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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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나의 문학관과 창작의 길

연길-카스 2만리 기행.2
2008년 10월 14일 06시 08분  조회:1434  추천:43  작성자: 최룡관

7.북경은 이전의 북경이 아니여

   중학생신문사 마룡덕사장님의 덕분으로 통화조선족중학교 선생들의 사주는 저녁을 먹고 차표을 가지고 렬차의 제일 고급좌석인 연석칸에 올랐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고 렬차는 어둠을 물어뜯으면서 달리기만 하였다. 드르렁드르렁하는 렬차의 차바퀴소리가 고르럽게 들리였다.

   조형도 시인이고 나도 시인인지라 우리는 시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조형은 주요하게 말씀하는 위치이고 나는 가끔가다 한마디씩 께끼면서 듣는 사람이였다. 조형은 일찍이 20세기 70년대에 한국의 월간문학신인상으로 등단한 시인이다. 사업에 다망하다보니 시를 많이 쓰지 못하고 시집도 한권밖에 펴내지 못했지만  시에 대한 연박한 지식이 있는분이다. 앉은 자리에서 한국의 명시들을 수십편 술술 암송할수있어 기억력과 총명도 이만저만이 아닌 시인이다.

   시는 예술을 벗어나서는 안된다. 시는 노래말(우리가 말하는 가사를 한국에서는 노래말이라고 한다.)이나 웅변고와는 다르다. 노래말이나 웅변고는 예술을 떠나도 된다. 일본에 ‘일흔번째 맞는 봄’이란 시가 있는데 이는 제목만 하여도 시가 된다. 시인들이 왜 꽃을 자주 노래하겠는가. 꽃은 꽃잎도 꽃술도 락화도 모두가 시다. 도레미파는 모두가 음악이다. 시의 도레미는 언어이다. 음부가 표현의 다양한 통로로 여러 가지 명가곡을 만드는것처럼 시도 언어로 여러 가지 다양한 표현을 하여 여러 가지 아름다운 시로 되여야 한다. 연변시는 로쇠하다. 문제가 있다. 언어련금술이 아니 된다. 연변의 어떤 시인의 시는 시가 아니고 어떤 사람은 책을 찍으려 하는데 그런 책을 찍어서 무얼하느냐 하는 등등 연변문학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연변은 50대 시인들의 시가 좀 괜찮다고 피력한다. 그러면서 미나리 하나로 비빔밥을 못 만든다는것이다. 료리사라면 여러가지 료리를 만들줄 알아야 진정한 료리사라고 할수있단다... 

   이튿날 오전 열시오십분에 우리는 북경역에 내리였다. 북경역은 사람들이 어찌도 많은지 조금만 내다보아도 사람들은 걸어다니는것이 아니라 출렁거린다고 할지경이였다. 우리는 산서성 대동시(大同市)로 가야 했다. 이번 려행의 주요 목적은 비단의 길의 중로를 견학하는것이지만 연도의 명승지들을 보면서 가자는것이다. 대동에는 우리가 중학시절 지리시간에 배운 중국에서도 유명한 운강석굴(云岗石屈)이 있다. 그래서 대동시로 꼭 가야 한다. 그런데 대동시로 가는 버스가 있을것인데 어디 가서 찾아야 하는가? 조형은 물론 가이드라는 룡관씨도 그것은 감감하다.

   한 70세도 넘어보이는 늙은이가 나타나서 어디를 가느냐고 묻는다. 산서성대동으로 간다니까 자기가 버스역을 안다고 한다. 우리는 곤색천가방을 들고 누런 군대용 솜외투를 입은 늙은이를 따라 역왼쪽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어쩐지 미심스러워났다. 마침 지나가는 역전경찰과 물었더니 모른단다. 왼쪽으로 나가다가 누런 이발 하나밖에 없는 이 령감이 다른 사람들과 대동으로 가는 버스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아얏, 속히우는것이 아냐? 나는 대뜸 이 늙은 두상한테 당하는 감이 들어 그를 뿌리쳤다. 딴곳으로 가려하는데 령감이 명함장을 내밀면서 그냥 자기가 안다고 하였다. 명함장에는 북경-대동 버스역 번호가 씌여있었다. 즉각 전화를 쳤다. 북경시 20선버스 출발역이라고 한다. 어떻게 찾느냐고 물으니 끊어지는 전화다. 잘못 결려들었다간 그 후과를 상상하기도 두려웠다. 우리는 짐을 끌고 역전 오른편으로 갔다. 광장을 벗어나는 곳에 숱한 사람들이 장도버스가이드 패말을 들고 어디로 가는가고 앞을 다투어물었다. 나는 그들이 든 패말을 눈빛질하다가 태원이라고 쓴 패말을 발견하였다. 그 사람과 태원가는 차가 대동을 거치느냐고 물었더니 아니 거친단다. 그래서 지나가는 경찰한테 묻기도 하고 해방군병사를 보고 묻기도 하였으나 모두 모른다고 하니 그냥 헛물을 켜는 판이였다. 깜짝이야. 역전앞에  김삿갓술집을 경영하는 정공산경리가 있지 않는가. 한때 우리와 합작하여 해란강문학상을 운영했던. 바라보니 집들이 헐리여 있었다. 그러는데 한 사람이 오른쪽으로 조금 가면 대동차가 있을것이라고 한다. 용빼는수가 따로 없었다. 우선 그리로 가봐야 했다.

   짐을 끌고 가보니 진베이 소형버스 한대가 있었다. 사람 대여섯이 앉아있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대동손님 안내란다. 오후 한시십오분에 뜬다고 한다. 시계를 보니 열한시반이다. 공짜로 안내한단다. 왜 공짜일가? 공짜는 좋은데  믿고 기다리다가 헛물을 켜는 날이면 어쩌나 하는 위구심이 들었다. 내가 안달아 하는것을 보고 조형이 택시를 타잔다. 북경의 택시비가 쩍하면 50원을 넘는줄 아는 나는 감히 택시를 탈 엄두를 못내였다. 조형이 택시를 타자니 두세번 택시를 세워서 물어보았는데 모두 모른단다. 세상에! 택시도 모른다면 누가 안단말인가! 숨이 막혔다. 가이드로는 진짜 빵점이였다. 아무 택시나 아는놈이 있겠지 하고 또 한 대를 잡았다. 택시비 40원을 내면 간단다. 나는 다짐을 땄다. 찾지 못하면 택시비를 주지 않는다고. 운전수도 그러자고 하였다. 택시에 앉았다. 한식경이나 달려서야 한 장거리 버스역에 닿았다. 운전수가 차에서 내리면서 들어가 보겠다고 한다. 우리들은 차에서 기다렸다. 시간이 퍼그나 지나서야 운전수가 돌아왔다. 아니란다. 그는 차를 몰고 딴곳으로 가면서 꼭 찾아주겠으니 근심말란다. 또 한참 달리였다. 버스들이 서있는 곳으로 갔다. 운전수가 내려서 알아보더니 대동으로 가는 버스가 오후 두시에 여기에 도착한다면서 타고 가라고 한다. 나는 안된다. 당신이 버스가 서있는 곳까지 실어다 준다고 하지 않았는가고 하였다. 거기에도 손님을 소개하고 돈 벌어먹는 놈들이 씨글씨글하였다. 나까지 나서서 이것저것 물었으나 심통한수가 없었다. 한놈이 나타나서 자기가 알고있으니 소식제공비 40원을 내란다. 호화버스가 떠나는 곳을 안다고 큰 소리친다. 거기서 대동버스가 떠나지 않으면 돈을 받지 않겠단다. 그를 택시에 싣고 또 떠났다.

   나는 북경으로 여라믄번 온것같다. 문화대혁명때 서너번 북경으로 와보았고 기자 시절에 취재도 와보았고, 6.4운동때도 기자로 한번 다녀갔다. 기자 견학단일원으로 운남으로 가고 올 때도 북경에 들리였고, 재작년에 덴마르크에 있는 딸이 부모를 북경구경시킨다해서 왔다간적이 또 있다. 그때의 북경은 이렇게 복잡하고 돈을 버느라고 사람들이 지금처럼은 싸대던것 같지 않았다.북경사람들은 례절이 밝고 손님들을 따뜻이 대해주었다. 상품생산이라는것이 사람들을 미치게 하고 서로 등을 쳐먹고 간을 뽑아먹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맴돌았다.

