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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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조선족문예 60년 산책 4
2013년 08월 05일 09시 43분  조회:4967  추천:3  작성자: 김희관
----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맞으며
 
머리말
 
8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문예의 새봄>은 새싹을 티우기 시작했다. 당시 주내의 작가협회, 문련의 각 협회, 신문사, 출판사, 라디오TV방송국, 주와 8개현시의 가무단,예술단,문화관 등 문예창작단체와 문예표연단체들에서는 창작열이 들끓기 시작하여 창작모임, 새작품 발표회 등 모임이 여기저기서 열리는 새국면이 조성되였다. 당시 주문화국에서는 <문예의 새봄>이 무르익어가고 있는 좋은 력사적 기회를 잘 파악하고 사회주의문예의 <백가쟁명 백화만발>의 새국면을 조성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기울려 문예계를 위해 봉사하였다.
 
 
잊을수 없는  제1 <연변의 여름 예술절>
 
1984년 4월중순, 주문화국에서는 룡정시영화발행공사 구락부에서 <전주 문예창작좌담회>를 일주일간 열었다. 당시 주문화국 직속 문예단체의 창작일군들은 문론이고 각현시의 문예창작일군들도 모두 초청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게 몇년만에 열리는 큰잔치인데. 당시 우리는 문예창작좌담회을 열게된 취지를 말씀드리면서 <여러분들이 이번 문예창작좌담회에서 마음을 활짝 열고 속심으로 생각해온 문예창작의 동기를 얘기하시기를 바란다. 지난 10여년동안 심지어는 평생을 두고 하고싶었던 문예창작에 대한 진솔한 얘기를 해주시기 바란다. 여러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틀리거나 과격해도 상관없고 저희 문화행정에 대해 따끔한 비평을 하셔도 박수를 칠것이다. 앞으로 다시는 몽둥이와 처분은 없다.>고 선언했다.
 
지금 기억 나는 필자의 한단락의 발언을 적는다. “ <10년동란>은 우리의 <문예동산>을  페허로 전락시켰다. 저희는 존경하는 아버지를 잃었고 여러분은 당신들과 고락을 함께 하면서 연변조선족의 문예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전 중공연변주위 김문보서기를 잃었다. 저명한 작곡가 최삼명선생께서 저를 데리고 밤을 새면서 강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면서 <김문보서기가 우리 창작소조를 데리고 화룡현 로과향에 하향하여 함께 생활하면서 <두만강가에 피여난 중조친선의 꽃>을 취재하고 신문보도와 가곡창작을 지도해 주셨다. 하여 방죽송,김태갑이 가사를 쓰고 내가 작곡하여 중조우의를 노래하는 <친선의 꽃>이라는 가곡을 세상에 내놓게 되였다. 그 때를 생각하면 김문보서기님이 생각나서 가슴이 미여진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문화행정은 당의 문예방침을 어김없이 관철하여 여러분들의 문예창작의 불씨를 활활타오르게 도와드리고 여러분들을 위해 봉사하는 의무밖에는 아무것도 바라는것이 없다.>
 
<전주문예창작좌담회>는 서서히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낮에는 회의장에서 앞다투어 얘기를 주고받고 저녁에는 모두들 침실에서 밤중까지 열변을 토하는데 좌담회 후근조에서는 여러분들에게 밤참에 <조양소주>를 섬기느라 꽤나 바빴다.
 
<전주 문예창작좌담회>총화모임에서 필자는 주문화국을 대표하여 <1984년 제1차 <연변의 여름>예술절을 거행할데 관한 결정>을 선포하면서 여러분들이 이번<전주문예창작좌담회>의 열기를 문예창작의 에네르기로 바꾸어 좋은 문예작품을 선보일것을 주문했다.
 
후날에 당시 문예창작좌담회에 참석했던 여러 문예창작일군들은 <1984년 봄의 <전주 문예창작좌담회를 <룡정문예창작좌담회>라고 부르면서 한차례 명실공히 사상해방, 문예해방의 좌담회였고 <르네상스>의 발단이였다.>고 평가했다.
 
