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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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나의 문학관과 창작의 길

연길-카스 2만리 기행.5
2008년 11월 07일 07시 28분  조회:1805  추천:40  작성자: 최룡관
 

31.신비한 명사산(鸣沙山)과 월아천(月牙泉)


   돈황의 성남으로 20리를 가면 신비한 명사산과 월아천이 있다. 산을 미끄러져 내리면 소리가 난다고 명사산이라 부르고, 호수가 쪼각달처럼 생겼다고 하여 월아천이라 부른다. 우리는 점심술을 놓기 바쁘게 택시를 타고 그리로 달려갔다. 택시에서 내려 표를 사들고 출입문을 넘어서니 락타무리가 나타났다. 이 사막의 배들은 손님을 태우고 명사산과 월아천으로 가는 배들이였다. 지금은 려행기 비철이라 별로 이 배들을 리용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앞을 바라보니 하늘을 찌르고 솟은 명사산이 길을 막고있었다. 명사산이란 바로 우리의 눈앞의 길을 막고있는 모래산을 말하는것이다. 명사산기슭에  뼈만 앙상한 나무가 몇그루 장승처럼 서있다. 명사산의 허리에서는 사람 둴이 개미처럼 꼼지락거리고있었다. 우리는 사진도 찍을겸 배를 버리고 걸어서 사막의 바다로 들어갔다. 좁쌀알보다도 작은 보드라운 모래로 형성된 이 사막은 동서길이가 80리이고 남북으로 40리란다. 그러니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고비사막에 있는 작은 섬이렸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 언덕을 넘어서자 숲이 보이고 물이 보이는 오아시스가 나타났다. 조철호형은 사진을 찍느라고 바삐 돌아치고, 나는 사막의 신비한 경상에 도취되였다. 머리에 털이 나서 처음보는 사막인데다가 오아시스를 스쳐지나가는 마음이 황홀하다. 사막인것이 아니라 자연이 조각한 예술품이였다. 부드러운 산들은 병풍처럼 둘러섰는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발산하고있었다. 여기에다 목석을 세워놓아도 아-하고 감탄할만큼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였다.

   명사산을 오르는데는 새닥다리를 만들어 놓고 한사람한테서 10원씩 받아먹는 장사군이 있었다. 나와 조철호형은 새닥다리를 디디며 산으로 올랐다. 중간턱을 좀 넘어서 올라가 앉았다. 앞에는 살결부드러운 미녀의 라체같은 산이 마주하고있고, 그 산이 휘돌아서 우리를 지나갔다. 오른편을 내려다 보니 량옆에 파아란 못을 끼고 마을이 앉아있고, 우리쪽 마을기슭에는 난전들이 널려있었다. 희한한것은 왼쪽이였다. 모래산의 옹위하에 쪼각달같은 월아천이 있었다. 월아천가에는 옛집들이 두세채가 오붓하게 자리잡았다. 모래산과  물이 천년을 서로 범하지 않고 다정하게 살아가고있는 신화같은 고장이였다.

   사막의 배들이 정박해 있는 곳에 와서 기울어진 저녁해살이 비낀 명사산을 둘러보는것은 황홀한 향수였다. 더는 부드러울수 없는 명사산은 여러 가지 황홀경을 이루었다. 어찌보면 바다가를 휘돌아나간 장성같은 기세였고, 어찌보면 노란 파도가 갈기를 날리며 일어섰다가 물앉지 못하고 응고된 아름다움이였다. 산의 언저리를 따라 룡이 구불구불 기여오르는 같은데 산발은 미인의 허벅지같은 부드러움과 아릿다움으로 눈뿌리를 집요하게 빼앗아가고 , 크고 작은 봉우리들은 소녀의 봉긋한 젖무덤같아서 현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와락 끌어안고 몸을 비비고 싶었고, 산중턱에 가서 네각을 펴고 누워 영원히 돌아오지 않고 누워있지 못하는것이 한스러웠다. 풀 한포기 없고 나무 한그루 없고 물한방울 없는 산이지만 산중에서 명사산보다 더 아름다운 산이 이 세상에 더는 없으리라.

   아니, 뭘 그렇게 바라보오 하고 조형이 소리쳐서야 나는 명사산의 매혹에서 깨여났다. 야!- 정말 명사산이 아름답습니다! 나의 모든 세포가 저들도 모르게 감탄하였다.

   이튿날 아침 일찍이 우리는 돈황에 있는 지질공원을 향하여 떠났다. 가도가도 끊없는 고비사막이다. 무한무한 또 무한! 하늘도 위에 펼쳐지다 못하여 추욱 처져내린 무한이다. 차는 그냥 내리막길을 달려가고 있는 감각이다. 지평선 저 앞은 멀리서 보는 바다처럼 하얀데 차가 아무리 달려도 바다는 나타나지 않는다. 어디까지 왔는지 목표가 어데인지도 모르고 그냥 달리고 달리는것만 같다. 무수한 지평선을 넘어 우리는 돈황에서 유명한 자연지질공원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는 마귀성으로 왔다. 바람이 불면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하여 마귀성이란 이름을 가진 곳에 왔을 때는 점심때였다. 동서길이 50여리 남북너비 36리인 마귀성이 우리앞에 나타났다. 해발 810-970메트구간이란다.

   마귀성의 모래는 새까만 모래였다. 려행차를 타고 가다가 세우고 몇 개 지점을 돌아보는데 새까만 모래우에 새노란 흙무지, 실은 바위라 말하자니 바위가 아니고 흙이라 말하자니 흙도 아닌것들이 기기괴괴하게 여러 가지 모형으로 서있었다. 그것도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에서 부감하면 검은 바다우로 무한히 많은 선박들이 달리고있는 장관이다. 수억만년을 달리고 달렸지만 아직도 뭍에 닿지 못하여 그냥 줄기차게 달리고 있는 선박들의 무리. 가까이서 보면 서있는것도 있고, 누워있는것도 있고, 불쑥 솟았는가하면 구불구불 기기도 하고, 저마다 생김새도 각각이여서  말로써는 그 경상을 표현할길이 없다. 세상에 이런  신비한 세계도 있는가. 나무도 없고 풀도 없고 물도 없는 세계! 곤충도 없고 동물도 없는 세계. 그곳은 반고가 하늘을 열었을 때 탄생한 세계였다. 거기는 구석기시대 이전, 아니 류인원시대도 아닌 땅이 금방 태여난 세계였다. 땅이 금방 태여났을 때 어떤 모습이였던가를 보려면 아마 마귀성으로 와봐야 할것만 같았다. 와보지 않고서는 근본적으로 상상하여 낼수도 없는 기이한 세계. 자연의 신비에 머리가 숙어지는 아아 마귀성이여...