  추호의 경각성도 늦출수 없었다. 대동으로 가는 버스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돈을 주지 않으리라고 굳게 다짐했다. 거이 반시간을 달려서야 대동버스가 있다는 곳으로 찾아갔다. 소학교운동장 절반만큼한 공지에 버스 한대가 서있었다. 차에서 내린 나는 버스를 찾아가 대동으로 가느냐고 물었다. 아니란다. 한쪽켠에 공공변소가 있고 변소를 지키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과 물어보니 모른다는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조형을 차에서 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서성거리는 한 사람을 찾아 대동차가 여기서 떠나느냐 물었다. 그런단다. 그런데 왜 차가 없느냐고 하니 한시에 소형버스가 와서 손님을 실어가는데 자기도 그 차를 기다린단다. 그래도 나는 시름이 놓이지 않아서 언제 타보았느냐고 물었다. 전에도 타고 다녔단다. 시름이 놓이였다. 가이드한테 돈 30원만 주었다. 리유는 간단하였다. 호화차가 없다는것이다. 가이드는 울상이다. 택시를 타고가면 30원이 다 날아난다나. 나는 못듣는체  하였다. 자식 너도 코밥을 먹어봐. 차들을 보내고 보니 열두시가 좀 지났다. 그때 소형버스 한대가 왔다. 대동으로 가는 버스의 안내차란다. 오후 한시반에 떠난다는가. 대여섯이 차에 올랐다. 나는 점심을 아무렇게라도 외따져야겠기에 조형을 차에 있으라 하고 맞은켠으로 갔다. 가다보면 식당이 나질거라는 생각이였다. 한 200메터 가니 간이식당 하나가 나지였다. 마침 그 음식점에서 왠룽보를 만들어 팔기에 세주머니를 사고 샘물 두병을 사다가 먹었다. 배고픈 김에 먹는것이라 맛이 좋았다.

  한시반이 되자 소형버스는 우리를 싣고 달리였다. 어느 지점으로 가는지도 모르고 갔다. 거이 반시간을 달려서야 호화버스가 있는 아늑한 곳에 도착하였다. 대동으로 가는 차라고 갈아타라고 한다. 그런데 이상스러운 차였다. 장거리 차들은 모두 어디로부터 어디까지 간다는 글을 써붙이는데 이 차에는 그런것이 없었다. 등기도 하지 않고 벌어먹는 차임이 분명하였다.  그자식들이 통도 크구나. 수속이 있던 없던 우리는 관계할봐가 아니야. 대동으로 실어다 주기만 하면 만세야 하고 속으로 웃었다. 우리 나라 서울- 북경이 이러하니 이제 머나먼 길에서 오늘과 같은 일을 얼마나 겪어야 할지 알수 없는 일이여서 차를 타고 가면서도 가슴 한쪽구석에는 근심이 태산같았다.

   시내를 벗어나자 버스는 100키로 시속으로 산서성 대동시를 향하여 질풍같이 내달리였다. 북경사건을 겪고 조철호형은 기행문에서 이렇게 개탄한다. <<중국인들은 돈을 버는 일에는 참 기발한 사람들이다. 특히 북경은 800년 력사를 지닌 고도요. 16800평방키로메터의 면적을 지닌 매머드도시여서 예측을 뛰여넘는 일들도 줄을 서있는듯하다... 도시가 워낙 크고 사람이 많고 돈버는 궁량이 발달하다보니 이같이 정식을 벗어난 비공식적인 구조가 생겨나고, 그 빈구석에서 먹고 사는 일이 공식화돼 뿌리 내리고 먹이 사슬이 형성돼 북경의 또 다른 구조가 돼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음이 부끄럽지만 다행스럽기도 했다.>>


8.만리장성 - 피와 생명의 가치는 어디에


   차가 팔달령 (八达领)에  이르기 시작하자 만리장성(万里长成)이 나타났다. 하늘에서 거룡이 날아내리는가 땅우에서 거룡이 하늘로 꼬리를 흔들며 날아오르는가. 그런데  거룡은 한두마리가 아니다. 차를 삼키기라도 하려는듯 카다란 아가리를 벌리고 날아내렸다가는 삼키지 못하고 차길밑을 빠져서  하늘로 날아오르고, 그랬다가는 또다시 날아내리고 날아오른다. 길손들의 마음은 거룡들의 날음을 잡아타고 하늘을 날아오르기도 하고 하늘에서 날아 내리기도 한다. 날아오르고 날아내리는 거룡들의 등허리를 타고 우리를 실은 차가 질주한다.

   만리장성은 우리나라의 고대의 유명한 건축물로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력사의 기적이다. 우리나라 고대의 로동인민들의 지혜의 산물이기도 하고 인내력의 산물이기도 한 만리장성은 고대건축기술의 위대한 성과인 것이다.

   우리가 보통 장성을 보고 부르기 쉽게 만리장성이라고 하지만 어찌 만리라고만 하랴. 력사의 기재에 의하면 20여개 왕조와 제후국들이 외세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하여 장성을 쌓았는데  만약 여러 시대의 장성의 길이를 다 합쳐보면 그 길이가 십만여리가 된다고 한다. 지금의 신강, 감숙, 녕하, 산서 , 섬서, 내몽골, 북경, 하북, 천진, 료녕, 길림, 흑룡강, 하남, 산동, 호북, 호남 등 16개 성, 자치구, 시에 모두 길고 짜른 장성이 있다. 그중 내몽골자치구에만 하여도 삼만여리나 되는 장성이 있다.

   이렇듯 웅위로운 공정의 공정량은 현대인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 족하다. 압록강으로부터 기련산맥에 이르는 장성을 명나라에서 쌓았는데 그 길이가 12600여리에 달한다고 한다. 거기에 든 바위돌과 흙으로 두께 한메터, 높이 다섯메터로 계산하여 본다면 지구를 한바퀴 돌고도 남음이 있단다. 만약 그것으로 너비 다섯메터 , 두께 삼십오센치메터되는 길을 만든다면 지구를 서너고패 돌릴수 있다지 않는가. 그래서 우주비행원들이 하늘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면 제일 선명하게 보이는것이 중국의 장성이라고 한단다.

   장성은 돌로 쌓은것도 있고 벽돌로 쌓은것도 있고 흙과 자갈로 쌓은것도 있다. 장성하면  진시황을 생각하는데 실은 진시황이전의 몇백년전부터 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고대인들은 기원전 7세기 전후로부터 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제일 처음으로 장성을 쌓은 나라는 초나라였다고 한다. 초나라는 변경을 따라 수백리에 달하는 성벽을 쌓았는데 그 이름을 방성(方墭)이라고 불렀다한다. 그뒤를 이어 제나라, 위나라, 한나라, 조나라, 연나라, 진나라 등 제후국들이 련이어 자기의 변경에다 장성을 쌓았다한다. 이러한 장성의 유적들은 없어진것도 있고 남아있는것도 있다. 그때의 장성은 황하와 장강류역을 중심으로 동서로 뻗은 것도 있고 남북으로 뻗은것도 있었단다. 진시황은 6국을 통일한후 처음으로 중앙집권제를 건립하고, 몽념이라는 장군을 파견하여 흉노를 막기위하여 장성을 쌓았는데 군사 30만을 동원하였다고 한다. 진시황은 또 다시는 활거를 하지 못하게 제후국들이 쌓은 국내성을 허물어버리기도 하였단다. 그때 진시황은 서쪽으로는 지금의 감숙성민현으로부터 동으로 료동의 만리장성까지 쌓았다고 한다. 력사상 명대의 규모가 가장 컸는데 100여년간 장성을 쌓았다고 한다. 력사상 민부를 제일 많이 동원한조대는 북제였는데  450키로메터의 장성을 수축하기 위하여 한번에 180여만명이나  되는 군사와 백성을 동원하였다고 한다.

   장성은 우리나라 여러민족인민이 공동의 피와 땀으로 쌓아진것으로서 위대한 공정이고 진귀한 문화유산이다. 지금은 유네스코에서 제정한 중점문화유물보호물로 되었다.

   우리가 가는 길 어디에나 장성이 없는 곳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본 장성은 감숙의  가욕관(嘉峪关)에서였다. 황토와 모래로 쌓아진것이였는데 한토막이 웅위롭게 서있어서 그곳에서는 장성제일돈 (长城第一礅)이라고 자랑하고 있었다. 서안에는 시내의 한가운데에 명나라때에 벽돌로 쌓은 장성이 있었고, 산서성의 대동시로부터 하남성의 정주시로 남하하는데는 산발을 따라 쌓여진 장성이 심심찮게 보이였다. 옛날에 중국은 말그대로 장성의 나라였다.

   장성을 쌓는 시대에 얼마나 많은 부모처자가 생리별하였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던가! 장성은 한줌도 못되는 봉건통치배들의 리익을 보위하기 위하여 쌓아진것으로써 인민들의 피와 땀과 생명의 결정체이다. 장성은 중국력사의 위대한 건축물이기도 하고 중국력대의 통치배들의 죄악의 상징이기도 하다. 장성은 옛날에는 마음대로 드나들수 없는 국계의 상징이였지만 오늘은 누구나 마음대로 드나드는 문화유물이 되어버리였다. 지금은 장성안도 우리나라요 장성밖도 우리나라다. 장성은 불가침범의 국계의 상징이였고 백성들을 가두어놓는 울타리였다. 장성이 장성노릇을 못하니 백성이 얼마나 자유로와지였는가.

   장성이 인민들에게 가져다준 고통을 위나라 시인 진림은 이렇게 읊은 바 있다.

 
장성아래 샘물에서 말을 물 먹이니  


장성아래 샘물에서 말을 물 먹이니

물이 너무 차서 말뼈가 얼어든다네


성쌓는 관리에게 내 말하노니

<<태원의 역군들은 오래 머물러두지 말게

 
.............  


<<사나이 차라리 싸움터에서 죽을망정

.............

