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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풀 데이즈』
이승률 연변과학기술대학 대외부총장
Ⅳ. 새로운 동지들
새벽 기도회를 마친 후 우리 일행들은 북경에서 한국인들이 집중 거주(약 1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는 왕징(望京)이란 곳으로 가서 콩나물 해장국으로 아침 식사를 나누었다. 그리고나서 8시까지 숙소인 쿤륜(崑崙)호텔로 돌아왔다. 황사섭 원장은 지방 출장을 갔기 때문에 못 왔지만, 조찬 시간에 다른 또 한분의 조선족 목사님을 미리 초청해 두었었다.
김성(Daniel Jin)목사는 청화대 출신으로 자동제어 부문을 전공한 영재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2000년 여름이었다. (앞장에서 언급했던) 김설송 사장을 포함하여 여러 명의 청화대 학생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통해 만났었다. 특히 김성 목사는 나의 부탁을 받아들여 2000년 가을부터 중국인 청년기업인들을 규합하여 중국 최초로 중국인 기독실업인회(CBMC)를 구성하는 일에 기초역할을 맡아 주었다.
그 후 그는 중국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전도사가 되었으며, 3년전에 미국 LA 풀러신학대학원에 진학했다가 1년전에 귀국한 후 현재 북경에서 도시부흥교회(CRC)를 담임하고 있다. 나는 그를 5년만에 만나보게 되었다. 대만 출신인 부인과 함께 온 그를 힘껏 끌어안아 줌으로써 나의 우정과 사랑을 한껏 표현했다. 두 내외가 식사를 하는 동안, 나는 연변과 평양에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일들을 소개해 주었다. 식사 후 내 방으로 자리를 옮겨서 그의 지나온 과정과 포부를 자세히 얘기들었다. 그의 꿈은 중국 청년들과 기업인들을 복음화하여 그들과 함께 ‘Back To Jerusalem’으로 나아가는 국제 선교사역이 목표였다. 사역의 푯대가 분명했고, 전략과 열정을 겸비한 지도자로 성장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 의 두 손을 마주 잡고 실크로드 미션의 꿈을 위해 함께 동역할 것을 다짐하며 뜨거운 기도를 드렸다.
중국 여러 도시에 진출하여 기업 활동을 하고 있는 많은 한국인 CBMC 인맥들과 현지 중국인 CBMC 인력들이 함께 뜻을 모아 중국과 중앙아시아, 중동 지역 선교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새 길이 열릴것만 같은 희망이 솟구쳤다.
“원더풀 데이”란 말이 저절로 가슴속에 메아리친다.
김성 목사 내외가 돌아간 다음 나는 또 새로운 손님을 만났다. 한국인 여성법학자로서, 중국 인민대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마친 후 현재 인민대학 법학부에서 물권법과 지적재산권에 관한 강의를 맡고 있는 김현경 교수였다. 11년째 북경에 살고 있다는 김 교수는 중국에 여행을 왔다가 인민대학에 정착하여 공부를 하게 되었다면서 중국이 마음에 들고 생활하기에 무척 편한 사회라고 칭찬을 늘어놓았다. 중국어도 능통해서, 내가 듣기로 한국인으로서 김 교수만큼 중국어를 잘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유창했다. 점심 식사를 호텔 부근에 있는 ‘서라벌’식당으로 가서 하기로 했다.
김 교수가 한분을 더 초청해도 좋으냐고 물어서 그러자고 했다. 주 중국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는 정영옥 채구관(采購官)께서 식당으로 오셨다. 그 분은 원래 한국 조달청에서 근무를 했었는데, 국비로 중국인민대학에 유학와서 석사 공부를 마친 후 귀국했다가 얼마 전에 다시 주 중국 한국대사관으로 부임한 고위직 여성이었다. 나는 두 분의 뛰어난 커리어 우먼들을 모시고 점심을 먹는 행운을 가졌다. 그렇다고 내 본연의 임무를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미리 준비해간 연변과기대와 평양과기대 브로셔를 내 놓고, 식사 도중 짬짬이 학교 홍보를 위해 열띤 강의(?)를 했다. 연변과기대의 실사구시적인 교학시스템, 교수들의 헌신, 학생들의 높은 학력수준, 정직운동과 인성교육 및 맞춤 실기교육, 졸업 후 해외 유학 장려, 중국 내 대도시 취업(100%) 현황, 조선족 사회에 미친 선한 영향력(등대와 같은 역할) 등에 대해서 설명했다. 또한 평양과기대 설립 허가를 둘러싼 시대적 배경, 북한 내 교육 특구로서의 각별한 의미, 부족한 재정 가운데서도 한국교인들과 미국 교포사회가 꾸준히 지원해서 마침내 14개 건물이 준공단계에 들어가 있는 건축 현황, 그 동안 북한 미사일 발사 및 핵문제 등으로 남·북간에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대학 건설현장은 별다른 지장 없이 진척되어 왔다는 무용담 같은 이야기.
