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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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나의 문학관과 창작의 길

연길-카스 2만리 기행.1
2008년 10월 03일 12시 25분  조회:1483  추천:40  작성자: 최룡관

연길 - 카스  2만리 기행



최룡관

    2004년이 기울어져 가는 11월 11부터 12월 8일 새벽 5시까지 연길로부터 신강의 카스까지 2만여리에 발자국을 찍으며 조국땅을 돌아보는 행운을 가지게 되었다.

  환갑나이를 지난 나로 말하면 그것은 꿈같은 일이였고 복덕방에 떨어진 화사한 일이였다.

  연길-카스 동서 횡단 2만리.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나의 일생에 획기적인 사변이라고 말하지 않을수 없다. 공부하던 시절에 지도를 볼 때면 우리조국 땅이 넓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는데 이번에 처음 밟아보면서 그 신비함과 기의함을 피부로 느끼였다.

   그때의 감격들을 도저히 홀로만 가질수 없어 독자들과 함께 나누어보고자 한다.  


1.네번째 은인과 함께  


   2004년 11월 11일, 나는 새벽에 일어났다.

  조국땅 동서횡단을 떠나기 위하여 려행짐도  마저 꾸리고 개원호텔에 투숙한 한국 동양일보사 조철호 사장님(실제는 지금 회장이였음)과 함께 이른 아침  여섯시에 연길로부터 통화로 가는 버스를 타야했다. 개원호텔에 갔을 때 조사장님은 진작 일어나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계시였다. 우리는 차가 떠나기를 조금 앞두고 역전에 도착하였다.

  포석문학회 회장이며 연변일보사 문화부에 있는 시인 리임원씨와 연길시 텔레비기자인 시인 김영춘씨가 우리를 전송하기 위하여 벌써 역에 나와 있었다.

   우리들의  사이에는 따스한 말이 오가고 웃음이 오갔다. 영춘씨는 차에서 입질하라고 빵과 샘물을 넣은 꾸러미를 넘겨주었고, 돈도 주면서 길에서 한끼 자시란다. 리임원씨도 먼길을 떠나시는데 잘 다녀오시라며 모택동 사진이 박힌 빨간 종이장 몇장을 건네주었다.

   드디여 차가 떠났다. 두 사람의 고마운 전송을 받으며 우리는 떠났다. 버스는 호화차였다. 화룡시와 안도현을 가로질러 매화구로 가는 버스였다.

    연길-룡정고속로에 들어서자 버스는 바람처럼 달리기 시작하였다

    참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란 알다도 모를 일이다. 내가 한국의 동양일보사 사장 조철호님과 중국동서횡단을 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하였으랴. 지난 10월 하순 어느날이였다. 덴마크에 가있는 연이가 철남집을 사줘서 새집에 들려고 한창 장식에 여념이 없었는데 조사장님한테서 느닷없는 전화가 왔다. 실크로드 답사를 같이 가자는 청이였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예예 하고 응대는 하면서도 실크로드란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수 없었다. 영어에 깜깜부지인 내가 어찌 실크로드가 무엇인지 알수 있었으랴. 말이 한참 오가서야 비단의 길을 함께 가보잔다는것을 깨게 되였다. 희외망출이였다. 나는 너무도 좋아서 쾌히 받아들이였다. 세상에, 대방에서 경비를 대고 중국땅려행을 하자는데 누군들 마다하랴. 선택된 자체가 행운이였다. 조철호사장님은 중국에 수십차 다녀가신분이고 연변에도 너무너무 많이 다녀가신분이다. 해마다 조사장님의 후원으로 연변의 포석회가 중학생들을 대상해서 우리 글짓기 활동을 한지도 어언 삼년세월이 되였다. 그가 아는 연변사람이 어찌 한둘이랴. 그런데 이런 어마어마한 려행을 떠나면서 이미 퇴직한 최룡관이를 골랐으니 룡관이라는 사람도 복이 좀 있는 인간인것 같았다.

    조사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내가 살아온 뒤길을 스스로 점검해 보게 되었다. 여름이면 맨발바람으로 10리나 멀리 떨어진 소학교를 다니였고, 새벽 다섯시에 떠나서 20리나 되는 초중을 다니던 나였고, 부실하게도 문화대혁명까지 학생시절에 치르다나니 남들이 3년다닌 고중을 6년이나 다닌 나였다. 돌아보니 나에게는 은인들이 몇분 있다. 인생의 관건적인 시각마다 나타나서 이끌어준 은인. 그들이 있음으로 하여 오늘은 조철호사장님의 혜택도 나에게 차려진것이 아니랴.

   문화대혁명후 처음으로 대학시험을 칠 때였다. 우리 대대에서 대학시험을 볼 응시자들의 등기표를 가지고 공사소재지인 남평으로 가는데 초중 4학년을 다니던 친구가 나보고 형님도 금년에 시험을 치겠구만 한다. 나는 나이가 많아 안되잖소. 아니 로싼제(老三届)는 다 칠수있다고 화룡에서는 란리가 났소. 형님도 치오. 그가 뚜지는 바람에 시험을 일주일 앞두고 밤낮 책을 보다가 시험장으로 갔다. 누군지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가 나의 첫 은인이라고 가슴에 새겨두고있다. 대학시험을 칠 때 은인이 또 나타났다. 한고향에서 자랐고 고중시절 한세집에서 함께 공부하였고 한 학교에서 함께 교편을 잡고있는 허원욱형님이였다. 나보다 2년 선배인 그가 정치시험을 치던날 교문앞에서 날 기다리고있었다. 문과를 과목마다 90점으로 예산했던 나였다. 시험을 치고 나오면서 생각해보니 60점밖에 될것같지 않았다. 그래서 시험을 더는 치지 않기로 작심하였다. 정치를  개판을 치면 불합격은 그림보듯 뻔한 일이였다. 전날 시험을 칠 때 수학은 5분을 치고 나온 나였다. 인수분해 문제 하나만 풀고 나왔던것이다. 그래서 정치를 정말 60점 맞는 날에는 또라지가 뻔하지 않겠는가. 그날 저녁을 함께 하면서 허형은 네가 정치를 잘못치면 모두가 잘못치기에 근심말라면서 그냥 쳐야 한다고 하였다.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저녁에는 영화구경을 하였다. 영화를 보면서도 허형은 그냥 시험을 치라고 권장하였다. 그래서 친 대학시험으로 연변사범전과하교입학통지서가 내려온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재수가 없다고 통지서도 바로 보지 않았다. 고중과 중등전업은 동등한 학력인데 내가 왜 사범을 가는가 참 재수 없는놈이야. 그런데 허형이 통지서를 보더니만 중등사범인것이 아니라 대학전과라면서 가야한다는것이였다. 허형이 하도 설복하는 바람에 제일 마지막으로 등교한 입학생이 나였다. 그래서 대학전과나마 공부를 하게 되었고, 그후에 연변일보사 문예부로 오게 되였다. 연변일보로 오는데는 또 은인이 나지였다. 그때 연변일보에서 문학을 하는 편집 한명을 전 연변적으로 모집하였는데 김경석주임과 최형동부주임이 나를 골랐던것이다. 조동해온 썩후에  나보다 글 잘 쓰는 사람이 많았는데 왜 나를 골랐느냐고 물으니까 사범전과학교를 졸업했으니 대학물을 먹은놈은 나밖에 없더라는가. 그때가 1980년도였는데 남평같은 산골교원이 연변일보사로 조동한다는것은 하늘의 별따기 시절이였다. 시골사람들의 말로하면 농민의 아들 떼군의 아들이 큰 출세를 하였다. 그때 연길이란 고장도 연변일보라는 단위도 나로 말하면 너무도 어마어마한 고장이였다. 초중시절 여름 방학에 연길에 와서 원자탄에 대한 상식도 배우고 해군학습도 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연길사람들은 무엇이 잘 나서 이런 시가지에서 사느냐고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연길 사람들을 아무리 뜯어보아야 입이 하나고 눈이 두 개고 나와 같은 사람들이였다. 고중시절에 기자나 작가가 된다는 희망을 세우고 서점에 새책이 왔다면 식표라도 팔아서 책을 사보았다. 연변일보사로 조동한것은 나의 생애로 말해도 대단한 전환이 아닐수 없었다.