수많은 장정들 여기 끌려왔으니

집에는 홀로 사는 안해들 그 얼마겠나

 
그네들 안해에게 보내는 편지

<<부디 딴데로 시집을 가서

서로 만난 시부모 잘 섬기고 사오

다만 원하기는 때를 따라

옛남편을 생각이나 해주오>>

 
변방으로 오는 그 답장 탓하였으되

<<그대의 말씀 왜 그리도 야박하오>>

 
<<이몸 이러한 곤난속에 있으니

남의 집 딸을 어이 남겨두리 사나이는 낳거든 반겨하지 말고

딸을 낳거든 고이 기르소

보구려! 장성아래 끌려온 사나이들

죽어서 해골들만 쌓이고 엉켰소>>

 
<<머리 올려 그대 안해 되여

마음속 사랑 굳이 다짐했다오

변방의 성쌓기 괴로움을 내 알거니

어이 이 한몸 딴 생각을 하겠어요>>  


   력사는 흘러갔어도 장성은 남아있고 진림의 시가 남아있다. 장성도 진림의 시도 장성이 낳은 처참성과 전쟁의 참혹성을 눈물을 머금고 공소하고 있다. 일당만의 장성을 쌓느라고 남편은 안해한테 재가하라고 다시는 아들을 낳으면 반겨하지 말고 딸만 낳으라고 소리치고 있다. 장성의 물은 말이 먹어도 뼈가 어는 물이라고 하였으니 어찌 한마디로 장성이 빚어낸 질고를 다 헤아리랴. 시의 밑바닥에는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야 한다는 피타는 호소가 안받침되여 있다. 력래로 중국인민은 장성을 쌓으며 피를 흘리였고 장성을 허물며 평화와 안정을 획득하였다. 오늘의 안정에 이르기까지 중국인민은 얼마나 많은 장성을 허물었던가. 오늘의 안정을 보존하며 백성이 부유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장성을 허물어야 하는가. 장성은 국계였다. 국계는 어떠한 국계를 막론하고 전쟁의 참화를 도발할수 있는 가장 위험한 위험구이다. 인류는 이 국계들을 지워버려야 한다. 그래야 세계의 진정한 평화와 안정을 실현할수있다. 국계를 지워버리기 위하여 인류는 또 얼마나 많은 재앙을 입어야 하고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하겠는가.


 9. 내가 만난 불교의 첫현장 - 운강석굴

 
   우리는 아침 8시에 대동시의 구예호텔을 나와서 그리로부터 30여리 떨어져있는 운강석굴로 향발하였다. 산서성 대동시는 270여만이 살고있는 도시로서 북위(北魏)시대에는 100여년간이나 서울이였던 고장이다. 대동시에는 큰 자랑거리 두 개가 있는데 그하나는 운강석굴이고 다른 하나는 리화주(梨花酒)라는 술이다. 운강석굴은 중국고대 4대석굴예술의 하나에 속하는것으로서 2001년에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제정한것이고 리화주는 세계명주 500개를 뽑을 때 뽑힌 술로서 아마 중국에서 유일하게 세계명주로 된 술인것 같다. 웬일인지 우리가 대단하다고 하는 모태주는 세계명주에 들었다는 소식이 없었는데 산서성의 리화주가 세계명주라니 믿어지지 않기도 하였다.

   우리를 실은 버스는 잠간 달리더니 무주산(武州山)남쪽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운강석굴앞에 우리를 부리워놓았다. 차에서 내려 북을 바라보니 짙푸르게 서있는 측백나무들 너머로 운강석굴이 바라보이였다. 둔덕우에는 뱀장어가 꼬리를 치고 있는둣한 구불구불한 장성이 어디론가 헤염쳐갔는데 그밑으로 푸른 기와를 얹은 운강사목각건축물이 고풍을 현시하며 두채가 나란히 서있었고 좌우로 벌집같은 닫집들이 바라보이였다.

   다니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것으로 보아 우리가 첫손님으로 도착하였음이 분명하였다. 어제 저녁에 한국에다 편지를 보내겠다던 조형의 말씀이 생각나서 나는 조형을 우전국으로 안내하였다. 주소를 쓰는 조형의 뒤모습을 바라보니 조형은 훌륭한 사업가이기도 하지만 가정도 잘 거느리는 모범남편이며 모범아버지라는 감격이 내 가슴을 적시였다. 우전국을 나서서 우리는 곧추 운강석굴로 슬적슬적 걸어갔다.

   운강석굴은 동서로 2리나 펼쳐진 석굴인데 점유면적이 40만평방메트나 된다. 현존하고있는 동굴이 45개이고 부속동굴이 207개이며 크고 작은 불상이 51000여존이나 된다. 이 석굴은 기원 460년에 북위 문성제(文成帝)가 등극한후 주지승 탄요(昙曜)를 주도하게 하고 64년이란 시간을 거쳐 완성된 석굴이다. 탄요는 다섯곳에다 굴을 뚫고 불상을 조각하였는데 제일 높은 것은 70자요 버금가는 것은 60자였다. 이것을 지금 탄요5굴이라고 부르는데 16-20굴이다.

   운강석굴을 만드는것은 세차례의 대공정을 거친다. 첫공정은 465-494년 사이의 30년간인데 높이 30메터, 길이 600메터에 13개의 대형석굴을 만든다. 두 번째 공정은 494-524년까지의 30년간인데 불교신앙단체들이 달려들어서 벌집처럼 만들어 놓았다. 지금 현존하는 석굴은 210여개나 된다. 세번째공정은 당나라 초기에 이루어졌는데 운강 10사를 축조하고 1800여존의 불상을 수정했다. 그러나 료나라 말기에 전란으로 운강 10사는 불에 타고 명나라때에 와서는 운강석굴이 황페화되였다. 청나라 순치 8년 (1651)에 운강사원을 재건하여 북위시기 조각예술의 대표작이라는 칭호를 획득하였다. 운강석굴에는 당시의 건축, 복장, 음악, 무용, 불교흐름 등이 반영되여있어 그 문화적가치가 높은것으로 세상에 알려져있다. 운강석굴은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제일 처음으로 되는 대공정이였다.

  옛날 사람들은 정말 대단하였다. 그들은 순 망치와 정으로 석벽을 하나하나 뜯어내고 석굴을 만들었다. 우리 연변에는 이런 석벽이 있는것 같지 않았다. 진짜 청석바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여 흙도 아니였다. 모래와 돌로 다져진것같은데 대단히 딴딴한 석벽이였다. 이 누우런 석벽의 이름은 마애석벽이라 부른다. 난생 처음으로 이런것을 돌아보게 된 나는 너무도 대단하여 그저 혀만 끌끌 찼다.

   운강석굴에는 많은 동굴이 있는데 제일 화려한 것은 5화동(5华洞)(9-13)이다. 오화동에서  9,10굴은 앞과 뒤로 련결된 한쌍의 굴이다. 굴앞에는 8각기둥이 네개가 서있는데 중국의 한대와 위대의 건축기술이 빛을 뿌리고있다. 9굴의 동서  서쪽벽과 북쪽벽 아래에다는 <섬자본생>(睒子本生) 이야기를 부각한것이 특징적이다. 그 이야기는 이러하다. 가이국에 맹인 량주가 살고있었는데 늙도록 자식을 보지 못하여 산에 들어가 도를 닦았다. 보살자회(菩萨慈熙)가 이에 감동되여 아들로 들어가  그 이름을 섬자라 불렀다. 섬자는 삼림에다 풀집을 짓고 맹인 량주를 섬기였다. 섬자는 새와 짐승들과 친구로 사귀면서 여러가지 과실을 뜯어오고 샘물을 길어다 늙은 부모를 극진하게 봉양하였다. 하루는 국왕이 산에 가서 사냥을 하다가 몸에 사슴가죽옷을 입은 섬자를 사슴으로  잘못 알고 화살을 쏘았다. 순간 하늘땅이 뒤흔들리우고 태양이 빛을 잃고 뭇짐승들이 슬프게 울었다. 국왕은 맹인량주를 찾아가 죄를 빌고 그 집의 아들이 되였다. 이에 하느님이 감동되여 섬자를 다시 살아나게 하였다. 맹인량주가 이 소식을 듣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는데 눈물을 훔치니 눈앞이 환히 보였다.

   이 이야기 부각은 수법이 소박하고 조형이 정확하여 조각가들의 심후하고 견실한 생활체험이 보일뿐만 아니라 높은 예술기량도 환히 보인다.

   운강석굴의 제6굴에는 불교의 시조 석가모니(释迦牟尼)가 탄생한 경과를 부각하여 이채롭다. 이 굴은 부각내용이 풍부하고 아름다워서 운강제일위관(云岗第一 伟观)이라고 일컫는다. 석가모니는 금빛옷을 입고 오른손바닥을 보이며 맨발로 서있다. 귀가 어찌나 큰지 왼쪽귀가 어깨에까지 드리웠다. 석가모니의 키는 4.74메터이다. 머리에다 그물로 뜬것같은 모자를 쓰고있는 석가모니의 그 자애로운 모습을 언어로써는 표달할길이 없다. 량옆에 서있는 감실의 기둥은  9층으로 되였는데 층층의 면마다 보살이 셋씩 부각되여있다. 중심탑기둥의 아래와 남쪽벽에 석가모니가 어떻게 탄생하였는가 하는 전설을 이렇게 부각하였다.

