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삼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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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수필평] 고향에 대한 상실감과 진주로 거듭나기 댓글:  조회:252  추천:0  2019-07-15
고향에 대한 상실감과 진주로 거듭나기  최삼룡   허룡석의 수필 세편을 읽어본 필자의 마음이 가볍지 않다.  첫편 에서 그려진 룡정시 동성용향 옛날 조개선朝开线 철길 옆에 자리잡은 작자의 고향은 황페해질 대로 황페해졌다. 철도는 운행이 중지되고 철길은 녹이 쓸고 조개선의 끝 마을 개산툰에는 유명한 종이공장이 있었는데 이미 망해버렸고 새벽대학이라는 멋있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중국의 첫 농업대학도 사라졌고 심지어 작자가 다녔던 중학도 문을 닫아버렸고 사람들이 돈벌이를 위해 도시로 외국으로 가버린 마을도 황페해지고 논과 밭이 외래인에게 넘겨졌다.  개혁개방의 물결 속에서 허룡석씨의 고향집, 고향마을, 고향사람, 고향산천의 엄청난 변화는 참으로 락막落寞하기만 하다. 솔직히 말하면 허룡석씨가 여기서 그린 고향의 풍경은 퍽 희귀한 것이 아니다. 개혁개방 중에서 전에는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보귀하던 사물이 하루아침에 1전어치도 안되는 페물로 되여버린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며 계획경제시대에는 잘 나가던 공장이나 기업이 점차점차 아무 쓸모 없는 것으로 사라져버리는 현상은 얼마든지 있으며 동북3성의 조선족 농촌을 돌아보면 자연촌이 해체되여 마을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없고 학교 운동장에 뛰노는 학생들 대신 염소가 풀을 뜯거나 닭이 홰를 치는 황페한 풍경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개혁개방 이래 황페해진 조선족 농촌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금시초문이 아니다. 그러나 사회에 흔한 것이 문학에도 흔하다고 결론할 수는 없으며 다른 사람이 하는 이야기와 허룡석이 하는 이야기가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문학상식이다. 왜냐 하면 문학은 천성적으로 개성적이며 비반복적이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허룡석의 수필 는 아주 잘 씌여진 수필이 아닌바 내용상에서 모자람이 보이며 문체상에서도 세련미가 부족하지만 필자에게 큰 사색의 공간을 열어주었다. 첫째, 고향이란 무엇인가? 자기가 태여나 자란 곳 또는 자기 조상이 오래 누리여 살던 곳을 고향이라 한다. 고향은 나의 과거가 있는 곳이며 정이 든 곳이며 일정한 형태로 내게 형성된 하나의 세계이다. 고향은 공간이며 시간이며 마음人间이라는 세 요소가 불가분의 관계로 굳어진 복합된 심성心性이다. 고향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는 각인각색으로 모습을 달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움, 잊을 수 없음, 타향에서 갈 수 없는 안타까움 이런 면은 공통하다. 기본적으로 고향은 순수한 유년시절에 대한 동정과 관련되여 따뜻하고 자족적인 공간으로 상징된다. 이러한 고향의 긍정적 이미지는 현대의 훼손된 삶과 대비되면서 고향에 대한 상실감을 확신시킨다.  이렇다고 한다면 이 수필에 맥맥하게 흐르는 작자의 옛 고향에 대한 추억에는 허룡석의 인간적인 내면이 안받침되여있다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다. 그것은 곧  고향사람들과 고향산천에 대한 남다른 사랑이며 그리고 개혁개방의 세찬 물결 속에서 좌충우돌하는 조선족이라고 불리우는 이 민족공동체의 운명에 대한 관조观照다. 그러니깐 필자가 여기서 느낀 것은 고향에 대한 사랑 역시 허룡석씨 만큼 크고 박절하고 심각한 사람도 많지 않다는 말이다. 필자의 경우 허룡석의 고향과는 판판 다르고 황페해지는 것은 더 말할 것 없지만 나는 이 때까지 허룡석처럼 진지하게 구체적으로 사랑을 품고 고향의 황페화를 생각해본 적이 없음을 고백한다. 둘째, 개혁이란 무엇인가? 이 문제는 현대화란 무엇인가? 도시화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같은 물음이다. 중국 사람들은 오래동안 혁명이란 개념에는 익숙했지만 개혁이란 개념에 익숙한 것은 저 력사적 의의가 있는 당의 11차 대표대회 3차 전원회의 이후부터이다. 개혁이란 특정한 제도 행동 조건의 개조를 통하여 성취될 수 있을 때 사회제도 및 정치체제의 본질적인 요소를 유지하면서 일부분만을 사회의 발전에 적합하도록 변혁시키는 것을 말한다. 개혁은 기존의 체제나 추세와 조화를 이루면서 부분적이고 한정된 변화를 꾀하는 것이다. 개혁은 기존 사회제도 또는 정치체계를 전면적으로 전변시키는 혁명과 다르지만 부분적인 체제나 제도, 시책을 바꾸게 됨으로써 기성 리익자들의 권리와 리익에 손상주게 되며 일부 사물을 멸망시키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게 된다. 중국에서 현대화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생태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으로서 부분적인 리념과 제도의 포기와 새로운 리념과 제도의 어쩔 수 없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계획경제 시대의 어떤 리념과 체제가 포기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시장경제체제의 건립에 따라 생존경쟁의 세계에서 외계의 상태나 변화에 적합하거나 잘 적응하는 것만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것은 멸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 사람들, 기득권 계층 사람들의 개혁개방에 대한 반발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허룡석씨의 그 조개선 철도 운행이 중단되고 새벽농업대학이 사라지는 것은 력사의 필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허룡석씨가 다시 조개선 철도를 달리는 기차의 기적소리는 이제 영원히 들을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역시 조개선 렬파의 기적소리, 그것을 기다리는 허룡석씨를 바라보는 나는 더 할 말이 없다. 답답하다. 셋째, 조선족농촌의 황페화. 개혁개방, 현대화되고 도시화 되는 총적인 국면에서 농촌의 황페화는 어쩔 수 없는 사회현상으로 되고 있다. 농촌개혁의 성공과 농업에서 과학기술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농촌 잉여로동력을 낳았으며 이 잉여로동력은 자연스럽게 도시로 진출하게 되였다. 도시는 사람이 많고 일거리가 많고 돈이 많으며 정부의 시책활동이 집중되여서 눈부시게 발전한다. 상업, 공업, 교통, 류통, 교육, 정보산업, 언론매체, 무역 등등에서 농촌과 같은 농한기와 농번기 같은 완만한 반복 교대가 아니라 후퇴가 없는 전진과 발전이 지속된다. 정부의 시책으로 큰도시 집중 현상을 야기시켰고 그래서 농촌의 잉여로동력이 돈이 있고 살기 좋고 교육환경이 유리한 도시로 몰려들었다. 새로 발전하는 단계에서 수출입산업으로 경제규모가 확대되자 도시에서 인력이 급속히 요구되고 농촌인구의 도시집중화가 일어났으며 인구면에서 도시 증가와 농촌축소의 대비가 점점 더 극심해졌다. “돈이 있는 곳을 찾아 고향을 등지고”, “정들면 고향이니 나가서 벌어야지”, “돈이 몰린 곳에 사람이 몰리기 마련”, “도시발전에 먼저 참가하는 자가 유리하다.”는 론리가 팽배하였다. 급속한 도시화 현상으로 농촌 인구는 줄고 로동력은 로쇠하여 크게 감소되고 의욕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농촌에는 로인과 아녀자만 남고 젊은이는 도시로 빠져나간 형편에 생산을 올릴 수는 없었다. 이것은 지난 세기 80년대 말로부터 시작된 시장경제에 진입한 중국에서 보편적인 사회현상으로 되였는바 이미 도시에 진출한 농민이 1억 5천만이 넘었다는 통계가 있다. 그 결과 농촌의 일시적인 황페화는 불가피면적인 사회현상이다. 이와 같은 사회적 추세로 보면 조선족 농촌의 황페화는 역시 자연스러운 사회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선족은 다른 사회문제가 있으며 이른바 조선족의 도시진출도 자체에 고유한 특점이 있다. 그것은 즉 중국조선족이라고 불리우는 이 민족공동체의 력사의 독특성에서 온다. 주지하다 싶이 중국조선족은 과경민족으로서 그 력사가 200년도 안된다. 1980년대 개혁개방 이래 점차 조선족은 상대적으로 발달하고 개방된 대한민국으로 자유롭게 래왕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며 친지방문, 학술교류, 무역활동, 국제결혼, 위장결혼 등으로 래왕하는 것을 거쳐 요즘에는 로동력으로 한국에 나가 돈벌이를 하는 것이 합법화되여 중국조선족 로동력이 대량 한국에 나간 결과 조선족 인구의 부장성과 조선족 농촌의 황페화를 초래하게 되였다. 허룡석의 고향마을의 황페화는 그 가장 대표적인 례로 되는 것 같다. 요즘 한국의 통계에 근거하면 한국에 나간 중국조선족은 80만이 넘었고 제2세대만 이미 10만에 근접한다고 한다. 여기에다 국내의 대도시와 연해도시에 진출한 수십만 그리고 일본, 미국, 유럽, 로씨야에 진출한 인구를 제외하면 중국조선족 인구의 감소와 농촌의 황페화는 가히 추측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조선족 농촌의 황페화는 결코 외부세력의 영향에서 초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즉 중국의 정부나 당에서 우리의 오늘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한국정부에서 우리의 오늘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로지 중국조선족 자체의 실존에 그 기본 원인이 있다는 것을 승인하여야 한다. 원래 조선인 혹은 백의겨레는 근로하고 총명하지만 또 끈질긴 생명의지가 박약하고 눈앞에 리익만 챙기는 단기행위가 많다고 하는데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대륙에 와서도 그 렬근성을 다 극복하지 못한 중국조선족이여서 결국 오늘과 같은 이러한 력사의 어려운 고비를 넘어야 하는 상황이다. 수필 에 감사한 마음이다. 이 수필은 필자에게 이상과 같은 몇개 문제 즉 고향이란 무엇인가? 개혁개방이란 무엇인가? 중국조선족 농촌은 어째서 이렇게 빨리 해체되는가? 하는 등등 문제에 대하여 깊이 사고해볼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모두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모두가 운명적인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이에 대하여 작자는 수필의 결미를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고향마을이 주당위와 정부에서 진척시키고 있는 연길, 룡정, 도문, 연룡도발전계획안에 들어 마을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동경으로 가슴들이 새롭게 부풀어있다는 점이다. 고향마을의 새로운 도약적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음에 마음은 다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정든 고향이여, 부단히 발전하고 번영하라! 이 땅을 억척스레 가꾸며 세대로 구슬땀을 휘뿌려온 고향의 친인들이여, 부디 행복하시라.   이렇게 하였지만 숨결 뿐이고 맥이 빠진 텅 빈 말에 불과한 이 결미는 고향에 대한 작자의 상실감을 더한층 강조하는 구실을 할 뿐이다.   둘째편 은 문화비판 주제의 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과 다르게 꾸며서 하는 말을 거짓말이라고 하는데 작자는 수필에서 거짓말에 새빨간 거짓말과 새하얀 거짓말 두가지가 있다고 하면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 진실하고 성실한 사람이 허리를 펼 사회를 기대하는 마음을 전달하고 있다. 이 수필의 주제는 뭐 신영한 것이 아니고 글이 론설문처럼 론리적이고 딱딱하고 형상성이 부족하지만 사회의 보편성이 있고 대량 존재하는 현상에 대한 질서정연한 정리를 통해 역시 시장경제 건립의 충격 속에서 생성, 만연되는 부정현상의 하나로서 거짓말 현상에 대한 비판은 읽는 이들에게 일정한 계발을 주는바 적극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셋째편 는 한편의 특색이 있는 수필이다. 사실 좋은 약재로서 구황이나 우황이 개와 소의 쓸개에 고통을 동반하는 병으로 만들어진다는 말은 들은 지 오래고 귀중한 장신구에 쓰이는 진주가 조개의 체내에서 병적인 분비물이 오래동안 쌓이면서 만들어진다는 것도 처음 듣는 말은 아니지만 작자가 이렇게 써놓았을 때 읽는 이들에게 주는 계시는 다르다. 조개가 진주를 만들어내는 고통의 과정에서 모든 보귀한 것은 그 생성과 성장과 성숙의 고장에 고통을 동반하게 된다는 철리에 대하여 도출해낸 것도 계발을 주고 있지만 특히 조개가 진주를 만들어내는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는 작자의 사물에 대한 관찰력 혹은 일정한 지식에 대하여 철저하게 파악하려는 노력을 충분히 과시하고 있다. 그리고 전편 수필에 깔려있는 변신을 하려는 창조주체의 꿈과 진주처럼 빛나는 생명으로 거듭나려는 내적인 갈망을 잘 깔아놓고 있어서 읽는 이들에게 모름지기 계시를 주고 있다.   총적으로 이 3편의 수필은 글이 잘 다듬어지지 못하고 구성상에서 잘 째여지지 못하고 문장이 지루하게 늘어진 등 결함이 있어도 사회문제에 대한 독창적인 비판이 있으며 창조주체의 깊은 자아성찰이 있고 생활에서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려는 노력과 상식을 문학으로 재창조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출처:2018 제6호
10    민족의 수난과 개체의 기억 그리고 문체혁신의 몸부림 댓글:  조회:840  추천:6  2011-06-28
민족의 수난과 개체의 기억 그리고 문체혁신의 몸부림                                -강효근론                                최삼룡     들어가는 말    강효근(康孝根, 1935~)은 조선족문단에서 일가를 이룬 저명한 소설가이다.  그의 근 100편에 달하는 소설작품은 그 풍부한 생활내용과 선명한 지방특색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있다. 《높은 령 깊은 골》,《바람은 가슴속에 멋는다》,《객귀》,《귀책》 등 단편소설과 《정신있소》,《좀벌레․부평초․<세기병>》, 《신음하는 음영》, 《둥지를 떠난 새》,《살아 숨쉬는 상흔》 등 중편소설 그리고 최근에 출판한 장편소설 《산 너머 강》은 사상내용 및 예술형식에서 모두 우리 문단의 수작으로 평할수 있다.  1964년 단편소설《영각소리》를 발표하여서부터 근 반세기가 되는 작품활동으로 이룩한 강효근의 이러한 성과들은 거개가 조선족의 20세기 수난과 밀착되여있는  창조주체로서 강효근의 생생한 인생기억의 재생과  고향ㅡ길림시 조선족의 풋풋한 삶의 현장에 깊이 뿌리내린 선명한 지방특색으로 매력적이다.  본 론고는 강효근의 근 반세기 되는 작품활동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고찰하고 그의 대표작들의 제재와 인물, 사상의식성향에 대하여 심층적으로 조명하면서 강효근 소설의  문학사적 자리매김을 시도한다.          1. 민족의 수난과 강효근의 소설    강효근의 소설작품의 제재는 조선족이라고 불리우는 민족공체의 20세기 비운과 끈끈하게 밀착되였다.  조선족이라는 이 공동체가 형성되게 된 객관적인 원인은 다른데 있는것이 아니라 지난 세기초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에 대한 침략이다. 일제의 침략에 파산된 농민들이 생존을 위하여 고향을 떠나 조국을 등지고 만주땅에  이민으로 왔었으며 그들을 중심으로 점차 조선족사회가 형성되게 되였다.  강효근의 가정도 역시 살길을 찾아 황해도 재령을 떠나 길림시 복흥리에 자리를 잡고 『황해하숙』을 꾸리며 살아왔다. 강효근자신은 비록 길림에서 태여났지만 여렸을 때부터 고향을 떠나 조국을 등지고 길림으로 온 이민들의 피눈물의 현장을 보면서 자랐고 수많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성장하였던것이다.  수난의 시작은 바로 고향을 떠나 조국을 등졌다는데로부터 시작되고 이민을 왔으나 궁핍한 생활과 민족의 수난은 계속된다. 그러므로 강효근의 소설에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반복적으로 나오는것은 당연한것이며 이민 온 다음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궁핍한 삶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반복적으로 나오는것은 당연한것이다.    단편소설《동틀무렵》에서 녀주인공 순임의 부친은 바로 조선에서 3․1독립만세를 불렀고 체포되여 옥살이를 하고 석방된후 발붙일 자리가 없어 남부녀대하여 압록강을 건너 서란현에서 100여리 떨어진 태평툰이라는 마을에 와서 자리를 잡았으나 옥중고생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뜨고 어머니와 둘이 어려운 나날을 보냈다.   단편소설《객귀》의 주인공 명흥만의 고향은  울진에서 얼마 멀지 않는 죽변이라는 고장이었다. 거기에는 금란이라고 부르는 사랑하는 처녀가 있었는데 인면수심의 계부의 수작에 시달리다가 어느날 갑자기  난데없이 들이닥친 일본군인들에게 끌려갔다. 그 장본인이 바로 계부의 짓인것을 알게 된 명흥만이는 한주먹으로 금란이 계부를 때려눕히고 찾아온곳이 바로 송화강이 S형으로 감돌아흐르는 길림시였다.  그러나 일제의 눈을 피해 여기 길림으로 찾아온 그에게 자신의 운명을 바꿀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릴수 있었겠는가. 결국 송화강 나루터의 고독하고 쓸쓸한 배사공일밖에 더 차려진것이 없다.  이 나루터에서 배사공으로  있으면서 그가 하는 일이란 결국 객지에서  비명으로 사망하여  무주고혼이 된 객귀를 안장하는 일뿐이였다. 그중 한 객귀는 송화강 풍만수력발전소 현장에서 떠내려온 익사체다. 송화강에 처넣어진 로쇠해졌거나 앓아서 로동력을 상실당한 인부였다. 또 한 객귀는 겨릅댕기처럼 강말랐다 해서『써우즈(瘦子ㅡ말라꽹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는 비렁뱅이다.  또 다른 객귀는 일본놈에게 끌려와 일본군의 위안부로 있으면서 온갖 인생고를 다 겪고  매독에 걸려 이제 고향에 돌아갈 타산이였던 위안부, 명홍만이가 자기의 첫사랑 금란이로 착각한 녀자였다. 나중에 객귀를 매장하던 그도 객귀로 되고만다.      중편소설《세월은 흘러》의 주인공이면서 화자인 《나》가 어머니와 함께 만주에 이민 온것은 세대주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내내 떠돌이로 사는 아버지에 대한 기대감이 무너진것이 주요 원인이지만 이것 또한 일제식민지치하에서 농업의 파산과 농민의 궁핍이라는 명제와 같은 맥락으로 풀이할수 있는것이다. 그들이 만주에 와서 겪는 삶의 궁핍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외삼촌이 사는 곳이라고 신의주를 지나 할빈에 닿고 다시 오상현을 거쳐 서란현 어느 산골 황가툰으로 찾아왔지만 먹는것은 끼니마다 머얼건 강냉이 죽이였다.   장편소설《산 너머 강》에서 일준이와 순자의 비참한 운명의 시작도 바로 고향을 떠나고 조국을 등진데로부터 시작되고있다. 순자는 바로 왜놈들이 전문 처녀애들을 강제로 끌어다가 말로는 만주의 어느 병기공장에 보낸다고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만주의 일본군의 위안부노릇을 한다는 소식에 아버지와 더불어 여기 만주로 건너왔던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마찬가지로  힘껐 일하고 배 부르게 먹고 발편 잠을 잘데가 없었던것이다. 그들 부녀 둘은 북으로 북으로 자리를 옮기다가 닿은 곳이 바로 치타이허라고 부르는 탄광이였고 그곳에서 아버지는 겨우 일자리를 찾았으나 얼마 안되여 탄광이 무너져 비명에 죽음을 당하고 순자는 고아로 된다.  조선족의 초기 이민시기와는 한세기도 저 떠러진 21세기의 어느 조선족로인의 쓸쓸한 만년을 재현한 소설《일그러진 석양》에서도 강효근은 모름지기 주인공의 고향이 황해도 재령이였다는것을 밝히고있다.  1945년 8 ․ 15 해방전의 생활을 조선족의 이민생활의 첫 단계라고 한다면 1945년으로부터 1949년 10 ․ 1 건국까지 를 조선족이민들의 두번째 단계라고 할수 있다.  이 시기의 길림 조선인들의 생활에 대한 반영은 강효근의 소설작품의 주체를 이루고있다.  사실상에서 이 시기는 길림의 조선족들뿐만아니라 2백만으로 헤아리던 재만 조선인들의 생활이 말그대로 십자로에 처한 시기였다. 게다가 길림은 지정학적으로 북만과 동만과 남만을 련결하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군사상의 요새지대였다. 하기에 해방공간에서 길림의 여러 력량, 여러 당파, 여러 계층의 투쟁은 다른 지구에 비하여 더 치렬하고 다 첨예하고 더 복잡할수밖에 없었다. 국민당과 그 아래의 직계부대와 토비 등 군사력량과 , 공산당과 그 아래의 동북민주련군(후에 제4야전군) 등 군사력량의 생사투쟁외에 여러가지 주의와 구호를 내건 여러 조직과 종파들의 리익을 대표하는 조선인해방동맹회, 한국교민회 등  정치조직들 사이의 투쟁과 공산당의 로선정책을 집행하는 와중에 생긴 좌적인 편향의 영향을 받으면서 길림시의 조선인들은 해방공간에서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 격으로 새로운 수난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것이다.  첫째, 쏘련군의 만행.  해방공간에서 첫 가해자는 쏘련군이다. 