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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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나의 문학관과 창작의 길

연길-카스 2만리 기행.4
2008년 10월 30일 09시 04분  조회:1208  추천:39  작성자: 최룡관
 

22. 섬서의 풍경과 도가


   11월 21일 아침일직이 진시황릉으로 가는 길은 가슴이 울렁거리는 길이였다. 오늘은 진시황릉과 병마용 및 청화지를 보게 되는 것이다.

   택시를 타고 가며 조형은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좋은것은 세계가 다 같고 나쁜것은 각기 다르다. 쓰레기통은 문명국일수록 바퀴가 달리여 가볍다. 비문명국일수록 쓰레기통이 견고하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택시운전수가 우리를 살갑게 대하며 섬서의 열가지 특점을 이야기 한다. 나는 필기장을 꺼내여들고 하나하나 이렇게 적었다.

   첫째는 집을 지을 때 지붕의 절반은 높이를 낮추어 빗물이 될수록  뜨락에 떨어지게 한다. 떨어진 빗물은 뜨락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다. (물이 귀하기땜에)

   둘째는 칼국수의 국수가닥은 허리띠처럼 넓고도 길게 한다. 보통 국수가닥의 너비가 2센치메트나 된다.

   셋째는 기름, 시금치, 고추만 있으면 훌륭한 료리가 된다.

   넷째는 처녀가 외지로 시집가지 않는다. 그것은 섬서보다 더 좋은 곳이 없기때문에.

   다섯째는 베개가 있어도 베지 않고 람전옥을 벤단다. 람전옥은 섬서의 람전에서 나는데 중국의 사대명옥의 하나란다. 신강화전옥, 섬서의 람옥, 동북의 수옥, 운남의 전옥이 중국의 4대옥이라는가.

   여섯째는 섬서사람은 앉아있기를 즐기여 의자가 있어도 앉지 않고 칼국수를 먹어도 문어구에 무릎을 꿇고 앉아먹는다.

   일곱째는 밥사발이 커서 밥상에다 다 놓지 못한다. 이것은 량식이 많다는 자랑이라는가.

  여덟째는 흰수건을 머리에 맨다. 이것은 산서, 섬서의 풍속.

  아홉째는 대화할 때 극을 노는것처럼 높은 소리를 친다.

  열 번째는 기름떡이 솥뚜껑만큼 크다.


   길에서 운전수가 위하기슭에 도가의 명성궁이 있다고 하여 피뜩 들렀다. 당조중기로부터 명성궁이 있었는데 1400여년의 력사가 깃든 곳이였다. 중국에는 도가가 유명했고 유가가 유명했다. 도가는 고대의 로자가 창시인이고 유가는 공자가 창시인이다.  로자의 성은 리씨이고 이름은 이(耳)이고 자는 담(聃)이고 춘추시대의 사상가이고 철학가이고 대학자이다. 공자의 성은 공(孔)씨이고 이름은 구(丘)이고 자는 중니(仲尼)이며 춘추시대의 사상가이며 정치가이며 교육가이다. 공자는 34살 때 로자를 방문하고 그의 학설에 감복하여 로자를 구름속의 룡 (运中支龙)이라고 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평등하므로 화목하게 지내야 한다는것이 도교의 사상이다. 도교는 사람과 모든 자연물은 평등하다고 하였으며 사람과  써캐도 평등하다고 주장했다. 세상사물은 모두 산생, 발전, 사멸의 길을 걷는다고 한것도 도가였다. 유교는 군군 신신 부부 자자(君君 臣臣 父父 子子)라는 공구의 사상을 따랐고, 인간이 세상을 다스리고 인간이 인간을 인(仁)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하였지만 도가는 세상사물과 인간은 서로 사랑하며 화목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명성궁을 돌아보며 도교의 계승자였던 장자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머니가 저 세상으로 가자 자연의 법칙을 따랐다고 장자는 통곡치며 울대신 뜨락에 나가 장단을 두드리며 축하하였단다.

    우리가 본것들은 모두 불교사찰이거나 석굴이였지 유가나 도가의것은 보지 못하였는지라 명성궁을 본다는것은 의미가 있는것이였다. 명성궁은 지금 한창 수건중에 있는 절이였다. 인민페 400여만원을 투자하여 수건하는데 큰 공정은 마무리 지은 셈이고 잔손질이 한창이였다.

   뜨락에는 준도귀덕비(遵道贵德碑)가 집벽만큼이나 커다랗게 세워져있고, 전내에는 기다란 명주필이 드리워져있는데 공봉도교 선조사영등(供奉道教 仙祖谢映登)이라는 글발이 씌여져있었다. 글발 좌우에는 작은 옥상이 있고 벽에는 자름자름한 칸이 수백개나 있었다. 칸마다 불이 켜져있었는데 그 불은 행객의 길을 밝혀주는 불이라고 한다.

   운강석굴이며 룡문석굴이며를 보고난뒤라 별로 볼것은 없었지만 조촐하게 차린 명성궁이였다. 명성궁을 돌아서 진시황릉으로 가면서 조형은 좀 우스웠던지 이런 말씀을 한다. 시장경제는 뜯어먹기 경제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뜯어먹으며 살고있습니다. 명성궁은 아직도 시공중이지만 한사람한테서 40원씩 뜯어먹고있습니다. 중국사람들은 돈벌이 골이 텄습니다. 조형의 말씀은 간단했지만 의미심장하였다. 북경에서, 짠제에서, 쑈랑디에서 우리는 피부로 뜯어먹는 경제시대의 아픔을 당하지 않았던가.


23. 진시황릉은 산이였다


   진시황, 중국의 초대황제. 진시황의 성은 영(嬴)씨, 이름은 정(政).기원전 243년에 조나라의 큰 상인 여불위(呂不暐)의 돈과 지략에 의하여 태여난 기생의 아들이며, 진나라 왕위에 오른 장양왕의 양아들이였다. 부왕이 즉위 3년만에 죽자 13세때인 기원전 246년에 영정왕이 되었다. 황제의 혈통도 아닌 사람이 황제로 된일은 중국력사에서 영정왕이 첫기록이였는지도 모른다.영정왕은 한(韩),위(魏),초(楚),연(燕),조(赵),제(齐)를 선후로 정복하고 천하를 통일한후 스스로 진시황이라고 봉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진시황은  중국력사의 찬란한 창조자였다. 그는 6국을 통일한후 처음으로 문자,도량형, 화페를 통일하고 전국을 군과 현으로 나누고 중앙집권제도를 실시하였고, 법령으로 세상을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진시황은 중국력사의 가장 잔혹한 황제이기도 하였다. 그는 도로망을 건설하면서 전국의 부호 12만호를 강제로 이주시켰고, 분서갱유를 단행하여 천고의 죄악을 빚어내였고, 만리장성쌓기, 아방궁건설, 여산수릉등 공사를 벌리고 백성들을 혹사시켰다. 그는 하루에 30키로그람의 문서에 결재를 하면서 다섯차례나 전국을 시찰하였는데 마지막시찰에서 얻은 병으로 50세(210년)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진시황릉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릉이 아니라 산이였다. 릉에는 수풀이 무성하고 릉의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있었다. 릉으로 오르내리게 층층계길이 가리마처럼 곧추 뻗어있었다. 꼭대기에 있는사람은 달걀만큼하게 보이였다. 움직이니 사람이라 하지 움직이지 않으면 누가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나와 조형은 서슴없이 릉꼭대기로 발걸음을 옮기였다. 길가에는 석류나무들이 가담가담 많이도 있었다. 석류는 다 떨어지고 이따금 몇알씩 달려있는것이 보이기도 하였다. 우거진것은 소나무였고 잡목들도 끼여있었다. 꼭대기에는 초가집뜨락만큼한 평지가 있었는데 장사군 몇이 난전을 벌리고있었다. 그리고 진시황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한 비문이 서있었다. 사위를 바라보니 서안시내가 멀리 운무속에 아른거리였다.

