합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매우 바보스러운 말이지만 자못 중요하다. 이 말이 통하는가 통하지 않는가는 기성관념을 버리는가 안 버리는가와 관계되며, 무의식으로 사물을 대하는가 안 대하는가와 관계된다.
문학은 언어 조합작업을 한다. 언어나라에는 왕이 없고 일률 평등하고, 법이 없고 자유만이 존재한다. 낱말들은 언제나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고 조합될 수 있는 것이다. 돌과 모든 명사, 수사, 대명사, 접두사, 동사, 형용사, 부사가 아무 때나 자유로이 어울릴 수 있는 것이다. 믿지 못하겠으면 마음 속으로 한번 실험해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어느 것이나 다 말이 맞고 어느 것이나 다 순하게 통하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언어자유의 본질이고 기능이라겠다. 낱말들은 사물들보다 더 가까운 한혈통이고 한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은 언어를 가지고 쓰는 것이지 원 사물자체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지구는 사물의 대동세계이고 문학은 언어의 대동세계이다. 어허, 말이 길어졌네. 저 삼층집이 디긋자로 둘러 앉고 유리 피라밋으로 출입구를 만든 루브르 박물관으로 발길을 옮겨야지. 하고 나의 뇌가 명령한다.
오솔길의 고백
나 오솔길이야. 아라비야수자로 말함 내리금 1자이고. 한자로 말함 –자 건너금, 훈민정음으로 말하면 ㄹ자. 영어로 말함 S. 내리금은 추락이요 건너금은 횡단이고, ㄹ나 S는 꼬불랑. ㅎㅎ꼬불랑은 횡단도 있고 추락도 있고, 동서가 갈라졌어. 동양은 왼쪽 오른쪽, 서양은 오른쪽 왼쪽, 지도를 보면 서양은 왼쪽, 동양은 오른쪽, 아마 서로가 통하고 싶어 그런가보지. ㅎㅎ
산의 오솔길에 네각을 뻐드리고 뫼부리를 머리에 베고 누우면 가관이야. 하늘에 구름이 흐르고 바람이 설렁거리며 내 몸을 쓰다듬어 주지. 좌우에서 꽃들이 풀들이 싱그러운 향기도 풍기고 아름다운 풍경도 만들어주지. 참나무 자작나무 고로쇠나무들이 기립하여 나의 호위병으로 대렬을 짓기도 하지. 맞아. 이 산의 왕이야 나지. 왕이라고? 추한 생각. 응당 왕이 아니라 자연의 일속이라고 해야지.
앞내는 뱀이야. 구불구불구불, 어디서 기여오고 어디로 기여가는지 나도 몰라. 내물에선 물방울들이 돌을 넘으며 퐁퐁 뛰고 , 물속에선 피라미들이 꼬리로 물을 흔들어도 보고 쏭쏭 하늘에 대가리를 내밀며 점프를 하지. 내가의 버드나무 잎들은 눈이 퀭해서 녀석들 놀음구경에 해가 지는줄도 모르고, 내물이 때론 바이올린을 켜고 때론 손풍금을 치고, 때론 색스폰을 불어, 소리 - 소리들의 경음악에 몸을 흔들어대면서 날가는 줄도 모르지뭐야.
그래 맞아 난 상형문자야. 두만강을 건너 살길을 찾아오던 당년의 사람들 발이 써놓은 상형문자. 쪽지게에 솥을 지고 오던 미투리들이 써놓은 상형문자. 무명저고리 등에 애기를 업고 건너온 아줌마들의 고무신발이 써놓은 상형문자. 나는 오르며 희망을 새김질 했고, 나를 만들며 꿈을 바라보았지. 하지만 그래 하지만 그 꿈과 희망은 1자도 아니요 – 자도 아니요 ㄹ자! S자! 그 울음과 피와 한이 내게 있어. 해밝은 천당을 바라고 왔건만 달죽은 지옥의 그 길을 억척스레 헤쳐야 했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 할머니의 할머니들!