이런 이야기는 강효근의 소설에서 자주 나오는데 그중 대표적인것이 일본이 무조건투항을 선포한 다음 일본인에 대한 쏘련군의 비인도적인 만행에 대한 고발이다.      8․15광복을 맞아 좋은 세월이 도래하리라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시국은 점점 란국란시로 변해갔다. ……  따발총을 멘 이상한 말을 하는 군인들이 순이내 하숙집으로 돌입했고 그 즉시 칸칸이 문을 열고 눈이 벌개 살피였다.  《야뽄스끼 마담 니예뚜?(일본녀인 없는가?)》  《여긴 하숙집이외다. 일본녀인이 있을리 만무하지요.》  순애 어머니는 딱 잡아떼였다.  그때였다. 고방에서 인기척소리가 났다.  군인의 한놈이 와락 고방으로 다려갔고 고방문을 활 열어젖힌다. 고방벽쪽에 딱 붙어선 한 사람이 전신을 덜덜 떨고있었다. 《야뽄스키마담, 호로쇼!(일본녀인 참 좋군)》  아끼꼬(秋子)는 남자로 가장하느라 장발머리를 박박 깎고 광목천으로 젖무덤을 칭칭 감았다. 군인들의 수색을 피해 뒤고방에 숨어있었다. 이 모든것은 순애 어머니의 의사에 따라진행되였다. 가석하게도 수포로 돌아갔다.  《오바상,다스게데!(아줌마 구해주세요.)》  아끼꼬의 음성은 절절했다. 솟용이 없었다. 군인들은 그녀를 끌어내여 빈칸으로 끌고 들어갔고 륜간을 진행했다.  한놈이 그짓을 하면 다른 놈들은 따발총을 들고 보초를 섰다.    이것은 소설 《귀책》에서 아끼꼬가 당하는 이야기고 장편소설《산너머 강》에 하루꼬(春子)가 당하는 이야기가  씌여져있다. 다르다면 륜간을 당하는 녀자가  일본녀자가 아니라 남편이 남편이 어디 가고 혼자 사는 녀자이다. 쏘련군이 사라지자  토비 등 지방의 악세력이 만행한다. 장편소설《산너머 강》에서  일제놈의 강제병으로 끌려 갔다가 8․15해방과 함께 태평촌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하일준의 입은 옷과 신발까지 빼앗아내는놈들이 바로 토비들이다. 장편소설《산너머 강》에서 고향을 찾아 조국으로 돌아가는 귀향길에 나선 태평촌의 하일준, 오순자, 옥치복, 박인덕, 마상훈 등의 꿈을 여지없이 짓부신놈들이 바로 〈사팔뜨기〉를 대장으로 하는 토비무리였다.  하루 아침에 이 몇 가정의 조국으로 돌아가려는 세기적인 꿈이 깨여졌을뿐만 아니라  전 재산이 모조리 략탈당하고  심지어는 치복의 부친과 상훈의 아들은 참살을 당하고 오순자는 토비들에게 붙잡혀가게 된다. 이로부터 상훈이는 공포증으로 인한 정신이상이 오고 옥치복의 가치관에는 심각하고 미묘한 변화가 생기고  오순자의 인생은 더 비참하고 복잡하게 된다.     바로 이 시기에 강효근의 어머니가 길림시 복흥리에서 꾸리던 《황해하숙》이 철저한 훼멸을 당한다. 강효근의 여러 편의 소설에서 이 《황해하숙》의 이야기는 반복된다. 중편소설《강 건너 꽃구경》에서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묘술되였다.   도끼 날창, 식칼을 치켜든 어중이 떠중이들이 우리 집으로 밀려들어 소유의 가장집물을 ,어머니가 장장세월을 두고 한감두감씩 장만해놓았던 란국란시가 녀려되여 천반우 연복가지밑에 숨겨두었던 우리 4형제의 례장감까지 몽땅 털어갔다. 학도병으로 끌려간 큰형이 즉었는지 살았는지 감감무소식이였다.……어머니는 세상을 뜨고말았다.   단편소설 《귀책》에서는 이렇게 씌여졌다.    쏘련군이 사라지자 그를 대신한것은 국민당이였다.  화액(禍厄)은 불시에 들이 닥쳤다. 어중이 떠중이들이 칼, 날창, 되를 들고 순애네 하숙집으로 쳐들어왔다.《왜 이러지요?》  순애 아버지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사연을 물었다. 《위만때 네놈들 2등국민으로 우쭐했지? 꼬우리빵즈(조선놈새끼) 꾼단!(썩 물러가라.)》  막무가내녔다. 순애 아버지를  옆으로 밀어제친 놈들은 닥치는대로 부수고 까뭉개였다. 유리창은 산산이 박산나고 문짝은 볼모양이 없이 각이 물러났다. 전부 그런것은 아니였다 쓸모있는 가장집물은 하나도 빠짐없이 몽땅 털어갔다.   이 사건후 순애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세상을 뜨고 홀로 남은 순애는 살길을 찾아 태평촌으로 이사간다.   장편소설 《산너머 강》 제9절 〈해는 서산에 저물고〉에는 이 사건이 이렇게 묘사된다.    그때 출입문이 탕! 소리를 내며 열리였다. 이게 웬 일일가? 도끼와 식칼과 날창을 든 어중이떠중이들이 폭풍처럼 몰려들었다. 닥치는대로 마스고 부시였다. 유리창이 챙그랑  깨지고 미닫이문이 와당탕 부서져 나갔다.  -왜들 이러우?  재령댁이 급히 그들을 막아선다.  -꼬우리빵즈같은게 몰라 물어?  그중의 한 놈이 사팔눈을 지릅떠 보인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러시우?  -빠루디 재웠지, 밥 해먹였지?  사팔눈의 눈동자가 중간으로 모여들며  갈범처럼 으르렁거린다. 귀향길에 들어선 사람들에게 행패를 가하고 순자를 랍치해갔던 <사팔뜨기>였다.  -빠루라니? 조선에서 살지 못해 만주로 온 나그네들을 재웠을뿐인데 그것도 잘못인가?  이번엔 재령댁 바깥량반이 그들에게 덤벼들었다.  -꼬리방즈 2등 국민같은게 흥. 왜놈들께 붙어 그만큼 호의호식했으면 됐다. 이젠 우리 말등국민도 호강해보자. 저리 비켜!  <사팔뜨기>가 불호령을 지르면서 바깥량반을 냅다 찬다. 그바람에 구심을 잃은 강범수는 저만치로 밀려나가 쓰러진다.  략탈이 시작되였다. 유용한 가장집물은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놈들은 수년을 두고 한푼 두푼 모아 정성껏 장만하여 천정에 감추어두었던 아들의 혼수감까지 모조리 들추어내였다.  -날 죽여라, 이 날강도들아!  악밖에 남지 않은 재령댁은  바락바락 대여들었다.  녀인의 반항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어중이떠중이들은  모든 재물을 략탈해갖고 뿔뿔이 돌아갔다.  -이모 정신 차려요.  말선이가 이모를 끌어안아 일구었다. 재령댁의 머리는 헝크러져 흩어진 쑥대밭처럼 되였고 볼과 이마에는 상처가 여러 곳이였다. 그녀는 초점 잃은 시선으로 엉망이 된 집안을 멍청히 바라본다. 완연히 넋잃은 사람이였다. 그러다가 돌연 가슴이 터지는 소리를 내였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졌다고... 아, 아-재령댁은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방성대곡을 풀어헤친다. 슬퍼서 울고 억울해서 울고 가슴이 아파 울었다.    이 계렬의 소설에서 제일  돋보이는것이 중편소설 《동틀무렵》이다.  갖 해방된 길림부근의 상촌이라 부르는 마을에 서로 사랑하는 운봉이라는 남자와  순임이라는 녀자가 있었는데 울라깨의 조선인 치고는 제일 큰 부자이며  지방자위대 대장인 황금산의 아들 치복이가 순임이를 욕심내지만 순임의 결사적인 거절로 야욕을 채우지 못한다.  순임은 그야말로 가난의 꾸레미를 송두리째 끌어안고 알탕갈탕하면서 인생길을 걸어온 불상한 녀자다.  그의 부친은 3․1독림 만세를  불렀고 체포되여 갖은 곡경을 겪었다. 석방되였어도 고향땅에 발 붙일 형편이 없어 남부녀대하여 압록강을 건넜다. 후에 아버지는 옥중고생이 후유증으로 세상을 뜨고 어머니 슬하에서 온갖 고생을 겪으며 학교문앞에도 못 가보면서 일에 쪼들려 살아왔다.  그런데 운봉이가 서란현성에서 100리 떨어진 태평촌에 고모부의 상사(喪事)에 갔다오니  자위대의 략탈중에  아버지는 죽었고 순임이는 치복의 겁탈을 당하였다. 분노에 떨며 강팡질팡하던 운봉은 의용군을 찾아간다. 의용군에 들어간 그는 길림해방전투의 준비로 상툰에 먼저 파견되여 국민당의 곁다리드를 없앨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성한다. 연후에  순임이를 찾았으나 길림해방전투에서 순임을 만날줄이야! 순임이도 의용군에 참가하였던것이다.  부상당한 운봉이는 순임이를 만난 흥분과 자책과 자기의 정찰에서 불찰로 부대가 받는 손상에 대한 안타까움 등 복잡한 심태로 수류탄묶음을 들도 적의 보루를 짓부시고 장려한 최후를 마친다.  어찌 보면 장편소설《산 너머 강》의 추형이라고 접근할수 있는 이 소설에는 해방전 길림지구 초기이민들의 수난과 해방공간에서 고래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같은 운명을 고도로 압축시켰다고 할수 있다.  국민당이 패망한 다음에 진정한 해방의 은인 공산당이 왔다. 우선, 경자유기전(耕者有其田)! 밭을 가는자에게 땅을 준다는 세기적숙망을 이룩하는 력사의 새 아침이 여기 조선인들에게도 찾아오는 순간이다. 지주를 타도하고 땅을 분배하는 위대한 토지개혁이 시작되였다.  그러나 조선인들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여기서 강효근은 명석한 두뇌를 보지(保持)하면서 력사를 깊이 있게 투시하고 력사의 진실을 제대로 파헤치면서 우리 조상들이 겪었던 수많은 수난의 이야기를 인상 깊게 들려주고있다.  장편소설《산너머 강》에서 작자는 제 10장 《다사했던 그해 봄》으로부터 제18장 《신음하는 광야》까지 전편소설의 아주 많은 편폭을  할애하여 태평촌의 토지개혁운동과  토지개혁중에서 겪은 민족의 수난에 대하여 쓰고있다.  여기서 가장 대표적인것은 박인덕과 김응삼과 오순자의 죽음이다.   박인덕은 표준적인 농민이다. 풋풋한 인생체험으로부터 소가 농민에게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가를 깊이 터득한 그는 모든 밑천을 다 털어넣어 집에 소 한마리를 매여놓았다. 그런데  태평촌 농회의 좌적인 결재에 의하여 이 소를 빼앗기게 되며 이에 억울함과 분을 참을수 없는 박인덕은 밤중에 우사에 들어가 칼로 소를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응삼은 비교적 복잡한 인생경력을 겪은 사람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 동만에서 항일투쟁에 참가하고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이른바 반민생단투쟁중에서  잔혹한 투쟁을 받다가 최후에 해방을 받고 당의 지시에 따라 길림에 와서 위장자수를 한  당의 비밀공작자이다. 후에 조직과의 련계가 단절된 상황에서 그는 길림시에서 리어꺼를 끄는것으로 호구하면서 8․15해방전까지 생계를 유지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자 인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였다고 기뻐하였으나 결국 당년에 자기를 길림에 파견한 상급조직의 책임자 최사령원을 찾지 못하여 안달아하는판에 토지개혁중에서 변절자라는 죄명으로  총살을 당한다.   오순자의 죽음은 더구나 복잡하다고 할수 있다.  그날 귀향길에 올랐다가 《사팔뜨기》에게 붙잡혀갔다가 구사일생으로 도망쳐나온 순자는 장덕칠에 의하여 기생집 명월관에 팔려가게 되고 옥치복에 의하여 명월관을 벗어났으나 다른 살길이 없어서 막걸리선술집을 꾸려 생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렇게 되여 순자는 태평촌사람들에게 갈보, 매춘녀, 화냥년으로 몰리다가 토지개혁때에는 투쟁대상이 되는것이다. 하기는 순자의 직접 죽음은 치렬한 계급투쟁 즉 환향단 지주 황금산과 토지개혁공작대로 파견되여온 해방군과의 생사박투가 초래한것이지만 토지개혁중에서 집행된 좌적인 조치와 혁명열정이 넘치는 농민들의  망동에 그 근본 리유가 있는것이다.  여기서 꼮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순자의 사랑하는 남자, 소설의 주인공 하일수의 순자에 대한 편견이다. 그는 순자가 기생으로 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다짜고짜로 태도가  변해버리는바 순자가 월명관과 맺은 계약서를 읽어보지도 않고 찢어버린다.  다른 하나는 토지개혁이 시작된후 지주 황금산의 아들 황경춘이 딴 심보를 가지고 순자네 선술집에 몇번 다녀간데 대하여 크게 문장을 지은것이다. 태평촌 부녀회주임으로 활약하는 말순이는 원래부터 순자를 갈보, 매춘녀, 화냥년이라고 생각하던차에 토지개혁이 시작되니 순자를 투쟁대상으로 점 찍어놓고 순자가 황금산과 내통한다는 요언까지 날조한다. 알수 있는바 니 소설에서 순자의 죽음은 역시 깊은 의미가 있는것이다.  토지개혁중에서 장덕칠의 처 옥심이는 황경춘의 첩으로 되여 임신한 죄로 투쟁을 맞아 죽으며 순박한 농민 마상원과 남편을 읽은 박덕칠의 안해 백영도는  정신착란이 오며 길림의 이민들을  위해 좋은 일을 수많이 한 황해하숙 재령댁도  정신병이 발작된다. 이 모든것은  토지개혁때 받은 민족의 수난으로 읽을수 있다.  토지개혁도 끝나고 중화인민공화국도 건립되고 조선족은 정치상에서 중화의 56개 민족의 하나로 여기에 정착되였다. 나라의 떳떳한 주인으로 되였고 살림도 점차 궁핍에서 해탈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였으며 자기의 발전과 진보의 길에서 조선족은 중화의 56개 민족중 선진민족의 위상을 부상하여왔다.    그러나 민족의 수난의 력사가 끝난것은 아니다. 특히 1950년 6 ․ 25전쟁의 폭발, 건국하여 1년도 안 되여 터진 조선전쟁은 또 조선족의 생활에 예상하지 못했던 수난을 가져다주었다. 강효근의 소설에 전쟁과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에 대한 묘술이 많은것은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단편소설《귀책》의 주인공 순애는 결혼 3개월만에 남편 박기순이 자원하여 지원군에 입대하여 조선에 나갔는데 전쟁 3년간 편지 한통 없고 정전되였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순애는 시아버지를 모시고 어린 아들을 키우면서 온갖 고생이란 고생을 다 겪는다. 박기순은 3․8선 부근의 전투에서 타박상을 입고 포로로 되고 팔을 절단하고 한국에 남게 되였던것이다.  장편소설《산 너머 강》에서 주인공 하일준이와 리호원 옥치복 , 최만수 등은 갑자기 상급의 비밀명령에 따라 조선으로 나가 인민군에 편입되고  전쟁중에서 최만수는 희생되고 하일준이와  리호원과 옥치복은 포로로 되였다가 정전후 제가끔 갈라진다. 외다리가 된 리호원은 북에 남고 옥치복은 고향을 찾아 남에 남고 하일준은 태평촌으로 돌아온다.  중편소설《바람은 가슴속에 멎는다》의 주인공 승증렬은 지원군에 입대하여 조선에 나가 싸웠는데 천마산 무명고지 전투중에서 련장의 명령을 받고 물 구하러 산아래 내천으로 내려갔다가 부상을 당하고 포로로 되였다.  중편소설《살아 숨쉬는 상흔》에 화자 《나》의 친정아버지도 지원군으로 조선전쟁에 참가하였는데  바로 철원일대 무명고지를 탈취하기 위한 전투에서 복부관통상을 받았다. 총탄에 의해 끊어지고 뒤틀어진 창자를 끊어내고 바로 잡고난 결과는 창자가 짧아져 항문과 도저히 련결이 안되였다. 방법이 없는 방법으로 왼쪽옆구리에 구멍을 뚫고 거기에다 창자의 한끝을 이어놓고 그 주변을 비닐봉지로 감싸놓았다. 대변을 받는 곳이였다. 이렇듯 처절한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온 아버지는 죽지못해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이 소설의 다른 주인공 민대식의 운명도 역시 화자의 아버지와 별다르지 않다. 다르다면 그는 하일준이나 승정렬이와 다른 리념과 체제에서 산다는것이다. 철원 무명고지에서 지원군과의 싸움에서  다리를 부상당하고 절단수술을 한 그가 고향에 찾아갔을 때 부모는 폭격에 돌아가셨다. 그런데 소속부대가 무명고지의 전투에서 전멸되였기에 그의 신원을 증명할 사람이 없고 또한 그가 부산당한 다리를 수술한데는 군병원이 아니고 어느 로인네 집에서였다. 하기에 지금까지 유공자대우도 못받는 처지다.  민대식이 남북정상회담같은것은 정객들의 놀음이고 백성은 고래싸움에 터지는 새우라는 생각이나 화자의 자기 아버지를 피해자라고 한다면 자기는 피해자의 피해자라는 생각은 도리가 있는 생각들이라고 할수 있겠다.  전쟁은 승리의 개선가를 울리기도 하고 전투영웅을 낳는 마당인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류혈의 마당인것도 사실이다. 수많은 비명의 사망과 수많은 몸과 마음의 잔폐자를 만들어내는 전쟁에 총칼을 들고 직접 참가한 군인들이 겪는 고생에 대하여서는 더 말할것도 없지만 전쟁은 마찬가지로 후방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루 말할수 없는 고통을 주고 또 전쟁은 끝나도 그 후유증은 오래가거나 옥은 영원히 가셔낼수 없는 상처로 남아있게 되며 한 가정의 고통과 한 민족의 수난과 직결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전쟁포로 승정렬의 전후의 생활을 재현한  중편소설 《바람은 가슴속에 멎는다》와 군인가속 순애의 전쟁시기와 전쟁후의  생활을 재현한  단편소설 《귀책》은 우리 소설사에서 뚜렷한 한획을 그은  성과작으로 꼽을수  있다.  승정렬은 전쟁포로였다.  장편소설 《산 너머 강》의 주인공 하일준이도 역시 전쟁포로였는데 그가 돌아온 태평촌에의 생활을 작자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버스를 타고 도보로 걷고 한나절이 걸려서야 드디여 마을 입구에 들어섰다. 산과 들 그리고 수목들은 그닥 변함이 없고 당장이라도 찌그러질듯한 오두막도 올망졸망 그대로였다. 변했다면 마을 사람들이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그를 외면하면서 백안시했다. \"포로병으로 거제도인지 어딘지에 갇혀있었다며?\" \"군공을 세울대신 그게 뭐야.\" \"토지개혁에서 사람을 많이 죽이더니만  업보를 받은게지.\" 이러루한 말들이 그의 귀를 쑤시였다. 사람들의 공론이 처음에는 몹시 거슬렸다. 죽을 고생을 하면서 사선에서 헤면서도 태평촌이 그리워 불원만리 찾아왔거늘 왜들 이러지? 그러나 반감은 잠순간에 불과했다. 듣고 듣다가 곰곰 따져보면 그네들의 역설이 누구를 비하해 그런것은 아니였다. 실제 사실이 그렇고 그런걸 누굴 원망할가. 정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쟁터에서 귀환한 병사들에게 모두 적절한  일터를 마련해 주었건만 유독 일준에게만은 두고 봅시다, 라는 대답이 전부였다. 현실은 무정했다. 포로병이라는 꼬리표는 멸시와 기시의 대명사였다. 오로지 포로병이였다는 그것으로 머리를 들수없었던  일준에게 그 모든것은 무자비한 타격이 아닐수 없었다.   장편소설 《산 너머 강》보다 10여년전에 발표한 중편소설 《바람은 가슴속에 멎는다》의 주인공 승정렬의 형상은 바로 전쟁후 하일준의 형상이다. 봉합된 아래턱이 들쭉날쭉한데 턱 전체가 왼쪽으로 삐뚤어진 흉상을 한 승정렬은 전쟁포로의 꼬리표를 달고 고향 빠후툰으로 돌아왔는데 ������온 동네가 백안시(白眼視)했다. 어마지두 악연히 놀라며 뒤걸음을 쳤다. 담장우에 도사리고앉은 구렝이를 만난것처럼, 물고에서 꿈질거리는 거마리를 본것처럼. 처녀들만 기겁한게 아니다. 동년배들도 그와 사귀기를 꺼려했다.������ 뒤간을 피해 에돌아가듯 그를 외면했다. 게다가 쇠파리같은 배두천의 작간에 의하여 그는 더구나 비인간적인 괄세를 당하게 된다. 그러나  찾아가서 한번 자기의 신세를 하소연할데도 없고 가슴에 가득 찬 고뇌를 털어놓을 사람 하나 없는것이 바로 포로의 가련한 처지다. 마을에서 그의 생활을 보살피는 사람은 부농가정출신의 점례 하나뿐이고 한번은 물에 빠져 죽게 되는 점례를 모든 사람들이 모르는체 할 때 구해준것도 죄가 되여 온갖 비방과 욕설을 먹으며 나중에는 살인죄까지 들쓰고 20년 도형을 받게 된다. 《귀책》의 주인공 순애는 결혼 3개월만에 남편을 항미원조 전선에 내보내고  시아버를 모시고 어린 아들을 키우면서 몹시 어려운 나날을 보낸다.  거기다가  금강촌부녀회주임이라는 직무까지 맡고보니 ������문제를 보고 판단하는 각도는 모두 로고대중의  리익을 앞세워야 했고 정부의 호소라면 무조건 찬성하여 일변도(一邊倒)해야 했다.������ 하기에 순애가  받는 정신압력은 누구보다 더했던것이다. 그런데 남편 박동규는 전쟁 3년 기간 내내 편지 한장도 없고 정전이 되였는데도 돌아오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소식 한마디도 없다.  그러다가 금강촌 농업합작사 주임 겸 당지부서기인 허상권과 정사를 치르게 되고 임신까지  하였으나 허상권은 자기의 리익에 따라 처사하며 순애에 대하여 책임지기는커녕 순애가 동네 벙어리와 관계하여  임신을 하였다는 요언을 날조하고 시아버지는 ������넌 원래 그런 년이였냐? 화냥년!������,������패가망신을 시켜도 유분수지, 이 집에서 당장 나가!������라고 최후통첩을  내린다. 아들이 있고 시아버지가 있는 집에서 쫓겨난 순애는 갈팡지팡하다가 무작정  걸어서 왕바거우 입구에 들어서 쓰러졌는데 거기서 『산동빵즈』 왕취예즈의 구원을 받아 생명을 유지했을뿐만 아니라 해산도 하고 나중에  왕취예즈의 고향, 산동에 가서 몇십년을 살았다. 보기 싫어도 떨어질수 없었던, 정이 없어도 함께 살아야 했던 운명이였던것이다.  그러나 비극은 여기서 끈이 나는것이 아니였다. 순애가 시아버지에게 두고온 아들도 자라고 그의 곁에서 자란 딸도 자라 대학에 갔는데 둘이 사랑하는 사이가 되여버렸는데 해서는 안되는 그들의 결혼을 말려내는 방법이 없게 된것이다.  이렇게 전쟁이 낳는 고통은 전쟁판에만 있는것이 아니고 전쟁기간에만 있는것이 아니다. 군인가속으로서 순애는 이루 다 말할수 없는 고통을 겪었으며 한평생을 그 후유증에서 허덕여야 하였던것이다.   민대식의 남에서 생활은 다리가 없이 북에 남은 리호원대대장 혹은 포로로 되였다가 요행 살아넘아 북을 거쳐 길림 태평촌으로 돌아온  일준이와 공동점이 없지 않다. 바로 고래싸움에 터지는 새우라는점에서 같다. 의식형태와 제도 혹은 리념과 체제와  관계없이 그러하다.  정당정치의 후과는 역시 마찬가지다. 군사문화의 양상. 작가의 기본 사상 혹은 작품의 핵심주제는 이러하지만 이렇게 분명하게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여러 작품을 모두어 개괄해보면 이에 대한 강효근의 생각은 하루 이틀간 생성된것이 아니다.    2. 정신없는 남자들과 바람난 녀자들  정체상에서 강효근의 소설은  20세기 조선족의 생활과 끈끈하게 밀착되여있으며  20세기 력사의 매 단계에 겪은 조선족의 생활을 진실하게 재현하고있는바 어느 한 시간단의 생활도 홀시되지 않고있다. 이리하여 강효근의 근 100편의 소설에서 창조된 인물형상들은 한 계렬을 이루고있는것이 특징적이다.  앞절에서 우리는 이민초기로부터 8․15해방까지, 그리고 해방공간으로부터 조선전쟁의 승리까지 조선족의 생활이 강효근의 소설에서 어떻게 반영되였는가는 고찰하였다.  그후 1957년년부터 좌적인 로선과 방침이 실시되다가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수정주의라는것이 무엇인지도 명확하지 않은채 국제상에서 반수정주의운동을 전개하고 국내에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계급투쟁을 전개하다가 드디여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문화대혁명이라는 명의의 문화에 대한 대토벌이 진행되였으며 중국인민에게는 정치, 경제, 문화 제 분야에서 전면적인 대재난이 들씌워졌다.  