그러나 EAR(반출금지품목승인시스템) 관련 업무가 처리되지 못해 컴퓨터, 서버, 인터넷 장비들이 북한 경내에 들어갈 수 없어 개학 일정이 늦어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소상히 설명해드렸다. 나중에는 연변조선족사회의 지정학적 특수성과 중국 동북지역 진흥정책, 탈북자 문제와 6자회담의 진로, 한반도 통일정책을 위한 Soft Power 전략까지 거론하며 대화의 폭이 여러 방향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떠들다가 식당 안에 있던 손님들이 다 빠져 나가고 우리들만 남아 있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우리들도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영옥 채구관께서 한국대사관 근무지로 돌아간 후 나는 김현경 교수의 안내로 인민대학을 방문했다. 실은 지난해 10월 한국의 「박영사」에서 “동북아시대와 조선족”이라는 전문서적을 출판해 주었는데, 그 「박영사」의 오너이신 안종만 회장께서 내가 북경에 간다고 하니 꼭 가서 만나보라고 추천해 주셨던 분들이 바로 김현경 박사와 그의 스승인 한대원 교수다.
조선족 출신인 한대원 교수는 인민대학 법대의 부원장이며, 「일본법연구소」소장을 겸하고 있는 법학자로서 특히 「중국헌법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중요인물이다. 그는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 영어에 능통한 국제통 학자로서 저서가 한국에서도 「박영사」를 통하여 출간된바있다.
마침 인민대학을 방문했을 시간에 일본 학자들과 같이 학술세미나를 주재하고 있어서 부득이 별도의 인사를 나누지는 못했다. 지난해 쓴 책 (“동북아시대와 조선족”)을 선물로 남겨둔 채 학교를 떠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직접 만나보지 못했지만 마음속으로 우리 조선족 사회의 높은 역량과 성취도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큰 자긍심을 느꼈다.
김현경 교수의 안내로 법대 도서관을 둘러본 후 그의 연구실에 가서 한 시간가량 대담을 나눴다. 나는 그 대화 가운데 또 하나의 큰 희망을 갖게 되었다.
나는 작년 11월 1일부로 통일부에 사단법인 「동북아공동체연구회」를 등록하고 회장으로 취임한 바 있다. 이 조직은‘21세기 동아시아 공동체’구현을 위한 대안으로, 한·중·일 지식인들과 기업인들이 연대하여 공동선을 찾아가고자 하는 R&D기관이다. 트랜스네셔널리즘(Transnationalism, 초국가주의)을 학문적 기반으로 삼고, 동북아 삼국을 접속하는 교통인프라 구축방안으로 한·일해저터널과 한·중해저터널을 연결시키는‘(가칭)동북아 대운하 건설계획’(TNT프로젝트:Tunnel & Tunnel)을 추진하여, 이 교통대로가 통과하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통행 ,통신, 통관(물류 유통)이 자유로운 자유무역통합시장을 형성함으로써 ‘동북아경제공동체’의 새 길을 열어 보자고 하는 것이 본회의 목표이다. 이를 위해 여러 분야의 전문 인력들이 결속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는데, 특히 동북아 삼국간의 법제를 비교연구하는 일은 이런 큰 계획을 성사 시키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분야 중 하나였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까 고민해왔는데 마침내 김현경 박사와의 대화를 통해 그 해결책을 찾게 된 것이다.
지금 한국의 헌법학 분야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보이고 있는 분들이 이석연 변호사(현 법제처장), 강경근 교수(숭실대), 정종섭 교수(서울대)등이 있다. 세분 다 나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데, 그 중 강경근 교수는 본회 자문위원으로 참여해 있으면서 특히 일본 공법학자들과의 교류가 매우 깊으신 분이다. 강 교수께서는 내게, 중국 공법학자들과의 교류만 연결되면 명실공히 동북아공동체 차원에서의 법제 비교연구가 가능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곤 했었다.
이제 그 적임자를 발견하게 된 셈이다. 김현경 교수의 스승인 한대원 교수야말로 바로 내가 찾고 있던 인물이 아니었던가! 그는 「중국헌법학회」 회장이면서 일본(어)에 능통한 「일본법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는 분이다. 동북아공동체 법제 비교연구를 풀어가기에는 가장 적합한 인물임에 틀림 없어렷다.
“원더풀 데이”
김현경 교수와 대화하면서 나는 좀체 찾기 어려운 보물을 금방 쉽게 찾아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김 교수가 우리 「동북아공동체연구회」의 중국 측 법제 연구위원으로 참여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나중에 한대원 교수께도 잘 말씀을 드려서 본회 자문역으로 참여 해 주실 것을 부탁드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다시한번 마음속으로 두 분의 이름을 불러보며 고(故) 김춘수 시인의「꽃」을 되새겨 보았다.
「 꽃 」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경북고 1학년 시절, 철없는 나이였지만 경북대 국문과 선배들 틈에 끼어 김춘수 시인의 강의를 들었고, 그 분의 집에도 몇 번 찾아가서 사사를 하는 등 시심에 심취했던 적이 기억에 새롭다. 그날따라 북경 하늘은 곧 비가 올 듯 찌푸린 날씨였다. 그러나 내 마음속은 더없이 쾌청했다. 「꽃」이 만발한 4월이 곧 다가오기 때문일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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