   사람이 살아가느라면 기회를 만나야 하고 남들의 부추김을 받아야 하는것이다. 독불장군이라는것은 옛날부터 실패자의 대명사였다. 조사장님은 네번째로 나의 앞길에 문을 열어준 사람으로 되였다. 나의 일생에 마지막으로 받는 큰 혜택일런지도 모른다.

   우리들을  실은 버스는 어느새 화룡시와룡골안으로 달리고 있다. 와룡골에는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곳이다. 소학교 5학년을 마치던 여름방학이였다. 화룡현에서 소학생화령영을 조직하였는데 내가 다니는 로과소학교에 지표 한명이 떨어지였다. 그때 학교에서는 2반의 반장이였던 나를 뽑아보내였다. 화룡이라는 곳이 어느 쪽에 붙었는지도 모르는 시골아이가 현화령영에 참가한다는것은 경사로운 아닐수 없었다.우리는 와룡골천리봉에 올라가서 항일유격대들이 영용하게 싸운 전적지를 참관하였다. 그 어린 나이에 그곳을 보고서 오늘의 행복이 선렬들의 피와 생명으로 바꾸어온 귀중한것이라는것을 처음으로 가슴에 새기던 고장이였다. 그때로부터 오늘까지 와룡의 천리봉을 나는 잊은적이 없다. 항일이요 혁명이요 하면 언제나 나의 뇌리에 먼저 떠오르는것이 있으니 그것은 웅위로운 와룡골연의  천리봉이다.

   차는 로야령으로 오르기 위하여 골안길을 누비며 덜석거린다. 골안의 시내물이 초겨울의 을시년스러운 풀숲을 헤치며 요리조리 흘러내려가고있다. 이따금 림산마을이 나타난다. 갑자기 어머니가 생각난다. 나를 낳아키워준 어머니는 이름이 최금순이고 애명은 아간녀이다. 68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치신분이다. 글자는 가짜다리도 모르는 문맹이다. 6형제를 낳아기르느라고 락을 보지 못하고 인생의 종지부를 찍은 분이다. 어머니만 생각하면 어쩐 일인지 강장골스껌더기에 가서 보리밭 기음을 매시던 어머니,  소나무그늘밑에서 동생을 보던 내가 생각나군 한다. 비록 연길에 와서 살아보기는 하였지만 평생 락이란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맛보지 못한 어머니다.

  로야령에는 눈이 많이 내리였다. 온 산이 은빛세계에 잠겼다. 해빛을 머금은 은빛세계는 눈부신 빛을 황홀하게 발산하고있었다. 소나무들은 저마다 하얀 양산을 들고서있다. 우중충한 수림을 바라보며 수림속을 달리노라니 아버지가 나의 눈앞으로 걸어오신다. 나의 아버지는 아홉살에 어머니를 떼우고 열두살에 아버지를 떼우고 인간의 밑바닥에서 고생을 다 하신분이다. 이 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하여 말 그대로 뼈와 살을 다 바치신분이다. 지금의 로과향죽림촌의 한 집에 가서 양아들로 자라셨다.  열네살부터 목재판으로 돌아다니며 한생을 보내다가 대식품 시절에 자식들이 굶어죽는다고 퇴직하여 농사를 지으시면서 일생을 보내시였다. 이 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하여 농사를 지으면서도 겨울이면 겨울마다 목재판으로 다니신 아버지다. 글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여 이름자밖에 모르고 이응자 동그라미는 삼각형을 치면서 살아오신 아버지. 고중에 붙으니까 우리 집에 고등인물이 나왔다고 그렇게 즐거워 하신 아버지. 문화대혁명후기에 대대에 초중이 나오니까 나를 선생으로 초빙할 때였다. 두세번이나 찾아왔으나 나는 선생질을 안 한다고 밀막았다. 그때였다. 네가 공부한것은 공산당덕이라며 왜 당에서 시키는 일을 하지 않겠느냐고 하는바람에 나는 손을 들고 교편을 잡았댔다. 아버지는 아들이 훈장이 되였다고 무등 기뻐하시였다. 그러시던 아버지께서 쉰아홉이 되시던 봄날 간암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진단을 받으셨다. 석달을 앓으시고 돌아가신 아버지. 내가 대학전문학교에 가는것도 . 동생 룡운이가 연변의학원에 가는것도, 내가 당당한 남평중학교 교원이 되는것도 , 내가 연변일보사로 조동하는것도 보시지 못하고 이 세상을 하직하신 아버지. 자식들이 잘 되는것을 보고 돌아가셨더라면 눈이라도 편히 감으셨을것이 아니였으랴. 우리 아버지는 애주가셨다.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주사를 맞아야 끝을 보시였다. 그렇게 술을 즐거워 하시면서도 이 아들의 고중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목재판으로 가실 때면 가는 날 오는 날 술을 마시고는 입에 술한방울 대지않으셨다. 목재판에서 술을 마시면  아들이 또 경제휴학을 한다는 근심이 가슴에 매달려있었다는것을 나는 알고있었다. 평생 하루도 발편 잠을 자보지 못한 아버지! 10년만 더 앉으셨어도 이 아들이 하늘땅이 맞붙는 슬픔과 아픔을 맞보지 않았을것이고 아버지도 자식을 키운 보람이 어떤것이라는것을 알고 돌아가셨으련만...이래서 나의 뼈속에는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더 아프게 새겨져 있다.

  버스는 무수한 산을 넘고 무수한 골짜기를 누비며 구불구불한 길을 내처 달리였다. 대지는 바다! 버스는 하나의 작디작은 나무잎. 산봉우리를 오른다는것은 나뭇잎이 선인장같은 파도의 가슴을 타고 오르는것이요, 산봉우리를 내린다는것은 하나의 외로운 나무잎이 파도의 밑바닥에 떨어지는 일이요, 골짜기를 누빈다는것은 나뭇잎이 파도사이를 요리조리 비집는 일이다.

  하늘에는 구름 몇송이가 떠있다. 흰 구름들은 그렇듯 아득하고 무연한 하늘에서 천천히 그리고 자유롭게 가고싶은데로 날아다니고있었다. 백운거사 리규보가 자신을 구름에 비하면서 하던 말씀이 귀전을 스친다. <<백운을 나는 본뜨려는것이다. 본떠서 그것을 배운다면 비록 공부하여 배운것만큼은 못되더라도 역시 거의 가깝게 될것이다. ...비가 되여 가물에 말리는것을 살리니 어질다 할것이요, 와도 집착함이 없고 가도 미련이 없으니 탁 트였다할것이요, 빛이 푸른것 ,누른것, 붉은것, 검은것은 구름의 본 빛이 아니고 오직 희고 문채 없음이 구름의 본 빛인것이다. 덕이 벌써 그러하니 빛도 그러한것이다. 만약 그것을 본따서 배운다면... 구름이 나인지 내가 구름인지 모르게 되면 옛 사람이 얻은 열매에 가까울것이 아니겠는가>> 이번 길에 나도 백운거사가 말한 구름이나 되어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차는 미끄러지듯 앞으로 달린다.

 
2.한 침대에서 둘이


   해와 함께 집안(集安)에 도착하리라던 우리 생각은 빗나갔다. 집안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렸을 때는 거리에 가로등이 반짝이는 때였다. 나도 조사장님도 한번도 여기에 와보지 못한 생뜨기들이다. 먼저 숙박부터 해야 했다. 동서남북이 어떻게 돼 먹었는지도 모르는 고장이라 어느 곳에다 숙박을 잡아야 할지 몰랐다. 려관간판은 앞에도 뒤에도 수두룩하였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버스역초대소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잠간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제가 들어갔다 오겠습니다.>>

   내가 가이드를 시작한 첫마디였다.

   조사장님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등기부에 가서 제일 좋은 방이 어느것이냐 물었다.

   봉사원의 눈에 반짝 기쁨이 넘치였다. 려행객이 없는 계절에 비싼 값을 내겠다니 얼싸 좋다고 2층으로 안내하였다. 위생실이 달리였고 쌍침대가 놓여있었다. 다른 방이 또 없느냐고 물으니 좋은 방은 이것뿐이란다.

