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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정치, 시대 및 기타
최룡관
시와 정치
시와 정치는 어떤 관계일가? 어떤 사람은 시는 정치의 부속물이라고 하고 시는 정치의 반영이라고 한다 나도 한때는 그런 생각이 있었다 내가 금방 시를 쓰기 시작한 때부터 상당히 오랜 시간에 시는 정치의 부속물이며 시는 정치의 반영이라고 생각하였다 뿌시낀도 12월 당의 가수라고 칭송되지 않았던가 <<카프>>도 그렇게 시를 쓰지 않았던가 이것이 나의 주요한 리유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후에 보니까 그런것이 아니였다. 정치는 사람을 다스리고 사회를 다스리는 일이고 시는 시인의 령혼을 그려내는 일로서 량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것이다. 물론 정치를 반영하는 시도 있다. 그런데 이런 시들은 한때의 흐름일뿐이다. 정치는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 의하여 대체되는 경우가 많은데 어떠한 정치를 반영한 시던지 그 정치집단의 운명과 생사고락을 함께하게 되여있다. 한 정치집단이라 하여도 로선, 방침, 정책이 개변되면 시는 또 자신의 운명을 다하게 된다. 그러므로 시는 멀리 내다보고 쓰는것이 좋다. 소위 멀리란것은 정치가 바뀌여도 읽힐수 있는 시를 쓰는것이 바람직하다. 어떤 시가 그런 시인가? 이것은 시인의 앞에 놓여진 하나의 근본적인 과제로서 시인마다 탐색하여 볼 일이다. 아무튼 정치는 정치의 특성이 있고 시는 시의 특성이 따로 있다. 시는 정치의 부속물인것이 아니라 정치와 떨어져있는 독립물이다. 시는 시의 자률성이 있다. 우리는 시의 자률성을 존중하여야 한다. 그럼 정치에 관계되는 시를 쓰지 말아야 하는가? 쓸수도 있다. 하지만 쓰더라도 시의 자률성속에서 씌여져야 할것이다.
시와 시대
시를 분석할 때 많은 사람들이 시대성을 론한다. 시는 확실히 일정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시인이 쓰는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시대에 대한 생각은 각자 나름이다. 어떤사람은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나 사회의 조류가 시대성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 나는 후자를 많이 고려한다.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나 어떤 형세의 흐름은 시대의 한 반영일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시대를 대표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울것이다. 어떠한 사건 어떠한 형세나 조류는 시대의 본질적인 반영이 아닐수도 있는것이다. 시로 보는 시대란 매우 긴 력사시기를 말하는것이지 눈앞의 일같은것을 두고 말하는것이 아니다. 시대는 변하지만 시는 변하지 않을수도 있으며 시대와 시는 완전히 다른 표현일수도 있는것이다. 중국은 지난세기 <<5.4>>운동이후부터 신시시대를 맞이하였는데 지금도 시의 시대는 그냥 신시시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간에 정치시대와 형세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지만 신시시대는 아직도 그냥 흘러가고 있으며 발전하고 있다. 물론 형세나 어떤 조류를 반영하는 시들은 일시적으로 베스트셀레로 되기도 하지만 진정한 시적인 이미지는 가지지 못한다. 중국의 왕궈전시가 한때 대학계를 휩쓸었지만 문학사적으로 말할 때 왕궈전의 시는 유감스럽게도 자리가 없고 왕궈전이란 자체도 시인의 명함에 오르지 못하고있다. 또 한시기 얜치라는 시인의 시가 베스트셀러가 되여 굉장하였지만 얜치도 왕궈전의 운명을 면치 못하였다. 시인은 인류가 읽는것이여야 한다. 총통이 읽으나 도적놈이 읽으나 그누가 읽으나 어떤 새로운 심미가치를 부여할수 있는 시일때만이 시가 생명력이 강하다고 하여야 할것이다. 한국 30년대의 명시들은 어느것이든 식민지사회를 <<카프>>처럼 정면으로 안고 반영하느라고 애쓴것이 없다. 모두 시적으로 노래한것들이다. 우리는 과거에 형세를 반영하고 명절을 노래하고 계절을 노래하면서 쓴 시들이 많았는데 거기서 시라고 말할만한 시를 고르자면 마치 바다에서 바늘줍기와 같은 감을 가지게 되는데 이건 아주 침통하고도 심각한 교훈이다. 지금 적지 않는 시들이 그때의 변종으로 나타나는데 모름지기 주의할 일이라고 생각된다. 