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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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역사』9 (이승률18)
2007년 04월 25일 17시 29분  조회:2753  추천:59  작성자: 이승률

『희망의 역사』

이승률 연변과기대 대외 부총장


Ⅸ.

겐까이 로얄호텔로 돌아온 우리 일행들은 간단히 온천을 마친 다음 2층에 있는 일본식당 오토메(浜乙女)에 모여 큐슈여행의 마지막 만찬을 함께 했다.

조선인 3세(女)가 운영하는 식당이다. 이름을 물어보지 않아서 알 수가 없었지만, 우리를 특별히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평일에 한산했던 호텔이 주말을 앞둔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갑자기 붐비기 시작했다. 이 오토메 식당도 손님들로 가득 찼다. 호텔 투숙객보다 일반 손님들이 더 많았고, 그들 대부분은 회식을 하기 위해 온 일본인 직장단체팀들이었다. 좌장격인 이은선 회장께서 저녁 만찬을 위해 내게 건배사를 해주기를 요청하셨다. 나는 현해탄 해안도로를 달리며 느꼈던 소감을 잠시 이야기 한 후, 누구에게나 다 내일을 향한 꿈을 갖고 살아야 된다는 뜻으로 ‘진달래’ 구호를 선창했다.

“진정으로 달콤한 래일(내일)을 위하여”

술잔이 오고가면서 “위하여(與), 위하야(野), 위하세(世), 위하고(高)” 등등의 후렴이 계속 터져 나왔다.

오늘 술(정종)은 김경철 회장께서 만찬을 위하여 낮에 쇼핑할 때 준비해놓으신 것인데, 식당 주인에게 미리 양해를 구한 뒤 사용했다. 술병에 붙어 있는 상표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

「설중한매(雪中寒梅)」

홀연히 나는 오늘 낮에 라운딩을 하던 중에 보았던, 산기슭 후미진 곳에 외롭게 서있던 늙은 매화나무의 잔가지에 피어난 작은 꽃잎들을 다시 한번 망막에 떠올렸다. 새삼스레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뇌리 속으로 한가닥 영감의 빛이 빠르게 지나갔다.

「설중한매와 진달래」

어쩌면 이 두 가지 소재는 오늘날의 동북아 시대상황을 적절히 대변하는, 새봄을 알리는 첫 화신(花信)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이 끝나기 전, 아직도 눈이 덮여 있는 산골짜기에 찬바람을 맞으며 피어나는 매화의 꽃잎처럼, 지난 2월 13일 북경에서 타결된 6자회담의 공동성명은, 어쩌면 아직도 많은 의구심과 살벌한 탐색전이 남아 있는 한랭전선 속에 피어난, 새로운 협상과 해결책을 위한 작은 신호가 아니겠는가?

「악의 축」이라고까지 불리던 저 엄혹한 동토의 대지 위에도 새 봄의 꽃은 피려나?

「설중한매」의 향기에 취하여 술기운이 고조되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한번 건배사를 외쳤다.

“진달래! 진정으로 달콤한 한반도의 내일을 위하여 건배!”
술기운 탓인가?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진정시키며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김소월(金素月)이 노래한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을 속으로 암송해봤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저렇게 아름다운 영변의 땅 속에 핵폭탄이라는 무시무시한 재앙의 불씨가 숨겨져 있다니!

“오, 하나님! 영변의 약산 진달래가 진정으로 달콤한 한반도의 내일을 위한 새봄의 꽃이 되게 해 주십시오. 칠천만 온 민족이 한마음으로 즈려밟고 가도 좋을, 핵이 제거된 그 땅을 넘치는 희망의 노래를 부르며 달려갈 수 있도록 새 봄의 길을 열어 주십시오. 다시 한번 일본과 한반도와 중국이 실질적인 평화체제의 한마당으로 들어설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고, 우리 모두를 새 하늘과 새 땅의 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해주십시오.”

「설중한매」의 향기에 취하고, 「진달래」의 감동에 취하여 그날 밤 나는 크게 만취하였다.

