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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전시인의 토템시 구조
18년동안에 남영전시인은 <<황소>>처럼 <<느릿느릿>>하게 42수의 토템시를 창출하였다. 우에서 남영전시인의 토템시의 정신ㅡ 원융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였다. 우리는 남영전토템시의 구조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러가지 각도로 살펴볼수 있겠지만 필자는 제재들의 구조와 토템시에 일관된 정신에 대하여 천착해보려 한다.
제재적인 각도에서 남영전시인의 토템시를 보면 하늘과 대지와 그 사이에서 활동하는 사물들을 취급함으로써 천지인화의 경지를 구축하고있다겠다.
하늘의 제재로서는 해, 달, 별, 구름과 같은것이고 대지의 제재로서는 산, 물, 흙, 바다와 같은것이고 대지와 하늘을 이어주는 작용을 하는 제재들로는 두루미, 백조, 매, 바람 등등이다.
다른 방면으로 보면 전설적인 사물과 현실적인 사물들의 교차이기도 하다. 룡, 봉황, 신단수들은 순 전설적인 사물에 속하고 기타의 사물들은 현실적이면서도 토템적인 사물에 속한다고 할수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토템시의 시간과 공간의 호한성을 감안하게 된다. 시간적으로 말하면 인류력사의 수십만년을 포괄하고있으며 공간적으로 말하면 우주를 포용하고있다. 그러므로 토템시의 구축은 하나의 전례없던 방대한 작업으로서 소설로 쓰자해도 몇십권을 써야 할분량으로 되여있다는것을 알수 있다. 남영전시인이 이런 방대한 작업을 42수의 시로 완성하였다는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할수 없다.
남영전토템시의 정신은 세가지로 구축되였다고 볼수 있다. 첫째는 모성사상으로 관통되였고 둘째는 자존자강의 사상으로 관통되였고 셋째는 더불어 살자는 사상으로 관통되였다. 이 세가지는 모두가 원융이라는 핵을 받쳐주는 세개의 기둥이라고 할수 있다.
모성사상은 어머니마음이다. 토템의 뿌리는 모계사회에 있다. 토템자체가 모성이다. 모성은 인간에게서 가장 위대한 도덕이며 륜리이며 기치이며 응집력이다. 자연은 이 세상사물의 어머니이고 이 세상 모든 사물이 자연의 자식들이다. 자연은 자식들을 사랑한다. 불효한 자식이 있을뿐이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는 없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자식이 형제들과 싸우면서 어머니한테 많은 상처를 입히고있다. 남영전시인은 이러한 인간들의 불효를 타매하고 바로 잡기 위하여 토템시를 썼다. 토템시 모두가 모성을 위하여, 모성의 복구를 위하여 씌여졌다고 할수 있겠다. <<바다>>, <<산>>, <<해>>,… 등에서 모성이 집중적으로 표현되고있다.
생명을 낳아키우고
중생을 품에 안은
바다는
세상의 무궁변천과
인간의 창상지변을
낱낱이 엿보아왔다
그 가슴 넓고도 깊어
골육상쟁이 피묻은 칼과
세인이 모르는 비밀도
깊숙이 감추고
언제나 하냥
입을 꼬옥 다물고있다
시 <<바다>>에서 절록한것이다. 바다는 중생을 낳아키우면서 세상의 변천과 인간의 창상지변을 본다. 바다의 흉금은 넓고도 넓어 싸움에서 떨어진 피묻은 칼도 품어주고 세인의 비밀도 말하지 않으면서 침묵속에서 묵묵히 지켜본다. 이것이 어머니 품성이 아니고 무엇이랴. 세상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식이 잘못을 저질러도 안아주고 달래주고 가르쳐주는 어머니의 정과 마음이 바다를 통하여 우리의 가슴을 치고있다.