중편소설《몹시 추웠던 겨울》에서 공진태와 수련이의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와 중편소설 《둥지를 떠난 새》에서 소연이와 태섭이의 사랑의 곡절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문화대혁명에 대한 이야기며 역시 문화대혁명의 후유증에 대한 이야기다.  그 다음 력사의 수레바퀴는 돌고돌아서 문화대혁명이 결속되고 새로운 력사시기가 시작되였으며 점차 사회주의시장경제의 체제가 정립되기 시작하였으며 경제의 급속도의 증장과 더불어 따스하게 입고 배부르게 먹는 문제가 해결되였다. 그러나  조선족사회에도 예견하지 못했던 많은 문제들이 생성되였다. 시장경제의 물결속에서 농촌잉여로동력의 도시진출, 한국진출 등 인구의 대이동과 아울러 조선족의 인구가 부증장하고 조선족자연촌이 급속도로 해산하게 되였으며 조선족문화가 안으로부터 무너진다는 절규가 나오기 시작하였으며 이런 와중에 조선족들속에서도 숫한 정신없는 남자들과 바람난 녀자들이 나타났다.   강효근은 작품활동중에서 줄곧 이 문제에 대하여 촉각을 세웠는바 그의 전부의 소설중에서 고래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들의 이야기외에 가장 인기를 모으는 이야기가 바로 전신없는 남자들과 바람난 녀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중편소설《정신있소》는 이 부류의 소설로 가장 먼저 창출된 작품으로 우리의 주의를 끈다.  이 소설의 벼슬에 미친 주인공 왕월금은 자기의 몸을 팔면서 어깨가 칼에 찍히우면서도 은행의 거금을 지켜냈다는 가짜 ������영웅업적������을 조작하여 승급의 계단을 만드는데 성공하여 출남과 과장으로 되였고 이제 한급 더 높은 주임자리로 올라가기 위해  비루한 수단으로������천원사건������을 조작하여 온갖 방법을 다해 무고한 수복이를  해친다. 그 결과 주인공 수복이는 첫사랑마저 빼앗기는 등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된다. 소설의 결미에서  결국 왕월금의 음모는 들통나고 수복이는 루명을 벗으며 우연하게 한 아름다운 처녀의 순수한 사랑도 얻게 된다는 이 소설의 핵심은 정신없는 녀자 왕월금에 대한 이야기다.   이 소설은 제목이 《정신있소》로 되였을뿐더러 소설에 주인공들의 대화중에 ������너 정신있니?������혹은 ������당신 정신있소?������,������정신 나간 말씀������,������정신있는 말이요?������,������아니? 정신 있어요?������,������동부, 정신있소?������등  말이 몇번이고 반복되는데 이 한마디 말은 바로 이 작품의 주제어라고 할수 있다.  《정신있소》라는 이 제목의 뜻을 제대로 나타내자면 ������정신있소?������일것이고 이것은 또������정신없다������를 강조하는 반문일것이다. ������정신없다������란 제 정신이 아니라는 뜻의 단어조합이다.  사실 정식으로  통계를 내지는 않았지만 강효근의 소설에서 ������정신있소?������ 이 말은 이 소설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소설에서도 아주 많이 쓰이고 있다. 이것은 강효근의 소설에 정신이 나간 사람 내지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다는 하나의 표지로 된다.  중편소설《 좀벌레, 부평초,〈세기병〉》,《유혹의 한계》,《신음하는 음영》,《둥지를 떠난 새》 등 작품이 묘술하는 이야기는 모두 정신없는 남자들 혹은 녀자들  바람난 녀자들 혹은 남자들의 이야기로 개괄할수 있다.  여기서 《좀벌레, 부평초,〈세기병〉》을 먼저 보자.  에기 정신없는 사람은  은행판사처의  신용대부과 과장 김철식이다. 그는 행장, 부친 김익선의 등살에 기대여 모름지기 자기의 리익을 챙기느라 아무짓이나 다 한다. 그는 동방무역공사에 거액의 대부금을 받을  여건이 없다는것을 알면서도 대부금을 주고 그 돈으로 자동차 매매를 하여 수만원의 리익을  챙기고 원칙을 견지하면서  상황을 상급에 진실하게 반영하는 두남에게 모진 타격을 가한다. 동방무역회사의 경리가 목매여 자살하는 등 사태가 이미 다 기울어졌는데도 그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단말마적으로 날띤다. 정말 제 정신이 나간 남자이다.  이 소설에 정신 나간 사람이 하나 더 있는데 그가 바로 은행판사처 출납과에서 일하는 옥란이라는 녀자다. 학교를 졸업한지 2년밖에 안되는 그녀는 은행이라는 좋은 강위를 리용하여 생활을 향수하기에 급급하며 채색텔레비를 갖추고 라사외투를 입을 환상에 잠기며 결국 원칙성이 강한 약혼남 두남이를 무맥한 남자, 전도가 없는 남자라고 판단하며 은행의 행장의 아들, 신용대부과 과장, 김철식에게로 마음을 옮겨 출납과로부터 신용대부과로 전근하는 야망은 실현하지만 결국 결혼의 가망성도 없이 그에게 정조를 빼앗기는 처지에 빠지게 된다. 두남이를 버리고 제 정신이 아닌 철식이를 찾아간 옥란이 역시 정신이 나간 녀자, 불행한 녀자이다.  중편소설《둥지를 떠난 새》의  은행의 신용대부과 과장 오종필이 역시 정신없는 남자로서 손색없는 사람이다. 그는 시장부 비서장 아들이며 검찰원에서 꾸리는 《거룡실업유한회사》 총경리와 짜고들어 은행의 돈을 움직여 돈벌이를 하며 허희복이라는 처녀에게 직업을 소개한다면서 임신시키고 심지어는 안해와 딱친구, 안해와 같은 집체호출신의 마학실이라는 녀자에게  대부를 해주고 통간을 한다. 그외에도 남의 자금을 잘라쓰고 그것이 들통나자 깡패들을 고용하여 자금임자를 부시는 등 권력도 있고 류망이기도 하고 색에 빠지기도 한 오독이 겸비한 정신이 나간 남자이다.  이 중편소설에 마학실이라는 녀자는 강효근 소설에의 바람난 녀인들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수 있다. 이 녀자는 잘살아보기 위해 같은  집체호출신의 소향의 남편, 은행의 신용대부과 과장 오종필에게로 접근하여 대부금을 해결하여 소매점을 꾸리고 돈을 벌어서 기쁜  나머지 그 감사로  사슴의 그것을 공개적으로 소향을 통하여 종필에게 선물하며 복잡한 인생의갈림길에서 방황하는 소향에게 오종필과 헤어지라고 하던 그녀는 나중에는 오종필, 친구의 남편과 통간도 서슴지 않는다. 역시 바람난 녀자. 제 정신이 아닌 녀자다.   중편소설 《신음하는 음영》에서 지섭이라고 부르는 그 남자, 박물관에서 일하는 혜정의 남편도 정신이 나간 남자이며 혜경의 대학동창생 백현미, 나중에 동창생 혜정의 남편마저도 도 쟁취해내는 이 녀자 역시 바람난 녀자다. 그녀는 ������지금은 모든것이 일회용이야. 라이터, 위생저가락, 플아스틱컵, 어느게 일회용 아닌게 있어?남자와의 사랑도 일회용이야.������라고 말한다.   중편소설 《유혹의 한계》에서 모 방직공장 공급판매과 과장 효식이는  안해 정희,  한 집체호 경력의 첫사랑 월선, (효식의 아들을 낳아서 키우고있는 녀자), 그리고  표준부속품공장의 판매원으로 자처하고 나타난  미향이. (������거추장스럽게 남편을 해선 무얼해요?������라고 말하는 녀자,  알고보니 무직업자이고 털실, 자동차, 표준부속품 등 상품의 투기도매로 살아가는 녀자다) 세 녀자앞에서 좌충우돌하면서 살아가는데 역시 제 정신이 아닌 남자고 세 녀자중 미향이는 역시 가장 대표적인 바람난 녀자이다.  등등. 이제 더 례를 들지 않아도 강효근의 소설에서 정신없는 남자들과 바람난 녀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것인가를 알수 있을것이다.  물론 이런 인물형상들에 체현된 창조주체의 동기는 다양한바  사회에 만연되는 부정부패와 비리, 그리고 도덕수준의 하강에 대한 고발도 있으며 만성타락의 길에서 부식되는 령혼에 대한 질타도 있으며 민족의 생존상황과 문화상태에 대한 자아성찰의 의지도 있다.     3. 강효근 소설의 문학공간    강효근의 근 100편에 달하는 소설작품은 우리 소설문학의 발전사에 큼직한 한획을 그었다고 평가할수 있는바 그가 창조한 재령댁, 명흥복, 하일준, 승정렬, 순애, 오순자 등은 민족의 수난과 끈끈하게 밀착된 운명의 소유자자들로서 우리 소설발전사에서 독창적인 비반복적인 성격으로서 영원할것이다. 그리고 또 강효근이 창조한 정신없는 남자들과 바람 난 녀자들의 형상과 여러가지 주객관적인 여건에 의하여 불행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형상은 비록 우리 소설발전사에서 전혀 새로운 인물형상이라고 할수는 없어도 자체의 매력이 있다.  솔직하게  말하면 강효근의 소설은 지난날 가치평가를 공평하게 받지 못했다고 해야 할것이다. 이렇게 된데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는데 창조주체의 측면으로 보면 자체의 약점이 있기때문이다. 길림에서 나서 자랐고 일생 대부분 시간을 길림에서 살아온 강효근은 우리 말에 대한 문학적구사력이 좀 부족한것이 문제로 되였으며 일부 소설작품의  스토리의 류사성이 작품의 매력을 떨어뜨렸으며 일부 이야기모티브 즉 화소(話素)의 반복이 읽는이들에게  신선감이 없다는 인상을 남겨주었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강효근의 중요한 문학공간으로서의 길림시에 조선족문학비평의 결석 내지 지각이다. 다시말하면  강효근의 작품활동이 제때로 되는 평론문학의 각광을 받지 못한것이 그 첫번째 원인이다. 다음 더욱 중요한 원인은 평론가 내지 문학사가들의 의식에 존재하는 결함에 있다. 그것은 즉 문학창작의 현장이나 문학풍경을 고찰하거나 문학발전사의 주선을 그을 때 시간의 흐름을 중시하고 공간의 상태를 홀시한데 그 근본원인이 있다. 쉽게 말하면 어느 한 시간단 혹은 려사단계의 문학사를 고찰할 때 대표적인 작가 한두분 연구하면 나머지 여러분은 시간의 저쪽에 파뭍기우고 마는것이다. 이러한 편향을 극복하기 위한 음직임이 중국의 철학계와 문예계에도 이미 나타나고있는데 이에 대하여 우리 평론계도 충분한 중시를 돌려야 한다.  다음 강효근의 작품계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정신없는 사람들과 바람 난 녀자들에 대한 소설은 강효근이 평생 직업이였던 은행생활에 바탕을 두고있다.  중편소설《정신있소》의 왕월금은 은행 출납과 과장이고 김철식은 신용대부과 과장이고 《둥지를 떠난 새》의 은행 신용대부과 과장 오종필이도 신용대부과 과장이다. 그리고 많은 바람난 녀자들, 된장덩이에 날아드는 오유월 시파리들처럼 신용대부과를 찾아온다. 이것은  평생 은행에서 일해온 강효근의 인생경력과 무관하지 않을것이다.  마지막으로 강효근 소설에는 무시로 작가와 기자 혹은 화가 신분의 화자가 많이 등장하는데 이것 또한 강효근의 인생경력과 무관하지 않다.  1995년 정년퇴직한 강효근은 직무에 매여달린 시간과 정력의 한계를 벗어나 작가의 신분으로 완전히 자유롭게 문학을 공부하고  사회조사에 참가하면서 작품활동에 종사할수 있었다. 이렇게 보는 세상은 은행직원의 시각에서 보는 세상과 틀릴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강효근의 작품활동의 대상은 전례없이 넓어지였다. 이런 맥박에서  강효근의 소설에서 작가, 기자, 화가로 등장하는 화자도 강효근의 인상기억과 끈끈하게 밀착되여있음을 리해해야 할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사유는 두가지 갈래로 나누어 펼쳐져야 한다.  첫째, 강효근 소설과 강효근의 인생기억에 대하여.  이 문제는 문예리론에서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가 아니다. 고금중외의 많은 미학가들이 문학과 예술은 생명개체의 기억 내지 민족공동체의 기억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심지어 어떤 학자들은 모든 문학은 죄다 자서전이라는 결론도 내린바 있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당신의 인생기억이 문학창작의 바탕으로 되게 화려하고 풍부하고 충실한가? 그렇지 못한가? 하는 문제가 있으며 더욱 중요한것은 창조주체가 그것을 자기 작품활동의 문화적자원으로 삼을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가 있는것이다. 이 방면에서 강효근의 소설은 역시 우리에게 주는 계시가 크다.  둘째, 강효근 소설의 지방특색에 대하여  강효근은 1935년 길림시 복흥리에서 태여났다. .  강효근은 어느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문우들은 나를 누구에게 소개할 때마다 한결같이 길림에서 온 소설가 강효근이라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길림 출생이고 거기서 소년시절을 보내였다. 길림은 확실히 나의 고향이다. ……  길림의 복흥리(福興里)라면 무서운 빈민굴이다. 제정때부터 우리 백의 겨레들이 많이 모여 살던곳이다. 우리 집에서는 바로 여기에다 『황해하숙』이라는 하숙집을 꾸리였고 그 경영은 주로 어머니몫이였다. 오로지 어머니의 부지런함으로 하여 당시 우리 집생활은 그다지 유족하지는 못했지만 먹고 입고 살수는 있었다. 그러더 8․15해방을 맞게 되였다.……  우리 집에선 조상들의 뼈가 뭍힌 황해도 송화군으로 돌아가려 했다. 공교롭게도 호시절속의 단꿈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때면 림표가 령솔한 제4야전군이 길림시에 본부를 둔 국민당 제88사와 사활적인 대결을 하고있던 시절이였다. 치렬한 전운이 휘말림속에서 안동과 도문으로 통한 철길이 끊어져 어디든 갈수 없었다. 우리 집식구 모두가 꼼짝 못하고있는 어느날 난데없이 어중이떠중이들이 식칼, 도끼, 날창 등을 번뜩이며 하숙집으로 처들어왔다. 불의의 습격이였다. 그들은 닥치는대로 족치면서도 쓸만한 가장집물을 하나도 남김없이 몽땅 가지고 갔다. 우리 집은 눈 깜박할새 빈털털이로 되여버렸다. …어머니는 결국 원한을 풀지 못한채 저승으로 가시고 말았다. ……  고향에 대한 추억은 가난에 쪼들린 불행 대개 그런것이였다. 그래서 더더욱 잊지 뭇하는 모양인데 그것들은 또  고스란히 나의 체험으로 되여 나의 소설에 반영되였다. 중편소설 《강 건너 꽃구경》에서는 하숙집이 몽땅 털린 사실이, 단편소설《객귀》에서는 하숙집에서 조선인 형사가 원인불명으로 죽은 사실과 복흥리 곳곳에 깔린 사창(私娼)의 사실이, 중편소설 《귀책》에서는 왜놈이 망한 뒤 미처 일본으로 귀국하지 못한 일본녀인을 어머니가  여기 하숙집에 숨겨두었던 사실들이 그대로 서술되였다.������(《기억속의 고향》, 산문집《저문 들녘 노을처럼》,한국학술정보〔주〕2005년 12월)    좀더 조심스럽게 접근해보면 강효근의 많은 소설의 이야기는 길림시와 길림시부근, 송화강연안의 마을들에서 펼쳐짐을 보아낼수 있다.   강효근 소설의 이 공간에 대하여 우리는 보다 심층적으로 리해할 때가 되였다.  전에도 문화학에 지역문화라는 개념이 있었으며 문학비평에 지방특색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이런 개념으로부터 출발하여도 우리는 강효근 소설의 지방특색 내지 지역문화적 내함에 대하여 높이 평가할수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인식은 여기에 멈춰서는 안된다.  지난 세기 50년대에 바슐라르(Bachelard)의 《공간시학》이 출판되고 70년대로부터 프랑스의 레페불(Hernri Lefevre)이 《공간의 생산》, 푸꼬(Foucault)의 《권력의 지리학》 등이 출판된후 문화지리학과 지리적상상이라는 개념이 생성되였으며  중국의 문학리론계에도 요즘『공간전향』이라는 개념이 류행되고있는데 여기서 전부  해석기는 불가능하지만 한두마디로 개괄하여본다면 이들에 의하면 문학공간은 생존체험의 심도공간이라는것이며 문학공간의 생성원은 생존에 대한 작가의 내재적체험이라는것이다.  아주 쉽게 표현한다면 전통적인 리론은 시간을 중시하기에 공간적인 존재가 홀시되였으며 게다가 시대정신 등 추상적인 개념의 만연으로 형이하학적인 공간존재로서의 생존체험이 더구나  홀시되였다, 그러므로 시간성, 사회성, 공간성을 정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공간생산을 중시해야 한다는것이다. 그래서 최근에 중국의 문학사 연구에서도 중국문학지도 그리기 작업이 시작되고있다.    이렇다면 우리는 강효근의 소설에서의 길림이라는 이 공간에 대하여 보다 새로운 시각으로 파악하여야 할것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강효근 소설에 대한 연구에서 우리는 이 점에 대하여 명석한 인식이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강효근의 소설에 대한 연구에서와 문학사에서 강효근의 소설작품에 대한  자리매김에서 새로운 의식이 수요된다고 생각한다.   강효근처럼 자기 고향에 대하여 집착하고 자기 고향을 사랑하고 자기고향의 력사와 삶의 현장에 대하여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는 소설가도 우리 문단에 드문줄 안다.  례를 들면 룡정은 조선족이민 초기 개척지로서 또 해방전 위만주국시기 조선족이민들의 문화중심지로서 력사가 있고 유물이 많은 곳이지만 유감스러운것은 소설로 길림과 송화강을 다루는 강효근이처럼 소설로 룡정과 해란강을 다루는 소설가가 몇이 되지 않은줄 알고있다. 리근전의 장편소설《고난의 년대》, 최홍일의 장편소설 《눈물 젖은 두만강》은 이 방면의 시도가 보이는 작품이지만  강효근의 길림과 송화강에 대한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말해야 할것 같다.  특히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것은 강효근의 소설에서 길림이라는 문학공간에 대한 집착은  필연적으로 일부 력사에 대한  재해석이 진행되였다는것이다. 길림시 조선족의 초기이민사, 해방전쟁시기 조선족의 투쟁사, 항미원조에서 조선족의 희생 그리고 일부 건국으로부터 문화대혁명전까지 17년사 등의 력사에 대한 재해석에 주목된다. 물론 이런 력사에 대한 재해석은 력사학자로서의 재해석이 아니라 소설가로서의 재해석이다.  《객귀》의 중요내용은  송화강 나루터에서 배사공으로 일하는 주인공 명흥만이 객지에서 귀신이 된 무주고혼을 안치하는것인데 그중 하나는 당년에 그렇게 으르딱딱 날뛰던 왜놈장교『코수염』의 시체를 안치하는것이다.  할복자살한 『코수염』의 시체를 처음 발견했을 때 그것은 악한 짓에 대한 업보라고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까마귀들이 시체에 붙어 다닥다닥 붙어살점을 쫓고있을 때 그냥 버려둘수 없었다.    『코수염』도 실은 객귀의 신세로 타관땅에 외롭게 버려진 시체였다. 무리들의 동정과 도움을 받지 못하고 군드러진채 까마귀의 밥이 된다는것은 가연스러웠다.  명흥만은 『코수염』을 『써우즈』옆에 묻어주었다. 장례에서 치루어야 하는 수시(收屍)호혼(招魂), 발상(發喪)같은 절차는 없었지만 그래도 수으(壽衣)만은 입혀서 묻었다. 그것이 광목으로 된것이 아니고 넝마쪼각을 무어서 만든 수의라 할지라도 말이다. 부디 안식하라는 말을 남기고 토굴집으로 돌아왔다.     문학은 원쑤의 시체를 놓고도 생각을 할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강효근이야말로  바로 길림 송화강연안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원쑤의 장례를 지내는  명장면을 재현할수 있었다.  력사에 대한 재해석은 소설《귀책》에서 한시기 그렇게 득세하던 당지부서기 허승권과 패가망신시켰다면서 며느리를 좇아내던 박재덕이를 지옥에 처넣고 군인가속으로 다른 남자를 했다는 죄로 숫한 욕을 본  순애를 천당에 보내는데서도 잘 나타나며 《살아 숨쉬는 상흔》에서 총칼을 마주하고 우리와 생사박투를 벌린 원쑤였던 민대식의 눈물겨운 인생에 대한 풋풋한 묘술에서도 잘 보인다.  여기까지 쓰고보니 료녕대학 송위교수의 문학공간에 대한 한마디 결론이 생각난다.    문학공간은 단순한 물리공간장소를 재현하거나 심리공간의식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사람의 생존깊이가 닿는 체험공간이다. 宋偉 《後理論時代的來臨》(文化藝術出版社, 2011년 1월, 제 1판) 330頁   4. 문체의 혁신을 위한 몸부림   강효근의 소설창작의 방법은 사실주의방법이다. 이점에 대하여 강효근자신이 여러번 강조한바 있다.    아무튼 전 사실주의의 기법에서 벗어날수 없었어요. 물론 전에 론했던 사실주의의 내용이 변화갱신되면서 새로운 내용이 가첨된것은 사실이고 또 소설이 독자들에게 기법상의 취미성과 활력을 주자면 형식의 다양성과 기법상의 취미성이 절실히 필요하지요. (강효근 《나의 문학 나의 량심》, 중편소설집《둥지를 떠난 새》, 료녕민족출판사 10월 314폐지)    강효근씨가 스스로 말한것처럼 강효근의 소설은 기본상에서 사실주의적 창작방법에 의존하지만 최근에는 많이 변화하는 양상을 과시하면서 자기의 독창적인 풍격을 과시하고있다.  여기서 특히 강조하고싶은것은 강효근의 소설에서 시종 매력을 끄는 남성적인 풍격과 북방대륙의 숭고미다. 강효근의 성공적인 중단편소설에서 부각된 남주인공들의 성격에서 풍기는 헌헌장부의 모습과 진정한 사나이의 정신에서 발산되는 남성미는 더 말하지 말고 그의 소설의 갈피갈피에서 그려진 북방대륙의 땡볕과 강물과 눈보라에 대한 묘사는 참으로 중국조선족문단에서 희귀한 명품이라고 칭찬할만 하다. 더 전개할 편폭이 없지만 필자는 여기서 특히《높은 령 깊은 골》에서 사냥군 덕보령감과 메돼지의 생사판가리 싸움을 상기시키는바이며 《웅크린 꿈》에서 녀주인공 마인선과 범죄분자 오광섭과의 결투장면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는 바이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2005년에 발표한 졸문《삶의 현장에 대한 심층조명》에서 언급한바 있는데 여기서 다시 한번 힘주어 내세우는바이다.)  이 두 편외에도 중편소설들과 최근 출판한 장편소설《산 너머 강》에서 부각된 많은 남주인공들의 형상은 모두 강효근 풍격의 남성미로 필자의 주목을 끈다. 만약 강효근씨의 문체의 혁신을 위한 몸부림이 없다면 이러한 독창적인 풍격은 불가능하였을것이 아닌가.  다음 《정신있소》를 비롯한 많은 소설에서 강효근의 고심한 문체실험이 돋보인다.     왕월금에겐 공교롭게도 희고 흰 백지 한장뿐이였다.로임진급시험에서 락제를 맞았고 주택도 령이 동그란 닭알을 낳았다. 빈털터리밖에 차례지지 않았다. 저금소에서 주산알을 퉁기는 운명을 개변할수 없었다.  《흑, 흑흑》  《왜 그러우?》  《죽었으면 좋겠어요.》  《당신 정신 있소? 어서 병원으로 가기요.》  《병원에서 운명을 고쳐준대요?》  《먹고 살았으면 됐지 운명타령은?》  《사람값을 못하며 살아선 뭘해요?》  《그렇다고 국가주석이 되겠소?》  《남에게 눌려 더는 못살겠어요. 흑흑!》  우연과 필연이 력사를 엮는가 보다. 그런 월금에게 대운이 금문을 활짝 열었다.    이것은 중편소설《정신있소》에서 임의로 선택한 한 단락이다.   여기에는 인물의 운명에 대한 평가도 있으며  언어묘사 즉 인물들의 대화도 있으며 바야흐로 전개되는 사건에 대한 교대도 있다. 그런데 대화의 주인공이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데 대한 교대는 전혀 없다. 그리고 누가 말하였다 하는 식의 교대도 없다. 읽는이들은 자기의 주관판단으로 누구와 누구의 대화겠구나 라고 생각할수 있을뿐이다. 이러한 서술에 대한 생략은 소설은 묘사문학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새삼스러운 인식을 하게 한다.  그리고 인물들에 대한 묘술에서도 전통적인 질서를 파괴하면서 큰 비약을 시도하고있 추상적인 언어와 구체적인 언어를 재치있게 활용함으로써 소설의 취미성을 한층 더해주고 그 함의를 파악하는 감칠맛을 더해준다.   다음 이상과 같이 인물들의 대화에서 비약을 많이 하는것처럼 진행되는 인물들의 행위도 많이 비약시킴으로써 읽는이들의 사유를 활성화하고 전체 문본의 신식량을 크게 할수 있었다.  시종 사실주의창작방법에 의존하는 강효근이지만  최근 그의 작품에는 자연주의 묘사도 가끔 보이며 흑색유모어적인 수법도 자주 보인다.  례를 들면《객귀》에서 송화강나루터 배사공 명홍만의 삶의 모습은 그 환경묘사나 의식주에 대한 세절묘사에서 모두 자연주의적인 방법이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있으며《귀책》의 서두에서와 결미에서 천당과 지옥에 대한 설정은 사실주의 창작방법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창조주체의 모지름을 단도직입적으로 과시하고있다.     나가는 말    강효근은 길림의 소설가다. 그는 길림사람으로서 길림에서 태여났고 길림에서 성장했으며  길림에서 일생을 살았고 길림의 이야기를 쓰고 역시 길림의 동포들의 사랑을 받는 작가이다.  그의 50여년 작품활동은 조선족문학사에 뚜렸한 한획을 그었다. 창조주체의 개인기억의 재생으로 특징되는 강효근 소설은 개성적인 문학공간과  생활과의 가까운 거리로 매력적이다.  그가 창조한 백의겨레의 수난사에서 나타난  수많은 희생자들의 형상과 새로운 시대의 변화속에서 생성되는 수많은 정신 나간 남자들과 바람난 녀자들의 형상은 우리 소설문단에서 독창적인 형상이며 우리 소설사에서 단단하게 자리매김을 할수 있는 형상들이다.     그는 사실주의방법에 대하여 비교적 투철한 인식을 갖고있는 소설가로서  사실주의 핵심리념에 대하여 동요가 없지만 역시 사실주의 방법의 한계와 자기 창작수준과 문학적으로 준비된 주관상황의 한계에 대하여 비교적 일찍 보아내고 문체혁신을 위하여 처절한 몸부림을 해온 소설가이다.  강효근은 사상이 있는 소설가이며 역시 독창성이 있는 소설가이며 성과가 있는 소설가이다.                                                         〓끝〓  
