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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석의 소설과 농촌사회학
―박선석의 소설을 보는 한 시각
최삼룡
박선석(朴善錫,1945~ )은 《털없는 개》(료녕민족출판사, 1999년 3월 제1판),《즐거운 인생》(연중출판사, 1995년 4월 제1판),《웃는 얼굴》(연중출판사, 1995년 1월 제1판) 등 중단편소설집과 장편대하소설《쓴웃음》(상, 중, 하 3권, 료녕민족출판사, 2003년 12월 제1판 ), 장편소설《재해》(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7년 10월 제1판) 등 수백만자에 이르는 소설작품으로 우리의 조선족 소설문학의 번영을 위하여 한마지로를 세운 저명한 소설가이다.
박선석의 소설에 접근함에 있어서 많은 독자들이나 평론가들은 우선 박선석의 신분에 주의를 돌리면서 그를 농민작가라고 부른다.
이러한 개괄에는 합리한 리유가 있다.
우선 박선석은 진짜 60평생 농민의 신분을 벗어나지 못한 농부임에 틀림이 없다. 듣는 말에 의하면 지난 세기 90년대 중반인가 박선석이 매하구시 조선민족문화관에 초빙되여 일한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2년도 견지하지 못하고 그 일을 그만두었으며 더구나 그 일을 하는 사이에도 시종 농사를 그만둔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박선석을 진짜 농민으로서 농업로동에 종사하면서 글쓰기를 견지한 에누리 없이 농민작가라고 부를수 있는것이다.
다음 박선석의 소설작품의 제재는 거개가 농촌재재이며 창조한 인물도 거개가 농민이다.
《범과 사람》(1985년)이거나《령약비방》(1990년) 혹은《탄알값》(1984년),《간절한 소원》(1982년) 등 작품처럼 간혹 농민밖에 기타 인물형상이 창조되기도 하고 농업밖에 제재가 취급되기도 하지만 그것들마저도 거개가 농촌의 말단 간부나 직원들의 이야기이며 거개가 농민, 농촌, 농업과 련계되여있는 문제들이며 순수한 도시제재나 시민들의 이야기는 거의 없다. 특히 건국후로부터 문화대혁명이 결속되기까지의 농촌사회를 사실주의적적으로 재현한 두부의 장편소설《쓴웃음》과 《재해》는 우리 소설사에서 당당하게 자리매김을 할수 있는 력작이다.
그 다음 박선석의 소설은 농민들에게 많이 읽히고있다. 다시 말하면 박선석의 소설의 주요한 독자군은 농촌에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 필자는 구체적인 조사연구가 없지만 우연한 기회에 많은 《장백산》잡지의 농민구독자들에게서 박선석의 소설이 있기에 이 잡지를 사서 본다는 말을 여러번 들은적이 있다.
조선족문단을 두루 살펴보아도 시집을 출판한 농민시인은 몇분 있어도 장편소설을 창출한 작자중에 진짜 농민신분의 작가는 박선석 한분인줄 안다.
이러루한 점을 미루어보아 박선석을 농민작가라고 칭하는것은 충족한 리유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괄은 아주 피상적인바 박선석을 농민작가라고 하면서도 구경 농민의 함의, 농촌사회의 리면, 농촌문제의 심각성에 대하여 잘 모르면서 운운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또는 『작가』앞에 구지『농민』이라고 붙이는것은 박선석에 대한 존경인지? 아니면 좀 어떻게 내리보는것이 아닌지? 사람에 따라 틀리는것 같은데 박선석본인은 이런 칭호를 영광스럽게 생각하는지? 아니면 좀 거치장스럽게 생각하는지? 깊이 생각해볼 때가 되지 않았는가.
이런점을 감안하여 본 론고에서 필자는 농민작가 박선석의 소설에서 농촌사회학을 고찰하는것으로서 박선석의 소설에 대한 심층분석을 시도해본다.
1. 농민의 신분과 직업 그리고 박선석의 신분과 직업
아직까지도 기본상 농업국이라고 칭할수 있는 우리 나라에서 농민은 최대의 사회군체이며 농업, 농촌, 농민 을 통칭하는 이른바『3농문제』의 핵심은 농민이다.
그러면 농민이란 무엇인가? 생활중에서 아주 간단하고 쉬운것 같은 문제가 정작 해답하자면 쉽지 않을 때가 많은데 농민이란 무엇인가 하는 이 문제가 바로 이러한 문제에 속하는것 같다.
그러면 무엇을 농민이라고 하는가? 사실 지금까지 세계상에는 이 문제에 대한 통일적인 해답이 없다.
중국의 가장 권위있는 사전《現代漢語辭典》에서는 『농촌에서 농업로동에 종사하는 로동자』1)라고 정의를 내렸으며 중국의 다른 대사전《사해(辭海)》에서는《직접적으로 농업생산에 종사하는 로동자를 농민이라고 한다.…자본주의사회와 식민지 반식민지사회에서는 주요하게 빈농과 중농을 가리키고 사회주의사회에서는 집단농민을 가리킨다.》2) 라고 정의를 내렸다.