   고인도에 쟈피뤄위(迦毗罗卫)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왕비가 40이 다되도록 자식이 없었다. 국왕은 대를 이을 자식이 없는지라 늘 수심에 잠겨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마야왕비(摩耶王妃)는  보살님이 태를 얹어주는 꿈을 꾸고 임신하게 되었다. 마야왕비는 풍속에 따라 본가로 해산하러 왔다. 하루는 왕비가 화원을 지나다가 무우수(无优树)라는 나무를 잡고 한심 쉬는데 오른쪽겨드랑이밑에서  남자아이가 떨어졌다. 그날이 4월 8일이였다.

   금방 태여난 태자는 동서남북으로 각각 일곱발자국 걸었는데 자국마다에 련꽃이 피여났다. 그는 한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땅을 가리키면서 말하였다.<<하늘땅에 나만이 독존하리라>>

    그때 9마리 룡이 하늘에서 날아내려와 입으로 성수를 뿜으면서 먼길을 다녀온 태자를 환영하는 환영연을 베풀었다. 왕이 태자를 맞으니 황궁에서는 노래와 춤이 넘치였다. 왕은 신선을 불러다 아들의 관상을 보게 하였다. 신선이 왕태자를 안고 보니 생김새가 뛰여났고 금강과 같은 몸에 32가지 기이한것이 있고 80가지의 훌륭한것이 있어서 이렇게 고하였다.

   <<태자는 집에 두면 왕위를 계승할거고 내여놓으면 불도가 될것이옵니다>>

   태자는  태여난지 일곱날만에 어머니를 잃고 이모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국왕은 태자에게 왕위를 물려줄 마음으로 날마다 100여명의 미녀를 동원하여 태자로 하여금 락을 누리게 하였다. 그러나 태자는 늘 마음이 허전하고 쓸쓸하였다. 태자가 열일곱살먹은 해에 장가를 들게 하였는데 태자는 풍속에 따라 약혼힘을 검사하게 되였다. 태자는 활을 쏘아 한살로 일곱면의 쇠북을 꿰였는데 그 기술은 세상에 당할자 없었다. 태자는 부왕의 허락을 받고 궁전을 돌아보았다. 동서남북 네문에서 로인, 병자,주검, 승려를 만나면서 생명은 무상한것이여서 인생의 어려운 길에서 해탈되여야겠다고 태자는 속다짐한다. 태자가 가출하겠다고 하자 왕은 안된다고 하면서 성안에다 계엄령을 내리였다. 여섯째날밤에 안해가 벌떡 일어나서 꿈이야기를 한다. 밝은 달이 하늘에서 떨어지는데 이발이 다 빠지고 오른쪽팔이 끊어지더란다. 태자는 안해의 꿈이야기를 듣고 오늘저녁에 가출할 시간이라고 단정하였다. 이 밤만 지나면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데 그러면 모든것이 끝장나는 판이였다. 그는 안해를 달래여 잠들게 하고는 말을 타고 황궁을 탈출한다. 이때 사천왕(四天王)이 나타나서 태자와 말을 들어 성문을 넘게 한다.

   산에 들어간 태자는 보리수(菩堤树)아래에 앉아 음식을 전페하고 마흔아홉날을 해탈을 꿈꾸다가 마침내 도를 깨닫고 부처님이 된다. 그날이 기원전 530년 음력으로 섣달 초여드래날이다. 그때 그의 나이가 서른살(서른다섯이라는 설도있음)이였다.

   운강석굴에서 제일 큰 불상은 제54굴에 있는데 키가 17메더나 된다. 이 석굴에서 제일 작은 불상은 몇센치메터밖에 안된다. 석굴마다 다 자기의 특색이 있는데 제12굴이 북위의 가무를 표현한 굴이다. 사람들은 이 굴을 음악굴이라고 부른다. 앞실의 북쪽벽문웃설주에 춤을 추는 무리를 새기여 놓았는데 바람에 날리는듯 가벼운 동작인가 하면 기음이 웅위롭고 동작이 련관되여 강열한 절주감을 주고있다. 제일 높은곳에 있는 천정의 닫집은 결구가 웅대하고 형식이 사치하다.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기악대가 배렬되였는데 불고 두드리고 뜯고 하는 여러 가지 기악합주가 한창이다. 퉁소가 있는가 하면 북이 있고 피파가 있는가 하면 징이있는데 무려 열대여섯가지 악기가 지휘를 따라 자기의 소리를 내고 있다. 당시의 태평성세를 노래하는 부드럽고 아름답고 웅위로운 음악소리가 귀전을 울리는것만 같다.

   석굴을 돌아보고 버스역으로 나오니 추운 바람이 옷자락을 붙잡고 놓지 않는다. 강물에는 유리판같은 살얼음이 덮히여있다. 홑바지바람으로 운강석굴에 온 조형의 얼굴이 찬바람에 빨갛게 얼어있었다.  


10. 오대(五臺)로 가는 길


   아득하게 펼쳐진 시누런 벌판, 이곳이 세상에 유명한 황토고원이다. 동으로 태행산, 서으로 일월산, 남으로 진령, 북으로 음산, 그 면적이 58만평방키로메트나 되고, 일반적으로 해발을 1000으로부터 2000메트로 헤아린다. 시누런 흙으로 이루어진 황토고원의 흙두께는  보통 100메트이상이고 제일 두꺼운 곳은 200메트도 넘어난다.

   산이란 이름이 없는 시누런 벌판으로 소형버스 한대가 질주하고 있다. 나무도 보기드문 벌판으로 달리는 소형버스는 고속도로가 아닌 일반포장길로 100키로의 시속으로 남으로 남으로 달리고있다. 그 차에다 나와 조형은 몸을 실었다. 온기가 설핏한 날씨가 잉잉거리는 차를 어루만진다. 이따금 마을이 나타나는데 넓은 벌에 걸맞게  소학교처럼 기다란  집들이 벽돌담장을 두루고있다. 마을이 나타나면 나무들이 좀씩 서있다. 수백리를 달려도 물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물이 흐른 흔적이 있는곳엔 땅이 패워들어가 흙골짜기를 이루었다. 바닥에는 그래도 흙이 아니라 자갈들이 보이기도 하였다. 여긴 어디로 가나 흙의 나라였다. 차안에는 땀내와 손님들이 겨끔내기로 피워대는 담배냄새가 코를 찌른다.

   얼마나 달렸는지 저 아득한 곳에서 아물아물하게 산이 나타났다. 오대산이란다. 우리가 가는 곳이 저 오대산이다. 오대산은 중국에서 4대불교명산중이 하나이다. 하나는 보타산(宝陀山)이고, 다른 하나는 아미(蛾眉)산이고, 또 하나는 구화(九火)산이고, 나머지 하나는 오대산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중국에 살면서도 4대불교명산이 있는줄을 모르다가 조형이 말씀하는 바람에 알게 되였다. 오대산은 산서성동쪽에 있는 산이다. 오대산을 가기위하여 우리는 먼저 원평(原坪)이라는 곳으로 가서 오대로 들어가는 차를 타기로 작정하였다. 대동에서 오대로 가는 차는 여름에는 오전오후에 다 있는데 지금은 려행비철이여서 오전에 한번만 있단다. 그래서 할수없이 에돌아가는판이다. 래일아침까지 기다린다는것은 반날을 떼우는것이니까 그럴수가 없었다. 시간이 금전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원평이라는 목적지만 있을뿐 어디로 해서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는 길은 따분하기만 하다. 둬시간 잘 달려서 왼손편 멀리에 은빛 바다가 나타난다. 항구에는 선박들이 떠있다. 나는 너무도 희한하여 소리쳤다.

   조형 저기에 바다가 나타났습니다.

   어디오

   저앞에

  그건 바다인 것이 아니라 신기루요

  아니 바다인데요

   허허허

   조형은 어처구니 없다는듯 사람좋게 웃었다.

   그제야 나는 환각에서 깨여난듯 하다. 물 한방울도 보이지 않는 황토고원에서 처음으로 신기루를 보았다는 신비감이 가슴에서 설레였다. 어릴 때 사막에 신기루가 있다는것을 교과서에서 배웠지만 제눈으로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였다. 처음보는 신기루는 신기하고도 희한하고 아름다운것이였다.

   산은 가까이 다가오기도 하고 멀리 사라지기도 하면서 차와 무슨 경주라도 하고있는것 같았다. 산은 나무가 몇대 보이지 않는 라체였다. 이따금 보이는 나무라야 키가 작달막하고 뼈가 앙상한 꾸불떡 나무였다. 산이 가까이 올 때마다 흙으로 쌓은 옛날의 장성도 산과 함께 따라왔다. 산은 벌을 위하여 서있고 벌은 산을 위하여 누워있었다. 산서사람들은 어찌보면 벌이였다. 수레가 지나가도 차가 지나가도 찍소리 한마디 없이 엎디여있는 벌이였다. 이런 벌에 바람을 맞받아 눈비를 맞받아 웅위롭게 서있는 산이 중국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오후 한시반에 탄 버스는 네시반에 우리를 원평의 버스역에다 부리워놓았다. 마침 오대로 가는 버스가 있어서 그 자리로 갈아탔다. 25명 정원이 앉는 좌석에 무려 49명이 올랐다. 일찍 올라서 자리를 잡았으니 망정이지 하마트면 서서 갈번하였다. 두시간이면 오대에 닿는다고 한다. 나는 사과랑 빵이랑 물이랑 한꾸러미를 차에 올리였다. 산서와 섬서는 귤과 사과가 많이 나는 고장이다. 제일 맛이 좋은 사과는 한근에 50전을 하는 사과이다. 이런 사과는 주인이 직접 따가지고 와서 파는 신선한것인데 어찌나 달고 시원한지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를 지경이다. 이런 사과를 우연히 서안에서 만나 먹어보았는데 난생 처음 먹어보는 사과였다. 조형이 식전에 먹는 사과는 금사과라고 하는바람에 거기로부터 우리는 사과를 부지런히 사먹었다.