설렁 버림을 당한대도
설사 알몸이 된다 해도
설약 만신창이 된다 해도
설혹 불구의 몸이 된다 해도
굽히지 않는 신념으로
충천하는 기백으로
우뚝 솟으리
자신의 피
자신의 살
자신의 정기
자신의 팔로
날고 기는 생명 품에 안아주고
춤추고 노래하는 령혼 어루만져준다
쓸쓸하고 차가운 세상에
그래서 활기가 넘쳐나고
그래서 화목한 분위기가 돈다
<<산>>의 이미지다. 우리는 이 이미지를 통하여 어머니 품성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자신이 아무리 큰 타격과 상처를 입어도 그것을 속으로 묵묵히 새기며 자신의 팔로 자신의 가슴으로 생명을 안아 보듬어주고 이 세상에 활기가 넘치게 하기 위하여, 화목이 무르녹게 하기 위하여 비바람과 눈보라속에서도 우뚝 서있는 산! 그것은 동구밖에 나가서 집 떠난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그런 모습을 떠올리고, 때거리가 없어도 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죽이라도 따뜻하게 끓여주는 그런 녀인을 떠올린다.
아득히 먼 해궁전에
조상의 흰 대문이 열려있다
조상의 흰 령광
검은 도깨비와 사악을 붙잡고
조상의 흰 온정
첩첩 설산과 원하를 녹이고
조상의 흰 자애
귀여운 자손들의 외로움을 달래준다
그리하여
까무라진 혼백들 어둠에서 깨여나고
상서로운 부락들 어둠속에 태여난다
<<해>>에서 나오는 이 조상이 누구인가? 인류사회를 탄생시킨 어머니이다. 광의적으로 말하면 세상만물을 낳아준 자연이고, 협의적으로 말하면 모계씨족사회라고도 할수 있다. 모두어 말하면 원초적인 어머니이다. 어머니의 령광은 도깨비와 사악을 물리치고, 어머니의 온정은 이 세상의 차거움을 녹여주고, 원한을 삭여주고, 어머니의 자애는 자손들의 외로움을 달래준다. 어머니는 까무라진 흔백을 깨워주고,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살림을 꾸려가고 가세를 일으켜 세우면서 자신의 모든것을 헌신하고있다. 이 모성은 조상과 자손을 이어주는 <<다리>>로 되여 눈부신 빛을 뿌리면서 언제나 <<흰 대문>>이 열려져있는 원융의 궁전으로 우리를 불러들이고있다.
<<해>>, <<산>>, <<바다>>의 너그러움과 포옹, 그리고 헌신정신이 바로 어머니 정신이며 남영전토템시의 골격을 이루는 사상의 하나라겟다.
자존과 자강은 모든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정신이다. 자존과 자강이 없는 사물은 이 세상에서 존재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자존하고 자강하는것은 분발을 의미하며,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과 행위를 의미한다. 남영전토템시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원융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분발하고있으며 자강하고있다.
신비한 불
신비한 빛
날짐승도 얼씬 못하고
길짐승도 얼씬 못하고
도깨비도 얼씬 못한다
주눅이 든 혼백도
그래서 얼어붙은 날개 퍼덕인다
그래서 악마의 공포를 털어버린다
시 <<불>>의 제2련이다. 생존도, 풍년도, 정결도, 강녕도 불을 떠나서는 이룩될수 없다. 불은 이렇게 위력이 있고 이렇게 신성하다. 날짐승도 막고 길짐승도 막고 도깨비도 막는 불의 힘은 위대하다. 불은 인류의 문명을 창조해준 천지신명이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며 어두운 밤을 태우고 태양을 불러오는 존재이다.
시 <<개구리>>도 자존자강하기 위하여 폭력과 싸우며 따사로움을 위하여 기도를 드리는 생령이다. <<북풍>>, <<빙설>>, <<동토>>, 이 삼대산의 잔혹한 형벌속에서 <<인간의 잔인한>> 압제속에서 먹지 못하고 보지 못하지만 <<캄캄한 령어속에서>> 뛰쳐나온다. 왜 뛰쳐나오는가? 시는 이렇게 말하고있다.
다시는 묻히우기 싫어
다시는 어둠이 싫어
다시는 외로움과 굶주림이 싫어
논밭에서
련못에서
나무가지에서
밤낮 울며 노래한다
밤에는 어제날의 운명을 울고
낮에는 영원한 봄과 함께
따사로움이 그리워 기도를 드린다.
