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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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를 쓰는 방법.5
2008년 10월 13일 18시 21분  조회:968  추천:44  작성자: 최룡관
 

제5장 이미지의 특성


  세상에 천차만별의 사물들이 존재하고있는것은 사물마다 각각 자기의 특성이 있기때문이다. 이미지도 존재하므로 자기의 특성이 있기마련이다. 이미지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돌이나 나무와 같은 실물인것이 아니라 상상속에 존재하는 비실재적인 사물을 언어로 그려놓은 그림인것이다. 이 언어의 회화는 현실에 대한 파괴속에서 생겨나는 상상의 산물로서 그의 특성을 한마디로 규납하면 불협화 혹은 낯설기라고 할수있다. <<시는 친숙한 것을 고의적으로 낯설게 만들며 가까이 있는것을 먼곳으로 가져간다.>>(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그리하여 이미지는 사물을 떠나고, 관념을 떠나고, 인간을 떠나고, 언어를 떠나고, 현실을 떠나는 작업을 하고 문체도 때로는 파편문체라는 새로운 문체를 요구하기도 하기때문에 기성의 사상관념, 문체, 및 론리로서는 이미지시를 해석하기 어렵다.

  아래에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제1절 이미지가 사물을 떠난다.


  시인은 어떤 사물이나 관념에서 무엇인가를 느끼고 시를 쓰기마련이다. 하지만 시인은 <<사물을 보인 그대로,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보지 말고, 이렇게도 볼수있지 않을가하는 시각으로, 보이는 대로에서 있을수있는 사실로, 그리고 새로운 사실로 볼줄 아는 특수한 시력>>으로 보아야 한다고 박진환은 <<현대시를 이렇게 쓰자>>에서 밝히고있다. 요약해보면 원물을 그대로 쓰는가 아니면 변형시켜 새로운 사실로 쓰는가이다. 새로운 사실로 쓰는것이 이미지이며 현대시이다. 새로운 사실로 쓰면 당연히 원물을 떠나게 되는데 소위 사물을 떠난다는 함의가 여기에 있겠다.

  우리가 바위우의 소나무를 시로 쓴다고 하자. 그 소나무를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쓰는것이 아니라 그 소나무로부터 상상하여 낸 새로운 사실을 써야 한다는것이겠다. 새로운 사실을 상상해 낸다는것은 변형을 시킨다는것이고 변형시켜 얻은 사실이 바로 새로운 사실이라겠다. 이 새로운 사실은 소나무가 아닌 다른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사물을 떠난다는 론리가 서는것이다. 시를 쓸 때 사물-관찰-변형의 길을 걷게 되는데 시를 쓴다는 것은 변형으로 얻은 새로운 사물을 쓴다는 말이다. 새로운 사실이나 새로운 사물은 익숙한 것이 아니라 낯선것이다. 이 낯선것이야말로 시인이 창출해낸 이미지이다. 후고 프리드리히는 <<현대시는 그것들(사물이나 인간)을 익숙하지 않는곳으로 데리고 가서 낯설게 만들며 변형>>시키는 작업이라고 한바있다.

  백문불여일견이라고 한번 보기로 하자


작은 섬주위에

텅 빈 배가 서로 머리를 대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일요일이든 평일이든

화가도 모파상도 산보하러 오지 않는다

앞가슴이 불룩한 바보같은 여자와 함께

두팔을 걷어부치고 배를 타러오지 않는다

작은 배여

이 섬가에서 너는 나를 슬프게 한다


  프랑스 시인 아폴리네르가 쓴 <<개구리>> 전문이다. 보는바와 같이 제목은 <<개구리>>지만 시에서는 개구리라는 언어도 없고 그런 뜻도 전혀 나타나지 않고있다. <<개구리>>는 밀려나고 대신 <<텅 빈 배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있다>> <<화가>>도, <<모파상>>도, <<바보같은 녀자>>도, <<두 팔을 걷어부친>>남자도 오지 않고 작은 <<배>>가 <<작은 섬>>에 쓸쓸히 있으며 <<나를 슬프게 한다>>.

  망망한 바다, 작은 섬, 섬가에 놓인 쪽배 두개 이렇게 상상해보면 섬과 쪽배가 한마리의 개구리, 두다리를 벌리고있는 개구리를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개구리>>라는 제목을 달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개구리>>와 시적내용은 다른것으로 되여 시가 사물을 떠나고있음은 분명해졌다고 하겠다. 우리는 또 아무도 오지 않는 이런 환경에 홀로 서있는 <<나>>, 고독한 <<나>>를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시는 고독을 이미지화것이라 해도 너무 틀린다고는 할수 없으리라. 현대시가 사물을 떠난다는 의미는 시인은 시적대상을 정면으로 노래하는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서 받은 느낌을 다른 사물이나 사실로써 노래한다는것을 알수있겠다.

  일본의 무라노시로오의 시 <<체조>>를 다시 보자


나에겐 사랑이 없다

나에겐 권력이 없다.

흰 셔츠속의것이다

나는 해체하고 구성한다

지평선에 와서 나하고 교제한다

나는 주위를 무시한다

하지만 외계는 정렬한다

내 목통은 피리

내 명령은 소리다

나는 보드라운 신바닥을 젖혀

심호흡을 한다

이때

내 형상에 꽂혀지는 한송이 장미


   시적대상은 <<체조>>이지만 시의 내용은 무엇인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체조란 몸과 팔다리를 흔들어대는것인데 시에는 구런 의미의 언어가 등장하지 않고 있다. 동장하였다면 <<흰 셔츠속의것이다>>와 <<보도라운 신바닥을 젖혀>>이다. <<흰 셔츠속의것>>은 몸을 가리킬것이고 <<신바닥>>은 발을 가리킬것이지만 애매하다. 더구나 <<신바닥을 젖혀 심호흡을 한다>>하니 발로 호흡한다는 표현이 되고있다. 복합이미지로 구성된 <<체조>>는 <<체조>>와는 일만팔천리나 떨어진 형상을 구축하고있다.

  무슨 의미인가? <<체조>>가 결국은 <<내 형상에 꽂혀지는 한송이 장미>>이다. <<체조>>와 <<한송이 장미>>를  어떠한 해석을 붙이면 명료해질가? 그것은 독자나름의 해석을 따르는수밖에 없을것이다. 여러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있는것이 이미지시의 기능의 하나라고 할수있다. <<체조>>는 바로 이런 기능을 향유하고있다하겠다. 한편의 시가 무슨 뜻인가를 똑똑히 나타내던 시대는 랑만주의시의 결속과 함께 종지부를 찍었다. <<해체하고>> <<구성하고>> <<지평선>>과 <<교제하고>> <<신바닥을 젖혀 심호흡>>을 한후에 <<한송이 장미>>로 태어난 이 성과물은 내함이 다채롭고 풍만한것이여서 한마디로 규정짓는다는것은 무리이며 불가능한것이라겠다.

  이번에 한춘섭의 시조 한수를 보자


초이틀 서산마루

고운 이 은장도

봉긋한 젖가슴이

사려비칠 별빛같다

돌담에

들고난 물동이

희디흰 박꽃미소

떠난 사람 예전 일을

숯불 피고 보라한다

들길로 걸어가면

묏새알 잠들고야

촉촉한

천지 떠난채

잠이 들가 재촉하네

   <<한 평생 단 한번만이라도 훌륭한 이미지>>를 만들어보리라는 야심을 품고 데뷔 35년만에 펴낸 시조시집 <<적>>에 실린 첫수 <<초승달>>이다.