내 발끝엔 신작로. 탈구지소리로 점철되던 날은 언제던가?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트럭이 달리던 날은 언제였던가? 보송보송한 아스팔트길위로 달리는 매미들 꼬리엔 먼지 한알 아리숭하다. 해방이 되면서 나는 막치기에 담구었던 내 몸을 잘라버리였다. 사회주의 서러운 나날 나는 내 몸을 버덕으로 옮기여 놓았다. 개혁개방이 되면서 나는 내 몸을 하늘길에 바다길에 옮겨놓았다. 이제 내 몸밖에서 피던 꽃이 내 몸에서 피고 내 몸밖에서 자라던 풀이 내 몸안에서 자라고 내 몸밖에서 나를 보호하던 나무들이 내 몸에 집을 잡고 산다. 나는 서서히 서서히 사라진다. 이 슬픔 , 이 행복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한단 말인가! 그럴 랑그도 그럴 빠롤도 나에게는 없다. 나는 메투리자궁에서 태여나서 자랐고, 컴퓨터의 탄알에 맞아 죽는다. 하지만 죽어도 살아있는 내가 아닌가? 죽어서 살아가는 내가 아닌가? 천당이래도 좋고 지옥이래도 좋지. 천당이라면 그 리유가 있을 것이고 지옥이라면 그 리유가 있으리. 누가 뭐라든 나와 무슨 상관이랴. 지금 나는 내 몸위에다 천당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내 집, 내 궁전을 건설하고 있는데야. 무슨 소리냐고? 그것도 몰라 자연. 하늘이 주는 자연……
그런데 인간사회에는 영원히 죽지 않는 오솔길이 있어. 언제나 소수인들이 걷는 길. 과학자가 이 길을 걷고 문학가가 이 길을 걷지. 그들은 창조와 발명으로 느을 새길을 닦으며 걷는 장인바치지, 마냥 고독하게 외롭게 살면서. 그들이 있어 인간문화와 세상이 발전도 하고 번영도 하지. 그들은 낡은 것을 불사르는 불씨. 그 불씨가 불길로 타오르면 세상은 새로워지 는거야.
그래 내 몸엔 언제나 그늘이 들기 쉬워. 하지만 그 그늘속에서 나, 나는 시원히 자연욕을 하며 투지를 련마하고, 그 그늘속에서 나는 뫼부리와 대지를 이어놓는 걸 항시 잊지 않고 있어. 나는 하늘과 땅을 이어놓는 다리야. 하늘의 말씀이 다리를 타고 땅으로 내려오고 땅의 숨결이 다리를 타고 하늘 세상으로 올라가는거야. 알겠어?!.
2015. 4.9.
함박눈【연변일보】
눈이눈이 내린다 함박눈이 내린다. 누가 하늘을 찢어서, 찢어도 하얗게 찢어서, 찢어도 산산이 찢어서 대지에 휘뿌리는가. 하늘의 쪼각들이 하얗게 하늘을 메우며 쏟아져내린다. 하늘도 숨을 죽였다. 대지도 숨을 죽였다. 고요, 아늑한 고요가 하늘과 땅사이를 고즈너기 흐른다.
함박눈은 눈잎마다 하얀 실오리를 뽑으며 내린다. 그래서 하늘에 잉아를 건 은실오리들이 씨실을 늘인다. 가느다란 바람이 은실오리 사이를 솔솔 빠지며 날실을 늘인다. 잘칵잘칵 바디질소리가 은은한 속에 얇디얇은 옥색비단이 해설프게 펴진다. 한벌두벌, 열벌백벌이 덧펴지면서 두터운 비단실이 이불을 짓는다. 바디질소리가 자장가를 부르는 속에 대지는 비단 이불을 덮고 달콤한 꿈나라로 간다.
어느 시인이 말했던가. 함박눈이 오는 날은 하늘에서 먼곳 녀인의 옷벗는
소리가 들려온다고. 참 그 시인의 귀는 밝기도 하다. 하늘이 옷벗는 소리까지
다 듣고. 아니 시인은 소리를 들었을뿐만 아니라 보기도 하였으리라. 인자하신
어머니가 아이 옷을 벗기는 소리와 캐드득거리는 아이의 웃는 모습을. 아니,
청춘들이 옷벗는 소리와 모습은 아니였을가! 중년이나 늙은이들의 옷벗는 소리
나 모습을 보고 들은 것은 아니였을거야. 선녀가 옷벗는 소리나 모습이 아니
면 천사의 옷벗는 소리나 모습이였으리.