   진시황은 13세에 등극해서부터 자기의 묘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는데 죽을 때까지 36년이란 시간을 허비하였다. 이 공사에 동원시킨 민부만 하여도 무려 72만명이나 된다고 한다. 려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다고 려산원이라고도 부르는 이 릉은 운전수의 말에 의하면 크기가 옥문의 두배나 된다고 한다. 진시황릉의 비밀은 40여년간의 탐사를 거쳐 기본상 밝혀졌는데  도읍을 본따서 평지에다 흙을 4층으로 쌓아만들었다. 릉을 중심으로 내성과 외성이 있고 외성밖에 또 성이 있다. 릉의 앉음새는 서에서 동으로 향하였고, 남이 높고 북이 낮은 도성(都城)으로서 남북의 락차가 87메트다. 지하의 궁전과 내성사이에는 제사지내는 곳과 배장건축들이 많이 분포되여있다. 성내의 남반부에 궁성외의 침실이며 말과 수레의 의장대며 배장갱이며가 집중되여있고, 북반부의 서쪽구역에는 궁전의 부속건물이 분포되여있고, 동쪽구역에는 후궁인원들의 배장구역이다. 외성의 서쪽구역에는 지면과 지하시설이 가장 밀집된 곳이다. 마구간도 있고, 짐승우리도 있고, 관리들의 숙사유적지가 있다. 외성동남부에는 대형돌갑옷배장갱이 있다. 외성밖에는 병마용갱, 돌다듬장, 벽돌기와 굽는 굴, 려산의 홍수를 방지하는 제방 등등 건축물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기구들이 있다.

   내성이나 외성이나 모두 回자모양으로 되었다. 성벽의 총길이가 12000메트이고, 릉원점지면적이 56250평방메트이고, 성내면적이 2130평방메터이고, 병마용갱과의 거리는 1500메트다. 문헌에 따르면 원래 릉의 높이는 115메트였는데 지금은 81메트로 낮아지였단다. 외성에는 문이 다섯개인데 북에 문이 두개이고 내성에는 문이 세개인데 북문이 없다. 진시황이 누워있는 무덤은 동서가 길고 남북이 짜른 달걀형모양이다. 진시황릉의 흙은 무덤과 연못을 파면서 나온 흙과 려산의 흙을 합하여 쌓아올린것이라 한다.

사마천의 <<사기>>의 진시황본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3층이나 되는 샘을 뚫고 구리를 녹인 물을 부어 틈을 막은후 자신의 외관을 그곳에 두었다. 또한 궁관, 백관에게 명하여 진기한 보물들을 가져다 그곳에 가득 채워넣었다.  게다가 기술책임자에게 명하여 기관부가 달린 활을 만들게 하여 만약 어떤자가 도굴을 하려고 이곳에 들어오면 자동적으로 맞아죽게 했다. 또한 수은으로 백천강하 대하를 본떠서 만들고, 기관부를 리용하여 이들이 서로 보고 지킬수있도록 하였다. 분묘위는 해와 달 등 천문도안으로 장식하고, 그아래로는 산이나 강 등의  지리도형으로 배치했다. 이 내부를 밝히기위하여 도룡뇽의 기름으로 초불을 오래도록 꺼지지 않도록 하였다.>> 여기서 거대한 왕릉의 용의주도하고 세세한데까지 알힘을 들였다는것을 읽어내기 어렵지 않다.

   1987년에 유네스코에 의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진시황릉꼭대기를 밟아보고 기슭으로 내려오는데 북과 징을 두드리며 한떼의 고대복장을 차린 인마가 올라오고있었다. 검은 기발을 든 좌우에는  황색기발이다. 머리에다는 흰꽃을 꼽고 붉은 목수건을 두르고 누런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다. 50여명 병사들이 저마다 기다란 병기를 들고 반시간가량 장군의 지휘에 따라 북소리를 울리며 여러 가지 행렬도 지어보고 고함도 지르면서 당년의  훈련인지 뭔지 모를 표현을 하였다. 아마 황제근위군들의 행색을 재연하는것 같았다.


24.세계 8대기적 -병마용갱


   진시황릉을 돌아보고 병마용갱으로 향하는 길에서 조형은 진시황이 위대하긴 위대합니다. 죽어서도 후세들에게 돈을 벌어주니까요. 라고 우스개를 하여 조형도 나도 하하 웃음보를 터치였다. 사실 서안은 12조대 도읍으로 되어있던 도시라 전문적으로 송장이며 고대건축이며를 가지고  돈을 벌어먹는 도시이다. 그것도 투자가 적고 떼돈을 버는것이다. 중국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서안에 가서 중국고대를 읽어보려하고 있으며, 세계도 서안에 와서 진시황릉이며 병마용갱이며를 돌아보고싶어한다. 아마 서안에서는 관광수입을 굴지의 산업으로 치고있을것이다.

   병마용갱은 진시황릉에서 3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어구지에 큰 장마당이 있었는데 장마당에는 고물모사품으로부터 현대의 상품에 이르기까지 없는것이 없었다. 귤을 사먹어보았는데 귤맛이 달콤하기가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시장을 지나면 인공송림이 나지였다. 인공송림을 지나니 병마용갱이 넓다란 광장을 끼고 나타나는데 우람한 층집들이 광장둘레 에 어깨를 비비며 서있었다. 유네스코에 든 세계적인 유적지는 어디로 가나 문표가 120원인데 병마용갱은 99원이였다. 100원도 아닌 99원이라 조형의 말대로 하면  고것들이 참 애교있게 표값을 받고있었다. 국가에서는 15억을 투자하여 오늘의 병마용갱을 중심으로 전람관이며를 꾸려놓았다. 사시장철 관광객이 들어오는데 해마다 300만 이상이란다. 일년수입이 3억정도가 된다. 5년이면 15억투자를 메꿀수 있다니 이보다 좋은 돈벌이가 또 어디에 있으랴. 하물며 세월이 가면갈수록 관광객이 늘어나는데야.

   세계 제8의 기적이라 불리우는 병마용갱은 지난 1974년, 밭에다 우물을 파던 양지발이란 농민에 의하여 발견되였다. 왕이 죽으면 그를 섬기던 가신이나 근위병사 등을 함께 묻는 구덩이인 이 부장갱은 모두 3개의 갱으로 구분된다. 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당시의 관념으로 보아 국왕의 죽음과 함게 측근신하들이 따라 죽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국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진시황이 실제 인물이나 말의 모습을 똑같이 만들어 대신 묻도록 명을 내렸으며 , 자신이 묻힐 려산릉원옆인 이곳에 갱을 만들었을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무사들의 모습이나 출신지역이나 계급이나 소속이나 생김새가 모두 실제인물이였을것이라는데 의견을 모으고있다.

   지금 발굴된 병마용갱의 면적은 2만평방메트나 된다. 실내에 도용이 8000여건이고 전차가 수백승이고 병기가 수십만건에 달한다. 병마용갱은 진시황 생전에 전국을 통일한 호호탕탕한 군사장면을 우리 앞에 펼쳐보이고있다. 병마용갱은 우리나라 고대예술의 보물고로서 진나라때의 오체르크예술의 완미한 체현이다. 병마용갱의 발견은 20세기 제일 중요한 발견이며  세계에서 8번째 대기적의 탄생이였다.

  병마용갱의 3대갱은 품(品)자형으로 배렬되였는데 깊이는 5메트이다.

1호갱은 1975년부터 발굴되였는데 동서 길이는 230메트,남북너비는 62메트, 면적이 1만 4620평방메트이다. 갱에는 6400개 병마용이 있는데 보병을 중심으로 장방형진을 치고있는 모습이다. 무사와 전차들은 실전 정예군의 전쟁행군대형으로 선봉 3렬에 횡대본대 38렬이다. 청동검, 구리창 ,화살, 쇠뇌 등 실전무기가 완정하게 보존되여있다.

   2호갱은 6000평방메트로서 인마용 1000여점이 발굴되였는데 전차와 기병을 위주로 여러가지 병종이 련합으로 진을 친 모습이다. 3호갱은 통수부로서 1,2호갱의 지휘부이다. 통수들은 전차를 타고 73명 전사들이 무기를 잡고 호위하고있다. 출토된 도용들의 키는 모두 1.81-1.97메트로서 키골이 장대하고 몸구조 비례가 알맞고 형상이 생동하다. 천사람의 얼굴모습이 각각이여서 살아있는것 같이 진실하다. 근래에 2호갱에서 채색도용이 출토되였는데 그 색깔은 천연광물염료였다. 그중 자색은 규산동(硅酸铜)바리움이다. 이것은 20세기 80년대 초도체(超导体)연구에서 처음으로 합성생산한것이다. 2200년전의 병마용의 몸에서 이런 색깔이 나왔으니 누구도 그 비밀을 알길이 없다. 앞으로 2호갱에서 또 사람을 놀래우는 어떤 기적이 발견될지는 ...

