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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탈의 창구를 더 크게크게...
-2009년 <<연변문학>>반년분 시를 읽고
최흔
들어가는 말
2009년, <<연변문학>>에 실린 반년분의 시를 보고 생각나는바가 많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각자생존이지만 서로 련계되지 않는것이 없다. 시는 사물들의 련계성을 새롭게 파보는 예술이다. 새롭게 파보는것이 바로 창조이다. 시인은 각이한 사물을 련계시켜 균형을 잡으면서 아름다운 조화를 그려내는 작업을 한다. 시인은 또 언어의 요술사로서 맞지 않는 말을 아름답게 맞추기를 한다. 이런것을 폭력적조합이라고 한다. 시의 뜻은 이미지에 함유되여있는것이지 드러내는것이 아니다. 그래서 물아일체란 말이 나왔다. 시는 새로운 상징이다. 새로운 상징은 무의식속에서 시인의 직관에 의하여 산생하는것이다. 시가 계몽의 립장에 서면 격이 낮아지고 예술의 립장에 서면 격이 높아진다. 계몽의 립장에서 쓴 시는 박수를 치는 사람이 많을수도 있지만 예술의 립장에서 쓴 시는 생명이 길게 된다. 계몽시는 중국의 긴 력사에서 작용이 있었지만 <<5.4>>이후의 신시도래로부터 현대예술밖으로 밀려난다. 문학도 독립성을 갖고있는 하나의 생명체이다. 그런데 문학본체론에 접근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은 사상해방과 언어해방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금년상반년 <<연변문학>>의 시들이 필자에게 준 계시이다. 그래서 <<일탈의 창구를 더 크게크게...>>라는 제목을 달았다.
2009년 <연변문학> 첫기에 나온 시들중에서 지영호시 <비방>을 보자.
이 시는 시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가야하는가? 기성의미의 테두리안에 있을것인가? 기성의미의 테두리밖에서 자유로의 날아다닐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일정한 연구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비방>>은 개념화적인 언어가 없이 이미지적으로 첨부터 잘 흘러갔다고 할수있다. 이것이 <<비방>>이 거둔 성과라면 성과다. 시인은 세가지 층차로 비방의 참혹성을 드러내고 있는데 마지막에는 죽음을 초래한다면서 비방자들을 질타하고있다. 여기서 <혀>라는 언어를 잘 택하였다고 하리라. 한사물의 어느한 세부를 틀어쥐고 전반 사물을 말한다는것은 시쓰는 사람마다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혀는 인간의 한개 구조로서 옹근 인간을 대용한 언어라겠다.
이 시의 치명적인 약점은 시를 구상하는 상상력이 차하단데 있겠다. 기성관념의 울타리에서 사유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비방하여 사람을 잡는다는것은 문화혁명을 거친 사람으로서는 별로 새로운 감이 없는 말이다. 시인의 사유는 여기에서 맴돌고 있다. 시인의 상상은 어떤 사물의 성질에서 일탈하여 만리창공을 날수있으며 고금중외를 메주 밟듯할수 있다. 그런데 이 시는 비방의 나쁜점울타리에 갇혀서 헤여나오지 못하고있는 상태다. 그래서 이미지는 잘 흘러 내려갔지만 사유의 빈약과 상상의 빈약을 초래하게 되었다
<<써레질로 온 하늘에 노을을 일구네>>. (犁耙耕出滿天霞)TV에서 이런 노래를 들은적이있다. 기성관념으로 말하면 써레질로는 밭을 갈지 절대 하늘을 갈수 없으며 또 간다해도 노을을 만들어낼수는 더욱 없는것이다. 그런데 이 가사는 써레질로 하늘에 노을을 일군다고 하였다. 이런 수법은 시인이 한껏 상상을 펼치면서 아름다운 환영을 추출해낸것이다. 시인은 모름지기 이런 수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가. 이런 수법은 기성의 관념을 무시하고 시인의 상상을 확장한 표현인것이다. 앞으로 지영호시인은 이러한 시적사유에 공력을 들이면 보다 훌륭한 시를 쓰리라 생각된다.
제2기 안표지에 실린 김일량시인의 <<눈내리는 밤>>이라는 시가 돋보인다. 시인은 이 시로 새로운 차원의 문을 연것같아 시우로서 기쁘다.
