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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역사』
이승률 연변과기대 대외 부총장
Ⅷ.
일본야쿠르트(주)에서 운영하는 「후쿠오카 국제칸츄리클럽」은 개장된 지가 30년이 넘는 골프장이다. 클럽하우스 시설은 낡고 규모가 작아서 시대에 뒤쳐져 보이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LPGA를 개최할 정도로 이곳 큐슈지역에서는 전통적인 명문 골프장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우리 일행들이 도착하자 골프장 사장과 지배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준비해간 선물(한국산 인삼 엑기스)을 증정해드린 후 잠시 담소를 나누었다.
한국야쿠르트(주)에서 오랫동안 대표이사를 역임하셨던 이은선 회장께서, 1969년에 일본야쿠르트(주)와의 기술제휴를 통해서 합작 설립한 한국야쿠르트(주)의 발전사를 자세히 소개해주셨다. 그동안 꾸준히 지속되어온 양사간의 변함없는 우정과 성실한 동반자관계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계셨다.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유를 발효시켜서 만든 야쿠르트처럼 우리 한일간 역사발전에도 지속적인 우정과 동반자의식을 발효시키는 신물질(?)과 같은 어떤 새로운 대안을 하나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운딩을 하는 동안 나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온화한 날씨에 푸르고 맑은 하늘이 참으로 쾌청했다. 그동안 왼쪽 어깨의 통증(2년 전부터 회전낭대파열이 생겨서 지금까지 큰 고생을 하고 있다)으로 오랫동안 골프를 못했는데, 이번 큐슈 여행에서는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아니면 마음을 비워서 그런지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경기 내용이 좋았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그날따라 유난히 타구가 벙커에 많이 들어가서 애를 먹은 점이다. 18홀 코스에서 12번이나 벙커에 들어갔으니, 같이 라운딩을 하던 이인혁 회장께서 “이 부총장은 왜 그리 벙커를 좋아하시오”라고 놀릴 정도였다. 공이 자꾸 벙커에 빠지자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북한 핵문제를 놓고 오랫동안 씨름을 해왔던 6자회담이 지난 2월 13일 북경에서 극적인 타협을 보게 되어 앞으로 북미간․중미간․남북간․북일간에 상당한 수준의 해빙무드가 조성될 전망이다.
그러나 이 2.13 공동성명은 골프로 치자면 벙커에 빠진 공을 쳐서 겨우 페 어웨이로 옮겨 놓은 상태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우선 기분은 좋지만 앞에 여전히 험난한 코스를 남겨두고 있지 않는가? 러프와 해저드와 OB라인이 있을 뿐만 아니라 벙커도 여기 저기 남아 있어서 또다시 모래밭에 공을 처박을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 핵문제의 해결은 이와 같이 험난한 코스의 절반도 돌지 못한 상태에서 당사국들이 내기 게임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그런 형국이라고 볼 수 있다. 골프장을 계속 라운딩하면서 나는 벙커에 공이 빠질 때마다 6자회담에서 선수로 뛰고 있는 각국의 협상 당국자들이 상호간에 얼마나 힘든 게임을 벌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내심 민망스럽기까지 했다.
아무튼 이제 북경 6자회담이 이루어놓은 2.13 공동성명은 동북아정세에 따뜻한 새봄을 예비해준 셈이다. 동토의 대지에도 조만간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혀 주변국가와 세계 앞에 평화의 잔치를 베풀 수 있을지는 지켜볼 일이다.
