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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대한 상실감과 진주로 거듭나기
최삼룡
허룡석의 수필 세편을 읽어본 필자의 마음이 가볍지 않다.
첫편 <녹쓴 철길 우에서>에서 그려진 룡정시 동성용향 옛날 조개선朝开线 철길 옆에 자리잡은 작자의 고향은 황페해질 대로 황페해졌다. 철도는 운행이 중지되고 철길은 녹이 쓸고 조개선의 끝 마을 개산툰에는 유명한 종이공장이 있었는데 이미 망해버렸고 새벽대학이라는 멋있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중국의 첫 농업대학도 사라졌고 심지어 작자가 다녔던 중학도 문을 닫아버렸고 사람들이 돈벌이를 위해 도시로 외국으로 가버린 마을도 황페해지고 논과 밭이 외래인에게 넘겨졌다.
개혁개방의 물결 속에서 허룡석씨의 고향집, 고향마을, 고향사람, 고향산천의 엄청난 변화는 참으로 락막落寞하기만 하다.
솔직히 말하면 허룡석씨가 여기서 그린 고향의 풍경은 퍽 희귀한 것이 아니다. 개혁개방 중에서 전에는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보귀하던 사물이 하루아침에 1전어치도 안되는 페물로 되여버린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며 계획경제시대에는 잘 나가던 공장이나 기업이 점차점차 아무 쓸모 없는 것으로 사라져버리는 현상은 얼마든지 있으며 동북3성의 조선족 농촌을 돌아보면 자연촌이 해체되여 마을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없고 학교 운동장에 뛰노는 학생들 대신 염소가 풀을 뜯거나 닭이 홰를 치는 황페한 풍경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개혁개방 이래 황페해진 조선족 농촌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금시초문이 아니다. 그러나 사회에 흔한 것이 문학에도 흔하다고 결론할 수는 없으며 다른 사람이 하는 이야기와 허룡석이 하는 이야기가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문학상식이다. 왜냐 하면 문학은 천성적으로 개성적이며 비반복적이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허룡석의 수필 <녹쓴 철길 우에서>는 아주 잘 씌여진 수필이 아닌바 내용상에서 모자람이 보이며 문체상에서도 세련미가 부족하지만 필자에게 큰 사색의 공간을 열어주었다.
첫째, 고향이란 무엇인가?
자기가 태여나 자란 곳 또는 자기 조상이 오래 누리여 살던 곳을 고향이라 한다. 고향은 나의 과거가 있는 곳이며 정이 든 곳이며 일정한 형태로 내게 형성된 하나의 세계이다. 고향은 공간이며 시간이며 마음人间이라는 세 요소가 불가분의 관계로 굳어진 복합된 심성心性이다. 고향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는 각인각색으로 모습을 달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움, 잊을 수 없음, 타향에서 갈 수 없는 안타까움 이런 면은 공통하다. 기본적으로 고향은 순수한 유년시절에 대한 동정과 관련되여 따뜻하고 자족적인 공간으로 상징된다. 이러한 고향의 긍정적 이미지는 현대의 훼손된 삶과 대비되면서 고향에 대한 상실감을 확신시킨다.
이렇다고 한다면 이 수필에 맥맥하게 흐르는 작자의 옛 고향에 대한 추억에는 허룡석의 인간적인 내면이 안받침되여있다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다. 그것은 곧 고향사람들과 고향산천에 대한 남다른 사랑이며 그리고 개혁개방의 세찬 물결 속에서 좌충우돌하는 조선족이라고 불리우는 이 민족공동체의 운명에 대한 관조观照다. 그러니깐 필자가 여기서 느낀 것은 고향에 대한 사랑 역시 허룡석씨 만큼 크고 박절하고 심각한 사람도 많지 않다는 말이다. 필자의 경우 허룡석의 고향과는 판판 다르고 황페해지는 것은 더 말할 것 없지만 나는 이 때까지 허룡석처럼 진지하게 구체적으로 사랑을 품고 고향의 황페화를 생각해본 적이 없음을 고백한다.
둘째, 개혁이란 무엇인가? 이 문제는 현대화란 무엇인가? 도시화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같은 물음이다.