1984년 8월12일, <제1차 연변의 여름 예술절>이 성황리에 개막되였다. 주내 각 문예단체들 10일간 문예의 대축제를 벌려 자기들의 성과작을 마음껏 과시했다. 사실 이번 예술축제전에 전주각지의 공연프로을 점검하기 위해 주문화국에서는 국장이 조장은 맡은 조사연구소조를 무어 주직속문예단체와 전주 8개 현시 예술단,문공단을 20여일 순회하면서 예비공연를 관람하고 좋은프로는 더좋게, 가능성이 있는 프로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같이 모색하며서 준비를 다그쳐왔다.
 
<제1차 연변의 여름예술절>은 예술극장에 가무무대를, 문화영극원에 연극,구연무대를 열어 공연을 했다. 공연은 우선 주직속 문예단체와 각 현시 문예단체가 각자 준비한 프로를 완정하게 공연을 하고 예술절 심사평가위원회에서 초보적인 평의를 거쳐 제2차 선발프로공연을 하는 방식으로 무대표연의 기회를 충분히 제공했다. 그 동안 공연이  밤낮으로 진행되여도 광대한 연직원들은 하나도 피곤한 기색이 없이 축제의 분위기속에서 자기들의 새로운 가무,연극,구연프로를 마음껏 표연함으로써 시대를 반영하는 참신한 주제와 새로운 연예기량을 발산했다. 수많은 가무프로와 연극,구연프로가 사상해방과 경제중심의 새시대를 반영하는 시대정신을 반영하여 참신하였다. 그중에서 연변연극단이 올린 리광수  작 연극<도시+농민=?>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연극계에서는 당시 농민들이 도시에 진출하기 시작하는 시대적 추세에 대한 연극의 사명 등 연극리론, 연기분야에서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필자는 이러한 새기상을 부축하는것이 시대적인 수요임을 판단하고 연극예술가들과 여러번 소통을 하여 대상을 수여했다. <제1차 연변의 여름 예술절>의 상패는 <물동이를 이고있는 여신상>이였다. 그것은 여러차례 공모끝에 선택한 알루미늄 조각품이였다.
 
예술절기간 놀라운 사건은 우리의 보고를 접한 국가문화부 민족문화사(民族文化司)와 예술국(艺术局)에서 몇몇 간부들이 시찰을 내려오셨지 않았겠는가. 우리는 황급한 마음으로 주영화발행공사 영화관에서 중앙령도들을 모시고 우리가 <제1차 연변의 여름 예술절>을 개막하게 된 동기와 준비과정, 그리고 소기 목적 등을 보고드렸다. 결과 중앙간부들은 <국내에는 아직 <예술절>을 열어 문예에 대한 대검열을 진행한 선례가 없다. 당신들이 선참으로 <예술절>을 개막하는데 대해 진심으로 축하를 드리며 앞으로 예술절의 경험을 잘 총화하기 바린다.>라고 격례해 주었다. 몇년후 국내 각성, 시의 <예술절>과 <중국예술절>이 륙속열리기 시작했다.
 
<제1차 연변의 여름 예술절>은 문예창작과 표연, 인재와 단체 등 여러방면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주문화국에서는 되도록 많은 연직원들에게 영예의 상장을 수여함으로서 대다수 문예일군들을 고무해 주었다. 몇년후 국가에서 문예일군들의 문예직함평정사업이 전개되였는데 몇년전부터 우리가 진행한 문예단체정돈사업과 문예업무자질검증사업 그리고 <제1차 연변의 여름 예술절>은 주내 광대한 문예일군들이 저마다 적당한 문예직함을 수여받는데 밑거름이 되였다. 참으로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였다. <연변의 여름 예술절>은 3년에 한차례씩 3차까지 거행되고 막을 내려서 참 아쉽다.
 