핵을 가진 북한과 함께 추구하는 평화는 진정 어떤 평화인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일이다. 어쩌면 2.13 해빙의 급물살에 덤벙대다가 대한민국이 저 멀리 떠내려가는 위험한 비극의 봄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지 않는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코스 이동을 하다가 문득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니 골프장 곳곳에 새봄을 알리는 꽃들이 군데군데 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이 자연의 새 봄이야말로 인위적으로 가꾸는 한반도 해빙의 봄과는 사뭇 다르리라. 특히 산기슭 후미진 곳에 내가 좋아하는 매화가 피어 있어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푸른 잎 사이로 많은 꽃을 달고 있는 나무는 역시 동백이었다. 겨우내 계속 피는 동백의 붉은 꽃잎이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그 곁에 외롭게 서있는 매화나무의 잔가지에 피어있는 작고 흰 꽃잎의 품격이 내 마음에 더욱 귀하게 여겨진다. 찬 눈바람 속에서 피어나는 일지매(一枝梅)의 고아한 기상, 그 아름다운 절개(節槪)의 미(美)를 감탄하는 마음이야 한일간에 공통된 감성이 아니겠는가! 복숭아꽃이 무리지어 피어있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고, 여기저기 우뚝 서있는 목련과 벚나무의 가지에 이제 막 꽃망울이 맺히고 있는 모습 또한 귀하게 보였다.
봄에 나뭇가지에 싹이 트고 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보면 마치 누가 마술을 부리는 듯하다. 생명이 살아있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하고 행복한 일이다. 저마다의 존재이유와 목적을 자유롭게 실현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한 일이다. 자연의 개체와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의 생명도 이러하리라.
(생각이 자꾸 비약하는지 모르지만) 이번 큐슈 여행은 본인으로 하여금 새로운 희망이 샘솟는, 자유와 평화의 꿈을 일깨워주는 멋진 여행으로 인식된다.
오후 일찍 라운딩을 마친 우리 일행들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 호텔로 돌아가는 도중에 두 군데 명소를 구경하러 다녔다.
먼저 간 곳은 -----에 있는 「龜의 尾」라는 상표를 내걸고 정종을 만드는 술도가였다. 한 집안에서 290년간 대대로 이어왔다고 한다. 전통의 미학이 예술처럼 느껴지는 명문주가였다. 소문난 그대로 술의 종류가 다양했고 (종류마다 조금씩 맛을 봤는데) 맛과 향기도 뛰어났다.
두 번째로 옮겨간 곳은 ------에 있는 쇼핑센터였다. 대규모 할인매장으로 실용적인 상품들이 많았다. 함께 쇼핑하는 중에 이은선 회장께서 또 한 말씀을 가르쳐 주셨다.
“이 물가가 10년 전과 똑같아. 그만큼 일본의 과거 물가가 비쌌고 거품이 많았다는 증거야. 그러다가 버블현상이 붕괴되면서 경기침체가 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몰라. 그런데 지금은 고생 끝에 이룬, 기초가 잘 다져진 기반같아. 이런 기반 위에서 경제가 다시 발전한다면 결코 우리가 따라잡지 못할지도 몰라.”
아내가 「패션 안경」을 하나 고르려고 하자 종업원이 아내의 시력과 얼굴형에 맞춰 열 개도 넘는 안경테를 꺼내놓고 재료와 타입에 대해서 하나씩 자세히 설명해준 후 그 중에서 가장 적합한 것을 고를 수 있도록 끝까지 친절하게 잘 처리해주었다. 아까 골프장에서, 라운딩을 마친 후 캐디가 골프백 정리를 할 때 골프채 14개를 다 꺼내놓고 하나씩 끝까지 정성스럽게 닦아주던 모습이 연상된다. 마무리 공정이 뛰어난 일본 제조기술산업의 특성이 온 국민들의 몸에 습관처럼 배어있는 듯 했다.
새삼스럽게 일본인들의 「친절과 정성」에 대해 실감나는 공부를 하게 된 셈이다.
언젠가 누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군대는, 미국인 장군이 독일인 참모를 데리고 일본인 사병을 지휘하는 군대이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약한 군대는, 중국인 장군이 일본인 참모를 데리고 이탈리아인 사병을 지휘하는 군대이다”
각 국가의 국민성을 잘 반영한 말로 들렸는데, 세계 최강 군대의 일본인 사병은 이해가 되나, 세계 최약 군대의 일본인 참모는 이해가 잘 안되었다.