    나는 이번 길을 떠나면서 될수록이면 조사장님의 돈을 덜 축내는것을 원칙으로 내세웠었다. 쓸데없는 사치는 걷어장지고 밑바닥 생활을 체험하면서 다녀야 글이 나온다는것이 나의 신조였다.

   <<조사장님, 둘이 한방에 듭시다.>>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해?>>

   조사장님의 두눈이 데꾼해났다.

   <<하나밖에 들만한 방이 없습니다.>>

   <<그럼 딴 곳을 찾지>>

   <<주위를 보십시오. 모두 개인려관인데 어디 가서 좋은 곳을 찾습니까? 황차 여긴 호텔이 없는 고장이랍니다.>>

  <<참 머리에 털이 나서 처음 이런 고장에 왔네.>>

  <<머리에 털나서 처음 겪는 일이 많고도 많을겁니다>>

   <<그럴가>>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통쾌하게 웃었다.

   그로 말하면 기막힌 일이 아닐수 없었다. 사실 조철호사장님은 한국 충북에서는 지체 높은분이시다. 그곳의 고위층에 속하는 사람인데 첫날숙박부터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일이였다. 그렇다고 자기만 좋은 방에 들고 나를 다른 방에 들라고는 할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하루밤쯤 한 침대에서 동성련애를 하면 될거아닙니까.>>

  나의 말에 먼 하늘을 잠간 쳐다보던 그는

  <<별수 없구만.>>

  이렇게 하여 우리는 려행을 떠난 첫날 저녁에 사이비한 콩트 한편을 엮게 되였다.

 
3.나의 준비는 억망

 
   하루밤을 한 침상에서 자고 나니 나는 조사장님을 얼결에 조형이라고 불렀다. 쏟친 물은 담을수 없다고 나간 말은 거두어들일수 없었다. 나이로 말하면 조사장님은 나보다 한 살 아래이고 직으로 말하면 하늘과 땅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그이는 한국 지방신문(여기로 말하면 성급신문)에서 수십년을 사장일을 본 사람이요 나는 그보다도 작은 지구급 신문사의 일개 편집기자였다. 그는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이고 나는 중층의 하바닥에서 굴러먹다시피한 놈이다. 연변작가협회부주석이라 하지만 그것은 헌겉막대같은 명의상 칭호여서 주석단 회의에 가서 손이나 드는 허수아비다. 그런데 별수가 있는가. 하루밤을 같이 자도 만리장성을 쌓았단데 우리도 하루밤을 함침상에서 자지 않았는가. 사실 카스까지 가자면 멀고도 먼 려행길인데 그냥 조사장님이라고 부르는것도 우리 사이에 간격이 있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 아니겠는가. 조형은 어떻게 나를 리해하겠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렇게 부르는것으로 우리 사이에 놓인 간이벽을 활 허물어버리라 작심하였다.

   내가 제일 처음 리상각선생님을 따라 한국에 계시는 시조시인 한춘섭선생님댁으로 갔을 때였다. 그이는 나보다 이상분이였다. 나를 어떻게 불렀으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던 그는 불쑥 나를 최형이라고 부르는것이였다. 나는 손아래 사람이니까 형이라 부르지 말라고 하였다. 실은 그때 한춘섭선생님께서 나를 존중하여 최형이라고 불렀다는것을 후에사 알았던것이다. 타남지간에 형이라 부르는것은 서로 의리를 지키는 옛날 사람들의 례의가 아니였던가 하는 생각도 들어 그날 아침후부터 나는 그냥 조형이라고 부르는것을 꺼리지 않았다. 조형이 한국에 돌아가신다음 이메일을 보내면서 내가 자기를 조형이라고 부르는것이 좋다면서 자기도 나를 최형이라고 부르기로 했다는것이였다. 그래서 우리사이에는 서로 형으로 부르는 칭호가 완전히 통용되였다. 참 편한 부름이다. 서로 조형 최형 하니까 무람없는것을.

   집안시를 돌아보는것은 우리가 이번 려행답사의 첫스타트였다. 그런데 나는 출발할 때부터 준비가 억망이다. 아침에 일어나 사진기에 필림을 넣고 시험삼아 한장을 찍자하니 소리가 나지 않는다. 나는 너무도 이상하여 다시 샤타를 눌렀다. 여전히 죽은 아이 배때처럼 소리가 없다. 하느님 맙시사. 사진기가 빵쿠가 났다. 어제 차에서 집에다 전화를 치니 전화가 되지 않았다. 그 전화기는 내가 평시에 쓰던것이 아니였다. 떠나기 전날 중학생신문사 마사장이 먼길을 떠나는데 전화기가 없어 되느냐고 자기에게 전화기 한대가 있으니 가지고 떠나라는것이였다. 내 전화기라야 쑈링퉁이니까. 그것을 지니고 갈수는 없었다. 큰 일도 없는 사람이  핸드폰이나 들고 다녀서 별볼일이 없었던 나는 남들이 핸드폰을 갖추라고 하여도 그냥 못듣는체 하였다. 장사도 안 하고 출근도 안 하는 나는 핸드폰은 갖출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핸드폰력사는 있는 사람이였다. 하루는 나의 처남이 핸드폰 한대가 생겼다면서 번호를 넣어쓰라고 하였다. 공짜라 그러마하고  수속을 하였다. 그런데 며칠을 가지고 놀지 않았는데 고 반질반질하고 매끌매끌한것이 나를 업수히 여기고  내 몸에서 뺑소니를 쳤다. 나에게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물건이라 별로 배아픈 일도 없었다. 그후에 화룡에 있는 나의 동서간 되는 사람이 <<형님은 작가라는게 쑈링퉁도 없어 되겠소. >> 하면서 쑈링퉁 한대를 가져다 나에게 주었다. 또 복이 없는 사람은 달랐다. 며칠 쓰니까 꼭도리가 떨어져 나갔다. 그런대로 말은 잘 통하면서. 친지들은 몇푼 안되는 꼭도리이니 수리하여 쓰라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말이 제대로 통하는데 수리는 무슨 수리냐고 그냥 그대로 지니고 다니였다. 후에 큰 딸이 새쑈링퉁을 가지고 다니다가 상해로 가게 되니 또 한대가 차례지였다. 그것이 내가 쓰고있는 전화기였다.

   떠나기 전날은 하는 일없이 바삐 보냈다. 그래서 문학반에서 시를 강의할 때  학생이고 변호사이며 이동통신에서 근무하였던 김무를 찾아갔다. 래일 먼길을 떠나니까 단선수금을 하는 전화로 만들어달라고. 저녁에 와서 찾아가겠다고 하면서 받지 않겠다는 돈 200원을 주었다. 그런 전화가 이튿날부터 통하지 않았으니 나는 무슨 영문인지도 몰랐다. 어디 전화기뿐인가? 또있다. 떠나기전날 집근체에 있는 약방에 가서 돈을 주면서 당뇨병약을 우리 집에 송달해 달라고 하였다. 약방영업원은 그러마고 하였다. 저녁 늦게 집에 들어가 물어보니 약은 무슨 약이냐고 하였다.

   <<허허, 최선생이 손에 다치면 뭐나 다 고장나는구만>> 하고 조형이 나를 놀려주었다. 그러면서 사진기 석대를 가져 왔으니 한대 쓰라고 내여놓는것이였다. 세계 각지로 갖고 다니며 숱한 사진을 찍은 독일제 렌즈를 박은 귀한 사진기였다. 조형은 떠날 때부터 준비가 주도하고 면밀하였다. 디지털사진기를 포함한 사진기 석대에다 필림 80여통을 갖고왔던것이다. 필림이 무겁고 짐이 넘어나니까 절반은 나의 짐속에 넣었다. 그리고 길에서 신세를 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려고 녀성용 스타킨도 수십짝을 지니였다. 짐을 끌고 다닐수있는 작은 차는 내것까지 가지고 왔고 아래 내의도 입기 편리한것으로 가져다 나를 주었다. 아침을 먹고 식당주인과 함께 사진기 수리부를 찾아가니 수리할수 없는것이란다. 그래서 식당주인에게 줘버리고 말았다. 전화기수리부로 찾아가 나의 전화기를 보였더니 너무 오래된것이여서 쓸수 없다는것이였다. 그래서 300원을 주고 중고 한대를 다시 마련하였다.  참 안 되였네. 첫날부터 쓸데 없는 경비지출이 생겨서. 조형 미안해! 하고 나는 속으로 되뇌였다. 겉으로는 허허 웃으면서.