연변예술학교예술단의 미국방문공연
 
1984년 가을, 주문화국은 연변예술학교예술단의 미국방문공연에 관한 미국 아세아문화중심의  공식적인 초청서를 받았다. 주위와 주정부는 주문화국의 <연변예술학교예술단의 미국방문공연에 관한 보고>를 비준하면서 필자를 미국방문 연변예술학교예술단 단장으로 임명했다. 동시에 연변예술학교예술단의 가무프로 선정기준에 관한 보고도 비준하였는바 그 원칙은 첫째, 연변조선족 전통문화예술의 기본을 견지한다. 둘째, 가요부문에서는 우리의 <혁명가요>는  회피하고 민요, 흘러간 옛노래중에서 건강한 가요, 당시 유행하는 연변노래중에서 택한다. 셋째, 미국에서 화교,중국류학생을 대상으로 공연할 때는 중국어 가요를 부른다.
 
주위,주정부의 지시에 따라 주문화국과 연변예술학교는 공동으로 <연변예술학교예술단 미국방문공연 령도소조>를 결성하였으며 연변예술학교에서는 1985년3월 새학기부터 미국방문공연예술단의 가무프로 작성과 그에 따른 예술단의 구성, 가무배우선정 작업에 돌입했다.
 
<문예의 새봄>을 맞아 연변의 문예계는 여러방면의 <문예부흥>의 실천을 해왔고 또한 1984년 4월의 <호요방총서기 연변시찰 문예만회>, 8월 <제1차 연변의 여름예술절>까지 치르면서 참신한 경험은 다소 쌓았으나 미국방문공연이라는 국제문예행사에 대한 경험은 전무했다. 이런상황에서 우리는 우선 여러 경로를 통하여 미국의 사회와 문화예술, 미국 한인사회의 기본상황과 문화예술, 미국 화교사회와 류학생들에 대한 <소식(그 때는 정보화개념이 없었음)을 되도록 많이 수집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또한 광동성 심수시(深圳市)의 테마파크(주제공원)에 조선족 복장모델을 선발하여 파견하는 작업과 심수시의 개혁개방상황을 현지고찰하는 과정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현대문명의 <소식>을 다소 접하게 되였다. 당시 미국측과 전화통화를 한번하려면 사무실에서 밤을 쇠면서 연길,장춘,북경,동경,로센젤레스까지 전화교환수의 도움하에 겨우 통하던 일이 생각난다.
 
연변예술학교예술단은 예술학교 교원 8명, 무용반 녀학생 4명과 연변가무단 배우 6명 그리고 중국대외연출공사 영어번역, 필자 등 모두20명으로 구성되였다. 배우들은 그해 봄부터 여름,가을까지 밤낮으로 연습한 결과 나름대로 공연프포가 준비되였다. 가수,무용수,악사들의 무대복장은 기본상 연변에서 디자인하고 재봉하여 완성했다. 그런데 남녀단원들의 양복만큼은 당시 연변의 수준으로는 되지않아서 상해에서 양복사가 직접와서 매사람마다 재량을 하여 한달여만에 배달이 되였다.  
 
10월 상순의 어느날, 주위,주정부의 지도자들이 우리의 리허설을 보시였다. 리허설의 레파토리는 대체로 무용<물동이 춤>으로 시작하여 성악프로는 림성호의 독창(가요 반갑습니다,배노래 등),한국화(가요 내고향 오솔길,초립동 등),조옥형의 독창(가요 황금낟알 설레일 때 날 찾아오세요, 둥실타령 등), 기악프로는 김성삼의 가야금독주<양산도,도라지 등>, 김인석의 장고독주<향촌의 기쁨> 백정소의 목금 독주(고향의 봄,종달새 등), 무용프로는 집체무<물동이춤>, 최미선의 장고춤<풍년벌에 울리는 장고소리>, 그리고 마지막에는 <농악무>로 끝나는 구성이였다. 마지막 답례무대는 전체 연직원의 합창 <고향의 봄>과 <아리랑>을 준비했다. 리허설에 대한 반향은 대체로 민족정책과 민족문예방침이 잘 반영되였고 연변조선족의 연변조선족문예의 새로운 기상을 담아 잘 엮어졌다는 평가였다.
 