   진시황릉과 병마용갱을 여러차례 관광한 조형은 자기의 기행문에다 이렇게 그 감회를 쓰고 있다. ...2000년전 진시황이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며 역사한 무모한 행위가 이제는 관광지로 둔갑하여 후대들의 돈주머니를 불려주고있으니 력사의 아이러니에 쓴 웃음이 난다. 중국정부는 이곳이 세계적인 관심의 초점이 되자 최근 이 일대에다 십년이상된 소나무를 수백그루 식재하는 등 조경사업부터 일체 정비사업을 서둘러 가볼적마다  그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25.화청지(华清池)- 황제들의 목욕하던 곳


    병마용에서 멀지 않는곳에 왕들의 놀이터 화청지라는 곳이 있다. 출입문안으로 들어가자 고색이 창연한 집들이 려산을 끼고 가득 들어앉아있었다. 이곳이 바로 온천물이 따스한 곳이기도 하지만 천고의 풍류가 성행한 황제들의 목욕하던 곳이다.

   화청지는 화청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3000년의 황가의 원림사와 6000년의 온천리용사로 중국은 물론 세상에 명승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라 지금도 사람들이 발자국이 무리로 찍히고있었다. 제일 먼저 화청지에 발을 들여놓은 왕은 주유(周幽)왕이였다. 그는 여기에다 려궁을 짓고 국사를 보며 비빈들과 환락을 누리면서 려산에다 봉화대를 만들고 일이있으면 봉화로써 제후들을 불러들이였다. 진나라는 려산탕을 짓고, 한나라는 리궁을 지었다. 청화지라는 이름은 당현종(唐玄宗)이 지은 이름이다. 당대에 와서 산기슭에다 선후로 당천궁, 온천궁 등 궁전을 짓고 궁전을 에워싼 성벽을 쌓고 그 이름을 화청지라고 하였다. 화청지가 유명해진것은 당현종과 양귀비가 여기서 전기적인 애정생활을 엮은 때부터일것이다. 양귀비의 원이름은 양옥환(杨玉环)이였는데 당현종의 열여덟번째 아들의 첩이였다. 그녀의 빼여난 이쁨과 뛰여난 가무에 홀딱 반하여 당현종은 아들의 첩을 빼앗아다가 자기의 첩으로 만들고 청화지에 데리고 와서 방탕한 일로를 걸었다. 기재에 의하면 기원 745-755년 10년사이에 당현종은 해마다 10월이면 여기에 와서 겨울을 나고 이듬해 3,4월에 장안으로 돌아갔다한다. 당현종은 화청지에 와서 겨울나이를 하면서 양귀비의 자매들을 데리고 와서 너무 도를 넘는 방탕을 누리면서 국사는 보네마네 하였다. 당현종의 방탕한 생활은 마침내 안사이란을 일으켰고, 그는 사천으로 피난가는 도중 마외파라는 곳에서 호위병들의 핍박을 못이겨 양귀비를 목을 달아 죽이는 비극을 연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후에 화청지의 흥성은 깨여지였지만 송,원,명,청 등 조대뿐만아니라 근대에 와서도 원래의 궁전은 보수하고 새로운 궁전도 지어서 오늘의 규모에 이르렀다. 현대에 와서는 국민당 애국장령인 장학량과 양호성이 장개석의 매국로선을 반대하여 서안사변을 일으켜서 유명해지기도 한다. 장개석은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팬티바람으로 창문을 뛰여넘어 려산에 가 숨었으나 포박을 면치 못하였다. 주은래가 이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제일차 국공합작을 실현하여 단결항일의 새국면을 개척하였던것이다.

   중국에는 2700여곳에 온천이 있다지만 청화지의 온천처럼 물이 따뜻하고 향기롭고 건강에 좋은 곳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주유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진시황, 한무제, 북주무제, 당고조, 당태종, 당현종, 당대종, 당헌종, 당숙종, 당경종, 후진고조,송인종,원세조,청승조강희,청인종가경, 청덕종광서, 청순제부 등 력대의 황제들이 여기 와서 몸을 씻고 국사도 보고 주색잡이도 하였다.

   당현종과 양귀비가 목욕하던 련화탕(莲花汤)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문으로 들어가면 목욕탕은 눈아래 본인다. 가로 6메트, 세로 10메트되는 련꽃모양의 욕조에는 량쪽에 화강암으로 된 층층계길이 나있다. 양귀비와 당현종이 어떻게 욕조에 들어가서 어떻게 목욕을 하였을가를 떠올는지 여기 온 사람들은 한참씩 서서 구경을 하며 떠들어댄다. 두 개의 층층계는 한쪽으로 들어오고 한쪽으로 나가는 걸거야. 아니야 량쪽으로 함께 들어와서 만났을거야. 아니야 양귀비가 당현종을 업고 들어왔을 거야. 별소리가 다 많다. 련화탕옆에 있는 자그마한 구룡호에는  살이 포동포동진 양귀비의 누드 미녀상이 백옥으로 세워져 있었다. 몸을 비틀고 서있는 모습이 요염하였다. 실제는 이보다 엄청 더 예뻤다고 한다. 당대의 대시인 백거이는 장한가에서 양귀비의 요염함을 이렇게 읊고 있다.

.........

부드러운 온천물에 고운 살결 씻고나니

시녀에게 부축되는 날씬한 그 몸매

황제의 사랑을 한몸에 끌었다네

검은 머리 고운 얼굴 한들한들 금목걸이

련꽃무늬 휘장속에 봄밤을 지새울제

봄밤이 너무 짧다 아쉬워 원망하며

조회 받는 시간조차 이때부터 늦어졌네

군왕이 즐기도록 잔치마다 모시였고

봄놀이도 따라하고 밤자리도 독차지

후궁에 아릿다운 3천궁녀 있었건만

3천궁녀 받을 사랑 제 한몸에 받았네

........

   당현종과 양귀비가 목욕하던 곳은 련화탕만이 아니라 해당탕, 성진탕, 상식탕, 태자탕 등 다섯곳이였다. 그것들이 지금 모두 원모양대로 보존되여 그날의 이야기를 하고있다.

   9룡호옆에 있는 궁전에는 여기를 다녀간 황제들의 사진이 줄느런히 걸려있고, 련화탕옆의 오간청에는 장개석이 사무를 보던 사무실이다. 9룡호 못가에 서있는 양귀비 옥상너머에는 온수가 쏟아지는제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고, 굽이굽이 돌아간 얕은 물에서는 금붕어들이 욱실거리였다.

   당현종과 양귀비의 애정생활은 당대의 많은 시인들의 필묵에 올랐다. 백거이는 장한가(长恨歌)라는 장시를 지어 그들의 부화타락을 비판하고 구들의 사랑의 비극을 애석해하기도 하였다. 두목은 <<화청궁을 지나며>>에서 <<말탄 사람 달려오니 귀비가 반기나니/려지를 가져온줄 그누가 알았으랴>> 하고 남방에 있는 과실-려지를 가져다먹는 양귀비의 사치를 질타하였다. 두보는 화청궁의 썩어빠진 생활을  <<주홍문에선 술고기 썩어나는데/ 길가에는 얼어죽은 백골이 뒹구누나 >> 하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13.3만평방메트되는 고로한 황가원림은 옛날에는 황제들의 극락세계였지만 오늘은 관광명승지로 탈바꿈하였다. 지금은 일반백성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유람을 올뿐만 아니라 국내외의 귀빈들이 다녀가기도 한다. 1990년 6월 12일에는 강택민주석이 다녀갔고 1995년 1월 21일에는 호금도 주석이 다녀갔고, 1988년 8월 28일에는 일본수상이 다녀갔고, 1985년 11월 13일에는 미국 국무경 기신거가 다녀갔고, 2001년 6월 8일에는 멕시코 총통 부커스(福克斯)가 다녀갔다.

    화청지를 떠나 호텔로 돌아오면서 당현종과 양귀비 생각이 그냥 머리에서 맴돌이쳤다. 양귀비야 당현종에게 붙어서 먹느라고 아양을 떨며 요염한 자태를 배배탈며 당현종을 삶았겠지만 당당한 황제인 당현종이야 왜 그런 비극의 길을 걸었을가하는 생각이다. 인간은 누구한테나 욕망이 있는것이다. 이 욕망은 한이 없는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한이 없는 욕망을 한이 있게 펴야 한다. 당현종에게는 세상에 부러울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한이 없는 욕망을 한이 있게 절제하지 못하였다. 많이 먹으면 배가 터지게 되고 주색에 너무 빠지면 사업을 그르치고 명예를 휘두르면 반항이 온다. 자기 처신과 신분에 맞게 입고, 먹고, 쓸줄 아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일것이다. 황제라 하여도 욕망을 억제하지 않으면 비극을 면치 못하는데  황제의 신하들이나 일반 관리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당현종은 언녕 우리에게 반면으로 훌륭한 거울을 제공하였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이런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는것은 삶을 깨끗하고 풍요롭게 살아가는 비결이 아닐가.