부드럽고 우아한 선율이 흐르는 시이다. 1련은 하얀 옷을 벗는 하늘, 2련은 깊어가는 밤에 내리는 눈, 3련은 땅에 부리우는 옷벗는 소리, 4련은 감미로운 추억과 꿈, 5련은 화자의 개입이다.
시는 시작이 관건이다. 새로운 이미지창출로 시를 시작하는가 아니면 선입견으로 시를 시작하는가 하는것은 시가 어떤 시로 되는가하는것을 결정하게 된다. 일량시인은 창의적인 발상으로 시를 시작하여 시의 새로움을 획득하고 있다. 밤에 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하늘이 옷을 하얗게 벗는다>> 고 한다. 색깔에 의거한 그의 이미지창출이 새롭고 신비하다. 이런 시적이미지 창출은 우리앞에 갑자기 새로운 세계를 눈이 확 뜨이게 안겨주고있으며, 왜 눈을 하얀옷이라고 했는가 하는 의문으로 독자를 사로잡고있다. 제목이 눈내리는 밤이여서 첫행을 삭제했더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다음행의 별스러움으로 아쉬움이 메워지기도 한다.
2련에서는 밤이 깊어가는것을 쓰고있는데 밤이라는 이 정적인 사물을 동적으로 표현하고있으며 밤이 깊어가는것을 우물에 <<드레박이>> 떨어지는것으로 씀으로써 추상적인 사물을 시각화해 내는데 성공하고있다. 이채로운것은 하늘이 옷을 벗는바람에 밤이 쫓기듯 도망치는것이다. 아마 하늘의 라신을 보기 부끄러웠던 모양. 유모아적이고 희극적이다. 하늘이 처녀였는지도 모르지도 않는가. 흔상할 여지를 깔아주는 련이다.
3련은 옷벗는 소리를 땅에 부리운다고 한다. 여기서 <<푸실푸실>>이란 언어의 내함이 다양하다. 눈 내리는 표현과 눈내리는 소리 또 하늘이 옷벗는 소리에 대한 표현 등 여러가지 해석이 닿을수 있어서 <<부려놓는 밤>>이란 시구의 기초를 다지기도 하고 이미지의 참신함을 생동하게 부각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하늘이 옷벗는 소리>>와 <<조용히 부려놓는 밤>>의 조화가 어색한 같지만 시상의 새로움으로 돋보이고있다. 소리란 청각으로서 보이지도 만질수도 없는 사물에 속하지만 시인은 <<부려놓는다>>는 동적인 언어를 씀으로써 청각적인 언어의 흐름을 회화적으로 교묘하게 전의시키고있다.
4련은 눈오는 겨울에 땅의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고있는데 <<꽃사슴>>, <<비단바람>>, <<속살 간지러운 그 물소리>> 등 이미지들이 추억의 감미로움을 표현하기에 족하다. 마지막행에서 <<보슴털이 속속 돋는 꿈 꾸는데>>가 과시 의경의 절창을 이룬다 하겠다. <<보슴털>>은 다름아닌 새싹이다. 시인이 만약 <<보슴털>>이라 하지 않고 새싹이라고 하였더라면 시맛을 놓쳐버린 아쉬움을 남겼을것이다. 이 <<보슴털>>은 변형된 시적언어로써 새봄을 표현하는 상징인데 세부를 쥘줄아는 시인의 솜씨가 놀랍다.
마지막련은 눈오는 밤의 황홀을 흔상하던 화자도 참을수 없어 하늘이 옷을 벗는 속으로 용감히 뛰여든다. 화자의 마음속에서도 <<보슴털>>이 돋았다. <<숯불을 벌겋게 지피며/하늘이 하얀 속살을 깎아내는>> <<아픈 소리>>를 찾아가고있단다. <<숯불>>이란 언어가 새로운 탄생을 맞는 시인의 열정과 희망을 표현하기에 걸맞는 상징이라겠다. <<하얀 속살을 깎아내는 소리>>가 과시 명구로 되기에 손색이 없겠으나 일량시인으로 말하면 전철을 밟는 시구인것같다. 아마 그전에 가을달인지 하는것을 쓸때 달의 하얀 속살을 깎아내여 집을 짓는다는것을 쓴것같다. 옷을 벗겼으니 살결을 쓰는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중복하는것은 바람직하지 못하지 않을가. 뒤에 오는 <<아픈소리>>라는 언어를 창출하기 위한 복선이라 괜찮기도 하겠지만 다른 표현이였더면 훨씬 값진것이 되었으리라는 생각. <<아픈소리>>는 환희의 반어여서 잘 다듬어졌다하겠다.