  시조의 전편에 <<초승달>>>에 대한 직접적진술이 한마디도 없다. 있다면 <<초이틀 서산마루>>이다. 오라지 않아 천지간에서 사라질 <<초승달>>은 상징적의미로 쓰인것이다. <<초승달>>은 변형되여 <<은장도>>로 나타난다. 초장에서 나타났던 <<은장도>>는 중장에서 <<별빛같은>> <<봉긋한 젖가슴>>에 밀려난다. 종장에서 이 <<젖가슴>>은 <<물동이>>와 <<박꽃미소>>에 의하여 또 밀려난다. <<초승달>>은 연시조인데 두번째 시조의 초장은 <<떠난 사람 예전 일을 숯불 피고 보라한다>>고 쓰고있다. <<숯불>>에 의하여 <<물동이>>도 <<박꽃미소>>도 다 밀려난다. 중장에서 또 새로운 사물들에 잠든 <<묏새알>>이 나타난다. <<숯불>>빛에 의해 현현된것은 잠든 <<묏새알>>이다. 시인은 최후의 종장에서 <<잠이 들가 재촉하네>>로 끝을 맺는다. 왜 잠들지 말라는건가. 들의 <<묏새알>>이 묏새로 깨여나 자연속으로 날아가야 할 일이 아직도 남았기때문이라고 할수있다. 이 일의 몫은 <<초승달>>한테 있는 같다. <<촉촉한 천지>>이니 이슬이 내리는 새벽으로 시간이 흐르고있다. <<초승달>>이 <<묏새알>>을 새로 만들수있겠는지는 아직 미지수다. <<초승달>>은 60고개에 오른 시인일지도 모른다. 전반 연시조가 파편문체로 되여있어 시인 자신이 아니고서는 철저한 리해 가능성이 배제되고있다. 우리는 상태와 기분만을 수용하여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한 인간이 걸어온 길은 빛나는 자국이였건만 아직도 할 일이 많아 자신을 채찍질하고있는 모습을 보는것쯤으로 받아들이면 어떠할가하는 사려를 굴려본다.


내 귀가에 얼음처럼 매달린

아버지 말소리를 뚝 따서

손바닥에 놓으면

숯처럼 검은 침묵이 된다

그것을 뜨겁도록 꽉 움켜쥐면

손가락새로 막 흘러나오는

피처럼 붉은 불길이 된다

  

   최룡국씨의 시 <<아버지 말소리 >> 전문이다. 아버지 말소리는 아름답거나, 퉁명스럽거나, 귀청을 다치는 어떤 소리인것이 아니라 소리라는 사실을 떠나서 고드름이 되고 숯이 되고 붉은 불길이된다.시인이 쓰려는 사물을 떠나서 다른 사물로 표현된 이미지라겠다.

  이미지시인은 일상적인 개념이나 관념으로 말하는것이 아니라 이미지로 말한다. 이는 현대시의 근본이다. 시인은 시적대상을 잡은후 그 사물의 형상이나 의미를 떠나서 새로운 건축작업을 한다. 시인의 지적인 통제하에서 완성되는 이 건물은 시인이 홀로 기초를 파고 벽돌을 쌓고 지붕을 만들고 타일을 붙이게 된다. 이 건물은 력사에도 없었고 현실에도 없었던 시인만의 궁전이다. 타인이 이 궁전속으로 들어가자면 출입구문을 찾아야 하고 문열쇠를 지녀야 한다. 그 열쇠를 누가 만들어주는것이 아니다. 독자 본인이 벼려서만들 일이다.


제2절 이미지가 관념을 떠난다


  이미지가 시적대상인 사물을 떠난다는것을 살펴보았다. 이제 관념을 떠나야 한다는 명제를 살펴보자. 사물을 떠난다는것도 어찌보면 관념을 떠난다는 하나의 류형으로 볼수있겠다. 관념이란 무엇인가? 한 사물에 대한 판단이며 견해이다. 관념은 감각적인것이 아니라 리성적인 것이다.

  <<현대시는 종래 의미의 인간성, 체험, 감상 그리고 심지어 시인의 개인적 자아마저도 도외시해 버린다>>고 후고 . 프리드리히는 밝히였다. <<종래의 의미, 인간성, 체험, 감상>> 및 <<개인적자아>>까지 버리면 무엇이 남는가? 남는것이 없다. 이 남는것이 없는 빈터에서 사물과 인간의 새로운 관계가 산생되고 새로운 인간성, 체험, 감상이 산생되고, 새로운 자아가 산생된다. 이런 새로운것들은 시인의 상상을 통한 재구성속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시를 보면 관념을 떠난다는 명제가 명확해지리라.


        밀턴은 우리를 위해 지옥의 문을 열어

        우리로 하여금 보게 했다

        단테도 동일한 일을 하였다

        이 두 지옥은 각각 특징이 있었으며

        하나는 밀턴의 지옥이며 또 하나는 단테의 지옥이였다

        밀턴은 지상에 있는 지옥에 모든 것을 넣어두었으며

        단테도 자기를 위해 지상에 있는 지옥에 모든것을 넣어두었다

        당신이 나를 위해 당신의 자물쇠를 연다면

        나도 당신을 위해 나의 지옥의 자물쇠를 열어놓겠소

        그러면 그 두지옥은 특징이 있지요

        우리들 각자는 지상에 있는 지옥을 우리를 위해 보이겠지요

        당신의 지옥과 나의 지옥은 각각 다른것이지요


   미국의 샌드버그 <<우리의 지옥>>의 전문이다. 우선 여기에 관계되는 세 인물이 어떤 사람들인가 보기로 하자. <<세계의 명시집>>을 펴낸 김희보는 이 세 인물을 이렇게 소개한다. 샌드버그는 <<산업국 미국현실에도 비로소 완전한 표현을 부여하였다고 일컬어지는 가장 미국적인>> 시인으로서 <<세계명시집시리즈 69권>>에 <<우리의 지옥>>이 실렸다고 소개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세계가 알아주는 샌드버그라겠다. 단테나 밀턴은 우리도 조금은 안다. 14세기 이태리시인 단테, <<신곡>>을 써서 세계 4대시성의 한 사람으로 된 단테. 17세기 영국시인 밀턴, <<실락원>>이라는 세계명작을 쓴 밀턴, 위대한 시인.

  샌드버그는 <<지옥>>이라는 무서운 언어로 단테와 밀턴을 론하고 당신과 나도 이런 <<지옥>>이 있다면서 <<열쇠>>이야기를 한다.

  지옥이란 불교의 언어로서 중생들이 살아서 죄를 지면 죽은다음 땅속에 들어가 형벌을 받는다는 곳이 지옥이다. 단테, 밀턴, 당신, 그리고 내가 지상에다 이런 지옥을 세우고 <<모든 것을 넣어두었다>>는것이다. <<지옥>>이란 원관념이 변했다. 땅속의 지옥이 아니라 땅우의 <<지옥>>이다. 형벌을 받는 곳이 아니라 <<모든 것을 넣은 >> 창고이다. 이 <<지옥>>은 보여주는 <<지옥>>이지 중생의 죄를 다스리는 지옥이 아니다. 단테의 <<지옥>>에는 <<신곡>>이 있을것이고, 밀턴의 <<지옥>>에는 <<실락원>>이 있을것이고, 샌드버그의 <<지옥>>에는 그가 쓴 세계의 명시가 있을것이다. 이러한 <<지옥>>도 <<지옥>>인가? 아니다! 인류의 찬란한 문화가 있는 보물고라고 함이 적당할것 같다. 샌드버그의 <<지옥>>은 반어적, 상징적 의미로 쓰였다함이 옳을 같다. <<지옥>>이란 관념을 떠났다. <<지옥>>이 관념을 떠났으니 <<열쇠>>도 잇따라 관념을 떠나게 되어있음은 자명하겠다. 샌드버그가 단테와 밀턴에게 <<지옥>>이라는 언어를 쓸수있은것은 <<신곡>>이나 <<실락원>>이 당시에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 사실에서 근거를 찾을수있을것이다.  사실 현대에도 아무나 읽어서 리해할수있는 책이 아니다. 그래서 <<지옥>>이라는 관념을 쓰지 않았을가 궁리해본다.  이 <<지옥>>으로는 중생의 죄인을 가둘수 없고 이 <<열쇠>>로는 어떠한 자물쇠도 열수 없다. <<지옥>>과 <<열쇠>>는 우리의 관념을 떠난 상상물이며 허상이다.

  헤세의 시 <<사랑의 노래>>를 보자


나는 사슴 당신은 노루

당신은 새 나는 나무

당신은 태양 나는 눈

당신은 대낮이요 나는 꿈이로다

한밤에 잠든 나의 입에서

황금새 한 마리가 당신에게 날아간다

티 없이 맑은 새소리, 화려한 날개

당신을 위하여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당신을 위하여 나의 노래부른다


  독일의 문호 헤세는 소설, 시, 수필, 평론, 우화 등 여러가지 쟝르의 문학을 다루어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현대작가이다.