26.안마풍파


   저녁에 술한잔 마시고 침대에 누워서 잡담을 하는데 전화벨소리가 따르릉 울리였다. 안마를 청하는 아가씨의 전화였다. 호텔의 저녁에는 어디로 가나 오는 전화이다. 우리는 번마다 오는 전화요청을 밀막아 버리였다. 오늘은 서안구경도 하고 빨래할것도 없고 술한잔 마셨으니 피로를 잘 풀기 위하여 안마를 한번 받아보기로 하였다.

   전화를 놓기 바쁘게 안마사 아가씨 둘이 웃으며 들어왔다.

   진짜 안마를 할줄 압니까.

   알고 말고요 안마가 직업인데요

   진짜 안마를 못하면 내보내겠습니다.

   그러세요

   아가씨 둘이 안마를 하기 시작하였다. 나를 안마하는 아가씨 솜씨가 맹물이였다. 연길에 있는 나의 외조카가가 그전에는 안마사였다. 광주집단공사에서 연길에다 제일 처음으로 사우나를 꾸리고 안마사 3명을 배양하였는데 그중의 한 아이가 나의 외조카였다. 그에게서 안마를 받으면 진짜 피곤이 풀리였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안마사를 불렀고 진짜로 하는가고 다짐까지 받았는데 어깨를 안마하는것이 안마가 아니라 물떡물떡하게 주물기만 하였다.

   너 안마할줄 모르는구나.

   알아요.

   그렇게 주무르지만 말고 진짜로 해라.

  우린 이렇게 해요.

   그애들은 캐득거리며 좋아하였으나 나는 만족되지 않았다.

   조형, 어때요 그애는 안마할줄 압니까.

   그저 그렇소.

   조형도 시들한 소리다.

   너, 안되겠다. 안마할줄 모르는구나. 넌 나가고 딴애를 들여보내라.

  아가씨는 눈빛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할수 없었다. 주물기우자고 돈을 파는것이 아니라 안마를 받자고 하는 일이니깐.

   딴 안마아가씨가 들어와서 안마를 했다. 그런데 이 애도 망태기 안마사일줄이야. 나는  또 당했구나 하는 불쾌한 생각밖에 없었다.

   얘, 돈을 줄테니 너 그만해.

   예? 안마아가씨는 깜짝 놀라는것이였다.

   아직 멀었어요.

   됐다. 이런 안마는 안마가 아니야. 내가 잘라 말하였다.

    다른 서비스도 얼마든지 할수 있어요.

   우린 그런건 안 한다.

   안마를 한다는것이 몸이나 팔고 돈을 벌려는 애들임이 틀림없었다.

   그때다. 갑자기 문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또 누가 오니.

   아니 안 와요.

   그럼 누가 문을 두드리니.

   몰라요.

   이런 대화를 하는데 경찰이 불쑥 들어섰다.

   뭘하고 있는가 말씨부터 거칠다.

   당신들은 뭘하는 사람이요. 왜 남의 침실에 함부로 뛰여듭니까.

   난 경찰이요. 공무를 집행합니다.

   경찰은 경찰증을 내보이였다.

   나는 경찰증이 진짜인가고 받아보았다. 진짜는 진짜인것 같았다.

   내가 경찰과 맞서는 사이에 아가씨들은 뿔뿔이 밖으로 나갔다.

   신분증을 내놓으시오.

   나는 신분증을 주었다.

   저사람것도.

   조형, 려권을 보잡니다.

   조형이 려권을 내놓았다.

   나는 조형보기가 안스러웠다. 별일은 없겠지만 경찰이 걸고 들면 시끄러울것은 불 보기다.

    이때 뒤로 한사람이 들어왔다. 그 사람은 경찰을 불러내갔다. 이윽고 그사람이 신분증과 려권을 들고 들어와서

   손님들을 놀래워서 참 미안합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하면서 신분증과 려권을 돌려주는것이였다.

   안마는 호텔에서 경영하는것이 아닙니까 왜 경찰들이 지랄입니까 하고 나는 따지고 들었다.

   오해입니다. 미안합니다.하고 무마하는 사람은 자기가 호텔의 안전을 책임진 보안인원인데 잠간 나갔다오는 사이에 이런 일이 일어나서 연신 미안하다고 한다.

   나는 쓰거워서 더 말이 나가지 않는데다가 조형이 옆에서 말리는바람에 더 따지지 않았다.

   외부경찰이 우리가 안마를 하는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들은 서로 짜고 들어서 손님의 등이나 짜먹는 놈들이였음이 분명하였다. 미쳐도 한심하게 미친놈팽이들이였다. 남자 둘이 한방에서 함께 안마를 받으면서 어떻게 애들의 바지를 벗기며 놀리라는 생각을 한단말인가.

   이튿날 나는 카운터에 가서 거짓말로 분명하게 쏘아주었다. 당신들이 어제밤에 추태극을 노는바람에 한국인이 여기 투자하러 왔다가 기분이 상해 돌아간다고.


27.천수시 맥적산에서 발이 떨려


  감숙성의 천수시에서 차를 타고 60리가량 달려와서 차에서 내리니 우리가 찾아가는 맥적산(麦积山)이 한눈으로 들어온다. 기슭으로부터 산중턱을 훨씬 넘어까지는 깎아지른 벼랑이고 그위에 나무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산의 생김새가 밀낟가리가 틀림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로부터 산의 이름을 밀낟가리 같다고 하여 맥적산이라고 불렀단다.

  가을 가랑비가 내린다. 흐리터분한 날씨이다. 바람 한점 없다. 집을 떠나서 처음으로 맞는 비다. 하늘이 국수를 누르는것만 같다. 가는 국수국수오리를 무수히 드리우고 있다. 우리는 그 가는 국수오리들이 싫지 않아서 국수오리들 속을 천천히 걸어서 올라갔다. 먼산들은 몽몽한 안개속에서 보일듯말듯 헤염치며 몸을 씻고 있었고 가까운 곳 사람들은 가을의 가랑비를 그대로 맞고 있다. 한참 가는데 길이 두갈래로 갈라지였다. 왼쪽으로 난 오솔길로 가면 맥적산에 빨리 닿을것 같아서 그리로 발걸음을 잡았다. 산밑에 작은 집이 나타났다. 그곳이 표를 파는 곳이려니 했는데 아니다. 수림속에 아담한 집은 손님들이 짐을 보관하거나 화장실이있는 집이였고 안에는 휴식실도 딸려있었다. 그 집을 둘러싼 울바자를 빠져나가 조금 올라가니 맥적산 석굴입구가 나지였다.

   이곳 맥적산의 석굴은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4대석굴의 하나이다. 우리는 이미 운강석굴 룡강석굴을 보았고 오늘은 맥적산석굴을 본다. 이제 하나가 남았는데 돈황석굴이다. 맥적산석굴은 후진 때부터 석굴을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산에다 불상을 조각하고 절간을 세웠다. 위문제의 황후가 죽자 맥적산 벼랑에다 감실을 만들고 매장하였다. 북주 보정, 천화년간에 진주대도독 리윤신이 사망된 아버지를 위하여 칠불각을 수건한곳도 이 맥적산이였다.

   해발 2000메트되는 맥적산을 올려다 보니 산밑에서 20-30메트되는 곳에서부터 석굴을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70-80메트되는 높이까지 석굴이 층층이 덥히여 벌둥지를 방불케 한다. 어찌 벌둥지처럼 보이지 않으랴. 여기에는 북위, 서위, 북주, 수나라, 당나라, 오대,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 청나라 등 여러 조대의 크고 작은 동굴이 194개나 있고 돌조각상과 흙조각상이 7200여개나 있고 벽화 1300평방메트나 보존되여 있는 곳임에랴. 불상은 조각공예가 아주 정교하고 생동하고 큰 불상의 높이는 16메트이고 작은 불상은 10센치메트도 안 된다. 석굴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맥적산석굴은 돈황의 장경동석굴과 비슷한 석굴이라고 거론하고 있는데 축성년대로 보면 돈황의 막고굴보다는 20년가량 늦고 대동의 운강석굴이나 락양의 룡문석굴보다는 반세기 앞서 완성된것이다. 문헌에 의하면 맥적산 석굴이야말로 <<동방조각의 궁전>>이라고 할수있다고 기술돼있을만큼 그 가치를 높게 보는 이들도 있다.