시대라는것은 그릇이 큰것인데 눈앞의 어떤 사건이나 형세에 매달려서 그것을 직접반영하느라고 시를 쓰는 경향은 모름지기 극복하는것이 좋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현실을 떠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실제상 이러한 여론은 문학의 본체 시의 본체를 거부하는 일이다. 문학은 문학의 시대가 있고 정치는 정치의 시대가 있다. 문학에 어제날의 랑만주의시대와 오늘의 현대주의시대가 있는데 이 두시대속에 얼마나 많은 정치변화가 있었는지 모른다. 20세기전반에 걸쳐 세계문학은 오늘까지도 현대주의시대인데 이 100여년기간에 세계의 정치변화와 각국의 정치변화는 이루다 헤아릴수 없이 많았지만 문학의 현대주의시대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왔고 아직도 왕성한 위력을 과시하고있다. 하지만 우리는 봉페된 시기를 거치면서 20세기 현대주의문학의 성과를 아직도 낯선상태로 마주하고있으며, 무엇을 발양하고 무엇을 극복할것인가에 대하여 리론적으로 실천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너무도 많이 우리앞에 나서고있다. 시인들은 반드시 부단히 사상을 해방하고 20세기 현대주의시기교를 받아들여 봉페된 우리 시를 활성화하여야 출로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시와 반영과 표현
시는 인간생활의 반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모멘트를 틀어쥐고 잘 반영하면 좋은 시가 된다고들 한다. 시는 어떤 사물이나 사실을 사진을 찍듯 문자로 잘 그려낸것이 아니다. 이러한 시는 많은 사람들이 보고 무엇을 쓰고있구나 하는 감은 주지만 시로서의 사명은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고있는 시이다. 시는 복사가 아니고 사진찍기가 아니다. 이런 시는 아직 시적소재에 머무른 시다. 시와 시가 아닌 본질적인 구별은 문구를 별행하였거나 안 한것으로 나위여 지는것이 아니라 상징과 은유가 시의 기본으로 되였는가 안 되였는가이다. 다시 말하면 변형이라는 기법으로 씌여지였는가 안 지였는가로 구별하게 된다. 변형으로 씌여졌다면 문장으로 써 놓아도 시라고 할수 있지만 변형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아무리 별행을 시켜도 시의 성격을 가지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시는 직설적인것이 아니다. 직설로 쓴 시도 있지만 그것은 엄격한 의미로 따지면 좋은 시라고 할수 없다. 이러한 시는 가사에 가까운것이지 시에 가까운것이 아니다. 시는 시대에 따라 쓰는 방법이 달랐다. 지금의 시대는 모방의 시대가 아니라 표현의 시대이다. 표현이란 무엇인가? 우선 사물이나 사실에 대한 시인의 개성적체험이야 하며 그 체험을 시로서 반영할 때 변형의 수법을 리용하여 간접적으로 사물에 접근하는것이다. 시는 감정을 북받치는 그대로 발로하는것이 아니라 감정을 억제한 예술적발로인것이다. 시의 존재성을 확인하는것은 객관사물의 존재를 실재적으로 반영하는것이 아니라 허구적으로 상상적으로 반영하는것으로서 시의 이미지는 허상이다. 즉 시인이 창조하여 내놓은 사물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물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상상과 허구 더 나아가서는 환상적인것이 없으면 결코 좋은 시라고 말하기 어려울것이다. 님의 눈썹을 곱게 닦아서 하늘에 심어놓았다는 서정주의 대표작 <<동천>>도 환상으로 충만된 시라는것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시와 언어
시는 언어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시의 언어는 일상적인 관습적인 언어의 의미를 떠나서 쓰인다. 그래서 시어는 다의적이라고 한다. 시에서 돌이라고 쓰면 그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돌인것이 아니라 시인의 머릿속에서 어떤 새로운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돌인것이다. 언어는 시의 재료로서 시의 공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 공구나 재료가 어떻게 씌여지는가에 의하여 시가 달라지게 되며 시에서 표현하는것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례하면 사람들은 정조를 지켜야 한다고 한다고 한다. 