  시의 첫련은 은유의 숲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사슴>>도 되고, <<나무>>도 되고, <<눈>>도 되고, <<꿈>>도 된다. <<당신>>은 <<노루>>도 되고, <<새>>도 되고, <<태양>>도 되고 <<대낮>>도 된다. 서로 <<짝을 맞추는>> 일이 한번에 그치는것이 아니라 네번씩이나 변하여간다. <<나>>는 <<사슴>>으로 변하였다가 <<나무>>로 변하고, 또 <<눈>>으로 변하였다가 <<꿈>>으로 변한다. <<당신>>도 <<나>>처럼 련줄련줄 변한다. 결국 등장하는 두 인물인 <<나>>는 내가 아니고 <<당신>>은 당신이 아니다. 나와 당신이란 원관념을 떠난 <<나>>와 <<당신>>이다. 이런 <<나>>와 <<당신>>은 객관존재로서의 실상인것이 아니라 추상적존재로서의 허상이다. 모두 우리 관념밖의 인물이며 존재인것이다. 량자가 된다는 <<사슴>>, <<노루>>, <<새>>, <<나무>>, <<태양>>, <<눈>>, <<대낮>>, <<꿈>>들도 원관념을 떠난 상상속의 사물이지 실재적인 사물이 아니다. 모두 원관념을 떠났다. 이러한 사물들은 시적언어로 되는 순간에 자기의 의미를 버리고 새로운 상징적언어로 등용되여 시의 재료로 될뿐이다. 즉 새로운 관념으로 우리앞에 나타난다.

  2련은 더욱 신비스럽다. 1련에서 <<당신>>을 <<새>>라고 하였지만 <<새>>는 <<당신>>에게서 날아 <<나>>에게로 오는 것이 아니라 <<잠든 나의 입에서 황금의 새가 당신에게로 날아간다>>. 날아가서는 <<티 없이 맑은 새소리>>로 <<화려한 날개>>를 푸덕이면서 <<노래를 부른다>>. 론리와 현실을 초월한 이러한 시구들은 실재를 모방하거나 재현한것이 아니라 상상으로 직조한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며 <<당신>>을 사랑하는 <<나>>의 감정적 표현이다. 2련에서 <<황금새>>라는 황홀한 이미지를 떠올려 <<꿈>>에도 그리는 <<당신>>에게 보여주며 열렬한 사랑의 기분을 마련한다. 이 사랑은 누구와 누구의 일대일의 사랑이 아니라 <<사슴>>과 <<노루>>, <<새>>와 <<나무>>, <<태양>>과 <<눈>>과의 사랑이며, <<대낮>>과 <<꿈>>과의 사랑이다. 사랑의 의미가 확충되여 시에서 표현된 사랑은 일상적인 너와 나의 사랑이라는 것과는 완전히 틀리는 사랑이다.

    한때 우리 시단의 청년시인의 대표라고 불리웠던 석화의 시 <<나의 장례식>>이 관념을 어떻게 떠났는가를 살펴보자

나는 나를 위해 구슬픈 장송곡을 목메게 부르며

나는 나의 무덤을 판다

나는 나의 홁묻은 괭이를 던지고

나는 나의 안식처 나의 무덤에 드러눕는다

시커먼 구덩이는 구슬픈 기도 읊조리고

서리찬 기운은 쓰다듬어 안아준다

그러면 내가 쌓아놓은 흙더미 내 몸을 묻어주고

그러면 무덤은 둥그런 무덤이 된다

그러면 파묻힌 내 몸에서 심장만이 살아

아, 그러면 심장만이 살아서 싹 터오른다

심장은 한그루의 나무가 되어 하늘을 찌르며 자란다

그 나무에선 주렁주렁 새심장들이 가득 열린다

   석화시인이 쓴 <<나의 장례식>>은 장례식이 아니라 <<나의 행진곡>>이다. 이 시에 씌여진 모든 관념들은 실제적으로 합리한 관념인것이 아니라 반대로 합리성을 떠난 관념들이다. 인간이 자기절로 자기 무덤을 파고 죽어서 무덤을 만들 일은 있을수 없는 일이다. 죽은 다음의 심장에서 그무슨 싹이 틀수도 없는 일이요, 심장이 나무가 될 일은 신화에서나 있을 일이요, 나무에 새심장이 주렁진다는것은 더구나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러나 이 시는 대단히 훌륭한 가편이다. 모든 일상을 초월한 상상과 관념을 떠난 언어들로 기틀을 잡고 이룩해 놓은 시이기때문이라고 할수있다. 시인은 시속의 <<나>> 자신의 죽음까지 밟으면서 자신의 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분투한 끝에 풍성한 열매를 따내는 눈물겨운 아름다움을 노래하고있다.

   언어가 원관념을 떠나지 않으면 새로운 이미지가 생성될수 없다는것을 현대시는 재삼 말하게 된다. 이런 도리를  잘 장악하고 능란하게 리용하는것은 이미지리스트의 지혜이다. 이런 지혜가 없는 시인은 결코 현대시에 득달한 시인이라고 말하기 어려우리라.


제3절 이미지가 인간을 떠난다.


  이미지의 특성의 하나인 관념을 떠난다는것은 따지고 보면 인간을 떠나는 일종 표현이라고 할수있다. 하지만 직접 인간을 떠나는 경향이 이미지특성의 하나로 되겠다. 허구 많은 현대시인들이 인간을 쓰지 않고 직접 사물을 이미지로 만드는것도 인간을 떠나는 표현이겠지만 여기서 살펴보려는것은 직접 인간을 쓰면서도 인간세상에서 인간을 따나게 한다는것이다. 즉 현실적 인간을 시속에서 축출해 버리고 새로운 인간을 내세우는 경향이라겠다. 시인들은 <<시는 감정의 해방이 아니고 감정으로부터 도피>>이며 <<개성적 표현이 아니며 개성으로부터 도피>>라는 엘리어트의 말을 신주처럼 모시고 시를 쓴다. 이미지가 추구하는것은 심정의 지각인것이 아니라 상상력의 지각이다.

  현대시의 거장 랭보에 대하여 후고. 프리드리히는 이렇게 지적한바있다. <<전하는바에 의하면 랭보는 <나의 우월성은 어떤 한도 가지고있지 않다는데 있다>라고 말한다. 랑만주의시의 느끼는 감정들은 그에게 역겨움을 준다.>>

  랑만주의시는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쏟아내는 시였다면 현대시는 <<감정으로부터>><<개성으로부터>><<도피>>를 꾀하는 시라겠다. 이미지는 감정의 개입을 억제하여 얼굴을 내밀지 못하게 한다. 현대시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의 하나인 탈인간화를 프리드리히는 이렇게 정의한다.

  <<그것은 자연적인 감정상태를 배제시키고, 인간을 이제 그 가장 낮은 단계로 밀려나게 하며 종래까지는 타당했던 사물과 인간사이의 단계질서를 역전시키고 인간을 가능한 인간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시각에서 인간을 기술한다.>>

   인간의 <<자연적인 감정상태를 배제시키고>> 인간과 사물과의 타당했던 <<단계질서를 역전시키면>> 인간은 당연히 원래의 위치에서 밀려나고 일상적인 인간이하로 쫓겨나서 희미한 인간으로 전락되게 된다. 시인이 만드는 이미지는 일상적인 인간의 사상, 감정, 관념 등 여러 가지 의식과는 담을 쌓고 새로운 사물, 새로운 사실, 새로운 언어를 제작해내여 비실재적인 새로운 세계를 구축한다.


내 지극히 사랑하는 녀인은 알몸이였고

내 마음을 알기에 오직 요란한

보석만을 지녀 그 호화로운 노리개로

행복한 나날의 모르오의 노예처럼 의기양양하도다

노리개 흔들리며 쟁쟁 소리낼 때

금속과 보석으로 찬란한 그 세계에 나는

넋을 잃고 황홀하여, 음향과 빛이 뒤섞이는

물건들을 나는 미친듯이 사랑하네

                   -보들레르 <<보석>>1, 2련

황량한 골짜기로 피리 불며 내려가다

즐겁고 유쾌한 노래 피리로 불며가다

나는 보았네 구름우에 한 어린이

그 아이 웃으며 내게 말했네

어린 양에 관한 노래 피리로 불어주세요

그래서 나는 신나게 피리 불었네

피리아가씨, 그 노래 다시 피리 불어주세요

그래서 내 피리부니 그 아이 듣고 웃었네

                 -w. 블레이크 <<서시>> 1, 2련

가을 안개속에 오막살이 몇채

다리 굽은 농부가 송아지새끼를 끌고

안개속을 천천히 걷는다

농부는 걸어가며 노래한다

사랑과 변심의 노래

부서진 반지와 심장의 뜻을

아, 가을 가을은 여름을 시들게 했다

안개속을 희미한 두 그림자가 걸어간다

                   -아폴리네르 <<가을>>전문

   우의 세수의 시는 모두 프랑스 시인들의 작품이다. 세수의 시가 모두 인간을 배제하는 각도에서 인간을 노래하고있다. 보들레르의 화자는 <<지극히 사랑하는 알몸>>의 <<녀인>>을 앞에 두고 <<그녀>>를 사랑하는것이 아니다. <<그녀>>의 <<요란한>> <<보석>>만을 <<미친듯이 사랑>>하고있다.