여기서 알수 있는바 중국에서도 오래동안 농민을 직업개념으로 리해하였던것이다.
이를테면 발달한 국가에서는 농민이란 완전히 직업개념이다. 거기서 농민은 농장을 경영하거나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어민이나 상인과 병렬되는 개념을 갖는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의 상황에 부합되는 정의가 아닌것 같다.
중국의 학계에서 연구나 사회생활의 담론중에서 농민은 한가지 직업에 끝이는것이 아니라 일종의 등급, 일종의 신분 혹은 준신분, 일종의 생존상태를 가리킨다. 한마디로 말하면 도시호구소지자(城市戶籍所持者)밖의 모든 사람, 1985년전에 국가식량을 배급받던 사람밖의 모든 사람을 대체적으로 농민이라고 부른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농민은 직업이 아니라 신분인것이다.
례를 들면 우리 나라에서 개혁개방이후 나타난 『농민로동자』,『농민기업가』,『농민과학가』,『향진기업』,『땅을 떠나도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등 현상은 『농민』이 직업을 개변하였어도 『신분』을 개변하지 못한다는 이 사실과 론리적인 련계가 있게 된다.
이것은 중국의 2원사회구조로부터 산생된 일계렬의 불평등제도로부터 파생된 사회현상으로서 그중 량식제도와 호구제도가 가장 관건적인 작용을 놀고있다.
시민들의 식량공급을 보장하기 위하여 국가에서는 1953년부터 량식의 통구통소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 정책은 1985년까지 계속되였다. 이에 따라서 중국에는 이른바『상품식량인구』와 『농촌식량인구』혹은 《농촌식량인구》와 《비농촌식량인구》가 엄격히 구분되였다.
국가에서는 또 1956년부터 여러 차례 결의를 짓고 강제성적인 조치를 대여 농민의 도시진출을 공제하였다. 이리하여 농업인구와 비농업인구의 획분과 그 전환에 대한 제한 즉 《농민을 비농민으로 전변시키는(農非轉)》공작은 중국호구제도의 핵심내용으로 되였으며 이로부터 인위적으로 중국공민을 도시주민과 농민 이 두가지 신분으로 나누게 되였다. 이것을 어떤 학자들은 『일국이책(一國兩策)』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호구제도는 농민과 시민지간에 한갈래의 깊은 신분구렁을 만들어놓게 되였다.
이렇게 되여 발달국가와 달리 중국에서는 국가의지에 의하여 『농민』이 직업개념으로만 되는것이 아니라 신분개념으로 되게 되였다.
소설가 박선석의 경우를 보아도 역시 우리는 직업과 신분의 모순에 부딪치게 됨을 회피할수 없게 된다.
박선석은 60여년의 일생에서 하루도 땅을 떠난적이 없는 농민이다. 즉 박선석은 일생동안 농촌호구소지자(農村戶籍所持者)였다. 바꾸어 말하면 박선석의 직업과 신분은 농민이다.
그런데 또 박선석은 100여편의 중단편소설과 2부의 220여만자의 장편소설을 창출해낸 작가, 우리의 민간언어로 표현하면 성과가 풍성한 농민과외작가이다. 이것은 박선석의 농민은 농민이되 보통농민이 아니라 작가라는 직업을 겸한 농민이라는 말이 된다. 이렇게 박선석은 부분적으로 직업을 바꾸었지만 역시 신분은 바꾸지 못했다.
우리가 여기서 농민의 직업과 신분을 담론하게 되고 박선석의 직업과 신분을 담론하게 되는것은 바로 중국에서 농촌호구소지자와 도시호구소지자 이 량자의 사이에는 정치, 경제, 문화상에서 사실적인 차별이 분명하게 존재하기때문이다.
이런 도시와 농촌의 차별 혹은 시민과 농민의 차별은 국가의 시민과 농민에 대한 2원적인 정책으로부터 산생된것이다.
그 2원적인 정책을 중국의 어느 사회학자는 농업과 비농업으로 나누는 호구제도, 농민식량과 비농민식량을 나누는 식량공급제도, 시민과 농민에 대한 부동한 부식품과 연료공급제도, 교육제도, 취업제도, 의료제도, 양로보험제도, 로동보험제도, 인재제도, 병역제도, 혼인제도, 생육제도 등 14종 제도로 개괄한바 있다.
이상 14종제도중에서 시민은 모두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고 농민은 모두 열세에 처하게 되였다. 3)
이제 우리가 박선석을 농민작가라고 칭할 때 그 함의가 무엇인가를 좀 알고 칭하여야 할것이다.
학력 9년의 초중졸업 문화수준의 순농민 박선석과 중단편소설 100여편 100여만자, 장편소설 2권 220여만자를 창출해낸 소설가 박선석 이 두 박선석의 초상은 너무도 현저한 격차로 우리를 놀래우지 않는가. 그는 한평생 열세에 처한 농민의 일원이였으며 인생의 후반부에 들어와서 저명한 작가로 성공하여 우리의 민족을 위하여 걸출한 공헌을 세운 작가로 변신하였어도 중국에서 특수한 함의가 있는 이 농민신분을 탈리하지 못하였다.