32. 기이한 투루판


  11월 28일 우리는 중국에서 유명한 곳인 투루판에서 아침을 맞이하였다. 투루판은 옛날에는 고창이라 부렀고, 또 서주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유구한 력사를 품고있는 투루판은 지금도 대량의 문화유물을 보존하고 있는고장으로서 천연박물관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자연적인 모든것의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은 고장이여서 투루판은 중국서부에서 신비한 색채가 가득한 고장으로서 소문이 나있다.

   여기의 아침은 출근시간이 열시였다. 점심시간은 북경시간으로 오후 두시부터 4시사이였고, 퇴근시간은 오후 8,9시였다. 여름에 무더울 때는 오후 네시부터 일곱시반까지 출근하는 고장이였다. 예날에 이곳을 내지와 다른 서역이라 불렀는데 지금도 여기는 딴 세상 같았다. 아이들과  로인들은 한어를 모르기에  말부터 잘 통하지 않았고, 음식이란 거개가 양고기여서 돼지고기를 먹자하여도 신경을 써야 하는 고장이였고, 우리가 좋아하는 개고기는 근본적으로 있는것같지 않았다. 밥대신 밀가루로 만든 빵이였고, 국이란 양고기국이였고, 속을 넣은 빵이라해도 양고기속이였다. 빵을 굽는것도 솥에다 붙혀서 굽는 것이 아니라 흙으로 빚은 항아리를 달구면서 그속에다 척척 붙혀서 구워내였다.

  아침에 양고기국에 만든 칼국수를 먹고 화염산을 향하였다. 투루판에서 유명한것이 화염산이다. 화염산은 평균해발이 500메트좌우되고 제일 높은 봉우리라야 851메트밖에 안된다. 산의 길이는 200리를 넘지않는다. 택시창문으로 들어오는 화염산은 눈을 떠서 첨보는 산이였다. 나무 한 대 풀 한포기 없는 민둥산이였다. 차가 산줄기사이를 지나가는데 좌우에 줄기를 뻗친 화염산은 누우런 색갈이다. 산발엔 내리 주름이 가득하였다. 여러층으로 높이 솟은 층층마다 패인 주름은 각각이였다. 직선으로 내리뻗은 주름은 하나도 없고 죄다 구불구불하였다. 우리가 간 때는 겨울이여서 찬 바람이 불었지만 여름이면 섭시 70도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그러니까 <<사막에서 달걀을 굽고 고비사막에서 대병을 굽는다>>는 말은 헛소리가 아닐것이였다. 여름의 태양이 비추면 산이 열을 내면서 붉은 빛을 반사하기에 산이 산으로 본이지 않고 산이 불길로 보이고 불덩어리로 보여서 화염산이라는 이름을 가지였다고한다.

   중국고대의 서적 <<산해경 (山海经)>>에서는 화염산을 염화지산(炎火支山)라고 밝히였고, 수당시기 력사서적에는 적석산(赤石山)이라고 밝히였다. 오늘 화염산이라고 쓰는것은 명나라때의 유명한 려행가 진성(陈诚)이라는 사람이 1414년에 서역을 돌아보고 <<서역행정기>> (西域行程记)라는 기행을 쓸 때 화염산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떠올린후부터 내려온 이름이다. 화염산은 당지의 위그르족말로 하면 키질라타크인데 우리말로 하면 붉은 산이라는 뜻이다. 버즈커리커석굴에 도착하여 화염산을 바라보니 하늘을 찌르고 높이 솟아있다. 산골짜기로 물이 흘러내리는데 자갈한알 보이지 않고 맑은 물이 그냥 흙위로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흙골짜기가 아득하게 내려다보이였다. 황토고원의 최고 흙두께가 200메트라던 말이 실감나는 화염산골짜기였다.

   투루판에는 유명한 고창고성과 교하고성이 있다. 화염산에서 내려온 우리는 고창고성으로 갔다. 고창고성은 투루판에서 동으로 40키로 떨어진 곳에 있었다. 고창고성은 비단의 길에서의 번성한 상업성시였다. 고대서역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의 중심이기도 하였다. 기원전 1세기에 일어섰다가 14세기에 페기된 고창고성은 서한의 군사요지였다. 한나라, 위나라, 진나라에서도 무기교위를 고창에 파견하여 주둔시켜서 일면 무기교위성이라고도 불렀다. 동진때에는 고창군으로 되였다가 후에는 고창왕성으로 되였는데 당년의 허다한 중대한 사건이 고창왕성에서 일어났다. 그리하여 서북의 중요한 정치중심이였다. 당나라때에는 서주치소(西洲治所)라 하였고, 10세기 중엽후에는 서주회골왕성(西洲廻鹘王城)으로 되었다. 13세기에 40여년간 병재를 입은 고창성은 번화하던 번성기를 잃어버렸을뿐만 아니라 지면의 건축물들도 여지없는 파괴를 입어 우리 앞에 나타난것은 시누런 흙으로 된 성과 흙으로 된 유적들뿐이였다.

   당년에 왕궁도 있고, 관서도 있고 절당도 있고, 술공장도 있고, 동병기공장도 있었건만 지금은 그 자리조차 알아볼 길이 없고 흙벽들의 잔해들만 여러 가지 형태로 어마마하게 널려있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서있노라면 당년의 왕궁에서 호령하던 황제의 모습이 보이는듯하고, 병장기를 만드느라고 치던 메질소리가 들리는듯도 하고, 술공장에서 솔솔 날려오는 포도주 냄새가 풍기는듯도 하고, 절당에서 경을 읽는 소리가 들리는듯도 하다. 하지만 흙무지들이 우중충하게 서있을뿐 력사의 풍운은 여기의 모든것을 휩쓸어가서 쓸쓸한 흙성과 흙벽들만이 처량하다.

   베제클리클석굴에 가봐도 그렇고 소공탑에 와봐도 그렇다. 흙으로 만든 것들이 바람과 비를 맞으며 수천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 모색이 변하지 않고 창연하다. 소공탑은 청나라 건륭 42년에 흙으로 빚어세운 44메트높이를 가진 꽃병같은 뾰족탑이였는데 그 모습이 고색창연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발산하고 있었다. 투루판의 기후는 고맙게도 흙을 빚어 세상에 남겨놓은 모든것을 그대로 보존하는 습관이 있었다.