9    《중국에 〈되놈〉은 없더라》 漢文판 출판을 축하합니다 댓글:  조회:824  추천:8  2011-06-22
  조철호의 장편기행문 《중국에 〈되놈〉은 없더라》漢文판 출판을 축하합니다                                  (一)    존경하는 조철호 회장님:  존경하는 래객 여러분:  몇년전에 참으로 큰 흥분속에서 한국 동양일보 조철호회장님의 장편기행문《중국에 <되놈>은 없더라》를 읽었었는데 오늘은 이 책의 漢文판이 출판을 기념하는 행사가 이렇게 성대히 열립니다.  저는 한 독자의 신분으로 조철호 회장님의 장편기행문《중국에〈되놈〉은 없더라》의 漢文판 출판을 충심으로 기뻐하며 축하하는 마음으로 여기 연단에 올라왔습니다.  저명한 시인이시며 언론인이시며 사회할동가이신 조철호 회장님은 제가 가장 존경하는 한국의 지성인의 한분이십니다.  저는 어느 해인가 청주로 찾아간 저에게 반날이라는 시간을 떼내여 청주의 유명한 문물을 참관시켜주던 회장님의 관심을 잊을수 없으며 연길과 청주의 호텔과 다방 그리고 식당에서 맥주컵을 사이에 두고 나눈 10여차의 대화를 영원히 간직하고있으며 연변사범학교, 룡정고중, 연변대학의 대회장 연단에서 들은 회장님의 생명의 활기에 넘치는 연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있으며 2007년 가을 충북에서 보낸 11박 12일의 나날들을 인생의 가장 의의있는 나날들로 간주합니다. 회장님은 우리 10명으로 이루어진 팀을 위하여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 곁을 지켜주시였으며 우리와 함께 움직이시고 우리와 함께 먹고 함께 마시였습니다. 그해 청주에서 열린 조명희 문학제와 전국 시랑송경연과 충북 근 20개 군과 도시의 명사시랑송회를 통하여 저는 조회장님의 영원히 꺼지지 않을 사업열정과 인제 조회장님의 습관으로 되여버린 내내 남을 배려하고 남을 생각하고 남을  섬기는 정신에 큰 감동을 먹었였습니다. 회장님의 인격과 사업과 시에 완전히 매료되면서 나는 나의 인생에 대하여 한번 깊이있는 자성을 할수 있었습니다.  존경하는 회장님:  최근에 회장님의 신체건강에 이상이 생겨서 숫한 고생을 치뤘다는 말을 늦게나마 듣고 마음속으로 회장님의 강복과 쾌유를 기원하였습니다만 오늘도 틀림없이 불원만리하고 또 연길에 찾아오신데 대하여 마음속으로 감탄하고있습니다. 그러면서 조철호 히장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으로 여기 이 강단에 섰습니다.                                  (二)                그러면 아래에서 장편기행문 《중국에는 〈되놈〉이 없더라》의 독후감을 발표하겠습니다.  이 글은 기행문이 금방 출판되였을 때 쓴것인데 줄여쓰기로 되여《장백산》잡지에 게재된바 있습니다만 오늘 여기서 발표하여도 이 장편기행문에 대한 훼손은 되지 않으리라는 판단으로부터 오늘 여기서 저의 원고대로 발표하기로 하였습니다. 조철호 횢방님과 래객 여러분의 량해를 바랍니다.                                  (三)    비록 중국에서 태여났고 중국에서 대학을 다녔고 중국에서 수십년 글을 써온 필자이지만 또 중국의 명승지, 사적지 몇군데 가보기도 했지만 이와 같은 조철호 회장님의 이 장편기행문과 같은것은  꿈도 꿔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행문을 읽으면서 배운 지식과 인생에 대한 깨달음은 참으로 몇마디로 개괄하기 힘들게 심각하고 풍부합니다. 그것들을 제대로 개괄하는데는 저의 필력이 엄청 모자라다는것을 솔직하게 승인합니다.  우선 《중국에 <되놈>은 없더라》를 통하여 많은 지식을 배웠습니다. 사실《중국에 <되놈>은 없더라》에 소개된 많은 명승지를 저는 가보지 못했으며 혹간 가본 곳이 있지만 많은것을 모르고 지나갔습니다. 여기에는 려행하는 사람의 몸가짐이 어떠한가 하는 문제가 있으며 특히 공부하려는 열정이 있는가 없는가가 문제로 제기됩니다.  저로 놓고 말하면 려행길에서 어디에 가면 거기서 주는 안내서 한 장 혹은 입구에 세워놓은 홍보패 한쪼각이면 만족하였습니다. 여기에 왔다 갔다는것만으로 만족해하는 자세였으며 또 려행중에도 흔히 다른 생각을 하였습니다. 때로는 조철호회장님으로는 상상할수도 없는 려행도 해보았습니다. 려행팀이 조직되고 목적지에 가서는 사진 몇장을 찍고 기념품 한두가지 사면 끝나고 나머지 시간은 호텔방 혹은 커피점에서  관광봉사를 받습니다. 요즈음 제가 본 글에는 이보다 더 험한 려행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조철호회장님은 그렇게 해박한 지식에도  만족해 하지 않고 열심히 발길이 닿는 곳마다 배우기에 게으름이 없었으며 아울러 이 기행문에서 읽는 이들이  만끽할수 있게 그것들을 정리해주었습니다.  《중국에 <되놈>은 없더라》는 중국대륙의 2만 5천리 현장에서 손수 보고 듣고 느낀것들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예민하게 포착하여 우리가 바야흐로 살고있는 중국의 삶의 현장에 대한 풋풋한 감수를 생동하게 전달해주고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내내 참으로 조철호회장님이야말로 중국의 오늘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있지 않나 감탄했습니다.  세인들은 모두가 자기가 사는 시대를 알고있다는 착각속에서 살고있는것 같습니다. 고도로 발달한 전자문명시대, 대중메스콤시대를 살고있는 우리는 더구나 외국과 력사를  몰라도 우리의 현실을 알고있다는 오해를 거듭하면서 살아가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중국에 <되놈>은 없더라》를 통하여 저는 확실히 중국의 오늘을 잘 모르고 살고있다는것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베이징에서의 혼란》,《온수없는 호텔 모자쓰고 잠자리에》,《황하 소랑저변의 어떤 부녀이야기》,《공안원의 기습<안마공작>에 혼비백산》등 장절에서 중국의 삶의 현장에 대한 조명은 저에게 큰 계시를 주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조명은 심층조명이 아니지만 풋풋한 삶의 현장에 대한 조명이며 특수한 신분의 려행자가 아니고서는 체험할수 없는 삶의 현장이고 오늘 중국의 만백성들이 매일같이 피부로 부딪치며 사는 삶의 현장이지만 우리는 잘 모르고 모르면서 알려고도 하지않는 현실입니다.  《중국에 <되놈>은 없더라》는 중국사람이 중국을 쓴 책이 아니라 한 외국의 지성인이 중국을 쓴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타자의 안광으로 본 중국입니다. 한국의 기자 시인 조철호회장님이 2004년겨울에 본 중국이라고 개괄할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 책에는 타자로서 흔히 가질수 있는 편견이 없으며 현대지성인의 통병으로 되어있는 초조감과 신경쇠약증이 없고 그 대신 넉넉함이 있고 양보가 있고 너그러움이 있고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습니다. 《중국에 <되놈>은 없더라》 전편에 충일되여있는 이런 리념과 체제를 초월하고 계급성과 국수주의를 초월한 조철호회장님의 여유작작함에 참으로 감동되였습니다. 작자의 이러한 여유작작하고 느슨한 정서는 중국문화에 대한 애호, 발전도상국 중국문화에 대한 사색 그리고 중국사람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밀착되여 표현되고있습니다.  여기서 《오, 시성 두보》한절만 봅시다.  작자는 하남성 정주시 공의현 남요만촌 필가산 아래에 있는 두보의 생가를 살펴본 다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보의 생가 토굴근처가 너무 황량하고 어수선한게 아무래도 이상스럽다. 누가  생각해보아도 천하의 시성 두보의 생가를 이렇게  팽개쳐두고있을수 있단 말인가. 두보가 누구인가. 리백은 두보보다 11년 일찍 태여나 61세 되던 762년에 세상을 떠났고 이보다 8년뒤 세상을 떠났으니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다. 리백을 시선이라하고 두보를 시성이라 했거늘 다른 곳도 아닌 중국에서 그 후대들이 어찌 이렇게 대할수 있단 말인가. 도무지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된 작자는 우선 남요만촌 청사를 찾았고 다음에는 공의현 문화국을 찾아  두보 생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이제 두보의 생가를 문화유적지답게 꾸미는 일에 착수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러면 그렇겠지. 세상에 한 시대를 뛰여넘어 동양시단의 큰 봉우리를 외면할수 있겠는가������라고 마음이 놓여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강점진에 있는 두보의 묘를 찾아갑니다.  이 장절에서는 이렇게 국경과 민족과 계급을 초월한 한 지성인의 중국문화에 대한 애호가 잘 표현되였습니다.  발전도상국으로서 중국은 개혁개방을 실시하고 현대화를 실현하는 길에서 경제의 급속도 증장 등 휘황한 성과를 쌓아 올렸으며 또한 발전의 도상에서 많은 문제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생태환경보호는 그중 중요한 문제의 하나입니다. 이 문제는 사실상에서 중국 한 나라의 문제는 아니지만 이 문제상에서도 중국특색이 있습니다. 조철호회장님은 《중국에 <되놈>은 없더라》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큰 관심을 보여주고있는데 《매연이 삼킨 고도 란저우》,《이미 가동된 시한폭탄 황토고원》두 장절에서 집중적으로 표현하고있습니다.  《중국에 <되놈>은 없더라》에는 시종 작자의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아마도 시인 조철호는 시인답게 뜨거운 가슴의 사나인가 봅니다.  작자는 프롤로그에서 《왜 사람이 사람에 대한 애정은 이만 못할가. 왜 이웃에 대한 호기심은 이만 못할가를 생각하게 됐다.》고 의미심장한 물음을 던졌고 마지막 장 마지막 절《려행의 종점, 우루무치까지의 24시간》에서도 스스로 《그렇다. 생각해보니 이번 려행에서 얻은 가장 큰것은 중국과 중국인들을 더욱 사랑하게 됐다는 사실이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실 작자의 중국인에 대한 사랑은 전편에 일관되여있으며 국경과 리념과 체제룰 초월한 시랑은 읽는 이들의 마음속에 휘황한 광채를 뿌리는 창조주체의 이미지를 세워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2층 침대뻐스에서의 14시간》에 그 이름모를 소수민족 모자(母子)에 대한 묘술을 그 대표적인 것으로 헤아릴수 있습니다.  이 절에서 작자가《만일 저 로파가 이 버스안에서 운명을 한다면 나는 기꺼이 저 젊은이를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주리라.》라고 썼을 때 나는 끝내 이 세상 인간들속에 그래도 사랑이라는것이 남아있고 돈냄새가 나지 않는 구석이 있구나 생각하면서 눈물이 찔끔 나는것을 어쩔수 없었습니다.  사실 조철호회장님의 려행자세도 따라배워야 하고 그의 해박한 지식도 배워야 하고 국경과 리념을 초월한 그의 사랑도 따라배워야 하며 특히는 그의 인격을 따라배워야 한다는것이 《중국에<되놈>은 없더라》를 읽은 나의 총적 결론입니다.  조철호회장님의 기자의 안광, 시인의 가슴,  철학자의 두뇌로 씌여진 이《중국에 <되놈>은 없더라》는 내가 이때까지 읽은 한국인이 중국을 쓴 기행문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가장 훌륭한 작품의 하나라고 결론할수 있습니다.  한권의 책으로 저에게 이렇게 많은 지식을 주고 인생의 계시를 주고 사랑의 에너지를 준 조철호회장님께 충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드리고싶습니다.                                      (四)    이번 조철호 회장님의 《중국에는〈되놈〉이 없더라》의 출판의 의의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개괄할수 있을것입니다.  이 장편기행문의 출판 특히 漢文판 출판은 다시 한번 지난 세기 최후 10년에 지구촌에서 전개되기 시작한 탈랭전의 분위기를 실감하게 합니다. 리념과 체제의 벽을 초월하려는 인류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음을 수많은 사건들과 인물들이 증명하여주고있으며 조철호회장님의 이 장편기행문이 증명하여주고있습니다. 세상이 갈수록 살기 좋아지는 세상으로 변하고있다는 정보를 이 장편기행문은 세인들에게 주고있습니다.  다음으로 이 장편기행문은 갈수록 돈독해지는 중국과 한국의 친선을 과시하는 장거라고 평가할수 있습니다. 리념과 체제의 높은 벽이 넘을수 없는 태산처럼 생각되던 시절이 지나갔음을 실감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중국을 바라보는 세인들의 눈길이 퍽  달라지고있지 않습니까. 중국을 위해서도 한국을 위해서도 북을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아니 온 지구촌을 위해서도 이것은 참으로 경하할만한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장편기행문의 출판은 믄학을 공부하는 모든 작가, 시인들에게 특히 문학을 금방 공부하기 시작한 문학도들에게 한권의 훌륭한 교과서로 될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지금은 많이 극복되고있습니다만 오래동안 고금중외의 문인들속에서는 하나의 편견이 있었는데 시와 소설, 희곡 작품을 본격문학이라고 중시하고 기타 논 픽션(non ficton)  혹은 비소설류의 작품에 대하여 홀시하였습니다. 지금은 그런 편견을 버려야 할 시대입니다. 소설보다 더 재미있는 삶의 현장은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최근에는 논 픽션이 픽션보다 더 감동적이라는 말이 류행어까지 생기지 않았습니까. 이 장편기행문의 출판은 이런 의미에서도 우리에게 특히 중국 조선족의 작가 시인들에게  하나의 깨달음을 주는 텍스트라고 생각됩니다.   이상과 같이 저의 독후감을 발표하면서 조철호 회장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 전달하고 회장님의 쾌유를 기원합니다.                          2011년 6월 21일                                                                최삼룡 
8    추천사 (2010 10.4~ 10.11 ) 댓글:  조회:669  추천:39  2010-10-09
추 천 사     조선족 문학 비평계에 반드시 거론되야애할 평론가가 바로 최삼룡이다.   순발력있는 그의 현장평론들은 조선족 평론계에서 그 량산의 작품력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있다.   일전 최삼룡의 또 한부의 저서 “만주기행”이 출간되였다. 작자가 다년간 수집과 정리의 로고를 바쳐온 료집은 근대시기에 만주를 체험한 조선인들의 만주 기행문을 수집하여 묶었다. 책을 통해 우리는 식민지시기의 조선 지식인들의 시각으로 형상화된 격동기 만주를 다양한 시각과 해석의 방식으로 엿볼수 있다.   한편 최삼룡의 편찬도서 ”재만조선인친일문학작품집”은 지난해 한국 문화관광부 선정 우수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중국조선족 작가나 학자들의 문학작품이나 학술저작이 한국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기는 그가 처음이다.   정년퇴직을 한 뒤에도 중국조선족문학의 자료 수집, 정리 및 연구에 매진하면서 만추를 불태우고있는 이순의 현역작가- 금주의 문인으로 추천한다.   문학닷컴 편집부  
7    최삼룡 편찬도서 한국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댓글:  조회:609  추천:30  2010-10-09
최삼룡 편찬 <재만조선인 친일문학작품집> 한국 문화관광부 2009년 우수도서로 선정   [인터넷 길림신문]2009.8.27   2007년 한국 친일반민족행위규명위 초청으로 해방전 재만 조선인 친일문학연구 진행  장편론문 《재만 조선인 친일문학 연구》 창출 《재만조선인 친일문학작품집》 정리 출판   기자가 최근 입수한데 따르면 한국 도서출판 보고사에서 2008년 8월에 출판한 중국조선족 문학평론가 최삼룡의 편찬도서《재만조선인친일문학작품집》이 2009년 7월  한국 문화관광부 선정 우수도서로 평정되였다.  확인한데 의하면 중국조선족 작가나 학자들의 문학작품이나 학술저작이 한국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된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우수도서로 선정되면 재판을 할 때에 책표지에 『문화관광부 선정 우수도서』라는 마크를 달아주고 국가에서 몇권을 구입해서 여러 도서관에 기증한다.   무려 827페이지, 80여만자 되는  《재만조선인친일문학작품집》에는 시 38수, 소설 8편, 수필 22편, 희곡 1편과  편저자가 쓴 해제ㅡ《재만조선인문학의 친일작가와 작품에 대하여》라고 제목한 5만여자의 론문이  수록되였다.   평론가 최삼룡은 정년퇴직한후 연변인민출판사와 연변대학 조선-한국문학연구소의 요청으로 해방전 중국조선족문학을 발굴, 정리, 연구하는 작업에 정진하고있는데 현대시권,  항일문학권은 이미 출판되였고 민요권과 산문권(백만자, 상, 하권)이 인쇄중에 있다.   친일문학에 대한 발굴과 연구는 2001년부터 시작되였는데 그 첫 결실이 2002년 5월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20세기중국조선족문학자료전집 제6집》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연길에서 구독할수 있는 도서와 재료에만 의거하다 보니 많은 재료가 루락되였고 일부 재료는 여러가지 외적인 원인으로 수록하지 못하였었다.   이 책의 미흡한 점을 통절히 느낀 최삼룡평론가는  여러차례 한국으로  출국하는 기회를 리용하여 연세대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에 들어가 유관재료를 발굴하였는데 그 자료를 복사하는데만도 만만치 않은 돈이 들어갔다고 한다.   2007년 초 최삼룡평론가는 한국의 친일반민족행위규명위원회의 초청을 받고 해방전 재만 조선인 친일문학연구를 하게 되였는데 그 결실로 장편론문 《재만 조선인 친일문학 연구》(8만자)가 창출되였고 그 부산물로 《재만조선인 친일문학작품집》이 정리, 출판되였는데 이번에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된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친일문학연구에서 하나의 새로운 성과물로 평가를 받는다.   조선족문학사에서 가장 악독한 친일연극《김동한》의 작자가 김우석이 아니라 김영팔(金永八)이라는것, 박팔양의 창씨개명한 이름이『靑木一夫』외에『水原一夫』라는 이름이 더 있었다는것, 그리고《만선일보》에서 1942년 1~2월 사이에 조직한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라는 같은 제목으로 쓴 11명 문인들의 친일문장 11편도 이 책에 처음으로 수록되였으며 또 안수길(安壽吉)이 만주제국협화회 룡정분회의 상무원이였다는것도 이 책에서 처음 밝혀졌다.   그리고 이 책에는 만주 조선인 친일문학에 대한 편찬자나름의  일부 새로운 견해도 있는데 례하면 친일작품을 썼다고 하여 모두 친일분자로 결론할수 없으며 작자의 주도적이고 일관적인 표현을 전면적으로 평가하여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작품을 평가할 때에도 친일작품과 친일성향의 작품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야 한다는 등 견해가 그렇다.   (박문희)
6    자료집 “만주기행문” 출간 댓글:  조회:544  추천:34  2010-10-09