4.우리는 깨여있지 못하였다.  


   첫견학은 고구려(高句丽) 장군분(将军坟)이였다. 부드럽고도 억센 기상을 하고 뻗어나간 산줄기를 병풍처럼 뒤에 두른 장군분은 희기도 하고 누르기도한  축조물 피라미트였다. 그것은 무덤이라고만 보아서 될 일이 아니였다. 망망한 바다의 한기슭에 정박하고있는 함선이였다. 아니 지금도 달리고 있었다. 옛고구려를 거느리고 오늘의 집안시를 거느리고 그렇듯 줄기차고 기세당당하게 달리고있었다. 고구려 제 20대 왕릉의 웅위로운 위용이 첫 눈에 안겨온 기상을 다르게 무엇이라고 표현할 말이 없었다.

   지척에 가서 왕릉의 주위를 돌아보며 나는 입을 딱 벌리였다. 한쪽 길이가 31.58메터인 정방형으로 된 왕릉인데 거석들로 쌓은 릉묘였다. 거석들은 죄다 장방형인데 작은것이라야 연길에서 뛰여다니는 택시만큼한것이였다. 쳐다보니 모두 스물두층계였다. 해설원이 말한다. 높이가 12.40메터이고 밑부분의 면적은 960평방메터다. 왕릉을 축조한 거석이 모두 1100개인데 그 체적이 자그만치 6000립방메터다. 제일 큰 거석의 길이는 5.7메터이고 너비는 1.12메터이고 두께가 1.1메터이고 제일 작은 거석의 무게가 열다섯톤이란다. 쌓아놓은 돌탑이 무너지는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대형반석을 한면에 세개씩 받쳐놓았다. 왕릉이 모두 네 개면이니까 받침돌이 12개여야 했다. 그런데 어찌된 연고인지 뒷면 받침돌 하나가 보이지 않아 지금은 11개가 왕릉을 받쳐주고있었다. 그것들은 천오백년전에 고구려 20대왕두리를 옹위하던 검을 찬 장군들이였으리라.  왕의 옥체를 모시였던 자리는 도굴을 맞아 안에 아무것도 없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22층으로 일매지게 쌓여있는 거석들을 밟으며 왕릉위로 올가갔다. 60평방메터되는 널직한 평면이 나를 맞아주었다. 원을 지어 둘러서서 배구라도 칠수 있는 왕릉꼭대기바닥은 유리판처럼 반듯하였다.

   앞을 내다보니 압록강 푸른 물이 출렁이고  강기슭의 량안에는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강남에는 조선자강도의 만포가 바라보인다. 강북의 서쪽에는 북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강이 한갈래가 압록강으로 들어가고있다. 그 강을 옛날에는 계아강이라 불렀고 근대에 와서는 통강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집안이 자리잡고 있는 평원을 통강평원. 20여만이 살고있다는 집안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발은 진의 북변을 휘돌아 벌판을 감싸안고 있다. 초겨울이라 대부분이 참나무 수림으로 된 산발은 부옇게 바라보인다. 집안시의 건물도 보이지만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무덤들이 더 눈길을 끈다. 이 고장에는 고구려 옛무덤이  7800여개나 있다고 한다. 그러니 집안진은 무덤진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이 무덤들은 한결같이 고구려 이왕지사를 증명하는 살아있는 언어들이다. 눈아래 멀지 않는 곳에 관개토왕비와 큰 무덤하나가 바라보이고  저 멀리 북으로  환도산성입구가 아련하다.

   왕릉을 떠나면서 돌아보니 여기선 천여년전 시간이 그대로 서있다. 세월이 천여년을 흘러왔건만 그때의 그 시간이 여기서 굳어져 왕릉으로 솟아있다. 저 거석들을 날라오던 민부들의 허영차 허영차 하고 목이 터지게 부르짖던 소리가 귀가에 따갑게 울려오고, 주먹땀을 좔좔 흘리며 힘을 쓰던  민부들의 얼굴이 어렴풋이 안겨온다.

   저 거석들은 진내에서 40여리 떨어진 오녀봉(五女峰)에서 날라온것이라고 한다. 가파르고 아름다운 오녀봉을 당년에는 신선이 있던곳이라고 해서 거선봉(居仙峰)이라 불렀다한다. 지금의 오녀봉바위들은 검은색갈이지만 고구려시기에는 황금빛이여서 황금석이라고 하였단다. 천궁의  궁전을 지을 때면 이 황금석을 날라다 지었기에 인간들이 도적질해 갈가봐 천제(天帝)는 토지신(土地神)을 파견하여 오녀봉을 지키게 했단다. 그바람에 누구도 오녀봉에 얼씬할수 없었단다. 토지신이 깊은 바위동굴에다 자기의 심장을 두고다니여서 토지신이 산에 없어도 그누구도 범접할수 없는 거선봉이였단다. 그런데 고구려국왕은 자기의 릉을 짓기 위하여 석공을 거선봉으로 보냈는데 들어가는 사람마다 살아서 돌아오는이가 없었단다. 임금이 사기에게 명을 내려 사흘내에 방법을 대라고 하였단다. 다 죽게 된 사기(思奇)는 가속을 피난시키려고 하였는데 그의 안해 령지(灵芝)가 방법을 내놓았단다. 그녀는 원래 거선봉마루의 령지초의 화신이였는데

   <<부군께서 시름 놓으세요. 토지신이 나한테 반했던자라 제가 그자를 꼬여낸다음 부군께서 그 깊은 동굴에 들어가 활을 당겨 심장을 쏘면 토지신이 죽을것이옵니다>> 한다.

   사기가 그 말을 따라 했더니 토지신은 죽고 거선봉은 다섯개의 봉우리로 깨여졌다 한다. 그래서 거선봉이 오늘의 5녀봉으로 되었단다. 임금은 너무도 기뻐 사기한테 2천의 석공을 딸리여 황금석을 캐여오게 하였단다.

  물론 이것은 전설이다. 하지만  고구려의 황제는 물론 고관대작들도 자기의 무덤을 돌로 쌓았다. 환도산성앞 개펄에는 지금도 그런 무덤들이 총총하다. 거석으로  사면을 쌓고 그우에다 숱한 돌을  날라다 둥그렇게 무져 놓았다. 무져놓은 돌들은 하나같이 반들반들하다. 천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돌묘지는 길손들의 눈길을 끌고 발을 잡아당기고 있다. 돌들은 죄다 강물에 닦기워서 뺀질뺀질한 돌들이다. 묘지우에 올라가 서서 그 돌들을 밟아보노라면 강물소리가 들리고 바닷물소리가 들리는것만 같다.

    당년에 고구려귀족들은 어이하여 돌로 무덤을 만들었던가!

   소설가 류연산씨가 쓴 <<혈연의 강들>>을 보면 고구려사람들이 왜 돌무덤을 만들었는가를 알수있다. 소설가 류연산씨는 전설로써 이렇게 밝히고있다.

   어느날 졸본부여국의 신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냥을 하다가 청석류돌무지에 앉아 한쉼 쉬였다. 갑자기 돌무지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터지였다. 돌무지에서 천만갈래의 금빛이 일었다. 신하들은 눈이 부시여 앞을 볼수 없었다. 이윽고 빛이 사라지고 돌로된 련꽃대가 나타나더니만 신왕을 앉힌채로 하늘로 올라갔다. 신왕은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시고 손을 저으시며 신하들과 작별하였다. 신하들은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신왕을 오래오래 배웅하였다.

   신왕이 천국으로 올라간 이듬해부터 해마다 이날이 오면 새로운 국왕은 신하들을 이끌고 와서 신왕의 제를 지냈다. 그때마다 신왕은 련꽃대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조언을 주군하였다. 그래서 졸본부여국사람들은 창석류의 돌무지를 사람이 죽으면 승천하는 신성한것으로 여기고 돌우에다 시신을 모시였다.