   투루판의 시장에 가면 제일 눈에 뜨이는것이 건포도이다. 건포도는 색갈도 여러 가지이다. 붉은것 , 파란것, 노란 것, 하얀것, 갈색... 시장의 포도가 여러 가지 색갈이지만 포도를 말리우는 시설은 한모양이였다. 집집마다 건포도 건조실이 있는데 거개가 구워내지 않은 흙벽돌로 쌓은 건조실이였다. 벽돌장과 벽돌장사이에 공간을 내여 바람이 잘 통하게 하고 너비보다 길이가 더긴 장방형건조실. 투루판의 포도는 국내외에 소문이 자자한 유명한 포도인데 기막히게 단것이였다. 우리가 연변에서 먹는 포도는 거기 포도처럼 그렇게 단것같지 않았다. 투루판에서는 해마다 8월이면 3만여명이 동원되는 포도절을 새면서 국내외의 손님들을 끌여들여 흥성흥성한 나날을 며칠씩 보낸다고 한다. 포도라는 식물의 원산지는 지중해연안의것인데 지금부터 2000여년전부터  투루판에도 포도가 생겨났다고 한다. 누가 가져왔는가는 아직도 비밀로 되여있다. 장건이 가져왔다는 설이 있는데 그것도 어떤 확연한 증거가 없단다. 투루판에는 지금 놀랍게도 100여종의 포도가 나고있고 포도골이라는 곳도 있다.  투루판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포도의 산지이다. 어찌보면 투루판은 포도과원이라고 해야 할것만 같다. 유서깊은 투루판, 유서깊은 포도 이것이 투루판에서 받은  깊은 인상의 하나이기도 하다...


33.꿈처럼 바람처럼 대사막을 횡단


  12월 1일. 우리는 타클라마칸사막을 건너가기 위하여 룬타이(轮臺)에서 새벽 8시전에 운수소앞마당에 나섰다. 그런데 룬타이로 가는 버스가 나타나지 않을줄이야. 택시들은 우리를 싣겠다고 아우성을 지르고, 우리는 일반차를 타고 사막을 넘어보겠다고 싱갱이질하였다. 기다리다못하여 우리는 타클라마칸사막으로 나가는 길목에 가서 기다리기로 하고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비 20원을 내고 동쪽의 쿠처(库车)와 서쪽의 룬타이에서 사막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가서섰다. 희뿜히 밝아오는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였고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우리는 아무 차나 잡아타려고 하였다. 쿠처와 룬타이 사이로 차들은 이따금씩 나타지만 우리쪽으로 오는 차는 나타나지 않았다. 몇대가 지나가면서 세워주는것도 있었지만 사막으로 들어가는 차는 없었다. 날이 다 밝아서야 트럭두대가 쌍을 지어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우리는 거이 길을 막다시피하고 차를 세우라고 손을 들었다. 웬놈이냐는듯 우리옆을 스치던 차가 삐익하고 멈추어섰다. 운전수만 앉은 기름을 나르는 기름통차였다. 나는 달려가서 인사를 하고 민풍차구(民豊岔口)로 가는데 실어줄수 없느냐고 물었다. 지도에서 보면 민풍차구는 타클라마칸사막의 중간에 있는 작은 향진이였다. 우선 그곳까지만이라도 가고 보자는 우리였다. 고맙게도 운전수는 우리더러 한차에 한사람씩 타라고 하였다. 나는 앞차에 앉고 조형은 뒤차에 앉았다. 안고보니 그차가 타클라마칸사막의 남단에 있는 민풍을  지나 카스(客甚)로 가는 길의 중간에 있는 화전까지 간다고 하지 않겠는가. 천만다행으로 하늘에서 복이 떨어진셈이였다.

  우리가 가는 길은 국도는 아니였지만 포장길이여서 차가 달리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차가 달리는 2,3백리 구간에는 사막이라 하지만 키작은 나무와 풀들이 자라고있었다. 운전수의 말에 의하면 이 구간은 개간하여도 된다는것이였다. 순간 나는 중국에는 아직도 땅에 비하여 인구가 작다는 감이 들었다. 여기에 인가가 들어앉으면 적어도 1억은 용납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38세인 운전수는 20년이나 신강에서 차를 몰았다고 한다. 집은 하남성정주에 있는데 자식은 딸이 하나라고 한다. 한달 로임은 3000원이란다. 돈버는 재미에 가족과 멀리 떨어져있으면서 일년에 한두번씩 정주로 다녀온다고 한다. 정주에 그의 회사가 있는데 안해는 회사에 출근한단다. 인제는 견우와 직녀 생활에 적응되였다나.

   차가 둬시간 남짓이 달리자 이상한 환경이 나타났다. 길 좌우에 수림이 나타났던것이다. 나는 눈이 확 뜨이였다. 한아름이 넘는 나무들의 밀림이였다. 나무들의 키는 굵기에 맞지 않게 작은편이였지만 진짜 사막에 뿌리를 박고있었던것이다. 밑뿌리 두리에는 빨간단풍잎들이 양산을 펼친듯이 동그랗게 내려앉아있었다. 천녀의 치맛자락을 방불케 한는 단풍잎이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나무를 처음 보는지라 가만히 앉아서 볼수만 없었다. 괴춤에 차고 다니는 사진기를 꺼내려고 손을 대는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수가 없었다. 괴춤에는 홀죽한 사진기를 넣는 주머니만 있고 사진기가 없었다. 정신없이 사진기를 찾았다. 사진기는 나지지 않았다. 마침 차가 한 마을에 들어섰다. 나는 차를 세우고 부랴부랴 달려가서 뒤에서 오는 조형의 차를 세웠다.

  <<무슨일입니까?>> 조형이 차문을 열고 나에게 물었다.

