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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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나의 문학관과 창작의 길

연길-카스 2만리 기행.3
2008년 10월 22일 06시 09분  조회:1226  추천:43  작성자: 최룡관

 
15. 짠제(站街)의 봉변


   우리가 오후 세시사십분에 소림사를 떠나 정주에 갔다가 공의(功义)라는곳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운 6시40분이였다. 소림사에서 부랴부랴 여기에 온것은 두보를 보기 위함이였다. 소림사로 들어가던 도중 오른쪽켠에 세워놓은 두보묘(杜甫墓)라는 작은 패말을 조형이 보았던것이다. 이 패말을 보고 조형은 퍼그나 흥분되였다. 그는 나에게 두보묘를 보지 못하였는가고 세번이나 물어왔다. 나는 딱히 보지 못하여 애매한 대답을 하였다. 조형은 차안의 손님들과 여러번 문의하였으나 두보묘가 있는 확실한 지점을 아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소림사를 다 구경하고 나오는 길에 여러사람과 물어보다가 마침내 두보묘가 공의라는 곳에 있다는것을 확인하였다. 조형은 너무 좋아서 두보묘를 보는것은 이번려행의 금덩이요 금덩이 하고 얼굴에 환한 웃음을 떠올리였다. 그래서 지금 공의에서 내리였다.

   마침 풍천을 씌운 택시 한대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보묘가 있는곳을 압니까

    알다마다요 생가가 있는곳이 짠제입니다.

   여기서 멉니까

   10원이면 갈수있습니다.

   우리는 짐을 차에 싣고 올랐다.

   귀따가운 소리를 부릉거리며 택시가 어둠을 가르며 달리였다.

   짠제에 려관이나 호텔이 좋은곳이 있습니까

   좋고 나쁘고 호텔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리로 안내해주시오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 사이에 어느덧 차는 호텔문어구에 와서섰다. 낮이면 5원이면 족할 거리였다. 5원을 당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음에 새길일은 아니였다. 북경에서 당하던 일에 비하면 꽃이였다.

   우리를 2층으로 인도하는 호텔주인은 젊은 남자였다.

   더운 물이 나옵니까

   나오지 않구요

   방이 따뜻합니다.

   그럼요

   내가 꼬치꼬치 캐여 물었다. 온 하루 길에서 씨악질하였으니 더운 물에 몸을 씻고 따뜻한 곳에서 자야 피곤이 풀린다. 더구나 조형은 이런 생활에 물젖은 사람이여서 호텔에 더운 물이 없으면 안되고, 방이 따스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다.

   방안에 들어서니 방안이 썰렁하였다. 나는 짐을 풀어놓기 바쁘게 위생실에 들어가 온수가 나오는가고 보았다. 찬물이다. 그래서 복도에 나가 복무원을 불렀다. 복무원이 왔다.

   왜 더운물이 나오지 않습니까.

   잠간 기다리십시오.

   방이 너무 썰렁합니다.

   난로를 따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어슴프레한 거리에 나가 저녁을 먹고 호텔에 오니 9시반이 다되였는데도 온수도 난로도 오지 않았다. 대답은 시원시원하였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여러번 독촉하여서야 더운 물이고 뭐고 다 기계가 고장이 나서 안된다는 벼락이 떨어질줄이야.

   조형 어쩌겠습니까. 이런 일은 앞으로도 많이 당할수 있습니다. 한번 중국의 밑바닥 생활을 체험하는셈치고 인제는 잡시다. 하고 나는 조형을 위안하였다.

   털나서 처음이네 하고 조형은 기막혀 하였다. 하지만 무슨 방법이 더있으랴. 울며겨자먹기를 당하는 판인데야.

   이튿날 아침 눈을 떠보니 조형은 옷을 입은 채로 귀가리개가 붙은 모자를 쓴채로 앉아있었다.

   아니 벌써 일어났습니까.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누웠는데 추워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습니다.

   그랬습니까. 추울 때는 아예 옷을 벗고 자는게 더 좋은데요.

   그런가 허허허...

   조형은 허거프게 웃었다. 어제 온 하루 길에 지친 몸으로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조형을 나는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중국이란 이 넓은 땅에 발전한 곳도 있지만 짠제처럼 어수선한 곳이 어찌 한두곳뿐이랴. 아직도 머나먼 길을 가야 하는 우리앞에 어떤 애로가 누워있는지는 누구도 알길이 없다. 나는 이러한 생활에 조금은 적응된 사람이지만 당당한 성보의 사장인 그야 언제 이러한 어려움을 겪어보았으랴. 2만불시대를 치달아오르는 나라에서 와서  천불시대도 안되는 짠제와의 차이를 그가 감내한다는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닐것만은 불보기처럼 뻔한 일이다.

   려행이란게 사치인것이 아니라 전투입니다. 내가 말했다.

   허허, 맞소. 전투요. 조형도 고개를 끄덕이였다.

   아침을 먹자고 호텔문을 나서니 벌써 호텔뜨락에는 식전음식마당이 펼쳐져있었다. 만투, 타래떡,밀가루떡튀우기가 있는가하면 여러 가지 죽들이 있고 짠지가 있었다. 호텔에서는 손님들에게 무료로 아침을 주는지라 우리는 공짜로 아침을 치렀다. 찬 곳에서 자고 뜨끈뜨끈한 아침을 먹으니 속이 좀 풀리는것 같았다. 나는 별로 큰 느낌이 없었으나 조형은 처음으로 이런 아침장마당을 보는지라 자기의 려행기에다 그날의 아침을 감명깊게  적고있다.

   둘러보니 출근길의 사람부터 꼬마들까지 갈데없는 동네잔치 풍경이다. 학교를 가는 학생들이 책가방을 옆에 놓고 아침식사를 사먹는 모습이 이채롭다. 한쪽에서 빵을 굽고 한쪽에선 국을 끓이고 한쪽에선 고기를 튀기고...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해댄 주인 남자가 정문쪽에서 돈을 받고 거슬러주기에 분주하고, 그의 안해는 음식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고, 그의 딸은 국을 퍼주느라고 한눈 팔 시간도 없다. 숙박비를 계산하느라고 주인에게 다가서니 언제 거짓말을 했냐싶게 상냥한 표정이다. 온수가 나오지 않았으므로 약속대로 30위엔을 받으라고 돈을 건네자 금방 안색이 달라지더니 세상에 하루밤자고 30위엔이 무슨 말이냐며 언성을 높인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당신과의 약속이 아니냐며 이 쪽도 버티자 그는 호텔이 잠값을 받는 곳이지 물값을 받는 곳이냐며 고집을 피운다. 그러나 우리는 단호하게 30위엔과 식사비 6위엔을 주고 나왔다. 다른 려행객들에게도 그런 경우 없는 서비스를 하면 결국 당신이 받을 돈을 제대로 못 받게 된다는것을 깨우쳐주기 위한 우리의 숨은 뜻을 알기는 하는지.

16 . 서글퍼라 두보의 생가

 
   두보(杜甫)의 생가는 짠제의 한 변두리에 있었다. 택시를 타니 10분도 되지 않아서 큰길에서 차가 멈춰선다.

   저기 땅굴이 보이지요.

   녜?

   두보가 탄생한 곳입니다. 운전수는 지나가는 말처럼 아무런 감동도 없는 어조였다.

   두보(712-770)! 두보는 당나라 위대한 사실주의 시인이다. 리백은 당나라 위대한 랑만주의 시인이다. 두 시인은 당나라때의 쌍벽을 이루는 시성일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문학사에서 쌍벽을 이루는 시인이다. 그들은 다 당년의 잔혹한 봉건통치에 불만을 품고 나라와 인민을 사랑하는 많은 시들을 썼는데 오늘까지도 그들이 쓴 시는 사상성은 물론 예술상에서도 거울로 되고있다. 석호리와 매탄옹과 같은 두보의 시를 배운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두보의 자는 자미이고 시인 두심언의 손자이다. 40살에 겨우 과거에 급제하여 약간의 벼슬을 하였으나 강직한 탓으로 거기서 밀려나 한생을 섬서,사천, 호북, 하남 등지로 류랑생활을 하였으며 마지막에는 류랑의 길에서 사망하였다. 지금 중국내에 그의 묘가 8개나 된다고 하는데 이는 그의 류랑생활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의 가세는 아이들을 굶겨죽일 정도로 가난하였고 자신은 포로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전쟁이 빚어내는 병사들과 인민들의 참화를 진지하게 그려내였으며 착취계급들의 썩어빠진 생활과 그 죄악을 신라라하게 폭로비판하였다. 그는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위하여 힘차게 웨치였다.