   고구려를 세운 초대왕을 우리는 동명왕(东明王)이라 부르기도 한다. 집정 19년이 되는 어느날 동명왕은 꿈을 꾸었다. 력대의  졸본부국 왕들이 동명왕한테 돌을 선물하였다. 동명왕이 그 돌들을 가지고  전방형으로 일곱층까지 쌓아놓자 돌무지에서 금빛이 눈부시게 빛발쳤다. 왕은 신무(神巫)를 불러다 해몽을 하였더니 고구려를 위하여 불멸의 공로를 세우신 왕님께서 사명을 다 하셨으니 천제가 부른단다. 높은 석대를 만드시고 그우에 서서 천사가 모시기를 기다려야 한단다. 동명왕은 신무가 시키는대로 하고 하늘로 올라갔단다. 그후부터 고구려의 국왕마다 등극하자마자 풍수지리를 보아 자리를 마련하고 거석을 옮겨다 왕릉을 건설하였다 한다.

   집안시에 있는 이름있는 무덤은 장군분만 있는것이 아니다. 호태왕릉, 태왕릉, 염모묘, 각저묘, 무용묘, 삼실묘...... 등 유명한 묘들이 여기저기예 널려있다. 이런 묘지들은 고구려시기에 신비한 전설같은 이야기를 엮기도 하였다한다. 봉상황 5년에 연나라 모용간(慕容谏)이 2만의 병기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친다. 선봉장군인 모용간은 선조의 무덤을 목숨처럼 보호하는 고구려 사람들의 성격을 알고서 투항하지 않으면 먼저 서천왕릉을 파헤치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조상의 묘지를 목숨처럼 여겼지만 그의 헛소리를 호락호락 들을 고구려 사람들이 아니였다.

   누구도 투항하지 않자 모용간은 군사를 묘지파기에 밀어부친다. 얼마 안되여 2천의 군사가 몰살되는 참상이 벌어진다. 이 광경을 목격한 군사들은 벌벌 떨기만 한다. 모용간이 다시 2000여명의 군사를 묘지파기에 밀어넣는다. 군사들은 누구도 손을 대고싶지 않았으나 어느 령이라고 거역할수 있었으랴. 또다시 거이다 죽고 한 500명쯤 남았는데 묘지안에서 음악소리가 흘러나온다. 퉁소소리, 가야금소리, 장고소리의 굉장한 합주다. 그래도 모용간은 군사를 전장에로 몰아부쳤는데 참패는 그뒤에 있었다한다.

   옛날에도 살아있었고 지금도 살아있는것만 같은 무덤. 장군릉을 다시 보아도 위풍이 천하를 떨치는 왕릉이다.

   내려오는 길에 조형은 <<왜 왕릉을 장군분이라 해.>> 하고 입이 뿌죽해났다. 고구려 20대 왕릉을 장군분이라고 격하하는데 대하여 불만이 굴뚝같은 조형이다. 전하는데  의하면 이 왕릉이 장군분으로 된데는 산동에서 오륙백년전에 살길을 찾아  여기로 왔던 류씨형제의 착각이였다고 한다. 력사에 대하여 까막골인 그들은 변경에 릉이 있으니까 장군의 무덤일거라고 했단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이 왕릉을 장군분이라고 부른단다.

   고구려의 위엄과 문화를 오늘도 고스란히 빛나게 전하는 왕릉을 보고 돌아오는 나의 발길은 가볍지가 않았다. 조룡남시인이 여기 왔다가 <<장군총>>이라고 쓴 시가 떠오른다.


얼마나 가슴 벅찬 세월이였더뇨

얼마나 처절한 싸움이였더뇨


그대 피어린 혈전에서 돌아와

잠간 붙인 눈이 천년이 지났구려


출정이 그리워 백마는 울고

영광을 기다려 장검이 우느니

 
장군이여 인제

잠을 깨실 때 되지 않았는고

 
   장군총이 잠을 깨지 않았는가? 아니 깨여있었다. 왕릉이 저기에 저렇게 웅위롭게 떳떳이 웅좌하고 있지 않는가! 천년의 바람이 천년의 눈이 천년의 비가 내렸지만 그날의 그 고구려 왕릉의 모습은 추호도 변하지 않았다. 왕릉은 위대하게 서서 천년을 지켜보았고 오늘을 지켜보고있으며 래일도 지켜보고있을것이다. 잠을 깨지 못한 이는 장군총이 아니라 우리들이다. 왕릉이 잠을 잔것이 아니라 잠을 잔것은 우리들이였다. 우리들은 눈을 똑바로 뜨고 잠을 깨야 한다. 나도 오늘에 와서야 겨우 어설프게 눈을 뜨며 잠을 깨기 시작하였다.  

5.력사의 현장이 살아 숨쉬는 곳


    400여년동안 세상에 호통을 쳤던 환도산성(丸都山城), 력사의 현장이 살아숨쉬는 환도산성, 얼마나 보고싶었던가 얼마나 알고싶었던가. 늦게나마 나는 네앞에 와 숙연히 서있다. 위나엄산성-환도산성이여.

   입구의 돌토성이 우리를 막아섰다.  길이40-90센치메터, 너비 20-50센치메터, 두께 10-30센티메터 되는 돌들로 쌓여진 산성은 총길이가 6951메터라는 기재도 있고 6395메터라는 기재도 있고 14리라는 기재도 있다.  마치도 커다란 벽돌장을  한장두장 쌓은듯이 일매지다. 가운데가 열리여있어 고구려의 황궁을 찾아들어가기에는 별불편이 없었고 그 옛날의 보초병도 없어 성큼성큼 들어선다. 한참 올라가니 왼쪽편에 산등성이 하나가 나타났다. 가이드는 우리를 그리로 안내하였다. 장방형으로 돌들이 쌓여있는 료망대가 나타났다. 고구려황성옛터를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었던 초소이기도 하고 봉화대이기도 한것이였다. 지금은 북쪽켠이 거이다 무너지여있었다. 가이드는 앞으로 이 요망대의 원형을 회복할것이라 한다.

   나는 료망대(辽望臺)로 올라갔다. 앞이 시원하게 트이여 조선의 산과 벌이 환히 내다보이고 통강벌이 눈아래 밟혀왔다. 과시 초소로 쓰기에는 안성맞춤한 곳이였다. 사위를 바라보니 환도산성은 두부를 앗을 때 쓰는 매오시처럼 생긴 곳이였다. 우리가 들어온 입구가 두부모를 맞추느라고 물이 빠지게한 주둥이고 사위는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매오시의 운두같았다. 저 산발들의 마루를 따라 외적들이 쳐들어오지 못하게 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 성이 지금도 그대로 있어 올라가 보면 알린다지 않겠는가. 황성입구로 들어올 때 북경의 만리장성에는 비길수 없는 조촐함을 가진 성이 산으로 뻗은것을 보았는지라 가이드 아가씨 해설이 사실이라는것이 믿어지였다.

   중국사람들이 수집정리한 고구려 전설을 보면 고구려발상지는 집안인것이 아니라 지금의 료녕성 환인현이라고 한다. 고구려의 도읍을 지금의 길림성 최남단인 앞록강기슭에다 옮겨온 왕은 제2대왕 류리명왕이라고 한다. 기원 3년에 집안으로 도읍을 옮겨온  고구려는 425년간 집안을 서울로 정하였다가 장수왕 15년(427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겨갔고 628년에 고구려는 자기의 수명을 마쳤다.

   고구려를 건립한 사람은 주몽(朱蒙)이다. 전하는데 의하면 주몽은 하늘에서 내려온 해모수(海慕漱)의 아들이며 물을 관리하는 천신 하백(河伯)의 외손자이다. 주몽이 탄생하여 왕이 되기까지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는데 그중에서 백운거사 리규보서사시의 이야기 한가지만 들어보기로하자. 중국 한나라 신작 3년(기원전 59년) 에 해모수는 다섯마리 룡이 끄는 룡수레에 앉아 따욱이를 탄 100여명 신하들의 옹위를 받으며 하늘에서 날아내린다. 왕이 되여 신하들을 딸리고 사냥을 하던 어느날 웅심연이라는 호수에서 미역을 감는 이쁜 처녀 셋을 발견한다. 그 처녀들이 바로 하백의 따님들이다. 큰 딸은 류화이고 작은 딸은 위화이고 둘쨋딸은 훤호이다. 해모수는 첫눈에 반하여 그들중 어느 한 공주를 안해로 만들기로 마음을 먹는다. 해모수가 그들한테로 다가가자 그들은 모두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린다. 해모수가 신하에게 어찌하면 좋겠는가고 묻는다. 신하는 궁전을 지어놓고 잠간만 기다리라고 한다. 그래서 해모수는 채찍으로 땅에다 동그라미를 하나 그린다. 웅위로운 궁궐 한 채가 눈깜박할 사이에 호수가에 일어선다.