중국 사람들은 오래동안 혁명이란 개념에는 익숙했지만 개혁이란 개념에 익숙한 것은 저 력사적 의의가 있는 당의 11차 대표대회 3차 전원회의 이후부터이다. 개혁이란 특정한 제도 행동 조건의 개조를 통하여 성취될 수 있을 때 사회제도 및 정치체제의 본질적인 요소를 유지하면서 일부분만을 사회의 발전에 적합하도록 변혁시키는 것을 말한다. 개혁은 기존의 체제나 추세와 조화를 이루면서 부분적이고 한정된 변화를 꾀하는 것이다. 개혁은 기존 사회제도 또는 정치체계를 전면적으로 전변시키는 혁명과 다르지만 부분적인 체제나 제도, 시책을 바꾸게 됨으로써 기성 리익자들의 권리와 리익에 손상주게 되며 일부 사물을 멸망시키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게 된다. 중국에서 현대화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생태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으로서 부분적인 리념과 제도의 포기와 새로운 리념과 제도의 어쩔 수 없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계획경제 시대의 어떤 리념과 체제가 포기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시장경제체제의 건립에 따라 생존경쟁의 세계에서 외계의 상태나 변화에 적합하거나 잘 적응하는 것만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멸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 사람들, 기득권 계층 사람들의 개혁개방에 대한 반발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허룡석씨의 그 조개선 철도 운행이 중단되고 새벽농업대학이 사라지는 것은 력사의 필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허룡석씨가 다시 조개선 철도를 달리는 기차의 기적소리는 이제 영원히 들을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역시 조개선 렬파의 기적소리, 그것을 기다리는 허룡석씨를 바라보는 나는 더 할 말이 없다. 답답하다.
셋째, 조선족농촌의 황페화.
개혁개방, 현대화되고 도시화 되는 총적인 국면에서 농촌의 황페화는 어쩔 수 없는 사회현상으로 되고 있다. 농촌개혁의 성공과 농업에서 과학기술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농촌 잉여로동력을 낳았으며 이 잉여로동력은 자연스럽게 도시로 진출하게 되였다.
도시는 사람이 많고 일거리가 많고 돈이 많으며 정부의 시책활동이 집중되여서 눈부시게 발전한다. 상업, 공업, 교통, 류통, 교육, 정보산업, 언론매체, 무역 등등에서 농촌과 같은 농한기와 농번기 같은 완만한 반복 교대가 아니라 후퇴가 없는 전진과 발전이 지속된다. 정부의 시책으로 큰도시 집중 현상을 야기시켰고 그래서 농촌의 잉여로동력이 돈이 있고 살기 좋고 교육환경이 유리한 도시로 몰려들었다. 새로 발전하는 단계에서 수출입산업으로 경제규모가 확대되자 도시에서 인력이 급속히 요구되고 농촌인구의 도시집중화가 일어났으며 인구면에서 도시 증가와 농촌축소의 대비가 점점 더 극심해졌다. “돈이 있는 곳을 찾아 고향을 등지고”, “정들면 고향이니 나가서 벌어야지”, “돈이 몰린 곳에 사람이 몰리기 마련”, “도시발전에 먼저 참가하는 자가 유리하다.”는 론리가 팽배하였다. 급속한 도시화 현상으로 농촌 인구는 줄고 로동력은 로쇠하여 크게 감소되고 의욕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농촌에는 로인과 아녀자만 남고 젊은이는 도시로 빠져나간 형편에 생산을 올릴 수는 없었다. 이것은 지난 세기 80년대 말로부터 시작된 시장경제에 진입한 중국에서 보편적인 사회현상으로 되였는바 이미 도시에 진출한 농민이 1억 5천만이 넘었다는 통계가 있다. 그 결과 농촌의 일시적인 황페화는 불가피면적인 사회현상이다.
이와 같은 사회적 추세로 보면 조선족 농촌의 황페화는 역시 자연스러운 사회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선족은 다른 사회문제가 있으며 이른바 조선족의 도시진출도 자체에 고유한 특점이 있다. 그것은 즉 중국조선족이라고 불리우는 이 민족공동체의 력사의 독특성에서 온다.
