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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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흐름의 미학
2008년 10월 25일 09시 24분  조회:3393  추천:71  작성자: 이승률

「역사는 어디로 흐르는가」

Ⅴ. 흐름의 미학


이승률
연변과학기술대학 부총장




다음날(셋째날) 아침 우리 일행들은 일찌감치 일어나 장백폭포로 산행을 나갔다. 한 여름이지만, 높은 산중의 새벽공기라 그런지 차가왔다.

심호흡을 하면 폐부 깊이 스며드는 공기가 너무나 신선하고 청정했다.

폭포쪽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노천 온천수가 솟아나는 곳이 있는데 거기서 피어오르는 김이 백자작 고목들 사이로 새벽안개처럼 퍼지면서 한 폭의 그림을 만드는것 같다. 조금 더 걸어 올라가면 폭포에서 흘러  내리는 물길 위로 길이가 50m 정도 되는 철제 다리가 가로 놓여 있다. 모양은 볼품이 없지만, 매우 견고하게 만들어져 있다. 철교 위에 서서, 장백폭포에서 쏟아진 물결이 하얀 거품을 물고 우렁찬 소리를 내며 발밑으로 빠른 속도로 흘러내려가는 모양을 바라본다. 한참동안 그렇게 바라보고 있노라면 물의 흐름속에 빠져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 물은 어디에서 나서 어디로 흘러가는가. 그동안  '흐름'에 대한 생각을 별로 심각하게 해 본적이 없었는데, 오늘 아침 장백의 흐름이 나를 철학적인 명상에 빠져 들도록 만든다.

백자작과 물푸레나무들이 한데 엉켜 우거져 있는 산길을 15분정도 더 걸어 올라가니, 드디어 장백폭포가 한눈에 가득 들어오면서 시야가 탁 트였다.

장백폭포의 위용을 말로 어찌 다 표현할까!

멀리서보면 긴 하얀 천이 움직이지 않는 그림처럼 산비탈 허공에 걸려 있는듯 했는데, 가까이와서 보니 천지에서 흘러넘치는 물의 양이 대단할 뿐만 아니라 물안개를 피우며 낙차하는 그 웅대한 힘의 위력이 온 산천을 진동시키는 듯하다.

일행들이 이쪽저쪽에서 사진을 찍느라고 야단들이다.

나는 흘러가는 물가의 바위위에 올라서서 마치 돌부처처럼 허공을 바라본다.

은연중에 자연의 일부로 되돌아가고 싶은 욕구가 일어난다. 만물은 본디 자연으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속성을 갖고 있지 않는가?

오늘 아침 따라 인간의 존재를 자연의 일부로 해석하고 싶은 생각이 뭉클 솟는다.

물의 흐름은 자연의 흐름이리라.

그래서 만물은 흐르고, 나도 그 속에서 함께 흐른다. 이 흐름의 미학속에 나를 침잠시켜보니 내가 곧 물이요 물은 나의 의식의 흐름이 되어 나를 자연의 일부로 되돌아가도록 만들어 주었다.

젊은 날, 일주일이 멀다하고 산행을 즐길 때 내가 던진 화두중에 가장 멋있다고 느껴진 말이 "산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라는 말이었다.

오늘 이제 물의 흐름에 잠겨보니 물 또한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흐르는 흐름속에 존재함을 깨닫는다.

다만 물이 산과 다른것은, 산맥은 정지된 상태의 흐름으로 여러 방향으로 이어지지만 물길은 물이 물을 당기고 밀치며 한 방향으로 이어져 흘러가는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낙화유수라고 했던가, 물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르고, 한길 낮은 곳으로 흐르는 그 겸허한 흐름속에 물의 실존이 살아 있는것 같다.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인간의 실존을 느끼며, 돌부처처럼 서서 허공을 바라보던 나는 일순 역사도 이와같아서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수도 있지만, 또한 역사의 일부가 된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아, 그렇다.

인간은 자연존재이기도 하지만 한편 역사존재이기도하다.