   두보가 탄생한 동굴은 하남성 정주시 공의현 강점진 남요만촌 짠제툰 필가산(笔架山) 밑에 있었다. 필가산이란 맨 흙으로 된 산이였다.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두보생가인 동굴앞에 다가섰다. 두보생가라는 편액이 쓸쓸하게 붙어있었다. 높이 11메트, 너비 3메트되는 동굴이였다. 출입문은 봉해있었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니 일부 가장집물들이 보이였다. 집앞에는 두보비가 세워져있는데 1986년에 미국의 루이아이리(路易艾黎)라는 사람이 세운것이였다. 여기 사람들은 두보생가를 뚜푸꾸리(杜甫古里)라고 불렀다. 생가에서 조금 나오니  우물자리가 있었다. 지금은 콩크리트로 우물자리를 복원하였는데 들여다보니 깊숙한 곳에 물이 보이였다. 우물자리에 서서 다시 산을 바라보니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낮다분한 봉우리가 셋인 흙산밑에 생가가 있었는데 왼쪽이 빗물에 패워서 그냥 놓아두면 두보생가가 없어질 위험이 확연히 알리였다. 세계적명성을 갖고있는 위대한 시인 두보생가를 이렇게 둔다는것은 얼마나 큰 실수일가 하는 생각이 그냥 뇌리에서 돌아갔다.

   두보, 할아버지는 공현의 현령이였고, 아버지는 봉천현의 현령이였다. 그의 어머니는 최씨였는데 현숙한 녀인이였다. 지방관리의 집안에서 정월초하루날에 태여난 두보는 세살때에 글을 깨우쳤고, 일곱살에 처녀작을 썼는데 그 시제목은 <<봉황을 읊노라>>이다. 두보의 처녀작은 환상과 랑만이 풍부한 시이다. 시의 내용은 이러하다. 아이들과 함께 물가에서 노는데 멀리서 날아오는 봉황을 발견한다. 아리들이 달려가니 봉황은 사라지고 오색찬연한 봉황의 알이있다. 시적주인공은 아이들에게 봉황알을 빼앗길가봐 얼른 봉황알을 입에 넣어삽킨다. 집에 와서 토해 놓았는데 그 알이 모래로 변하여 하나하나의 글귀로 되어 시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때로부터 두보의 천재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두보는 24살 때 과거를 보았으나 조정의 승상으로 과거를 주관하던 리림보( 李林甫)가 두보네 일가와 척진사이라 락방을 면할수 없었다. 억울함을 해결할길이 없는 두보는 평생을 떠돌이로 살다시피하였다. 그는 일생에 3000편의 시를 썼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것이 2400편(1400편이라도함)이라고 한다.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두보는 양자강 (상강이라는 설도있음)수상생활을 하다가 병을 얻어 집도 아닌 배안에서 처참하게 돌아갔다.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1234년전이다. 고향의 망산령에 묻어달라는 그의 유언이 있었으나 지금 그의 무덤이 중국에 8개나 있으니 어느것이 진짜 두보무덤인지 누가 알랴.`

   지금 500만원을 들여 두보생가를 복원련다고 한다. 그 면적은 23무인데 여기에다 기념관까지 세울예산이라고 이곳 문화유물관리일군이 우리와 말하고있다. 늦기는 하지만 다행이여서 이 한산한 두보생가가 하루속히 보건되기를 속으로 비노라니 적막강촌에 있을 때 자기집을 찾아온 손님 최령을 반기던 두보의 시가 떠오른다.


내 집의 남북쪽엔 봄물이 흘러흘러

날마다 갈매기만 떼지어 날아들뿐.

손님이 없는 꽃밭길 쓸어본적 없건만

오늘은 그대 맞아 사립문 열었도다.

거리에서 먼곳이라 안주상 스산하고

구차한 살림이라 술마저 남은것뿐.

이웃집 늙은이와 맞잔 들려 하거들랑

울너머로 불러다 남은 술 마저 하소.


   그렇게 손님을 반기던 두보였으니 오늘까지 살아계셨다면 꼭 우리를 반기련만 그이는 여기에 없어 슬픔이 절로 난다. 그래서 나도 시 한수를 올린다.

 
천만리 먼곳에서 그대를 찾아왔건만

앙상한 나무우에 까치 한 마리도 없네

시성은 어디에 계시기에

비(碑)마저 외국인이 세웠는고

술 한잔 부어 그대의 명복을 비나니

인제 가면 언제 올지 알길이 없노라

그대생가 복원될 날 손꼽아보며

소조한 갈바람에 내 마음 띄우노라


   두보의 생가를 떠나 강점진(康店鎭)에 있다는 그이 릉원을 찾아떠났다. 진정부에 있는 문화국의 일군들은 연변일보가 소개한 나의 소개신을 보고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두보를 전문적으로 관활하는 40세쯤 돼보이는 남자가 두보의 릉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시성 두보의 문화유물은 정주시의 문화유물보호단위다. 1987년부터 보호사업을 시작하였고 1990년도에는 정부에서 100만원을 투자하여 릉원건설을 완성하였다. 이제 두보의 생가를 문화유적지답게 꾸리는 일이 남았다. 23무의 토지 매입이 끝나고 기념관 설계가 나왔다. 1기공정에 500만이 투입될 예산이란다.

   학교시절에 두보의 시를 읽었다는 조형도 흥분되였다. 그는 자기의 기행문에다 그때의 감정을 이렇게 피력한다. 그러면 그렇겠지.세상에 한시대를 뛰여넘어 동양시단의 큰 봉우리를 외면할수 있겠는가. 마음이 놓이면서도 그들이 검토중이라는 계획이 신중하고 막대한 예산을 들이는게 부러웠다.

  우리가 택시를 타고 두보릉원에 이르렀을 때는 릉원소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에서 그한테 손님이 가니 잘 안내하라고 전화를 쳤던것이다. 그의 안내로 우리는 릉원을 돌아보았다.

   정문안에 발길을 들여놓자 생가와는 완연히 다른 경상이 나타났다. 신작로만큼 넓은 사이를 두고 새파란 측백나무들이 나란히 서있는데 그 앞에 두보동상이 보이였다. 백옥을 다듬어세운 두보상은 해빛에 오색의 령롱한 빛을 발산하고있었다. 약간 굽은 자세로 서있는 두보시성의 전신상은 품격높은 위대한 시인의 분위기를 살려서 두보가 살아서 정원의 화초들을 살피고있는것만 같았다. 자애롭고 고결한 자태, 상냥하고 인자한 얼굴모습이 무던한 할아버지를 련상시키였다. 단아하고 고결한 백옥조각상 받침대엔 시성두보(诗圣杜甫)라는 네글자가 새겨져있었다. 시구처럼 깔끔한 네글자외에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시성이면 다지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생전에 불후의 고전으로 남을 시 3000수를 지은 두보가 여기에서 시를 읊으며 현대인들과 담소를 하고있었다. 나는 그가 매탄옹을 읊는같기도 하고 석호리를 읊는같기도 하고 봉황대를 읊는같기도 하여 자꾸만 첨앙하였다. 조형은 대단하오 정말 동상의 극치오 하면서 연신 찬탄을 금치 못하였다.

   중국 최고의 조각가로 소문난 류개집(刘开集)의 작품인 이 조각상의 높이는 7.7메트이고 두리에는 측백나무 월계화 파초수로 에워싸여 있었다. 상이 서있는 원형화단뒤에는 두보의 묘지가 있었다. 높이 11메트, 너비 15메트로 된 둥근 묘지에는 측백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었고 사람들이 자주 올라가서 오솔길이 나있었다. 조형은 제조상의 무덤을 찾아왔다가 묘지우에 난 오솔길을 보기라도 한것처럼 분해한다. 어떻게 묘지우에 길이나게 사람들이 다닐수있는가. 시성의 묘지를 어떻게 저렇게 짓밟을수 있는가. 그 마음은 나도 마찬가지다. 무덤이란 고인을 고이 모시는 후손이 마음이련만 저렇게 마구 밟아버렸으니 무례하기 그지 없다. 무덤옆에는 장남 종문(宗文)과 차남 종무(宗武)의 무덤도 있었다. 제일 왼쪽의 큰 봉분이 두보의 묘다. 두보의 묘소는 당초 평강현에 있던것을 그의 손자가 43년후인 813년에 고인의 유언과 집안의 뜻에 따라 여기로 옮겨왔다고 한다.