주지하다 싶이 중국조선족은 과경민족으로서 그 력사가 200년도 안된다. 1980년대 개혁개방 이래 점차 조선족은 상대적으로 발달하고 개방된 대한민국으로 자유롭게 래왕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며 친지방문, 학술교류, 무역활동, 국제결혼, 위장결혼 등으로 래왕하는 것을 거쳐 요즘에는 로동력으로 한국에 나가 돈벌이를 하는 것이 합법화되여 중국조선족 로동력이 대량 한국에 나간 결과 조선족 인구의 부장성과 조선족 농촌의 황페화를 초래하게 되였다. 허룡석의 고향마을의 황페화는 그 가장 대표적인 례로 되는 것 같다. 요즘 한국의 통계에 근거하면 한국에 나간 중국조선족은 80만이 넘었고 제2세대만 이미 10만에 근접한다고 한다. 여기에다 국내의 대도시와 연해도시에 진출한 수십만 그리고 일본, 미국, 유럽, 로씨야에 진출한 인구를 제외하면 중국조선족 인구의 감소와 농촌의 황페화는 가히 추측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조선족 농촌의 황페화는 결코 외부세력의 영향에서 초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즉 중국의 정부나 당에서 우리의 오늘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한국정부에서 우리의 오늘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로지 중국조선족 자체의 실존에 그 기본 원인이 있다는 것을 승인하여야 한다. 원래 조선인 혹은 백의겨레는 근로하고 총명하지만 또 끈질긴 생명의지가 박약하고 눈앞에 리익만 챙기는 단기행위가 많다고 하는데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대륙에 와서도 그 렬근성을 다 극복하지 못한 중국조선족이여서 결국 오늘과 같은 이러한 력사의 어려운 고비를 넘어야 하는 상황이다.
수필 <녹쓴 철길 우에서>에 감사한 마음이다. 이 수필은 필자에게 이상과 같은 몇개 문제 즉 고향이란 무엇인가? 개혁개방이란 무엇인가? 중국조선족 농촌은 어째서 이렇게 빨리 해체되는가? 하는 등등 문제에 대하여 깊이 사고해볼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모두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모두가 운명적인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이에 대하여 작자는 수필의 결미를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고향마을이 주당위와 정부에서 진척시키고 있는 연길, 룡정, 도문, 연룡도발전계획안에 들어 마을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동경으로 가슴들이 새롭게 부풀어있다는 점이다. 고향마을의 새로운 도약적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음에 마음은 다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정든 고향이여, 부단히 발전하고 번영하라! 이 땅을 억척스레 가꾸며 세대로 구슬땀을 휘뿌려온 고향의 친인들이여, 부디 행복하시라.
이렇게 하였지만 숨결 뿐이고 맥이 빠진 텅 빈 말에 불과한 이 결미는 고향에 대한 작자의 상실감을 더한층 강조하는 구실을 할 뿐이다.
둘째편 <새빨간 거짓말과 새하얀 거짓말>은 문화비판 주제의 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과 다르게 꾸며서 하는 말을 거짓말이라고 하는데 작자는 수필에서 거짓말에 새빨간 거짓말과 새하얀 거짓말 두가지가 있다고 하면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 진실하고 성실한 사람이 허리를 펼 사회를 기대하는 마음을 전달하고 있다. 이 수필의 주제는 뭐 신영한 것이 아니고 글이 론설문처럼 론리적이고 딱딱하고 형상성이 부족하지만 사회의 보편성이 있고 대량 존재하는 현상에 대한 질서정연한 정리를 통해 역시 시장경제 건립의 충격 속에서 생성, 만연되는 부정현상의 하나로서 거짓말 현상에 대한 비판은 읽는 이들에게 일정한 계발을 주는바 적극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셋째편 <아픔이 진주를 낳는다>는 한편의 특색이 있는 수필이다. 사실 좋은 약재로서 구황이나 우황이 개와 소의 쓸개에 고통을 동반하는 병으로 만들어진다는 말은 들은 지 오래고 귀중한 장신구에 쓰이는 진주가 조개의 체내에서 병적인 분비물이 오래동안 쌓이면서 만들어진다는 것도 처음 듣는 말은 아니지만 작자가 이렇게 써놓았을 때 읽는 이들에게 주는 계시는 다르다.
조개가 진주를 만들어내는 고통의 과정에서 모든 보귀한 것은 그 생성과 성장과 성숙의 고장에 고통을 동반하게 된다는 철리에 대하여 도출해낸 것도 계발을 주고 있지만 특히 조개가 진주를 만들어내는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는 작자의 사물에 대한 관찰력 혹은 일정한 지식에 대하여 철저하게 파악하려는 노력을 충분히 과시하고 있다. 그리고 전편 수필에 깔려있는 변신을 하려는 창조주체의 꿈과 진주처럼 빛나는 생명으로 거듭나려는 내적인 갈망을 잘 깔아놓고 있어서 읽는 이들에게 모름지기 계시를 주고 있다.
총적으로 이 3편의 수필은 글이 잘 다듬어지지 못하고 구성상에서 잘 째여지지 못하고 문장이 지루하게 늘어진 등 결함이 있어도 사회문제에 대한 독창적인 비판이 있으며 창조주체의 깊은 자아성찰이 있고 생활에서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려는 노력과 상식을 문학으로 재창조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출처:<장백산>2018 제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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