   버스는 콩나물처럼 들어선 손님을 싣고 달리기 시작한다. 사람만 콩나물처럼 들어선것이 아니라 말소리도 콩나물처럼 들어섰고 담배연기도 콩나물처럼 들어섰다. 권연만 피우는것도 아니고 남자들만 피우는것도 아니다. 산서의 독초를 태우는 고약하고 독한 냄새가 말 그대로 코를 찔러서 조형은 이따금 코를 막는다. 차가 농촌으로 접어들자 밭에는 모두 옥수수 글거리만 보인다. 집집마자 옥수수대를 가득 무져놓은것을 보니 화목이 옥수수대였다. 여기도 물이 없는 강이 많기도 하다. 길은 차길인것이 아니라 수레길이여서 사람을 채로 치는것 같다. 차는 분기식 비행기가 연기를 뿜으며 하늘을 나는것처럼 먼지를 뿌옇게 날리며 달린다. 산이란것도 죄다 나무가 보이지 않는 흙산이다.

   차가 산골안을 지나간다. 둔덕이 있는 곳마다에 땅굴이 보인다. 여기저기에 땅굴은 많기도 하다. 문을 해단것도 있고 달지않은것도 있다. 어쩐지 그것이 해골에 패운 눈처럼 우묵해 보였다. 굴을 보면서 나는 문화대혁명때를 떠올린다. 진보도사건이 일어났다는 후다. 땅굴을 깊이 파서 량식을 저장하여 전쟁준비를 한다고 고아대며 내 고향 류신이라는 깊고깊은 시골에서도 땅굴을 팠다. 사람들은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무슨 량식이 있다고 땅굴을 파며 전쟁이 나서 땅굴속에 들어가면 모두 한구덩이에서 굶어죽을것이 아닌가. 적들이 왔을 때 땅굴속에 들어갔다가 독가스를 쏘면 찍소리 한마디 못하고 무리죽음을 당할것이 아닌가. 라는 불평들이 배에 가득 찼으나 누구 하나 입밖에는 내지는 못하였다. 한마디만 내비쳐도 반혁명이 되는판이라 벙어리가 제일 좋은 세월이였다. 산서에서도 땅굴을 많이도 팠구나.

  <<저게 무슨 굴인가 물어봐요>> 조형이 궁금해 하였다.

  나는 문화대명때 일은 말하기 싫어서 해석하지 않고 차에 앉은 사람들에게 물었다. 하는 대답이 뜻밖에도 내 생각과는 틀린다. 사과랑 귤이랑 저장하는 창고란다. 과일창고라는 말을 들은 나도 눈이 둥그래졌지만 조형의  눈에서는 신비감까지 내비치였다. 나야 연안 요동이요 갱도전이요 하는 영화를 본일이 있지만 조형이야 땅굴같은것은 처음 목격하는 일이였던 모양이다. 물론 한국에는 김치굴은 있어도 이런 땅굴이 없는것이다. 조형은 사진을 찍으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차가 들추기는 바람에 초점을 맞출수 없어 끊내 한장도 찍지 못하여 무척 아쉬워하였다. 두시간이면 닿는다던 오대에 세시간반을 달려서 밤 8시에 겨우 오대에 도착하였다.

   이튿날 이른 아침 7시에 오대산으로 가는 차를 타려고 버스가 있다는 곳으로 갔다. 두시간이면 오대산에 도착한다는 소형버스를 만났다. 그 차가 좋겠다고 생각하고 언제 떠나느냐 물으니 당장이란다. 올라서 표를 끊으니 차가 떠날념을 하지 않는다. 떠난다떠난다 하면서 떠나지 않으니 속이 바질바질 탔다. 어제 저녁에 올 때도 중도에서 한시간이나 누구를 기다리면서 차가 머물더니 오늘아침 또 재수 없는판이 아니겠는가. 숱한 차들이 나와서 손님을 끌면서 어느 차도  떠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택시를 탈수는 없다. 밑바닥 생활을 체험하여야 글이 나온다고 하였지만 이런 밑바닥생활을 체험한다는것은 단가마의 개미처럼 매삼거리기다.

   마침내 차가 자리를 떴다. 후  단김을 뿜었다. 그런데 한 40리가서 두촌(杜村)이라는 마을이 나타났는데 운전수들이 잠간 볼일을 본다고 차에서 내렸다. 한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옆에서는 택시들이 제 차를 타라고 손님을 꼬드긴다. 기다리다 못하여 조형이 시간이 금전이니 택시를 타자고 한다. 나도 간장이 다 탄지라 택시를 불렀다. 150원이란다. 나는 운전수와 100원이면 가겠다고 하였다. 잠간 싱갱이질을 하여 백원으로 흥정하고 차에 올랐다.

 
11. 사찰의 숲 오대산 
 

   한시간쯤 달린 차는 오대산에 접어들었다. 가파롭고 험한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서 차가 산마루에 올라서니 오대산입구라는 대문이 나타났다. 길이 막혔다. 돈을 내란다. 운전수가 자기가 공짜로 들어가게 하면 두사람 입산비가 100원인데 30원을 달라고 하였다. 그러마했다. 운전수가 차에서 내려 문지기와 상론하였으나 실패. 우리는 100원을 내고 입산증을 떼였다. 이러면 오대산에 들어가서 참관만 하면 되오. 하고 나는 운전수에게 물었다. 50원을 입산비지 절보는 값이 아니란다. 중국에서 제일 비싼것이 이런 유람입장료인것 같다. 운강석굴입장료는 120원이였다. 후에 지불한 일이지만 돈황의 입장료도 120원이였다. 비싸지만 유모아적인 입장료는 진시황릉에 있는 병마용이였다. 1원이 모자라는 99원이였다. 려행하는데 소비되는 경비는 차비, 려관비, 식비 세가지로 계산하여야 하는데 제일 많이 드는것이 입장료이다. 돈이 적으면 눅거리 려관에 들어도 되고 먹는것도 일반 백성들이 먹는 눅거리 음식을 먹을수있지만 입장료만은 어디로 가나 요구대로 내지 않으면 안된다. 택시는 뱀처럼 구불구불 기여간 산길을 따라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하얀 단장을 한  오대산봉우리들이 우리의 눈으로 뛰여든다. 하아 여기까지 찾아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모지름을 썼던가. 오대산, 둘레의 길이가 250키로메터이고 산봉우리 다섯이 빙 둘러있다고 하여 그 이름을 오대산이라고 부른다. 높이 솟은 산봉우리마다 꼭대기가 평평하게 넓다고 한다. 그 모양이 흙을 쌓아만든 대와 같아서 오대산이라는가. 오대산의 중심은 지금 우리가 가고있는 대회진이다. 오대는 제각기 딴이름이 있다. 동대는 바다가 바라보인다고 망해봉(望海峰)이요, 서대는 달을 보는 곳이라고 쾌월봉(快月峰)이요, 남대는 아름답다고 하여 금수(锦繡)봉이요, 북대는 풀입같다고 하여 엽두봉(叶头峰)이요, 중간에 있는 봉우리는 주위에 산봉우리들이 모여있다고 하여 취암봉(聚巖峰)이다. 5대가운데서 북대가 제일 높은 산봉우리인데 해발 3,058메터로서 <<화북의 지붕>>이다. 사람들은 동대에서 해돋이를 보고, 서대에서 달구경하고, 중대에서 별을 헤여보고, 북대에서 적설을 보고, 남대에서는 꽃구경을 한다고 말하고있다. 산우의 기후는 차다. 해마다 4월이 되어 해동이 되고 9월부터는 흰눈이 내린다. 한여름에도 시원하여 사람들은 청량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참 차를 타고 내려가노라니 사찰이 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골짜기에도 사찰이요 산허리에도 사찰이요 산꼭대기에도 사찰이다. 이 고장에 47개나 되는 사찰이 있으니 사찰의 천국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기재에 따르면 오대산에는 동한 영평(永平)년간(58-75)에 벌써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그후 위,제,수,당,명,청 시기에 많은 절을 수건하여 지금의 사찰의 숲을 이루었다고 한다. 오대산의 사찰은 중국불교사에서도 유명하다. 당송이래로 일본, 조선, 인도네시아, 네팔 등등 나라의 승려들이 빈번히 오간곳이다. 현대에는 미국의 클린톤대통령도 왕림하여 오대산에 빛을 더해주었다. 