  블레이크의 시에 등장하는 아이는 인간세상의 아이인것이 아니라 인간세상에서 추방된 <<구름위의 한 어린이>>이다. 그 아이가 듣고싶어하는 피리의 노래도 아빠나 엄마나 누이나 동생이나 친구에 관한것이 아니라 <<어린양에 관한 노래이다.>>

  아폴리네르의 시에는 농부가 등장하는데 <다리 굽은 농부>>이다. 온전하지 못한 농부이다. 농부는 <<송아지새끼를 끌고 안개속을 천천히 걸어간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두곡인데 한곡은 <<사랑과 변심>>이고 다른 한곡은 <<부서진 반지와 심장의 뜻>>이다. 그런데 <<사랑>>을 부른다음 <<변심>>을 부른다. 그러므로 노래는 <<변심>>으로 끝난다. 그것은 <<부서진 반지>>이며 <<심장의 뜻>>이다. <<여름을 시들게 한>> 가을 안개속을 <<희미한 두 그림자가 걸어간다>>. 여기에 숙고의 가치가 있겠다. <<다리굽은 농부>> 자체가 완정하지 못한 인간인데 <<희미한 두 그림자>>로 변해버렸으니 양과 사람의 구분이 사라지였다. 사라진다는것은 존재의 상실을 의미하고 존재의 상실은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를 보여준다.

  이미지시에서 인간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서정시는 매우 희소하다. 있다면 어떤 상징이나 은유의 대상으로 쓰인것이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이 아닐것이다. 허구에 의하여 각색된 인간이며 상상에 의하여 제조된 인간이며 예술에 용해된 인간이라겠다.

  시는 일상적인 인간의 정서와 감정을 그대로 뿜기 위하여 씌여지는것이 아니다. 새로 지각되는 치렬한 극단에서, 쓰지 않고는 안되는 극한에서 변형의 작업을 하여 이미지화하는 일이다. 시인이 시를 쓸 때 론리적인 사유는 할수있겠지만 론리의 제한은 받지 않는다. 시인은 사물의 법칙을 존중하지만 사물법칙의 구속에서 시를 쓰지 않는다. 시인의 상상력은 현존하는 모든 계률과 관계없이 자유자재로 달아다니며 이미지를 창조한다. 시는 시인이라는 인간이 시를 쓰는것이 아니라 시인이라는 인간의 상상력이 그것도 이미지를 창출해 낼수있는 상상력이 시를 쓴다고 해야 할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시가 완성된 다음에 보면 시인의 원래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시가 되여나오는 경우를 시인은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상상력이 시인을 차버리고 제멋대로 알을 까놓았다고 하여 시인은 자기의 원래의상상을 초월했다고 비난할 대신 오히려 즐거워하게 된다.

  시인을 물이라면 상상력은 수증기이다. 수증기는 물에서 태여나지만 물의 의도대로 날아가는것이 아니다. 물은 수증기를 만드는 모체일뿐 수증기를 지배하지는 못한다. 시인은 자기의 상상력을 통제하고 지배하려 하지만 상상력이 엉뚱하게 제멋대로 달려나가는 때를 늘 만나게 된다.

  이미지가 창조될 때 상상력이 시인을 떠나는것은 최고의 아름다움의 산파라겠다


제4절 언어가 언어를 떠난다.


  앞에서 우리는 이미지가 사물을 떠나고, 관념을 떠나고, 인간을 떠난다는것을 알아보았다. 이러한 이미지특성과 기능은 모두 언어를 통해 표현된다. 그것들이 그렇게 표현되는 주요한 원인은 또 언어가 언어를 떠나기때문이라고 해도 틀린다고 할수 없을것이다.

  옛날에는 언어이자 사물이였고 사물이자 언어였다. 세월의 흐름과 사회의 발전에 따라 언어도 발전해왔다. 이제는 언어가 사물을 떠날 수있을뿐만 아니라 언어가 언어를 떠날수있게 되였다. 시의 언어는 사물의 부착물인것이 아니라 독립적존재로 되었고 하나의 언어가 하나의 뜻으로 쓰이던데로부터 여러 가지 의미로 씌일수있는 자유가 있게 되었다.

  상징과 은유의 시에서의 보편화는 언어가 언어를 떠나는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문법적규례와 론리적인 체계속에서 활동하던 언어는 현대시라는 이미지에 와서는 이런 규례의 사슬을 짓부셔버리고 자유자재로 조합되면서 새로운 사물을 제멋대로 생성해내고있다.

  영국시인 하디는 <<지나침의 길을 걷노라면 지혜의 궁전에 이른다>>는 시구를 쓴적이 있다. 언어가 이러하다. 지나치게 자유로와지면서 자신의 지혜로 새로운 궁전을 세우는것은 이미지시의 공로라 아니할수 없다.

  잠시 머물러 하디가 언어조합을 한 것을 간략적으로나마 살펴보자. 시인 하디는 <<진홍빛기쁨>>, <<금빛눈물>>, <<황금의 쾌락>> 등등 언어를 자기 시에 부여하고 있다. <<기쁨>>이란 추상어로서 만질수도 볼수도 없다. 기쁨앞에다 <<진홍빛>>이란 규정어를 씀으로써 시각화를 꾀하여 기쁨을 우리 눈앞에 환히 떠올리고있다. 이런 조합은 정상적이고 일상적인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두 사물의 강박적인 얽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겠다. 뿐만아니라 기존의 문법이나 론리로서는 해석되는것이 아니다. 오직 시적인 기분, 예술적인 기분으로 받아들여지는 <<지나침으로 이루어진 지혜>>의 산물이라겠다. 그 뒤의 <<금빛눈물>>, <<황금의 쾌락>>도 같은 지나침의 지혜이다. 이미지시는 이런 <<지나침의 길>>을 달갑게 걷게 되는것이다.

  처녀와 총각이 하번만 살놀이 하면 처녀는 더는 처녀가 아니고 총각은 더는 총각이 아니되는것처럼 언어도 일단 이미지의 재료로 충당되면 원래의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고 돼지는 돼지가 아니고 모기는 모기가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자기의 본의미를 떠나서 다른 그 무엇을 표현하게 된다.

  20세기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 불리우는 발레리의 시 한 단락을 보자.

그렇다! 광란을 타고난 커다란 바다여

표범가죽이여, 숱한 태양의 영상으로

구멍 뚫린 희랍외투여

침묵과 같은 소란속에서

반짝거리는 네 꼬리를 물어뜯는

너의 푸른 몸뚱이에 취한 단호한 히드라여

바람이 인다...살려고 애써야 한다!

거대한 대기가 내 책을 폈다가 다시 접는다

가루같은 물결이 바위에서 솟아난다!

날아가거라 정말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즐거워하는 파도로 부숴라

돛단배들이 모이를 쪼고있던 이 고요한 지붕을

             -<<해변의 묘지>>의 마지막 두련


  후고. 프리드리히는 이 시를 의식과 존재의 싸움에서 <<바다는 이제 자연적인 이름을 되찾는데 (파도 해양) 이것은 의식이 자연의 실재앞에 자신을 되찾았다는 증거이다>>고 평한다. 후고.프리드리히의 비평에 의하면 바다는 바다라는 의미에 앞서 <<의식이 자연의 실재앞에 자신을 되찾은>> <<증거>>로 나선다. 즉 <<바다>>는 의식의 <<증거>>로 충당되였다는것이다. 주제적으로 살필 때 <<바다>>는 바다를 떠나 <<증거>>로 되었다고 하는데 문장을 더 깊이 파고들면 <<바다>>는 <<표범가죽>>이나 <<희랍외투>>로 될뿐만 아니라 절로 <<제 꼬리를 물어뜯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대가리가 50개나 되는 괴상한 뱀-히드라가 된다. 결국 <<바다>><<표범가죽>> <<희랍외투>> <<히드라>> <<침묵>> <<꼬리>>...들은 모두 바다는 바다가 아니고, 표범가죽도 표범가죽이 아니고, 희랍외투도 희랍외투가 아니고, 꼬리도 꼬리가 아니고 침묵도 침묵이 아니고, 히드라도 히드라가 아니게 되었다. 이러한 언어들은 언어를 떠나 시인이 새롭게 구축하고있는 이미지의 재료로 되었다고 할수있다. 이쯤하면 <<해변의 묘지>> 아래련의 언어를 더 분석해 보지 않아도 되리라고 믿는다.