과거로부터 미래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시간과 공간의 교직으로 짜여지는 역사의 흐름속에 살아가는 현존재가 바로 우리들의 지금 이 모습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과 역사를 함유하는 존재이며, 또한 자연과 역사를 관통하는 흐름의 미학이야말로 인간의 실존적 가치를 가장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 의식의 틀이 될 것같다.

만물은 흐른다. 자연도 흐르고 역사도 흐른다.

이 흐름을 주관하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믿는게 기독교 신앙이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자연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날 아침, 백두산 장백폭포 앞에서 자연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다시한번 깊은 감격을 맛보았다.

장백폭포를 구경하고 호텔로 돌아 온 일행들은 곧바로 온천탕으로 가서 목욕을 했다.

멀리 내몽고와 신장 지역에서 온 분들이 온천을 너무나 좋아했다.

조찬을 든 다음, 우리들은 짐을 챙겨 경내 셔틀버스를 타고 백두산 산정으로 올라가기 위해 짚차들이 대기하고 있는 정류장으로 갔다.

백두산 산문(山門) 바깥에 있는 숙박시설을 이용했던 중국인 관광객들과 연길에서 새벽 일찍 출발하여 온 한국인 관광객들이 상당수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들은 열두명이라 여섯명씩 타는 짚차 두 대에 알맞게 분승했다.

하늘은 구름 한점없이 맑고 쾌청했다. 바람도 별로 불지 않아서 천지 등정을 하기에는 최상의 날씨였다.

백두산 꼭대기로 올라가는 산복도로는 험하고 가파르다.
길이 꼬불꼬불 거릴 뿐만 아니라 경사도가 있어서 일정 속도 이상으로 달리지 않으면 차를 운행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일행들은 찝차가 거칠게 커브를 돌때마다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즐거워했다.

산기슭에서부터 산정에 오르는 고도에 따라 식물군의 분포가 확실히 차이가 났다.

와이프(박재숙:원예학 박사)의 말에 따르면 백두산에서 자생하는 관목류와 지피식물은  천연의 보고라고 할 정도로 그 종류가 다양하고 희귀성이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른다. 중국 정부는 이 산을 몇 년전에 중국 10대 명산중의 하나로 편입시켰으며, UN에 보고하여 환경보호구역으로 지정받았다.그 뿐만 아니라 그 동안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관리하던 장백산 관광지 관리운영권을 길림성으로 이관시킨 후 대대적인 관광지 개발 사업을 벌려 인근 백산시에 공항을 건설하고 도로 및 철도를 연결했을 뿐 아니라 교통 요충지인 이도백하(二道白河)를 유럽풍의 리조트형  관광도시로 탈바꿈시켜, 중국내 주요기관들과 부유층의 여름휴가 별장지로 사용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 일은 이 지역에 투자해왔던 한국 기업인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또한 연변조선족자치주에도 관광재정 수익면에서 많은 손실을 안겨주기도 해 말썽을 빚고 있기도 하다.

짚차가 백두산 산정 가까이 올라서면 오래전에 중국 정부에서 세운 기상관측소가 나타난다. 그리고 최근에 기상관측소 앞에 국경 및 관광지 관리 임무를 띈 행정 건물이 하나 더 들어서 있는것을 볼 수 있다. 그 건물 벽에는 이런 글이 쓰여있다.

"祖国利益 高於一切"

중국의 국가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중국 정부의 정책이 노골적으로 표현된 글이다.

짚차에서 내리자 「민박회」일행들은 모두 뛰어 오르듯 산정으로 올라갔다.

많은 관광객들 사이에 끼어 천문봉 정상에 올라선 그들의 눈에 드러난 천지(天池)의 모습은 문자 그대로 한 폭의 신비스러운 영상화면을 보는것과 같았다. 분화구 전체를 에메랄드색 유리판으로 덮어 놓은 듯 푸르고 맑은 빛을 띄며 햇빛에 반사되고 있었다. 눈을 제대로 뜰수없을 만큼 눈 부시다. 마치 구름한점 없는 푸른 하늘이 그대로 천지에 빠져있는 듯 한 현상이다.