  <<사진기를 잃어먹었습니다. 돌아가서 찾아가지고 다시 옵시다.>>

  <<안 됩니다. 그냥 갑시다. 잃어버리면 버렸지 이제 어디라고 다시 간단말입니까.>>

   조형의 강렬한 주장에 나는 숙으러드는수밖에 없었다. 참 아까운 사진기를 여기 사막에 외롭게 두고간다는것이 가슴 저린 일이 아닐수 없었다. 조형은 그 놀라이섹스 사진기를 가지고 전 세계를 유람하며 기념을 남기였다. 아무리 눅거리로 값을 쳐도 인민페로 3000원은 넘는 사진기였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호텔에서는 확실하게 갖고 나온 사진기, 차를 기다리는 길목에서 뒤를 볼 때 떨구었음이 분명하였다. 사막을 넘는 온 하루 나는 사진기 때문에 배를 앓았다. 조형에게 너무 미안을 끼치는것도 있지만 사진기보다 귀중한것은 그안에 스물대여섯장이나 되는 현장사진이다. 중도에서 점심을 먹고 파출소를 찾아갔다. 파출소판공실은 판자집이였다. 거기서 룬남진파출소전화 0996-4954-110에 련락하여 이틀이나 씨악질하였으나 사진기는 영영 나의 몸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사진기를 잃어먹었다고 일깨워준 고르라크수림은 그냥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 차창옆을 스쳐지나고있었다. 물한방울 없는 사막에서 모래로 밥을 지어먹으며 아름다운 록음을 펼치며 살아가는 고르라크. 그것은 나무가 아니라 신비한 존재로 나의 가슴에 자신의 도안을 각인시켜주고있었다. 인간세상에서 잘 싸우는 사람을 용사라하고 공을 세운 사람을 영웅이라 부른다. 고르라크야말로 사막의 용사이고 영웅이다. 오늘 이 영웅들의 대오를 검열하는 행운을 가진것으로 하여 행복하다.

   운전수는 나에게 고르라크는 천년을 죽지 않고 천년을 넘어지지 않고 천년을 썩지 않는 나무라고 말한다. 저 작은 고르라크라도 몇천년을 살았는지 알수 없단다. 보통은 5000년을 살았을것이고, 제일 나많은 나무는 아마 10000살은 되었을거라고 한다. 그러니 저 수림속의 어느 고르라크는 100세기 년륜을 아로새기고 있을것이 아닌가. 바위도 아니고 벼랑도 아닌 나무가 100세기 풍상을 헤치면서 100세기 사막력사를 증언한다는것은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시인인 조형은 후에 이런 시를 써내였다.


고르라크를 위한 회상

              조철호


누가 그대에게

살아서 천년을 견딘 나무라고

누가 그대에게

죽어서 천년을 견딘 나무라고

누가 그대에게

스러져서 천년을 견딘 나무라고

질기고 질긴 목숨

3천년을 견딘 나무라고

모두

찬탄과 부러운 눈길 주어도

그대는 자랑스럽지 않네

오늘은 별이 떴어라

모래바람을 뚫은이들은 죽음의 바다라고

시인은 목이 말라도 아름다운것을 감출수 없는 녀인의 알몸이라고

여행자는 구도자의 길이 여기 있노라고

저마다 사막을 말하지만

그대는 알고있네

사막은 찾는이의 마음에 따라 지옥도 되고 궁전도 되는곳

천년을 살지 않아도

사막을 지키는건 말 없이 지평을 넘어가는 락타라는것을

그리고 그대 나이를 부러워하던 뭇사람들은

그 빈자리에 목을 추기는 문명을 따라 떠나가고 늙은 락타의 눈망울속에만

고르라크

그대의 모습 선연함을 나는 알겠네


그렇다. 이 망망한 사막의 대해속에서 서로의 선연함을 아는것은 오직 락타와 고르라크일것이다. 그들만이 사막의 진정한 주인이고, 그들만이 사막을 자기의 고향이고 살만한 곳이라는것을 피부로 알고있을것이다. 그들의 눈길만이 사막이 아름다움을 보아낼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지금 넘어가고있는 곳은 타클라마칸사막 천리횡단이다. 조형이 어찌 넘으랴고 태산같이 근심하던 길이다. 차는 그냥 90-100키로의 시속으로 달리지만 굼벵이처럼 기여가는것만 같다. 가도가도 아득하기만 한 사막의 바다다. 그런데 이 사막을 개조하기 위하여 나라에서는 해마다 2000만원을 투자하고있었다. 길량쪽으로 관개용 우물이 4키로메트에 하나씩 있는데 우물우에는 빨간 기화에 람색벽을 가진  작은 집이 있다. 우물집과 집사이에는 100메트에 하나씩 물을 분배하는 작은 물땅크가 있고, 천리사막을 가로 질러 10여갈래(어떤 곳은 20갈래도 넘는다)의 물줄이 줄줄이 늘여져있다. 물줄사이에는 마른 풀들이 심어져있었다. 우리가 간 시절이 겨울이여서 그렇지 여름이면 물줄에서 물이 뿜어나오면서 풀들에게 젖을 먹인다고 한다. 어떤 구간에다는 모래가 날리여 길을 엄습하는것을 방지하느라고 갈대같은것으로 바자를 엮어서 모래를 방지하고 있었다. 천리길에 한메트도 빼여놓지 않고 이런 시설이 있으니 인간이 자연을 개조하기 위하여, 살아가기 위하여 모지름을 쓰고있는 정경이 눈물겹게 안겨오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조화는 한입으로 다 말하기 어렵다. 저 멀리 산줄기처럼 뻗어나간 모래산맥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길좌우의 어떤곳은 묘지를 방불케 하기도 하고, 련줄련줄 밀려오는 노란 바다의 파도를 방불케 하기도 하고, 밋밋한 산우의 무한한 등판을 방불케 하기도 한다. 사막의 조화의 주인공은 바람이다. 바람이 지나가는 발자국자리는 아름답다. 잔주름은 잔잔한 물무늬요 물무늬를 지나면 백사장에 널려있는 조개무리가 나타나기도 한다. 때론 금사주단을 펴놓기도 하다가 장성을 쌓아놓기도 한다. 바람은 여기서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그려보기도 하고, 이 세상의 모든 재앙을 엮어보기도 한다. 우리는 모래의 왕국 바람의 왕국을 온 하루 달리였다.

  해질녁에야 우리앞에 초지가 나타났다. 망망한 초지에 이따금 집들이 보이였다. 석양이 비낀 초지마을엔 집이 많아야 서너채. 어떤 집은 아예 망망한 대해의 일편엽주처럼 홀로 떠있었다. 운전수는 차를 몰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여기 사람들은 호적이라는것이 없고 법이라는것이 없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먹고 살며 어떻게 사는가는 누구도 모릅니다. 그들은 근친 결혼은 물론 한 남자에 여러자매나 한녀자에 여러형제가 엉키여 산답니다. 확실히 그런지는 모르지만 끔직스러운 이야기다. 집들이 몇채있는 마을에도 사람은 본이지 않고 양만 몇마리 보이는 이런 고장은 아직도 원시적인 생활이 영위되고 있을것만 같아서 바라보는 내 마음이 쓸쓸하기도 하고 처량하기도 하였다.