   가파른 산의 오솔길을 톺아올라서 단김을 뽑으며 입구를 지나려하는데 문지기가 앞을 가로 막는다. 그때에야 나는 표를 떼지 않았다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어디서 표를 떼는가 물으니 저쪽이라고 가리킨다. 표값이 한사람당 60원이란다. 문지기가 가리키는 대로 바라보니 표떼는 곳이 너무 멀었다. 여기다 표값을 내고 들어가자니 아니 된단다. 표떼려 갔다올 일이 아득하다. 문지기가 한사람인지라  내가 돈 50원을 줄테니 우리 둘을 올라가게 해달라고 사정하였다. 처음에는 안 된다고 딱 잡아떼는것이였다. 그래서 어디서 표를 파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그때 한무리 손님들이 표를 보이며 다가서고있었다. 그는 손님들이 오는데 길을 비키고 좀 기다리라고 하였다. 나는 속으로 쾌자를 불렀다. 어느 고양이가 쥐고기를 싫어하고 어느 사람이 돈을 싫어하랴. 돈 50원은 여기서 큰 돈이다. 온 하루 표를 받았대야 그에게 공짜로 차례지는 이 50원돈보다 적을것은 뻔하였다. 조형이 왜 표사러 가지 않는가고 하였다. 나는 좀 기다리라고 하였다. 한무리 손님들이 다 들어간다음 나는  50원짜리 한장을 문지기손에다 쥐여주면서 문안을 넘어섰다. 조형도 나를 따라 넘어섰다.그래서 엉터리 입장을 한번 해보았다.

   맥적산석굴은 깎아지른 벼랑에다 수건한것이여서 올라가는것은 철란간을 잡고 층층계를 요리조리 에돌아 올라가게 되여있었다. 우리 앞에 나타나는 불상들은 운강석굴이나 룡문석굴의것과는 완전히 다른 불상들이였다. 선이 부드럽고 살이 보동보동한  불상들이였는데 불상들마자 생생하게 살아있는것만 같았다. 나는 어떻게 하면 대패로 나무를 밀어놓은것처럼 하였을가고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여러 가지 색깔을 올린곳도 색이 날지 않아 선연한 그대로 였다. 닫집들을 하나하나 지나면서 세심하게 뜯어보다가 여기의 불상들은 진흙으로 만든것이라는것을 발견하였다. 속에다는 갈대같은것을 넣고 그우에다 진흙을 발라놓은것이였다. 수천년간 비를 맞지 않아 말라 굳어진대로였다. 인물자태가 감동적이고, 선이 류창하고, 표정이 살아있는 같고, 색채도 중복되는 곳이 없고, 진흙으로 일매지고 부드럽게 만들어놓아 질감이 확연하게 안겨왔다. 16메트나 되는 제일 큰 불상앞에 섰다. 몸의 형태가 풍만하고 얼굴이 자애로운 수나라 작품이였다. 칠불각의 천정의 벽화는 희한하기 그지없는것이였다. 마차와 사람을 그린것으로서 조형이 독특하였다. 어느 각도로 보나 그림속의 말들이 가는 방향이 각각이여서 경의로왔다.

   최초의 맥적산불상들을 보면 복장에서 인도의 정조가 은은히 내비치고 만년에 만든 불상들에서는 중국과 외국의 풍격이 융합되여 새맛이 풍기였다. 전문가들의 감정에 따르면 제일 값진것들은 비굴(飛窟),우아당(牛儿堂), 마불당( 万佛堂), 천당동(天堂洞), 123굴, 84굴이란다. 최근에 와서 새롭게 장비동(藏碑洞)을 발견하였는데 123굴이다. 굴안에는 21개의 돌로 만든 조상비(艁像碑)가 있는데 18개가 완정한것이고 3개가 엄중한 손상을 입은것이였다. 이 18개의 조상비는 불교를 전달하는 이야기와 천불설법도 들이다. 부동한 시대 부동한 장인들이 만든 조상비였는데 많은것은 북위중기와 말기 그리고 서위시대의 풍격이다. 전문가들은 이 조상비들은 돈황의 장경동과 맞먹는 가치를 갖고있다고 평하고있다.

   한참 구경하다가 돌아서서 바라보니 산발들은 내가 서있는 석굴앞을 막으며 뉘연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수림이 울창하였다. 푸른 소나무가 많아서 산은 푸른 산이다. 그 푸른 수림에 안개덩어리 서너개가 여기 저기서 혼곤히 취한채로 잠을 자고있어서 하늘의 선경을 방불케 하였다. 소나무숲과 안개가 만든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있다가 아래를 내려다 보는 순간 아찔하였다. 아스라하게 깎아지른 벼랑에 나홀로 달려있는것만 같아서 두발다닥이 전기에라도 닿은듯이 찡찡 저려났다. 철판으로 만든 길이 한사람이 겨우 통하게 되여있는데 란간을 붙잡고 왜 이러나 떨어안져 하고 속으로 되뇌이며 앞으로 걸어나갔지만 발바닥은 그냥 찡찡하다. 평평한 곳으로 갈 때는 괜찮은데 한층계 또 한층계 내려갈 때면 더구나 찡찡거려서 나는 구경이고 뭐고 란간을 꼬옥 잡으며 먼저 내려오는수밖에 없었다. 내 심장과 내 담이 왜 이렇게 작아지는지는걸가? 올라올 때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게 뒤문치기를 하여서 하느님이 징벌하는것일가? 어처구니 없는 생각도 들었다. 불교란것은 사심없는 깨끗한 마음으로 림해야 도에 득달하는것이 아닌가. 불교라는 거울에 나를 비춰보면 때가 여러겹으로, 땅땅한 조개껍질처럼 나의 온 몸을 휩싸고있을것이다. 속세를 벗어나야 이런 조개껍질들이 없어지련만 나에게는 속세를 벗어날 용기가 아직은 없다. 속세는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돌아가면 될수록이면 모든것을 관용적으로 대해야 하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이 뇌리를 잠식하고있었다.


28.란주의 풍경


   란주(兰州)에서 하루밤을 잔 이튿날, 허동식시인이 우리가 든 호텔인 금관대주점으로 찾아왔다. 어제밤에 란주에 온 우리를 마중하고 저녁까지 한상을 잘 차려주었던 시인이다. 키꼴이 훤칠한 허동식시인을 마나기는 란주에 와서 만났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 우리의 가이드였다. 리임원시인의 소개로 허동식시인과 우리는 언녕부터 련계가 있던터였다. 우리가 대동의 운강석굴이며 산서의 오대산이며 정주의 소림사며 락양의 룡강석굴에 든 관광코스는 모두 허동식시인이 가리켜준것이였다. 그러니까 서안으로 가기전까지의 우리 려행의 막후지휘자가 허동식시인이였던것이다. 금관대주점은 4성급호텔인데 숙박비가 250원이 넘는다. 그런데 란주에서 한 려행사의 부문경리로 사업하고있는 그가 우리 요구대로 120원으로 들게 하였던것이다. 그는 화룡고중을 졸업하고 북경의 재무학원을 졸업하고 련인을 따라 란주로 간 사람이다. 나와는 한 고향인 셈이고 선후배 관계여서 우리 사이는 인차 무람없는 사이로 되여버리였다. 게다가 그도 시를 쓰고 나도 시를 쓰니까 서로 오가는 말이 우리사이의 장벽을 지워버리였다. 시원시원하고 활달한 젊은이였다.

   허동식시인은 란주에 가있지만 연변문단에 대한 관심이 대단한 사람이였다. 어쩌다 연변으로 오면 제일 먼저 들리는 곳이 서점이고 사는 책은 연변시인들이 출판한 시집이란다. 그에게는 연변시인들이 시집이 기본상 다 있단다.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았는데 연변시인, 아니 중국조선족시인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시에 대한 견해도 밝았다. 시를 보는 그와 나의 관점은 대동소이하여 우리둘 사이에 말이 잘 통하였다. 특히 그는 김정호시에 대하여 력점을 두고 그의 시가 기법이 새롭고 신선하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미 시집 한권을 출판한 그는 중국에다 한국시를 체계적으로 소개하기 위하여 많은 시를 번역하였고 지금도 번역하고있었다. 언제 기회가 되면 출판할 예정이란다. 리임원시인과 막역한 사이인 그는 리시인의 시집도 번역하여 놓고 출판기회를 기다리고있었다. 우리와는 다른 오지에 가 있으면서 우리 말과 언어를 살리겠다고 애쓰는 그의 마음에 나는 심심한 감동을 받지 않을수 없었다.