<<눈 내리는 밤>>은 부드럽고 우아한 우리 언어의 맛을 살리면서 새로운 이미지를 많이 떠올리였다. 김일량시인을 새로운 차원으로 한 발자국을 내디디게 한 시라고 인정하고싶다. 그런데 후에 발표되는 시들은 이렇지 못했다. 앞으로 너무 전원적인 읊조림에만 집착하지 말고 시적령역을 넓혔으면 한다.
<<연변문학>> 제3기에서는 안표지에 실린 김영건의 시 <<빈자리>>를 한번 읽어 볼만 하다. 대립통일이라는 철학사상으로 시를 구축하고 있는것이 특색이다. <<빈자리>>에서 비운다는것은 불교사상의 핵심의 하나로서 많은 학자들과 시인들이 연구하고 표현하는 테마이다. 영건시인은 바로 이 중대한 테마를 시로써 다루어보고있다.
세상은 음양결합의 덩어리이다. 시인은 필을 대자마자 대립물조화의 시각으로 사물을 분해하고 련결시키면서 이미지를 추출해내는데로 촉을 달린다. 비여있는 하늘과 앉아있는 해살, 어둠과 투명. 때리는것과 무흔적. 골짜기물과 천지 이러한 대비속에서 시는 시작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모두 대립적인 두측면을 바탕으로 삼고있다.
시작부터 4행까지 시는 하나의 내용인데 한사물의 대립적측면의 조화로 비움을 노래하는 시의 총적인 구도를 해석하는 첫작업이다. 이 첫작업에서 시인은 한개 사물의 움직임속에서의 대립되는 측면의 화합을 일구어내고있다.
시의 5-6행에서 영건시인은 한사물운동의 대립면을 읊조리던데로부터 사유의 범위를 확장하여 부동한 사물들의 관계를 노래하고있다. 산과 조약돌과 바람과 물고기들이 <<서로를 그리워>>한다는것이다. 산, 조약돌, 바람, 물고기 등 사물들은 각자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들로서 자기의 존재적가치를 독자적으로 현시할수 있는 사물들이며 서로 어떠한 련계도 가지지 않아도 이 세상에서 한자리가 있다. 산이 없다하여 조약돌이나 바람이나 물고기가 살수 없는것이 아니고 존재하지 못할것도 아니고, 조약돌이 없다하여 산이나 바람이나 물고기가 죽는것도 아니고, 바람이 없다하여 산이나 조약돌이나 물고기가 존재할수 없는것도 아니고, 물고기가 없다하여 조약돌이나 바람이나 산이 소실되는것도 아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것들이 <<서로를 그리워>>한다고 한다. 왜 그리워한다고 시인은 말하고있을가 . 그것은 이 땅의 모든 사물의 존재는 어떤 유대를 가자고있기때문이다. 어떤 유대인가. 우선 지구라는 이 대지우에서, 하늘이라는 이 사물아래에서 공존하는 사물들이다. 시인은 공존을 말하는데 공존하는 자체가 바로 비우는것이고 비우는것은 공존에 의하여 성립된다는 철리를 성립시키려고 시도한다고 하겠다. 다시 말하면 비움과 존재의 대립되는 사물들의 조화로움과 통일을 노래하고있겠다.
그다음 3행은 세번째 내용으로서 시인은 환상의 날개를 활짝 펴고 훨훨 날고있다. <<바위속에 해살로 들어가>> 본다. 해살이 되어 바위속으로 들어간다는 환각적인 시구는 상당한 매력과 시적비약의 운치를 현시한다. 이 시구는 과도구로서 앞에서 읊조린 이미지들이 형이하적이였다면 뒤의 시구들은 형이상학적이다. 바위속에서 시인은 무엇을 보아냈는가? 시인이 보아낸것은 바위속에 돋은 화산의 정열, 이끼의 작은 사랑 그리고 간밤의 별자리다. 여기에서 <<돋아있다>>는 언어의 사용이 이색적이다. 앞에서 렬거한 <화산의 정열>>도 <<이끼의 작은 사랑>>도 <<간밤의 별자리>>도 돋을수 없는 현상이지만 시인은 <<돋아있다>>는것으로 우리들에게 그것들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꾀한다. 이것이 바로 시어와 일상어의 구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인의 언어작업이라겠다. 황차 보이지 않는것을 보여주고 들리지 않는것을 들려주는것이 시적장치의 중요한 수법임에랴.