11월4일 오전, 예술단이 북경 국가문화부 초대소에서 출국준비에 분주한데 문화부의 간부가 찾아와  오후에는 중앙령도동지의 접견이 있으니 모두 대기하라고 당부했다. 오후 2시, 우리는 문화부에서 보낸 버스편으로 중남해에 도착하여 근정전(勤政殿)에 초대됐다. 내가 문화부 간부에 물으니 근정전은 당중앙 령도자들의 회의실이라고 했다. 얼마후 중공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호계립(胡启立)동지와 중공중앙대외선전판공실 주임 겸 신화사 사장 주목지(朱穆之),문화부의 간부 등이 접견장으로 들어오셔서 우선 우리와 집체사진을 찍고 커다란 원탁주변에 모여 앉았다. 호계립동지는 환한 웃음을 지으시며 예술단의 전체성원 특히는 어린 무용배우 여학생들을 예뻐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오늘 나는 중앙령도동지들을 대표하여 연변예술학교예술단의 미국방문공연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조선족은 노래와 춤에 뛰여난 민족이고 총명하고 지혜롭로운 우수한 민족이다. 혁명시기 조선족은 많은 공훈를 세웠고 사회주의시기에도 여러방면에서 커다란 공헌을 하고 있다. 오늘 나는 동무들에게 두가지 임무를 주고 싶다. 하나는 미국방문공연과정에 동무들은 예술이라는 아름다운 언어로 중국인민의 미국인민들에 대한 우호적인 인사를 전해주기를 바란다. 둘째는 지금 미국에는 화교들이 많을뿐만아니라 중국류학생도 근 4만명에 달한다. 동무들은 바쁜 일정속에서 시간을 짜내여 그들을 위해 특별히 위문공연을 해주며 조국의 문안을 전해주기 바란다.>
 
11월5일 오후, 예술단은 북경공항에서 중국국제항공편으로 일본 동경으로 날아 하루 저녁을 동경에서 체류했다. 저녁식사후 각자 침실에서 쉬는게 침실이 진동을 하며 정신이 아찔한 순간이 발생했다. 지진이였다. 잠시후 TV방송에서 지진소식을 알리면서 지도에 정확한 위치까지 알린다. 참으로 처음보는 TV속보였다. 11월6일 저녁 우리는 동경 나리타공항에서 일본 JAL편으로 미국 센프랜시스코로 날았다. 몇시간후 우리는 태평양상공에서 동방과 서방이 시차를 맞아 다시 미국시간 11월5일 오전시간을 날게되였다. 10여시간을 날아 우리는 샌프랜시스코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거리에는 건물마다 모두 미국의 성조기가 나붓기고 있어서 안내자에게 <오늘은 미국의 무슨 명절날인가?>고 물으니 그는 웃으면서 <오늘 명절이 아니다. 매일 국기를 계양하는것은 미국사람들의 애국심이다.>라고 한다.
 
11월7일부터 우리는 샌프랜시스코, 로센젤레스, 휴스턴, 시카코. 워싱톤,필라델피아, 뉴욕,로센젤레스 2차,하와이 순으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 방문공연을 하였다. 그중에서 영원히 잊을수 없는 력사적인 몇장면을 간략하게 적어본다.
 