아마도 중국인은 조직적인 리더십이 부족하고 일본의 참모진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맹종만 했지 창의적인 대안을 제시하거나 융통성 있는 전략을 세우지 못하는 것 같고, 이탈리아인은 다들 개성이 강해서 제멋대로 놀기 때문에 통솔이 잘 안 되는 경향이 있지 않나 하는 정도로 해석해볼 수밖에 없었다.
또 얼마 전에 두레교회의 김진홍 목사님 설교 테이프에서 들었던 얘기가 생각났다. 본인이 과거에 화장품회사 외판원 시절을 거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배운 바로, 일본 여성들은 기초화장에 충실한 반면에 한국 여성들은 색조화장술이 뛰어나며, 미국 여성들은 얼굴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고 머리카락, 손톱, 발톱관리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는 얘기였다.
외국에 나오면 자국과 타국을 비교하는 얘기를 자주하게 된다. 일행들이 쇼핑을 마치고 버스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는 동안에 아내가 최근에 사회교육(SERI CEO 강좌)을 통해서 배운 얘기 한 가지를 들려주었다.
“한중일 3국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일본은 섬나라이고 영국을 성장모델로 삼았으며, 매우 보수적이고 난이도가 높은 정밀분야 생산력에 강하다. 한국은 반도국가이고, 이태리와 기질 및 성향이 비슷하며, 매우 진보적이고 융통성과 창의적인 응용기술력이 뛰어나다. 그리고 중국은 대륙국가로서 미국과 같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용광로와 같고 융화적이고 다양성이 뛰어나며 응집력이 강하다. 특히 한국인의 기질적인 특성을 살펴보면, 스피드가 빠른 반면에 조급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창조성에 민감한 반면에 변화기복이 심하고, 신명이 있어서 흥이 많아 응원문화가 발달했으며, 남에게 지기 싫어하거나 또 남에게 보여지는 것을 중시하는 경향 때문에 과거에는 체면문화, 오늘날에는 성형문화가 횡행하게 되었다. 그래서 심지어, 지는 놈은 죽어야하고, 못난 여자는 여자도 아니다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지경까지 되었다.”
관광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 일행들은 나의 특별한(?) 제안을 받아들여 현해탄을 끼고 있는 해안도로로 드라이브했다. 푸른 송림과 검은 암석들이 잘 어우러져 있는 해안으로 현해탄의 파도가 밀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현해탄을 가깝게 접해본 우리 일행들은 기분이 동(動)해서 모두 대포라도 한잔 하자는 의견이었다. 혹시나 선술집 같은 게 있나 해서 바닷가 근처 동네를 여기저기 찾아다녀 봤지만 관광지가 아니라서 그런지 술파는 집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이 부근에서 가장 이름 있는 항(港)이 카네자키 항(KANEZAKI PORT)인줄을 알게 되었다. 릴낚시를 하는 어부들이 주로 어업활동을 하는 조그만 항구였다. 북동쪽으로 세 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포구를 둘러싸고 있는, 작고 평온하기 짝이 없는 아름다운 항구였다. 내 생각 같아서는 혼자 남아서 배를 빌려 타고 저 멀리 바다 안으로 달려가 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지만, 일행들을 감안해서 꾹 참았다. 되돌아오는 해안 길이 점차 어둑해져 가고 있었다. 왠지 내 마음에 찡한 슬픔이 밀려왔다. 푸른 송림이 우거져 있는 절벽 아래 해안선을 따라 검은 암석을 때리며 하얗게 울부짖고 있는 현해탄의 파도가, 떠도는 재일동포들의 한을 노래하고 있는 듯해서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 저 길을 뚫자. 저 현해탄 바다 밑으로 터널을 뚫어 역사의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 재일동포들의 인생에 쌓인 한을 풀어드리자. 죽은 혼령들조차도 마음껏 자유롭게 고국을 드나들 수 있도록 대로를 열어보자. 거기에 한일간 역사발전의 새 길을 열어보자. 동북아시대 국제협력의 새로운 모델을 기획하여 상호간에 새 시대의 희망을 창출하는 기적의 새 날을 열어보자!”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넘실대는 현해탄을 차창 밖으로 바라보면서 신음을 토하듯 이와 같이 다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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