눈은 구름의 아들이고 비는 구름의 딸이다. 구름은 여름이면 딸을 낳고 겨울이면 아들을 낳는다. 구름이 아들을 낳든 딸을 낳든 그건다 우주의 질서에 속한다. 우주의 질서에 의하여 대지에서 구름이 생기니 구름은 대지의 자식이고 눈은 대지의 손자이고 비는 대지의 손녀가 되리라. 아들은 겨울에 딸은 여름에 할배 할매네 집으로 놀러온다. 손녀는 여름에 놀러와서 나무며, 풀이며, 열매며, 땅이며를 살지운다. 삐리리 우는 새들의 목청을 틔워주기도 하고, 천만 봉오리 꽃봉오리들이 속살을 열어보이게도 하고 골짜기를 누비는 농오리라기 같은 가냘픈 시내물에 전례없던 생기를 불어넣어 재잘거리게 한다. 손자는 겨울에 놀러와서 할배할매품에 꼬옥 안겨 꿈을 빚다가 간다. 손자들이 빚는 꿈은 무슨 빛일가? 당연히 채색이다. 하얀 꿈도 빚고 파란 꿈도 빚고 빨간 꿈도 빚고 노란 꿈도 빚는다. 락하산을 띄우는 꿈도 꾸고 반들거리는 조약돌의 꿈도 꿈도 꾸고 엉성한 억새의 꿈도 꾸고 두귀 빨죽한 짐승들의 꿈도 꾸고. 시골아낙네의 꿈도 꾸고 도회지 대학생들의 꿈도 꾸고… 수천수만가지의 꿈을 꾸거늘 어이 한입으로 그 꿈들의 이야기를 다 말하랴.
한잎한잎의 눈은 홍모처럼 가볍다. 하지만 그것들의 모이고 뭉치면 대단한 힘이 된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날 산에 가면 이따금 신다리같은 소나무허리 부러지는 소리가 산을 쩌렁하게 울린다. 바람에 하얗게 눈보라를 날리는 것은 할배 할매품에서 강동질하며 노는 눈들의 재롱이요 땅에 하얗게 쌓여있는 것은 눈들의 몸이 서로서로 엉키여 한덩어리가 되여 꿈을 가꾸는 중이요. 그래서 적설은 오색의 령롱하다. 따슨 해살들이 살금살짝 밟고 지나가면 적설들은 오색을 고아서 , 자기의 살과 뼈를 야금야금 녹여서 한방울 두방울 젖을 빚는다. 온몸을 다 녹여서 빚는 젖! 만물은 그 젖을 먹고 다시 소생하기도 하고 다시 생기를 찾아 새라새로운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젖향기는 만리에 향기로와 먼곳의 철새들이 그 달콤한 향내를 찾아 북으로 북으로 새살림을 꾸리러 날아온다.
함박눈의 몸짓은 우아하기 이를데 없고 함박눈의 꿈은 우주의 신비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눈을 반겨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눈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리라. 함박눈은 대지에 하얀 종이장을 펼쳐놓았다. 사람마다 하얀 종이우에 자기의 꿈을 그려놓으라고 . 애기는 애기의 꿈을, 소녀는 소녀의 꿈을. 청년은 청년의 꿈을. 장년은 장년의 꿈을. 로인은 로인의 꿈을, 70은 고래희란데 머리에 서리 앉은 나에게 무슨 꿈이 더 있을가만은 그래도 살아있는 한 꿈을 꾸는것이 인간이 아니던가. 빠드득빠드득 발밑에서 울리는 발과 눈의 연주를 들으며 나는 내가 그릴 꿈을 구상하고있다.
2012년 12월하순. 소흥에서
살아있는혼의뼈다귀
참 이상스럽다. 제목을 살아있는 혼의 뼈다귀라고 다는 내가 참 이상스럽다. 뼈다귀가 혼을 품고 살아있다는 말인지 아니면 혼이 있는 뼈다귀인지 아니면 살아있는 뼈다귀에다 그저 심심풀이로 혼이란것을 부여하는지
나는 지금 한 뼈다귀를 보고있다.