미국의 수도 워싱톤에서 방문공연하는 3박 4일간 우리는 중화인민공화국 주미국 대사 한서대사(韩叙大使)와 대사관 외교관들의 극진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았다. 한서대사님은 중미최고급의 외교활동이 그렇게 다망하시면서도 매일 한밤중에  공연을 맡친 우리를 중국대사관으로 불러 밤참을 챙겨주시고 격려해주셨다. 한서대사는 말씀이다.<연변예술학교예술단은 국가에서 파견한 첫 소수민족예술단이다. 요즘 외교관들과 신문방송의 반영을 들어보면 동무들은 예술무대를 통하여 중국의 민족정책을 잘 홍보하고 있어서 참 고맙다. 앞으로 여러도시에 가서 공연을 할때 우리 외교관들이 잘 보살피라고 지시를 내렸다. 동무들이 미국방문공연이 성공하리라고 굳게 믿는다.>
 
원싱톤에서 우리는 미국헌법대청에서 공연을 하게되였다. 아세아문화중심 리광덕회장님의 말씀이다. <헌법대청은 미국의 헌법과 중대 법률에 관한  정치행사를  하는 대청이다. 하기에 예술공연은 세계 유명예술단이 아니면 아예 견주지를 못한다. 우리가 미국 당국에 연변예술학교예술단은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정부가 파견한 소수민족 예술단이라고 홍보를 반복적으로 하여 성사되였다.> 하여 우리의 공연은 주미중국대사관 문화참사관의 축사와 미국 아제아문화중심 회장님의 축사를 받으면서 성황리에 공연을 했다.
 
그 이틀날 저녁 우리는 미국프레스센터(기자중심)에 초대되였다. 미국프레스센터는 세계각국의 취재기자들이 상주하면서 미국의 정부와 유명인사, 사회를 취재하는 뉴스센터이다. 우리의 안내자는 1979년 1월 등소평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바로 여기서 세계의 기자들을 대상으로 기자초대회를 가졌다고 소개했다. 나는 수많은 외신기자들 앞에서 중국의 민족자치정책과 연변을 홍보하는 기조연설을 했다. 사전에 준비된 원고는 없이 즉흥적인 기조연설이자만 내가 해야할 말이 너무나 뚜렸하니까 떨림없이 순조롭게 피력했다. 그리고 우리 예술단의 배우들을 소개한 다음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순서로 넘어갔다. 기자들속에는 한국기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의 가장 많은 질문은 <김단장님은 분명히 한국혈통인데 왜서 중국사람인가?>였다. 나의 대답은 아주 명확했다. <20세기초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면서 할아버지께서는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중국으로 건너갔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후 우리는 중국국적을 취득했다. 우리는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우리민족의 주장님을 모시고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키면서 주인답게 살아오고 있다.> 기자들이 조선족자치주에 대해 흥취가 많아서 질문이 계속되였다. 마지막으로 <중국사람들도 다정다감한가?>라는 엉뚱한 질문을 던져왔다. 그래서 <물론이다. 아래에 노래 한수를 들어보시기 바란다.>라고 하면서 나는 녀가수 조옥형더러 당시 국내에서 유횅하는 통속가요 <어머님의 키스(妈妈的吻)을 부르게 했다. 기자들이 녹음을 하면서 가사를 못알아들어 머리를 갸웃둥하길래 내가 즉석에서 그 가사를 통채로 통역을 해 드렸다. 그랬더니 기자들속에서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뉴욕을 방문공연할 때 우리는 뉴욕주재 중국총령사관에 주숙했다. 1979년1월 등소평이 뉴욕을 방문했을 때 역시 여기에 주숙했다고 총령사관의 직원이 소개해 주었다. 뉴욕총령사관 바로 길건너 바다에는 맥아더가 제2차세계대전의 참패국인 일본의 투항서를 받던 미주리호 항공모함이 정박해 있었다. 우리는 줄리에음악대학과 카네기홀을 방문했고 시대광장을 산책했으며 뮤지컬<뉴욕 42가>를 관람했고 뉴욕의 민족명절인 추수감사절 퍼레이드를 보았다. 우리가 뉴욕 세계무역센터 제2호 105층 빌딩 지붕위에 올라 맨하탄과 뉴욕 사방을 바라보던 날이 어제 같은데 2001년 9월11일  <9.11테러>로 하여 그 빌딩은 영영 사라졌다.
 