비워서 가득한 하늘 넘쳐서 흐르는 강물/어데라 없이 강물소리 넘친다/세상 모든 자리는 비여서 우주가 출렁인다
마지막 세행이다. 이 마무리가 바로 우의 흐름에 대한 총화이며 시인이 말하고저 하는 핵심이며 추구이다. 비움과 참의 대립면의 통일이나 련결 및 그 동일성. 비여서 가득한 하늘과 비여서 출렁이 우주라는 이 대립적존재와 조화로움이 바로 시인이 추구하는 형이상학의 세계이며, 사물의 생명운동의 필연적인 결과이며, 이 세상에 만물이 존재할수있는 리유이며, 사물들이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게 되는 바탕이다.
총적으로 이 시를 두가지 각도로 구성을 살펴볼수 있다. 점으로부터 시작하여 면으로 확장되다가 환상의 수법으로 다시 해부한후 결말을 도출해내는것이 한가지 방법이고 . 형이하로 출발하여 형의상으로의 전환을 이룩하면서 철리적 마무리를 도출해 내는것이 또 한가지 방법이겠다.
언어사용면에서 지적할것이 있다. <<물은 골짜기를 채워도 천지가 들어있다>>는 시구인데 필자의 생각에는 <<물은 골짜기서 실오리 늘여도 천지가 들어있다>>로 하면 큰것과 작은것의 대립의 조화가 더 도드라질것 같은 감이 든다.
제4기에는 김현순씨의 <<꽃>>이 이채롭다. 시란 어떤것이며 어떻게 써야 하겠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한다. 시인은 꽃나무가 소녀이고 소녀가 꽃나무이며 꽃망울이 소녀의 젖가슴이고 소녀의 젖가슴이 꽃망울이라는 엉뚱한 상상을 시로 다듬어놓았다. 하나는 식물의 일종이고 하나는 소녀이고 소녀의 젖가슴인데 이런 비유가 왜서 성립되는가? 꽃망울도 동그랗고 소녀의 젖가슴도 동그래서 그럴가? 꽃망울이 꽃을 키우고 피여나게 하는것과 소녀의 젖으로 후대를 키울수 있다고 해서 그럴가? 색깔이 고운 희한한 꽃을 품고있는 꽃망울의 신비성과 청춘을 사로잡는 소녀의 젖무덤의 매혹이 비슷해서 그럴가? 아무렴 무엇인들 어떠랴. 시인은 시를 쓸때 세상사물을 얕잡아보고 마음대로 노복처럼 부려먹을수 있는데야.
시의 시작이 지움과 떠올림이다. 지움이란 시적대상의 기성관념을 지우는것이며 떠올림이란 시를 쓰기위한 새로운 대상을 떠올리는것이다. 류협은 이러한 수법을 시의 시작이며 관건이라고 하였다. 이 시에서 시인은 소녀로 꽃나무를 대체하고 소녀의 젖무덤으로 꽃망울을 대체시키면서 은유적인 수법으로 조화를 꾀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 시적매력이 점수를 딴다. 이것은 시인의 창조적인 시적사유의 산물이며, 새로운 창의이며, 꽃에 대한 새로운 표현이라겠다. 시인은 이렇게 새롭게 시를 쓸수 있는 기초를 닦아놓았다. 좀만 시적예술에 능하면 아래는 별로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언어에만 신경쓰면 시가 탄생하게 되는것이다.