식당마감시간인 밤 10시가 지나서야 우리 일행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행들과 헤어진 후 나와 아내는 어제 밤처럼 또 중정에 나가 산책을 했다. 벤치에 앉아 아내를 내 가슴에 끌어안고 한참동안 잠자듯이 휴식을 취했다. 마음에 큰 위로와 행복이 넘쳐났다. 아내의 제안으로 우리는 다시 2층으로 올라가 휴게실 안마의자에 앉아 한참동안 몸을 풀고 나서 또 온천을 했다. 우리 내외만큼 온천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드물 것이다. 온천을 하면 심신이 맑아지고 기분이 좋아질 뿐만 아니라 상상력이 크게 증대되는 것을 느낀다. 일본에 여행을 올 때마다, 일본에서 가장 좋다고 여겨지는 것이 바로 일본의 온천 문화다. 이 겐까이 로얄호텔의 온천장도 수질이 뛰어나,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관광객이 많을 뿐만 아니라 지역주민들이 제집처럼 드나들면서 애용한다고 한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온천장에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나는 또 옥외탕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옥외탕에는 이용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반신욕을 하면서  시원한 밤공기를 가슴 속 깊숙이 들이마셨다가 내뿜는 동작을 여러 번 반복했다. 술기운이 확 깨고 마음이 평안해지면서 심신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인간의 폐를 펼쳐 놓으면 정구장 크기만큼이나 된다고 한다. 호흡을 깊고 길게 하는 훈련은 폐활량을 키워줄 뿐만 아니라 잠재된 정신력의 깊이를 확장하는데 매우 좋은 훈련이 된다. 이는 마치 깊은 샘에서 청량한 물을 길어 올리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얼마동안 심호흡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데, 3․40대로 보이는 일본인 두 사람이 조용히 옥외탕 안으로 들어와 앉는 게 눈에 띄었다. 나는 심심하던 차에 그들 곁으로 다가가서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미숙한 영어이지만, 웃으며 천천히 말을 건넸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영어에 대해서는 콤플렉스를 느끼고 도망치듯 피하는 게 예사인데, 두 사람 중 한 분이 다행히 영어를 잘 알고 있어서 나의 말을 받아주었다.

그의 이름은 신지 오야마, 나이는 38세, 원래 고향은 나라 현(縣)이었으나 지금은 나가사키 시(市)에서 살고 있고, 그곳에서 무역상을 하고 있으며 7살난 아들 한명이 있다고 자기를 소개했다. 다른 또 한 분은 후쿠오카 시내에서 도서출판회사의 중역으로  있으며, 나이는 45세, 고향은 오사카 태생이고 이름은 나까무라 겐죠라고 했다.

나는 그날 밤에, 이번 큐슈여행 중 일본인들과의 만남 가운데 (이시이 회장을 제외하고는) 가장 의미 있는 만남이라고 여겨질 만한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대화는 주로 신지 사장과 나누었으며, 30분 넘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신지 사장은, 내가 나가사키市를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경도시라고 추켜세우고, 또한 네덜란드와 큐슈 간의 교류가 일본 근대화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나가사키市 부근에 네덜란드 풍으로 건설한 신도시 「하우스텐보스」야말로 동서문화의 융합을 대표할만한 국제문화자산이라 생각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자 기분이 좋았던지 좀체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계속 싱글벙글거렸다.

이렇게 되자 그도 내게 친근감을 나타내며, 6년 전에 도쿄의 한 지하철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해놓고 숨진 한국인 유학생 故 이수현 군에 대해 칭찬의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대뜸 이수현 군을 기리는 추모영화가 얼마 전에 개봉되었는데, 그걸 봤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아직 그 영화를 보지 못했고, 한국에서는 방영되지 않았다고 대답해줬다. 그러자 신지 사장은 요즘 일본 여성들 사이에 우상이 되어 있는 몇몇 한국 연예인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그들보다 이수현 군이 얼마나 더 훌륭한 사람인가를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여기서 나는 일본 남성들이 한국 연예인 인기남들을 싫어하고 견제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내가 보기에 성격이 매우 활달해 보이는 신지 사장은, 이수현 군에 대한 얘기를 계속하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계속 지껄이도록 내버려두고 주로 듣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지난 1월 26일, 故 이수현 군의 6주기를 맞아 한국과 일본이 합작해서 만든 추모영화 시사회에 일본 천황 부부가 참석한 사실에 대해 무척 자랑스럽다는 뜻을 나타냈다.