한 개의 원이

굴러간다

천사의 버린 지환이다

그 안팎으로

감기는 별빛과

꽃잎들...

금빛의 수밀도만한

세 개의 원이

천개의 원이

굴러간다

신의 눈알들이다

어떤 눈알은 모가 서서

삼각형이 되어

쓰러진다

어떤 눈알은 가로 누운

불기둥이 되어

뻗는다

한 개의 원이

8월 한가위 달마큼

자라서

굴러간다

            -문덕수 <<원>>전문


  시인은 원을 쓴다고 했지만 실상은 <<천사가 버린 지환>>을 썼고, <<신의 눈알들>>을 썼다. 기하학적인 원의 도형이 반복적으로 변하면서 우리 앞에 기이한 이미지를 련발하고 있다. 가락지만한 원이 보름달로 자라기까지 치른 여러가지 고역이 생동한 이미지로 우리 앞을 지나면서 고행을 치러야 성공한다는 뜻을 알려주는 같다. 혹은 원이라는것은 속이 빈것이니까 비우는 신념의 아름다운 결과를 이룩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는지도 모른다. 이미지의 뜻의 해독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나름에 달린것이니까. 이시에 사용된 <<지환>><<별빛>><<꽃잎>><<원>><<신의 눈알>><<불기둥>><<한가위 달>>들은 죄다 시인의 어떤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들로서 결코 이 언어들의 관습적인 의미와는 완전히 틀린 표현이라는것은 자명하다.

    지난 90년대초에 시어를 새롭게 태여나게 하였다고 말할수있는 김학송시인은 하늘에 뜬 두루미모양을 흰구름 한송이로 변형시키면서 이렇게 읊조리고 있다.


청청한 거울속

흰구름 한점

부풀은 소망

그린 듯이

꽃바람을 몰고 가는

하아얀 치마

그리움을 불태우는

노을 한쪼각

    간결한 필치로 깨끗하게 씌여진 한편의 시다. 맑은 하늘에 높이 떠있는 두루미, 하얀 두루미는 눈덩이같은 순수이다. 그 정갈한 아름다움을 우러르면서 시인은 두루미를 <<흰 구름 한점>>이라고 변형시키고있다. 흰 구름을 <<부풀은 소망>>과 <<꽃바람을 몰고가는 하아얀 치마>>로 승화시키고 그것을 다시 그리움이 사무치게 하는 <<노을 한쪼각>>으로 마무리를 짓고있다. 제목에 두루미라는 언어가 있을뿐 내용을 쓸 때에는 두루미에 대한 언어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고 두루미에 대한 변형물들만 진렬되여있을뿐이다. 중요한 것은 두루미를 흰구름으로 변형시킨다음 그 변형물을 리용하여 새로운 변형물을 파생시켰다는 것이다. 여기서 <<흰구름 한점>>이나 <<하아얀 치마>>나 <<노을 한쪼각>>과 같은 언어들은 원래의 언어의 뜻을 떠나서 완전히 새로운 상징적의미로 우리앞에 새롭게 태여나고있다고 하겠다.

   이만큼 살펴본다. 똑똑히 하여야 할것은 이미지특징의 하나가 언어가 언어를 떠난다는것만은 가슴에 각인시켜야 할 일이다.


  제5절 이미지가 현실을 떠난다. 

   

    현실은 구체적인 사물속에 있지 않거니

    말할수있는 공간에 가서 찾아야 하리

    벽과 벽사이로 뻗은 바다의 백사장을

     소리 없는 곳에서 소리 없는 바다의 음을


   당대영국의 유명한 초현실주의시인 차르스. 터무린썬의 <<미>>라는 시다.  차르스의 이 시를 보면 시의 <<현실>>라는것은 구체적인 사물속에 있는것이 아니라 말로 할수있는 <<공간>>에 있다는것이다. 말로 할수있는 <<공간>>이란 그 의미가 한이 없이 넓고 깊다. 그 공간은 상상의 공간이며 허구의 공간이다. 차르스 . 터무린썬이 말한것처럼 <<벽사이로 뻗은 바다의 백사장>>이나 <<소리없는 곳에서  소리 없는 바다 음>>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시의 이미지는 현실자체 있는것이 아니라 시인의 상상속에 문학적허구속에 있다는것이겠다.

  우에서 우리는 이미지특성이 사물을 떠나고, 관념을 떠나고, 인간을 떠나고, 언어를 떠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제 우리는 차르스. 터무린썬의 시를 통하여 이미지가 현실을 떠난다는 새로운 명제를 떠올리게 된다.

   초현실주의시가 현실을 떠나 어떻게 이미지를 제조하고 있는가를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지난 세기 5,60년대에 영국에서 중요한 비평가로 활약하기도 한 영국시인 아르와레스의 시 <<실>>(失)을 보자.


아르와레스


내가 잠속을 거닐면 착한 마음이 꿈을 꾼다

하늘은 푸르디 푸르다.

당신이  손을 펴면

손은 하늘의 시계속으로 들어가고

나는 천천히 움직인다


같은 손목이 나의 얼굴에 놓인다

나의 손가락이 스치기만 하여도

같은 머리 하나가 내 가슴앞에서 가볍게 움직인다

나의 팔이  같은 몸을 안으면

같은 죽은  팔의 움직임을 느낀다

내 손가락이 죽은 머릿속으로 들어가면

같은 배가 죽은 허벅지를 움직인다


꿈은 때린다. 저며낸다 백주에

껌벅거리는 눈이 가볍게  움직인다

사랑하는 이, 그녀는 당신이 아니라 그녀요


   아르와레스는 현실을 완전히 떠나서 괴상한 꿈을 쓰고 있다. 꿈을 쓰는것은 영미 당대 초현실주의시인들이 즐겨쓰는 제재이다. 아르와레스의 이 시자체가 현실을 떠났다. 초현실주의라는 언어자체가 현실을 떠난다는 말인것이다. 꿈속으로 들어가 추출해낸 이미지는 현실일수가 없다. 사실 아르와레스의 시를 보면 한 인간이 거울을 앞에 놓고 동작하면서 거울속에 비친 자신의 움직임을 시로 쓰고있는같다. 같은 손목, 같은 팔, 같은 배, 같은 몸 등 움직임을 보면 거울속의 나와 현실속의 내가 함께 움직이고 있는것이 보인다. 첫련에서 하늘이 푸르디 푸르다고 한것은 맑은 거울을 말하는것이며 당신이 손을 들면 손이 시계속으로 들어간다는것은 거울속에 시계가 비치였는데 손을 드니까 시계의 일부가 가리워진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거울속에 비친것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그림과 같은것이다. 아무렇게 따지여보나 이 시는 현실을 떠나서 이미지를 만들었다는것이 확연하다.

   1927년에 미국의 뉴욕에서 태여나 영국과 프랑스에서 전전하다가 1968년도에 미국으로 돌아가 초현실주의 시운동에 몸을 담구면서 많은 시를 써서 미국의 국가도서상과 영국의 대통령상을 받은 우.에쓰. 머원의 시를 한수 보자.


4월

우. 에쓰. 무원


내가 돌을 떠나면 노래가 멎는다


4월 4월은

내 이름의 사막에 까라앉았다


미래의 나날들은

별 하나도 없이 음페되였다


당신이 안녕하게 기다린다면 당신은 거기에 있으리


당신이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리


   머원의 시는 제목은 4월이지만 시의 내용은 4월이라는 감이 추호도 없다. 시인은 4월을 떠나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있다. 이것은 이미지의 본질인 <<짝>>으로 하여 생기게 되는것이며 성질이 다른 사물의 배럴에 의하여 생기는것이라고 하겠다. 이미지의 특성은 제목과는 다른 사물을 끌어다 쓰는것이며, 제목의 의미와는 관계 없이 시인이 자유로이 허상을 만들어 쓰는것이며 , 어떤 때에는 그어떤 지적인 통제도 받지 않고 자유로운 이미지를 구사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이미지가 현실을 떠나게 마련되여있다. 현실을 떠나지 않는 시는 이미지시에 와서는 용납되지 않는것이다. 우리의 시들에서도 영미당대 초현실주의 시에 비하면 아직은 좀 유치하지만 현실을 떠나는 시들을 얼마든지 찾아볼수있다.