   한생을 떠돌이로 재냈던 두보의 묘지는 호북남양,  호남내양, 섬서경주, 섬서 화주, 호남평강, 하남언사, 하남공현, 사천성도 등 여덟곳에 있단다. 두보가 머물렀던 곳마다에서 시성을 기리여 묘지를 만들고 사당을 지었다는 말이겠다. 사천성의 도읍인 성도에는 두보 초당이 있는데 완화초당이라고도 부른다. 이 초당은 두보가 48세때에 안록산의 란을 피하여 성도에 와서 3년간을 살았는데 거기서 그가 240편의 시를 쓴것을 기리여 세워진것이란다. 이 사당엔 두보의 모습이 그려져있고 세계각지에서 간행한 두보의 시집과 관련책자들이 진렬되여있다고 한다.

   두보묘지의 왼쪽켠의 담장에는 력대의 시인들의 시비림이 있다. 제일 첫머리에 모택동의 시사 심원춘눈이 있어 경의롭다. 시비가 너무도 많아서 안쪽에다는 벽에 붙이지 못하고  장져놓은것들이 가득하다.

  두보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은 내내 흠모의 정으로 설레였다.


17. 려로에서의 이야기


   나와 조사장은 이 고장에서 저고장으로 갈 때면 여러가지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중에서 향기나는 이야기를 몇가지 적어본다.

  정주에서 소림사로 갈 때 이야기.

  최선생, 연길에도 애인들이 많지요.

  그런가 봅니다.

  우리 한국은 지금 사정이 달라졌어요. 과거에는 남자들이 좀 난삽하였지만 지금은 표준이 있어요.

  어떤 표준입니까.

  한국남자들이 여자를 하는 표준은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직장 녀자를 삼가합니다. 범도 굴앞의 짐승은 잡아먹지 않는다지 않습니까.

  하하하. 참 그 말에 도리가 있습니다. 토끼도 굴앞의 풀은 뜯어먹지 않는다고 합데다. 그런데 우리 연길은 다르다고 합데다. 굴앞의 풀을 내가 먹지 않으면 딴사람들이 먹는다던데요

  그래요.미국에서도 직장애를 못 다칩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70년대초까지 굴앞의 풀잡기를 하였습니다. 지금은 안 합니다.

  하하하 거참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요. 둘째로 우리 한국에서는 유부녀를 삼가하고있습니다.

  왜서요.

  유부녀와 내통하면 꼭 소문이 나게 마련입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눈치중에서 제일 눈치가 빨리 나는것이 그 관계란 말입니다. 그래서 자칫하면 말성이 대단합니다.

  세 번째표준은요

  셋째는 술집아이들을 안 다칩니다.

  성병이 들가봐그럽니까 여럿이 빠진  우물이라 더러워 그럽니까

  그것도 있겠지만 그애들의 뒤에는 건달들이 있습니다. 잘 못견드렸다간 큰 일이지요

  들을라니까 한국에서는 간부들이 남녀관계만 발생하면 목을 떼운다고 합데다. 정말입니까.

  그럼요. 발견만 되면 그 자리에서 별을 떼지요

   공의 역에서 버스를 타고 락양으로 들어가면서 조형은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문명인은 사람을 대할 때 친절해야 합니다. 표정이 밝고 온화해야 친절성이 있습니다. 이야기를 할 때에는 조용조용히 해야 합니다. 공중장소에 가서 큰소리로 떠들어대는건 실례입니다. 대방에 대해서는 언제나 배려를 해주는 쪽에 있어야 합니다.

   어떤것이 배려입니까.

   버스에서 남에게 발을 밟혔을 때 밟힌 놈이 미안하다고 인사를 하는겁니다. 남의 발을 놓을 자리에 자기가 발을 놓았으니까 말입니다. 남에게 그런 불편을 주었으니 사과를 하는겁니다.

 
   서안의 호텔에서는 미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친것은 명분이 없는 침략이고, 테로를 반대한다고 미국이 떠들고있지만 실상 미국은 세계에서 제일 큰 국가적테로 행각을 하고 있다는것에는 둘이 관점이 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조형은 내가 깜깜이던 이야기를 하여 나는 깜짝 놀랐다.

   지금 전 세계군사력을 다 합쳐도 미국군사력보다 약하다나. 설마 그럴수가 있는가하니까 어느 통계에서 발설한것인데 진짜라나. 그래서 미국이 세상에서 살판친단다. 사실 미국은 국제 헌병노릇을 하고있다. 미국은 세계에서 최강의 군사대국, 경제대국, 무역대국이여서 지금은 아무도 건드리기 어렵다는것이다. 미국은 한번 일본을 혼살먹였단다. 2차세계대전후 미국에서는 일본에 대대적으로 밀가루를 공급하여 밥을 먹던 일본을 밀가루먹는 일본으로 만들었단다. 지금 일본의 청년들은 물론 장년들까지도 밀가루가 없으면 못산단다. 일본에서는 날마다 외국으로부터 엄청난 량의 밀가루를 수입해 들인단다. 일본을 밀가루먹는 나라로 만든것은 미국의 전략이였단다. 한번은 일본에서 세계에 향하여 자기들이 미국과 겨룰수 있는 경제대국이라고 공포한 일이 있었단다. 미국이 이 소식을 듣고 쪽발이같은것들이 으시댄다고 일본으로 들어가는 밀가루를 공제했단다. 밀가루가 들어가지 못하자 바빠난것은 일본정부였단다. 그렇다고 백성들한테 알릴 일도 못되여 최고급관리들만 속이 바질바질 탔단다. 할수없이 일본 외무장관이 미국에 가서 손이야 발이야 잘못했다고 빌어서야 겨우 밀가루문제를 풀었단다. 일본이 아세아에서 큰 소리쳐도 목줄이 미국에 쥐여져있어 미국말이라면 고양이 앞에 쥐신세란다.

   미국은 지금 세계에서 패권을 쥐고 여러나라들을 쥐락펴락하고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이 올리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법이다. 국가도 그러하고 가정도 그러하고 개인도 그러하다.

   이제 미국이 물앉는 날도 있을것이니 그때에 가서 또 이 세상을 쥐락펴락할 나라는 어느 나라일가 그것은 예측할수 없는 일이지만 어쩐지 동양아세아의 어느 나라가 아닐가? 만일 그렇다면 세계에서 제일 큰 대국인 중국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난다. 물론 세계가 무중심으로 될수도 있겠지만.

18.유서깊은 락양


   18일 오후 한시기차로 락양에 떨어진 우리는 역전부근에 호텔을 잡기로 하였다. 짠제에서 하루밤을 혼난 조형은 호텔에 드는것이 절약이라고 연신 말한다. 우리는 하루에 120원 좌우를 하는 호텔에 들기로 하였다. 그만하면 설비가 괜찮으니까. 한 호텔에 가서 등기를 하고 들려니까 중국사람과 외국사람은 한방에 못든단다. 세상에 아직도 이런 법이 있는 대도시가 있다니 억이 막히였다. 역전앞은 호텔이 주르르 서있는지라 우리는 짐을 끌고 나와서 건너편으로 갔다. 마침 거기에 숙비 50포인트를 받는다는 프랑카트광고가 있었다. 왕성호텔이였다. 그리로 들어가니 워낙 300원씩하던것을 120원에 줄수있단다. 한사람은 외국사람인데 어쩌느냐고 했더니 괜찮다는것이 아니겠는가. 거리 하나를 사이두고 호텔마다 다른 정책을 실시하고있다는것이 우스워났다. 아무튼 우리의 요구와 맞으니 행장을 풀었다.

   호텔옆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간단히 먹었다. 천부수어(天府水鱼)라는 물고기국을 청해 먹었는데 얼벌하게 매운것이였다. 나는 먹기가 좋았는데 조형은 너무 맵다고 하면서 땀을 벌벌 흘리였다. 벌써 조형은 음식전투를 시작한 셈이다. 아직도 머나먼 길을 가야 하는데 음식이 맞지 않아 조형이 고생할 일을 생각하니 적이 불안했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락양시 고분박물관으로 가는 시내버스에 올랐다.락양은 우리나라에서 첫손에 꼽히는 유서깊은 력사의 성지이다. 북위 효문제 시기에 대동에 있던 도읍을 락양으로 옮기여왔다. 그때 조정에서는 개혁파와 보수파간의 투쟁이 격렬하였는데 효문제의 태자도 보수파였다. 효문제는 자신의 개혁을 완성하기 위하여 아들한테 독약을 먹이여 죽이였다. 그때 그의 아들은 15살이였다.