사막에서 뼈다귀를 보고있다
일색으로 누우런 망망한 사막이다.
사막의 배 락타의 방울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바람처럼 질주하는 말 발굽 소리도 보이지 않는다. 고슴토치같은 락타풀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사막 한곳에 나와 뼈다귀가 있다. 가는 바람이 불어온다. 가루같은 모래알들이 날려가다가 뼈다귀주위를 뱅글거린다. 모래에 깔린 뼈다귀는 창살같은 뼈를 내밀고 바람에 항거한다. 모래에 항거한다. 뼈다귀가 울부짖지만 나는 뼈다귀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처연하게 서있다. 알지 못할 감정의 회오리가 나를 휩싼다. 내몸의 피와 함께 온 몸을 휘돈다. 나는 뼈다귀 진면모를 봐야겠다는 의식의 도가니에 빠진다. 와락 업드렸다. 두손으로 모래를 와락와락 파헤친다. 땀이다. 얼굴에 모래 벙거지를 들쓴다. 그래도 기를 쓰고 판다. 드디여 커다란 골격이 눈앞에 나타난다. 아, 그 창날같은 뼈다귀는 갈비대였다. 후 한숨을 내쉰다. 그것이 무슨 동물의 뼈다귀일가. 순간 내 앞으로 한무리 짐승들이 질주하고 있다. 고비사막을 달리는 령양의 무리!
어느때였을가? 여기에 푸른 초원이 있고 령양의 서식지가 되었을 때는. 하지만 나는 이런 질문을 해답할만한 학식이 갖추어지지 않는 사람이다. 오직 눈앞으로 당년의 령양들의 생활이 영화의 화면처럼 흘러갈 뿐...
이른 봄이면 령양 수놈은 수놈들끼리 무리지어 어디론가 간다. 암놈은 암놈들끼리 무리지어 어디론가 간다. 두무리는 서로 딴길로 가지만 모이는 곳은 한고장이다. 거기서 암놈과 수놈들은 서로 짝짓기를 하고 또 갈라져서 수놈은 수놈들끼리 암놈은 암놈들끼리 무리지어 갈라져 간다. 암놈들은 수놈들이 어디로 어떻게 가는지 모르고 수놈들은 암놈들이 어디로 어떻게 가는지도 모른다. 만나기 위하여 오고 , 와서는 짝짓기 하고. 헤여지기 위하여 가는 족속들이다. 만나는 것은 후대를 위하여 짝짓기를 하는것이고 헤여질 때는 수놈들은 살기 위하여 헤여지고 암놈들은 새끼를 배고 낳고 살기 위하여 헤여진다. 하느님이 왜 이놈들을 이렇게 살게 하였는지는 누구도 모른다. 나 하느님이 아니니까 알 수도 없다. 그래서 령양은 걸으면서 사는 족속이 되었다. 무작정 걸어야 먹을수 있고 무작정 걸어야 살게 되어있는 이 신비를 아마 하느님밖에 모를것이다. 그들이 서로 갈라져가고 모이러오는 길은 지금도 누두도 그 경로를 체크해 본 일이 없다하니 신비스러울 수 밖에. 천년만년을 그렇게 모이기 위하여 험악한 령을 넘고 산비탈과 초원을 누비며 신고스레 왔다간 짝짓기만 하고 갈라져서 또 그렇게 헤여져 가는 하나의 스토리. 눈보라도 비바람도 그들의 모이고 헤여짐을 막지 못하는 본능적인 스토리. 신비스러움 속에 처절함이 묻어나는 헤여짐과 해후! 가는 모습이나 오는 모습이나 장사진인데 창날같은 쌍뿔을 하늘에 비껴들고 당당히 걷는 수놈들의 대렬, 그 먼먼 길을 지겹게 여기지 않고 척척척 발을 내딛는 암놈들의 모습. 이쁘다면 이쁘고 슬프다면 슬픈 대렬의 대 장정이다.