새벽

김승종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은 ㅡ

남을 위한 종소리를

     그렇게도 많이 쳐주셨소이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은 ㅡ

자신을 위한 종소리는

     단 한번도 못쳐보고 가셨소이다


어머님 ㅡ


   승종시인은 시제목은 새벽이라고 달았지만 그가 쓴 시내용은 새벽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어머니를 쓰고있으며 어머니가 남을 위하여 종을 쳐주셨다는것을 쓰고있다. 시제목은 <<새벽>>이지만 시의 이미지에는 <<새벽>>이라는 현실은 없고 어머니의 행동만 나타나고있다. 현실을 떠난 이 시는 대공무사하게 남을 위하여 자식을 위하여 자신을 다 바친 어머니 품성과 새날을 낳아주고 아무런 바람도 없이 사라지는 새벽에 등호를 치고있다.

   이미지시가 현실을 떠나는것을 즐기는 원인은 현실의 속박에서 벗어났을 때 사유가 자유로와지고 언어가 자유로와지고 이미지가 신기하고 새롭게 생성되기때문이다. 새로운 이미지는 현실 사물속에 있는것이 아니라 상상의 공간속에 있는것이다. 그것이 이미지시이고 이미지의 예술이겠다.


제6절 파편문체가 일으키는 혼돈


  이미지의 첫번째 특성-사물을 떠난다는것을 말할 때 한춘섭의 <<초승달>>을 살펴보면서 파편문체라는 개념을 떠올린적이 있다. 파편문체는 현대시문체론적 특성의 하나이며 파편문체로 하여 혼돈이 일어난다.

  파편문체란 어떠한 개념인가? <<현대시구조>>에서 지적한 후고 프리드리히의 말을 들어보자.

  <<결합이 아닌 불연속성, 연결대신에 병렬, 이것들의 내적 불연속성, 불가능의 경계선상에 있는 문체적특성이다. 파편은 이룩되여가는 완정성의 상징이라는 지위를 획득한다. 파편들은 리념들의 결혼징표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미학의 근본명제이기도 하다>>. 말라르메와 발레리의 시학을 거론할 때 프리드리히는 또 다시 파편문체를 말한다. <<파편개념은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이 개념은 가시적인것 속에서 불가시적인것을 최대한 예술적으로 현현시키는것이다. 이러한 현현은 바로 그 파편적인 특성으로 인해 불가시적인 우월성과 아울러 가시적인것의 불충분을 보여준다. 파편문체는 현대시의 특징이 되었다.>>

  프리드리히는 파편문체의 중요성을 <<현대미학의 근본명제>>와 <<현대시의 특징이 되었다>>로 밝히고 있다. 필자는 현대시에 대한 살펴보기를 하므로 <<현대미학의 근본명제>>는 접어두고 <<현대시의 특징이 되었다>>는 명제만을 펼쳐보려고 한다.

  <<파편문체는 현대시의 특징이 되었다>>고 했으니 이전에는 아니였는데 지금와서 되었다는 의미가 되겠다. 즉 시가 현대시로 발전하기전에는 파편문체가 시의 특징이 아니였다는 뜻이라겠다.

  후고. 프리드리히의 파편문체의 정의를 보면 핵심은 <<결합이 아닌 불연속성, 연결대신에 병렬>> <<내적인 불연속성>>과 <<불가능의 경계선상에 있는 문체>>이다. 이로 인하여 <<파편은 이룩되여가는 완정성이라는 상징의 지위>>를 얻게 되고 <<리념의 결혼징표>>로 된다. 이로 인하여 파편은 <<불가시적인 우월성과 아울러 가시적인것의 불충분>>이 나타나게 된다. 더 풀이해보면 이미지와 이미지가 내용상으로 련결되지 않고 단절된 상태이며 서로 성격이 다른 이미지라겠다. 시적인 대상을 변형하여 그려낸 이미지이므로 보이지 않던것은 단편적으로나마 보이게 되었으니 우월해지고 보이는것은 더 구체적인 진술이 없기에 불충분해지게 된다.

  파편문체는 현대시의 초월성을 체현한 초현실주의적인 문체라겠다. 현대시자체가 초월의 성격이 다분한데 전형적인 파편문체로 된 시들은 몽롱한것이 아니라 완전히 해독하기 어려운 난해시에 속한다. 파편문체에 대한 전문지식과 파편문체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고 현대시에 대한 연박함이 없으면 이 낯선 세계를 해설하기 어려운것이다. 우리가 리상이나 조향의 시를 처음 만났을 때 해석의 오리무중에 빠져 해설을 읽지 않고는 알수 없었던것은 그들의 시가 파편문체로 구성되였기때문이라겠다. 리상이나 조향의 스승이 구라파의 초현실주의 시인들이였는지도 모른다.


가까운 신들이여 피투성이 신들이여① 채색되고 페쇄된 언론이여② 대낮같은 등화의 온상아래③ 가장 광대한 마음이 익는다④ 파도가 너의 페쇄된 덧창에 불어닥칠 때⑤ 기울어진 여름은 닻의 쇠사슬을 올리고⑥ 례배당의 유리를 향하듯 추분의 거대한 장비를 향해서 방향을 바꾼다⑦


   생종-페르스의 시 <<이국의 여인에게 바치는 시>>에서 임의로 한 련을 절록하였다. 모두 7개의 이미지로 되였는데 이 일곱개의 이미지들은 아무런 련관도 없이 병렬적으로 배렬되여있다. 각개의 이미지들은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 뒤의 이미지가 앞의 이미지를 더 연장하거나 해석하거나 진술하지 못하게 밀어버린다. 출렁이는 물결이 흘러가듯 이미지들이 저마끔 흘러가면서 우리 눈에 스치운다. 생종 - 페르스의 시는 한 개 련에서 이러할뿐만아니라 련과 련사이는 더욱 이러하다.

  성격이 다른 이미지들로 구성되여 리해의 접촉을 단절시킨다 하겠다. 이질적인 이미지군이 시에 올방자를 틀고 앉아서 독자들의 용이한 해득에 빗장을 지르고 들여놓지 않는다. 단테의 <<신곡>>이나 밀턴의 <<실락원>>처럼 <<지상의 지옥>>인것 같다. 그런데 이 <<지옥>>속에도 보물이 있는것이다. 이 <<지옥>>의 문을 여는 <<열쇠>>를 쥐기란 웬간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파편문체의 특징이라고 생각된다.

  후고. 프리드리히는 생종. 페르스의 시에 대하여 이런 결론을 내린다.

  <<모든 이미지구성부분들은 감각적이다. 이미지들 자체는 결합할수 없는 결합에 의하여 비실재적이다.>><<주문과 같은 시구들이 장엄하게 울리면서 지나가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동시에 혼란스러운 새로운 이미지들을 조밀하게 전개한다.>>


낡은 아코오뎡은 대화를 관뒀습니다

-여보세요!

<뽄 뽄 다리아>

<마주르카>

<디이젤 엔징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녀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눈동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기폭들

나비는

기중기의

허리끝에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의 <<바다의 층계>>전문


    이 시에 대한 한국 비평가들의 평가를 살펴보면 파편문체에 대한 리해가 깊어지리라 믿어진다.

  홍문표는 <<현대시학>>에서 리상, 리시우, 신백수 그리고 해방후의 조향, 김용구를 초현실주의 시를 실험한 시인들로 점찍으면서 조향의 <<바다의 층계>>는 <<우선 시행에 있어서도 다양한 변화를 주어 층계의 시각성을 보이고있거니와 여러 가지 사물들 즉 비둘기, 소녀, 기폭 등이 비론리적인 련결로 되어 강한 충돌감을 느끼게 한다>>고 하였다.

  김준오는 <<도시시와 해체시>>에서 <<낱말(이미지)이 자유련상대로 라렬됨으로써 문법적구문이 파괴되고 거의 모든 관련이 단절된다. 낱말이 <자유화> <절대화>되였다. 낱말의 인격과도 의미와도 아무런 관계없이 낱말이 지배한다는것이 그 구성원리이다>>고 하였다.