박선석의 이 직업과 신분의 격차 혹은 농민과 작가의 갈등이 얼마나 심각한것이였겠는가에 대하여서는 아마도 제3자로서는 영원히 리해하지 못할것이다. 이 과정에서 박선석은 얼마만한 노력을 하였겠으며 얼마나 많은 애로를 극복하였겠으며 또 얼마나 모진 정신적인 고민을 겪었겠는가.
게다가 박선석의 가정출신은 부농이라고 한다. 부농출신이라는 이 가정출신이 박선석의 성장발전에 어떤 장애작용을 놀았는가에 대하여서는 그의 중편소설《피와 운명》을 제대로 읽어본 독자들은 련상할수 있을것이다. 4)
이에 대하여 박선석의 처녀작의 발표로부터 지금까지 28년간 줄곧 박선석의 문학적성장과 성공을 지켜본 《장백산》잡지사의 남영전주필은 다음과 같이 피력한바 있다.
글을 특이하게 쓰는 박선석은 실은 불행아였다. 가정성분이 부농이란 딱지때문에 계급투쟁을 부르짓고 정치운동만 하던 그 시절 그는 어렸을 때부터 정신적타격을 받았다고 한다. 초중졸업, 학력이 겨우 9년밖에 안되는 그의 경우 그 어떤 가슴 아픈 사연들이 숨겨져있었다. 그래서 그는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로 되였을것이다.
고독을 달래려고 그는 늘쌍 고기낚으러 다녔고 수영을 하였으며 산에 올랐다. 속세를 떠난 자연과의 사귐은 그의 우울증을 덜어주었고 삶의 용기를 주었으며 정신을 맑게 하였다.
그러나 그가 풀지 못한것은 가슴속깊이 맺힌 한이엿다. 이 한을 풀려고 백성들의 속심말을 대변하려고 그가 선택한 길은 문학이였고 그가 걷는 길 또한 고리끼와 같은 고심한 자학의 길이였다.5)
남주필의 이러한 지론은 우리가 박선석의 소설을 심각히 연구하는데 가장 주요한 열쇠를 제공해주고있다. 그것은 즉 박선석이 소설가로 된 내적기인(內的起因)이 무엇인가를 직접적으로 해명한것으로 된다.
아무튼 인제는 박선석은 사실상에서 농민이 아니다. 소설가, 우리 조선족내부에서는 당당하게 『저명한』이란 규정어를 얹어 놓을수 있는 소설가이다. 사실상에서 우리 문단에서 생전인 어느 소설가를 비교해보아도 박선석은 당당한 자리매김을 할수 있는 작가인것이다.
사실 박선석의 명성은 이미 국내외에 알려지고있다. 필자는 정확하게 1998년 9월, 한국에 갔을 때 어느날 오후 한국의 20여개 잡지사의 주필 (혹은 부주필)들과 함께 북한산으로 등산하였는데 휴식시간에 당신들은 중국조선족의 작가들중에 누구를 알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소설가로는 박선석, 우광훈을 아는 사람이 제일 많았었다.
물론 이것은 정식 조사가 아니여서 아무런 문제도 설명할수 없지만 하여튼 박선석의 소설을 우리 소설의 우수작품으로 헤아릴수 있다는데는 이의가 없을줄 안다.
그렇다면 왜서 『작가 박선석』앞에 『농민』이란 두글자를 얹어놓아야 한단말인가?
이것을 사회학적으로 지적하면 사실상에서 아직까지도 농민을 직업으로만 보는것이 아니라신분으로, 등급으로 , 어떤 생활상태로 보는 습관의 류독이라고 말하지 않을수 없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지, 박선석본신이 어떻게 생각하겠는지 관계없이 필자는 지금부터 『작가 박선석』앞에 『농민』 두 글자를 생략하기로 함을 여기서 모름지기 선언하는바이다.
2. 농촌사회학의 시각으로부터 보는 박선석의 소설
필자는 이 문장의 집필을 위하여 박선석의 3책의 중단편집과 2부의 장편소설을 다시 통독하였다.
그 느낌을 이 편폭이 제한된 평론에서 다 쓴다는것은 무리이고 여기서는 가장 돌출한 느낌 몇가지를 정리해보려 한다.
첫번째 생각이 앞절에서 운운한 그것 즉 『작가 박선석』앞에 『농민』이란 두 글자를 지워버려야 한다는 생각이다.
앞절에서 많이 언급했기에 여기서 반복하지 않고 단 한가지만 더 보충한다면 박선석의 문학수준과 더불어 중화인민공화국사 특히 농촌변천사와 농촌사회학에 대한 인식과 지식이 아주 심각하고도 투철하다는것을 힘주어내세우고싶다. 보통농민이라면 감성적인 체험은 있을수 있지만 박선석처럼 그러한 지식은 있을수 없다. 수십년간 열심히 공부한 결과물이지 결코 하루 아침에 깨우친것이 아니다. 이러한 지식이 있는 작가이기에 우리는 《재해》나 《쓴웃음》같은 장편소설의 창출을 기대할수 있었을것이다. 사실 박선석의 중화인민공화국사 특히 농촌변천사와 농촌사회학에 대한 지식은 력사학계의 누구를 내놓아도 결코 짝지지 않을 그런 높이에 이르렀음을 감지하면서 필자는 이러한 작가에게 농민이란 규정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것을 더욱 심각하게 느꼈던것이다.