그런데 시인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자물쇠가 잠가져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나의 자물쇠를 열수있는 열쇠가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씌여진 자물쇠나 열쇠가 현실사물인것이 아니라 현실사물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의 사물로 변하여 버린것이다. 시적언어는 이렇게 변화의 양상을 지니는데 그것도 시인에 따라서 천만가지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것이다. 이런 언어의 변화는 현실의 사물보다 이질적이면 이질적일수록 시적값이 비싸게 되는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인을 언어의 창조자라고 말하고있는것이 아닐가. 여기서 말하는 이질적이란 말은 성질이 다르면 다를수록 좋다는 말이며 비교되는 대상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좋다는 말이다. 시인을 언어의 요술사 혹은 언어의 마술사라고 하는것은 자물쇠처럼 왕청같은 의미로 언어를 쓰기때문이다. 과거에는 언어와 실체가 불가분리 관게에 있었지만 지금은 언어와 실체를 갈라놓고 쓰고있는 경우가 항간에도 많이 류행되고 있다. 시는 력래로 이러한 갈라짐을 중시하여 왔다. 사실 언어는 껍데기뿐이라는 말이 있는데 시인은 이런 언어의 껍데기로 여러가지 새로운 시를 쓴다. 다시 말하면 이 껍데기로 이 세상에다 시인령혼의 새로운 사물을 만들어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있다는것이다. 그러므로 시는 시인이 혼자서 완성하는것이 아니라 독자도 시에 참여하여 언어의 껍데기로 된 새로운 사물을 관찰하고 해석하면서 나름대로 시를 완성해 보게 되는것이다.
시와 전통
전통이란것이 시에서 어느만큼 작용하는가 하면 사람마다 대답이 다르다. 전통에는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의식과 선배들로부터 내려오는 시의 기법이 있는것이다. 어느 유명한 사람의 말이 떠오른다. 시는 아버지 죽이기라고. 시란 자체가 새로운 창조를 말하는것이니 아버지 죽이기라는 말도 과언은 아니다. 시는 전통을 중시하지만 전통을 부정하기도 한다. 과거시인들이 창조한것들은 왕왕 전세대의 시의 전통을 부정하면서 새롭게 뜻을 세우고 새롭게 언어를 닦은데 있는것이다. 시에서 전통은 영구불변한것이 아니다. 한시기 전통은 다음시기의 창조에 밑거름이나 바탕으로 될뿐이지 그대로 옮겨놓는 일이 아니다. 그대로 옮겨놓으면 창조가 없는 복사일뿐이다. 새로운 창의나 창조를 목적으로 하는 시는 전통을 부정하는데서 산생하게 된다. 전통은 토양이고 시는 땅우에서 자라는 수초거나 동물이거나 미생물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땅의 영양분을 먹고 생명활동을 진행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은 땅에서 태여난 새로운 생명체로서 땅이 아니다. 이러한것들은 생명을 다하면 땅이 된다. 시도 마찬가지다. 전통에 의거하여 산생하지만 전통이 아니며 좋은 시들은 또 전통을 부단히 보완하고 전통을 완선화하고 살지게 한다. 전통과 시와의관계는 씨앗과 새싹의 관계와 같은것이다. 새싹은 씨앗에서 나왔지만 씨앗이 아니다. 새싹은 씨앗을 부정하고 새로운 사물로 씨앗에서 나온것이다. 이때의 씨앗도 새싹이라고 말할수 없다. 씨앗은 새싹을 낳고 자신도 사멸한다. 시도 마찬가지다. 전 세대의 전통에서 나왔지만 새싹처럼 전통을 지킬수 없으며 또 지켜서는 안되는것이다. 전통만 말하면서 변혁이 없고 새것이 없는것은 실은 전통을 말살하는것이다. 전통은 과거이지 오늘이 아니며 미래는 더욱 아니다. 전통은 바탕이지 새로운 탄생이 아니다. 오늘의 시인은 어제의 전통에 누워 낮잠을 잘것이 아니라 그 전통을 혁신하고 발전시켜 새로운 전통을 개척할 의무가 있는것이다. 소위 찌거기를 버리고 알맹이를 취한다고들 하는데 알맹이도 그대로 취한채로만 있어서는 안 된다. 그 알맹이를 다시 갈고 닦아서 새로운 차원에로 끌어올려야 한다. 이렇게 되면 시인의 시가 새로워지고 시인의 세계가 새로워지게 된다. 마치 줄기에서 잎이 나오고 잎에서 꽃이 나오고 꽃에서 열매가 나오고 열매속에 알이 나오는것처럼 시인은 전통이라는 씨앗에서 새로운 잎이 나오게 하여야 하며, 잎에서 꽃이 나오게 하여야 하며, 꽃에서 열매가 나오게 하여야 하며, 열매에서 새로운 씨앗이 나오게 하여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개혁과 변혁과 발전이 없는 전통은 죽은 송장을 우상처럼 모시는 격이라고 할수 있다.