   신하의 말대로 선녀같은 공주들은 물속에서 나와 궁전으로 들어간다. 눈부신 비단자리, 금술잔에는 넘치는  술이라 공주들은 깔깔대며 술을 마신다. 그녀들이 한참 술을 마실 때 해모수는 그녀들 앞에 나타난다. 깜짝 놀란 그녀들은 그를 피하여 뿔뿔이 도망쳤으나 맏딸 류화(柳花)가 해모수에게 잡힌다.

   이 소식을 들은 하백(河伯)은 대노하여 신하를 시켜 해모수를 룡궁으로 대령시킨다. 너는 어떤놈이기에 남의 귀중한 딸을 잡아다 안해로 삼으려는가 하고 하백은 대노한다. 해모수는 천제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럼 한번 재주를 비겨보자고 한다. 그리하여 해모수와 하백은 재주겨룸을 하게 된다. 해모수가 이기면 사위로 되고 지면 쫓기는 겨룸이다.

   하백은 바다잉어로 변한다. 이때 해모수는 수달로 변하여 잉어를 쫓아간다. 하백은 다시 꿩으로 변하여 하늘을 난다. 해모수는 제깍 매로 변하여 꿩을 쫓는다. 하백은 순간에 사슴으로 변하여 쏜살같이 내닫는다. 해모수는 승냥이로 변하여 사슴을 쫓아간다. 하백은 졌다. 그는 풍성한 잔치를 베풀고 딸과 사위의 백년가약을 축하해준다. 해모수는 너무도 기뻐서  술을 많이 마시고 취한다. 하백은 가죽주머니에다 류화와 해모수를 넣고 수레에 앉아 하늘로 날아올라간다. 수레가 강속에서 나오자 해모수는 류화의 금비녀로 가죽주머니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으로 빠져나온다. 하백은 큰 딸이 가문을 더럽혔다고 입술을 당겨 석자나 늘구어 놓고 우발수로 쫓아낸다. 부여국의 우발수(优渤水)에서 고기잡이 하던 어부가 물속에  있는 이상한 류화를 발견하고 금와왕(金蛙王)에게 보한다. 금와왕은 사람들을 시켜 쇠줄그물로 류화를 끌어올린다。입이 추하게 생긴 류화는 말을 못한다. 금와왕은 령을 내려 류화의 입을 세 번이나 잘라내서야 류화는 말을 한다. 해모수의 왕비이며 하백의 맏딸이라는것을 안 금와왕은 그를 별궁에 모신다. 류화는 커다란 알을 낳는다. 금와왕이 괴이하게 여겨 알을 마구간에 던지게 한다. 그런데 말들이 밟지 않는다. 금와왕은 또 알을 수림에 던지게 한다. 짐승들이 알을 높이 모신다. 그래서 금와왕은 알을 류화에게 돌려준다. 류화가 알을 정히 품었는데 아이가 태여나 그이름을 주몽이라 짓는다. 주몽은 태여나 한달만에 말을 하고 어릴 때부터 활을 쏘아 물레우의 파리를 잡고, 멀리있는 물동이에 구멍을 빼고  다시 살에 흙을 발라 쏘면 물동이 구멍을 메꾼다. 금와왕의 태자가 시샘하여 주몽을 나쁜놈이라며 앞으로 큰 일을 저지를 거라고 아버지한테 고한다.

   금와왕은 주몽을 말먹이는 일을 시킨다. 어머니는 앞으로 큰 일을 하자면 좋은 말이 있어야 한다고 아들을 일깨운다. 주몽은 말우리에 와서 채찍으로 말들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한 적토마가 울타리를 뛰여넘는다. 주몽은 적토마의 혀바닥에다 바늘을 질러놓는다. 여느 말들은 살이져가지만 적토마는 여물을 먹지 못하여 뼈가 앙상하게 여윈다. 하루는 금와왕이 말우리를 시찰하다가 적토마가 너무도 여위였는지라 주몽에게 가지라고 한다. 주몽은 말의 혀바닥의 바늘을 빼고 살이 피둥피둥하게 기른다.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그는 딱친구들인 오이(乌伊), 마리(摩攡), 협부(陜父)들을 데리고 도망친다. 강물이 앞을 가로 막는다. 배가 없다. 뒤에서는 금와왕의 일곱아들이 군사를 휘동하여 쫓아온다. 주몽은 하늘에 대고 소리친다. 나는 하늘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이다. 란리를 피하여 여기에 이르렀으니 슬프다. 외로운 이 마음을 하늘과 땅이 저버리려는가. 그리고는 활을 들어 강물은 친다. 순간 자라들과 물고기들이 모여와 물우에 떠서 다리가 된다. 주몽과 그의 친구들은 강을 건너간다. 뒤따르던 금와왕 아들의 병마들은 그다리를 건느려다 자라들이 물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강물에 빠진다. 주몽은 지금의  혼강가에 있는 비류국(怫流国)으로 가서 산다. 비류왕이 자기를 잘 섬기지 않는다고  나무린다. 주몽은 무예를 비기여 승한자가 왕이 되자고 한다. 그리하여 주몽과 비류왕의 무예겨룸이 벌어진다. 처음으로 활쏘기다. 비류왕이  열발자국밖에 있는 사슴의 배꼽을 향하여 화살을 날렸는데 빗나간다. 주몽은 백보밖의 가락지를 쏘아서 부서지게 한다. 비류왕은 이웃나라의 북과 나팔을 빌어다 제것이라고 자랑한다. 그런데 그가 들고온 북과 나팔이 죄다 낡은것으로 되어버린다. 비류왕이 자기 도읍의 궁전을 자랑한다. 궁전기둥이 인차 좀에 먹히워 볼모양이 없게 된다. 하루는 사냥을 나갔던 주몽이 사슴을 사로잡아 거꾸로 달아매고 네가 비류땅에 큰 비가 내리게 하여 홍수가 들게 하면 살려주겠다고 한다. 사슴은 하늘을 향하여 큰 소리로 슬프게 운다. 과연 하늘에서 강물이 쏟아지듯이 소나기가 내려 비류땅에 대단한 홍수가 진다. 비류왕 송양(松让)도 홍수에 빠진다. 이때 주몽이 채찍으로 물을 친다. 물은 두갈래로 갈라지더니만 인차 땅에 스며든다. 이리하여 주몽은 비류땅에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라고 그 이름을 지었다한다...

   요망대에서  뒤로 조금 가니 초병들이 주둔했던 집터자리가 나타났다. 지금은 나무들 사이에서 집기둥을 받쳤던 돌들만 쓸쓸하다. 건너편을 바라보니 황궁의 성터자리다. 옛날엔 으리으리한 궁전이 저기에 있어서 문무백관들이 의포도 정히 차리고 왕을 배알하러 드나들었겠으나 지금은 그 위용을 볼수 없고 초겨울의  소조한 바람이 스치여 지나고 있을뿐이다. 아득히 높아진 푸른 하늘에서는 설핀 그름이 가는듯 마는듯 조을고 황궁을 둘러싼 산줄기에서는 참나무숲이 누렇게 말라있다. 세월의 조화를 그누가 알랴. 시간은 상전을 벽해로 만들기도 하고 벽해를 상전으로 만들기도 하거니. 나는 처연한 눈길로 사위를 바라본다. 박화시인이 생전에 읊었던 시 <<환도산성 단상>>이 떠오른다.