다음 박선석의 수백만자에 달하는 소설에 취급된 시대는 건국후로부터 개혁개방, 시장경제체제가 건립되는 지난세기 말까지 반세기 되는 시간을 다 포괄하고 있으며 재현한 내용은 토지개혁으로부터 농촌의 사회주의개조, 인민공사화와 사회주의교육 그리고 문화대혁명, 개혁개방과 사회주의시장경제체제의 건립까지 조선족농민들이 겪은 영광과 고난의 력사가 다 포괄되여있으며 창조된 인물은 한번 읽으면 잊어지지 않는 인물만 백여명이나 되고 묘술된 에피소트가 수백컬레나 된다.
이러한 방대한 규모의 작품중에서 필자에게 제일 인상이 깊은 인물은 누구이고 사건은 무엇인가?
△ 단편소설《시대가 낳은 불행아》(1986년)의 정철.
《시대가 낳은 불행아》의 정철이는 대단한 재간도 있고 남다른 패기도 있는 청년이였는데 조국의 부름을 받고 항미원조전투에 나가 대공 1차를 세우고 소공 3차를 세운 전투영웅이지만 포로로 되는 불행아였고 팔 하나에다 남자의 보귀한 그것마저 잃었던것이다. 전쟁이 끝나 고향에 돌아온 그는 사랑하는 안해의 전도를 위하여 억지로 리혼시키고 홀로 살아가는데다가 포로였다는 리유로 계속 정치적으로 괄세를 받으며 살다가 마침내 문화대혁명중에서 반란파들에게 맞아 한쪽다리까지 잃게 되며 한쪽 팔과 한쪽 다리로 살아가는 비참한 운명에 빠지게 된다.
정철의 청년시대의 건실한 삶과 전쟁후의 비참한 인생은 결코 그 개인의 운명이 아니다.
그의 인생비극의 주요 원흉은 전쟁이다. 작가의 동기도 주로는 전쟁의 비인도성을 고발하려는것이라고 할수 잇다. 그러나 필자는 중국농민의 력사적운명과 련계시켜보면서 보다 깊이 생각할 문제에 접근하게 되였는데 그것은 즉 중국농민의 혁명에 대한 공헌과 혁명승리후의 생존의 격차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철의 전쟁전후의 토막난 인생은 모종의 상징성마저 있다고 평가할수 있다.
농민에 대한 당과 국가의 좌적인 정책이 혁명시기에는 농민을 혁명의 주체로 보았으나 혁명이 승리한 뒤에는 개조대상으로 본 결과물이 바로 이소설《시대가 낳은 불행아》의 정철과 이제 아래에서 분석할 《재해》의 김덕순과 같은 인물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중국농민이 겪은 이러한 비참한 삶을 전혀 없었고 건국후 중국농민의 삶은 내내 행복하기만 했다고 주장할 사람은 인제는 없다. 그러나 중국농민의 운명이 어떻게 되여 이렇게 되였는가에 대하여 명확히 아는 사람은 아직도 많지 못하다.
사실 좀더 깊이 분석해보면 이러한 비극은 최고결책층의 중국농민에 대한 인식의 오류에서 생긴것이라고 말할수밖에 없다.
여기에 모택동의 중국농민에 대한 인식을 개괄한 한단락의 문자가 있다.
농민에 대한 모택동의 인식도 하나의 과정이 있었다.
대혁명시기 모택동은 농민의 혁명성을 발견하였다. 그는 향촌에서 줄곧 악전고투하는 주요력량은 빈농이다…이 빈농은 향촌인구의 70%를 차지한다, 그들은 농촌의 무산계급과 반(半)무산계급으로서 혁명의 주체력량이다. 토지혁명시기 모택동은 중국혁명은 실질상에서 농민혁명이며 중국혁명의 근본문제는 농민문제다. 누가 농민을 쟁취하면 누가 혁명의 승리를 쟁취할것이다라고 인정하였다. 그는 아울러 농민의 고유한 락후성(례를 들면 자사자리와 우매보수)과 농촌생활의 변두리성을 지적하면서 농민혁명중에서 반듯이 무산계급의 정치적지도를 견지하여야 하며 농민에 대하여 무산계급사상교육을 견지하여야 한다고 인정하였다.