시와 민족
시와 민족의 관계는 복잡하면서도 간단하다. 복잡하다는것은 시는 민족성이 있어야 하고 민족을 위하여 복무하여야 한다는 관점이 있기때문이다. 실상 시는 계급도 민족도 국가도 초월하는 각도에서 쓰는것이 좋다. 시를 어떤 언어로 쓰는가하는것이 시와 민족관계에서 핵심으로 나서는 문제이디. 한민족의 언어는 해당민족의 문화의 핵심이며 얼굴이며 전통이며 미래이다. 우리로 말하면 조선어로 쓰는것이 가장 민족적인것이다. 조선어로 어떠한 풍격의 시를 쓰든 좋은 시만 쓰면 그것은 민족성이 강하다고 할수 있다. 소위 말하는 민족정서나 민족의식이나 민족풍격과 같은것들을 중시할 필요는 있지만 그대로 옮겨서는 안 된다. 중요한것은 좋은 시를 쓰는가 못쓰는가가 중요한것이다. 시를 쓸 때에 시밖의 일에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한다. 시인은 시를 쓸 때 이러한 따위를 고려하지 않게 된다. 시의 텍스트를 잡은다음 어떻게 하면 그 시를 잘 쓰겠는가를 고려하지 어떻게 민족정서며 민족의식이며 민족풍격을 살리겠는가를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의 언어로 어떻게 시인자신의 상상을 표현하며 어떻게 언어의 표현을 새롭게 하겠는가에 골몰하게 된다. 이렇게 써놓은 시에는 자연스럽게 민족의식이나 민족풍격이나 민족정서같은것이 녹아서 슴배이게 마련되는것이다. 황차 다르더라도 그것은 별문제인것이다. 시인의 시에서 새로운것이 탄생하였다면 그것은 더 좋은 일이다. 이제까지 없던 의식, 없던 풍격, 없던 정서를 쓰면 그만큼 새로운 령역을 개척하는것으로 되기에 그것이 바로 민족을 위한 새로운 창조이며 새로운 발전이며 새로운 풍격이 되는것이다. 시인자신은 민족의 일원이므로 구태여 민족의 정서요 의식이요 풍격이요 하는데 따로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시인의 정서, 의식, 풍격이 해당민족의 정서, 의식, 풍격의 한부분이니까. 시인자신의 정서, 의식, 풍격은 특수할수 있는데 이는 특수하면 특수할수록 좋다. 특수성속에 보편성이 있는것이지 보편성속에 특수성이 있는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남선. 김소월. 정지용. 리상 등등 좋은 시를 쓴 시인들은 다 그렇게 하였던것이다. 그들의 당대의 시들의 전대의 시들과 달랐다고 하여 정서, 의식, 풍격이 다른 민족이나 다른 국가의 것이라고 나무람할 수가 없었던것이다. 물론 일부 시인이나 학자들이 물의를 일으켰지만 그것은 한시기 일이였다.