   어제 저녁에 술을 많이 마셨으니 란주에 와서는 칼국수로 해정을 해야 한다며 택시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우리가 택시에서 내린 곳은 작은 음식점들이 오롱조롱 두줄로 모여있는 작은 골목이였다. 그는 우리를 마자록우육면관으로 안내하였다. 여느 음식점들은 손님이 한사람도 없는데 이 우육면관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있었다. 벌써 상마다 사람들이 만원을 이루었다. 여기서는 손님이 매표구에서 표를 떼고 우육면은 손님절로 받아다먹게 되여있었다. 한 20명 줄을 섰는데 우육면을 받으려고 선 줄이였다. 우육면 한그릇 값은 3원이였다. 네댓씩 앉을만한 상들이 여람개 있는 작은 식당이지만 흥성흥성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이 식당은 이른 아침부터 온 하루 손님이 흥성거리는데 점심저녁에는 늦게 오기만 하면 반시간쯤 기다리는 손님들이 가득하단다.

   마자록우육면이 인기를 끄는데는 그 맛이 특별한데 있었다. 칼국수가 쫄깃쫄깃하면서도 부드럽고  소고기 국물인데 매콤한 맛이 겻들어서 시원하기도 하고 따끈하기도 하여 먹으면 기분이 나고 속이 편안하였다. 술을 많이 마신 사람은 해정이 잘 되고 입맛이 떨어진 사람은 입맛을 돋구어주기에 안성맞춤이였다. 그래서 300만이 살고있는 란주사람치고는 이 식당에 다녀가지 않은 사람이 없고, 한번 와서 먹어보고는 다시 찾아오는 사람이 헤아릴수 없이 많단다. 먹어보니 실로 란주의 명물로 되기에 손색이 없을것 같았다.

   이 식당주인 마자록은 80대 령감인데 지금도 꼭 주방에 나와서 일을 보고 계신단다. 100년의 력사를 갖고있는 이 식당음식은 마자보라는 조상이 만들어 퍼뜨린것인데 오늘까지도 란주시에서는 이 가보를 초월하는 사람이 없다는가. 마령감은 우육면 한그릇에 3원씩 팔아서 아들 6형제를 어려움 없이 공부를 시켜 외국에까지 내여보냈다니 얼마나 많이 팔았겠는가를 어찌 상상할수 있으랴. 의사가 병을 떼는 밀방이 있으면 떼돈을 번다는 말은 들었어도 조상이 물려준 한가지 음식으로 떼돈을 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였던 나는 세상이 넓다는것을 다시 한번 알게 되였다.

   마자록우육면관에서 황하는 멀지 않는 곳에 있었다. 여기의 황하는 누런 물이 아니라 푸른 물이였다. 백탑산으로 올라가려면 황하대교인 중산다리를 지나야 하였다. 이 다리는 황하에 제일 처음 놓인 다리다. 명나라 홍무년간(1368-1398)에 놓은 다리인데 백은 30만 6000냥을 들였다고 한다. 천여년의 력사를 지니고 있는 황하의 첫다리를 밟아본다는 의미가 있어 다리를 건너는 기분이 한결 상쾌하였다. 무한장강대교를 걸어 중간에 가 서니 약간씩 상하로 진동하는 감각을 느낄수 있었는데 란주황하대교는 무한 장강대교보다 짧아서 그런 감각은 없었다. 지금은 란주지역에 24개의 황하다리가 있어 황하다리 박물관을 이루고있다겠다.

   백탑산은 란주시의 황하북안에 우뚝 솟아있다. 산우에 백탑이 있다고 하여 그 이름을 백탑산이라고 부른다. 산아래에 금성관과 옥질관이 있는 백탑산은 예로부터 중요한 군사 요충지이였다. 산의 지세에 따라 건축군이 자리잡고 있는데 정대루각이 웅위롭다. 패방, 라한전, 백탑사, 삼궁전, 삼성전, 영욱객각 등 건물들이 백탑산의 기개를 돋구기도 한다. 산은 수림이 울창하고 경치가 수려하다. 동,서,북 세봉우리에 동풍정, 회우정, 목단정이 있어 이채롭다.

   백탑산봉우리에 올라가니 란주시가 한눈에 안겨온다. 해발 1500메트나 되는 고지대에 자리잡고있는 란주시는 황하를 끼고 동서로 35키로메트나 기다랗게 앉아있다. 너비가 제일 좁은 곳은 1키로메트다. 300만이 살고있다는 란주시는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벽돌과 세멘트로 지은 고층건물들이 즐비하다. 가까운 곳은 잘 보이지만 먼곳은 매연에 잠기여 보이지 않았다. 옥문유정이 개발되면서 일어선 도시였는데 옥문유정이 맥을 추지 못하게 되자 어제날의 산업도시로부터  지금은 고신기술도시로 탈바꿈하느라고 모지름을 쓰고있단다.

   백탑산우의 백탑은 말과 같이 새하얀 탑이다. 8각모양으로 둥근 탑인데  일곱층우에다 푸른 지붕을 얹어놓았다. 높이는 17메트다. 멀리서 보면 하얀 빛이 눈부시고 가까이서 보면 하늘을 찌르고 우뚝 솟아 만리창공을 받치고 선 기둥을 방불케 한다.

   백탑옆에는 이름도 신비한  조롱박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안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조롱박공예품들이 가득 진렬되여 있는데 조롱박에다 좁쌀알만큼한 글씨를 새겨 놓았는가하면 그림을 그려놓은것도 있다. 눈으로 보기에는 무슨 글을 써놓았는지 알수 없지만 확대경으로 들여다 보면 하나하나의 글자가 인쇄한것처럼 똑똑하다. 인간의 섬세한 기교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여러 가지 모양의 앙징스러운 벼루돌들도 조롱박박물관의 한 자리를 버젓이 차지하고있다. 란주의 도화석은  안휘성의 흡현석과 광동의 단계석과 함께 중국에서 유명한 3대벼루돌이란다.

   란주의 황하가에는 공원을 꾸려놓았다. 우리는 강변을 거닐면서 서유기를 형상한 조각도 보고 어머니와 아기 조각상도 보고 물레방아전람관도 돌아보았다. 아기가 어머니 배우로 기여올라가는 조각상은 란주의 상징의 하나라고 하고, 물방아전람관에는 엄청 큰 물레방아가 있었는데 중국에서 유명한 곳이란다. 황하에서는 시베리아에서 온 오리들이 두셋씩 노일고있었다. 백탑산, 황하 , 철교, 강변공원은 란주의 자연경관을 이루어 유람자들의 휴식의 한때를 보내기에는 족한 곳이였다.

   허동식시인이 갑자기 재미있는 이야기를 꺼내였다.

   골동품 세개가 있는데 유태인, 중국인, 한국인들에게 나누어주면 어떻게 장사를 하는지 압니까?

   그래 어떻게 한다오? 내가 물었다.

   유태인과 중국인은 하나씩 가진것을 높은 값으로 팔려고 하고 한국인은  한 열개쯤 모조품을 만들어 판답니다.

  왜서라오?

  유태인과 중국인은 진품의 가치를 받으려고 하고 한국인은 개수를 늘구어서 눅게 빨리 팔려한답니다.

   우리 모두가 하하하 웃었다. 은근히 큰것을 노리는 유태인과 중국인, 약빠른 한국인을 형상한 이야기랄가. 나는 조형에게 이야기가 맞는가고 물었다. 조형은 시무룩해서 확연한 대답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와 허동식시인은 또 큰 웃음을 토했다. 날씨가 맑아 하늘이 상쾌하고 웃음을 웃어서 마음도 상쾌한 하루였다.

   백화상점을 돌아보면서 동식시인은 또 엄청난 이야기를 하였다. 얼마전에 란주의 한 상점에서 텔레비죤을 저울에다 근을 떠서 팔았단다. 5000원씩하는 텔레비죤 한대를 저울에 달아파니까 1900원쯤 되더라는가. 그날 그 상점에는 텔레비죤 사러간 사람들로 부글부글 끓어번지였단다. 그 기이한 판매가  한때 란주의 충격적인 화제로 되여 사람마다  흥분하였다나.


29. 천하웅관 가욕관(嘉峪关)


    감숙성의 서남에 자리잡고 있는 가욕관호텔에서 밖에 나서니 맵짠 바람이 불었다. 갑자기 날씨가 령하 20도로 떨어지였던것이다. 손이 시려나고 얼굴이 시려났다. 길을 떠난후 처음으로 당하는 추운 날씨여서 몸이 오싹오싹해났다. 바람은 죽을 놈은 나오라고 소리치지만 우리는 호텔에 처박혀있을수가 없었다. 조형은 있는 옷들을 다 주어입었다. 옷이래야 두벌밖에 안되였던것이다. 나는 겨울추위를 그냥 겪으며 난 사람이니까 별문제로 생각되였지만 조형이 감기에라도 걸리면 어쩌랴싶어 은근히 근심스러웠다.

