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혁
동주를 위한 3개의 공책(空册)
공책 하나―소울메이트
친구가 차를 뽑았다. 차 이름은 ‘소울’이였다. 가격이 너무 착해서, 차를 너무 갖고 싶던 차 이곳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는 형의 차를 샀다고 했다. 그리고 중고차라 혀아래소리로 굳이 밝히며 어딘가 자존심의 어깨가 처져있는 친구를 위로할 겸 나는 우스개로 한마디 했다.
“중고가 좋아, 친숙해, 우리 사이도 이젠 중고가 됐잖아.”
즐겁게 웃고 나서 나는 차 이름 ‘소울’ 대신 다른 ‘소울’을 생각하고 있었다.
소울메이트는 령혼(Soul)과 동료(Mate)의 합성어로 서로 뜻이 잘 맞는 사이를 지칭한다. 문학, 예술, 스포츠, 비즈니스 등 분야에서 큰 성공을 한 사람에게는 흔히 도타운 소울메이트의 존재가 있다.
그 일례로, 독일 고전주의 문학의 대가 괴테와 실러를 들 수 있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깊은 리해를 바탕으로 한 자극과 격려를 통해 독일 고전주의 문학을 완성해나갔다.
두 예술가의 우정은 베토벤과도 이어졌다. 두 문호를 존경했고, 이들의 작품에 큰 령감을 받은 베토벤은 두 사람의 작품에 곡을 붙였다. 소울메이트들끼리 단순한 우정을 넘어 예술사에 한획을 긋는 일을 유발시킨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와 동생 테오는 또 한쌍의 유명한 소울메이트이다.
동생 테오는 괴퍅한 성격을 가진 형의 재능을 알았고 힘 들게 번 돈으로 형을 위해 생계비를 대며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고흐가 자살한 뒤, 애달픈 나머지 테오는 여섯달 만에 형의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지금 형제의 묘는 함께 나란히 놓여있다.
겨레가 애대하는 민족시인 윤동주에게도 생사를 함께 한 소울메이트가 있었다. 바로 송몽규이다.
둘이는 1917년 파평 윤씨네 가문에서 석달을 차이 두고 태여났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동갑내기 고종사촌형이 된다. 명동학교도, 룡정의 은진중학교에 함께 다녔다.
송몽규가 열여덟 어린 나이에 서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꽁트 〈숟가락〉이 당선되자 이는 윤동주에게 큰 자극이 되여 자신의 작품에 날자를 표기하기 시작했다.
둘은 또 경성의 연희전문에 나란히 합격했고 학교에서 함께 문학동아리들의 잡지 《문우》를 펴냈다.
당시 《문우》에 실었던 윤동주의 시 〈새로운 길〉이 그의 룡정 자택 장례식에서 랑송되였다.
두 사람은 또 일본류학을 함께 떠났다가 반일운동의 죄목으로 일제경찰의 마수에 떨어져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였다. 일제의 잔인한 생체실험으로 의문의 주사를 맞고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절명했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송몽규는 그 며칠 뒤인 3월 7일 윤동주를 따라갔다.
후쿠오카 화장장에서 재로 변한 윤동주의 시신은 고향 룡정으로 돌아와 룡정 동산의 교회묘지에 묻혔다. 가족에서는 “‘시인 윤동주’지묘”라 비석을 새겼다.
송몽규의 시신도 명동의 장재촌 뒤산에 묻혔고 “‘청년문사(文士) 송몽규’지묘”라는 비석을 세웠다.
1990년 4월 그들을 기리는 이들에 의해 송몽규의 묘는 룡정 동산 윤동주의 묘소 곁으로 이전했다. 불과 몇메터 가까이 손잡힐 듯한 곳에 둘이는 묻혔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삶과 죽음을 온전히 함께 한 벗이였다.
오늘날 윤동주는 겨레 시인으로 높이 추앙되였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오래전에 등단한 문사이자, 철저한 반일지사인 송몽규에 대해 아는 이는 적다. 그러나 차라리 숙명의 동반자였던 윤동주가 옆에 있어 그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은 삶과 죽음을 온전하게 나눈 진정한 소울메이트였으니깐.
공책 둘―간(肝)의 노래
남자들끼리 앉으면 간에 대한 화제가 많이 떠오른다.
세계적으로 남성들이 녀성들보다 간암발병 위험이 7배나 높다고 하니 잦은 음주로 인한 간질병에 대한 걱정으로 남성들 화제의 일순위에 오르는 때가 많은 것이다.