휴스턴을 방문공연할 때 우리는 미국우주센터를 참관했다. 우선 잔디밭에 전시된 거대한 우주로켓을 견학했는데 그것이 바로 20세기60년대 우주비행원을 달에까지 실어가 달탐사를 끝내고 같이 돌아온  우주로켓이라고 했다. 우주박물관에 들렸을 때 우리는 우주비행원들이 달에서 실어왔다는 커다란 바위를 보았다. 저희가 리광덕회장님께 물었다. <목사님 저 달에서 실어온 바위에서도 하나님의 그림자는 찾아볼수 없다. 하느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시는가?> 그러니 리광덕회장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하느님은 자네 마음속에 있다네…>하신다. 나도 웃었다.
 
우리는 뉴욕에서 로센젤레스에 다시 날아와2차 공연을 했다. 멀리 몇백키로메터 밖에서도 달려온 한인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공연의 기분은 진짜 도가니 그 자체였다. 공연끝에 우리가 무대에서 <고향의 봄>을 부르며 답례를 하는데 근 3천명의 관중들이 함께 목청껏 부른다. 그러던중 예고없이 한국축구대표팀 운동원 한명이 축구공을 들고 무대로 뛰여 올라와 나에게 선물하는것이 아닌가. 그순간 나는 즉시 그 축구공을 두손으로 추켜들고 흔들면서 답례를 했다. 매번 그랬듯이 공연은 1시간 반 정도인데 공연이 끝나면 우리는 무대로 올라와서 문안하고 축하해 주시는 관중들과 2시간 남짓이 환담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로센젤레스에 체류하는 동안 헐리우드와 디질랜드를 방문한것도 잊을수 없다. 로센젤레스를 떠나기 전날 이번 미국방문공연의 협찬을 맡은 한국일보 미주본사 장재근사장님이 예술단을 위해 파티를 열었다. 파티가 무르익을 무렵 본 나와 장사장이 술을 많이 마시는 시합이 벌어졌다. 그런데 내가 습관되지않은 <조양소주>가 아니라 위스키를 마셔야 하는것은 좀 부담스러웠다. 예술단원들이 박수를 치며 한잔 두잔을 외치면서 지켜보는 가운데 나와 장사장님이 서로 마주보며 한잔 한잔 마셔나갔다. 내가 위크키잔으로 12잔을 마신것은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은 필림이 끝어졌다. 내가 깨여 나니 모두들 깔깔 거리며 웃어대는데 결과를 알아보니 내가 졸도하는 순간 장사장님도 역시 잔을 놓았다는 것이다.
 
이틑날 저녁, 우리는 로센젤레스에서 태평양 한복판에 떠있는 하와이로 날아갔다. 몇시간을 캄캄한 하늘을 날다가 창문밖으로 저멀리 불바다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글이글 타는 저곳은 어디일까? 방송에서 영어로 <하와이>라는 소리에 소스라쳤다. 하와이렬도는 그렇게 낯에는 수시로 타오르는 화산의 붉은 불빛을 볼수 있고 밤이면 화산의 불빛과 등불이 어울려 저렇게 불타는 불야성을 연출한다. 우리는 하와이에서 백여년전부터 이민을 와서 살고 있는 화교와 한인들의 후대들과 함께 공연과 파티를 즐기면서 2박3일을 지내고 12월5일 일본 동경으로 날았다.
 
12월 상순의 어느날 한밤중에 우리는 연변으로 귀환했다. 주위,주정부 지도자들이 우리를 접견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연변예술학교예술단의 미국 방문공연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중공중앙대외선전판공실에서는 통보를 내여 연변예술학교예술단의 미국방문공연이 성공적이라고 칭찬했다. 력사적인 미국방문공연의 성공을 축하한다.>
 
 ( 2011년10월3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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