34. 위그르족의 풍속도


   하루사이에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타클라마칸사막의 1200여리를 꿈처럼 바람처럼 횡단한 우리는 민풍에서 하루밤을 묵고, 이튿날 새벽에  화전으로 향하였다. 민풍과 화전사이에 있는 우전이라는 곳에서 아침을 먹게 되였다. 길가에 있는 식당이다. 식당이래야 어머니와 아들이 경영하고있었다. 마당에다 천을 쳐놓고 상두어개를 놓고있었고, 간편한 부뚜막을 만들어놓았다. 나는 초맨(炒糆)을 시켜놓고,  위그르족이 사는 집안으로  들어가보았다. 집안은 장방형 단간방이였다. 벽에다는 주단을 치고, 주단방석을 깐 쏘파가 벽밑에 놓여있었고, 한쪽에는 침대가 있었다. 창문쪽에 놓여있는 그릇에는 밀가루반죽오리가 흰 뱀처럼 따발을 틀고있었다. 음식을 주문 받자 아들이 어디론가 달려가 양고기 한덩이를 가져다가 한줌만큼 잘라내여 채칼에 친것처럼 자잘하게  쏠았다. 그는 배추와 고추도 잘게 쏜후 채가마에다 먼저 양고기와 파를 넣고닦는다. 양고기가 익자 배추와 고추를 넣어닦는다. 채가마를 흔들 때마다 붉은 불길이 펄펄 일었다. 그후 도마도 하나를 썰어서 넣고 또 불길이 펄펄 일게 흔들어댄다. 그런 다음 물 네국자를 넣고 마늘 네알을 칼등으로 짓쫗아넣는다. 그리고는 시금치 한줌을 넣고 잠간 끌인다음 간을 맞추었다. 

   어머니는 한발쯤되는 하얀 떡오리를 잘라내다가 두세겹으로 접은다음 칼판에 대고 납작하게 꾹꾹 눌렀다. 그것을 왼쪽팔목에 걸고나서 남비에서 끓고있는 물에다 뜯어던지였다. 큰 손가락마디만큼한 떡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남비안으로 나비처럼 날아갔다. 떡이 다 익자 구멍이 숭숭한 양철광주리에 담아 물을 빼였다.

  떡이 익고 국이 끓자 떡과 국을 함께 버무려서 네사발에 나누었다. 떡하나도 국물 한방울도 남지 않는 네그릇이였다. 초맨은 달큼,시큼한 맛이 났고 떡은 쫄깃쫄깃하였다. 값은 한그릇에 5원이였다. 남보다 일찌기 20원을 챙겼다고 식당주인은 얼굴에 환한 웃음을 떠올리였다.

   화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우리들은 고마운 운전수들과 갈라지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20원짜리 택시까지 잡아주면서 안녕히 가라고 하였다. 조형이 한국에서 가져온 스타킨 한쌍씩 그들에게 주었다. 운전수들은 외제품 한국스타킨이라고 얼굴이 벙글벙글 했다. 조형은 연도에서 그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보내주겠다며 그들의 주소를 수첩에 적어넣기도 하였다.


35. 중국에서의 최고 옥

 

   화전(和田)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옥이 나는 옥의 산지다. 대단히 큰 시내는 아니고 진쯤되는 고장이였다. 2003년 8월 3일 북경에서 오림픽휘장공개회를 열었다. 오림픽휘장은 가치가 10억딸라에 달하는 옥으로 만든것인데 그 옥이 신강의 화전옥이였다. 이 소식이 공포되자 사람들은 놀람을 금치 못했고, 화전옥이라는 이름이 중국과 세계에 쫙 퍼지였다. 따라서 화전옥은 중국에서 제일 유명한 옥으로 부상되였고 값이 껑충 뛰여올랐다고 한다.

  화전에 이른 우리는 시내구경을 하면서 옥상점에 가보았다. 옥상점거리가 있었다. 백옥, 흑옥,청옥, 홍옥 여러 가지 옥들이 있었는데 모두가 일품이였달. 백옥은 그 이상 더는 흴수 없는것이였고, 흑옥은 그이상 더는 검을수 없는 옥이였고, 청옥은 더 이상 푸를수 없는 옥이였다. 옥을 보는 순간 어쩐지 마음이 평온해지고 차분해 지였다. 가격을 둘러보니 콩알 반쪽만한 백옥 한알에 50원이고, 크고 비싼 것은 몇만딸라씩 하기도 하고 몇십만 딸라짜리도 있었다.

  중화민족은 예로부터 옥을 보물로 신봉해왔다. 옥은 돌이지만 력래로 돌중의 왕으로 추대되여 사람들의 심목에 보물로 되어왔고, 재부로 되어왔으며, 부유의 상징으로 되여왔다. 옥은 물질적이기보다는 사회적문화적인 관념이 더 강하다. 중국의 어느 조대때의 사상가들부터 그랬는지는 알수 없으나 옥에다 인(仁),지(智), 의(义) ,례(礼), 락(樂), 충(忠), 신(信), 도(道), 덕(德) 등 9가지 개념을 부어넣어 옥은 사회도덕의 상징으로 되여 풍부한 정신내함을 배태하게 되었다. 옥은 또 고귀하고 순결하고 친선적이고  화평을 표현할뿐만 아니라 훌륭한 길상물이고, 화사한 장식품이여서 인간세상의 아름다움의 집중적표현이라고도 할수있다.

   옥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가공하여 상품으로 개발하였는데 그 내함이 대단히 풍부하다. 류협이 쓴 유명한 고전 <<문심조룡>>에는 이런 명언이 있다. <<아름다운 옥에는 꼭 정채로운 무늬가 있다>>.류협의 명언처럼 화전옥에는 여러 가지 정채로운 무늬가 있어서 그 뜻이 심오하다.

   옥은 무늬를 가짐으로써 여러 가지 식물로 다시 태여나면서 새로운 생명체로 발족한다. 매란죽국(梅兰竹菊)은 꽃중의 4군자라고 하면서 미인들의 고상한 품성을 나타내고, 소나무는 사지장철 푸르름을 나타내고, 복숭아와 락화생은 건강장수를 나타내고, 목단은 부귀영화를 타나내고, 석류는 백자(百子)라 가문의 흥성을 말하고, 련꽃은 진흙속에서 살지만 때가 묻지 않아 청렴하고 순수한것을 나타내고, 령지는 하는 일이 뜻대로 됨을 나타낸다...