자존과 자강을 위하여 하늘에 기도드리는 개구리는 잔혹한 압력에 굽어들지 않고 자신의 생존을 개척해나가는 완강한 의지의 실천자이다. 사실 개구리에게도 찬란한 력사가 있었다. 부어신화를 보면 부여왕 해부루의 뒤를 이은 왕은 금와왕이였다. 금와왕은 추방당한 물의 녀신 류화를 도와 궁에 있게 함으로써 고구려의 건국시조 주몽을 낳게 하였다. 이것을 물의 생명력(류화의 잉태)과 개구리의 보호(금와왕의 행동)에 의해 탄생한 영웅(주몽)신화로 본다면, 금와왕의 행위는 산파(产婆)의 기능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였다. 물과 같이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그가 어찌 력사에 의하여 맥없이 무너지며 매몰될수 있으랴.
시에 등장하는 <<매>>도 자손자강의 한 전범이라겠다.
망망수해 어디나
명명황야 어디나
날고 날
비범한 담력과 흥분으로
우주의 바람 일으킨다…
한생 변함없는 큰 포부 안고
한생 두려움 모르는 추구로
경계의 노를
천지간에 저어간다
싸우지 않으면 망하고
강하지 못하면 망하거늘
날개 돋쳐 나는것만이
이 세상 살아가는 길이다
매는 수림의 바다와 어슴푸레한 황야를 난다. 그는 평상치 않은 담력과 흥분으로 우주에다 바람을 일으킨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경계의 노를 젓는다. 사냥물을 덮칠 때 그의 눈은 예리하고 그의 속도는 번개속도다. 강하기 위하여 싸운다. 매가 싸운다는것은 나는것이다. 날아야 매는 살고 날지 않으면 매는 죽는다. 매는 난다는 자체가 자기에 대한 존중이고 자기의 의무와 희망에 충성하는 길이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것이 아니고 만물은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도와주고 서로 엉키여서 더불어 살아가기 마련이다. 더불어 살아간다는것은 이 세상의 아름다움이며 도덕이며 륜리이다. 더불어살아간다는것은 이 세상이 화목해진다는 표징이며 평화로와진다는 표징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더불어 화목하게 살아가는 때면 토템시대가 다시 오는 때이며 원융의 희망이 실현되는 때이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에서 더불어 화목하게 살아가는 정신이 체현되고있다. 더불어 화목하게 살아가자는 사상이 시인의 시에 체현된 주요한 사상의 하나라겠다.
시 <<뻐꾸기>>는 피타게 웨친다. 이 세상이 어두워간다고 피타게 절규한다. <<외로운 그림자 끌고>>, <<백골>>은 <<거친 들판에서 쓸쓸히 한숨을 짓>>기에. 이런 절규를 시인은 이렇게 무드화하고있다.
피 터지는 울부짖음
방울방울 빨간 피로
설설 끓는 피눈물로
갈라터진 가슴을 녹여주고
말라죽는 목숨을 살려준다
화창한 봄을 불러오고
아롱진 색채를 입히여
세상이 목마르게 바라는
금빛동산을 일떠세운다.
피! 피를 바치는것은 최고의 헌신이며 충성이다. 피를 바친다는것은 희생을 각오한 일이며 생명의 마지막 연소를 의미한다. 뻐꾸기는 그런 마음과 의지와 자세로 <<갈라터진 가슴을 축여>> 주려하고, <<말라죽는 목숨을 살려>> 주려하고, 봄을 불러다 아름답게 장식하려고 하고, <<금빛동산을 일떠세우려>>한다. 더불어 화목하게 살기 위한 뻐꾸기정신은 아름다운 정신이며 비장한 정신이다. 뻐꾸기울음소리는 횡적으로 울리는것이 아니라 종적으로 하늘에서 떨어지고있다. 하늘에서 떨어진다는것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것으로써 신성한 하늘의 숙원을 전달하는것이며, 하늘과 땅을 하나로 융합시키려는것이다. 이것이 뻐꾸기의 더불어 화목하게 살려하는 정신이다.