짝짓기전, 수놈들은 서로 안해를 많이 차지하려고 싸운다. 힘 센자가 당연히 안해를 많이 차지하기다. 허나 힘장사도 영원한 힘장사로 될수는 없다. 후대가 자라나 선배를 제치고 안해들을 차지한다. 강자의 위엄은 한시기요 약자의 떨림도 한시기다. 세월은 그들에게 나이를 선사하면서 약자를 강자로 만들고 강자를 약자로 만들어 만들어버린다. 강자가 되려면 적수를 젓치는 수고가 많지만 일단 강자로 되면 당당해지며 하늘을 향하여 효용하기도 하고 뿔을 휘저으며 원을 돌기도 한다. 처녀 령양들이 부끄러워 말을 듣지 않으면 힘껏 쫓아서 힘이 빠지게 한다. 그런다음 다리로 처녀 령양의 엉덩이를 두드리고 더 반항하지 않으면 올라타기를 한다. 그 순간의 오르가즘을 치르기 위하여 얼마나 신고를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한 순간이였어도 그것은 순결하고 고상하고 위대한 시간이였건만 그것들은 그것이 아마 무엇인지도 몰랐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해후의 본능이니까. 약자로 된 다음은 다시는 강자로 될수 없는 고독과 허무를 감수하게 된다
해후의 종말은 걷기다. 걷는 생을 살아야 하는 족속이기에. 약자는 걷다가 지치면 무리를 떠나 한 초지의 한구석에서 쉼을 한다. 걷는 생을 마치는 순간이 온 것이다. 무리들은 그가 떨어졌건 말건 저 멀리로 서서히 사라지고 약자는 누워서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구름을 바라본다. 저 멀리서 오는 날카로운 부리를 가진 독수리 떼나 까마귀 떼를 바라본다. 그 번쩍이던 어제의 눈빛이 서서히 빛을 잃으며 감긴다. 약자는 두다리를 하늘에 대고 강잉히 흔들다가, 온몸을 부르르 떨다가 숨쉬는 생명을 마친다. 남은 것은 헌신의 생명이다. 독수리나 까마귀들이 모여와 날개를 퍼덕이면서 하느님이 마련해준 진수성찬을 만포식한다. 마지막 고기 한점까지 남을 위하여 선사하는 약자의 운명은 가엽기보다 장엄하고 무위여도 위대하다.
강자였던 약자의 뼈다귀가 오늘 부드러운 모래바람 부는 내 앞에 이렇게 타나나 나를 울리는 것은 우연일가 필연일가. 귀 기울이니 뼈다귀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실오리 같은 가는 소리로 아름다운 곡을 연주한다. 천상의 곡인지 지상의 곡인지 지옥의 곡인지 알 수 없는 환상곡이 나의 귀바퀴를 쓰다듬는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는다. 령양 떼들이 장사진을 이루어 걸어오고 있다. 메마른 산기슭을 에돌아 피둥피둥한 엉덩이를 흔들며 나를 향하여 걸어오고 있다. 나는 이 환영을 마음갈피에 록화하고 있다. 왜서일가? 나도 모른다. 목적이 있는 것은 목적에 도달하면 사라지는 것이 많지만 무욕은 언제나 자연스럽고 사랑스럽고 신비한 것이 아니랴. 나의 뇌리에 록화된 이 한폭의 아름다움은 그림으로만 남아 이따금 흔들리리라. 그림이 흔들리면 나는 신령의 소리도 들을 것만 같다. 령양은 죽어 뼈다귀를 남겼는데 뼈다귀는 다시 령양으로 부활하여 나의 혼과 삶을 같이 하고 있다. 먼 훗날, 나의 뼈다귀도 누가 불러다 함께 삶을 살아가게 될가!
얼음꽃
아직도 세월이 겨울 옷을 벗지 못한 때, 아직도 응지에는 하얀 빛이 석연할 때, 적설 위의 여기저기에 새노란 꽃이 대여섯송이 피여난다. 만나는 사람을 깜작 놀라게 하는 이 꽃을 우리는 얼음꽃이라 불렀다. 그래 얼음 꽃이지. 실오리만큼 가느라단 파아란 줄기가 새노란 꽃송이를 소담하게 이고 서있다. 하나, 둘, 셋, 넷 꽃잎이 동서남북으로 활짝 열렸다. 하나의 꽃잎은 살가운 처녀애들의 새끼손가락 손톱만하다. 요리 보아도 조리 보아도 앙증스럽기 짝이 없는 황금의 꽃이요 황홀의 덩어리이다. 노란 꽃 속에는 꽃살이 일곱개다. 칠성별! 일곱대의 황금의 화살이 팽팽한 줄에 메워져있다.