   오대산주위를 바라보니 수림이 울창하였다. 천여리길에 수림을 보지 못한 나는 너무도 신비하여 조형에게 물었다. 왜 절이 있는곳에는 수림이 무성합니까? 절이 서면 나무들이 따라와 자랄까요 아니면 주지들이 나무가 있는곳에다 절을 세웠을가요. 허허 글쎄요. 아마 풍수지리를 잘 보고 절을 세웠겠지요. 

   두루 이야기를 나누는데 차는 왼쪽에 보이는 새하얀 탑을 지나 잠간 내려가다가 서서히 멈추어섰다. 차에서 내려 돌아보니 둔덕우에 사찰 하나가 보였다. 룡천사(龙泉寺)였다. 룡천사의 뒷산은 구룡산이다. 절에 룡천이라는 샘이 있다고 하여 룡천사라 부른다 .운전수가 안내하는 대로 돌아보리라 작정한 우리는 룡천사로 올라갔다. 길좌우에는 잎이 떨어진 나무들이 길길이 서있고 숱한 난전들이 주인이 없이 줄느런히 서있었다. 려행계절에는 사람들이 붐비였겠으나 오늘은 우리 두사람밖에 없었다. 둔덕우에 올라서니 한족로파셋이 난전을 벌리여놓고 볕쪼임을 하고있었다. 들어서는 대문의 전각이 화사하였다. 푸른 자기기와를 얹은 2층대문인데 왼쪽에는 공동피안(共同彼岸) 오른쪽에는 회부룡안(会赴龙崋) 가운데 웃쪽에는 불광보조(佛光普照) 라는 글들이 네 개의 기둥사이의 하얀판에 푸른 글로 새겨져있고, 기둥의 중간에는 룡, 위쪽에는 사자비슷한 짐승이 새겨져있다. 세개의 출입문우에다는 숱한 꽃이며 보살들이 자질구레하게 가득 새겨져있는데 찬찬히 여겨보면 어찌도 섬세한지 살아있는것같아 찬탄이 절로 나간다. 룡마루에는 한쌍의 룡이 입을 벌리고 마주서있다. 처마밑에 총총하게 드러난 두겹의 서까래끝에도 살아있는 보살들이다. 2층의 가운데다는 련꽃모양의 도안속에다 숱한것들을 새겨놓았는데 선이 선명하고 도안이 깔끔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과 짐승과 룡과 구름이  꽃들이 만개한 동산에서 서로 어울려 자유로이 놀고있는 원융의 세계라  하겠다.

  룡천사에서 나온 우리가 차를 타고 오리쯤 내려오니 두골짜기 합수목이였다. 사위를 둘러보았다. 왼쪽으로 산기슭을 따라 사찰이 줄느런히 줄지어 있고 오른쪽 산둔덕을 오르며 사찰마을이 환히 바라보였다. 오른쪽동켠산허리에도 사찰 여려개가 울쭉불쭉 솟아있었다. 47개의 사찰에 그이름이 다 있으련만 어느것이 어느것인지 알수는 없었지만 오대산의 웅장하고 장려한 사찰들의 면모를 둘러볼수있어 정말 장관이였다. 우리는 왼손편에 있는 층층계를 걸어올라가 한사찰을 들어가 보았다. 특별한 특색이 없었다. 그앞에는 북경의 북해공원에 있는 백탑처럼 웅장한 백탑이 하늘을 찌르고 솟아있는 금정백탑사(金顶白塔寺)가 서있다. 오대산 사찰의 대표로 되어있는 금정백탑사는 한창 수건중에 있는지라 파란 베일에 싸여있었다. 그런대로 손님이 나들어 그리로 들어가보았다. 층층계를 밟고 잠간 올라가니 복도가 나지였다. 복도에는 구리로 만든것인지 둬뽐 키를 가진 구부레가 총총히 서있었다. 그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구부레를 돌리며 지나갔다. 구부레를 돌리면 하느님이 돌봐준다나. 나도 하나를 돌려보았다. 사람들의 손에 다슬어 반들반들해진 구부레는 다치기 바쁘게 뱅그르르 돌아갔다. 대웅전(大雄殿)에 들어서니 희한하게 큰 보살초상화가 모셔져있는데 석가모니가 아니였다. 문수(文殊)보살이란다. 문수보살은 오대산에 불심을 심은 보살로서 이 고장은 그의 도장이여서 석가모니를 모시지 않고 모두 문수보살을 모시고있단다. 기재에 의하면 2000여년전 한나라의 명제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문수보살을 오대산에 보내여 불교성지의 터전을 마련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대라진 동쪽의 산꼭대기에 있는 대리정에다는 동대천명문수, 서대사자문수, 남대지혜문수, 북대무구문수, 중대유동문수 등 다섯 개 문수상을 모시고 오대산의 다섯대를 대표하게 하였으니 오대산은 실제상 문수보살의 세상이다.

  여기에는 북위효문제(北魏孝文帝) 시기(471-499)에 세운 500라한을 모신 불국사가 있는가 하면 당나라 건중3년(782)에 수건한 당조불상 18존을 모신 남선사도 있다. 이밖에도 오대산에 있는 사찰들의 이름을 들어본다면 현통사, 탑원사, 보살정, 수상사, 라후사, 금각사, 벽산사, 진해사, 대라정, 관음동, 연경사 , 존승사, 광인사, 죽림사, 보화사, 비밀사, 남산사, 광산사 ...

   오대산의 사찰을 다 돌아보자면 적어도 열흘은 보아야 할것이라 말타고 꽃구경하듯 몇개를 돌아보았다. 새빨간 수박을 깨여놓고 몇쪼각을 먹어본 셈이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부랴부랴 태원으로 가는 소형버스에 올랐다. 주요 목적이 비단의 길이다보니 이만큼 수박맛을 보아도 족하였던것이다.  


12. 조형의  점경


   태원시에 도착하자마자 역전에 가서 하남성정주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래일저녁 7시발행 침대표였다. 연길에서 침대표를 끊자면 사흘전부터 납다쳐야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끊을수있으니 재수가 좋았다. 래일 하루 태원시를 구경할수 있어서 좋았다.

  저녁에 조형의 아들한테서 문자메시지가 또 왔다. 조형은 동양일보사 사장으로부터 지금은 회장이다. 33여년간 신문사업을 한 그이는 날마다 한국에서 오는 숱한 소식을 받는다. 소식을 받으면 전화로 지시도 내리고 이야기도 나눈다. 신강에 들어가서 통신이 안 되는 곳이 있을 때 단 가마의 개미처럼 맴돌이치며 몸둘바를 몰라했다.

   아버지 회사일이 잘 풀리네요。 몸 건강하세요 하는 아들의 메시지를 받은 조형의 얼굴에는 기쁨이 찰랑거린다. 그의 아들 조석준이는 애명이 조원형이다. 조형이 아들을 키운 방법은 특색이 있다. 그는 아들을 명문대학에 보내여 인재로 되게 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고 신체가 건강하고 지식이 연박한 쪽으로 택하였다. 체육권학교를 3등생으로 입학. 체육학교권을 다녀서 신체가 건장하단다. 석준이는 아버지 특별한 배양속에서 자라난 동양일보 기자인데 키는 178센치메터.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에 몰입한것이 아니라 아버지 가르침대로 날마다 영화 두편씩 보기를 하였단다. 3년동안 날마다 영화 두편씩 보았으니 그의 머릿속에 쌓인 여러가지 지식이 얼마랴. 조형은 이렇게 자기의 계승자를 영화로 탐탁하게 키워냈단다.

   조철호의 집안은 충북의 량반가문이였다. 우리가 잘 알고있는  조벽암과 조명희가 그의 조부들인데 그들은 조선반도의 문학사에서 한자리를 차지하는 문학가들이다. 특히 조명희 소설 <<락동강>>은 수십년동안 우리 고중교과서에 실리여 조명희라하면 연변사람들이 거이다 알고있는 유명인이다. 이 몇해사이에 연변에서 조명희포석회까지 활동하고 있어서 인기가 더 화려해지였다.

   아들놈은 참 든든하다고 말하는 조형의 얼굴에는 아들에 대한 믿음과 아들로 하여 생기는 자호감으로 이 세상에 부러운것이 없다는 기색이 완연하다. 청년시절에 고기소를 키워서 엄청난 돈을 번것으로 오늘의 동양일보를 경영하기까지 그의 일생은 분투의 일생이였으며 성공의 일생이였다. 세계각지를 다녀보지 않는 곳이 거이 없는 그는 33년만에 처음으로 맞는 휴가를 가장 뜻있게 쓰기위하여 택한것이 중국동서횡단 25000리(한국계산) 려행이였다. 어찌하여 이 길을 택하였는가를 그는 자기의기행문 프롤로그에다 이렇게 밝히고있다

   <<려행을 해본 사람은 알고있다. 려행을 하기로 결정한후 어디를 갈것인가로 고민하는 행복감이란 첫사랑과 흡사하다는것을.