인체에서 가장 큰 장기인 간은 복부의 오른쪽 웃쪽에 위치하는 내장기관으로 입을 통해 섭취돼 위장관에서 소화, 흡수되는 대부분의 물질들을 걸러낸다. 갑옷 떨쳐입고 칼과 창을 비껴들고 성문이나 궁문을 지키던 옛날의 무관들처럼 우리 몸의 ‘수문장’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영양분의 대사와 저장, 단백질과 지질의 합성, 면역 조절 등 정상적인 신체기능 유지에 필수적인 생화학적 대사 기능을 대부분 담당하고 있다.
우리 몸에 필요한 물질을 만들고 저장하며 인체의 해로운 물질을 해독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고마운 장기이다.
여기 간에 대해 읊은 시인이 있다. 윤동주, 그의 대표작의 하나로 되는 시가 바로 〈간〉이다.
바다가 해빛 바른 바위 우에 /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 코카서스 산중(山中)에서 도망해온 토끼처럼 /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 내가 오래 기르는 여윈 독수리야! / 와서 뜯어먹어라, 시름없이 / 너는 살찌고 / 나는 여위여야지 / 그러나 거북이야 / 다시는 룡궁(龙宮)의 유혹에 안 떨어진다. // 프로메테우스 불쌍한 프로메테우스 / 불 도적한 죄로 목에 매돌을 달고 / 끝없이 침전(沈澱)하는 프로메테우스…
경성의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시기에 쓴 작품으로 알려진 이 시는 두개의 이질적인 설화를 결합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시는 거북이의 꾀임에 빠져 간(肝)을 잃을 번했던 토끼가 기지를 발휘하여 목숨을 건졌다는 우리 민족의 ‘구토지설(龟兔之说)’과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어 신의 저주를 받고 매일 재생되는 간을 독수리로부터 쪼아먹히는 형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의 희랍신화를 적절히 변용하면서 작품 속에 투영시키고 있다.
윤동주는 궁지에 몰려서도 슬기롭게 자기의 ‘간’을 지킨 토끼와 죄 아닌 죄를 짓고서 속죄양이 될 수 밖에 없었던 프로메테우스의 처지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우의적(寓意的)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한국 연세대학교 설성경교수가 윤동주의 시 〈간〉에 대해 저항시라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구운몽》을 새롭게 해석하는 등 한국 고전소설의 난제를 해결해온 전문가인 설교수는 《윤동주의 〈간(肝)〉에 형상화된 ‘프로메테우스 연구’》를 출간하면서 이 같은 주장을 펼쳤다. 그는 “윤동주의 〈간〉이 저항시임을 외면한 채 그간의 연구자들은 시인이 희생적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오판했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시 〈간〉은 윤동주시인이 프로메테우스에 자신을 빗대여 식민지 시절 손상을 입은 량심의 회복 의지를 노래한 것으로 해석돼왔다. 하지만 설교수는 “오히려 〈간〉은 일제시대의 가장 저항적인 시이자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심판시”라는 새로운 해석을 가한다.
설교수에 따르면 그동안 학계는 〈간〉의 핵심 시어인 ‘프로메테우스’를 희랍신화의 영웅의 오기로 간주해왔고 이를 토대로 마광수 등 기존 학자들은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를 시적 자아인 윤동주의 상징으로 봤다. 순수성(불)을 상실(도적)한 시인 자신에 대한 비탄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설교수는 “프로메테우스의 의도적 변형을 통해 윤동주가 ‘가짜 영웅’일제의 패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시인은 나라(불)를 빼앗고 착취(도적)한 일제에게 “목에 매돌을 달고 끝없이 침전하는”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설교수는 “이 표현은 기독교에서 지옥과 사탄을 이야기할 때 사용했다”며 “시의 바탕에 기독교주의적인 민족주의가 깔려있다”고 설명했다.
설교수는 특히 윤동주의 시가 다른 저항시보다 한수 우의 경지라고 설명했다. 그는 “리륙사, 한용운 등의 시에 등장한 저항은 아래에서 우로의 저항이고 세계문학의 모든 저항시들이 택하는 방식도 이와 비슷하다”며 “하지만 이 시는 력사의 이름을 빌려 가짜 영웅을 내치는 심판시이자 동서양 신화의 접목이라는 측면에서도 탁월한 시”라고 평가했다.