   옥은 무늬로  여러 가지 동물로 변신하면서 새로운 내함을 가진다. 말옥은 하늘을 찌르는 호기를 나타내는가 하면 성공을 나타내고, 사슴옥은 작록(爵禄)을 상징하고 , 룡옥은 존귀를 표현하고 , 봉황옥은 고귀한것을 상징하고, 원앙새옥은 사랑과 부처간의 화목을 표현한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면서 문인묵객들이 동물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하였는데 그런 의미들은 옥으로 만든 동물에서도 나타나고있는것이다.

  옥은 무늬로 하여 신선이나 인간으로 탈바꿈하면서  여러 가지 뜻을 표현한다. 석가모니, 관음보살이 있는가 하면 미륵불, 라한, 여덟신선등이다. 보나마나 종교신앙을 표상한것들이다. 민간영웅인물들이 많은데 그들은 모두가 력사상에 위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나 신화전설중의 인물들이다. 보통인물들도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으로부터 아름다운 축복을 보낼만한 인물들이다. 아이들은 천진란만한것을, 로인들은 만년장수를 축원하는 바람을 표현한것들이 그 일례로 된다.

   그 외에도 추상적으로 무늬거나 글자를 쓴것들도 있다. 그 무늬와 글자를 통하여 여러 가지 인간의 마음을 표현한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옥에 패말을 새겨 걸어도 평안무사하다는 표현이니 옥의 뜻은 이루다 헤아릴길이 없다. 가공한 옥의 뜻들은 조대가 바뀌고 세월이 흐른다음 사람들이 제련해낸 사상의 정화들로 된다. 하나의 도안 하나의 언어는 모두 사람들의 마음속의 심정을 표현한것이다. 화전옥은 그 하나하나가 중화민족의 자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이 있다겠다. 그리하여 생명이 없는곳에 생명이 약동하고 소리가 없는 곳에 거대한 진동이 있다.

 

36.맨 서쪽의 도시 - 카스(喀甚)


   타클라마칸사막의 남쪽변두리를 밟고 우리가 탄차는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린다. 카스는 중국에서 제일 서쪽에 있는 도시이다. 천산이 이따금 머리를 내밀고 보다가 멀리 사라질뿐 무야평지이다. 동안뜨게 나타나는 이름모를 마을들은 백양나무숲에 가리워져있다. 신강의 집들은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억새나 풀로 벽을 엮고 흙을 발라서 지은 집들이다. 집들은 모두 성냥갑처럼 생겼는데 널판자로 만든 출입문들에는 무늬들을 새겼다. 나는 연도의 한 고장을 지나가다가 가슴이 섬찍한 일을 목격하였다. 이슬람교를 믿는 그곳의 사람들은 대낮에 밖에서 수백명이 모여서 하늘에 절을 올리고있었다. 신강위르족의 신앙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런 광경을 처음보는 나였다. 두번째로 놀란 것은 영길이라는 곳을 벗어나자 하얀 소금의 바다가 백여리에 펼쳐지였다. 땅소금이 있다는 말은 들었으나 제눈으로 보기는 이번의 처음이였다. 옆의 사람과 물어보니 그 소금은 식용으로는 쓰지 못한다는것이였다. 서운했다. 카스에 도착한 날은 12월 3일이였다.

   카스의 호텔들은 광장과 멀지 않는 십자로에 집중되여 있었다. 카스의 광장은 어찌보면 천안문광장을 상기시키는 광장이였다. 천안문이 없을뿐이지 천안문광장처럼 생기였다. 천안문대신 광장에는 거대한 모택동주석의 동상이 모셔져있었다. 모택동주석은 거기서서 오른팔을 추켜들고 있었는데 오늘도 홍위병들을 접견하고 있는것만 같았고, 앞길을 가리키고 있는것만 같았다. 모택동주석의 동상은 백색화강암으로 쌓아올리고 뒤에 휘연히 펼쳐진 담벽에다 모택동시사 심원춘 <<눈>>을  새겨놓았다. <<북국의 풍광 천리에 얼음 얼고 만리에 눈 날리네>>라는 글발이 시인의 친필체로 새겨져 금빛을 뿌리고있었다. 모택동동상은 서안에서 보고 여기와서 보았는데 참 잘 보존하였다고 생각되였다. 당년에 전국 어디서나 동상을 모시였는데 한때 전국 어디서나 허물어버리였다. 하지만 서안과 카스에서는 허물지 않고있었다. 남들이 허물 때 허물지 않고 력사의 현장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는것은 력사에 대한 존중이며 아름다움이 아닐수 없었다. 그런데 유감스러운것은 마음대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것이였다. 새로운 <<홍위병>>들이 길을 막고있었다. 낮에도 밤에도 그냥 지키고있어 야릇한 감이 없지 않았다. 보존했으면 응당 아무 사람들이나 마음대로 가까이서 보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모택동동상앞에서 아이러니컬한 희극 제2막이 공연되고있었다. 기다란 붉은 프랑카트를 동상의 앞에 띄웠는데  프랑카트에는 이런 글발이 씌여져있었다. 카스를 에이즈병을 방지하는 선진구역으로 건설하자. 에이즈병 예방 방지 표병으로 되자는 따위의 구호가 숭엄하고 위대한 정치가의 동상앞에서 펄럭이였다. 동상의 어깨와 머리우에는 이따금 비둘기들이 날아와 않아서 구구거리며 똥을 싸고있었다. 이러한것들이 카스사람들 눈에는 어떻게 보이겠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눈에는 참 안스러운것으로 보이였다.

   광장은 천안문광장처럼 정방형이였는데 사위에는 고층빌딩들이 줄느런히 들어섰다. 광장두리에는  궹장히 큰 붉은 등불이 한면에 여섯개씩 걸려있고, 자잘한 등불들은 몇개인지 헤아릴수 없게 많았다. 동상 맞은켠에다는 좌우에 천안문앞의 금수교와 같은 다리를 두쌍씩 세웠는데 그쪽으로 광장을 나가려면 그 다리를 건너는것이 멋으로 보이였다. 중국서쪽의 막 끝에 있는 서울이라는것을 련상시키는 카스광장이였다.