 


 산이 내린다 발아래

옛날이 다가선다

이끼푸른 성벽에는

땀의 흔적

피의 자국

힘의 술결

쇠같이 단단한 울타리라고

쇠울이 또 여기였건만

아득한 전설이 산에 실리고

뜨거운 메아리 가슴에 넘쳐

깨여진 기와장은

력사의 파편

오늘도 무거이

버려진 꿈쪼각

너무도 긴긴 세월

망각에 묻혔던 그 사연이

죄스런 심장을 허비여도

옛님은 할 일 다했거늘

잊음이 바로 죽임이라고

피줄 뛰는 여기 정든 땅에서

무거운 기와장에 구름이 뒤채고

옛님의 성벽에 노을이 부시다.

 

  시인들은 여기 왔다가 앞을 다투어 시를 지었는데 내 심장은 돌심장인가 시가 또오르지 않는다. 사람들은 날 시인이라고 하지만 돌아가서도 한편의 시도 쓸것같지 못한 망연함이다. 웬 일일가? 나도 모른다. 어쩐지 시적감흥이 나지 않고 심장만 세차게 망치질 하고있다.

   류리왕때부터 민부의 피와 뼈로 195년동안이나 쌓은 환도산성에 와서 시 한수도 떠올리지 못하는 부끄러움을 누구와 말할길이 없다. 물깊이 80메터나 되는 음마만(饮马湾)이라는 늪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물이 한방울도 고여있지 않고 늪자리마저 확연히 짚을 곳이 없다. 음마만이 어러하니 우물이 두 개나 있었다는거야 더 찾을 길이 있으랴. 내 상상도 음마만처럼 말라버렸는지 모른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내려와서 환도산성을 다시 돌아본다. 대무신왕 11년 여름에 펼쳐였던 전란의 란리가 눈앞에 펼쳐진다. 대무신왕이 백만대군을 거느리고 먼저 국내성을 함락시킨다. 사람도, 개도, 돼지도, 낟알도 아무것도 줍지 못하고 헛물을 켠다. 성이 난  대무신왕은 실패를 달가와 하지 않고 련이어 환도산성을 포위한다. 고구려에서는 산성문을 닫아걸고 싸울념을 하지 않는다. 오래 포위하고 있으면 저들의 식량이 떨어져 항복할것이라고 믿었는데  오히려 대무신왕의 군량이 다 떨어지는데도 고구려는 반응이 없다. 쌍방은 다 식량이 절단이 난다. 이때 한시종이 음마만에서 잉어 한 마리를 잡아온다. 이 물고기를 본 을두지(乙豆智)가 묘한 계책이 떠올라서 왕에게 이리이리 하자고 간한다. 왕이 고개를 끄덕인다. 을두지는 련꽃잎에 잉어를 싸서 성외에 있는 병졸들한테 상으로 보내준다. 성안에 쌀도 없고 물도 없으리라고 여겼던 대무신왕은 깜짝놀라 하는수 없이 군사를 철거한다.

   인간이라는 고급동물이 이 세상에 태여난 날부터 오늘의 이 시각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날 싸우지 않고 편안하게 산 날이 있었던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400여년의  고구려력사를 기록하고 있던 저 환도산성에 맞아 부러진 화살은 얼마였고 부서진 장검은 얼마였고 성안에서 성밖에서 죽은 목숨은 또 얼마였으랴. 전쟁이란 정의든 비정의든 승리하자면 죽음을 내야 한다. 전쟁은 통치집단의 리익을 위하여 사상자를 낸다. 전쟁에서 제일 불쌍하게 무리로 죽는 사람은 고관대작들이 아니라  백성들이고 제일 큰 리익을 얻는자는 백성들이 아니라 고관대작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말로는 언제나 뻔뻔스럽게 백성들의 리익을 위하여 싸워야 한다고 선동한다. 싸울 때는 정의라고 기발을 흔들지만 력사가 써억 지나간다음 후세사람들이 돌이켜보면 웃으웠던 전쟁이 너무도 많다. 인류는 앞으로도 얼마나 싸울지 모른다. 아마 인류가 멸종되는 날까지 싸울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물들 무리중 아마 동종끼리 무리 죽음을 내는것은 인간의 전쟁밖에 없으리라. 전쟁을 모르는 인류가 이 세상에 태여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것인가. 하느님이 인류를 낼 때 왜 전쟁을 하게 만들었을가. 전쟁만 하지 않게 만들었더라면 누구나 다 하느님을 우러러 모셨으련만...


6.호태왕비는 말한다.


   집안시는 광서 28년부터 1965년까지는 집안현이라고 불리였다. 그후에 시로 되었고 저명한 서법가 범증이라는 사람이 소강남이라는 글을 돌에 새기여 집안시의 토구령에다 세운다음에는 소강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기원 2년부터 427년까지 고구려 시대에는 집안시를 국내성이라 불렀다 한다.

   이 국내성에 고구려 력사를 증언하고 고구려문화를 찬란히 빛발치게 하는 호태왕비가 있다. 기원 414년에 고구려 20대 장수왕이 부왕의 공적을 기리여 세운 이 비를 <<국강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国冈广开土境平安好太王碑)라 부른다. 국강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란 기다란 이름을 가진 왕은 고구려 19대왕이였고 장수왕의 아버지였다. 그 기다란 이름을 부르기 쉽게 부르느라고 우리는 이 비를 간단히 호태왕비라 부르고 한국에서는 광개토왕비라고 부르기도한다.

   나와 조형은 지금 이 호태왕비 앞에 서있다. 유네스코에 의해 2003년에 집안시의 고구려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였다. 호태왕비는 유리벽과 지붕이 달린 보호각에 싸여있다. 몇해만 더 빨리왔더라도 만져볼 수 있는 호태왕비를 나는 눈으로만 쓰다듬는다. 네모꼴기둥형으로 세워진 이 비는 높이가 6.39메텅고 너비가 1.34-2메터이다. 비의 사면을 돌아가며 한문으로 비문이 새겨져있다. 글줄마다 41자쯤 되는 글이 44줄쯤되는데 도합 1775자가 새겨져있다. 글자마다의 크기는 9-10센치메터인데 예서체가 대부분이고 부분적으로 호서체, 계체이다. 이런 서체들은 고구려의 관방에서 썼던것으로 알려지고있다.

   6메트도 넘는 이 검은 빛이 반짝이는 돌이 어디서 왔는가? 이 비돌은 원래는 집안의 돌인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던 신선이 백두산에 내려와  5000여년을 수련한 신령한 돌이였다. 옛날에 천지에 암수 두룡이 살면서 한재와 수재를 일으켜 백성들을 못살게 굴었다. 하느님이 이 일을 알고 백두산천지가에 있는 강룡석 두돌에게 명하여 룡들을 다스리라고 하였다. 암수 두돌은 암수 두룡이 말썽을 일으키지 못하게 백여년을 지키였으나 룡은 아무런 말성도 일으키지 않았다. 하루는 수돌이 너무도 심심하여 암돌에게 고구려국내성이 번창하다고 하는데 구경을 가보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암돌은 기막히게 아름다운 색시로 변신하고 수돌은 색시에 못지 않는 의젓한 남편으로 변하여 번화한 고구려 국내성을 구경하였다. 하루동안 구경한 그들은 하루를 더 보고 이튿날 백두산으로 돌아가기로 약정하였다. 그날 국왕이 이들을 발견하고 색시가 욕심나서 신하들에게 어디에 드는가를 살피게 하였다. 국왕의 신하들은 밤중에 가만히 그들이 잠자는 방에 뛰여들어 먼저 남자를 바줄로 꽁꽁 동이고 여자를 메여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고구려 장군 10여명이 접어들어도 그녀를 잡을수 없었다. 바줄에 묶이였던 남자가 깨여나서 싸우는것을 보자 응하고 힘을 쓰더니만 일시에 바줄이 동강났다. 하여 왕은 색시를 가질념을 버리고 돼지피를 한 함지가져다가 틈을 보아 젊은이 몸에 뿌리게 하였다. 온 몸에 돼지피를 들쓴 젊은이는 쾅 꼬꾸라졌는데 검은 빛이 반짝이는 돌이 되였다. 색시는 그들과 생사결판을 내고싶었으나 또 돼지피 벼락을 맞을가봐 휙 소리와 함께 사라지였다. 지금의 호태왕비가 바로 그 돌이란다.