   중국에는 20년의 중국을 알려면 심천으로 가고, 200년을 알려면 상해로 가고, 500년을 알려면 북경으로 가고, 1000년을 알려면 개봉을로 가고, 3000년을 알려면 서안으로 가고, 5000년을 알려면 락양으로 가라는 말이 있다. 중국에서의 락양은 천하의 중심지나 다름이 없다. 이곳이 바로 중원이다.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 하나로 황하중류의 중원을  꼽는데 그 중심이 바로 락양이다.

   락양시의 한 십자로 복판에  탑이 우뚝 솟아있다. 락양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특이한 탑이다. 원통형의 탑꼭대기에는 다리가 네개인  정(鼎)이 고색창연한 빛을 발산하고 있으면서 락양이 옛날의 서울이였다는것을 세상에 알리고 있다. 원통형기둥으로는 9마리 룡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무늬가 새겨져있고, 그 높이가 30메트나 되여 웅장한 장관을 이루었다. 아홉 마리 룡, 그것은 락양에서 일어서고 무너진 서주,동한, 조위, 서진, 북위, 수, 당, 후량, 후당 등 9왕조의 도읍을 상징하는것이였다. 탑주위에는 조명시설이 갖추어져있어 밤에도 그 정취를 느낄수 있는 굉장한 탑이다.

   락양에는 일년에 1만여명이 나든다는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은 검은 기와를 옌 옛스러운 집인데 9개조대의 력사유물 진품들이 지하에 진렬되여 있다. 중국 최조의 마차가 있는가하면 2000년전  벽돌도 있고, 남녀가 같이 설 때 남자는 왼쪽이요 녀자는 오른쪽이라는 배렬이 있는가하면 옛날의 여러 가지 장례식이 있었는데  남자 한사람을 묻을 때 여자 셋을 함께 묻은것도 있고,  900년전에 밥을 먹는 장면 , 주방, 가무 등등 벽화들도 있다. 그 외에도 각개 조대의 도자기, 병장기,사치품, 벼라별  진품들이 그 수효를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 그러한것들은 모두 락양은 중국고대의 문명의 발원지라는것을 증언하고있었다.


19. 불교의 인자함을 가르쳐준 룡문석굴


    19일 아침일찍이 버스를 타고 락양시남쪽시교에 있는 룡문석굴(龙门石屈)로 갔다. 룡문석굴은 중국의 운강석굴 맥적산 석굴 돈황의 막고굴과 더불어 유명한 4대석굴에 속하는 곳이다.

   시내와 13키로메트 떨어져 있는 룡문산은 향산과 마주 서있고 산사이로 이수가 흐르고 있었다. 룡문산에도 석굴이 있고 향산에도 석굴있는데 관광객들이 강사이를 나들며 석굴구경을 한껏하기에 편리하라고 아래우에 큰 다리가 놓여져있었다. 강변의 버드나무는 실실이 가는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고 강에서는 물안개가 피여오른다. 룡문산의 석굴은 운강석굴과는 달랐다. 운강석굴은 마애석굴이지만 룡문석굴은 청바위를 뚫고 까내고 다듬어만든 석굴이였다. 이제 세월이 억년을 더 흐른다 하면 운강석굴은 지워질지 모르지만 룡문석굴은 끄덕하지 않고 그대로 남을 석굴이였다.

   룡문석굴은 북위 태화(北魏太和)18년(494년)에 착공하여 400여년동안이나 수건하였다. 석굴 1351개,  불탑 40여개, 조각 10만 3000여점이 있다. 이밖에도 또 석각과 제사가 3600여건이나 된다. 룡문석굴은 세상에 이름난 고대문화의 예술의 보물고로서 2000년에 유네스코에 의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되였다. 대표적인것은 북위시대의 고양동, 빈양동, 련화동과 당나라 시대의 잠계사, 만불동, 봉선사, 간경사 등이다. 석굴안의 비천이 자태가 아릿다와 사람들을 경탄케 한다.

   락양사람들은 이곳이 강물과 산세가 어우러져 빚는 경관을 룡문산빛이라고 이름을 지어놓고 락양8대경치의 으뜸으로 치고 있다. 그럴만도 하였다. 강북에 있는 룡문산의 석굴들은 모두가 남향작이여서 불상들은 아침부터 줄곧 저녁까지 해빛을 쪼이면서 따뜻이 지내고 있었다.

   아침이라 날씨가 쌀쌀하고 비방울까지 뿌리였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모여든다. 우리는 경탄을 금치 못하면서 북산기슭을 따라 구경하였다. 그런데 나보다 조형의 속도가 매우 늦었다. 그는 무었인가를 살피고있는것이였다. 무엇을 찾느냐고 물으니 여기에 백제인이 만든 불상이 있다는 보도가 작년 11월에 한국신문에 실렸단다. 여기의 불상들은 모두 번호가 있는데 백제인이 만든 불상이 877번이란다. 정말 희귀한 일이였다. 하지만 관람객들이 환히 볼수있게 새겨진 번호가 아니여서 찾기가 여간만 힘든것이 아니였다. 이 불상을 먼저 발견한 사람은 락양대 특임교수로 와있는 임성조교수란다. 당나라시대의 석굴에 백제인이 만든 불상이 있다는 발견은 금시초문으로서 한국의 유관부문과 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소식이였다 .조형이 한시간이나 허비하면서 살펴보더니만 환성을 질렀다. 여기 있소 하고.

 나도 달려가 보았다. 877번 불상 왼쪽좌불이 조각된 두 개의 감실아래에 부여씨(扶馀氏)라는 세글자가 새겨져있었다. 임교수는 부여씨라는것은  백제왕실의 성이므로 이 불상을 만든 사람은 백제멸망직후 당나라에 끌려온 백제인일것이라고 기사에다 밝히고있었다.

   룡문석굴에서 제일 큰 불상은 17.4메트이고 제일 작은 불상은 2센치메트란다. 봉선사에 이르러 제일 큰 불상 로사나불을 보는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고 경건한 마음으로 첨앙하였다. 여기로 오기까지 수천개의 불상을 보았건만 이 불상을 보는것처럼 마음이 설레인적은 없었다. 바위를 파내고 모시였는데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것만 같았다. 무엇이 착하고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인자하고 무엇이 참한것인가를 불상은 나와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 그래서 사람들은 불교를 믿었댔구나 하는 생각이 내 가슴에서 회오리치고있었다. 로사나불은 인간의 모든 악을 버리고 인간의 모든 아름다움을 집대성한 축도였다. 이제까지 춥던 감각이 가뭇없이 사라지고 나의 얼굴은 열이 오르는것처럼 뜨끈뜨끈해났다.

   당나라 함형3년(672년)에 수건하였다는 이 봉선사는 룡문석굴에서 규모가 제일 큰 로천감실이여서 굉장하기가 이를데 없었다. 당나라 조각예술의 대표작으로 인정 받는 이 감실은 남북으로 36메트이고 동서로 길이가 41메트나 된다.  감실에 있는 주불 로사나불의 높이가 17.4메트인데 머리길이가 4메트이고, 귀의 길이가 1.9메트이다. 얼굴이 넙죽하고 눈과 눈썹이 길죽하고 입귀가 약간 들리였는데 보는 사람마다 너무도 완벽한 예술품이여서 야! 야! 연신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량쪽의 제자들인 가엽은 엄숙하고, 아난은 온순하고 경건하였다. 보살은 단정하고 소심하고, 천왕은 두눈을 부릅 뜨고 위풍이 당당하였다. 전반 조각군이 조예가 깊고 배치가 잘 어울려있었다. 이 석굴을 완성하기 위하여 무측천이 은전 2만냥을 하사하였고, 준공의식에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왔단다. 사람들은 이 불상이 무측천을 닮았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지는 알길이 없다. 봉선사로 눈길이 자꾸만 가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를 보았지만 모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로사나불을 본다음부터는 다시는 내 마음을 사로잡는 불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 인자하고 선하고 착하고 아름답고 참한 형상이 머리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20. 관림(关林)의 슬픔


   룡문석굴에서 돌아오는 길에 관림에 들리였다. 관림이란 사람들이 관제묘라고 부르는 관우의 묘지이다. 삼국시기 촉나라 장수 관우의 수급이 묻혀있는 곳. 건안 25년(220년)에 오나라와 촉나라가 형주를 쟁탈할 때 관우는 오나라의 당양에서 여몽에게 잡히여 살해당하였다. 오나라는 관우의 수급을 락양에 보내여 그 죄를 조조에게 씌우려했다. 그런데 조조는 도리여 황후의 례의로 관우를 성남에 묻었다. 그후 명나라때에 와서 관우의 묘를 세우고 청조건륭시기에 확대건축하여 오늘의 규모에 이르렀다. 락양의 사람들은 관우를 공자와 함께 2대 성인으로 받들기도 하고, 관제묘는 하남성의 문화뉴물로 지정되여있고 락양의 하나의 고대석각예술관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관림의 앞에는 운동장만큼 큰 광장이 있었다. 광장가운데는 벽돌로 쌓은 커다란 정자가 있다. 광장에 들어서니 비자루같은 큰 물붓을 들고 글자를 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해서체도 쓰고 초서도 쓰면서 늙은이들이 시간을 보내고있었다.