   카스에는 중국에서 제일 크다는 청진사(清真寺)가 있다.청진사는 1442년(이슬람교력 862년)에 건설한 이슬람교례배당으로서 1955년에 전면적으로 수건하고, 1962년에는 신강자치구 문화유물보호단위로 되었고,  1983년에는 국가에서 돈을 내여 다시 수건하였고, 2001년에는 드디여 국가 중점문화유물보호단위로 된 청진사이다. 중국에서 제일 크다는 호기심으로 청진사에 들어간 우리는 적이 실망이 갔다. 사안에는 아무것도 없고 주단만 깔려있었다. 종래로 례배당이란 어떤 곳인지 모르는 나는 그안에 무슨 굉장한것이 있으려니 했던것이다. 이슬람교에 대하여 백치인 자신이 유치하고 우스운 존재였던것을 실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조형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던지 돈을 받고 관람시키는 자체가 대동강물을 팔아먹는놈과 똑 같애 하고 비양거리였다.

   카스에는 유명한 향비묘가 있다. 우리는 인민광장에서 20번 버스를 타고 그리로 갔다. 이묘를 위그르족말로 아바허쟈마짜라고 부른다. 마짜란 묘지란 뜻이다. 묘지는 록색의 류리벽돌로 쌓아올리였고 간벽사이는 하얀벽이여서 조형이 온건하고 간결하였고 색채가 선명하였다. 두터운 벽의 네귀는  탑식으로 고정되여 집모양이 특별하고 전형적인 이슬람교건축풍격을 현시하고있었다. 둥그런 지붕의  꼭대기에 탑식덧붙이를 하여 여자의 젖무덤을 방불케 하였다. 해빛에 눈부신 묘지건물은 칠색의 눈부신빛을 뿌리였다. 문에다는 아름다운 도안을 그리였고 량쪽의 벽은 미황색의 석고로 장식하였는데 조각이 섬세하였다. 주요한 묘실은 네개의 아치형천정이 가운데의 커다란  궁륭식 천정을 받들고있었다. 1640년에 건축한 이 묘지안에다는 아바허쟈의 5대의 시체 72인이 묘셔져있다. 관우에는 여러 가지 도안의 천이 덮혀있고 벽은 하얀 색이여서 묘실안은 아늑하고 정숙하였다.

   이 묘지를 사람들은 향비(香妃)묘라고 부르기도 한다. 향비는 청나라 건륭년간에 청나라를 반대하는 회부추장의 안해였다. 용모가 빼여난 미인인데다가 몸에서 향기로운 향기가 풍기는 녀인이여서 사람들은 향비라고 불렀다. 청나라 군사가 회강에 들어왔을 때 정변장군 조혜장이 향비를 포획하였다. 그는 향비를 데리고 서울에 올라가 건륭황제 홍력에게 헌납하였다. 건륭황제는 향비를 입궁시켰으나 복숭아처럼 생긴 향비는 서리찬 눈길로 황제를 대하였다. 그녀는  옷소매속에 늘 비수를 여러개 감추고 있으면서 기회만 있으면 황제를 죽이고 남편을 위하여 복수하겠다고 도스르고 있었다.

   건륭황제는 남자의 성욕을 자극하는 기이한 향기를 풍기는 향비의 마음이 돌아서기를 기다리면서 머리도 빗겨주고 화장도 도와주었지만 일년이 넘도록 향비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다. 그녀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날마다 눈물로 세월을 보내면서 처량한 나날을 보내였다.

   하루는 건륭이 천단에 가서 제사를 지내였다. 그때 황태후가 향비를 불러다 놓고 죽음을 하사하였다. 향비는 머리를 쳐들고 말하였다. <<태후께서 저를 그렇게 하라니 정말 그 은혜가 하늘보다 높고 땅보다 두껍나이다. 제가 죽은후 구중천에 가서도 황후께 감격할거외다>> 실은 죽지 못해 살아가던 향비였던것이다. 소식을 듣고 황제가 달려왔을 때는 한발자국 늦은 시간이였다. 금방 숨을 거둔 향비의 얼굴은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있었다. 건륭은 후하게 관을 만들어 신강에 가져다 안장하게 하였다. 향비가 서울에 와서 황비로 되었을 때는 27세였고 그가 죽을 때는 35살였다. 그녀의 관을 북경에서 카스까지 옮겨오까지는 3년이걸리였다고 한다. 꽃처럼 피여났다가 이슬처럼 사라진 향비였다.

   카스에서 유명한 날은 일요일이다. 일요일은 바짜날인데 우리 말로하면 장날이다. 이 장날은 지금도 외국사람들이 많이 와서 장사를 하는 날이란다. 우리는 이 장날을 보기위하여 민풍으로부터는 걸음을 늦추면서 왔다. 일요일(12월 5일)날 해는 열시가 되여솟아올랐다. 우리는 열시반에 장마당으로 갔다.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거리는 발을 옮겨디딜자리가 없이 사람들로 바글바글하였다. 장에는 고양이 뿔외치 없는 것이 없었다. 값도 연길에 비하면 죄다 눅거리였다. 마늘접을 목에 걸고있는 사람에게 물으니까 한접에 (50쪽)에  3원이라고 한다. 구두파는 곳에 가서 물으니 겨울에 신기 좋은  양가죽구두가 20원이란다. 신강지구의 옷종류와 먹거리, 일상용품이 총동원되여 전시되고있었다. 버스와 택시들은 련이어 장거리옆에다 사람들을 물처럼 쏟아붓고있다. 장보러 온 사람들이 수만명이 되여 끓는 가마물처럼 흥성거였다. 나와 조형은 갈라지면 찾지 못한다고 그림자처럼 붙어다니였다.


37.그날의 남방항공은 마스락 비행공사.


   12월 5일, 카스에서 기차에 오른 우리는 29개의 턴널과 새까만 고비사막, 그리고 무수한 구릉지대와 산악을 넘어 6일 우루무치에 도착하였다. 신강의 수부 우루무치는 우람스러운 대성시였다.

    7일 새벽 8시에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8시반쯤에 택시를 잡아타고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공항에 닿으니 9시가 될가말가한 시각이였다. 두루 수속을 밟고 북경행 휴식장소로 갔다. 비행장으로 슬밋슬밋 안개가 기여들고있었다 .이윽하여 온 비행장이 안개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이런 날엔 비행기가 뜨기 어려워요.>> 조형이 창밖을 내다보며 근심하였다.