제목은 꽃이였지만 꽃이라는 개념을 지워버리고 소녀와 소녀의 젖가슴을 떠올린 시인은 젖가슴이라는 핵심적인 이미지의 변화를 추구하면서 두사물의 혼연일체를 부드럽고 정이 자르르 흐르는 언어로 엮어놓았다. 시인은 시적변형물의 움직임을 세심하게 그려내고있다. 시적변형물을 잡은다음 그 변형물의 움직임으로 시를 쓰는가 아니면 이모저모로 립체적인 해석을 가하는가 하는 문제는 시창작에서 자못 중요한 갈림이다. 대개 시는 이 두가지 방법으로 쓰기가 일수인데 결과는 자연히 다르게 마련이다. 김현순시인은 꽃망울과 소녀의 젖가슴이 혼연일체속에서 별빛, 나비, 벌, 아침해살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고 있는가를 섬세하게 그리고있다. 그래서 계렬화된 아름다운 경상, 명징한 그림. 매혹스러운 장면들이 우리 눈앞을 스치게 한다. 그림으로써 울림을 주고 미적향수를 준다.
김현순시인이 눈박은것은 새로운 이미지 창출이다. 그의 시에 의하면 시는 시인의 관념을 드러내는것이 아니다. 그의 이미지 창출은 사물의 모방이나 재현에서 온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사물의 화해와 련결 그리고 조화속에서 사물의 운동을 통하여 표현된것이라고 함이 아마 가장 적절할것이다.
그런데 시화전에서 볼라니까 동시도 <<꽃>>이라는 제목으로 썼는데 이 시와 완연한 시였다. 어느 시가 먼저 창작된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이런 장난은 삼가하는것이 바람직하겠다.
제5기 강효삼시인의 <<종소리>>를 보고 필자는 이런 축하를 보내였다.
어 효삼씨 축하!
오늘 <<연변문학>> 5기를 가져다보았지. 먼저 시부터 보는놈인데 보다가 당신의 <<종소리>>올가미에 걸려서 흰둥 넘어졌어. 하늘은 가없이 푸른데 흰구름 두어송이가 둥둥 떠있었지. 그리로 당신의 종소리가 짜르릉 짜르릉 울려가지 않겠나. 무지개 같은 칠색의 종소리가 비끼는것을 보노라고 한식경이나 멍청해졌어. 참 멋있는 시데. 청나라 왕국유(王國維)가 하던 말이 생각나데. 사는 경계(境界)를 최고로 삼는다했잖아. 경계가 있으면 스스로 격이 높아지고 명구가 절로 생긴다 했잖아. 경계란 당신도 알지 쉬운말로 하면 뜻이 있는 경물의 모임이지. 경이 없으면 정이 산생하지 않고 정이 없으면 경이 나오지 못하지. 바로 당신의 <<종소리>>가 경과 정, 정과 경이 융합된거지. 참 기쁘게 놀랐단 말이요. 시는 소리를 쓰기 제일 바쁜 제재인데 멋있게 썼더군.
소리를 길을 떠난 나그네라고 ㅎㅎㅎ 참 멋있소. 시가 문을 열자 새로운 대상물을 찾았으니 신선한 이미지죠. 이미지는 워낙 이런거지 . 원사물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던 사물을 시인이 직관으로 보아내지. 종소리가 길떠난 나그네라고 ㅎㅎㅎ. 아마 이것이 제일경인 같소. 멋진 대상물이데. 시를 쓸때 좋은 대상물을 잡으면 그야 80프로 먹은 셈이지. 당신은 시작하자마자 먹었더군 ㅎㅎㅎ.
당신의 나그네는 바삐 돌더구만. 돌아오지 않는 길을 종주먹을 쥐고 달려만 가니 말이요. 그래 서라고 소리라도 칠거지, 뭐 소리쳐도 안 서더라구 ㅎㅎ. 그렇지 설택이 없지. 그는 한번 출발하면 늘 바삐 가기만 하는 나그네니까. 출발하기 직전까지 종속에 죽은듯이 가만히 보이지 않게 있다가 일단 출발하면야 그의 달림을 누가 감히 막을수 있을라구. 참 효삼씬 묘하기두 하구만. 발걸음 소리가 정말 들리던가요. 그 나그네를 세우고 정지상태에서 이것저것 바라본것이 아니라 나그네를 움직이게 한것이 참 이쁘오. 만약 세워놓고 여기저기를 뜯어보았더라면 똘가지를 치겠는데. 나그네가 정말 보이던가요. 이것이 당신이 창조한 제 2경이지.