일행들은 온갖 폼을 취하며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12명 전원 단체 사진을 관광지 전속 사진사에게 돈을 주고 파노라마형으로 찍었다.

현장에서 바로 인화된 사진을 한 장씩 받아 들고 일행들이 떠들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마음이 너무나 행복해졌다.

하늘도 푸르고 천지도 푸르고 내 마음도 푸르다.

또한「민박회」로 모인 소수민족들이 하나의 꿈으로 소통하는 모습이 너무나 푸르고 순진하다.

누가 우리의 이 푸른 꿈을 막을 것인가?

무엇이 우리의 이 순수한 우정의 관계를 왜곡 시킬것인가?

천지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푸른 물길을 마음에 새기며, 내 가슴 속 깊은 심연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뜨거운 열정의 흐름에 자신을 맡겨본다. 시작도 끝도 없이 솟아오르고 흘러내리는 천지의 열정을 내 가슴에 담는다.

존재하는 삶의 가치로서 이 보다 더 깊고 뜨거운 흐름의 미학이 어디 있을까?

영겁의 세월을 통하여 순환하는 자연의 이치가 내 의식의 흐름 속에 하나의 메모리 칩으로 압축되는 듯 한 감을 느낀다.

깊은 영혼의 호흡을 통해 깨닫는 천지(天池)의 속성은 바로 이런 모습이다. 천지(天池)는 곧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정기와 욕망을 담은 자궁이요. 장백폭포는 배꼽이 되어 긴 탯줄을 대지위에 드리운 채 만물을 소성케하는 강(江)의 시작이 되는 그런 형상이다.

천지(天池)를 바라보면서, 그 천지(天池)를 통해 하늘과 땅과 천지만물(天地萬物)의 흐름을 체감하는 영적 기쁨은 마치 생명의 근원에 몰입할 때 경험하는 카타르시스와 같았다.

장백폭포가 쏟아낸 긴 흐름도 결국은 천지(天池)라는 물 근원이 있음으로 가능하리라.

우리 인생뿐만 아니라 세계역사의 흐름도 결국은 창조주의 배꼽으로부터 솟아난 생명의 물줄기를 따라 이합집산하며 여기까지 흘러온게 틀림없다.

'전쟁과 평화라는 이름의 쌍두마차'를 타고 여기까지 달려 온 인류 역사의 본질은 한마디로 흐름의 미학을 따라 존재하는 삶의 궤적이라고 할 만하다.

천지와 장백폭포을 바라보면서 내가 느낀 역사적 진실은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와도 상통하는 순환론적 섭리에 의한 인간 집단의 욕망과 투쟁하는 삶의 흐름이었다.


백두산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안도현 만보진에 있는 조선족 민속촌(홍기촌)을 구경했다.

마을 입구에는 조선족 출신으로서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정책을 다루는 최고기관인 정협회의 주임이신 리덕수 선생께서 쓴 '중국조선족제일촌'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민속마을의 규모는 작지만 촌민 생활구, 민속 거주구, 민속 활동구, 민속 음식 제작구 등으로 구역을 나눠 특징있게 시설을 배치 해 놓았다.

민박회 일행들은 특히 조선족 촌민들의 거주 생활과 음식 제작 부문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어떤이는 북방식 주거 형태인 마루짱 밑 부엌구조가 신기해 보였는지 직접 마루짱을 열고 들어가 가마솥 뚜껑을 들어 보기도 했다.
건물들은 모두 단층 기와집으로 단장되어 있고, 지붕에는 태양열수기가 장치 되어있으며, 수세식 변소와 함께 주방에는 프로판 가스도 연결되어 있었다. 마당에는 옥수수, 해바라기, 배추, 고추, 가지, 파, 황두(콩), 깻잎 등의 작물이 자라고 있고, 빨간 꽃방울이 조롱조롱 매달린 분꽃이 화단에 심겨져 있다.