   정문입구에는 철사자 한쌍이 앉아있는데 이 철사자는 무쇠 3000근으로 만들어진것이다. 입구의 량켠에는 돌기둥이 서있는데 104마리의 사자를 조각해 놓았다. 옛사람들은 사자를 관우의 상징으로 삼은것같았다.

   대문안에 들어서니 측백나무들이 푸르러있었다. 기상고고전(气壮高高殿)은 1593년에 건축한것인데 대우에는 인자한 모습의 관우가 패쪽을 들고 조용히 앉아있다. 광조일월전(光照日月殿)에는 관우가 가운데 위쪽에 앉아있고 오른쪽에는 주창, 왼쪽에는 관평이 앉아있었다. 관우는 류비가 준 옷을 입고있었다. 관우는 눈썹이 위로 치켜올라갔지만 눈빛이 부드럽고 자애로와 무서운 기운이 나는것이 아니라 인자하고 관용적인 상이였다.

   관우묘는 제일 뒤에 있었다. 1765년에 수건한 관우묘두리에는 수림이 무성하고  높이가 20메트인 8각형무덤이였다. 무덤앞에 세워진 문에는 이런 글이 씌여있었다. 문설주우에다는 충의신무령우인(忠义神武灵佑仁)용무현관승대제림(勇武显关呈大帝林)라는 글발이 두줄로 가로 새겨져있고, 왼쪽문설주에는 내리글로 수재천중음수룡(首在天中阴睡龙)이라  새겨져있고, 오른쪽문설주예는 내리글로 신유상원승선학(神维上苑乘仙鹤)라는 글발이 새겨져있었다. 관우를 룡으로 학으로 비기면서 의리가 있고 무예가 출중한 충신으로 보고있는 이곳 사람들의 마음이 알리였다. 관우가 쓰던 3메트나 되는 칼이 관림에 소장되여 있어 이채로왔다.

   관림을 돌아보고 두보의 생가가 떠올라서 나는 서운한 감이 없지 않았다. 두보와 관우를 비기면 두보는 중국의 시성이요 관우는 촉의 한 명장이다. 그런데 관우는 이렇게 큰 관림을 세우고 기리는데 두보의 생가는 아직도 꾸려지지 않고있다. 관우보다 못한 두보란 말인가. 내가 문인이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내 눈안에 두보는 밝은 혜성이고 관우는 두보에 비하면 개똥벌레의 불빛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영국에서는 쉐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그러기는 중국도 마찬가지일것이다. 중국도 두보와 인도를 바꾸자면 아니 바꿀것이다. 중국에서 세계에 내여놓고 자랑할만한 력사인물이  두보인가 아니면 관우인가 하고 물으면 중국사람은 물론 온 세상의 문명인들도 두보라고 할것이다. 그런데 혜성이 떨어져 반디불이 되고, 반디불이 하늘에 올라가 혜성이 되었음은 누구를 탓해야 하며 전도된 이 력사는 누가 바로잡아야 하는가.

   삼국연의소설에서 관우가 싸우던 장면들을 눈앞에 떠올리면서 관우묘를 나오는데 안녕하게요 한국에서 오셨죠라는 처녀애의 목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리였다. 안경을 낀 처녀애가 하늘에서 떨어진듯이 우리를 보고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있었다.

   장백현을 떠난후 처음 보는 조선족이라 서로 기쁘기 그지 없었다.

   뭘합니까

   초를 팔고 있습니다. 한대 사세요. 여기 오는 사람들은 모두 향불을 피우고 간답니다.

  우리는 그럴사이가 없거니와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녜 그래요

  이름이 뭐지

  윤숙이얘요

  몇 살이지

  스물일곱이얘요 말띠얘요

  어디서 왔지

  흑룡강에서 왔어요

  살아가기가 어때요

  괜찮아요

   초값이 얼마요

   30원입니다

   조형은 초를 사봤자 그에게 차례지는 돈이 얼마 안될거고 우리는 향불을 피울 사람도 아니니까 점심이나 사먹으라고 돈 10원을 윤숙이에게 주고 자리를 떴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그 애의 얼굴이 그냥 내머리에서 맴돌이쳤다. 나는 어쩐지 그 애가 가엽게만 생각되였다. 멀고먼 흑룡강에서 부모형제를 떠나 산 설고 물 선 타고장에 와서 돈을 벌겠다고 애쓰는 그 애 모습이 외국에 가있는 딸처럼 생각되였다. 나의 딸들도 외국에 가서 저렇게 일하겠지 하는 마음이 종시 내려가지 않았다. 윤숙아 제발 잘 되여라 하고 나는 속으로 빌고빌었다. 지금도 그 애가 다시 보고싶다. 올겨울을 무사히 보냈는지가 궁금하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더니 이런걸 두고 하는 말인가.


20. 쑈랑디(小浪底)의  변천


   조형은 황하를 보지 않으면 중국동서횡단을 하는 의미가 없어진다고 하면서 황하를 꼭 보아야 한다는것이였다. 그도 그럴것이 황하는 장강과 함께 중국의 상징이 아닌가. 황화가에는 80만년전의 류인원의 화석이 있고, 황하는 세계4대 문명발상지중 하나를 끼고 있으며, 황하는 중국력사의 왕조들의 도읍을 끼고있는 곳이 아닌가. 황하의 력사는 중국의 력사인것이다.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어느 사변이 황하와 관계가 없는것이 있었던가. <<흐르는 물도 피로 물들고 백골이 무더기로 쌓여있다네>> 안사이란을 겪은 리백이 <<부풍땅을 읊은 호걸>>에서 오죽하면 황하를 이렇게 읊었겠는가. 황하는 중국력사에서 피로 물든 강이였으며, 황하는 중국력사에서 전투의 붉은기도 날리였고 승리의 붉은기도 날이였던 강이다. 황하의 갈피갈피에는 중국의 력사가 적혀져 있어 중국을 알자면 황하를 읽어야 한다. 황하를 모르고서야 어찌 중국을 안다고 하겠는가. 우리가 가려는 길이 바로 이 황하를 읽는 길이 아니겠는가. 조형의 생각한 길은 백번 옳은 길이였다. 그래서 우리는 황하를 보러가기로 하였다. 락양에서 황하를 볼만한 곳은 여러곳이였다. 우리는 시간이 많지 않았으므로 황하삼협으러 가는가 아니면 쑈랑디로 가는가 하고 망설이다가 그래도 거리가 가까운 쑈랑디를 택하였다. 쑈랑디는 락양역에서 40키로메트 떨어진 곳에 있어서 다녀오기 편리한 곳이였다.

   버스에 앉아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자기가 쑈랑디에 있다면서 우리를 반갑게 대하는 50대의 사나이가 나타났다. 자기 딸이 차를 모는데 차로 쑈랑디 구경을 시키겠단다. 한시간쯤 달리던 버스는 산기슭에 난 포장도로를 따라 쑈랑디를 넘어서고있었다. 여기의 황하는 누런물이 아니라 새파란 물이였다. 황하는 세차게 흐르고있었는데 생각보다 물이 많지 않았다. 훈춘시 방천에서 보는 두만강쯤되는 같았다. 물가에서는 자연산 오리들이 두어곳에서 몇마리씩 놀고있었다. 쑈랑디라는것은 땜의 이름이였는데 황하를 가로 지르고 웅위롭게 뻗어나갔다. 땜의 길이가 1667메트, 꼭대기 너비가 15메트, 높이가 154메트, 밑의 두께가 846메트, 이 어마어마한 땜에 저수지 물이 130립방키로메트 깔려있다 . 여기에 든 토방량을 너비 1메트, 높이 1메트로 늘여놓으면 지구를 한바퀴 돈다고 50대가 자랑이다. 땜에는 황하안란복택인민하산영고(黄河安澜福泽人民河山永固)라는 강택민주석이 쓴 제사가 새겨져있고, 쑈랑디라는 땜이름이 굉장하게 새겨져있다. 50대의 말에 의하면 그 글자들 한자에 만원씩 들었고 글자의 노란색 염료는 미국에서 수입한것이라고 한다.