윤동주의 시가 추구한 핵심적 문제는 현실적 존재의 슬픔이 어디로부터 나온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자문의 련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의해 우리의 말과 글과 얼이 사라져가는데 대해 내장이 상할 만큼 맹독(猛毒)의 아픔을 느끼며 몸부림을 거듭했다. 그의 시편들은 비록 조용하고 어딘가 소극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부끄러운 자아의 응시로부터 력사와 민족의 현실에 대한 고뇌와 성찰을 그 기저에 깊이 깔고 있다. 때문에 그에 대해 ‘저항시인’이라는 평가를 가능하게 해준다. 시 〈간〉에 대한 새로운 해제 또한 이를 뒤받침해주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속출하고 있는 민족 공동체의 아픔과 그 위기에도 무관심으로 일관한 채 신상의 작은 질병에 대한 걱정에나 전전긍긍하며 무사안일의 나날에 버릇된 현대인들에게 윤동주의 시 〈간〉을 한번 읊어보라 권장하고 싶다.
공책 셋―‘별’을 쏘다
모 잡지에 〈소설가 김혁의 인물시리즈〉라는 인물칼럼을 련작한 적 있다. 2년 반 되게 련재한 칼럼은 조선족 수십명 인걸들의 생애를 사전형식으로 가나다라 순으로 짧고 명료하게 다루고 있는 소전기물이다. 민족을 위해 커다란 족적을 남긴 기라성 같은 별들을 헤아리는 작업에 기꺼이 투신하면서 아낌없이 산화해간 별들을 두고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한면 그 가운데 이름은 화려해도 아무런 빛도 내지 않은 암흑성(暗黑星)도 끼여있어 선정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룡정의 명인들을 정리하면서 그러한 어려움은 곱배로 밀려왔다.
룡정에서 윤동주의 시대에 함께 족적을 남긴 저 유명한 동요〈반달〉의 작곡자 윤극영, 녀류시인 모윤숙 모두가 친일의 혐의에서 여유롭지 못했기 때문이였다.
윤극영은 1926년경 피아니스트 오인경과의 애정행각으로 서울에서 룡정으로 도피를 했다.
윤동주와 문익환이 다녔던 광명중학교 등 학교들에서 음악교원으로 교편생활을 했다. 이후 1940년에는 할빈에서 예술단을 창립하기도 했다.
하지만 룡정에서 간도성 협화회(间岛省协和会)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일본이 투항하자 1946년 체포되여 3년형 선고를 받고 복역중 보석으로 겨우 풀려났다.
1950년대초 북경에서 조선족 음악인 김정평과 김철남이 윤극영의 〈반달〉을 중국어로 번역 편곡, 레코드로 취입했다. 노래는 근 30년간 애송되였으며 1979년 전국 통용 음악교과서에 수록되였다.
하지만 윤극영이 가담했다. 이른바 협화회는 일본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한낱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협화회에는 조선인과 한족, 만주족 등 대표적인 친일 인사들이 가담했는데, 이들의 역할은 일제의 충실한 주구로서 만중을 선동하고 감시하는데 있었다.
고 박창욱 연변대학 교수는 일찍 “협화회(协和会)는 소위 민중조직이라고 하나, 사실은 비밀공작을 위한 특무조직이다. 협화회는 일반적인 민중조직인 동시에 내부에는 특무가 있는 것이다. 협화회의 선무반, 특별공작반 등은 완전히 일본군 토벌대와 같이 독립운동 세력을 토벌하는 것이다.”고 밝힌 바 있다.
윤극영이 협화회 책임자로서 적극적 친일을 한 것은 90년대 소설가 고 류연산씨의 추적을 통해 속속 드러났다.
모윤숙 1931년 리화녀전 영문과를 졸업했고 그해 친지의 주선으로 룡정에 있는 명신(明信)녀학교 교사로 취직하였다. 바로 윤동주가 다녔던 은진중학과 나란히 이웃한 학교였다.
명신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동안 〈피로 새긴 당신의 얼굴을〉《동광》에 발표하면서 등단한 뒤 교사, 기자이자 시인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중 각종 친일단체에 가입하여 강연 및 저술활동으로 전쟁에 협력했다. 친일강연을 했고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등에 친일론설을 기고했다.
특히 일본제국주의의 대동아공영권 론리를 형상화한 〈동방의 녀인들〉(1942)을 친일 잡지 《신시대》에 기고하고 지원병 참전을 독려하는 시 〈어린 날개--히로오카(廣岡)소년 학도병에게〉, 〈아가야 너는--해군 기념일을 맞아〉 등을 련달아 발표하는 등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했다. 이 시기 비슷한 주제의 시들을 창작한 로천명과 함께 문인 중 가장 로골적인 친일파로 전락했다.