  자료집 “만주기행문” 출간      최삼룡, 허경진 공저로 된 자료집 “만주기행”이 출간되였다. 자료집은 근대시기에 만주를 체험한 조선인들의 만주 기행문을 수집하여 묶었다. 다년간 수집과 정리의 로고를 바쳐 리광수의 “만주에서”, 한설야의 “북극기행”,강경애의 “간도를 등지면서”등 47편의 작품을 선별, 장기 체류기와 단기 려행기로 체류류형에 따라 구분하여 폭넓게 수록했다.   자료집에 수록된 기행문들은 당시의 사회체제안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위하여 혹은 식민지 조선을 떠나 만주에서 새로운 터전을 찾기 위하여 만주에 체류한 이들의 민족의식과 력사의식이 반영되여있다. 책에 수록된 기행문들을 통해 우리는 식민지시기의 조선 지식인들의 시각으로 형상화된 격동기 만주를 다양한 시각과 해석의 방식으로 엿볼수 있다. 편저자 최삼룡은 1939년 2월 길림성 룡정시 태양향에서 출생, 1958년 연변대학교 조선언어, 문학학부를 졸업한뒤 교사로 취직하였다가 후일 연변교육출판사로 전근되어 편집, 부주필 등 직무를 맡아보았다. 연변사회과학원 문학예술연구로 자리를 옮겨 부소장, 소장 등 직무를 맡아보면서 본격적으로 연구에 종사하게 되었다.   저서로는 평론집 “각성과 곤혼”, “격변기의 문학선택”, “인성의 심도와 문체의 다양화”, “중국조선족문학사”(공저)등이 있고 편저로는 “20세기중국조선족문학사료전집”의 친일문학권과 항일문학권, 민요권, 산문권을”재만조선인 친일문학 작품집”등을 편찬하였다. 그중 친일문학연구에서 하나의 새로운 성과물로 평가를 받는 편찬도서”재만조선인친일문학작품집”은 한국 문화관광부 선정 우수도서로 평정되기도 했다.    1999년 정년퇴직을 한 뒤 현재까지 중국조선족문학의 자료 수집, 정리 및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공저자 허경진은 한국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서 주요저서로는”조선위항문학사”,”허균 시 연구”,”한국의 읍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연암 박지원 소설집”, ”매천야록”, ”서유견문”, ”삼국유사”, ”택리지”등 다수가 있다.   “동아시아가 화두로 떠오른 오늘날, 백년전의 만주려행기를 다시금 읽어보며 우리의 모습을 찾아보는것도 의미있는 일이다”고 편저자들은 집필 동기를 밝혔다.   김혁 기자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종합신문” 2020년 9월 27일   
5    최룡관의《이미지시 창작론》독후감 댓글:  조회:853  추천:32  2009-12-02
최룡관의 《이미지시 창작론》 독후감 최 삼 룡  1. 최룡관시인의 《이미지시 창작론》이 정식으로 출판된것은 2007년 4월인데 2006년 봄인가  나는 원고를 한번 통독한바 있고 정식으로 출판된 다음에도 한번 정독한바 있다.  오늘 최룡관시인의 이 책이 재판된다는 반가운 소식에 접하여 기껍게 이 책을 읽어본 필자의 독후감을 발표하기로 하였다. 2. 최룡관시인은  지난 세기 60년대 중기에 좌적인 정치서정시를 쓰는데로부터 시공부를 시작하였다.   그후 문화대혁명이 결속되고 사상해방운동과 더불어 전개된 문학관념갱신의 물결속에서 최룡관의 시도  의식성향이나 방법기교상에서 총체적으로  많이 달라졌으나 90년대 초까지만 하여도 시단의 다른 시인들 특히 문화대혁명후 시단에 데뷔한 시인들과 비교해보면 변화의 양상이 뚜렷하지 못하였고 시단에서 주목을 받을만한 작품도 몇수 창출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최룡관시인의 시는 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시나브로 변화의 폭이 커지기 시작하였는바  드디여 1996년에 이르러 시집 《반쪽은 다른 얼굴이다》를 출판하게 되는데 이 시집의 출판은  시의 재생과 탈피를  시도해온 최룡관시인의  20여년의 피타는 탐구의 열매였으며 아울러 시탐구의 길에서 앞으로 계속 탈태환골의 변신을 꿈꾸는 시적 혁신의지의 슬로건이였다.  이 시집은 확실하게 절반이 다른 모습으로 독자들앞에 다가왔는바 당시 조선족시단에 하나의 화제를 몰아왔었다.  그때 필자의 눈길을 끈것은 우선 이 시집의 뒤에 붙인 《나의 시작관》이라 이름하고 발표한 다음과 같은 몇마디 말이였다.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새길로 가라. 미쳐서 가라. 혼불을 다 빼앗겨 진정으로 미쳤을 때 쓴 시가 진짜 시다.   시의 변신을 꿈꾸는  최룡관씨의 비장한 결의를   직토한 이 시적인 슬로건에 접촉하면서 필자는 앞으로 있을 최룡관시인의 탈태환골의 변신을 예감하였으며  또 확실히 절반이 달라진 이 시집을 놓고 절반은 사실주의이고   절반은 현대주의인가? 한쪽은 시본체를 깨친 모습이고 다른 한쪽은  시본체를 깨치지 못한 모습인가? 반쪽은 거울의 시학이고 반쪽은 등불의 시학인가? 하고 문제를 제기해보고 그렇게 리해할수도 있다고 자문자답을 해본적이 있다.   이무튼 필자는 최룡관시인의 변신을 기꺼운 심정으로  그의 달라진 반쪽의 모습이 이제 서서히 커지면서 최시인의  전체 얼굴이 크게 변할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걸고 그의 시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이것은 사실 최룡관시인 한분뿐만 아닌 옹군 조선족시단의 변화에 대한 필자의 기대였을것이며 또 이것은 결코 나하나의 기대가 아니였을것이다.  과연 최룡관시인은 여러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는바 이 10여년래   륙속 새로운 시집을 창출해내여 조선족 시문학의 번영, 특히 현대주의시의  발전을 위해 큰 공을 세웠다. 누구나 시집 《새벽, 내 가슴에서 깃을 치다》, 《누드의 언어》, 《백두산은 독한 술이랍니다》, 《사춘기는 들말이야》를 잘 읽어보면 최룡관의 시가 이 10여년래 얼마나 엄청난 탈바꿈을 하였는가를 보아낼수 있을것이며 필자의 이 평가에 동감할것이다. 물론 이 시집들에 수록된 수백수의 시가 모두 우수작일수는 없고 그중에는 시가 되지 못한것들도 없지 않고 또 이미지시가 아닌것도 없지 않지만    최룡관의 시가 총체상에서 크게 탈바꿈하였다는 결론은 과분한 결론이 아닐것이다.   자기의 시를 변신시키는 그 과정에 최룡관시인은 문화학적 시각에서 보면 농경문화로부터 현대문화에로 과도하는 변화를 치러야 하였으며  창작방법으로 놓고 말하면 사실주의에 대한 심화와 확대,  더 나아가서 현대주의를 공부하고 실천하는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여야 하였으며  본체시학의 시각에서 말한다면 사회본체로부터 언어본체와 생명본체에로 과도하는 변화를 치러야 하였다. 10여년래 최룡관시인은 시평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였는바 리욱,  김성휘, 박화, 정몽호 등 타계하신 시인들과  김철, 조룡남, 리삼월, 리상각, 리설인,  남영전, 김파, 김응준, 석화,  김학송, 남철심, 박춘월 등 시인들의 시에 대한 그의 평론은 평론대상으로 선택된 해당 시인들에게 큰 계시를 주었을뿐만아니라 시공부를 금방 시작한 신인들에게 적극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또 조선족 평론계에서 일가를 이루었다고 평가할수 있는 정도의  리론실력을 과시하였다. 그리고 젊은 시절의 교편을 잡았던 경험과 흥취를 바탕으로 최룡관시인은 또 이 10여년간 문하에 여러 시학도를 거느리고 공동히 시를 공부하고 시창작을 지도하고 시창작경험을 교류하면서 조선족시단의 신인양성을 위하여 로고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이 《이미지시 창작론》이 리론적으로 론한다면 어느만큼 여물었고 얼마만큼 설익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실제창작을 지도하는데는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겠다는 신심만은 있다.책을 좀 읽었고 시를 쓰겠다는 마음만 가진 문학도들이 이 글을 숙독하고 시를 쓰지 못할 사람이 없을것이고 자발적으로 시를 쓰고있으나 시적자각이 없는 시인들이 이 책을 숙독하고 자신의 시를 한단계 제고시키지 못할 시인은 없을것이라고 외람된 생각도 가져본다. 나의 제자들의 실천이 나에게 이런 생각을 굳히게 하였다.   시인이  책의 머리말에 쓴 이 한단락의 글에서 이 책은 시인의 창작경험의 총화이고 시론탐구의 결과물이면서 아울러 교육실천의 검중을 거친 , 시창작실천에서 지도적의의가 있는 교과서라는것을 직설하고있다. 이것을 우리가  저자의 자찬이거나 과언이라고 밀어붙일수 있겠는가.   30여년의 교제가 있는 내가 아는 최룡관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이상의 개괄에서 우리는 최룡관시인에게 만약 장기간의 시창작경험이 없었고 자기의 시에 대한 자아성찰의 자세가 없었고 또 자기의 시를 탈태환골시키려는 혼불을 태우는 노력이 없었고 또 문하에 제자를 거느리고 시를 함께 공부해온 교육실천이 없었더라면 이 시론의 창  출은 애당초 불가능하였을것이라는 결론을 내릴수 있겠다. 3. 이제 아래에서 이 책을 읽어보면서 떠오른 느낌을 몇가지로 나누어 서술하여보려 한다.   첫째, 이 책은 최룡관시인의 참답게 공부하는 자세를 잘 보여주고있다. 지식인이 열심히 공부하여야 한다는것은 세인들이 다 아는 하나의 상식이다. 부단하게 자기자신의 지식을 갱신하려면 열심히 독서하는것밖에  다른 길이 없다. 특히 20세기 후반엽으로부터 인류는 지식이 폭발하는 시대를 맞이하여 석학들은 지금은 지식이 힘으로 되는 시대가 아니라 지식에 대한 지식이 힘으로 되는 시대라고 개괄하고있다. 이것을 우리는 20세기 80년대로부터 우리 나라에서  매일같이 쏟아져나오는 인문과학, 문학리론, 시학, 미학 등 분야에서의 정보만 보아도 피부로 실감할수 있는것이다.  시대적인 요청으로 보아도 이렇고 특히는 한창나이에  문화대혁명의 재난속에서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홍위병세대의 한 분자로서  특히 시인의 꿈을 안고 사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충실히 하고 나아가서  문학의 꿈을 이룩하는길은 참다운 독서 그 길밖에 더 있을까.   머리에  시인의 면루관을 이고 다니는 지식인으로서 참답게 독서하지 않고 어찌  지식경제시대의   삶을 잘  영위해나갈수 있으며 계급과 민족과 인류와 대화할수 있는 시를 쓸수 있으며 이 시대의 전위적인 작품을 창출해낼수 있겠는가.  이 책은 바로 이 방면에서  최룡관시인이 홍위병세대의 그 누구보다 각성이 심각하다는것을 중명하고있다.  다른것은 말을 말고 시인은 이 책 마지막에 참고서 목록 80여종을 렬거했는데 여기서도 우리는 최룡관씨가 얼마나 열심히 현대시학을 탐독했고 어마나 열심히 고금중외의 명시들을 애독했는지 알수 있으며 얼마나 큰 애심을 가지고 조선족시인들의 시작품을 읽었는지를 보아낼수 있다. 여기서   필자는 감히 최룡관씨가 읽은 글이 이보다 퍽 더 많을것이라고 단언한다.프랑스에는 책 한권을 읽고 글을 쓰는것을 도작이라고 하고 책 백권을 읽고 글을 쓰는것을 연구라고 한다는 격언이 있는데 최룡관시인이야말로   시창작리론 연구가라고 자호해도 당당할것 같다. 더욱 필자를 감동시키는것은 최룡관시인이 이  도서들을  아주 참답게 읽었다는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다른데서가 아니라 바로 이 책의 본문에서 그 증거를 찾을수 있다.  어째서 이렇게 하였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에는 시인, 학자들의 말씀에 주해를 달지 않았는데 만약 달았더라면 아마 수백개의 주해를 달아야 하였을것이다. 이것은 단적으로 최룡관씨의 독서량을 중명해주고있는것이다.  그리고 본문에서 리론을 전개함에있어서도 거의 모든 문제들에 대한  론술에서  선인들의 말씀을 대전제로 제시하고 그것을 론중하는 구조로 되였다. 우리는 본문의 어느 한 장절을 놓고도 모두 이러한 구조로 리론이 전개되였음을 보아낼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최근 10여년래 시를 공부해온 최룡관시인의 독서필기라고 할수 있겠다.  어떤 의미에서 혹자는 이것을 작자의 국한성이라고 흠잡을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우선 최룡관씨의 참답게 공부하는 허심한 자세라고 치하해주고싶다. 여기서 필자는  우리 시단에 독서필기를 참답게 하는 사람도 몇이나 되는가? 물어보고싶다.   둘째,  최룡관씨의 자아성찰의 자세와 탈피의 모지름이 필자를 감동시키였다. 솔직하게 말하면 최룡관시인의 시가 모두 이미지시인것은 아니다. 시집 《반쪽은 다른 얼굴이다》 이후에 출판한 몇권  시집에 수록된  시들중에도 이미지시가 아닌것이 많다. 그런데 어째서 최룡관시인은 이미지시만 힘주어 내세우고있는가? 또 고금중외의 시발전사를 더듬어보아도 세상의 모든 시가 이미지시인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최룡관시인은 기어이 《고금동서의 모든 시를 이미지시학으로 살펴보고 분석해볼수 있을것 같다.》(《이미지시 창작론》1페지 )고 하면서 이미지시에만 매달리고있는가?  이 책을 읽어본  사람들속에서 이 책에 대한 부정적인  의론의 한가지가 바로 세상의 시가 모두 이미지시가 아니고  자기가 써낸것도  모두가 이미지시인것이 아닌데 최룡관시인이 이미지시론으로 억지를 부리는것이 아니냐 하는것이다.  필자도 처음에 그런 생각이 없은것이 아니지만 후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여기에 최룡관씨의 자아성찰의 자세와 탈피의 모지름이 짙게 깔려있었다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지난 세기 70년대 초로부터 최룡관시인을 접촉해온 필자는 그의 시가 걸어온 길을 잘 알고있다.  문화대혁명초기에 고중을 졸업한 최룡관시인은 그 시기 여느 신인들과 마찬가지로  《만세》를 부르고 《타도》를 웨치면서  시를 배우지 않으면 안되는, 후세사람들이 《 홍위병세대 》라고 칭하는 세대의 한 적극적인 문학도였던것이다. 여기서 자세하게 펼치지는 않겠지만 그가 오랫동안 쓴것은 정치서정시의 형태를 해탈하지 못한 시, 바로 지금 최룡관시인이 말하는 이미지시와 그 의식성향이나 방법, 기교상에서  잘 대조되는 시였던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지난 세기 80년대초에  있었던 한차례의 시문학연구회에서 최룡관시인의 한마디 발언을 상기하면서 홀로  유심한 미소를 짓는다. 그 회의에서 최시인은 대의 다음과 같은 발언으로  좌중을  웃기였던것이다. 《무슨 현대시가 따로 있는가? 현대생활을 현대적으로 쓰면 현대시지.》  이랬던 최룡관시인이 오늘 이미지시를 들고나온것은 바로 자기의 시에 대한 오랜 자아성찰에 따르는 반발과 저항의 집중적 몸짓이며 자기의 시를 현대화의 진군소리 높이  급변하는 시대와 걸맞는 현대시로 거듭나게 하려는 재생과 탈피의 모지름이다고 볼수 있는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말한다면 이 책의 제목은 이미지시 창작론이라고 해도 되고 모더니즘시 창작론이라고 해도 되고 그저 현대시 창작론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작자는 이 책에서  현대시에 제기되는 거의 모든 문제를  건드리고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최룡관시인은  자기의 초기의 시에 대한 불만이 컸고 자기의 시를 재생시키려는 욕구도 강렬하였으며 새로운 시인으로서 거듭나려는 정서도 조급했던것이다.   이렇다면 우리는 최룡관시인의 이 《이미지시 창작론》이 리론적으로 미숙한데가 보이고 심지어는 일부 개념에 대한 리해에서 오류가 보이더라도 전편 글의 리론적심도와 정확도에 대하여서는 차치하고 너그럽게 관용을 베풀수 있지 않을까고 생각해본다. 10여년전 어느 회의에서 필자는 대의 다음과 같은 말을 한바 있다.  우리의  시인들이 모두 최룡관시인처럼 자기의 시에 대하여 자아성찰하고 시의 탈피와 재생을 위하여 피흐르는 령혼의 모지름을 쓴다면 우리 조선족의 시단의 풍경은 총체상에서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나는 지금도 여기서 이 말을 한번 되풀이하고싶다.  셋째, 최룡관시인의 리론탐구정신에 감동하였다.  이미지의 정의로부터 시작하여 이미지와 시적상관물에 이르기까지 7장으로 나누어 론술된 이 이미지시 창작론은 자체의 엄밀한 체계를 갖고있다. 이미지시 창작에서 해결하여야 할 거의 전부의 문제가 론술되였으며  장절과 장절사이의 련계가 엄밀하며 매개 장절마다 론점이 있고 론거가 있고 작자의  견해를  명확하게 펼치였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은근히 시인 최룡관씨의 창작경험이 깔려있다.  물론  경전시학과 현대시학의  일부 개념에 대한 리해가 틀리는것도 있고 실천적으로도  큰 지도적의의가 없는 빈말이 없는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여기서 이 책의 리론탐구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되는것은 저자가 숱한 리론서적을 그대로 베껴낸것이 아니라 힘껏 실천과 결부시키면서 자기나름대로  체계화하려고 애쓴것이다. 특히 높이 평가하고싶은것은  실패한 경험까지 포괄하여 창작경험이 풍부고 젊은 신인들의 시창작에서 고충이 무엇인가를 잘 리해하고있는 저자는 되도록이면 형이상학적인 리론의 론술보다 시창작중에서 절실하게 해결을 기다리는 문제에 대한 해석에 애쓴점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런 작업은 시창작경험이 없는 순리론가에게서는 바랄수 없는것이다.  실로 최룡관시인의 이 책의 창출은 우리 조선족시단에도 인제는 시인이 시를 쓸뿐만 아니라 시평도 쓰고 시학을 연구하는 시대가 왔다는것을 실감하게 한다.  원래 천성적으로 론리사유능력이 약하다고 평가를 받는 조선족은 여러 가지 주객관적 사정에 의하여 오랫동안 문단에서 평론이 결석하는 상황이였고 근 30년래 전업평론대오가 형성되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문학창작의 발전에 많이 뒤진 상황, 이런 상황은 더구나 창작실천경험이 있는 작가, 시인들이 평론과 연구에 참여하는것은 참으로 우리의 문학의 진흥을 위하여 바람직한 거동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도 필자는 최룡관시인의 이 책의 출판을 진심으로 환호하는 마음이다.4. 앞에서도 이따금씩 이 책의 모자람에 대하여 언급하였지만 몇마디 더 깊이있게 언급한다면 첫째 개념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고 론술한것이 적지 않는데  개념에 대한 수의적인 해석은 론설문에서는 금물이다. 왜냐하면 개념이란 언제 어데서나 일정한 민족, 계급 혹은 계층이나 단체의 공유물이지 결코 생명개체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억지로 체계를 세우려는 헛욕심으로 하여 이미지시에  현대주의시의 많은 류파들을 포함시키고있는데 이러한 론술은 이책의 리론적인 설복력을 크게 손상시키고있다. 례를 들면 낯설게 하기는 우선 로시아형식주의의 리론이였고 자동기술법은 유럽 초현실주의자들의 리론이였던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독립적인 시류파들을 분별없이 이미지시에 포괄시켜 연구하고 고금중외의 모든 시를 이미지시로 보는것은 리론상, 실천상 모두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미지시와 련계시켜 반드시 연구해야 할 일부 문제들에 대하여 언급하지 못하고 넘어간것도 하나의 큰 유감으로 남는다. 례를 들면 이미지와 이미지시의 구별, 현대주의시에서 이미지시가 차지하는 위치, 조선족의 시에서 이미지시 창작의 력사와 당전의 동태 등등 .  이 몇년간  교제중에서  이 책에 존재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저자가 이미 감지하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여기서  더 언급하지 않겠다. 필자는  앞으로 적당한 기회에 더 깊이 연구할것을 약속하고 여기서는 이만 줄인다.   총적으로 필자는 시인 최룡관씨의 이 책을  30여년 시를 써온 시인의 창작경험의 총화라고 생각하며 조선족시단의 번영과 진흥을 위한 시인의 리론탐구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하며 아울러 자기의 시를 거듭나게 하기 위해 애써온 시인의  시적모지름의 소산이라고 생각하는바  바로 이렇기 때문에 이 책은 시학연구에서 리론적 가치가 있고 또 시창작에서 실천적 의의도 있다고 인정하며 특히 시애호자들과 시창작의 길에 금방 들어선 신인들의 훌륭한 교과서로 될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면서 홍위병시인, 정치서정시인으로부터 이미지시인으로 거듭났을뿐만아니라 시평가로 거듭난 최룡관시인의 조선족시단의 번영을 위한 로고를 높이 치하하고싶은 마음을  전달하면서 이만 줄인다.                                       2008년 1월 6일