   가욕관은 우리나라 만리장성의 종점이 있는곳이다. 가욕관은 기련산 설봉과 마종산 여러 봉우리들 사이에 있는 도시로서 지세가 험난하고 건축이 웅위로와 예로부터 천하웅관이라고 불러왔으며 고대 비단의 길에서 반드시 지나야 하는 관액이였다. 가욕관은 명홍무 (明洪武)5년부터 명정덕 (明正德)년까지 건설한 옛도시이다. 시초에는 층집이라곤 없었던 고장이였다. 성을 쌓고 성루를 만들었다. 점지면적이 33500평방메트이고 둘래의 길이가 733메트, 성루높이가 10메트, 성벽높이가 1.7메트인 성을 쌓았었다. 동서로 문을 내였는데 동문은 광화문이라 불렀고, 서문은 유원문이라 불렀다. 문마다에 성루가 있었는데 그 높이가 17메트. 삼층으로 처마를 내였는데 처마들은 정교하고 령롱하였다. 관성의 네 귀에다 누각을 건설하고 남북량면성에다도 적을 대체하는 성루를 앉히였다. 성루에 올라서서 바라보니 가욕관 시내에 널따란 길이 가로세로 시원하게 뻗어있었다. 멀리 바라보면 고비사막에 쌓아놓은 장성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모습이 아련하다. 서쪽에는 옥문유정의 시추기들이 수풀처럼 바라보이고 북산기슭에서는 등호의 푸른 물결이 아른거린다. 성남쪽의 기련산의 면면한 봉우리들이 새하얀 눈속에 잠겨있는데 은뱀들이 구불거리는것만 같아 그림처럼 아름답다. 서쪽문으로 나와 돌아서서 보면 가욕관이라는 세 글자가 성을 덮었는데 이 문이 바로 옛가욕관의 정문으로서 고대사람들이 드나드는 문이였다. 동쪽성밖에는 문창각, 관제묘, 교예루들이 있는데 모두 청나라때에 건축한 건물들이다.

  서쪽문안에는 가욕관장성박물관이 있다. 1989년에 건축한 이 박물관은 장성형식으로 건축되였고, 력대의 장성건축사를 펼쳐보이고 있다. 박물관의 점지면적은 1.1헥타르이고 건축면적은 2813평방메트다. 박물관안은 주요한 진렬청과 보조진렬청 다섯개가 있다. 박물관출입구에 가서 박물관을 보면 웅위롭고 호한한 감이 든다.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길거리에는 락타조각상들이 줄을 지어서서 서북의 풍경을 이루고있다.

  우리는 택시를 잡아타고 장성이 끝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아득한 고비사막의 한곳에 노란 자갈과 흙으로 다져진 장성 마지막 토막이 우뚝 솟아있었는데 사람들은 이 토막을 장성제일돈(长成第1墩)이라고 부르고 있다. 장성제1돈의 남쪽은 사오십메트깊이로 패여있었는데 시내물이 졸졸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장성토막은 명나라때 쌓은것인데 수백년 세월이 지나갔건만 고비사막에서 력사를 견증하고 있었다.

 장성제일돈에서 시내로 들어온 우리는 시장에 나가서 양가죽털수갑을 사고 계도실로 뜬, 눈만 내놓을수 있는 모자를 샀다. 수갑이 연길에서는 몇십원을 줘야 살것이였지만 거기서는 한컬레에 14원 헐값이였다.

   오후에 버스를 타고 돈황으로 떠났다. 머리에 털이 나서 처음으로 보는 고비사막은 광활하고 무한하다는 말이 고비사막에서 나왔겠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득히 먼곳에서 기련산맥의 산들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지는데 기본상 산이라는것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감각을 잃어버릴 때가 많았다. 때론 새까만 색갈의 고비사막이 나타나기도 하고 때론 누런 색갈의 고비사막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띠염띠염 있는 풀들은 모두 고슴도치 같기도 하고 물우에 뜬 부표같기도 하였다. 가도가도 아득한 고비사막, 가도가도 인적이라곤 없는 황량한 고비사막...


30.꿈에도 그리던 돈황(墩煌)의 막고굴


    돈황! 돈황으로 간다는것은 오매에도 그리던 일이다. 그것은 돈황에 중국에서 제일 유명한 막고굴이 있을뿐만아니라 중국에서 유명한 조선족화가 한락연이 돈황벽화를 그려내여 지금도 중화 그림력사의 한자리를 빛내고있다. 수십년간 돈황이라는 곳이 어떤곳인가 한번 가보고싶다는 생각이 내 머리를 떠난적이 없었다. 이번길에 그 숙원을 풀게 되어 마음은 적이 격동되기도 하였다.

   돈황은 감숙성의 하서주랑의 서쪽에 있다. 돈황의 옆으로 당하가 흐르고있다. 유구한 력사를 갖고있는 돈황은 요순시기에는 선민들이 방목하던 고장이고 춘추시기에는 농업이 발전한 곳이다. 돈황이라는 이름은 휘황한 고장이라는 뜻이다. 한나라때에 돈황군이라 불렀고 동진시기에는 서량국도(西凉国都)였고, 수나라때에는 과주(瓜州)라 불렀고, 당나라때에는 사주(沙州)라 불렀고, 송나라때에는 서하에 속하였고, 청나라때부터 다시 돈황이라 불렀다. 돈황은 고대에 아세아주와 구라파주를 련결하는 교통요충지였고 비단의 길에서의 서쪽의 중진이였다. 돈황은 석굴이며 옛무덤이며 한나라때 성이며 옛역전등 고대 문화유물이 241곳에 별무리처럼 널려있는 고장이다. 돈황의 동남쪽에 있는 막고굴은 중국의 4대석굴의 으뜸으로서 4세기로부터 14세기까지의 천년의 벽화와 조각예술품들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돈황을 인류문명의 서광이라고 사람들은 말하고있다. 성남에는 또 수려한 명사산과 월아천이 있어 려행가들은 이 려행도시를 언제나 눈박아본다.

   돈황에 도착하였을 때는 거리에 가로등불빛이 환할 때였다. 란주에 있는 허동식시인이 돈황에 가면 아무개를 찾아보라고 하여 우리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전화를 받고 인차 달려왔다. 보통키에 시원시원한 말씨였다. 그런데 하마터면 그에게 걸리여 골탕을 먹을번할줄이야. 그의 안내하에 한 호텔로 들어갔는데 호텔비가 250원이란다. 비철인데 내리워 달라해도 딱 잡아떼고 내리우지 않는다. 돈황은 유명한 곳이여서 아직도 유람객이 붐비는 모양이다 하고 드는수밖에 없었다. 짐을 부리우고 저녁먹으러 나왔다가 나는 슬그머니 옆에 있는 림업호텔을 찾아가서 방값이 얼마냐고 물었다. 90원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조선족가이드라고 믿었다가 하마터면 깜때에 넘어가서 2,3일숙박에 호텔비만 하여도 몇백원이나 되는 헛돈을 팔번하였다. 하긴 그도 우리처럼 멋도 모르고 뛰여드는 관광객을 붙잡고 팁이라도 받아먹어야 이 겨울을 날수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크게 밉지는 않았다. 저녁을 먹고 우리는 짐을 림업호텔로 옮기였다.

  돈황의 동남쪽으로 50리가량 떨어진 막고굴로 아침 일찍이 떠났다. 막고굴앞에는 골동품을 파는 시장이 여러개있었다. 남북으로 1600메트되는 막고굴은 상하 다섯층으로 되어있지만 무성한 나무들이 앞을 가리워 출입문을 들어서지 않고서는 그 굉장함을 볼수 없었다. 출입구에서는 보위일군들이 사진기며 록화기며를 가지고 들어가지 못하게 단속하고있었다. 출입구를 지나자 높고 낮은 천불동이 층층이 줄지어있었다. 막고굴은 우리나라 석굴예술에서 최대의 규모를 갖춘 석굴로서 내용이 제일 풍부하고, 예술적가치가 제일 높고,  4대석굴중에서 명성이 제일 높아 1987년에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에다 이름을 적어놓은 문화유물이다.