   오늘은 저렇게 황하를 다스리면서 인민들에게 복을 마련해 주고있지만 옛날의 황하가 인민들에게 들씌운 재난은 얼마였던가. 강을 건너가는 다리에 올라섰노라니 쏴아 울부짖는 황하의 물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오면서 리백이 읊은 <<배끄는 노래>>가 귀전에서 맴돈다.


운양땅에 끌려왔더니

량언덕엔 장사치만 득실거리네

숨이 막히도록 더운 오뉴월에

배끄는 고생 한이 없어라


감탕물처럼 물흐려 마실수 없고

항아리에 넣으면 가라앉는 흙이 절반

이럴 때 배끄는 노래 부르면

마음 아파 눈물이 비오듯한다네


만사람이 모여서 파내는 돌

무슨 수로 강가까지 옮겨놓으랴

보시라 망탕가에서 실어내는 돌

천고의 피눈물로 무늬가 되었다네


   배군들의 피눈물에 천고의 돌에도 무늬가 패여 어룽거리였단다. 그것은 어제의 황하의 축도가 아니랴. 강택민주석이 쓴 글발을 새겨안고 쑈랑디는 오후의 해빛에 찬연한 빛을 뿌리며 고즈너기 웅좌하고 있었다.

   강을 건너 마을에 이르니 정말 장사치들만 득실거리는 마을이 나지였다. 50대네도 길가에다 상점을 벌리고 식당을 차리고 영업을 하고있었다. 손님 비철이라 상점도 식당도 한산하였다. 우리는 50대딸이 모는 오토바이차에 앉아 오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관광계절이 아니여서 문지기도 없었다. 한둔덕에 올라가니 쑈랑디가 눈아래 바라보이였다. 당나라때의 시인 왕지환이 <<황하는 아득히 구름가서 흘러오고 만길높은 산마루엔 성곽 하나 외로와라>>하고 황하를 노래한적이 있는데 오늘의 황하는 하늘가서 흘러 여기에 와 바다가 되었고 외롭게 서있던 산정의 성곽에서 유람객들의 노래소리 웃음소리 넘치는 경상이였다. 파아란 물이 산골안을 따라 아득히 펼쳐져있고 산굽이 물굽이마다에 유람선들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얼마전에 유람선사고로 배들이 항구에 정박한 채로 뜨지 못한다고 50대의 딸은 이야기하였다. 실은 뜬다고 하여도 배를 탈 사람이 나와 조형 두사람밖에 없었다.

   내려와서 50대와 차비를 어쩌느냐 물었더니 딸과 상의 하란다. 올때에는 공짜로 태워줄것처럼 하던 50대였건만 제안속이 있어서 꽈다쳤던것이다차비 50원을 치렀다. 실은 또 좀 당한것 같았다. 연길이면 20원이면 족할것을 50원이나 물어야 했으니 말이다. 속이 아파도 별수 없는 일이였다. 그렇다고 하여 아웅다웅할수도 없는 일. 현하 중국은 낯모르는 곳에 가면 뜯기게 마련이고 당하게 마련인데야. 두눈이 새똥그래서 남의 돈을 긁어내려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는것이 아니겠는가. 연길에서 커피 두잔 먹었다고 생각하면 될 일을. 길을 나서면 이와같은 아큐정신이 있어야 하는 세월이다. 

   차가 오려니 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차가 오지 않았다. 오늘은 버스가 쉬는 날이라고 오지 않는다나. 옆에서 손님을 노리고 있는 택시들이 제 차를 타라고 수선을 떨고있다. 재수 없는 놈이 가루 팔러 장마당에 나가면 바람이 분다더니 오다나니 이런 날에 올줄이야. 한시간 족히 기다리는데 차 한대가 와서 무엇인가 수리하고있었다. 나는 달려가서 그 차를 타려고 하였다. 마침 두사람이 돈을 내고 도거리한 차였다. 함께 차비를 내기로 하고 그 차에 올랐다. 그 차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택시비 200원이나 팔번하였다.

   차에 앉아오면서 들을라니까 쑈랑디에도 조선족이 몇이 있단다. 어느 대학을 졸업하고 와서 공정사로 있다나. 이런곳에서 살아보지 못한 나는 그들이 이런 외진 곳에 와서 어떻게 살가고,  무슨 멋에 살가고, 어떤집에서 어떻게 살고있을가 하는 궁금증이 가슴속에서 자꾸 살아나 동행자들과 이것저것 물었다. 나는 그들을 꼭 알아야 할 리유는 없었지만 무턱대고 묻고 싶었고 알고싶었고 만나고싶었다. 그들을 만나만 보면 매우 반가워할거야 하는 생각만이 뱅글뱅글 돌았다. 그러면서 관림에 있는 윤숙이는 오늘도 무사한지 하는 부질없는 념려가 살아났다... 
                                                         

21  열두조대의 서울 서안

 
   19일 저녁에 락양에서 밤차를 타고 서안으로 떠난다. 서안 생각만 하여도 가슴 벅찬 곳이다. 서안은 중국의 력대의 조대가 서울을 정한 곳이다. 주, 진, 서한, 신망, 서진, 전조, 전진, 후진, 서위, 북주,  수, 당 12개 조대가 서울을 정했던 고장으로서 1100여년의 서울력사를 갖고있어 도읍력사가 가장 길고 가장 고로한 도시이다. 게다가 서안은 황소의 대제(大齐), 리자성의 대순(大顺) 두개의 농민정권 소재지였고, 신민주주의 혁명시기에는 중국현대사에서 유명한 서안사변이 발생한 곳이다. 서안을 주나라때에는 호경이라 부르고, 진나라때에는 함양이라 하였고, 한나라와 당나라때에는 장안이라 불렀다.

   중국을 와서 서안을 보지 못하면 중국을 보았다고 말할수 없을 정도로 서안은 유명한 력사의 도시이다. 도도한 위하가 서안을 지나 400여리를 흘러흘러 황하로 들어가는데  력사의 명성 서안은 강을 가운데다 끼고 앉아있다.  서안은 우리나라 6개 고도의 하나이며, 우리나라 서부교통의 요충지이며, 서북의 중요한 전략요지이다. 서안은 경하, 위하, 산하, 파하, 풍하, 호하 , 로하, 율하 등 여덟강에 얽혀있어서 팔수제왕도(八水帝王都)라는 명성을 가지고있다.

   서안을 진나라때에는 장안향이라 불렀고 한고제 7년(기원전 200년)부터 도읍이 된곳이다. 그때에 거리가 문살처럼 교차되여있고, 성시가 발달하여 서양의 로마성과 아름다움을 비기는 도시였다. 당조때에 서안을 대대적으로 확건하였는데 동서길이가 9550메트였고 남북길이가 8470메트였다. 서안에는 집들이 바둑판에 바둑알처럼 많았고, 열두거리가 정연하여 당조때의 장안성을 일본에서도 모방하여 도시를 건설하였다. 한무제때엔 저명한 사자 장건이 서역으로 나들었고, 당조때엔 일본류학생들이 13차나 서안으로 왔는데 많을 때엔 20여명이나 되었고, 제일 많을 때에는 200여명이나 되었다. 당천보(唐天宝)20년 (기원 753년)에 일본에서 온 류학생들이 공부를 마치고 돌아간다음부터 중국의 한자를 쓰기 시작하였다. 조형이라는 한어이름을 가진 일본사람은 당조에서 관리질하면서 50여년이나 장안에 있었는데 일본에 갔다오다가 바다에서 익사하였다. 그와 친교가 깊었던 당나라시인 리백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명월이 바다에 가라앉아 돌아오지 않으니 그 슬픔에 푸른 오동나무도 흰구름이 되였다고 하였다.

   렬차를 타고 서안에 와서 내리니 역전앞에 산줄기같은 장성이 눈앞을 가린다. 장성을 지나지 않으면 시내안으로 들어갈수 없게 되여있다. 우리는 옛날의 국경선을 넘어 시내로 들어갔다.