투시력과 감수력  ―리혜선의 《외로운 기다림》을 평함   /최삼룡         어찌 보면 아무리 격변기라고 하여도 생활은 별다른 변화없이 잔잔하게 흘러가는것 같다. 매일 만나던 사람을 만나고 매일 같은 시간과 공간에 같은 직장으로 통근하고 매일 숙달된 동작을 자꾸 반복하는 로동에 참가하니말이다. 그러나 생활은 그 밑바탕으로부터 변화하면서 앞으로 내달리는것이다. 격변기의 생활은 더구나 이러하다. 만약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사회의 진보는 운운할 나위가 없을것이다. 하기에 재간있는 작가라면 매일같이 반복되는 평범한 생활에서 본질적인것을 투시하고 포착하고 그것을 복잡하고 다종다양하고 색채현란한 생활현장에 대한 민첩한 감각을 통하여 재현할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한다. 작가에게는 직업적으로 보통사람보다 더 민첩하고 풍부하고 독특한 감수력이 있어야 한다.     프랑스의 H·A 텐은 《예술철학》에서 이 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피력한바 있다.     《예술가는 사물앞에서 반드시 독특한 감각이 있어야 한다. 사물의 같지 않은 자극에서 특수한 인상을 얻을수 있어야 한다. 즉 태여날 때부터 재간있는 사람의 감수력은 적어도 어느 한갈래에서는 민첩하고 세밀할것이다. 그의 청신하고 믿음직한 감각은 자연스럽게 여러가지 세세한 층차와 관계를 가려내고 포착하게 할것이며 하나의 소리에 서로 처량함과 웅장함을 가려내게 할것이며 하나의 몸가짐에서도 영준함과 쇠퇴함을 가려내게 할것이며 서로 보충되고 이어져있는 두가지 색체에서도 화려함과 소박함을 가려내게 할것이다. 그는 이러한 능력으로 사물의 내부에 심입할수 있으며 남보다 더 강한 민감성을 나타내게 된다. 그런데 개인에게 고유한 이 선명한 감각은 정지되여있는것이 아니라 전부의 기능에 미치여 그것들을 진동시킨다.》     녀류소설가 리혜선의 신작 《외로운 기다림》 (《천지》 1991년 5월호)을 읽고 제일 말하고싶은것이 바로 작가의 생활본질에 대한 투시력과 생활현장에 대한 감수력이다.     독자들에게 큰 흥미를 자아내기는커녕 도리여 답답하고 갑갑하고 따분한 느낌밖에 주지 못할것 같은 남의 나이를 벌써 스물이나 잡수신, 그러니깐 80이 된 시할머니의 생활에서 작자는 거대한 생활과 하나로 이어져있는 본질적인것을 투시해냈다.     시할머니는 워낙 며느리와 함께 살았는데 갑자기 며느리에게 노여운 일이 생겨서 손비의 집 즉 작품에서 《나》의 집에 옮기게 되였다.     손비 집에 옮겨온 뒤 세상을 뜨실 때까지 시할머니는 제나름대로 살았다. 시할머니는 손비와의 력사거리감을 회피하지도 않고 80평방 현대화 아빠트의 당신에 대한 외면에 대하여 숨기지도 않고 《나》가 당날치기로 신고 버린 긴 양말목을 풀기도 하며 돈도 좀 달라 시계도 차보고싶다 뭘 먹고싶다고 임신부보다 더 잔사설을 많이 하면서 살아간다. 표면적으로 보면 시할머니의 생활은 매우 따분하고 아무 변화도 없이 고리타분한것 같지만 곰곰히 음미해보면 퍽 흥미로운 변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쑈왕과 쑈장이 한때 연출한 《특집프로》와 자기의 며느리에 대한 태도의 미묘한 변화에 대하여 충분한 주의를 돌려야 한다.     처음에는 쑈왕이 불쌍한 남자라는 자세한 설명을 듣고도 《그래두 저렇게 아이까지 달린바에야 그런대로 살아야지.》하던 시할머니가 쑈왕의 죽음앞에서는 《저 젊은이두 죽자구 그랜걸 가지구 좋아하던 체네 하구 좋아해봤으문 한가지 원은 끄구 가겠구나.》고 완전히 의식이 다른 판단을 내린다. 또 《흥, 나이 오십을 먹구두 시집 비위나서 야단이야. 나원, 오래 사니깐 별꼴 다 본다.》면서 며느리에 대하여 《쌍년》이라고 하면서 쌍욕을 퍼붓던 시할머니가 당신의 림종을 앞두고는 《자네 시에미더러 그 사람하구 살라 하게.》라고 손비에게 부탁드린다. 시할머니의 이런 태도는 전후가 모순되며 리념상에서 서로 충돌되여 아울러 시할머니의 의식의 변화를 생동하게 보여주고있다.     시할머니의 이 성격변화는 실로 미묘하지만 거대한 변화이며 령혼내부의 심리갈등을 심각하게 보여주는 변화이며 획시대적인 변화라고 볼수 있는것이다. 이와 같이 리혜선은 평범한 인간의 일상적인 생활현장을 통하여 우리곁에서 부단히 변화되며 앞으로 흘러가는 생활의 본질을 심각히 제시하였다.     생활의 본질을 투시하고 반영한다고 하여 리혜선은 결코 인물을 우상화하거나 생활을 가식화하지 않고 우리들의 의식중에 여전히 뿌리 깊이 남아있는 보수적이고 고루하고 퇴영적인 일면을 은만하지 않음으로써 개혁과 보수, 개방과 페쇄, 진취와 퇴영이 대립되고 융합되고 교차된 현실생활을 진실하게 재현할수 있었다.      시할머니는 눈을 감는 그날까지 상시와 돈과 시계를 잘 갖춰가지고 먼저 저승에 간 남편과 아들놈을 만날 생각에 여념이 없다. 그는 당신의 체면까지 잃어가면서 손비와 돈을 달라고 하고 시계를 차고싶다는 거짓말로 저승에 가서 아들을 줄 시계를 마련한다. 시할머니의 이러한 완고부화한 봉건의식은 아무래도 건전한 인간의 생명욕구를 압제하게 되는것이다. 시할머니와 그 며느리의 충돌도 우리는 이런 시각에서 리해해야 된다. 시할머니의 이런 낡은 의식은 바로 네가지 현대화에로 나래쳐갈 우리의 날개를 무겁게 하는 중요한 중하로 되고있다는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시할머니의 성격특징은 이 몇마디로 개괄할수 있는것이 아니다. 저승에 가서라도 생전에 시계를 차보지 못한 아들이 시계를 차보게 하겠다는 갈망은 그자체로서는 허황하고 미신적이고 봉건적이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 평생을 잘 살아보지 못한 한을 저승에 가서라도 풀어보겠다는 우리 인민들의 원초적인 생명욕구의 풋풋한 표현이라고 볼수 있으며 또 이렇게 완고부화한 시할머니가 림종전에 성격이 미묘하게 변화되는것은 격변기의 우리 생활은 정체적으로나 세부적으로나 변화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어떤 당위성을 표현하기도 한다.     작자는 나중에 시할머니의 상시 등 유물이 담긴 낡은 트렁크를 박물관에 보존시키는것으로 격변기의 생활에 적응하고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해 우리는 의식가운데 모든 보수와 페쇄와 퇴영을 력사로 되게 해야 한다는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있다.     리혜선은 이 단편소설에서 생활의 본질에 대한 투시력을 과시했으며 또 생활의 현장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예민한 감각에 기초한 예술감수력을 과시하였다.     《고독한 기다림》에서 작자의 감수력은 주로 《나》 즉 시할머니의 손비의 관찰과 감각과 판단으로 표현되고있다.     이제 시할머니에 대한 묘사를 보자.     《하이얀 택시로부터 하이얀 치마저고리에 하이얀 코신과 하이얀 머리의 로인》, 《하이얀 틀이에 시선을 주며 곱게 물었다.》, 《비오는 날 베란다에 하얀 로인이 서있는 모습이란 사뭇 처량한 정경이다》, 《백지처럼 하얀 얼굴에 거문버섯 기미들이 차겁게 돋아있다》, 《할머니의 얼굴은 창백하였다. 주름살마다 피기를 잃고 씻은 나무뿌리처럼 하이얗다. 이마에서 물집같은 땀방울이 희부옇게 빛난다.》     이상 인용은 죄다 《나》의 눈에 비낀 시할머니의 모습이다. 아주 신선하며 진실하며 시할머니의 원래모습을 그대로 잘 보여주면서도 또 작가의 의식과 작품의 주제를 잘 표현하고있다. 특히 작가의 《흰색》에 대한 색채감각은 아주 독창적이며 핍진적인 예술경지에서 우리를 매혹시키고있다. 《흰색》은 여기서 《백의동포》의 상징으로도 되며 《말끔하다》는 의미도 나타내며 《아무것도 없다》, 《신기하다》는 거의 허무에 가까운 정서를 미묘하게 나타내면서 고독하게 내내 무엇을 기다리는 현대지성인의 심태를 의미심장하게 보여주고있다.     작자의 세밀한 관찰력과 예민한 감각은 전편 소설에서 《소도구》의 구실을 하는 시할머니의 낡은 트렁크에 대한 묘사에서도 훌륭히 고시되고있다. 이 트렁크의 외형에 대한 묘사, 이 트렁크에 담긴 물건, 그리고 이 트렁크에 대한 시할머니의 거의 단념을 못하고 떨어질수 없는 그 애착심에 대한 묘사 그리고 나중에는 박물관에 가서 되는 트렁크의 력사적인 운명에 대한 묘사를 전편소설에서 유기적인 생명체를 이루고 있는 세부묘사로 볼수 있다.     이외에도 군더더기 같아 보이는 생태환경에 대한 세부묘사도 그 독특한 형상성으로 우리의 눈길을 모으고있다. 《나》의 고귀한 베란다의 처마가 되여버린 7층집의 《세계지도》가 그려진 누런 이불과 그 주위를 공작새털같이 고운 나래를 투명하게 날리면서 날아예는 쉬파리, 그리고 《나》의 집 맞은편 강뚝의 낚시군의 회색태양모와 낡은 자전거에 대한 묘사는 작품의 문화적색채를 짙게 하여주면서 우리모두가 기다리는것이 구경 무엇인가를 재치있게 암시하여주고있다.     우리는 지금 시할머니의 가슴에 뿌리깊이 남아있는 보수, 페쇠, 퇴영을 밀어버리며 거대한 변화를 치르는 개혁과 개방의 위대한 견변기에 살고있으며 내내 무엇을 기다리는 기대감과 갈망을 안고 열심히들 살아가고있다.     격변기의 이 거대하고 미묘하고 복잡한 변화를 보아내고 우리의 날개를 무겁게 하는 락후하고 고루하고 고리타분한 낡은 의식을 예리하게 투시하고 그것을 생생한 생활현장에 대한 감각을 통하여 독창적인 예술형상을 창조해내는 작가는 행복할것이다.     자아감각이 언제나 좋고 안온하게 살며 글을 쓰기에 주위의 변화되는 생활을 모르고 그것을 예술감각으로 감수하지 못하고 내내 남을 반복하거나 자기를 반복하는 작가는 슬픈것이다.     물론 시할머니의 성격변화에 좀더 구체적인 계기가 안받침되고 좀더 풍부한 사회내용이 그려졌으면 좋았겠다는 욕심도 없지 않지만 총적으로 리혜선의 신작 《외로운 기다림》의 성공을 축하하는 바이다.     보다 행복한 인생을 갈망하고 보다 훌륭한 소설을 기다리는 필자른 결코 고독하지 않다. 이것은 리혜선의 신작 《외로운 기다림》을 읽고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1991. 5     
3    [평론]박선석의 소설과 농촌사회학(최삼룡) 댓글:  조회:1137  추천:53  2009-01-04
박선석의 소설과 농촌사회학  ―박선석의 소설을 보는 한 시각     최삼룡박선석(朴善錫,1945~ )은 《털없는 개》(료녕민족출판사, 1999년 3월 제1판),《즐거운 인생》(연중출판사, 1995년 4월 제1판),《웃는 얼굴》(연중출판사, 1995년 1월 제1판) 등 중단편소설집과  장편대하소설《쓴웃음》(상, 중, 하 3권, 료녕민족출판사, 2003년 12월 제1판 ), 장편소설《재해》(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7년 10월 제1판) 등 수백만자에 이르는 소설작품으로 우리의 조선족 소설문학의 번영을 위하여 한마지로를 세운 저명한 소설가이다.  박선석의 소설에 접근함에 있어서 많은 독자들이나 평론가들은 우선 박선석의 신분에 주의를 돌리면서 그를  농민작가라고 부른다.  이러한 개괄에는 합리한 리유가 있다.  우선 박선석은 진짜 60평생 농민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한 농부임에 틀림이 없다. 듣는 말에 의하면 지난 세기 90년대 중반인가 박선석이 매하구시 조선민족문화관에 초빙되여 일한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2년도 견지하지 못하고 그 일을 그만두었으며 더구나 그 일을 하는 사이에도 시종 농사를 그만둔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박선석을 진짜 농민으로서 농업로동에 종사하면서 글쓰기를 견지한 에누리 없이 농민작가라고 부를수 있는것이다.   다음 박선석의 소설작품의 제재는 거개가 농촌재재이며 창조한 인물도 거개가 농민이다. 《범과 사람》(1985년)이거나《령약비방》(1990년) 혹은《탄알값》(1984년),《간절한 소원》(1982년) 등 작품처럼 간혹 농민밖에 기타 인물형상이 창조되기도 하고 농업밖에 제재가 취급되기도 하지만 그것들마저도 거개가 농촌의 말단 간부나 직원들의 이야기이며 거개가 농민, 농촌, 농업과 련계되여있는 문제들이며 순수한 도시제재나 시민들의 이야기는 거의 없다. 특히 건국후로부터 문화대혁명이 결속되기까지의 농촌사회를 사실주의적적으로 재현한  두부의 장편소설《쓴웃음》과 《재해》는  우리 소설사에서 당당하게 자리매김을 할수 있는 력작이다.  그 다음 박선석의 소설은 농민들에게 많이 읽히고있다. 다시 말하면 박선석의 소설의 주요한 독자군은 농촌에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 필자는 구체적인 조사연구가 없지만 우연한 기회에 많은 《장백산》잡지의 농민구독자들에게서 박선석의 소설이 있기에 이 잡지를 사서 본다는 말을 여러번 들은적이 있다.  조선족문단을 두루 살펴보아도 시집을 출판한 농민시인은 몇분 있어도 장편소설을 창출한 작자중에 진짜 농민신분의 작가는 박선석 한분인줄 안다.  이러루한 점을 미루어보아 박선석을 농민작가라고 칭하는것은 충족한 리유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괄은 아주 피상적인바 박선석을 농민작가라고 하면서도 구경 농민의 함의, 농촌사회의 리면, 농촌문제의 심각성에 대하여 잘 모르면서 운운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또는 『작가』앞에 구지『농민』이라고 붙이는것은 박선석에 대한 존경인지? 아니면 좀 어떻게 내리보는것이 아닌지?  사람에 따라 틀리는것 같은데 박선석본인은 이런 칭호를 영광스럽게 생각하는지? 아니면 좀 거치장스럽게 생각하는지?   깊이 생각해볼 때가 되지 않았는가.  이런점을 감안하여 본 론고에서 필자는 농민작가 박선석의 소설에서 농촌사회학을 고찰하는것으로서 박선석의 소설에 대한 심층분석을 시도해본다.  1. 농민의 신분과 직업 그리고 박선석의 신분과 직업    아직까지도 기본상 농업국이라고 칭할수 있는 우리 나라에서 농민은 최대의 사회군체이며 농업, 농촌, 농민 을 통칭하는 이른바『3농문제』의 핵심은 농민이다.  그러면 농민이란 무엇인가? 생활중에서 아주 간단하고 쉬운것 같은 문제가 정작 해답하자면 쉽지 않을 때가 많은데 농민이란 무엇인가 하는 이 문제가 바로 이러한 문제에 속하는것 같다.  그러면 무엇을 농민이라고 하는가?  사실 지금까지 세계상에는 이 문제에 대한 통일적인 해답이 없다.  중국의 가장 권위있는 사전《現代漢語辭典》에서는 『농촌에서 농업로동에 종사하는 로동자』1)라고 정의를 내렸으며 중국의 다른 대사전《사해(辭海)》에서는《직접적으로 농업생산에 종사하는 로동자를 농민이라고 한다.…자본주의사회와 식민지 반식민지사회에서는 주요하게 빈농과 중농을 가리키고 사회주의사회에서는 집단농민을 가리킨다.》2) 라고 정의를 내렸다.  여기서 알수 있는바 중국에서도 오래동안 농민을 직업개념으로 리해하였던것이다.  이를테면 발달한 국가에서는 농민이란 완전히 직업개념이다. 거기서 농민은 농장을 경영하거나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어민이나 상인과 병렬되는 개념을 갖는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의 상황에 부합되는 정의가 아닌것 같다.  중국의 학계에서 연구나 사회생활의 담론중에서 농민은 한가지 직업에 끝이는것이 아니라 일종의 등급, 일종의 신분 혹은 준신분, 일종의 생존상태를 가리킨다. 한마디로 말하면 도시호구소지자(城市戶籍所持者)밖의 모든 사람, 1985년전에 국가식량을 배급받던 사람밖의 모든 사람을 대체적으로 농민이라고 부른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농민은 직업이 아니라 신분인것이다.  례를 들면 우리 나라에서 개혁개방이후 나타난 『농민로동자』,『농민기업가』,『농민과학가』,『향진기업』,『땅을 떠나도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등 현상은 『농민』이 직업을 개변하였어도 『신분』을 개변하지 못한다는 이 사실과 론리적인 련계가 있게 된다.  이것은 중국의 2원사회구조로부터 산생된 일계렬의 불평등제도로부터 파생된 사회현상으로서 그중 량식제도와 호구제도가 가장 관건적인 작용을 놀고있다.  시민들의 식량공급을 보장하기 위하여 국가에서는 1953년부터 량식의 통구통소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 정책은 1985년까지 계속되였다. 이에 따라서 중국에는 이른바『상품식량인구』와 『농촌식량인구』혹은 《농촌식량인구》와 《비농촌식량인구》가 엄격히 구분되였다.  국가에서는 또 1956년부터 여러 차례 결의를 짓고 강제성적인 조치를 대여 농민의 도시진출을 공제하였다. 이리하여 농업인구와 비농업인구의 획분과 그 전환에 대한 제한 즉 《농민을 비농민으로 전변시키는(農非轉)》공작은 중국호구제도의 핵심내용으로 되였으며  이로부터 인위적으로 중국공민을  도시주민과 농민 이  두가지 신분으로 나누게 되였다. 이것을 어떤 학자들은 『일국이책(一國兩策)』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호구제도는 농민과 시민지간에 한갈래의 깊은 신분구렁을 만들어놓게 되였다.   이렇게 되여 발달국가와 달리 중국에서는 국가의지에 의하여 『농민』이 직업개념으로만 되는것이 아니라 신분개념으로 되게 되였다.  소설가 박선석의 경우를 보아도 역시 우리는 직업과 신분의 모순에 부딪치게 됨을 회피할수 없게 된다.  박선석은 60여년의 일생에서 하루도 땅을 떠난적이 없는 농민이다. 즉 박선석은 일생동안  농촌호구소지자(農村戶籍所持者)였다. 바꾸어 말하면 박선석의 직업과 신분은 농민이다.  그런데 또 박선석은 100여편의 중단편소설과 2부의 220여만자의 장편소설을 창출해낸 작가, 우리의 민간언어로 표현하면  성과가 풍성한 농민과외작가이다. 이것은 박선석의  농민은 농민이되 보통농민이 아니라 작가라는 직업을 겸한 농민이라는 말이 된다. 이렇게  박선석은  부분적으로 직업을 바꾸었지만 역시 신분은 바꾸지 못했다.  우리가 여기서 농민의 직업과 신분을 담론하게 되고 박선석의 직업과 신분을 담론하게 되는것은 바로 중국에서 농촌호구소지자와 도시호구소지자 이 량자의 사이에는 정치, 경제, 문화상에서  사실적인 차별이 분명하게 존재하기때문이다.  이런 도시와 농촌의 차별 혹은 시민과 농민의 차별은 국가의 시민과 농민에 대한 2원적인 정책으로부터 산생된것이다.  그 2원적인 정책을 중국의 어느 사회학자는 농업과 비농업으로 나누는 호구제도, 농민식량과 비농민식량을 나누는 식량공급제도, 시민과 농민에 대한 부동한 부식품과 연료공급제도, 교육제도, 취업제도, 의료제도, 양로보험제도, 로동보험제도, 인재제도, 병역제도, 혼인제도, 생육제도 등 14종 제도로 개괄한바 있다.  이상 14종제도중에서 시민은 모두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고 농민은 모두 열세에 처하게 되였다. 3)  이제 우리가 박선석을 농민작가라고 칭할 때  그 함의가 무엇인가를 좀 알고 칭하여야 할것이다.  학력 9년의 초중졸업 문화수준의 순농민 박선석과  중단편소설 100여편 100여만자, 장편소설 2권 220여만자를  창출해낸 소설가 박선석 이 두 박선석의 초상은 너무도 현저한 격차로 우리를 놀래우지 않는가. 그는 한평생 열세에 처한 농민의 일원이였으며 인생의 후반부에 들어와서 저명한 작가로 성공하여 우리의 민족을 위하여 걸출한 공헌을 세운 작가로 변신하였어도 중국에서 특수한 함의가 있는 이 농민신분을 탈리하지 못하였다.  박선석의 이 직업과 신분의 격차 혹은 농민과 작가의 갈등이 얼마나 심각한것이였겠는가에 대하여서는 아마도 제3자로서는 영원히 리해하지 못할것이다. 이 과정에서 박선석은 얼마만한 노력을 하였겠으며 얼마나 많은 애로를 극복하였겠으며 또 얼마나 모진 정신적인 고민을 겪었겠는가.  게다가 박선석의 가정출신은 부농이라고 한다. 부농출신이라는 이 가정출신이 박선석의 성장발전에 어떤 장애작용을 놀았는가에 대하여서는 그의 중편소설《피와 운명》을 제대로 읽어본 독자들은 련상할수 있을것이다. 4)   이에 대하여 박선석의 처녀작의 발표로부터 지금까지 28년간 줄곧 박선석의 문학적성장과 성공을 지켜본 《장백산》잡지사의 남영전주필은 다음과 같이 피력한바 있다.     글을 특이하게 쓰는 박선석은 실은 불행아였다. 가정성분이 부농이란 딱지때문에 계급투쟁을 부르짓고 정치운동만 하던 그 시절 그는 어렸을 때부터 정신적타격을 받았다고 한다. 초중졸업, 학력이 겨우 9년밖에 안되는 그의 경우 그 어떤 가슴 아픈 사연들이 숨겨져있었다. 그래서 그는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로 되였을것이다.  고독을 달래려고 그는 늘쌍 고기낚으러 다녔고 수영을 하였으며 산에 올랐다. 속세를 떠난 자연과의 사귐은 그의 우울증을 덜어주었고 삶의 용기를 주었으며 정신을 맑게 하였다.  그러나 그가 풀지 못한것은 가슴속깊이 맺힌 한이엿다. 이 한을 풀려고 백성들의 속심말을 대변하려고 그가 선택한 길은 문학이였고 그가 걷는 길 또한 고리끼와 같은 고심한 자학의 길이였다.5)    남주필의 이러한 지론은 우리가 박선석의 소설을 심각히 연구하는데 가장 주요한 열쇠를 제공해주고있다. 그것은 즉 박선석이 소설가로 된 내적기인(內的起因)이 무엇인가를 직접적으로 해명한것으로 된다.  아무튼 인제는 박선석은 사실상에서 농민이 아니다. 소설가, 우리 조선족내부에서는 당당하게 『저명한』이란 규정어를 얹어 놓을수 있는 소설가이다. 사실상에서 우리 문단에서 생전인 어느 소설가를 비교해보아도 박선석은 당당한 자리매김을 할수 있는 작가인것이다.    사실 박선석의 명성은 이미 국내외에 알려지고있다. 필자는 정확하게 1998년 9월, 한국에 갔을 때 어느날 오후  한국의 20여개 잡지사의 주필 (혹은 부주필)들과 함께 북한산으로  등산하였는데 휴식시간에 당신들은 중국조선족의 작가들중에 누구를 알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소설가로는 박선석, 우광훈을 아는 사람이 제일 많았었다.  물론 이것은 정식 조사가 아니여서 아무런 문제도 설명할수 없지만 하여튼 박선석의 소설을 우리 소설의 우수작품으로 헤아릴수 있다는데는 이의가 없을줄 안다.  그렇다면 왜서 『작가 박선석』앞에 『농민』이란 두글자를 얹어놓아야 한단말인가?  이것을 사회학적으로 지적하면 사실상에서 아직까지도 농민을 직업으로만 보는것이 아니라신분으로, 등급으로 , 어떤 생활상태로 보는 습관의 류독이라고 말하지 않을수 없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지, 박선석본신이 어떻게 생각하겠는지 관계없이 필자는 지금부터 『작가 박선석』앞에 『농민』 두 글자를 생략하기로 함을 여기서 모름지기 선언하는바이다.     2. 농촌사회학의 시각으로부터 보는 박선석의 소설    필자는 이 문장의 집필을 위하여 박선석의 3책의 중단편집과 2부의 장편소설을 다시 통독하였다.  그 느낌을 이 편폭이 제한된 평론에서 다 쓴다는것은 무리이고 여기서는  가장 돌출한 느낌 몇가지를 정리해보려 한다.  첫번째 생각이 앞절에서 운운한 그것 즉 『작가 박선석』앞에 『농민』이란 두 글자를 지워버려야 한다는 생각이다.  앞절에서 많이 언급했기에 여기서  반복하지 않고 단 한가지만 더 보충한다면 박선석의 문학수준과 더불어 중화인민공화국사 특히 농촌변천사와 농촌사회학에 대한 인식과 지식이 아주 심각하고도 투철하다는것을 힘주어내세우고싶다. 보통농민이라면 감성적인 체험은 있을수 있지만 박선석처럼 그러한 지식은 있을수 없다. 수십년간 열심히 공부한 결과물이지 결코 하루 아침에 깨우친것이 아니다. 이러한 지식이 있는 작가이기에 우리는 《재해》나 《쓴웃음》같은 장편소설의 창출을 기대할수 있었을것이다. 사실 박선석의 중화인민공화국사 특히 농촌변천사와 농촌사회학에 대한 지식은 력사학계의 누구를 내놓아도 결코 짝지지 않을 그런 높이에 이르렀음을 감지하면서 필자는 이러한 작가에게 농민이란 규정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것을 더욱 심각하게 느꼈던것이다.  다음 박선석의 수백만자에 달하는 소설에 취급된 시대는 건국후로부터 개혁개방, 시장경제체제가 건립되는 지난세기 말까지 반세기 되는 시간을 다 포괄하고 있으며  재현한 내용은 토지개혁으로부터 농촌의 사회주의개조, 인민공사화와 사회주의교육 그리고 문화대혁명, 개혁개방과 사회주의시장경제체제의 건립까지 조선족농민들이 겪은 영광과 고난의 력사가 다 포괄되여있으며  창조된 인물은 한번 읽으면 잊어지지 않는 인물만 백여명이나 되고 묘술된 에피소트가 수백컬레나 된다.  이러한 방대한 규모의 작품중에서 필자에게 제일 인상이 깊은 인물은 누구이고 사건은 무엇인가?  △ 단편소설《시대가 낳은 불행아》(1986년)의 정철.  《시대가 낳은 불행아》의 정철이는  대단한 재간도 있고 남다른 패기도 있는 청년이였는데 조국의 부름을 받고 항미원조전투에 나가 대공 1차를 세우고 소공 3차를 세운 전투영웅이지만 포로로 되는 불행아였고 팔 하나에다 남자의 보귀한 그것마저 잃었던것이다. 전쟁이 끝나 고향에 돌아온 그는 사랑하는 안해의 전도를 위하여 억지로 리혼시키고 홀로 살아가는데다가 포로였다는 리유로 계속 정치적으로 괄세를 받으며 살다가 마침내 문화대혁명중에서 반란파들에게 맞아 한쪽다리까지 잃게 되며 한쪽 팔과 한쪽 다리로 살아가는  비참한 운명에 빠지게 된다.  정철의 청년시대의 건실한 삶과 전쟁후의 비참한 인생은 결코 그 개인의 운명이 아니다.  