  한무제가 병사를 파견하여 흉노를 전승한후 내지의 이민들을 동원하여 여기에 와서 개간하게 하면서 돈황등 여섯개현을 건설하였는데 이곳을 옛날에는 하서주랑이라고 부르면서 600키로메트 장성을 쌓고 군사요충지로 만들었다. 그때 돈황서쪽부터 지중해까지 서역이라고 하였다. 비단의 길이 여기서 신강으로 들어가는데는 세갈래길이 있었다. 이 세갈래길이 모두 돈황이 출발지점이였다. 그리하여 돈황은 교통요충지로 되었고 불교를 동방에 전파하는 제일역으로 되었다. 그래서 돈황석굴이 산생하게 되었던것이다.

  막고굴은 전진건원(前秦建元)2년으로부터 건설하기 시작하였는데 세월의 풍화작용과 인간의 파괴로 인하여 많은 손상을 보았지만 지금도 16국, 북위, 서위, 북주, 수,당, 5대, 송, 서하, 원대 등 력대의 석굴들이 492굴이 있다. 굴내에는 벽화가 도합 45000평방메트가 있고, 채색조각이 2400여개가 있다. 또 당송목조건물이 5좌가 있고, 련꽃석주와 꽃벽돌이 수천개가 있다. 돈황의 막고굴은 건축, 회화, 조각 세가지가 결합된 종합예술의 보물고이다.

  청광서 2년(1901년)에 막고굴은 우연하게 발견되였다. 도사 왕원록(王圆菉)이가 동굴앞의 모래를 청리하다가 굴을 발견하였다. 굴안에는 만으로 헤아리는 경서며, 필사본이며 문서며, 수놓이 방직품이며가 있었는데 사막의 건조한 기후에 의하여 하나도 썩지 않고 완정하게 보존되여있었다. 그 굴이 지금의 제17굴 장경동이다. 이 굴을 사람들은 <<중고시대의 백과전서>>라고 한다. 왕원록도사는 이 사실을 당년의 감숙학정  엽창치(叶昌炽)한테 보고한다. 엽창치는 국가의 보물이므로 봉하라고 한다. 굴은 봉하였어도 소문은 봉하지 못하여 1908년에는 영국의 고고학자 마크.A스타인이 찾아와서 6000점의 고대미술품을 락타 40마리에 싣고 갔고, 그후 7년뒤인 1914년에 다시 찾아와서 경서류 600권을 더 가져갔다. 스타인이 왕원록에게 던져준것은 마제은 (马蹄银) 40개였다.이 유물들은 지금 영국의 대영도서관과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여있다고 한다. 영국의 뒤를 이어 이듬해인 1908년에는 프랑스의 동양학자 폴 펠리오가 막고굴을 찾아왔다. 당시 베트남의 하노이에 있는 한 대학에서 교수로 있던 그는 신비한 세계였던 동양에 대하여 본격적인 연구를 하다가 스타인의 횡재소식을 듣고 달려왔던것이다. 그는 한달동안이나 막고굴을 누비다가 고대문서중 6600점을 선별하여 가져갔다. 조형의 말씀에 의하면 6600점중에 신라의 혜초(慧超.704-787)가 쓴 필사본 <<왕오천축국전>>도 끼여있었다고 한다. 펠리오가 가져간 막고굴유물들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과 기메미술관에 소장되여있다고 한다.

  유럽학자들의 뒤를 이어 1910년에 일본의 오타니 고이즈가 탐험대를 조직하여 돈황에 파견한다. 오타니 탐험대는 서안에서 락타를 타고 2000여 키로메트를 걸어 88일만에 겨우 돈황에 도착한다. 천신만고 끝에 온 오타니탐험대는 왕원록을 설득하여 경서류 1000점을 빼내는데 성공한다. 그들이 빼내간 귀중품들은 일본도꾜국립박물관과 류코크대학에 소장되였는가하면 중국려순 박물관에도 소장돼있고, 한국국립박물관에도 소장돼있다. 그후 1915년에는 로씨야탐험대가, 1925년에는 미국의 탐험대가 달려들어 나름대로 수단을 아끼지 않고 가져갔다.

   돈황의 마고굴력사를 소급해보면 왕원록은 국가의 보배를 팔아먹은 놈이다. 일본은 동북과 조선반도를 식민지화하였으니 영원한 자기네 땅인줄로만 알았던 유치한 침략자였다는것을 알게 된다. 조철호형은 기행문에다 <<우리는 그나마 쓴웃음이라도 지을수있으나, 일본은 울며겨자먹기여서 돈황유물말만 들어도 분통이 터질일일것이다>> 라고 피력하고 있다.

   막고굴 불상의 특점은 모두 진흙을 발라서 만든다음 채색을 올린것이다.불상의 량측에는 제자, 천왕, 보살, 힘장사들이 시립하여있는데 적으면 셋, 많으면 11명까지이다. 제일 큰 불상은 높이가 33메트이고, 제일 작은 불상은 10센치메트이다. 북위와 서위때 작품이 조형이 간결하고 선이 분방하고, 몸체가 뚱뚱하고, 색갈사용이 대담한것이 특점이다. 제259굴의 불상의 모습은 표정이 밝고 치켜든 입술에는 회심의 미소가 흐르고있어 사람들은 동방의 몬나리자라고 한다. 수나라때의 불상들은 인물풍도를 추구하여 얼굴모습이 호화롭다. 당나라때의 조각예술은 정묘하고 청신하여 보살이 숙녀같고 천왕은 용맹한 무사같다. 제45굴의 관세음보살은 성당때에 채색진흙으로 만든것인데 외표가 아름답고, 마음과 체형의 조화가 잘 되여 속세를 벗어났다. 웃는가 하면 웃지 않고 기뻐하는가 하면 기뻐하지 않고 인간세상의 여러 가지 심리표현이 융합되여있어 돈황조각예술의 으뜸으로 친다.

  막고굴의 벽화는 돈황의 예술에서 수량이 제일 많고 성취가 제일 큰 벽화이다. 벽화의 내용 대부분이 불교를 전수하는 제재이다. 나머지는 당년의 각계각층의 생활을 반영한것들이다. 고기잡이, 농사짓기, 도자기 만들기. 곡식을 찧느라고 매돌을 돌리는 등 여러 가지 생산활동이 그려져있다. 수레, 선박, 농구, 물레, 베틀은 물론 궁정, 성시, 정자, 루각, 탑, 사찰, 점포, 부두 등 고전건축모습이 여러면이 보인다. 여러조대의 벽화들중에서 당대의 벽화수준이 제일 높다. 당대의 벽화는 종교와 현실생활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궁전시녀들로 모델을 삼고, 서천불국의 정경을 표현하여 인물이 숨쉬는 듯 생생하고 형상이 아름답다. 례하면 112굴의 벽화의 서방정토변(西方净土变) 중의  락무(樂舞)에는 피파를 치는 모습이 그려져있는데 자태가 아름답고 무녀의 형상이 생동하여 사람들은 돈황예술의 상징이라고들 한다. 막고굴의 벽화에는 많은 그림이 가무를 표현한 그림들인데 거기에 나오는 천녀들은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하여 비천이라고 일컫는다. 화가들은 간결한 필묵으로 천자락을 날리며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천녀들을 그려내여 그 형상이  절묘하다. 그녀들은 채색구름을 타고 머리를 추켜들고 날아다니기도 하고, 구름우에 편안하게 앉아서 북을 두드리기도 하고, 피리를 불기도 하고, 공중에 꺼꾸러 서서 손을 들어 피파도 치고, 무리를 지어 춤을 추면서 꽃을 날리기도 한다. 실로 천백만 모습의 천녀들이 하늘을 달아다니여서  꽃들이 만발한 화원을 이루었다. 이러한 비천의 형상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활에 재현되여 건축물들에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용품들에도 많이 나타나고있다. 285굴은 서위시대의 작품의 정화로서 녀와로부터 화생동자에 이르기까지, 비천으로부터 선사에 이르기까지, 그 배치로 보나 색채로 보나 인물의 세절이 생생하고, 실감이 짙고 화려하면서도 속되지 않고, 아름다우면서도 경박하지 않아서 보는 사람마다 놀라게 한다.

   막고굴의 장경동에서는 5세기로부터 11세기에 이르는 10개조대의 경서, 문서, 그림, 동상 등 문화유물이 6만여점이 발굴되였다. 이는 우리나라 고대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종교, 과학, 예술, 민족, 력사, 대외교류 등 각종분야를 연구하는데에 귀중한 연구재료를 제공하였다. 지금 이재료들은 세계적으로 돈황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큰 중시를 받고있다.

   막고굴은 신비한 세계이며 기의한 세계이다. 여건이 허락되면 누구나 한번쯤 가본다는것은  삶의 질을 풍부히 하는 향수라고 아니할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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