종은 이렇게 아픈 매로 가슴을 비워/출산의 울음소리 만드네/ 비우고 또 비운 배속 가득/끝없는 울음소리 채우며/ 이것이 제3경인가. 이크 며자를 잘못 쓴같아 응당 -네나 -다로 종결지어야 하지 않을가. 이건 내 생각. 아주 철리적이죠. 종은 정말 그렇지 . 속은 비였는데 누가 두드리면 소리를 날려보내지. 그속엔 숱한 소리가 있지. 때리는데 따라 소리의 높고 낮음이 다르고 음량이 다르고 질감이 다르지만 아무튼 아무리 보내도 그냥 소리가 무한대로 쌓이여있지. 그렇지 당신 시정대로 하면 억만의 나그네들이 종속에 갇히여있으면서 출발을 대기하고있을거야 . 비우다와 찬다는 반대어인데 참 잘 써먹은 같아. 빈것이자 찬것이고 찬것이자 빈것이라 어느 절당에 찾아가서 불교의 념불을 주절거렸나보지 ㅎㅎㅎ. 한번 가면 오지 않는 나그네 그것이 생활이며 인생이지. 내가 지금 효삼씨와 말하는 사이에도 그냥 다시 오지 않을 시간들이 똑딱거리며 가고있소. 실상 현재라는것도 없는같아. 그냥 과거가 점철된뿐인같아. 미래와 과거사이에 현재가 있는데 현재는 바람처럼 한번 슬쩍 스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단말이요. 아마 돌아온다는건 영원히 희망사항이 아닐가 ㅎㅎㅎ.
제4경이. 아직 잠들어있는 그 누구인가를 /소리쳐 깨우기 위하여//전번에 <<님의 눈빛>>을 성냥이라고 하면서 나를 깨우더니 이번에는 종소리로 나를 깨우는구만. 근데 종소리가 더 좋아. <<님의 눈빛>>은 류사성 냄새가 나지만 종소리는 쫄닥 새거야. 이 나그네가 효삼씨한테 메달 하나를 달아준 같아. 참 신선하고 기발하고 시적이야. 시란 뭐겠소. 남들이 알지 못하는, 시인만이 발견한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는거지. 나도 당신의 <<종소리>>를 보기전에는 종소리속에 돌아오지 않는 나그네가 있다는걸 생각도 못했소. 종주먹을 쥐고 달려가는 나그네. 종은 나그네를 보내고도 더 많은 나그네를 갖고 있다는걸. 달려가는 나그네들은 아직도 자고있는 사람을 깨운다는걸. 그바람에 나도 깨도가 갔어. 여기서 종소리는 나그네란 내함을 가질뿐만 아니라 새로운것에 대한 추구이고 새로움자체였소. 당신만이 정을 부여한 새로운 나그네는 2중3중의 의미를 가진 뚱보야 뚱보. 의경이 독특하고 째여서 읽을 멋도 있고 흔상할 가지도 있어서 좋았소. 앞으로 이런 시를 많이 쓰기를 ㅎㅎㅎ. 축하!
제6기를 보고나니 동시들이 좋았다. 일년에 한번씩 내는 동시. 시적이미지가 자연물과의 융합으로 이루어진것이 특징적이였다. 자연은 시의 중요한 모체로서 자연은 시를 낳는다. 이점을 절대 홀시할수 없다.
모두 6수인데 다섯수가 자연이미지로 시를 풀어내려갔다. 그중에서 한석윤시인의 <<할머니네 배나무>>, 최문섭시인의 <<새날이 온다>>, 김욱시인의 <<가랑잎>>, 김철호시인의 <<파도와 빛>>이 필자의 눈길을 끓었다.
구체적으로 분류해보면 <<할머니네 배나무>>와 <<가랑잎>>은 한사물을 다른 사물로새롭게 변형시킨것이고, <<새날이 온다>>와 <<파도의 빛>>은 자연현상에 대한 시인나름대로의 새로운 변형적추구이다. <<할머니네 배나무>>는 배나무를 <<종지부>>로 둔갑시키고, 해, 달 , 바람, 물, 땅과 배와의 융합을 여러 가지 방면으로 해석하였고, <<가랑잎>>은 가랑잎이 눈길우에서 <<또박또박 받아쓰기>>를 어떻게 하고 외우는가를 시적주인공의 움직임으로 표현하고있다. <<새날이 온다>>는 수탉의 닭볏을 잡고 날개의 사이 잔등에 앉아온다거니 새별의 빛줄기를 밟고 새날이 온다고 한다. <<파도의 빛>>은 빛이 도망치려하나 파도가 놓아주지 않아서 실랑이질 한다고 한다. 모두가 자연현상에 대한 시인의 새로운 해석으로써 우리 앞에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있다.