그의 인생비극의 주요 원흉은 전쟁이다. 작가의 동기도 주로는 전쟁의 비인도성을 고발하려는것이라고 할수 잇다. 그러나 필자는  중국농민의 력사적운명과 련계시켜보면서  보다 깊이 생각할 문제에 접근하게 되였는데 그것은 즉 중국농민의 혁명에 대한 공헌과 혁명승리후의 생존의 격차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철의 전쟁전후의 토막난 인생은 모종의 상징성마저 있다고 평가할수 있다.  농민에 대한 당과 국가의 좌적인 정책이 혁명시기에는 농민을 혁명의 주체로 보았으나 혁명이 승리한 뒤에는 개조대상으로 본 결과물이 바로 이소설《시대가 낳은 불행아》의 정철과 이제 아래에서 분석할 《재해》의 김덕순과 같은 인물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중국농민이 겪은 이러한 비참한 삶을 전혀 없었고 건국후 중국농민의 삶은 내내 행복하기만 했다고 주장할 사람은 인제는 없다. 그러나 중국농민의  운명이 어떻게 되여 이렇게 되였는가에 대하여 명확히 아는 사람은 아직도 많지 못하다.  사실 좀더 깊이 분석해보면 이러한 비극은 최고결책층의 중국농민에 대한 인식의 오류에서 생긴것이라고 말할수밖에  없다.  여기에 모택동의 중국농민에 대한 인식을 개괄한 한단락의 문자가 있다.    농민에 대한 모택동의 인식도 하나의 과정이 있었다.  대혁명시기 모택동은 농민의 혁명성을 발견하였다. 그는 󰡒향촌에서 줄곧 악전고투하는 주요력량은 빈농이다…이 빈농은 향촌인구의 70%를 차지한다󰡓, 그들은 농촌의 무산계급과 반(半)무산계급으로서 혁명의 주체력량이다. 토지혁명시기 모택동은 중국혁명은 실질상에서 농민혁명이며 중국혁명의 근본문제는 농민문제다. 누가 농민을 쟁취하면 누가 혁명의 승리를 쟁취할것이다라고 인정하였다. 그는 아울러 농민의 고유한 락후성(례를 들면 자사자리와 우매보수)과 농촌생활의 변두리성을 지적하면서 농민혁명중에서 반듯이 무산계급의 정치적지도를 견지하여야 하며 농민에 대하여 무산계급사상교육을 견지하여야 한다고 인정하였다.  신민주주의혁명을 완성하고 사회주의혁명으로 과도하는 시기에 와서 모택동은 농민은 인제 혁명의 주체가 아니고 의거할 력량이 아니라고 인정하였다. 그뿐만아니라 농민이 의존하는 경제가 락후하기에 이러한 경제를 개조함과 아울러 농민도 마땅히 교육을 접수하여야 한다고 인정하였으며 󰡒엄중한 문제는 농민을 교육하는것이다󰡓라고 하면서 농민을 맑스주의 교육대상으로 삼았다.6)    모택동은 레닌의 농민의 이중성에 대한 리론을 중국의 구체정황에 결합시켜 중국농민에 대하여 력사적이고 심각한 분석을 진행하여 중국의 혁명중에서 특수한 농민문제를 창조성적으로 해결하였지만 또 농민은 소생산자이며 아울러 로동자라는것을 근본상에서 부정하고 농민은 우리 나라 사회주의건설의 주력군이라는것을 부인하고 농민에 대한 극좌적인 로선과 조치를 실시하였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 로선과 시책이 건국후 50년대로부터 개혁개방이전까지 여러번 좌절당하고  실패한 주요한 원인이다.   정철의 비참한 운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 장편소설《재해》의 리석태.  리석태는 장편소설《재해》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창조된 인물형상일뿐만아니라 박선석의 전반 소설문학에서 창조된 일계렬의 농민형상중에서 가장 훌륭하게 창조된 인물형상으로 평가할수 있다.  리석태는 려명벌에서 한다고  하는 감농군으로서 토지개혁후 근로치부한 모범농민이다.  《재해》의 〈제1장 땅〉에서 리석태가  농업합작화의 관건적인 한단계인 고급생산합작사건립의 대고조속에서 토지개혁후 8년간 아껴 먹고 아껴 쓰면서 모은 돈 3000원으로 금방 산 논을 포함한 땅을 고급사에 바치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중점으로 묘사하였다.  그후 고급합작화의 생산과 생활 중에서도 리석태는 감농군의 재간과 열정을 다하여 집체를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였지만  좌적인 방침과 기층간부들의 맹동에 의하여 계속 당하기만 하는 불행아로 부각되였으며 특히 1957년의 반우파투쟁중에서는 어느 상급간부의 뜻을 거슬러 민족련합사를 반대한것이 죄장이 되여 농민우파로 되여 정치적으로 박해를 받는다.  여기서 우리가 심사숙고해야 할것은 리석태는 진짜 중국농민의 한부류의 전형이라는것이다.    생각할수록 억울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가슴이 터져온다. 8년간 땅값을 버느라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였던가? 온집식구가 일년사시절 밤낮이 따로 없이 땀 흘리며 숨이 가쁘도록 일했다 . 일밖에 모르고 살았다. 그 돈을 모으느라고 먹는것도 아까와 입쌀을 팔아 눅은 강낭쌀을 사먹었다. 해마다 되지를 서너마리씩 길렀지만 한마리도 잡아먹지 않고 팔았고 지어는 한알에 3전씩 하는 닭알도 먹지 않고 팔아서 잎돈을 모았다. 온집식구가 초신을 삼아 신었고 단추도 헌 고무신바닥이나 깨진 물바가지로 만들어 달아 입었으며 석냥값을 절약하느라 부시돌을 써왔다. 안해는 언제나 몽당치마를 입었고 자기와 아들은 기운 배적삼을 입었으며 다 자란 딸애는 변변한 속옷 한가지 입어보지 못했다.    이것은 리석태가 그 3000원돈을 날려보내고 혼자 하는 생각이다.  그 먼저 땅을 살 궁리를 할 때 딸이 아버지 머리속의 미국사상을 가셔야 한다고 할 때 석태의 대답은 어떠하였던가.    공산당이 땅까지 주면서 잘살라고 해서 잘살려고 그러는데 그게 미국놈사상이냐? 일하기 싫어 농사 망치고 공산당이 준 땅을 팔아 도박하다가 또 거러지가 된 심해만이를 따라 배우란 말이야?    보라 , 토지개혁후 리석태와 같이 부지런한 농민들의 근로치부의 꿈은 얼마나 컸으며 또 공산당에 대한 기대도 얼마나 컸던것인가.  그러나 공산당의 좌적인 농업시책은 이러한 순진한 농민들의 부풀어오르는 꿈을 여지없이 유린하였던것이다.  건국후 중국의 토지개혁은 농민으로 하여금 진정으로 토지의 주인이 되게 하였으며 농민과 토지의 직접적인 결합을 실현할수 있었다.  이때의 중국농민은 진정으로 토지를 얻었을뿐만아니라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그뒤에 실시한 호조조형식도 농민의 자주독립과 인신자유가 기본상 보장되였었다.  초급사계단까지도 농민들에게 입사퇴사의 자유가 있었으며 토지 등 생산자료는 주식을 나누는 등 형식을 취하엿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중국농민은 독립인격이 있고 자유로웠다.    그러나 1955년 후반년부터 전국적으로 일어난 한차례의 농업합작화고조는 실제상에서 정부가 채취한 강제성적인 제도변천, 농민에 대한  박탈을 채취한 정책이라고 해야 할것인바 소유의 농민들이 모두 입사하여야 하였으며 그렇지 않으면 자본주의도로로 가는것으로 인정되였다. 많은 지방에서 하루밤사이에 농민에게 속하는 토지, 가축, 대형생산자료가 무상으로 집단의것으로 되였으며 원래 개체적이고 자주독립적이던 농민들은 고급사의 사원으로 되여 일을 하는 등 일체권리가 순간에 없어져 농민의 적극성을 최대한으로 좌절시켰다.  1958년에 시작된 농촌인민공사제도는 개혁개방의 초기까지 연장되였는데 인민공사제도와 도시와 농촌에 대한 2원적인 호구정책으로써 농민을 꽁꽁 묶어놓았으며 그들로 하여금 아무런 선택의 자유도 없게 하였으며 같은 일, 같은 로동보수, 같은 수준의 생활을 하게 하였다. 정부는 공사, 대대, 생산대, 생산소조를 통하여 층층이 엄밀히 공제하여 농민을 모조리 국가가 공제하는 궤도에 몰아넣고 토지에 견고히 매여놓고 그들로 하여금 모든 개인자유를 상실하게 하였고 인신자유를 포함한 최저의 인격존엄마저 상실하게 하였다.7)     사실 그때 8억 중국농민의 신분은 곧『사원』하나로 통일되였다. 이 사원들은 명예상에서 집체토지의 주인이였으나 실제상에서 생산, 경영, 분배에서 아무런 권리도 없었으며 사실상에서 사원들은 로동권리마저 없는것과 마찬가지였다.『언제 일하러 나가고 언제 일을 끝마치고 언제 휴식하는가 하는것도 모두 생산대장이 정하고 사원들의 의무는 한가지 복종하는것밖에 없었다.』8) 뿐만아니라 시장에 가고 친척방문하는것도 모두 대장의 비준을 맡아야 하고 자유롭게 농촌을 떠나 도시로 들어가는것은 천방야담이였다. 이런 체제에서 농민들은 『큰가마밥을 먹었으며』『잘하나 못하나 마찬가지고 하나 하지 않으나 같은』삶을 누리게 되였다.  박선석이 창조한 리석태 이 인물의 실망과 좌절과 억울함은 바로 중국농민이 근 30년 겪은 실망과 좌절과 억울함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하다.   △ 장편소설《재해》의 김덕순.  다음《재해》의 김덕순이를 보자. 그는 항미원조전쟁의 세례를 겪은 인간성이 있으며 원칙성이 강한 중공당원이다. 그러나 그는 농촌의 고급사건립과 인민공사화 그리고 대약진 운동중에서 줄곧 불공정한 대우를 받으며 마침내 1960년대 중국농촌을  휩쓴 대기아속에서 폐결핵으로  3년 앓는 안해를 약 한첩도 써주지 못하고 마지막 밥 한끼도 제대로 멕이지 못한채로  잃고 말며 그에 앞서 대약진 공사장에서 사고로 맏아들 경국이를  잃고 만다.  이 인물의 운명도  상징적의의가 있다. 그가 혁명에 대한 공헌과 인생의 후반생에 겪게 되는 비참한 경우는 우리가 앞에서 분석한 《시대가 낳은 불행아》의 정철이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청춘을 혁명에 공헌한 공로자이지만 사회주의건설중에서는 비참한 삶을 영위해나가는 시대의 희생자이다.  그런데 김덕순의 인물형상에는 또 다른 하나의 문제를 더 체현되고있는데 그것은 즉 1958년후 중국농촌을 휩쓴 대기아이다.  《재해》 〈제12장 기아〉에서 작자는 전문 기아문제를 취급하고있다.  김덕순의 안해의 죽음은 가장 대표적이고 또 가장 비참한 죽음이다. 3년간 폐병을 앓고있는 안해에게 김덕순은 약 한첩도 써주지 못했다. 그런데 또 상상할수 없는 기아가 들이닥쳤다.  병마에 시달리는 그의 안해는 허기증에 허덕이면서 온종일 헛소리만 한다.󰡒여보, 세상이 좋아지면…내…제사때…제사밥을…무드기…많이 담아달라요󰡓이것이 김덕순의 안해의 유언이다. 이 말을 들은 김덕순은 벌떡 일어나 쌀을 얻으러 집체식당에 갔으나  헛물을 켜고 그 소문을 들은 김준환이 김석태네 집에 가서 얻어온 한사발의 돌피쌀을 얻어 안해에게 밥이라고 해서 준다 .안해는 그 밥을 달갑게 먹고 󰡒야, 잘 먹었다.󰡓한마디 던지고 눈을 감는다.  그날 저녁에 마을의 정로인도 굶어서 세상을 뜨고 . 그 먼저 수리공지에서  김덕순의 아들 경국이도 결국 며칠이고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에서 맥이 진하여 터지는 남포의 발파구역을 제대로 벗어나지 못했기에 죽은것이다.  어째서 이러한 기아가 오게 되였는가? 자연재해인가?  인재인가?  이 문제에 대하여 소설은  림종에 처한 안해를 위하여 집체식당에 쌀을 얻으러 갔다가 허탕을 치고 악에 바쳐 내뱉는 몇마디 말로 해답하고있다.    󰡒최대장, 우리가 일을 적게 했나? 당의 말을 안 들었나? 우리가 잘못한게 뭔가? 그런데…그런데 저 멀건 강낭가루죽밖에 남은게 뭔가?󰡓  󰡒나나…여러분이나…3년만에 공산주의를 건설한다고 …그…그날을 위해 별의별 고생을 다했수다…󰡓  󰡒이게…그래 우리가 그렇게 바라던 공산주의요?󰡓  󰡒뭐? 자연재해? 입은 가로 째졌어도 말은 바로 하라구. 물없이 논을 풀고 쇠물을 녹인다구 인력과 물력을 랑비하구  무당 20만근을 낸다구 논에 남포질을 해서 소를 빠뜨려죽이구 밀식을 하구 비료를 쏟아부어 벼를 푹 썩이구…그래 이게 자연재해인가? 응? 자연재해야?󰡓  김덕순의 이 몇마디 말은 대기아의 직접적 원인을 고도로 개괄하였다. 50년대 중기로부터 실시된 좌적인 로선과 시책이 나중에 1960년대초의 대기아를 가져왔던것이다.  그러나 박선석의 사색은 결코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작자는 마을에 사람들이 굶어죽어가는 현실을 쓰기전에 슬그머니 1960년 7월에 열린 중공중앙 북대하회의에서《전당이 동원되여 대대적으로 농업을 꾸리고 대대적으로 량식을 주릴데 관한 지시》9)를 제정한 사실을 제기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 회의에서는 도시와 농촌의 식량표준을 낮출데 관한 지시를 내린것이다. 이 회의에서는 농촌의 식량표준을 반드시 낮추어야 한다고 지시했는바 회하이남으로부터 주강류역까지 인평균 원량 360근으로 하고 회하이북 인평균 원량 300근 좌우로 하고 동북은 좀 높일수 있고  각성의 중재구에서는 마땅히 인평균 300근 이하로 하여야 한다고 지시했다. 이와 동시에 도시에서는 매월 식량표준을 2근씩 줄인다고 지시했다.10)  그리고 그해 8월에 도시의 식량공급을 보장하기 위하여 중공중앙에서는 󰡒대중도시에서 경상적으로 3개월의 식량주전을 위한 재고량식을 준비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11)  이렇게 하였기에 도시에서는 식량공급이 보장되였을 뿐만아니라 농촌보다 그 표준이 훨씬 더 높았다.  1961년 사실상에서 전국적인 기아가 점점 더 엄중해지는 상황에서도 국가에서는 여전히󰡒량식산량지의 결량대대에에 대하여 국가에서는 일반적으로 식량을 더 공급하지 않는다. 대대와 대대사이, 공사와 공사사이에 남는것과 모자라는것을 조절하여 해결할것󰡓12)을 요구하였다.  알수 있는바 1960년대초의 대기아는 도시에서 보다 농촌에서 더욱 심각하였던 사실상에서 농촌의 대기아였으며 제도성적인 문제였다는것을 알수  있으며 이 대기아가 생성된 주요원인은  도시와 농촌에 대한 정책의 차이에서 왔다는것을 알수 있다.  김덕순이 이번 기아는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였다는 말을 우리는 이러한 시각에서 그 함의를 파악하여야 할것이다. △ 《재해》의 최만근과 《쓴웃음》의 정인철, 송길동. 이 셋은 특별히 연구할 가치가 있는 인물형상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2중신분의 사람들로서 사원은 사원이되  관리층에 들어간 사람들인데  여전히 농민 즉 국가의 로임을 받지 못하고 국가의 량식을 먹지 못하는 농촌호구소지자들이다.  인민공사의 시대에 인민공사의 내부에는 비교적 공고한 두개의 사회계층이 있엇는데 그것은 사원계층과 관리자계층이였다. 최만근과 정인철 , 송길동 이들은 토지개혁과 합작화운동중에서 적극분자들인데  대개 20여년간 농촌을 관리하였다. 이들은 상급지도자들과 접촉이 많았고 사원들보다 외계의 정보를 많이 알고있엇으며 사원들중에서 상급의 지시를 집행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였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본지농촌의 실정을 익숙히 장악하고있었고 다년래의 단련을 거쳐 계획경제의 체제하에서 농촌을 관리하는 능력을 키웠다. 따라서 그들은 상응한 권리와 리익을 획득하였다.  대체로 이렇게 말할수 있지만 역시 사람에 따라서 그 출발점이 다르고 수준이 다르고 성과가 다르고 나아가서 끝장도 달랐다.  최만근이는 호조조시기부터 초급합작사시기, 고급합작사시기, 인민공사시기의 전(前)단계 즉 1960년대초의  3년 간고한 시기까지 관리층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야심은 있으나 능력은 모자라고 독립사고력이 없으며 상급의 지시라면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집행하는 부류에 속하는 사람으로  결국 사원들의 신임을 받지 못해 관리계층에서 나떨어진다.  정인철은 혁명전쟁의 시련을 겪은 당원으로서 일심정력으로 인민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으로서 집체와 사원들을 위하여 좋은 일을 많이 하였으나 사회주의교육운동과 무산계급문화대혁명중에서 투쟁을 맞고 관리층에서 쫒겨나고만다. 그러다가 《4인방》이 타도되고 새로운 력사시기를 맞이한후에 다시 생산대 대장으로 선거된다.  송길동은 사회주의교육운동과 문화대혁명중에서 아첨과 사기와 기편과 공갈 등 온갖 수단을 다하여 관리층에 올라간 사람으로서 문화대혁중에서 력사를 속이고 가짜애비를 모시고 생사람을 잡고 녀인을 통간하고 살인을 하는 등 온갖 나쁜짓이란 나쁜 짓을 다하다가 결국 한 녀자를 놓고 벌이는 개싸움에서 맞아죽는다.  《쓴웃음》에는  야심, 아첨, 사기, 녀색, 살인에서 송길동보다 짝지지 않는 방춘달이란 대장이 있는데 그는 정인철과 대조되게 《4인방》이 타도되고 새로운 력사시기를 맞이한후에 대장에서 락선되고 그의 무거운 인생은 결국 자살로 결속된다.  △ 《재해》와《쓴웃음》의 김룡철 그리고 광범한 사원들.  박선석의 소설중에는 유일하게 두권의 장편소설에 련속 등장하는 인물이 있는데 그가 바로 김룡철이다. 이로보아 김룡철 이 인물은 작가가 아주 사랑하는 인물임을 알수 있다.  기룡철은 바로 진정한 사원이다. 한번도 관리층에 올라간적이 넚는 순수한 농민이다.  그는 농사일을 잘 할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일에 재간이 많으며 남다를 생존지혜가 있으며 중국농민들에게 다 있는 그러한 결함도 있고 나쁜 버릇도 있지만 또 언제나 솔직하며 특히 불의에 맞서고 권세에 아부하지 않는 우점이 있으며 락관적이고 림기웅변의 순발력이 강하고 유모어와 해학이 있는 농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사원들의 편에서 말을 하고 행동하기에 사원들의 옹호를 받으나 최만근이나 송길동과 같은 관리층에 있는 사람들과 적극분자들의 미움을 받는다.  이밖의 많은 남녀로소 사원들은 그 기질이나 재간에서는 김룡철과 차이가 있지만 운명은 마찬가지다.    3. 농촌을 보고 농민을 쓰는 박선석의 한계.     박선석의 장편소설 《쓴웃음》은 우리의 소설사에서 기념비적대작이라고 평가하는데는 충분한 리유가 있다.13) 사실 이 소설뿐만 아니라 장편소설《재해》와 더불어 그의 수많은 성과작들은 우리의 문학사에서 뚜렸한 자리매김을 할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장편소설을 비롯한 박선석의 소설의 한계도 명석하게 인식하여야 한다.  이것은 쟁론할 나위가 없는 결론일것이다.  이러한 한계는 주로 농민을 보는 박선석의 한계에서 온다.  여기서 특히 농촌사회학의 시각으로 보여지는것만 제기한다면 첫째로는 농민의 2중성에 대한 리해가 깊지 못하기에 그려진 인물들의 성격의 내적갈등이 구체적이 되지 못하고 많은 인물들의 형상이 아주 단순하다. 이러한 한계는 작품의 구조작업에서도 분명히 나타나는데 그것은 즉 구조상에서 2극대립의 모식에서 해탈하지 못한것이다. 여기서 특히 농민들과 밀접히 련계되는 당과 정부의 간부들의 형상창조가 너무 단순하게 되고 개혁개방후 농민들의 삶을 조명하는 작품에서도 여전히 2극대립의 모식에서 해탈되지 못하한것을 지적하게 된다. 이것은 박선석의 작품이 문화대혁명후에 태여난 세대들과 일부 청년독자들에게서 환심을 사지 못하는 주요한 원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개혁개방후 중국농민의 처지에는 실질적인 변화가 생기였고 농민개인들은 자유를 획득하였고 자주성이 체현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는 신분형농민으로부터 직업형농민으로의 전변이 가속화되고있다. 이러한 시대적변화가 박선석의 소설에 아직 더 심각하게 재현되지 못하고있다는것을 지적하게 된다.  이러한 한계에다가 박선석의 소설미학이 전통적인 사실주의에서 초탈하려는 탈경전적인 움직임이 크게 보이지 않기에 일부 지성인들속에서도 박선석의 소설을 높이 사려고 하지 않는 경행이 생기는것 같다.  현대적인 소설미학에 근거하면 소설발전사는 이야기단계와 인물형상창조단계를 거쳐 인제는 소설에 감정과 정서를 담는 단계에 들어섰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나 견해는 일가지언이지만 확실히 박선석의 소설에서 이야기와 인물형상창조는 성공적으로 진행되고있지만 아직 소설에 서정성이 모자란다는것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다.  이러한 문제들은 한마디로 해결할수 없지만 인물들의 처한 환경(자연환경과 인문환경)에 대한 묘사를 보다 더 감각적으로 재현하고 인물들의 복잡하고 2중적인 내적우주의 구석구석을 예술적으로 재현하는 노력이 기대된다.  이런 노력의 관건은 박선석이 농민을 보다 높이 서서 멀리 내다보는 시각을 해결하는데 있다.  즉 농민의 립장에서만  세상을 바라볼것이 아니라 작가적립장에서 지성인의 립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진정으로 이러한 눈을 키워내는 날에는 또 진정으로 작가 박선석앞에 붙이던 『농민』이란 두 글자를 삭제할수 있을것이다.   2008년 10월 8일.    <<연변문학>> 2008년 11호    
2    물빛으로 다듬은 시혼, 진선미에 대한 끈질긴 추구(최삼룡) 댓글:  조회:948  추천:98  2007-12-19