  호태왕은 고구려 력사상 28대 왕들중에서 위대하기로 손에 꼽을만한 황제였다고 한다.   38세를 일기로 살아왔던 그는 등극한 391년에 서북의 연나라와 싸우고 일본과 통한 백제를 쳐서 신라를 구한다. 그리고 침략하여 들어온 일본을 격파하고 그 세력을 사방으로 뻗친다. 404년에는 일본과 내통한 백제가 신라를 침공하자 신라의 청을 받고 군사를 남하시켜 일본군과 정면충돌한다. 일본군을 대패시킨다. 호태왕은 지금의 동북땅과 한강이북을 통합시켜 고구려의 전성의 대문을 활짝 열어놓는다.

   어제밤에 집안시에 도착하다보니 집안시의 번화거리를 보지 못하였다. 조형과 함께 점심을 치르고 잠간 집안시의 번화거리를 거니였다. 태왕상점, 태왕식당. 태왕카라오케이라는 간판들이 이따금씩 보이는가 하면 태왕병원이라는것도 보인다. 1000여년전에 고구려를 쥐락펴락하던 왕의 이름이 시장경제시대에서도 오르내리며 자못 인기를 끌고있다. 어쩐지 이런 간판을 보면 입으로  한번 외워보게 되며 친절함을 감수하게 된다. 고구려는는 망했어도 력사는 망할수 없고 지울수 없는것은 이래서리.

   호태왕비의 주위에는 새파란 풀을 심어놓았는데 서리에 맞고 찬바람에 뜯기운 풀들은 뿌옇게 죽었지만 이 풀들만은 새파란 그대로였다. 클로바란 이풀은 불란서의 나폴레옹의 목숨을 구한 풀이라고 조형이 말씀한다. 제1차 세계대전때. 클로바는 워낙 세잎사귀 풀인데 나폴레옹이 네잎사귀 클로바를 만나 하도 신기하여 허리를 굽히고 볼 때 탄알이 등허리 우를 날아지났다고. 그래서 클로바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행운의 풀이 되었단다. 호태왕비는 이 행운의 풀들속에서 웅위롭게 서있다.

   호태왕비가 오늘에 이르는 천여년세월에 무수한 희비극을 엮는다. 고구려가 망해서 천여년이 흘러간 후다. 청나라는 백두산을 만족의 발상지라고 하면서 강희 (康熙)16년(1677)에 백두산지역을 사람들이 나들지 못하게 봉해버린다. 그때 백두산의 서쪽은 집안까지였다. 그래서 호태왕비도 사람들이 얼씬거릴수 없는 구역에 귀속된다. 그때로부터 201년동안 집안은 인적이 없는 불모지로 된다. 고구려 묘지들과 비석은 비바람 눈바람에 씻기고 울창한 숲에 쌓여서 시퍼런 청태에 휩싸인다. 1877년에 통화현과 회인현(오늘의 환인현)이 설치된다. 그때 회인현의 문서는 관월산(关月山)이라는 사람이였는데 그는 석공출신이였다. 옛묘지와 고적을 찾아다니기를 즐기던 그가 통구에 이르러 동강의 숲속에서 우연히 청태에 덮인 석주를 발견한다. 손으로 청태를 벗기며 쓰다듬어보니 글씨가 새겨져있었다. 그것이 지금의 호태왕비다. 201년만에 사람들 안목에서 사라졌던 호태왕비가 부활된것이다. 곽월산은 현의 허가를 받고 호태왕비근처에 초막을 짓고 사는 초천부(初天富)에게 비석의 청태를 벗기게 한다. 초천부는 날마다 사다리를 놓고 올라서서 청태를 벗기였다. 잘 벗겨지지 않으니까 소똥을 바른다. 소똥이 마르니까 불을 지른다. 그래도 글자들이 확연히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기름을 치고 또 불을 지른다. 과연 청태는 다 타버리였으나 가석하게도 비석에 금이 가고 어떤 글자는 알아볼수 없게 된다. 현재 비석의 1면에는 16자가 보이지 않고 2면에는 25자가 보이지 않고 3면에는 81자가 보이지 않는다. 도합 122자가 보이지 않는것을 그때에 입은 액이라는 말이 있다.

   별처럼 반짝이는 글씨들이 나타나자 고고학자와 금석학자들이 물밀 듯이 몰려든다. 초천부는 명을 받고 창호지로 탁본을 떴는데 글자가 똑똑하지 못한것은 원모양대로 다시 쫗아서 탁본을 찍어낸다.  현아문과 고고학자들한테 바친 외의 나머지 탁본을 초천부는 팔아서 돈을 번다. 성경(심양)과 안동(단동) 사람들은 탁본을 사다가 외국사람들에게 고가로 팔아 돈벌이를 한다. 광서 2년(1902)에 초천부는 관아에 탁본을 바친 나머지를 팔수있다는 허가를 받는다. 그는 탁본에다 사진까지 붙혀서 자기의 전매품으로 만든다.

   30여년을 호대왕비에 붙어살던 초천부가 죽자 그의 아들 초균덕(初均德)이 탁본을 이어받는다. 민국년간에 초균덕은 탁본을 대량 생산하여 한장에 소양 12원, 대양 10원을 받는다. 당년에 사람들은 그를 초대비라고 부른다. 초대비는 나이 70이 되니까 땅과 집을 팔아가지고 청석진으로 이사하여 만년을 보낸다.

   광서 33년(1907)에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 57련대장 고자와 도꾸헤이가  호태왕비를 팔라고 한다. 진사출신이고 연박한 학식을 가진 현장 오광국(吴光国)은 호태왕비의 진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는 사람이였다. 문서에는 그들의 대화기록이 이렇게 씌여있다.

   <<이 비는 대단히 무거워 도저히 일본까지 운반할수 없을겁니다>>

   <<그거야 쉽지요. 우리의 병선이 이보다 훨씬더 무겁지 않습니까? 병선으로 옮기려합니다.>>

   <<이 비석은 지방에 있지만 국보입니다. 나는 지방의 보잘것 없는 관리라 어찌 나라의 국보를 마음대로 처리할수 있겠습니까. 각하께서는 교양이 깊으신분인데 나의 고충도 리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사실 저는 문화유물에 흥취가 있답니다. 부르는 대로 값을 치를테니 지현께서 양도하시지요.>>

  <<각하께서 그렇게 흥취를 갖고 계신다니 나한테 있는 탁본 몇장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오지현은 그에게 탁본을 주었다. 일본군 고자와 도꾸헤이는 할말이 없었다.

  만주사건후 일본이 동북을 강점하였는데 웬 영문인지 호태왕비를 가져가지 않았다. 만주국이 영원히 자기네 나라가 되였다고 환상하였는지도 모른다.

   1925년 집안현의 류천성(刘天成)이 모금을 해서 높이 석장 너비 한장반되는 정자를 세워 호태왕비가 비를 피하게 하였다. 목조건물이라 반세기가 지나자 풍우에 정자가 거덜이 났다.1982년에 집안현 문화유물관리소에서 정자를 다시 지었다. 그때 중국사회과학원부원장이며 고고연구소 소장인 하내가 <<호태왕비>>라는 넉자를 써줘서 편액을 달았다.

   호태왕비의 비문에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선대왕들의 이름이 새겨져있고 관개토왕의 위업과 고구려당년의 제도가 밝혀져있다. 호태왕비는 이런 력사의 현장을  거느리고 영원히 웅위롭게 서있을것이다.

   나는 호태옹비옆에 있는 호태왕묘로 올라갔다. 집안시가 눈아래 밟히였다. 크고 작은 돌들이 쌓여있다. 돌이나 하나 주어다가 기념으로 하자고 눈에 불을 켜고 기념될만한 돌을 찾았다. 마침 달걀만큼한 돌이 눈에 들어왔다. 묘지모양으로 생긴돌인데 밑이 반질반질하고 허리쯤부처 약간 갈아놓은것처럼 다슨 돌이다. 물우에 뜬 섬같은 것이다. 보면 볼수록 호태왕묘와 흡사하다. 호태왕묘도 대지라는 이 바다에 솟아있는 영원히 가라앉지 않을 하나의 돌이나 섬이나 산이 아니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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