   마음이 들뜨고 아름다운 환상에 빠져들게 하는 여행의 마력은 환갑나이를 소년기로 되돌리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동안 몇차례 다녀온 아프리카에 가서 수개월 누벼볼가, 쇄빙선을 타고 알래스카 깊숙히 들어가 볼가, 러시아에서부터 세계를 밝힌 대문호들의 고향을 찾아 문학지도를 그려볼가, 아니면 차라리 한국이 강이면 강, 산이면 산을 몽땅 섭렵해볼가...그런 어떤날, 베르나르 올리비에 (1938-.프랑스기자출신 작가)의 <나는 걷는다>를 읽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동양인인 나는 조금 창피했다. 그는 1999년부터 4년간을 걸어서만 이스탄불에서 서안까지의 실크로드를 려행하였는데 그가 이 려행기를 출판한 나이가 62세였다.>>

신문에다 사진기행도 련재하고 문자기행도 련재하고 책으로도 만들어 베스트셀레를 꿈꾸는 조철호 사장님.  


13.태원의 상징 쌍탑사


  이튿날 아침, 그러니까 11월 16일 아침이다. 우리는 태원의 상징이라고 일컫는 쌍탑사로 갔다. 쌍탑사(双塔寺)는 영조사(永祚寺) 속칭이다. 영조사내에 있는 쌍탑이 유명하여 영조사는 쌍탑사로 불리고 있다. 태원시에는 180만 사람들이 살고있는데 그누구와 물어보아도 쌍탑사라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곧장 쌍탑사로 갔다. 두 개의 탑이 나란히 하늘을 용용히 찌르고 서있다. 진짜 한쌍의 쌍둥이였다. 8각기둥으로 세운 두탑은 모두 13층이였다. 층마다에 문이 여덟 개씩 난것도 같았고 키도 53메터라는데  둘이다 똑 같았다.벽돌을 쌓아올린 탑이였는데 쌍둥이가 틀림없었다. 태원역동남쪽에 있는 이 쌍탑은 1573년부터 1619년사이에 세운 탑이다. 쌍탑의 내부가 어떠냐고 우리는 한 탑으로 들어갔다. 탑속에는 가파르게 생긴 목조 층층계가 있었다. 한사람이 겨우 올라갈만한 너비로 된 좁다란 층층계. 한층을 올라가면 널따란 공간이 나지는데 공간을 지나면 또 층계가 나지여서 빙빙 돌아올라가게끔 층계가 이루어졌다. 6층까지 올라가 밖을 내다보려고 창문쪽으로 허리를 굽히고 앉은 걸음을 걸었다. 천정은 둥그런 천정이다. 창문앞에 가 쪼크리고 서니 태원시내의 고층건물들이  눈앞에 환하다.

   쌍탑에서 나온 우리는 대웅전, 관음각, 객당, 선당을 에돌아 비림을 구경하였다. 이 절이 유명해진것은 쌍탑의 위용에도 있겠지만 명대의 문필가들의 글씨가 새겨진 비림이 있기때문이란다. 비림이라니 나는 시비처럼 만들어진것인가 하였는데 여기 비림이라는것은 벽에다 새까만 석재를 붙이고 그우에다 유명한 명시들을 새긴것이였다. 어떤 비는 색이 날고 글씨가 떨어져서 무슨 글자인지 알리지 않는것도 있어서 안타까왔다. 우리가 보는 제일 마지막에 새겨진 시는 소동파(북송시인소식)의 념뇨교.적벽회고(念奴娇. 赤壁怀故)였다.

 


동으로 동으로 흘러흐르는 도도한 장강이여

하늘치는 창파로

얼마나 많은 천고의 풍류들을 쓸어갔던고

..............

인생은 꿈과 같거니

술잔을 들어 강에 달을 마시노라

 


   소동파의 그 호방한 시구를 새김질하며 마지막으로 우리가 닿은 곳은 뜨락에 있는 목단꽃밭이였다. 잎이 다 떨어진 목단꽃나무밭에서 늙은이 몇이 꽃밭을 정리하고 있었다. 한메터남짓한 키를 가진 꽃중의 왕이라 불리우는 목단꽃 나무들은 암갈색이였다. 명나라때의 목단꽃나무가 어느것이냐고 조형이 물었다. 그런것에는 감감한 나는 조형은 아는것도 많구나 하고 흠칫 놀랐다. 저 패말을 꽂은곳이라고 알려주는 로인은 목단꽃씨를 파니까 사가란다. 명나라때에 심었다는 목단꽃은 다른 목단보다 키가 더 큰것은 아니지만 더 실하였다. 돌아나오다가 나는 다시 목단꽃밭으로 갔다. 7.8년전에 꽃기르기를 좋아하는 집사람이 180원이나 주고 숱한 목단꽃묘목을 사왔다가 한가지도 살리지 못하고 돈만 처넣은 생각이 났던것이다. 씨앗을 얻어다가 심어보자는 생각이였다. 로인들에게 나의 의사를 말하였다. 조금만 기다리라더니 땅에 떨어진것을 주어서 나에게 주었다. 콩알보다 조금 더 큰  새까만 목단씨앗 여덟알이였다. 난는 진주라도 가진것만 같았다. 올봄에 그것들을 화분통에다 심어놓았는데 아직 잎주두리도 보이지 않는다.

  태원에는 산서성의 고대문화유물을 년대별로 종류별로 진렬해 놓은 산서성박물관이 있어서 볼만한것들이 많았지만 우리의 시선을 잡아당긴 것은 시내의 광장이였다. 조형은 한 도시의 광장과 조각은 그 도시의 문명정도를 나타내는 주요한 척도라고 한다. 광장은 소통의 공간이요 동상은 기릴 가치가 있는 위인과 그를 기릴줄아는 사회적환경이 보이기때문이란다. 넓다란 과장의 넓은 길쪽에 조각상이 있는데  우선 크기부터 웅장하다. 웬만한 조각상들에 비하여 엄청나게 더 큰 이 조각상은 한쌍남녀의 상이였는데 남자는 피리를 불고 여자는 풍만한 몸집을 남자에게 기대고 먼 하늘을 바라보고있는 모습이다.

  조형은 이 조각을 보고 찬탄을 금치 못한다. 조각솜씨가 훌륭하다. 라상남녀의 조화와 그 포즈가 평화롭고 예술적으로 완벽한 작품이다. 주변에 꽃사슴상도 곁들여 시민공원의 분위기도 살렸다. 공원내 화단의 손질도 허술한 구석이 없다고 과찬한다. 지구촌을 그어디나 가보지 않은 곳이 없는 조형이 이렇게 과찬할 때는 태원의 꾸림새가 확실하게 괜찮으리라.

  피리를 부는 남자, 그에게 기대인 미인을 보노라니 피리의 미묘하고 아름다운 소리가 내 귀전을 맴도는것만 같다. 피리소리는 공후소리로 변한다. 피리나 공후가 다같은 고대의 악기여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무척 사랑하는 당나라 시인 리하의 <<리빙의 공후소리를 듣고>>라는 시가 나의 머리에 떠올라선지.

 


짙어가는 마가을날 은은한 공후소리

흘러가던 구름마저 산마루에 멎어서고

 상아가 흐느끼고 소녀도 슬퍼하니

장안에서 리빙이 공후 타는 소리로다.

곤산옥돌 부서지나, 봉황새가 우짖느냐?

부용꽃이 흐느끼냐 란초꽃이 웃느냐?

열두성문 장안성에 찬 얼음 녹아지고

스물석줄 가락소리 하늘도 탄복하네

녀와가 돌을 불려 기웠다는 하늘이

놀래여 터지면서 가을비 쏟아지냐?

꿈속에서 성부인의 공후솜씨 듣는거냐?

물고기와 교룡조차 물결차며 춤추누나

달나라 옥토끼 밤이슬에 젖건만은

계수나무 기대여서 오강도 잠못드네.


   공후소리같은 피리소리, 피리소리같은 리하의 시가 내 마음을 따스하게 휘젓는다.  


14.백만 무술도가 자라는 소림사


   다방도 없는 태원시, 한국영화를 좋아하고, 한국가수를 좋아하며, 한국에 가보고싶다고는 하나 한국사람을 처음으로 본다는 한국제려행사 아가씨 송씨양이 있는 태원시를 저녁차로 뒤에두고 하남성소재지 정주에 도착하였을 때는 아침 6시10분, 정주역앞에 있는 버스역은 굉장하였다. 렬차역정면은 물론 왼쪽면에까지 매표구가 수십개나 설치되여 표사기가 너무 편리한 버스부였다. 7시20분 소림사로 가는 버스표를 끊었다. 려행계절이 아니여서 그런지 소림사로 가는 손님은 무려 셋이였다. 차는 우리를 싣고 가다가 딴차에 앉쳐보내고 돌아갔다. 글쎄 손님셋을 싣고 간다는것은 너무도 수입지출이 맞지 않는 일이였을것이다. 정주시내를 벗어나자 산서성과는 완전히 판이한 경상이 나타났다. 산서성의 밭은 발가숭이였지만 하남성의 밭은 새파란 밀밭세계였다. 산서성의 밭에서는 옥수수대무지를 태우는 들불이 일어났지만 하남성의 구릉에서는 손바닥만한 제전에도 밀이 파랗게 자라고 이따금 잎이 푸른 오동나무숲까지 나져서  우리는 여름의 세계로 달리는것만 같아 기분이 좋았다.