  서안에서  이제까지 전투를 한 피곤도 풀고, 비단의 길을 답사할 준비도 하고, 서안고도에 대한 고찰도 하면서 서안에서는 며칠 묵기로 하였다. 호텔에 든 조형의 첫 작업은 샤와이고 빨래이다. 어디에 가나 짬만 있으면 빨래를 하는 조형이다. 짬이 적으면 양말같은것을 빨고, 짬이 많으면 옷견지들을 빠는 조형이다. 나는 또 빨래부터 합니까 조형은 정말 빨래선수라니까 하고 우스개를 한다. 이렇게 우스개를 하지만 조형의 빨래습관은 따라 배울만한것이였다. 몸을 빨래하면 피곤이 풀리고 옷을 자주 빨아입으면 길을 가는 마음도 몸도 다 가벼워진다. 조형은 아무리 먼길을 오래 다녀와도 집으로 갈 때에는 절대 빨래꾸러미를 가지고 가지 않는단다. 깨끗한 몸, 신선한 마음으로 려행도 하고 집에도 돌아간다는 조형이다. 그때 빨래하는 감정을 조형은 자기 려행기에다 이렇게 쓰고 있다.

   ... 빨래를 하는데 왜 이렇게 행복감이 충만해지는가. 경험치 못한 이들은 모를 일이다. 온수로 샤워를 하고 세탁비누로 빨래를 한다는 당연한 일이 왜 이토록 새삼스럽게 고맙고 행복한가...

   조형이 빨래를 끝낸다음 나도 조형을 본받아 몸도 빨고 옷견지도  빨았다. 하지만 조형처럼 새삼스럽게 고맙고 행복한 감은 느끼지는 못하면서...

   이러저러한 한담을 하다가 조형은 또 들을만한 이야기를 하였다.

   려행하는 사람이 돈가방의 돈을 깨낼 때는 꼭 돈가방에 돈이 어느만큼 들어있다는것을 남에게 보이지 않게 손으로 가리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간 어느 도적놈이나 나쁜놈에게 발각되면 추궁을 당하거나 봉변을 당할수도 있습니다. 배낭에 물건을 많이 넣고 주머니는 가벼워야 합니다. 많은 돈을 한곳에 두지 말고 여러곳에 갈라넣어야 합니다. 그래야 돈을 도적 맞히거나 잃어버려도 나머지가 있게 되며 큰 돈을 잃어버리지 않게 됩니다. 려행이라는것을 처음 해보는 나는 또 한가지를 터득하였다. 빨래를 하는것도, 돈지갑이나 돈을 잘 간수하는것도 모두 성숙한 려행자의 소행이였다.

   700여만이 살고있는 서안 시내를 나서니 매연이 너무도 심하여 골칫거리였다. 락양에서도 매연 때문에 사진을 바로 찍지 못하였는데 서안은 그보다 더하였다. 디지텔칼라사진마저 찍을수 없어 조형은 매우 속을 태웠다. 사진은 기념물인데 사진을 제대로 찍지 못하게 되니 서안시내에 있는 많은 문화유적지와 유물들을 생각대로 렌즈에 담을수 없다는것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수 없었다. 어째서 매연이 이러냐고 물으니 나는 이런 대답을 하는수밖에 없었다. 서안의 인구가 700여만인데 한집식구를 평균 넷으로 친다면 서안시에는 150여만채의 집이 있는셈이다. 거기에다 수천으로 헤아리는 기관이 있다. 그것을 따뜻하게 덮혀주기 위하여 수십만개의 굴뚞에서 아침저녁으로 모두 연기를 뿜는다. 지금은 잠풍한 계절이여서 연기들이 모두 서안시내의 하늘에서 떠돌게 되는데 어떻게 개인 하늘이 보이겠는가. 서안은 연기구름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우리는 목이 매캐해서 마스크를 사서 끼고 다니는수밖에 없었다.

   조형은 서안사람들은 대단하오 이런 매연속에서 마스크도 끼지 않고 다니네 하고 연신 내뱉었다. 하긴 가스를 때는 한국사람으로서 매연의 맛을 보지 못하였겠으니 그럴만도 하였다. 중국의 대성시 사람들은 겨울이면 석탄내굴을 먹으며 사는데 습관된 사람들이 아닌가. 중국사람들의 심장은 철심장이여서 매연이 침범 못한다는것을 조형은 모르고있었다.


   서안에서 제일처음으로 가본곳은 서안시안의 남쪽에 있는 대안탑(大雁塔)이다. 대안탑은 고대서안의 독특한 풍경을 이룬 서안의 표징이였다. 하늘을 가르고 우뚝 솟아있는 대안탑은 멀리에서 보아도 웅위로운 고풍이 그대로 빛을 뿌리였다.

   대안탑은 대자은사(大慈恩寺)내에 있다. 대자은사는 수나라때 세운 무루사(无漏寺)였는데 당나라 당정관(唐贞观) 22년(648년)에 다시 확건하고 대자은사라 그 이름을 다시 지었다. 당시 대자은사에는 전(殿)과 각(阁)이 줄느런히 들어섰는데 집이 도합 1897채였다고 한다. 절에는 벽화가 여러점이 있었는데 모두 당년의 유명한 화가인 염립본(闫立本), 오도자(吴道子), 위자을승(尉迟乙僧) 등이 그린것이라고 한다. 사를 건립한지 얼마 안되여 당태종은 홍복사(弘福寺)에 있는 현장을 대자은사에 이사와서 절의사무를 관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특별히 역경원을 지어주고 국내의 연박한 고승들과 학자들을 불러들이여 현장이 인도에 가서 가져온 불교경전을 번역하는 일을 도와주게 하였다.

   현장의 원성은 진이였고 하남 사람이였다. 현장은 우리나라 력사상의 유명한 고승이였고, 중국불교의 법상종의 창시인이였다. 그는 불교성전인 경장 (经藏),률장(律藏),론장(论藏)에 통달한 고승이라 삼장법사라고 칭하였다. 그는 정관 3년(629년)에 인도에 가서 불교를 학습하고 정관 19년에 중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올 때에 불서 657부를 갖고 왔는데 선후로 홍복사, 자은사, 옥화사 등 절에서 74부의 불경을 번역하여 1335권을 만든 고승이였고, 대당서역기(大唐西域记)라는 책을 써내였다. 이 책에는 인도와 서역각지의 산천, 성읍, 인문, 물산 등이 밝혀져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서부변강과 중아세아 및 인도 등 나라에 대한 고대력사와 지리를 연구하는 중요한 문헌이다.

   대안탑은 현장이 인도에 가서 가져온 불경재료 657권을 보관하기 위하여 당고종영위 3년(652)에  인도의  건축형식을 모방하여 5층으로 세운 탑이였다. 무측천 장안년간(701-704)에 7층으로 다시 수건하기도 하였다. 대안탑의 평면은 정방형이다. 대안탑은 길이가 45메트이고 높이가 4메트인 기초대우에다 세워져있었다. 이 탑을 왜 대안탑이라고 이름 지었는가? <<천축기>>라는 책에는 인도에서 천석산에다 5층불탑을 세울 때 아래층을 기러기형태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를 본따서  대안탑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탑은 벽돌장을 엇물리게 쌓아서 비상히 견고하게 지은것이였다. 탑이 아래 두층에는 각각 9홉칸이고 3,4층은 7칸이고 제일 높은 층은 5칸이다. 탑내에는 층층계가 있다. 사람이 올라가려면 빙빙 돌아올라가게 하였고, 층마다 사면에 밖을 내다볼수 있는 동굴같은 문이 났다. 제일 아래층 사면에 난 돌문 문설주우에는 정교하게 새긴 불상이 새겨져있다. 그것은 당대의 화가 염립본이 몸소 그린것으로서 아미타불이 불교를 선전하는 도해이다. 탑남문 량켠에 지어놓은 감실에는 당조의 저명한 서법가 저수양 (褚邃良)이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圣教序)와 <<술삼장성교서기>>(述三藏圣教序记) 라고 쓴 두개의 비문이 서있다.

   당대말기의 전란으로 하여 지금은 대안탑만 우뚝 솟아있다. 오늘 보이는 사자리는 대개 명대이후의 규모이고, 절의 전당은 청대말년의 건축이란다. 당대시인 잠삼(岑參)은  해맑은 날 사각탑7층은 창공을 찌른다. 눈아래 새들의 날음이 보이고 귀기울이면 바람소리 들린다고 대안탑을 칭송하였다.