  문덕수는 <<시론>>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이 시에서 <녀인+허벅지>와 같이 단어와 단어의 결합은 근접성에 의해 결합되여있지만, <모래밭에서+수화기>, <녀인의 허벅지+낙지 까아만 눈동자>와 같이 행과 행, 그리고 련과 련의 결합에서는 근접성이나 유사성을 찾아내기 어렵다. 이 경우는 근접성과 련결성을 고의로 파괴하고, 나아가서는 언어요소들의 결합에 의해서 발생하는 의미의 맥락까지 차단하고 파괴하는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시적 언어에 대한 해체를 시도하고있다. 일종의 무의미시라고 할수 있다.>>

  김춘수는 <<시의 리해와 작법>>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모래밭> <수화기>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눈동자> 등이 이 시에서 차지하고있는 높이대로 강하게(짙게) 혹은 약하게(희미하게) 시인의 의식의 흐름속에서 명멸하는것을 활자배열을 통해서 시각적으로 보여주고있다. 이런 경우 이들 네개의 물체를 그대로 받아들여 <개념에 때묻지 않는> 어떤 상태를 느낄수있으면 되는것이다.>>

  작자 조향은 화가 보라크의 말을 빌어서 이렇게 해석한다고 한다.

  <<아름다운 레델이 붙은 통조림이 아직 부엌에 있는 동안은 그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일단 쓰레기통에 내버려져서 그 의미와 효용성을 잃어버렸을 때 나는 비로소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나는 무를 발견한 후에야 미를 알게 되었다>>는 말라르메의 말과 통하는것이라 하겠다.

  박진환은 <<현대시를 이렇게 쓰자>>에서 이렇게 평하였다.

  <<기존의 시에서 볼수 없는 사물의 현실적배치가 아니라 자률적 이미지로 새로이 배치되는 전위와 변형의 수법에 의존되고있다. 그 때문에 이미지가 주는 인상의 피동적 수용에서 자률적이고도 내재적인 이미지가 외적사물을 능동적으로 지배하는 사고형태가 사물형태를 지배하고있다. 이러한 방식은 꿈과 무의식에 전능적특권을 부여함으로써 이미지의 결합의 이질화, 언어배치의 탐구성 등에 의해 사물을 완전히 현실위치에서 이탈시켜 현실에서는 있을수 없는 관계형태로 배치, 몽환상태와 같은 전율을 일으키게 한다.>>

  한국 비평들은 파편문체의 작품은 비인간적이기 때문에 사람(작가)들이 작품에서 손을 떼는 순간에 이미 독자의 어떠한 접근도 용납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작품은 완전히 독자적으로 존재한다는 말라르메의 견해와 맥을 같이하고 있겠다 하겠다.

  파편문체의 상징들은 우선 현실과 재래의 의식에 대한 도전이며 파괴이다. 한편한편의 시가 비실재적인, 전례에 없던 창조물이기에 난해의 소용돌이를 몰고온다. <<몽환상태와 같은 전율>>(박진환)에서 <<어떤 상태를 느끼>>(김춘수)거나 <<강한 충돌감>>(홍문표)을 감수하면 되는것이다. 그것들은 <<인생론적의미가 없는>> <<무의미시>>이며 <<낱말들의 결합>>(문덕수)이며 <<효용성을 잃었을 때>>의 <<아름다움>>(조향)이다.

    우리 시단으로 말하면 파편문체의 시는 공백상태나 다름이 없다. 청년시인 김승종씨가 파편문체의 경향을 띤 시들을 조금 시도해 보았을뿐이다. 파편문체로 성숙된 시인은 필자가 보기에는 아직  없다.


제7절 이미지는 암시의 예술


  시는 암시의 문학, 암시의 예술이라는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미지시는 암시의 예술을 기치로 내세우고있다. 상징, 은유, 함축의 옷을 입고 그림으로 독자앞에 나타나는 이미지, 이러한 시야말로 진짜 암시에 속하는 시이며 가치가 있는 시가 아닐까.

  이미지는 일상적인 개념, 사상, 감정, 리념을 모두 떠나서 낯선 땅 낯선 곳에서 자기의 그림을 그리고 이제까지 만나보지 못했던 영상을 떠올린다. 현대시 시조라고 불리우는 프랑스의 보들레르는 <<알바트로스>>에서 이렇게 밝히였다.

  <<근대적개념에 따른 순수한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주체와 객체를 그리고 예술가의 외적세계와 예술가 자신을 동시에 내포하는 암시적인 마술을 창조하는 것이다.>>

  <<암시적인 마술을 창조>>하는것이 <<순수한 예술>>이며 현대시라고 밝힌 시인은 보들레르만이 아니다. 엘리어트는 시는 리해되지 않고도 전달될수있다고 하였고 말라르메는 시의 목적은 사물을 암시하는것에 있다하였고 장꼭도는 <<시는 비밀의 무기>>이며 때로는 <<헤아릴수 없이 먼거리의 목표물을 향해서만 쏘아지는 무기이다>>(<<몬마르또르의 축제>>)고 하였고 얀 무카로브스키는 <<시란 무엇인가>>에서 시적 표현의 목적은 <<의사소통>>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게 된다>>고 하였다...

  암시는 현대시의 정수이며 이미지는 이 정수로 만드는 과업을 자각적으로 짊어지고있다. 암시란 불러일으키는 것이며 자극하는 것이다. 깨우쳐주는것으로써 말한다는 의미이며 에둘러 말한다는 의미이다. 이미지시는 사물을 떠나서 관념을 떠나서 인간을 떠나서 언어를 떠나서 현실을 떠나서 이루어지므로, 일상의 냄새를 제거해 버리므로 이미지 자체가 암시의 잔치라 하겠다. 암시는 필연적으로 몽롱성을 초래한다. 몽롱성이 없는 시는 암시성이 희박한 시일것이다. 한번 읽고 다 알리는 시, 한두번 듣고 다 알리는 시, 그러한 시에서 암시성을 론한다거나 몽롱미를 론한다는것, 그리고 흔상의 가치를 론한다는것은 의미가 없을것으로 알고있다. 그러한 시는 일시적인 동감과 친숙성은 있으나 암시성이 없고 몽롱미가 없고 흔상가치가 없어 다각적, 다층차적인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늘엔 천사와 또 천사가 있다

장교복을 입은 천사

료리사 차림인 천사

노래하는 천사

하늘빛의 제복을 입은 장교님

성탄절지나 따스한 봄이 오면

당신은 빛나는 태양의

       훈장을 달게 되겠지요

료리사는 거위털을 뜯는다

         아 눈이 내린다 내려라 눈아

         사랑하는 이

내 품안에서 멀어졌구나


  프랑스 아폴리네르시인의 <<흰눈>>의 전문이다.

  시에서 <<눈>>이 <<천사>>로 탈바꿈하고 <<천사>>는 또 <<장교>>와 <<료리사>>, <<가수>>로 탈바꿈한다. 이러한 탈바꿈이 바로 사물에서의 일탈이며 관념에서의 일탈이며 언어에서의 일탈, 인간에서의 일탈, 한마디로 말하면 일상적인 현실에서의 일탈이라겠다. 이러한 일탈이 바로 암시성을 갖고있다 하겠다.

  시는 <<장교님>>은 성탄절이 지나 봄이 오면 <<빛나는 태양의 훈장>>을 달게 될것이라고 한다. <<태양의 훈장>> 그것도 <<빛>>이 번쩍거리는 <<훈장>>이다. <<태양의 훈장>>이란 어떤것일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흔상자에 따라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고 갑을론박할것이다. <<태양의 훈장>>이란 본 사람도 없고 우리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도 아니다. <<태양의 훈장>>은 시인의 상상속의 산물이며 암시의 상징물이다. 유감스럽게도 시인은 말하지 않는다. 사실 말할수도 없고 말해서도 안되것이 시인이다. 해석을 독자에게 맏기는것은 현대시 시인의 천직이니까. 료리사는 무얼하고있는가. <<거위털>>을 뜯고있다. 그뒤에 <<눈이 내린다>>고 하였으니 <<거위털>>은 <<눈>>을 표현하는 시적상관물이겠다고 생각되는데 시인은 또 다시 기지를 발휘하고있다. <<사랑하는 이/ 내 품안에서 멀어졌구나>>. 눈이 <<사랑하는 이>>인지 <<거위털이 사랑하는 이>>인지 아니면 료리사가 <<사랑하는 이>>인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 <<내 품>>이란 언어도 료리사의 품인지 하늘의 품인지 명확하지 않다. 이러한 불투명, 불명확성이 바로 암시라겠다. 시 <<흰눈>>은 한보 더 나아가서 큰 암시를 파묻고 있다. <<장교님>>이나 <<료리사>>에 대한 진술은 있어도 <<노래하는 천사>>에 대한 진술은 한마디도 없다. 대담한 생략, 끝나지 않은 시로써 끝을 냄으로써 암시의 력도와 흔상의 가치를 높이고있다.