“It's great, It's great!"

신지 사장은 연거푸 이렇게 외치듯 말했다. 이수현 군의 선행도 훌륭하지만, 일본 천황이 이수현씨 부모와 5년 전에 한 약속을 지켰다는 점을 매우 중시하는 어투였다. 그의 얼굴에 일본인 특유의 애국심이 번졌다. 나도 이수현 군에 대한 뉴스를 국내 언론을 통해서 여러 번 듣고 있어서 잘 알고 있던 터라 곰곰이 생각해보니 약 한 달 전쯤에 읽었던 신문기사가 기억이 났다.

“「너를 잊지 않을거야」라는 제목의 이 영화는 이날 오후 도쿄 일본 소방회관에서 공개됐다. 아키히토(明仁) 일왕은 이수현씨가 숨진 이듬해 고인의 부모를 도쿄 왕궁으로 초청해 위로했다. 이때 이수현씨 추모영화가 만들어지면 시사회에 꼭 참석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신지 사장은 옥외탕의 물을 손바닥으로 툭툭 치면서까지 자신의 감정을 크게 드러내며 말했다. (나는 그가 「나라」현 출신이라서 그의 선조가 혹시 백제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국인인 내게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일본 천황이 한국 관련 민간 행사에 참석한 것은 ‘일본 황실이 한일 관계의 개선을 희망하고 있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면서, 일황의 이런 행보가 그동안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던 일본 정부요인들이나 우파 집단에 대해 무언의 압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평소 일본인들이 황실의 근황에 대해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그리고 나는  지난 1월 중순경에 도쿄에서 열린 ‘한․중․일 우정의 가교 콘서트 2007’이라는 행사에 일본의 나루히토(德仁)왕세자가 비올라 연주자로 직접 참여했다는 뉴스를 인터넷신문에서 본 바가 있다. 그리고 그때 그 왕세자는 연주를 마친 뒤 무대에 올라가 “대단히 귀중한 경험을 얻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한․중․일 3국의 우호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이례적인 즉석  연설을 했다는 기사를 읽어서 기억하고 있다. 또한 (내가 알기로) 아키히토 천황이 2005년 6월 사이판 섬을 방문했을 때, 그 행사일정 첫 번째 순서로 한국평화기념탑을 참배한 바 있으며, 여러 차례 일제 군국주의의 한반도 지배를 사과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또 기자회견을 통해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 세계 속에서 일본 황실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말하는 등 ‘평화주의자’로서의 인식을 높여주었다는 평가를 들은 기억이 났다.

신지 사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일본의 국민들이 아키히토(明仁) 일황과 나루히토(德仁) 왕세자를 무척 존경하고 있으며, 또한 고이즈미 전(前)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함으로서 군국주의 패권의식을 조장하려고 했던 사실에 대해 황실이 결코 동의하지 않았음을 (내게) 알려주려고 애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신지 사장과 그의 동료는, 끝으로, 이수현 군의 추모 영화제목을 인용하여 내게 “이 선생님, 저도 이 선생님을 잊지 않을 겁니다.”라는 인사말을 건넨 후 조용히 먼저 온천장을 떠났다.