신민주주의혁명을 완성하고 사회주의혁명으로 과도하는 시기에 와서 모택동은 농민은 인제 혁명의 주체가 아니고 의거할 력량이 아니라고 인정하였다. 그뿐만아니라 농민이 의존하는 경제가 락후하기에 이러한 경제를 개조함과 아울러 농민도 마땅히 교육을 접수하여야 한다고 인정하였으며 엄중한 문제는 농민을 교육하는것이다라고 하면서 농민을 맑스주의 교육대상으로 삼았다.6)
모택동은 레닌의 농민의 이중성에 대한 리론을 중국의 구체정황에 결합시켜 중국농민에 대하여 력사적이고 심각한 분석을 진행하여 중국의 혁명중에서 특수한 농민문제를 창조성적으로 해결하였지만 또 농민은 소생산자이며 아울러 로동자라는것을 근본상에서 부정하고 농민은 우리 나라 사회주의건설의 주력군이라는것을 부인하고 농민에 대한 극좌적인 로선과 조치를 실시하였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 로선과 시책이 건국후 50년대로부터 개혁개방이전까지 여러번 좌절당하고 실패한 주요한 원인이다.
정철의 비참한 운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 장편소설《재해》의 리석태.
리석태는 장편소설《재해》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창조된 인물형상일뿐만아니라 박선석의 전반 소설문학에서 창조된 일계렬의 농민형상중에서 가장 훌륭하게 창조된 인물형상으로 평가할수 있다.
리석태는 려명벌에서 한다고 하는 감농군으로서 토지개혁후 근로치부한 모범농민이다.
《재해》의 〈제1장 땅〉에서 리석태가 농업합작화의 관건적인 한단계인 고급생산합작사건립의 대고조속에서 토지개혁후 8년간 아껴 먹고 아껴 쓰면서 모은 돈 3000원으로 금방 산 논을 포함한 땅을 고급사에 바치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중점으로 묘사하였다.
그후 고급합작화의 생산과 생활 중에서도 리석태는 감농군의 재간과 열정을 다하여 집체를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였지만 좌적인 방침과 기층간부들의 맹동에 의하여 계속 당하기만 하는 불행아로 부각되였으며 특히 1957년의 반우파투쟁중에서는 어느 상급간부의 뜻을 거슬러 민족련합사를 반대한것이 죄장이 되여 농민우파로 되여 정치적으로 박해를 받는다.
여기서 우리가 심사숙고해야 할것은 리석태는 진짜 중국농민의 한부류의 전형이라는것이다.
생각할수록 억울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가슴이 터져온다. 8년간 땅값을 버느라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였던가? 온집식구가 일년사시절 밤낮이 따로 없이 땀 흘리며 숨이 가쁘도록 일했다 . 일밖에 모르고 살았다. 그 돈을 모으느라고 먹는것도 아까와 입쌀을 팔아 눅은 강낭쌀을 사먹었다. 해마다 되지를 서너마리씩 길렀지만 한마리도 잡아먹지 않고 팔았고 지어는 한알에 3전씩 하는 닭알도 먹지 않고 팔아서 잎돈을 모았다. 온집식구가 초신을 삼아 신었고 단추도 헌 고무신바닥이나 깨진 물바가지로 만들어 달아 입었으며 석냥값을 절약하느라 부시돌을 써왔다. 안해는 언제나 몽당치마를 입었고 자기와 아들은 기운 배적삼을 입었으며 다 자란 딸애는 변변한 속옷 한가지 입어보지 못했다.
이것은 리석태가 그 3000원돈을 날려보내고 혼자 하는 생각이다.
그 먼저 땅을 살 궁리를 할 때 딸이 아버지 머리속의 미국사상을 가셔야 한다고 할 때 석태의 대답은 어떠하였던가.
공산당이 땅까지 주면서 잘살라고 해서 잘살려고 그러는데 그게 미국놈사상이냐? 일하기 싫어 농사 망치고 공산당이 준 땅을 팔아 도박하다가 또 거러지가 된 심해만이를 따라 배우란 말이야?
보라 , 토지개혁후 리석태와 같이 부지런한 농민들의 근로치부의 꿈은 얼마나 컸으며 또 공산당에 대한 기대도 얼마나 컸던것인가.
그러나 공산당의 좌적인 농업시책은 이러한 순진한 농민들의 부풀어오르는 꿈을 여지없이 유린하였던것이다.
건국후 중국의 토지개혁은 농민으로 하여금 진정으로 토지의 주인이 되게 하였으며 농민과 토지의 직접적인 결합을 실현할수 있었다.
이때의 중국농민은 진정으로 토지를 얻었을뿐만아니라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그뒤에 실시한 호조조형식도 농민의 자주독립과 인신자유가 기본상 보장되였었다.
초급사계단까지도 농민들에게 입사퇴사의 자유가 있었으며 토지 등 생산자료는 주식을 나누는 등 형식을 취하엿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중국농민은 독립인격이 있고 자유로웠다.
그러나 1955년 후반년부터 전국적으로 일어난 한차례의 농업합작화고조는 실제상에서 정부가 채취한 강제성적인 제도변천, 농민에 대한 박탈을 채취한 정책이라고 해야 할것인바 소유의 농민들이 모두 입사하여야 하였으며 그렇지 않으면 자본주의도로로 가는것으로 인정되였다. 많은 지방에서 하루밤사이에 농민에게 속하는 토지, 가축, 대형생산자료가 무상으로 집단의것으로 되였으며 원래 개체적이고 자주독립적이던 농민들은 고급사의 사원으로 되여 일을 하는 등 일체권리가 순간에 없어져 농민의 적극성을 최대한으로 좌절시켰다.