   소림사(少林寺)는 등봉현(登封县) 소재지 서북쪽과 15키로메트 상거한 소실산북쪽의  오유봉아래에 있다. 소실산은 등봉현 경내에 있는 숭산(崇山)중의 한 산이다. 숭산에는 소실산과 태실산 쌍둥이 산이 있다. 소실산의 주봉 옥채봉은 해발 1405메트이고 태실산의 주봉 준극봉은 해발1440메트로서 두주봉의 키가 별반 차이가 없고, 두산에  각각 36개의 봉우리가 있어 사람들은 숭산 72봉이라 부른다. 숭산은 중국 오악중의 중산으로서 북으로 황하와 락하를 끼고 남으로는 영수와 기이한 산이 있고 동서길이가 600여리나 된다. 소림사 경내엔 동서 석비방인 비록, 산문, 미륵불, 위타보살, 비랑천왕전, 종루와 고루, 탐림 등 25개의 경관이 있다고 한다.

   등봉시내를 벗어나 먼저 들린곳이 영태사(永泰寺)이다. 태실산의 서쪽기슭에 탑을 두개나 안고 자리를 잡고있었다. 문어구에는 기념품을 파는녀인들이 여럿이 서있었다. 소림에는 니구절이 3개가 있다는데 영태사가 그중의 하나이다. 이 절의 원이름은 명련사(明练寺)였다. 당신룡2년(기원706년)에  효명제의 녀동생 영태공주가 입사한것을 기념하여 지은 절이다. 산문앞에는 당나라때의 팔각형경당 두채가 있었다. 절에는 비로전, 대웅전, 황고루 등 건물과 높이 20메트되는 당나라때의 탑과 명나라때의 탑이 있었다. 니구절인데 니구는 한명도 보이지 않고 탑도 보지 못하게 봉하고있어 별 흥취가 나지 않았다. 니구절이여서 여기에다 손님을 안내하는것  같았다. 듣자니 절에 니구는 셋밖에 없다고 한다. 밖에 나와서 기념으로 빨간줄에 달려있는 니구비닐제품 두개를 샀는데 그것이 이번 려행길에서 산 유일한 기념품이였다.

    소림사 경내에 들어서기 시작하자 분위기가 달랐다. 보이는것은 무술학교간판들이다. 층집마다에 무술학교간판들이 보란듯이 으시대고있었다. 무려 84개나 되는 무술학교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라니 그럴만도 하였다. 여기에서 탑구무술학교(塔沟武術学校)가 제일 크다는데 학생이 13000여명이다. 84개나 되는 무술학교의 학생수는 거이다 비슷하다니 무술학습생이 백여만이 집중된 곳이다. 백만무술대군, 얼마나 어마어마한가. 학교에서는 정상적으로 글도 가르치면서 무술을 익힌다고 한다. 중국에 소림사가 7개가 있다고 하는데 모두가 등봉시의 소림사처럼 학교를 경영한다면 이에 종사하는 모든 일군까지 합치면 천여만으로 헤아려야 할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가는 왼쪽 운동장두리에는 여러 가지 의포단장을 한 학생들이 가득 모여 북을 잡아두드리며 응원을 하고있었다. 운동장복판에서는 무술경연이 한창이였다.

   우리는 가이드를 따라서 중앙tv에서 와서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무술표현을 본다음 소림사무술관으로 들어갔다. 관광객들을 위하여 소림사의 후대들이 무술표현을 하는곳이였다. 1988년에 지은 이 무술관에서의 표현은 이미 6개나라의 사절들이 관람하였고 중앙수장들이 관람하였다는 자랑을 기록한 곳이다. 손님자리가 300석이 되는 원추형무술관은 천정에다 불교의 상징인 련꽃식장식을 하였고 선녀넷이 구름을 타고 놀고있었다.

    막이 열리니 불자들이 등장하는데 우뢰치는 채찍소리로 표연의 문을 여는것이였다. 모두 세막으로 된 표연이다. 칼도 쓰고, 몽치도 쓰고, 방패도 쓰고, 채찍도 쓰는데 차는가 하면 박고, 박는가 하면 돌고, 도는가 하면 날고, 나는가 하면 앉아 뛰기도 한다. 팔다리가 귀신처럼 돌아가고, 검에서는 번개가 번쩍이고, 몽둥이에서는 서리발이 번뜩인다. 북을 잔잔히 치면,  고요하던 물이다가 몸을 쓰면,  갑자기 사품치는 강이되고,  험한 파도를 일으키는 바다가 된다. 여럿이 등장하여도 동작이 일치하기가 이를데 없고, 기세가 사무칠 때는 하늘이 놀랄지경이요 동작이 부드러울 때는 선녀가 왔다가 울고 갈지경이다. 눈깜박할사이에 한시간이 홀딱 지나갔다.

   무술관에서 나와 문어구로부터 아름드리 측백나무들이 나란히 대렬을 지은 절로 들어갔다. 나무들이 쌍쌍이 뿌리를 엉키고 나란히 자라고 있었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두나무중의 한그루는 암컷이고 한그루는 수컷이란다. 그렇게 서있어야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린다고 한다. 손님들은 모두가 하하하 웃는다. 그 절이 바로 천하에 소문난 소림사였다.

    소림사는 북위 (北魏) 태화 (太和)19년(495)에 소실산 북쪽수림속에 세운 절의 이름이다. 1400여년전에 세운 이 절의 면적은 3만평방메트인데 527년에 인도의 중 보제달마가 와서 선종을 창립하여 선종의 조종이 된곳이다. 보제달마를 력사에서는 초조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후 7세기초에 이 절의 무승들이 당태종을 도와 당나라를 건립하는데 공로를 세워서 나라로부터 큰 상을 받았고, 천하제일명찰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그로부터 무승들의 무술이 천하의 승인을 받고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된다. 소림사에는 아름드리 측백나무와 소나무가 무성하여 태고연한 정글을 형성하였다. 절에는 산문 , 객당, 달마정, 백의전, 지장전과 천불전 등 고색이 창연한 건물들이 들어서있다. 천불전에는 화면이 300평방메트되는 대형벽화가 동쪽, 북쪽, 서쪽 세곳에 그려져있는데 인물표정이 생동하고 자세가 각이하였다. 땅바닥에는 깊이가 20센치메트되는 발자국이 넉줄로 나있다. 이는 소림사 무승들이 무예를 익힐 때 발을 굴러서 생긴 자국이란다. 백의전에는 13명 중이 당태종을 구원한 형상을 반영한 이야기가 벽화로 그려져있고, 청나라시기 소림사 권술수풀이가 련환화로 펼쳐져있었다. 달마정은 2조 혜하가 문밖에서 달마를 기다리며 눈이 무릎을 넘을 때까지 차렸자세로 서있는 곳이라고 하여 림설정이라고도 한다. 절서쪽에는 탑림이 있고 서북쪽에는 초조암, 달마면벽동, 서남쪽에는 2조암, 부근에는 당나라 백여탑, 동광탑, 5대시기의 벽화탑, 원나라의 연공탑들이 줄느런히 서있어 이채를 돋군다. 절에는 당태종 리세민이 소림사 주교에게 보낸 편지를 새긴 비석이며 소동파, 미비, 채경, 조맹부, 동기창, 일본중 소원의  석각 등 귀중품들이 300여개가  소림사의 력사를 자랑하며 서있다. 이곳에 있는 고양서원은 북송 4대서원중의 하나이며 주공 측영대(测影臺)와 원대의 시성대(视星臺)는 우리나라 천문사상의 빛나는 한페지를 기록한 곳이다. 유교의 집산지이도 한 소림사는 사원자체가 현존하는 한문화의 가장 오랜 걸작으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다.

   탑림으로 가는 기차같은 택시들이 렬을 지어 오고갔으나 우리는 택시를 타지 않고 구경을 하면서 탑림으로걸어갔다.

   한참 가서야 탑림이 문을 열고 우리를 마중하였다. 탑림은 말그대로 탑들이 수풀처럼 일어선 곳이였다. 길길이 자란 측백나무와 탑들이 어울린 탑림은 소림사영화 화면에 나오던 그대로 우아하고 신비로운 자세로 손님들의 눈길을 끌고있다. 우리나라의 최대의 묘탑군으로서 당초에는 500여개로 헤아리였는데 현존하는 탑중에서 완전한것이 200개가 불쑥울쑥 솟아있었다. 첫눈에 띄는 문앞에 서있는 탑은 9층으로 된것이지만 제일 안에 있는 탑은 단층으로 된 낮다분한것이였다. 둥근탑도 있고 사각형 탑고 있고 6각형탑도 있어 모양도 여러 가지였다. 이 탑림에서 제일오랜 것은 당나라때 건축한것인데 제일 안쪽에 있는 사각형 난쟁이 탑이였다. 제일 늦게 세운 탑은 소희(素喜)탑인데 대문안의 오른쪽 첫머리에 세워진 둥근탑이다. 2002년 8월에 수건한 이 탑의 주인공은 살아있는 보살 소희이다. 소희는 금년에 80세다.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공적을 기리여 세운것이다.

   탑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탑을 세우는데는 세가지 원칙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사리탑이고, 둘째는 고승들의 진품을 저장하는 탑이고, 셋째는 고승들의 덕을 기리는 묘지탑이다. 급방 세운 소희의 탑은 묘지가 아닌 살아있는 덕탑이다. 나는 소희의 덕탑을 저도 모르게 다시 우러러보면서 탑림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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