지금은 경제가 다국화시대이며 문화가 다원화 시대이며 정치가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시대이다. 정치, 경제, 문화가 호상침투하고 호상 견제하고 호상 발전하는 시대이다. 시인도 가슴이 열려야 한다. 협착하게 한민족의 무엇을 고집할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의 우수한것을 받아들여서 우리의 피와 살로 만들어야 하는 때이다. 선진적인 문화를 받아들이는것만이 출로가 있는것이다. 황차 연변의 시들은 같은 언어를 가지고 있는 한국에 비하여도 너무 차이가 있으며 세계적인 차원에서 보면 더구나 우물안의 개구리같은 감이 없지 않다. 가장 민족적인것이 가장 세계적인것이라는 말은 일정한 일리는 있지만 절대적인것은 아니다. 지금은 이런 구호를 부르짖을 때가 아니라고 본다. 지금은 디지털시대이다. 디지털시대는 국계를 넘어 지구를 한개의 동네로 만들어가고 있고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을 이웃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이 혼합되자면 아직 멀고도 멀었지만 문화와 문화의 어울림과 시와 시의 어울림은 국가나 민족을 초월하여 먼저 될수도 있는 일이다. 교학악이 서양의 고급문화였지만 연변에서도 지향하고 있는것이 바로 살아있는 증명이 아니랴. 서양사람도 현대시를 쓸수 있고, 한국사람, 일본사람도 현대시를 쓸수 있고, 우리 연변사람도 현대시를 쓸수 있지 않는가. 시인은 자신을 어느한 울타리에 가두어 놓지 말고 열린 사색을 하여야 하며 열린 시풍으로 시를 써야 한다고 생각된다. 디지털은 모든 울타리와 한계를 짓부셔버리면서 세계의 문화를 융합시키고 있으며 새롭게 발전시키고 있다. 시인은 무엇보다도 여기에 적응하는것이 바람직할것이다.
시와 명예주의
시인은 명예주의자이다. 시는 아무나 쓰는것이 아니다. 시는 개인주의 산물이며 시는 개인의 창조를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말들은 틀리는것 같지만 맞는 말들이다. 시를 왜 쓰는가 시인이라는 영광스러운 명예가 있기 때문이다. 이 명예가 없다면 누구나 시를 쓰지 않을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말하면 명예주의자이다. 산골의 농민도 그로서의 명예를 중시하며 명예를 생명으로 간주한다. 각자는 자기의 명예를 위하여 분투하고 있다. 아무런 명예심도 없다면 허황하게 되며 염세주의자로 될것이며 자살을 선택하게 될것이다. 어떠한 사람이나 다 그로서의 자존심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명예주의의 핵심인것이다. 황차 시인임에랴. 명예주의의 밑바닥에는 개인주의가 웅크리고 있다. 개인주의를 없애버리면 사람을 분투할 필요성이 없게 된다. 개인주의는 본질상에서 생명체의 원초적인 욕망인것이다. 개인주의를 말살하면 인간개성이 말살되는데 누가 동의하겠는가. 사람들이 추구하는것은 개인주의와 사회가 어울릴것을 바랄뿐이지 개인주의를 없애는것을 바라는것은 아니다. 집단주의를 요구하지만 그 집단주의에 참여하는 모둔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과 집단의 구호가 일치되기때문이지 개성을 말살하고 개인욕망을 말살하면서 집단주의를 옹호하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없을것이다. 이 세상에 여러 가지 당파들이 존재하고 여러 가지 집단이나 무리가 존재하는것도 이때문인것이다. 소위 마음 맞는 사람끼리 집단을 조직하고 당파를 조직하는것도 실질을 따지면 욕망이 같거나 비슷한 사람끼리 모임이다. 시에서 동인회가 나오는것도 바로 이런 현상이다. 어찌보면 비슷한 선호를 가진 개인주의자들의 모임인것이다. 동인회는 모여서 비슷한 예술추구를 하다가도 맞지 않으면 갈라질수도 있다. 갈라지는 데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주장이 다른것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어떤것을 주장한다는 자체가 바로 그 사람의 개성이며 개인주의표현인것이다. 시창작도 마찬가지이다. 시는 주관주의 산물이라고들 한다. 