   <<안개때문에요?>>

   <<그래, 내가 구라파 갔다가 안개 때문에 하루를 갇힌적이 있어요. 안개 앞에서 비행기는 맥을 못써요.>>

   비행기를 몇번 타보지 못하였고, 비행장과 안개가 씨름하는것을 한번도 구경하지 못한 나는 안개가 비행기를 눌러서 뜨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 크게 실감되지 않았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안개가 사라지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이였다. 간대루야 비행기가 못뜨랴 하는 일념뿐이였는데 방송이 나왔다. 북경으로 가는 비행기는 안개로 하여 열두시에 출발합니다 하고.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카스에서 비행기표를 뗄 때 우루무치-북경, 북경-연길 비행시간을 두시간 차를 놓고 떼였는데 안개가 훌떡 나의 비행시간을 두시간이나 잡아먹지 않았는가. 우루무치에서 10시 40분에 떠나 오후 2시 5분에 북경공항에 내리고 네시에 연길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가려던 우리였다. 12시에 떠나면 오후 3시에 북경에 도착하겠는데 까딱하면 연길로 간다는것이 랑패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나는 공항일군들을 찾아가 사연을 말하고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여러곳에 여러사람과 물어보았으나 대답은 하나였다. 북경에 가서 다른 비행기를 타는 수속을 하라는것이였다. 무슨 용빼는수가 있는가? 그렇게 하는수밖에. 그래도 다른 비행기 수속을 할수있다니 한시름이 놓이였다. 카스 사람들이 북경에서 연길로 가는 비행기가 오후 4시, 6시,7시 세번있다고 하였으니깐.

   뜻밖에도 11시가 되였을 때 안개가 퍼그나 사라지여 우리는 등반하게 되었다. 게시판에 열한시반에 떠난다는 메시지가 나오더니 아마 그러는 모양이라고 기뻐하였다. 열한시반에 떠나면 오후 두시반에 북경에 내릴수 있으니까 연길행 네시 비행기를 타기에는 안성맞춤이였다. 그런데 11시 20분이 되어서야 손님들이 비행기에 다 올랐는데  반이 지나도 비행기는 떠날념을 하지 않았다. 40분이 지났는데도. 나의 마음은  안달아났다. 할수 없이 아가씨를 찾아서 물었더니 한사람이 오르지 않아서 못떠난단다. 웬놈이 무슨 지랄이 나서 제때에 오르지 않고 어디가서 번들거리는가 하는 욕이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른다. 한놈 때문에 백놈이 눈이 펀들펀들해서 속을 태우며 기다려야 한다. 나의 앞에 앉은 손님은 오후 세시에 하르빈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고 했다. 그는 완전히 미역국을 마신거야. 실은 한놈을 나무랄것도 못되였다. 비행기가 열두시에 떠난다고 방송하였으니까 그전에 비행기에 오르면 되지 않는가. 그 시간이 되자면 아직도 시간이 있다. 앞에서 와야하고 환성이 터지였다. 특별석을 지나 한 사내가 입이 헤써해서 들어서고있었다. 보통키에 50좌우되는 사내였다. 인젠 떠나겠구나 하고 한시름이 놓이였다.

   12시가 되자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활주로를 달리던 비행기가 갑자기 선자리에서 부릉거릴줄이야. 한식경이나 부릉거리던 비행기가 구렁텅이에서 기여나오기라도 했을 때에 절망을 안겨주는 방송이 나왔다.

   <<손님 여러분, 비행기가 고장나서 수리해야 합니다. 량해하여 주십시오>>

  아니, 비행시간이 연착되였을 때 왜 검사수리하지 않고 떠나다가 고장을 발견하고 이따위야. 뭣들하고 밥처먹는 놈들인가 하는 불만이 가슴속에서 마구 솟구쳐올랐다.

   결국 다섯시가 넘어서야 북경공항에 내린 우리였다. 나는 백사를 제하고 비행기표부터 수속하였다. 그런데 복무원이라는 자식들이 어느놈도 수속하는 곳을 딱부러지게 알려주지 않아서 땀을 벌벌 흘리며 여러곳을 찾아다니게 하였다. 마지막에는 한바탕 성을 내는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야 겨우 수속을 밟았다. 그런데 일곱시에 떠난다던 비행기가 일곱시가 지났는데도 아직  연길에서 떠나지도 않았다는것이 아니겠는가. 기가 딱 막히였다. 재수 없는 놈이 장날에 가루 팔러나가면 바람이 분다더니 우리 팔자가 그러하였다. 언제 떠나는지도 모르는 판이였다. 공항에서는 할수 없이 우리를 버스에 싣고 호텔로 향하였다. 에라 모르겠다 될대로 되라지 하고 나는 맥을 버리고말았다. 새벽 두시가 되여 비행기가 따난다고 소식이 왔다. 잠을 설친 손님들이 끄신끄신 호텔을 나와 버스에 올랐다.

   비행기 타러 나가는데 앞에서 술렁거리였다. 한사람한테 손해비 100원씩 나누어주고있었다. 그때 한사람이 지나가면서 고까짓 100원이 뭔가. 우리는 전번에 400원씩 가졌다고 하였다. 그럴법도 하였다. 여섯시간이나 연착된데다가 밤잠도 자지 못했는데 그까짓 백원이 뭔가. 한번 문의라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문의하였더니 상급의 문건이 그러하다는것이였다. 우리는 문건을 보자고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문건을 내놓지 못하였다. 이렇게 티각태각하였으나 손해비를 더 받을 싹수가 보이지 않았다. 마침 연변가무단의 안무 리승숙이 우리와 함께 걸고 들었다. 말해서는 아니 되겠으니까 리승숙이 전국정협상무위원 공작증을 내들고 당신들의 문건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그들은 대뜸 얼굴빛이 변하였다. 리승숙이를 제일 특별석에 모실테니 어서 오르라고 하였다. 그에 동의할 리승숙이 아니였다. 나도 기자증이라도 지니고 갔더라면 승세해 주겠는데 그렇지 못하여 서운하였다. 한참 기다려도 문건이 오지 못하였다. 공항측에서는 할수 없이 200원씩 줄테니까 비행기에 오르라고 하였다. 손님들이 그만하면 되였다고 하나 둘 오르기 시작하였다. 리승숙녀사도 오르자고 하였다. 손님들이 모두 오르기로 하였고, 먼저 오른 손님들한테도 100원씩 보충해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래서 연길에 와 내린 시간이 이튿날 네시가 퍼그나 넘은 때였다. 그날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내내 다시는 비행기를 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가슴에 못박히였다. 이런 비행기를 타고 다니다가 사고 나면 뼈도 추리지 못할것 같았다. 그날 우리를 실은 비행공사는 마스락 비행공사였다. 갈 때에는 웃으면서 기쁘게 갔는데 올 때에는 숱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왔다.

   첫맛이 달고 후맛이 쓴 나와 조형의  려행은 이렇게 끝을 마치였다.

                                    2005。3。24 -- 2005。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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