1958년에 시작된 농촌인민공사제도는 개혁개방의 초기까지 연장되였는데 인민공사제도와 도시와 농촌에 대한 2원적인 호구정책으로써 농민을 꽁꽁 묶어놓았으며 그들로 하여금 아무런 선택의 자유도 없게 하였으며 같은 일, 같은 로동보수, 같은 수준의 생활을 하게 하였다. 정부는 공사, 대대, 생산대, 생산소조를 통하여 층층이 엄밀히 공제하여 농민을 모조리 국가가 공제하는 궤도에 몰아넣고 토지에 견고히 매여놓고 그들로 하여금 모든 개인자유를 상실하게 하였고 인신자유를 포함한 최저의 인격존엄마저 상실하게 하였다.7)
사실 그때 8억 중국농민의 신분은 곧『사원』하나로 통일되였다. 이 사원들은 명예상에서 집체토지의 주인이였으나 실제상에서 생산, 경영, 분배에서 아무런 권리도 없었으며 사실상에서 사원들은 로동권리마저 없는것과 마찬가지였다.『언제 일하러 나가고 언제 일을 끝마치고 언제 휴식하는가 하는것도 모두 생산대장이 정하고 사원들의 의무는 한가지 복종하는것밖에 없었다.』8) 뿐만아니라 시장에 가고 친척방문하는것도 모두 대장의 비준을 맡아야 하고 자유롭게 농촌을 떠나 도시로 들어가는것은 천방야담이였다. 이런 체제에서 농민들은 『큰가마밥을 먹었으며』『잘하나 못하나 마찬가지고 하나 하지 않으나 같은』삶을 누리게 되였다.
박선석이 창조한 리석태 이 인물의 실망과 좌절과 억울함은 바로 중국농민이 근 30년 겪은 실망과 좌절과 억울함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하다.
△ 장편소설《재해》의 김덕순.
다음《재해》의 김덕순이를 보자. 그는 항미원조전쟁의 세례를 겪은 인간성이 있으며 원칙성이 강한 중공당원이다. 그러나 그는 농촌의 고급사건립과 인민공사화 그리고 대약진 운동중에서 줄곧 불공정한 대우를 받으며 마침내 1960년대 중국농촌을 휩쓴 대기아속에서 폐결핵으로 3년 앓는 안해를 약 한첩도 써주지 못하고 마지막 밥 한끼도 제대로 멕이지 못한채로 잃고 말며 그에 앞서 대약진 공사장에서 사고로 맏아들 경국이를 잃고 만다.
이 인물의 운명도 상징적의의가 있다. 그가 혁명에 대한 공헌과 인생의 후반생에 겪게 되는 비참한 경우는 우리가 앞에서 분석한 《시대가 낳은 불행아》의 정철이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청춘을 혁명에 공헌한 공로자이지만 사회주의건설중에서는 비참한 삶을 영위해나가는 시대의 희생자이다.
그런데 김덕순의 인물형상에는 또 다른 하나의 문제를 더 체현되고있는데 그것은 즉 1958년후 중국농촌을 휩쓴 대기아이다.
《재해》 〈제12장 기아〉에서 작자는 전문 기아문제를 취급하고있다.
김덕순의 안해의 죽음은 가장 대표적이고 또 가장 비참한 죽음이다. 3년간 폐병을 앓고있는 안해에게 김덕순은 약 한첩도 써주지 못했다. 그런데 또 상상할수 없는 기아가 들이닥쳤다.
병마에 시달리는 그의 안해는 허기증에 허덕이면서 온종일 헛소리만 한다.여보, 세상이 좋아지면…내…제사때…제사밥을…무드기…많이 담아달라요이것이 김덕순의 안해의 유언이다. 이 말을 들은 김덕순은 벌떡 일어나 쌀을 얻으러 집체식당에 갔으나 헛물을 켜고 그 소문을 들은 김준환이 김석태네 집에 가서 얻어온 한사발의 돌피쌀을 얻어 안해에게 밥이라고 해서 준다 .안해는 그 밥을 달갑게 먹고 야, 잘 먹었다.한마디 던지고 눈을 감는다. 그날 저녁에 마을의 정로인도 굶어서 세상을 뜨고 . 그 먼저 수리공지에서 김덕순의 아들 경국이도 결국 며칠이고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에서 맥이 진하여 터지는 남포의 발파구역을 제대로 벗어나지 못했기에 죽은것이다.
어째서 이러한 기아가 오게 되였는가? 자연재해인가? 인재인가?
이 문제에 대하여 소설은 림종에 처한 안해를 위하여 집체식당에 쌀을 얻으러 갔다가 허탕을 치고 악에 바쳐 내뱉는 몇마디 말로 해답하고있다.
최대장, 우리가 일을 적게 했나? 당의 말을 안 들었나? 우리가 잘못한게 뭔가? 그런데…그런데 저 멀건 강낭가루죽밖에 남은게 뭔가?
나나…여러분이나…3년만에 공산주의를 건설한다고 …그…그날을 위해 별의별 고생을 다했수다…
이게…그래 우리가 그렇게 바라던 공산주의요?