남영전시인의 <<정혼의 집>>이고 <<정혼의 신비한 조각품>>이라 부르는 <<돌>>에서도 더불어 화목하게 살아가자는 의지가 빛발치고있다.
돌은 가장 거룩한 거인이여라
그의 말은
불과 우뢰, 비와 바람이 엮어주고
그의 마음은
천지간의 차고 더움을 헤아려주노라
그의 손은
해와 달을 받쳐들고
그의 힘은
끝없이 뻗쳐
수없이 많고 많은 령체를 움직이노라
돌은 분신쇄골이 되여도
알알이 모래로 되여 대천세계를 끌어안노라
남영전시인은 하늘과 돌의 신비하면서도 상서로운 만남과 어울림을 격조높이 노래하고있다. 거룩한 거인 돌의 말은 <<불과 우뢰, 바람이 엮어주고>> 돌의 마음은 <<천지간의 차고 더움을 헤아려주고>> 돌은 <<해와 달을 받쳐들고>> <<수없이 많은 령체를 움직인다>> <<돌은 분신쇄골이 되여도>> <<대천세계를 끌어안는다.>> 불, 우뢰, 바람, 비, 해, 달, 령체와 돌의 조화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서로 감싸주고 서로 받들어주고 서로 도와주면서 살아가는 그 순리가 바로 더불어 살아가는 화목이다. 그래서 돌은 산산이 부서져 알알의 모래로 되여도 대천세계를 달가이 끌어안는다. 생각할수록 그들의 마음의 어울림은 가슴을 찡하게 한다. 토템시를 극성스럽게 쓴 남영전시인의 바람이 바로 이러한것일것이고 이 세상 순박한 사람들의 마음이 바로 이런것이리라.
아무 곳에나 똥오줌을 갈기는 개, 애기의 똥도 맛갈스럽게 먹는 개다. 벼슬도, 명성도, 명예도 <<력사에 묻혀버려>> <<세월의 뒤꼬리에 달려/ 오늘도 달랑달랑 흔들거릴뿐>>인 개도 서로 어울려 화목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지조 하나만은 잊지 않고있다.
과분한 요구가 없고
주인집 못산다 꺼리지 않는다
예민한 코
밝은 귀
재빠른 네다리
집을 지켜주고
집주인 바래준다
주인의 버림을 당해도
주인을 배반하지 않는다
죽어서도
세월의 뒤꼬리에 달려
누울자리 하나면 만족이다
개는 왜 이렇게 바보질하는가? <<세월의 뒤꼬리에 달려/ 죽어도 누울 자리 하나만>> 있으면 되는 개, 애들의 똥이나 맛있게 먹으면 되는 개, 하지만 언제나 주인을 섬기는 개다. 주인이 부자든 빈자던 개는 관계하지 않는다. 주인이기만 하면 <<집을 지켜주고 집주인 바래준다.>> 함께 더불어 살면 되는것을 개는 영광으로 행복으로 숙명으로 간주하고있기때문이다. 인류의 력사에서 개의 공헌은 컸다. 사냥군을 도와 짐승잡이에 나서서 목숨을 걸고 주인을 도와주다가 죽은 개는 얼마이며 군견이 되여 전쟁에서 희생된 개는 그 얼마이랴. 생각해보면 인간중에는 개보다 못한 사람들이 많고도 많다. 어찌보면 개는 바보 같지만 실제상 개는 령물이고 신령한 영웅이다. 그러기에 인간이 원융에 도착하는 날 시인은 <<사람과 개 동시에/ 지평선에 나타난다>>고 했으리라.
모성으로, 자존자강으로, 더불어 사는 정신은 <<원융>>에 도달하려는 남영전시인의 토템시의 정신이라고 필자는 말하고싶다. 인간이 이런 정신으로 삶을 대하고 자연을 대하고 인간 서로를 대하면 마음이 편하게 평화의 향연을 누리게 되리라고 필자는 믿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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