몇해전 한국에서 펴낸 《친일파인물사전》사전편찬위원회에서는 친일파의 정의를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 식민통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우리 민족 또는 타민족에게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끼친 자”로 규정했다.
편찬자들은 친일파선정 원칙에서 “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은 그 사회적 도덕적 책무와 영향력을 감안해 보다 엄중하게 책임을 물었다”고 밝혔다. 이어 “생계형 부일협력자는 뚜렷한 친일행적이 없으면 제외하되 권력과 부, 명예를 쫓는 출세형 협력자는 엄중하게 취급했다”고 밝혔다.
높은 위치의 정계인사들뿐 아니라 문화예술계의 이름이 쟁쟁한 인사들도 대량 포함되여 세간을 경악케 하고 있다. 한국 각계의 논란이 가열화 되는 등 역풍이 거세지만 력사적 진실 규명을 위한 작업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세기 30, 40년대는 일제의 악랄한 식민지 정책에 우리 민족의 정기가 말살되고 민족문학사가 실종된 칠흑처럼 어두운 시대였다.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물자를 수탈하고, 징용령을 만들어 조선인을 군인, 보국대, 로무자, 위안부로 징발했다. 1938년에는 조선어교육을 페지하고 아침마다 일장기를 향해 황국신민 서사를 암송하게 했다. 1940년에는 창씨개명을 단행해 조상이 준 이름을 일본식 대로 뜯어고치게 했다. 그 마수는 문화예술계에도 미쳤다. 조선말로 된 유명 일간지며 문학지들을 페간시켰고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보국회 등 어용 문학단체를 만들어 침략전쟁과 징병제를 선전하게 했다.
그러나 더욱 슬픈 것은 민족의 수난기에 안일과 부귀를 위해 일제에 무릎 꿇은 문인들의 친일행위였다. 그동안 민족주의 작가로 주목받던 문단의 대표적 인사들이 대거 친일문학의 대렬에 끼여든 것이다.
지울 수 없는 오명을 진 문학인들로는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로 민족시의 전환점을 지었던 시인 최남선, 《화사집》, 《귀촉도》 등 탐미적인 시편들로 민족어의 가능성을 한껏 키운 것으로 평가되였던 시인 서정주, 본격적인 근대문학의 확립에 크게 이바지했던 《감자》, 《운현궁의 봄》의 저자 소설가 김동인… 등이다.
그 전형으로 개화계몽기부터 1920년대까지 언제나 민족주의적인 립장에서 앞장섰던 《무정》, 《흙》의 작가 리광수를 들 수 있다. 리광수는 온갖 친일 단체에 참여하여 그 뛰여난 문필가의 기량을 황국 신민화, 징병징용학병정신대 권고문 따위의 글을 써내는데 허비했다.
남보다 앞서 꼭두새벽부터 줄을 서가며 창씨개명을 했고 “조선인으로서의 본질과 껍데기까지 모조리 던져버리고 일본인으로 변종할”것을 공공연히 웨쳤다. 일본에까지 건너가 류학생들을 선하며 일본군에 입대하여 천황페하를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지자고 선동했다.
근시안적이고 삐뚤어진 그들의 행태는 우리의 민족문학사에 치명적인 얼룩을 남기고 말았다.
문단을 대표하고 민족의 지성을 상징한다는 이들이 하나같이 ‘텐노헤이카(天皇陛下)’를 칭송하고 ‘황군(皇军)’을 위해 비루한 붓을 들고 있을 때, 숭앙했던 문인들과 자기 학교의 교장마저 친일에 앞장설 때 중국 동북변강의 오지인 룡정에서도 수십리 떨어진 작은 촌부락에서 태여난 한 문학청년이 괴로움에 찬 시편 〈참회록(忏悔录)〉을 내놓았다.
윤동주, 식민지시기 스물네살의 문학청년이 령혼의 잉크를 재워 각혈처럼 지었던 그 시작(诗作)은 오늘도 우리들의 마음을 전률하게 만든다.
〈참회록〉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가 1942년 일본류학을 준비할 무렵에 쓴 시이다. 시인은 부끄러움을 담은 자기 고백을 또박또박 원고지에 각인해 내려갔다. 지금까지 보존되여있는 원고의 하단 여백에는 도일(渡日), 시란? 문학, 생존, 생과 같은 시인의 고뇌를 짐작케 하는 절절한 락서들이 남아있다.