뭐? 자연재해? 입은 가로 째졌어도 말은 바로 하라구. 물없이 논을 풀고 쇠물을 녹인다구 인력과 물력을 랑비하구 무당 20만근을 낸다구 논에 남포질을 해서 소를 빠뜨려죽이구 밀식을 하구 비료를 쏟아부어 벼를 푹 썩이구…그래 이게 자연재해인가? 응? 자연재해야?
김덕순의 이 몇마디 말은 대기아의 직접적 원인을 고도로 개괄하였다. 50년대 중기로부터 실시된 좌적인 로선과 시책이 나중에 1960년대초의 대기아를 가져왔던것이다.
그러나 박선석의 사색은 결코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작자는 마을에 사람들이 굶어죽어가는 현실을 쓰기전에 슬그머니 1960년 7월에 열린 중공중앙 북대하회의에서《전당이 동원되여 대대적으로 농업을 꾸리고 대대적으로 량식을 주릴데 관한 지시》9)를 제정한 사실을 제기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 회의에서는 도시와 농촌의 식량표준을 낮출데 관한 지시를 내린것이다. 이 회의에서는 농촌의 식량표준을 반드시 낮추어야 한다고 지시했는바 회하이남으로부터 주강류역까지 인평균 원량 360근으로 하고 회하이북 인평균 원량 300근 좌우로 하고 동북은 좀 높일수 있고 각성의 중재구에서는 마땅히 인평균 300근 이하로 하여야 한다고 지시했다. 이와 동시에 도시에서는 매월 식량표준을 2근씩 줄인다고 지시했다.10)
그리고 그해 8월에 도시의 식량공급을 보장하기 위하여 중공중앙에서는 대중도시에서 경상적으로 3개월의 식량주전을 위한 재고량식을 준비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11)
이렇게 하였기에 도시에서는 식량공급이 보장되였을 뿐만아니라 농촌보다 그 표준이 훨씬 더 높았다.
1961년 사실상에서 전국적인 기아가 점점 더 엄중해지는 상황에서도 국가에서는 여전히량식산량지의 결량대대에에 대하여 국가에서는 일반적으로 식량을 더 공급하지 않는다. 대대와 대대사이, 공사와 공사사이에 남는것과 모자라는것을 조절하여 해결할것12)을 요구하였다.
알수 있는바 1960년대초의 대기아는 도시에서 보다 농촌에서 더욱 심각하였던 사실상에서 농촌의 대기아였으며 제도성적인 문제였다는것을 알수 있으며 이 대기아가 생성된 주요원인은 도시와 농촌에 대한 정책의 차이에서 왔다는것을 알수 있다.
김덕순이 이번 기아는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였다는 말을 우리는 이러한 시각에서 그 함의를 파악하여야 할것이다.
△ 《재해》의 최만근과 《쓴웃음》의 정인철, 송길동.
이 셋은 특별히 연구할 가치가 있는 인물형상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2중신분의 사람들로서 사원은 사원이되 관리층에 들어간 사람들인데 여전히 농민 즉 국가의 로임을 받지 못하고 국가의 량식을 먹지 못하는 농촌호구소지자들이다.
인민공사의 시대에 인민공사의 내부에는 비교적 공고한 두개의 사회계층이 있엇는데 그것은 사원계층과 관리자계층이였다. 최만근과 정인철 , 송길동 이들은 토지개혁과 합작화운동중에서 적극분자들인데 대개 20여년간 농촌을 관리하였다. 이들은 상급지도자들과 접촉이 많았고 사원들보다 외계의 정보를 많이 알고있엇으며 사원들중에서 상급의 지시를 집행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였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본지농촌의 실정을 익숙히 장악하고있었고 다년래의 단련을 거쳐 계획경제의 체제하에서 농촌을 관리하는 능력을 키웠다. 따라서 그들은 상응한 권리와 리익을 획득하였다.
대체로 이렇게 말할수 있지만 역시 사람에 따라서 그 출발점이 다르고 수준이 다르고 성과가 다르고 나아가서 끝장도 달랐다.
최만근이는 호조조시기부터 초급합작사시기, 고급합작사시기, 인민공사시기의 전(前)단계 즉 1960년대초의 3년 간고한 시기까지 관리층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야심은 있으나 능력은 모자라고 독립사고력이 없으며 상급의 지시라면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집행하는 부류에 속하는 사람으로 결국 사원들의 신임을 받지 못해 관리계층에서 나떨어진다.
정인철은 혁명전쟁의 시련을 겪은 당원으로서 일심정력으로 인민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으로서 집체와 사원들을 위하여 좋은 일을 많이 하였으나 사회주의교육운동과 무산계급문화대혁명중에서 투쟁을 맞고 관리층에서 쫒겨나고만다. 그러다가 《4인방》이 타도되고 새로운 력사시기를 맞이한후에 다시 생산대 대장으로 선거된다.