물빛으로 다듬은 시혼, 진선미에 대한 끈질긴 추구최삼룡―김동진시인의 근작시작품을 평함 1 김동진시인의 이름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꺼질줄 모르는 시혼을 불태우며 40여성상 작품활동에 정진한 김동진시인은 새로운 세기에 들어온이래 계속 왕성한 작품활동을 벌리고있다. 새로운 세기에 들어선 이 몇년 시인은 이미 시집으로 《백두산에 가서는》, 《락엽귀근》, 《봄비와 사랑과 두만강》, 《장성과 안개와 백두산》, 시조선집 《청자의 꿈 백자의 향》, 가사집 《산향천리》등 6부의 시집을 창출해내였다. 새 세기에 진입한이래 시인의 새로운 탐구작들은 특히 민족의 구심점을 찾으려는 시인의 몸짓이 돋보이며 새로운 력사의 풍파속에서 피흘리는 령혼의 몸부림을 치는 겨레의 삶의 현장에 눈길을 돌리는 시적자세가 어여쁘며 자연을 읽고 자연과 대화하는 지혜가 대견스러운데서 시인이 닿은 새로운 고도를 보여주고있으며 사상 및 예술상에서 보다 완숙된 모습으로 읽는 이들의 가슴에 접근해오고있다.  조선족시단의 활약적인 시인들중 평생 기층에서 삶을 영위하며 작품활동에 종사하는 시인은 많지 않은데 김동진은 그중  대표적인 한분으로서 그래도 조선족의 농업, 농민, 농촌과 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사는 시인이 김동진이라고 말할수 있겠다. 이것은 온 나라가 바야흐로 도시화되는 시점에서 말하면 시인에게 꼭 유리하게만 작용하는 생활환경이 아니겠지만 우리 겨레의 가장 낮은 밑바닥 인생을 영위하는 농민들과 대화할수 있고 대자연과 직접 교감할수 있는 환경임에는 틀림없다.  다음 김동진시인은 장기간의 작품활동중에서 시종 진선미에 대한 추구를 견지했으며 꾸준하게 인간의 애심, 인류의 친선, 세계의 평화를 읊조리였다. 이에 대하여 시인이 스스로 피력한바 있다. 《문학이 본연에로의 회귀를 촉구하는 모진 진통속에서 깨달은것이라면 흔들림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진선미(眞善美)에 대한 인간의 추구였다. 세계명작을 보아도 문학으로 승화된 진선미는 사상과 리념과 체제와 국경을 초월하여 세계적인 심미공감대를 이룩하는것이였다. 그러므로 작가, 시인은 언제 어디서나 진선미에 대한 추구를 영원한 사명으로 받들어야 한다. 이는 생활과 문학이 나에게 알려준것이지 나의 발견이 아니다.》 (《김동진문집1》 17페지)여기에서 알수 있는바 진선미에 대한 추구는 김동진시인의 작품활동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이며 또 최고의 목표이다. 그다음, 김동진시인이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에 정진하기 시작한 1980년대는 조선족시단도 커다란 변화를 겪은 계절이였는데 사실주의방법의 복원과 현대주의, 후현대주의 방법의 수용이 그 주요한 표지로 된다. 이 변화속에서 시적실험 내지 시적모험을 하는 선봉시인들이 애쓴 결과 주지주의시, 상징주의시, 초현실주의시, 토템시 등이 대량 산출되였다. 하여 사실주의 시만 창작하던 국면이 크게 타파되여 오늘의 시단을 굽어보면 보다 다양하고 풍부하고 복잡한 시풍경이 나타나게 되였다. 이 거대한 변화속에서 고전시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있다는것이 김동진시인의 작품에 대한 필자의 총적인 인상이였다. 사실 랭정하게 생각해보아도 시단이나 평단에서 김동진시인의 시에 대한 평가가 오래동안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미미했던것은 바로 김동진시인의 시에서 고전시학에서 탈출하려는 모험을 찾아볼수 없었기때문이 아닐가 생각된다. 김동진의 근작들은 계속 옛날의 시학에 몰입하는 김동진시인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또 고전시학과 현대시학, 전통시와 현대시의 접목에 애를 쓰는 김동진시인의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2 김동진의 근작에 일관된 의식성향은 민족정신의 함양이고 민족의 운명에 대한 고민이고 또 민족의 삶의 현장에 대한 조명이다. 시 《영원》은 이 주제에 받쳐진 시편들중 가장 대표적인것이라고 할수 있다.  이 시의 시적대상은 부제에서 밝힌바 조종의 산 백두산이다. 하지만 본문에는 백두산이란 말 한마디도 없다. 시인은 백두산을 《당신》이라고 부르면서 백두산의 산봉우리, 천지, 온천을 쓰고 백두의 령혼 즉 배달겨레의 영원한 령혼을 구가하였다. 이처럼 백두산에 기탁한 민족정신에 대한 구가는 그의 많은 시편에서 주선률로 되고있다. 시인은 백두산을 바라보면서 《이제 천년을 흐른다 하여/장백이라는 산과 흰옷 입은 사람들을/갈라놓을수 있을가//천심이 민심이고/지심도 민심이니/천지물은 항시 푸르리라》(《백두명상》에서)는 명상에 잠겨도 보고 고조할매의 거울 천지에 찾아가 《풍진속세에 찌든 가슴에/속죄의 향불이 피여오른다》면서 자아성찰도 해보고(《고조할매의 거울》에서) 백두대간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이 땅의 무슨 말을 들어보려고/누구의 무슨 한을 달래주려고/하늘벼랑 락화암에서/하얀 치마폭 뒤집어쓴 꽃잎이/내리고 내리고 또 내리는가》라는 환상에 잠겨보기도 하고(《백두대간에 내리는 눈》에서) 백두대간에 솟는 해를 바라보면서 《백두대간에 솟는 해는/3억리의 머언 길 단숨에 달려왔다》면서 《이 강포에 굴함없는 령혼의 산과/이 정의로 굽이치는 력사의 강을/차마 례사로이 만날수가 없어 백두대간에 솟는 해는/동해바다에서 목욕단장을 하고왔다》는 상상도 해보며(《백두대간에 솟는 해》에서) 백두대간에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너는 투명한 노래가락으로/나의 가슴에 스며들고/나는 감격에 떨리는 두팔로/너의 젖은 몸 안아보며/우리는 이렇게 사랑하였다》고 웨쳤으며 (《백두대간에 내리는 비》에서) 두만강기슭을 거닐면서 《눈물젖은 사공의 노래는/천년의 갈숲에 스며들고/세월은 아픔을 삼키며/아득히 흘러가고있었다》고 하면서 《두만강―력사의 강/너는 진작 눈물이 말라버린/저 하늘의 빛이요/이 땅의 소리였다고》 노래하였다.(《두만강은 눈물이 아니다》에서) 백두산을 우러르면서 두만강을 거닐면서 읊조린 이와 같은 시편들에는 한결같이 애족애향의 감정이 충일되여있으며 영원한 민족정신과 빛나는 민족문화에 대한 함양이 도고하며 민족의 운명에 대한 깊은 고민이 안받침되여있다. 이렇게 민족의 운명에 대하여 깊은 고민을 안고 사는 시인이기에 김동진시인은 내내 민족의 삶의 현장에서 눈을 떼지 않고있으며 따라서 그의 시에는 민족의 생존상황에 대한 커다란 우환의식으로 일관되여있다. 흩날리는 버들꽃을 바라보며 마음이 왜 무거워져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그냥 모르겠지만 흰색을 좋아하기로 허옇게 소금 돋히는 강바닥까지 자랑거리로 삼을수는 없다 이것은 시 《엄마야 누나야》의 제1련이다. 이렇게 강바닥에 소금 돋히는 현실을 소묘하면서 갈라터진 강변에는 여울소리 울리는 언어가 없고 물빛으로 일렁이는 문자가 없다고 한탄한다. 서글픈 분위기와 쓸쓸한 기분을 조성하는 고향의 강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길은 처절하기만 하다. 시 《비여있는 집》은 바야흐로 해체되고있는 조선족 농촌의 스산한 현장을 비여있는 집으로 은유하면서 뿌리박은 터가 소버짐을 앓기 시작하고 사람내음이 떠나버린 개바자는 바라보는 눈알을 아리게 한다고 하였으며 내장을 뽑아내고 박제된 두더지 같은 빈집, 잡초의 향연에 묻혀버린 빈집은 한무지 흙으로 무너진다고 하였다. 시 《저기 저 산기슭에》에서 시인은 모든것이 기억만으로 남아있고 현실에는 없는것들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에 잠겨 그 산기슭에는 원래 《나의 살던 고향》이 있었는데 재미있는 동네, 달콤한 동네, 그림 같은 동네, 사랑밭 가꾼 동네가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고 통곡을 치고있다. 시 《저기 저 마을》에서도 역시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가시내들에 대한 그리움을 절절하게 표현하고있다. 어시 닮은 가시내들, 이슬 맺힌 가시내들, 옷깃 여민 가시내들, 해달 같은 가시내들, 잘도 크더니 잘도 크더니 잘도 크더니… 몇번 곱씹고 뒤말을 잇지 못하고있다. 총적으로 동포들의 삶의 현장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 시인의 마음은 불안하며 초조하며 착잡하다. 어느새 김동진시인의 시에서도 전에 부르던 《이 아니 농가지락인가》하는 식의 전원목가는 가뭇없이 사라졌다. 3 조선족 농촌의 해체와 조선족의 운명 그리고 조선족 전통문화의 소실은 근심을 자아내지만 김동진시인의 진선미에 대한 추구는 멈춰지지 않는다. 그의 많은 시편들이 이를 증명하고있다. 시 《그리움의 강물》에서 읊은것처럼 사는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봄은 따사롭고 세상은 아름답다는것은 바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시인의 신념으로 굳어졌다. 시인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먼저 자기 신변의 친인들에게서 찾아보았다.  여기서 먼저 시 《엄마의 새벽》을 보자. 이 시에서 시적화자는 자식의 공부뒤바라지때문에 콩나물을 이고 새벽길을 걸어 시장으로 가는 엄마의 모습을 그리고있다. 새벽이 열리기전 엄마는 떠나야 한다 깊이를 알수 없는 밤의 먹물속에 잠긴 엄마는 오십고개에 처진 빈약한 젖가슴으로 바위처럼 무거운 어둠의 대문을 밀고나간다 엄마의 머리에는 엄마보다 더 큰 싸리광주리 광주리안에는 엄마의 꿈처럼 어둠속에서 눈을 뜬 콩나물의 음악이 있다 ―《엄마의 새벽》 전반부 이렇게 시작된 이 시에서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영원한 사랑, 절대적인 사랑을 인상깊게 찬미하고있다. 시 《당신의 체온 36. 5도》는 안해의 사랑을 특색있게 읊조린 시편으로 우리에게 큰 감동을 안겨준다. 시의 시작에서 창밖에는 삭풍이 울부짖어도 당신의 체온이 내곁에 있기에 나에게는 겨울이 없다고 단도직입적으로 직설한후 시적화자는 《문득 처마밑에 깃든 참새 아빠도/이렇게 참새 엄마의 체온으로/이 겨울을 따스하게 살리라는 생각과/밤이면 추워서 잠이 안온다는/이웃집 홀아비의 말이 떠오릅니다》라고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안해의 사랑을 읊조리고있다. 당신이라는 꺼질줄 모르는 화로가 있어 성에가 끼지 않는 나의 방에는 겨울을 모르는 꽃이 피는군요 나를 업어키우신 할머니의 잔등과 언 손을 품어주시던 엄마의 가슴과 신통히도 같은 당신의 체온 36.5도 그 체온을 나에게로 보내주신 저 하늘에 늘 감사하는 두팔로 나는 당신의 체온을 안아봅니다 창밖에 삭풍이 울부짖는 날 이 시에 대한 설명은 모두 쓸데 없는 군더더기로 될것이다. 봄이 따스하고 세상이 아름다운것은 바로 36. 5도의 체온을 갖고있는 안해의 뜨거운 사랑이 있고 엄마의 절대적인 사랑이 있고 활등처럼 휘여든 허리로 새끼들을 업어키우신 할머니들의 영원한 사랑이 있기때문이다. 이밖에  또 《임당수》 등 여러 시편에서는 어지러운 세상에서 이미 많이 색이 바래진 사랑― 효를 찾아 헤매기도 하며 《려명의 천사》 등 여러 시편에서는 시적인 상상력을 동원하여 인간의 사랑을 고양하고있다. 《려명의 천사》에서 시적화자는 려명의 창문밖을 내다보면서 밤의 면사포를 벗기는 새벽빛을 천사의 예쁜 손으로 련상하면서 사랑의 위대한 힘을 확인하고있다. 망울 터치는 꽃나무의 전률에 무늬지으며 흔들리는 새벽호수 가위눌린 가슴이 부풀어오르도록 흘러내리는 새날의 싱싱한 강물이여 우리의 아름다운 노래와 춤사위가 물빛으로 설레이는 까닭도 알겠다. 이 시에서 풍기는 분위기를 통하여 우리는 시인의 드팀없는 신념, 래일에 대한 락관적인 전망 그리고 진선미와 사랑에 대한 끈질긴 추구를 다시한번 확인하게 된다. 4 김동진의 근작에서  또 한가지 우리의 주의를 끄는것은 시인의 자연을 읽는 지혜와 자연과 대화하는 수준이다. 우리는 그의 많은 시편들이 자연에 대한 감각과 자연현상에 대한 관찰로부터 발상되고있음을 보아낼수 있으며 이러한 시편들에 인간과 민족, 시대와 사회에 대한 철리적인 사색이 깊이 깔려있음을 보아낼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김동진의 시에서 일종의 자연현상으로서 눈과 단풍이 차지하는 비중을 가늠해볼 필요가 있으며 산과 바다 그중에서도 백두산과 두만강이 차지하는 비중을 가늠해볼 필요가 있다는것을 독자들에게 환기시키고싶다. 5 김동진의 근작들을 두루 살펴보면서  필자가 제일 기꺼워지게 되는것은 새 세기에 진입한이래 김동진시인의 시가 많이 탈바꿈되였다는 점이다. 어느 글에서 시인은 《나는 접목을 시도한다》고 선언한바 있는데 이 말의 함의는 바로 전통적인것을 버리지 않으면서 혁신을 시도하겠다는 뜻이고 고전적인것과 현대적인것, 동방적인것과 서방적인것의 결합을 시도하겠다는 뜻일것이다. 김동진시인이 이 시적슬로건의 실천에 골몰하는 모습 참으로 돋보인다. 첫째, 시이미지 창조. 하아얀 소복차림으로 개벽의 첫새벽에 떠놓은 정화수 한대접에 북두칠성 우러러 합장하고 서있는 당신의 모습이 영원으로 비꼈습니다 숙명으로 다져진 어시의 마음으로 혹시나 어느 자식 배를 곯을가 밤낮으로 쉬임없이 찧고 또 찧는 쿵덕쿵덕 절구방아소리에도 당신의 영원은 들려오고 당신의 가마전에 피여오르는 식을줄 모르는 더운 김에서도 당신의 영원은 하얀 치마자락으로 나붓깁니다 이것은 조종의 산 백두산에 대한 송가인데 여기에는 이른바 시적대상으로 된 원형에 대한 복제는 거의 없고 모두 시인의 상상에 의한 시적이미지로 창조되였다. 《하아얀 소복차림》, 《정화수 한대접》, 《북두칠성 우러러 합장하고 서있는 당신》이 무엇을 은유하고있는가는 더 설명이 필요없고 《밤낮으로 쉬임없이 찧고 또 찧는 쿵덕쿵덕 절구방아소리》는 폭포소리의 은유이고 《가마전에 피여오르는 식을줄 모르는 더운 김》은 온천수의 은유임에 틀림없을것이다. 이 시에 창조된 이미저리는 동적인것이 특징적이며 또 시각적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가 복합적으로 창조된것이 특징적이다. ① 하늘나무에 걸려 찢어진 바람     그 바람의 람루처럼 펄럭거리는    삭막한 계절의 옷자락을 여며주려고    눈은 저리도 내리는것인가 ② 백두대간    하얀 너울    백설천지    하얀 꽃춤 ③ 하늘벼랑 락화암에서    하얀 치마폭 뒤집어쓴 꽃잎이    내리고 내리고 또 내리는가 이 세련의 시는 모두 《백두대간에 내리는 눈》에서 발취한것인데 ①에서 《삭막한 계절의 옷자락》은 민족의 어떤 생활상을 은유한 형태적인 이미지이고 ②에서 《하얀 너울》과 《하얀 꽃춤》은 시각적 이미지이고 ③에서 《하얀 치마폭 뒤집어쓴 꽃잎》도 시각적 이미지인데 이 세개 이미지는 모두 시인의 상상에 의하여 창조된 시적원형에 대한 복제가 아닌 시적 이미지다. 김동진의 시에는 이렇게 예민한 감각과 심각한 사색 그리고 풍부한 상상의 결합으로 창조된 풋풋한 생명이 살아숨쉬는 시적 이미지가 점차 많아지는 추세를 보여주고있다. 그리고 이런 시적이미지에 힘입어 그의 근작들은  어느 한수의 시도 결코 허술하게 창조되지 않았다는 인상을 남겨주고있다. 둘째, 최근에 창작된 시편들은 김동진시인이 시창작중에서 점차 지성을 중시하고있으며  따라서 그의 시편들중 주지시가 많아지고있음을 보여주고있다. 40년간의 작품활동중에서 김동진시인은 오래동안 주로 주정시를 써왔으며 또 지금도  주정시가 그의 시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있는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점차 시창작에서 지성을 중히 여기고 또 주지시 창작에도 흥취를 보이고있는데 이는 김동진시인의 시적인 곤혹과 변신의 모지름을 과시하는 대목이다. 이른바 주지시란 주정시의 대립개념으로 감각과 정서보다는 지성의 작용을 중요시하는 창작태도 혹은 그 경향을 의미한다. 여기서 지성의 작용이란 작품내용이 지적(知的)이라기보다 대상에 대하여 감정을 억제하는 시인의 태도를 가리키며 그 가치취향으로 놓고 말하면 주지시는 현대문명의 병페에 대한 비평 내지 고발이 위주이다. 이런 의미에서 국내외의 많은 학자들이 주지시와 모더니즘시 사이에 같기 부호를 치는것이다. 살면서 몸과 마음에 입혔던 온갖 빛갈 고운 옷가지를 모조리  벗어버린다는건 수치로만 해석할 일이 아니다 그런 날 가슴 헤친 해가 솟아오르면 해살을 타고 흘러내리는 가장 뜨거운 언어들이 알몸의 진실을 어루만진다 알몸의 예술 진실의 미학 나무는 그것을 만들려고 해마다 봄, 여름을 넘어 가을로 가고있다   ―《가을로 가는 나무》 전문 이 시는 제목 그대로 나무를 쓰고있지만 시의 내용은 그것이 아니라 시적대상 즉 가을로 가는 나무에 대한 감정이나 정서가 아니라 사색이고 나무로부터 창조된 시이미지는 없는바 이 시의 주제는 시인의 자유에 대한 동경과 알몸의 예술과 진실의 미학 그리고 자아의 철저한 해방에 대한 추구이다. 시 《갈대의 추억》의 내용도 갈대에 기탁한 인생의 허무와 인간의 이중성에 대한 사색인바 전편 시에서 주체를 이루고있는것은 갈대의 이미지가 아니라 인생에 대한 사색이다. 시 《나의 이름》은 완전한 주지시로서 자아의 가치에 대한 랭철한 분석으로 일관되여있다. 이 시에는 권세와 금전의 유희 그리고 명예의 유혹을 초월한 극히 평범하면서도 참다운 인생에 대한 추구가 분명히 암시되고있다. 이밖에도 《사막시대》, 《탈이 많은 세상》, 《열리지 않는 문》 등 주지시에서는 현대문명의 페단에 대한 비판에 예봉을 돌리고있다. 셋째, 김동진시인의 시는 점차 이미지의 창조에 주력하고 또 지성을 중시하는 과정에서 일부 시인의 주관원망과는 달리 언어의 폭력조합 내지 이미지폭력조합 등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나는 현대시에 많이 쓰이는 시어의 폭력조합이요 이미지폭력조합이요 하는것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김동진문집》(1) 17페지)라고 말한바 있는 김동진시인이지만 그의 근작들에서 우리는 시어의 폭력조합은 물론 이미지의 폭력조합까지 어렵잖게 찾아볼수 있으며 심지어는 난해한 시까지 적지 않게 보인다. 이것은 김동진시인의 시의 모순 아니 시인의 모순이라 할수 있는데 이 모순이야말로 김동진시인이 비로소 진정한 현대시창작의 차원에 입문했다는 증거로 된다. 총적으로 김동진의 근작은 시인의 진선미에 대한 추구가 계속되고있으며 시인이 꿈꾸는 고전시학과 현대시학, 전통과 현대를 접목하려는 모지름이 계 속되고있다는것을 증명하고있다. 김동진시인의 시가 좋아지고있어서 기쁘다. 2007년 5월 2일 <<연변문학>> 2007년 11월호
1    《문화지키기》론 (최삼룡) 댓글:  조회:984  추천:107  2007-10-21
《문화지키기》론최삼룡 문학평론가어느 출판사에서 항일전쟁승리 60주년을 기념하여 출판한 《항일음악사》에 정률성이 제외된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서점에서 그 책의 목록을 읽어보는 순간 우리 력사는 우리가 써야 한다는것을 깊이 느꼈다. 그후 어느 좌담회에서 필자는 이 명제로 나의 생각을 토로한바 있으며 그것이 몇백자로 정리되여 신문에 발표되였다. 최근에 나는 《우리의 문화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명제로 확대시키면서 많은 생각들을 했다. 이 명제에서 《문화》와 《지키기》는 주제어이다. 우리 중국조선족에게 문화가 있는가? 조선족에게 언어와 문자, 풍속과 습관, 문학과 예술이 있는데 왜서 이런 문제가 제기되는가? 중화인민공화국의 56개 민족중의 한 민족인 조선족의 문화는 다른 민족과 구별된다는것만 가지고 그 특점을 개괄할수 없기때문이다. 주지하다싶이 중국의 조선족은 과경민족으로 력사는 기껏해야 2세기에 불과하기에 그 전통으로 보면 문화상에서 중국조선족과 조선(한국)의 조선인(한인)과 공통점이 많다. 다시말하면 언어문자, 풍속습관, 문학예술상에서 공통점이 많다. 그러나 중국조선족은 이 땅을 개척하고 지켜오고 건설하는 가운데서 문화상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으며 조선(한국)의것과 틀리는 특점을 구비하게 되였다. 우리가 말하는 조선족문화는 바로 중화민족의 56개 민족중에서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문화이며 조선(한국)의 문화와도 구별되는 문화이다. 이 점에 대하여 많이 언급되였기에 더 반복하지 않겠지만 필자가 강조하고싶은것은 객관적으로 중국의 조선족문화의 존재에 대하여 절대로 동요해서는 안된다는것이다. 다음 《지키기》에 대하여 언급하겠다. 《지킨다》는 동사는 잃지 않도록 살핀다는 뜻의 낱말이다. 《우리의 문화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명제는 《잃을 가능성》을 전제로 하고 제기된것이다.  근년에 조선족문화는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향을 많이 보여주고있다. 하여 조선족지성인들은 조선족사회는 절대 허물어져서는 안된다고 웨치고있다.  조선족인구의 감소, 조선족자연툰의 해체, 조선족교육사업의 위기, 조선족출판 등 여러 형태의 문화사업의 위축 등은 조선족사회에 많은 위기를 조성하고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앞에서 우리는 자기의 문화를 굳게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력사를 회고해보면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 즉 월경 1세는 어려운 인문환경속에서 민족의 문화를 잘 지켜냈을뿐만아니라 새로운 환경과 발전하는 시대에 잘 적응하면서 민족의 문화를 공고, 발전시켰다.  이를테면 20세기 전반기 일본제국주의침략자들의 정치적, 군사적, 문화적 탄압속에서도 항쟁의 불길을 지펴올려 항일혁명의 비장한 력사를 써왔으며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피바다, 불바다속에서도 지혜롭게 자기의 언어와 문자를 지켜왔고 자기 특색의 문학과 예술을 창조하였다. 새 중국이 성립된후 오래동안 중국조선족은 선진민족의 위상을 떨쳐왔다. 그런데 개혁개방이 시작된이래 농경문화가 도시문화에로 전환되고 전통문화가 현대문화에로 전환되는 격변속에서 조선족의 고유한 렬근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민족문화에 대한 허무주의적태도가 자생되고 민족문화위기론이 범람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의 지성인들앞에 《문화지키기》가 제기되는것은 필연적이다. 민족문화를 해체시키는 허무주의, 즉 민족문화에 대한 허무주의태도를 엄격히 배격해야 한다. 외부에서 중국조선족문화의 존재를 부정하고 민족정신을 타매하는 언론이나 조치가 가끔 존재하는데 이는 모두 민족내부의 허무주의, 비관주의 등을 통해 작용하고있다. 그러므로 《문화지키기》에서의 급선무는 조선족지성인들이 자기 력사와 문화를 잘 습득하고 솔선수범하는것이다. 후배들한테 조선족문화를 알게 하는 사업을 구체적으로 장기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청소년들한테 조선족문자를 배워주어야 하고 조선족력사를 알게 하며 조선족문학과 예술을 흔상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시장경제의 충격으로 민족언어를 외면하는 경향이 농후한 현상태에서 조선족교육가들과 지성인들은 더 열심히 《문화지키기》에 신경을 써야 한다. 1970년대 말엽, 개혁개방이 금방 시작된 시기였다. 연길에서 열린 전 주 조선어문교수모임에서 정판룡교수님을 초청하여 문학동태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강의가 끝나고 질의시간에 어느 조선어문교원이 왜서 우리가 후대들한테 조선어문을 배워주어야 하는가? 하는 아름찬 물음을 제기하였다. 정판룡교수는 《그것은 우리가 다른 민족으로 동화되는 시간을 하루라도 지연시키기 위한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때는 미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예지가 번뜩이는 명답이였다. 나는 조선족지성인들이 왜서 《문화지키기》를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정판룡선생님의 말씀으로 대답하고싶다. 중국력사에는 칭키스칸의 후예들이 중원을 100여년이나 통치했고 누르하치의 후예들이 중원을 300여년 통치했으나 결국 자기의 언어와 문자마저 지켜내지 못한 사례가 있다. 문화의 힘이란 이처럼 끈질긴것으로 정권과 군사로 이겨내지 못한다. 많은 사실이 증명하다싶이 지구촌에서 문화의 충돌은 갈수록 심해지고있으며 국내외의 많은 석학들이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로 될것이라고 예측하고있다. 어느 모로 보나 《문화지키기》는 민족지성인들이 마다할수 없는 과제이다.  우리 문화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 2006년 10월 10일 연변문학 2007년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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