자연적인 이미지로 시를 쓰는 수법은 성인시에서도 절대 홀대할수 없는것이다. 시란 인생과 자연의 섭리를 새롭게 발견하고 해석하는것이라고 할수 있다. 그런데 인류도 자연의 한 속물이므로 자연을 떠나서 운운할수 없는것이다. 그러므로 자연물과 자연현상속으로 시상을 새롭게 파고 들거나 이미지를 구사하는것은 시인들의 자연스러우면서도 중요한 작업이라 하겠다. 어찌 보면 모든 시는 자연을 떠날수 없으며 자연속에서 새로운 발견을 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추출하는것이라고 할수 있다. 천지인설을 떠나서 시라는것은 태여날수 없는 운명임에랴.
나오는 말
2009년 <<연변문학>>상반년의 시를 보고 필자는 이런 말을 하고싶다.
1978-2008년의 <<중국우수시가>>를 편집한 북경사범대학문학원 박사도사인 장청화는 서언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시는 마땅히 모든것이 변형이여야 한다.>> <<기교는 제일 마지막에 문학작품의 질을 결정짓는 <유일한 > 요소이다.>>시는 변형, 이 명제는 시가 탄생한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또 영원한 래일까지 시본체론의 핵심으로 될것이다. 현실의식흐름의 조류속에서 시를 찾을것이 아니라 당신의 무의식속으로 들어가 시성으로 시를 찾아야 시같은 시가 나올것이다. 그래서 시는 언제나 독자와 낯설게 만나게 되는것이다. 낯설기에 난삽하다는 말로 부정해서는 안된다. 독일당대시인가운데서 가장 커다란 명성과 가치를 인정 받는 첼란의 시도 낯설었다. 낯설어서 일부 사람들이 난삽하다고 하였다. 왜 시가 낯설게 되는가. 시인은 현실사물의 실체를 변형시켜 독자앞에 내세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는 언어의 일반적인 의미와 개념의 령역을 넘어나게 되는것이다. 시가 몽롱하다 난삽하다는것은 시자체의 특성으로서 나무릴바가 못된다. 시는 원래 그렇다. 시는 변형된 표상의 행진이다. 표상속에 인간의 감정이 용해되여 있어 흔상의 가치를 산생하는것이다. 이미지는 변형을 통하여야만이 참신해 진다. 변형이라는 이 작법이 시의 질을 결정하는 마지막의 <<유일한 요소>>인지도 모른다. 시는 예술을 창조하는 작업이다. 시의 예술은 변형을 통해서만이 가능해진다. 변형은 이미지와 언어의 폭력적조합에 의하여 산생된다. 변형은 현대시의 문턱이며 시문학의 본체론이다. 우리는 이 문턱을 넘어 시의 본체론속으로 들어와야 할 박절성과 긴박성을 감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몇기에 걸쳐 <<시교실>>이란 커트를 달고 신인들의 시를 내보냈는데 별로 인기가 없었다. 많은 시들은 아직 시가 되지 않고 시적소재상태였다. 우상렬박사가 제4기의<<시교실>>의 시를 보고 마지막에 <<현대시의 시각에서 볼 때 은유, 상징, 역설 등을 통한 이미지화를 구상하는 수법을 많이 강구했으면 좋겠다.>>는 안타까움을 내놓았는데 적중하다. 이 말씀은 시의 기본인 변형이 안되였다는 말씀이며 시가 아직 여물지 못했다는 말씀이다. 차라리 이런 커트대신 중국과 외국의 현대명시 같은것을 보여주는 명시커트를 하나 꾸렸으면 좋을 같다.
<<연변문학>>은 참신한 변형으로 쓴 시들을 대량으로 산출하지 못하고 있다. 좀 선도적이고 전위적인 작용을 발휘할수 있는 시, 계몽시경향을 뒤로 하고 시적예술을 앞세우는 시를 대두로 새로운 개방이 있었으면 좋겠다.
2009년 7월 8일, 서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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