건물 벽에 군데군데「福」자와 함께 벽화형태로 민속그림이 그려져 있고, 마을 중앙에 있는 행정기관의 현관에 "신농촌 신면모, 신농민 신생활"이라고 쓴 붉은 글씨가 보인다. 한마디로 한국의 새마을 운동과 같은 신 농촌운동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면서 길을 따라 마을 뒤쪽으로 가보니 향도원(香稻園)이라는 이름의 수전(水田)농사 시범지구가 있었다.

2,000평 정도의 규모로 지당(池塘)을 조성 해 놓고, 사방으로 목재 데크 통로를 배치하여 관광객들이 물에서 자라는 여러 가지 수초와 벼농사를 직접 관찰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내몽고와 신장지역에서 온 몇 사람들은 '벼'를 난생 처음 본다고 하면서 물에서 열매 맺는 수전 농사에 대해 매우 신기해했다.

그들은 여태껏 밭작물(한전) 밖에는 모르고 자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손춘일 원장께서 조선족 사회가 중국에 미친 영향 가운데 가장 큰 성과가 바로 수전 농사를 개척, 보급한 일이었고, 특히 이곳 연변과 길림을 중심으로 벼농사 곡창지대에서 나는 쌀을 '동백미'라 하여 청나라 황실에만 독점적으로 공급했음을 설명 해 주었다.

나는 손 원장의 설명을 들으면서 한편 이런 생각에 잠겼다.

백두산 천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압록강과 두만강 그리고 송화강의 발원이 되어 대지를 비옥케하는 생명수가 된 듯, 수전 농사를 통하여 이 땅에 새로운 생산성의 흐름을 개척한 한민족 이주민들이야말로 이 땅을 변화시킨, 새로운 역사를 창출한 선구자들이지 않는가!

여기서 생산된 '동백미'가 청나라 황실을 먹이고 키우는 소재(素材)가 되어, 그들로 하여금 중국을 움직이고 천하를 호령하도록 만들었다면, 이는 곧 자연과 역사를 하나의 필연적인 순환 구조속에서 일체화시킨 흐름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겠는가하는 엉뚱한(?) 생각마져 들었다.

이러한 엉뚱한 생각이 역사를 변화시키는 미학으로 발전하여 시대사의 흐름을 주도한 사례가 적지 않음을 깨닫으면서 천천히 향도원(香稻園)을 떠났다.

예를 들면, 헤겔의 변증법과 '역사철학'이 그랬으며, 물질이 정신의 기초가 되어 생산성을 이끌어 냄으로서 프로레타리아 노동자 계급이 권력의 기초가 되도록 길을 열어준 칼 막스의 공산주의 이념이 바로 이와같은 생각의 흐름을 통해 배태된 결실이 아니었던가!

그 열매가 우리를 더러는 행복의 식탁으로 데려가주기도 했고, 또한 더러는 불행과 고통의 밭으로 끌고 갈 때도 있었지만, 아무튼 우리는 자연과 역사의 교접을 통해 새로운 인류사회의 흐름을 발견하는 지혜를 터득해야만 할 것 같다.

이것이 흐름의 미학이 갖는 과제가 아니겠는가!


「역사는 어디로 흐르는가」글 싣는 순서
Ⅰ. 민박회
Ⅱ. 경희궁의 밤
Ⅲ. 백두산 소수민족 올림픽
Ⅳ. 올림픽 이후 중국의 과제
Ⅴ. 흐름의 미학
Ⅵ. 실크로드 사역과 신 노마드 운동
Ⅶ. 거듭나는 천년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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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 ]

1   작성자 : 백두산
날자:2008-10-26 08:44:43
"흐름의 미학" 정말 재미있게 엮었습니다. "흐름" 공기가 흘러 바람되고 바람은 구름을 몰고 동남쪽으로 납니다. 물이 흘러 강이되고 강물은 두만강에 모여서 동해로 달립니다. 시간이 흘러 세월이 되고 세월은 력사를 밀고 21세기를 뛰고 있습니다. 력사는 자기의 흐름속에서 기필고 민족의 화합과 국가의 통일을 펼쳐줄 것이며 돈과 권세에 의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를 지워 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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