   서안시 남북밖의 우의서로 남측에는 대안탑과 대칭되는 소안탑(小雁塔)이 있다. 당중종경룡년간(707-709)에 지은 이 탑은 모두 15층이였는데 명성화 23년(1487년)에 이렁난 대지진으로 탑꼭대기가 무너지고 탑에 금이 실리여 지금의 열두층으로 되었다. 평면이 정방형으로 된 이 탑의 지금의 높이는 43.3메트이고 밑변의 길이는 11.38메트이다. 이 탑은 당나라의 고승 의정(义净)이 당고종함형 2년 (671년)에 지금의 광주를 거쳐 인도에 갔다가 가져온 불교경전 400부를 저장하였던 곳이다. 소안탑에는 1193년에 주조한 종이 달려있었다. 이른 아침마다 울리는 종소리는 몇리밖에서도 들리였다고 한다. 그래서 소안탑도 장안 8경의 하나에 속한단다.

   서안의 유구한 력사와 문화를 자랑하고 있는 대안탑과 소안탑은 오늘도 유람객들의 발길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며 웅위롭게 서있다. 그외에도 서안시에는 흥교사 현장탑이며 향적사 선도탑이며 남오대 승수사탑이며 ...여기저기에 탑들이 우뚝우뚝 솟아있어 서안의 경관을 이루고있다.


   종루를 걸어가는 길에서 나는 고구마 두 개를 샀다. 락양에서 고구마를 먹어봤으면 하던 조형의 말도 생각났지만 나도 고구마를 먹고싶었다. 황토고원의 고구마가 특별한 맛이 있겠다고 생각되여서가 아니라 조형은 한국 충북소재지인 청주에 있는 동양일보사 회장이고, 나도 연변일보사 기자이다가 지금은 작가협회 부주석이다 보니 조형은 한국에서 나는 연길에서 고구마같은것을 사서 질근질근 씹어먹으면서 거리를 흔들거리며 다니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길거리에서 구워서 파는 고구마란 연길에서는 아이들이나 아낙네들이 사먹는것인줄만 알고있는 나였다.

   서안에 오니 아는 사람 하나도 없다. 고구마를 먹든 넝마주이를 하든 체면을 깎일 일이 없고 부끄러울것이 없었다. 서안에 있는 우리는 아무런 신분도 없는 무깍지들이였다. 모든 체면과 모든 허위적인 껍질들을 죄다 벗어던지고 둘이 마주보며 서로 웃으며 따끈따끈하고 달달한 고구마를 먹어본다는것은 어쩐지 대단한 향수가 아니랴. 종루길은 흐린날 줄지어가는 개미들처럼 사람들이 붐비였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고구마를 맛있게 먹으며 한차례의 향연을 누리는 기분이였다. 종루의 가까이에 가서는 아예 지하도문어구에 있는 콩크리트대에 걸터앉아서 고구마를 맛있게 먹었다. 길손들은 어디서 저런 령감들이 나타나 애들처럼 고구마를 먹는가 하고 생각할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홀가분한 심정으로 달콤한 고구마를 껍질을 밝으며 맛있게 먹었다. 조형도 나도 처음으로 거리에서 구운 고구마를 먹다보니 정말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과 기분이였다. 나는 너무도 맛있어서 고구마 껍질까지 다 먹어버리였다.

   이 사회에 살면서 사람들은 세가지를 위하여 살게 되는 같다. 하나는 의식주, 둘째는 성, 세째는 명예. 마음대로 먹고 입을수 있는 생활, 남녀의 사랑과 정 , 어디 가서나 남보다 못하지 않는 신분으로 사람들은 살고싶어한다, 그러한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기가 일수이다. 하지만 이 세가지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차례지는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 세가지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은 한이 없어 자기에게 차례진것에 대하여 만족하는 사람이 아마 이 세상에 별로 없을것이다. 이 세가지에서 만족을 보기위하여 사람들은 아웅다웅 질투하고 다투고 있으며, 이 세가지를 얻기위하여 사람무리들은 전쟁까지도 거리낌없이 하면서 살인마저 서슴치 않고있다. 그런데 고무마를 먹는 이 시각 우리는 이 세가지에 대한 남다른 추구가 추호도 없다. 그것은 진정한  해탈의 시간이며 자유의 시간이였다. 고구마를 먹는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그자체가  향수이고 행복일줄을 누가 알았으랴. 우리의 해탈과 자유를 경축하는듯 어디선가 떵떵하고 종소리가 야무지게 울리였다.


   고구마를 다 먹고나니 개원상장(开元商场)이라는 커다란 간판을 단 둥근 층집이 우리 앞길을 막고있었다. 네거리 가운데 있는 상점빌딩이여서  차들이 빙빙 돌아서 제갈길을 가고있었다. 주위에는 종루술집이며 종루판점이며 종루시장이며 종루우전국이며... 빌딩들이 상점의 위세와 번영을 돋구면서 어깨를 겪고 서있었다. 그것들의 옹위를 받으면서  붉은 색칠을 한 상점은 둥글게 서있었다. 종루라는 간판들이 많이 붙었지만 거기에는 종루가 없었다. 겉모양이 둥글게 생긴것처럼 상점안으로 들어가는 길도 빙빙 돌면서 둥글게 들어가게 되어있었다. 상점은 대단히 컸는데 고양이 뿔외의 상품은 모두 있었다..

   종루는 서안성내의 동,서,남,북 거리 합수목에 있다. 홍명무 17년(1384년)에 건축한것이다. 원래는 서대가의 북광거리어구지에 건설했던것인데 명성종만력(明神宗万曆) 10년(1582년)에 순안어사(巡按御史) 공무현(龚懋贤)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고 한다. 종루가 준공될 때에는 공씨가 사천으로 벼슬하러 가서 현지에 없었으므로 멀리에서 종루가 (钟楼歌)라는 글귀를 써보내여 그 이름을 종루라고 달았단다. 종건륭 4년(1739년)에 종루는 다시 보수를 거치였는데 국민당시기에 엄중한 파괴를 입었다. 해방이 되어 1953과 1958년에 두차의 보건을 거쳐 또다시 광채로운 오늘의 종루로 되었다.

  종루는 면적이 1300여 평방메트이고 기초의 높이가 8.6메트이고 지면으로의 높이는 36메트이다. 정방형으로 된 종루는 안으로는 5칸이고 겉으로는 7칸이다. 루는 두층인데 처마가 3층이다. 처마의 네귀는 새가 나는것 같아서 건축술어로는 휘하식(翬下式)즉 다섯가지 색을 가진 꿩이 날아예는 식이다. 지붕은 푸른 류리기와요 벽에는 금빛그림이요 기둥에다도 그림을 새겨 집안은 금빛이 찬란하다. 지붕꼭대기는 금덩이를 얹어놓은것 같아서 해가 뜨면 황홀하다. 이 고대건물은 서안의 독특한 표징의 하나로서 기세가 우람하고 아름다워 늘 유람객들이 모여든다.

   종루와 마주서 있는 고루(鼓楼)는 서안의 서대가 북원문의 남단에 웅위롭게 서있었다. 고루는 서안의 유명한 명승고적의 하나이다. 지금으로부터 600여년의 력사를 갖고있는 고루는 면홍무(明洪武) 13년인 1380년에 지은 5층으로 된 고대건축이였다. 청강희(清康熙) 38년(1699년)과 건륭(乾隆) 5년(1740년) 두차례의 수건을 거친 고루는 명조때와 청조때에 저녁시간을 알리는 큰 북이 하나가 있었다하여 고루라는 이름을 붙이였다.

검은 벽돌을 쌓아지은 고루는 동서길이가 52메트이고, 남북의 너비가 37메트이고, 성대의 높이가 7메트이고, 면적이 1924평방메트이고, 지면으로부터 꼭대기까지 34메트이다. 성대에는 남북으로 통하는 아치형문이 나있어 북으로는 북원문에 이르고 남으로는 서대가에 이른다. 장방형으로 생긴 고루는 상하 두층이고 처마가 세층으로 되어있고, 정면은 보기에는 일곱칸인것 같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세칸이다. 사면으로 복도가 통하면서 아홉칸으로 갈라져있어 건축언어로 말하면 <<7칸9>>라고 한다 .록색의 푸른 류리기와 아래의 남쪽과 북쪽에 편액이 둘이 달려있다. 남쪽것은 고루가 준공된후 청고종건륭(清高宗乾隆)의 어필을 모사한 문무성지(文武盛地)라는 글이 새겨져있고, 북쪽에것은 상전계함년 리윤관(相传係咸宁李允宽)이 쓴 성문어천(声闻于天)이라는 글이 새겨져있었다. 이 두편액이 고루에 고로한 색깔을 짙게 하고있었다.

   서안에는 종루와 고루같은 고색이 창연한 건물이 많은데 종루와 고루가 대표적이라 하겠다.

 
22. 섬서의 풍경과 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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