그들이 떠난 후에도 나는 한참동안 멍한 상태로 그냥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온 얼굴과 가슴에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어쩌면 아키히토 일황이 바라는 한중일 3국 간의 평화는 진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수현 군의 6주기에 참석하여 5년 전에 이군의 부모들과 약속했던 바를 지켰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만든 심경적 진실이 무엇이었겠는가 하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나는 단연코) 이수현 군이 보여주었던 희생적인 사랑의 능력이 일황의 마음을 감동시켰고, 또 이러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이야말로 앞으로 이 시대 한중일 3국 간에 새로운 평화체제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 같았다. 이러한 ‘황실의 판단’은 나로 하여금 이번 큐슈여행을 통해 줄곧 생각해왔던 동북아시대 「희망의 역사」를 풀어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이수현 군이 우리에게 보여준 헌신과 희생의 정신, 그 사랑의 복음적 능력이 곧 우리 시대의 현안 문제를 풀어가는 키워드(key word)가 될 것임을 확신하면서, 나는 차제에 일본 황실과 일본 정부에 대해 감히 이와 같은 제안을 한번 해보고 싶어졌다.

최근에 세계경영계를 열광시키고 있는 책이 하나 있다. 제목이 「블루 오션 전략(Blue Ocean Strategy)」인 이 책은, 2005년 2월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출판사에서 발간된 이래 182개국에서 32개 언어로 번역되는 초(超) 베스트셀러가 됐다. 저자인 김위찬 교수는 프랑스 파리에 있는 유럽경영대학원(INSEAD) 석좌 교수로 있으며, 한국 출신이다. 이 책의 주제인 블루 오션의 세계관에 따르면, 이 세상의 모든 산업분야는 레드 오션(red ocean)과 블루 오션(blue ocean)의 두 가지 시장(市場)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레드 오션은 유혈의 경쟁공간이자, 시장 참가자들이 제한된 포화(飽和)시장을 놓고 목을 조이는 출혈경쟁을 벌인다. 반면 블루 오션은 가치혁신을 통해 다시 창출된, 새로운 시장공간이다. 전혀 새로운 가치 도약을 통해 경쟁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김위찬 교수는 강의를 시작할 때마다 늘 이 말을 빠뜨리지 않는다고 한다.

“경쟁에서 이기려면 경쟁을 포기하라”

김위찬 교수는 그의 신실한 파트너인 마보안 교수(INSEAD)와 함께 지난 120년 동안 역사에 기록된 동서양의 혁신 사례를 조사해 보았는데, 그 결과 전략적 사고의 차이가 성공과 실패를 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전략적 사고에는 ‘환경 결정론’과 ‘재구축주의’의 두 가지 패러다임이 있다. 그리고 혁신에 성공하는 사람은 대개 후자 쪽이며, 그들은 가치혁신을 통해 환경을 뛰어넘거나 아니면 아예 환경자체를 새로 구축한다. 이와 같이 새로운 가치 창조를 통해 경쟁으로 붉게 물든 유혈의 바다에서 벗어나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는 신세계로 나아가는 전략 ― 블루 오션의 사고방식과 방법론을 먼저 체득하는 기업과 국가가 21세기의 세계 경제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나는 김위찬 교수의 「블루 오션 전략」을 여러 번 탐독하는 가운데, 새로운 가치 창조를 위한 창조경영이야말로 이 시대의 화두이며, 나아가 한중일 3국 간에도 이와 같은 가치혁신의 창조적 대안을 적용해 가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전략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너를 잊지 않을 거야」

의인(義人) 이수현 군이 우리에게 남겨두고 간 진실은 무엇인가?
일본 천황이 5년 간을 기다리며 애써 지키려고 했던 그 약속의 진실은 무엇인가?

이수현 군과 아키히토 일황의 영적 만남으로 나타나는 이 참된 사랑의 능력, 이 배려 깊은 사랑의 능력이야말로 앞으로 우리들의 과거사 속에 맴돌고 있던 레드 오션을 벗어나 미래의 푸른 바다 ― 블루 오션으로 나아가게 하는 새로운 가치 창조의 힘이요 그 대안이 되지 않겠는가?