주관주의란 객관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주대를 세우는 일이라고도 할수 있다. 바로 시창작이 이러한것이다. 누구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시인은 다르게 생각한다. 다르게 생각하기때문에 시가 나오게 되는것이다. 같게 생각하면 시 한수만 나오면 된다. 그런데 시인마다 생각이 다르기에 여러가지 시가 씌여지게 되고 여러 풍격의 시가 씌여지게 되여 시의 다양화를 이루게 된다. 그래서 문학은 언제나 백화만발 백가쟁명이라는 구호를 제창하게 되는것이다. 한가지 꽃만 피여서는 봄이라고 할수 없고, 한종류의 새만 울어도 봄이라고 할수 없듯이 시의 화원이라는 이 요람에 여러가지 꽃이 피여야 하고 여러가지 새가 울어야 풍성한 수확이 있게 됨은 자명한 일이 아니라고 할수 없다. 시인은 내 개성으로 시를 쓴다고 고집할수는 있지만 다른사람의 풍격도 존중해야 한다. 비평가는 시를 해석할 자격은 있어도 이런 시는 오도요 하고 매도할 자격은 없다. 세계의 모든 사물이 각자존재인것처럼 시인도 시도 각자 존재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독재도 필요하지 않다. 시는 자유만 요구할뿐이지 어떠한 계률의 지배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인은 전통시를 쓰다가도 현대시를 쓸수도 있고 현대시를 쓰다가도 전통시를 쓸수도 있으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다른 시를 쓸수도 있다.
시와 과거의 몇가지 구호
과거에 우리는 예술지상주의를 반대하였다. 그것은 자산계급의 주장이라기때문이였다. 그런데 지금은 이 구호를 다시 반성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 우리문학은 계급투쟁공구로 충당되여 문학이 문학같지를 않는 세월을 살아왔다. 문학은 실제상 일종 예술이다. 시는 문학의 핵심쟝르로서 당연히 예술이다. 예술이 예술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것이다. 시는 시로서의 예술특점이 따로 있는것이다. 시는 시적예술을 떠나면 시가 제대로 된다고 생각할수 없다. 무엇무엇해도 시가 우선 시로 되어야 함은 시적예술품으로 되어야 한다는것과 같다. 시가 어떠한가를 론한다는것도 시가 시로 된다음의 일이다. 시로 되기전의 글을 놓고 시니뭐니하고 시야비야하는것은 공담에 지나지 않을것이다. 시가 시로 되자면 우선 시적예술이 시에 있어야 하는것이다 . 그러므로 예술지상주의를 무턱대고 반대한것은 미상불 틀린것이라고 말하지 않을수 없다. 예술지상주의를 어떻게 대할것인가를 다시 반성해 볼 필요가 있을것 같다. 시적예술이란 무엇인가 시를 쓰는 여러 가지 방법과 기교를 시적예술이라고 필자는 보고있다. 시적방법이나 기교가 없이 씌여진 시, 시적장치가 없이 씌여진 시를 결코 좋은 시라고 할수 없는것이 아니겠는가. 최고기교는 무기교라고 하면서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기교를 득달한 시인들의 말이지 기교를 모르고 시를 써야한다는 말은 아니다. 시 기교를 모르고 시를 쓴다는것은 상상할수도 없는 일이다. 왜 어떤 사람은 시를 쓸수 있는데 어떤 사람은 시를 쓸수 없는가? 그것은 시적기교를 아는것과 모르는것과의 차이이다. 왜 어떤 사람은 좋은 시를 많이 쓸수 있는데 어떤 사람은 좋은 시를 많이 쓰지 못하는가 그것은 시적기교에 득달한것과 못한것의 차이를 나타내기때문이다. 그래서 문심조룡에서는 드레박줄이 짜르면 물을 길어올릴수 없다고 하였다. 기교에 대한 성숙이 있어야 좋은 시를 많이 쓰게 되지만 기교에 대한 숙달이 없으면 우연하게 좋은 시를 쓸수 있지만 경상적으로 좋은 시를 쓸수는 없는것이다. 류협이 말한것처럼 도박을 모르면서 도박을 놀면 우연히 돈을 딸수는 있지만 그냥 돈을 딸수는 없는것이다. 사실 저명한 시인들은 기교를 득달하여 잘 영위하기 때문에 늘 좋은 시를 쓴다고 말할수 있다. 그러므로 예술지상주의를 부정한다는것은 기실은 시를 모르면서 시를 써도 된다는 말과 같으며 글을 써놓고 시라는 이름을 붙여놓으면 시가 된다는 말과 같다. 무릇 좋은 시는 기교의 예술을 떠날수 없다는것을 명기할 필요가 있을 같다.