“… 래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굴욕, 치욕, 릉멸, 방황, 그 어떤 말을 가져다 붙인다 해도 그때 그 시가 담고 있는 고뇌와 슬픔과 반성을 감당하기에는 모자란다.
그리고 2년 후 일본 도지샤대에 수학하던 윤동주는 ‘불령선인’으로 체포되여 후쿠오카의 감옥에서 이슬로 사라진다. 그의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일제가 전시에 수요되는 혈장을 얻기 위해 생리식염수를 투여하는 생체실험을 한데서 기인된 것이라고 한다.
윤동주는 식민지체재에 동화될 수도 저항할 수도 없던 여리고 섬세한 20대의 문학청년이였다. 당시 그에게서 생의 출구는 막혀있고 현실은 랭혹하고 폭력적이며 미래는 어둡고 삶의 리정표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내면은 분렬을 거듭했다. 윤동주는 ‘나약’했고 ‘감성적’이였지만 감정적이지는 않다. 그는 주변부 식민지의 생활과 속악한 삶의 행태에 수치심을 느꼈다. 의지할 수 있는 곳을 찾지 못해 떠돌던 그의 마음은 종국에는 때묻지 않은 령혼의 시줄에 깃들었다.
윤동주의 시를 떠받치고 있는 정신적 바탕은 시대적 현실에 대해 방관자적 립장에 처해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기반성과 고뇌라 할 수 있다. 그의 시의 중심적인 심상을 이루고 있는 ‘부끄러움’은 이 같은 자기반성과 고뇌의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물론 당시는 극한의 식민지 현실에서 그 누구도 정상적인 문학을 할 수 없는 상황이였다. 그러나 민족의 위기에 가장 먼저 민족문학의 전통과 자존을 지켜야 할 문인들이 저항은커녕 오히려 굴종과 어용과 변절로 민족문학사를 훼손한 친일행위에 민족사의 심각한 비극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의 지성인들이 사회의 압력과 역풍에도 친일인명사전을 굳이 간행한 것도 바로 이러한 력사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여 민족 정통성의 확립과 정의로운 사회의 구현을 위한 취지여서였다.
력사의 갈피에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남은 이러한 문인들의 행태처럼 오늘날에도 여전히 보잘것없는 눈 높음과 영욕에 매달려 권력과 리념과 공리의 뒤꽁무니를 따라서 철새처럼 이동하는 문인들을 찾아볼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윤동주를 다시금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윤동주,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먹먹한 시대를 돌아보게 되고 그의 이름을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부끄러워진다.
민족과 언어를 빼앗겼던 정말 암울하고 힘들었던 식민지 시대에 자아와 민족이 부재한 력사적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초극하고자 윤동주는 참회와 헌신의 신앙적 결의로 마침내 도래할 미래의 시간과 공간을 확신하면서 ‘주어진 길을 걸어갔’다.
시인의 고향의 하늘에 별은 오늘도 또렷하다. 그 밤하늘을 쳐다보노라니 윤동주의 〈달을 쏘다〉라는 산문의 한 구절이 뚜렷이 떠오른다.
그 찰나 가을이 원망스럽고 달이 미워진다.
더듬어 돌을 찾아 달을 향하여 죽어라고 팔매질을 하였다.
통쾌! 달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놀랐던 물결이 잦아들 때 오래잖아 달은 도로 살아난 것이 아니냐,
문득 하늘을 쳐다보니 얄미운 달은 머리우에서 빈정대는 것을…
나는 꼿꼿한 나무가지를 고나 띠를 째서 줄을 매여 훌륭한 활을 만들었다.
그리고 좀 탄탄한 갈대로 화살을 삼아 무사의 마음을 먹고 달을 쏘다.
오늘날 우리는 “보람처럼 풀이 무성한” 고향의 언덕배기에 잠든 시인을 더더욱 기리고 있으며 시인이 읊었던 별의 밝음과 어둠을 낱낱이 헤아리고 있다.
찬란한 별무리 속에 은닉(隐匿)해있는 별조차 낱낱이 헤여보다 ‘좀 탄탄한’ 오안(五眼)의 빛을 ‘화살로 삼아’ ‘무사의 마음을 먹고’‘별’을 쏜다.
출처: <<도라지>>2017년 제5기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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