  영국 로렌스 시를 한번 살펴보는 것도 좋을 같다.


      익은 열매 떨어질 때

      그 대지의 혈관으로 달콤함 스며나와 방울져 똑똑 떨어진다         온전히 산 사람들 죽을 때

      그들 체험이 살아있는 현관의 공간으로

      들어가 그 빛 더 한다.

      원자에 죽지 않는 혼돈의 몸뚱이에

      공간이 살아있어

      고니처럼 움직이고

      그 깃털 정제된 체험의 기름으로

      비단처럼 빛나기 때문이다

          -<<익은 열매 떨어질 때>>전문


  한두번 읽어서 감이 잡히지 않는다. 여러번 읽으며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해독이 조금 가는 같다. 왜 그럴까? 시가 감정을 배설하지 않았고 언어들이 라체를 드러내지 않았고 이미지로 되었기때문이다. 얼핏 밑바닥이 보일듯 하지만 찬히 뜯어보고 사색해 보지 않으면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우리는 1련에다 이런 의견을 들여본다. <<대지의 혈관으로 달콤함 스며나와 방울져 똑똑 떨어진다>>고 하였는데 <<대지의 혈관>>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대지는 가장 낮은 곳인데 거기에 <<스며나와 방울져 똑똑 떨어지면>> 어디로 떨어지는가? <<익은 열매가 떨어질 때>>의 <<익은 열매>>는 과일인가, 그때는 가을을 지칭하는가 아니면?

  2련에다는 이런 질문을 할수 있다.

  <<온전히 산 사람>>은 어떻게 산 사람을 말하는가? <<체험의 살아있는 혈관의 공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혈관>>에 공간이 생기면 크게 생기면 생명이 위험한 것이다. <<빛>>, 혈관속으로 들어가는 <<빛>>이란 어떤 상징인가? <<원자에, 죽지 않는 혼돈의 몸뚱이>>는 어떤 사물을 가리킴인가?

  3련에다 이렇게 묻고싶다.

  <<공간이 살아있어 고니처럼 움지이고>>에서 그 공간은 <<혈관의 공간>>이겠는데 <<고니처럼 움직>>일수 있으니 무슨 비밀을 말함인가? <<고니>>의 상징은 무엇을 표현하는가? <<비단처럼 빛나는>> <<정제된 체험의 기름>>은 무엇이기에 고니의 <<깃털>>에 바를수 있는것인가?

  시의 련마다에 시행마다에 주요한 언어마다에 의문을 제기할수 있다는것이 암시가 있기때문이 아니랴. 의문을 제기한다는것은 비밀이 있기때문이며 소통이 잘 안되거나 안되기때문이다. 시를 읽은후에 그저 그렇구나 하는 감이 들면 <<친절>>은 있어도 <<암시>>가 없게 된다.

  3련만 굳이 해설해 본다면 이런 의미가 아닐가 한다. <<공간이 살아있어/ 고니처럼 움직>>이고에서 <<공간>>은 <<혈관의 공간>>으로서 생명이 활동하는 공간쯤으로 설계할수있고 <<살아있다>>는것은 이 공간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라겠다. <<고니>>는 작자의 리상적인 사물이라겠으며 아름다움의 징표라겠다. 우리의 생활속에서 백설같은 아릿다운 고니가 자유로이 날아옐수있는것은 <<정제된 기름>>을 바른 <<비단처럼 빛나는>> <<깃털이>> 있기때문이란다. <<정제된 기름>>은 생활이 주는 정면, 반면의 교훈이며 체험이라겠다. 그러기에 그것은 <<비단처럼 빛나는>> 인생을 가꿀수있는 <<깃털>>을 가진 <<고니>>를 떠올리는것이 아니겠는가! 필자 나름의 살핌이다. 아무튼 이미지시 해석은 수학이나 물리의 공식처럼 공식풀이를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이미지는 감정이나 관념같은 것을 어떤 사물로 대용해버리기 때문에 이방인으로서는 100%의 완정한 해석의 가능을 배제해버리기가 일수이다.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는, 듣지 못하는 것을 듣게 하는 낯선 작업, 에티오피아는 있어도 도착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감내하여야 하는 이미지시다.

  이미지는 어떤 의도에나 해석을 가하지 않으며 어떤 의도나 로출시키는 것을 꺼리는 암시의 시이다. 이제 우리는 루이스의 문장을 긴대로 참을성 있게 보기로 하자.


오, 장미여 너는 병들었도다!

울부짖는 폭풍속을

밤을 뚫고 날아온

보이지 않는 벌레

너의 분홍색 기쁨인

잠자리를 찾았도다

어둡고 비밀스런 벌레의 사랑

너의 생명을 멸망케 하리라

                       -블레이크

살아있는 동안 노래도 모르던 은빛 백조

죽음이 다가왔을 때 닫혔던 목이 열려

갈대 무성한 강가에서 가슴을 떨며

처음이자 마지막인 오직 한마디 노래를 부른다

기쁨이여 아녕, 죽음이여 다가와서 나의 눈을 감겨다오

현자보다 바보가 더 떠들 듯이 거위가 백조보다 더 떠드네

                -엘리자베시대의 시(필자 불명)


  <<시를 읽는 젊은이들을 위하여>>란 문장에다 루이스는 상기한 두수의 시를 써놓고 의미심장하게 자신의 관점을 피력한다.

  <<어느 누구도 블레이크의 시를 단순하다고 할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나에게 던진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이처럼 불가해한것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는 마치 전류의 쇼크처럼 세찬 감정이 나의 몸을 뚫고 지나가게 합니다. 이 시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직도 난 확실히 모르지만 그 다음의 시는 이에 비하면 조용하고 지극히 단순합니다. 거기에는 조그만한 수수께끼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는 블레이크의 시처럼 순수한것은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ㅡ이는 마지막 두행에서 이 시의 작자는 죽음에 림박한 백조의 입을 빌어서 생에 관한 인간적인 의견을 말하고 있기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팔팔하고 기운 좋은 백조라도 사물을 생략하지 못한다는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입니다.ㅡ하물며 세상은 말세가 되었다. 거위나 바보 따위가 백조나 현자보다 더 뽐내고 행세하는 세상이라면 차라지 죽어도 아까울것이 없다ㅡ이런 내용의 말을 할리가 없습니다. 마지막 두행에 포함되여있는 인생에 관한 의견은 불순한것ㅡ말하자면 시의 체내에 섞여든 불순한것입니다. 이 시의 전체의 형태를 무너뜨리지 않고 작자 자신의 이러한 의견을 시와 정서와 바탕속에 짜넣을수가 있었던것은 시인의 기교덕분입니다.

  블레이크 시에는 이러한 불순물이 끼여있지 않습니다...시인이...판단을 말하거나 자기 마음에 떠오른 하나의 사상을 짜넣는다는것을 사람에게 느끼게 하는 대목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루한 인용이지만 꽤 의미가 있다겠다. 백조를 의인화한것을 부정하는데는 무리가 좀 있다하겠지만 시는 <<자기 마음에 떠오른 하나의 사상을 짜넣는다는것을 사람에게 느끼게 하는 대목은 하나도 없어야>> 한다는것은 모름지기 큰 계발을 주는것이고 <<불순물>>이라는 지적은 큰 충격으로 가슴을 울려주고있다. 사색의 가치가 있는, 두세번 다시 읽어볼 가치가 있는 견해라 겠다.

  <<시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로만 야콥슨은 이렇게 쓰고있다.

  <<만일 시인의 감동효과의 범위를 거부한다면 배타적인 시(상징주의와 같음)를 초래하게 된다. 시인이 영속성을 거부한다면 의도적으로 시사성이 강한 작품(례컨대 정치적시)를 낳게 된다.>> 이미지시는 배타적인 시라 하겠다. 이미지시는 선전을 위한것도, 계몽을 위한것도, 교육을 위한것도 아니다. 이미지시는 예술로 존재할뿐이며 대중가요인것이 아니라 교향악이다. 이미지는 모호함과 불일치로 암시를 일으킨다. 모호하지 않고 모두 일치되여 있으면 무엇을 암시하겠는가. 암시할것이 없다겠다. 이미지시는 표현의 수법으로 흔상의 가치를 창출하는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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