과거에 우리는 자유 평등 박애를 자산계급 구호라고 죽도록 반대하였다. 사실 자산계급은 나쁜 면도 있지만 좋은면도 있는것이다. 자산계급은 락후한 봉건제도를 뒤업고 생산력을 대대적으로 해방하였으며 인류력사에서 마멸할수 없는 공로를 세웠다. 자산계급이 탄생함으로 하여 인류의 정치 경제 문화가 류례없던 발전을 가져온것도 객관사실이다. 이런 자산계급이 제출한 자유 평등 박애는 지금도 인류의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을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것이다. 지금 우리가 조화로운 세계를 요구하는것도 따지고 보면 자유 평등 박애와 련관성이 없는것이 아니란것을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수 있다. 인류는 자유를 추구하고 평등할것을 요구하며 서로 사랑하여야 한다는것이 왜 나쁘다고만 할수 있는가 모택동도 대동세계를 요구하였다. 이 대동세계란 필자의 나름대로 판단하면 자유 평등 박애의 세계이다. 모종의미로 말하면 자유 평등 박애는 어느 령역에서나 모두 필수적인 사상이다. 정치도 그렇다. 자유 평등 박애가 있어야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이 자유로아지고 경제건설과 문화건설이 잘 될수 있다. 군사도 그렇다. 해당국가의 자유 평등 박애를 지키는 무력이라고 할수 있다. 군사는 전쟁을 요구하여 필요한것이 아니라 전쟁을 피면하기 위하여 필요한것이며 종국적으로 세계가 군사를 요구하지 않는 세계로 발전하기 위한것이다. 문화도 그렇고 문학도 그렇고 시도 그렇다. 자유가 없고 평등이 없고 박애가 없다면 이 세상은 전쟁으로 충만될것이며 나라는 포화에 시달리고 백성은 전쟁에서 죽어갈것이다. 비록 자유 평등 박애는 자산계급이 제출한것이지만 시인이 요구하는것이며, 모든 계급과 계층이 요구하는것이며, 인류가 요구하는 구호이며 사상이라고 할수 있다.
과거에 우리는 계급에 따라 요구하는 예술이 다르다고 하였다. 무산계급예술은 혁명이라는 기계의 치륜이나 나사못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예술은 국계와 민족이 따로 없이 모두가 요구하는것이다. 자산계급이 예술이라고 하여 다 나쁜것은 아니고 무산계급이 예술이라 하여 다 좋은것은 아니였다. 자고로 예술은 경계가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쎄르반테스의 동키호테나 단테의 신곡은 어느나라 어느 민족이나 다 명작이라고 하는것이고, 교향악은 다 고급예술로 치는것이고, 다빈치 그림은 다 명작이라고 말하게 되는것이다. 우리는 봉건황궁의 예술은 무턱대고 나쁘다면서 배격해 버리였는데 이것도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교향악명작들은 거개가 황궁의 예술이였다. 우리 나라 봉건황궁에도 섭취할만한 예술적가치가 있는 작품들이 많으리라고 생각되며 그것을 발굴하여 오늘에 리용하는것은 나쁜 일이 없다고 생각된다. 중국고대의 녀성문학은 모종의미에서 기생문학이였다. 이 기생문학을 빼놓으면 중국의 녀성문학연구가 완정하다고 할수 없을것이다. 조선반도의 황진의 문학이 기생문학이였는데 그녀는 얼마나 좋은 시조를 썼는가는 주지의 사실이다. 력사가 유구한 중국의 기생문화도 이와같은 명주들이 많으리라고 생각된다. 땅이 두텁고 비옥하여야 농사가 잘 되듯이 고금중외의 예술을 잘 연구하여 우리의 바탕으로 삶아야 새로운 멋들어진 창작을 이룩할것이다.