일본의 역사를 살펴보면 일본의 근대화를 성공시킨 명치유신은, 그것을 주도한 인물들이 대부분 사무라이 출신들이라는 점에서 이미 「레드 오션」적인 요소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들은 경쟁과 승부를 통해, 남을 죽이지 않으면 자기가 죽는 유혈의 권력투쟁 속에서 개인의 영달과 국가의 위업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해왔다. 그 결과로 그들은 일본을 세계 제2의 경제대국과 군사강국으로 만들었지만, 그들 자신의 속성 때문에 지금 벗어나기 힘든 한계 속에서 맴돌고 있다. 지난날에 있었던 주변 국가에 대한 침략과 태평양 전쟁에 대해서는 아예 거론하지 않더라도, 지금 당장도 일본은 패권의식과 국수주의적인 지배욕과 우익집단의 편견 때문에 군비를 재확충하고 기술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하며 동북아 국제사회에 예기치 못한 심각한 갈등과 긴장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경쟁에서 이기려면 경쟁을 포기하라”

김위찬 교수의 이 역설적인 메시지가 이 경우에도 명쾌하게 적중하리라고 본다.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다시 한번 선진국가로서의 진정한 리더십을 회복하려면, 국민의 마인드 세트를 블루 오션 형(型)으로 바꾸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전략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시대 이래 인류가 지켜왔던 문명의 세계에는 다음 두 가지 가치론이 있다. 하나는 소유가치요, 다른 하나는 존재가치이다. 전자는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욕심에 이끌리는 가치요, 후자는 인간의 보편적인 목적이 이끄는 삶의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진정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죽어야 하고, 만일 자기 욕심대로 살면 끝내 죽고 말 것이다. 선한 가치를 위해 죽고자 하는 자는 다시 살고,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살고자 하는 자는 결국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라는 도덕적인 지상명령(至上命令)이 있다.

나는 (또 비약하는지 모르겠지만) 생각이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가운데, 이수현 군을 추모하는 영화 시사회에 오신, 아키히토(明仁) 일황께서 어쩌면 속으로 이렇게 조문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수현씨, 나는 당신을 결코 잊을 수가 없어요. 그대가 흘린 고귀한 희생의 피, 그 아름다운 사랑의 혼이 나를 감동시켰고 또 우리 일본 국민 전체를 변화시키는 큰 힘이 되고 있어요. 당신의 희생적인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일본이 다시 한번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고 나는 생각해요. 고맙습니다. 이수현씨, 나는 앞으로 이런 정신으로 내 생애를 다하기까지 한일간의 관계 개선과 동북아와 세계를 위해 진심으로 헌신하고 봉사하면서, 새로운 국제평화의 길을 개척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소. 그 길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 길이 우리 국민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에 나는 끝까지 이 길을 지키며 걸어가겠소!”

다시 한번 나는 여기서 감히 제안한다. 만일 아키히토 일황께서 진심으로 그렇게 반성과 감사의 마음을 다해 이수현 군을 추모해주셨다면, 나는 그분의 연호(年號)를 좇아 이 2007년 1월 26일을, 인류의 보편적인 사랑과 용서와 화평의 감동이 넘치는 새로운 드림 소사이어티(Dream Society)로 나아가는 “明仁유신의 첫 날”이라고 선포하고 싶어진다. 1867년 12월 9일, 「왕정복고의 대호령」이 떨어진 날로부터 시작된 명치(明治)유신의 항로가 사무라이 식(式) 무사도정신과 군국주의가 판을 쳤던 지배욕구의 소유가치에 물든「레드 오션」의 길이었다면, 이제 2007년 1월 26일, 「너를 잊지 않을 거야」라는 영화로부터 시작한 “명인(明仁)유신”의 항로는 21세기 국제사회의 새로운 가치 창조 ― 즉, 쌍방간의 존재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해주면서 각자의 Identity와 Image를 창조적으로 극대화시켜나가는 희망찬 「블루 오션」의 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길이야말로 마땅히 우리 동북아시대를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이끌어나갈 「희망의 역사」가 되어줄 것이다.

땀을 비오듯 쏟으며, 단전호흡을 하는 자세로 앉아있던 자리에서 나는 벌떡 일어나 하늘을 향해 팔을 뻗었다. 우거진 송림 사이로 검푸른 하늘이 열려 있고, 거기 높은 하늘 위에 별들이 보석같이 반짝이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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