송길동은 사회주의교육운동과 문화대혁명중에서 아첨과 사기와 기편과 공갈 등 온갖 수단을 다하여 관리층에 올라간 사람으로서 문화대혁중에서 력사를 속이고 가짜애비를 모시고 생사람을 잡고 녀인을 통간하고 살인을 하는 등 온갖 나쁜짓이란 나쁜 짓을 다하다가 결국 한 녀자를 놓고 벌이는 개싸움에서 맞아죽는다.
《쓴웃음》에는 야심, 아첨, 사기, 녀색, 살인에서 송길동보다 짝지지 않는 방춘달이란 대장이 있는데 그는 정인철과 대조되게 《4인방》이 타도되고 새로운 력사시기를 맞이한후에 대장에서 락선되고 그의 무거운 인생은 결국 자살로 결속된다.
△ 《재해》와《쓴웃음》의 김룡철 그리고 광범한 사원들.
박선석의 소설중에는 유일하게 두권의 장편소설에 련속 등장하는 인물이 있는데 그가 바로 김룡철이다. 이로보아 김룡철 이 인물은 작가가 아주 사랑하는 인물임을 알수 있다.
기룡철은 바로 진정한 사원이다. 한번도 관리층에 올라간적이 넚는 순수한 농민이다.
그는 농사일을 잘 할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일에 재간이 많으며 남다를 생존지혜가 있으며 중국농민들에게 다 있는 그러한 결함도 있고 나쁜 버릇도 있지만 또 언제나 솔직하며 특히 불의에 맞서고 권세에 아부하지 않는 우점이 있으며 락관적이고 림기웅변의 순발력이 강하고 유모어와 해학이 있는 농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사원들의 편에서 말을 하고 행동하기에 사원들의 옹호를 받으나 최만근이나 송길동과 같은 관리층에 있는 사람들과 적극분자들의 미움을 받는다.
이밖의 많은 남녀로소 사원들은 그 기질이나 재간에서는 김룡철과 차이가 있지만 운명은 마찬가지다.
3. 농촌을 보고 농민을 쓰는 박선석의 한계.
박선석의 장편소설 《쓴웃음》은 우리의 소설사에서 기념비적대작이라고 평가하는데는 충분한 리유가 있다.13) 사실 이 소설뿐만 아니라 장편소설《재해》와 더불어 그의 수많은 성과작들은 우리의 문학사에서 뚜렸한 자리매김을 할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장편소설을 비롯한 박선석의 소설의 한계도 명석하게 인식하여야 한다.
이것은 쟁론할 나위가 없는 결론일것이다.
이러한 한계는 주로 농민을 보는 박선석의 한계에서 온다.
여기서 특히 농촌사회학의 시각으로 보여지는것만 제기한다면 첫째로는 농민의 2중성에 대한 리해가 깊지 못하기에 그려진 인물들의 성격의 내적갈등이 구체적이 되지 못하고 많은 인물들의 형상이 아주 단순하다. 이러한 한계는 작품의 구조작업에서도 분명히 나타나는데 그것은 즉 구조상에서 2극대립의 모식에서 해탈하지 못한것이다. 여기서 특히 농민들과 밀접히 련계되는 당과 정부의 간부들의 형상창조가 너무 단순하게 되고 개혁개방후 농민들의 삶을 조명하는 작품에서도 여전히 2극대립의 모식에서 해탈되지 못하한것을 지적하게 된다. 이것은 박선석의 작품이 문화대혁명후에 태여난 세대들과 일부 청년독자들에게서 환심을 사지 못하는 주요한 원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개혁개방후 중국농민의 처지에는 실질적인 변화가 생기였고 농민개인들은 자유를 획득하였고 자주성이 체현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는 신분형농민으로부터 직업형농민으로의 전변이 가속화되고있다. 이러한 시대적변화가 박선석의 소설에 아직 더 심각하게 재현되지 못하고있다는것을 지적하게 된다.
이러한 한계에다가 박선석의 소설미학이 전통적인 사실주의에서 초탈하려는 탈경전적인 움직임이 크게 보이지 않기에 일부 지성인들속에서도 박선석의 소설을 높이 사려고 하지 않는 경행이 생기는것 같다.
현대적인 소설미학에 근거하면 소설발전사는 이야기단계와 인물형상창조단계를 거쳐 인제는 소설에 감정과 정서를 담는 단계에 들어섰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나 견해는 일가지언이지만 확실히 박선석의 소설에서 이야기와 인물형상창조는 성공적으로 진행되고있지만 아직 소설에 서정성이 모자란다는것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다.
이러한 문제들은 한마디로 해결할수 없지만 인물들의 처한 환경(자연환경과 인문환경)에 대한 묘사를 보다 더 감각적으로 재현하고 인물들의 복잡하고 2중적인 내적우주의 구석구석을 예술적으로 재현하는 노력이 기대된다.
이런 노력의 관건은 박선석이 농민을 보다 높이 서서 멀리 내다보는 시각을 해결하는데 있다.
즉 농민의 립장에서만 세상을 바라볼것이 아니라 작가적립장에서 지성인의 립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진정으로 이러한 눈을 키워내는 날에는 또 진정으로 작가 박선석앞에 붙이던 『농민』이란 두 글자를 삭제할수 있을것이다.
2008년 10월 8일.
<<연변문학>> 2008년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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