시에서의 10가지 구별
전통시와 현대시가 어떻게 다른가. 이 과제는 우리가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학자가 연구해야 할뿐만 아니라 비평가도 연구하여야 하며 시인도 연구하여야 한다. 물론 시인은 비평가나 학자보다 심도가 깊게 광도가 넓게 요구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개략적인것에 대하여서는 판별할줄 알아야 되는것으로 알고있다. 아래에 열가지 방면이로 우리가 말하는 전통시와 현대시의 구별에 대한 졸견을 말하려 한다.
1)제재를 다스리는 방면에서 전통시와 현대시는 엄격한 구별이 있다. 전통시는 시적대상을 잡으면 그것을 직접적으로 정면적으로 노래하지만 현대시는 그것을 간접적으로 외둘러 노래한다.
2)주제를 표현하는 방면에서 전통시는 드러내고 말하지만 현대시는 감추기를 하면서 이미지로 말한다.
3)시를 쓰는 기법에서 전통시는 모방을 중심으로 하지만 현대시는 표현을 중심으로 한다. 소위 모방이란 시적대상을 보는대로 있는그대로 느끼는 대로 쓰려는것이고 표현이란것은 시인이 보고 느낀것을 원래의 사물과 다른 사물운동으로 이미지를 만드는것이다.
4)비유법을 사용함에 있어서 전통시는 직유를 쓰기 좋아하지만 현대시는 은유나 상징을 쓰기 좋아한다. 현대시에서 직유는 금물로 되여있다. 전통시는 어떤 비슷한 점을 강조하면서 비유를 만들려 하지만 현대시는 성질이 완전히 다른 사물사이의 균형을 잡으면서 비유를 조직한다
5)시적효과를 론함에 있어서 전통시는 교육적목적을 중시하면서 실용주의 공리주의 경향을 보이지만 현대시는 심미적목적을 내세운다. 이리하여 전통시는 한번 보면 무엇을 썼다는것이 인차 알리지만 현대시는 몽롱미가 있어 음미하지 않으면 안 된다.
6)언어사용에서 전통시는 언어의 원의미를 그대로 살리기 위하여 애쓰지만 현대시는 언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전통시언어는 기성문법과 론리를 지키지만 현대시언어는 기성문법과 론리를 도외시하고 폭력적조합으로 언어를 새롭게 창출하고 이미지를 새롭게 창출한다.
7)사유방면에서 전통시는 현실을 정시하는 현실적사유를 주장하면서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있지만 현대시는 초월적사유를 숭상하면서 사유의 공간을 부단히 확장하고 환상으로 가상현실을 기도한다.
8)시를 시작할 때 전통시는 현재의 의식에서 시작하지만 현대시는 현재의 의식을 밀어버리고 무의식속에서 새로운 사물이나 사실을 떠올리려고 시도한다.
9)시의 흐름에서 전통시는 시를 단선구조로 끌고 내려가려하지만 현대시 특히 초현실주의, 포스트모더니즘, 하이퍼텍스트와 같은 시들은 다선구조로 시를 만들기 위하여 애쓴다.
10)문체응용에서 전통시는 련결을 강조하고 순순히 풀려내려갈것을 원하지만 현대시는 의식의 흐름을 중시하면서 이미지와 이미지, 행과 행, 련과 련사이의 단절을 추구하며 분리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외에도 시와 소설과 평론의 관계를 말할수 있지만 간단히 짚고 넘어간다. 시와 소설은 문학의 근본이고 우선이면 평론은 시나 소설에 붙어서 사는 기생과 같은것이다. 시와 소설이 없음 평론은 할 말이 없게 된다. 창작자는 평론을 중시하여야 하지만 평론의 말을 우상처럼 받들 필요는 없다. 중요한것은 자신의 시나 소설을 잘 쓰는 일이다. 문단에서 창작을 리드하는것은 시나 소설 그자체이지 평론인것은 아니다. 시나 소설은 창작에서의 교과서라 한다면 평론은 참고문건에 지나지 않는다. 평론이 나쁘다고 하여 좋은 작품이 나빠지는것이 아니고 평론이 좋다고 하여 나쁜 작품이 좋아지는것은 아니다. 작품의 질은 작품자체에 의하여 결정되는것이지 평론에 의하여 결정되는것이 아니다.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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