주위에는 떡갈나무가 하얀 눈에 발을 묻고 앙상하게 서있고 연푸른 빛이라곤 찾아볼 길이 없는데 눈시린 눈우에 동안뜨게 피여 있는 얼음꽃. 돌처럼 땅땅하게 얼어있는 땅속에서 씨앗은 어떻게 싹이 텄으며 그 가늘디 가는 줄기로 적설은 어떻게 뚫고 나왔으며 차디찬 바람속에서 꽃은 어떻게 피여났을가? 기이하기만 하고 야릇하기만 하다.
진달래 꽃처럼 온 산을 발갛게 불태우며 요란스럽게 피여나는 꽃이 아니여도, 배나무 꽃처럼 어느날 아침 흰구름 덩어리를 산기슭에 끌어온듯이 희한하지 못해도, 련꽃처럼 커다란 잎우에 초롱같은 꽃봉오리를 터지우지 않는 꽃이여도, 접시꽃처럼 한대에 여러송이를 호함지게 피우지 못했어도 얼음꽃은 그 여느 꽃보다도 더 화사하고 더 눈부시다. 눈속에서 피여나는 신비함과 추위를 이기는 강의함 그리고 몇 송이만으로도 너무 당당한 그 기세를 여느 꽃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리라.
얼음꽃은 들숨으로 령하의 찬바람을 마시고 날숨으로 령상의 따스함을 뿜어내고 송이마다 금방울이 되여 자르릉거리며 봄이 온다고 알린다. 얼음꽃은 송이마다 금빛 열쇠가 되여 봄의 대문을 빠금히 열고 아득히 머나먼 곳에서 굳잠을 자고있는 아지랑이를 어서 일어나라고 깨운다. 얼음꽃은 금빛 찬란한 리정비가 되여 겨울의 종말을 고하고 새봄의 서곡을 은은히 엮어간다. 우주는 한창 희곡을 연출하고 있다, 얼음꽃은 그 희곡에서 선구자 창조자의 배역으로 출연하여 우리들의 가슴들이 새로운 감동을 뿜게 한다.
얼음꽃은 봄의 창조자이고 선구자이다. 그래서 그는 외롭고 고독하다. 여느 꽃들은 피여나기 바쁘게 나비도 날아들고 벌떼들도 날아와 반기지만 그에게는 그런 반려나 친구가 없다. 찬 바람의 짓밟음을 헤치며 이 땅에 아름답고 장쾌한 봄의 서곡을 쓰고 있을 뿐이다. 그는 머나먼 남방에서 보내오는 메시지, 제비나 기러기들의 속삭임을 미소 속에서 듣는다. 우리 갈게요! 근심말아요!
얼음꽃은 단순하지만 아름답다. 그는 꽃대도 꽃잎도 꽃살도 어느것 하나 부드럽지 않은 부분이 없고, 유연하지 않는 부분이 없다. 그는 부드러움으로 유연함으로 강한 겨울을 이긴다. 한없이 유연하고 부드러운 꽃이지만 한없이 강한 지조를 갖고 있는 얼음꽃을 보며 나는 우리의 녀인들을 떠올린다. 우리들의 할머니, 어머니, 처녀들 모두가 겉으로는 유연하고 부드러워 보이지만 속은 송죽같아 외유내강한 강자들! 특히 얼음꽃과 같은 노랑 저고리들의 랑랑한 웃음소리만 생각해도 가슴이 뿌듯하게 벅차오르는 감격으로 하여 얼굴이 뜨거워난다.
조무래기들이 털옷바람으로 산에 오르다가 이따금 얼음꽃을 발견하고 얼음꽃에 취하다가 우르르 달려내려온다. 어떤 애들은 목수건을 휘두르고 어떤 애들은 털모자를 하늘에 하늘 공중에 뿌려올린다. 애들도, 애들의 흔드는 목수건도, 벗어뿌리는 털모자도 , 애들의 찍는 발자국들도 죄다 노란 얼음꽃으로 피여난다.
겨울은 얼음꽃을 창조한다. 하지만 얼음꽃은 겨울의 심장을 향하여 쏘는 탄알이다. 겨울은 자신을 죽이기 위하여 탄알을 만든다. 와야 할 때를 알고 찾아오고 가야 할 때를 알고 탄알을 만드는 겨울은 얼마나 장려하고 거룩한가!
환상의 성- 시(诗)
가스통 바슐라르는 플로콩의 조각을 보고 [환영의 성]이라는 이름을 달아주었다. 나는 시에 대하여 [환상의 성]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 이 [환상의 성]은 세상에 없는 것들만 모여서 오롯이 살아가고 있는 도시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시인은 미친놈이라고. 그렇다. 시인은 미친놈이다. 시인은 현실세계를 그대로 시에 담는 똑똑한 인간들이 아니다. 그들은 현실세계를 비틀어서 짜낸 술을 시에 담는다. 그것도 주르르 흘러나오는 술이 아니라 한방울 두방울 떨어지는 술이다. 오로지 시인만이 이 술을 담글 줄을 알고, 오로지 시인만이 이 술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보고 듣는다. 저 혼자 보고 저 혼자 들으면서 희열을 느끼는 시인이니 [미친놈]이란 말을 골백번 들어도 싸지. 시인은 현실에다 현실적인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상상으로 신기루같은 집을 지어서 내여놓는다. 푸른 바다에 배가 떠있고 갈매기가 날아예는 진실인 것이 아니라 하늘에 배가 떠있고 땅속으로 갈매기가 날아예는 환상이고 환영이다. 그러니 어이 미친놈이 아닐수 있으랴.
사람들은 말린다. 귀신이 씨알 까먹는 소리를 작작 줴치라고. 그렇다. 시인은 귀신이 씨알 까먹는 소리를 한두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소리를 하는데 완전히 습관되여 있고 그런 소리에 젖어있다. 이 젖음은 오늘의 시인들이 발견한것이 아니다. 보들레르는 [돌속에서 오리가 헤염친다]고 하였고. 랭보는 모음A를 [윙윙거리는 굉장한 파리떼들의 털투성이의 검은 ‘코르셋’]이라고 하였고, 발레리는 파도를 보고 [표범가죽]이라고 하였고, 2011년 노벨문학상수상자시인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는 [10월바다가 신기루 등지느러미를 달고]라는 표현으로 [기상도]라는 시를 시작한다. 리백은 피리소리에서 꽃이 떨어진다고 하였고, 정지용은 바다가에 가서 푸르른 [도마뱀떼가 재재 발렀다]고 하였고. 문덕수는 원을 [신의 눈알]이라고 하였고, 서정주는 쪼각달을 보고 님의 눈섭을 [하늘에 심어놓은]것이라고 하였다. 엉터리라면 엉터리이고 나발이라면 나발이고 황당무계하다면 황당무계하다. 하지만 이런 엉터리, 이런 나발, 이런 황당무계한 이미지가 없으면 결코 좋은 시가 못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귀신이 씨알 까먹는 소리를 한다는 것을 어떻게 나무리랴.
이 세상에 괴짜가 많다지만 시인같은 괴짜는 별로 없으리라. 시인은 새까만 곳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곳으로 들어가기를 즐긴다. 먹물처럼 새까만 그 곳에서 시인은 피아노소리를 듣고 번개의 울부짖음을 듣는다. 꽃이 속살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새가 그 작은 부리로 우는 소리를 본다. 시인은 돌속에서 휘몰아치는 바람도 보고, 여름에 푸른 잎에서 굴러다니는 얼음덩어리도 본다. 시인은 바다에서 물장구치는 태양도 보고 하늘에 걸려있는 별초롱도 본다. 시인은 배고파 우는 태양도 쓰다듬어 주고 배불러 씩씩거리는 달의 비만도 다이어트시켜 준다. 그러니 괴짜라도 이 세상에서 으뜸으로 가는 괴짜가 아니고 뭐랴.
아하, 괴짜들이여! 더욱 우람하고 아름다운 환상의 성을 쌓으라 지으라. 오로지 그런 짓만이 당신을 구할것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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